정체성을 양보하지 않은 柳成龍

『안 됩니다. 大駕(대가: 임금이 타는 수레)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死去 400주년 柳成龍의 리더십

땅 많은 양반에 重課… 從軍한 賤民은 免賤
임금이 버린 백성을 끌어안고 朝鮮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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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成龍 리더십의 5가지 핵심
① 正體性 문제는 타협하지 않는다―宣祖의 요동行 반대
②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수용―陽明學 용인
③ 백성 위주의 民生개혁―作米法(대동법) 실시
④ 능력 위주의 人材 등용―이순신·권율 기용, 노비도 功이 있으면 포상
⑤ 실용주의―通商으로 기근 구제, 인센티브제 도입

李德一 역사평론가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숭실大 사학과 졸업. 同 대학원 문학박사. 저서 「조선왕 독살사건」, 「조선선비 살해사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오국사기」, 「이덕일의 역사사랑」,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등.



正體性 문제에 타협 없어


宣祖(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申砬(신립)의 충주 탄금대 敗戰(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宣祖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宣祖수정실록」 5월1일조의 기록이다. 임진나루 건너 東坡館(동파관)에 도착한 宣祖가 李山海(이산해)와 柳成龍(유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李某(이모·이산해)야, 柳某(유모·柳成龍)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고 말했다.

宣祖가 이 말을 한 속뜻은 압록강을 건너 遼東(요동)으로 도주하자는 데 있었다. 明나라로 망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좌의정 柳成龍이 단호하게 반대했다.

<『안 됩니다. 大駕(대가: 임금이 타는 수레)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上이 일렀다.

『內附(내부: 明나라에 가서 붙는 것)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柳成龍이 거듭 안 된다고 하였다>

「御駕(어가)가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는다」는 柳成龍의 말은 그의 正體性(정체성)을 분명히 말해 준다. 宣祖나 일부 대신들에게 明나라는 上國(상국)이었지만 柳成龍에게는 외국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宣祖 30년(1597)에 明나라에서 평안도에 自國(자국)의 관청을 설치해 관원을 두고 屯田(둔전)까지 설치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사실상 조선을 직접 지배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때 宣祖는 『중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어찌 딴뜻이 있겠는가고 여긴다』며 찬성했다. 영돈녕부사 李山海는 『둔전을 많이 설치한다면 반드시 견디기 어렵겠지만, 한 관원을 내어 둔전을 한다면 혹 가능하겠습니다』라고 조건부로 찬성했다.

그러나 柳成龍은 元나라 征東行省(정동행성: 元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해 설치했던 관청으로 후일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자행했음―편집자 注)을 예로 들면서 『중국 관원이 나와서 모든 일을 일체 관찰사처럼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손을 댈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援軍(원군)을 파견한 明나라가 常駐(상주) 관청까지 설치하면 사실상 조정 위의 상부관청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宣祖의 遼東 內附策(내부책)이나 明나라 상주관청 설치 찬성은 모두 자기 正體性에 관한 문제였다. 柳成龍은 이런 문제에서는 타협이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는 리더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자기 正體性이 모호한 것이다.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柳成龍의 뚜렷한 자기 정체성은 현재의 리더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柳成龍은 새로운 것의 장점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陽明學(양명학)이다. 그는 17세 때인 明宗 13년(1558) 부친 柳仲?(유중영)의 임지였던 의주에서 「陽明集(양명집)」을 최초로 접한다. 사은사 沈通源(심통원)이 北京에서 사가지고 오다가 규정 이외의 물품이라고 탄핵당해 버리고 간 것이었다.

柳成龍은 『내가 그것을 보고 기뻐서 곧 아버님에게 말씀드리고, 글씨 잘 쓰는 아전을 시켜 베껴 내게 하여 상자 속에 간직한 지가 어언 35년이었다(「양명집 뒤에 쓰다〔書陽明集後〕」)』라고 했다. 性理學(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시종 異端(이단)으로 몰았던 양명학에 대해 그는 관대했던 것이다.

柳成龍의 주위 환경은 양명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고향 근처인 경상도 영주에 세워진 「백운동 서원」은 조선 최초의 賜額(사액)서원인 紹修書院(소수서원)으로서 조선 성리학의 本山(본산)이었다. 「傳習錄辨(전습록변)」에서 양명학을 「斯文(사문·성리학)의 禍(화)」라고 비판한 退溪 李滉(퇴계 이황)은 柳成龍의 스승이었다.


陽明學 장점 수용해 民生개혁 추진

임진왜란의 교훈을 기록한 柳成龍의「懲毖綠」.

學脈(학맥)이 곧 政派(정파)가 되는 조선 풍토에서 스승이 비판의 선봉으로 나선 양명학을 배격하지 않은 것은 그가 새로운 것의 장점을 취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柳成龍 연보」는 그가 양명학을 여러 차례 비판했다고 쓰고 있지만, 이는 柳成龍이 異端에 물들지 않았음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에서 쓴 것이다. 柳成龍은 양명학의 장점을 수용한 인물이었다.

柳成龍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宣祖 26년(1593) 고향 안동에 잠시 들렀을 때 「양명집」이 불타지 않은 것을 보고 『내가 그것을 다시 보니 불각 중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슬펐다, …사실의 대강을 적어 자제로 하여금 잘 보존하여 다시는 유실되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양명집 뒤에 쓰다」)』고 한다.

柳成龍이 양명학의 장점을 수용한 것은 중요하다. 그가 양명학 이론 속에서 戰亂(전란) 극복의 요체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양명학과 朱子學(주자학)의 가장 큰 차이는 四民(사민: 士·農·工·商)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다. 주자학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의 신분적 차이를 하늘이 정해준 天經之義(천경지의)로 생각하는 반면, 양명학은 四民平等(사민평등)을 주장한다.

王陽明은 「옛날 四民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았다(異業而同道)」면서 『정치도 士大夫 계급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능력 있는 자는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柳成龍은 안동에서 「양명집」을 다시 읽은 다음 서울로 올라와 영의정에 오르는데, 이때 영의정·都體察使(도체찰사: 戰時에 軍政과 民政을 감시하는 임시 관직―편집자 注)로서 쏟아낸 각종 개혁 시책들은 양명학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여럿 있다.

柳成龍은 戰亂으로 무너진 나라를 되살리려면 백성들의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이 궁궐에 난입해 불을 지를 때 조선은 이미 멸망한 것이었다.

柳成龍은 백성들의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구체적 이익이 되는 民生(민생)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作米法(작미법)」, 즉 大同法(대동법)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왕조에서 떠난 이유 중의 하나는 불합리한 조세체계였다. 그중의 하나가 貢納(공납)제도로서 「富者(부자)는 많이 내고 貧者(빈자)는 적게 낸다」는 조세 정의와 거꾸로 가는 제도였다. 부과 기준이 형평에 맞지 않아서 인구가 많은 큰 郡縣(군현)과 인구가 적은 작은 郡縣의 부과 액수가 비슷했다.


大同法의 선구자

더 큰 문제는 家戶(가호) 단위 부과 기준이었다.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佃戶(전호·소작인)나 드넓은 토지를 지닌 田主(전주·지주)나 비슷한 액수를 부담했다. 때로는 가난한 佃戶에게 더 많이 부과되었다. 관아와 통하게 마련인 양반가의 농간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防納業者(방납업자·貢物을 代納하고 그 이자를 받는 업자)들이 개입해 벼슬아치나 아전들과 짜고 농민들의 등골을 빼먹었다.

문제는 컸지만 그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수많은 가짓수의 공납을 쌀 한 가지로 통일하고, 부과 단위를 家戶에서 토지 면적의 多寡(다과)로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많은 토지를 가진 양반 사대부들은 많은 세금을 내는 반면,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면제되는 것이었다.

趙光祖(조광조)·李珥(이이) 같은 개혁 정치가들이 시행을 주장했었지만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던 것을 柳成龍이 戰時에 시행한 것이다.

柳成龍에게 이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再건국사업의 일환이었다. 宣祖 27년(1594) 柳成龍은 「時務(시무)를 아뢰는 箚子(차자)」를 올려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적게 내고, 가난한 백성들은 도리어 많이 내는 공납의 폐단을 소상히 아뢰면서, 『지금 만약 곧바로 變通(변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으며, 나라 저축도 쌓아둘 길이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변통」이란 현대어로 「전면적 개혁」이란 뜻이다.

흔히 大同法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시범 실시되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임진왜란 때 「作米法」이라는 이름으로 柳成龍의 강력한 주청으로 이미 실시했던 법이다.

作米法은 많은 반발을 받았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각 道의 감사와 兵使(병사), 각 고을의 수령·아전들까지 모두 반대했다. 柳成龍은 宣祖에게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헌의(貢物作米議)」를 올려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柳成龍에게 이는 신분적 이해를 따져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대로 국가가 양반 사대부들의 이해만 대변한다면 나라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서 柳成龍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作米法을 강행했던 것이다. 壬亂 중에 作米法이 실시되면서 백성들의 부담은 대폭 경감되었다. 백성들은 이제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를 알게 되었다.


功을 세운 노비에게도 벼슬을 줘야

柳成龍이 천거한 李舜臣.

壬亂 때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데는 병역제도의 모순이 있었다. 양반들은 합법적으로 軍役(군역)에서 면제되고, 노비들은 양반들의 私財(사재)라는 이유로 면제됐다. 가난한 농민들만 軍役(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지배층인 양반들이 軍役의 의무에서 면제된 나라를 백성들이 지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柳成龍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戰亂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양반들을 從軍(종군)시키고, 賤人(천인)들을 充軍(충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柳成龍은 양반과 賤人이 함께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束伍軍(속오군)」을 만들었다.

柳成龍은 宣祖 28년(1595) 11월26일,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에서 『병졸을 교련시키는 한 가지 일은 더욱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으니 出身(출신: 과거 급제 후 出仕하지 못한 사람)·양반·庶孼(서얼)·鄕吏(향리)·公賤(공천·公노비)·私賤(사천·私노비)을 논할 것 없이 壯丁(장정)으로서 실제로 군사가 될 만한 사람은, 事目(사목·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隊伍(대오·군대)로 편성하라』고 지시했다.

신분을 따지지 말고 모두 군적에 포함시키라는 말로서, 이는 조선 군사제도에 대한 혁명적 변화였다.

그러나 柳成龍은 賤人의 充軍은 양반의 從軍과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배층인 양반의 종군은 당연한 의무지만 被(피)지배층인 賤人의 充軍은 반대급부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목숨 걸고 전쟁에 나가 싸웠는데 終戰(종전) 후 여전히 賤人이라면 누가 싸우겠는가? 그래서 柳成龍은 賤人들의 가장 큰 소원인 免賤(면천: 賤人신분에서 면제되는 것)을 조건으로 군사를 모집했다.

노비들을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던 양반들은 이 방안에 극력 반대했다. 宣祖 28년(1595) 前 형조참의 柳祖?(유조인)이 상소를 올려 私賤을 군사로 충당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柳成龍은 「유조인의 상소에 대한 回啓(회계)」에서 『私賤을 군사로 만드는데 따르는 폐단에 대해서 현재까지의 관습으로 논한다면 이런 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천하 일반 사회의 도리로서 말한다면 私賤만은 유독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私賤獨非國民乎)』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柳成龍은 여기에서 나아가 功(공)을 세운 良民(양민)은 물론 노비들에게 벼슬을 주자고 주장했다. 「明軍이 퇴각하여 평양에 주둔한 뒤 軍中의 할 일에 대해 아뢴 書狀(서장)」에서 柳成龍은 『良民은 적의 머리를 1級(급: 목을 벤 머리를 세는 단위―편집자 注) 이상, 庶孼(서얼)은 2급, 公·私 賤人은 3급을 각각 얻으면 科擧(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인정하자』며, 『이렇게 하면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불길을 밟더라도 全力(전력)을 다해 敵(적)을 무찔러 열흘도 채 못 가서 적의 수급이 쌓여 京觀(경관: 적의 시신을 쌓아 놓은 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柳成龍의 이런 주장은 軍功(군공)을 세운 자들을 포상하는 軍功廳에 의해서 법제화되었다. 일본군이 壬亂 초기를 제외하고는 크게 고전한 근본적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신분제에 恨이 맺혔던 노비와 양인들은 免賤(면천)과 敍用(서용)을 조건으로 내걸자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게 덤볐다. 자신의 免賤과 敍用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식 때문에 목숨 걸고 나선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이들이 대거 전쟁에 가담하면서 戰勢(전세)는 역전되어 갔다.


기근 극복 위해 중국과 通商

柳成龍이 천거한 權慄.

柳成龍은 戰亂 극복을 위해서는 기존의 農本商末(농본상말)의 경제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戰亂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속출했지만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전쟁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宣祖실록」 27년 1월 17일자는, 『기근이 극심해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을 책임진 당국자가 전쟁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극심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柳成龍이 고안한 것이 국제무역이었다. 압록강 中江鎭(중강진)에 국제무역 시장을 열어 明나라의 곡물과 조선의 綿布(면포·무명)를 무역하자는 방안이었다.

사사롭게 국제무역에 나섰다가 발각되면 死刑(사형)까지 시켰던 조선에서 이것은 혁명적 발상이었다. 「萬機要覽(만기요람)」 (조선 순조 때 임금의 政事에 참고할 목적으로 편찬된 財政과 軍政에 관한 책―편집자 注) 「中江開市(중강개시)」조는 中江開市를 연 인물이 柳成龍임을 밝히면서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綿布 1필 값이 皮穀(피곡·겉곡식) 한 말이 되지 않았으나, 중강진에서 팔면 쌀 20여 말이 넘었다. 銀(은)·구리·무쇠를 교역하는 자도 10배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遼東 왼쪽 지방의 미곡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생활을 온전하게 한 자가 매우 많았다」라고 적고 있다.

柳成龍도 자신의 「중강개시」조에서 「옛사람들이 通商(통상)이 凶年(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에 중요한 일이라고 한 말은 참으로 까닭이 있음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중강개시에서 요동의 곡식이 유입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기근에서 벗어났다. 국가 시책을 상업금지에서 상업장려로 바꾼 것일 뿐인데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국가정책이 民生과 國富(국부)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국제무역 외에 柳成龍이 고안했던 것이 국내의 소금 생산과 유통이었다. 소금 굽는 것이 苦役(고역)이었는데, 아무런 반대급부가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서 소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柳成龍은 황해도 섬과 연안의 소금 굽는 백성들에게 생산량의 절반을 주는 조건이면 서로 몰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소금 굽는 백성들이 서로 몰려들어 소금을 생산했다. 柳成龍은 이 소금을 영·호남 곡창지대와 해안이 없는 충청도 내륙으로 가져가 곡식과 바꾸어서 서울과 충청도로 실어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다. 나머지 곡식은 소금을 생산한 황해도와 개성부의 종자로 주었다.

소금 굽는 백성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발상의 전환 하나로 국가에서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수많은 백성들을 구제하고 國富를 증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관련자 모두에게 이익이었으니 국가정책 하나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國富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준 또 하나의 사례였다.


賤民도 능력에 따라 등용

柳成龍은 무엇보다 중요한 재산은 人材(인재)라고 생각했다. 許穆(허목)은 「서애유사」에서 「柳成龍이 李舜臣(이순신)과 權慄(권율)을 등용했다」고 적고 있다.

柳成龍이 없었다면 壬亂 발발 당시 전라좌수사 李舜臣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윤휴가 「통제사 이 충무공 遺事(유사)」에서 『舜臣은 본디 성품이 고상하여 귀족들을 찾아가지 않았다』고 쓴 대로 강직한 성품이어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柳成龍은 「징비록」에서 『조정에서 李舜臣을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武科(무과)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도록 벼슬이 승진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가 단지 私情(사정) 때문에 李舜臣을 천거한 것은 아니다. 金堉(김육)이 「통제사 이충무공 신도비」에서 『柳成龍은 李舜臣과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로서 매번 대장감이라고 칭찬했다』고 말했듯이 李舜臣이 대장감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천거한 것이었다.

柳成龍이 「징비록」에서 『내가 舜臣을 천거해 水使(수사·전라좌수사)로 차례를 뛰어넘어 임명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갑작스레 승진된 것을 의심하였다』라고 쓴 대로 李舜臣의 승진은 臺諫(대간: 사헌부와 사간원―편집자 注)의 탄핵을 받았다. 하지만 柳成龍이 壬亂 한 해 전 李舜臣를 전라좌수사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함으로써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賤民 출신 장수 신충원

柳成龍이 천거한 賤民 출신 장수 辛忠元이 축조한 鳥嶺關.

柳成龍이 추천한 인물은 李舜臣과 權慄 같은 사대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賤民 출신 辛忠元(신충원)도 발탁했다. 신충원은 賤人도 功을 세우면 벼슬을 준다는 柳成龍의 방침에 의해 守門將(수문장)에 제수된 인물이다. 柳成龍은 요새지인 鳥嶺(조령)에 關門(관문)을 설치하는 책임자로 그를 宣祖에게 직접 천거했다.

신충원은 僧軍(승군)과 山尺(산척·심마니)·노비 같은 賤人들을 끌어 모아 鳥嶺에 관문을 설치했다. 충청순찰사 尹承勳(윤승훈)은 장계에서, 『그 형세가 중국의 山海關(산해관)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정도로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사람도 열 수 없을 곳이었습니다』(「宣祖실록」 27년 10월9일)라고 감탄했다.

이처럼 柳成龍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人材를 적재적소에 발탁하는 열린 인재관과 안목을 갖고 있었다. 이런 柳成龍이 영의정·도체찰사로 전국을 총지휘하면서 戰亂은 극복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 撤市하며 애도

柳成龍의 位版을 모신 병산서원.

이런 혁명적 시책과 발상의 전환으로 壬亂 극복의 일등공신이 된 柳成龍은 宣祖 31년(1598) 9월부터 느닷없이 탄핵을 당한다. 그 전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고 조선출병군에게 撤軍令(철군령)이 내려진 뒤였다.

그가 탄핵당한 이유는 우습게도 明나라에 변명하러 가는 사신을 자청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때는 이미 좌의정 李元翼(이원익)이 사신으로 간 뒤였으므로 柳成龍이 갈 이유는 없었다.

柳成龍 실각의 원인은 宣祖에게 있었다. 전쟁 종결이 확실시되면서 宣祖는 柳成龍 제거를 결심했고, 이를 간파한 李爾瞻(이이첨)을 비롯한 北人(북인)들이 柳成龍 탄핵에 나선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실각한 宣祖 31년 11월19일은 李舜臣이 마지막 海戰(해전)인 노량해전에서 戰死(전사)한 날이었다.

柳成龍 실각 후 그가 戰亂 극복을 위해 내세웠던 作米法 같은 혁명적 법안들이 모두 폐지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조선은 30여 년 후 丙子胡亂(병자호란)에서 또다시 쓰라린 치욕을 당했다.

파직 후 안동으로 내려간 柳成龍은 다시는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이후 조정에서 내리는 모든 벼슬을 거부한 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0년 전인 1607년(宣祖 40년) 세상을 떠났다.

『편안하고 조용하게 造化(조화)로 돌아가련다』

이런 유언을 남기고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란 평가를 받은 柳成龍은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애선생 연보」는 『사대부들이 城南(성남: 남산 남쪽) 옛집 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상처럼 통곡했다』고 전했다.

놀라운 것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撤市(철시)하면서, 『우리들이 이 어진 정승을 잃은 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다. 허목은 「서애유사」에서 『시민들이 4일간이나 시장 문을 닫으면서 「선생이 아니었던들 우리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임금은 그를 버렸어도, 그가 주인으로 섬겼던 백성들은 그의 공적을 알아 주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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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成龍 年譜

1542년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황해도 관찰사 柳仲?의 둘째 아들로 출생.
1562년 退溪 李滉으로부터 「近思錄(근사록)」을 전수함.
1566년 文科 급제. 승정원 權知副正字(권지부정자)로 임명됨.
1582년 大司諫, 右副承旨, 都承旨를 거쳐 大司憲에 임명됨.
1584년 예조판서, 홍문관 제학에 임명됨.
1588년 형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됨.
1589년 대사헌 겸 병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됨.
1590년 우의정 겸 이조판서에 임명됨. 黃允吉·金誠一 등을 통신사로 보내 일본의 정세를 살펴오게 함. 光國功臣(광국공신)·풍원부원군으로 서훈됨.
1591년 좌의정 겸 이조판서. 李舜臣을 전라좌수사, 權慄을 의주목사로 천거.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좌의정 겸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임명됐으나 곧 파직됨. 평안도 도체찰사에 임명됨.
1593년 충청·전라·경상 3道 도체찰사에 임명됨. 훈련도감 설치를 건의. 영의정 겸 훈련도감 도제조에 임명됨.
1598년 北人들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됨.
1602년 淸白吏로 뽑힘.
1604년「징비록」을 저술함. 扈聖功臣(호성공신: 임진왜란 때 宣祖의 播遷을 수행한 공신)으로 서훈됨.
1607년 향리에서 66세를 일기로 서거.
1614년 병산서원에 位版이 봉안됨.
1627년 文忠이라는 시호가 하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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