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포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3)/이때 동료가 치어죽는 장면을 목격 한 공수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 고 실토했다.

(월간조선 1988년 8월호)


제3부 발포·오인 전투·탈환

사격 개시

5월21일 오전 공수부대는 수십만으로 불어난 광주시민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취재 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전 10시54분: 땅을 치고 통곡하는 군인들의 모습 보임.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 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와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5월 21일 오후1시쯤. 전남 도청 앞에서는 수십만의 시위군중과 약1천 2백명의 7. 11여단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금남로를 맡은 11여단의 3개 대대 병력은 분수대 앞에 APC장갑 차 한 대를 세워놓고 그 장갑차를 믿고서 횡대로 서 있었다. 시민과 공수 부대원 사이의 거리는 10여 m도 되지 않았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시민측에는 이날 새벽 아세아 자동차에서 빼앗은 장갑차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은 카빈·실탄 등으로 무장한 이들도 있었다. 도청앞 광장에서는 헬리콥터가 자주 내렸다가 떴다가 하면서 서류 등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팽팽한 대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장갑차 때문이었다.

11여단소속 통신병 慶箕萬씨의 증언―.
『우리 등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측의 장갑차 한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 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공수부대 대열의 뒷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南東成상경은 이렇게 기억했다.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 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동료가 치어죽는 장면을 목격 한 공수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 고 실토했다. 한 공수부대원도 『동료가 죽고 다치는 것을 보니 내 마음 속에 잠재해 있던 야수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 했다. 이 차량돌진은 공수부대와 시민측의 총격전이 시작된 계기였다. 공수부대는 이때부터 경계용 실탄을 개인에게 지급하기 시작했고 도청주변의 옥상에 군인들을 올려보내 아래에 있는 시위군중을 견제하게 하였다. 이때도 조준사격이라기보다는 공중을 향해 쏘는 위협용 사격이 주류였다고 한다.

본격적인 총격전은 공수부대가 시내를 빠져나가면서 시작되었다. 그 때 7여단 35대대 3중대는 도청을 등에 지고 도청정면을 맡은 11여단의 왼쪽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대의 APC는 11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 우회전하면서 7여단의 방어선으로 돌진했다. 3중대장 朴炳洙대위는 이렇게 말했다. 『실탄도 없는 우리 병력은 APC가 달려오자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청 담을 뛰어넘어 피신했다. 도청안에서 우리 대대는 실탄을 처음으로 분배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실탄이 11여단으로부터 빌어 온 것으로 안다. 중대장. 지대장(팀장). 하사관까지 1인당 10발씩 실탄을 지급했고, 일반사병들에게는 실탄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실탄을 나누어주면서도 조준만 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1여단 지역에서는 사격이 시작돼 있었다』

자위적 발포를 허용하는 명령이 전남북 계엄분소로부터 예하 부대에 내려간 것은 21일 오후 6시였다. 그러나 시위현장에서는 그 훨씬 전부터 발포가 시작돼 있었던 것이다.

철수와 자위적 발포 허용

崔雄대사는 『우리 세 여단장이 공수부대 병력을 시 외곽으로 빼야 한다고 건의했었다』 고 말했다. 張師福 당시 전교사참모장은 『철수 결정은 우리 사령부의 작전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져 계엄사령관의 허가를 받아 실시되었다』 고 했다. 『양쪽이 모두 무장을 하고 있는데 군이 계속해서 시내에 머물러 있으면 희생자만 늘어 날 뿐이라고 판단했었다. 결과적으로 철수결정은 희생자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 말했다.

당시 11여단의 한 대대장은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렸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 오후에 발포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도청근처의 빌딩 위에 공수부대원들이 올라가 아래를 향해 사격을 한 것도 엄호용이었다. 그 때 수십만 군중을 향해 본격적으로 쏘았다면 그 정도만 죽었겠는가. 21일 오후에 공수부대는 일부 대대에서 경계용 실탄으로 대처한 것이고, 본격적으로 전투용실탄을 공급받은 것은 광주에서 철수한 뒤인 22일이었다』 고 주장했다. 이 대대장은 「21일에 공수부대가 아니었다면 쌍방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일반 부대였다면 공포감에 휩싸여 사격을 서둘렀든지 시민측에 항복해 버렸을 것이다』 고 했다. 공수부대의 철수 상황에 대해서 특전사일지는 이런 요지의 기록을 남겼다.

「오후 5시, 조선대학교에 있던 7 여단은 철수명령을 받고서 5시50분까지 화순으로 가는 길목의 주답마을로 이동을 끝냈다. 조선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11여단은 뒷산인 깃대봉을 돌아 지원등을 거쳐 오후 8시쯤 주답 마을에 도착했다. 7, 11여단 병력은 부근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광주에서 화순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했다. 전남대학교 교정에 있던 제3여단은 5만여명의 군중에 의해 포위돼 있었다. 무장 시위자들은 차량대열로 정문을 돌파하려고 여러번 시도해 왔다. 오후 4시30분 제3여단은 광주에서 담양군으로 빠지는 길목의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장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었다.

오후 5시30분쯤 제3 여단은 광주교도소에 도착, 방호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담얀군으로 빠져 나가는 무장시위대를 저지하게 되었다」 11여단은 조선대학교에서 철수하여 뒷산으로 퇴각하기 직전에 1인당 15 발씩의 실탄을 지급했다고 한다. 퇴각 할 때 자위수단으로 쏘라는 실탄이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발포가 허용된 셈이었다. 자위적 발포와 공격적 발포를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구분하여 적용하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뒷산으로 물러날 때 대부분의 병력은 뛰어서 갔고 장교들은 차를 탔다. 지프는 특히 무장시위대의 좋은 사격 목표가 되었다. 11여단의 정훈장교 변상진, 운전병 이상수, 두 사람은 지프를 몰고 철수하다가 기관총에 피격 돼 죽었다. 참모장은 걸어서 퇴각했는데. 참모장 지프를 몰고가던 운전병 裵東煥. 타고가던 연락병 김은철(金殷鐵)씨는 주택가에서 집중사격을 받아 金씨는 가슴, 裵씨는 관통상을 입었다. 裵씨는 다른 팔로 운전을 계속. 목표지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산 속으로 달아나다

11여단장 崔雄준장은 헬기편으로 전교사로 갔고, 양대인(梁大仁)참모장은 뒷산으로 퇴각했다가 22일에 전교사로 갔다. 7여단의 朴炳洙씨는 「21일 저녁은 퇴각한다고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총성이 가깝게 들리기도 했고, 캄캄한 속에서 피아 구별도 못할 것 같아 신경이 극도로 긴장상태에 있었다. 조선대학을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공포등 위협사격을 하며 거리를 뛰어갔다』 고 했다. 당시 11여단 대대장의 당번병이었던 김동철씨는 「우리는 10일에 광주에 투입된 이후 한, 두끼 정도의 더운밥을 먹었을 뿐 그 뒤로는 특전비상식량으로 견디었다. 산 속으로 퇴각하면서는 아카시아 꽃잎을 훑어 먹었다. 라면이 하나 있어 대대장에게 끓여 드렸다. 국물이라도 남겨줄 줄 알았는데 다 먹어치우는 것이 그렇게 야속할 수 가 없더라』 고 했다. 11여단참모장 梁大仁중령은 조선대 뒷산으로 퇴각하여 그날밤을 광주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지샜다고 했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들 중엔 뒤집어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11여단의 장병들이 충분한 전투실탄(1인당 5백60발)을 지급받은 것은 5월22일이었다고 한다. 산기슭 주답 마을 근처에 배치된 11여단 병력에게 헬기가 다른 보급품과 실탄을 실어 날랐다는 것이다.

시내버스에 집중사격

11여단 61대대의 김기수 중사는 낙오가 되었다. 며칠동안 제대로 식사를 못하고 잠을 못잤던 김중사는 철수 도중에 잠시 앉아 쉰다는 것이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깨어보니 동료들은 간곳이 없었다. 그는 배낭을 버리고 휴가 나온 공수부대원인 것처럼 행세하며 시내로 내려왔다가 시민군에게 붙들려 전남도청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하룻밤 동안 신문을 받았는데 한 대학생의 협조로 달아나 전교사가 있는 상무대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시민들로부터 얻어맞아 얼굴이 엉망이 됐었는데 성형수술을 받았다.

당시 11여단의 慶箕萬씨는 조선대 뒷산으로 철수한 날 밤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산기슭에 저수지가 있었고 그 부근 에서 우리팀은 판초를 덮어쓰고 잠에 들었다. 내가 세번째 보초를 선 뒤 잠에 들러고 하는데(22일 새벽 2시께) 따콩 하는 카빈총소리가 났다. 우리는 배위에 M16을 놓아두고 잤다. 그 총을 잡고 총소리가 난 암흑 속을 향하여 지향사격을 한 30분간 했다. 저쪽에서 누가 맞았는지 확인할 수도 수색할 수도 없었다. 그 때는 모두가 신경이 예민하여 바스락 소리만 들어도 방아쇠를 당길 정도였다』

시내에서 철수한 7. 11여단 병력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23일 이 길에서 피비린내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윤재걸씨(한겨레신문사기자)가 편집한 「작전명령―화려한 휴가」에는 11여단 소속 공수부대원의 수기가 실려 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학살인가 후송인가

「광주쪽에서 화순으로 달리던 미니버스를 발견하고 한 공수부대원이 길 가운데로 나서서 손을 들자 버스가 서면서 손든 장교에게 카빈 사격을 가했다. 양쪽에 매복하고 있던 군인들이 버스를 향해 일제사격을 개시.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중 13명은 사망했다. 잠시후 우리 부대원이 리어카에 부상자 2명을 싣고, 오른손에 총상을 입어 손가락2개가 잘린 여고생 한 명을 데리고 왔다. 2명의 젊은 시위자는 온몸에 총알을 맞았지만 정신은 살아 있었다. 내가 직업을 묻자 한 명은 전남대생, 다른 한 명은 없다고 했다. 모 하사관이 주머니를 뒤지니 카빈실탄 30발과 피묻은 돈이 나왔다. 한 소령이 오더니. 「저 새끼들 뭣하러 데리고 왔어. 빨리 밑으로 데려가 죽여버려」라고 했다. 모 하사관이 리어카를 끌고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뒤따라가 말렸으나 하사관은 이들의 머리에 세 발씩의 총탄을 발사했다. 비명은 없었고, 몸이 떨고 있을 뿐이었다. 민가에서 빌린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기자는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11여단 소속 부대원들을 찾다가 목격자인 慶箕萬씨를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버스와의 교전은 밤중에 있었던 걸로 안다. 혹시 버스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 총을 쏠까 봐 아침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생존자를 끌어내 내가 있던 곳까지 데리고 온것을 보았다. 리어카에는 청년 2명이 실려 있었고, 여고생과 할머니가 부상상태였다. 할머니는 두 눈을 총에 맞았는데 폭도들이 아들을 데리고 나가려는 것을 말리다가 폭도가 쏜 총에 맞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통신담당인 나는 이들을 후송하기 위해 헬기를 요청한 다음 아래로 내려가 보초교대를 한 뒤 돌아왔더니 네 명은 없었고, 리어카는 거기에 있었다. 「화려한 휴가」에서는 리어카로 실어다가 두 청년을 사살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빈 리어카를 다시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두 청년도 같이 후송해 준 줄 안다』

그 때 전교사에서 이 버스총격전 소식을 들었다는 梁大仁씨의 증언―.
『우리가 매복해서 길목을 지키고 있는데 버스가 검문을 받지않고 계속해서 달리고 총격까지 가하기에 우리 부대원들도 응사를 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10명 가량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 이 총격전의 유일한 생존자인 여고생이 전교사로 후송돼 왔었다. 내가 직접 그 여고생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웃 언니와 함께 전남도청에 구경 갔다가 밥심부름도 해주고 방송안내도 맡았다는 것이었다. 피격된 사람들의 시체는 가매장했다가 광주가 탈환된 뒤 그 지역대장이 내려가 확인, 발굴해준 줄 안다』 위의 세 사람의 증언은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이것은 국회진상조사에서 밝혀야 할 사건인 것 같다.

발포명령과 鄭雄씨의 역할

육군행정학교 교장 소준열(蘇俊烈)소장은 21일 오전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김흥한 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육본에 나갔더니 이희성계엄사령관이 『당장 전교사로 내려가 윤흥정 사령관을 보좌하는 입장에서 일해달라』고 했다. 비행기편으로 21일 오후 5시에 전교사에 도착했다. 공수부대의 철수, 발포문제 등으로 어수선했다. 蘇씨는 「22일 오전 10시에 윤흥정 장군이 체신부 장관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후임이 되었다』 고 했다.

현재 재향군인회장인 蘇씨는 『광주 사태는 발단―확산―수습이란 세단계가 있었는데 나는 수습을 책임졌다』 고 했다. 그가 말하는 수습의 핵심은 5월27일의 광주재진입과 전남도청탈환 이었다. 蘇씨는 『광주사태는 계엄령후의 학생시위가 동(動), 여단의 과잉진압이 반동(反動)이 되었고, 이 반동에 대한 또다른 동(動)으로서 시민참여에 의한 시위가 있었다. 이 동에의 반동으로서 계엄군의 추가투입이 있었고, 이 반동에의 동으로서 무장시위, 이동에의 반동으로서 5월27일의 진압 작전식으로 사태가 에스칼레이트되는 과정을 겪었다』 고 했다. 蘇씨는 학생데모를 이 사태의 기점으로 잡았지만 광주시민측에서는 80년봄의 민주화 소망에 찬물을 끼얹은 반역사적인 5.17조치를 이사태의 근본원인으로 보고 있어 시각의 입각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당무자는 『우리는 군 작전일지를 갖고 있다. 국회의 진상조사가 진행되면 이를 공개하겠다. 여기에는 정웅31사단장이 발포명령을 내려달라고 몇 차례 상부에 요청한 사실도 적혀있다』 고 했다.

당시 鄭雄 사단장의 직속상관이었던 尹興禎씨는 지난 6월8일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런 요청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고 말했다.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의 참모장이었던 張師福씨는 『윤장군이 참모회의에서 정웅장군으로부터 그런 요청을 받고 발포하면 안된다고 지시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 고 지난 6월9일 기자에게 말했다. 崔雄대사는 『21일 오후에 3, 7, 11 여단장은 윤흥정, 정호용 장군과 함께 전교사에 있으면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6시에 자위를 위한 발포 허용 명령이 내려갔는데, 불가피하게 발포를 하더라도 하체를 쏘라는 지침이 붙어 있었다』 고 기억한다.

張師福씨는 『자위적 발포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은 『시위대 쪽에서 군 헬리콥터를 향해 기관총 사격을 한 것이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고 했다. 張씨는 『21일 새벽에 예비군 무기고가 털렸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그때부터는 시위대를 무장한 폭도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고 했다. 鄭雄의원은 이에 대해 『시위대가 사단 사령부 등 부대로 몰려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지침을 구한 적은 있으나 직접 윤장군에게 발포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한 기억은 없다』 고 했다. 그는 또 『작전일지에 적혀 있다면 작전참모가 요청한 것을 사단장이 한 것처럼 기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전참모로부터 그런 요청을 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은 없다』고 했다. 이 발포명령 문제는 국회진상조사 특위의 최대쟁점이 될 것이다.

광주교도소 공방

당시 31사단의 한 대대에 소속되었던 안문영씨는 5월21일에는 30여명의 대대병력과 함께 광주교도소의 경비에 임하게 되었다. 이때 이들은 실탄을 한 발도 지급받지 못하고 탄총만 들 고 교도소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오전부터 시위대가 교도소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니까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포크레인, 트럭. 버스를 몰고 몽둥이로 차체를 두 드리면서 수천명이 몰려와 우리 앞에서 획 돌아가곤 했다. 우리는 오금이 저려 꽁무니를 빼고 싶었으나 중대장이 뒤에서 꼼짝 말고 서 있으라고 독려하곤 했다.

시위대는 학생들이 아니고 거의가 무직자들 같거나, 노동자들이었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김밥 등 먹을 것을 던져주었고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어떤 시민들은 차를 세워 놓고 내려와 우리에게 「고향이 어디냐?」 「경상도 군인들이 우리 씨를 말리려고 왔다」 고 말을 걸기도 했다. 오후 5시쯤 우리는 공수 3여단과 교대하게 되었다. 공수부대원들 이 교도소 바깥에 포진하는 도중에 시위대 쪽에서 발포한 공수부대원이 다치는 것을 목격했다. 교도소 앞길은 비탈길인데 시위대는 그 언덕 너머에서 총을 쏜 것이었다. 우리는 철수하여 사단 사령부로 이동했는데 거기서 비로소 실탄 20발씩을 지급받았다』

당시 3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현역 대령의 증언. 「21일 오전 우리는 전남대학교 안에 있다가 광주 교도소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 여단 병력이 오후에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즉시 교도소 외곽에 호를 파고 대치했다. 그날 오후에 무장 시위대의 습격이 몇 차례 있었고 우리는 응사했다. 우리 여단이 배치될 때 그 쪽이 선제사격을 가해 한 사병이 먼저 다쳤다. 전우가 쓰러지면 사격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는 법이다』 이 대령은 『그때 죽은 시민측의 시체는 가매장했다가 당국에 알려주었다』 고 도 했다(계엄사의 발표에 따르면 시위대 28명이 죽었다).

공수 3여단은 24일에 교도소 경비 임무를 20 사단에 넘겨주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朴俊炳 소장이 지휘하던 20사단의 2개 연대는 5·17 이틀 전인 15일에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효창공원과 잠실체육관에 주둔하고 있었다. 5·17 조치 이후 사단사령부는 한양대학교, 61연대는 서강대·홍익대·단국대, 62연대에는 건국대와 서울산업대·한양대학교에 진입하였다. 5월18일 새벽에는 경기도ㅇㅇ에 남아 있던 1 개 연대가 서울로 들어와 경희대·외국어대·국민대 교정에 진주하였다.

이 20사단에 출동명령이 내려간 것은 21일 저녁 8시쯤이었다. 육본작전 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朴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윤흥정 중장이 계엄군의 추가 투입을 건의해 와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이를 승인하였다』 는 것이었다. 이날밤 용산역을 출발한 군용 열차편으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20 사단의 3개 연대 가운데 2개 연대가 광주로 출발했다. 동원된 열차의 차량 수는 1백여량이나 되었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민화위 증언에서 『이 사단 병력은 하시를 막론하고 계엄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주한 연합사의 지휘하에서 떠난 병력으로 서울 근교에 집결시켜두었던 병력이다. 공수특전사병력도 연합사의 동의없이 쓸 수 있는 병력이다』고 말했었다.

11여단과 교도대의 전투

24일 오전 전교사 상황실에 있던 梁大仁 11여단 참모장은 상황판을 살피다가 가슴이 뜨끔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고 한다. 효천역 근방에 「적 APC 1대 격파」란 붉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판에는 당연히 그려져 있어야 할 효천역 부근 산에 매복하고 있는 전교사 산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의 표시가 없었다. 梁참모장은 효천역 부근을 지나고 있을 11여단 63대대를 무전으로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는 코브라형 헬기를 그쪽으로 보냈다. 「우리 APC와 트럭이 불타고 전투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鄭鎬溶 특전사령관은 崔雄 여단장을 불러 빨리 현지로 가라고 지시했고, 梁참모장은 부상자들이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뛰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특전사 작전일지는 이런 요지로 적고 있다.
「24일 아침 8시 공수 3개여단은 주둔치에서 광주 비행장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다. 오전 10시30분 7여단과 11여단은 보병 20사단 61연대에게 외곽지역 봉쇄 임무를 인계하였다. 제3여단이 이동중 제116호 운전병이 무장시위자들의 발포로 사망했고, 이관영 중사가 실종됐다. 이하사는 26일 오후 1시에 난자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11여단은 이동중 송암동 삼거리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로부터 산발적인 총격을 받았으나 피해 없이 지나쳤다. 11여단은 APC 장갑차를 선두에 세우고 전진했다. 효천역에 5백 m 쯤 못 미친 곳에 당도했을 때였다. 갑자기 도로변 매복지로부터 무반동포가 APC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소총사격과 수류탄 공격도 잇따랐다. 11여단 병력은 즉시 하차 도로변으로 산개하여 응사했다. 11여단 병력은 이 선제공격에 의해 8명이 즉사, 36명이 중상을 당하는 광주사태 중 최대의 피해를 당했다. 11여단 병력은 산쪽의 매복지로 쳐들어가 1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신문해보니 전 교사 산하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였다. 교도대는 APC 장갑차를 폭도가 탈취한 장갑차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무반동포에 맞은 장갑차

맨처음 무반동포를 맞았던 장갑차에는 63대대장 조창구(趙昌九)중령, 차정환 소령(작전 과장), 金동철 병장 등 6명이 타고 있었다. 지금은 서울시 강동구 하일동에서 포장마차 음식집을 꾸려가고 있는 金동철씨는 이렇게 말했다.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왼쪽편에 전답이 있고 농가가 7∼8채 있었다. 그 쪽에서 무장한 시위대 3∼4명이 우리를 보고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옆자리에 탄 대대장에게 「쏠까요?」라고 했더니 그냥 두라는 것이었다. 길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쾅 하고 폭음이 울리면서 장갑차는 화염에 휩싸였다. 차정환 소령은 즉사했다. 대대장 당번인 나는 「대대장님 뜁시다」라고 외치면서 조중령의 손을 잡으려 했는데. 손이 잡히지 않았다. 조 중령의 오른손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길 옆으로 뛰어 내려가 조중령을 지혈시키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비명과 수류탄 폭발음이 터져나오고 사격소리가 콩볶듯했다. 완전히 전쟁판이었다. 아무도 대대장을 구하러 오지 않아 내가 욕설을 퍼부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오인사격은 매복 중이던 교도대에게 11여단의 통과 예정을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11여단이 이동하는 길 주변에서는 무장시위대가 사격을 가해오고 있었고, 교도대에는 무장한 시위대가 차량을 탈취, 그 쪽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고 한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교도대는 길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11여단의 장갑차를 발견하자 마자 무장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로 오인, 집중사격을 가했다는 것이 당시 11여단 지휘부에 있었던 이들의 해석이다. 당시 11여단의 한 장교는 『우리가 매복진지를 점검해보니 정규군이 진지속에 있었다. 흥분한 부하들이 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말리느라고 혼이 났다』고 했다. 동료 40여명이 죽거나 다친 이런 난장판에서 흥분한 11여단의 공수부대원이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즉결 처분의 수수께끼

지난 85년 6월에 기자는 광주에서 권근남(權根南)씨(32·쌀가게 경영)를 만나 이런 증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의 형 권근립(權根立)씨는 포항의 어느 공장에서 근무하던 중 집에 다니러 와 있었다. 5월 24일 오전 9시쯤, 한 울타리 안에 다섯 가구가 살고 있는 우리집(광주시 송암동 58의 2 )으로 갑자기 일제 사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형을 비롯한 네가족들은 숨거나 엎드렸다. 총성이 멈추더니 공수부대 군인들이 찾아와 가택수색을 했다. 그들은 부엌에서 형과 김승훈(당시 18·노동자) 임병철씨(26) 등 세 청년을 발견 다짜고짜 끌고 갔다. 아버지는 논에서 못자리에 손을 보고 있다가 총성이 나자 집으로 돌아왔으나 원체 겁이 나서 형이 끌려가는걸 보고도 숨지 않을 수 없었다. 1시간쯤 집에 숨어 있다가 나가서 형의 행방을 찾았다.

형과 김승훈의 총살된 시체는 집에서 가까운 철도변 하수구에 처박혀 있었다. 형은 가슴에 총을 맞았고 양팔에는 대검으로 찔린 흔적이 있었다. 임병철씨의 시체는 맞은편 산기슭에서 발견됐다. 나는 아무 까닭도 없이 참살된 형의 죽음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목격자들을 찾아 그 전후사정을 알아보던 중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중략) 그날 아침 진짜 무장시위대는 군용 트럭을 몰고 공수부대 뒤를 따라 갔는데 바로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여 차를 버리고 주택가로 숨어버렸다. 공수부대 병력이 우리집 등을 수색한 것은 바로 이 오인사격 뒤. 숨어든 무장시민들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형과 두 청년을 홧김에 즉결처분한 셈이다』

「작전 명령―화려한 휴가」에 실린 11여단 공수부대원의 수기에는 權씨의 증언과 일치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때까지도 우리는(오인사격에 의한) 그 전투의 상대가 시민군인 줄 알았다. 우리는 하차하여 부근의 민가를 수색했다. 야산에서 젊은이 2명을 시위대라고 잡아 왔다. 얼굴은 구타를 당해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청년에게(동료들은) 너도나도 개머리판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우리는 절대로 시위대가 아니다. 근처의 모 연탄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옆에 흐르는 물에 엎드려!」하고 시켰다. 한 장교가 「어이, 사살시켜」라고 했다. 한 군인이 M16 자물쇠를 풀더니 앞의 젊은이에게 세발, 뒤의 젊은이에게 세발을 쏘자 파르르 물 속에서 떠는 것이었다. 모 하사관은 확인사살을 한다고 죽은 젊은이에게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기자는 당시 11여단과 전교사의 고위장교들에게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6·25 참전 경험을 가진 한 장성은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보고를 했겠느냐. 6·25때 보니까 격전을 치른 부대에서는 포로가 살아나지를 못하더라. 동료 가 다친 데 대한 화풀이로 적의 포로를 생포해도 죽여버리더라』고 했다. 이 사건도 국회 진상 조사에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오인 충돌

5월24일 오전 10시쯤 31사단 소속의 한 대대 소속 중대원 30여명은 트럭 한대에 타고 영광쪽 호남고속도로 진입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사단본부에서 대대본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고속도로 진입로는 통행이 중지돼 이 군용트럭 한대만 지나가고 있었다. 트럭 맨 앞에서 동료 3명과 함께 집총 자세를 하고 서 있었던 안문영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양쪽은 산비탈이었다. 우리는 이동중 간헐적으로 사격을 받았다.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중대장 송준욱 대위가 그냥 지나가라고 지시했다. 트럭이 돌진했으나 바리케이드에 걸려 잠시 멈추었다. 그때 산속에서 집중사격이 쏟아졌다. 우리도 트럭에 탄 채 응사했다. 누가 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M16과 구경 50밀리 기관총탄이 트럭을 향해 빗발치듯 했다. 총알이 트럭 차체에 맞는 소리가 탁 탁 탁하고 났다. 나는 왼쪽 팔목에 첫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양손 양다리 등에 다섯 발을 더 맞았다.

신학대학에 다닌 적이 있는 나는 「하느님」을 불러댔다. 내 옆에 서 있던 김명철, 최필양, 허 모 사병 등 3명은 그 사격으로 즉사했고, 나를 포함한 5명(서보원, 장태 산씨 등)이 중상을 입었다. 중대장도 부상했다. 중대장은 다치고도 저쪽의 사격이 조직적인 게 이상하여 무전으로 「우리는 국군이다」고 소리치게 했다. 저쪽에서 무전을 받아 「총을 놓고 트럭에서 내려라」는 지시를 했다. 알고 보니 저편은 전투교육 사령부 소속 기갑학교의 하사관생도 들이었다. 그들은 산에 매복하고 있다가 우리를 폭도로 오인, 사격을 시작했고, 우리가 응사하자, 더욱 확신을 갖고 집중 사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사상자들은 그쪽에서 보내준 APC에 실려 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광주 탈환은 나의 결정』

이상에 소개한 두건의 오인충돌로 군인 12명이 사망 40여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광주 사태에서 사망한 군인들은 모두 23명이고 부상자는 약 1백명인데 각각의 반쯤이 오인 충돌에 의한 희생자들인 것이다. 한 장교는 『전투라는 것은 원래 혼란상황이라 이런 사고가 날 수 있는 법이다. 군인이 이 정도라면 시민 측에서도 자기들끼리 오인 사격이 꽤 있었으리라고 추리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鄭雄 당시 31사단장은 『이 두건의 오인사격은 나의 관할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전 교사에서 나의 지역에 매복 병력을 보내 놓고도 알려주지 않아 상호간의 오인을 자초했다. 우리한테 알려주었으면 관련 부대에 상호간의 위치를 통보, 오인이 없도록 했었을 것이다. 이 오인사격에는 의심이 가는 부분도 있다』 고 말했다.

張師福 당시 전교사 참모장은 전남 도청 지하실에 있던 다이나마이트의 뇌관과 수류탄의 안전핀을 제거한 과정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다.
『전남도청에 들어가 있었던 5명의 대학생이 아세아 자동차 쪽 대치선을 넘어 나에게 찾아왔다. 23일이나 24일 경으로 기억된다. 이들은 지하실에 있는 다이나마이트와 수류탄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전 교사 병기근무대의 한 문관을 25일 밤에 몰래 도청으로 들여보냈다. 나를 찾아온 다섯 명의 학생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틈을 타서 이 문관이 밤을 새워 수류탄 안전핀 등을 제거하여 갖고 나왔다. 그런데 그 학생 가운데 한 명은 5월27일의 도청 탈환 전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張師福씨는 『우리가 재진입을 결정하게 된 것은 시민측에 의한 자체 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시내의 치안도 불안해졌고, 계엄군이 다시 들어와 질서를 회복해 주기를 바라는 여론도 높다는 판단을 했었다』 고 했다. 蘇俊烈 당시 전교사 사령관은 『영관급 전역자 출신인 전 교사 연구관들을 몰래 광주시내로 보내 민심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군의 재진입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는 보고를 받았다』 고 했다.

25일 오후 崔圭夏대통령이 비행기편으로 광주에 도착. 전교사를 방문하고. 광주시민에게 할 방송을 녹음한 뒤 서울로 올라갔다. 주영복(周永福)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수행하여 내려왔다.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은 내려오지 않았다. 광주사태 기간중 그는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 이 자리에서 蘇俊烈사령관은 崔대통령에게 『아무래도 작전을 해야겠습니다』고 보고했다. 崔대통령은 『그러면 시민들이 많이 다칠텐데…』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崔대통령이 장형태(張炯泰) 전남도지사의 의견을 묻자 張지사는 군의 재진입에 반대하는 뜻의 이야기를 했다. 李희성 계엄사령관은 張지사의 견해를 심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蘇俊烈씨는 『광주 탈환 작전은 완전히 내 책임 아래에서 결정했다』 고 말했다. 『26일 오후의 참모회의에서 27일 새벽 4시를 목표지점 행동개시 시간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가 새나갈까 봐 신경을 썼다. 31사단장에게는 작전이 보류된 것처럼 통보했고, 3개 공수여단의 여단장에게만 임무를 부여했다. 심지어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도 작전이 시작된 뒤인 27일 0시쯤 작전개시를 알렸다. 이 사령관은 「작전을 시작한 뒤 알리면 어떻게 하느냐」 고 역정냈지만, 이 작전을 계통을 밟아 하다가는 시간만 걸리고 정보가 새 나갈 것으로 나는 판단하였다』 蘇씨는 『31사단장 정웅 장군에게는 27일 0시가 지나서 전화로 작전 개시를 통보하고 31사단의 임무를 부여했다』 고 했다. 31사단은 한 방직공장의 점령 등 비교적 사소한 일을 맡았다.

鄭鎬鎔씨는 얼마나 간여했나?

광주 탈환과 관련한 鄭鎬溶 특전사령관의 역할에 대해서 千金成씨는 「10·26, 12·12, 광주사태」란 책에서 鄭씨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여 대강 이렇게 기록하였다. 즉, 5월 25일 오후에 鄭사령관은 서울로 올라와 국군보안사령부에서 全斗煥사령관, 盧泰愚수도경비사령관, 白雲澤 9사단장과 만나 진압작전에 대해서 협의한 뒤 「결행한다」는 지침을 받고 광주로 내려왔고. 26일 오후에는 광주비행장 사령실에서 朴俊炳 20사단장과 세 여단장을 불러 작전에 관련된 지시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작전개시를 알린 것도(蘇俊烈씨의 증언과는 달리) 鄭鎬溶사령관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蘇씨는 鄭사령관이 자신에게 계엄사령관에게 작전이 개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하여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다.

千金成씨의 기록대로라면 鄭씨는 12대 국회에서의 발언과는 달리 광주 사태의 작전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千씨에게 鄭씨가 증언한 시점이 1981년 초로 아직 5공화국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라 자신의 역할을 솔직하게(또는 과장되게) 이야기했는지, 아니면 잘못 전달됐는지는 국회진상 조사에서 가릴 수 있을 것이다. 蘇사령관은 도청 탈환 특공조의 조장으로 선발된 편종식 대위가 있던 송정리 비행장으로 찾아가 임수원 대대장과 편대위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다고 주장한다. 『생포를 많이 하는 것이 전과를 올리는 일이다. 희생자를 최대한 줄여라』

공수부대의 마무리 작전

광주탈환작전은 3, 7, 11공수단이 27일 새벽에 시민군의 요충지를 직격하여 무력화시킨 뒤 20사단 병력에게 인계하고 날이 새기 전에 재빨리 빠져 나와 「공수부대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전사 작전일지」에 따르면 이 작전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장교 11명, 사병, 하사관 66명으로 구성된 3여단 11대대( 대대장 임수원 중령)의 특공조 (조장 편종식 대위)는 새벽 2시에 기상하여 조선대학교-조대부중-도깨비시장-전남기계공고를 거쳐 새벽 4시 정각에 도청후문에 도착했다. 이들은 보병 복장으로 위장했다. 4시10분 특공조는 전남 도청으로 진입했다. 편종식 대위는 도청지하실로 들어가 폭약과 수류탄을 먼저 압수했다. 전격작전은 30분만에 끝났다. 2백여명의 시민군들을 체포했다.

7여단 33대대병력 2백1명은 광주공원을 목표로 27일 새벽 1시 30분에 국군통합병원에 집결. 시내로 잠입하기 시작했다. 월산동 부근에서 10여명의 시민군과 조우하여 7여단에서 한 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다. 시민군 1명이 사살되고 한 명은 생포되었다. 새벽 4시 광주공원에 도착해보니 무장시위대는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은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으로 옮겨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도청에서는 당초에 예상했던 80여명보다 많은 2백여명의 시민군을 체포할 수 있었다. 11여단은 전일빌딩을 점령, 30여명의 시민군을 체포했고 YWCA건물을 접수할 때 안에 있던 30여명의 시민군이 저항. 총격전이 벌어졌다. 두 하사가 피격당했고 시민군 3명을 사살, 29명을 붙들었다」

계엄사는 광주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17명의 시민군을 사살했고, 군측에서는 3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었다. 蘇俊烈 당시 전남북계엄분소장 겸. 전교사사령관은 『최소한의 희생으로써 질서를 회복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공수부대가 과잉진압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킨 면도 있지만 탈환 과정에서는 야간기습전술로써 피해를 적게 내는데 본령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일반 보병부대를 투입, 정공법으로 나갔다면 희생은 엄청났을 것이다』 고 주장했다.

이 작전에서는 공수부대가 승리했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또 국회진상특위의 증언대 위에서 승부는 어떻게 날 것인가?

참고로 세 공수여단장의 그 뒤를 알아본다. 70여단장 신우식(申佑植)씨는 경북사람으로서 육사 14기 출신이다. 국군보안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鄭鎬溶준장이 공수7여단을 창설했을 때는 鄭 여단장 밑에서 참모장을 지냈었다. 광주사태 이후에는 5사단장을 거쳐 한직에 있다가 3년 전에 전역했다. 11 여단장 崔雄씨는 서울 출신인데 육사 12기 출신으로서 광주사태 이후 사단장, 특전사령관을 거쳐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뒤 지금은 파키스탄주재 대사로 있다. 3여단장 崔世昌씨는 대구사람으로서 경북중-경동고를 나왔으며 육사 13기로서 공수단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부마사태 진압과 12·12사태 때의 특전사령관 연행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그는 광주사태 뒤에는 수경사령관 3 군사령관을 거쳐 지금은 합참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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