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단행본/한국 現代史 요약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라는 월계관은 무능한 반역守舊세력과 싸워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1948년 건국 이후 근대화를 성공시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으나 1998년 이후 守舊좌파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자유통일을 넘어서 一流국가 건설로 가야 하는 길목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올해에 친북좌파정권을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50년이 될지 모른다. 아르헨티나 등 많은 中進國이 선진국 문턱에 걸려 넘어져 一流국가 건설의 꿈을 접었다. 한국도 그런 반열에 들 것인가? 우리가 자유와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한국은 후퇴할 것이다.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라는 월계관은 무능한 반역守舊세력과 싸워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배부른 돼지가 일류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투지만만한 야윈 늑대가 온순한 양떼를 지휘해야 一流국가를 세울 수 있다. 지금 한국인에게 부족한 것은 지능지수도 아니고 國富도 아니다. 용기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日帝 때의 독립운동가, 6.25전쟁 때의 학도의용군, 산업전사들, 민주투사들과 같은 집단적 용기를 발휘하여 권력을 사기적 숫법으로 차지한 얼치기 좌파정권을 정리할 수 있다면 一流국가로 가는 길은 넓게 열릴 것이다. 그런 용기가 없다면 국민들은 좌파의 밥이 되어 자유도 재산도 미래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어떤 고생을 했고 어떤 고난을 극복했는지 뒤돌아보는 이유는 선배들의 惡戰苦鬪(악전고투)를 돠새기면서 거기서 투지를 뽑아내기 위한 것이다. 선배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에 비교하면 지금 좌파의 도전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화장한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무장한 좌파를 물리쳤던 우리가 '거짓말만 뱉어놓는 입밖에 없는 사이비 좌파'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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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흐름


*발전방향: 조국 근대화(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자유통일-조국 先進化로 나아가야 하는 道程에 있다.
*대한민국의 4대 再발견: 해양정신, 기업가정신, 尙武정신, 自主정신
*4대 기여 집단: 장교단, 기업인, 기독교, 과학기술자
*國力의 양적 규모로는 세계 12위권, 삶의 질로서는 세계 20-30위권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다투는 세 나라 한국, 대만, 이스라엘은 모두 안보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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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史: 신라통일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다. 신라는 對唐결전으로써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이곳을 한민족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했다. 삼국시대엔 민족의식이 없었다. 韓民族은, 신라통일로써 만들어진 同族의식을 딛고 장구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대한민국은 민족사의 정통이며 金正日 정권은 이단이다. 민족사의 정통성은 신라통일에서 비롯된다. 신라통일의 정당성을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설 자리가 없다. 민족통일 국가가 있었기에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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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광복과 分斷의 의미

·해양화: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 해양세력과 손잡고 해외 지향의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미국 일본 서구 등 해양문명권의 일원이 되었고 이 선진문화권의 유산들-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과학과 합리정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봉건적 전통과의 결별: 한반도 분단은 자유 對 독재의 이념형 분단으로서 자유 선진 진영에 줄을 선 한국은 큰 저항 없이 後進的 대륙세력 및 朝鮮朝의 봉건적 전통과 결별하고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미동맹: 해방군으로 진주한 미군은 일단 철수했다가 김일성의 남침전쟁 때 구원자로 다시 왔다. 전쟁은 동맹관계를 맺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 동맹은 한국인에게 울타리도 되고 우산도 되어주었다.

2.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

·국민국가 건설: 주체적 근대화(산업화, 민주화)의 시작이었다.
·국가이념: 헌법의 基調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설정됨으로써 「脫대륙, 脫후진적 전통, 脫주자학적 이데올로기」의 근대화 혁명이 발진하는 틀이 갖추어졌다.
·국가 정통성: 건국과정이 유엔의 공인하 총선거로 이뤄짐으로써 한국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였다.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지도력: 그의 정치철학은 반공 기독교적 민주주의였고 통치행태는 「對外 개방적·실용적 권위주의」였다. 그는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반도에서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등장한 실용적 집권자였다.
·군대의 主力세력화: 국민국가의 생존 조건이자 국가 목표인 富國强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공산주의자들의 위협 속에서 건국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朝鮮朝 개국 이후 처음으로 군대가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남북대치상황의 본질: 1민족1국가의 정통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의 金日成 정권을 반란집단, 북한땅을 한국의 영토, 통일을 미수복지구의 수복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그 뒤 남북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善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으로 굳혀진다.


3. 李承晩과 그의 시대
-건국과 호국의 구심점으로서 근대화의 礎石을 놓았다.

·李承晩이란 축복: 아인슈타인이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된 격이다. 동서양의 최고 교양을 아우르고 사명감으로 무장한 한국 최초의 박사. 한국인의 주체성과 魂을 견지한 自主 자존의 지도자였다.
·국군의 창설: 북한의 위협으로 강력한 상비군을 갖게 되었다. 국군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다음 시대를 주도할 능력을 키워갔다. 강력한 국군장교단의 등장은 朝鮮朝 500년간 잊혀졌던 尙武정신과 그에 수반되는 실용정신, 효율성, 과학과 합리정신을 우리 역사에서 되살림으로써 진취적이고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민족성과 기풍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지개혁: 기득권층으로서의 地主계급을 없앰으로써 그 뒤 산업화와 민주화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회갈등의 소지를 축소시켰다. 농지개혁으로 한국 赤化가 저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제 시대 관료의 활용: 親日 경찰과 헌병들까지 이용한 부작용도 있었으나 근대국가 운영에 참여했던 경험자가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 동원되었다.
·6·25 전쟁 지도: 그의 카리스마는 후퇴하는 국군에게 저항과 반격의 의지를 심어준 구심점이었다.
·6·25 전쟁의 의미: 한국은 자유세계의 선봉으로서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함으로써 일본과 독일의 부흥, 대만의 수호에 기여했다. 이 전쟁은 미국이 對蘇 봉쇄작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 동서냉전은 한국에서 시작되었으며 공산주의의 붕괴도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서 남한내 좌익세력을 일소함으로써 체제수호와 근대화의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 전쟁을 통하여 거대한 군사집단이 생겼고 이는 근대화 주도세력이 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휴전협상에서 소외된 李承晩 대통령은 단독 北進, 반공포로 석방을 카드로 미국정부를 압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끌어냈다. 한미동맹 덕분에 산업화 시기 국방비의 증액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자원을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민주 교육의 강화: 1950년대에 양성되고 온존된 젊은층이 60년대 근대화의 人力으로 쓰여졌고 4·19 혁명의 주도층이 되었다. 그는 언론자유와 야당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 양성된 민주세력이 자유당 정권 타도의 선봉이 되었다. 李承晩도 모든 성공한 지도자처럼 「자기 성공의 실패자」였다.
·애국적 기업인의 등장: 유교적 실용주의, 한국적 상업정신(개성상인), 기독교적 직업윤리, 그리고 애국심으로 무장한 창업주群이 자본주의의 전도사 내지 개척자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李承晩은 좋은 후원자였다.
·헌법과 현실의 갈등: 민주주의의 경험이 全無한 후진국이 선진 민주주의 헌법체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현실과 법과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선진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으로 후진 조국의 현실을 재단할 때의 부정적이고 자학적인 평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를 남겼다.
·李承晩 정권의 붕괴: 자유와 복지를 다같이 갈망하는 국민들, 특히 젊은 군인들과 학생들의 커지는 에너지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너무 노쇠하고 경직된 자유당 정권의 정치행태가 무리한 부정선거를 촉발시켰다. 李承晩 대통령의 하야 결단이 최소한의 流血로 정권 이양을 가능하게 했다.

4. 張勉 정부: 善意의 실패

·붕당정치 再現: 4.19 혁명 후 李承晩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정치풍토에서 내각제를 실험하자 한국의 전통적인 붕당정치 행태가 再演되었다. 민주당의 新舊派 분당 사태는 정치 지도력의 약화를 가져와 4·19로 촉발된 국민들의 욕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이 틈을 탄 좌익세력의 등장은 반공정신과 개혁의지에 불타던 장교단에게 심각한 체제불안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때는 6·25가 끝난 지 불과 7년이 흐른 때였다.
·민심과 軍心의 이반: 張勉 정부는 우파 정권이었으나 좌익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군 장교단의 불안과 불신을 불식시킬 수 없었다. 일반 국민들도 민주화에 따른 사회불안에 진절머리를 냈으며 군인들의 등장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커갔다. 민심과 함께 물려 돌아가는 軍心도 張勉 정부에 등을 돌려 5·16 주체세력들은 거의 공공연히 쿠데타 모의를 할 수 있었다.
·善意의 실패: 張勉 정부는 그러나 경제개발계획 작성 등 나름대로의 국가 발전 계획을 세우는 노력을 하였으나 민주당의 분열에 기인한 지도력의 약화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張勉 정권의 실패로 내각제는 허약한 정치체제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강하게 주었고 대통령 중심제의 리더십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5. 5·16 군사혁명-700년만의 군인 主導 국가개조

·왜 혁명인가: 근대화라는 가장 큰 규모의 국가개조를 가능하게 한 주체세력이 있었고, 지도자 朴正熙의 뚜렷한 목표와 이념과 전략이 있었다. 1963년에 그가 제시한 비전은 초과 달성되었다. 국민의 지지가 60% 이상이었다.
·군사문화의 확산: 13세기 고려 무신정권 이후 최초의 군사정권. 군사문화가 가진 실용성, 효율성, 과학과 합리주의, 자주성, 富國强兵의 철학 등 긍정적인 면이 획일성 등 부정적인 면을 압도하고 국가개조에 크게 기여했다. 그 뒤 3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군사문화는 민족문화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장교단의 개혁성: 당시의 군 장교단은 최강, 최선진 개혁 집단이었다. 10%가 미국 유학 경험자로서 그 비율은 외무부 직원보다도 높았다.
·商工農士로의 신분혁명: 박정희는 士農工商의 후진적 신분서열을 商工農士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자, 언론인, 정치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기업인 군인 관료 과학기술자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킨 점에 그의 근대화 혁명 이념의 핵심이 있다. 기업인과 군인들이 사회의 주류층을 형성한 것은 우리 민족사상 처음이다. 근대화 혁명의 주체세력이 득세하면서 한국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實事求是的인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朴正熙의 혁명적 역사관과 자주적 민주주의觀: 朝鮮朝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무능, 위선, 守舊로 비판했던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우상 숭배하는 야당과 지식인들을 사대주의로 인식했다. 그의 주체적 생각은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로 표현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한국식 민주주의로 확산, 정착시키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그의 한국적 민주주의론과 개발전략은 후발 開途國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빵 다음에 자유: 朴正熙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물질적 토대를 딛고 설 때만 기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 그는 5·16을 일으킨 데 대해서 죄의식이 없었다. 그는 민주당과 자유당을 똑 같은 위선적 정치집단 또는 守舊세력으로 보았다.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란 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 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

6. 朴正熙와 그의 시대

·朴正熙 리더십의 본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사명감과 서민성을 바탕으로 깔고서 일본적인 武士道 정신과 국가주의 및 미국의 합리적 조직 경영법을 종합한 韓日美의 합작품.
·朴正熙 전략의 핵심: (정신적)自助-(경제적)自立-(국방과 정치의)自主의 3단계 발전론. 그는 국가 주도에 시장경제적인 경쟁개념을 도입했다. 새마을 사업의 원칙은 잘하는 마을을 집중 지원하고 못하는 마을은 방치하여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朴正熙의 비전: 민족중흥, 조국 근대화, 自主국방, 한국적 민주주의.
·동양적 실용정신: 朴正熙는 管仲-명치유신 지도자-鄧小平-李光耀로 이어지는 동양의 실용적 정치 지도자型에 속한다.
·결정적 선택-수출입국: 속좁은 민족주의가 선택하기 쉬운 수입대체 전략을 폐기하고 수출입국 전략으로의 방향전환을 통해서 우리 기업은 처음부터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先경제, 後민주: 先경제, 後자주국방 건설, 先건설, 後통일의 전략에서 보듯이 朴正熙 정권은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孟子)는 동양적 실용주의 노선을 실천했다.
·남북한 逆轉: 1960년대에 남한은 경제제일 노선, 북한은 군사제일노선 추구했다. 1970년대에 남한은 견실한 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자주국방을 추진했으나, 북한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의 누적으로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남북한 國力의 逆轉이 일어났다.
·朴正熙式 세계화 전략: 수출입국 정책, 한일 국교정상화, 월남파병, 중동건설 시장 진출은 한국인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확대시켰다.
·민족사 세번째의 국제화: 신라통일 前後, 몽골 지배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한민족은 세계사의 중심부에서 활동공간을 확보했다. 이는 唐, 몽골, 미국 등 당대 최대강국과 친선 및 동맹관계를 유지한 덕분이다.
·維新시대의 功過: 1972년부터 7년간은 국력의 조직화, 효율의 극대화에 성공한 권위정부가 중화학 및 自主국방 건설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언론 및 정치의 자유는 제한되었으나 고도성장으로 두 차례 석유위기를 돌파하고 필리핀, 타이, 말레이시아, 북한 등을 추월하여 멀리 따돌리고 질적으로 다른 국가가 되었다. 정치의 코스트가 최소화되면서 공직자 부패도 최소화되었던 시기였다.
·결정적 선택: 1973년 석유쇼크와 중화학공업 전략 밀고 나가기: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1974년부터 본격화되는 중동건설시장 진출은 월남진출의 경험을 딛고 가능했다.
·국민국가의 기본시스템을 구축: 군의 현대화, 방위산업 진흥, 직업 공무원조직의 확립, 법령정비, 의료보험제도 도입, 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축적, 국책 연구기관의 창설, 특히 KIST와 원자력 연구소 등 과학기술 진흥 등.
·민주화 세력의 저항과 미국의 압력: 민주주의를 하느님처럼 모시려는 세력에 대한 朴正熙의 비판과 代案 모색은 다수 지식인과 국민들이 판단 기준을 선진 민주주의로 삼고 있는 大勢 속에서 실패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이념집단을 만드는 데 실패한 이유는 지식인층의 반발로 근대화의 산물인 중산층을 의식화시키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韓美 갈등: 카터의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공약이 朴 대통령의 반발을 샀다.
·중산층 이반-釜馬사태: 釜馬사태는, 근대화 성공의 産物인 도시 중산층이 학생 야당과 손잡고 정권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정권에 충격을 주었다. 金載圭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 뒤 한국 정치 변동의 결정적 역할이 도시 중산층의 손으로 넘어간다.
·釜馬사태의 원인: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 민주화 운동,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고와 부가가치세 징수, 金泳三 의원직 제명.
·10.26 사건의 의미: 「朴正熙는 봉건적 잔재 및 사대주의와 싸우다가 戰死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그의 죽음은 適期에 피로한 旗手를 교체하여 한국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간 朴正熙: 인정과 눈물이 많은 鐵人·哲人·超人. 가슴에 총을 맞고도 『난 괜찮아』라고 주변인물을 걱정하면서 죽었다.

7. 신군부의 재집권 ··

·12·12 군사변란의 성격: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朴正熙 친위세력이 10.26 이후 박정희 격하 움직임이 일어나자 불만을 품었고 시해사건 수사와 엮여서 일어난 군내 갈등속에서 流血사태를 촉발시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집권으로 매진하게 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朴正熙의 지도이념을 신념화하지 않은 권력기생 체질이 강해 朴正熙가 사라지자 지리멸렬하여 주도권을 상실했다.
·중산층의 중립-군부 재집권: 1980년 봄 정치자유화를 계기로 야당은 분열하고 사북사태 등 혼란이 발생했으며 제2차 석유위기의 여파로 경제는 不況 국면이었다. 중산층의 불안이 증대했고 학생시위에 대해 냉담한 중립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탄 신군부의 집권 시도는 광주에서 局地的 저항에 직면하였으나 다수 국민들의 非호의적 묵인하에 성공했다. 10·26사건의 한 동기가 되었던, 釜馬사태 때의 중산층과 학생들의 합세는 이때에는 이뤄지지 않아 야당, 학생 등 민주화 운동 세력은 고립되었다.
·미국의 중립: 미국은 정권 교체기에 있었고 카터는 이란 인질 사건에 매달려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8. 全斗煥 정권-유혈 집권, 경제의 안정적 발전, 單任 실천

·3低시대의 경제약진: 박정희 시대 말기에 노출되었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의 부작용을 정리했다. 엘리트 경제관료들의 정책수행을 대통령이 뒷받침하여 물가를 잡고 국제 석유價 안정에 힘입어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등 견실한 성장세를 지속하고 對外개방적책을 폈다. 경제호조가 민주화의 충격과 혼란을 흡수함으로써 평화적 민주화 과정이 가능해졌다.
·정보통신과 전자산업의 전략적 추진: 1990년대의 IT 붐을 예약하였다.
·韓美관계의 안정: 레이건 행정부가 對蘇압박정책을 쓰면서 일본의 나카소네, 영국의 대처, 한국의 全斗煥 정권을 필요하게 되어 朴正熙 후반기와 같은 큰 갈등이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의 전략적 추진: 한국 사회 선진화, 對北우위 확보, 對공산권 접근, 한국의 국제 이미지 提高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했다. 국내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부측의 강력 대응은 올림픽 반납을 각오해야 하는 등 민주화 과정의 한 안전판이 되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정권과의 대결에서 승리: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북한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고 대응카드로 써먹은 평양 세계청년축전은 예산 낭비를 가져와 1990년대 대기근 사태의 要因이 되었다.
·학생운동권에 친북 좌익 이념 확산: 민주화 운동의 흐름속에서 북한세력과 연계되거나 자생적인 좌익이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하여 당국의 단속을 탄압으로 몰아갔고 언론과 여론도 속아넘어갔다. 여론과 야당에 밀린 정부도 적실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좌익 이념의 젊은층 침투는 大勢가 되었다.
·1985년 2·12총선과 민주화 운동의 대세화: 이 흐름은 1987년6월 대시위로 폭발했고 全斗煥-盧泰愚세력은 6·29민주화 선언으로 대응하여 정면충돌 위기를 평화적인 민주화 과정으로 전환시켰으며 兩金의 분열로 盧泰愚후보가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全斗煥 정권은 유혈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7년간 대내외적으로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한국 사회를 긴장과 갈등과 성장이 교차하는 역동적 사회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9. 盧泰愚에서 盧武鉉까지: 민주화의 진통과 文民좌파정권 등장

·대중정치의 시대: 1988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 집회 시위의 자유가 확대되는 가운데 좌파가 주도하는 각종 대중운동이 강력한 조직력과 활동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공권력과 기성세력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들 조직중에서는 친북적인 성격을 가진 단체도 많아 체제 불안 요인이 되었다.
·노사문제의 결정적 중요성: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기업이 정권의 보호 아래 노조운동을 누르고 생산과 판매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고 노조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노사문제가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었다.
·관념적 문민정치의 폐해: 1993년 소위 문민 정부의 재등장은 한국 정치가 예외의 시대(군인 주도 시대)가 끝나고 正常의 시대(문민 우위)로 복귀했다는 의미였다. 한국 정치의 정상복귀란 조선조 정치생리의 재현으로 나타났다. 정치인, 언론인, 학자, 법조인, 사회단체가 주도하는 위선적 명분론의 부패한 파당정치가 경제와 안보 및 외교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회의 좌경화-좌파 권력의 등장: 1980년대에 좌경화되었던 운동권 세력이 사회 중심부로 진입함에 따라 한국 사회의 권력구조도 좌경화되고 이런 바탕에서 金大中, 盧武鉉 좌파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세계화속에서 좌초: 국내의 권력투쟁에 함몰하여 전통적으로 세계大勢에 무지, 무관심한 소위 文民정부는 세계화에 한국 경제를 제대로 적응시키지 못해 1997-98년의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그 뒤에도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政經유착, 전투적 노조 등 문제점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치부패의 深化: 정치권력의 부패는 민주화에 따른 잇단 선거로 해서 오히려 더 악화되었고 이는 심각한 정치不信을 야기하여 정치 리더십의 약화를 초래했다.
·북한의 大飢饉과 北核문제: 흡수통일에 따른 책임과 부담을 두려워한 한국인들과 정부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통일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1998년 이후 좌파정권이 등장하여 굴욕적 對北지원으로 金正日 정권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북한동포-국군포로-납북자-탈북자를 외면하고 韓美동맹을 약화시키고 國論분열을 주도하더니 드디어 북한의 핵무장을 허용했다. 이는 통일의 결정적 찬스를 놓치고 분단고착을 불러 북한동포의 고통을 연장한 민족사적 범죄이다.
·국론분열: 金大中 좌파 정권이 추진한 햇볕정책은 위기에 빠진 金正日 체제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남한내 친북좌익 세력의 강화로 이어져 체제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한편 북한의 내부개혁은 요원한 실정이다. 체제, 이념문제를 둘러싼 살벌한 대립은 대한민국의 존립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남북한 親北反美 연합전선의 형성: 남북한에 걸쳐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를 파괴하려는 親北反美 연합 전선이 형성되고 있고 정권이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親북한정권 세력은 「북한공작원+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세력+대한민국의 공권력으로부터 제재를 당한 경험에서 생긴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세력+前근대화 후진세력의 집합체」로 되어 있다.
·근대와 前近代의 대결: 한반도에선 지금 前근대 봉건 세력이 金正日 정권을 핵으로 하여 남북한에 통일전선을 형성중이며 이에 대해 대한민국이 지난 60년간 키워온 근대국민국가로서의 시스템(기업, 법치,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헌법 등등)과 중산층이 저항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산층의 위기와 선동정치: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변동기 때 결정적 역할을 했던 중산층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신감을 잃어 사회의 중심 균형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좌파세력의 양극화 선동, 가짜 민족주의 선동이 먹혀 들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정통主流 세력의 위기: 1997년 및 2002년 선거에서 우파 세력이 분열하여 좌파 정권의 등장을 허용하였다. 두 차례 선거에서 대한민국의 챔피언이어야 할 우파 지도층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취를 제대로 옹호하지 못하고 좌파선동에 변명위주의 수세로 대응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상실했다. 우파 지도부는, 한반도 상황을 이념적으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戰略부재의 무기력을 보여주었다.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이념과 역사관이 가장 큰 전략이다. 이에 따라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행동하는 국가엘리트 집단이 사라졌다.
·反美와 親中: 남북한의 좌파전선이 反美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는 사이 중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고 때로는 굴종적인 자세가 굳어지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팽창은 한국에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고, 과거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의 再現이 우려되고 있다.
·해양문화권에서 대륙문화권으로 복귀 가능성: 1945년 이후 지속되었던 한국의 해양화, 세계화 추세는 1993년 金泳三 정권의 등장을 계기로 하여 미국 일본과는 불화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쪽으로 기우는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한국 내 두 흐름-해양화와 대륙화-의 대결은 舊韓末의 재판이 되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도 있다.

10. 대한민국의 내일: 자유통일을 넘어서 일류국가 건설로

*한국의 國力 지표: 국내총생산은 세계 12위(인구 10억인 인도와 비슷하다). 수출은 세계 12위, 수입은 14위. 에너지 총소비량은 세계 10위, 1인당 소비량은 16위. 粗鋼생산량은 세계 5위. 선박 건조량은 1위.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6위. 전자제품 생산량은 3위. 인터넷 이용자수는 세계 3위. 개인컴퓨터 보유율은 7위. 인구는 세계 26위.

*國力은 선진국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國力에 걸맞는 지도층의 교양과 능력,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신감, 반란집단인 북한정권에 대한 엄정한 자세와 북한동포들에 대한 동정심이 갖추어지면 자유통일도, 조국 선진화도 가능하다. 물질적 근대화 이후에 정신적 근대화(합리화, 과학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김정일 정권의 선동과 방해가 작동하고 있어 선진화가 늦추어지고 있다. 조국 선진화는 김정일 집단이란 방해물을 치우지 않고는 달성될 수 없다. 우리 민족사의 발전방향은 자유 복지 안전의 조건과 인간의 존엄성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國政에 참여하는 계층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보하여 왔다. 북한의 오늘날 생활 수준은 조선조 500년에서도 최악이었던 철종 고종 시절보다 못하다. 민족사의 발전 원리는, 역사발전과 국민국가건설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2천만 북한동포들을 구출하고 이들을 역사만들기에 동참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꿈 꾸는 대한민국의 모습

히틀러는 국가주의자, 처칠은 애국자라고 구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적을 증오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애국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正義를 독점하는 위선자들에게서 사명감(왜곡된)은 느낄 수 있지만 사랑은 느낄 수 없다. 한국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경쟁하고, 남북대치상황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숙명을 갖고 나온 셈이다. 이 경쟁과 투쟁이 인간애와 애국심으로 바탕으로 하여 이뤄져야 한다.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관심, 북한동포에 대한 동정심과 김정일에 대한 분노,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따뜻한 마음, 그런 마음들이 모인 국가. 이와 같은 국가가 존재해본 적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비슷한 국가를 우리 민족사에서 찾는다면 삼국통일기의 신라일 것이다. 唐將 蘇定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한 다음 귀국하여 唐帝 고종에게 귀국신고를 하니 고종은 이렇게 물었다.
'왜 내친 김에 신라마저 정벌하지 않았는가.'
蘇定方은 이렇게 답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忠義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감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하, 즉 국가엘리트들이 忠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나라(즉 헌법)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짐, 사랑, 忠義, 받듬, 섬김-위의 짧은 문장 속에 등장하는 이런 키 워드가 충만한 신라였기 때문에 삼국통일과 對唐결전으로써 한반도를 지켜내어 민족의 보금자리를 가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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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대통령 이야기
-두 위대한 대통령, 두 부지런한 대통령, 두 반역적 대통령,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 두 과도기 대통령.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두 명의 위대한 대통령(李承晩, 朴正熙), 두 명의 부지런한 대통령(全斗煥, 盧泰愚), 두 명의 반역적 대통령(金大中, 盧武鉉),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金泳三), 그리고 군사변란을 묵인했던 두 과도기 대통령(尹潽善, 崔圭夏)이 있었다.
李承晩 건국 대통령은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이념 위에 세우고 6.25 휴전기에 미국을 압박하여 韓美동맹이란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그는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좌익의 공격목표를 사전에 소멸시키고 민주주의 교육으로써 '不義와 不正에 저항할 줄 아는 젊은 세대'를 키웠다. 이 젊은 세대가 4.19 학생혁명으로써 李대통령을 몰아냈으니 그는 자기성공의 희생자였다.
미국의 名門 프린세턴 대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된 그는 동서양의 교양을 한 몸에 통합한 카리스마와 세계大勢를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으로써 한국을 해양세력권에 묶어놓고 세계사의 主流 속에 집어넣었다. 1948년 건국 당시 한국인중 知的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었다.

아시아에서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용적인 중국사람들이 공산화된 것. 이는 毛澤東의 군사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또 다른 기적은 관념론의 포로였던 한국인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1920년대에 이미 간파했던 李承晩의 지도력에 힙입은 바 크다. 李承晩을 매개로 하여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속으로 들어와 건국이념이 된 것이다. 2007년의 한국이 세계 10大 경제력, 26위의 삶의 질을 가진 선진국 수준의 나라가 된 데는 李 대통령이 만든 자유와 동맹의 울타리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역사상 800년만에 처음으로 효율적인 군사문화를 도입하여 후진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린 '근대화의 旗手'이자 '시스템 운영의 鬼才'였던 朴正熙는 6.25 전쟁의 産物이다. 이 전쟁으로 한국 사회의 最强집단이 된 국군장교단이 무능한 文民지배층을 교체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다. 朴 대통령은 '서구식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면서 민주주의를 한국식으로 변형하여 근대화를 성공시킨 진정한 주체사상가였다. 그는 富國强兵策으로써 민주주의의 물질적, 제도적, 계급적 토대를 만들었다.

이른바 유신독재로써 정치코스트를 최소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해갔던 1970년대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했고 이것이 성공하여 한국을 重量級 국가로 올려세웠다. 1979년에 들어서서 朴正熙式 근대화의 産物인 도시중산층이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끼고 지식인 및 학생들과 손 잡고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고(釜馬사태), 이것이 朴정권의 실력자 金載圭 정보부장을 변심시켜 대통령을 사살하게 만들었으니 朴正熙 또한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이끄는 약5000명의 혁명군이 서울에 진입하였을 때 張勉 총리는 달아나 연락이 두절되었다. 군통수권자이던 尹潽善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의 진압군 동원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內戰을 막고 군사혁명의 성공을 보장했다. 朴 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군부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全斗煥 장군이 12.12 군사변란을 일으키자 崔圭夏 대통령도 流血사태를 걱정하여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尹, 崔 두 대통령은 이 조치로 해서 비판을 받았으나 북한군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군을 동원하여 국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全斗煥, 盧泰愚 두 대통령은 장교 시절부터 朴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힘으로써 혼란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12.12사건, 광주사태 등 流血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민주화 약속을 지켰고 세계1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며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다.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으로써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했다. 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는 金泳三-金大中의 분열을 틈타서 당선되어 전면적인 민주화를 주도했다. 그는 공산권 붕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중국, 소련, 동구국가들과 수교함으로써 북한을 후방에서 고립시켰고 신도시 건설, 인천공항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적극적으로 했다. 盧대통령은 또 3당 合黨을 통해서 보수연합정당인 민자당을 만들고 金泳三씨를 후계자로 밀었다.

안정적인 보수연합구도의 지원하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金泳三 대통령은 좌파적 영향하에 들어가 보수연합구도를 깨고 한국 현대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함으로써 좌파득세로 가는 카피트를 깔았다. 그는 보수를 자칭했으나 사실상 좌파적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의 분열적 정책이 金鍾泌의 충청도 세력과 대구-경북세력을 民自黨에서 이탈시켰고 外換위기를 불렀다. 이런 정책실패와 보수분열 구도하에서 金大中이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좌익활동가 출신 金大中은 대통령이 된 이후 좌경적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현대그룹을 통해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낸 끝에 2000년 6월의 평양회담을 성사시켰다. 비밀송금으로 김정일에게 약점이 잡힌 신세가 된 그는 김정일의 對南적화전략지침을 그대로 수용한 6.15 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을 赤化의 길로 내몰았다. 金大中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2년에 당선된 盧武鉉 대통령은 金大中의 反헌법-反국가적 노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위선적 평화론의 전도사가 되었고, 金正日의 對南赤化전략의 핵심인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한국을 북한 정권의 인질로 전락시킨 끝에 北의 戰犯집단이 핵무장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金日成이 일으킨 민족반역적 6.25 전쟁으로 약300만, 金正日의 사회주의 실패로 약300만 명이 죽음으로써 공산주의의 본성을 보여주었는데도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를 통해서 민주투사로 위장한 親김정일 세력을 정권담당자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히틀러를 뽑은 것과 같은 실수를 한 셈이다. 金泳三 이후 14년간 한국정치는 조선조의 朋黨정치 시대로 회귀했다. 국가엘리트層이 약해지고 지역, 계급적 이해관계로 國論이 분열되면서 국민들의 정신도 많이 망가졌다. 다행히 民間부문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여 기우는 나라를 버티고 있다.

각성하고 있는 한국의 유권자들이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반역적 좌파정권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어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좌파종식에 성공한다면 한국은 자유통일을 너머서 一流국가를 건설할 것이고 이는 非서구국가로선 일본에 이어 두번째의 위업이 된다. 2007년은 민족사의 결정적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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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짧은 자서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나는 罪人이 아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국민국가의 간판을 달자말자 남침전쟁으로 얻어맞아 國土는 초토화되고, 위대한 건국 대통령은 학생혁명으로 쫓겨났다. 민주당 정권은 1년만에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제2의 월남화를 노린 김일성의 지령으로 청와대가 북한특공대의 기습을 받았다. 그 6년 뒤 대통령의 부인은 김정일이 보낸 자객의 총을 맞아 죽고 그 5년 뒤 근대화의 기수는 자기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군사變亂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미얀마로 출장갔던 대통령 일행을 노린 김정일의 테러로 17명의 장관급 엘리트가 죽고,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김정일이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는 바람에 중동근로자 등 115명이 죽어갔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무역흑자국을 만들고 민주화 약속도 지킨 두 전직 대통령이 내란죄로 몰려 2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멀쩡한 국립박물관이 친일파라도 되는 듯이 건물에 사형을 선고하여 때려부순 대통령의 失政으로 국가不渡 위기로 몰린 나라는 IMF에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도 민주세력으로 위장한 좌파정권을 2代에 걸쳐 등장시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反美선동과 對南적화전략에 동조하니 국가는 분열되었다. 그 틈을 타고 김정일이 핵실험을 해도 韓美동맹은 반신불수 상태이다. 좌파정권은 각종 위원회를 통해 간첩을 애국자로 만드는 등 국가이념을 바꿔치기 하여 사법부의 권위를 파괴하고 있다. 민족반역자에게 영혼을 판 두 좌파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패가 됨으로써 올해 大選은 내전적 상황에서 치러질 것으로 예측되는 아, 대한민국!

그런데 어찌하여 이 나라는 지금 세계 약200개 국가중 삶의 질이 26위로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해 있고, 사람들은 살빼기에 목숨을 걸고,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가 하면, 남자의 평균키가 아시아에서 가장 큰 키가 되고, 공업에서 세계 4강, 경제력 및 군사력 부문에선 8강을 노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연간 成人인구의 약3분의 1인 1200만 명이 비행기나 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가? 이것이 기적인가, 꿈인가, 현실인가?
한강의 기적은 공짜가 아니었다.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라면 국민수준보다 너무나 위대한 李承晩, 朴正熙가 대통령이 된 것이 기적이요, 1950년 6월25일 남침 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에게 '그 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내뱉으면서 30초만에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구하려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 것이 기적이다. 이 결단으로 약5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었다. 근면성실한 국민성, 머리 좋고 강건한 민족적 자질, 이승만 대통령이 간판을 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율과 경쟁 원리, 박정희가 도입한 능률적인 군사문화, 그리고 미국의 결정적 지원이 합쳐져서 우리의 실력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룩했다.
김일성, 김정일 일당과 이들에게 넘어간 반역자들의 집요한 공작, 암살, 침투, 선동, 배신, 훼방에도 끄떡 않고 대한민국은 전진했고 국민들은 한 손에 망치 들고 한 손에 총을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고마움을 모르는 김대중, 노무현 세력은 이런 기적을 만든 대한민국의 歷代 지도자와 기성세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조국의 과거와 약점을 캐기 위하여 공권력과 예산을 집중 투입하였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지난 60년간 지도층은 국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는데 기적적인 대한민국은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느님이 만들어서 땅위로 내려보냈단 말인가? 북의 김일성 김정일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남한으로 선물했단 말인가? 아니면 김대중씨가 혼자서 땀을 흘려 만들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노무현씨가 그 말 많은 입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기적 같은 대한민국은 있는데 애국자도 영웅도 보이지 않고 온통 독재자, 守舊세력, 냉전세력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반역자들이 만든 나라란 결론인가?
대한민국은 이제 사과할 것도 미안해 할 것도 변명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이런 나라를 만든 주인공들은 역사 앞에, 세계 앞에, 무엇보다 김정일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자랑한다. 우리는 현대사를 긍정한다. 우리는 선배세대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를 다 쓸어안고싶다.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땅과 이 하늘을 사랑한다. 당당한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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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친북좌파 종식 3.1 국민대회 연설문 원고

국민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참으셨습니까?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습니까. 남북한의 좌익들. 이 천하의 개망나니들이 우리가 세우고 가꾸어온 대한민국을 분탕질하고 난도질하고 헌법을 짓밝고 국가이념을 바꿔치기하고 간첩을 감싸고 국군포로와 탈북자들을 외면하고 한미동맹을 사실상 해체하려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얼마나 속이 상했습니까?
국민 여러분, 그러나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대한민국은 오늘 이 자리에서 반격을 시작합니다. 국민들이 각성하고 여론이 바뀌자 겁을 집어먹은 친북좌익들이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열린당은 政權사기단으로서의 역할이 끝났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부도를 내어놓고는 위장폐업한 뒤 야반도주하여 신장개업하는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국민들을 속이려는 계략입니다. 노무현씨도 어제 탈당하여 이 야반도주의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자기가 몰던 대한민국이란 배에 불을 질러놓은 선장이 승객들은 남겨놓은 채 구명정을 타고 달아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드디어 찬스가 왔습니다. 우리 손으로 이 불을 끄고 좌익난동을 진압하고 국가를 정상화시킨 다음에 자유통일로써 북한동포를 해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류국가를 건설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지켜낼 때 흘린 피, 산업전사들이 흘린 땀, 민주화 시대에 흘렸던 눈물. 이 피 땀 눈물이 만들어낸 것이 자유통일과 일류국가의 꿈입니다. 이 꿈을 사기꾼들에게 빼앗기지 맙시다. >

국민 여러분, 행동으로 새 세상을 만듭시다. 국가정상화, 자유통일, 조국 선진화로 달려가는 길을 막고 있는 저 장애물들을 우리 손으로 치워버립시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올해 대통령 선거,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신을 차리고 속지 않으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속으면 죽고, 정신차리면 삽니다. 속느냐, 죽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총반격이 시작된 오늘 맹세하고 다짐합시다.
“우리는 안 속는다” “우리는 다시는 안 속는다” “우리는 절대 안 속는다”

먼저 저들의 말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은 진보를 자처합니다. 세계적으로 진보란 말이 정치적으로 쓰이면 좌익 또는 공산당이란 뜻입니다. 저들은 진보로 위장한 퇴보세력입니다. 저들은 민족을 앞세우나 민족반역자이고, 평화를 노래 하나 戰犯집단의 졸개들이고, 입만 열면 개혁을 설파하나 그들의 정체는 부패하고 무능한 守舊기득권세력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은 친북반미좌익들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친북좌파정권을 끝장내는 일이 최고의 개혁입니다.

천하의 개망나니 김정일에게 굴종해온 저들은 대한민국까지 끌고 들어가서 저 민족반역자 앞에 무릎을 꿇리려 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죽든지 친북좌익들이 사라지든지 양자택일뿐입니다.
저들은 지역감정과 계층갈등을 먹고사는 수구반동세력입니다. 선거철을 맞아 저들은 또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 서울, 지방을 서로 싸우게 하고 분열시켜서 표를 얻으려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59년 전 국민국가로 출범했습니다. 지역, 계급, 종교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안에선 모두가 국민입니다. 전라도도 대한민국이요, 경상도도 대한민국이요,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 서울이 다 대한민국, 우리 조국, 우리 겨레, 그리고 같은 국민입니다.

저들 친북세력의 지역감정 부추기기와 양극화 선동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敵과 同志를 분명히 가려야 합니다. 한반도에선 이념이 가장 큰 전략입니다. 김정일 편인가, 대한민국 편인가. 독재편인가, 민주주의 편인가, 학살자 편인가, 자유의 편인가, 압박과 설움의 편인가, 인권과 번영의 편인가. 태도를 분명히 합시다. 저들은 김정일 편, 학살자 편, 독재자 편, 전쟁광 편, 반역자 편입니다. 우리는 正義의 편이고 저들은 不義의 편입니다. 자유세력은 정의파이고 친북좌익들은 비겁자들이고 위선자들입니다.

대한민국에 모처럼 기회는 왔지만 대동단결하지 않으면 이 찬스를 놓칩니다. 모든 국민, 특히 애국세력, 한나라당,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씨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과 대한민국의 적은 김정일과 조총련과 친북세력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동지이고 친구이고 경쟁자들입니다. 친구를 敵처럼 공격하고 敵인 김정일을 친구처럼 감싸지 마세요. 적과 동지를 분명히 가리고 적과는 결투하고, 동지와는 협력과 경쟁을 하세요! 이명박씨의 적은 박근혜씨가 아니고 김정일입니다. 박근혜씨의 적도 이명박씨가 아니고 김정일입니다. 민족공멸의 핵무기를 손에 든 김정일은 이명박씨, 박근혜씨, 그리고 대한민국의 主敵입니다.

남북한 무장대치상황의 본질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선과 악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입니다. 300만 동족을 굶겨죽이고, 40만 양심수를 강제수용소에서 때려죽이고, 서울을 겨냥한 핵폭탄을 개발한 김정일이야말로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입니다.
그런 김정일과 대한민국이 싸우는 데서는 중립도, 中道도 중간도 없습니다.
건국 대통령이 지금 지하에서 울부짖고 계십니다. 생전에 그분이 하신 말씀이 들려옵니다.
“대한민국이 너희를 자유민으로 만들었으니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쓰지 말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렇습니다. 속으면 노예가 되고 정신차리면 자유를 얻습니다. 무릎 꿇으면 노예가 되고 싸우면 자유민이 됩니다.
대한민국은 죄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과 함께 전진합시다. 대한민국과 함께 돌격합시다. 대한민국과 함께 승리합시다.
대한민국이여 일어나라, 대한민국이여 속지말라, 대한민국이여 단결하자! 대한민국 만세! 자유통일 만세! 국군만세! 한미동맹 만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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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반도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대한민국헌법에 담긴 민족자결주의의 열정을 동원하면 우리가 한반도 문제해결의 주인공이 된다.
趙甲濟

한반도의 격변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몇 가지 原則的인 觀点이 定立되어야 한다. 그 觀点은 가치관과 세계관과 사실관계에 입각할 때 정확해진다. 이런 관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 상황을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樂觀과 悲觀사이를 오고가면서 혼란에 빠진다. 예컨대 2005년 9월19일 北京의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담은 합의문이 나왔을 때 나는 즉각 나의 인터넷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 합의문은 지켜지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글을 썼다. 나의 예상보다도 일찍, 즉 바로 다음날 북한은 “輕水爐를 먼저 지어주어야 핵시설 폐기에 들어간다”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북한정권의 속성은 馬賊團이다. 국제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고 판단할 때만 지킨다. 약속을 깨는 데 대해서 아무런 양심의 苛責이 없다. 9.19 합의문은 김정일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가할 罰則이 없었기에 휴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金正日에 대한 觀点이다.
金正日은 非이념적 이기주의자이다. 그의 행태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들과 북한정권내에서 그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 金正日은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민족, 북한노동당, 북한주민, 북한체제 등 그 어떤 집단이나 他人을 위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과 이해관계에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의사 결정도 獨斷한다. 혼자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의 이념이라면 이념이다. 한반도를 理念무장대치상황으로 몰아간 자가 本性은 非이념형 독재자인 것이다. 理念이란 가치관이므로 그는 가치관이 없는 독재자, 양심이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후계자 문제에 관심이 없다. 후계자를 내세울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 다른 움직임이 없다. 자신이 고민해서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어준다는 생각만 해도 억울한 모양이다. 그는 북한정권이 어차피 자기 代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그는 측근들이 통일 이야기를 하면 화를 낸다고 한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 즉 자신의 안전이 급선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과 권한이 침해받거나 도전받는다고 판단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미국이 작년 9월 金正日의 범죄자금을 취급해온 마카오 은행과 미국은행 사이의 거래를 금지시키자 국제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對北거래를 중단하는, 이른바 금융제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직접 북한을 상대로 취한 제재가 아닌데도 국제금융을 지배하는 미국의 방침에 대해서 국제금융기관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때문이다.
金正日이 이 조치에 발끈한 것은 자신의 돈줄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한 것도 무슨 大戰略이 있어서가 아니고 자신의 비밀金庫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한 지극히 개인적인 도발이고 투정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 CIA의 북한담당 분석관 출신 한 인사는 '金正日은 후계자를 절대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와 측근들은 가이아나의 人民寺院 광신도들처럼 동반自爆과 集團自殺로 종말을 고할 것이다'고 예언했다.
金正日은 그 어떤 인간적 배려도 하지 않는, 同情心과 利他心이 철저히 배제된 글자 그대로 악마라고 단언하는 기독교인 對北전문가도 있다.
金正日은 2000년 6월 최소 5억 달러의 금품을 받고서 남북수뇌회담을 金大中 당시 대통령에게 판 사람이다. 金大中은 5억 달러중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냈다. 2007년에 盧武鉉-金正日 회담이 열리지 않게 된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盧 대통령이 金正日에게 현금을 뇌물로 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正日은 權力과 金力에 의해서 유지된다. 金力의 핵심은 39호실 비자금이다. 2005년 9월부터 시작된 미국에 의한 간접적인 對北금융제재(미국은 북한정권을 상대로 금융제재를 취한 적이 없다. 북한정권의 不法자금을 관리하는 외국은행과 미국금융기관의 거래를 규제한 것뿐이다)는 金正日의 急所인 金力을 친 것이다.
2007년에 들어서 미국 정부는 북한정권과 직접 대화를 하고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묶여 있는 북한자금의 일부를 풀어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북한측도 영변 원자로의 가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다시 받겠다고 나선 듯하다. 미국정부는 극히 일부인 合法자금을 풀어주더라도 '金正日비자금遮斷작전'의 큰 틀은 결코 허물지 않을 것이다. 2006년에 있었던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 이에 대한 유엔안보리 제재결의, 중국의 對北압박 등은 미국이 金正日의 돈줄을 쥐어짠 데 대한 金正日의 반발과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징이었다. '金正日비자금遮斷작전'이 거둔 성과이기도 했다. 미국이 유일하고 가장 효과적인 이 전략적 압박수단을 놓아버릴 리는 없다. 북한은 식량이 바닥나는 이른바 春窮期를 맞아 한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식량과 비료를 지원받기 위해서 전술적 후퇴를 하겠지만 핵무기는 절대로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金正日비자금遮斷작전’은 김정일 한 사람만을 표적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본질을 直擊한 것이므로 효과가 크다. 이를 잘 활용하면 金正日을 북한주민 및 지배층으로부터도 고립시킨 뒤 격파할 수 있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에 나온 유엔안보리 결의문이 사치품의 對北禁輸조치를 포함시킨 것은 金正日에겐 큰 스트레스이다. 金正日을 굶겨야 북한주민들이 굶지 않을지 모른다.

金正日에 대한 또 다른 핵심적 觀点의 하나는 그가 바로 대량살상무기란 점이다. 체코 전 대통령 하벨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의 아우슈비츠보다도 더 가혹한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지난 30년간 약40만 명이 학살당했다. 하벨은 金正日의 대학살이 北核보다 더 위험한 것이므로 이를 유엔안보리에서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김정일은 집단농장의 개혁이나 군사비 지출의 삭감, 해외비자금 사용 등 여러 가지 구제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의 편의를 위해서 그 구제수단을 쓰지 않음으로써 북한주민 수백 만명을 사실상 굶겨죽였다. 그는 모자라는 식량을 골고루 나누지 않고 충성집단에만 배급하고 불만계층과 동요계층에 대해선 배급을 중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적대계층을 숙청하는 도구로 飢餓를 이용하였다.
人命손실을 기준하면 金正日은 한국전쟁을 북한지역에서 한번 더 일으킨 셈이고 히로시마급 원자폭탄을 同族을 향하여 수십개 投下한 셈이다. 핵폭탄 제조와 북한동포 학살이란 2大 反인류범죄의 張本人은 金正日이다. 그가 바로 핵무기보다도, 히틀러보다도 더 무서운 대량살상무기이다. 金正日은 2100만 북한인민들이 자신을 決死擁衛(결사옹위)하는 ‘인간총폭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류역사상 인민 모두를 언제든지 폭파시킬 수 있는 폭탄으로 만든 유일한 독재가가 金正日이다. 북한공작원은 추격을 받고 죽게 되면 金正日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電文을 보내고 전원 자살한다. 金正日이란 대량살상무기의 해체 없이는 핵무기의 해체도 대학살의 중단도 불가능하다. 對北문제의 본질은 金正日 제거인 것이다.
金正日의 딜레마는 核을 포기해도 죽고 核을 껴안고 있어도 죽는다는 점이다. 핵무기를 포기한 金正日은 이빨과 발톱이 빠진 호랑이다. 국제사회에서뿐 아니라 지배층안에서도 경멸당하고 쫓겨날 것이다. 이를 잘 아는 그는 결국 핵무기를 껴안고 自爆하든지 自滅하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7년과 2008년의 한반도는 큰 위기상황 없이 지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은 2008년 北京올림픽에 방해가 되는 金正日의 불장난을 막으려 할 것이다. 미국 공화당 정부는 2008년 대통령 선거 전에 北核문제 해결을 위한 可視的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2008년에 미국과 중국에서 예정되어 있는 두 행사는 金正日에 대한 압박을 더할 지렛대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빅딜(Big Deal)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金正日과 핵무기를 동시에 처리하고 새로 등장한 북한정권을 중국이 親中化하여 鄧小平식으로 개혁 개방하게 만든다는 諒解이다.
金正日도 앞으로 2년을 위장평화공세와 내부단속으로 버티어내면서 핵보유국의 지위를 기정사실로 만들려 할 것이다. 김정일과의 대화나 약속은 실천과는 상관이 없다. 정치인들은 그러나 합의를 위한 합의를 해놓고 평화가 이뤄졌다고 선전하는 버릇이 있다.

한반도 사태의 주인공은 그러나 미국도 중국도 아니다. 4800만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영토, 북한정권을 反국가단체, 북한동포를 해방시켜야 할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에 담겨 있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한국인들이 신념화할 때 金正日 제거를 핵심으로 하는 북한문제 해결은 대한민국의 몫이 된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선 盧武鉉과 金大中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이 몰락하고 정통세력이 미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2007년 大選승리의 여파로 2008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선 좌파가 정치적으로 소멸할 가능성마저 보인다. 親北좌파의 退潮는 大勢이다. 작년 초까지 한국사회는 좌파정권에 의한 親北좌경화와 이에 대응한 國民大覺醒 흐름이 치열하게 경쟁했다. 작년의 5.31 지방선거에서 盧武鉉의 與黨이 사상최악의 참패를 한 이후 國民大覺醒 흐름이 大勢化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어리다. 나이가 60세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민주주의는 독재자뿐 아니라 선동꾼과 거짓말쟁이에 의해서 醜行당하기 쉽다. 지난 15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는 民主鬪士 출신 세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에 의하여 농락당하였으나 민주주의의 본질을 잃지는 않았다.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私有재산권이라는 3대 조건이 작동하고 있다. 이 힘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좌파정권이 교체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체질이 강화될 것이다. 세어진 민주주의의 힘은 北進하여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는 자유통일의 방향으로 작용하게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자유통일의 본질적 의미는 노예상태의 북한동포를 해방하여 한국사람처럼 自由民으로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人權이다. 한반도의 인권문제는 金正日에 의한 북한인민 대학살을 어떻게 중단시킬 것이냐이다. 이는 핵개발 중단보다도 더 시급한 사안이다. 이 대학살을 중단시키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이고 통일의 목적인 것이다. 필자가 金大中과 盧武鉉에 분노하는 이유도 이들이 人權을 팔아 대통령이 되었으면서도 人權을 말살하는 편에 섰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金正日과 반역자와 자기 패거리들의 인권만 보호했고, 북한주민 탈북자 납북자 미귀환 국군포로의 人權을 외면했다. 이들이 소중하게 여긴 인권은 학살자와 반역자와 부하들의 인권이었다.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오늘 이 순간에도 맞아죽고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의 인권은 이들에겐 인권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적 가치에 대해선 증오심을 품고 그런 생각을 정책에 투영시켜온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계급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분열적이고 수구적인 人權色盲者였다.
盧 대통령은 좌파적 가치관을 외교에도 투입하여 親金正日, 親中國, 反美, 反日정책을 취함으로써 한국을 北核 위기 때 무력한 구경꾼으로 만들었다. 金正日의 대학살에 방관자가 된 그는 金正日의 핵개발에 대해서도 傍助者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金正日 金大中 盧武鉉 세 사람은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조종간을 정상적인 대통령이 다시 잡게 되면 한국인의 底力과 資源이 金正日의 無力化를 위해 동원될 수 있다. 국민총생산을 기준으로 하면 북한은 한국의 100분의 1이다. 2007년 한국의 수출액은 3000억 달러를 넘었는데 북한은 그 200분의 1이다. 한국의 5일간 석유소비량이 북한의 1년치이다. 이런 경제력이 國民大覺醒의 大勢化에 의하여 北韓住民들에 대한 동정심과 金正日에 대한 분노의 힘으로 轉換된다면, 또 韓美동맹과 韓日우호관계가 회복된다면, 그리하여 자유를 공통가치로 하는 韓美日 해양문화권의 협력이 이뤄진다면 2008년은 金正日 정권의 사실상 종말의 해가 될 것이다.
金正日은 2006년 11월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것을 보고 부시의 對北강경정책이 무디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민주당 클린턴 정부 시절국방장관을 지냈던 페리는 北核 시설 폭격론을 주장하는 등 민주당이 오히려 더 공격적이다.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의 의회가 對北강경 노선으로 경쟁할지도 모른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金正日이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중간한 핵실험을 했다고 해서 당장 긴급한 군사적 위협으로 커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이유에서 金正日의 목을 세게 졸라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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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나


한반도에서 정통국가는 하나뿐이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국가도 하나뿐이다.
趙甲濟



1. 대통령들까지도 反헌법 발언

우리나라 식자층 인사들 가운데서, 또 대한민국 수호 세력 인사들 가운데서도,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동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유엔 동시 가입, 6.15 남북정상 회담이 있었고 남북간 교류가 이뤄지고 있는데 어떻게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金大中 전 대통령도 그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고 지금 민주노동당은 당 강령을 통해서 국가연합-연방제 통일방식을 천명하여 북한을 국가로 본다고 명시하고 있다. 盧武鉉 대통령도 국가연합식 통일방안을 언급했다. 헌법을 수호할 책임을 가진 이들까지도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우리 헌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더할 것이다.

2. 우리 헌법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말라고 명령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명문으로 규정한 것은 물론 헌법 제3조이다.
<제3조(영토):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附屬島嶼로 한다>
이 조항에 따라서 북한정권은 한반도의 북반부를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정부를 참칭하며 대한민국을 변란시키려 하는 反국가단체, 즉 반란집단이 된 것이다.
우리 판례는 '이 3조에 따라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의 주권과 부딪치는 어떤 국가단체도 인정할 수 없다. 비록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주권국가로 존속하고 있고, 우리 정부가 북한당국자의 명칭을 쓰면서 정상회담을 제의하였다 하여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고권을 침해하는 반국가단체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 남북관계의 변화가 이 조항의 해석에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명백히 했다.

우리 헌법은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언론은 북한 정권, 북한 당국이라 부른다.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북한 국민이라고 하지 않고 북한 주민이라고 하는 이유도 헌법 3조를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북한을 무엇으로 인정하는가. 대한민국은 북한을 정치권력의 실체, 즉 정권으로는 인정한다. 그래서 대화도, 교류도, 협력도 하는 것이다. 교류, 협력도 하는데 왜 국가로 인정해선 안되는가. 국가는 역사적,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3. 민족 정통성은 무엇인가.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국제적 합법성, 그리고 통일의 의지를 담고 있는 우리 헌법의 뇌수와 심장이다. 우리 민족은 서기 7세기 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한 후 후삼국 시대와 남북 분단 시대를 빼고는 1민족1국가의 전통을 이어왔다.

우리 민족은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통국가는 1개 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독일 민족은 1871년에 프러시아가 통일할 때까지 많을 때는 수백개, 적을 때라도 수십 개의 도시국가를 갖고 있었다. 이런 독일 민족도 東西 분단 상태를 극복하여 통일로 나아갔는데 하물며 1민족 1국가가 민족의 체질이 된 한반도에서 1민족 2국가를 인정한다는 것은 민족의 전통 가치관, 즉 민족정신과 생리에 반하는 것이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당연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통국가는 하나여야 한다는 1000년 이상 걸려서 만들어낸 민족사의 합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남북관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남북한 어느 체제가 민족사의 정통국가인가, 즉 어느 쪽이 한민족의 대표선수인가를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란 점이다. 이런 본질에 대해서는 한국뿐 아니라 북한 정권도 적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북한정권의 對南전략 핵심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온갖 전술과 전략이다. 그들이 우리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권력실체로는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식민지로 간주하고 있다든지,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든지, 금강산 관광객들이 한국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두 민족정통성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4. 북한은 왜 국가 자격이 없나

민족 정통성 싸움이란 한 집안의 嫡者와 庶者를 가르는 싸움과 같다. 어느 종교에서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것과 같다.
정통성을 부여받은 정권에게 씌어주는 월계관의 이름이 '국가'이다. 국가는 왜 정권이나 단체와 다른가. 국가는 단체와 다른 고도의 도덕성을 지닌다. 국가가 국가의 자격을 지니려면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국제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북한정권은 태어날 때부터 소련 정보기관의 사생아였다. 선거를 통해서 주권자인 국민이 만들어낸 대한민국과 달리 북한은 소련 정보기관이 시나리오를 쓰고 가짜 김일성을 주연배우로 내세워 제조한 괴뢰정권이었다.

북한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자유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 과정을 거부함으로써 유엔의 승인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국제규범에 위반하는 침략전쟁, 납치, 테러, 위조지폐 유통, 마약 밀조 밀수출 등 온갖 범죄행위를 자행함으로써 국가의 자격을 실질적으로 상실했다. 현대 정치용어로써 '국가'라고 할 때 그것은 국민국가, 즉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체제를 想定한다. 북한정권은 그 속성이 수령국가, 마적단, 마피아이다. 국가의 조건을 원천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가장 결정적 결격 사유는 1995년 이후에 만들어졌다. 북한 정권은 식량이 모자라자 체제 충성분자들 약500만 명에게만 식량을 공급하고 나머지 1700만 명에게는 배급을 중단하여 이 계층에서 약3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이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학살을 능가하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인종학살, 계급학살이었다. 식량의 생산과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주의 정권이 평양사람, 군인, 노동당 간부, 국가보위부원, 사회안전부원 등에게만 식량을 공급한 것은 체제 유지에 필수요원이 아닌 사람들은 굶어죽어도 된다, 또는 이 기회에 굶어죽는 것이 낫다는 정책의 반영이었다.

金正日은 대기근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역이용하여 체제유지에 짐이 되는 계층을 청소해버리려 한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통계도 있다. 북한 정권이 분류한 성분별 인구에서 동요계층 또는 적대계층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사자와 영양불량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했고 충성분자들은 안전했다는 통계가 그것이다(나치오스가 쓴 [북한의 대기근], 아래 참고자료 1 참조).

북한정권은 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임무를 포기하였을 뿐 아니라 조직적인 기아학살을 자행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자격뿐 아니라 사회주의로서의 자격도 상실했다(배급을 포기하는 사회주의는 없다). 이 기간에도 金正日은 호화 식단을 유지하여 일본인 전속 요리사는 김정일 곁에 있었던 12년간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김정일의 요리사]). 그의 식단은 중앙 아시아, 동남마, 일본, 파리에서 공수된 포도, 참치 뱃살, 아이스크림, 수박, 떡으로 채워진다. 그는 24일간의 기괴한 시베리아 철도 여행중에도 평양에서 공수해온 요리를 먹었다.
이런 김정일 정권에 대해 '국가'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물론이고 사실적으로도, 정치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5. 그러면 왜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자는 말이 나오나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자고 하는 세력은 남한의 좌파들과 일부 우파세력인데 의도는 물론 다르다. 좌파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합법국가인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마적단 정권 수준으로 격하시키기 위하여 북한을 남한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자고 한다. 盧武鉉 대통령은 대한민국 수립을 金日成 정권과 같은 [분열정권 수립]으로 본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국가연합식 통일]이란 말을 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한국의 공식 통일방안은 남북 연합이지 [국가연합]이 아니다. 남북 연합은 남한도 북한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상호 협의체를 만들어 교류하자는 정도의 통일안이다.

국가 연합은 상호 국가로 인정한 뒤 연합체를 만들어 평화공존하면서 최종적인 통일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되는 발상이자 反통일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한 다음에는 무력통일이 아니면 통일을 '의무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국가연합 발상은 평화통일의 의무를 규정한 헌법 4조와도 충돌한다. 국가연합 발상은 통일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 정도의 사안으로 격하시킨 사실상의 통일 포기 논리이다.

이 국가연합을 주장하는 사람이 내세우는 구체적인 안을 보면 북한정권이 주장해온 對南적화전략으로서의 연방제안에 가깝다. 대한민국 정부를 지방정부로 격하시킨다든지 민족 정통성의 말뚝이 박힌 서울을 수도로서 포기하고 개성 근방에 새 수도를 만든다든지 하는 발상이 국가연합이란 간판 아래서 진행된다면 이는 진정한 국가 연합도 아니고 위장된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이라고 보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당수 보수세력 인사들은 그 이유로 유엔 동시 가입과 동서독 사례를 든다. 유엔에 가입했으니 남북한 모두 국가로 인정받은 것이란 논리이다. 이는 남북 관계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유엔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남북한 상호간의 문제이다. 남북한 어느 쪽도 통일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할래야 할 수가 없다. 유엔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고 해서 한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님은 남북한 기본합의서의 前文이 잘 정리해 둔 대로이다. 이 前文은 남북한 관계를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정리한 것이다.

체제대결에서 밀린 동독은 흡수통일을 두려워하여 서독에 대하여 兩獨 관계를 국가간의 관계로 설정하자고 졸랐다. 서독은 이를 거부했다. 동서독간에는 수상 레벨의 회담은 자주 있었으나 국가 원수간의 회담은 없었다. 兩獨간에는 국가 사이의 예처럼 대사 교환도 없었다. 서독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서독은 동서독 관계의 업무를 외무부가 아닌 총리실과 내무부가 맡아 했다. 서독은 또 기본법(헌법)에다가 '1937년 현재의 독일제국 영토하의 독일국적 소유자는 독일국적자로 간주한다'고 하여 동독주민들을 자국민으로 대우함으로써 동독을 독립된 외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동방정책을 추진한 브란트 정부는 동독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동서독은)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고 못박았다(아래 참고 자료 2 참조).

서독은 동독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을 흡수 통일할 때 국제법의 제한을 받지 않았고 기존의 서독 헌법을 고치지도 않고 그 헌법체제안으로 동독을 통합할 수 있었다. 동서독은 상호간 평화공존하면서 서로를 권력실체로서 인정했을 뿐 서독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이 점을 놓치면 독일 통일의 핵심을 잃게 된다. 우리가 북한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인정한다면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도 통일을 추구할 수가 없고, 탈북자를 자국민으로 간주하여 구출하는 데도 어려움이 생긴다.

6.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지켜가는 짐이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내려놓을 수는 없다.

7.4 공동성명, 6.15 공동성명에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 담겨 있다고 해도 그 말들이 한반도의 조건과 대한민국 헌법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방향으로의 헌법 개정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유일합법성, 그리고 통일의무를 포기하는 국체변경에 해당하므로 헌법개정으로써도 할 수 없는 원천적 무효라고 보는 헌법학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보수인사들마저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한 다음 남북관계를 국가간의 관계로 설정하여 분단상황을 평화롭게 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먼저 포기하는 쪽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남북관계의 역사적 본질을 간과한 것이고 패배주의적인 발상이기도 하다. 망나니 짓을 하는 金씨가 있다고 하자. 집안의 어른이, 그 金씨의 버릇을 고쳐놓기가 괴롭고, 힘도 부치니 '내가 먼저 성을 갈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때부터 그 어른은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여 망나니를 교화하거나 단속할 수 없게 된다.

북한정권을 상대로 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국가 정통성을 지켜가는 일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이 짐을 내려놓는 즉시 우리는 역사적, 도덕적 우월성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자유통일의 주도권을 놓치게 된다. 우리 헌법이 규정한 자유통일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국제법적, 도덕적 우월성이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그 우월성의 핵심은 대한민국은 국가, 북한정권은 반란집단이라는 인식이다.

국가란 존재는 국민들에게 죽음을 요구할 합법적 권한을 가진 유일한 단체이다. 살인범이나 반역자에게는 사형을, 전쟁이 났을 때는 군인들에게 死地로 갈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이 국가이다. 때문에 국가는 어느 조직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한다. 북한 정권은 동족에 대한 민족반역적인 학살행위의 주체로서, 또 국제평화를 파괴한 反인류범죄행위로써 스스로 국가가 아님을 선언한 조직이다. 이런 집단에게는 정권이나 당국이란 호칭도 과분하다. 대한민국만이 한민족의 챔피언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합법국가임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자부심이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가장 큰 에너지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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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1/왜 敵對계층에서 주로 죽었나
金正日이 일으킨 餓死살인-계급살인

북한의 飢餓(기아)사태를 다룬 책중에서 가장 종합적인 분석과 자료를 담고 있는 것은 구호단체 월드 비전의 부회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 앤드류 S. 나치오스(ANDREW S. NATSIOS)가 쓴 '북한의 대기근'(The Great North Korean Famine:Famine, Politics, and Foreign Policy. 2001.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Press)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1994-1998년의 대기근 때 수백만 명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도 북한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의 구호활동가들은 『우리는 굶어죽은 시체도 보지 못했고 꽃제비도 보지 못했다』면서 언론의 보도를 부인하였다고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연구자들이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한 조선족 사람은 1998년5월 북한을 여행했을 때 본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거리는 이상하게도 깨끗했습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향해 나오지 말고 건물 속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교통경찰관들이 행인들을 건물안으로 들여보내느라고 바빴습니다. 내가 왜 저러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중국과 한국의 적십자 표시가 붙은 자동차가 지나갔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한 노점상 아주머니가 어린이를 구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말리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내 아이 다섯 중 둘이 굶어죽었습니다. 내가 팔고 있는 이 옥수수는 나에겐 생명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걸 훔치려고 했습니다. 무의식중에 너무 화가 나서 두들겨 패게 된 것입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외국 구호 단체가 방문하는 날이면 시민들은 건물 안에 있어야 하고 좋은 옷을 입지 않고선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외국인에겐 절대로 말을 해선 안된다는 지시를 당국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이 대기근 사태 초기에 솔직하게 참상을 알리고 국제적인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필자는 20세기의 5대 기근은 모두 전체주의 국가에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1930-33년의 소련 우크라이나 대기근, 1958-62년 중공 대기근, 1984-85년 이디오피아 대기근, 1975년의 캠보디아 대기근, 1990년대 말 북한의 대기근이 그것이다. 이들 전체주의 국가는 대기근이 발생했는데도 정치적인 이유를 중시하여 신속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아를 해결하는 자유까지도 속박했기 때문에 수많은 인명 손실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著者 나치오스씨는 의미 심장한 통계표를 하나 제시했다. 북한의 계층구조와 영양불량 상태와의 상관 관계이다. 金日成 시절 북한의 계층은 충성분자들인 핵심계층이 전체 인구의 25%, 동요계층 55%, 불만 계층 20%로 분류되었다. 유엔이 1998년에 조사한 북한인구의 영양상태를 보면 약32%는 영양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약62%는 중간 정도의 영양부족이었다. 약16%는 극심한 영양 부족이었다.
이 통계는 25%(핵심 계층) 對 32%(영양양호), 55%(동요계층) 대 62%(중간정도의 영양불량), 20%(불만계층) 대 16%(극심한 영양불량)의 대응을 보인다.

이 통계를 보고 하기와라 료(전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 평양특파원. 「조선전쟁」의 著者)같은 일부 인사들은 金正日이 불만계층을 정치적으로 숙청하기 위하여 대기근 사태를 이용했다는 견해를 보였다. 「북한 대기근」의 저자는 이 주장을 배척하면서도 권력의 세기와 餓死者(아사자) 사이엔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선 金正日은 핵심계층만이 사는 평양주민들과 당간부 및 군인들한테는 식량을 공급했고 농민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한테는 식량 공급을 해주지 않았다. 식량배급이 끊겨버린 사람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백성들이었다. 餓死者는 주로 정치적 배경이 약한 이 계층에서 발생했다. 결국 金正日 정권의 계급차별이 힘 약한 사람들을 집단적 餓死로 몰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집안에서도 힘이 약한 어린이와 노인들이 주로 굶어죽었다. 弱肉强食의 정글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지옥의 세월이었다는 이야기이다.

하기와라 료씨는 이렇게 말했다.
『계급차별 사회에서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 힘 있는 사람은 식량을 많이 차지하고 힘 약한 사람은 몫이 작아져 굶든지 죽게 된다. 여기에 지배층이 이들을 고의로 내팽개쳐버리면 敵對(적대)계층에서 집중적인 아사자가 발생한다. 함경남북도와 자강도에서는 적대계층 사람들이 많이 살고 운송수단도 취약했다. 여러가지가 겹쳐 아사자가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체제의 구조적 생리와 金正日의 의도가 합쳐서 발생한 餓死살인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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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2(月刊朝鮮 2000년 3월호)

서독의 東方정책이 한국의 햇볕정책에 주는 교훈 -「붕괴를 위한 지원」 만이 있었다


단호한 원칙 없는 화해와 협력은 독일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서독은 결코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독은 동독의 人權 침해 사례를 30년간 모아 통일 후 처벌했다.
●경제 지원에는 반드시 국경에서의 긴장 완화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직접 차관은 不許… 차관과 총격 중지를 교환하기도
●社民黨정부, 동독과 화해정책 펴면서 「反체제 인사의 공직취임 금지」 결정

金玄浩 月刊朝鮮 차장

「붕괴를 위한 지원」 만이 있었다

『東方政策(동방정책)은 동독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는가, 지연시켰는가』

독일의 대표적 권위지인 週刊(주간) 디 차이트(Die Zeit)가 1992년 2월부터 3월까지 6회에 걸쳐 게재한 시리즈 논쟁의 제목이다.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는 이 주제를 놓고 일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東方政策은 엄밀히 말하면 1960년대 말부터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가 추진한 소련과 동구권에 대한 평화공존 및 화해정책이지만 여기서는 브란트 이후 통일 때까지 서독이 동독에 취한 「독일정책」까지 포괄하는 의미이다.

차이트紙(지)가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실은 기사의 제목은 「원칙적으로 올바른 東方政策이 왜 마지막에 가서 부분적으로 운영상의 실패로 끝났는가」였다. 핵심 부분을 인용해 본다.


▲ 베를린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1990년 10월3일 새벽 독일통일을 자축하는 시민들이 독일국기를 힘차게 흔들고 있다.

『과연 東方政策은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일조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는가? 그같은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東方政策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 체제의 현실을 처음으로 직시하면서 동독의 內的(내적)인 안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外的(외적)인 안정을 보장해 줌으로써 동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돕는 것으로 공산주의 붕괴의 출발점이 되도록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즉 「안정화를 통한 변화(Wandel durch Stabilisierung)」 유도였던 것이다. 붕괴시킬 것인가, 지원할 것인가의 선택 가능성은 존재한 적이 없다. 단지 붕괴를 위한 지원만이 있을 뿐이었다(통일부 번역자료에서)』

이 글을 쓴 차이트紙의 로베르트 라이히트(Robert Leicht) 기자는 이같은 목적을 가진 東方政策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동서독간 타협으로 시작된 개방이 지속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反動(반동)」을 맞았다는 것이다. 동독內 주민들의 분위기는 베일에 가려지고, 경제 침체는 가속화됐으며, 비밀경찰(Stasi)의 규모가 확대되고, 반체제 운동가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서독의 정부와 政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東方政策의 후반기에 들어 서독의 정치인들이 현상에 안주해 동독內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이었다.

이 기사가 東方政策에 대한 독일內의 일반적 평가를 대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이트紙의 논쟁 기사가 거듭 확인하고 있는 사실은 東方政策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독일內에서도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 온 서독의 東方政策은 어떠한가. 한국인들의 東方政策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독일 분단 시대에 서독은 동독에 대해 평화공존을 바탕으로 한 화해와 협력 정책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의 통일정책관련 자료나 학자들의 글 속에서도 이같은 인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독일의 통일정책하면 「화해와 협력」을 떠 올리는 것이 일반의 상식처럼 됐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金大中(김대중) 정부의 對北(대북) 햇볕정책이 추진되면서 더욱 심화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차이트紙의 지적대로 서독의 對동독정책이 화해와 협력, 교류 등의 모습만 갖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님에도, 우리에게는 유독 이 부분만 부각되고 있는 느낌은 떨치기 어렵다. 서독이 동독과의 화해와 협력을 표방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견지하고 실현하려고 했던 핵심적 원칙들에 대해서는 좀체 우리의 시선이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칙들은 화해정책 속에 담긴 「숨은 그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해내지 못한 채 화해와 협력이라는 겉모습만을 추구하다가는 우리는 독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기사는 서독의 東方政策 전반을 되돌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화해와 협력이라는 화려한 外樣(외양) 속에 서독 정부가 내부적으로 그어놓은 원칙과 양보할 수 없는 한계가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면서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 보려는 것이다.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 1999년 10월3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통일기념 축제에서 시민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독일 통일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독일 통일은 서독이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사실상 포기한 채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화해 협력을 강화해 온 결과 국제적 여건 변화에 따라 「偶然(우연)」의 모습으로 찾아 왔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국의 對北 햇볕정책도 근저에는 이같은 통일 철학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독은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통일 의지를 스스로 약화시키거나, 약화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은 극도로 삼가했다. 서독 기본법은 서문에서 『모든 독일 민족은 自決(자결)에 의하여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역대 서독 정부는 이를 최고의 통일 이념과 통일 정책으로 삼아 對 동독 정책의 기본으로 유지했다.

기본법의 이 규정은 단순한 선언적 의미에 머물지 않았다.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자 서독 바이에른 주정부는 이듬해 5월 연방헌법재판소에 기본조약의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바이에른주는 독일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사당(CSU)이 집권하고 있다. 위헌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기본조약에서 동독을 서독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독립된 자립 국가로 승인한 것은 기본법에 규정된 「통일 완수의 使命(사명)」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기본조약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동등 자격의 원칙 위에서 상호 정상적 선린 관계를 발전 시킨다」 「(양측은) 주권상의 평등, 독립의 존중, 자립과 영토의 불가침성, 자결권, 인권 보장 등 유엔헌장에 명시된 목표와 원칙을 준수한다」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었다.

서독은 기본조약에서 동서독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하려 했으나, 동독의 강력한 반발로 이를 조약에 명시하지 못했다. 브란트 사민당 정부는 동독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 앞서 동독에 대한 국가 승인의 문제가 국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1969년 10월28일 『서독 정부가 동독을 국제법상 승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설사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들은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간의 관계는 특수할 수밖에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 1989년 11월9일 동독 정부가 여행자유화 조치의 일환으로 국경을 전면 개방하자 수백명의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브란덴부르크문 근처 베를린 장벽을 넘고 있다

이에 반해 동독은 정권 수립 이후 줄기차게 서독으로부터의 국가 인정을 요구해 왔고, 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도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서 서독으로부터 제한 조건 없이 국제법상의 국가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기본조약의 해당 조항 표현은 양측의 타협의 결과였다.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약은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동독은 국제법상 하나의 국가이다. 그러나 서독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 문제는 별개이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국제법상 승인을 공식적으로 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와 반대로 되풀이하여 이를 분명히 거부하였다. 서독이 동독에 대하여 긴장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취한 태도와 특히 조약을 체결하면서 대두된 실제상의 승인 사실을 평가한다면 이는 특수한 형태의 사실상의 승인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常駐대표부도 총리실 소속으로


헌법재판소는 서독 정부의 「특수 관계」이론을 지지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특히 기본조약이 분단 고착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이 조약은 기본법상의 再통일 사명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 조약은 분단을 위한 조약이 아니고 오히려 독일 민족이 다시금 국가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연방정부가 오늘에도 내일에도 언제나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통일을 위해 노력해 나가기 위해 마련한 조약인 것이다』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학자들 사이에 적잖은 이론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서독 헌법재판소 판결이 독일 국내와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서독이 추진하는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긴장완화 정책이 결코 통일 의지의 약화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며, 서독 정부는 영원히 통일의 사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서독 정부 역시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국제법상의 국가 승인으로까지 확대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 나갔다. 기본조약에 따라 동독의 동베를린에 설치한 상주대표부를 외교부가 아닌 총리실 소속으로 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常駐대표부 설치가 동독과의 외교 관계 수립, 즉 국제법상의 국가승인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하기위한 苦肉策(고육책)이었다. 반면 동독은 서독 본에 설치한 常駐대표부를 외교부 산하에 두어 양측 관계를 국제법상의 국가관계 성격으로 만들기 위해 진력했다.

당시 서독의 야당이었던 보수성향의 기민당(CDU)은 常駐대표부 교환과, 서독 연방대통령에대한 동독 常駐대표부 대표의 신임장 제정이 국제법상의 승인과 다름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민당 정부는 서독 기본법에 규정된 신임장 제정 대상인 「파견된 자(die Gesandten)」를 반드시 외교사절에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까지 개발하면서 이를 일축했다. 常駐대표부 근무자들에 대해 비엔나 외교협정의 외교관 특권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이 됐을 때도, 서독 정부는 현실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끝까지 「이를 준용하여 적용한다」는 유보적 태도를 고수했다.

서독의 통일 의지에 맞서 동독의 「분리 의지」도 집요했다. 1971년 집권한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1974년 헌법 개정에서 통일 조항을 아예 삭제함으로써 對 서독 「분리 정책(Abgrenzungspolitik)」을 공식화했다. 삭제된 통일 조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그 국민은 독일민족의 제국주의에 의하여 강요된 독일 분단을 극복하고 두 개의 독일 국가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바탕 위에서 통일할 때까지 단계적으로 노력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해 유엔 총회 연설에서 피셔 동독 외무장관은 『오늘날 독일 땅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민족, 즉 「사회주의적 민족」과 「자본주의적 민족」이 존재한다』는 주장까지 폈다. 동독이 「2 민족론」까지 내세우며 서독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은 인구, 국력, 국제적 위상, 정통성 등에서 서독에 대한 절대적 열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흡수통일」 아닌 동독의 자발적 「편입」


서독이 동독과의 평화 공존과 화해 협력을 추구해 나가면서도, 이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통일의지의 약화로 비쳐지지 않도록 분명한 자세를 견지한 사실은, 한국 정부가 「흡수 통일」 배제를 對北 정책의 3원칙 중 하나로 공식 천명하고 있는 점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정부가 말하는 「흡수통일」은, 동독 공산 정권 붕괴 이후 서독이 주도한 독일식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서는 이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도 없다. 독일 통일 당시 서독 기본법 규정에 따르면 두 가지 방식의 통일이 가능했다.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 지역이 서독 연방에 「편입」하는 방식과, 146조에 따라 동서독이 함께 새로운 통일 헌법을 제정하는 방식이었다. 호네커 정권 붕괴 후 자유총선에 의해 구성된 동독 의회는 이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조속한 통일을 위해 스스로「편입(Beitritt)」을 선택해 서독 기본법 체계 속으로 들어 간 것이다. 서독도 통일과정의 단순화를 위해 이 방식을 선호했다.

만약 한국 정부가 독일식 통일을 배제한다면, 어느 날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한국 헌법 체계 속으로 들어 올 것을 결정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이를 「배제」하겠다는 뜻이 된다.

한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식의 배제를 굳이 공식 정책으로 천명하고, 대통령까지 나서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통일 의지의 약화로 비쳐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金大中 대통령은 『지금 곧 통일해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 통일을 서두르는 것은 북한이나 한국에게 모두 좋은 일이 아니다』(지난 1월5일 도이 다카코 일본 사민당 당수와의 회견)고 언급하고 있다. 통일 비용이 두려워 일부러라도 통일을 늦추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통일 의지는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한국 정부는 현재 미국과 일본 등에 대해 북한과의 수교를 촉구하고 있다. 이것이 마치 한국이 북한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승인하는 의미로 비쳐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남북한은 현재 어느 일방도 동독과 같은 「분리 정책」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당장 논쟁거리가 될 여지는 거의 없다. 남북기본합의서도, 동서독 기본조약과 달리, 남북한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만약 어느 날 북한 정권이,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대한 체제 열세를 절감해 국제사회와 한국에 대해 체제 보장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한국의 북한에 대한 국제법상 국가 승인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한국 정부가 현재 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對北정책은 한국의 북한에 대한 국가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이 金日成(김일성) 死後(사후) 자신들을 「金日成 민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에서 동독의 「2 민족론」을 연상하는 것은 영원한 杞憂(기우)일까.


동독인은 당연히 서독 국적을 인정


서독이 동독과의 화해정책 속에서도 동독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끝까지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독 탈출 주민 문제였다.

이는 현재 한국 정부의 탈북자 또는 중국內 조선족들에 대한 정책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서독은 동독 주민을 자국민으로 간주했다.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정책에서도 이 원칙을 지켰다. 서독 기본법 116조는 『1937년 12월31일 현재 독일제국 영토하의 독일 국적 소유자와 그 배우자 및 비속은 독일 국적을 갖는다』고 규정했다. 이는 곧 서독이 전체 독일 민족의 정통성을 법적으로 승계하고 있음을 명확히 천명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동독 지역은 물론 폴란드 체코 소련 등지의 독일인들은 독일 국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됐으며, 이들이 서독으로 들어 올 경우 별도의 국적 취득 절차 없이 당연히 서독 국민이 갖는 모든 권리를 갖는 것으로 해석됐다.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한 위헌 소송 판결에서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이 조약은 동독 정부가 국적에 관한 법률을 어떻게 다루든지 관계없이 서독은 동독의 모든 국민에게 기본법 규정에 따라 서독 국민과 동일한 독일인으로 취급한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서독의 「1 국적 주의」에 동독은 강력히 반발했다. 동독은 동서독이 서로 다른 2개의 국적을 갖는다는 내용의 국적법을 제정했고,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는 『서독도 2개의 국가와 2개의 국적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유입된 인구는 4백90만명에 달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는 47만명이 넘어갔다. 동독의 이주·탈출 주민들은 서독과 국제사회에서 동독 체제의 문제점을 폭로함으로써 동독 체제의 안정성을 더욱 떨어뜨렸다. 대개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층들이 대거 서독으로 넘어감으로써 동독 체제 내부의 자체 개혁 잠재력이 더욱 약화돼 사회적 위기가 고조됐고, 결국 공산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반면 서독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고도 성장 과정에서 이주민들의 역동력이 경제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업型 「탈주 지원」도 보호


서독 정부가 동독으로부터의 탈출 주민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견지했는지는 탈출 지원자들에 대한 처리에서 분명해진다.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 서독으로의 탈주로가 봉쇄되면서 서독인들의 동독인 탈출 지원도 크게 늘어나게 됐다. 이를 서독은 「탈출 지원」이라고 했고, 동독은 「인신 매매」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처음에는 탈출 지원이 순수한 인도적 성격이었지만 나중에는 돈을 받고 도와주는 상업적 탈주 지원까지 생겨나게 됐다.

동독은 서독의 탈출 지원 업체의 활동을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은 거주이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속하는 절대적인 기본권이며 단일 국적 제도를 원칙으로 삼고 있어 동독 시민의 서독 입국을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지켰다. 나아가 다른 사람이 거주이전의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람도 형사 처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원 과정에서 문서 위조 등을 하였다 하더라도 범죄 행위가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1977년 9월 서독 연방대법원은 탈출 지원에 관한 3건의 소송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판결을 내렸다. 이중 2건은 동독 탈주 성공 후 탈주자가 지원자에게 잔금 지불을 거절한 것이었고, 1건은 탈출 실패 후 선금을 환불하라는 소송이었다. 연방대법원은 동서독간에 체결한 통과교통협정이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독간의 국가 관계만을 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탈출 지원은 법적인 금지 사항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따라서 탈출 지원 계약은 동독에서 오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기본권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기에 「善意(선의)의 관습」에 어긋나지도 않는다고 밝혀 탈주 지원 행위를 격려했다.

이 판결에 대해 당시 니르 동독 외무장관은 『서독에 있는 범죄적 인신 매매자들의 존재와 행위를 정당화시킬 뿐 아니라 동독內 통과路(로)의 악용을 공공연히 호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동독 대법원도 『(서독) 도당에 의한 범죄행위가 정당화 됐으며, 동독의 법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독은 1957년 형법에서 「동독 출국 使嗾(사주)」와 「反(반)국가 인신매매」를 범죄로 규정했고, 1977년에는 탈주 지원에 대해 종신금고형까지 가능토록 했다. 동서독 통과교통협정 발효 후 6년간 서독 출신 9백52명이 동독에서 탈주 지원 또는 방조 혐의로 체포돼 이중 8백65명이 기소되고 6백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탈출 지원에는 납으로 봉인된 트럭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는 동서독간 협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동독측은 불시에 봉인된 트럭을 열어보는 방법으로 대처해 나갔다. 이런 일로 동독과의 마찰이 심해지자 서독은 1978년 기업형 탈출 지원에 대해 마약 남용(탈주자를 운송 과정에서 마취시키는 경우) 규정 등을 적용해 영업 행위를 일부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했으나 탈출 지원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독일 통일의 직접적 계기가 된 1989년의 동독인 대거 탈출 사태는 이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西獨, 동독 인권 침해 사례 기록 모아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해 공개적인 언급을 가급적 삼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효도 없이 공연히 북한 정권을 자극만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에도 「人權(인권)」이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 없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유엔 헌장을 빌어 「인권 보호」를 명시적으로 규정했고, 이는 서독의 강력한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동독 정권이 서독의 인권 개선 요구를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는 경우에 대해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서독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이익을 자유롭고 합당하게 표출하는 것을 동독이 기본조약 정신을 위배한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제한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 편(동독)에서 조약을 위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서독 기본법이 적용되는 지역은 서독 지역에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에 대해 서독 기본법상의 인권 보장을 동독에 요구하는 것은 실효성을 갖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서독은 동독內의 인권 신장을 원칙으로 천명해 놓고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 사안마다 동독 주민들의 삶의 조건 개선을 시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동독은 서독과의 기본조약 체결 이듬해인 1973년 국제인권협약을 비준하고 1976년부터 국내에 발효시킴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구속력을 인정했다.

서독이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동독內의 인권 개선 의지를 지속적이고 단호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잘츠기터(Salzgitter)에 설치한 동독지역의 정치적 폭행사례에 관한 기록보존소였다. 잘츠기터는 지방법원이 소재한 도시 중 동서독 경계에 가장 가까운 국경 도시였고, 이 도시가 속한 니더작센주는 가장 긴 동서독 경계선을 갖고 있었다. 동독의 코앞에다 이런 기록보존소를 세운 것 자체가 서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기록보존소의 설립 목적은 동독 정권에 대해 인권 침해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동독內에서 자행되는 각종 인권 침해와 정치적 탄압 사례를 최대한 수집해 자세히 기록해 둠으로써 동독이 민주화되거나 통일이 이루어지면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었다. 당장은 이같은 無言(무언)의 경고를 통해 동독 정권이 가급적 인권 침해를 자제토록 하는 효과를 노렸다.

동독은 이 기록보존소의 존재 자체가 동독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면서 서독과의 교류 중단까지 위협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해체를 요구했지만 서독은 요지 부동이었다. 서독 연방대법원은 동독인이 동독內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서도 서독 법원의 사법권이 미친다는 취지의 판결을 통해 기록보존소의 법적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잘츠기터 기록보존소는 1961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 구축에 대한 대응조치의 하나로 설립된 후 통일 이후인 1991년까지 30년간 존속했다.

관련 기록들의 수집 통로는 다양했다. 돈을 지불하고 인도 받은 동독 정치범, 동독 탈출자, 동독 방문 서독인 , 동독의 신문 방송 등에 보도되는 사건 등을 통해 인권 침해 사례를 모았다. 인권 침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묻는 질문서에는 가해자의 성명 주소 연령 인상착의 특징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난이 포함돼 있었다. 이 기록보존소가 30년간 수집한 사례는 4만3백 건에 달했다. 여기에는 8만여 명의 이름이 언급됐고, 이중 1만여 명이 형사 소추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이 문건들은 실제로 통일 후 동독 체제 청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권 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 처벌의 증거가 되는 한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의 근거로 활용됐다.

잘츠기터 기록보존소는 우리가 지금 북한 인권 문제에 어떤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를 되새겨 보게 한다.


경제 지원에는 국경 긴장 완화 조건 붙여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지원은 항상 조건이 붙어 있었다. 서독의 요구 조건은 인적 교류의 확대, 內獨間 국경에서의 수속 절차 완화, 환경 문화 교육 분야의 협력 강화 등이었다.

동서독간 경제 협력중 교역이나 임가공 등은 순수 경제적 측면이 강했던 반면, 정치적 고려에 의한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주로 차관 형태로 이루어졌다. 서독 은행들은 1970년대부터 동독에 차관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독 자금이 곧바로 동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독 은행의 외국 지점(주로 런던 파리 룩셈부르크 등)이 국제 컨소시엄(채권단)을 구성해 「유럽 차관(Eurokredit)」을 제공하는 형식을 취했다. 서독 정부와 연방은행은 통일 당시까지 서독은행이 서독의 자금을 직접 동독에 차관으로 제공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다.

동독은 1983년 서독측에 대규모 차관을 요청했다. 1980년대 들어 동독은 심각해진 경제난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채무는 늘어나고 신용도는 떨어져 서방은행들이 차관 제공을 거부하는 사태를 맞고 있었다. 당시 동독의 왜채는 90억~1백30억 달러에 달했으며, 이중 약 40%는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독 대외무역부 차관 겸 외환 총책임자인 샬크 골로드코브스키는 서독의 기사당(SCU) 당수 프란츠 요셉 슈트라우스에게 서방은행의 차관을 서독 정부가 주선하고 보증을 서 줄 것을 요청했다. 동독이 서독 정계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슈트라우스에게 직접 접근한 것은 그의 이해 없이는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는 사전 접촉에서 협상 개시의 조건으로 동서독 국경에서의 여행 규제 완화와 총격 사살 금지 등을 요구했다. 실제로 양측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동독측의 여행수속 절차가 대폭 간소화되고 총격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본격 회담에서는 서독측에서 독일정책 담당 주무 부처인 총리실의 예닝거 장관이 참여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0억 마르크와 9억5천만 마르크의 차관이 동독에 제공됐다. 금리와 상환 기간 등 차관조건은 당시 유럽 금융시장에서 적용되던 통상 수준으로 특혜는 아니었다. 또 서독은 국내의 자본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차관 금액 전액을 유럽內 서독 은행 지점들을 통해 유럽 자본시장에서 조달했다. 서독 정부의 예산 부담도 전혀 없었다.

차관 제공이 결정 난 후인 1983년 9월 동독측은 슈트라우스에게 국경 지대에 설치된 자동발사 장치를 제거하겠다고 통보한 후, 5만4천 개의 「SM-70 자동발사 장치」와 잔여 지뢰들을 제거했다. 대신 동독은 전자 감시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양독 경계선상의 살벌함을 대폭 줄였다.


화해 앞서 내부 체제부터 가다듬어


1984년 차관 제공후 동독이 서독에 취한 주요 화해 조치는 11가지에 달했다.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 허가 조건을 완화하고, 서독 체류 기간 한도를 30일에서 60일로 늘렸다. 서독인들의 동독 방문 허용 기간도 30일에서 45일로 늘리고, 동독 방문시 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동독 마르크로 바꿔야 하는 서독 마르크의 액수도 25마르크에서 15마르크로 낮췄다. 이러한 조치들이 동서독간 인적 왕래를 확대시켰음은 물론이다.

한국은 북한에 15만여 t의 비료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금강산 관광및 개발 대가로 9억4천여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신 북한으로부터 어떤 화해 조치를 얻어내고 있는가.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는 동독과의 화해정책을 본격화하고 있던 1972년 1월 브란트 연방총리와 각 주의 총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동 결의안을 채택했다.

『서독 기본법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은 공직에 임용될 수 없다. 反헌법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단체에 가입한 자들은, 단체 가입 사실 자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도록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서독 정부는 이런 자들의 공직 임용을 배제할 수 있다』

결의안은 反헌법적인 단체의 기준에대해서는 명확히 언급하지 않고, 그 판단을 헌법수호청(Verfassungsschutz)에 위임했다. 이 때문에 정부 각 기관은 공무원을 임용할 때 반드시 反헌법적 단체 소속 여부와 활동 등에 관해 신원 조회를 해야 했다.

이 결의안은 서독 各 주별로 취해지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행정 규제에 대해 통일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독 공산당(KPD)은 1956년 위헌 판결을 받아 해산되고 3천여 명의 당원들이 구속됐으나, 1968년 기본 政綱(정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시하지 않는 등 보다 온건한 모습으로 탈바꿈해 DKP라는 이름으로 再창당했다. 서독 정부는 DKP를 다시 해산시키지는 않았으나 그 활동을 정밀 관찰하고 당원들의 공직 임용을 금지시키는 등의 제한을 가한 것이다. 사민당이 동독과의 화해정책 추진과 함께 이같은 결의안을 마련한 데에는 「東方政策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용만 당한다」는 보수 정당들로부터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한 의도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독과의 본격적인 대화와 교류에 앞서 내부 체제를 가다듬는 의미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對北 햇볕정책이 북한의 외투를 벗기기 전에 한국의 對北 경각심부터 허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서독의 東方政策과 현재의 한국 햇볕정책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당시 동서독과 지금의 남북한은 내부 체제, 분단상황, 국제 환경 등에서 너무나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 관리를 통해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정책이 어떤 목표와 원칙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있어서는 독일과 한국이 크게 다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인류사에서 가장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우는 우리가 자주 들춰보아야 할 「참고서」임에 틀림없다.

서독 헌법재판소의 다음과 같은 판결은 지금의 한국 정부가 되새겨 볼 만한 금언이다.

『서독의 모든 헌법기관은 국가 통일의 재성취를 정치 목표로서 견지하여야 하며, 이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할 정치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통일을 좌절시키는 어떤 일도 시도해서는 안된다. 대내적으로는 언제나 경각심을 갖고 통일문제를 추진해 나가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이를 끈기 있게 대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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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비전: 자유통일을 넘어서 일류국가 건설


평화통일이란 잘못 된 용어. 강한 군사력의 뒷받침하에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하여 한반도 전체를 자유-민주화해야.
趙甲濟

1. 간단명료한 자유통일 원칙



1. 남북문제의 본질: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


2. 통일의 원칙: 헌법정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유일합법성을 견지하고, 남북한 교류를 증진하여 북한주민들의 인권과 복지를 향상시키며, 한미동맹 등 국제협력에 기초하여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하여 평화적 자유통일을 달성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민주화를 이룩한 여세를 몰아 기필코 先進조국을 건설한다.

*헌법정신, 북한주민 인권 향상을 위한 남북교류, 韓美동맹, 민족자결주의, 한반도 전체의 민주화, 자유통일 뒤의 선진국 건설이 키워드이다.

2. 평화통일보다 자유통일이 중요


우리 헌법은 통일의 대원칙으로서 자유민주평화통일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구현하는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사이 親北정권 세력은 평화통일만을 강조한다. 평화로 포장된 對南적화통일 노선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도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통일의 목표이다. 즉, 자유민주통일, 줄여서 자유통일이다. 이를 평화적으로 달성한다는 것은 무력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력의 뒷받침을 받아야 자유도 평화도 달성된다. 최소한의 유혈로써 자유민주평화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평화적 통일로 봐야 한다. 예컨대 100명 정도의 인명피해로써 2000만 북한동포들이 해방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항구적으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그런 희생은 자유를 위한 평화적 통일의 代價이다.

통일의 목표를 강조해야지 수단을 강조하면 실천이 어려워진다. 서울에 가라고 하면 되지 반드시 기차를 타라고 할 필요는 없다. 자유란 말 안에 평화란 말이 포함된다. 자유 없는 평화는 공동묘지의 평화이다. 우리는 자유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가 있으면 평화도 있고, 평화만 있으면 자유도 정의도 없다.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온갖 거짓과 선동과 폭력을 일삼는 親김정일 세력의 위장평화공세에 속지 말자!

3. 중국과 전쟁을 각오해야 자유통일 가능할지도
=신라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여덟 가지 교훈=


대한민국이 자유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선진국을 만들어 一流국민으로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안보, 복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이 3대 조건은 한반도 전체의 자유통일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 약20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서기 8, 9세기이다. 이 시기 신라는 唐 및 일본과 공존공영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기 신라 당 일본의 東洋3국은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한국이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성공시킨다면 東北亞도 그런 황금기를 누릴 것이다.

신라가 주도한 삼국통일과 대한민국이 주도할 남북통일은 몇 가지 공통점과 시사점이 있다.

1. 主役: 군사의 김유신, 외교의 태종무열왕, 정치의 문무왕. 건국과 호국의 이승만, 근대화의 박정희, 그리고 통일을 마무리할 그 누구? 비스마르크의 외교, 몰트케의 군사, 빌헤름 1세의 정치가 종합된 독일통일과 비슷하다.
2. 동맹국: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과 친구가 되었다. 唐과 미국.

3. 해양세력의 승리: 신라는 바다를 건넌 외교와 해군력으로 통일했다. 한국은 미국 등 해양세력과 손잡고 國力을 키웠다.
4. 文武겸전의 나라: 고구려와 북한은 무단적이고 백제는 문화적이었으나 신라는 야성과 지성을 겸했다.
5. 종교와 정치의 이상적 결합: 불교를 자주적으로 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나라가 신라였다. 신라통일엔 호국불교의 영향이 컸다. 高僧과 화랑도의 결합이 있었다. 한국에선 건국 호국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6. 국가지도층의 死生觀과 교양과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 儒佛仙을 종합한 신라 지도층의 교양에 비견되는 것을 한국의 지도층이 가질 수 있을 것인가.
7. 정치를 잘 한 나라: 신라는 정치안정과 국내단합으로 국민동원력이 컸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법치로써 정착시켜야 국내의 안정과 단합을 이룰 수 있다.
8. 自主性: 신라가 당시 세계최대의 제국을 상대로 결전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는 너희들 밑에서 살기 싫다' '우리는 너희들과 다른 존재이다'라는 자존심과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도 통일과정에서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신라가 唐과 결전하여 민족통일국가를 세웠듯이 대한민국도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南北자유통일을 이룰 수 없을지 모른다.


4. '연합사 해체하면 자유통일 불가능'
전 고위직 인사의 고백


盧정권의 핵심부에서 근무했던 한 고위직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권이 추진하는 韓美연합사 해체가 저지되지 않고 이뤄진다면 자유통일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남북통일 과정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중국이다. 중국은 북한을 영향권 아래 넣으려고 할 것이다. 그 중국의 영향력을 한반도에서 배제해줄 수 있는 힘은 韓美연합사를 고리로 한 美軍의 지원에서 나온다. 盧정권이 反美 선동으로 연합사를 해체하면 미국은 유사시의 증원군 규모를 줄이든지 아예 삭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군은 단독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한반도에서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북한을 중국에 예속시킴으로써 한국 주도의 통일은 멀어진다. 연합사 해체야말로 反통일책동이다'

5. 한미동맹 있어야 자유통일과 先進강국 가능

애국운동은 지금 수비 위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좌파정권과 친북세력, 그리고 김정일 정권의 공세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수비로써 애국 전투에서 이길 수는 없다. 수비를 하면서도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
애국운동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하고 특히 젊은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의 비전은 자유통일과 선진강국 건설이다. 국민의 힘으로써 막강한 어용언론과 친북적 권력을 상대로 국가, 체제, 자유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런 국민들은 선진국민이다. 선진국민들은 권력의 압력과 어용언론의 선동에 굴복하지 않고 체제를 지킬 수 있는 용기와 교양을 갖고 있다.
애국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선진화로 나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이다. 그 길에는 통일이라는 관문이 있다. 근대화를 이룩한 민족의 저력이라면, 애국운동으로 高揚(고양)된 국민들의 힘이라면 자유통일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자유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은 7천만 국민들을 갖게 된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보다도 많은 인구이다.
흔히 한국의 국가적 목표를 작고 강한 나라, 즉 强小國으로 설정한다. 네덜란드나 스위스를 모델로 삼으려 한다. 인구 7천만의 대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례연구이다. 통일된 한국은 프랑스나 영국 정도의 강대국이 될 수 있다. 인구뿐 아니라 경제력, 특히 공업력과 군사력에서 그러하다.
반토막 난 국토를 가지고도 우리는 남한에서만 세계 10위안에 드는 중화학 공업을 7종목이나 가진 나라를 만들었다. 전자,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제철, 원자력, 기계공업이 그것이다. 이런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을 제외하면 없다. 통일조국은 5대 강국안에 들어갈 선진강국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선진이란 정신적, 도덕적 힘과 수준을 말한다. 강국이란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힘을 말한다.
지금 애국세력이 하고 있는 운동은 그런 점에서 선진화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애국 운동의 비전은 '자유통일 이룩하여 선진강국 창조하자!'이다.

그런데 자유통일과 선진강국 건설에는 동맹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자유통일과 선진강국 건설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되고 강력하며 자유로운 나라와 친구가 되어야 가능하다. 그런 친구를 우리는 갖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한국에 대해서 한 일들을 살펴본다.

1. 개화기 때 미국의 선교사들이 연세대학교 같은 학교와 수많은 병원을 지어 한국인들을 돕고 깨우쳐주었다.
2. 독립운동 시기 미국 사람들은 이승만 같은 투사들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했다.
3. 한국의 해방은 미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결과였다. 미국은 해방자였다.
4. 6.25남침 때 미국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약15만명의 自國 젊은이들이 다치거나 죽도록 했다.
5. 개발연대 때 미국은 한국을 원조했고, 기술을 제공했으며, 만든 물건을 사주었다.
6. 민주화 시기 때 미국은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에 압력을 넣어 민주화 운동권을 탄압하지 못하게 했다.
7. 北核 위기 때 미국은 한국을 대신하여 북한정권에 압력을 넣고 있다.
8. 자유통일 때 미국은 한국을 지원하여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족통일을 이룩하도록 도울 것이다.
9. 이런 미국을 저주하는 무리들은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이다. 고마움을 원수로 갚는 조직이나 인간은 반드시 저주를 받는다. 애국운동이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는 것은 사대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고마움을 알기 때문이며 선진강국의 念願(염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10. 우리가 金正日 및 그 추종세력과 싸우는 것도 이들 後進세력의 친북(親독재)반미(反민주) 책동이 자유통일과 선진강국 창조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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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國力(국력)에 대한 국제통계를 일별해 보면 GDP나 무역 등 규모 면에선 세계 10위권, 삶의 질 부문에선 세계 30위권이다. 세계 一流국가群에 편입되기 직전이다. 非유럽‧非기독교 국가로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一流국가 그룹에 進入할 태세이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한 676년 이후 약 200년간 東아시아는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한반도가 통일신라에 의해 통일되고 안정된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이때가 古代 동아시아의 황금기였다. 唐-신라-日本 사이엔 문물의 교류가 활발했다. 이 시기의 문화와 예술은 세 나라 박물관의 가장 찬란한 전시품이다. 漢字와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東아시아는 서구가 주도한 해양개척시대‧산업혁명‧ 민주화 시대에 뒤처졌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는 東進하여 잠자던 東아시아를 깨웠다.
日本이 먼저 문을 열고 주체적으로 서구의 先進문명을 받아들이는 근대화 혁명에 성공하여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日本은 아시아를 상대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시작했고 이것이 한국과 중국을 각성시켜 민족주의의 열정이 폭발했다. 한국은 이보다 80년 늦게 국민국가를 세우고 근대화 사업에 착수했다. 중국은 사회주의의 실험기를 거쳐 1980년대에 근대화를 시작했다. 북한은 金日成-金正日 神政체제의 미몽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해 東아시아의 生動하는 역사창조에 동참하지 못하고 암덩어리처럼 이 지역의 소통과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PPP(구매력) 기준으로 韓‧中‧日 세 나라의 국가총생산 규모는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東아시아는 이제 7~9세기 이후 처음으로 세계 역사의 主무대가 되어 공존공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문제는 북한정권의 처리이다. 일종의 대량살상무기인 김정일은 그동안 집권의 편리를 위해 개혁‧개방을 거부함으로써 주민 300만 명을 사실상 굶겨죽였고, 사소한 트집을 잡아 불만인사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두어 약 40만 명을 학살했다. 북한정권은 非무장한 북한주민들을 향해서 전쟁을 한 셈이다. 김정일은 인명손실 기준으로 수십 개의 핵폭탄을 인민들에게 투하한 셈이다. 6‧25 전쟁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김정일의 폭정으로 죽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차라리 전쟁이라도 났으면…” 하고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한다. 지금의 생활이 전쟁보다 못하기 때문에 전쟁이 ‘더 나은 미래’인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정권이 존속할 수 있는 것은 비호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소련과 중공 등 사회주의 진영이 있었고 지금은 중국과 노무현 정권이다. 노 정권과 중국은 김정일 정권의 급작스런 붕괴는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김정일 정권 온존 정책을 써왔다.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고 대학살을 계속해도 그를 지원하고 감싸줌으로써 암덩어리를 키우고 있다. 일찍 절제수술했어야 할 암세포가 이젠 한국으로까지 번졌다. 암 치료를 하려면 김정일과 노정권이라는 部位를 한꺼번에 잘라내어야 할 판이다.
2007년에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결단과 슬기로써 커져가는 體內 암세포를 큰 출혈 없이 잘라낼 수 있는가의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다. 선거를 통해서 反헌법적‧反국가적 사이비 좌파집단을 집권세력으로 선출했던 한국인과 한국의 민주주의가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合憲的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 再生의 길이 열릴 것이고 그 길은 한국의 一流국가化, 東아시아의 공존공영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은 암세포 절제수술을 견딜 만한 체력이 있다. 문제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정신 수준이다. 일에 열심이고 지기 싫어하지만 달콤한 말에 잘 속으며 공동체의 윤리가 약하고 人道주의와 正義感이 결여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으려 한다. ‘야윈 늑대’ 같은 金正日 눈에는 이런 한국이 ‘살찐 돼지’ 같이 보일 것이다.
한 국가의 정신과 혼을 순결하게 지켜가는 것은 국가 엘리트층의 몫이다. 장교단 출신 국가엘리트는 개방정책을 통해 산업화를 성공시켰다. 이들이 만든 國富와 제도가 민주화의 토대가 되었다. 덕택에 민주투사들은 집권세력으로 올라섰으나 조선조式 명분론과 당파주의‧지역주의로 회귀했다. 다행히 군인들이 키운 민간부문의 비중이 엄청나 소위 민주투사들과 사이비 좌파들의 10여년에 걸친 깽판치기를 견디면서 외양적 성장은 계속하고 있다.
인간개발지수(교육‧보건‧소득‧평균수명 등)에서 한국은 세계 약 200개 국가 가운데 26위이다. 포르투갈, 체코, 헝가리보다 앞이다. 선진국 수준이다. 한국은 양적인 팽창으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의 주류층이 키워온 덩치가 워낙 거대하다. 특히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독재로 정치 비용을 줄인 뒤 국력을 조직화, 능률을 극대화하여 기초를 놓은 重厚長大한 중화학 공업이 한국경제의 멈추지 않는 기관차이다.
자동차 생산량 세계 5위, 전자제품 세계 3위, 조선(造船) 세계 1위, 제철부문 세계 5~6위, 인구당 PC 보유대수 세계 4위이다. 미국의 FORTUNE誌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 500대 기업’에 한국 회사가 11개 들어가 있다.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중국, 네덜란드, 캐나다에 이어 9위(이탈리아보다 앞이다)였다.
한 나라의 生動力과 성장력을 상징하는 에너지 소비량에서 한국은 이렇다. 電力생산량 세계 9위, 기름 소비량 세계 5~6위(영국보다 많다), 총에너지 소비량은 7~8위권. 올해 한국은 수출입을 합친 무역액이 6000억 달러를 넘어선다. 세계 12~13위권이다.
북한의 무역액은 약 30억 달러로서 남한의 200분의 1이다. 체력이 100분의 1밖에 안되는 상대를 겁내고 끌려다니고 뜯어먹히고 있는 대한민국이 덩치에 걸맞는 강건한 지도층과 집권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자유통일을 넘어서 一流국가 건설로 나아갈 것이다.
대한민국의 체력에 어울리는 정신력, 정치적 관리자로서 一流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정통보수 정예정당이 등장할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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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一流국가를 만들 수 있다


一流국가의 조건, 一流국민의 특성, 新羅모델 등.
趙甲濟

1.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목표: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근대화를 성공시킨 힘으로써 자유통일을 이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자유화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류국가를 건설하여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 一流국가의 조건

가. 地政學的 위치: 세계문명의 교차로에 있다.
나. 역사의 깊이: 보통 2000년 이상.
다. 국민국가를 만든 경험의 길이: 보통 200년 이상.
라. 국가엘리트층의 존재: 여론이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國益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3. 一流국가 국민들의 특성

1. 화장실이 깨끗하다.
2. 사람들의 목소리가 낮다(일본의 경우 텔레비전 뉴스 앵커들의 목소리가 특히 낮다)
3. 인물을 기리는 銅像과 기념관이 많다.
4. 사람들이 친절하면서도 절도가 있다.
5. 옷차림이 간소하다.
6. 일을 하는 모습이 즐겁게 보인다.
7. 보통국민들도 글을 잘 쓴다.
8. 경찰에 대드는 사람이 없고, 경찰도 듬직하고 친절하다.

4. 一流국가의 공통적인 역사경험

가. 전쟁과 혁명을 많이 치렀다. 혁명이 없으면 민주주의가 불가능하고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국민국가를 만들 수 없다는 말도 있다.
나. 군사지배와 봉건제도의 경험이 있다. 군사지배를 통해서 질서와 法治, 그리고 경제력과 관료제도 및 과학이 발달했다. 봉건제도를 통해서 권력의 分占과 그 권력의 실용적 이용을 경험했다.
다. 이동을 많이 했다. 해외로 많이 나가든지, 국내에서 이동하든지, 또는 사회적 계층이동이 잘 되든지.
라. 기독교, 특히 칼빈주의 정신이 왕성했던 나라(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미국 등)가 一流국가로 발전했다.

5. 대기선의 세 나라

일류국가群은 주로 유럽과 유럽사람들이 만든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란드이고 유일한 非서구 一流국가는 일본이다. 한국, 대만, 이스라엘이 선진국 進入 대기선에 있다. 지난 200년간 後發國에서 분발하여 一流국가가 된 나라는 일본뿐이다. 국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집단작업은 근대화와 선진화이다. 한국인들은 근대화를 자유통일로 마무리하면 선진화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6. 한민족 세번의 세계화

우리 민족사상 세번의 세계화가 있었다. 우리 민족은 이 세번의 시기에 세계사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첫번째는 7세기 말 신라 통일 이후 약200년간이다. 세계제국 唐과 결전하여 이김으로써 안동도호부(평양)를 한반도에서 추방하여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어낸 신라는 그 뒤 唐과 화해했다. 唐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면서 신라는 물질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달했고 신라인은 중국, 일본 등 당시 세계사의 본무대에서 당당하게 활동했다.
두번째는 13세기 약40년의 對蒙 항전 끝에 항복한 고려를 칭기스칸 제국인 元이 고려를 부마국으로 대우하면서이다. 元의 황제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던 고려가 존경스러워서 그랬는지 고려 王朝를 멸망시키지 않고 國體를 보존하게 했으며 고려왕을 사위로 삼고 고려인들을 우대했다. 당시 元은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였다. 이 元과 친한 관계로 해서 고려 사람들의 행동 반경은 元나라의 통치 범위만큼 넓어졌다.
세번째는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의 최강국인 미국과 동맹국이 되면서이다. 미국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르쳐주고 젊은 이들의 목숨을 5만 명 이상이나 바쳐 나라를 지켜주었으며, 戰亂으로 피폐한 한국에 군사 경제 기술 원조를 주어 근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미국은 또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 상품의 수출시장이 되어주었고 민주화의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여 권위주의 정부를 견제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자 우리보다도 더 걱정을 많이 해주었고 잘 하면 통일로 나아갈 때 결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韓美동맹이 와해되지 않으면).

이상 세번의 교훈은 간단하다. 세계의 최강 선진국과 친하면 우리도 세계화되어 활동공간이 넒어지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번영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인권적으로 최첨단을 걷고 있는 나라와 친구가 되려고 경쟁이 치열한 판에 거짓과 선동으로써 잘 나가던 친구관계도 끊어버리자고 나서는 세력이 있다. 이 守舊세력의 책동을 저지해야 일류국가로 가는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

7. 민족사 최초의 일류국가 統一新羅

신라를 일류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이렇게 정의된다.
1. 정치가 안정되었다. 王權의 계승이 비교적 순리대로 이뤄졌다.
2. 지배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확립되어 국민단합이 이뤄졌다.
3. 외교를 잘하여 당시의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4. 종교와 권력이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삼국통일의 2대 주체세력인 호국불교와 화랑도를 만들어냈다.
5. 文武겸전; 나라의 기풍이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6. 해양력이 강했다. 對唐결전에서 신라는 海戰으로 결판을 냈다.
7. 실용적 自主정신이 강했다.
8. 행정 시스템이 잘 짜여져 유사시 동원력이 강했다.
9. 불교 같은 외래문물을 事大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국의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10.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한강유역을 잃지 않았다.
11. 통일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거의 차별없이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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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속는 국민들이 一流국가를 만든다


5월31일 이후 항상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유는 속지 않는 국민들이 많아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趙甲濟

盧武鉉 세력과 같은 좌파는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체제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 정권을 연장하고싶어도 공산도배들처럼 폭력을 동원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좌파가 非폭력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려면 선거 때 국민들을 속여야 한다. 1998년 김대중씨는 김종필 지지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국민들을 향해서 내각제 개헌 약속을 하여 유권자들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사기전문가 김대업의 거짓폭로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는 한편 遷都를 '행정수도 건설'이라고 속여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처럼 두 번의 좌파정권은 속임수에 의해 등장했다. 내가 이들을 政權사기단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유권자들이 속았거나 속이는 줄 알면서도 다른 이유로 이들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지난 5.31 선거는 유권자들이 좌파 선동에 잘 속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속을 만큼 속아 보았기 때문이고, 정보가 공개되는 자유민주체제 안에선 속이는 쪽에도 시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잠시 속지만 영원히 속지는 않는다.

자, 이런 상황에서 2007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좌파는 다른 전략을 동원하려 할 것이다. 국민들 앞에서 改過遷善(개과천선)하는 모습을 보이려 할 것이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극좌파를 내몰지도 모른다. 아니면 종목이 전혀 다른 거짓말을 개발하여 어용언론과 짜고 투표일 직전에 쇼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에 또 국민들이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하려면 앞으로 1년 반 동안 우파 인사들, 즉 한나라당 애국단체 正道언론 정상적 지식인들이 국민들을 향한 계몽과 교육에 盡力(진력)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한번도 국민 교육을 해본 적이 없다. 잘못 판단한 국민들에게까지도 영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망가뜨려온 정당이다.

한나라당이 농땡이를 부린다고 애국시민들이 가만 있을 수는 없다. 한나라당이 나태해질수록 애국시민들은 방탕한 아들을 둔 부모 된 입장에서 더욱 땀을 흘려야 한다. 물론 방탕한 아들을 계속해서 매질하면서.

한 나라의 보통사람들이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다. 속지 않는 국민들은 일류국민이다. 포퓰리즘을 허용하지 않는 국민들은 선진국을 만들 자질이 있다.

국민들이 거짓말에 속지 않으려면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이 있어야 한다. 정치나 역사를 판단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첫째 헌법이다. 둘째 국가이익이다. 셋째 세계를 움직이는 보편적 가치관이다. 헌법에 맞지 않고 國益을 해치며 세계 大勢를 거스르는 주장을 하는 자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거짓말장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일류국민이 되는 것이다.

2007년을 향해 가는 이 기간은 한국인들을 그런 일류시민으로 昇格(승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좋은 교육장이다. 둘도 없는 시험대이다. 5월31일 이후 항상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유는 속지 않는 국민들이 많아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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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사꾼들이 一流국가를 만드나?


사물을 계산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경직된 도덕론에서 해방되면 인간이 유연해진다
趙甲濟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 조선은 열두 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를 에토(지금의 도쿄)에 있던 幕府로 보냈다. 외교사절일 뿐 아니라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에 끼였던 기록관이 남긴 일본에 대한 관찰기를 지금 읽어보면 흥미롭다. 1719년 德川吉宗(도쿠가와요시무네)이 막부의 최고 실력자인 장군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 일행에 製述官(제술관. 기록자)으로 동행했던 申維翰이 [海游錄]을 남겼다. 이 책을 읽으면 요사이 일본사회와 비교하게 되어 더욱 재미 있다.

申維翰은 조선 선비 특유의 華夷的 관점에서 일본을 관찰했다. 조선을 중국과 같은 문명의 중심이 華로 보고 일본을 夷나 倭, 즉 오랑캐 같은 야만족으로 본 것이다. 그는 群衆이라고 써야 할 때도 群倭라고 썼다. 그런 경멸을 깔고 관찰했으나 사실관계는 상당히 정확하다. 申維翰은 일본사회가 무사들에 의해 잘 통제되어 보통사람들이 매사에 아주 절도 있고 성실하게 임한다고 썼다. 그는, 조선 통신사가 탄 배를 마중나온 일본 배가 날렵하게 바다를 헤쳐가면서 인도하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느려터진 조선 선원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일본사회가 兵農工商의 계급사회라고 보았다. 士農工商의 조선조 사회와 다른 점은 일본이 무사, 즉 兵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회인 데 반해 조선조는 글을 아는 선비나 양반에 의해 통치된다는 점이다. 申씨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유학자의 신분이 극히 낮은 데 유의하고 있다.
<兵(무사)은 안일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商은 부유하지만 稅法이 무겁다. 工은 기술이 뛰어나지만 제품값이 너무 싸다. 농민들은 고생하지만 租稅 이외엔 다른 부역이 없다>

申維翰은, 비록 칼을 찬 무사가 지배하는 일본사회이지만 형식적인 계급차별은 조선조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명분이 정해지면 상하가 단결하여 일을 정연하게 처리하는 것에 감탄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太守(藩主. 大名)는 평범하고 다소 못나 보였지만 그 부하들은 태수의 명령을 받아 행하는 데 조금도 빈틈과 소홀함이 없었다. 부하를 불렀을 때 그에 응대하는 것이 메아리와 같고 일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하며 보초 서고 차를 끓여오는 데 조금도 헛점이 없다>

申제술관은 보통 일본인이 보여준 질서정연함에 놀란다. 특히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거리로 몰려나와 구경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구경꾼들은 길 양쪽으로 갈라서 앉아 있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앞줄에, 큰 사람은 뒷줄에 앉는다. 차례대로 대열을 이루고 누구 하나 소란을 피우고 이탈하는 이가 없이 엄숙했다. 한 사람도 길을 넘는 자가 없었다>
申제술관은 서민들의 이런 질서가 兵이 군법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본사람들이 총명하고 문자를 많이 알며 특히 출판이 왕성한 데 놀란다. 요사이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일본인의 독서열에 감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대체로 총명하고 말을 잘 하는데 筆談을 해보면 奇言美談을 인용한 표현이 많다. 이 나라의 서적은 조선에서 가져온 것이 100이라면 중국의 남경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천을 헤아린다. 고금의 異書나 百家의 문집이 출판된 양을 본다면 조선의 10배 이상이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書物을 먹는 紙魚처럼, 사람이 글자를 먹은 것처럼 보고 생각하는 안목이 밝다. 古事를 논하고 평하는 소견도 的確하기 짝이 없다>

申維翰은 '오사카에서 서적 출판이 왕성한 것은 일대 장관이다'고 평하면서 특히 [退溪集]을 읽고 공부하고 또 궁금해하는 일본사람들이 많다고 소개한다.
<그들이 묻는 항목을 보면 退溪集과 관련한 것이 가장 많다. '도산서원은 무슨 군에 속합니까' '선생의 후손은 몇명이며 무슨 직책을 맡고 있습니까' '선생은 생전에 무엇을 좋아했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다 적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申維翰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에토로 가는 旅路에서 목격했던 주점의 청결성도 기록하였다.
<주점의 여자종업원들은 반드시 화장을 하고 깨끗한 복장을 하며 그릇도 청결하다. 倭의 풍습은 그릇이 불결해도 먹지 않고, 주인을 보고 누추하다고 생각하면 먹지 않는다>
그는 또 일본인들이 상당히 개방적이고 남녀간에 서스럼이 없다고 썼다.
<여자들은 외국인한테도 손을 흔들고, 웃고 말하는 소리가 낭랑하며, 넓은 노상에서 남녀가 머리와 뺨을 만져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申제술관의 기록을 정리하면 18세기 초 일본인과 일본인사회는 이러하다.

1. 사람들이 책을 많이 내고 많이 읽는다.
2. 외국문물을 배우고 외국인에게 묻는다.
3. 군사문화의 지배로 해서 사람들의 행동이 절도가 있으며 능률적이다.
4. 깨끗하고 서비스 정신에 투철하다.
5. 남녀간 차별이 심하지 않다.

이상의 일본인 특징은 요사이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인의 눈에 비치는 일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인과 일본사회가 선진적인 면이 있었고 이런 바탕에서 명치유신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족성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생기고 바뀌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요사이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약300년에 걸친 평화가 오늘의 번영을 만든 기초가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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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維翰의 관찰에 대하여 일본의 국민작가로 일컬어지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렇게 평했다.
<막부 시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국민의 비율은 70%나 되었다. 국민의 약10%는 士族, 즉 사무라이였는데 이들은 識者계급이었다. 農商工에 종사한 사람도 문자를 알았다. 維翰 선생이 보았다는 오사카가 그러했다. 이 도시의 私塾(사숙: 민간인이 운영하던 글방)에서 사용하던 초등교과서만도 1만 종류가 간행되었다. 그들은 聖賢의 道를 아는 데서는 모자람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글자와 주판을 모르고서는 상점에서 일해도 간부가 될 수 없고, 상선을 타도 선장이 될 수 없었다>

막부 시대 무사들이 칼부림이나 하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을 잘못 보는 수도 없을 것이다. 무사가 다스리던 明治維新期의 일본 국민들은 양반이 다스리던 조선조의 백성들보다도 문맹률이 훨씬 낮았다. 지방 영주(大名. 다이묘) 등 무사들이 남긴 글과 그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愛藏(애장) 예술품들이 일본의 지방 박물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수준이 높아 이들이 全人的인 교양인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사계급의 사람들은 또 상공업에 대한 지식도 높았다. 당시 조선조에서도 실학파 유학자들은 실용적인 지식에 밝았지만 권력을 잡지는 못했었다.

시바료타로는 또 이렇게 申維翰을 비판한다.
<무사가 지배하던 막부 봉건사회에서는 동시대의 유럽보다도 정밀하고 왕성한 상품경제가 발달했다. 이는 前期(전기)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는 270개 정도의 藩(번. 일종의 지방 領地)이 있어 산업과 학문을 경쟁적으로 발전시켰다. 藩(번)에는 儒官(유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과 같은 이데올로그가 아니었다. 이들은 사물을 볼 때 宋學的 관념론을 따르지 않았다. 일종의 인문과학적 思考法으로써 있는 그대로 관찰하려고 했다. 이는 상품경제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상업은 인간에게 意外의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라볼 때 質과 量, 그리고 유통의 측면에서 보는 습성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이 돌고 돌아 학자나 사상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시바료타로가 말한 商業의 중요성은 핵심적인 의미를 띤다. 조선조 사회의 신분질서는 다 아는대로 士農工商이었다. 글을 아는 선비가 돈을 아는 상인을 경멸하면서 끌어간 사회였다. 이런 나라에선 國富가 쌓이지 않는다. 국부가 약하면 强兵도 예술도 불가능하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0년대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주변 참모들에게 '우리는 商工農士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工商農士가 맞지 않느냐고 반론했지만 朴대통령은 商을 우선시켰다. 물건을 사고팔아 이문을 남긴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主題일 뿐 아니라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장사하는 사람은 관념론이나 위선적 도덕주의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사물을 계산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위선적이고 경직된 도덕론에서 해방되면 인간이 유연해진다. 상업은 그 핵심이 이동이다. 물건과 돈뿐 아니라 인간도 이동해야 한다. 이동은 모험이고 교류이며 여행이고 배움이다. 상인들이 종합적 인간능력에서 가장 뛰어나게 되는 이유도 이동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商人的인 민족이나 국가는 대체로 일류국가를 만들었다. 유럽에서 보면 10~11세기의 바이킹, 베니스, 15~17세기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미국이 상인적 기질의 나라였다. 동양에선 징기스칸 제국과 일본과 통일신라가 상업적이었다. 이들 나라는 國益의 핵심을 돈벌이와 무역에 두었다. 이 國益을 지키기 위해서는 强兵이 필요하다. 즉, 富國强兵이란 불멸의 국가목표가 등장하는 것이다.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國富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내정치와 외교를 잘해야 한다. 상업적인 민족과 국가는 대체로 정치와 외교에 능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상업적이었던 나라 신라가 외교와 정치에서 특히 우수했다. 정치의 핵심은 권력승계의 제도화에 의한 국내안정이고 외교의 핵심은 동맹국 관리이다. 상인적 국가는 외교 군사(특히 해군) 무역에 능하다. 이들 나라는 대체로 商武국가이다(베니스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바이킹을 예로 들면 이들은 척박한 스칸디나비아에 살면서 장사에 종사하다가 여차하면 戰士로 돌변하여 약탈자 정복자가 되었다. 바이킹이 점령했던 시실리, 영국, 노르만디, 키에프 등은 상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했다. 바이킹은 정복지를 다스리는 재주가 비상했다. 바이킹의 후예국가들은 전부 일류국가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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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통계도 있다. 일본의 일간신문 구독수는 총5300만부로서 인구가 두 배인 미국의 5520만부와 거의 같다. 요미우리 신문은 발행부수가 1010만부이다. 미국의 USA TODAY는 230만부이다. USA TODAY 발행인인 알 뉴하스는 일본신문이 뉴스를 공정하게 보도하고 교양있는 표현을 쓰며 독자들을 예우하는 면에서 미국신문보다 낫고 이것이 일본신문의 성공비결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신문이 일본신문의 공정하고 겸손한 자세를 배우라고 충고했다. 申제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이미 에토시대에도 출판과 독서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런 독서의 전통 위에 일본의 신문이 서 있다. 일본신문들은 1면 광고는 반드시 책광고로 메운다.


그리스 로마 기독교 문화계통의 서구 열강을 빼고 後發 근대화 국가중에서 선진국에 진입한 非서구 나라는 지난 200년간 일본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교양과 생산력의 축적이 장기간에 걸쳐 이뤄져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류국민이 일류국가를 만든다. 일류국민이란 애국심, 교양, 전문성을 두루 갖춘 생산성과 창조성과 규율이 강한 사람들이다. 요사이 한국의 집권층이 하는 정책은 국민들의 교양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국가 선진화에 대한 비전도 정열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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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流국가와 一流국민이 되기 위한 프로그램


국가의 품격을 유지 발전시키고 국민들의 기백과 魂을 수호하며 私益보다 公益을 우선시킬 줄 아는 교양인들이 국가 엘리트層으로 세력화되어야 한다.

일류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인과 지식인과 기업인과 노동자들을 포함한 국민들이 一流가 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의 선진화를 지도할 국가 엘리트層이 두텁게 형성되어야 한다. 국가 엘리트층은, 지역주의나 당파주의, 또는 계층과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국가 이익을 파괴하는 파당적 엘리트와는 다르다. 국가 엘리트층은 건전한 인간관, 국가관, 역사관을 가진 人文的 교양인들로서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公益이나 國益으로 삼을 줄 안다.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들인 李承晩, 金九, 李範錫 같은 분들이 그런 국가 엘리트였다. 근대화의 主役들인 朴正熙, 金鍾泌, 李錫濟, 金正濂, 南悳祐, 吳源哲, 그리고 장교단과 관료들이 그런 국가 엘리트였다.

金大中, 金泳三, 그리고 在野민주화운동가들도 민주화 투쟁기엔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국가 이익을 당파적 이익보다 앞세우는 모습을 보였으나 집권과정에서 개인과 지역과 당파이익을 國益보다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재는 이 민주투사 출신들을 국가 엘리트라고 부르기 어렵게 되었다.

좌익인사들은 근본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反국가적 성향의 소유자들이므로 국가 엘리트로서의 자격을 원천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국가 엘리트의 자격과 성향은 대강 이러하다.
1. 역사, 문학, 철학, 예술, 스포츠 등 全人的 교양을 갖추고 있다.
2. 과거와 역사를 긍정하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3. 기본적으로 너그럽고 온화하며 겸손하고 용감하다.
4. 민족적 자부심이 강하고 애국적이다.
5. 국제적 안목을 갖추고 있다.
6. 주체성과 함께 전문성을 갖고 있다.
7. 公私 구별이 엄정하다. 地緣, 學緣, 血緣보다 公的 이익을 우선시킨다.
8. 空理空論보다 실천적 지식을 중시한다.
9. 국가의 안전과 기백과 魂을 수호하는 사람이란 自意識이 강하다.
10. 實事求是: 사물을 판단할 때 사실과 현실을 근거로 객관성과 과학성을 견지한다.
11. 일반 국민들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한다.

한국엔 국가 엘리트層이 있는가. 없다면 오늘의 한국이 이렇게 굴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 엘리트들이 숨어 있거나 가려져 있거나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가 엘리트層이 형성되려면 이념무장을 하고 인맥과 흐름을 만들고 세력화되어야 한다. 국가 엘리트층의 핵심적 역할은 당파적, 지역적, 혈연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국가적이고 인류적인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정치인과 관료들을 그 방향으로 끌고가면서 일반 국민들을 교육하여 교양인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요청되는 국가 엘리트層의 역할은 무엇인가?
1. 국민 교양의 再建이다. 人文교육의 바탕이 되는 고급한 언어생활, 이를 위한 漢字의 복원이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2. 절도 있는 국민 양성이다. 친절하고도 효율성이 높은 국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교육과 훈련, 이에 대한 이념과 방향을 국가 엘리트층이 제시해야 한다.
3. 국가적 목표를 '일류국가 건설-일류국민 되기'로 정하고 이를 위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4. 국가 안보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통해서 외교 정치 군사 부문을 일류국가 건설을 위해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5. 동맹국 관리: 한국은 해양국가로 남아 있어야 하고 미국 등 해양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大陸국가들과도 친선을 유지하는 슬기를 발휘한다.
6. 과학과 합리와 주체성에 기초한 애국심을 국민들에게 심어준다. 젊은이들을 배타적인 국가주의자가 아니라 포용적인 애국자들로 양성해야 한다. 국가주의는 증오심에 기초하기 쉽지만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다.
7. 국민들에게 균형 있고 긍정적인 역사관을 심어주며 韓國史의 훌륭한 인물들을 기리고 빛내는 사업을 지도한다.
8. 에너지 문제, 과학기술 정책, 언어정책, 역사관, 교육이념, 안보정책 등 국가적 進路에 큰 영향을 주는 주제들을 자신의 몫으로 삼아 연구하고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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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流국가와 一流국민과 국가엘리트


국가의 품격을 유지 발전시키고 국민들의 기백과 魂을 수호하며 私益보다 公益을 우선시킬 줄 아는 교양인들이 국가 엘리트層으로 세력화되어야 한다.
趙甲濟


일류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인과 지식인과 기업인과 노동자들을 포함한 국민들이 一流가 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의 선진화를 지도할 국가 엘리트層이 두텁게 형성되어야 한다. 국가 엘리트층은, 지역주의나 당파주의, 또는 계층과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국가 이익을 파괴하는 파당적 엘리트와는 다르다. 국가 엘리트층은 건전한 인간관, 국가관, 역사관을 가진 人文的 교양인들로서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公益이나 國益으로 삼을 줄 안다.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들인 李承晩, 金九, 李範錫 같은 분들이 그런 국가 엘리트였다. 근대화의 主役들인 朴正熙, 金鍾泌, 李錫濟, 金正濂, 南悳祐, 吳源哲, 그리고 장교단과 관료들이 그런 국가 엘리트였다.

金大中, 金泳三, 그리고 在野민주화운동가들도 민주화 투쟁기엔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국가 이익을 당파적 이익보다 앞세우는 모습을 보였으나 집권과정에서 개인과 지역과 당파이익을 國益보다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재는 이 민주투사 출신들을 국가 엘리트라고 부르기 어렵게 되었다.

좌익인사들은 근본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反국가적 성향의 소유자들이므로 국가 엘리트로서의 자격을 원천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국가 엘리트의 자격과 성향은 대강 이러하다.
1. 역사, 문학, 철학, 예술, 스포츠 등 全人的 교양을 갖추고 있다.
2. 과거와 역사를 긍정하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3. 기본적으로 너그럽고 온화하며 겸손하고 용감하다.
4. 민족적 자부심이 강하고 애국적이다.
5. 국제적 안목을 갖추고 있다.
6. 주체성과 함께 전문성을 갖고 있다.
7. 公私 구별이 엄정하다. 地緣, 學緣, 血緣보다 公的 이익을 우선시킨다.
8. 空理空論보다 실천적 지식을 중시한다.
9. 국가의 안전과 기백과 魂을 수호하는 사람이란 自意識이 강하다.
10. 實事求是: 사물을 판단할 때 사실과 현실을 근거로 객관성과 과학성을 견지한다.
11. 일반 국민들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한다.

한국엔 국가 엘리트層이 있는가. 없다면 오늘의 한국이 이렇게 굴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 엘리트들이 숨어 있거나 가려져 있거나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가 엘리트層이 형성되려면 이념무장을 하고 인맥과 흐름을 만들고 세력화되어야 한다. 국가 엘리트층의 핵심적 역할은 당파적, 지역적, 혈연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국가적이고 인류적인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정치인과 관료들을 그 방향으로 끌고가면서 일반 국민들을 교육하여 교양인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요청되는 국가 엘리트層의 역할은 무엇인가?
1. 국민 교양의 再建이다. 人文교육의 바탕이 되는 고급한 언어생활, 이를 위한 漢字의 복원이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2. 절도 있는 국민 양성이다. 친절하고도 효율성이 높은 국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교육과 훈련, 이에 대한 이념과 방향을 국가 엘리트층이 제시해야 한다.
3. 국가적 목표를 '일류국가 건설-일류국민 되기'로 정하고 이를 위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4. 국가 안보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통해서 외교 정치 군사 부문을 일류국가 건설을 위해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5. 동맹국 관리: 한국은 해양국가로 남아 있어야 하고 미국 등 해양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大陸국가들과도 친선을 유지하는 슬기를 발휘한다.
6. 과학과 합리와 주체성에 기초한 애국심을 국민들에게 심어준다. 젊은이들을 배타적인 국가주의자가 아니라 포용적인 애국자들로 양성해야 한다. 국가주의는 증오심에 기초하기 쉽지만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다.
7. 국민들에게 균형 있고 긍정적인 역사관을 심어주며 韓國史의 훌륭한 인물들을 기리고 빛내는 사업을 지도한다.
8. 에너지 문제, 과학기술 정책, 언어정책, 역사관, 교육이념, 안보정책 등 국가적 進路에 큰 영향을 주는 주제들을 자신의 몫으로 삼아 연구하고 고민한다.


프로테스탄트(新敎)의 정통신학은 칼빈주의이다. 16세기 초 독일사람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카톨릭의 관료적 병폐를 폭로하고 성경정신으로 돌아가 인간과 하나님의 직접 관계에 의한 구원을 제창한 것을 이어받아 세계사의 진보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 칼빈주의이다. 지난 500년간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이념을 꼽는다면 칼빈주의가 단연 1위가 될 것이다. 인류 발전에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친 이념은 물론 공산주의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칼빈주의를 받아들여 조국발전에 기여했고, 북한의 지배층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조국을 망쳤다. 사상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내는 것이다.

칼빈주의가 근대화에 끼친 공로는 칼빈주의 神學이 들어간 나라가 거의 예외없이 1류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프랑스 출생인 그는 종교탄압을 피해서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와 집권자가 되면서 자신의 신앙을 世俗에서 적용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칼빈주의는 당시의 신흥 시민계층이 받아들이면서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칼빈주의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퍼져가면서 인류발전에 이정표가 될 만한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킨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의 건국은 칼빈주의자들 또는 칼빈주의 정신이 주도한 사건들이었다. 여기에 한국의 기적적인 발전이 칼빈주의의 승리 목록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정통세력도 칼빈주의를 받아들였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주류인 장로교가 바로 칼빈주의 종파이다. 한국 기독교가 칼빈주의를 신념으로 하여 개화기, 독립운동기, 건국기, 호국기, 근대화 및 민주화 시기에 역사의 흐름 한복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자유통일기에도 그럴 것이다.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상륙했던 미국 장로교 선교회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칼빈주의 신앙을 갖고 한국에 온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칼빈주의를 매개로 하여 유럽의 종교개혁과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미국의 건국정신과 맥을 통하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칼빈주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신념체계였다. 하나님의 主權인정, 성경의 무오류성 인정, 종교와 신앙의 자유, 不義한 권력에 대한 저항권 인정, 근면하고 성실한 직업윤리의 강조를 핵심으로 하는 칼빈주의는 국민국가 건설기의 한국에 맞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가 대팽창한 것은 국민국가건설기의 참여했기 때문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신학이 칼빈주의였던 것이다.

이제 한국의 칼빈주의는 金正日 정권을 어떻게 규정하고 자유통일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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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들


칼빈주의와 미국의 건국

1517년 독일의 가톨릭 승려 마르틴 루터가 [95개 명제]를 발표하여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교황과 성당의 부패를 고발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루터가 주장한 핵심은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지 가톨릭처럼 권위주의적인 계급구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인간과 절대자 사이에 있는 교회의 중계역할을 부정한 것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봉건영주와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유럽은 백년을 넘게 종교분쟁에 휩싸였다. 이 종교 분쟁에서 어느 쪽에 섰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대체로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같은 투톤族 나라들이 루터 편을 들어서 개신교(改新敎) 국가가 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라틴系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나라들에서는 그 뒤에 산업혁명과 민주화가 상대적으로 잘 진행되어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종교혁명을 받아들여 많은 州가 로마 교황의 지도력을 거부하게 되었다. 제네바市는 프랑스 신학자로서 종교박해를 피해서 망명한 존 칼빈을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모셨다. 칼빈은 이 도시를 자신의 신학에 따라서 통치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그리스도교의 원칙](1536년)은 아주 주목할 만한 구원관(救援觀)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이 창세기(創世記) 때부터 이미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인데 칼빈은 무궁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구원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그러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락한 생활을 할 것인가. 칼빈은 누가 구원을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 하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했다. 타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지옥행(地獄行) 열차를 타지 않으려면 평소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건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엄격한 도덕률과 근면성을, 그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건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절묘한 논리가 탄생했다.

칼빈의 淸富사상

이 윤리는 그 때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시민계층의 행동철학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적합하였다. 말하자면 역사의 흐름과 맞는 신학이 되었다. 이 사상은 그 뒤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확대되고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연결되었다. 돈을 버는 행위를 천한 것으로 보는 종교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칼빈주의는 인간의 경제활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파악했다. 돈벌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신성한 가치를 지니려면 돈을 벌고 특히 쓰는 행위가 정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인간이 돈을 버는 것은 개인의 부(富)를 증식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몫을 잘 관리하여 크게 키우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 富를 사회에 환원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경제관은 청부(淸富)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활동을 경멸했던 주자학의 청빈(淸貧)사상과 정반대이다. 청빈사상은 위선적이고 선언적이며 패배적인 생각이라면 청부사상은 적극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천적이다. 淸貧의 사조에서 자란 한국의 자본주의가 아직도 천민적(賤民的)이란 비판을 듣고 있는 것은 철학이 돈을 미워하면서 다투기만한 때문이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돈과 정신을 통합할 수 있는 경제윤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칼빈주의는 개신교의 주류(主流)신학이 되어 프랑스의 위그노派 독일과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그리고 영국 청교도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미국의 건국정신은 이 영국 청교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재미있는 역사의 우연이 있었다.
16세기 초 영국왕 헨리 8세는 원래 로마 교황과 사이가 좋았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영향을 차단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란 칭호까지 받았다. 그런데 헨리 8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캐서린 공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남아(男兒)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요청은 허락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는 사정이 묘하게 꼬이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연 카를로스 5세의 숙모였다. 카를로스 5세는 합스부르그 왕조(王朝) 출신으로서 스페인왕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도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세속적인 권력은 카를로스 5세가, 정신적 권위는 로마 교황이 나누어 갖고 있는 형국이었다. 로마 교황은 카를로스 5세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숙모 캐서린과 영국왕 헨리 8세가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화가 난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와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는 앤이라는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이 사건은 유럽에서 로마의 교황권이 약화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헨리 8세가 아들을 얻기 위해서 맞아들였던 앤은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딸이 커서 엘리자베스 1세가 되고 그의 치세(治世)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극단적인 개혁파 청교도

그런데 영국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로 논쟁이 일어났다. 칼빈주의의 원칙을 도입하여 영국 교회에 남아있는 가톨릭적인 잔재를 청소하자는 개혁세력을 퓨리턴(Puritan)이라고 불렀다. 영어로 퓨리파이(Purify), 즉 청소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퓨리턴, 즉 청교도 중에는 영국 교회자체를 부정하고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개혁파가 있었다. 이들을 분리교도(Separatists)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간 것이 이 분리주의자들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가 이상향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이 점이 미국의 국가적 성격을 상당 부분 규정했다.

영국의 동쪽 스크루비에 있던 분리주의 집단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1607년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10여 년 살다가 보니 문제가 생겼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신도들은 이 분리주의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허용했으나 일자리는 하층민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선원, 병사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네덜란드의 습관에 동화되어 조국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이 영국을 떠난 것은 조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인데 이곳에 오래 살다가는 후손들이 동화되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고, 그리하여 이 분리주의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영국, 즉 뉴 잉글랜드를 건설하자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때, 즉 1620년 무렵 워싱턴 남쪽에 있는 지금의 버지니아 지방에서도 영국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버지니아 회사라는 식민지 회사가 개척민을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짓고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다. 분리주의자들 35명은 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토지사용권을 얻어서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에 이 회사소속으로서 총 1백2명의 이주자들을 모집하여 1620년 9월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떠나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을 태운 1백80t짜리 메이플라워호(號)가 대서양을 건너 그해 12월에 도착한 곳이 지금 매사추세츠州에 속하는 해변으로서 플리머스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래는 버지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폭풍 때문에 이곳에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메이플라워는 다음해 4월까지 머물면서 겨울에는 이주민들의 피난처로 쓰였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순례자(Pilgrims)로 불리게 된 이들 중 반이 죽었다. 근처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시체를 묻어도 표시를 남기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근처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워서 풍작을 이루었다. 이를 기념하여 추수감사절이 생겼다.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플리머스港에는 메이플라워號의 복제품과 최초의 상륙자가 밟았다는 돌, 그리고 민속촌으로 재현된 농장이 있다.

이 플리머스 농장에는 청교도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영국 억양의 중세영어를 써가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비행기가 상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무슨 새가 저렇게 크지}라고 능청을 떨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코리아, 코리아, 그런 나라도 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청교도들이 건설한 이 농장에는 교회, 감옥, 요새가 있다. 인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설인 것이다. 종교적인 열정으로써 뭉쳤다고 해도 질서를 유지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순례자들은 영국의 보호로부터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선 어느 나라의 주권 아래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규율을 잡지 않으면 공멸(共滅)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만든 법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었다. [메이플라워 맹약]이라고 불리는 이 약속을 기초로 하여 자치기구를 설립했다. 교회의 간부들이 자치기구의 간부를 겸하였다.

교회에서 태어난 국가

메이플라워 맹약에 서명한 사람들이 총회(General Court)를 구성하고 여기서 지사를 뽑았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교화를 요람으로 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해야 왜 아직도 미국에서 청교도적 정신의 영향이 그토록 뿌리깊은지를 알 수가 있다. 버지니아보다도 매사추세츠 지방의 개척이 늦게 되었는데도 미국의 발상지라고 하면 이곳 뉴 잉글랜드가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버지니아의 개척은 영국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식민지로서 경영을 한 것이고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등 뉴 잉글랜드는 여기에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을 공유한 사람들이 세운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산다는 차원과 정신적인 자유를 목적으로 삼아 모험을 결행한 것의 차이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철학적인 바탕을 깔고 하는 것과 그냥 편의대로 하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흐르면 크나큰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플리머스 정착촌의 인구는 7천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뉴 잉글랜드의 중심지는 곧 그 북쪽에 있는 보스턴으로 옮겨갔다. 순례자들(분리주의자)보다는 다소 온건한 영국 청교도들이 1620년대 말부터 보스턴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변호사이자 청교도 지도자인 존 윈스롭의 지휘하에 이들은 청교도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장소를 보스턴에서 구하여 [언덕 위의 도시], 즉 신시(神市)를 만들겠다고 1630년에 알벨라號를 비롯한 일곱 척의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매사추세츠만(灣)회사라는 일종의 무역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의 이사회에 해당하는 사령탑에는 [자유인]이라고 불린 교회의 간부들이 주주(株主)의 자격으로 포진하였다. 이사회는 정착민들의 자치기구 책임자를 선출하였다. 이민자가 많아지자 이사회의 구성원은 교회가 아닌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확대되게 되었다.

즉, 교회에서 회사가 생기고 회사에서 정부와 의회가 생겨난 과정이다. 교회로 상징되는 정신, 회사로 상징되는 물질, 그리고 정부로 상징되는 권력, 이 세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미국에서는 그 요람기에서부터 한 덩어리로 결합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점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국가의 3대 구성요소인 종교(또는 이념), 경제, 권력의 관계가 갈등하면 그 국가는 통합성을 상실한다. 이 관계가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하여 한 덩어리로 되어 있을 때 그 국가는 건실하고 생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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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일류국가


인륙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혁명가와 혁명이론은 칼빈과 칼빈주의이다. 프랑스 사람 칼빈은 프랑스 왕조의 신교도 탄압을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제네바 시장이 된 그는 칼빈주의에 따라 이 도시를 다스렸다.

칼빈주의의 핵심은 구원예정설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천당에 갈 것인가,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구원받지 않을 사람인가는 알 수 있다. 구원받지 못할 자는 인생을 낭비하는 자, 도둑질 하는 자, 게으른 자,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

이런 구제불능의 그룹에 들지 않으려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의심을 갖지 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고 재산을 늘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16세기 이런 칼빈주의는 그때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상공업자들과 시민계급의 윤리(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윤리로서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번 돈을 좋은 데 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거리낌 없이 돈을 벌자! 이른바 淸富 사상인 것이다.

칼빈주의가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따라서 富强했다. 칼빈주의자들은 또 왕정과 독재를 미워했으므로 곳곳에서 혁명과 봉기를 일으켰다. 네덜란드에선 칼빈주의자들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일으켜 성공했다. 영국에서는 퓨리탄이라고 불린 칼빈주의자들이 크롬웰의 지휘하에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카톨릭 세력뿐 아니라 왕정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크롬웰의 등장 이전 영국 청교도들이 카톨릭왕의 탄압을 피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것이 미국 독립정신의 시초였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즉 17세기부터 약300년간 세계를 주도해온 선진해양산업강국의 정신적 엔진이 칼빈주의였다.

부국강병, 법치, 인권, 개인주의, 경쟁, 근로의 보람을 확산시킨 칼빈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칼빈주의는 영국에서는 장로교에 들어갔다. 19세기말 개화기 때 이 장로교가 한국으로 들어와 그들의 칼빈주의가 한국인의 개화, 독립투쟁, 건국, 근대화, 민주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자유통일의 시기에도 그럴 것이다. 세계적인 성공모델인 대한민국의 발전에 끼친 칼빈주의의 역할을 추적하면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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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탈당: 사기적 黨名이 부른 업보


국민들을 속이려고 만든 '열린우리당'이란 黨名이 결국 국회의원들과 대통령들을 잡아먹고 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열린우리당'이란 黨名은 국민들을 속이기 위해서 작명된 것이므로 이 이름으로썬 절대로 재집권이 안될 것이라고 예언해왔다.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이 黨에서 탈당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나의 예언이 적중되어가는 듯하다. 작년과 재작년에 썼던 기사를 再錄한다.




1. 黨名 '열린우리당'으론 재집권 불가능

열린우리당은 「닫힌우리당」으로 改名해야

「열린우리당」의 당원이 아닌 대다수 국민들은 아침에 신문을 펴고 기사를 훑다가 「열린우리당」이란 단어를 읽을 때는 사기를 당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당원」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이 당을 「우리당」이라고 읽도록 강제하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란 소설에는 大兄이 다스리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선전선동부서를 「진리성」, 국방부를 「평화성」이라고 부르도록 하는 장면이 있다. 「열린우리당」이란 작명은 국민들이 매일 자신을 속이도록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기적인 作名일 뿐 아니라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이 作名을 한 사람들은 「열린우리당」이란 이름을 반복적으로 읽다가 보면 국민들이 세뇌되어 이 정당에 대해서 好感을 갖게 될 것이란 점을 노렸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속임수 작명으로써는 재집권이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이름값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丁一權은 장정들(丁) 가운데 제일가는(一) 권력자(權)란 뜻이다. 즉, 삼군총사령관 또는 육군참모총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열린우리당」 당원이 아닌 사람은 「열린우리당」의 「우리」를 「We」가 아닌 짐승의「우리」(가두어 두는 곳)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를 열어놓는 정당이 또 집권을 한다? 우리를 열어놓으면 짐승도 표도 달아나버리는데 선거에서 이긴다? 「열린우리당」이
「닫힌우리당」이라고 改名하지 않는 한 다음 선거에선 이름값을 할 것 같다.

作名이 중요한 것은 그 속에 구성원들의 성격과 가치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성격은 운명이라고 하니 作名대로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어느 정도 과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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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린 우리'에서 짐승들이 탈출했다!


어제 저녁 미국 로스 앤젤레스 한국통일문화진흥회의 LA지부(회장 金道祐)가 주최한 창립8주년 기념식 및 강연회에 초대받았다. 나는 '한국의 절망과 희망'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강연 뒤 청중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 것까지 포함하여 3시간이 걸렸다. 약300명의 교민들이 참석하여 끝까지 경청해주었다. 라디오코리아 방송국에서 강연을 한 시간 중계했다. 시종 진지하게 조국의 위기에 대한 나의 설명을 들어준 교민들의 표정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걱정으로 차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이, 가장 성공한 在美동포인 李承晩박사의 영도하에 미국과 손잡고 세운 나라임을 강조했다. 李박사와 미국을 매개로 하여 대한민국은 해양문화권 선진국의 정치제도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반면 북한은 실패한 在中-在蘇동포 金日成이 소련의 스탈린이 써주는 시나리오대로 꼭두각시 놀음을 하면서 세운 괴뢰국가였다. 李, 金 두 사람은 기독교를 믿었으나 李박사는 미국으로 건너와서 자유민주주의와 만났고, 金은 북쪽 대륙으로 올라가서 증오의 狂信과 만났다. 李박사는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결합시켰고, 金은 기독교에서 사랑을 빼어버리고 그 儀式을 도용하여 공산주의와 교배시켜 오늘의 소위 주체사상이란 신흥종교를 만들었다.

李承晩이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유학온 것은 한국의 축복이고 金日成이 대륙으로 간 것은 북한동포의 재앙이 되었다.

盧武鉉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성공조건이 되었던 해양화 노선을 수정하여 균형자론으로 위장된 親대륙노선으로 가려고 한다. 우리가 대륙에서 배울 것이 무엇인가. 중국 러시아 북한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대륙국가의 속성은 독재와 탄압과 침략의 근성이 아닌가. 한국이 해양성을 상실하면 대륙적 침체와 전제체질로 변질되어 진취성을 상실하고 쇠퇴했다는 것은 역사의 한 법칙이 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강연을 끝낸 뒤의 질문응답 시간에 한 교민이 재미 있는 제안을 했다. 내가 한반도의 대표적인 두 사기성 作名에 대해 한 논평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열린우리당이란 두 名詞야말로 한반도의 가장 큰 거짓말이다'고 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다 거짓말이다. 김정일정권은 조선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며 인민이 선택한 정권도 아니고 공화국도 아니다. 다 거짓말이다. 열린우리당은 열리지도 않았고 '우리당'도 아니다. 나는 이 黨에 가입한 적이 없다. 좌파는 이런 식으로 국민들을 속이는 데 대해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지 않도로 하는 마취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60대 후반으로 되어보이는 질문자는 이렇게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黨名을 존중해줍시다. 그 대신 발음을 정확하게 합시다. 열린우리당의 '우'에 액센트를 둡시다. 그 이름대로 '우리'가 열려 그 안에 있던 짐승들이 바깥으로 달아났어요. 국민들이 그것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하면 될 것 아닙니까'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발음을 정확하게 하자는 말씀을 본국에 전하겠습니다. 狂信과 싸울 때는 합리나 과학으로써만은 부족하고 다른 종류의 신념체계, 기독교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광신과 사기에 대해서는 유머감각도 중요한 무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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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최신정보파일

'1994년 이후에도 남침땅굴 굴착했다'
-140만 명 人的사항정보, 금강산 관광 통해 北韓으로/세계 어디서나 '진보'란 '공산주의자'란 뜻/새로운 세계7大불가사의 뽑기/비행기 사고가 많이 나는 지역/『KBS시청료 안내도 斷電 못한다』/李承晩, 핵개발 겨냥하여 원자력 기술자 육성/완벽한 인간이란?/ 李明博, 高建의 뒤를 따르는가?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위원/조갑제닷컴 대표)




1.'북한, 1994년 이후에도 땅굴 굴착'

탈북기술자 증언: '인민무력부 군수건설국이 전담. 산소공급이 가장 큰 문제. 잠수함用 산소발생기로 사용'


탈북자수가 약1만명에 이르러도 남침땅굴 작업과 관련된 일을 했던 사람은 1974년에 귀순했던 북한군 병사 金富成씨뿐이다. 그는 제3땅굴을 팠던 사람인데 그의 提報가 단초가 되어 全斗煥 소장이 지휘하던 1사단이 1978년10월에 제3땅굴을 발견했다. 이 땅굴은 너비와 높이가 2m이고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을 435m 지난 지하 73m까지 파들어간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우리쪽으로 침투길이가 가장 긴 땅굴은 1975년3월 제6사단(사단장 鄭明煥 소장)이 발견한 제2땅굴로서 1,100m였다. 북한쪽 길이까지 계산하여 가장 긴 땅굴은 제1(고랑포)땅굴과 제2땅굴로서 3,500m이다.
지금까지 네 개의 땅굴이 발견되었는데 1990년 3월 강원도 양구 북쪽에서 발견된 제4땅굴이 마지막이다. 군에선 땅굴 굴착이 1980년대에 끝났을 것이라고 본다.
최근 기자는 땅굴 작업과 관련한 일을 했던 한 탈북자를 만났다. 그는 군수공업부문에서 근무했던 고위기술자인데 南侵 땅굴 굴착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땅굴 현장엔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증언을 했다. 땅굴을 북한에선 기통수(機通手)라고 부른다고 한다. 機通手는 군대에서 신문이나 문서를 배달하는 일종의 연락병이다. 땅굴 굴착은 인민무력부 직속의 583부대(군수건설국)가 맡고 있다. 이 부대는 김일성 김정일의 숙소나 별장 등 이른바 ‘모신 사업’과 관련된 건설사업과 비밀군사시설 건설을 전담한다. 평양의 동대원구에 본부가 있다.
이 탈북자는 583부대는 한국에서 터널을 뚫을 때 쓰는 자동굴착기 TBM(Tunnel Boring Machine)을 북한에서는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만드는 이 기계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큰 장비는 한국측에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북한은 착암기로 바위에 구멍을 뚫고 여기에 다이나마이트를 넣은 뒤 폭파시킨 다음 정이나 망치를 써 굴을 넓혀 가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6명씩 교대를 하면서 하루 24시간씩 뚫으면 한달에 수십 m를 나갈 수 있다.
작업상 가장 큰 문제는 산소부족이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다이나마이트로 바위를 폭파한 뒤 작업을 하다가 有毒가스에 질식하거나 산소부족으로 죽기도 했다. 방독면을 쓰고 작업을 해도 희생자는 줄지 않았다. 이 탈북자는 산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여했다.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산소발생장치를 坑안으로 갖고 들어가 산소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켰으나 땅굴 굴착중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산소발생기는 열이 많이 나기 때문에 坑內의 가스에 인화되어 폭발사고가 자주 났다.
땅굴을 뚫는 데 가장 큰 난관은 換氣(환기) 문제이다. 일반 광산에선 바깥으로부터 압축공기를 주입받거나 별도의 斜坑(사갱)을 뚫어 공기를 소통시킨다. 남침용 땅굴은 그렇게 하면 한국측 高空정찰기에 노출이 됨으로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땅굴 굴착 전담 583부대원들은 제대를 안 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제대하는 경우에도 일반인들과 접촉이 안 되는 군 관련 직업을 알선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탈북자는 열 개 정도의 南侵땅굴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라고 말했다. 뚫은 땅굴의 관리도 583 부대가 한다고 한다. 그는 20km 이상의 장거리 땅굴 굴착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였다. 굴착 가능 길이는 10km 이내라는 것이다. 한강을 넘어 김포로 땅굴이 들어왔는가에 대해서, 그는 “한강 밑을 뚫을 경우 바위층에 틈이 많아 물이 새기 때문에 파이프를 사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한강 밑으론 아마도 뚫기 힘들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탈북자가 한 말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김일성이 죽은 1994년 이후에도 남침땅굴 굴착과 관련된 기술문제가 현장으로부터 제기되어 올라왔다는 증언이다. 그는 “땅굴 굴착 현장에 가보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땅굴 작업이 계속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땅굴 굴착에 대해서만은 “캄파니아식으로 뚫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너무 서둘러 하다가 무너지든지 발각되는 것을 경계한 말이었다고 한다.



2. 140만 명 人的사항정보, 금강산 관광 통해 北韓으로
공무원만도 수천명, 국방연구원 관계자까지


금강산 관광을 통해 국책기관 연구원을 포함한 140여 만 명의 人的사항 정보가 북한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금강산 관광을 구경가기 위해서는 성명, 성별, 주소, 연락처, 직장명, 직위, 주민번호 등 상세한 人的사항이 기재된 북한방문증명서와 관광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문제는 칼라사진까지 포함된 이들 개인정보가 북한으로 들어가느냐의 여부이다.
북한출입 심사과정에서는 관광객이 목에 거는 「금강산관광출입증」과 북한에 사전 통보된 소위 「입국서류」의 인적사항을 서로 대조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이는 북한에 人的사항 정보가 이미 들어갔음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금강산 관광을 담당하는 현대아산 측 관계자는 『人的사항이 북한에 전달되는 것은 맞다. 칼라사진을 포함해 이들 정보가 제공되는 것은 북한 출입을 위한 불가피한 절차』라고 설명했다.
통일부의 금강산관광 담당자는 『관광을 위해 기재했던 人的사항은 북한측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 출입時 동일인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달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2006년 11월 현재 금강산관광객수, 즉 북한에 전달된 대한민국 국민의 人的사항은 약140만 명분이다. 여기에는 국책기관 관계자를 포함한 공무원도 다수 포함된다. 예컨대 한국교통연구원은 지난 해 3월16일부터 18일까지 社內연수를, 對外경제정책연구원은 같은 해 2월6일에서 8일까지 워크숍을, 통일연구원은 같은 해 4월12일부터 14일까지 혁신 워크숍을 모두 금강산에서 가졌다. 국방기밀을 다루는 국방연구원도 2005년 12월2일부터 4일간 금강산에서 국방포럼을 개최한 바 있다.
일반 공무원들의 연수도 금강산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다. 민족문화교류재단이라는 민간단체가 위탁받아 운영하는 소위 「공무원통일전문교육훈련과정」은 2000년 8월 이래 금강산과 설악산을 이틀씩 오가며 3천여 명에 달하는 공무원들을 연수시켰다. 김정일 정권은 최소 3천 명 이상의 공무원 프로파일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金成昱 조갑제닷컴 기자).

3. 세계 어디서나 '진보'란 '공산주의자'란 뜻
'진보(Progressive)'라는 말을 정치적으로 쓰면 보통은 공산주의란 의미를 갖는다.

요사이 집권 세력과 김정일 전위대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진보'라고 말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진보라는 말을 정치적으로 쓰면 좌익이나 공산주의란 말과 거의 同意語이다. 이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자신들을 진보라고 자처한다면 정직하고, 모르고 그렇게 했다면 바보이며, 자신들의 좌익성향을 숨기려 그랬다면 어리석다.
캐나다에 노동진보당(Labor Progressive Party)이 있다. 캐나다의 공산당은 1941년에 해산명령을 받았다. 이 당원들은 정체성을 숨기기 위하여 노동진보당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출마했다.
미국에 진보당이 있다. Progressive Party라고 불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아래서 부통령을 지냈던 헨리 A. 왈레스가 만든 당인데 공산당원들이 장악한 당이었다. 왈레스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미국 공산당은 그를 지지했다.
1962년 中蘇 이념분쟁이 일어나자 미국 공산당의 극좌파들이 중국의 모택동 노선을 지지하여 탈당하면서 진보노동운동(Progressive Labor Movement)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1966년에 이 단체는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을 만들었다. 이 당에서 또 극좌파들이 튀어나와 웨드맨(Weathman)이란 테러조직과 공산혁명당을 만들었다.
미국 공산당의 정강정책엔 '공산당은 항상 노동계급과 진보적 사회세력의 단결을 추구한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도 진보는 親共세력과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 공산주의의 위장명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진보진영'이라고 자처한 단체 120 개는 전부가 공산주의자들의 위장단체였다고 한다.
1940년대 초 미국 평화 동원(American Peace Mobilization)이란 단체가 反戰운동을 했다. 당시 미국 공산당원이었던 넌 픽션 작가 존 톨란드는 회고록에서 '이 운동을 언론은 진보운동이라고 불렀으나 사실은 나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아르메니아의 공산당은 이름이 진보공산당(Progressive Communist Party)이다. 요르단의 진보당(The Progressive Party)도 공산당이다.
인도의 진보작가협회(Progressive Writers Association)는 공산당의 외곽단체이다.
미국의 한 반공사이트에 '공산주의를 여러분들은 얼마나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가?'란 제목의 글이 있다. 일부를 인용한다.

예외가 몇 있다. 대만의 民進黨은 反共정당이고 시오도어 루스벨트가 만든 진보당은 공산당이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이나 혁명공작을, 역사의 진보를 대표한다는 뜻에서 '진보적'이라고 불렀다. 이 용어를 수입한 한국의 김일성 김정일 추종 극좌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진보라고 부른다. 놀랍게도 집권 세력도 겁도 없이 자신들을 진보라고 부른다. 그들의 인맥과 前歷과 행태를 종합하면 그들이 말하는 진보란 '공산주의' 혹은 '친북좌익'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용어 사용법을 분석하면 항상 의미를 거꾸로 돌린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는 플로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독재이다. 그들의 평화는 전쟁이다. 그들의 自主는 事大이다. 그들의 '우리민족끼리'는 '민족반역자끼리'란 뜻이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진보는 퇴보란 뜻이다. 진보는 월계관처럼 쓰이나 머지 않아 烙印이 될 것이다.

4. 새로운 세계7大불가사의 뽑기
21개 최종후보 선정, 오는 7월7일에 7개를 발표한다. 한국 것은 하나도 없다.

요사이 ‘새로운 세계7大불가사의 뽑기’ 경쟁이 치열하다. 고대세계의 7大 불가사의는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알테미스 신전(터키), 기제의 피라미드(이집트), 바빌론의 공중정원, 로도스 섬의 巨像, 할리카르나수스의 무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올림피아의 제우스像인데 현존하는 것은 피라미드뿐이다. 2000년에 영화 제작자 버나드 웨버는 유네스코 사무총장 출신인 페데리코 마요르 교수 등 전문가 그룹과 함께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세계 7大불가사의 인기투표'를 기획하여 몇 년 전부터 全세계적인 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작년 1월 77개의 랭킹을 발표하고 이중에서 21개를 최종후보로 선정했다.
이 인기투표엔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인도의 네티즌들이 열심히 참여했다. 77개의 예비후보중에서 1등은 만리장성, 2등은 티벳의 포탈라 궁전, 3등은 타지마할, 4등은 콜로세움(로마), 5등은 멕시코의 치첸이차 마야 피라미드, 6등은 칠레 이스터섬의 巨像, 7등은 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斜塔이었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참여도가 낮았는데 한국 것은 하나도 없었다.
최종후보 21개를 알파벳 순서로 적어보면 이렇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寺院
멕시코의 마야 유적지 치첸이차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
브라질 리오데 자네이로의 예수像
칠레 이스터섬의 巨像
파리의 에펠탑
중국의 만리장성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소피아 성당
일본 교토의 淸水寺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
페루의 山頂 잉카 도시 마추피추
독일의 환상적인 노이슈반스타인城
요르단의 페트라(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곳)
이집트 기제의 피라미드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영국의 스톤헨지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인도의 타지마할
말리의 12세기 대학 유적지 팀북투


이상의 21개중에서 7개를 뽑아서 발표하는 날은 07년7월7일이다. 위에 뽑힌 21개 최종후보를 훑어보면 피라미드, 소피아 성당, 만리장성, 타지마할처럼 이론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문화유산도 있으나 ‘자유의 여신상’ ‘에펠 탑’처럼 최근 200년 안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국가별 안배를 한 흔적도 보인다. 이탈리아에서 콜로세움 하나만 뽑는 바람에 聖베드로사원 같은 걸작이 빠졌다. 전문가 그룹이 1國1個의 원칙을 세웠다는 증거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사람들이 만들어 선물한 것이므로 미국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21개 중 필자는 11개를 구경했다. 내게 21개중 7개를 뽑으라면 만리장성, 소피아寺院, 피라미드, 마추피추, 앙코르와트, 콜로세움, 타지마할이다. www.new7wonders.com으로 들어가면 즐길 수 있다.
'새로운 세계7大불가사의 뽑기’사이트를 통해서 인터넷 투표 등으로 선정한 77개 건축물의 類型을 분석해보았다. 약 절반인 34개가 종교건축물이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寺院,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聖가족성당(가우디 설계), 터키 이스탄불의 聖소피아 寺院, 독일의 아헨성당, 인도의 황금사원 등이 그렇다. 인간이 不可思議할 정도의 위대한 힘을 내는 것은 종교적 열정과 신앙심으로 무장할 때임을 잘 나타낸다.
다음은 정치권력과 관련된 건축물(15개)이었다. 인도 무갈제국의 왕이 부인을 위해서 지어준 타지마할,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권력이 만들어낸 베르사이유 궁전, 러시아 전제권력의 상징인 크렘린 궁전, 스페인을 800년간 지배했던 이슬람 문명의 精髓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베니스 공화국의 정부청사 두칼레 팔라초, 영국과 헝가리의 국회의사당, 독일의 한 영주가 지은 환상적인 城 노이슈반스타인, 북경 자금성 등이다. 이런 大건물은 권력자가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어 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건축은 정치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건축물(6개)이었다. 중국의 漢族 정권이 북방의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서 만든 만리장성, 잉카사람들이 산꼭대기에 만든 요새 도시 마추피추, 스페인 세빌리아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일종의 망루인 지랄다塔 등이다.
나머지는 예술, 오락, 기념물, 또는 실용성이 있는 건물들이다. 위의 통계에서 우리는 종교, 권력, 軍事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동원력을 최고도로 높이는 힘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강대국은 위의 세 요소를 두루 경험했던 나라이다. 종교, 권력, 軍事는 속성상 중앙집권적으로 절대화되려는 속성이 강하다. 이런 권력의 자기표현을 가능하게 하려면 돈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절대권력을 가진 집단이나 사람이 돈과 기술의 뒷받침 없이 거대한 기념물을 짓기 시작하면 백성들만 쥐어짜게 된다. 바로 북한정권이 한 일이다. 루이 14세도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전쟁을 좋아하다가 그 부유한 프랑스의 살림살이를 어렵게 만들어 루이 16세 때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했었다. 하물며 김일성, 김정일이랴!

5. 비행기 사고가 많이 나는 지역
北美, 유럽, 아시아가 안전하다.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南美가 불안하다.

3월 초 인도네시아에서 또 비행기 착륙 사고가 발생하여 22명이 사망했다. 비행기 사고는 후진국일수록 많이 난다. 통계에 따르면 비행기 사고가 가장 적은 나라는 캐나다와 미국이다. 100만回의 비행당 0.2건의 비행기 全損(기체가 몽땅 부서지는 사고) 사고가 났다. 유럽에선 100만회당 0.4건, 아시아는 0.8건, 중동은 1.7건, 南美는 2건, 아프리카는 6.7건, 인도네시아는 5건이다. 유럽, 北美, 아시아가 비교적 안전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은 미국에서 타는 것보다 25배나 위험하다는 뜻이다. 경제수준이 높을수록 비행기도 안전하다. 돈이 있어야 안보도 안전도 유지된다. 돈은 위대한 힘이다.

6. 『KBS시청료 안내도 斷電 못한다』
「時辯」 李憲 변호사 인터뷰/金成昱 조갑제닷컴 기자

뉴라이트전국연합은 3월13일 기자회견을 열어 「KBS수신료거부선언」을 했다. 전국연합은 KBS 정상화운동본부(www.newkbs.co.kr)를 통해서 수신료 납부거부운동에 동참할 일반국민들을 모집하고 있다. 「KBS수신료거부」 관련 소송을 대리해 온 「시민과함께하는변호사들(市辯)」모임의 총무간사 李憲 변호사를 만나보았다. 李변호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의 「KBS정상화국민운동」에서도 법률자문을 맡고 있다.

- KBS수신료 거부 관련 소송(訴訟)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KBS수신료는 지난 94년 10월 한국 전력과 KBS가 맺은 위탁계약에 따라 일반주택은 전기요금에, 아파트는 관리비에 통합돼 가구당 月2500원씩 일괄 징수돼왔다. 수신료 징수의 부당성을 이유로 「KBS수신료징수違憲소송추진본부」가 2005년 9월 서울행정법원에 「TV수신료부과처분取消청구소송」를 제기했고, 2006년 8월에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낸 바 있다. 행정소송은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수신료거부운동이 汎국민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해 온 이유는 동참한 시민들이 「단전(斷電)」이나 「신용불량」 같은 피해를 입을 우려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전기료에 수신료가 통합되어 징수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전기료와 수신료를 분리해서 전기료만 입금시켜도, 한국전력 측에서는 완납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력은 전기료가 미납되면 「단전」에 들어가고, 그래도 미납되면 금융감독원을 통해 「신용불량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KBS를 상대로 진행 중인 두 개의 소송과정에서 뜻밖의 轉機를 마련했다』
- 구체적으로 어떤 轉機인가?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해 9월5일 「TV수신료부과처분取消청구소송」 1심에서 'KBS가 「수신료 체납을 이유로 전기 공급을 중단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 'KBS가 수신료 체납 시 전기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고는 해석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인천 시민들이 제기한 「KBS수신료통합징수권한不存在확인」 소송에서도 같은 내용의 판결이 나왔다. 인천지방법원은 지난 해 8월23일 'KBS는 단순한 수신료 징수업무만을 위임받았을 뿐 수신료 등의 강제(强制)징수업무는 위임받은 바 없다 할 것'이라며 '법령상 KBS가 수신료 체납을 이유로 한 강제징수로서 자신의 고유 업무와 결합하여 전기 공급을 거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고 판시했다』
- 만약 韓電이 전기료 미납을 이유로 실제 斷電조치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
『만일 斷電사례가 발생하면, 현재 진행 중인 KBS수신료 소송은 그것으로 끝이다. 원고 측이 승리하고, KBS는 패배하는 것이다.
KBS가 「수신료 거부를 이유로 斷電에 나서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번복하는 것이 되므로, 법원은 KBS수신료 징수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략적인 면에서도 KBS가 수신료 거부를 이유로 斷電에 나서는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斷電이 걱정돼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명백한 위헌을 묵인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 KBS는 수신료 거부 시 斷電 이외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나?
『KBS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세법(稅法)상 체납처분의 예를 따르는 것이다. 2500원에 해당하는 물품을 가져가기 위해, 거부자의 집에 와서 압류 「딱지」를 붙이는 정도이다』
- 수신료 거부 시 KBS는 斷電을 할 수 없다 해도, 한국전력은 전기료를 완납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斷電에 나설 수 있지 않은가? 시민단체 주도로 「공탁(供託)계좌」를 개설하고, 수신료거부 참가자들은 전기료만 공탁계좌에 입금시키면 이를 피해갈 수 있는가?
『수신료거부운동에서 분명히 할 부분은 「확실한 것은 없다」는 점이다. 「공탁계좌」를 만들어 전기료만 입금시키고, 수신료는 거부한다 해도 '전기료는 낸 것이고 수신료만 거부한 것이므로 한국전력은 斷電해선 안 된다'고 정해놓은 法은 없다. 판단은 결국 법원의 몫이다. 우리로선 斷電상황이 발생하면 가처분(假處分)등 조치를 취해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斷電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다만 斷電을 하는 주체가 누구이든, 수신료 거부를 이유로 한 斷電사례가 발생하면 현재 진행 중인 소송에서 KBS의 패소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법원은 斷電사례 발생 시 수신료 징수 자체의 부당성을 확인해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지난 해 9월 재판의 쟁점이 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수신료거부운동에 동참한 몇몇 사람이 斷電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 승리는 KBS가 아닌 국민이 될 것이다』
- 시청료거부운동의 참가인원은 어느 정도를 예상하고 있나?
『많을수록 좋겠지만 사회지도층 인물 몇 명이어도 된다. 대표적 애국인사들이 참여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斷電사례 발생은 KBS의 자충수이다』
- 만일 수신료거부운동에 동참하는 사람이 없고, 斷電사례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현재 진행 중인 소송은 어떻게 예상되나?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 수신료거부운동의 취지에 동참하면서도 斷電 등의 우려로 망설이는 분들에게 한 말씀해 주신다면?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될 일이 없다』
- 수신료거부 소송을 사실상 혼자 떠맡아온 것으로 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결국 사람들의 참여부족이었다. 용기와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서 다들 포기해버리니 혼자 남게 됐다. 이제라도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주기를 바란다. 단전, 신용불량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KBS를 정상화시키겠다는 행동만이 더 큰 피해를 막고 나라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7. 李承晩, 핵개발 겨냥하여 원자력 기술자 육성
국무회의록 분석결과. 下野는 4.19전에 결심한 듯.

月刊朝鮮에 의하여 입수되어 공개된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에는 李承晩 대통령이 주재한 마지막 회의록이 있다. 4.19 시위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의 국무회의에서 李 대통령은 비로소 '부정선거 때문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장관들은 정직하게 보고하지 않는다. 본질과는 거리가 먼 민주당과 공산당 조종설로 대통령을 위로하려고 한다. 오히려 李 대통령이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음을 내비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李 대통령은 또 '어린 아이들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고 개탄한다. 이는 최루탄 맞은 金朱烈군의 屍身이 바다에서 떠오른 것을 가리킨다. 그는 또 '내가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한다.
李 대통령은 국민들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을 안 순간 결단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학생이던 기자의 기억으로는 시위대가 당초 주장한 것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였지 李承晩 타도가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은 야당후보인 趙炳玉 박사가 선거기간중 사망하여 李承晩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는데도 부통령까지 먹겠다고 부정선거로써 李起鵬을 당선시켰다가 국민들의 저항을 부른 것이다. 4월 중순부터 '이승만 타도'라는 구호가 나왔다. 李承晩 대통령은 그 전에 그만둘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람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 아닌가? 물러나라는 요구가 없는데도 스스로 그만두기로 결심한 독재자는 역사상 한 사람도 없다.
국무회의록에 따르면 1960년 2월22일 회의에서 李 대통령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日人들은 外援을 거절하고 자립하여 나가고 있으며 잠수함도 自家 생산하는 현재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하여 시작한 對韓원조이지만 이것을 언제까지 계속 하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가 자립하지 못하면 노예밖에 될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원자력을 개발하고 군비에 관한 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代를 이을 만한 기술자를 기르고 그를 위하여 필요하면 돈을 좀 쓰도록 할 것이며 현재 잘 안 되고 있는 조선공사 시설을 잘 조작하여 무엇을 만들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의 對韓원조가 끊어지는 날에 대비하여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 말은 원자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李 박사는 1950년대에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하고 원자력원을 설립했으며 서울工大에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 목적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기술축적이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대목이다.

8. 완벽한 인간이란?
영국사람처럼 요리하고, 프랑스사람처럼 운전하고, 이탈리아사람처럼 냉정하며...


완벽한 인간이란?
'영국사람처럼 요리하고, 프랑스사람처럼 운전하고, 이탈리아사람처럼 냉정하며, 일본인처럼 유머가 있고, 스페인사람처럼 겸손하고, 포르투갈사럼처럼 근면하며, 벨기에사람처럼 쓸모가 있고, 네델란드사람처럼 기분파이고, 한국인처럼 참을성이 좋고, 인도사람처럼 품위가 있으며, 러시아사람처럼 술을 마시지 않고, 터키사람처럼 계획성이 있으며, 이라크사람처럼 온화하고 룩셈부르그사람처럼 존재감이 있는 인간'
세계 최강의 군대는?
'미국인 장군이 독일인 참모를 데리고 일본인 사병을 지휘하는 군대.'
세계 最弱의 군대는?
'중국인 장군이 일본인 참모를 데리고 이탈리아인 사병을 지휘하는 군대.'

19세기 영국의 명재상 벤자민 디스렐리(1804~1881)는 정치에 대해서 명언을 많이 남겼다.
<정당이 할 수 없는 반역과 무자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엔 염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읽지말라. 傳記만 읽으라. 이론이 빠진 삶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時機를 놓치면 안된다. 기회는 정복자나 예언자보다도 더 강하다>
<정치에 마지막이란 말은 없다>
<정당은 조직된 여론이다>
<암살이 세계 역사를 바꾼 적은 없다>
<효율성이 없는 곳엔 경제가 있을 수 없다>
<이 나라의 교육에 이 나라의 운명이 놓여 있다>
<불평하지 말고 해명하지 말라>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빌어먹을 거짓말, 그리고 통계>
<紳士가 선거에서 떨어지면, 제국도 소멸할 것이다>
<나이가 많아지면 알게 되는 것은 공직생활에서 가장 희귀한 덕목은 용기라는 사실이다>

9. 李明博, 高建의 뒤를 따르는가?
인기1위에 취해서 좌파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경제제일주의로 나가면 그는 동네북이 될 것이다.

정치인의 가장 큰 자산은 인기이다. 인기는 그러나 자주 변한다. 인기가 높을 때 이 유동자산을 정치적 고정자산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허무하게 사라진다. 高建씨가 차기 대통령감으로 압도적 1위를 달렸던 것을 기억하는가? 高建씨는 그 인기를 누리고 즐기려고만 했지 인기를 자원으로 활용하여 정치세력이란 고정자산을 만들어놓는 데는 실패했다.

작년 여름 朴槿惠씨는 테러를 당해가면서 한나라당을 5.31 지방선거에서 압승시킨 직후라서 인기절정이었다.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되는 것은 운명적으로 예정된 일이란 느낌이 들 정도였다. 朴씨 역시 이 인기를 누리고 즐기기만 했지 고정자산으로 굳히는 데 실패하고 인기의 상당부분을 잃었다. 당시 한국 사회를 달구고 있던 韓美연합사 해체 음모에 대한 반대 투쟁에 앞장서는 것을 기피함으로써 救國의 잔다르크가 될 수 있는 찬스를 스스로 차버렸다. 朴씨는 애국투쟁의 현장을 멀리 한 채 몇달 동안 안일하게 지내다가 2등으로 밀렸고 지금 그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李明博씨는 지금 不動의 1위이나 高建, 朴槿惠씨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 또한 인기1위의 강점을 활용하여 자신을 이념형 지도자로 탈바꿈시키고 지지층을 투쟁조직화하고 救國의 지도자로 나서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그가 인기1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념대결을 기피하고 경제제일주의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李씨의 對北,통일전략이 무엇인지 잘 모르니까 그를 좌파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인기1위라는 정치적 자산은 큰 힘이다. 그는 이 힘을 바탕으로 하여 김정일에 맞설 수 있는 지도자像을 보이고 萬惡의 근원인 6.15 선언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담긴 對北정책과 통일정책을 제시하여야 했었다. 이명박씨 주변에선 이념, 통일문제에 손을 대면 좌파의 집중공격을 당하기만 하고 표로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조언을 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이런 생각은 국회의원 선거에선 통할지 모르지만 체제대결 상태인, 아직도 냉전이 끝나지 않은 한반도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좌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념대결을 벌이려고 남북정상회담까지 추진하고 있는데 우파가 이념대결을 피해서 집권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달리기 선수가 뛰지 않고 금메달을 받겠다고 나선 꼴이다.

無이념 정치집단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좌파와 싸울 줄 모르고, 大同단결도 하지 못하고, 지지자들의 신념어린 자발적 참여를 동원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지지율이 떨어지면 사기를 잃고 高建처럼 흩어져 버린다.

이념대결을 회피하고 경제만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좌파들은 가장 경멸한다. 그런 인물들이 아무리 잘 나가도 '주먹이 약한 모범생'이나 '살찐 돼지' 정도로 본다. 정치나 전쟁에서는 만만하게 보이면 폭로와 逆攻이 들어온다. 거짓선동을 했다가는 당한다는 공포감을 상대에게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수야당의 對좌파 공격력은 투철한 反共자유민주의 신념에서만 나올 수 있다. 李明博씨는 반역자를 감옥으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인기에다가 이념을 보태면 그런 파괴력이 생긴다.

사람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李明博씨는 잘 나갈 때가 위기란 점을 지금쯤 깨달았을 것이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고 한다. 특히 도전자에겐 그렇다. 李明博씨가 김정일-김대중-노무현 세력을 향해서 이념적, 애국적 공세를 펼칠 수 없다면, 그런 신념과 용기가 없다면 대통령직은 더 멀어질 것이다. 李明博씨는 지금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늦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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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학자들은 김정일을 이렇게 속였다! “起爆장치의 문제점을 은폐하기 위해 'Pu 240' 섞어 未熟폭발 유도”라는 중대 證言.



1. 柳世桓 서기관 직위해제 사건
-대한민국 공무원은 반역을 보고도 침묵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근거하여 좌파정권의 赤化방조행위를 고발한 책 '대한민국憲法제3조'(조갑제닷컴 발간)를 냈다가 국회사무처로부터 직위해제를 당한 국회입법서기관 柳世桓씨 사건은 정권이 반역적 행태를 보일 때 공무원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지난 1월9일 국회사무처는 '대한민국憲法제3조'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견해를 다수 포함하고 있어 국가공무원법 제65조의 정치운동 금지조항 4항 및 이에 근거한 국회공무원 복무규정 제24조의 정치행위 금지 의무를 위반했다'고 직위해제를 결정하고 징계위원회에 중징계를 요구했다. 국회사무처는 또 柳 서기관이 2004년과 2005년에 국회사무총장으로부터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의견을 게재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번에 책을 출판하여 공무원법 제57조의 복종의무 및 제63조의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했다'고 덧붙였다.
柳씨는 자신의 인터넷홈페이지를 통해서 민노당의 강령과 이념 등이 북한정권의 對南적화공작에 동조하는 내용이란 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글을 올렸고, 공무원 노조가 주체사상 교육을 실시한 것을 폭로했었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공무원이 정권과 대통령의 反헌법적 행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법률위반인가 아닌가이다. 국가공무원법보다 상위 법인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했다. 柳 서기관은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갖는다고 하나 그것이 최고의 가치일 수는 없고 특히 헌법가치에까지 중립적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법원이 赤化통일 전략이라고 판단한 북한정권의 연방제안을 대통령이 지지함으로써 헌법의 기본질서 및 가치가 위협받고 있을 때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침묵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자유민주주의 憲政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72년 당시 서독의 브란트 수상은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州정부 수반들과 함께 히틀러 추종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공직 임용을 금지시키는 훈령을 내린 바 있다. 이 훈령엔 '공무원들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헌신할 의무를 진다'는 조항이 있다. 柳 서기관은 자신이 바로 이런 헌신을 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정권의 對南赤化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인 연방제안을 지지하는 발언을 여러 번 했고, 지지자들을 향해서 '시민혁명'을 선동했으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기도했었다. 연방제안 지지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규정한 헌법을 무시하고 대한민국을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행위임은 再論의 여지가 없다. 6.15 선언 이전에 우리 검찰과 법원은 연방제안을 주장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실형을 선고해왔었다.
대통령이 이런 反헌법적, 反국가적 행위를 할 때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지킨다면서 침묵하고 맹종할 것인가, 아니면 헌법 제7조의 규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고발과 抗命에 나설 것인가. 이는 이념대치 상황의 한국 공무원의 의무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이다. 헌법제7조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규정한 것은 국민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즉, 안보 체제 위기時) 공무원이 다른 국민보다도 먼저 위기를 막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합리적일 것이다. 헌법제7조가 '공무원은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한 것도 공무원들이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므로 안보위기時 공무원들은 위기의 원인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柳世桓 서기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수많은 反헌법적-反국가적 행위가 내란수괴인 김정일의 內亂행위(對南적화)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런 행위를 보고도 침묵한다면 이는 헌법제7조를 위반하고 국가보안법 제10조 불고지죄를 범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직도 準戰時 상태인 휴전체제하의 대한민국 공무원에겐 다른 나라보다 더 엄격한 국가 및 헌법수호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對南赤化공작을 방조하는 정권과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단체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행위로서 처벌받아야 한다면 공무원은 정권에 의한 반역이나 쿠데타에 대해선 알고도 침묵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국가의 자살을 방조하란 뜻이다.
국회사무처가 柳 서기관에 대해 중징계를 내리면 그는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갈 것이다. 법정의 쟁점은 盧 정권과 대통령의 행위가 헌법을 위반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초로 盧 정권의 친북정책에 대한 법적인 판단이 내려지는 셈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식민지형 관료집단이라면 김정일 세상이 되어도 열심히 복무할 것이다'고 말한다. 魂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90만 공무원중 유일하게 柳世桓 서기관이 침묵을 깼다. 문제는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려고 행동한 그를 대한민국 헌법이 지켜줄 것인가이다.

2. 김일성 증언:“毛澤東이 남한내 무장폭동 촉구”
-일본 공산당의 면담기록에 따르면 1965년 金日成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비밀조직에 의한 혁명운동’을 지시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6.25 戰史 전문가 蘇진철 대사는 최근 일본 공산당의 문서에서 재미 있는 자료를 발굴했다. 1966년 3월 일본 공산당 미야모도(宮本顯治) 서기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 나눈 대화록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6.25 남침을 맨 먼저 김일성에게 촉구한 것은 毛澤東이다. 1949년 가을 毛澤東은 김일성을 만나고싶다고 연락해왔다. 김일성의 술회에 따르면 그는 노동당 부위원장을 보냈다. 毛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이 미국세력을 축출하는 데 좋은 기회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주둔을 허용하면 대중들은 그것에 익숙하게 되어 싸울 용기가 없어진다”
김일성은 이런 말도 했다.
“1950년 5월 소련 북조선 중국이 심양에서 黨 차원의 회의를 했다. 미군이 도발행위를 하면 즉시 반격을 해 南進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중국은 직접 군대를 보내서 원조하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서 돕기로 했다”
일본 공산당의 김일성 면담보고서는 김일성이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전쟁은 덜레스 장관이 訪韓하는 등 미국측의 도발이 있었으나, 자신(북조선)들이 전쟁을 시작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김일성이 스스로 남침을 했다고 고백한 셈이다. 김일성은 1965년 3월에도 모택동이 자신을 만나고싶다고 했을 때 측근인 崔庸建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그가 북경에 갔더니 그곳에는 월남과 인도네시아의 공산당 대표도 와 있었다. 김일성에 따르면 毛는 崔庸建에게 '남조선 인민이 게릴라 투쟁을 하도록 지도해주기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崔는 평양으로 돌아와 김일성에게 보고했는데 金은 조선노동당이 이 제의를 거절하도록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일본공산당 대표단에 이렇게 말했다.
<남조선은 해안선이 길고, 산은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발달했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런 데서 게릴라 활동은 어렵다. 바로 무장봉기를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 대중속에 비밀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이런 투쟁이 아니면 戰力이 소모될 뿐 이기기 어렵다>
일본공산당의 이 기록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毛澤東의 권유에 따라 서둘러 赤色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군부의 대탄압을 받아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한에서 게릴라 작전을 전개하는 대신에 지하 조직을 만들어 대중들의 의식을 좌경화시키는 전략을 選好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대중공작의 성과가 요사이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위의 일본공산당 기록은 6.25 남침전쟁에서 毛澤東의 역할이 예상 외로 컸음을 보여준다. 毛는 1949년 중국 내전이 끝나갈 무렵에 조선족으로 구성된 실전 경험이 있는 3개 사단 약3만 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기 시작하여 남침 때 선봉에 서도록 했다. 毛는 또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한 직후 북한에 대해서 미군이 개입하면 중국도 병력을 투입하여 돕겠다고 약속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北進을 개시하여 평양으로 다가오자 毛는 黨內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병을 결정한다. 스탈린이 당초 약속했던 공군지원을 마지막 순간에 철회했음에도 毛는 파병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최근의 毛澤東 전기에 따르면 그는 중공군 포로들이 대만으로 보내진 데 대한 보복으로 한국군 포로 약6만 명을 돌려보내지 말고 억류하도록 김일성에게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한민족의 철천지 원수인 이런 毛澤東을 존경하고 있는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이다.

3. 日流! 왜 한국인은 일본으로 몰려가는가?
-訪日 한국인이 訪韓 일본인보다 더 많아졌다. 일본의 물가가 싸졌고 한국은 이유 없이 비싸다는 소문이 펴졌다.

지난 해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이 약232만 명,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이 약237만명이었다. 1975년 통계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訪日 한국인이 訪韓 일본인보다 많아졌다. 2002년의 경우 訪韓 일본인은 약231만 명, 訪日 한국인은 약147만 명이었다. 訪韓 일본인은 거의 늘지 않았고, 訪日 한국인은 急增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본의 물가가 싸졌고 서비스가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 한 잔에 1만4000원 하는 커피를 팔고 있는 한국의 호텔, 1인당 9000원 하는 점심 뷔페를 팔고 있는 일본 호텔. 초밥 1인분을 한국 호텔에서 먹으면 3~5만원인데, 일본의 초밥 전문점에서 먹으면 1만6000원 정도이고 맛도 훨씬 더 좋다. '한국의 호텔과 음식점은 이유 없이 비싸다'는 소문이 일본인 사이에 퍼졌고, 일본을 자주 찾아가는 한국인들도 이를 실감한다. '일본은 비싸다'는 말이 '한국이 더 비싸다'는 말로 바뀌었다.
제주도에 가는 것보다 아오모리에 갔다 오는 것이 더 싸게 먹히고, 뒷맛이 좋다는 것이다. 일본의 물가가 불황기에 많이 내렸고 가격인하 경쟁은 더 치열하다. 원래부터 초인적인 일본인의 서비스는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일본의 음식도 무엇보다 쌀밥이 맛 있고 술이 좋다는 定評이 나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정직한 일본에서 4박5일간 쉬고 오면 心身의 건강이 많이 좋아진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일본은 국토가 넓고, 계곡은 깊고, 산은 높고, 온천이 많다. 지방마다 남다른 개성과 문화와 전통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국내관광이 강하다. 한국은 해외여행을 많이 하는 편에 비교하면 국내여행이 약하다. 국내여행의 기반이 약하면 해외여행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앞으로 한일간의 여행逆轉현상이 심화될 것 같다.

4. 불만 품은 機長이 동반자살한 사건
- 이집트항공의 조종사는 회사로부터 징계를 당하게 된 데 불만을 품고 217명이 탄 여객기의 엔진을 끈다!

애국단체에선 한국을 좌파에 의해서 국가 조종실이 점거되어 납치된 나라로 비유한다. 청와대, 국회, 군 지휘부, 國情院 등이 대한민국의 조종실이다. 대통령은 조종실에서 조종간을 잡은 機長이다. 機長이 자살을 결심하면 승객들이 몰사하듯이 대통령이 정신이상 상태에 든다든지, 逆心을 품든지, 자포자기의 자살충동에 빠지면 국민전체가 재앙을 맞는다.
회사에 불만을 품은 조종사가 자신이 몰던 여객기의 엔진을 꺼버리고 비행기를 바다에 추락시켜 217명이 죽은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원인 규명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항공사측에서 억지를 부리면서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1999년 10월31일 새벽 1시20분경 이집트 항공의 보잉 767機가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을 이륙하여 카이로로 향했다. 4명의 조종사, 10명의 승무원, 203명의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이륙후 20분이 지나 3만3000피트의 순항고도에 도달했다. 이때 代替 부기장으로서 승객실에 있던 알 바투티가 조종실에 들어오더니 부기장에게 말했다.
“나는 잠이 안 오는데 대신 해줄까”
이륙한 지 20분밖에 되지 않을 때라 부기장은 거절했다. 그래도 바투티는 자신이 대신 근무하겠다고 졸랐다. 부기장은 바투티가 나가자 機長에게 작은 목소리로 “봤지요? 저 사람 멋대로 하는 것을”이라고 했다. 바투티가 곧 다시 들어와 또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뒤에 가서 쉬고 오라”는 바투티의 말에 부기장은 마지못한 듯이 機長의 허가를 받고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런 상황은 회수된 블랙 박스 녹음테이프에 담겨 있었다.
이 녹음 테이프엔 바투티가 부기장석에 앉자마자 조종실에 있던 한 승무원에게 “여기 펜이 있는데 부기장한테 갖다 주라”면서 내어보내는 장면이 녹음되어 있다. 새벽 1시48분, 機長은 “화장실이 붐비기 전에 내가 좀 갔다 오겠다”면서 조종간을 바투티에게 맡기고 조종실을 나간다. 그 1분 뒤 바투티가 침착한 말투로 “나는 신을 믿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앞에 있는 자동조종장치를 풀고 手動조종으로 바꾸더니 다시 “나는 신을 믿는다”고 속삭인다. 그리곤 엔진 파워 조정장치를 뒤로 밀어 엔진을 꺼버리는 것과 동시에 조종간을 앞으로 밀어 비행기를 급강하시켰다. 그 1분 뒤 機長이 조종실로 들어오면서 “무슨 일이야”라고 소리친다.
바투티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나는 신을 믿는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미 비행기는 40도로 숙여지면서 곤두박질친다. 기장은 부기장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조종간을 당겨 올리려고 애썼다. 부기장이 조종간을 앞으로 밀고 있는 것도 모른 듯 기장은 소리친다.
“조종간을 같이 끌어올리자”
機長은 엔진 파워를 올리려고 조정 손잡이를 앞으로 밀다가 “아니 엔진을 껐어?”라고 소리친다. 그제야 부기장 바투티는 “그래요, 꺼버렸어요”라고 말한다. 바투티는 다시 “나는 신을 믿는다”고 속삭인다. 呪文(주문)처럼.
機長이 안간힘을 써서 조종간을 당겨올려 순간적으로 기체는 일시 상승하다가 다시 바다를 향해 떨어졌다. 고도 1만 미터에서 機體는 쇳덩이처럼 되어 거의 자유낙하하듯 했고, 그 충격으로 엔진 한 개는 떨어져나갔다. 새벽 1시52분 기체는 매사추세츠 난터켓 남쪽 60마일의 바다로 쳐박혔다. 기체는 산산조각이 났으나 블랙 박스는 회수되었다.
최근 디스카버리 채널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副機長 바투티는 품행이 나빴다. 투숙한 호텔에서 여성을 추근대고 호텔 종업원에게 100달러 지폐를 보여주면서 유혹하다가 경찰에 신고당하기도 했다. 회사도 이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최후의 비행 직전 바투티는 회사측으로부터 “돌아와서 징계를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바투티는 마지막 비행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승객을 상대로 분풀이를 했다. 조종간을 잡은 조종사나 군통수권을 쥔 대통령이 비행기나 국가를 자살로 몰고가려고 할 때 이를 저지할 수단은 많지 않다.

5. 북한 핵실험 조작의 내막
-북한과학자들은 김정일을 이렇게 속였다! “起爆장치의 문제점을 은폐하기 위해 Pu 240 섞어 未熟폭발 유도”는 중대 證言.


2006년 10월9일의 북한 핵실험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해명하는 데 결정적 정보를 가진 한 탈북자(P씨)를 만나 며칠 동안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그는 핵폭탄이 터지도록 하는 起爆장치 개발에 관여하는 등 핵개발 사정에 정통한 이였다. P씨는 2006년 초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올 때 이런 말을 했다.
“지금쯤 핵개발 담당 북한 과학자들은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매년 金正日에게 과장보고를 해왔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조직의 생리상 매년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보고를 올려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金正日에게는 미사일에 실을 수 있을 정도로 핵폭탄 무게를 1t 이하로 小型化까지 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私席에선 걱정을 많이 했다. 만약 핵실험 명령이 내려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핵폭탄을 설계하고 起爆장치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100만분의 1초 동작까지 찍을 수 있는 고성능 카메라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었다. 다른 측정장치도 부족했다. 개발과정에서 측정과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만든 핵폭탄이 과연 터질지 안 터질지 그들도 잘 모르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러나 핵실험을 하라는 명령에 대비하여 묘안을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작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는데 폭발력이 400t(TNT 기준)에 불과했다. 핵실험 직전 북한이 중국에 통보한 실험 규모는 4000t이었는데 실제 폭발력은 그 10분의 1 에 그쳤다. 인도, 파키스탄 등 최근에 핵보유국이 된 나라의 첫 핵실험에선 폭발력이 모두 10kt, 즉 1만t을 넘었으니 북한이 다이나마이트를 터트려놓고 핵실험을 했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생길 정도였다. 북한 핵실험 이틀 후 만난 P씨는 “북한 과학자들이 그 시나리오대로 했구먼”이라고 했다.
그의 입에선 복잡한 화학 물리학 용어가 나왔지만 핵심적 단어는 ‘플루토늄 240’이었다. 핵폭탄이 정상적으로 터진다는 자신이 없었던 북한 과학자들은 핵폭탄의 원료물질인 ‘플루토늄 239’에다가 ‘플루토늄 240’을 일정량(7% 이상) 섞어 터뜨렸다는 것이다. ‘플루토늄 240’은 핵분열을 잘하기 때문에 폭발은 쉽게 되지만 이것이 섞이면 불완전 폭발이 되어 폭발력이 매우 약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이 P씨의 말을 검증하려고 문헌을 찾다가 흥미 있는 자료를 발견했다. 미국이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原爆을 투하하기 직전의 일이다. 뉴 멕시코 로스 알라모스 기지에서 원자탄 설계를 맡았던 J.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레슬리 글로브스 장군에게 보고서를 썼다. “이 폭탄의 폭발력이 1kt에 미달할 확률이 2%쯤 된다”는 요지였다. 그 이유는 “만약 최대 임계치에 도달하기 1천만분의 1초 전에 터진다면 폭발력이 急減한다”는 것이었다.
핵폭탄의 원료로 쓰인 플루토늄 속에 ‘플루토늄 240’이 7% 이상 섞여 있으면 최대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터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탄은 제대로 터져 폭발력이 TNT 환산 2만t을 넘었다.

북한이 중국측에 4kt짜리를 터트리겠다고 통보했다는 것은 P씨의 예측대로 플루토늄을 4~5kg 쓴 작은 폭탄을 실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핵폭탄의 소형화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폭탄의 무게를 500kg~1t 정도로 줄여 미사일의 彈頭로 실을 수 있게 한다는 뜻이지 폭발력을 줄인다는 뜻은 아니다. 소형화된 핵폭탄도 그 폭발력은 10kt 이상이라야 한다. 북한은 그런 소형화 기술은 없다. 다만 플루토늄을 少量 써서 폭탄의 무게를 줄인 것을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사키에 投下된 플루토늄彈은 4t이 넘었다. 북한 과학자들은 이미 金正日에게 小型化에 성공했다고 보고하였으므로 작은 크기의 핵폭탄으로 실험했는데 그마저 제대로 터지지 않은 것이다.
원자폭탄을 많이 만들어본 미국의 과학자들은 북한의 핵실험 결과에 대해서 대강 이런 추측을 내어놓았다.
1. ‘플루토늄 240’ 성분이 많이 들어간 불량 플루토늄을 썼기 때문에 최대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터져 폭발효율이 떨어졌다.
2. 起爆장치의 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플루토늄을 싸고 있는 고성능 폭약이 터질 때 폭발력이 균일한 속도와 방향으로 중심을 향해 가서 플루토늄을 수축시킴으로써 임계치에 도달하게 해야 하는데 한 군데서라도 폭발력에 차이가 생기면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는 식으로 未熟(미숙)폭발이 일어난다.
3. 원래부터 소량의 플루토늄에 의한 소규모 폭발을 기도했다.

P씨의 증언은 위의 세 시나리오를 검증하게 하였다. 그는 숨겨진 사고 하나를 소개했다. 1991년 무렵 핵개발 團地인 영변 원자력센터 안에서 폭발사고가 났다고 한다. 재처리한 플루토늄이 지하에서 보관중 터졌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핵폭탄이 터질 때 발산되는 방사능 물질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러시아가 이를 탐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때의 폭발사고에 대해서 P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플루토늄 240’ 때문이었습니다. 플루토늄 239와 240이 함께 섞여 있으면 핵분열성이 강한 240이 불안정하여 연쇄핵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아주 주의해야 하는데 이 관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240이 터져버렸어요. 그런데 과학자들이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플루토늄 240을 일정 성분 섞어놓고 핵실험을 하면 起爆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도 폭탄은 반드시 터진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다만 폭발력이 약해집니다. 이것을 이번에 응용한 것이 확실합니다. 북한 과학자들이 起爆장치와 핵폭탄 설계의 문제점을 숨기기 위해서 머리를 쓴 것이지요”
이 말이 맞다면 400t이란 史上초유의 낮은 폭발력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이것이 얼마나 낮은 폭발력인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자료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나가사키에 投下되어 약7만 명의 사망자를 낸 원자폭탄에는 약7kg의 플루토늄이 들어갔다. 그 폭발력은 22kt, 즉 다이너마이트 2만2000t이었다. 1945년 미국이 뉴 멕시코에서 실시한 핵실험에서는 6kg의 플루토늄으로 20kt의 폭발력을 얻었다. 북한이 이번에 4kg의 플루토늄을 썼다고 해도 15kt 정도의 폭발력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폭발력은 그 정상치의 40분의 1이었다.
터지다가 만 꼴인 이 未熟폭발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起爆장치가 부실했고 핵폭탄의 원료물질인 ‘플루토늄 239’에 불순물질인 ‘플루토늄 240’이 상당량 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플루토늄 239’의 순도가 93% 이상인 무기급(Weapon Grade) 플루토늄을 북한은 만들지 못했던가? 그렇지 않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992년 6월에 북한측이 재처리한 플루토늄을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플루토늄 240’의 비율은 2.44%였다. 미국 핵폭탄은 ‘플루토늄 240’이 평균 6%. 북한제 플루토늄이 훨씬 질이 높은 것이다. 즉, 북한과학자들은 순도가 높은 플루토늄이 있었지만 그것을 쓰지 않고 일부러 ‘플루토늄 240’의 농도가 높도록 조작한 불순 플루토늄을 써 未熟폭발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순도가 높은 플루토늄을 썼을 경우 起爆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아예 터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240을 일정량(7% 이상) 혼합시켜놓으면 起爆장치가 정상작동하지 않아도 반드시 폭발하긴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불완전 핵분열로 인해 아주 낮은 폭발력만 낸다. 폭발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플루토늄 240’을 섞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원자폭탄의 폭발 메카니즘을 간단히 설명해둔다. 원자폭탄은 공처럼 생겼다. 공의 중심에 플루토늄이 있고 표면을 따라서 고성능 폭약판 조각이 축구공의 표면처럼 붙어 있다(이것을 起爆장치라고 부른다). 이 폭약판은 터질 때 그 힘이 바깥이 아닌 중심부로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런 폭발을 內爆(내폭: Implosion)이라고 한다. 수십 개의 폭약판은 터질 때 일제히 균일한 힘으로써 중심부를 향하면서 중앙의 플루토늄 물질을 균등하게 수축시켜야 한다. 이때 플루토늄은 수축하면서 핵분열의 임계치에 도달한다. 그러면 중성자가 발생하면서 연쇄분열반응이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이 연쇄반응이 최고치에 달하여 최고의 폭발력을 얻기 위해선 100만분의 1초간 플루토늄이 팽창 상태, 즉 공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여 최고치의 폭발력을 축적했다가 한꺼번에 터져야 한다.
북한은 起爆장치 실험을 많이 해왔으나 측정장치가 없이 해왔으므로 핵폭탄 설계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핵실험을 했는데 핵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면 핵개발 과학자들은 문책을 면할 수 없고, 金正日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 북한과학자들은 여기서 꾀를 낸 것이다. 起爆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도 핵분열이 일어날 수 있게끔 분열성이 높은 ‘플루토늄 240’을 섞어놓았다. 실제 실험에서 起爆장치는 제대도 터지지 않았으나 플루토늄 240이 핵분열하여 터져주는 바람에(아주 약하게) 사상최소의 폭발력이나마 얻을 수 있었고, 金正日은 이를 핵실험 성공이라고 선전할 수 있었으며, 미국은 속으로는 비웃었지만 이를 ‘성공한 핵실험’(金正日이 그렇게 선전하니까)으로 간주하여 유엔안보리의 對北제재를 이끌어낸 것이다. 거짓과 선동을 중요한 체제유지 수단으로 이용해온 金正日은 거짓선동으로써 자신의 무덤을 판 격이다.

이런 북한의 핵실험 결과를 놓고 다음과 같은 推論을 할 수 있다.
1. 이런 북한의 실력으로 미뤄 미사일에 실을 만한 소형화된 핵탄두를 만드는 것은 10년내, 또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2. 나가사키급의 4t짜리 原始型 핵폭탄을 만드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추가 핵실험이 필요하다.
3. 지금 실력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핵폭탄이 아닌 핵폭발장치이다. 폭발력 400t은 1977년 이리역 폭파사고時 파괴력의 약10배이다. 당시 이리역 주변 반경 약500m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59명을 죽게 했던 이 사고는 열차에 싣고 있던 약30t의 TNT에 촛불이 옮겨붙어 일어났다. 金正日이 이 原始상태의 핵폭파장치를 배에 싣고 항구에 가져가서 폭파시킨다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을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한 다음엔 국제사회의 보복을 받아 金正日이 사라질 것이란 점이다. 미사일에 실을 수 없는 핵폭탄은 미국, 일본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배나 큰 폭격기로 운반해야 할 原始型 핵폭탄의 위협을 받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데 북한의 미사일과 핵폭탄이 한국엔 위협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6. 파키스탄 개보다 못한 食생활
-파키스탄 개는 쌀밥을 먹고, 김정일은 아직도 '이밥에 고기국'을 먹이지 못하고 있다.
파키스탄에 근무했던 한 북한 외교관은 한국으로 온 뒤 이런 증언을 했다.
'파키스탄에선 개를 놓아 키우는데 아무 집에서나 밥을 주어요. 하얀 쌀밥을 양푼에 담아 바깥에 내어놓으면 지나가던 개가 먹곤 해요. 1990년대 북한에선 수백만 명이 굶어죽어갈 때였습니다. 개가 쌀밥 먹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지대요. 김일성 김정일은 매년 '이밥에 고기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空約(공약)하곤 했는데, 파키스탄에선 개가 쌀밥을 먹고 있으니 우리 북한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존재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선 파키스탄 개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파키스탄 개가 쌀밥을 먹는다고 말하면 불평불만자로 몰려 수용소로 사라질까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


7. 年3억 달러를 아껴 300만을 굶겨죽인 자
-김정일이 옥수수를 연간 200만t씩만 수입했더라면 북한주민은 한 사람도 굶어죽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 무역담당 간부 출신 탈북자는 소름끼치는 秘話를 소개했다. 그 무렵 국제 곡물시장에서 옥수수 1t은 약150달러였다고 한다. 김정일이 매년 약3억 달러만 써서 연간 200만t의 옥수수만 수입했더라면 북한주민들은 한 사람도 굶어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김정일은 스위스 은행 등에 40억 달러 이상을 숨겨놓고 있었는데 식량구입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 탈북자는 '그러니 300만 명을 김정일이 굶겨죽였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8. 3000년분의 월급을 한꺼번에 받는 탈북자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 대부분이 북한의 부총리급만큼 잘 산다.

요사이 탈북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정부로부터 정착자금으로 받는 액수는 가족당 3000만원 이상이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3만 달러 이상이다. 북한 사람들의 평균 월급은 북한 돈으로 약3000원이다. 이는 암시장에서 1달러이다. 1년 월급은 약12 달러이다. 3만 달러라면 북한주민의 3000년분 월급이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 대부분이 북한의 장관급보다 잘 산다. 장관급이라야 몰 수 있는 자가용 자동차를 거의 모든 탈북자들이 갖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탈북자들 대부분이 김정일보다 잘 산다. 미국 등 해외여행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갈 수 없는 곳을 탈북자들은 간다. 김정일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니까 김정일보다 잘 사는 것이다.
1990년대 북한정권의 이종옥 부주석은 동남아를 방문할 때 호텔에 묵었다가 아침만 먹고 나와서는 점심 저녁 식사는 북한대사관 직원 집에서 대접받은 뒤 잠만 호텔로 돌아가서 잤다고 한다. 여행경비가 모자라서였다. 한 탈북자는 '북한에선 김정일을 빼면 모두 노예이다. 간부들은 上노예일 뿐이다'고 말했다. 북한에선 아무리 출세해도 김정일의 말 한 마디만 떨어지면 이유도 없이 수용소로 간다.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다.

9. 김정일, 남북頂上회담 원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집권을 기정사실로 보고 대비할지도

북한통일전선부 소속이었던 한 탈북자는 김정일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을 내어놓았다. 그 요약.
<최근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은 오는 8월15일에 서울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 현 정부 또한 현재의 지지도를 끌어 올리는 돌파구를 남북정상회담에서 찾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북한의 태도를 분석해보면 김정일은 남북頂上회담을 원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첫째로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에서 잘 알 수 있다. 북한은 올해를 ‘5·25교시 40돌’로 규정했다. ‘5·25교시’란 1967년 이른바 종파청산을 한다며 대대적인 숙청을 할 때 김일성이 한 말들을 종합한 것이다. 북한이 올해를 제2의 종파청산, 즉 사상단합과 주민결속의 해로 규정했다는 분석이다.
이는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전후로 그 어떤 전략적 액션도 취할 수 없는 북한의 딱한 처지 때문이다. 현재 김정일로서는 2차, 3차 핵실험 협박으로 핵전략을 계속 유지함으로서 미국으로 하여금 더 많은 양보를 이끌어내고 싶지만 만약 그럴 경우 올림픽을 준비하는 중국으로부터 당근 대신 채찍 맛을 볼 것은 뻔하다. 결국 올해와 내년은 이 두 해는 북한에 있어서 전략적 공백이 될 수밖에 없다.
하여 북한은 향후 핵전략에 대비하기 위해, 또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를 감안하여 그 대응책으로 올해를 내부결속의 해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5·25정서에 배치되는 남북정상회담을 한다는 것은 그러지 않아도 한국 환상에 젖어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더 자극하여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공동사설에서 밝힌 對南과업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정부가 작년부터 추진하던 사업이다. 북한이 우리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만큼 만약 북한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면 對南과업 분야에서 그에 대한 전술도 피력했을 것이다. 김대중이나 자칭 진보세력 중 大權인물을 초청하거나 아니면 김정일은 답방하지 않더라도 권력서열 2위로 알려진 김영남 최고상임위원회 위원장을 訪韓시켜 소위 ‘남북화해’를 부각시켰을 것이다.
그 외에도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성을 높이기 위해 북한이 보여줄 수 있는 전술 카드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공동사설에서 북한은 형식적으로 反한나라당 세력의 결속을 호소했을 뿐 구체적인 전술들은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세력도 민족이익을 위해서는 포섭할 수 있다는 이른바 민족중시 노선을 호소했다.
이는 북한이 한나라당의 현 지지도를 의식한 때문인지 反한나라당 투쟁 의지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로 남북정상회담의 가치 때문이다.
북한 통일전선부가 김대중의 남북정상회담 제의에 응한 것은 전략적으로나 실리 차원에서 그 가치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북한을 짝사랑 하지만 북한은 미국을 짝사랑 하고 있다. 김정일이 가장 친해지고 싶은 나라는 미국이다.
북한이 6·15정상회담을 한 이유는 미북관계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화해를 미국에 보여줘야 할 시각적 효과가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대중과의 정상회담이 끝나기 바쁘게 김정일은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국장을 미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햇볕정책 역이용전략이 필요했던 북한으로서는 한국 정치권에 햇볕정책이 고착되도록 김대중을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은 김대중에 비하면 아무것도 없는 빈 달구지이기 때문에 頂上회담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북한은 생각하는 듯하다.
넷째로 6자 회담의 再開와도 관련된다. 이 회담이 잘 풀리면 김정일은 남한을 거치지 않고 곧장 미국과 담판하려 들 것이다. 북한이 美北 관계 회복을 원하는 이유는 미국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며, 내년 북경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것이고, 한나라당이 집권했을 경우 美北관계에 남북관계를 종속시키자는 것이다>

10. 臺灣(대만)의 左統세력
-장개석의 국민당 세력이 親중공 통일 노선을 취하고 민주화세력은 독립노선이다. 內戰的 대만 사정을 해부한다.

臺灣(타이완)의 공식國名은 무엇일까? 自由中國? 아니다. 中華民國이다. 孫文의 신해혁명 이후 蔣介石이 대만으로 밀려날 때까지 썼던 國名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蔣介石과 그 아들 蔣經國은 대만이 중국을 수복하여 통일하는 것을 국가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臺灣은 냉전시절에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국가로 인정받아 유엔안보리상임이사국 대우를 받았다. 유엔은 중공을 한국전쟁의 침략자로 규정했고 중국의 유엔 가입을 거부해왔다. 1971년 유엔총회는 대만을 몰아내고 중공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고 유엔안보리상임이사국으로 앉혔다. 유엔에서 밀려난 대만은 세계은행이나 세계보건기구(WHO)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蔣經國이 죽은 뒤 李登輝가 대통령이 되었다. 李 대통령은 400년 전 중국본토에서 건너온 本省人 출신이다. 대만 인구의 약86%가 本省人이고 14%가 1949년에 蔣介石과 함께 건너온 外省人이다. 대만은 국민당이 계엄령통치를 해오다가 민주화 과정을 밟게 되는데 여기서 중대한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중국과 통일할 것인가, 아니면 대만의 독립을 선언할 것인가. 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오랫동안 反共통일을 주장해왔다. 국민당은 중국과 통일해야 한다는 일종의 親共통일 노선으로 변했다. 물론 중국은 一國兩制를 주장한다. 중국의 사회주의와 대만의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 통일하자는 것이다. 이 통일노선을 지지하는 것은 장개석과 함께 본토에서 건너온 外省人들이다.
선주민인 86%의 本省人들은 대만이 중국과 합칠 게 아니라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4%의 外省人들은 국민당 정부 덕분에 정치, 군대, 언론, 사법부 등 지배기구를 장악해왔다. 그들은 本省人들이 쓰는 대만어를 공용어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방송에선 北京語만 쓰도록 했다.

2000년에 야당인 民進黨의 첸수빈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本省人이다. 첸 대통령은 대만의 독립을 주장한다. 중국은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면 武力침공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外省人과 국민당 세력은 한때 원수였던 중국과 친하게 접촉하면서 反독립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독립노선의 本省人들은 한때 反共통일 세력이던 국민당 세력을 左統세력이라고 부른다. 좌익통일파라는 뜻이다. 蔣介石의 후예들이 親共통일세력으로 바뀐 것은 대만이 내전적 상황으로 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당 세력은 정권을 民進黨에 넘겨주었으나 아직도 언론, 군대, 사법, 외교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民進黨의 첸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대만 언론의 약80%는 국민당 계열인데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한다. 중국자금이 간접투자되고 있는 언론사도 많다는 것이다. 이들 언론은 左統계열이므로 현 정권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독립파의 무기는 국민투표이다. 국민투표로써 대만의 독립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다. 중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이므로 국민투표는 중국 全域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만이 內戰상태로 가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의 힘 덕분이다.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으로 國家노선의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총을 든 싸움으로 악화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군대이다. 군의 지휘부는 아직도 국민당 계열이 잡고 있다. 국민당 계열이 親中共통일노선으로 도는 바람에 군대도 主敵개념이 애매해져버렸다고 한다.

시간은 本省人과 독립노선쪽이라는 분석도 있다. 外省人들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外省人의 자손들도 本土에 대한 향수를 잊어갈 때 대만은 자연히 독립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으리란 것이다. 문제는 그 전에 중국이 개입한다든지, 말로 하는 內戰이 實戰으로 변할 때이다.

대만 사람들은 올해 한국 대통령 선거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우파가 승리하여 정권을 되찾아오게 되면 民進黨의 독립노선에 큰 힘을 실어주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판 左統세력에 대한 한국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2차 대전후 아시아에서 성공한 민주주의는 일본, 한국, 대만이다. 한국과 대만은 민주주의를 발전시켜가면서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二重의 고민을 안고 있다. 두 나라 모두 통일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자유민주세력이 승리하여야 한다. 한반도에선 한국이 북한정권을 흡수통일하여 자유민주체제로 나아가는 것이 민주주의 승리의 길이고, 대만에서는 민주주의 국가인 대만이 독재국가인 중국과 헤어져 독립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이기는 길이다. 물론 중국이 민주화되면 대만도 중국과 자연스럽게 통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중국이 자유민주국가가 되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다. 그 100년간 중국과 대만이 지금과 같은 불안한 공존을 지속해갈 수 있다면 流血사태 없이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만의 本省人들은 미국과 일본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견제하려고 한다. 올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민주세력이 親독재세력을 누르고 정권을 되찾아오면 미국-대만-일본-한국의 자유동맹이 생겨 중국-북한의 독재동맹을 포위할 수 있을지 모른다.

[趙甲濟의 최신정보 파일]『목숨 걸지 않고 대통령 되겠다는 건 도둑 심보』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와 논평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1) 제자 43명 중 13명이 非命橫死
(2) 『목숨 걸지 않고 대통령 되겠다는 건 도둑 심보』
(3) 탈북자들이 세운 대한민국
(4) 『金正日은 盧武鉉을 만나지 않는다』
(5) 『金正日은 非이념형 독재자』
(6) 金日成과 金正日이 죽인 屍身은 9000km
(7) 일본 정부가 펼친「북한인권계몽週間 행사」
(8) 진짜로 준비된 대통령 레이건
(9) 李承晩도 極右로 불렸다!
(10)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11) 李明博씨는 金正日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인가?
(12) 朴槿惠씨는 왜 2위로 밀렸나?
(13) 과거사委,『이수근은 간첩이 아님』
(14) 별세한 柳陽洙 회장 추억
(15) 서울市의 오만하고 한심한 用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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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 43명 중 13명이 非命橫死

明治유신의 주역들을 길러 냈던 요시다 쇼인의 경우
―교육과 희생 없이는 역사를 움직일 수 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재작년에 일본 도쿄의 자민당 사무실에서 아베 신조 의원(現 총리)을 인터뷰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치인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이 있습니까.

『저의 고향은 야마구치縣(현), 도쿠가와 시절엔 조슈한(長州藩)입니다만, 여기에 메이지(明治)유신의 志士들을 많이 길러 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란 선생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孟子(맹자)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誠意를 다하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는 말씀입니다』

그가 말한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근대화 혁명인 明治유신의 주체세력을 길러낸 스승으로 불린다. 政界(정계) 거물 이토 히로부미, 軍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明治 시기의 주역들이 그의 제자였다. 아베 총리는 야마구치縣 출신으로선 여덟 번째 총리이다. 요시다 쇼인이란 선생이 있었기에 이 작은 지역이 일본 역대 정권의 핵심인물들을 배출한 것이다.

明治維新의 주역들을 길러 낸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그러나 만 30세에 처형됐다. 그는 「도쿠가와 幕府(막부)를 타도하고 서구식의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르쳤다. 조슈한에서 서당 비슷한 松下村塾(송하촌숙)을 열어 문하생들을 교육한 지 4년째 되는 해, 즉 1859년 막부에 의해 역모죄로 몰려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가르친 조슈한의 제자들이 지금의 가고시마(규슈), 고치(시고쿠) 무사들과 손잡고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明治유신이 일어난 것은 그가 죽은 지 9년 뒤였다.

일본의 이즈(伊豆) 반도 끝에 있는 시모다(下田) 항구는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의해서 개항된 곳으로 유명하다. 요시다 쇼인은 이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옮겨 타고 정박 중이던 美 해군 함정에 찾아가서 渡美(도미)의 편의를 보아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이때 요시다 쇼인이 묵었던 집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이 도시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통계가 있었다.

그가 松下村塾에서 가르친 43명의 제자들은 亂世(난세)에 어떤 운명을 맞았는가? 할복자살 6명, 戰死 1명,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사망(討死) 4명, 참수형 1명, 옥사 1명. 13명이 요사이 말로 하면 非命橫死(비명횡사)한 것이다. 요시다의 제자들 중 明治유신의 성공으로 출세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 등 5명 정도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데는 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志士들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통계이다.


(2) 『목숨 걸지 않고 대통령 되겠다는 건 도둑 심보』

柳根一: 『정권을 건 싸움에서 공짜는 없다』

黃長燁(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비서는 지난 연말 송년 행사장에서 『북한이 붕괴 직전에 이르러 5년을 지탱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親北(친북)정책으로 몇 배나 改惡(개악)돼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黃長燁 선생은 金正日(김정일)을 민족반역자라고 표현하면서 2007년에는 애국세력이 대동단결하여 親北세력을 정리하자고 역설했다.

柳根一(유근일) 前 조선일보 주필은 인사말에서 金正日 정권을 상대로 싸우지 않으려는 대통령 지망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국무총리까지는 누가 시켜 주지만 대통령은 스스로 되는 것이다』면서 『朴正熙·金泳三·金大中씨가 다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둑 심보」라면서 『정권을 건 싸움에서 공짜는 없다』고 말했다.


(3) 탈북자들이 세운 대한민국

金日成과 金正日이 내몬 사람들이 한국으로 와서 反共의 보루를 만들었다. 제 무덤을 판 것이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年初(연초)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있었던 黃長燁 선생 위로 신년회에 참석했다. 올해 만 84세인 黃선생은 아직 건강이 좋은 듯했다. 이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金正日과 從金세력의 급소를 찌르는 비수 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 이날 모임에서 李東馥(이동복) 前 국회의원(남북고위급회담 남측 대변인 출신)은 재미있는 말을 했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탈북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李承晩 대통령부터가 북한 출신 아닙니까? 요사이 탈북자는 1만 명 정도이지만 6·25 전쟁 전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수많은 1세대 탈북자들이 여기서 反共(반공)의 보루를 만든 것입니다. 6·25 남침 때 북한군과 맞서 싸웠던 국군의 지휘부는 거의가 북한 출신 월남자들이었습니다』

동석했던 李哲承(이철승·前 신민당 대표) 선생이 비슷한 말을 했다. 李선생은 광복 직후 反共학생운동을 주도하여 건국에 큰 功(공)을 세웠다.

요덕수용소 출신 姜哲煥 朝鮮日報 기자

『북한의 신의주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反蘇(반소)시위를 벌였습니다. 탄압받은 주동자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공산주의의 만행을 고발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 증언을 듣고 反共운동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엔 탈북자 출신들이 많이 참석했다. 「탈북자동지회」 홍순경 회장,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씨, 요덕수용소 출신 강철환 기자 등이었다. 이들은 남한 사회에 북한의 지옥상을 알려 주어 언론과 국민들이 깨어나게 한 귀중한 증언자들이다.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이런 탈북자들이 10만 명만 된다면 從金세력과 함께 金正日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金日成과 소련과 공산당이 싫어 월남한 북한인들이 한국에서 기독교를 더욱 확산시켰다. 남한의 기독교化는 남한의 反共민주화와 궤를 같이한다. 결국 金日成-金正日의 惡行(악행)이 남한에서 자신의 敵對세력을 만들어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應報(응보)이다.


(4) 『金正日은 盧武鉉을 만나지 않는다』

일부 북한전문가들 견해:『인기 떨어진 말년의 대통령을 만나 무얼 하겠는가. 김영남을 대신 보낼 가능성은 있다』

盧武鉉 대통령

金正日은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는 盧武鉉대통령과 회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전문가를 두 사람 만났다. 한 사람은 일본 정부 관리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북한의 對南공작부서 출신 탈북자이다. 올해 상반기에 盧·金 회담이 있을 것이라는 다수설과 배치되는 이들의 시각을 소개한다.

1) 金正日은 정말로 자신을 神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한다. 인기가 떨어진 말년의 남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위신에 상처를 준다고 판단할 것이다. 제2인자 격인 김영남을 대신 남쪽으로 내려 보내 만나게 할 순 있다.

2) 2000년 6월에 金正日이 金大中 당시 대통령을 만난 것은 미국과 담판하기 위한 징검다리 작전이었다. 실제로 평양회담 이후 美·北의 고위급 접촉이 이뤄져 조명록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고, 올브라이트 美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었다. 金正日은 核무기라는 카드를 가지고 미국과 담판을 하려고 하지, 인기가 급락한 盧대통령을 상대로 하진 않을 것이다.

3) 金正日은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아도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공갈을 칠 수 있고, 당당하게 얻어먹을 수 있다. 그러나 親한나라당 정책은 불가능하다. 그런 노선을 취하면 남한 내의 親北세력, 즉 赤化기지를 잃는다. 한나라당이 집권했을 때 金正日은 이를 이용하여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내부 단속을 할 수 있다.

金正日

4) 金正日은 非이념형 독재자, 즉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며 가치관이 全無한 독재자이므로 북한정권이나 북한주민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해서 盧대통령을 만나지는 않는다. 金大中 前 대통령처럼 현금 뇌물을 듬뿍 바칠 수 있으면 모를까.

5) 核실험 이후 남북관계나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金正日은 가동 중인 원자로의 동결과 국제사찰을 수용하는 선까지는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스처는 미국을 상대로 할 것이다. 核실험으로 해서 남북관계는 美·北관계에 더욱 종속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6) 2007년이 金正日을 압박할 수 있는 찬스이다. 2008년에 北京 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에 중국은 내년에 金正日이 추가 核실험을 하여 올림픽 분위기를 깨는 짓을 한사코 막으려 할 것이다. 金正日이 말을 듣지 않으면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金正日을 제거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7) 盧武鉉 대통령이 金正日에게 줄 것이 없다. 金正日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연합사 해체 등 赤化노선에 동조한 점이 많은데, 이기주의자 金正日은 이것보다는 현금지원을 원할 것이다. 金正日이 해외 비자금에 대한 미국의 압박을 못 견뎌 하는 것은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자기 돈에 대한 간섭을 못 참아하는 것이 金正日이다.


(5) 『金正日은 非이념형 독재자』

수백만 명의 인간을 죽여서라도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利己主義의 화신이다.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의 어린이들.

理念(이념)이란, 黃長燁 선생의 定義(정의)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이다. 이념이란 公的인 가치관이다. 스탈린·毛澤東(모택동)·히틀러는 모두 이념형 독재자였다. 金日成 또한 남침전쟁을 통해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이념형 독재자로 볼 수 있다.

金正日은 다르다는 의견이 있다. 그의 행태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들과 북한정권 내에서 그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 金正日은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민족이든, 북한노동당이든 어떤 집단을 위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과 이해관계에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의사 결정도 獨斷(독단)한다. 혼자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의 이념이라면 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후계자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후계자를 내세울 시간이 지났는데 별 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고민해서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어 준다는 생각만 해도 억울한 모양이다. 그는 북한정권이 어차피 자기 代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그는 측근들이 통일 이야기를 하면 화를 낸다고 한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 즉 자신의 안전이 급선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과 권한이 침해받거나 도전받는다고 판단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미국이 2006년 9월 金正日의 비자금을 취급하는 마카오 은행과 미국 은행 사이의 거래를 금지시키자 국제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對北거래를 중단하는, 이른바 금융제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직접 북한을 상대로 취한 제재가 아닌데 국제 금융을 지배하는 미국의 방침에 대해서 국제 금융기관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때문이다.

金正日이 이 조치에 발끈한 것은 자신의 돈줄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미사일을 쏘고, 核실험을 한 것이 무슨 大전략이 있어서가 아니고, 자신의 금고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한 지극히 개인적인 도발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 CIA의 북한담당 분석관 출신 한 인사는 『金正日은 후계자를 절대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와 측근들은 가이아나의 인민사원 광신도들처럼 동반자폭과 집단자살로 종말을 고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金正日은 그 어떤 인간적 배려도 하지 않는, 인간성과 이타심이 철저히 배제된 글자 그대로 「악마」라고 단언하는 기독교인 對北전문가도 있다.


(6) 金日成과 金正日이 죽인 屍身은 9000km

그 屍身이 깔린 도로를 서울에서 파리까지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자에게 굴종하는 자들의 죗값은?

홍위병들을 사열하는 毛澤東.

金日成은 동족을 치기 위해 毛澤東·스탈린을 불러들인 남침전쟁을 벌였다가 한반도를 국제 전쟁터로 만들었다. 약300만 명이 죽었다. 300만 구의 시체를 일렬로 고속도로 위에 눕혀 놓으면(평균 키 150cm 기준) 그 길이가 약 4500km이다. 그 시체가 깔린 서울-평양-北京 도로를 차로써 며칠을 달려도 끝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 300만의 생명 하나 하나는 이 지구보다 무거운 값을 가졌다. 그 한 구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울부짖었을 아내, 아버지, 어머니, 남편의 고통이 지금도 한반도의 하늘과 땅을 덮고 있다.

金日成의 아들 金正日은 개혁·개방 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의 편의를 위해서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식량수입에 비자금을 한 푼도 쓰지 않음으로써 300만 명을 또 굶겨 죽였다. 父子가 약 600만 명을 죽였다. 600만 명의 屍身(시신)을 도로 위에 일렬로 깔면 서울에서 파리까지 그 주검 위로만 달릴 수 있다.

동족학살에서 세계 1위는 毛澤東이다. 그는 400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을 죽였다. 盧武鉉 대통령은 이 毛澤東을 중국인 중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민족이 동족 600만의 죽음으로써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폭로했는데도 선거를 통해서 左派들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이 유권자들이었다. 이 과오를 피로써 씻으려면 또 몇백만의 한국인들이 죽어야 할까?


(7) 일본 정부가 펼친 「북한인권계몽週間 행사」

한국 납북자 가족들은 盧정권 대신 일본 정부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2002년 9월, 拉北된 딸 요코다 메구미의 소식을 접하고 오열하는 요코다 시게루氏(왼쪽)와 요코다 사키에氏.

2006년 12월14일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에 있는 공회당에서 일본 정부가 주최한 북한 납치자 관련 대중집회에 참석했다. 그해 6월 성립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일본 정부는 「북한인권계몽주간」을 선포하고 여러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탈북자, 납북자 가족들이 이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히비야 공회당에선 북한납치자 문제를 잘 다루어 총리가 된 아베氏가 연사로 나왔다. 그는 『내가 총리로 있는 한 납치자 문제의 완전한 해결 없이는 절대로 북한과 수교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이 대목에서 관중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북한정권에 의한 국제납치 문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이 대회에 초청받았다.

일본 정부·국회·언론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납치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國力(국력)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중한 일본인들은 좀처럼 본심을 드러내지 않지만 느낌으로선 일본이 미국보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金正日 정권의 붕괴나 無力化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 세미나의 결론을 맺은 사토 가쓰미 구출회 회장은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인 金正日의 제거 없이는 납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일본이 金正日로부터 대단한 양보를 받아낸 것 같은데 일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2002년 9월 평양회담에서 고이즈미 당시 총리는 金正日로부터 일본인 납치의 자백을 받았고, 16명(지금은 17명으로 일본 정부가 확인)의 납치자 중 생존자 5명을 데리고 왔다. 일본은 북한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 납치자들이 살아 있다고 전제하고 북한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압박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인권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이 선진국이고 일본은 후진국이었다. 1991년 7월호 月刊朝鮮은 북한공작원 辛光洙(신광수)에 의한 일본인 하라 타다아키氏 납치 사건을 현지 취재로 상세하게 다뤘다. 당시 편집장으로서 이 기사를 읽어본 나는, 일본 경찰이 이 명백한 납치사건에 대해서 쉬쉬하면서 공개수사를 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북한에 의한 납치임이 안기부 수사로 밝혀졌는데도 북한당국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나」 하고 의아해했다.

그런 한국이 북한인권 문제에 관한 한 지금은 후진국이 되어 버렸고, 일본이 오히려 선진국이 된 것을 이번에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逆轉(역전)은 어떻게 이뤄졌던가? 일본의 용감한 기자들, 현대코리아 그룹 인사들, 그리고 납치자 가족들이 약 10년간 끈질기게 조사해 진실을 밝혀 내고 이를 근거로 일본 정치인을 움직이고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나서고, 드디어 金正日의 자백을 받아 내고 그렇게 되니 일본의 여론이 움직이고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1977년 11월15일 니카다 해안에서 북한공작원이 납치해 간 13세 중학생 요코다 메구미 사건이었다. 요코다 메구미氏를 북한에서 보았다는 탈북 공작원 安明進(안명진)씨의 증언이 진상규명의 돌파구였다. 요코다 소녀(지금은 40代)의 부모는 총리 이상으로 일본인들에게 잘 알려진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일본에서 천황·총리만큼 기자들을 많이 끌고 다니는 인물이 요코다 시게루(아버지)-요코다 사키에(어머니) 부부일 것이다.

이 부모는 납북된 딸의 實名(실명)을 걸고 공개적으로 납치자 문제를 호소했다. 實名을 공개하면 북한당국이 딸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도 했으나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지난해 12월14일의 집회에서도 요코다 부모가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조용한 강연을 했다. 어머니 요코다 사키에氏의 차분한 설명이 감동적이었다. 사키에氏는 일본 경찰이 일찍 공개수사를 했더라면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딸이 실종된 뒤 지옥 같은 하루하루의 고통에 대해 어머니 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金正日 이 자가 정말 악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사키에氏는 경찰로부터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와서 확인해 달라」는 전화가 올 때마다 온몸이 떨리고 맥이 빠졌다고 한다.

이날 강연에서 요코다 사키에氏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다. 6·25 때 한국에서 끌려간 10만 명 이상의 납북자들, 휴전 후 납치된 500명, 그리고 북한 강제수용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다루는 일본의 공무원과 구출회, 그리고 가족회 사람들은 한국인 납북자와 탈북자, 그리고 북한 내의 인권탄압을 반드시 언급한다. 납치자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한국인 납치자 가족들은 일본 정부인사들을 만나면 『한국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에 호소해 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한다. 盧武鉉·金大中 정부가 외면하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국이 버린 가족의 문제를 외국 정부에 호소하려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12월14일 오후 국제 세미나 참석자들이 아소 외무장관을 만났을 때 한국 납북자 가족 대표들로부터 그런 부탁이 나왔다. 아소 장관은 말했다.

『일본 정부는 외국과 頂上(정상)회담이나 외상회담을 할 때마다 반드시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고 협력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내각의 확고한 방침입니다』

아베 총리는 취임 직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총리에게 납치자 관련 팸플릿을 건네주면서 『북한이 중국사람도 납치해 갔으니 관심을 가져 달라』는 취지의 당부를 했다고 한다.

아베氏는 고이즈미 총리 시절 납치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한 정치인으로 부각되어 50代 초반에 집권 자민당의 총재=日本 총리가 되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북한인권파」를 黨과 내각의 요직에 앉혔다. 총리 자신이 납치대책본부장을 겸하고 全각료가 위원이다. 2007년 12월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인권외면파」인 從金세력이 몰락하고, 「인권파」가 집권한다면 韓·美·日 사이의 공조가 부활할 것이다.


(8) 진짜로 준비된 대통령 레이건

그는 국내 戰線에서 20년간 매일 공산당과 싸워 이겼던 사람이다. 그는 이 경험을 소련에 적용해서 이겼다.

1983년 11월 DMZ를 둘러보는 레이건 美 대통령.

1980년대 후반, 소련을 필두로 하는 국제 공산주의 제국을 붕괴시킨 主役은 로널드 레이건 美 대통령이었다. 助役은 요한 바오로 2세, 대처 영국 총리, 바웬사, 그리고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다. 美·蘇 냉전은 스탈린이 도발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이에 응전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루먼은 자신과 미국의 對蘇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6·25 전쟁에 참전해 한국을 구했다. 트루먼과 레이건이 냉전을 승리로 이끈 두 「巨人」이었다. 두 사람은 민주당·공화당으로 입장은 달랐지만 공산주의를 惡의 세력으로 본 점에선 같았다.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배우 출신의 카우보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레이건을 「근사하게 생긴 바보」라고 본 한국인들이 많았다. 레이건은 위대한 인물에게 필수적인 「위대한 관점」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관점이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능력을 뜻한다.

레이건이 1981년에 집권해 1989년에 물러날 때까지 공산주의 세력을 코너로 몰아 항복을 받아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든 힘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전환이 우연한 인물의 우연한 행위로써 이뤄질 리는 없다.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은 그 순간을 위해 준비된 인물이다. 레이건이 그러했다. 그는 20년간 미국의 국내 戰線(전선)에서 공산주의와 매일 싸워서 이겼던 사람이다.

배우로서 성공했던 레이건은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영화배우협회」의 핵심 멤버나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했다. 주먹다짐을 하고 테러위협을 받아 가면서 그는 좌익들과 매일 싸웠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는 이런 對共투쟁의 경험을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본질과 생리, 그리고 전술을 알게 되었고, 대통령이 된 뒤 이 경험을 살려 국제공산주의자들을 분쇄할 수 있었다.

레이건은 공산주의자들을, 「자유를 파괴하기 위한 敵들 중 가장 잘 조직되고 유능한 세력」이라고 평했다. 그는 1960년에 다시 영화배우조합 위원장으로 뽑혔는데 「러시아와의 이념전쟁이야말로 이 세계의 가장 큰 문제」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는 평화至上(지상)주의자들을 경멸했다. 평화지상주의자들이 『지금은 평화시대이므로 이 평화를 깨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국을 패배의 길로 내몰고 있는 독약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미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와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1960년대 레이건의 이 말은 어리석은 2007년의 한국인을 향해서 하는 말처럼 들린다. 金正日과 從金세력은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盧武鉉·金大中 그리고 비겁한 일부 한국인들은 『지금은 남북화해 교류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공산당 운운 하는 당신들은 전쟁하자는 이야기냐』라고 말한다.

1960년대 레이건은 이런 한국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논리로써 이렇게 경고했다.

『만약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지고, 그리하여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면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패배를 방지하기 위한 행동에서 가장 비겁했기 때문에 우리는 졌노라고』

이런 레이건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 소련의 허점을 발견하자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그 허점을 확대시켜 갔고, 결국 공산권의 총붕괴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81년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미국은 카터 대통령의 失政(실정)으로 인해 총퇴각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군의 지배하로 넘어가고 反共 팔레비 정권이 무너져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손에 장악되었다. 이란 혁명정부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고 444일 동안 미국을 갖고 놀았다. 이들을 구출하려던 미국의 특공작전은 이륙도 해보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실패했다. 미국의 코밑인 니카라과에서는 산디니스트 공산주의 정권이 流血(유혈)혁명에 성공했다.

이러한 때 집권한 레이건은 수비에서 공세로 전환해 소련 공산제국을 붕괴시키는 大전략을 추진한다. 목표를 엄청 높이 잡은 것이다. 그 大전략의 핵심은 자유노조 운동이 일어난 폴란드였다.

레이건은 『폴란드를 민주화시키면 안전핀이 빠진 수류탄처럼 동구 공산권이 터져 버리고, 그 파편으로 소련까지 무너진다』는 계산을 했다. 레이건이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영국의 대처 총리와 공조해 가면서 소련을 경제적·군사적·외교적으로 몰아붙인 결과, 소련 지도부가 내놓은 代案이 고르바초프였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정치적·외교적으로 지원했지만 군사적으로는 더 밀어붙였다. 즉, 고르바초프의 체제해체적 개혁을 응원함으로써 소련이 내부적으로 무너지도록 일종의 자살을 유도했던 것이다. 레이건이야말로 「惡의 제국」과 정면대결함으로써 이를 해체하기 위해 훈련받고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9) 李承晩도 極右로 불렸다!

남로당, 左右합작파, 美 군정과 싸우면서 오로지 신념과 여론의 힘에 의지해 대한민국을 세웠던 이분은 참 외로웠다.

1948년 7월24일 취임선서를 하는 李承晩 대통령.

요즘 「대한민국 建國의 內幕」이란 책을 다시 정독하고 있다. 李承晩 대통령의 친구이자 고문이었던 미국인 학자 로버트 T. 올리버氏가 쓴 것을 朴日泳씨가 번역했다(啓明社). 1998년에 상·하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李承晩 대통령이 올리버氏에게 써 보낸 私信(사신)을 중심으로 하여 쓰였다. 李박사의 솔직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 李承晩을 가장 가까이서 실감 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 李承晩 대통령이 그 위대한 안목으로 해서 당했던 비난과 모함, 그로 인해 느꼈을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공산당의 본질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안 사람이 李박사였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기회주의자들과 미국이 그를 極右니 守舊세력이니 고집장이니 하는 말로써 공격한다. 朴憲永(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남로당은 남한의 공산화 노선을 추구하고 김규식-여운형系는 左右합작 노선을 좇아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赤化로 가는 길이 된다는 것이 李承晩의 확신이었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美 군정은 본국의 정책에 따라 左右합작 노선을 지지하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李承晩을 공산당만큼 미워한다. 1946년 말 이후 李承晩은 四面이 敵(적)이었다. 소련, 金日成·남로당·左右합작파·美 군정당국이 모두 李承晩의 反共자유민주주의 건국노선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李박사가 초지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신념과 일반 대중의 절대적 지지였다. 신념과 여론의 힘으로써 그는 포위망을 깨부수고 자신의 설계도대로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었다. 東歐에서 만들어진 左右합작 정부가 모조리 공산화되는 것을 본 트루먼 美 대통령이 對蘇 강경정책으로 선회한 것이 李承晩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으나 대한민국의 건국은 오로지 李承晩 노선의 자주적 승리였다.

요사이 교과서는 대한민국을 美 군정당국이 만들어 준 작품처럼 왜곡한다. 건국과정의 설명에서 李承晩의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오는 교과서도 있다(그것도 좀 낫다는 교과서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런 부분을 말살하고 넘어가는 현대사 교육이 좌익선동의 밥이 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광복 직후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남북한 좌익은 赤化노선이고 盧武鉉 세력은 赤化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左右합작 노선이다. 약 30%인 대한민국 수호세력만이 李承晩 노선을 이어받아 反共자유민주주의와 자유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아직도 李承晩 노선과 대한민국 수호 노선은 외롭고 의로운 길이다. 李承晩과 대한민국 수호세력이 똑같이 極右·守舊라고 불린 점은 흥미롭다. 좌익이 말하는 極右란 애국이고 독립운동이란 뜻이다. 훈장인 것이다.


(10)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닉슨 사면을 결정했던 포드 대통령은『정치인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여론조사가 아니라 결단이다』고 했다.

제럴드 포드 前 미국 대통령

지난 연말 他界(타계)한 미국의 제럴드 포드 前 대통령은 대학교 때는 미식축구팀의 名센터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구축함에서 근무했다. 태풍을 맞아 세 척의 구축함이 침몰해 778명이 죽는 사고가 났을 때 그의 배는 침몰을 면했다.

닉슨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던 멜빈 R. 레어드는 이 태풍 속에서 다른 구축함에 타고 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지난 12월29일자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문에서 친구인 포드에 대해서 감동적인 평가와 일화를 소개했다.

포드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으로 해서 정치위기를 위기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生死가 오가는 戰場의 위기에 비교하면 정치판의 위기는 위기도 아니다. 포드는 하원의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가 소속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지 못해 그 꿈이 이뤄지지 않은 대신에 그는 부통령으로서 상원의장이 되었고,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스피로 에그뉴 부통령이 스캔들로 사임하자 공화당의 하원총무였던 포드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1974년 8월9일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포드는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그 직후 포드는 닉슨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제하는 사면령을 내렸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을 은폐하고 국민들에게 거짓보고한 데 대해서 격앙되어 있었던 언론과 야당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레어드는 포드의 결심에 찬성하고, 일단 美 의회를 먼저 설득한 뒤 사면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포드는 즉각적인 사면령을 내렸다고 한다. 포드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미국이 매달려 있으면 있을수록 국가의 進路(진로)가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의 악몽」을 일찍 끝내겠다는 포드의 결정은 여론을 거슬렀다. 이는 그가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민주당 후보에게 진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포드의 닉슨 사면 결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이가 암살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당시 대통령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5년 전 에드워드 케네디는 「존 F 케네디의 용기 있는 사람들 상」을 포드 전 대통령에게 주는 자리에서 자신의 과오를 고백했다. 그는 『나도 포드 대통령의 사임조치에 반대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지만 시간은 과거사를 명확히 해준다. 지금 우리는 그때 포드 대통령이 취한 조치가 옳았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포드의 답사가 감동적이었다.

『정치인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여론조사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험적 결단을 어떻게 했느냐로 정해진다. 단기적으로 어떤 결단은 (그 영향이) 너무 엄청나고, 때로는 자기파멸적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가장 큰 人生 패배는 그런 결단의 용기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삶은 사는 것이 아니다』


(11) 李明博씨는 金正日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인가?

한국에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함은 『金正日 정권과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영토·계속성·헌법을 지켜 내고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인물을 고른다』는 의미이다.

李明博 前 서울시장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②항은 「大統領은 國家의 獨立·領土의 保全·國家의 繼續性과 憲法을 守護할 責務를 진다」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영토·계속성·헌법을 위협하는 집단은 한반도의 북반부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反국가단체 金正日 정권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함은 『金正日 정권과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영토·계속성·헌법을 지켜 내고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인물을 뽑는다』는 의미이다. 쉽게 줄이면 金正日과 맞서 대한민국을 지켜 낼 인물을 고르는 일이다. 이는 또한 대통령 선택의 제1 기준이 되어야 한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대통령 후보群 중 누가 이런 헌법의 요구에 가장 알맞은 인물인가? 현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수 유권자들은 李明博(이명박) 前 서울시장을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40%대의 지지율로 獨走(독주)상태이다. 李 前 시장에 대한 높은 지지율의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은 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인물』이란 신뢰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李씨는 경제와 행정에 유능한 사람이란 인상이 강하다. 현대건설의 회장으로서, 서울시장으로서 보여 준 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적증명서가 되고 있다.

『제발 마음 편하게 먹고살게 해주세요』라는 것이 국민들의 第一願望(제일원망)이라면 『제발 金正日을 무력화시켜 안보 걱정을 안 하도록 해달라』는 것이 제2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제1의 희망이 이뤄지려면 제2의 희망이 이뤄져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金正日의 위협과 남한內 金正日 세력의 도전을 눌러 성실한 국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경제는 표면상의 희망이고 내용상으로는 金正日과 親北좌익 세력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영토·계속성·헌법을 지켜 달라』는 것이 국민들의 일치된 소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李明博씨가 이 기준에 맞는 인물인지의 여부는 다음 몇 가지 기준으로 검증해봐야 할 것이다.

첫째, 李明博씨는 金大中 前 대통령과 金正日이 야합하여 만들어 낸 대한민국赤化전략문서인 6·15 선언을 폐기할 수 있는가. 李 前 시장은 6·15 선언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그는 金大中 前 대통령을 세배차 방문했다.

둘째, 북한의 核무장을 저지할 수 있는가.

셋째, 韓美동맹을 복구하고 韓美연합사 해체 기도를 중단시킬 수 있는가.

넷째, 공직사회로 침투하여 헌법정신을 유린하고 있는 극좌공산주의자들을 퇴출시킬 수 있는가.

다섯째, 對共수사기관을 활성화시켜 간첩수사를 재개할 수 있는가.

여섯째, 위선적인 평화통일이 아닌, 헌법적인 자유통일을 추진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일곱째, 북한인권 문제를 國政(국정)의 주요목표로 삼아 탈북자·납북자·국군포로들에게 광명을 안겨 줄 수 있는가.

여덟째, 법치와 질서를 회복시켜 줄 것인가.

아홉째, 국군의 主敵이 金正日 정권임을 再천명하고 軍의 對北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

열 번째, 대한민국 憲法 제3조가 개정이 불가능한 대한민국 憲法의 심장임을 이해하는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말이 신념화되어 있는가.

이 10개항에 대한 답은 너무 쉽다. 상식 있는 국민들이라면 100점을 맞을 수 있다. 인기영합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대중 정치인이 상식적 판단을 하기란 쉽지 않다. 지도자가 상식을 따르면 위대한 인물이 된다.

李明博씨의 경제제일주의가 확고한 안보관의 뒷받침을 받는다면 그의 獨走는 계속될 것이지만, 안보관이 허약하면 남북한 좌익의 계략과 도전에 직면했을 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 국민들이 보수인 줄 알고 뽑아 놓았더니 左派에게 이용당하여 결과적으로 宿主(숙주) 역할을 한 金泳三씨의 경우가 있다. 안보관은 李明博씨의 下體이고 경제는 上體이다.

안보관의 핵심은 그가 金正日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이다. 친구로 보는가? 主敵으로 보는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가? 그가 300만 同族학살자 金正日을 無力化시켜야 할 민족반역자로 보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李明博씨는 부시처럼 『金正日 그 자의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인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북한동포 생각만 하면 잠이 오지 않는 인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분노와 동정심은 태극기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애국심의 자연스런 반영이다.

2006년 8월15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남북한 좌익들이 서울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 李明博 시장이 서울시청 건물을 태극기로 감싸주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일이 생각난다.


(12) 朴槿惠씨는 왜 2위로 밀렸나?

작년의 피크타임에서 失足한 때문이다. 안보위기를 맞아 영웅 待望의 무대가 마련되었으나 구경꾼으로 만족했다.

朴槿惠 前 한나라당 대표

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은 당대표로서 두 번 한나라당을 구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탄핵 역풍을 만난 한나라당을 구하여 改憲(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선 한나라당의 大勝(대승)을 이끌어 盧武鉉 정권을 사실상의 레임덕 상태로 몰아넣고 대세론을 만들었다. 특히 목에 칼을 맞는 순간에 보여 준 초인적인 냉철함은 『역시 그 아버지의 그 딸』이란 찬사를 불렀다. 대표를 그만둔 이후의 한나라당 대표 및 최고위원 競選(경선)에서 親朴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가 지난해 여름. 여론조사에서 朴의원은 상당한 차이로 李明博씨를 누르고 1위를 달렸다. 이즈음 朴槿惠 대세론도 나왔다. 그 후 6개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朴의원 지지율은 李 前 시장의 반으로 줄어들었는가?

朴의원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바로 그때 한국은 안보위기로 접어들었다. 2006년 7월5일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했고, 盧정권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韓美연합사 해체 사업을 밀고 나갔다. 10월9일엔 드디어 金正日이 核실험을 했다. 이런 안보위기를 맞아 朴槿惠씨는 失足(실족)했다.

국가위기를 당해 불안에 빠진 국민들은 한나라당과 대통령 후보群이 金正日-盧武鉉 세력과 정면대결 자세를 취하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싸움에 앞장서 줄 것을 기대했다. 애국단체에선 서울역 광장이나 시청 앞 시위를 할 때 朴의원에게 잇따라 초대장을 보냈다. 李明博씨도 그러했지만 朴槿惠 의원은 안보투쟁에서 구경꾼이나 손님 역할 이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영웅 待望의 무대는 마련되었지만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무대는 朴槿惠씨에게 잘 어울리는 무대였다. 李明博씨는 「경제」와 「행정」이란 고유의 무대를 따로 가진 사람이다. 國難이란 무대는 朴正熙의 딸 朴槿惠씨의 독무대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대를 피했을 때의 타격도 朴씨에게 주로 갔다.

朴槿惠씨가 만약 애국투쟁의 선두에 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여론조사에서 1위로 달리고 있든지 李明博씨와 비슷할 것이다. 朴씨는 그야말로 잔 다르크役을 할 수 있었다. 가냘프게 보이고 앳되어 보이기도 하는 朴씨가 金正日이란 천하의 개망나니와 盧武鉉이란 「깽판 대통령」을 상대로 하여 나라를 지켜 내는 투쟁을 거리에서 광장에서 대중 속에서 벌이는 모습은 상상하기만 해도 아름답지 않은가?

朴槿惠씨는 굳이 그 役을 회피했다. 애국투쟁의 현장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70, 80代 老兵(노병)들이 30℃를 넘나드는 땡볕 아래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는데 朴씨는 앞장을 서지 않았다. 기억할 만한 기자회견도, 연설도 없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국가비상시기에 사실상 침묵한 것은 임무포기로 비쳐졌다.

자연스럽게 2002년의 朴槿惠-金正日 회담에 관한 의혹이 재발했다. 金正日에게 속아서, 또는 金正日이 무서워서 反核反金의 애국투쟁을 기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워낙 사건·사고가 많은 한국에선 잊혀지기도 쉽다. 몇 달간 朴槿惠씨는 거의 그런 존재가 되었다. 목에 칼을 맞았을 때 국민들이 가졌던 보호본능은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朴槿惠씨가 앞으로 李明博씨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안보 분야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는 李明博씨를 앞지르기 어려울 것이다. 李씨의 대운하 계획에 대응하려고 급조한 「열차페리 구상」은 너무 사소하다. 金正日을 「나의 맞수」라고 생각하고 북한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할 인질」이라고 여기고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6·15 선언 폐기를 공약하고, 親北좌익 척결을 다짐하며 韓美연합사 해체 계획의 중단을 약속하면서 「안보의 朴槿惠」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만회가 힘들 것이다.

李明博씨는 콘텐츠가 강하고 朴槿惠씨는 이미지가 강하다. 李明博의 경제와 朴槿惠의 안보가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서 하나로 융합된다면 한나라당은 無敵의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朴槿惠-李明博 경쟁은 치열할수록 좋다.


(13) 과거사委,『이수근은 간첩이 아님』

李大鎔, 趙甲濟씨 등 우파 인사들이 문제제기

1969년 2월 캄보디아에서 체포되어 압송되어 오는 李穗根.

정부 산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委)」가 소위 「위장간첩 李穗根(이수근) 사건」에 대해 『李穗根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고 2006년 12월19일에 최종 판단했다.

李씨는 1967년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탈출한 전직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서, 귀순 후 한국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對국민 반공강연 활동 등을 해온 인물이다. 그는 1969년 초 한국을 다시 탈출해 홍콩을 경유하여 베트남에 들어갔다가 체포됐고, 그해 7월 「위장간첩」이라는 지탄 속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李穗根이 정말로 위장귀순한 간첩이었는지는 논란이 있었다. 李씨를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했던 李大鎔 당시 주월공사·趙甲濟 前 月刊朝鮮 사장이 글과 증언을 통해서 『李穗根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고 주장해 왔다.

과거사委의 결정은 이 같은 문제 제기를 국가 차원에서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사委는 결정문을 통해 『이수근이 귀순 후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및 在北 가족의 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한국을 출국하자, 중앙정보부가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 처형하여 귀순자의 생명권이 박탈된 非인도적·反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결정문은 『국가는 수사과정에서 불법감금 등에 의존한 무리한 기소 등에 대해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국가는 확정판결에 대해 피해자들과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再審(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1989년 3월호 月刊朝鮮에 실어 논란의 불을 지폈던 趙甲濟 기자(조갑제닷컴 대표)는 『이수근 사건의 진실규명은 애국자유진영 인사들이 단서를 열어 줬다는 점에서, 이들이 과거 정권의 잘못까지 감싸고 도는 사람들이 아님을 입증해 준 사례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과거사委는 6·25 전쟁 중 있었던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국가범죄 행위와 함께 규명해야 공평하다. 약10만 명이 좌익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수근 사건 조작을 지시한 당시 중앙정보부장 金炯旭(김형욱) 등 특정인물의 잘못을 들어 정권이나 정보기관 전체를 매도하는 논리적 비약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고 했다.

趙대표는 『眞實(진실)은 단편적인 事實(사실)들이 모여야 드러나는 총체적 모습인 만큼, 공평성을 결여한 사실규명은 결코 진실규명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金成昱(미래한국 객원기자)〉


(14) 별세한 柳陽洙 회장 추억

朴正熙와 맺은 인연의 소중함을 생애를 걸고 지킨 분. 군인·외교관·장관·기업인·사회단체장으로서 쉼 없는 公人생활을 했던 그는 별세 직전까지 나라 걱정을 했다.

柳陽洙「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

柳陽洙(유양수) 「朴正熙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 지난 1월1일 밤 별세했다. 1923년 출생이니 향년 84세였다. 柳회장은 군인·외교관·장관·기업인·사회단체장으로서 쉼 없는 公人생활을 했다. 柳회장은 지난해 여름부터 癌투병을 해왔다. 수술 이후 경과가 좋지 않았다. 원래 날씬한 분이 더욱 여위어 갔다. 두 달 전 서울 마포에 있는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더니 필자의 「朴正熙 전기가 언제 출판되느냐」고 물었다. 보름 전 필자가 외국에 가 있는데 柳회장이 또 전화를 걸어와 『언제 나오느냐』고 재촉하듯이 묻는 것이었다.

柳회장은 별세 직전까지 『나라가 이 모양인데,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 되는데. 특히 2007년은 중요한 해가 아닌가』라면서 자신의 몸보다는 나라 걱정을 더 많이 했다고 한다.

朴正熙기념사업회는 金大中-盧武鉉 정부가 국가지원금 200억원을 묶어 놓고 지출을 못 하게 하는 바람에 서울 상암동의 기념관 공사를 중단시켜 놓고 있다. 2007년 柳회장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1심에서 재판부는 국가가 200억원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했으나 정부가 항소했다.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신경을 많이 썼던 柳회장은 그야말로 公職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꽉 채운 분이다.

필자가 柳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5월13일 부산항에서였다. 그해 4월30일 월남의 사이공이 월맹군에게 함락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그 며칠 전 월남에 살던 한국인과 그 가족들을 실은 한국 해군 수송선 두 척이 사이공港을 떠났고, 이날 부산항에 입항했던 것이다. 필자는 부산 국제신문의 사회부 기자였다. 柳회장은 월남대사를 그만두고 정부 기업체를 맡고 있었다. 기자는 수송선을 마중 나온 柳회장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柳 前 월남대사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柳회장은 1973년 초 티우 월남 대통령에 대한 키신저의 强勸(강권)으로 월남평화협정이 체결될 때 대사로 있으면서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런 식의 협정이라면 월남은 머지않아 적화된다』는 경고를 티우에게 했던 이다.

柳회장은 몇 년 전 월남이 망한 과정을 분석한 소책자를 만들어 나눠 주면서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柳회장이 남긴 월남평화협정 성립과정에 대한 글은 참전국인 한국 측 시각으로 비판한 귀중한 史料(사료)이다.

柳회장과 朴正熙 대통령의 인연은 「운명적」이라고 부를 만하다. 육사 7기 특별반 출신인 그는 陸士에서 朴正熙 중대장을 처음 만났다. 朴소령은 1948년 10월 여순14연대 반란사건 이후 진압군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이때 柳대위는 경찰과의 연락장교로 사령부에 내려와 함께 일했다.

朴소령은 郡內(군내) 남로당 간부라고 하여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刑(형)집행이 면제되고 군복을 벗었다. 그를 살려 준 白善燁(백선엽) 육군정보국장은 이 아까운 人材를 柳陽洙 전투 정보과장 아래서 민간인으로 근무하게 했다. 柳과장은 1950년 초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상부에 올렸다. 이 보고서 작성 작업에는 朴正熙도 관계했다. 金鍾泌 등 한국 현대사를 바꾼 육사 8기생들을 대거 정보국으로 데려와 부하로 썼던 이도 柳陽洙였다.

柳회장은 6·25 때는 연대장 등 일선부대 지휘관으로 잘 싸웠다. 12·12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鄭昇和(정승화) 장군은 柳회장의 직속부하였다. 5공화국 시절 신군부에서 鄭장군을 폄하하는 소문을 퍼뜨릴 때 柳회장은 鄭장군의 용감성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곤 했었다.

柳장군은 1960년 4·19 의거 이후 등장한 張勉(장면) 정부 시절 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패상을 몸소 겪었다. 그는 5·16 주체는 아니었으나 군사혁명의 지도자가 朴正熙 소장이란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지지에 앞장섰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외무위원장으로서 對美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어를 잘하는 그는 1950년대 말에 駐美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민정이양 후 柳장군은 軍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교관으로 전직했다. 駐필리핀 대사·駐오스트리아 대사·駐월남대사·駐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냈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사일 때 故 李承晩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고향인 빈에 와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柳대사는 朴대통령에게 건의해 프란체스카 여사가 귀국해 「이화장」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柳대사는 한국 건설업의 진흥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한국 건설업체들은 한국군을 따라 월남에 가서 해외공사를 하면서 체질을 강화했다. 그 경험을 살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中東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월남대사로서 해외건설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柳대사는 1970년대 후반엔 駐사우디 대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건설회사들이 中東에서 활동하는 것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는 기업주들이 私益(사익)을 추구하느라고, 國益(국익)을 희생시키는 일을 막느라 애를 먹은 이야기를 생전에 많이 했다. 朴대통령 서거 이후 崔圭夏(최규하) 정부 시절 그는 동자부·교통부 장관으로 짧게 일했다. 新군부 집권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동아건설 부회장으로 영입되어 그 유명한 리비아 大水路 공사를 현지에서 지휘했다.

그 뒤 유원건설 회장을 지냈고, 申鉉碻 前 총리를 이어 朴正熙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柳회장은 기념관 건립공사가 중단된 이후엔 朴대통령 관련 강연회와 출판, 그리고 회보 발간에 정열을 쏟았다. 몸가짐이 항상 단정하고 일처리가 분명한 柳회장은 아무리 사소한 회의를 주재해도 발언원고나 메모를 정리해 놓고 그것을 참고로 하여 말을 하는 분이었다.

柳회장은 80세를 넘어서도 애국운동에 열심이었다. 2003년 3월1일의 反核反金 국민대회에도 참여했고, 2006년 여름 결성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호남인 모임」에도 이름을 걸었다. 성공회 신도인 그는 성공회 출신 일부 인사들의 좌파적 행각을 개탄해 마지 않았다.

柳회장을 만날 때마다 「역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의 정신력은 굉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되돌아보곤 했다.

柳陽洙 회장은 朴대통령과 맺은 인연과 의리를 생애를 걸고 지키신 분이다.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서는 故人의 유언에 따라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한 일은 많지만 폐를 끼치고 가지 않으려 했던 柳회장의 명복을 빈다.


(15) 서울市의 오만하고 한심한 用語

「창의시정 원년」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吳世勳씨 이전의 市長들은 몽땅 베끼기 행정만 했단 말인가?

서울시청에 걸린 새해 인사 현수막.

연초 서울시청 앞을 지나가다가 건물 앞면에 걸려 있는 「창의시정 원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걸개 표시물을 보게 되었다. 「창의시정 원년」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漢字(한자)를 읽을 줄 아는 이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창의시정 원년」은 뜻이 전달되지 않는 소리이고 암호일 뿐이다. 「創意市政 元年」으로 써야 했다.

『그러면 한자를 읽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하나』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사전을 찾아 배우면 된다. 「창의시정」으로 표기해도 모르는 사람에겐 「創意市政」이라고 써서 사전을 찾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배울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런 무식한 反論도 나올 것이다. 『왜 외국 글자인 한자를 써야 하느냐』고.

한자가 외국 글자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부친은 한자 이름을 썼을 터인데 외국인인가? 20세기까지 역대 한반도 국가의 모든 공문서는 한자로 쓰였다. 그렇다면 신라·고려·조선사람들은 외국인이었단 말인가?

한자는 국어의 중요한 일부이다. 일본사람들도 한자를 쓰는데, 그렇다면 일본인은 民族語가 없고 중국에서 만든 외국어를 쓰는 사람들인가? 國語는 70%의 漢字語와 30%의 한글어로 구성되어 있다.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면 한자를 모르는 이들에겐 암호가 된다. 70%의 단어를 암호로 만들어 놓는 언어생활은 국어의 파괴이다.

언어는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언어파괴는 정신과 문화에 금을 내는 짓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미쳐 돌아가는 구석이 있는 것은 民族魂(민족혼)을 담는 그릇에 금이 가서 정신이 새기 때문이다. 韓國語를 지켜 내는 것이 대한민국과 民族文化를 지켜 내는 일이다.

한국 사람들은 元年이란 말을 너무 헤프게 쓴다. 元年이란 임금이 즉위한 해, 나라를 세운 해, 年號를 정한 첫해, 어떤 일이 처음 시작되는 해를 가리킨다. 오세훈 시장은 創意市政이 시작되는 첫해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쓴 듯하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吳시장 앞의 서울시장들이 한 행정은 創意市政이 아니고 몽땅 베끼기 행정이었단 말인가? 예컨대 李明博 시장은 創意市政을 해본 적이 없는 시장인가? 청계천 복원공사는 創意市政의 작품이 아닌가? 李시장의 걸작품인 대중교통체계 개혁은 創意市政이 아닌가? 모방市政인가?

자기를 너무 높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자기 부정과 함께 남을 깎아 내리게 된다. 고귀함보다 더 귀중한 것은 겸손함이라고 한다. 공무원은 특히 겸손하고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1980년 5월21일 오전부터 광주 금남로가 끝나는 전남도청 앞에는 시위대로 변한 시민들이 몰려 들었다. 수만 명으로 불어나 도로를 꽉 메웠다. 전남도청을 지키는 병력은 공수 11여단의 61, 62, 63 대대와 7여단의 35 대대, 그리고 약간 명의 31사단 병력과 경찰이었다. 약2000명의 병력이었다. 이때 공수부대는 중대장들이 15발 정도의 실탄을 갖고 있었고 사병들까지는 분배되지 않았다. 62 대대장은 그 전날 밤 중대장들에게 실탄 한 탄창씩을 나누어 주면서 “내 지시가 있을 때만 사용하라”고 말했다. 21일 오전 전남도청 앞에서 수만, 수십만으로 보이는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62 대대장 安富雄 중령은 “몰리는 것은 우리였다. 포위된 것도 우리였다. 조선대학교에 여단 본부가 있었는데 전남도청에 배치된 우리한테 식사를 제공할 차량을 보낼 수도 없었다. 19일 광주에 배치된 이후 더운 밥을 먹은 것은 두 번이었고 나머지는 비상식량으로 때웠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극도의 피로감과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고 말했다.
정오 직전 전남도청 앞은 공수부대가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수십 m의 거리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까지 공수부대의 주된 진압무기는 곤봉이었다. 시위대는 차량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1995년 여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수사발표문에서 인용한다.

<5월 20일 17시경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기 기사들이 50여 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결의했다. 18시경 무등경기장에 100여명의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몰고 다시 집결하여 군 저지선을 돌파하고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였다.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전조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진입하여 전남도청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과 11공수여단 61, 62 대대는 도로변에 있는 장식용 대형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차량을 저지하려 했다. 19시30분경 다시 공용터미널쪽에서 1만 여명의 시위대가 수십 대의 차량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와 합세했다. 공수부대는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저지했다. 경찰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시위대의 도청쪽 진출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5월20일 20시경 시위대 약3000명이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20시10분경 노동청쪽에서는 부근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한 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5월20일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t 트럭 한 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한 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편집자 注: 당시 사망자는 3공수여단 16대대 소속의 육군상사 정관철)>
<5월20일 밤12시경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노동청 앞과 전남대 앞에서 경찰관과 공수부대원 수명이 사망한 사실이 전파되는 등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 지급을 요청했다. 11 공수여단 61 대대장과 62 대대장은 62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위급시 사용하기 위하여 탄창에 삽입하여 보관하는 실탄)을 실탄 15발 정도가 든 탄창 1개씩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위급시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광주역 앞에서 공수 3여단 12, 15 대대는 5월20일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 버스 등 차량돌진 공격을 계속하자 인도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했다.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하는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했다>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했다. 최세창 3 공수여단장은 22시30분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사이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했다. 여단 정보참모가 먼저 신안동 굴다리에 있던 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발을 전달했다. 여단 작전참모와 함께 광주역으로 진출하면서 수백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쳤다. 경고 방송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차량에 거치한 M 60 기관총을 위협 발사하고 권총과 M 16으로 공포 사격을 하고, 최루탄을 발사, 시위대를 해산했다>

20일까지는 실탄을 갖고 있던 공수부대원들도 차량, 휘발유, 투석 공격에도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 장교들만 소수의 실탄을 갖고 있었을 뿐 하사관 이하 사병들은 거의 실탄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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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1일 오전 공수부대는 수십만으로 불어난 광주시민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취재 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전 10시54분: 땅을 치고 통곡하는 군인들의 모습 보임.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 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와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5월 21일 오후1시쯤. 전남 도청 앞에서는 수십만의 시위군중과 약1천 2백명의 7. 11여단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금남로를 맡은 11여단의 3개 대대 병력은 분수대 앞에 APC장갑 차 한 대를 세워놓고 그 장갑차를 믿고서 횡대로 서 있었다. 시민과 공수 부대원 사이의 거리는 10여 m도 되지 않았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시민측에는 이날 새벽 아세아 자동차에서 빼앗은 장갑차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은 카빈·실탄 등으로 무장한 이들도 있었다. 도청앞 광장에서는 헬리콥터가 자주 내렸다가 떴다가 하면서 서류 등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팽팽한 대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장갑차 때문이었다.

11여단소속 통신병 慶箕萬씨의 증언―.
『우리 등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측의 장갑차 한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 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공수부대 대열의 뒷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南東成상경은 이렇게 기억했다.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 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동료가 치어죽는 장면을 목격 한 공수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 고 실토했다. 한 공수부대원도 『동료가 죽고 다치는 것을 보니 내 마음 속에 잠재해 있던 야수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 했다. 이 차량돌진은 공수부대와 시민측의 총격전이 시작된 계기였다. 공수부대는 이때부터 경계용 실탄을 사병들에게 지급하기 시작했고 도청주변의 옥상에 군인들을 올려보내 아래에 있는 시위군중을 견제하게 하였다. 이때도 조준사격이라기보다는 공중을 향해 쏘는 위협용 사격이 주류였다고 한다.

본격적인 총격전은 공수부대가 시내를 빠져나가면서 시작되었다. 그 때 7여단 35대대 3중대는 도청을 등에 지고 도청정면을 맡은 11여단의 왼쪽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대의 APC는 11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 우회전하면서 7여단의 방어선으로 돌진했다. 3중대장 朴炳洙대위는 이렇게 말했다. 『실탄도 없는 우리 병력은 APC가 달려오자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청 담을 뛰어넘어 피신했다. 도청안에서 우리 대대는 실탄을 처음으로 분배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실탄이 11여단으로부터 빌어 온 것으로 안다. 중대장. 지대장(팀장). 하사관까지 1인당 10발씩 실탄을 지급했고, 일반사병들에게는 실탄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실탄을 나누어주면서도 조준만 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1여단 지역에서는 사격이 시작돼 있었다』

자위적 발포를 허용하는 명령이 전남북 계엄분소로부터 예하 부대에 내려간 것은 21일 오후 6시였다. 그러나 시위현장에서는 그 훨씬 전부터 발포가 시작돼 있었던 것이다.

철수와 자위적 발포 허용

崔雄대사는 『우리 세 여단장이 공수부대 병력을 시 외곽으로 빼야 한다고 건의했었다』 고 말했다. 張師福 당시 전교사참모장은 『철수 결정은 우리 사령부의 작전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져 계엄사령관의 허가를 받아 실시되었다』 고 했다. 『양쪽이 모두 무장을 하고 있는데 군이 계속해서 시내에 머물러 있으면 희생자만 늘어 날 뿐이라고 판단했었다. 결과적으로 철수결정은 희생자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 말했다.

당시 11여단의 한 대대장은 『도청근처의 빌딩 위에 공수부대원들이 올라가 아래를 향해 사격을 한 것도 엄호용이었다. 그 때 수십만 군중을 향해 본격적으로 쏘았다면 그 정도만 죽었겠는가. 21일 오후에 공수부대는 일부 대대에서 경계용 실탄으로 대처한 것이고, 본격적으로 전투용실탄을 공급받은 것은 광주에서 철수한 뒤인 22일이었다』 고 주장했다. 이 대대장은 「21일에 공수부대가 아니었다면 쌍방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일반 부대였다면 공포감에 휩싸여 사격을 서둘렀든지 시민측에 항복해 버렸을 것이다』 고 했다. 공수부대의 철수 상황에 대해서 특전사일지는 이런 요지의 기록을 남겼다.




“누가 감히 공수부대에 대항하겠나”라는 생각을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 진압에 대비한 준비가 소홀했다. 방패와 최루탄을 갖고 가지 않았고 방석모도 부대 수송부에서 적당히 만든 것이었다. 물감을 뿌리도록 개조된 화염방사기는 가져 갔으나 시위 진압용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11여단 61 대대의 경우 300여명의 병력중 약3분의 1이 투석 등으로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5월21일 오후 3시쯤 헬기가 도청 분수대 근방에 내렸다. 31사단 병력을 철수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11여단의 安富雄 61 대대장이 보니 공수부대원 몇 명이 헬기로 달려가 사병들로부터 실탄을 얻고 있었다. 그때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원들은 중대장만 15발이 든 탄창 한 개씩만 갖고 있었다. 공수부대는 1개 여단이 3개 대대, 1개 대대가 3개 지역대, 1개 지역대가 3개 중대, 1개 중대가 3개 팀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 팀은 장교 1명이 사병이 10명이었다. 본부 및 지원 인원까지 포함하여 1개 대대는 약350명이었다. 1개 중대의 병력은 33명이므로 1인당 실탄이 한 발도 돌아가지 않았다. 사병들은 장갑차, 트럭, 카빈으로 무장한 시위대에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본능적으로 실탄을 구하려 했을 것이라고 安富雄씨는 말했다.
5월21일엔 심리적으로 공수부대가 압도된 상태였다. 공수부대의 횡대 셋째 열에서 지휘하고 있었던 安富雄 중령은 시민들이 손도끼나 몽둥이를 들고 와서 횡대로 서 있는 부하들의 철모를 두드리면서 위협하고 조롱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나는 부하들에게 그럴 경우 절대로 대응하지 말라고 시켰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공수부애원이니 버틴 것입니다. 일반 보병부대였다면 무너졌을 것이고 공포감으로 해서 사격을 일ㅇ찍부터 하여 사상자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공수부대원들은 비록 총을 등에 메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병은 실탄을 지급받지 못해 곤봉에 의존하여 투석, 몽둥이, 손도끼, 나중엔 장갑차와 트럭으로 무장한 수만 명의 시위대와 맞서고 있는 상태였다. 공수부대는 이들의 등 뒤에 장갑차 두 대를 배치했다. 최루탄은 경찰에서 빌려 썼으나 동이 났다.
서울 출신인 安富雄씨는 “우리 11여단은 본부가 춘천에 있었다. 전국 각지 출신들이 다 모여 있었는데 경상도보다는 호남출신이 더 많았다”고 했다. 전북 금마에 있다가 맨첨 투입되었던 7여단은 호남출신 장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80년 5월21일 오전부터 광주 금남로가 끝나는 전남도청 앞에는 시위대로 변한 시민들이 몰려 들었다. 수만 명으로 불어나 도로를 꽉 메웠다. 전남도청을 지키는 병력은 공수 11여단의 61, 62, 63 대대와 7여단의 35 대대, 그리고 약간 명의 31사단 병력과 경찰이었다. 약2000명의 병력이었다. 이때 공수부대는 중대장들이 15발 정도의 실탄을 갖고 있었고 사병들까지는 분배되지 않았다. 62 대대장은 그 전날 밤 중대장들에게 실탄 한 탄창씩을 나누어 주면서 “내 지시가 있을 때만 사용하라”고 말했다. 21일 오전 전남도청 앞에서 수만, 수십만으로 보이는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61 대대장 安富雄 중령은 “몰리는 것은 우리였다. 포위된 것도 우리였다. 조선대학교에 여단 본부가 있었는데 전남도청에 배치된 우리한테 식사를 제공할 차량을 보낼 수도 없었다. 19일 광주에 배치된 이후 더운 밥을 먹은 것은 두 번이었고 나머지는 비상식량으로 때웠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극도의 피로감과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고 말했다.
정오 직전 전남도청 앞은 공수부대가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수십 m의 거리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까지 공수부대의 주된 진압무기는 곤봉이었다. 시위대는 차량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1995년 여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수사발표문에서 인용한다.

<5월 20일 17시경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기 기사들이 50여 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결의했다. 18시경 무등경기장에 100여명의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몰고 다시 집결하여 군 저지선을 돌파하고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였다.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전조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진입하여 전남도청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과 11공수여단 61, 62 대대는 도로변에 있는 장식용 대형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차량을 저지하려 했다. 19시30분경 다시 공용터미널쪽에서 1만 여명의 시위대가 수십 대의 차량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와 합세했다. 공수부대는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저지했다. 경찰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시위대의 도청쪽 진출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5월20일 20시경 시위대 약3000명이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20시10분경 노동청쪽에서는 부근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한 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5월20일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t 트럭 한 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한 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편집자 注: 당시 사망자는 3공수여단 16대대 소속의 육군상사 정관철)>
<5월20일 밤12시경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노동청 앞과 전남대 앞에서 경찰관과 공수부대원 수명이 사망한 사실이 전파되는 등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 지급을 요청했다. 11 공수여단 61 대대장과 62 대대장은 62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위급시 사용하기 위하여 탄창에 삽입하여 보관하는 실탄)을 실탄 15발 정도가 든 탄창 1개씩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위급시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安富雄씨는 “그때 전남도청 앞에선 사격지시를 내린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와 버스에 깔려죽지 않기 위하여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검찰의 조사로써도 입증되었다.
安씨는 “내가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식의 사격을 명령했다면 5.18 수사 때 구속되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서 일제 사격을 명령했다면 공수부대원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불복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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