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가 안된다. 약100만명. 거의 전부가 神道를 믿는데 이를 종교로 볼 수 있을지는 쟁점이다. 샤머니즘과 불교가 혼합된 인상을 수는 神道는 수많은 神社를 통해서 일본인의 생활속으로 파고 들었다.
武士道는 종교는 아니나 종교적 심성을 깔고 있다. 일본인이 물건을 만들거나 직장에 다닐 때 보여주는 집중력과 성실함, 여기서 나오는 완벽함의 추구엔 종교적 心性이 보인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것, 초인적인 것,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을 갈구하면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求道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이 경제에 투입되면 名品을 만든다. 일본엔 求道者的 자세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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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칼 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의 名劍을 만들고 있는 匠人의 말: 武士道를 '죽는 것'이라 定義하는데 뒤집어보면 '치열하게 사는 것'이란 뜻이다.
며칠 전 히스토리 채널에서 일본의 사무라이(武士)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일본의 유명한 칼을 만드는 匠人이 소개되었다. 마사무네(正宗) 집안이 700년째 代를 이어 名劍을 만들고 있었다. 그 匠人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칼을 만들고 나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이 칼에 내 이름이 새겨지고 내 정성이 들어갑니다. 1000년 뒤에도 저는 이 칼을 통해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칼에 영혼을 불어넣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기능공이 철학자처럼 말했다. 匠人이기에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상품을 만들 때도 영혼을 쏟아붓듯이 정성을 다한다고 한다. 그러니 불량률이 세계에서 제일 낮은 제품이 나오는 것이다. 한 주제를 붙들고 거기에 魂을 쏟아붓는 정신,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의 본질이다. 이것이 그들의 살아 가는 방식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무식한 싸움꾼이 아니라 글을 아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武士道를 '죽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뒤집어보면 '사는 것'이다. 항상 명예로운 죽음을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의 모든 분야에 파고들어 있다.
미국의 건국정신, 서양의 기독교 정신(또는 신사도나 기사도), 조선조의 선비정신, 신라의 화랑도 정신 같은 것들이 살아 있어야 그런 사회는 타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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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정신
일본 北海道의 노보리베츠 온천마을 근방엔 에토 시대의 취락을 再現한 민속촌이 있다. 登別伊達時代村(노보리베츠 다데 지다이무라)이라고 한다. 그 안에 사무라이館이 있고 유키 료이치라는 사람이 썼다는 '武士道'(Spirit of Samurai)라는 글이 걸려 있다.
<인간의 투쟁본능은 보편적인 것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본은 이 거친 투쟁본능에 제어장치를 붙여, 통제하려고 했다. 이를 武士道라고 한다. 이는 사회를 통제하고 또한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투쟁본능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 어떤 神聖한 것의 존재를 일본인에게 깨우쳤다. 봉건제도는 무너져도 그것을 지탱해준 武士道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를 體現한 이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武士道를 일본인의 독특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독특한 출생의 비밀에 있다. 무사도의 아버지는 禪이고 어머니는 유교이다. 禪은 불교에 있어서 명상이며, 深思默考에 의해 知의 영역을 넘어서서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이며, 유교는 祖先숭배신앙을 기초로 민족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따라서 상호모순된 개념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생긴 武士道를 體現한 인간, 즉 사무라이는 이 둘의 조합의 비율에 따라, 또 그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 '사람의 人生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며, 서두르지 말고 참는 것이 無事長久의 기본이다'라고 말한 도쿠가와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이고, 강함을 추구하면서 결투에 생애를 걸고 상대를 죽여간 미야모토 무사시도 사무라이이다.
이 두 사람간에는 공통된 삶의 방식이 없어 對局에 위치하는 듯하다. 단 하나 있다고 한다면 艱難辛苦의 한가운데서 각각 神에 다가가 체감한 것,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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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士의 세계일주
인천 공항에서 오전 10시30분에 이륙한 아시아나 여객기(에어버스)가 2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일본 東北지방의 가장 큰 도시 센다이(仙台)에 내렸다. 미야기縣의 센다이는 인구가 약100만 명. 한때 일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힌 적이 있다. 센다이 근교에 마쓰시마(松島)라는 일본 3대 절경의 하나가 있다. 수백 개의 섬이 모여 있다.
센다이의 시립박물관에 가면 한 방이 온통 국보들로 꽉 차 있다. 하세쿠라 츠네나카(支倉常長)라는 일본 무사가 1613년부터 7년간 유럽을 왕복하면서 갖고 온 유물 47점이 3년 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하세쿠라는 일본에서 포교중이던 스페인 신부 소테로와 함께 범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지금의 미국 서해안에 기착한 뒤 다시 멕시코로 항해하여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4개월이 걸린 대항해였다.
이들은 멕시코에서 배를 갈아타고 대서양을 횡단, 스페인에 도착했다. 일행은 멕시코를 떠난 지 여덟 달만에 마드리드에 나타나 펠리페 3세를 알현했다. 하세쿠라는 스페인에서 세례를 받은 뒤 로마로 간다. 1615년10월 하세쿠라는 로마의 성베드로 사원 광장으로 들어갔다.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기병이 안내하고 이 일본 사무라이는 말을 타고 들어갔다. 법왕청은 그를 잘 대우했다. 하세쿠라는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항해술을 인정받았고 반란군 토벌 때는 외교술을 평가받아 센다이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 의해 사절로 발탁된 것이었다.
그해 11월 하세쿠라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그는 바오로 5세가 스페인에 부탁하여 멕시코와 센다이가 통상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세쿠라가 교황에게 제출한 서신에는 '奧州(지금의 동북지방)의 왕 伊達政宗'이란 표현이 있다. 당시 다테 마사무네는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신하로서 복종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王운운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교황측에서 다테 마사무네는 일국을 대표할 외교권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하세쿠라를 수행했던 스페인 선교사 소테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사무네公이 다음의 막부 장군이 될 실력자입니다. 지금 일본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30만 천주교도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 것입니다'
이런 무엄한 말이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래 전해졌지만 도쿠가와는 모른 척해버렸다고 한다. 마사무네는 배를 만들 때부터 막부의 허가를 얻었고 막부의 선박담당자를 항해사로 초빙했기 때문에 반역의 의사기 있다는 오해를 받지는 않았다. 교황청과 하세쿠라의 교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1620년부터 막부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센다이 시립박물관에는 하세쿠라가 가져온 성경, 십자가, 그림들이 있다. 하세쿠라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기도하는 초상화, 그에게 주어진 로마시민증서(羊皮紙에 금박글자가 쓰여 있다) 등은 國寶이다. 하세쿠라는 돌아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는 1617년 스페인의 세빌리아에서 귀국 길에 올랐다. 대서양을 건너 멕시코에,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에, 마닐라에서 센다이로 온 것이다.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한 지 약100년 뒤의 일이었다.
하세쿠라는 귀국한 2년 뒤 52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은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그가 가져온 물건들은 압수되어 명치유신 이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하세쿠라를 수행했던 소테로 신부도 순교했다.
센다이를 큰 도시로 발전시킨 藩主(번주. 막부시대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숨결과 발자취는 이 도시 곳곳에서 살아 있다. 일본은 서구식 봉건제도를 거친 나라이다. 봉건제도란 영주가 번(藩)이란 영지를 거의 독립국가처럼 통치하고 다만 중앙정부인 幕府의 조정과 견제를 받던 제도이다. 이 제도하에서 영주들은 藩의 경제발전에 경쟁적으로 힘을 쏟았고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 약250년간 일본은 평화속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축적되고 단련된 지식, 國富, 제도, 민족성이 명치유신의 물적인 토대가 되었다.
일본의 지방에 가보면 그 지방을 번성케 했던 옛 영주(藩主=大名)를 기리는 기념관이 많다. 중앙집권적인 조선조下에서는 지방관리들의 독자성이 허용되지 않아 기억할 만한 인물들도 별로 남아 있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센다이에서는 '다테 오도코'라는 말을 쓴다. 다테 마사무네처럼 멋진 남자란 뜻이다. 그런데 다테 마사무네는 어릴 때 천연두로 오른쪽 눈이 실명된 애꾸였다. 그의 별명은 獨眼龍이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雄이 천하를 놓고 대결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는 일본의 동북지방을 근거로 삼아 천하의 패권을 노려볼 만한 인물로 꼽히기도 했으나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1590년의 일이었다. 그 전해 마사무네는 지방 영주와 전투를 벌여 아이츠 지방을 손에 넣었다. 당시 이미 패권을 쥐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주들에게 전투금지령을 내려놓았었다. 이 명령을 어긴 마사무네에 대하여 히데요시는 지금의 도쿄 근교인 오다와라(小田原)까지 와서 해명하도록 명령했다. 마사무네는 잘못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上京 명령을 거부하고 싸울 것인가, 천하쟁투를 포기하고 복속할 것인가. 마사무네는 후자를 택했다.
오다와라에서 10만 대군을 이끌고 攻城戰을 벌이고 있던 53세의 히데요시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23세의 청년장군 마사무네의 목등을 막대기로 툭툭 치면서 '조금만 늦었더라면 여기가 위험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3년 뒤인 1593년4월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마사무네는 1300명의 부하병사들을 이끌고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상륙한다. 그 1년 전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약14만 명의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중이었다. 마사무네는 후방군수지원을 담당했다. 그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1차 진주성 싸움(1592년10월)에서 참패했던 일본군은 1593년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을 벌인다. '한 명도 살려보내지 말라'는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은 일본군은 약9만 병력을 집결시킨다. 그 7년 뒤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시대를 연 대결전 세키가하라 전투 때 東西 양군은 각각 9만을 동원했으니 진주성 공략에 히데요시가 얼마나 집착했는지 잘 알 수 있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이긴 일본군은 진주성 안에 있던 5만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다테 마사무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소, 말, 닭, 개까지 남기지 않고 죽였다'고 한다
求道者的 자세로 물건을 만드는 일본인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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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01, 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