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때 경찰관 네 명은 이렇게 죽어갔다

당시 戰警의 手記: 경상도 사람인 나는 광주시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집의 주인을 「광주 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 찾아뵙고 있다.
내가 겪은 80년 5월의 광주(월간조선 1988년 3월호)

南東成(가명, 29, 당시 전투경찰관)

경상도 전경을 살려준 「光州 아버님」

나는 경북 대구의 경북대학교 정외과 2년을 마치고 전투경찰관으로 입대, 전남 도경 2기동대 소속으로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사태를 맞게 됐다.
광주사태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5월20일 밤, 나는 전남도청 앞에서 데모대를 막고 있었다. 광주의 밤하늘은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길로 환했다.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와 가끔 「펑!」하면서 치솟는 화염이 전장을 방불케 했다. 우리 전경부대는 도청 앞의 네거리 중 노동청 광주지방 사무소 쪽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네 줄로 늘어서 저쪽의 군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군중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들을 우리 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트럭, 버스, 승용차, 지프 등 갖가지 차들이 슬금슬금 밀려오다가 중간 지대에서 멈췄다. 불타거나 불탄 차들이 서로 뒤엉켜 절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형세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부서지고 불탄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우리 戰警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피해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 버스를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
그때 우리는 최루탄이 거의 떨어져 데모대가 몰려오면 投石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戰警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오른쪽에 있는 담벼락을 긁으면서 스르르 멈추었다.
버스 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둠 속에서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끼거나 깔려 뒤엉켜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어머니!』하는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축 늘어진 팔, 다리였다.

거의 같은 순간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담벼락을 넘고 달아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이미 달아났고 다른 한 사람이 담벼락에 다리를 걸친 순간, 두 명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 뚱뚱한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사람은 뒷발길질을 하여 뿌리치고는 달아났다.
우리는 플래시로 버스 바퀴를 밝히면서 사상자들을 끌어내 병원으로 옮겼다. 이들 경찰관들은 사고 당시 담벼락 밑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전열(前列)에 있었던 젊은 전경대원들은 달려오는 버스를 보고 피해 달아날 수가 있었으나 이들 경찰관들은 앉아 있다가 뒤늦게 버스를 피하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 서 있다가 버스와 담 사이에 끼이거나 깔린 것이었다.
(편집자 주: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경장,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순경 등 네 명이 숨졌고 김대민 순경 등 네 명이 중상을 있었다. 이 버스를 몬 운전사 김갑진, 배용주 씨 등 2명은 그 뒤 경찰에 구속, 복역하다 석방됐다. 이들은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밀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몰고 가다가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를 세웠는데 그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20일 자정인지, 21일 새벽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데모대가 밤을 새워 시위를 했다. 중학생에서 노인까지, 여대생에서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 쇠파이프 등이 들려져 있었다. 모두가 악에 바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자가 마이크로 군중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경찰이 던지는 것은 수류탄이 아니고 최루탄입니다. 맞아도 죽지 않으니 전진합시다』
도청에서 가까운 충장로로 우리 부대가 진압 차 출동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데모군중의 습격을 받고 우리 몇 명은 고립됐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곁에 있던 동기생 한 놈이 『우린 여기서 죽는다』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달아나다가 쓰러졌다.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1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우리를 구원하려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돌입했고, 군중은 흩어져 달아났다.

갑자기 주위가 깨끗이 청소된 듯 비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이 휩쓸고 지나간 저쪽 길 바닥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두 명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달려갔다. 한 중학생은 가슴이 밟혔는지 푹 꺼져 있었다.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다. 다른 중학생은 『엄마! 엄마!』라고 신음하고 있었다. 곧 신음도 끊어졌다.

나는 이 소년도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소년을 길에서 들어내 가게 옆에 붙여놓고는 부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청 옆 주유소 근방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끌려가는 중학생 한 명을 목격했다. 나는 저놈이 군 부대로 넘겨지면 혼이 날 것 같아 공수부대 사병에게 『이 놈은 나에게 넘겨주십시오. 혼을 내서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인수받은 소년을 도청 근방의 民家로 데리고 가 넘겨주면서 잘 보호했다가 부모를 찾아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도청 쪽으로 돌아와 보니 데모군중과 진압부대가 충돌, 군중들이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주유소 앞에 두 20대 청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한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치명상이 어딘지는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다른 청년은 숨이 끊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방독면을 벗고 5분쯤 인공호흡을 시켰다.
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인데 『하느님! 왜 이 사람을 죽였습니까』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허망함이 그 때의 내 심경이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해 내가 본 사례로는 18일인가 19일쯤의 일로서 금남로 부근에서 대낮에 구타당하는 대학생을 할머니가 감싸고 말리는데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할머니를 때렸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퍽 쓰러졌다. 공수부대의 진압봉은 약 70cm. 야구방망이처럼 앞이 굵다.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휘두르면 앞이 무거워 가속도가 붙는다.

21일 낮 1시쯤이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도청 정문 앞에 포진하고 있었다. 금남로의 전일빌딩 부근에서 공수부대와 군중이 대치중이어서 그 DMZ(?)와 도청 사이는 텅 비어 있었다. 데모 진압은 전방을 공수부대가 맡고 후방을 전경 및 일반 경찰이 맡는 형식이었다.
이때였다. 저 아래 금남로의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공수부대원들이 서 있는 쪽으로 질주해 오는 게 보였다. 유리창은 박살 나 있었고, 그 안에는 수십 명의 시위자들이 타고 있었다. 몽둥이로 차체 외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차체에는 구호를 쓴 천이 붙어 있었다. 이 버스는 공수부대원 쪽으로 돌진했다. 두 명의 군인들이 차에 들이받혀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이 때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두 바퀴쯤 돌더니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버스를 향해 10m쯤의 지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했다. 차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거의 엎드려 쏴 자세로 군중을 향해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군중은 달아나지 않았다. 나의 기억으로는 도청 앞에서 조준 사격이 시작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전에는 주로 공포였다. 공수부대원들이 돌진한 버스에 치인 것이 동료들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인 듯 했다.

얼마 뒤 군중들이 무장을 하고 장갑차 등을 몰고 도청 앞으로 진격해 오자 전경들은 일단 도청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도청 안에는 전경, 사복경찰, 공수부대원 등 수백 명이 뒤섞여 있었다. 공수부대의 지휘관은 중령인 듯했다. 도청 안의 세면대에서 나는 공수부대 통신병을 만났다. 병장인 그는 얌전한 인상이었다. 내가 『경상도 군인만 왔다는 게 사실입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싱긋 웃으면서 『당신 군대 생활 한두 번 했소?』라고 반문했다. 그는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나는 도청 어느 모퉁이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몇 시쯤 됐을까. 누가 깨웠다. 우리 기동대장 許모 경정이 전경들을 집합시키더니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일단 해산한다. 각자 집으로 가거나 적당히 피신하라. 사태가 수습되면 방송으로 연락할테니 라디오를 잘 듣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광주에 사는 동료 전경에게 『날 좀 숨겨 달라』고 했다. 그는 『南상경님은 사투리가 거세어서…』하면서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우리는 도청 담을 넘었다. 도청 앞은 광장처럼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총성과 함성이 뒤섞여 들려 왔다. 나는 비로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러 전경들과 함께 나도 어느 가정집에 들어갔다. 주인은 달아난 듯 텅 빈 집이었다. 20, 30명의 전경대원들이 이 집의 옷장을 뒤져 서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자 털 외투만 입고 그대로 뛰어나가는 사람, 바지만 갈아입고 나가는 이도 있었다. 아무 사복이라도 걸쳐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나 붙들고 『돈 좀 빌려달라』고 했다. 『이 사람아, 이 판국에 돈이 어디 있어…』하면서 거절만 당했다. 집 바깥으로 나와 우리는 기었다. 머리 위로는 총탄이 스쳐가고 있었다. 어느 가정 집 앞을 기어가는데 대문의 틈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는 여자의 눈과 딱 마주쳤다.

나는 무조건 그 집으로 뛰어들었다. 그 아주머니는 처음엔 거절하다가 내가 『숨겨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하자 아이들이 쓰는 방으로 들어가 숨으라고 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아주머니는 대구에서 오랫동안 산 적이 있다면서 『데모대가 오면 내 동생이라고 이야기할테니 말을 미리 맞춰놓자』고 했다. 그 집에 네 남매가 있었는데 이불 밑에서 이름들을 외어두었다. 집 주인은 부동산업을 하는 분인데 생활은 넉넉한 것 같았다. 고마운 이분들의 보호를 받아 나는 5월27일까지 1주일 동안을 무사히 숨어 있을 수 있었다.
이 집 주위는 주택가였는데 시민들이 도청을 점거한 뒤, 도청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거의가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가버렸다. 내가 피신한 집에서도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친척 집으로 가버리고 나와 주인아저씨만 집을 지켰다. 27일 새벽이었다. 젊은 여인의 마이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원조였다.
『광주 민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총 가진 사람이나,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은 나와서 같이 싸웁시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하는 듯, 그 여자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 광주 사태 뒤에도 몇 달 동안 악몽을 꾸었는데 그 목소리는 몇 번 꿈에 나왔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준 목소리였다.
그 얼마 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바로 옆 도청 쪽에서 났다. 본격적인 총격전이 붙은 것 같았다. 30분쯤 뒤 총성이 좀 가라앉자 바깥이 소란해졌다. 계엄군이 『빨리 나와!』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도 들렸다.
내가 누워 자던 방은 옆담 바로 밑이었다. 창 쪽으로 담이 보였다. 그 담 위로 이른바 「시민군」 2명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둘 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야! 시민은 다치지 않게 해야 돼』
『알았어』
이런 대화가 들렸고, 그들이 옆집으로 숨었는지 총성이 가깝게 났다. 날이 밝자 나는 도청으로 나가 歸隊 신고를 했다.
광주사태와 지역감정을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경상도 사람인 나는 광주시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집의 주인을 「광주 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 찾아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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