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武鉉-金正日의 제2차 평양회담은 오는 12월19일의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후보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회담 以後 계속되는 與論조사들은 李明博 한나라당 후보 지지율이 이 회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투표일을 50여일 앞둔 상태에서 李 후보는 與黨인 대통합민주신당의 鄭東泳 후보를 6 對 2의 비율로 앞서간다. 간단하게 말해서 李明博 후보가 有故 상태가 되지 않는 한 그의 당선을 막을 방법이 없는 듯하다. 독일 宰相 비스마르크는 “정치인은 大勢를 만들지 못한다. 다만 그 大勢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한국 사회의 ‘反左派 大勢’는 청장년층의 實用化 흐름과 50세 이상 旣成層의 보수결집 흐름이 合流한 것이다. 1998년 이후 10년간 집권한 金大中, 盧武鉉 좌파정권은 헌법정신에 위반되는 反韓-反美-親北 路線을 걸어왔다. 정권이 국가에 도전한 셈이다. 특히 盧武鉉 대통령은 한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부정하고, 韓美동맹을 약화시키고, 북한정권의 핵개발을 사실상 傍助하면서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말살에 대해선 눈을 감았다.
좌파정권 10년간 한국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다. 金正日에 충성을 맹세하고 한국을 赤化시키겠다고 다짐했던 소위 主思派(극좌 공산주의자) 출신들이 盧武鉉 대통령의 庇護 아래 국가 조종실에 들어갔다. 이들과 同志的 관계인 좌파운동권 인사들이 대중조직을 장악하여 정권을 응원했다. 이들 執權左派세력이 국가정보기관, 군대, 검찰, 경찰을 통제하는 바람에 간첩 추모제가 서울 한복판에서 열릴 정도로 좌경화되었다. 한국은 극심한 좌우 이념 투쟁장으로 변하여 國論이 분열되고 財政은 빚더미가 되었으며 경제는 成長動力을 상실했다. “공산화는 다 되었는데 통일은 언제 되나”라는 우스개가 더 이상 우스개가 아닌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左傾化에 맨처음 叛旗를 든 것은 50세 이상 老壯層이었다. 급속한 인구의 高齡化 흐름으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50세 이상 유권자는 약34%에 이른다. 이들은 투표율이 높다. 올해는 80%를 넘을 것이다. 실질적 영향력은 40%에 달할 것이다. 19~49세의 靑壯年層도 3년 전부터 盧武鉉 정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盧 대통령의 난폭한 言行과 靑年失業 사태가 한때의 지지층을 離脫시켰다. 이 靑壯年層은 老年層처럼 反共化되지는 않았으나 경제를 살릴 유능한 정치인을 渴望(갈망)하는 ‘脫左派實用化’의 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여론 변화에 맞는 후보가 등장했으니 한나라당의 李明博 전 서울시장이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 출신인 그는 民選 서울시장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문화대혁명 10년에 대한 反作用으로 일어난 保守實用化 흐름이 오늘날의 李明博 大勢論을 만든 動力이다.
이런 흐름을 돌리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盧武鉉-金正日 회담은 ‘民族’과 ‘平和’란 美名으로 포장된 10.4 선언을 만들어냈으나 2000년의 제1차 평양회담과 같은 擧國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회담 직후에 올라갔던 盧武鉉 지지율은 다시 30%대로 떨어졌고 盧金합의에 대한 與論도 ‘總論찬성, 各論반대’로 식었다. 특히 盧 대통령이, 서울 仁川 등 2000만 명이 몰려 사는 首都圈 방어의 最一線인 서해의 軍事分界線을 軍의 반대를 무시하고 平和水域으로 재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해서 절대 다수 국민들이 분노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2차 平壤회담에서 盧 정권은 얻은 것이 없고, 일방적으로 金正日에게 양보만 했다는 認識이 퍼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有利하게 만들려는 목적은 실패했으나 한국을 불리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 회담이었다. 盧 대통령이 核을 포기할 것 같지도 않은 金正日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해버린 경제지원은 次期 정권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한국에는 不利하고 한국의 主敵(北韓政權)엔 有利한 행동만 골라서 했던 盧武鉉 대통령으로선 반쪽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제2차 평양회담, 노무현 반쪽의 성공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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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0-21, 1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