亡國的 역사관: 新羅죽이기=대한민국 죽이기

민족사의 2대 쾌거를 수치라고 가르치는 좌익들의 自虐的 역사관에 답한다.
1. 군인을 존중하던 시절에 태어난 金庾信의 장엄한 생애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려 仁宗시대의 權臣이기도 했던 金富軾(김부식)이 쓴 三國史記일 것이다. 이 책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약 1000년간의 역사는 암흑속으로, 또는 안개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중요한 三國史記는 申采浩 같은 사람들에 의해 反민족적·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신라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오해와 비판을 받아왔다. 기자도 이런 그릇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이 50 가까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서양의 문필가가 성경을 나이 50에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늦게 읽은 만큼 감동은 컸다. 正史답게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 正色을 하고 쓴 책이기 때문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중심에 놓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三國史記는 뒤에 나온 또 다른 正史 高麗史에 비해서 월등한 주체성을 띠고 있다. 기자는 三國史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신라통일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통일 주체세력들의 숨소리와 민중의 鼓動을 듣는 것 같았다. 통일 3傑-金春秋, 金庾信, 文武王의 경륜과 전략, 화랑도 출신 장수들의 장렬한 삶과 죽음. 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와 人間像은 우리 역사에서 그 뒤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1945년 이후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민족사의 두번째 황금기로서 이 시기와 비견될 것이다).

로마시대·중국 戰國시대·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신라통일기의 主役들 특히 그들의 집념, 명예심, 자주성, 국제적 視覺, 武人으로서의 교양은 『아 이런 분들이있었기에 신라가 唐을 이용하고 또 唐과 맞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과 나를 존재하게 했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列傳 부분의 金庾信傳에 명문이 많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17세 때 석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 나타난 難勝이란 도사에게 金庾信이 하는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를 멸망시킨 후 唐이 신라까지 칠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진 御前회의에서 金庾信의 발언)
이런 金庾信의 決戰의지에 꺾인 唐의 원정군사령관 蘇定方은 그냥 돌아간다. 唐 고종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三國史記는 전하고 있다.

<고종: 『어찌하여 新羅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
蘇定方: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가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義理로써 똘똘 뭉친 나라 - 이것이 新羅가 삼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自我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大國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干城이요 임금의 爪牙(조아·어금니)로서 승부의 결단을 矢石(화살과 돌)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道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신의 우매함과 불초함으로 어찌 국가에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의심치 않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기에 조그만 공을 이루어 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지나 또한 小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계승하는 임금이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다하는 일이 적어 累代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守成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시어 小人을 멀리 하고 君子를 가까이 하십시오. 조정은 위에서 화평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안정되어 재앙과 난리를 만들지 않고 국가의 基業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병문안 온 文武王에게 남긴 김유신의 유언)

<아내에게는 三從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元述 같은 자는 이미 先君(注-김유신을 지칭)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패전하고 돌아온 金庾信의 차남 원술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삼국사기를 통해서 기자가 만난 인물이 金庾信이다. 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수십년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모시고 統一大業에 精進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인자인 왕과 병권을 쥔 2인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共存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1인자가 군대를 장악한 2인자를 의심하는 순간 2인자의 운명은 刑場이거나 쿠데타에 의한 역습이다. 金庾信은 至誠으로 1인자를, 왕들은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金富軾은 金庾信傳의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평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고 꾀를 쓰려 할 때 이를 들어줌으로써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게 하였다>

부리는 왕과 부림을 받는 金庾信 사이의 이런 신뢰관계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金庾信은 꾀를 부려 누이 문희를 金春秋에게 시집보냈고 金春秋와 그 누이한테서 난 딸을 아내로 맞았다(당시는 近親결혼 풍습이 있었다). 문무왕은 金庾信의 여동생의 아들, 즉 생질이기도 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가야왕실의 후손인 金庾信은 이런 혈연관계를 통해서 신라왕족과 두 王의 安心을 산 뒤 자신의 야망-삼국통일을 해낸 것이리라. 권모술수와 전략전술을 겸비한 金庾信이야말로 정치군인의 한 典型이겠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이다」는 말이 있듯이 金庾信이 순수한 군인이었다면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金庾信은 권모술수에 통달하되 그것을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이 아닌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란 보다 큰 차원의 명제로 승화시킨 대인물이다. 그래서 기자는 그를 「한민족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定義하는 것이다.


2. 이순신의 不運과 김유신의 幸運

<그는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의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그보다 먼저 죽었는데, 이순신은 그들의 자손까지 자기 자식처럼 아껴 길렀으며, 조카들을 모두 혼인시킨 후에야 자기 자식들의 혼례를 올렸다. 그는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運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통제사 이순신은 軍中에서 갑옷을 벗는 일이 결코 없었다>

柳成龍이 쓴 懲毖錄(징비록)에 나오는 대목이다(서해문집. 김흥식 번역). 柳成龍은 李舜臣을 중용하고 그를 보호해준 후견인이었다. 위의 李舜臣에 대한 묘사는 공직자의 몸가짐이 어떠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듯하다. 柳成龍이 이순신을 不運한 군인이었다고 定義한 것이 인상적이다. '도덕주의자=선비'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군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전쟁에까지도 도덕을 적용하여 간첩도 보내지 못하게 하고 敵을 유인도 하지 못하게 했던 자들이, 정권을 잡은 선비 출신 文臣들이었다. 군인을 알아주지 않는 文弱한 문신들은 그러나 권력투쟁에는 용감했다. 그들이 한 위대한 군인을 괴롭혔다.

李舜臣과 정반대되는 곳에 있었던 이가 金庾信이다. 三國史記 列傳에는 김유신에 대해서 아주 긴 기사가 실려 있다. 마지막 대목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위임하여 변함 없으며, 꾀를 행할 때 말을 들어주어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치 않게 하였으니 유신이 그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삼국을 합쳐 한 나라를 만들고 공명으로써 끝마쳤다>
군인을 알아준 신라는 김유신이 뜻을 마음껏 펼 수 있도록 뒷받침했고 김유신은 삼국통일로써 나라에 보답했다. 김유신의 장엄한 생애와 이순신의 비장한 생애는 군인을 알아준 신라와 군인을 멸시했던 조선조의 차이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조선조는 민족사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순신 같은 人材도 말살하는 조선의 위선적 도덕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자유통일을 주도할 제2의 김유신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金庾信(김유신)의 장엄한 생애와 李舜臣(이순신)의 비장한 생애

가. 시대상황: 尙武정신이 넘쳐나던 통일신라 시대와 尙武정신이 억눌린 조선조 시대의 차이. 무사가 지배층이던 시절과 선비가 지배층이던 시절의 차이.
나. 金庾信은 권력자, 즉 정치군인이었지만 李舜臣은 순수군인이었다.
다. 金庾信은 삼국통일을 목표로 삼았고, 李舜臣은 조국의 수호가 목표였다.
라. 김유신은 對唐결전주의자였고 이순신은 明軍을 상대로 事大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마. 김유신의 自主的 자세, 이순신의 충성스러운 자세가 대조적이다.
바. 公私의 엄격한 구분 및 솔선수범이 공통점이다.
사. 불교적 인생관과 유교적 인생관의 차이가 크다.
아. 김유신은 신라의 적극적 뒷받침을 받았고 이순신은 조선조의 방해를 많이 받았다. 군사를 아는 왕(태종무열왕과 문무왕)과 군사를 모르는 왕(선조)의 차이이다.
자. 김유신은 79세로 장수했고, 이순신은 50代에 죽었다. 死後 김유신은 興武大王으로 추존되고 이순신은 충무공이 되었다.
차. 김유신은 민족통일 국가를 건설하여 한민족의 토대를 닦았고, 이순신은 국가를 위해 殉死(순사)했다.

3. 玉浦에서: 이순신이 기뻐할 위대한 역전승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압도적 쇳덩어리

尙美會(02-734-1245) 여행단 32명은 2006년 봄 거제도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玉浦大捷기념탑을 방문했다. '亂中日記를 들고 떠나는 민족의 聖地순례' 2박3일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전 퍼부었던 폭우가 걷히고 파아란 하늘과 청명한 공기 속에서 옥포만의 위용이 압도적으로 우리 눈앞에 다가왔다. 세계 제2위의 대우조선 공장이 내려다 보였다. 건조중인 수십만톤짜리 巨船들이 옥포만을 좁게 만들고 있었다. 900톤까지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도 보였다. 쇳덩어리의 집합체가 일대 장관이었다.

옥포海戰은 李舜臣 장군의 첫 승리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중 조선군의 첫 승리였다. 1592년 4월14일(음력) 부산포에 상륙한 15만 명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4월말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서울을 방어하도록 명령받은 金命元은 장수 된 몸이면서도 일본군이 다가오자 武器를 강에 버리고는 변장하여 달아나버렸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왜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서울을 점령했고, 宣祖는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592년 5월초의 상황이었다. 정규군인 官軍이 붕괴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이러한 때 玉浦 해전 승리는 그 어느 누구의 지시도 도움도 없이 李舜臣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규군의 첫 승리

전남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사 李舜臣은 우수사 李億祺(이억기)와 함께 85척의 함선을 이끌고 5월8일 옥포만에 도착했다. 일본 해군은 50여척을 정박시켜놓고 있다가 우리 水軍 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기세에 눌려 우리 배 6척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충무공은 직접 敵陣으로 들어가 26척을 불살랐다. 배를 잃은 일본군은 거제도에 상륙하여 도망했고, 살아남은 함선은 부산포로 물러났다.
이 승리는 조선과 일본의 정규군끼리 대결하여 조선군이 올린 첫 승리였다. 이 첫 경험이 李舜臣 함대의 자신감으로 굳어졌을 뿐 아니라 패퇴를 거듭하던 宣祖 정권도 逆轉勝의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해전을 기려 巨濟市가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산꼭대기에 만든 옥포대첩기념공원은 한려수도를 둘러볼 수 있게 하고 호젓한 산책로가 있어 생각에 잠기게도 했다. 특히, 그 勝戰의 현장에 해양강국 한국의 한 상징적 공장이 健在한 것을 내려다 보니 “이순신의 정신과 숨결이 저렇게 살아 있구나”하는 감회에 젖었다. 李舜臣의 이야기가 화석화된 역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實感이 드는 것이었다.
李舜臣이 남해안 바다를 지키지 못했으면 호남 곡창지대로 일본군이 들어가 明軍이 구원하러 오기 전에 조선은 일본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다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그린 앤 클린

오후에 그 옥포조선소에 들렸다. 휴일인데도 李學文 홍보팀장(부장)이 나와서 尙美會 여행단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130만 평에 들어 서 있는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DSME)는 종업원이 1만2000명, 협력업체 종사원은 약 1만900명이다. 올해 매출액은 약 5조원, 영업실적은 100억 달러(수주물량)를 예상하고 현재 수주 殘量이 149억 달러어치나 된다. LNG 운반선 건조량에서는 대우조선이 세계1위이다. 건조 선박의 약 97%를 수출한다. 한 해에 이 조선소가 사용하는 철강무게만 해도 100만톤을 넘는다. 그 중 약70%는 포스코에서 사들이고 나머지는 수입한다. 포스코가 철강생산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생산자가 큰 소리 친다고 한다.
대우조선이 만드는 32만톤 유조선의 경우 어른 500만 명분의 무게를 실을 수 있다. 이 조선소에서 짓는 배들중 가장 비싼 것은 浮游式원유생산저장하역선(FPSO: Floating Product Storage Off-loading)이다. 한 척이 10억 달러선이다. 아마도 9만톤짜리 원자력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 및 이지스 순양함을 제외하면 가장 비싼 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는 약1500명의 설계요원들을 데리고 있다. 한국의 조선업이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이유는 이 기술력인 것이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의 조선업이 싼 임금으로 성장했고,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 등 조선업종에서 노사분규가 심했던 시절이 있었다.
李學文 팀장은 “대우조선 공장은 그린 앤 크린(Green and Clean)하다”는 표현을 했다. 둘러보니 공장이라기 보다는 ‘쇳덩어리를 조각하는 공원’이란 느낌이 들었다. 쇳물이 녹아내려 바다를 더럽히는 그런 조선소를 생각하면 이 또한 오해이다. 공장을 한 바퀴 둘러보아도 휴지 한 조각, 오물 한 점, 쇳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유조선 한 척을 만드는 데 약8만 조각의 철판이 필요하다. 이 조각을 이어붙여 가는 것이 造船이다. 그래서 건설업종과 生理가 비슷하고 현대건설처럼 건설업에서 성공한 기업이 진출하면 잘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동행한 여행단 사람들에게 “이것이 바로 한국의 피라미드가 아니겠습니까. 프랑스는 에펠탑을 갖고 있지만 이런 조선소는 없으니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가장 감동적인 관광거리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No change, no future'(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이런 모토가 쓰여진 공장을 구경하던 여행객이 “이 공장을 만든 金宇中씨야말로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은 분이 아닌가. 그분이 獄에서 나와야 할텐데”라고 말했다. 다른 분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李舜臣의 위대성은 조정이나 국가가 전혀 지원하지도 않는 가운데서 水軍을 精兵으로 훈련하여 프로 戰士 집단인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른바 白衣從軍 정신에 있다. 조선조는 임진왜란을 당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침략을 허용하고 말았다. 李舜臣을 기렸으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던 것이 조선조였다. 실천력이 약한 선비집단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충무공 정신 이은 나라

李舜臣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것은 李承晩이 建國과 建軍을 주도했고, 朴正熙가 근대화와 자주국방정책을 이끌었던 대한민국이었다. 두 위대한 대통령은 富國强兵을 목표로 삼아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과 과학기술력을 건설했다. 종합 國力面에서 세계 10위권안에 드는 대한민국이야말로 李舜臣의 자주국방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정신과 실력을 두루 갖춘 자랑스러운 후손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李舜臣 정신은 말장난이나 글짓기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실력으로써 계승하는 것이다.
대우조선 공장을 나서면서 옥포대첩비가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내 곁의 한 분이 말했다.
“기업은 이렇게 잘 하는데 정치는 왜 그 모양입니까. 정치도 기업에 맡기면 안될까요?”
옥포대첩비 아래 效忠祠에는 ‘尙有十二微臣不死’(상유십이미신불사)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충무공이, 元均의 패전으로 사라진 水軍을 재건하여 일본군과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던 중 조정에 보고한 문서의 한 구절이다. “아직 12척이 있고 제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12척밖에 남지 않았던 朝鮮水軍으로 기적의 鳴梁대첩을 만들어냈던 李舜臣이 還生하여 대우조선의 위용과 巨船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여러분들, 정말 수고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4. 이순신의 亂中日記 읽기

알려질 것을 의식하지 않고 쓴 日記

李舜臣의 일기를 亂中日記라고 부르게 된 것은 正祖가 李忠武公全書를 만들도록 한 뒤였다. 편찬자가 亂中日記라고 붙인 것이지 李舜臣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李舜臣은 그의 死後에 자신의 日記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日記는 전란속에서 가슴에 쌓아둘 수 없었던 울분, 걱정, 한탄을 기록한 것이지 나중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일기를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일이다.

李舜臣은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알려질 일이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와 같은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서는 李舜臣의 그런 착각이 무척 다행이다. 솔직한 자기토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인간 李舜臣의 裸像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傳記작가들의 의해 신격화되고 박제품이 된 근엄하고 딱딱한 李舜臣과 달리 亂中日記속의 李舜臣은 피가 끓고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며 憂國과 분노가 뒤섞이고 비통함과 집념이 뒤엉키는 격동하고 생동하는 바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聖人도 아니고 聖雄도 아니다. 그의 傳記 10권을 읽는 것보다는 亂中日記 한 권을 읽는 것이 그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超人이 아닌 病弱했던 사람: 신경성 위장병을 앓다

正祖 시대 난중일기를 처음 활자판으로 간행할 때 누락시킨 부분이 많은데 주로 조정을 비판하고 元均에 대해서 험한 이야기를 한 경우이다. 이 누락부분이야말로 李舜臣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뇌물의 多少로 죄의 輕重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한 줄기 돈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丁酉年5월21일)
<元(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丁酉年 5월8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무치고 슬픈 마음에 눈물은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빨리 죽지 않는가>(丁酉年 5월6일)
1998년에 서울대학교 朴惠一 명예교수(원자력 공학)와 崔熙東 원자핵공학과 교수, 裵永德-金明燮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이 같이 쓴 「李舜臣의 일기-親筆草本에서 國譯本에 이르기까지」에는 난중일기를 분석하여 李舜臣의 행동을 엿보게 한 대목이 있다. 李舜臣이 자신의 일기에서 몸이 불편하다든지 병에 걸린 것을 언급한 대목이 180여 회에 이른다.
1597년 8월21일자 일기: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한 탓인가 하여 소주를 마셔 다스리려 했다가 人事不省에 빠져 거의 구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고통을 겪었다」
8월22일: 「곽란으로 인사불성, 기운이 없고 또 뒤도 보지 못하였다」
8월23일: 「병세가 몹시 위급하여 배에서 거처하기가 불편하고 또 실상 전쟁터도 아니므로 배에서 내려 포구밖에서 묵었다」
이 기사를 본 내과전문의의 소견은 「극심한 신체적 과로와 정신적 압박에서 비롯된 일종의 신경성 위장반응이며 급성 위염의 증상군에 속하는 病狀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엔 술마신 기록이 140여회나 나온다. 그는 속앓이를 하면서도 술을 즐겨 했다. 나라가 되어 가는 모습에 대한 울분,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 걱정,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元均에 대한 경멸과 미움, 倭敵에 대한 증오, 民草의 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李舜臣은 몸을 돌보지 않고 술로써 시름을 달랬던 것 같다. 토사곽란을 소주로 치료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위장병을 술로 다스리려고 한 사람

신경성 위장병의 원인은 과도한 걱정과 울분이었을 것이다. 李舜臣 일기엔 꿈에 대한 이야기가 수십 차례나 나온다. 그는 꿈자리가 어지러웠던 사람이다. 꿈의 내용도 주로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 걱정이다.
<丙申 정월12일: 새벽 2시쯤, 꿈에 어떤 곳에 이르러 영의정(柳成龍)과 함께 이야기했다잠시 함께 속 아랫도리를 끄르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 놓다가 끝내는 가슴이 막히어 그만두었다. 이윽고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비게 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다시 가시랴」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가슴이 막힐 만큼 나라 걱정을 하는 李舜臣은 元均에 대해서만은 아주 경멸스러운 용어를 쓰고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를 元凶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 난중일기의 元均 인물평으로 해서 임진왜란 뒤 3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다른 두 사람은 李舜臣과 權慄)으로 선정되었음에도 元均은 실제보다 더 나쁘게 알려진 억울한 면도 있다. 난중일기를 읽고 있으면 李舜臣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분과 恨을 가슴 속에 묻고 지낸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기록문학

李舜臣의 진면목은 역시 海戰을 기록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전멸하다시피한 朝鮮水軍에서 겨우 10척의 戰船을 수습하여 일본 水軍 200여척과 대결한 명량대첩날의 기록은 悲壯하고 문학적이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히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軍令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1594년 5월9일 일기: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잠못 이루는 밤속에서 읊은 시조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茄(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다.

달빛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긴 李舜臣의 모습은 亂中日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걱정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亂中日記 어디를 보아도 느긋한, 유쾌한 李舜臣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시대의 짐을 몽땅 혼자서 진 모습의 연속이다.

난중일기엔 아산에 모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100여회나 등장한다.
<丁酉 4월13일:잠시 후 종 順花가 배로부터 와서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
丁酉 4월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靈筵(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天地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李舜臣은 군인을 경멸하는 文民 지배의 정치질서 속에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모함에 걸어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양반 지도층 인사들의 등살에 그는 心身이 골았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아들을 잃었다. 막내아들(면)의 戰死통지를 받을 때 심경을 李舜臣은 이렇게 적었다.
<1597년 10월14일: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니와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어두워지고 캄캄하고 밝은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마침내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힘쓰고 같이 울고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 비가 내렸다>
3일 뒤 일기에서 李舜臣은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껏 통곡해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만드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脫營한 군인들을 잡아와서 처형하고 엉터리 보고를 한 군관에게 곤장을 치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戰船을 빌어준 군인들을 처벌하는 따위의 벌주는 기록에 110여회나 등장한다. 李舜臣은 결코 자애로운 장군이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군대를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軍需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는 劣惡한 상황에서 軍紀를 엄정하게 잡아가자니 강력한 體罰이 동원되었으리라.
러일 전쟁중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李舜臣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도고의 다음 설명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李舜臣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武將이 武將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이 바로 李舜臣의 실존적인 고독, 그 핵심을 이야기한다. 무능한 王朝, 엉터리 전쟁지도, 오지 않는 軍需 지원. 이런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敵을 상대해야 했던 李舜臣. 군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그가 최후의 해전에서 살아 개선했다면 과연 명대로 살았을까? 李舜臣의 가장 큰 多幸은 최후 전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는 느낌이다. 李舜臣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의 행동은 활쏘기이다. 270여회.

5. 연개소문과 김정일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인 연개소문을 美化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려 든다면...한 탈북자는 '연개소문이 김정일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는 짓이 김정일과 꼭 닮아'

며칠 전 북한정권의 한 고위직 출신 탈북자를 만났다. 70代인 그는 체구가 아주 컸다. 전형적인 북한의 지배층 체격이었다. 그는 요사이 고구려史를 읽으면서 북한을 생각한다고 했다.
'특히 淵蓋蘇文(연개소문)이 김정일과 흡사하더군요. 고구려를 망친 것이 연개소문이듯이 북한을 망친 것도 김정일인데 망치는 방법이 비슷하고 末路도 비슷해질 것 같습니다'
그는 이런 비교를 했다.
'당시 고구려가 세계최강국인 隋 唐과 전쟁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지요. 연개소문은 전쟁을 피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민들의 고통이 어떠했습니까? 요사이 김정일이 미국을 敵으로 돌려놓고 군사력을 건설한다면서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연개소문은 왕과 귀족들을 도륙하고 집권했습니다. 민심을 잃은 것이지요. 그가 죽자 세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남생은 唐으로 달아나 唐軍을 안내하여 와서 조국을 치지 않았습니까? 김정일이 죽으면 그 아들들끼리 싸우고 정남이는 중국에 붙을지도 모르지요. 고구려가 외교를 통해서 隋 唐과 화해했다면 인민들이 고생하지 않았을터인데 전쟁의 길을 선택하면서 천리城을 쌓았지 않습니까? 북한이 미국, 한국과 대결자세를 취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니 인민들이 고생하듯이 말입니다'
서강대학교 李鍾旭 교수가 쓴 '고구려의 역사'(김영사)를 읽어보니 이 탈북자와 같은 시각이 들어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의 집권은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온 결정적인 요인이다'고 지적했다.

1. 연개소문의 포악함은 고구려 백성들의 마음이 왕국을 떠나도록 했다.
2. 그는 집권과정에서 100여명의 대신들을 죽였다. 이들은 王政을 담당하던 세력이었다.
3. 그는 쿠데타에 반대한 지방세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羅唐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國力을 총동원할 수가 없었다. 唐과 싸우려면 국내의 단합을 도모해야 했는데 분열을 조장했다. 안시성에서 싸워 이긴 城主는 연개소문에 반대했던 이였다. 그는 연개소문의 도움 없이 唐軍을 무찔렀다.
4.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다.

李鍾旭 교수는 작년 10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 ─隋 양제와 唐 태종의 침략을 막아 내던 고구려가 왜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했을까요.
『중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들어서면 그 주변국들은 으레 守勢的 입장에 들어갔습니다. 三國史記엔 「고구려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잃고, 나라 안의 인심을 잃어 멸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고구려가 隋·唐에 대해 끝까지 대결정책을 쓴 것은 장쾌한 측면도 있지만, 「벼랑 끝 외교」로 결국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 집권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어떻게 보십니까.
『淵蓋蘇文은 연회를 베풀고 그 자리에 참석한 大人 100여 명을 몰살하고 왕궁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죽인 다음 그 몸을 몇 동강 내어 시궁창에 버렸습니다. 왕과 大人 100여 명을 한꺼번에 죽인 것은 고구려를 움직여 온 국가시스템을 파괴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개소문은 국정을 장악해서는 안 될 무능력자입니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킨 후 安市城(안시성)의 城主를 제압하지 못했어요. 그런 리더십으론 다른 지방세력도 제어하지 못했을 거예요』
─唐 태종의 원정군을 물리친 사람이 안시성 城主와 城民들입니다. 연개소문의 통제 밖에 있던 지방군이 唐軍을 물리친 것이죠.
『백제가 망한 이듬해 唐軍에 의해 평양성은 포위당했고 요동 영토는 거의 해마다 침입을 당했는데, 그것은 수도와 지방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런 펀치를 해마다 맞아선 長期戰에 견디기 어렵죠. 결국 연개소문이 죽은 지 2년 만에 고구려는 그의 아들 셋의 권력 다툼 속에서 패망했습니다』>

SBS의 신라폄하, 연개소문 미화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인물비교로써 설명한 논문도 있다. 연개소문의 포악함과 金春秋의 관대함, 연개소문의 폐쇄정책과 김춘추의 목숨을 건 동맹외교, 연개소문 아들들의 분열과 金春秋 아들들(문무왕과 김인문 등)의 단합이 대조적이다.
SBS가 이 연개소문을 미화하는 大河드라마를 작년 7월8일부터 내보냈다. SBS는 취지문에서 이미 선전적 의도를 드러냈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한을 축소 통일한 이후 고구려의 영웅들에 관한 역사는 왜곡되고 폄하되어 사라졌다. 특히 연개소문은 중국이 쓴 역사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그려졌으며 우리의 역사서도 그들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참으로 난폭하게 쓴 선전문이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고구려 추앙 분위기 속에서 대체로 과대평가되고 미화되었지 폄하된 적은 거의 없다. 신라가 통일 이후 고구려의 영웅들을 왜곡 폄하했다고 하는 주장은 三國史記를 읽어보지 않고 하는 막말 수준이다. 신라귀족의 후손인 金富軾이 쓴 三國史記는 고구려의 對唐, 對隋抗戰을 민족주체성의 입장에서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이 드라마의 위험성이 느껴진다. 즉, 연개소문을 통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려는 의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한 것이 아니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가 唐이 신라까지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자 백제, 고구려 유민들과 손을 잡고 8년간의 對唐결전을 통해서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한 것이다. 신라가 唐의 힘을 빌려온 것은 전반부의 이야기이고 통일은 唐과 싸워서 이룩한 것인데도 이 SBS의 선전문은 민족사의 최대업적을 굳이 내려앉히려고 한다.
SBS는 드라마 '연개소문'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KBS는 드라마 '1945년'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이 오늘 중국 山東省의 일부가 아니고 한국인이 漢族의 일부가 아니고 당당한 韓民族으로서 중국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신라의 對唐결전이 가져온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 건설이었다. SBS와 KBS가 합작하여 북한정권이 좋아하는 두 개,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통성 부정을 드라마틱하게 代行함 셈이다.

6. 전쟁과 天災가 가장 많았던 新羅가 통일한 이유

공격과 시련을 많이 당한 사람이나 국가는 죽거나 항복하지 않으면 대체로 발전한다. 국가로선 新羅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으로선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고 감옥에도 갔다 왔던 李承晩, 朴正熙 같은 지도자이다. 욕을 많이 먹고 매를 많이 맞는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일 경우가 많다. 다만 고통을 견디어낼 때만 그 투자는 거대한 수확을 얻는다.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 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냈고, 신라는 倭와 싸워 한반도의 남쪽을 지켰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라의 잦은 시련은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발전과 王權강화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전쟁을 민족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삼국통일이 요행수로 되었다고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7. 너무나 당연한 新羅正統論
-환상적, 희망적, 감상적 역사관의 안개가 걷힐 때 드러나는 韓國史는 의외로 단단하고 알차다. 과장하지 않아도, 견강부회하지 않아도 한국의 역사는 아름답다.


대한민국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진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이다. 북한은 민족사의 異端이고 한반도의 反국가단체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과 역사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진실이다. 국민들은 이 정통론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 근거하고 있다. 신라가 唐의 힘을 빌어 倭의 방해책동을 분쇄하고 백제, 고구려를 병합한 뒤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唐의 세력마저 내몰고 통일국가를 세운 것이 韓民族의 시작이다. 신라 이전은 민족이 아니라 종족이었다. 민족은 공통의 가치관, 풍습, 언어, 정치제도, 인종적 유사성을 가져야 한다. 장기간 그런 공통점을 공유해야 민족을 민족이게 하는 민족의식을 갖게 된다. 즉 민족은 오랜 세월의 정치적 숙성과정을 거쳐서 進化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한민국에 의한 국민국가 건설은 한민족의 2大 쾌거이다. 삼국통일에 의한 민족통일국가의 설립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통일에 의한 두번째 민족통합을 指向할 수 있다.
고구려 발해는 신라통일에서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主流에서 보면 上流와 支流에 해당한다. 북한정권은 이단이고. 고구려는 통일신라라는 저수지로 들어온 상류이고 발해는 말라버린 지류이다. 상류와 지류를 本流라고 오해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역사관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낮추어보기도 한다.
서강대학교 이종욱 교수가 '신라정통론'을 주장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새삼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非과학적인 역사관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환상적, 희망적, 감상적 역사관의 안개가 걷힐 때 드러나는 韓國史는 의외로 단단하고 알차다. 과장하지 않아도, 견강부회하지 않아도 한국의 역사는 아름답다.
특히 대한민국 建國과 신라의 삼국 통일은 장대한 드라마이다. 이 성공사례에서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만들어내야 한다. 고구려의 對唐, 對隋저항史도 대단하지만 결과론적으론 실패사례이다. 연개소문의 외교와 내정실패가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했다. 연개소문에서 실패의 연구를, 金春秋에서 성공의 사례연구를 해야지 연개소문이 唐과 싸워 일시적으로 이겼다는 사실만 부각하여 미화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배우는 길이다. 약한 나라가 당대의 최대 강국과 싸워 결국 망했다는 것은 외교의 실패를 의미한다.
신라는 세계최대 帝國인 唐과 친하여 그 힘을 빌어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唐이 야욕을 드러내자 결전하여 추방했다. 이런 자주성이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對唐결전이 한민족을 만든 것이다. 왜 이 대목은 드라마와 소설과 연극의 소재가 되지 않는가?
북한정권은 앵무새 같은 역사가들을 앞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방한다. 민족사의 가장 찬란한 부분에 회칠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민족사의 이단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민족사의 2大 쾌거를 기리지 않고 저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좌익들이야말로 민족반역자들이다.

8. 신라에 대한 부당한 모함의 예

A. 신라는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을 쳤다?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동족이 아니었다. 동족이란 무엇인가. 같은 언어, 같은 풍습, 같은 종교, 같은 정치제도,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오래 살아온 공동체이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은 서로 싸우느라고 이런 공동체에 필요한 공감대를 형성할 겨를이 없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同族이 되는 것은 신라통일 이후 한반도를 보금자리로 삼아 함께 살면서부터이다.
따라서 신라가 唐을 끌어들여 친 것은 동족이 아니라 외세였다. 즉, 외세를 불러들여 외세를 친 것이다. 신라에게는 당이나 백제, 고구려가 똑 같은 외세였다. 백제에겐 왜나 신라가 똑 같은 외세였다. 백제는 항상 왜와 손잡고 신라를 쳤다. 백제 또한 외세를 빌어 외세를 친 것이니 비난받을 필요가 없다.
7세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민족주의란 잣대를 신라통일에 들이대고 사대주의적 통일 운운하는 것은 세종대왕한테 왜 직선제 선거를 통해서 임금이 되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신라는 당을 끌어들였지만 최후엔 당을 한반도에서 쫓아내었다. 신라통일을 욕하는 이들은 唐을 끌어들인 이야기만 하고 신라가 唐을 격퇴시킴으로써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한 위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B. 만주를 차지하지 못한 불완전 통일이다?

그 책임은 만주를 지키지 못하고 羅唐 연합군한테 망해버린 고구려한테 물어야 한다. 왜 신라가 고구려의 책임까지 떠맡아야 하는가. 설사 고구려 중심으로 통일되어 만주와 한반도가 우리 땅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을 한족과 북방기마민족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때 만주를 차지했었던 거란의 遼, 여진족의 金이 그 뒤 어떻게 되었나를 보면 안다. 강과 바다로 대륙과 격리되어 수비하기가 좋은 한반도를 한민족이 차지했기 때문에 수많은 침략으로부터 국토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구려는 수와 당과 대결하여 민족통일국가에 보탬이 되는 인적, 지리적 자원을 지켜내었다. 신라는 왜와 대결하여 역시 한민족의 자원을 보존할 수 있었다. 백제는 가야,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백제의 자원을 660년까지 보존하고 있다가 신라통일에 의해 한민족의 한 구성요소로 넘겨주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모두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것이다.

C.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의 수치이다?

민족통일국가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고 이를 저주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지식인 대접을 받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국뿐일 것이다. 미국인이 언제 독립을 저주하던가, 일본인이 언제 명치유신을 저주 경멸하던가, 독일인이 언제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을 낮추어 보던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 가리발디-마치니-카불이 주도한 이탈리아 통일을 비난하던가. 민족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에 회칠을 하면서 조상을 욕하러 다니는 자들에게는 전통과 역사가 반드시 보복을 내린다.

9. 신라와 대한민국의 공통점

1. 통일신라는 세계의 一流국가였다. 대한민국은 非서구문명국가로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一流국가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2. 신라와 대한민국은 文武를 겸한 尙武국가였다.
3. 신라와 대한민국은 개방적 해양국가였다.
4. 통일신라와 대한민국 시대에 한민족의 활동반경이 가장 넓었고 세계사의 主流에 참여했다.
5. 신라와 대한민국은 동맹국 외교에 성공했다. 신라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唐과 동맹하여 통일에 성공했고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선진국 미국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통일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6. 신라와 대한민국은 애국적 종교와 정치를 결합시켰다. 호국불교와 화랑도의 결합, 反共애국기독교와 국군 장교단의 협력이 그것이다.
7. 신라와 대한민국은 강대국과 동맹하면서도 자주정신을 유지했다.
8. 신라와 대한민국은 유능한 지도자를 만났다. 통일신라는 외교의 金春秋, 군사의 金庾信, 내치의 文武王을 가졌고 대한민국은 외교의 李承晩, 군사의 朴正熙, 경제의 李秉喆을 가졌다.
9. 신라와 대한민국에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한국역사상 여왕들이 나온 나라는 신라뿐이고 여성대통령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나라는 東아시아에선 한국뿐이다.
10. 대한민국이 신라보다 못한 점은 두 개이다. 첫째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고귀한 자의 의무)이고 또 하나는 국내통합 부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아직도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11. 신라통일은 민족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건국은 국민국가의 출발이었으며 남북자유통일은 선진화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10. 一流국가 만들기의 新羅모델

대한민국의 꿈은 자유통일을 이룩한 다음 一流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민족사의 두번째 선진화 경험이다. 첫번째는 신라가 서기 676년 한반도를 통일한 다음 약200년간 一流국가로 번영했을 때였다. 7~9세기에 유럽은 암흑시대라고 하여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의하여 파괴된 뒤라서 교회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문화의 건설이 없었다. 아랍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 세계 2대 문화권은 唐과 신라를 중심으로 한 동양, 그리고 아랍권이었다. 예술, 군사력, 정신력에서 신라는 당시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신라가 唐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본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그 뒤 2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고대의 황금기인 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신라였다. 우리가 지금 두번째로 일류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첫번째 일류국가 新羅의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라를 一流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이렇게 정의된다.
1. 정치가 안정되었다. 王權의 계승이 비교적 순리대로 이뤄졌다.
2. 지배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확립되어 국민단합이 이뤄졌다.
3. 외교를 잘하여 당시의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4. 종교와 권력이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삼국통일의 2대 주체세력인 호국불교와 화랑도를 만들어냈다.
5. 文武겸전; 나라의 기풍이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6. 해양력이 강했다. 對唐결전에서 신라는 해전으로 결판을 냈다.
7. 실용적 자주정신이 강했다.
8. 행정 시스템이 잘 짜여져 유사시 동원력이 강했다.
9. 불교 같은 외래문물을 사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국의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10.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한강유역을 잃지 않았다.
11. 통일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거의 차별없이 통합했다.

위의 11개 조건은 대한민국이 일류국가의 꿈을 실현하는 데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주정신, 실용정신, 해양정신, 文武통합, 애국종교, 행정력, 수도死守, 지도층의 솔선수범, 애국청년의 조직화, 정치안정, 동맹외교라는 키워드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일류의 조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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