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大水路 공사 현장 紀行
조종실에서
오후 4시 김포공항 탑승 대기장 18번 게이트 옆 공중전화 박스. 기자는 전화를 걸려고 줄을 서 있었다. 앞에서는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왜 빨리 안 받노. 내 잘 갔다 올께. 아프면 약 사 묵어레이』
『……』
『잘 갔다 올께. 도착해서 전화할께. 장모한테 나 대신 전화하레이』
기자는 『아 이 분도 휴가를 끝내고 리비아 공사장으로 돌아가는 동아건설 노동자이구나』라고 직감했다. KE8013편 점보기는 오후 4시에 김포(金浦)를 이륙했다. 투니시아 제르바 공항에 도착하기 전 하노이와 바레인을 경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두 곳 모두 처음인데다가 기자의 방문 국가 리스트에 2를 더해주는 셈이 되지 않는가. 무착륙 장시간 비행보다는 중간 중간에서 쉬어가는 게 재미있지 않은가. 이륙 후 순항고도에 접어들자 『디스 이즈 캡틴 스피킹』(This is captain speaking)으로 시작되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맹동섭 기장」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맹(孟) 기장이 모는 점보기의 조종실에 앉아 태평양을 횡단, 김포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간 것은 1985년 10월이었다. 학자 같은 조용한 인상의 孟 기장 얼굴이 떠올랐다. 이륙 후 3시간쯤 지나 점보가 중국 남쪽지방 상공을 지나갈 때 허가를 받고 조종실로 들어갔다. 비행기가 순항고도에 진입한 뒤라 조종실의 세 사람-기장·부기장·항공기관사-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孟 기장은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하면 그 전용기의 기장으로 뽑혀 여덟 번이나 정상회담에 관계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방문국의 공항에 전용기를 도착시키는 데 신경 쓴 이야기를 했다. 9년 전 기자가 孟 기장의 점보기를 탔을 때는 밤이었다. 조종실의 앞 창은 시야가 넓다. 마치 우주선에 탄 기분이 들 정도로 별들이 가깝게 보인다. 그런 가운데서 비행의 애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군조종사 출신인 孟 기장은, 1970년대 초에 남쪽으로 착각 비행을 했다가 동해안 백사장에 불시착했던 북한 공군 미그기의 조종사 박순국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당국에선 귀순으로 발표했으나 朴 소좌는 결코 전향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朴 소좌의 미그기는 항법장치의 고장인지 조종사의 착각인지 동해안을 따라 포항 상공까지 남하했었다. 우리 공군은 뒤늦게 발진하여 다시 북상하는 미그기를 추격, 속초 근방의 해안에 불시착시켰었다. 결혼한 몸으로 가족을 北에 둔 朴 소좌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면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한 적도 있으나 공군장교가 되어 잘 살다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북한에선 朴 소좌를 영웅으로 만든 「은빛 날개」란 영화를 제작했다.
孟 기장은 『중국의 지상 관제소 가운데는 고장이 나서 가동이 중단된 곳이 더러 있다』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금방 구별된다』고 했다.
『옛날엔 한국의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국토가 벌겋고 일본은 검푸렀는데 요사이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해졌어요. 인도 대륙 위를 날다가 보면 황폐한 땅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지요』
하노이 공항에서의 추억
김포를 떠난 지 네 시간 만에 월남의 수도 하노이에 내렸다. 밤. 시골 驛舍같은 공항 시설. 파란 모자를 쓴, 깡마르고 키가 작은 월남 청년들이 탑승자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동아건설의 리비아 공사장으로 취업해 나가는 이들이었다. 말수가 적은 그들은 담배를 많이 피워댔다. 습기가 많은 후끈한 여름밤에 넥타이를 맨 승객은 기자뿐이었다. 좁은 대기실에서 한 시간쯤 기다리는 동안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간이매점처럼 단출한 카운터에는 콜라 등 음료수가 몇 개 놓여 있고 뱀이 들어 있는 술병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리비아에 도착했더니 동아건설의 한 간부가 『그 뱀술이 아직도 그대로 있습디까』 하고 물었다. 꽤 고명한 뱀술인 모양이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아프리카로 돈벌이 나가는 월남 청년들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기자가 다수의 월남인들을 만난 것은 이것이 19년 만이었다.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전에 우리 해군 LST 두 척은 한국 교민들과 월남인 妻 및 한국과 관계있는 월남인 1천 5백여 명을 태우고 출발, 5월 중순에 부산에 닿았다. 이들은 옛 부산여고 교사에 수용되었고 기자는 이곳을 취재했었다. 亡國의 流民이었지만 월남 사람들은 대단한 생존력을 보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나라로부터 도움과 보호를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수용소 관리소에 대해서 당당하게(때로는 건방지게) 요구, 항의하는 그들을 보고는 『독한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났었다. 주한 월남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던 한 월남 장교가 사이공에 남겨둔 아내가 혹시 LST편으로 탈출해 오지 않았나 고대하다가 타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흐느끼던 장면도 생각났다. 지금 그 장교는 어디에 있을까. 아내와 재회했을까. 아마도 했겠지… 역시 세월만이 역사가 남긴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상념에 잠겼다. 하노이 공항을 출발, 6시간의 야간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바레인. 현지 시간으로 새벽 0시40분이었다. 바레인은 중동의 회교 국가이지만 술이 허용될 정도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이다.
영국 식민지였고 지금도 영국인들이 관리로 많이 고용돼 있다. 공항은 아주 현대적이고 능률적이다. 여기서 3시간을 기다렸다. 공중전화 박스는 집으로 전화를 거는 한국인 근로자들로 만원이었다. 1987년 12월1일 오전, 이곳 바레인 공항에서 신분이 탄로난 KAL858편 폭파범 金勝一은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했다. 金賢姬도 앰플을 깨물었으나 경찰관이 즉시 개입하여 목숨을 건졌다.
1989년 봄, 기자는 金양과 최초의 인터뷰를 안기부 安家에서 가졌던 적이 있다. 앗시리아의 浮彫(부조)처럼 옆 얼굴의 윤곽이 또렷한 金양은 자살을 결심했을 때의 심정을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김일성 수령님의 지시에 따라 혁명가로 값지게 죽는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자꾸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金양은 그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공작원에게 잡히면 자살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의 체면을 보호하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신처럼 따랐던 金日成에 대한 각성의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金日成 死後에 다시 金양을 만났더니 『김일성은 한번도 좋은 일 못하고 죽었으니 참 불쌍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자가 북한에 대해서 본격적인 탐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도 金賢姬와의 인터뷰였다. 아무도 옆에서 총을 들이대고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예의 바른 처녀」 金賢姬는 왜 노동자들이 탄 비행기 안에 시한폭탄을 두고 내렸던가. 이 의문을 풀려고 접근해 보니 거기엔 金日成이란 神이 있었고 그의 신도가 된 金賢姬와 인민이 있었던 것이다.
리비아로 들어가다
기자는 비행기를 타면 늘 창쪽 좌석을 차지하여 지도와 실제 地理를 대조하는 재미를 즐긴다. 바레인을 떠난 지 네 시간쯤 지나서 날이 밝고 오른쪽으로 지중해가 나타나더니 두 바위섬이 항공모함처럼 떠 있었다. 시루떡처럼 평평하고 길쭉한 섬 위에는 활주로가 있고 절벽의 낙차는 200m를 실히 넘을 것 같다. 저기가 어딘가. 지도를 보니 말타였다. 몇 년 전 부시-고르바초프 頂上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점보기는 투니시아의 지중해쪽 北岸 상공으로 들어갔다. 누런 땅과 올리브 농장 위를 지나 제르바 섬에 내렸다. 독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이 관광지엔 동아건설 사무소가 있어 입국하는 근로자들을 맞아들인다. 리비아에 대한 UN의 경제 봉쇄조처로 국제항로가 끊겼기 때문에 제르바를 경유, 陸路로 리비아에 입국해야 한다.
제르바 공항에 내리니 현지 시간으로 오전 9시, 양명한 지중해의 하늘밑이었다. 비행의 時差에 따른 피로를 빨리 푸는 방법이 있는데 햇볕을 받으면서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해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행할 때의 時差 피로는 해의 운행 방향을 역류하는 경우보다 덜하다고도 한다. 역시 인간은 지구·자연의 리듬과 맞추어질 때 편해지도록 조직돼 있는 모양이다. 제르바에서 트리폴리까지의 육로는 부산-서울 거리다. 오른쪽으로는 올리브, 오렌지 농장이 연속돼 있고 왼쪽으론 지중해. 아프리카가 지중해와 만나는 모로코-알제리-투니시아-리비아-이집트의 北岸은 비가 적당히 와 그린벨트를 이루고 있다. 과일과 농산물이 풍성하게 나는 이곳을 페니키아-카르타고-그리스-로마-이슬람 문명이 연속적으로 지나갔다. 그 흔적이 다양한 인종구성과 유적으로 남아 있다. 본토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의 그리스-로마 도시들도 발굴돼 있다. 리비아-투니시아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여 리비아 땅으로 들어갔다. 도로표지판이 아랍어로만 표기돼 있고 거리를 써 넣지 않았다. 「地理」가 국가기밀이라고 한다.
유쾌한 청년처럼 그려진 지도자 가다피의 초상간판이 길가에서 자주 나타난다. 투시니아 쪽 길가에선 돈다발을 잡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흔드는 노상 환전상들이 자주 보였었는데 리비아에선 그것이 처벌대상이다. 네 시간 만에 동아건설의 트리폴리 사무소에 도착했다. 트리폴리市 교외에 자리잡은 이 기지는 잘 정돈된 건물과 정원으로 해서 지치고 불안한 여행자를 안도시킨다. 入國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서 1주일 정도 교육시킨 다음 현장으로 내보내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귀빈 숙소에 짐을 맡긴 뒤 오후엔 트리폴리시내로 구경을 나갔다.
서울에서부터 기자와 동행한 동아그룹 홍보실의 吳鴻埰 과장은 사진작가이기도 한데 리비아에서 이미 3년간 근무한 적이 있어 최고급 안내자였다. 리비아 국립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바닷가의 옛 요새 건물 속에 있는 이 박물관은 이탈리아 점령기엔 총독관저로 쓰였다고 하니 우리 중앙국립박물관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우리는 박물관 건물이 옛 총독부였다고 하여 철거했고 가다피 정부는 혁명 이후에도 옛 이탈리아 총독관저를 계속 박물관으로 쓰면서 최근엔 더욱 그 내부를 잘 꾸며놓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자주 정신으로 말한다면 金泳三에 뒤질 것 같지 않은 가다피는 왜 식민지 종주국의 사령부를 부숴버리지 않고 있나. 두 지도자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왜 다를까.
국립박물관으로 계속 쓰는 이탈리아 총독 관저
그 해답은 이 박물관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4층으로 된 박물관의 각 층은 리비아가 딛고 있는 역사·문화의 지층이었다. 先史시대-페니키아·카르타고-그리스·로마-이슬람-현대 리비아로 이어져온 역사의 흔적들이 이 박물관 안에서는 쌓이고 이어지고 조화되고 있었다. 한 문화의 융성과 멸망, 또 다른 문명의 등장과 퇴장, 전쟁과 평화, 격돌과 화해의 5000년간 파노라마를 한 시간 만에 스쳐지나가면서 기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건물엔 죄가 없는데…」
역시 로마 시대가 남긴 조각이 압권이었다. 위풍당당한 황제 및 원로원 의원들의 석상과 기품이 있으면서도 선정적인 귀부인 조각상은 2000년의 時空을 뛰어넘어 無言의 대화를 건네고 있었다. 로마시대의 여인상은 그 노출의 정도가 지금의 법률로써도 단속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 이런 대담한 개방성과 남자상에서 나타나는 위엄과 힘, 이것은 바로 로마 1000년을 관류한 시대 정신이었으리라. 힘과 자신이 있으니 개방도 대담하게 할 수 있었으리라. 군사력과 개방성, 즉 내부의 단결에 기초한 국제화는 로마 제국이 천년을 계속하면서 세계문명의 저수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 4층 박물관의 맨 위층은 가다피 기념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反美·자주·폐쇄·전투적 이미지가 충만하지만 가다피 또한 아래 3개층의 축적된 역사 위에 서 있는 것이고, 그런 토양 위에서 자란 그이기에 이탈리아 총독의 죄를 총독부 건물을 상대로 물을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자연히 알았던 것이 아닐까.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문 것의 한 결과는 日帝 침략에 대한 想起의 효과가 없어지는 것이다. 日帝 침략의 중요 물증을 없애는 것이다. 한 역사학 교수가 쓴 글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조선 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것이야말로 친일적이다」
상전으로 모셨던 필리핀人을 부리고 있는 한국인
동아 건설 트리폴리 사무소 曺正燮 소장은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월남전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공중사진 분석관(장교)으로 참전했던 그는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며칠 지나면 베트콩 부대들이 또 사진에 잡히고, 마치 샘 솟듯이 중단없이 땅 속에서 솟아나듯 병력이 보충되는 것을 보고는, 아,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曺소장은 『우리에겐 월남이 징검다리였다』고도 했다. 『월남 진출의 경험이 있었기에 中東건설 시장으로 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건설 기술이 발전하는데 디딤돌 역할을 했던 것은 1950∼60년대 주한美軍이 발주한 공사였다고 했다. 이때 공사 감독은 주로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한국 업자들은 필리핀 감독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회유와 수모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 필리핀 사람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과 부엌을 오가면서 음식을 나르는 근로자도 30대 초반의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 태도가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6시 운동장에는 어제 기자와 함께 왔던 월남인 입소자(入所者) 200여 명이 최초의 日朝점호 겸 훈련을 받고 있었다. 오와 열이 잘 맞지 않은 것으로 봐 군대경험자들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우리는 책임을 진다!』
『우리는 능력이 있다!』
『안전! 안전!』
한국어로 구호를 제창하면서 운동장 주위를 구보하는 월남 청년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완강한 한국인들의 손에 맡겨진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겁을 먹은 듯한 표정들이었다. 프랑스와 미군을 상대로 한 3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위대한 국민들은 또 다른 위대한 국민들을 만난 것이다.
리비아 도착 둘째날 오전 8시, 우리(기자+吳鴻埰 과장+필리핀 운전사)는 미제 비크 승용차 편으로 1000㎞ 동쪽에 있는 벵가지를 향해 출발했다. 지중해쪽 해안을 따라 나 있는 녹색 지대를 달리는 길이다. 아프리카나 사하라 사막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미국 아이다호나 몬태나주의 서부지역을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자동차 여행의 즐거움은 동승자들끼리의 대화이다. 특히 吳과장은 리비아에 관한 한 역사부터 지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분이라 기자는 완전히 시청각적인 입체 교육을 받는 기분이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大)의 파노라마, 귓전을 떠나지 않는 吳과장의 해설….
한 시간쯤 달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 홈즈市의 렙티스 마그나에 도착했다. 한 시간쯤밖에 여유가 없어 6일 뒤를 기약하기로 하고 중심부만 돌아보았다. 해변가의 이 도시 폐허는 광화문 일대보다 약간 넓다. 개선문, 공회당, 대중목욕탕, 신전, 야외극장, 魚市場 따위 공공건물이 모여 있었던 곳이다. 렙티스 마그나의 입구엔 이곳 출신인 세베루스 로마 황제의 동상이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날렵한 몸매에 곱슬머리-전형적인 武將의 모습이다. 기자가 딛고 있는 렙티스 마그나의 폐허는 약 2800년의 역사적 축적을 갖고 있다. 기원 전 9세기쯤 레바논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페니키아 상인들은 北아프리카 곳곳에 무역기지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지금 투니시아에 있는 카르타고와 렙티스 마그나도 포함된다.
카르타고는 강성해져 렙티스 마그나를 포함한 지금의 알제리 투니시아 리비아 일대를 정복하고 시실리까지도 영향권 안에 두었다. 3차에 걸친 로마와의 결전 끝에 카르타고가 철저하게 망해버리자 기원전 2세기 렙티스 마그나는 로마 영토가 되었다. 폼페이와 시저 사이의 內戰 때 렙티스 마그나는 폼페이 측에 붙어 물자와 인력을 제공했다. 시저가 암살된 뒤 13년간 로마는 또 다시 內戰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가 서기 전 31년 악티움 海戰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내전을 수습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등극하자 이 도시는 로마 원로원의 직접 통치下로 편입되었다.
세베루스 황제의 고향
서기 193년 코모두스 황제가 암살된다. 프레토리아 병사들로 구성된 친위대가 로마황제직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황제란 자리를 경매에 붙여 부자에게 물려주었다가 죽여버리고 또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이런 혼란을 수습한 이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장군이었다. 헝가리 지역 주둔군 사령관이던 그는 자기 병력을 이끌고 서기 193년 로마에 입성,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리비아族이었다. 그는 18년간 재위(在位)했는데 정권은 안정되었고 렙티스 마그나는 최고로 번창하였다. 세베루스 황제는 서기 202년쯤 렙티스 마그나를 방문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렙티스 마그나에는 로마市를 모방한 것 같은 큰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서기 439∼534년 사이 약 100년간 독일계 밴덜族(Vandal)이 스페인에서 北아프리카로 침입, 이곳을 통치했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漢武帝)의 흉노 토벌과 흉노족(훈족)의 西進으로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 여파가 500년 뒤 리비아에까지 미친 것이다. 밴덜족의 북아프리카 지배는 서기 534년 비잔틴제국(東로마제국)의 진출로 끝장났다.
100년 뒤 아랍족의 침입으로 렙티스 마그나의 주인은 또 바뀐다. 11세기 베드윈족의 약탈에 의하여 이 도시는 폐허가 되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1900년에 걸친 도시국가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었다. 17세기부터 렙티스 마그나는 문화재 약탈자에 의하여 해체된다. 대리석 기둥과 조각상들은 반출되어 파리 근교 베르사이유 궁전의 건축자재로 쓰였다.
18세기엔 렙티스 마그나의 문화재들이 루블 박물관과 영국의 윈저宮으로 옮겨졌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11년 이탈리아의 점령기가 시작된 이후였다. 그때 만든 궤도차用 철로가 지금도 렙티스 마그나를 일주하고 있다. 잡초 속의 무너져내린 古都를 밟고다니는 것은 묘한 비감(悲感)을 안겨 주었다.
섭씨 40도를 육박하지만 습기가 적어 상쾌하기까지 한 햇볕, 코발트 빛깔의 하늘, 그 아래에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대리석 기둥, 부서진 벽, 목잘린 조각상, 무너져 버린 천정. 그 속을 헤매니까 흰옷 입은 로마 원로원 의원이 툭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로 누워 있는 여인상의 젖무덤은 하도 만져서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짜릿한 전율이 천수백년을 건너 뛰어 기자를 감전시켰다.
개방과 폐쇄
대중목욕탕은 수백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한증탕, 냉탕, 독서실, 화장실까지 있는 복합 휴게 시설이었다. 공중 화장실의 구멍 자리에 앉아 보았다. 배설물이 떨어지면 지하 하수도가 그것을 싣고 빠지도록 돼 있었다. 앉은 채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을 수 있도록 포석정 같은 水路도 패여 있었다. 이 정도의 유적, 그것도 해안에 붙어 접근이 쉬운 로마의 폐허를 관광지로 개발한다면 연간(年間) 수백만 명의 손님과 수십 억 달러의 수입은 보장될 것이다. 그러나 이날 이곳에 표를 사서 입장한 손님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가장 개방적인 문명국가 로마의 유적이 가장 폐쇄적인 나라에 있다는 것, 이 개방과 폐쇄의 두 단어가 이번 여행 중 기자의 뇌리에 줄곧 話頭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은 개방을 선택했던 남한과 폐쇄의 길로 가버렸던 북한의 운명을 연구·규명하는 하나의 방도이기도 할 것이다. 남한이 반도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개방의 길로 나아간 것은 민족적 비극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의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엄청난 잠재력을 재발견한 것이다.
분단은 남한을 사실상의 섬으로 만들었다.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지도에 의해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해외에서 活路(활로)를 찾는 對外지향적 전략을 생존방식으로 채택했다.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개척·무역·해양·국제화 같은 단어가 지도적인 개념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해양정신의 등장인 것이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첨예한 군사대결 상황을 몰고 왔고 우리 사회에 군사문화를 정착시켰다. 군사문화의 일부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훈련·교육·책임감·추진력·효율성 같은 생산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였다. 尙武정신의 등장인 것이다. 분단과 전쟁이란 민족사적 도전에 임하여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집단적인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터득한 해양 및 상무정신이야말로 한국식 개방의 기조였다. 로마의 개방성이 군사력의 뒷받침을 받을 때 비로소 세계제국으로 개화할 수 있었듯이, 신라의 삼국통일이 국제감각과 군사력의 뒷받침으로 가능했듯이 남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도 해양 및 상무정신의 기반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해양정신의 본질은 개방·개척·국제화·자유 민주·화해·공존이며 한국적 실천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과 자유민주주의 구현이었다. 尙武정신의 본질은 국가주의·安保의 중시·규율과 효율·책임감·파워 엘리트의 희생정신이고, 그것의 한국적 표현은 국방과 國力 중시, 그리고 능률적 기업·관료 조직의 출현이었다. 나약한 文民의 전통에 오랫동안 눌려왔던 한국인의 야성은 해양·상무정신의 모습으로 대폭발하여 오늘날의 뻗어가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렙티스 마그나의 잡초 속 폐허를 밟으며 해보았다.
리비아에 매료된 사람
吳홍채 과장은 사하라 사막에 홀리고 리비아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무리 못사는 나라라도 오래 살다가 보면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이다. 中東에서 장기근무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진심으로 그 나라와 국민·문화에 정을 붙인 이들을 만나기는 매우 어려웠다. 가장 큰 원인은 아랍 사람들의 행동규범인 이슬람교에 대한 거부감인 듯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인들이 보여주는 교조적, 배타적, 독선적 태도는 한국인들의 유교적 심성과는 조화되기 어려운 면이 있는 듯했다. 리비아에 도착해서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 나라에 대해서 호감을 표시하는 한국인들을 의외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리비아 사회가 사회주의적으로 통제되고 있기는 하나 다른 이슬람 국가들처럼 교조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리라. 특히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은 이 나라의 분위기에 다소간 여유를 주고 있었다. 吳과장은 이런 얘기를 한다.
『벵가지 시내의 독립기념관에서 본 일입니다. 교사들이 장님 학생들을 데리고 구경을 나왔어요. 장님 학생들 하나에 선생님들이 한 명씩 맡아 손잡고 다니면서 진열품과 시설들을 만져보게 하고는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거에요. 찡한 감동이 전해졌고 이 나라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吳과장이 리비아에 매료된 것은 무엇보다도 사하라 사막을 카메라로 잡는 과정에서 그 경치와 땅에 홀딱 빠져버렸기 때문임을 곧 알게 되었다. 그는 사하라 사막에 관한 한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촬영 경험과 사진자료를 갖고 있다. 현지에서 전시회도 했다. 한국인들이 리비아 및 大水路(대수로)공사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는 그가 찍어서 언론에 제공한 사진들이 큰 기여를 했다.
『한번은 사막 촬영을 마치고 차를 몰면서 돌아오는데 졸리는 거에요. 살을 꼬집고 소리를 지르는 등 별별 짓을 다해도 아무 효과가 없어요. 차를 세우면 다른 일행과 떨어지고 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하에 있었습니다.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을 떠올려 졸리는 것을 물리치려 해도 안돼요.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사람들과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니 그제서야 잠이 달아납디다. 역시 좋아하는 감정이 미워하는 마음보다는 더 센 것 같아요』
오후 1시에 대한통운이 운영하는 管(관)운송사업소에 도착했다. 李秀一(이수일) 관리부장의 안내로 곧바로 구내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한국식 식단이 어찌나 정갈하고 푸짐한지 기자는 세 그릇을 비웠다. 채소는 현지에서 재배하니 신선하고 무공해다. 동아건설의 어느 작업장에 가도 식사는 서울의 一流 한식당보다 나은 것 같았다. 가정과 떨어져서 생활하는 해외 건설현장이나 원양선박에선 식사의 호(好), 불호(不好)가 작업능률과 사기·분위기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시원치 않은 주방장이 오면 직원들끼리의 갈등과 스트레스가 증가하기도 한다.
업어주고 싶은 태국 근로자
주로 운전사인 1524명의 운송본부 직원 중에 한국인은 관리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16.7%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국인들이 57.1%로 가장 많고 월남인(10.5%) 조선족(10%) 필리핀인(1.6%) 리비아인(1.8%) 등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 일을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李부장은 기다렸다는듯이 태국 노동자들에 대해서 열심히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정말 업어주고 싶어요. 체력 좋고 순종적이죠. 불평이 없고 자기들 문제는 누구한테 고자질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 버리지요…. 우리한테는 정말 효자입니다. 불교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체력·순종심·우직함―이것은 어딜 가나 태국 근로자에게 쏟아지는 찬사의 공통어였다. 태국 근로자들이 한국인 관리자에게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하는 모습은 가식적이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진실이 담긴 것이었다. 상대에게 敬意를 표함으로써 敬意를 끌어내는 인사 예법이었다. 태국인은 인격적 모독에 대해선 격렬하게 반응한다. 머리를 만지면 경고없이 킥 복싱이 들어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궁금했던 조선족의 일 능력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가 많았다. 체력이나 의욕이 태국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식 체질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알아서 일을 처리하려는 의지가 극히 약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동족이란 의식이 강해서 한국인과 평등한 대우를 바라는 것 같은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연장근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연장근무 수당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더 일하면 더 번다는 것을 깨우치곤 한다는 것이다.
한 東亞건설 간부는 『조선족들을 자본주의化 하는 데는 한 세대는 걸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맛도 못 본 북한사람들은 통일시기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흔히 월남인들은 한국인 이상으로 일에 악착같고 손재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사회주의적 타율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태국·필리핀인들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다. 민족성보다는 체제가 인간형성의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의 장점은 영어를 잘하고 고급기술을 익힌 이들이 많은 것이고 단점은 保安(보안)의식 결핍이라고 한다. 방글라데시人들은 기초체력이 약하고 겁이 많지만 순종적이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태국人과 한국人들은 다 같이 비슷한 시기, 즉 1970년대 초반부터 中東(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한국인은 부리는 쪽, 태국인들은 아직도 부림을 받는 편에 서 있는가? 노동자로서의 당초 자질은 태국人이 결코 뒤지지 않았는데. 이 의문에 대해서 이날 저녁에 벵가지 본부에서 만난 金洙吉(김수길)이사(기획담당)는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한국은 자본과 조직을 갖고서 중동에 진출했고 태국은 노동력만 수출했습니다. 노동력을 담아서 키울 그릇을 우리는 갖추고 있었고 태국은 지금까지도 중동 진출의 경험을 축적시킬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겁니다. 우리는 기업이란 조직단위로 진출했고 태국은 개인단위로 나왔거든요』
대기업을 앞세운 저돌적 경제발전 전략의 성공과 기업체의 뒷받침이 없는 태국·필리핀식 노동수출의 停滯性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례에서 우리는 전략적 사고와 시스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지상 최대 工事
오후 6시 벵가지 근교의 東亞건설 본부에 도착하기 직전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길가에서 한 소년이 돌멩이를 던졌는데 앞 유리창 하단에 맞았다. 금이 쫙 가고 운전사는 비틀했지만 더한 변고는 없었다. 벵가지 본부의 鄭鎭三(정진삼) 본부장은 온화한 표정의 50代 경영자였다. 기획담당 金洙吉 이사로 하여금 공사현황에 대해서 기자에게 설명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東亞건설(정확히 말하면 東亞건설이 중심이 된 계열기업의 콘소시엄체)이 10년째 하고 있는 리비아 대수로공사(Great Man-Made River Project:GMR)는 흔히 세계 최대의 土木공사로 일컬어진다. 리비아 남쪽 사하라 사막 지하에 잠자고 있는 약 35조t의 수맥을 약3500㎞의 거대한 관으로 연결시켜(관의 최대 지름이 4m이니 문자 그대로 人工江이다) 지중해 연안의 도시·공장·농촌·사막에 물을 대려는 것이 이 공사를 시작한 가다피의 꿈이다.
사막을 녹지로 바꿔놓겠다는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의 근간이며 시발점이 바로 이 공사이다. 1984년부터 시작된 이 공사는 1차, 2차로 나눠져 진행되고 있는데 공사비는 92억 달러. 東亞는 이미 56억 달러를 받아냈다. UN의 경제봉쇄를 당한데다가 油價(유가)하락으로 경제사정이 극히 긴장돼 있는데도 가다피는 이 공사 代金(대금)만은 꼬박꼬박 제때에 현금으로 지불해주고 있다. 東亞는 한 해에 10억 달러 가까이를 벌고 있으니 미국의 對가다피 태도가 어떠하든 리비아에 대해서만은 나부터도 특별한 배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大水路공사장은 아주 넓게 분포돼 있다. 남북으로 치면 제주도-나진·선봉 지역에 해당하고 동서로는 북경-백두산의 거리가 된다.
이 공사에 투입된 자재와 人力을 살펴보면 웬만한 나라의 총력전 체제를 연상시킨다. 동아건설의 현장 인원은 육군 1개 사단과 거의 같은 1만1700 명. 관리직이 총원의 10%인 1614명이다. 나머지는 기능직. 관리직의 숫자가 비교적 적은 셈이다. 이는 생산성이 매우 높은 조직이란 뜻이다. 국적별로는 한국인이 약22%, 태국인이 가장 많아 35%, 베트남인이 20%, 방글라데시인이 15%, 조선족 9%, 필리핀인 6%, 현지인 0.5%. 필리핀 노동자의 약 15%는 관리직이고 베트남인과 방글라데시인은 전부 기능직이다. 이는 각국의 사회발전단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만 6천대
鄭進三 본부장은 『한국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는데 관을 매설할 때 그 관을 들어올리는 크레인 운전기사가 그렇다』고 했다. 관을 매설 구덩이에 정확히 내려놓아 빨리 연결되도록 해야 작업능률이 오른다. 한국인 기사는 육감이 뛰어나 5분이면 되는데 필리핀 기술자의 경우 25분이나 걸린다고 한다. 大水路공사의 본질은 관을 만들고 이를 운반하여 매설하는 작업이다. 넓은 지역에 걸쳐 이뤄지는 공사이므로 운송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東亞그룹은 운송(대한통운), 관 제조(동아콘크리트), 토목(동아건설)의 세 요소를 이미 갖고 있었으므로 입찰 때 유리했었다고 한다. 리비아 정부 주무부처 사람들은 『동아건설은 大水路공사를 위해서 생긴 회사 같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동아건설이 현장에 보유하고 있는 각종 차량은 약6000 대이다. 주로 트레일러, 포크리프트, 트랙터, 크레인, 크러셔, 불도저 같은 重量(중량) 차량들이다. 수개 기계화사단의 장비에 해당한다. 매년 새로 구입하여 대체하는 승용차만도 200 대에 이른다. 제조원별로 분류하면 세계자동차 전시장이 될 정도로 국제적이다.
內徑(내경) 4m, 길이 7.5m인 관 하나의 무게는 73t. 이를 실어 나르는 트레일러의 무게까지 합치면 100t이 넘는다. 이 트레일러의 길이는 27.5m.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인데 독일회사에 특별히 주문하여 제작한 것이다. 동아건설은 925대의 트레일러를 갖고 있다. 1개 수송단은 60대의 트레일러로 구성된다. 이 수송단이 10여㎞의 거리에 걸쳐서 모래바람을 날리며 질주하는 모습은 함대의 이동처럼 보인다.
아마도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최대 장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동아건설이 리비아 사막에 지은 관 생산공장은 두 곳. 사리르 공장은 부지가 100만 평(坪)이나 되고 1개 라인의 길이가 1㎞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제조공장이다. 관 생산 공장에서 매설지까지 관을 운반하기 위해서 동아건설이 별도로 닦은 도로는 총연장이 3500㎞이다. 남한內 고속도로의 총연장보다 길다. 이 도로의 폭은 7∼11m로서 관리상태가 거의 고속도로 수준. 동아건설은 이 도로만 유지·보수하는 조직을 별도로 만들어 하루 24시간 계속해서 손을 보게 한다. 그 인원이 약300명, 차량을 200 대나 쓴다. 도로공사 같은 회사를 부설로 갖고 있는 셈이다.
동아건설이 大水路를 만들기 위해, 즉 관을 파묻기 위해 긴 계곡처럼 파내야 하는 토사량은 길이 3600km에 약2억6000만㎥. 가장 큰 피라미드 100개 분이나 되는 부피이다. 대수로의 1단계 공사는 1991년에 완공되었고 1993년 9월1일부터는 벵가지(제2의 도시·옛 수도)와 서트 주민들에게 상수도물이 공급되고 있다. 그동안 염분이 많은 지하수를 마셔왔던 이곳 주민들은 약수처럼 깨끗한 사하라 사막의 물을 마시게 되었다. 民心이 좋아져 가다피 정권의 안정에도 기여하게 되었고 수인성 풍토병도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가다피는 首都(수도)인 트리폴리 지역에도 하루 200만t의 수돗물을 빨리 공급하기 위해 2단계 大水路 공사의 일정을 단축시키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
다음날, 즉 리비아에 도착한 사흘째 아침 7시에 유적답사반으로 변한 우리 일행은 벵가지를 출발, 동쪽으로 향했다. 앞 차는 태국 운전사가 모는 지프차, 뒷 차는 필리핀人의 비크승용차. 기자는 金洙吉이사, 吳과장과 함께 뒷 차에 탔다.
영화 「사막의 라이온」 배경
30분쯤 지나 로마시대 때의 항구유적인 프톨레마이스에 도착했다. 박물관을 구경하다가 변소를 찾으니 관리인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 없이 지중해를 지향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작은 어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운 로마시대의 도시엔 石柱와 미로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지하시설이 남아 있었다. 간단하게 둘러본 뒤 계속해서 동쪽으로 달렸다. 차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린 마운틴」 지역이 펼쳐졌다. 동서로 길이 약 200㎞ 남북으로 너비가 최대 100㎞쯤 되는 해발 300∼700m의 고원지대였다. 전체면적은 경상남도를 합친 정도가 아닐까? 전개되는 풍경은 유럽적이었다. 과수원, 아담한 야산, 과일 노점상, 유럽풍의 집. 군데군데 쓰레기. 아직 리비아人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나쁘다는 의식이 없는 듯했다. 물론 지정된 쓰레기처리장도 없다.
高原지대의 지형은 점점 험준해져 갔다. 깊은 계곡, 토굴, 절벽…. 金이 사는 『여기가 영화 「사막의 라이온」에 나오는 곳이다』라고 설명한다. 리비아를 점령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독립항전을 지휘한 영웅 목타르(영화에선 앤소니 퀸)가 이런 험악한 지형을 배경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깊이가 100m는 실히 될 것 같은 계곡 위에 걸쳐진 거대한 시멘트 현수교는 장관이었다. 지슬와디 알 쿠프 다리. 스웨덴 회사가 건설했다고 한다. 金이사는 『쇠가 아닌 콘크리트 빔으로 다리판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한 것이 대단한 기술이다』고 감탄했다.
다리를 건너 10여분을 달려가니 북한 건설회사의 본부가 길 오른쪽에 서 있었다. 입구에 다가갔더니 경비원은 없었고 본부 안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입구 바깥의 진열장 안에는 1993년 봄에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李仁模 노인을 열렬히 환영하는 내용의 선전 畵報가 붙어 있었다. 리비아엔 북한 건설회사 이외에도 북한의 의사와 간호원이 여러 병원에 취업하고 있다. 이들과 동아건설 근로자들 사이엔 훈훈한 미담과 가슴 아픈 사연들이 경계심이나 적대감보다 더 많이 쌓여 있는 듯했다.
키레네의 샘물
山中도시인 알 베이다를 지나는데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우리 일행이 탄 두 車엔 SSB통신용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물론 설치 허가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두 경찰관은 팩팩 소리를 지르며 차를 몰고 따라 오라고 하더니 경찰서로 데려갔다. 알고보니 우리 차가 경찰車를 기분 나쁘게 추월했고 정지하라는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고 화가 나 있었다. 아랍어語가 통하는 洪과장이 간절히 사과한 끝에 우리는 곧 풀려날 수 있었다. 다른 사복 경찰관이 『동아건설인데 봐주지 뭐』하면서 단속 경찰관을 달래더란 것이다. 오후 1시에 키레네(CYRENE)에 도착했다. 지중해가 10여㎞ 북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高原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도시의 폐허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스-로마-비잔틴 문명으로 이어지면서 약1600이나 계속된 도시. 발굴돼 있는 부분은 주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이다. 한때 20만 명 이상이 살았던 北아프리카 최대의 도시터가 작렬하는 태양 아래 누렇게 변색된 대리석과 석회석의 돌기둥·조각상·성벽·참호·야외극장·신전·개선문·우물·수영장의 골격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기원 전 7세기에 그리스의 테라섬 사람들은 가뭄과 기근 때문에 고향을 탈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의 신탁을 받아보니 리비아로 건너가서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이 나왔다. 바투스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이곳에 상륙,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 신화의 시작인데 거의 史實과 일치한다고 한다. 이들이 키레네를 택한 것은 용솟음치는 샘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샘물은 언덕 비탈에서 지금도 냇물을 콸콸 토해내고 있었다. 리비아에 도착한 지 사흘만에 처음 듣는 물소리였다.
키레네 王朝는 피비린내 나는 궁중음모와 이집트軍의 침입, 원주민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200년 뒤인 기원 전 5세기엔 왕이 암살되고 共和政으로 바뀌었다. 키레네는 리비아 동부지역의 그리스系 다섯 도시국가 중 맹주였다. 리비아 서쪽엔 强國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트리폴리타니아(지금의 트리폴리 주변에 있던 세 도시국가)가 번창하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두 세력은 경계선의 분할을 의논했는데 그 방법이 재미 있다. 키레네의 경주선수와 카르타고의 선수가 동시에 자신의 고향을 떠나 마주 달리다가 만나는 지점을 국경선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카르타고 대표선수 필라에니 형제는 날아왔는지 키레네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지점에서 키레네 선수와 만났다. 키레네측에선 속였다고 항의했다. 필라에니 형제는 그런 주장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는 뜻에서 『만약 키레네가 이 지점을 국경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묻히겠다』고 자살을 자원, 그렇게 되었고 국경선이 카르타고에 유리하게 확정되었다는 신화같은 얘기가 전해져온다. 物産이 풍부했을 그린 마운틴을 누르고 지중해 해상무역로를 감제하는 요충지 키레네는 지중해 연안의 정세변화에 따라 여러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해상과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북아프리카는 對岸(대안)인 유럽대륙이나 中東에서 정치적 태풍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영향을 받게 돼 있었다. 문명과 전쟁과 무역의 회오리바람이 그칠 날 없는 길목에 이 고원도시가 놓여 있었다.
전쟁과 평화의 기록
기원 전 4세기엔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영향권에 들고, 그가 죽은 뒤엔 스파르타의 원정군에게 점령당했다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키레네는 프톨레미가 스파르타군을 내쫓은 뒤 주저앉아버리는 바람에 식민지가 돼버렸다. 기원 전 1세기엔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제압하고 지중해 연안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의 속국으로 변했다. 서기 2세기엔 키레네에 살던 유태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수많은 건물들을 파괴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진압군은 22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 서기 365년엔 지진과 해일로 키레네와 그 주변도시국가가 황폐화되었다. 그 뒤부터는 사막 유목민들의 잇따른 침략. 이어서 아랍족의 침략, 그리고 11세기의 유목민 침입이 이 도시의 생명을 끊어버렸다. 목이 날아간 조각상, 넘어진 돌기둥을 타고 넘으면서 이 폐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한나절이 걸린다. 기자는 언덕 비탈에 만든 야외극장의 스탠드에 앉아 한가롭게 지중해를 내려다보면서 눈부신 햇볕 아래서 잠시 그 시대로 돌아가 보았다.
비탈면에는 열 겹도 넘게 층층으로 토치카 같은 방어진지가 구축돼 있었다. 참호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도 잘 뚫려 있었다. 동굴같은 진지 안에 화덕자리도 있었다. 피를 부르는 함성과 창·칼의 부딪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저 아래 바다 쪽에서 상륙해서 올라오는 스파르타, 이집트, 로마 군대와 배후로 들어오는 유목민 사이에서 이 도시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비명에 갔을까? 역사란 결국 전쟁과 평화의 기록이다. 한 인간이 성숙되려면 死生觀이 서 있어야 하듯 한 국가가 제대로 이어지려면 국민들의 전쟁관이 확립돼야 하는 것이다. 어떨 때 전쟁을 피하고 어떤 조건에서 전쟁을 결심할 것인가. 누가 전쟁 비용을 부담하고 전쟁의 지휘부는 어떻게 조직하며 병사들은 어떻게 뽑아야 하는가. 카르타고처럼 용병으로 해결할 것인가, 로마처럼 징집제로 대처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처럼 외국에 의존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중국의 宋처럼 침략국에 뇌물을 바치는 것으로 모면할 것인가.
북한이 「전쟁불사」의 자세로 달려들어도 「전쟁불가」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키레네 언덕에 서서 이 폐허 밑에 쌓여 있는 전쟁과 죽음과 流血의 의미를 느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듯이 국가로 생존해 가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전쟁은 국가란 조직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것이 두려울 때는 국가를 해체하여 식민지로 전락하든지 노예의 신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도 전쟁이란 운명을 받아들이면서였다. 로마는 기원 전 4세기 북쪽에서 쳐내려온 켈트족에게 로마시를 점령당해 학살·약탈의 수모를 겪은 적이 있었다.
로마의 전쟁의지
이때 로마인들은 일대 각성을 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다투는 것은 좋지만 外敵이 나타나면 擧國체제로 단결해야 한다는 것, 국방에 관해서는 국론의 통일을 꾀해야 한다는 것, 국방의무는 기득권층인 로마시민계층이 져야 한다는 것에 합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는 그 뒤 800년 동안 한번도 수도를 敵에게 내주지 않고 세계제국으로 팽창했다. 켈트족에 당한 수모를 심오한 국방의지로 승화시킨 때문이었다. 기원 전 3∼2세기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3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 문화권을 통일하여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시실리의 주도권을 놓고 시작된 이 결전을 통해서 로마는 버거운 상대이던 카르타고뿐 아니라 그리스, 마케도니아, 시리아까지도 순차적으로 제압하는 패권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도전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응전한 결과였다.
로마보다도 더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아테네가 도시국가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국방에 대한 國論의 분열과 전쟁기피 또는 위선적인 평화론이었다. 아테네는 기원 전 404년 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숙적인 스파르타에 패전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에게 민주정치체제를 포기하고 寡頭(과두)정치체제를 택하도록 명령한 뒤 성벽을 헐게 했다.
이날 아테네인들은 마치 축제를 벌이듯 유쾌하게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지금의 북한같은 병영국가 스파르타는 전쟁기술은 가졌으되 로마와 같은 전쟁철학, 전쟁의 도(道)를 터득하지 못했다. 즉 전쟁을 문화로 만들지 못함으로써 패권국가가 아닌 군사강국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아테네는 찬란한 문화를 지킬 만한 전쟁관이, 스파르타는 군사기술을 지속시킬 만한 문화가 없었던 데 대해 로마, 영국같은 패권국가는 둘을 다 갖추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가장 깊은 명상을 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는 처칠(영국 수상)은 한 국가가 전쟁을 결단하는 과정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유화적으로 나가서 전쟁을 피하는 것이 좋은지 강경책으로 나가서 전쟁을 막는 게 좋은지에 대해선 정답이 없다. 국가가 전쟁을 결심하는 데 있어선 계산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해득실이 아닌 국가의 명예가 걸렸을 때 전쟁을 결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2차세계대전 때 영국이 독일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한 것은 독일이 자기 나라를 공격해 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했기 때문에 폴란드에의 지원을 공약했던 영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결전을 결심하게 된 것도 침략의 위협 속에 놓인 동맹국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동맹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평화의 방법으로써」를 외치는 일부 한국인들은 전쟁이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자격」이 있는 국가와 국민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이란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 유적의 공짜 입장
키레네 유적엔 숲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일행 7명은 미리 준비해온 매운탕을 끓여서 점심을 먹었다. 태국, 필리핀 운전사도 한국인같은 食性으로 변한 듯 맛있게 해치웠다. 우리는 다시 동쪽으로 출발했다. 꼬불꼬불한 도로를 타고 고원을 내려와 한적한 어항인 수사(Susa)에 도착한 것은 20㎞ 뒤였다. 벌겋게 녹슨 폐선이 바닷가에 얹혀 있고 항만시설은 가동불능상태였다. 어떤 생산활동도 보이지 않고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그냥 잠들어 있는 마을이었다.
여기에 키레네의 부속 항구에 해당하는 아폴로니아 유적이 있다. 해변을 따라서 하얀 돌기둥이 줄을 선 채 졸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는데 철문은 닫혀 있었다. 입장권을 파는 직원도 자리를 비웠다. 철문은 그러나 한덩어리 작은 돌로 고여 있었다. 그것을 밀어버리고 침입했다. 밟히는 모자이크 타일 조각이 삑삑 소리를 냈다. 무너진 성벽 아래 그늘엔 한 아랍인이 플라스틱 물통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명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리비아에선 혼자서 종일 저렇게 앉아 있는 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가다피가 녹색혁명의 꿈을 실현시키려면 저런 사람들을 奮起(분기)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이 상당히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료입장객은 단 한 사람도 없는 이 세계적인 그리스-로마유적지는 사회주의적 폐쇄정책의 비생산성을 증언하고 있었다.
폐쇄는 1이란 자원을 1 또는 그 이하로 만드는 반면 개방은 자신의 1과 바깥의 1을 더해서 2나 4로 만드는 사업이다. 알폴로니아라는 내부 자원에다가 외부의 자본을 결합시키면 당장 몇배의 財貨(재화)가 창출된다. 폐쇄는 자원의 이용을 제한하면서 동시에 인간능력의 이용률을 떨어뜨린다. 외부와의 경쟁심리가 없고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광(風光) 속의 무력해보이는 인간, 그것이 폐쇄의 결과물이었다. 돌아나오는데 뚱뚱한 매표원이 돌아와 있었다. 무단침입에 대해서 추궁을 당할까 두려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악수를 교환했더니 입장료도 사양하고 『잘 가라』면서 배웅까지 해주었다. 폐쇄된 나라일수록 인간은 순하다. 그러나 개방에 견딜 정도로 그 순수함이 강인한 경우는 드물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金洙吉 이사는 대수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리비아 정부에서 그 공사를 지휘하기 위해서 만든 대수로공사관리청(GMRA : 게무라라고 발음) 공무원들의 청렴결백과 일에 대한 엄격성. 리비아는 고위공직자일수록 깨끗하다고 한다. 요컨대 업자로부터 뜯어먹고 봐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수로 공사의 감리를 맡은 것은 용역사(동아는 원청사가 된다)인 영국 브라운 앤드 루트社(Brown & Root)의 철저한 감독. 金이사는 『BR은 우리에게 100%가 아니라 150%의 품질보증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중동진출의 최대인맥인 한양공대 토목과 출신인 金이사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택공사를 할 때 겪어야 했던 준공검사의 지긋지긋한 고생담을 들려주었다.
『창 하나하나를 직접 열어 봅니다. 도어를 열었다가 놓았을 때 너무 빨리 닫혀도 불합격입니다. 벽면을 손으로 만져 약간의 돌출만 있어도 재시공. 그때는 불평도 많이 했지만 그런 준공검사로 단련받으면서 우리의 건축·토목 기술이 이렇게 발전한 겁니다』
사(士)자 계급의 죄악
건설부에서 공사감독으로 일한 적도 있는 金이사는 『해외에 나오면 세계제일의 건설기술을 과시하는 우리나라 업계가 국내에선 짓던 다리가 무너지는 수준의 부실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최단시일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엄격한 준공검사라고 했다. 다 지은 고층건물 몇개를 헐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없는 준공검사의 본때를 보이면 시공자들은 청탁이 아니라 기술로써 해결하려 들 것이고 자연히 부실공사도 극복되고 건설기술도 향상될 것이다. 부실공사의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인 것이다. 金이사와의 車中토론이 여기에 이르자 기자는 늘 지니고 다니던 의문이 생각났다.
「왜 한국인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
1970년대 초 한국의 가장 큰 人力수출시장은 海運분야였다. 많을 때는 약4만 명의 선원들이 외국배를 탔다. 「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는 그 달러를 한국으로 보내주던 이 수출선원들은 세관의 밥이었다. 몇 년간 고생한 끝에 가족품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 부산항이 보이면 설레임보다는 「세관원에게 또 얼마나 당해야 하느냐」란 걱정이 앞서 다가오는 고향이 두려웠다는 푸념을 기자는 많이 들었다. 반도국가이면서도 뱃사람을 「뱃놈」으로 멸시해온 이 나라에서 자란 선원들은 왜 외국배만 타면 펄펄 날 정도로 기량을 발휘하여 세계최고의 선원들로 변모했던가. 이 의문에 대해서 한국해양대학의 한 교수는 기자에게 『조국을 떠났기 때문이다』고 잘라 말하던 기억이 새롭다.
『사농공상(士農工商)적인 신분차별, 관(官)에 의한 착취의 질곡에서 해방되니까 본래의 실력이 나온 것입니다』
하도 官의 착취가 심하니 바닷가에 고래가 얹혀도 잡아서 돈벌 생각은 하지 않고 『관리들이 알면 일만 죽도록 시킨다』면서 어민들은 밤새 그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는 朝鮮朝(조선조) 사회에서 산업이 발달할 리가 없고 초원을 달리던 기상이 발휘될 리가 만무했다.
朝鮮왕조의 유교적 지배 이데올로기, 그 가장 큰 해독은 경제의욕과 尙武정신을 퇴화시킨 것이었다. 그 책임은 士로 상징되는 정치인, 지식인, 관료들의 몫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이 士자 계급이 트집과 위선과 냉소적 태도로써 이 나라의 뻗어가는 기상에 찬물을 끼얹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왜 같은 한국인이라도 서울시내에서 만났을 때보다 사하라에서 만났을 때 더 패기 있고 정직하며 당당해 보이는가? 어째서 한국의 공사감리제도는 리비아보다도 못한가. 왜 많은 한국인들은 지금도 김포를 떠날 때 「앞으로 몸이야 고생이겠지만 마음은 편하다」고 느끼는가. 기자는, 士자 계급(기자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에 의한 農工商계급에 대한 착취구조는 지금도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자는 이런 농담을 즐겨한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과대평가되고 있는 직업인은 교수,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기업인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보통사람」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기업인이다.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다』
몽고기마군단의 기상 되찾다
1993년의 金泳三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에선 지난 50년간의 국가건설기에서 낙오되거나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힘을 갖고서 그 건설에 흠집을 내는 일을 「개혁」이니 「민주화」니 하는 말로 위장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오늘의 한국을, 우리 역사속의 어느 단계와도 확연히 구별짓게 만든 해양정신과 尙武정신을 망가뜨리고 그 결과로서 한국인의 기상을 꺾어버리는 일을 하고 있다. 역사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폐쇄적 역사관의 표현이랄 수밖에 없는 옛 중앙청의 졸속철거 결정이 그 한 예이다. 냉전시대의 붕괴에 신호탄을 올리고 동구공산권의 붕괴에 한 기폭제가 되었던 서울올림픽정신을 기념하여 만든 서울평화상을 낭비적이란 이유로 폐지하라고 지시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분명히 끼어 있는 민예총에 2억원이 넘는 문예진흥기금(국민들의 돈으로 조성되었다)을 대주고, 남북한 화가들의 합동전시회(코리아통일 美展)를 허가했다. 그 합동전시회에 출품된 그림들의 공통점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묘사하고 대한민국을 미국과 자본주의의 노예로 형상화한 점이었다.
좌파의 宿主가 된 김영삼 세력은 그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내부의 敵」이란 전투적 용어를 쓰면서 김일성 세력에 대해선 침묵한다. 권력을 쥔 일부 지식인들의 병적인 태도가 만드는 사회분위기는 우리가 모처럼 찾아낸 한국인의 야성을 죽이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士자 계급에 의한 질곡에서 벗어난 해외의 한국인들은 우리의 피속에서 너무나 오랫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에너지를 재발견했다. 그 에너지는 아마도 북방의 초원을 달리던 몽고기마군단의 폭발력이었을 것이다.
인구 150만의 몽골이 1억 인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 12만의 기병으로서 유라시아의 강대국을 차례로 점령해간 조직력의 비밀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에서도 발견된다. 동아콘소시엄은 8개국 노동자로 구성된 다국적軍이다. 지휘부를 장악한 것은 전체 인력의 약 20%인 한국인들이다. 몽골군단도 12만의 自國군대를 장교 및 하사관으로 삼고 졸병들은 현지에서 다국적군으로 편성하여(그래야 조직적인 반란이 불가능하다) 세계를 정복해 갔다고 한다. 몽골은 식민지 지배도 현지국가의 지도부를 강권으로 인질화하여 그들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했으므로 인력의 과도한 배치를 줄일 수 있었다. 몽골 유목민들의 이런 국제감각이 산악국가인 한국에서는 억눌려 있었으나 무대가 넓은 외국으로 나가면 되살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넓은 무대를 가져야
리비아의 한국인들을 만나면서 기자가 절실하게 느낀 점은 한국인들은 넓은 공간을 가질 때 비로소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는 점이었다. 인구밀도가 세계최고인 한국에선 한정된 공간과 자원 때문에 「내 것이 늘면 네 것은 줄어든다」는 「제로섬 게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치열한 권력투쟁과 치사한 방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외의 광활한 무대는 한국인을 그런 새장에서 탈출시켜 훨훨 날게 만들었다. 20%의 한국인이 80%의 외국노동자를 일사불란하게 장악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 비결은 군사문화였다. 리비아 현장에서 외국노동자들은 상관만 보면 구호를 외치며 거수경례를 올려 부치는데 영락없는 군대 분위기였다. 한순간, 한치의 실수가 큰 참사를 부르게 되는 작업현장에선 군사문화적 규율은 불가피하다. 군복무 경험을 가진 한국인 관리층이 군대식으로 외국노동자를 통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군대, 전쟁이란 말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하고 보자는 사람들은 생각을 달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기자는 분단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해양정신, 북한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尙武정신이 한국인의 야성을 폭발시켰고 이 바탕 위에서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앞에서 썼다. 金日成의 사망으로 통일의 방법은 보다 명쾌해졌다. 힘(경제력+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북한동포를 노예로 삼고 있는 김정일(金正日)정권을 제거하고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통일의 본질이다. 남북한간에는 공존·공영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큰 격차가 나버렸다. 북한은 共榮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역사의 흐름을 잃지 못한 채 흡수통일이 불러올 부작용을 과장하고 있는 한국의 지도층은 한국인의 야성·기상·희생정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 유약한 士자 계급보다 農工商계급의 사람들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북한문제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통일정신을 생각하다
통일이란 도전에 대해서 어떤 논리와 정신으로써 응전할 것인가. 이것을 집중적으로 토론할 때이다. 남한의 폭발적 에너지가 그동안 해양 쪽으로 지향했다면 통일은 그것을 북방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만주-몽골-러시아 동부 지역이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곳은 또 몽골문화권이기도 하다. 몽고-만주-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 ㄴ자형 몽골문화권은 앞으로 우리의 무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만주는 우리 것」이란 식의 저질 민족주의를 내세워 주변 국가를 놀라게 해선 곤란하다. 주변 국가들과 공존·공영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역할을 찾아야지 되지도 않을 영토적 야심을 촌스럽게 드러내어선 앞길이 막힌다. 심신이 피로한 북한동포를 손잡아 끌면서 통일의 에너지를 해외, 그리고 북방으로 확장시켜 나갈 때 통일의 부작용은 오히려 새로운 추진력으로 바뀔 것이다.
거대한 통일의 비전을 그릴 생각은 하지 않고 소심하게, 또 이기적으로 통일의 후유증을 과장하는 이들은 독일에 가봐야 한다. 통일 후유증을 급속히 치유한 독일 사람들은 이제 독일적인 가치관의 세계화를 꿈꾸면서 원대한 포석을 하고 있다. 통일 독일의 후유증을 흡수통일 반대론의 근거로 과대 선전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인사들은 독일이 그 후유증을 轉禍爲福의 계기로 삼고 있는 지금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인류역사상 가장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독일통일을 부정하는 좌익들은 사실상 분단고착론자들이거나 적화통일론자들이다.
벵가지로 돌아오니 저녁이었다. 吳홍채 과장과 나는 훈덕시장으로 나가보았다. 달러 유통은 법으로 금지돼 있는데도 「달러도 받습니다」란 한국어 표시가 돼 있는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吳과장은 『2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변했다』고 했다. 여자 사진이 나오는 광고 포스터나 화장품·브래지어의 진열은 2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다피가 1988년에 국유화 정책을 부분적으로 완화한 이래 自營상점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경제도 서서히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술도 집에서 마시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가다피가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다음날 아침 기자는 벵가지 본부內 한국인 직원들의 숙소를 둘러보았다. 3층짜리 영구 아파트였다. 棟마다 휴게실 체육시설 대중목욕탕 세탁장 사우나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不實없는 아파트는 깨끗하기 짝이 없었다. 외국노동자들을 청소부나 건물관리인으로 많이 쓰기 때문이었다. 한국인 직원들의 품위 있는 생활을 지탱하는 것은 값싼 이들 외국인 노동력이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로마인의 우아한 문화생활을 뒷받침한 물리력은 노예노동력이었던것처럼. 로마가 천년이나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노예가 로마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넓게 열어 두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10년 뒤 방글라데시나 조선족은 오늘날의 한국인 직원처럼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다시 사막을 향해 출발했다.
突貫 정신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쾌청한 아침 8시, 우리는 비크 승용차 편으로 리비아 벵가지의 동아건설 본부를 떠나 서쪽으로 「(천안)天安」을 향해 출발했다. 한 30분쯤 달리니 미국의 대평원에서 전개되는 것과 흡사한 밀농장이 나타났다. 지름이 500m나 되는, 양팔을 벌리고 회전하면서 물을 뿜어내는 급수장치는 「사막의 녹지화」라는 리비아 지도자 「가先生」(東亞사람들은 가다피를 그렇게 부른다)의 꿈을 실현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안내자로 동승한 金洙吉 기획담당理事는 지난해 있었던 기록적인 돌관工事에 대해서 실감 나게 설명해 주었다. 벵가지市에 大水路공사의 결과물인 生水처럼 깨끗한 사막 지하수를 혁명기념일인 9월1일에 공급할 수 있도록 「가先生」이 특별히 부탁하여 45㎞에 걸친 관매설 및 通水공사를 여섯 달 만에 해치웠다는 것이다. 처음에 공사 감리 업체인 영국의 브라운 앤드 루츠社에서도 난색을 표했으나 東亞가 몇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며 밀어붙이겠다고 나섰다. 발파작업을 리비아 軍부대가 맡고 브라운社는 설계심사를 간소하게 하도록 한 뒤 불철주야로 돌관공사를 강행했다.
벵가지市는 가다피가 쿠데타로 뒤엎기 전에 王都였다. 지금도 反가다피 정서가 남아 있는 제2의 도시에 신선한 물이 공급되면서 여론도 좋아졌고 水因性(수인성) 풍토병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다피가 東亞에 대해서 대금(代金)지불 등 여러 면에서 각별히 지원하고 있는 것도 자신의 꿈이 걸린 공사를 한국인들이 협조적으로 잘해주고 있는 데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한국인이 자랑하는 국제경쟁력의 핵심은 시간단축이다. 건설공사장이나 제조업체에 가면 항상 공기단축의 神話(신화)를 들을 수 있다. 뒤늦게 국가 근대화를 시작한 한국은 시간 압축적 고도성장으로써 뒤늦은 출발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시대 분위기에 따라 우리 생활의 곳곳에서 시간단축을 위한 死鬪(사투)가 벌어졌다. 『바쁘다, 바빠』란 유행어 그대로의 삶이었다. 부실건축, 과속에 의한 교통사고, 마감시간에 쫓긴 나머지의 誤報(오보)같은 것들은 시간단축의 부작용이었다. 지금도 한국인의 장기는 「기한내에는 해내고야 마는」 突貫(돌관) 정신인 것이다. 이런 정신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조직력의 중요한 원천은 군대文化였다.
군사文化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와 함께 요사이는 『시간이야 어찌 되었든 좋으니 제발 사고내지 말고 튼튼히 지으라』는 식의 업무방식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질(質)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가 되면 우리는 경쟁력을 잃게 된다. 시간단축과 질 높임을 함께 추구해야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이지 질을 위해서 시간을 희생한다는 것은 후퇴이다.
리비아의 天安에도 삼거리가 있다. 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트리폴리를 향해 직진하는 길, 남쪽으로 꺾어져 사하라 사막 깊숙이 있는 東亞컨소시엄의 사리르 관(管) 생산공장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을 그렇게 부른다. 東亞사람들은 벵가지를 서울, 아즈다비야를 天安, 사리르를 大邱라고 부르는 식으로 한국의 地名들을 통신상의 호출신호로 갖다 붙여 望鄕의 마음을 다소나마 달래고 있다. 벵가지市에서 서쪽으로 137㎞ 떨어진 아즈다비야에는 잠실 主경기장의 열 배나 되는 바닥넓이 20만 평(坪)의 인공(人工)저수조가 건설돼 있다(표면적이 커 여름엔 매일 5000t의 물이 증발된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이 거대한 접시에 수심 6m로 360만t의 물이 담겨져 있었다. 남쪽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뽑아 올린 물을 수백 ㎞의 관로를 통해서 이 저수조에 모은 다음 도시와 농장에 공급한다.
1991년에 있었던 이 아즈다비야 저수조 담수식에는 가다피가 40여 개국의 대표들을 초대, 스스로 빨간 양동이로 물을 퍼담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한 코발트 색깔을 띤 저수조의 水面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李相熙 전 대구시장은 대구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대구처럼 삭막한 내륙도시 사람들에게 물을 보여줌으로써 정서적인 안정(安定)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격동기의 서울 주민들에게 한강물이 없었더라면 살인사건과 정신병자 발생률이 늘었을 것이다. 이 저수조의 고민은 무공해 상태의 물을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일. 오염원은 인간이 아니라 날아 오는 새, 씨앗, 모래, 번식하는 플랑크톤 같은 것이다. 비닐로 水面을 덮어씌우는 방법도 한때 검토한 적이 있단다. 아즈다비야 저수조를 떠나 중장비 정비공장으로 향하는 국도 변에는 대낮인데도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었다. 자동점화 감지기에 먼지가 잔뜩 묻어 밤인 줄 알고 점등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식 공장운영
아즈다비아 정비공장은, 1945년 해방 때 한국에 있던 전체 차량과 맞먹는 6000 대의 東亞 소유 수송대의 규모에 걸맞게 약 4만枰의 부지와 35만종(種)의 부품을 가진 초대형이었다. 郭斗煥 공장장(56)은 30대 청년처럼 씩씩하게 생긴 관리자였다. 그는 『사막에서 차 굴리는 것은 모래·먼지와의 싸움이다』라고 했다. 부품의 손상도가 심해 연(延)30만㎞를 뛸 수 있는 차도 여기서는 반쯤만 달리면 폐차된다고 한다. 郭공장장은 리비아 근무가 6년째라고 한다. 郭씨는 정비공장에 있는 각종 부품을 훔치러 들어오는 도둑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식 발상을 했다. 정비공장을 둘러싸는 식으로 깊은 호를 팠다. 깊이 약 10m, 너비가 5∼6m나 될 것 같이 보였다. 들개들을 잡아와서 호속에 풀어 놓았다. 외부침입자가 호 근방에 나타나면 개들이 짖어대는 순간 비상이 걸리고 東亞의 기동 타격대가 나타나 사막의 대추격전을 벌인 끝에 도둑들을 붙들어 리비아 경찰에 인계한다.
호쾌한 인상 그대로 郭공장장의 언행(言行)은 거침이 없었다. 널찍한 땅에 큼직한 공장을 짓고 일선의 참호보다도 더 근사한 호를 푹푹 파놓고 박력 있게 100여 명의 정비사들을 지휘해가고 있는 郭공장장에겐 여기가 바로 그의 王國이다. 나의 부대, 나의 왕국을 가지고 내 소신대로 꿈을 펼칠 수 있다는 해방감이 가족을 떠난 외로움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리라. 아즈다비야의 東亞기지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남쪽으로 달렸다. 돌밭에 키가 작은 관목이 드문드문 보이다가 초목(草木)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자갈이 섞인 모래밭은 차츰 잔 모래로 바뀌어갔다. 한 시간쯤 뒤에는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모래의 대평원으로 나섰다. 사하라 사막은 대지(大地)라기 보다는 대양(大洋)의 느낌을 준다. 국민학교 사회과목 시간에 낙타는 「사막을 항해하는 배」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가끔 도로를 가로지르던 낙타도 보이지 않게 되더니 오로지 전선주만 우리와 동반해주었다. 1960년대에 상영된 바 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대작(大作)의 영화에서 주인공 로렌스(배우는 피터 오 툴)는 『사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사막은 깨끗하지요』(Desert is Clean)라고 짧게 끊어 말하는 장면이 있다. 과연 사막은 가을하늘처럼 깨끗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 달리고 있는 사리르(Sarir)는 평평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이 평평한 원반, 차중에선 베토벤의 전원교향악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가끔 東亞 소속 트럭이나 도로보수 차량이 마주치며 지나갔다. 잡화를 잔뜩 실은 수단人들의 트럭이 남쪽으로 달리기도 했다. 수단, 차드 등 이웃 나라에서는 리비아의 도시에 와서 물건을 사간다. 이들은 검문소에서 심한 수색을 받는다. 가득 실은 물건을 전부 내리게 해서 일일이 검사하는 데 며칠이 걸릴 때도 있다. 그래도 불평 한 마디 없이 車體 그늘에서 낮잠을 자가면서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한다.
잘루 병원의 북한 의사를 만나다
오후 4시20분쯤부터 오른쪽으로 유전지대의 가스 태우는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리비아 유전에서 나오는 기름은 대기오염의 주범(主犯)인 유황성분이 적어 유럽지역에서 인기가 있었다. 리비아産 원류는 1960年代에 지중해를 건너 西유럽에 집중 공급되었다. 1970년대에 가다피는 메이저의 석유가격 독점 결정체제에 도전, 산유국이 기름값을 결정하는 계기를 만든다. 그때 가다피가 지렛대로 활용한 것이 리비아産 원유에 대한 西유럽 국가들의 의존이었다. 잘루라고 불리는 오아시스 도시가 나타났다. 읍 정도의 취락인데 여기에 북한 의사·간호원들이 수십 명 근무하고 있다. 그들의 집단 숙소가 있는 아파트 입구엔 「모두가 영웅적으로 살며 투쟁하자」「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구호가 가로로 걸쳐져 있었다.
병원에 들어갔다. 복도 입구에서 깡마른 50代 정도의 북한 의사와 마주쳤다. 기자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우리 근로자들을 자상하게 치료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북한 의사는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뭐 그런 것 가지고 감사를 표하느냐』하는 표정을 지으며 『환자들이 많아서…』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가려고 했다. 억지로 붙들다시피 해놓고 복도에서 대화를 오래 끌어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의사가 방으로 들어가는데 방 안에 앉아있던 북한 간호원과 기자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하면서 인사하는 간호원은 의사와는 달리 다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절해고도(絶海孤島)와도 같은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만난 南과 北은 씁쓸하고 어정쩡하게 갈라졌다. 그러나 東亞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리비아內의 남북관계는 적대적이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는 南이 주로 받는 쪽이다. 이곳 자루 병원을 자주 이용하는 사리르 管 생산공장의 東亞사람들은 북한 의사나 간호원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몇 년 전 큰 교통사고가 났을 때는 그야말로 동족애를 발휘하여 東亞노동자들을 극진히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
東亞사람들이 고맙다고 과일이나 라면 같은 것들을 가져가면 北 의사들은 받자마자 쓰레기 통에 집어넣어 버린다고 한다. 북한 의사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보위부원의 눈초리를 의식해서이기 때문이겠지만 귀한 물건을 버리는 그들의 표정은 너무나 안쓰럽다는 것이다. 해방직후 우익(右翼)으로 활동한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의 지식인 사회에선 좌익(左翼)이데올로기가 유행이었고 매력적이었는데 왜 인기 없는 反共을 선택하게 되었느냐고.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인륜이 무너지더라. 사제지간, 형제지간, 부자지간의 천륜(天倫)까지 파괴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본질이란 것을 단번에 알았기 때문이다』
「증오의 과학(科學)」인 공산주의의 씨앗은 不毛의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서도 북한 주민(住民)들의 뇌리와 가슴에 뿌려져 공포·불신·경계의 나무로 자라고 있는 셈이다.
상념으로의 여행기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행자가 살아온 나라와 역사의 경험이 새로운 見聞과 부싯돌처럼 부딪쳐 상상의 불꽃이 튀는 것이 여행이다. 따라서 여행이란 것은 자신의 식견과 안목이란 안경을 통해서 바라보는 그림이자 자신과의 대화이다. 즉 자문자답(自問自答)의 과정이다. 여행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으므로 여행에 의해서 촉발된 상상의 전개와 自問自答의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여행기처럼 귀국한 뒤에 쓰여지는 글에선 동시적(同時的) 관찰만이 아닌 사전, 사후적인 감상이 들어가게 되므로 공간 속으로의 여행이 아닌 '想念 속으로의 非동시적 여행'이 되는 것이다.
기자는 리비아 여행에서 「왜 한국인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란 화두(話頭)를 지닌 채 돌아다녔다. 그 自問은 「한국안에서 한국인의 능력을 억누르고 나라를 후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집단은 위선적 명분론을 앞세워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고 획책하는 자칭 진보적 지식인 세력이다」라는 自答으로 돌아왔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느라고 군대에 안 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기자는 늘「그렇다면 군대에서 3년간 복무한 경력이나 중동에서 3년간 근무한 경력은 민주화 투쟁으로 3년간 옥살이한 경력보다 못한 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졌다.
사막에서, 정글에서, 동토(凍土)에서, 또는 공장에서, 연구실에서, 일선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함으로써 한국의 기적을 만든 생활인(生活人)들의 공(功)은 왜 거리에서, 감옥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 지식인들보다 낮게 평가돼야 하는가, 이게 불만이었다. 따라서 리비아에서 모범적으로 일하는 한국의 일꾼들을 볼 때마다 상상의 나래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로 날아갔다. 현장을 뛰는 生活人과 관념을 좇는 지식인의 대치된 모습이 리비아 여행 중 늘 나를 따라다녔고 주로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상상과 自問自答이 전개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편지
올해 초에 기자 앞으로 날아 온 한 독자의 편지를 소개한다 방글데시에서 사업하는 한 기업인이 보낸 것이다.
〈저는 趙 부장님과 비슷한 연배(年輩)로, 동시대에 대학에서 사회과학(社會科學)을 공부하고 지금은 경공업 제품을 외국에 수출하는 中小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비싼 임금을 피해 지금은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의 제삼국(第三國)에서 제품을 생산, 수출하고 있습니다. 오랫 동안 이러한 수출업에 종사해온 저로서는 비교적 많은 海外여행을 해 왔고 기회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현실경제의 측면에 입각해서, 우리나라 위상(位相)과 우리나라를 보는 外國의 시각(時角)을 항상 체감(體感)하면서 生活하고 있습니다.
月刊朝鮮 1993년 12월호 서진영씨의「『朴正熙와 金永三외 화해』에 이의 있다」를 읽고 불현듯 펜을 잡았습니다. 먼저 匿名(익명)으로 글을 쓰는 것과, 원고지에 글을 쓰지 못하는 점을 미리 사과 드립니다. 이곳 外國에는 원고지가 없습니다. 徐 교수는「…역사는 또한 개혁이 실패하는 主된 원인이 기득권세력과 이들의 이익을 비호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의 저항에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지도 않으면서 아는 체하려는 기회주의적인 천박한 지식인들」 또한 역사발전의 큰 장해 요인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이곳 후진국 방글라데시의 방직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섭씨 34도의 무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점검, 수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름도 없는 中小업체가 염색기계를 이 공장에 수출했고 작동(作動)에 문제가 있어서 기술자를 급파, 20여일간 머물면서 모든 것을 재(再)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현지인(現地人)들의 얘기로는 한국기계가 가격이 저렴하고 품질이 좋다고 했습니다. 기계값 한 대에 20여만 불, 복잡한 운송절차, 설치비용, 수리비용 등의 제반경비를 빼고 나면 과연 얼마의 마진이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 대공장(大工場)에서 유명(有名) 독일기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한국의 無名 中小업체의 기계, 그 우리나라의 상표가 얼마나 반갑고 자랑스러운지, 얄팍한 지식으로 겸손하지 못하게 입을 나불거리는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은 결코 모를 것입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기술 개발해서 어렵게 기계를 이런 곳에 팔고 있는, 이름도 없고 말도 없는 그런 업체들의 종사자들, 그들이 애국자입니다.
한국의 국회의원들 100 명이 이곳을 방문한들, 이 나라사람들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관심 없습니다. MADE IN KOREA를 붙인 한국의 기계 한 대, 이곳 시장(市場)에서 도요타(TOYOTA)의 물결 속에서 간혹 눈에 띄는 포니(PONY)나 스텔라(STELLAR) 한 대를 보고 코리아(KOREA)를 알아주지, 정치인들 교수들 수천 명이 이곳을 방문한다 한들, 관심 밖의 일입니다. 徐교수의 글은 사업하는 사람들, 일반상식인의 思考(사고)와 지식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글 같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제가 만약 趙부장님의 글에 반박문을 썼다면, 그런 수준의 글을 썼을 것입니다. 따라서 本人은 그 글에 조목조목 반론을 펴기보다는, 개괄적으로 우리나라의 당면 문제점이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될 것인지를 평범한 상식인의 입장에서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1. 한국경제발전의 原動力은 무엇이었나
첫째 朴正熙, 둘째 한국인의 근면성, 셋째 높은 교육수준, 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우위의 요소는 朴正熙의 지도력이었다고 봅니다. 저도 비록 朴正熙 군사정권의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만 朴正熙라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그가 명석함, 통찰력, 추진력, 꼼꼼함, 사람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움, 결단력으로 높은 교육수준의 한국 노동력을 조직화해서 이룩해낸 것이 한국의 경제발전인 것입니다. 1960년대초, 파키스탄의 개혁을 본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아유브칸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그 파키스탄의 노동자들이 지금은 한국에 불법입국(不法入國)하여 보다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한국 공장의 궂은 일들을 떠맡아 하고 있습니다. 1950年代 인도의 면방(綿紡)산업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었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인도를 배워야 한다고 떠들어댔었습니다. 그 인도가 지금은 자국(自國)의 수출공단(工團)에 한국 기업을 끌어들이고 앞다투어 한국업체들과 접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60年代까지만 해도 타이와 필리핀은 한국을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방콕은 한국人의 섹스 관광지의 하나요, 필리핀의 대졸(大卒) 여성들이 그 유창한 영어를 무기로 한국인 가정에 가정부로 취업하기 위해 문의를 하고 다닙니다.
朴正熙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한국사회는 난장판이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었고 자신감(自信感)도 없었고 자부심(自負心)도 없는 절망과 좌절의 사회였습니다. 정치 건달, 언론 사기꾼, 부패 군인들의 부패사회였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당시 사회의 암적(癌的) 존재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건달 政治人들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국회의원들의 60%는 건달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은 어땠습니까? 촌지(寸志)와 공갈로 살아가는 건달들이 기자들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들이 칼자루를 쥔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이곳 西南亞 국가들이 왜 지금까지 발전을 못하고 지지부진해 왔겠습니까? 자기희생 정신이 없고 진정한 애국심이 없는 고등정치(高等政治) 사기꾼들이 軍과 고급관료들을 부리면서 우매한 대중(大衆)을 우롱하는 위선적 民主主義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부정(不正)을 혁파하려는 능력 있고 배짱좋은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國民이 깨닫기 시작하고 國民이 보다 깨끗하고 능력 있는 정부를 희구해 가고 있기 때문에 이곳 政府들도 점차 면모를 달리해 가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에 점차 적극적이면서 깨끗한 정부 만들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수출, 경제 개발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우리들 생각으로는 이곳 더운 나라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것이 통념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섭게 일을 합니다. 오히려 한국인들보다 더 억척스럽게 일을 합니다. 돈의 위력과 돈의 매력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눈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 政治에는 도사들입니다. 이론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정당한 자가 노력의 대가로 잘 살려는 게 아니라 얼렁뚱땅 정치판에 뛰어들어 협잡으로 한몫 잡으려는 정치꾼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상기(上記) 한국경제발전의 原動力 세 가지 위에 물론 한 가지가 더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입니다. 대한민국이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體制)를 선택했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행운(幸運)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李承晩의 공헌은 지대(至大)합니다.
2. 후진국(後進國)의 개발독재는 꼭 매도만 되어야 하는가?
1960年代 末까지 北韓의 경제가 南韓을 훨씬 앞섰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아마 현재 金永三 대통령 핵심(核心)세력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재야출신(在野出身) 중에도 바로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당시 사회주의사상(社會主義思想)에 깊이 빠지고 신뢰했던 人士들도 있을 것입니다. 2000만 명 정도의 숙청 위에서 이루어졌던 스탈린의 개발독재는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무참한 인권 유린과 무자비한 숙청을 자행한 金日成의 개발독재 또한 그 실(實)을 따지기에 앞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60年代 한국의 개발독재는 똑같은 범주에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國民의 기본적(基本的) 자유(自由)의 일부가 유보되었다 하더라도, 중앙정보부의 人權 유린이 있었다 하더라도, 국민의 대다수가 숨도 못쉬고 살 정도의 숙청과 탄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面에선, 방종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自由의 일부를 제한했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토우(Rostow)교수의 말처럼,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서의 개발독재는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3. 우리나라의 문제점
6공(共)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에는 政治열풍이 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政治에 기웃거리려고 합니다. 각종 선거가 실시되기 시작했으니까 당연하겠습니다만, 生産에 투입되어야 할 人力이 政治로 몰리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모두가 자기 생업에 열중해야 합니다. 政治는 자기 희생이 각오된 엘리트들이 해야 됩니다. 남에게 봉사하려는, 자기재산을 팔아가면서라도 희생적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일부(一部) 엘리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生産에 투입(投入)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무슨 연구소(硏究所)다, 무슨 포럼이다 해서 우후죽순처럼 政治性 모임들이 생겨납니다. 한 자리 해보려는 사람들의 조직들이지요. 일않고 잘살아 보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 좋은 두뇌들이 건달化 되어서는 안되고 生産的으로 쓰여져야 됩니다.
무슨 民主化 연구소 등등 대신에 그 두뇌들이 모여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발품을 생산하는 기업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政治에 관심이 없어져야 합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사람들,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출열기가 다시 일어야 합니다. 경제를 일으켜야 됩니다. 「그까짓 경제」「그까짓 먹고사는 것쯤」이 아닙니다. 경제가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경제가 성공적이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은 무의미(無意味)해지는 것입니다〉
여자피부같이 예쁜 콘크리트 파이프
「시간은 생명이다. 1초를 아끼자」 오후 6시쯤 사리르 공장에 도착하니 정문에 붙은 구호가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든다. 사리르 공장은 65만坪의 부지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관(지름 4.58m, 길이 7.5m 무게 80t)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장이다. 2043명의 종사자중 관리직은 5%인 115명. 95%의 人力이 생산에 직접 투입되는 극히 효율적인 조직이다. 북한의 협동농장에선 절반 가량이 놀고 먹는 관리직이라고 한다. 농민들을 감독하는 관리자, 그 관리자를 감독하는 관리자, 다시 그 관리자를 감독하는 관리자…. 관리자가 많은 조직은 경직화, 관료화되고, 종국엔 건달化된다. 건달이란 놀면서도 큰소리 치는 이들을 말한다. 한국사회의 건달은 과연 정치꾼들뿐일까. 공부 안 하면서도 큰소리치는 교수들, 능력에 비해서 너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자들도 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건달群으로 분류될지 모른다.
領地를 가진 영주처럼 자신만만하면서도 소탈한 朴世弘(박세홍) 공장장(57)은 부장들을 배석시켜 놓고 현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엄청난 수압(水壓)에 견딜 수 있는 콘크리트 관을 만드는 데 왜 그토록 섬세한 신경을 써야 하는지 대충 알아 들었다. 한 기술자는 『잘 빠진 콘크리트 관을 만지면 여자 피부처럼 예쁘다』는 표현도 썼다. 콘크리트가 사랑스러워질 정도로 정열을 쏟고 있는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하루에 130본 가량의 목표량을 어떻게 달성하느냐에 집중돼 있었다. 시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동선(動線)의 단축, 인체 공학적인 작업설계, 품질관리의 철저, 252대의 중장비 점검·정비, 근로자들의 士氣유지를 위한 노래방(40개), 교회 운영 등등 각 분야의 정상적 작동이 오케스트라처럼 하나의 화음으로 울려나오도록 하는 것이 朴공장장의 지휘술인 성싶었다. 불량률 0.2%, 무사고 작업시간 320만(万)이란 수치가 朴공장장의 현재 성적이다.
이날 밤 방글라데시, 베트남, 조선족 노동자 대표들을 숙소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한국인 관리자들이 무서운 듯했다. 베트남 대표는 『한국인 상사들은 가끔 주먹이 먼저 나갈 때가 있다』고도 했다. 다음날 굉음 속의 공장을 한 시간쯤 살펴보면서 한국인 관리자가 말보다 먼저 주먹을 날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10층 높이의 로코모(Locomo)크레인은 자체중량이 배 만한 180t이다. 鐵路 위로 이동하는데 주로 80t이나 되는 관을 번쩍 들어 운반한다. 이 철로를 따라서 약 1㎞에 걸쳐 3층 높이의 일관작업 라인이 가설돼 있다. 먼 데서 바라보면 흡사 항공모함의 측면이다. 강철 거푸집에 모래, 시멘트, 물을 넣고 관을 만든 뒤 몰타르를 바르고 지름 0.6㎝의 강선을 팽팽하게 조여 감는다. 강선의 연장이 관(管) 하나당 12㎞, 이 무게만도 4t이다. 이 강선은 물론 관의 내압성(耐壓性)을 높이기 위함이다. 강선을 당겨 감을 때 저것이 만약 끊어진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니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일관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이며, 어떤 과정의 생략이나 나태도 허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80t짜리 파이프를 만드는 과정은 高所, 콘크리트, 쇳덩어리, 굉음과의 死鬪 속에서 이루어지니 엄격한 작업관리와 동작훈련이 없이는 人命사고가 다발(多發)할 소지가 많다.
우리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통솔을 하는지 제3국인들은 군인들보다 더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갖다 붙이고 있었다. 군대보다 더 군대같은 작업장 분위기였다. 기자는 1960년대 末에 공군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다. 그대 공군 부대에는 「완전무결」(Zero Defect)이란 품질관리 운동이 추진돼 꼭 기업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었다. 그 4반세기 뒤 기자는 기업內에서 군대를 느끼고 있다. 군사文化가 병영에서 사회로 확산된 그 현장에 서 있기 때문이리라.
「군사文化」란 동네북
최근 소위 「지존파」란 살인범들이 붙들린 이후, 언론을 통해서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이 여러 각도로 진행되었다. 빈부격차를 비롯한 사회문제에 책임을 돌리는 쪽과 그들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갈라졌다. 9월21일자 中央日報의 경우엔 1면 머리기사에서 「오랜 軍事문화에 윤리의식 실종 탓」이란 「전문가 의견」을 제목으로 뽑았다. 문제의 살인범들은 체포된 직후 기자들 앞에서 富者들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富者들만을 노리는 범죄를 계획했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실제로는 그들이 죽인 다섯 명 가운데는 「규탄 받아야 할 부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성실한 중소기업 사장 부부, 길을 가던 여성근로자, 배신했다는 동료를 죽인 것이 도대체 貧富격차나 부자들의 사치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언론은 마땅히 이들의 발언을 「흉악범죄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파출소의 순찰 능력 증강과 같은 구체적인 방범대책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여야 했었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는 흉악범이 나타나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는 식으로 참회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것이란 분위기가 있어 왔다. 모든 국민들이 성직자이기를 요구하는 이런 위선적 접근방법은 自慰행위는 될지언정 대책수립에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 더구나 군사문화를 이런 병적인 살인의 원인으로 삼아 매도하는 것은 부부생활이 잘 되지 않는 원인을 군사정권에 돌리는 것만큼이나 논리의 비약이다. 범인들이 군 특수부대에서 살인법을 배운 것도 아닌데…. 소위 문민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흘렀는데 왜 군사정권시절로 소급해서 군대를 끌어들이려는 것일까. 中央日報의 그 날짜 전문가 진단에 등장한 白尙昌씨(한국사회병리연구소장)는 「70년대와 80년대 이래 급진전된 민주화운동의 부작용과도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리만 주장하기」나 「자기 뜻대로 안되면 행동으로 밀어붙이기」 같은 행태가 이런 범죄행동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진단이었다. 이분의 주장대로라면 「오랜 민주화운동에 윤리의식 실종탓」이란 정반대의 제목뽑기가 가능해진다.
언론은 또 민주당 金玉川 의원의 자료공개를 바탕으로 하여 「一山 신도시 진지화(陣地化)개념으로 설계」라는 제하(題下)의 폭로성 기사를 1면 머리기사 수준으로 보도하면서 군사 문화적 발상을 비판하고 나왔다. 우선 「陣地化」란 용어는 엄청난 과장임이 드러났다. 휴전선을 20㎞ 앞에 둔 아파트群 도시에 방어개념을 도입하여 건물을 배치하고 시설을 했다는 정도로 이미 다른 도시나 건축에도 적용된 수준이었다. 문화일보 9월27일자 사설은 「주요 지점에 대공(對空) 화기진지를 구축하고… 심지어 지하 인도에 액체폭약주입용 관까지 매설토록 했다고 하니 그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라고 지적한 뒤「총알받이」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一山주민들에 대한「민심 달래기」를 촉구했다. 一山신도시 건설에 대해서 국방부는 북한의 기습남침을 저지할 수 있는 작전공간이 없어지고, 戰時에 一山주민들의 南下가 군의 기동을 방해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으나 주택문제 해결이란 文民的 요구에 눌려 버렸었다. 그 대신 一山신도시 건설에 통상적이고 최소한의 전략적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자유로를 달려본 사람들이면 알겠지만 휴전선에서 이 도로를 타면 10여분 만에 一山, 30분 만에 서울 도심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그 가공할 근접성을 감안할 때 一山신도시에 방어개념을 적용하지 않은 공무원이 있다면 직무유기와 利敵행위로 처벌해야 마땅하다. 軍이 너무나 당연한 일을 했는데도 정치인과 기자들로부터 매도되고 있는 이 나라는 과연 국가인가. 영세 중립국 스위스도 全국민의 70%가 들어갈 수 있는 방공호를 파는데, 一山과 서울이 북한 장거리 야포의 사정권 아래 인질처럼 잡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애써 눈감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위로부터의 반군(反軍)선동
군사문화(軍事文化)에 대해서,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일선 기자까지 「비판이 의무」라는 분위기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지도 오래 된다. 위도 해난사고 때 한 장관은 『군사문화의 획일적 행정이 뒤늦게 이런 사고로 나타난 것이다』는 취지의 변명을 했다. 金永三 당시 대통령은 비슷한 논법(論法)에 따라 『지난 5천년간의 적폐가 최근 잇단 사고·사건의 원인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지금의 사건책임을 군사문화나 과거로 전가해 버리는 것이 소위 文民정부의 변명공식처럼 돼 버린 지도 오래 된다. 문제는 이런 일방적 軍事文化 매도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군복무를 기피했거나 모종의 이유를 내세워 단축근무를 함으로써, 또는 사회주의에 심취해서 군복무를 거부, 군대문화의 단점과 아울러 그 장점을 체험할 수 없었던 이들이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같은 군사 대치상황에서는 「군복무를 안한 공직자에 의한 군대매도」처럼 사회정의에 反하는 행위도 드물 것이다.
하나회 같은 군사정치문화만큼 나쁜 것이 그러한 위선적 문민정치文化이다. 군사문화 전체가 아닌 군사정치문화를 비판대상으로 삼아야지 국가의 존립을 보장하고 있는 물리력의 원천으로서의 軍전체를 경멸과 매도의 대상으로 삼는 작금의 분위기는 軍紀문란을 불러와 戰力약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장교탈영 사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장교가 사병에게 얻어맞고 그 장교의 상관은 사건이 확대되면 一身上에 불리할 것이라고 판다, 사병들을 구속하지 않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장교는 탈영으로써 사회에 고발하고….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해결책이 나올 수 있는 성격이다. 군대를 동네북 취급하여 文民사회가 마구 치다가는 언젠가는 북이 찢어질 것이다.
남북한 군사대치 상황에서 북이 찢어진다는 의미는 한국인이 지난 50년간에 이룩한 찬란한 富의 축적을 北에 상납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지켜 주고 있는 군대를 경멸하려는 의도는 국가의 발전을 좀먹는 AIDS균이다. 이 균이 한 국가의 사령탑과 뇌수를 침범할 때는 아무리 건강한 신체라도 쓰러지게 돼있다.
군사文化의 기업 진입(進入)
국내의 反軍풍조와는 달리 기자가 사하라 사막 한복판 사리르 공장에서 확인한 것은 군사文化의 효율성이었다. 외국 노동자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고 있는 한국인 관리자들의 그런 리더십은 군대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ROTC 장교 출신을 신입사원 채용때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도 장교로서의 통솔력을 흡수하기 위함이다. 공군은 대한항공에 대해 조종사들의 공급처 역할을 했다. 기자는 1960年代에 공군 레이더 부대에서 근무했는데 레이더 정비병들 중 상당수는 제대한 뒤 전자·통신기업체로 들어가 군대기술을 사회로 확산시켰다. 군사文化의 장점인 효율성, 뚜렷한 목표의식과 전략개념, 책임감, 추진력은 皆兵制(개병제=全국민이 병역의무를 갖는 제도)에 의해 全국민, 全사회, 全기업으로 확산되었다.
기업중에서도 특히 土木건설·제조업이 군사文化를 적용하기에 적합한 생리를 갖고 있었다.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군대식 돌격정신이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오기와 맞물려 「해내는 정신」으로 승화된 그 현장에서 한강의 기적과 그것을 물질적 바탕으로 삼은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람이 그리운 사막의 외딴 섬
사리르 공장에서 하룻밤을 잔 뒤 기자 일행 4명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大水路공사의 水源인 지하수개발현장을 둘러본 뒤 지프로 바꿔 타고 사막 한복판을 향해 서쪽으로 달렸다. 「군포」라고 불리는 공업용수 基地가 목표지였다. 「군포」에서 북쪽으로 약 300㎞ 떨어진 곳, 지중해 연안 브레가에는 제2의 관생산 공장이 있다. 이 공장이 필요로 하는 공업용수를 군포에서 지하수 개발을 통해 확보한 뒤 대구-서울 거리의 송수 파이프를 통해 북송(北送)하는 것이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공업용수 파이프가 아닐까? 군포기지까지의 사막길은 일부러 닦은 게 아니라 많은 차량들이 모래밭 위를 오고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길이었다. 너비는 10차선을 넘을 것 같았다. 길 양쪽에 드문드문 廢타이어를 이정표처럼 세워 두었다. 이 길을 자주 달리는 지프 운전사는 조선족이었다. 그는 신기루를 가끔 볼 때도 있다고 했다. 군포용수기지에 심은 나무는 약 30㎞ 거리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 평평하니까 3∼4m의 언덕도 멀리서는 야산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사막 속의 고도(孤島)같은 用水기지에는 14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7명은 한국인, 두 사람은 타이人, 5명은 조선족. 주방장이 한국인이라 타이 노동자도 할 수 없이 한국음식으로 견딘다고 한다. 그래도 아무 불평없이 성실하게 일하는 타이人을 보면서 「조선족들도 저들을 닮아주었으면…」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조선족은 시키는 일만 하고, 타이人은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것이 큰 차이다. 이 군포 용수기지에선 열흘에 한번씩 브레가 공장에, 5일에 한번씩 잘루市에, 3일에 한번씩 사리르 공장으로 차를 보내 식량·부식 따위를 가져 온다. 분소장 韓寬燮(한관섭)씨(45)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7년간 근무한 뒤 이 고도(孤島)에선 1년2개월째 일하고 있다. 휴가를 마치고 기자가 타고온 대한항공 특별기에 동승하여 귀사한 韓분소장의 다음 휴가는 6개월 뒤가 된다.
韓분소장은 『비디오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고 했다. 기자가 가져간 잡지 최신호를 내놓으니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韓분소장의 친구는 근처에 있는 석유 채굴기지의 리비아 및 서양 기술자들이라고 한다. 고독을 공유하고 있는 그들은 서로 장비를 빌려주기도 하는 등 친숙하게 지낸다. 사람이 그리운 사하라 사막인 것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올 때도 있는데 웨건을 타고 다니는 강도단이다.
韓분소장은 최근 人工호수를 기지 안에 파놓았다. 70m×30m 규모의 연못을 파고 둘레에 나무를 심었다. 깊이 2m 가량의 연못은 수영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깡패」라고 별명을 붙인 물고기를 풀어 놓고 낚시도 하는데 잡히면 곧 풀어준다고 한다. 韓분소장의 안내로 사구(砂丘)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 석유 생산기지에 들렀더니 터키系 리비아人 두 사람이 외롭게 근무하고 있었다. 韓분소장과 친면이 있는 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이끌고 産油시설 여기저기를 보여주면서 신나게 설명해 주었다. 사람을 만난 것이 그렇게 즐거운 듯했다. 역시 사람이 드문 곳에서라야 사람의 값이 제대로 매겨지는 모양이다.
건설의 시대
韓분소장 일행과 작별한 뒤 브레가 관공장을 향해 사막길을 北上하면서 기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韓寬燮씨를 비롯한 군포 용수기지 사람들을 감옥에 버려 두고 문명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기자는 13년 전에 쿠웨이트에서 한국 유조선을 타고 한 달 만에 울산항에 도착한 일이 있었다.
그때 배 안에서 만났던 선원들의 순진무구한 얼굴들이 韓분소장의 넓은 얼굴과 겹쳐져 떠올랐다. 바다에서,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보면 한국의 뭍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어느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이 돼버린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 육상에서 정착하려다가 사기꾼들에게 걸려 재산을 날리는 일도 많다. 가족을 떠나 바다와 해외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육지사람들이 느끼게 되고, 권력을 쥔 내륙적(內陸的) 사고방식의 엘리트들이 「육지에서 바다로」가 아니라 「바다에서 육지를」바라볼 수 있을 때 한국인의 해양정신은 우리의 전통 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브레가로 북상하는 차중에서 기자는 金洙吉이사로부터 잘 만든 도로와 잘못 만든 도로를 구별하는 요령에 대하여 현장교육을 받았다.
기자는 金이사에게 왜 한국인이 土木과 건설 부문에서 세계최고가 되었는지를 물어보았다. 한국역사상 유명한 건축물치고 스케일로서 이름이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섬세함이나 예술 혼으로 해서 유명하지 규모의 방대함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그런 문화재는 全無한 상태이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건설업계는 지구의 얼굴을 바꿔 놓을 만한 대역사(大役事)를 세계도처에서 거뜬히 해내고 있다. 5·16 이후 30여년간은 건설의 역사였다. 세계가 한국건설의 무대로 변했다. 건설과는 상관없는 정체된 문화 속에서 시들던 한국인들의 에너지가 이처럼 대폭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건설 에너지가 통일 이후 북한 땅으로 투입될 때 황폐화된 산하(山河)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란 느낌이 들기도 했다.
金洙吉이사는 기자가 귀국한 뒤 편지를 보내 차중(車中)의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趙부장님과 헤어지고 나서도 해외공사에 대한 우리의 장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고자 계속 생각해 왔던 것을 우선 적어 보고자 합니다
① 한국건설회사는 전통적으로 상명하종(上命下從)의 피라미드 조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② 종업원들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조직의 이익에 우선을 두는 희생정신이 강합니다.
③ 간부들의 해내고야 말겠다는 정신력과 강한 책임감이 있습니다.
④ 개개인의 능력이 우수하고 근면합니다.
⑤ 계약서상의 문구에 구애받지 않고 현지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면서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는 점, 즉 예부터 官을 거스르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습관이 긍정적 작용을 합니다. 한국회사들은 크게 이익을 볼 수도 있었던 사항을 발주처의 잘못으로 이익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큰 손해만 보지 않았다면 웬만해서는 클레임을 걸지 않습니다. 이런 점이 현지 정부에서 한국회사를 선호하도록 만들었으며 계속적으로 공사를 수주(受注)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해외건설 초기에는 한국 건설 기능공들의 근면성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이제는 제3국 노동자들의 근면성을 동원하고 우리의 노하우를 이용하여 성공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완장체질, 책임감, 주인의식
金이사가 제시한 성공요인 가운데서도 「간부의 책임감」에 대해서 기자는 생각한 바가 있다. 한국인들만큼 완장을 찼을 때와 벗었을 때의 자세가 달라지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 것이다. 완장을 찼을 때, 즉 책임지는 직위를 부여받았을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강한 책임의식을 느끼면서 평사원 때와는 딴판으로 열심히 일한다. 책임감이 主人의식으로 변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한국인 특유의 오기, 즉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강한 자부심이 자신의 책임영역이 확실해짐에 따라 「이것은 내 것이니 내가 책임진다」는 주인의식·책임의식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해외공사장은 시어머니가 많은 국내보다는 간부들이 각자의 王國을 가질 만한 공간과 재량권을 제공한다. 「한국인에게는 날일을 시키면 장승될까 두렵고 도급일을 시키면 죽을까 겁난다」는 말이 있다. 책임의 영역을 분명히 하고는 자질구레한 간섭을 생략하고 결과주의로써 성적을 매기는 경영방식이 한국인들에겐 어울린다는 얘기다.
관리가 허술한 것 같은 現代그룹의 회사들이 무서운 저력을 발휘하는 비결도 한국인의 완장체질, 무대체질을 잘 살리는 관리방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통계에 따르면 취업자의 약70%는 월급으로 생활하는 피고용인이고 30%는 중소기업·상점·어장·농민 등을 자영(自營)하는 「사장들」이라고 한다. 이 자영업자들의 비중이 높은 게 우리 민족의 특징인데, 이것도 나만의 王國을 갖고 싶어하는 민족성의 반영이리라. 東亞의 경우도 1986부터 리비아 공사현장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기 시작하여 한인 노동자들을 제3국의 노동력으로 거의 전부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간부들의 이반(離反)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全근로자의 간부화가 이뤄질 수 있다면 한국은 펄펄 나는 나라가 될 것이다. 「全국민의 간부화」란 결국 「내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주인의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필리핀의 기능 人力은 왜 해외로 빠져나오나
사막 속의 고도(孤島) 군포 용수기지를 출발한 지 네 시간쯤 지나자 석양을 비스듬히 받는 모래밭의 자갈이 굵어지면서 키작은 관목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비가 내리는 지중해 연안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뜻했다. 초저녁에 브레가 관 생산 공장에 도착했다. 사리르 공장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이다. 1600여 명이 일하는데 하루에 평균 56개의 대형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무가 많아 사리르 공장처럼 삭막한 느낌은 주지 않았다. 李勝雄 공장장(51)도 이라크를 비롯한 中東건설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그는 『군포에서 보내주는 하루 1만2000t의 용수중 반(半)은 공장에서 반은 모래 및 자갈 채취장에서 쓴다』면서 『내일 토취장(土取場)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관리직이 아닌 한국인 노동자도 있는데 그들은 거의가 고도의 기능이 필요한 부분에만 취업하고 있다. 150t짜리 로코모 크레인 운전사의 반은 한국인이다. 한국인 노동자는 月220萬원쯤 받고 있는 데 반해 필리핀人들은 그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月66萬원 수준이었다. 똑같은 기능을 갖고도 차별대우를 받는 것은 바로 국력의 차이 때문이다.
리비아의 大水路공사장 人力구조를 보면 한국인 다음의 高기능 人力은 필리핀人들이다. 세계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필리핀 기능인력이 넓게 퍼져있다. 이것은 필리핀 국내에 그런 고급 人力을 받아들일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人力을 조직화하면서 해외로 진출할 자본(회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리비아內 東亞의 공사현장을 갈 때마다 기자는 月刊朝鮮5월호에 실린 박종한(朴鍾漢)회장 소개 기자를 화제로 삼은 간부들을 많이 만났다. 서울 광화문에 한국 최강(最强)의 빌딩으로 불리는 세안(世安)빌딩을 짓고 있는 재일교포 건설업체 사주(社主)인 朴회장의 한국 건설풍토 비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능력이 있으면서도 시키는대로 하지 않아 부실건물을 짓는다』 는 지적이나 계단 하나도 제대로 만드는 데가 드물고 엘리베이터를 타보면 그 건물의 不實여부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고 있었다. 기자는 몇 달 前 서울 남산타워에 車편으로 올라갔다가 케이블카 선(線)과 거의 나란히 회현동 쪽으로 걸어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시멘트 계단의 높낮이와 폭이 제멋대로 돼 있어서 관절염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시멘트 반죽을 들이부은 다음 적당히 계단을 깎아내어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날 정도였다.
브레가 공장의 입지(立地)조건을 천혜(天惠)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가까운 곳에 자갈·모래 채취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관을 만드는 데 있어서 2大 원료물질인 자갈·모래를 바로 옆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의 경이를 토목기술자들은 한국의 악조건과 비교해가며 실감있게 설명했다. 그 현장에 가보았다. 한 도시의 넓이 만한 수십㎢의 땅에서 구들장 같은 돌들을 캐내고 있었다. 이것을 파쇄장치에 걸어 자갈로 부수어내는 시설은 巨大 공장 규모였다. 돌조각들이 0.5㎞ 길이의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오가면서 때로는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우당탕탕하는 굉음과 흙먼지가 났다. 골재장의 羅日永소장(46)은 『한달에 7만t의 돌을 캐내서 처리한다』면서 『두 골재 채취장의 매장량이 약 500만t, 모래장의 매장량은 470만t이나 된다』고 자랑했다.
씩씩한 사나이의 씩씩한 이야기
우리는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서남서쪽으로 약 7백km 떨어져 있는 아슈샤리프 관매설 본부로 가기 위해서였다. 부산에서 평양까지에 해당하는 이 길의 3분의 2쯤은 東亞가 관 수송을 위해 닦은 길이다. 東亞는 대형관 수송을 위한 목적으로 약 3500㎞ 길이의 도로를 새로 닦았다. 너비 7∼11m의 이 도로는 포장은 안 돼 있지만 무거운 관운반 차량이 오가면서 다져놓아 고속도로처럼 탄탄했다. 차량용 급수정류장에선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나고 있었다. 낙타 떼들도 물을 마시러 몰려와 있었다. 낙타는 주인이 이사를 간 집까지 찾아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귀소본능이 강하다고 한다. 우리는 군데군데서 東亞 콘소시엄에 참여한 대한통운의 도로유지보수팀을 만날 수 있었다. 약 300명의 인원이 200 대의 차량을 상시 가동하면서 관운송 도로를 24시간 작업 체제로 보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쪽 사하라 사막의 분위기는 사리르 지역과는 달랐다. 붉은 색이 도는 땅색깔로 미루어 점토질이 많은 듯했다. 붉은 야산이 풀 한 포기 없는 나체를 그대로 드러내어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오후 4시를 지나 「장성」으로 불리는 관운송 G캠프에 도착,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梁貞錫 소장(53)은 『지금 이 시간에도 240대의 관운송 트레일러가 달리고 있다』고 했다. 반은 빈차, 반은 관을 싣고 달리는 차라고 했다. 80t의 관을 운반하는 대형 트레일러의 대당 가격은 2억4000만 원. 『1970년대 초에 나주 비료공장에서 사고가 나 공장가동이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대한통운 트럭으로 70t짜리 보일러를 싣고 고개를 넘어 나주로 들어갔습니다. 경찰차가 선도를 해주고 주민들이 환영을 해줄 정도로 위험한 운반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정도는 장난감처럼 움직이고 있지요』
관수송에 투입되는 운전기사는 431명 정비사는 88명. 80%가 태국인이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태국인에 대한 칭송을 또 들어야 했다. 『착하고, 불평없고, 더위를 잘 견디며, 서로 싸우지 않고…』
梁貞錫 소장의 사무실에 마침 이웃에 있는 도로유지보수출장소 부소장 李康穆씨(40)가 와 있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張飛처럼 용맹스럽게 생긴 거구의 호남아였다. 그는 하루에 400㎞씩 관운송로를 주파하면서 도로 보수를 지휘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부다비에서 6년간 일하다가 귀국해서 15坪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학비를 벌기 위해서 한번 더 나가자』고 결심하여 5년 전에 리비아로 진출한 이래 연속해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 좁은 한국에서 노는 것보다는 이런 데서 마음껏 일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권한도 많고 여기에 오면 집안일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일에만 열중할 수 있어서 남자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국에 돌아가 봐야 사무실 한 구석에 앉아서 따분하게 서류작업만 할 것인데 이 드넓은 大地를 바람처럼 휘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부리는 쾌감이 좀 좋으냐는 식의 말투였다. 李 부소장은 『김포(金浦)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할 때「이 나이에 뭣 하러 또 나가십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신경질이 난다 』면서 『해외근무자에겐 아파트 청약시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신입사원들은 무조건 해외로 보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李부소장은 세금을 제하고 340만원의 월급을 받는데, 이것이 고스란히 아내 손에 넘어간다는 점이 「남는 것」이라고 했다. 梁소장과 李부소장은 「돌아 다니는 것」이 일이라서 그런지 사하라 사막의 동물 생태계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경험담을 신나게 들려주었다. 낙타는 의리가 강하다는 것이다. 시력이 나쁜 낙타는 도로를 가로지르다가 자주 차에 치여 죽는다. 죽은 낙타 옆으로 친구인지 가족인지 모르지만 서너 마리의 낙타들이 며칠간이나 계속 웅크리고 앉아 문상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고 했다. 李부소장은 들개들을 붙잡아 키우는데 태국인들이 보신탕용으로 좋아한다고도 했다.
아! 대한민국
G캠프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계는 5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막의 석양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미국 아리조나주의 모뉴먼트 밸리와 흡사한, 황량한 풍경이 오른 쪽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석양을 받아 검붉게 물든 산맥들을 향해 가는데 東亞의 관 운송대와 만났다. 관을 부리고 돌아오는 60대의 거대한 트레일러 軍團이었다. 맨앞에 선도차, 그 뒤로 車間 거리를 약 300m로 유지하면서 약 20㎞에 걸친 거함들의 행렬…. 일대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트레일러의 운전석에는 흰 두건으로 머리를 온통 감고 선 글라스를 낀 유령같은 모습의 운전사가 앉아 있었다.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굉음을 남기고 스쳐 지나갈 때는 우리가 탄 비크 승용차가 지축과 함께 흔들렸다. 기자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조국 근대화를 시작한 지 30여년, 中東건설시장에 진출한 지 20년, 이제 우리도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벅찬 감동이 전율이 되어 온몸을 감전시켰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으면 될 것 아니가!』라고 내뱉던 故朴正熙 대통령, 鄭周永, 李秉喆, 중동출의 개척자 崔鍾煥(三煥기업회장), 東亞그룹 崔元碩 회장… 후세에선 이 시대를 開發年代란 무미건조한 명칭으로서가 아니라 龍飛 시대, 巨人들의 시대, 영웅시대로 부르리라.
감동에 젖어 있는 기자에게 金洙吉이사는 『우리 회사가 사우디에서 콰디마 항만 공사를 따고 이어서 TEP공사(전국 종합 통신시설 공사)를 수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大水路공사로 연결되었으니 참으로 행운이지요』라고 한참 설명하는데 기자의 상상력은 만주로, 시베리아로 달리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야성은 한반도만으로선 차지 않아. 한국을 하나의 베드타운(Bed Town), 즉 숙소 정도로만 생각하고 생활 공간을 세계로 잡고 큰 무대에서 놀도록 해야지…. 이런 박력으로 밀어붙인다면 통일의 후유증쯤은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질풍처럼 달리는 관운송대가 북한을 향해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것이었다. 항공모함 같은 트레일러가 끝도 없이 스쳐지나가는데 차안에선 패티김의 청아한 목소리가 「눈이 내리는데…」를 부르더니 이어서 「마이웨이」를 열창하고 있었다. 석양이 빚어내는 자연의 교향곡, 관 운송대가 빚어내는 인공의 교향곡을 타고 「마이웨이」는 사하라의 깊은 곳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기자는 갑자기 「아! 대한민국」을 부르고 싶어졌다. 서울 광화문의 창백한 사무실 근무자들, 그리고 증오와 독선으로 비틀린 위선적 지식인들에게 이 장관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종실에서
오후 4시 김포공항 탑승 대기장 18번 게이트 옆 공중전화 박스. 기자는 전화를 걸려고 줄을 서 있었다. 앞에서는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왜 빨리 안 받노. 내 잘 갔다 올께. 아프면 약 사 묵어레이』
『……』
『잘 갔다 올께. 도착해서 전화할께. 장모한테 나 대신 전화하레이』
기자는 『아 이 분도 휴가를 끝내고 리비아 공사장으로 돌아가는 동아건설 노동자이구나』라고 직감했다. KE8013편 점보기는 오후 4시에 김포(金浦)를 이륙했다. 투니시아 제르바 공항에 도착하기 전 하노이와 바레인을 경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두 곳 모두 처음인데다가 기자의 방문 국가 리스트에 2를 더해주는 셈이 되지 않는가. 무착륙 장시간 비행보다는 중간 중간에서 쉬어가는 게 재미있지 않은가. 이륙 후 순항고도에 접어들자 『디스 이즈 캡틴 스피킹』(This is captain speaking)으로 시작되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맹동섭 기장」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맹(孟) 기장이 모는 점보기의 조종실에 앉아 태평양을 횡단, 김포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간 것은 1985년 10월이었다. 학자 같은 조용한 인상의 孟 기장 얼굴이 떠올랐다. 이륙 후 3시간쯤 지나 점보가 중국 남쪽지방 상공을 지나갈 때 허가를 받고 조종실로 들어갔다. 비행기가 순항고도에 진입한 뒤라 조종실의 세 사람-기장·부기장·항공기관사-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孟 기장은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하면 그 전용기의 기장으로 뽑혀 여덟 번이나 정상회담에 관계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방문국의 공항에 전용기를 도착시키는 데 신경 쓴 이야기를 했다. 9년 전 기자가 孟 기장의 점보기를 탔을 때는 밤이었다. 조종실의 앞 창은 시야가 넓다. 마치 우주선에 탄 기분이 들 정도로 별들이 가깝게 보인다. 그런 가운데서 비행의 애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군조종사 출신인 孟 기장은, 1970년대 초에 남쪽으로 착각 비행을 했다가 동해안 백사장에 불시착했던 북한 공군 미그기의 조종사 박순국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당국에선 귀순으로 발표했으나 朴 소좌는 결코 전향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朴 소좌의 미그기는 항법장치의 고장인지 조종사의 착각인지 동해안을 따라 포항 상공까지 남하했었다. 우리 공군은 뒤늦게 발진하여 다시 북상하는 미그기를 추격, 속초 근방의 해안에 불시착시켰었다. 결혼한 몸으로 가족을 北에 둔 朴 소좌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면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한 적도 있으나 공군장교가 되어 잘 살다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북한에선 朴 소좌를 영웅으로 만든 「은빛 날개」란 영화를 제작했다.
孟 기장은 『중국의 지상 관제소 가운데는 고장이 나서 가동이 중단된 곳이 더러 있다』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금방 구별된다』고 했다.
『옛날엔 한국의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국토가 벌겋고 일본은 검푸렀는데 요사이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해졌어요. 인도 대륙 위를 날다가 보면 황폐한 땅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지요』
하노이 공항에서의 추억
김포를 떠난 지 네 시간 만에 월남의 수도 하노이에 내렸다. 밤. 시골 驛舍같은 공항 시설. 파란 모자를 쓴, 깡마르고 키가 작은 월남 청년들이 탑승자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동아건설의 리비아 공사장으로 취업해 나가는 이들이었다. 말수가 적은 그들은 담배를 많이 피워댔다. 습기가 많은 후끈한 여름밤에 넥타이를 맨 승객은 기자뿐이었다. 좁은 대기실에서 한 시간쯤 기다리는 동안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간이매점처럼 단출한 카운터에는 콜라 등 음료수가 몇 개 놓여 있고 뱀이 들어 있는 술병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리비아에 도착했더니 동아건설의 한 간부가 『그 뱀술이 아직도 그대로 있습디까』 하고 물었다. 꽤 고명한 뱀술인 모양이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아프리카로 돈벌이 나가는 월남 청년들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기자가 다수의 월남인들을 만난 것은 이것이 19년 만이었다.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전에 우리 해군 LST 두 척은 한국 교민들과 월남인 妻 및 한국과 관계있는 월남인 1천 5백여 명을 태우고 출발, 5월 중순에 부산에 닿았다. 이들은 옛 부산여고 교사에 수용되었고 기자는 이곳을 취재했었다. 亡國의 流民이었지만 월남 사람들은 대단한 생존력을 보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나라로부터 도움과 보호를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수용소 관리소에 대해서 당당하게(때로는 건방지게) 요구, 항의하는 그들을 보고는 『독한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났었다. 주한 월남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던 한 월남 장교가 사이공에 남겨둔 아내가 혹시 LST편으로 탈출해 오지 않았나 고대하다가 타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흐느끼던 장면도 생각났다. 지금 그 장교는 어디에 있을까. 아내와 재회했을까. 아마도 했겠지… 역시 세월만이 역사가 남긴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상념에 잠겼다. 하노이 공항을 출발, 6시간의 야간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바레인. 현지 시간으로 새벽 0시40분이었다. 바레인은 중동의 회교 국가이지만 술이 허용될 정도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이다.
영국 식민지였고 지금도 영국인들이 관리로 많이 고용돼 있다. 공항은 아주 현대적이고 능률적이다. 여기서 3시간을 기다렸다. 공중전화 박스는 집으로 전화를 거는 한국인 근로자들로 만원이었다. 1987년 12월1일 오전, 이곳 바레인 공항에서 신분이 탄로난 KAL858편 폭파범 金勝一은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했다. 金賢姬도 앰플을 깨물었으나 경찰관이 즉시 개입하여 목숨을 건졌다.
1989년 봄, 기자는 金양과 최초의 인터뷰를 안기부 安家에서 가졌던 적이 있다. 앗시리아의 浮彫(부조)처럼 옆 얼굴의 윤곽이 또렷한 金양은 자살을 결심했을 때의 심정을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김일성 수령님의 지시에 따라 혁명가로 값지게 죽는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자꾸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金양은 그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공작원에게 잡히면 자살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의 체면을 보호하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신처럼 따랐던 金日成에 대한 각성의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金日成 死後에 다시 金양을 만났더니 『김일성은 한번도 좋은 일 못하고 죽었으니 참 불쌍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자가 북한에 대해서 본격적인 탐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도 金賢姬와의 인터뷰였다. 아무도 옆에서 총을 들이대고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예의 바른 처녀」 金賢姬는 왜 노동자들이 탄 비행기 안에 시한폭탄을 두고 내렸던가. 이 의문을 풀려고 접근해 보니 거기엔 金日成이란 神이 있었고 그의 신도가 된 金賢姬와 인민이 있었던 것이다.
리비아로 들어가다
기자는 비행기를 타면 늘 창쪽 좌석을 차지하여 지도와 실제 地理를 대조하는 재미를 즐긴다. 바레인을 떠난 지 네 시간쯤 지나서 날이 밝고 오른쪽으로 지중해가 나타나더니 두 바위섬이 항공모함처럼 떠 있었다. 시루떡처럼 평평하고 길쭉한 섬 위에는 활주로가 있고 절벽의 낙차는 200m를 실히 넘을 것 같다. 저기가 어딘가. 지도를 보니 말타였다. 몇 년 전 부시-고르바초프 頂上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점보기는 투니시아의 지중해쪽 北岸 상공으로 들어갔다. 누런 땅과 올리브 농장 위를 지나 제르바 섬에 내렸다. 독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이 관광지엔 동아건설 사무소가 있어 입국하는 근로자들을 맞아들인다. 리비아에 대한 UN의 경제 봉쇄조처로 국제항로가 끊겼기 때문에 제르바를 경유, 陸路로 리비아에 입국해야 한다.
제르바 공항에 내리니 현지 시간으로 오전 9시, 양명한 지중해의 하늘밑이었다. 비행의 時差에 따른 피로를 빨리 푸는 방법이 있는데 햇볕을 받으면서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해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행할 때의 時差 피로는 해의 운행 방향을 역류하는 경우보다 덜하다고도 한다. 역시 인간은 지구·자연의 리듬과 맞추어질 때 편해지도록 조직돼 있는 모양이다. 제르바에서 트리폴리까지의 육로는 부산-서울 거리다. 오른쪽으로는 올리브, 오렌지 농장이 연속돼 있고 왼쪽으론 지중해. 아프리카가 지중해와 만나는 모로코-알제리-투니시아-리비아-이집트의 北岸은 비가 적당히 와 그린벨트를 이루고 있다. 과일과 농산물이 풍성하게 나는 이곳을 페니키아-카르타고-그리스-로마-이슬람 문명이 연속적으로 지나갔다. 그 흔적이 다양한 인종구성과 유적으로 남아 있다. 본토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의 그리스-로마 도시들도 발굴돼 있다. 리비아-투니시아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여 리비아 땅으로 들어갔다. 도로표지판이 아랍어로만 표기돼 있고 거리를 써 넣지 않았다. 「地理」가 국가기밀이라고 한다.
유쾌한 청년처럼 그려진 지도자 가다피의 초상간판이 길가에서 자주 나타난다. 투시니아 쪽 길가에선 돈다발을 잡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흔드는 노상 환전상들이 자주 보였었는데 리비아에선 그것이 처벌대상이다. 네 시간 만에 동아건설의 트리폴리 사무소에 도착했다. 트리폴리市 교외에 자리잡은 이 기지는 잘 정돈된 건물과 정원으로 해서 지치고 불안한 여행자를 안도시킨다. 入國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서 1주일 정도 교육시킨 다음 현장으로 내보내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귀빈 숙소에 짐을 맡긴 뒤 오후엔 트리폴리시내로 구경을 나갔다.
서울에서부터 기자와 동행한 동아그룹 홍보실의 吳鴻埰 과장은 사진작가이기도 한데 리비아에서 이미 3년간 근무한 적이 있어 최고급 안내자였다. 리비아 국립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바닷가의 옛 요새 건물 속에 있는 이 박물관은 이탈리아 점령기엔 총독관저로 쓰였다고 하니 우리 중앙국립박물관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우리는 박물관 건물이 옛 총독부였다고 하여 철거했고 가다피 정부는 혁명 이후에도 옛 이탈리아 총독관저를 계속 박물관으로 쓰면서 최근엔 더욱 그 내부를 잘 꾸며놓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자주 정신으로 말한다면 金泳三에 뒤질 것 같지 않은 가다피는 왜 식민지 종주국의 사령부를 부숴버리지 않고 있나. 두 지도자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왜 다를까.
국립박물관으로 계속 쓰는 이탈리아 총독 관저
그 해답은 이 박물관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4층으로 된 박물관의 각 층은 리비아가 딛고 있는 역사·문화의 지층이었다. 先史시대-페니키아·카르타고-그리스·로마-이슬람-현대 리비아로 이어져온 역사의 흔적들이 이 박물관 안에서는 쌓이고 이어지고 조화되고 있었다. 한 문화의 융성과 멸망, 또 다른 문명의 등장과 퇴장, 전쟁과 평화, 격돌과 화해의 5000년간 파노라마를 한 시간 만에 스쳐지나가면서 기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건물엔 죄가 없는데…」
역시 로마 시대가 남긴 조각이 압권이었다. 위풍당당한 황제 및 원로원 의원들의 석상과 기품이 있으면서도 선정적인 귀부인 조각상은 2000년의 時空을 뛰어넘어 無言의 대화를 건네고 있었다. 로마시대의 여인상은 그 노출의 정도가 지금의 법률로써도 단속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 이런 대담한 개방성과 남자상에서 나타나는 위엄과 힘, 이것은 바로 로마 1000년을 관류한 시대 정신이었으리라. 힘과 자신이 있으니 개방도 대담하게 할 수 있었으리라. 군사력과 개방성, 즉 내부의 단결에 기초한 국제화는 로마 제국이 천년을 계속하면서 세계문명의 저수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 4층 박물관의 맨 위층은 가다피 기념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反美·자주·폐쇄·전투적 이미지가 충만하지만 가다피 또한 아래 3개층의 축적된 역사 위에 서 있는 것이고, 그런 토양 위에서 자란 그이기에 이탈리아 총독의 죄를 총독부 건물을 상대로 물을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자연히 알았던 것이 아닐까.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문 것의 한 결과는 日帝 침략에 대한 想起의 효과가 없어지는 것이다. 日帝 침략의 중요 물증을 없애는 것이다. 한 역사학 교수가 쓴 글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조선 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것이야말로 친일적이다」
상전으로 모셨던 필리핀人을 부리고 있는 한국인
동아 건설 트리폴리 사무소 曺正燮 소장은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월남전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공중사진 분석관(장교)으로 참전했던 그는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며칠 지나면 베트콩 부대들이 또 사진에 잡히고, 마치 샘 솟듯이 중단없이 땅 속에서 솟아나듯 병력이 보충되는 것을 보고는, 아,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曺소장은 『우리에겐 월남이 징검다리였다』고도 했다. 『월남 진출의 경험이 있었기에 中東건설 시장으로 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건설 기술이 발전하는데 디딤돌 역할을 했던 것은 1950∼60년대 주한美軍이 발주한 공사였다고 했다. 이때 공사 감독은 주로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한국 업자들은 필리핀 감독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회유와 수모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 필리핀 사람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과 부엌을 오가면서 음식을 나르는 근로자도 30대 초반의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 태도가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6시 운동장에는 어제 기자와 함께 왔던 월남인 입소자(入所者) 200여 명이 최초의 日朝점호 겸 훈련을 받고 있었다. 오와 열이 잘 맞지 않은 것으로 봐 군대경험자들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우리는 책임을 진다!』
『우리는 능력이 있다!』
『안전! 안전!』
한국어로 구호를 제창하면서 운동장 주위를 구보하는 월남 청년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완강한 한국인들의 손에 맡겨진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겁을 먹은 듯한 표정들이었다. 프랑스와 미군을 상대로 한 3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위대한 국민들은 또 다른 위대한 국민들을 만난 것이다.
리비아 도착 둘째날 오전 8시, 우리(기자+吳鴻埰 과장+필리핀 운전사)는 미제 비크 승용차 편으로 1000㎞ 동쪽에 있는 벵가지를 향해 출발했다. 지중해쪽 해안을 따라 나 있는 녹색 지대를 달리는 길이다. 아프리카나 사하라 사막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미국 아이다호나 몬태나주의 서부지역을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자동차 여행의 즐거움은 동승자들끼리의 대화이다. 특히 吳과장은 리비아에 관한 한 역사부터 지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분이라 기자는 완전히 시청각적인 입체 교육을 받는 기분이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大)의 파노라마, 귓전을 떠나지 않는 吳과장의 해설….
한 시간쯤 달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 홈즈市의 렙티스 마그나에 도착했다. 한 시간쯤밖에 여유가 없어 6일 뒤를 기약하기로 하고 중심부만 돌아보았다. 해변가의 이 도시 폐허는 광화문 일대보다 약간 넓다. 개선문, 공회당, 대중목욕탕, 신전, 야외극장, 魚市場 따위 공공건물이 모여 있었던 곳이다. 렙티스 마그나의 입구엔 이곳 출신인 세베루스 로마 황제의 동상이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날렵한 몸매에 곱슬머리-전형적인 武將의 모습이다. 기자가 딛고 있는 렙티스 마그나의 폐허는 약 2800년의 역사적 축적을 갖고 있다. 기원 전 9세기쯤 레바논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페니키아 상인들은 北아프리카 곳곳에 무역기지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지금 투니시아에 있는 카르타고와 렙티스 마그나도 포함된다.
카르타고는 강성해져 렙티스 마그나를 포함한 지금의 알제리 투니시아 리비아 일대를 정복하고 시실리까지도 영향권 안에 두었다. 3차에 걸친 로마와의 결전 끝에 카르타고가 철저하게 망해버리자 기원전 2세기 렙티스 마그나는 로마 영토가 되었다. 폼페이와 시저 사이의 內戰 때 렙티스 마그나는 폼페이 측에 붙어 물자와 인력을 제공했다. 시저가 암살된 뒤 13년간 로마는 또 다시 內戰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가 서기 전 31년 악티움 海戰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내전을 수습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등극하자 이 도시는 로마 원로원의 직접 통치下로 편입되었다.
세베루스 황제의 고향
서기 193년 코모두스 황제가 암살된다. 프레토리아 병사들로 구성된 친위대가 로마황제직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황제란 자리를 경매에 붙여 부자에게 물려주었다가 죽여버리고 또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이런 혼란을 수습한 이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장군이었다. 헝가리 지역 주둔군 사령관이던 그는 자기 병력을 이끌고 서기 193년 로마에 입성,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리비아族이었다. 그는 18년간 재위(在位)했는데 정권은 안정되었고 렙티스 마그나는 최고로 번창하였다. 세베루스 황제는 서기 202년쯤 렙티스 마그나를 방문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렙티스 마그나에는 로마市를 모방한 것 같은 큰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서기 439∼534년 사이 약 100년간 독일계 밴덜族(Vandal)이 스페인에서 北아프리카로 침입, 이곳을 통치했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漢武帝)의 흉노 토벌과 흉노족(훈족)의 西進으로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 여파가 500년 뒤 리비아에까지 미친 것이다. 밴덜족의 북아프리카 지배는 서기 534년 비잔틴제국(東로마제국)의 진출로 끝장났다.
100년 뒤 아랍족의 침입으로 렙티스 마그나의 주인은 또 바뀐다. 11세기 베드윈족의 약탈에 의하여 이 도시는 폐허가 되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1900년에 걸친 도시국가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었다. 17세기부터 렙티스 마그나는 문화재 약탈자에 의하여 해체된다. 대리석 기둥과 조각상들은 반출되어 파리 근교 베르사이유 궁전의 건축자재로 쓰였다.
18세기엔 렙티스 마그나의 문화재들이 루블 박물관과 영국의 윈저宮으로 옮겨졌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11년 이탈리아의 점령기가 시작된 이후였다. 그때 만든 궤도차用 철로가 지금도 렙티스 마그나를 일주하고 있다. 잡초 속의 무너져내린 古都를 밟고다니는 것은 묘한 비감(悲感)을 안겨 주었다.
섭씨 40도를 육박하지만 습기가 적어 상쾌하기까지 한 햇볕, 코발트 빛깔의 하늘, 그 아래에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대리석 기둥, 부서진 벽, 목잘린 조각상, 무너져 버린 천정. 그 속을 헤매니까 흰옷 입은 로마 원로원 의원이 툭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로 누워 있는 여인상의 젖무덤은 하도 만져서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짜릿한 전율이 천수백년을 건너 뛰어 기자를 감전시켰다.
개방과 폐쇄
대중목욕탕은 수백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한증탕, 냉탕, 독서실, 화장실까지 있는 복합 휴게 시설이었다. 공중 화장실의 구멍 자리에 앉아 보았다. 배설물이 떨어지면 지하 하수도가 그것을 싣고 빠지도록 돼 있었다. 앉은 채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을 수 있도록 포석정 같은 水路도 패여 있었다. 이 정도의 유적, 그것도 해안에 붙어 접근이 쉬운 로마의 폐허를 관광지로 개발한다면 연간(年間) 수백만 명의 손님과 수십 억 달러의 수입은 보장될 것이다. 그러나 이날 이곳에 표를 사서 입장한 손님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가장 개방적인 문명국가 로마의 유적이 가장 폐쇄적인 나라에 있다는 것, 이 개방과 폐쇄의 두 단어가 이번 여행 중 기자의 뇌리에 줄곧 話頭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은 개방을 선택했던 남한과 폐쇄의 길로 가버렸던 북한의 운명을 연구·규명하는 하나의 방도이기도 할 것이다. 남한이 반도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개방의 길로 나아간 것은 민족적 비극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의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엄청난 잠재력을 재발견한 것이다.
분단은 남한을 사실상의 섬으로 만들었다.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지도에 의해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해외에서 活路(활로)를 찾는 對外지향적 전략을 생존방식으로 채택했다.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개척·무역·해양·국제화 같은 단어가 지도적인 개념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해양정신의 등장인 것이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첨예한 군사대결 상황을 몰고 왔고 우리 사회에 군사문화를 정착시켰다. 군사문화의 일부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훈련·교육·책임감·추진력·효율성 같은 생산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였다. 尙武정신의 등장인 것이다. 분단과 전쟁이란 민족사적 도전에 임하여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집단적인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터득한 해양 및 상무정신이야말로 한국식 개방의 기조였다. 로마의 개방성이 군사력의 뒷받침을 받을 때 비로소 세계제국으로 개화할 수 있었듯이, 신라의 삼국통일이 국제감각과 군사력의 뒷받침으로 가능했듯이 남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도 해양 및 상무정신의 기반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해양정신의 본질은 개방·개척·국제화·자유 민주·화해·공존이며 한국적 실천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과 자유민주주의 구현이었다. 尙武정신의 본질은 국가주의·安保의 중시·규율과 효율·책임감·파워 엘리트의 희생정신이고, 그것의 한국적 표현은 국방과 國力 중시, 그리고 능률적 기업·관료 조직의 출현이었다. 나약한 文民의 전통에 오랫동안 눌려왔던 한국인의 야성은 해양·상무정신의 모습으로 대폭발하여 오늘날의 뻗어가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렙티스 마그나의 잡초 속 폐허를 밟으며 해보았다.
리비아에 매료된 사람
吳홍채 과장은 사하라 사막에 홀리고 리비아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무리 못사는 나라라도 오래 살다가 보면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이다. 中東에서 장기근무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진심으로 그 나라와 국민·문화에 정을 붙인 이들을 만나기는 매우 어려웠다. 가장 큰 원인은 아랍 사람들의 행동규범인 이슬람교에 대한 거부감인 듯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인들이 보여주는 교조적, 배타적, 독선적 태도는 한국인들의 유교적 심성과는 조화되기 어려운 면이 있는 듯했다. 리비아에 도착해서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 나라에 대해서 호감을 표시하는 한국인들을 의외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리비아 사회가 사회주의적으로 통제되고 있기는 하나 다른 이슬람 국가들처럼 교조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리라. 특히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은 이 나라의 분위기에 다소간 여유를 주고 있었다. 吳과장은 이런 얘기를 한다.
『벵가지 시내의 독립기념관에서 본 일입니다. 교사들이 장님 학생들을 데리고 구경을 나왔어요. 장님 학생들 하나에 선생님들이 한 명씩 맡아 손잡고 다니면서 진열품과 시설들을 만져보게 하고는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거에요. 찡한 감동이 전해졌고 이 나라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吳과장이 리비아에 매료된 것은 무엇보다도 사하라 사막을 카메라로 잡는 과정에서 그 경치와 땅에 홀딱 빠져버렸기 때문임을 곧 알게 되었다. 그는 사하라 사막에 관한 한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촬영 경험과 사진자료를 갖고 있다. 현지에서 전시회도 했다. 한국인들이 리비아 및 大水路(대수로)공사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는 그가 찍어서 언론에 제공한 사진들이 큰 기여를 했다.
『한번은 사막 촬영을 마치고 차를 몰면서 돌아오는데 졸리는 거에요. 살을 꼬집고 소리를 지르는 등 별별 짓을 다해도 아무 효과가 없어요. 차를 세우면 다른 일행과 떨어지고 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하에 있었습니다.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을 떠올려 졸리는 것을 물리치려 해도 안돼요.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사람들과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니 그제서야 잠이 달아납디다. 역시 좋아하는 감정이 미워하는 마음보다는 더 센 것 같아요』
오후 1시에 대한통운이 운영하는 管(관)운송사업소에 도착했다. 李秀一(이수일) 관리부장의 안내로 곧바로 구내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한국식 식단이 어찌나 정갈하고 푸짐한지 기자는 세 그릇을 비웠다. 채소는 현지에서 재배하니 신선하고 무공해다. 동아건설의 어느 작업장에 가도 식사는 서울의 一流 한식당보다 나은 것 같았다. 가정과 떨어져서 생활하는 해외 건설현장이나 원양선박에선 식사의 호(好), 불호(不好)가 작업능률과 사기·분위기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시원치 않은 주방장이 오면 직원들끼리의 갈등과 스트레스가 증가하기도 한다.
업어주고 싶은 태국 근로자
주로 운전사인 1524명의 운송본부 직원 중에 한국인은 관리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16.7%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국인들이 57.1%로 가장 많고 월남인(10.5%) 조선족(10%) 필리핀인(1.6%) 리비아인(1.8%) 등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 일을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李부장은 기다렸다는듯이 태국 노동자들에 대해서 열심히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정말 업어주고 싶어요. 체력 좋고 순종적이죠. 불평이 없고 자기들 문제는 누구한테 고자질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 버리지요…. 우리한테는 정말 효자입니다. 불교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체력·순종심·우직함―이것은 어딜 가나 태국 근로자에게 쏟아지는 찬사의 공통어였다. 태국 근로자들이 한국인 관리자에게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하는 모습은 가식적이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진실이 담긴 것이었다. 상대에게 敬意를 표함으로써 敬意를 끌어내는 인사 예법이었다. 태국인은 인격적 모독에 대해선 격렬하게 반응한다. 머리를 만지면 경고없이 킥 복싱이 들어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궁금했던 조선족의 일 능력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가 많았다. 체력이나 의욕이 태국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식 체질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알아서 일을 처리하려는 의지가 극히 약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동족이란 의식이 강해서 한국인과 평등한 대우를 바라는 것 같은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연장근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연장근무 수당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더 일하면 더 번다는 것을 깨우치곤 한다는 것이다.
한 東亞건설 간부는 『조선족들을 자본주의化 하는 데는 한 세대는 걸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맛도 못 본 북한사람들은 통일시기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흔히 월남인들은 한국인 이상으로 일에 악착같고 손재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사회주의적 타율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태국·필리핀인들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다. 민족성보다는 체제가 인간형성의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의 장점은 영어를 잘하고 고급기술을 익힌 이들이 많은 것이고 단점은 保安(보안)의식 결핍이라고 한다. 방글라데시人들은 기초체력이 약하고 겁이 많지만 순종적이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태국人과 한국人들은 다 같이 비슷한 시기, 즉 1970년대 초반부터 中東(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한국인은 부리는 쪽, 태국인들은 아직도 부림을 받는 편에 서 있는가? 노동자로서의 당초 자질은 태국人이 결코 뒤지지 않았는데. 이 의문에 대해서 이날 저녁에 벵가지 본부에서 만난 金洙吉(김수길)이사(기획담당)는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한국은 자본과 조직을 갖고서 중동에 진출했고 태국은 노동력만 수출했습니다. 노동력을 담아서 키울 그릇을 우리는 갖추고 있었고 태국은 지금까지도 중동 진출의 경험을 축적시킬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겁니다. 우리는 기업이란 조직단위로 진출했고 태국은 개인단위로 나왔거든요』
대기업을 앞세운 저돌적 경제발전 전략의 성공과 기업체의 뒷받침이 없는 태국·필리핀식 노동수출의 停滯性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례에서 우리는 전략적 사고와 시스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지상 최대 工事
오후 6시 벵가지 근교의 東亞건설 본부에 도착하기 직전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길가에서 한 소년이 돌멩이를 던졌는데 앞 유리창 하단에 맞았다. 금이 쫙 가고 운전사는 비틀했지만 더한 변고는 없었다. 벵가지 본부의 鄭鎭三(정진삼) 본부장은 온화한 표정의 50代 경영자였다. 기획담당 金洙吉 이사로 하여금 공사현황에 대해서 기자에게 설명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東亞건설(정확히 말하면 東亞건설이 중심이 된 계열기업의 콘소시엄체)이 10년째 하고 있는 리비아 대수로공사(Great Man-Made River Project:GMR)는 흔히 세계 최대의 土木공사로 일컬어진다. 리비아 남쪽 사하라 사막 지하에 잠자고 있는 약 35조t의 수맥을 약3500㎞의 거대한 관으로 연결시켜(관의 최대 지름이 4m이니 문자 그대로 人工江이다) 지중해 연안의 도시·공장·농촌·사막에 물을 대려는 것이 이 공사를 시작한 가다피의 꿈이다.
사막을 녹지로 바꿔놓겠다는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의 근간이며 시발점이 바로 이 공사이다. 1984년부터 시작된 이 공사는 1차, 2차로 나눠져 진행되고 있는데 공사비는 92억 달러. 東亞는 이미 56억 달러를 받아냈다. UN의 경제봉쇄를 당한데다가 油價(유가)하락으로 경제사정이 극히 긴장돼 있는데도 가다피는 이 공사 代金(대금)만은 꼬박꼬박 제때에 현금으로 지불해주고 있다. 東亞는 한 해에 10억 달러 가까이를 벌고 있으니 미국의 對가다피 태도가 어떠하든 리비아에 대해서만은 나부터도 특별한 배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大水路공사장은 아주 넓게 분포돼 있다. 남북으로 치면 제주도-나진·선봉 지역에 해당하고 동서로는 북경-백두산의 거리가 된다.
이 공사에 투입된 자재와 人力을 살펴보면 웬만한 나라의 총력전 체제를 연상시킨다. 동아건설의 현장 인원은 육군 1개 사단과 거의 같은 1만1700 명. 관리직이 총원의 10%인 1614명이다. 나머지는 기능직. 관리직의 숫자가 비교적 적은 셈이다. 이는 생산성이 매우 높은 조직이란 뜻이다. 국적별로는 한국인이 약22%, 태국인이 가장 많아 35%, 베트남인이 20%, 방글라데시인이 15%, 조선족 9%, 필리핀인 6%, 현지인 0.5%. 필리핀 노동자의 약 15%는 관리직이고 베트남인과 방글라데시인은 전부 기능직이다. 이는 각국의 사회발전단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만 6천대
鄭進三 본부장은 『한국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는데 관을 매설할 때 그 관을 들어올리는 크레인 운전기사가 그렇다』고 했다. 관을 매설 구덩이에 정확히 내려놓아 빨리 연결되도록 해야 작업능률이 오른다. 한국인 기사는 육감이 뛰어나 5분이면 되는데 필리핀 기술자의 경우 25분이나 걸린다고 한다. 大水路공사의 본질은 관을 만들고 이를 운반하여 매설하는 작업이다. 넓은 지역에 걸쳐 이뤄지는 공사이므로 운송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東亞그룹은 운송(대한통운), 관 제조(동아콘크리트), 토목(동아건설)의 세 요소를 이미 갖고 있었으므로 입찰 때 유리했었다고 한다. 리비아 정부 주무부처 사람들은 『동아건설은 大水路공사를 위해서 생긴 회사 같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동아건설이 현장에 보유하고 있는 각종 차량은 약6000 대이다. 주로 트레일러, 포크리프트, 트랙터, 크레인, 크러셔, 불도저 같은 重量(중량) 차량들이다. 수개 기계화사단의 장비에 해당한다. 매년 새로 구입하여 대체하는 승용차만도 200 대에 이른다. 제조원별로 분류하면 세계자동차 전시장이 될 정도로 국제적이다.
內徑(내경) 4m, 길이 7.5m인 관 하나의 무게는 73t. 이를 실어 나르는 트레일러의 무게까지 합치면 100t이 넘는다. 이 트레일러의 길이는 27.5m.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인데 독일회사에 특별히 주문하여 제작한 것이다. 동아건설은 925대의 트레일러를 갖고 있다. 1개 수송단은 60대의 트레일러로 구성된다. 이 수송단이 10여㎞의 거리에 걸쳐서 모래바람을 날리며 질주하는 모습은 함대의 이동처럼 보인다.
아마도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최대 장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동아건설이 리비아 사막에 지은 관 생산공장은 두 곳. 사리르 공장은 부지가 100만 평(坪)이나 되고 1개 라인의 길이가 1㎞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제조공장이다. 관 생산 공장에서 매설지까지 관을 운반하기 위해서 동아건설이 별도로 닦은 도로는 총연장이 3500㎞이다. 남한內 고속도로의 총연장보다 길다. 이 도로의 폭은 7∼11m로서 관리상태가 거의 고속도로 수준. 동아건설은 이 도로만 유지·보수하는 조직을 별도로 만들어 하루 24시간 계속해서 손을 보게 한다. 그 인원이 약300명, 차량을 200 대나 쓴다. 도로공사 같은 회사를 부설로 갖고 있는 셈이다.
동아건설이 大水路를 만들기 위해, 즉 관을 파묻기 위해 긴 계곡처럼 파내야 하는 토사량은 길이 3600km에 약2억6000만㎥. 가장 큰 피라미드 100개 분이나 되는 부피이다. 대수로의 1단계 공사는 1991년에 완공되었고 1993년 9월1일부터는 벵가지(제2의 도시·옛 수도)와 서트 주민들에게 상수도물이 공급되고 있다. 그동안 염분이 많은 지하수를 마셔왔던 이곳 주민들은 약수처럼 깨끗한 사하라 사막의 물을 마시게 되었다. 民心이 좋아져 가다피 정권의 안정에도 기여하게 되었고 수인성 풍토병도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가다피는 首都(수도)인 트리폴리 지역에도 하루 200만t의 수돗물을 빨리 공급하기 위해 2단계 大水路 공사의 일정을 단축시키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
다음날, 즉 리비아에 도착한 사흘째 아침 7시에 유적답사반으로 변한 우리 일행은 벵가지를 출발, 동쪽으로 향했다. 앞 차는 태국 운전사가 모는 지프차, 뒷 차는 필리핀人의 비크승용차. 기자는 金洙吉이사, 吳과장과 함께 뒷 차에 탔다.
영화 「사막의 라이온」 배경
30분쯤 지나 로마시대 때의 항구유적인 프톨레마이스에 도착했다. 박물관을 구경하다가 변소를 찾으니 관리인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 없이 지중해를 지향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작은 어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운 로마시대의 도시엔 石柱와 미로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지하시설이 남아 있었다. 간단하게 둘러본 뒤 계속해서 동쪽으로 달렸다. 차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린 마운틴」 지역이 펼쳐졌다. 동서로 길이 약 200㎞ 남북으로 너비가 최대 100㎞쯤 되는 해발 300∼700m의 고원지대였다. 전체면적은 경상남도를 합친 정도가 아닐까? 전개되는 풍경은 유럽적이었다. 과수원, 아담한 야산, 과일 노점상, 유럽풍의 집. 군데군데 쓰레기. 아직 리비아人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나쁘다는 의식이 없는 듯했다. 물론 지정된 쓰레기처리장도 없다.
高原지대의 지형은 점점 험준해져 갔다. 깊은 계곡, 토굴, 절벽…. 金이 사는 『여기가 영화 「사막의 라이온」에 나오는 곳이다』라고 설명한다. 리비아를 점령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독립항전을 지휘한 영웅 목타르(영화에선 앤소니 퀸)가 이런 험악한 지형을 배경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깊이가 100m는 실히 될 것 같은 계곡 위에 걸쳐진 거대한 시멘트 현수교는 장관이었다. 지슬와디 알 쿠프 다리. 스웨덴 회사가 건설했다고 한다. 金이사는 『쇠가 아닌 콘크리트 빔으로 다리판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한 것이 대단한 기술이다』고 감탄했다.
다리를 건너 10여분을 달려가니 북한 건설회사의 본부가 길 오른쪽에 서 있었다. 입구에 다가갔더니 경비원은 없었고 본부 안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입구 바깥의 진열장 안에는 1993년 봄에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李仁模 노인을 열렬히 환영하는 내용의 선전 畵報가 붙어 있었다. 리비아엔 북한 건설회사 이외에도 북한의 의사와 간호원이 여러 병원에 취업하고 있다. 이들과 동아건설 근로자들 사이엔 훈훈한 미담과 가슴 아픈 사연들이 경계심이나 적대감보다 더 많이 쌓여 있는 듯했다.
키레네의 샘물
山中도시인 알 베이다를 지나는데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우리 일행이 탄 두 車엔 SSB통신용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물론 설치 허가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두 경찰관은 팩팩 소리를 지르며 차를 몰고 따라 오라고 하더니 경찰서로 데려갔다. 알고보니 우리 차가 경찰車를 기분 나쁘게 추월했고 정지하라는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고 화가 나 있었다. 아랍어語가 통하는 洪과장이 간절히 사과한 끝에 우리는 곧 풀려날 수 있었다. 다른 사복 경찰관이 『동아건설인데 봐주지 뭐』하면서 단속 경찰관을 달래더란 것이다. 오후 1시에 키레네(CYRENE)에 도착했다. 지중해가 10여㎞ 북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高原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도시의 폐허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스-로마-비잔틴 문명으로 이어지면서 약1600이나 계속된 도시. 발굴돼 있는 부분은 주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이다. 한때 20만 명 이상이 살았던 北아프리카 최대의 도시터가 작렬하는 태양 아래 누렇게 변색된 대리석과 석회석의 돌기둥·조각상·성벽·참호·야외극장·신전·개선문·우물·수영장의 골격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기원 전 7세기에 그리스의 테라섬 사람들은 가뭄과 기근 때문에 고향을 탈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의 신탁을 받아보니 리비아로 건너가서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이 나왔다. 바투스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이곳에 상륙,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 신화의 시작인데 거의 史實과 일치한다고 한다. 이들이 키레네를 택한 것은 용솟음치는 샘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샘물은 언덕 비탈에서 지금도 냇물을 콸콸 토해내고 있었다. 리비아에 도착한 지 사흘만에 처음 듣는 물소리였다.
키레네 王朝는 피비린내 나는 궁중음모와 이집트軍의 침입, 원주민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200년 뒤인 기원 전 5세기엔 왕이 암살되고 共和政으로 바뀌었다. 키레네는 리비아 동부지역의 그리스系 다섯 도시국가 중 맹주였다. 리비아 서쪽엔 强國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트리폴리타니아(지금의 트리폴리 주변에 있던 세 도시국가)가 번창하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두 세력은 경계선의 분할을 의논했는데 그 방법이 재미 있다. 키레네의 경주선수와 카르타고의 선수가 동시에 자신의 고향을 떠나 마주 달리다가 만나는 지점을 국경선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카르타고 대표선수 필라에니 형제는 날아왔는지 키레네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지점에서 키레네 선수와 만났다. 키레네측에선 속였다고 항의했다. 필라에니 형제는 그런 주장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는 뜻에서 『만약 키레네가 이 지점을 국경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묻히겠다』고 자살을 자원, 그렇게 되었고 국경선이 카르타고에 유리하게 확정되었다는 신화같은 얘기가 전해져온다. 物産이 풍부했을 그린 마운틴을 누르고 지중해 해상무역로를 감제하는 요충지 키레네는 지중해 연안의 정세변화에 따라 여러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해상과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북아프리카는 對岸(대안)인 유럽대륙이나 中東에서 정치적 태풍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영향을 받게 돼 있었다. 문명과 전쟁과 무역의 회오리바람이 그칠 날 없는 길목에 이 고원도시가 놓여 있었다.
전쟁과 평화의 기록
기원 전 4세기엔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영향권에 들고, 그가 죽은 뒤엔 스파르타의 원정군에게 점령당했다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키레네는 프톨레미가 스파르타군을 내쫓은 뒤 주저앉아버리는 바람에 식민지가 돼버렸다. 기원 전 1세기엔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제압하고 지중해 연안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의 속국으로 변했다. 서기 2세기엔 키레네에 살던 유태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수많은 건물들을 파괴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진압군은 22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 서기 365년엔 지진과 해일로 키레네와 그 주변도시국가가 황폐화되었다. 그 뒤부터는 사막 유목민들의 잇따른 침략. 이어서 아랍족의 침략, 그리고 11세기의 유목민 침입이 이 도시의 생명을 끊어버렸다. 목이 날아간 조각상, 넘어진 돌기둥을 타고 넘으면서 이 폐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한나절이 걸린다. 기자는 언덕 비탈에 만든 야외극장의 스탠드에 앉아 한가롭게 지중해를 내려다보면서 눈부신 햇볕 아래서 잠시 그 시대로 돌아가 보았다.
비탈면에는 열 겹도 넘게 층층으로 토치카 같은 방어진지가 구축돼 있었다. 참호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도 잘 뚫려 있었다. 동굴같은 진지 안에 화덕자리도 있었다. 피를 부르는 함성과 창·칼의 부딪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저 아래 바다 쪽에서 상륙해서 올라오는 스파르타, 이집트, 로마 군대와 배후로 들어오는 유목민 사이에서 이 도시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비명에 갔을까? 역사란 결국 전쟁과 평화의 기록이다. 한 인간이 성숙되려면 死生觀이 서 있어야 하듯 한 국가가 제대로 이어지려면 국민들의 전쟁관이 확립돼야 하는 것이다. 어떨 때 전쟁을 피하고 어떤 조건에서 전쟁을 결심할 것인가. 누가 전쟁 비용을 부담하고 전쟁의 지휘부는 어떻게 조직하며 병사들은 어떻게 뽑아야 하는가. 카르타고처럼 용병으로 해결할 것인가, 로마처럼 징집제로 대처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처럼 외국에 의존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중국의 宋처럼 침략국에 뇌물을 바치는 것으로 모면할 것인가.
북한이 「전쟁불사」의 자세로 달려들어도 「전쟁불가」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키레네 언덕에 서서 이 폐허 밑에 쌓여 있는 전쟁과 죽음과 流血의 의미를 느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듯이 국가로 생존해 가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전쟁은 국가란 조직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것이 두려울 때는 국가를 해체하여 식민지로 전락하든지 노예의 신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도 전쟁이란 운명을 받아들이면서였다. 로마는 기원 전 4세기 북쪽에서 쳐내려온 켈트족에게 로마시를 점령당해 학살·약탈의 수모를 겪은 적이 있었다.
로마의 전쟁의지
이때 로마인들은 일대 각성을 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다투는 것은 좋지만 外敵이 나타나면 擧國체제로 단결해야 한다는 것, 국방에 관해서는 국론의 통일을 꾀해야 한다는 것, 국방의무는 기득권층인 로마시민계층이 져야 한다는 것에 합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는 그 뒤 800년 동안 한번도 수도를 敵에게 내주지 않고 세계제국으로 팽창했다. 켈트족에 당한 수모를 심오한 국방의지로 승화시킨 때문이었다. 기원 전 3∼2세기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3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 문화권을 통일하여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시실리의 주도권을 놓고 시작된 이 결전을 통해서 로마는 버거운 상대이던 카르타고뿐 아니라 그리스, 마케도니아, 시리아까지도 순차적으로 제압하는 패권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도전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응전한 결과였다.
로마보다도 더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아테네가 도시국가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국방에 대한 國論의 분열과 전쟁기피 또는 위선적인 평화론이었다. 아테네는 기원 전 404년 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숙적인 스파르타에 패전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에게 민주정치체제를 포기하고 寡頭(과두)정치체제를 택하도록 명령한 뒤 성벽을 헐게 했다.
이날 아테네인들은 마치 축제를 벌이듯 유쾌하게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지금의 북한같은 병영국가 스파르타는 전쟁기술은 가졌으되 로마와 같은 전쟁철학, 전쟁의 도(道)를 터득하지 못했다. 즉 전쟁을 문화로 만들지 못함으로써 패권국가가 아닌 군사강국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아테네는 찬란한 문화를 지킬 만한 전쟁관이, 스파르타는 군사기술을 지속시킬 만한 문화가 없었던 데 대해 로마, 영국같은 패권국가는 둘을 다 갖추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가장 깊은 명상을 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는 처칠(영국 수상)은 한 국가가 전쟁을 결단하는 과정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유화적으로 나가서 전쟁을 피하는 것이 좋은지 강경책으로 나가서 전쟁을 막는 게 좋은지에 대해선 정답이 없다. 국가가 전쟁을 결심하는 데 있어선 계산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해득실이 아닌 국가의 명예가 걸렸을 때 전쟁을 결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2차세계대전 때 영국이 독일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한 것은 독일이 자기 나라를 공격해 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했기 때문에 폴란드에의 지원을 공약했던 영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결전을 결심하게 된 것도 침략의 위협 속에 놓인 동맹국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동맹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평화의 방법으로써」를 외치는 일부 한국인들은 전쟁이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자격」이 있는 국가와 국민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이란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 유적의 공짜 입장
키레네 유적엔 숲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일행 7명은 미리 준비해온 매운탕을 끓여서 점심을 먹었다. 태국, 필리핀 운전사도 한국인같은 食性으로 변한 듯 맛있게 해치웠다. 우리는 다시 동쪽으로 출발했다. 꼬불꼬불한 도로를 타고 고원을 내려와 한적한 어항인 수사(Susa)에 도착한 것은 20㎞ 뒤였다. 벌겋게 녹슨 폐선이 바닷가에 얹혀 있고 항만시설은 가동불능상태였다. 어떤 생산활동도 보이지 않고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그냥 잠들어 있는 마을이었다.
여기에 키레네의 부속 항구에 해당하는 아폴로니아 유적이 있다. 해변을 따라서 하얀 돌기둥이 줄을 선 채 졸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는데 철문은 닫혀 있었다. 입장권을 파는 직원도 자리를 비웠다. 철문은 그러나 한덩어리 작은 돌로 고여 있었다. 그것을 밀어버리고 침입했다. 밟히는 모자이크 타일 조각이 삑삑 소리를 냈다. 무너진 성벽 아래 그늘엔 한 아랍인이 플라스틱 물통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명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리비아에선 혼자서 종일 저렇게 앉아 있는 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가다피가 녹색혁명의 꿈을 실현시키려면 저런 사람들을 奮起(분기)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이 상당히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료입장객은 단 한 사람도 없는 이 세계적인 그리스-로마유적지는 사회주의적 폐쇄정책의 비생산성을 증언하고 있었다.
폐쇄는 1이란 자원을 1 또는 그 이하로 만드는 반면 개방은 자신의 1과 바깥의 1을 더해서 2나 4로 만드는 사업이다. 알폴로니아라는 내부 자원에다가 외부의 자본을 결합시키면 당장 몇배의 財貨(재화)가 창출된다. 폐쇄는 자원의 이용을 제한하면서 동시에 인간능력의 이용률을 떨어뜨린다. 외부와의 경쟁심리가 없고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광(風光) 속의 무력해보이는 인간, 그것이 폐쇄의 결과물이었다. 돌아나오는데 뚱뚱한 매표원이 돌아와 있었다. 무단침입에 대해서 추궁을 당할까 두려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악수를 교환했더니 입장료도 사양하고 『잘 가라』면서 배웅까지 해주었다. 폐쇄된 나라일수록 인간은 순하다. 그러나 개방에 견딜 정도로 그 순수함이 강인한 경우는 드물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金洙吉 이사는 대수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리비아 정부에서 그 공사를 지휘하기 위해서 만든 대수로공사관리청(GMRA : 게무라라고 발음) 공무원들의 청렴결백과 일에 대한 엄격성. 리비아는 고위공직자일수록 깨끗하다고 한다. 요컨대 업자로부터 뜯어먹고 봐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수로 공사의 감리를 맡은 것은 용역사(동아는 원청사가 된다)인 영국 브라운 앤드 루트社(Brown & Root)의 철저한 감독. 金이사는 『BR은 우리에게 100%가 아니라 150%의 품질보증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중동진출의 최대인맥인 한양공대 토목과 출신인 金이사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택공사를 할 때 겪어야 했던 준공검사의 지긋지긋한 고생담을 들려주었다.
『창 하나하나를 직접 열어 봅니다. 도어를 열었다가 놓았을 때 너무 빨리 닫혀도 불합격입니다. 벽면을 손으로 만져 약간의 돌출만 있어도 재시공. 그때는 불평도 많이 했지만 그런 준공검사로 단련받으면서 우리의 건축·토목 기술이 이렇게 발전한 겁니다』
사(士)자 계급의 죄악
건설부에서 공사감독으로 일한 적도 있는 金이사는 『해외에 나오면 세계제일의 건설기술을 과시하는 우리나라 업계가 국내에선 짓던 다리가 무너지는 수준의 부실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최단시일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엄격한 준공검사라고 했다. 다 지은 고층건물 몇개를 헐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없는 준공검사의 본때를 보이면 시공자들은 청탁이 아니라 기술로써 해결하려 들 것이고 자연히 부실공사도 극복되고 건설기술도 향상될 것이다. 부실공사의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인 것이다. 金이사와의 車中토론이 여기에 이르자 기자는 늘 지니고 다니던 의문이 생각났다.
「왜 한국인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
1970년대 초 한국의 가장 큰 人力수출시장은 海運분야였다. 많을 때는 약4만 명의 선원들이 외국배를 탔다. 「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는 그 달러를 한국으로 보내주던 이 수출선원들은 세관의 밥이었다. 몇 년간 고생한 끝에 가족품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 부산항이 보이면 설레임보다는 「세관원에게 또 얼마나 당해야 하느냐」란 걱정이 앞서 다가오는 고향이 두려웠다는 푸념을 기자는 많이 들었다. 반도국가이면서도 뱃사람을 「뱃놈」으로 멸시해온 이 나라에서 자란 선원들은 왜 외국배만 타면 펄펄 날 정도로 기량을 발휘하여 세계최고의 선원들로 변모했던가. 이 의문에 대해서 한국해양대학의 한 교수는 기자에게 『조국을 떠났기 때문이다』고 잘라 말하던 기억이 새롭다.
『사농공상(士農工商)적인 신분차별, 관(官)에 의한 착취의 질곡에서 해방되니까 본래의 실력이 나온 것입니다』
하도 官의 착취가 심하니 바닷가에 고래가 얹혀도 잡아서 돈벌 생각은 하지 않고 『관리들이 알면 일만 죽도록 시킨다』면서 어민들은 밤새 그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는 朝鮮朝(조선조) 사회에서 산업이 발달할 리가 없고 초원을 달리던 기상이 발휘될 리가 만무했다.
朝鮮왕조의 유교적 지배 이데올로기, 그 가장 큰 해독은 경제의욕과 尙武정신을 퇴화시킨 것이었다. 그 책임은 士로 상징되는 정치인, 지식인, 관료들의 몫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이 士자 계급이 트집과 위선과 냉소적 태도로써 이 나라의 뻗어가는 기상에 찬물을 끼얹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왜 같은 한국인이라도 서울시내에서 만났을 때보다 사하라에서 만났을 때 더 패기 있고 정직하며 당당해 보이는가? 어째서 한국의 공사감리제도는 리비아보다도 못한가. 왜 많은 한국인들은 지금도 김포를 떠날 때 「앞으로 몸이야 고생이겠지만 마음은 편하다」고 느끼는가. 기자는, 士자 계급(기자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에 의한 農工商계급에 대한 착취구조는 지금도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자는 이런 농담을 즐겨한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과대평가되고 있는 직업인은 교수,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기업인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보통사람」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기업인이다.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다』
몽고기마군단의 기상 되찾다
1993년의 金泳三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에선 지난 50년간의 국가건설기에서 낙오되거나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힘을 갖고서 그 건설에 흠집을 내는 일을 「개혁」이니 「민주화」니 하는 말로 위장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오늘의 한국을, 우리 역사속의 어느 단계와도 확연히 구별짓게 만든 해양정신과 尙武정신을 망가뜨리고 그 결과로서 한국인의 기상을 꺾어버리는 일을 하고 있다. 역사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폐쇄적 역사관의 표현이랄 수밖에 없는 옛 중앙청의 졸속철거 결정이 그 한 예이다. 냉전시대의 붕괴에 신호탄을 올리고 동구공산권의 붕괴에 한 기폭제가 되었던 서울올림픽정신을 기념하여 만든 서울평화상을 낭비적이란 이유로 폐지하라고 지시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분명히 끼어 있는 민예총에 2억원이 넘는 문예진흥기금(국민들의 돈으로 조성되었다)을 대주고, 남북한 화가들의 합동전시회(코리아통일 美展)를 허가했다. 그 합동전시회에 출품된 그림들의 공통점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묘사하고 대한민국을 미국과 자본주의의 노예로 형상화한 점이었다.
좌파의 宿主가 된 김영삼 세력은 그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내부의 敵」이란 전투적 용어를 쓰면서 김일성 세력에 대해선 침묵한다. 권력을 쥔 일부 지식인들의 병적인 태도가 만드는 사회분위기는 우리가 모처럼 찾아낸 한국인의 야성을 죽이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士자 계급에 의한 질곡에서 벗어난 해외의 한국인들은 우리의 피속에서 너무나 오랫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에너지를 재발견했다. 그 에너지는 아마도 북방의 초원을 달리던 몽고기마군단의 폭발력이었을 것이다.
인구 150만의 몽골이 1억 인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 12만의 기병으로서 유라시아의 강대국을 차례로 점령해간 조직력의 비밀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에서도 발견된다. 동아콘소시엄은 8개국 노동자로 구성된 다국적軍이다. 지휘부를 장악한 것은 전체 인력의 약 20%인 한국인들이다. 몽골군단도 12만의 自國군대를 장교 및 하사관으로 삼고 졸병들은 현지에서 다국적군으로 편성하여(그래야 조직적인 반란이 불가능하다) 세계를 정복해 갔다고 한다. 몽골은 식민지 지배도 현지국가의 지도부를 강권으로 인질화하여 그들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했으므로 인력의 과도한 배치를 줄일 수 있었다. 몽골 유목민들의 이런 국제감각이 산악국가인 한국에서는 억눌려 있었으나 무대가 넓은 외국으로 나가면 되살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넓은 무대를 가져야
리비아의 한국인들을 만나면서 기자가 절실하게 느낀 점은 한국인들은 넓은 공간을 가질 때 비로소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는 점이었다. 인구밀도가 세계최고인 한국에선 한정된 공간과 자원 때문에 「내 것이 늘면 네 것은 줄어든다」는 「제로섬 게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치열한 권력투쟁과 치사한 방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외의 광활한 무대는 한국인을 그런 새장에서 탈출시켜 훨훨 날게 만들었다. 20%의 한국인이 80%의 외국노동자를 일사불란하게 장악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 비결은 군사문화였다. 리비아 현장에서 외국노동자들은 상관만 보면 구호를 외치며 거수경례를 올려 부치는데 영락없는 군대 분위기였다. 한순간, 한치의 실수가 큰 참사를 부르게 되는 작업현장에선 군사문화적 규율은 불가피하다. 군복무 경험을 가진 한국인 관리층이 군대식으로 외국노동자를 통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군대, 전쟁이란 말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하고 보자는 사람들은 생각을 달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기자는 분단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해양정신, 북한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尙武정신이 한국인의 야성을 폭발시켰고 이 바탕 위에서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앞에서 썼다. 金日成의 사망으로 통일의 방법은 보다 명쾌해졌다. 힘(경제력+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북한동포를 노예로 삼고 있는 김정일(金正日)정권을 제거하고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통일의 본질이다. 남북한간에는 공존·공영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큰 격차가 나버렸다. 북한은 共榮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역사의 흐름을 잃지 못한 채 흡수통일이 불러올 부작용을 과장하고 있는 한국의 지도층은 한국인의 야성·기상·희생정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 유약한 士자 계급보다 農工商계급의 사람들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북한문제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통일정신을 생각하다
통일이란 도전에 대해서 어떤 논리와 정신으로써 응전할 것인가. 이것을 집중적으로 토론할 때이다. 남한의 폭발적 에너지가 그동안 해양 쪽으로 지향했다면 통일은 그것을 북방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만주-몽골-러시아 동부 지역이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곳은 또 몽골문화권이기도 하다. 몽고-만주-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 ㄴ자형 몽골문화권은 앞으로 우리의 무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만주는 우리 것」이란 식의 저질 민족주의를 내세워 주변 국가를 놀라게 해선 곤란하다. 주변 국가들과 공존·공영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역할을 찾아야지 되지도 않을 영토적 야심을 촌스럽게 드러내어선 앞길이 막힌다. 심신이 피로한 북한동포를 손잡아 끌면서 통일의 에너지를 해외, 그리고 북방으로 확장시켜 나갈 때 통일의 부작용은 오히려 새로운 추진력으로 바뀔 것이다.
거대한 통일의 비전을 그릴 생각은 하지 않고 소심하게, 또 이기적으로 통일의 후유증을 과장하는 이들은 독일에 가봐야 한다. 통일 후유증을 급속히 치유한 독일 사람들은 이제 독일적인 가치관의 세계화를 꿈꾸면서 원대한 포석을 하고 있다. 통일 독일의 후유증을 흡수통일 반대론의 근거로 과대 선전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인사들은 독일이 그 후유증을 轉禍爲福의 계기로 삼고 있는 지금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인류역사상 가장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독일통일을 부정하는 좌익들은 사실상 분단고착론자들이거나 적화통일론자들이다.
벵가지로 돌아오니 저녁이었다. 吳홍채 과장과 나는 훈덕시장으로 나가보았다. 달러 유통은 법으로 금지돼 있는데도 「달러도 받습니다」란 한국어 표시가 돼 있는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吳과장은 『2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변했다』고 했다. 여자 사진이 나오는 광고 포스터나 화장품·브래지어의 진열은 2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다피가 1988년에 국유화 정책을 부분적으로 완화한 이래 自營상점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경제도 서서히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술도 집에서 마시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가다피가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다음날 아침 기자는 벵가지 본부內 한국인 직원들의 숙소를 둘러보았다. 3층짜리 영구 아파트였다. 棟마다 휴게실 체육시설 대중목욕탕 세탁장 사우나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不實없는 아파트는 깨끗하기 짝이 없었다. 외국노동자들을 청소부나 건물관리인으로 많이 쓰기 때문이었다. 한국인 직원들의 품위 있는 생활을 지탱하는 것은 값싼 이들 외국인 노동력이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로마인의 우아한 문화생활을 뒷받침한 물리력은 노예노동력이었던것처럼. 로마가 천년이나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노예가 로마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넓게 열어 두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10년 뒤 방글라데시나 조선족은 오늘날의 한국인 직원처럼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다시 사막을 향해 출발했다.
突貫 정신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쾌청한 아침 8시, 우리는 비크 승용차 편으로 리비아 벵가지의 동아건설 본부를 떠나 서쪽으로 「(천안)天安」을 향해 출발했다. 한 30분쯤 달리니 미국의 대평원에서 전개되는 것과 흡사한 밀농장이 나타났다. 지름이 500m나 되는, 양팔을 벌리고 회전하면서 물을 뿜어내는 급수장치는 「사막의 녹지화」라는 리비아 지도자 「가先生」(東亞사람들은 가다피를 그렇게 부른다)의 꿈을 실현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안내자로 동승한 金洙吉 기획담당理事는 지난해 있었던 기록적인 돌관工事에 대해서 실감 나게 설명해 주었다. 벵가지市에 大水路공사의 결과물인 生水처럼 깨끗한 사막 지하수를 혁명기념일인 9월1일에 공급할 수 있도록 「가先生」이 특별히 부탁하여 45㎞에 걸친 관매설 및 通水공사를 여섯 달 만에 해치웠다는 것이다. 처음에 공사 감리 업체인 영국의 브라운 앤드 루츠社에서도 난색을 표했으나 東亞가 몇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며 밀어붙이겠다고 나섰다. 발파작업을 리비아 軍부대가 맡고 브라운社는 설계심사를 간소하게 하도록 한 뒤 불철주야로 돌관공사를 강행했다.
벵가지市는 가다피가 쿠데타로 뒤엎기 전에 王都였다. 지금도 反가다피 정서가 남아 있는 제2의 도시에 신선한 물이 공급되면서 여론도 좋아졌고 水因性(수인성) 풍토병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다피가 東亞에 대해서 대금(代金)지불 등 여러 면에서 각별히 지원하고 있는 것도 자신의 꿈이 걸린 공사를 한국인들이 협조적으로 잘해주고 있는 데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한국인이 자랑하는 국제경쟁력의 핵심은 시간단축이다. 건설공사장이나 제조업체에 가면 항상 공기단축의 神話(신화)를 들을 수 있다. 뒤늦게 국가 근대화를 시작한 한국은 시간 압축적 고도성장으로써 뒤늦은 출발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시대 분위기에 따라 우리 생활의 곳곳에서 시간단축을 위한 死鬪(사투)가 벌어졌다. 『바쁘다, 바빠』란 유행어 그대로의 삶이었다. 부실건축, 과속에 의한 교통사고, 마감시간에 쫓긴 나머지의 誤報(오보)같은 것들은 시간단축의 부작용이었다. 지금도 한국인의 장기는 「기한내에는 해내고야 마는」 突貫(돌관) 정신인 것이다. 이런 정신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조직력의 중요한 원천은 군대文化였다.
군사文化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와 함께 요사이는 『시간이야 어찌 되었든 좋으니 제발 사고내지 말고 튼튼히 지으라』는 식의 업무방식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질(質)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가 되면 우리는 경쟁력을 잃게 된다. 시간단축과 질 높임을 함께 추구해야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이지 질을 위해서 시간을 희생한다는 것은 후퇴이다.
리비아의 天安에도 삼거리가 있다. 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트리폴리를 향해 직진하는 길, 남쪽으로 꺾어져 사하라 사막 깊숙이 있는 東亞컨소시엄의 사리르 관(管) 생산공장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을 그렇게 부른다. 東亞사람들은 벵가지를 서울, 아즈다비야를 天安, 사리르를 大邱라고 부르는 식으로 한국의 地名들을 통신상의 호출신호로 갖다 붙여 望鄕의 마음을 다소나마 달래고 있다. 벵가지市에서 서쪽으로 137㎞ 떨어진 아즈다비야에는 잠실 主경기장의 열 배나 되는 바닥넓이 20만 평(坪)의 인공(人工)저수조가 건설돼 있다(표면적이 커 여름엔 매일 5000t의 물이 증발된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이 거대한 접시에 수심 6m로 360만t의 물이 담겨져 있었다. 남쪽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뽑아 올린 물을 수백 ㎞의 관로를 통해서 이 저수조에 모은 다음 도시와 농장에 공급한다.
1991년에 있었던 이 아즈다비야 저수조 담수식에는 가다피가 40여 개국의 대표들을 초대, 스스로 빨간 양동이로 물을 퍼담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한 코발트 색깔을 띤 저수조의 水面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李相熙 전 대구시장은 대구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대구처럼 삭막한 내륙도시 사람들에게 물을 보여줌으로써 정서적인 안정(安定)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격동기의 서울 주민들에게 한강물이 없었더라면 살인사건과 정신병자 발생률이 늘었을 것이다. 이 저수조의 고민은 무공해 상태의 물을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일. 오염원은 인간이 아니라 날아 오는 새, 씨앗, 모래, 번식하는 플랑크톤 같은 것이다. 비닐로 水面을 덮어씌우는 방법도 한때 검토한 적이 있단다. 아즈다비야 저수조를 떠나 중장비 정비공장으로 향하는 국도 변에는 대낮인데도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었다. 자동점화 감지기에 먼지가 잔뜩 묻어 밤인 줄 알고 점등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식 공장운영
아즈다비아 정비공장은, 1945년 해방 때 한국에 있던 전체 차량과 맞먹는 6000 대의 東亞 소유 수송대의 규모에 걸맞게 약 4만枰의 부지와 35만종(種)의 부품을 가진 초대형이었다. 郭斗煥 공장장(56)은 30대 청년처럼 씩씩하게 생긴 관리자였다. 그는 『사막에서 차 굴리는 것은 모래·먼지와의 싸움이다』라고 했다. 부품의 손상도가 심해 연(延)30만㎞를 뛸 수 있는 차도 여기서는 반쯤만 달리면 폐차된다고 한다. 郭공장장은 리비아 근무가 6년째라고 한다. 郭씨는 정비공장에 있는 각종 부품을 훔치러 들어오는 도둑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식 발상을 했다. 정비공장을 둘러싸는 식으로 깊은 호를 팠다. 깊이 약 10m, 너비가 5∼6m나 될 것 같이 보였다. 들개들을 잡아와서 호속에 풀어 놓았다. 외부침입자가 호 근방에 나타나면 개들이 짖어대는 순간 비상이 걸리고 東亞의 기동 타격대가 나타나 사막의 대추격전을 벌인 끝에 도둑들을 붙들어 리비아 경찰에 인계한다.
호쾌한 인상 그대로 郭공장장의 언행(言行)은 거침이 없었다. 널찍한 땅에 큼직한 공장을 짓고 일선의 참호보다도 더 근사한 호를 푹푹 파놓고 박력 있게 100여 명의 정비사들을 지휘해가고 있는 郭공장장에겐 여기가 바로 그의 王國이다. 나의 부대, 나의 왕국을 가지고 내 소신대로 꿈을 펼칠 수 있다는 해방감이 가족을 떠난 외로움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리라. 아즈다비야의 東亞기지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남쪽으로 달렸다. 돌밭에 키가 작은 관목이 드문드문 보이다가 초목(草木)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자갈이 섞인 모래밭은 차츰 잔 모래로 바뀌어갔다. 한 시간쯤 뒤에는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모래의 대평원으로 나섰다. 사하라 사막은 대지(大地)라기 보다는 대양(大洋)의 느낌을 준다. 국민학교 사회과목 시간에 낙타는 「사막을 항해하는 배」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가끔 도로를 가로지르던 낙타도 보이지 않게 되더니 오로지 전선주만 우리와 동반해주었다. 1960년대에 상영된 바 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대작(大作)의 영화에서 주인공 로렌스(배우는 피터 오 툴)는 『사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사막은 깨끗하지요』(Desert is Clean)라고 짧게 끊어 말하는 장면이 있다. 과연 사막은 가을하늘처럼 깨끗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 달리고 있는 사리르(Sarir)는 평평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이 평평한 원반, 차중에선 베토벤의 전원교향악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가끔 東亞 소속 트럭이나 도로보수 차량이 마주치며 지나갔다. 잡화를 잔뜩 실은 수단人들의 트럭이 남쪽으로 달리기도 했다. 수단, 차드 등 이웃 나라에서는 리비아의 도시에 와서 물건을 사간다. 이들은 검문소에서 심한 수색을 받는다. 가득 실은 물건을 전부 내리게 해서 일일이 검사하는 데 며칠이 걸릴 때도 있다. 그래도 불평 한 마디 없이 車體 그늘에서 낮잠을 자가면서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한다.
잘루 병원의 북한 의사를 만나다
오후 4시20분쯤부터 오른쪽으로 유전지대의 가스 태우는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리비아 유전에서 나오는 기름은 대기오염의 주범(主犯)인 유황성분이 적어 유럽지역에서 인기가 있었다. 리비아産 원류는 1960年代에 지중해를 건너 西유럽에 집중 공급되었다. 1970년대에 가다피는 메이저의 석유가격 독점 결정체제에 도전, 산유국이 기름값을 결정하는 계기를 만든다. 그때 가다피가 지렛대로 활용한 것이 리비아産 원유에 대한 西유럽 국가들의 의존이었다. 잘루라고 불리는 오아시스 도시가 나타났다. 읍 정도의 취락인데 여기에 북한 의사·간호원들이 수십 명 근무하고 있다. 그들의 집단 숙소가 있는 아파트 입구엔 「모두가 영웅적으로 살며 투쟁하자」「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구호가 가로로 걸쳐져 있었다.
병원에 들어갔다. 복도 입구에서 깡마른 50代 정도의 북한 의사와 마주쳤다. 기자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우리 근로자들을 자상하게 치료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북한 의사는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뭐 그런 것 가지고 감사를 표하느냐』하는 표정을 지으며 『환자들이 많아서…』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가려고 했다. 억지로 붙들다시피 해놓고 복도에서 대화를 오래 끌어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의사가 방으로 들어가는데 방 안에 앉아있던 북한 간호원과 기자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하면서 인사하는 간호원은 의사와는 달리 다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절해고도(絶海孤島)와도 같은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만난 南과 北은 씁쓸하고 어정쩡하게 갈라졌다. 그러나 東亞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리비아內의 남북관계는 적대적이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는 南이 주로 받는 쪽이다. 이곳 자루 병원을 자주 이용하는 사리르 管 생산공장의 東亞사람들은 북한 의사나 간호원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몇 년 전 큰 교통사고가 났을 때는 그야말로 동족애를 발휘하여 東亞노동자들을 극진히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
東亞사람들이 고맙다고 과일이나 라면 같은 것들을 가져가면 北 의사들은 받자마자 쓰레기 통에 집어넣어 버린다고 한다. 북한 의사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보위부원의 눈초리를 의식해서이기 때문이겠지만 귀한 물건을 버리는 그들의 표정은 너무나 안쓰럽다는 것이다. 해방직후 우익(右翼)으로 활동한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의 지식인 사회에선 좌익(左翼)이데올로기가 유행이었고 매력적이었는데 왜 인기 없는 反共을 선택하게 되었느냐고.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인륜이 무너지더라. 사제지간, 형제지간, 부자지간의 천륜(天倫)까지 파괴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본질이란 것을 단번에 알았기 때문이다』
「증오의 과학(科學)」인 공산주의의 씨앗은 不毛의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서도 북한 주민(住民)들의 뇌리와 가슴에 뿌려져 공포·불신·경계의 나무로 자라고 있는 셈이다.
상념으로의 여행기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행자가 살아온 나라와 역사의 경험이 새로운 見聞과 부싯돌처럼 부딪쳐 상상의 불꽃이 튀는 것이 여행이다. 따라서 여행이란 것은 자신의 식견과 안목이란 안경을 통해서 바라보는 그림이자 자신과의 대화이다. 즉 자문자답(自問自答)의 과정이다. 여행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으므로 여행에 의해서 촉발된 상상의 전개와 自問自答의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여행기처럼 귀국한 뒤에 쓰여지는 글에선 동시적(同時的) 관찰만이 아닌 사전, 사후적인 감상이 들어가게 되므로 공간 속으로의 여행이 아닌 '想念 속으로의 非동시적 여행'이 되는 것이다.
기자는 리비아 여행에서 「왜 한국인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란 화두(話頭)를 지닌 채 돌아다녔다. 그 自問은 「한국안에서 한국인의 능력을 억누르고 나라를 후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집단은 위선적 명분론을 앞세워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고 획책하는 자칭 진보적 지식인 세력이다」라는 自答으로 돌아왔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느라고 군대에 안 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기자는 늘「그렇다면 군대에서 3년간 복무한 경력이나 중동에서 3년간 근무한 경력은 민주화 투쟁으로 3년간 옥살이한 경력보다 못한 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졌다.
사막에서, 정글에서, 동토(凍土)에서, 또는 공장에서, 연구실에서, 일선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함으로써 한국의 기적을 만든 생활인(生活人)들의 공(功)은 왜 거리에서, 감옥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 지식인들보다 낮게 평가돼야 하는가, 이게 불만이었다. 따라서 리비아에서 모범적으로 일하는 한국의 일꾼들을 볼 때마다 상상의 나래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로 날아갔다. 현장을 뛰는 生活人과 관념을 좇는 지식인의 대치된 모습이 리비아 여행 중 늘 나를 따라다녔고 주로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상상과 自問自答이 전개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편지
올해 초에 기자 앞으로 날아 온 한 독자의 편지를 소개한다 방글데시에서 사업하는 한 기업인이 보낸 것이다.
〈저는 趙 부장님과 비슷한 연배(年輩)로, 동시대에 대학에서 사회과학(社會科學)을 공부하고 지금은 경공업 제품을 외국에 수출하는 中小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비싼 임금을 피해 지금은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의 제삼국(第三國)에서 제품을 생산, 수출하고 있습니다. 오랫 동안 이러한 수출업에 종사해온 저로서는 비교적 많은 海外여행을 해 왔고 기회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현실경제의 측면에 입각해서, 우리나라 위상(位相)과 우리나라를 보는 外國의 시각(時角)을 항상 체감(體感)하면서 生活하고 있습니다.
月刊朝鮮 1993년 12월호 서진영씨의「『朴正熙와 金永三외 화해』에 이의 있다」를 읽고 불현듯 펜을 잡았습니다. 먼저 匿名(익명)으로 글을 쓰는 것과, 원고지에 글을 쓰지 못하는 점을 미리 사과 드립니다. 이곳 外國에는 원고지가 없습니다. 徐 교수는「…역사는 또한 개혁이 실패하는 主된 원인이 기득권세력과 이들의 이익을 비호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의 저항에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지도 않으면서 아는 체하려는 기회주의적인 천박한 지식인들」 또한 역사발전의 큰 장해 요인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이곳 후진국 방글라데시의 방직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섭씨 34도의 무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점검, 수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름도 없는 中小업체가 염색기계를 이 공장에 수출했고 작동(作動)에 문제가 있어서 기술자를 급파, 20여일간 머물면서 모든 것을 재(再)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현지인(現地人)들의 얘기로는 한국기계가 가격이 저렴하고 품질이 좋다고 했습니다. 기계값 한 대에 20여만 불, 복잡한 운송절차, 설치비용, 수리비용 등의 제반경비를 빼고 나면 과연 얼마의 마진이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 대공장(大工場)에서 유명(有名) 독일기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한국의 無名 中小업체의 기계, 그 우리나라의 상표가 얼마나 반갑고 자랑스러운지, 얄팍한 지식으로 겸손하지 못하게 입을 나불거리는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은 결코 모를 것입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기술 개발해서 어렵게 기계를 이런 곳에 팔고 있는, 이름도 없고 말도 없는 그런 업체들의 종사자들, 그들이 애국자입니다.
한국의 국회의원들 100 명이 이곳을 방문한들, 이 나라사람들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관심 없습니다. MADE IN KOREA를 붙인 한국의 기계 한 대, 이곳 시장(市場)에서 도요타(TOYOTA)의 물결 속에서 간혹 눈에 띄는 포니(PONY)나 스텔라(STELLAR) 한 대를 보고 코리아(KOREA)를 알아주지, 정치인들 교수들 수천 명이 이곳을 방문한다 한들, 관심 밖의 일입니다. 徐교수의 글은 사업하는 사람들, 일반상식인의 思考(사고)와 지식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글 같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제가 만약 趙부장님의 글에 반박문을 썼다면, 그런 수준의 글을 썼을 것입니다. 따라서 本人은 그 글에 조목조목 반론을 펴기보다는, 개괄적으로 우리나라의 당면 문제점이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될 것인지를 평범한 상식인의 입장에서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1. 한국경제발전의 原動力은 무엇이었나
첫째 朴正熙, 둘째 한국인의 근면성, 셋째 높은 교육수준, 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우위의 요소는 朴正熙의 지도력이었다고 봅니다. 저도 비록 朴正熙 군사정권의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만 朴正熙라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그가 명석함, 통찰력, 추진력, 꼼꼼함, 사람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움, 결단력으로 높은 교육수준의 한국 노동력을 조직화해서 이룩해낸 것이 한국의 경제발전인 것입니다. 1960년대초, 파키스탄의 개혁을 본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아유브칸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그 파키스탄의 노동자들이 지금은 한국에 불법입국(不法入國)하여 보다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한국 공장의 궂은 일들을 떠맡아 하고 있습니다. 1950年代 인도의 면방(綿紡)산업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었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인도를 배워야 한다고 떠들어댔었습니다. 그 인도가 지금은 자국(自國)의 수출공단(工團)에 한국 기업을 끌어들이고 앞다투어 한국업체들과 접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60年代까지만 해도 타이와 필리핀은 한국을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방콕은 한국人의 섹스 관광지의 하나요, 필리핀의 대졸(大卒) 여성들이 그 유창한 영어를 무기로 한국인 가정에 가정부로 취업하기 위해 문의를 하고 다닙니다.
朴正熙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한국사회는 난장판이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었고 자신감(自信感)도 없었고 자부심(自負心)도 없는 절망과 좌절의 사회였습니다. 정치 건달, 언론 사기꾼, 부패 군인들의 부패사회였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당시 사회의 암적(癌的) 존재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건달 政治人들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국회의원들의 60%는 건달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은 어땠습니까? 촌지(寸志)와 공갈로 살아가는 건달들이 기자들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들이 칼자루를 쥔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이곳 西南亞 국가들이 왜 지금까지 발전을 못하고 지지부진해 왔겠습니까? 자기희생 정신이 없고 진정한 애국심이 없는 고등정치(高等政治) 사기꾼들이 軍과 고급관료들을 부리면서 우매한 대중(大衆)을 우롱하는 위선적 民主主義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부정(不正)을 혁파하려는 능력 있고 배짱좋은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國民이 깨닫기 시작하고 國民이 보다 깨끗하고 능력 있는 정부를 희구해 가고 있기 때문에 이곳 政府들도 점차 면모를 달리해 가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에 점차 적극적이면서 깨끗한 정부 만들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수출, 경제 개발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우리들 생각으로는 이곳 더운 나라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것이 통념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섭게 일을 합니다. 오히려 한국인들보다 더 억척스럽게 일을 합니다. 돈의 위력과 돈의 매력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눈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 政治에는 도사들입니다. 이론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정당한 자가 노력의 대가로 잘 살려는 게 아니라 얼렁뚱땅 정치판에 뛰어들어 협잡으로 한몫 잡으려는 정치꾼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상기(上記) 한국경제발전의 原動力 세 가지 위에 물론 한 가지가 더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입니다. 대한민국이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體制)를 선택했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행운(幸運)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李承晩의 공헌은 지대(至大)합니다.
2. 후진국(後進國)의 개발독재는 꼭 매도만 되어야 하는가?
1960年代 末까지 北韓의 경제가 南韓을 훨씬 앞섰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아마 현재 金永三 대통령 핵심(核心)세력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재야출신(在野出身) 중에도 바로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당시 사회주의사상(社會主義思想)에 깊이 빠지고 신뢰했던 人士들도 있을 것입니다. 2000만 명 정도의 숙청 위에서 이루어졌던 스탈린의 개발독재는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무참한 인권 유린과 무자비한 숙청을 자행한 金日成의 개발독재 또한 그 실(實)을 따지기에 앞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60年代 한국의 개발독재는 똑같은 범주에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國民의 기본적(基本的) 자유(自由)의 일부가 유보되었다 하더라도, 중앙정보부의 人權 유린이 있었다 하더라도, 국민의 대다수가 숨도 못쉬고 살 정도의 숙청과 탄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面에선, 방종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自由의 일부를 제한했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토우(Rostow)교수의 말처럼,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서의 개발독재는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3. 우리나라의 문제점
6공(共)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에는 政治열풍이 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政治에 기웃거리려고 합니다. 각종 선거가 실시되기 시작했으니까 당연하겠습니다만, 生産에 투입되어야 할 人力이 政治로 몰리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모두가 자기 생업에 열중해야 합니다. 政治는 자기 희생이 각오된 엘리트들이 해야 됩니다. 남에게 봉사하려는, 자기재산을 팔아가면서라도 희생적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일부(一部) 엘리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生産에 투입(投入)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무슨 연구소(硏究所)다, 무슨 포럼이다 해서 우후죽순처럼 政治性 모임들이 생겨납니다. 한 자리 해보려는 사람들의 조직들이지요. 일않고 잘살아 보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 좋은 두뇌들이 건달化 되어서는 안되고 生産的으로 쓰여져야 됩니다.
무슨 民主化 연구소 등등 대신에 그 두뇌들이 모여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발품을 생산하는 기업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政治에 관심이 없어져야 합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사람들,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출열기가 다시 일어야 합니다. 경제를 일으켜야 됩니다. 「그까짓 경제」「그까짓 먹고사는 것쯤」이 아닙니다. 경제가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경제가 성공적이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은 무의미(無意味)해지는 것입니다〉
여자피부같이 예쁜 콘크리트 파이프
「시간은 생명이다. 1초를 아끼자」 오후 6시쯤 사리르 공장에 도착하니 정문에 붙은 구호가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든다. 사리르 공장은 65만坪의 부지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관(지름 4.58m, 길이 7.5m 무게 80t)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장이다. 2043명의 종사자중 관리직은 5%인 115명. 95%의 人力이 생산에 직접 투입되는 극히 효율적인 조직이다. 북한의 협동농장에선 절반 가량이 놀고 먹는 관리직이라고 한다. 농민들을 감독하는 관리자, 그 관리자를 감독하는 관리자, 다시 그 관리자를 감독하는 관리자…. 관리자가 많은 조직은 경직화, 관료화되고, 종국엔 건달化된다. 건달이란 놀면서도 큰소리 치는 이들을 말한다. 한국사회의 건달은 과연 정치꾼들뿐일까. 공부 안 하면서도 큰소리치는 교수들, 능력에 비해서 너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자들도 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건달群으로 분류될지 모른다.
領地를 가진 영주처럼 자신만만하면서도 소탈한 朴世弘(박세홍) 공장장(57)은 부장들을 배석시켜 놓고 현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엄청난 수압(水壓)에 견딜 수 있는 콘크리트 관을 만드는 데 왜 그토록 섬세한 신경을 써야 하는지 대충 알아 들었다. 한 기술자는 『잘 빠진 콘크리트 관을 만지면 여자 피부처럼 예쁘다』는 표현도 썼다. 콘크리트가 사랑스러워질 정도로 정열을 쏟고 있는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하루에 130본 가량의 목표량을 어떻게 달성하느냐에 집중돼 있었다. 시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동선(動線)의 단축, 인체 공학적인 작업설계, 품질관리의 철저, 252대의 중장비 점검·정비, 근로자들의 士氣유지를 위한 노래방(40개), 교회 운영 등등 각 분야의 정상적 작동이 오케스트라처럼 하나의 화음으로 울려나오도록 하는 것이 朴공장장의 지휘술인 성싶었다. 불량률 0.2%, 무사고 작업시간 320만(万)이란 수치가 朴공장장의 현재 성적이다.
이날 밤 방글라데시, 베트남, 조선족 노동자 대표들을 숙소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한국인 관리자들이 무서운 듯했다. 베트남 대표는 『한국인 상사들은 가끔 주먹이 먼저 나갈 때가 있다』고도 했다. 다음날 굉음 속의 공장을 한 시간쯤 살펴보면서 한국인 관리자가 말보다 먼저 주먹을 날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10층 높이의 로코모(Locomo)크레인은 자체중량이 배 만한 180t이다. 鐵路 위로 이동하는데 주로 80t이나 되는 관을 번쩍 들어 운반한다. 이 철로를 따라서 약 1㎞에 걸쳐 3층 높이의 일관작업 라인이 가설돼 있다. 먼 데서 바라보면 흡사 항공모함의 측면이다. 강철 거푸집에 모래, 시멘트, 물을 넣고 관을 만든 뒤 몰타르를 바르고 지름 0.6㎝의 강선을 팽팽하게 조여 감는다. 강선의 연장이 관(管) 하나당 12㎞, 이 무게만도 4t이다. 이 강선은 물론 관의 내압성(耐壓性)을 높이기 위함이다. 강선을 당겨 감을 때 저것이 만약 끊어진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니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일관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이며, 어떤 과정의 생략이나 나태도 허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80t짜리 파이프를 만드는 과정은 高所, 콘크리트, 쇳덩어리, 굉음과의 死鬪 속에서 이루어지니 엄격한 작업관리와 동작훈련이 없이는 人命사고가 다발(多發)할 소지가 많다.
우리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통솔을 하는지 제3국인들은 군인들보다 더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갖다 붙이고 있었다. 군대보다 더 군대같은 작업장 분위기였다. 기자는 1960년대 末에 공군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다. 그대 공군 부대에는 「완전무결」(Zero Defect)이란 품질관리 운동이 추진돼 꼭 기업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었다. 그 4반세기 뒤 기자는 기업內에서 군대를 느끼고 있다. 군사文化가 병영에서 사회로 확산된 그 현장에 서 있기 때문이리라.
「군사文化」란 동네북
최근 소위 「지존파」란 살인범들이 붙들린 이후, 언론을 통해서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이 여러 각도로 진행되었다. 빈부격차를 비롯한 사회문제에 책임을 돌리는 쪽과 그들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갈라졌다. 9월21일자 中央日報의 경우엔 1면 머리기사에서 「오랜 軍事문화에 윤리의식 실종 탓」이란 「전문가 의견」을 제목으로 뽑았다. 문제의 살인범들은 체포된 직후 기자들 앞에서 富者들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富者들만을 노리는 범죄를 계획했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실제로는 그들이 죽인 다섯 명 가운데는 「규탄 받아야 할 부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성실한 중소기업 사장 부부, 길을 가던 여성근로자, 배신했다는 동료를 죽인 것이 도대체 貧富격차나 부자들의 사치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언론은 마땅히 이들의 발언을 「흉악범죄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파출소의 순찰 능력 증강과 같은 구체적인 방범대책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여야 했었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는 흉악범이 나타나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는 식으로 참회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것이란 분위기가 있어 왔다. 모든 국민들이 성직자이기를 요구하는 이런 위선적 접근방법은 自慰행위는 될지언정 대책수립에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 더구나 군사문화를 이런 병적인 살인의 원인으로 삼아 매도하는 것은 부부생활이 잘 되지 않는 원인을 군사정권에 돌리는 것만큼이나 논리의 비약이다. 범인들이 군 특수부대에서 살인법을 배운 것도 아닌데…. 소위 문민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흘렀는데 왜 군사정권시절로 소급해서 군대를 끌어들이려는 것일까. 中央日報의 그 날짜 전문가 진단에 등장한 白尙昌씨(한국사회병리연구소장)는 「70년대와 80년대 이래 급진전된 민주화운동의 부작용과도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리만 주장하기」나 「자기 뜻대로 안되면 행동으로 밀어붙이기」 같은 행태가 이런 범죄행동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진단이었다. 이분의 주장대로라면 「오랜 민주화운동에 윤리의식 실종탓」이란 정반대의 제목뽑기가 가능해진다.
언론은 또 민주당 金玉川 의원의 자료공개를 바탕으로 하여 「一山 신도시 진지화(陣地化)개념으로 설계」라는 제하(題下)의 폭로성 기사를 1면 머리기사 수준으로 보도하면서 군사 문화적 발상을 비판하고 나왔다. 우선 「陣地化」란 용어는 엄청난 과장임이 드러났다. 휴전선을 20㎞ 앞에 둔 아파트群 도시에 방어개념을 도입하여 건물을 배치하고 시설을 했다는 정도로 이미 다른 도시나 건축에도 적용된 수준이었다. 문화일보 9월27일자 사설은 「주요 지점에 대공(對空) 화기진지를 구축하고… 심지어 지하 인도에 액체폭약주입용 관까지 매설토록 했다고 하니 그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라고 지적한 뒤「총알받이」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一山주민들에 대한「민심 달래기」를 촉구했다. 一山신도시 건설에 대해서 국방부는 북한의 기습남침을 저지할 수 있는 작전공간이 없어지고, 戰時에 一山주민들의 南下가 군의 기동을 방해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으나 주택문제 해결이란 文民的 요구에 눌려 버렸었다. 그 대신 一山신도시 건설에 통상적이고 최소한의 전략적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자유로를 달려본 사람들이면 알겠지만 휴전선에서 이 도로를 타면 10여분 만에 一山, 30분 만에 서울 도심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그 가공할 근접성을 감안할 때 一山신도시에 방어개념을 적용하지 않은 공무원이 있다면 직무유기와 利敵행위로 처벌해야 마땅하다. 軍이 너무나 당연한 일을 했는데도 정치인과 기자들로부터 매도되고 있는 이 나라는 과연 국가인가. 영세 중립국 스위스도 全국민의 70%가 들어갈 수 있는 방공호를 파는데, 一山과 서울이 북한 장거리 야포의 사정권 아래 인질처럼 잡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애써 눈감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위로부터의 반군(反軍)선동
군사문화(軍事文化)에 대해서,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일선 기자까지 「비판이 의무」라는 분위기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지도 오래 된다. 위도 해난사고 때 한 장관은 『군사문화의 획일적 행정이 뒤늦게 이런 사고로 나타난 것이다』는 취지의 변명을 했다. 金永三 당시 대통령은 비슷한 논법(論法)에 따라 『지난 5천년간의 적폐가 최근 잇단 사고·사건의 원인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지금의 사건책임을 군사문화나 과거로 전가해 버리는 것이 소위 文民정부의 변명공식처럼 돼 버린 지도 오래 된다. 문제는 이런 일방적 軍事文化 매도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군복무를 기피했거나 모종의 이유를 내세워 단축근무를 함으로써, 또는 사회주의에 심취해서 군복무를 거부, 군대문화의 단점과 아울러 그 장점을 체험할 수 없었던 이들이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같은 군사 대치상황에서는 「군복무를 안한 공직자에 의한 군대매도」처럼 사회정의에 反하는 행위도 드물 것이다.
하나회 같은 군사정치문화만큼 나쁜 것이 그러한 위선적 문민정치文化이다. 군사문화 전체가 아닌 군사정치문화를 비판대상으로 삼아야지 국가의 존립을 보장하고 있는 물리력의 원천으로서의 軍전체를 경멸과 매도의 대상으로 삼는 작금의 분위기는 軍紀문란을 불러와 戰力약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장교탈영 사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장교가 사병에게 얻어맞고 그 장교의 상관은 사건이 확대되면 一身上에 불리할 것이라고 판다, 사병들을 구속하지 않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장교는 탈영으로써 사회에 고발하고….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해결책이 나올 수 있는 성격이다. 군대를 동네북 취급하여 文民사회가 마구 치다가는 언젠가는 북이 찢어질 것이다.
남북한 군사대치 상황에서 북이 찢어진다는 의미는 한국인이 지난 50년간에 이룩한 찬란한 富의 축적을 北에 상납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지켜 주고 있는 군대를 경멸하려는 의도는 국가의 발전을 좀먹는 AIDS균이다. 이 균이 한 국가의 사령탑과 뇌수를 침범할 때는 아무리 건강한 신체라도 쓰러지게 돼있다.
군사文化의 기업 진입(進入)
국내의 反軍풍조와는 달리 기자가 사하라 사막 한복판 사리르 공장에서 확인한 것은 군사文化의 효율성이었다. 외국 노동자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고 있는 한국인 관리자들의 그런 리더십은 군대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ROTC 장교 출신을 신입사원 채용때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도 장교로서의 통솔력을 흡수하기 위함이다. 공군은 대한항공에 대해 조종사들의 공급처 역할을 했다. 기자는 1960年代에 공군 레이더 부대에서 근무했는데 레이더 정비병들 중 상당수는 제대한 뒤 전자·통신기업체로 들어가 군대기술을 사회로 확산시켰다. 군사文化의 장점인 효율성, 뚜렷한 목표의식과 전략개념, 책임감, 추진력은 皆兵制(개병제=全국민이 병역의무를 갖는 제도)에 의해 全국민, 全사회, 全기업으로 확산되었다.
기업중에서도 특히 土木건설·제조업이 군사文化를 적용하기에 적합한 생리를 갖고 있었다.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군대식 돌격정신이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오기와 맞물려 「해내는 정신」으로 승화된 그 현장에서 한강의 기적과 그것을 물질적 바탕으로 삼은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람이 그리운 사막의 외딴 섬
사리르 공장에서 하룻밤을 잔 뒤 기자 일행 4명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大水路공사의 水源인 지하수개발현장을 둘러본 뒤 지프로 바꿔 타고 사막 한복판을 향해 서쪽으로 달렸다. 「군포」라고 불리는 공업용수 基地가 목표지였다. 「군포」에서 북쪽으로 약 300㎞ 떨어진 곳, 지중해 연안 브레가에는 제2의 관생산 공장이 있다. 이 공장이 필요로 하는 공업용수를 군포에서 지하수 개발을 통해 확보한 뒤 대구-서울 거리의 송수 파이프를 통해 북송(北送)하는 것이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공업용수 파이프가 아닐까? 군포기지까지의 사막길은 일부러 닦은 게 아니라 많은 차량들이 모래밭 위를 오고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길이었다. 너비는 10차선을 넘을 것 같았다. 길 양쪽에 드문드문 廢타이어를 이정표처럼 세워 두었다. 이 길을 자주 달리는 지프 운전사는 조선족이었다. 그는 신기루를 가끔 볼 때도 있다고 했다. 군포용수기지에 심은 나무는 약 30㎞ 거리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 평평하니까 3∼4m의 언덕도 멀리서는 야산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사막 속의 고도(孤島)같은 用水기지에는 14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7명은 한국인, 두 사람은 타이人, 5명은 조선족. 주방장이 한국인이라 타이 노동자도 할 수 없이 한국음식으로 견딘다고 한다. 그래도 아무 불평없이 성실하게 일하는 타이人을 보면서 「조선족들도 저들을 닮아주었으면…」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조선족은 시키는 일만 하고, 타이人은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것이 큰 차이다. 이 군포 용수기지에선 열흘에 한번씩 브레가 공장에, 5일에 한번씩 잘루市에, 3일에 한번씩 사리르 공장으로 차를 보내 식량·부식 따위를 가져 온다. 분소장 韓寬燮(한관섭)씨(45)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7년간 근무한 뒤 이 고도(孤島)에선 1년2개월째 일하고 있다. 휴가를 마치고 기자가 타고온 대한항공 특별기에 동승하여 귀사한 韓분소장의 다음 휴가는 6개월 뒤가 된다.
韓분소장은 『비디오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고 했다. 기자가 가져간 잡지 최신호를 내놓으니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韓분소장의 친구는 근처에 있는 석유 채굴기지의 리비아 및 서양 기술자들이라고 한다. 고독을 공유하고 있는 그들은 서로 장비를 빌려주기도 하는 등 친숙하게 지낸다. 사람이 그리운 사하라 사막인 것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올 때도 있는데 웨건을 타고 다니는 강도단이다.
韓분소장은 최근 人工호수를 기지 안에 파놓았다. 70m×30m 규모의 연못을 파고 둘레에 나무를 심었다. 깊이 2m 가량의 연못은 수영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깡패」라고 별명을 붙인 물고기를 풀어 놓고 낚시도 하는데 잡히면 곧 풀어준다고 한다. 韓분소장의 안내로 사구(砂丘)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 석유 생산기지에 들렀더니 터키系 리비아人 두 사람이 외롭게 근무하고 있었다. 韓분소장과 친면이 있는 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이끌고 産油시설 여기저기를 보여주면서 신나게 설명해 주었다. 사람을 만난 것이 그렇게 즐거운 듯했다. 역시 사람이 드문 곳에서라야 사람의 값이 제대로 매겨지는 모양이다.
건설의 시대
韓분소장 일행과 작별한 뒤 브레가 관공장을 향해 사막길을 北上하면서 기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韓寬燮씨를 비롯한 군포 용수기지 사람들을 감옥에 버려 두고 문명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기자는 13년 전에 쿠웨이트에서 한국 유조선을 타고 한 달 만에 울산항에 도착한 일이 있었다.
그때 배 안에서 만났던 선원들의 순진무구한 얼굴들이 韓분소장의 넓은 얼굴과 겹쳐져 떠올랐다. 바다에서,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보면 한국의 뭍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어느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이 돼버린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 육상에서 정착하려다가 사기꾼들에게 걸려 재산을 날리는 일도 많다. 가족을 떠나 바다와 해외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육지사람들이 느끼게 되고, 권력을 쥔 내륙적(內陸的) 사고방식의 엘리트들이 「육지에서 바다로」가 아니라 「바다에서 육지를」바라볼 수 있을 때 한국인의 해양정신은 우리의 전통 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브레가로 북상하는 차중에서 기자는 金洙吉이사로부터 잘 만든 도로와 잘못 만든 도로를 구별하는 요령에 대하여 현장교육을 받았다.
기자는 金이사에게 왜 한국인이 土木과 건설 부문에서 세계최고가 되었는지를 물어보았다. 한국역사상 유명한 건축물치고 스케일로서 이름이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섬세함이나 예술 혼으로 해서 유명하지 규모의 방대함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그런 문화재는 全無한 상태이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건설업계는 지구의 얼굴을 바꿔 놓을 만한 대역사(大役事)를 세계도처에서 거뜬히 해내고 있다. 5·16 이후 30여년간은 건설의 역사였다. 세계가 한국건설의 무대로 변했다. 건설과는 상관없는 정체된 문화 속에서 시들던 한국인들의 에너지가 이처럼 대폭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건설 에너지가 통일 이후 북한 땅으로 투입될 때 황폐화된 산하(山河)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란 느낌이 들기도 했다.
金洙吉이사는 기자가 귀국한 뒤 편지를 보내 차중(車中)의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趙부장님과 헤어지고 나서도 해외공사에 대한 우리의 장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고자 계속 생각해 왔던 것을 우선 적어 보고자 합니다
① 한국건설회사는 전통적으로 상명하종(上命下從)의 피라미드 조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② 종업원들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조직의 이익에 우선을 두는 희생정신이 강합니다.
③ 간부들의 해내고야 말겠다는 정신력과 강한 책임감이 있습니다.
④ 개개인의 능력이 우수하고 근면합니다.
⑤ 계약서상의 문구에 구애받지 않고 현지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면서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는 점, 즉 예부터 官을 거스르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습관이 긍정적 작용을 합니다. 한국회사들은 크게 이익을 볼 수도 있었던 사항을 발주처의 잘못으로 이익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큰 손해만 보지 않았다면 웬만해서는 클레임을 걸지 않습니다. 이런 점이 현지 정부에서 한국회사를 선호하도록 만들었으며 계속적으로 공사를 수주(受注)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해외건설 초기에는 한국 건설 기능공들의 근면성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이제는 제3국 노동자들의 근면성을 동원하고 우리의 노하우를 이용하여 성공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완장체질, 책임감, 주인의식
金이사가 제시한 성공요인 가운데서도 「간부의 책임감」에 대해서 기자는 생각한 바가 있다. 한국인들만큼 완장을 찼을 때와 벗었을 때의 자세가 달라지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 것이다. 완장을 찼을 때, 즉 책임지는 직위를 부여받았을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강한 책임의식을 느끼면서 평사원 때와는 딴판으로 열심히 일한다. 책임감이 主人의식으로 변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한국인 특유의 오기, 즉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강한 자부심이 자신의 책임영역이 확실해짐에 따라 「이것은 내 것이니 내가 책임진다」는 주인의식·책임의식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해외공사장은 시어머니가 많은 국내보다는 간부들이 각자의 王國을 가질 만한 공간과 재량권을 제공한다. 「한국인에게는 날일을 시키면 장승될까 두렵고 도급일을 시키면 죽을까 겁난다」는 말이 있다. 책임의 영역을 분명히 하고는 자질구레한 간섭을 생략하고 결과주의로써 성적을 매기는 경영방식이 한국인들에겐 어울린다는 얘기다.
관리가 허술한 것 같은 現代그룹의 회사들이 무서운 저력을 발휘하는 비결도 한국인의 완장체질, 무대체질을 잘 살리는 관리방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통계에 따르면 취업자의 약70%는 월급으로 생활하는 피고용인이고 30%는 중소기업·상점·어장·농민 등을 자영(自營)하는 「사장들」이라고 한다. 이 자영업자들의 비중이 높은 게 우리 민족의 특징인데, 이것도 나만의 王國을 갖고 싶어하는 민족성의 반영이리라. 東亞의 경우도 1986부터 리비아 공사현장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기 시작하여 한인 노동자들을 제3국의 노동력으로 거의 전부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간부들의 이반(離反)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全근로자의 간부화가 이뤄질 수 있다면 한국은 펄펄 나는 나라가 될 것이다. 「全국민의 간부화」란 결국 「내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주인의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필리핀의 기능 人力은 왜 해외로 빠져나오나
사막 속의 고도(孤島) 군포 용수기지를 출발한 지 네 시간쯤 지나자 석양을 비스듬히 받는 모래밭의 자갈이 굵어지면서 키작은 관목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비가 내리는 지중해 연안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뜻했다. 초저녁에 브레가 관 생산 공장에 도착했다. 사리르 공장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이다. 1600여 명이 일하는데 하루에 평균 56개의 대형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무가 많아 사리르 공장처럼 삭막한 느낌은 주지 않았다. 李勝雄 공장장(51)도 이라크를 비롯한 中東건설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그는 『군포에서 보내주는 하루 1만2000t의 용수중 반(半)은 공장에서 반은 모래 및 자갈 채취장에서 쓴다』면서 『내일 토취장(土取場)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관리직이 아닌 한국인 노동자도 있는데 그들은 거의가 고도의 기능이 필요한 부분에만 취업하고 있다. 150t짜리 로코모 크레인 운전사의 반은 한국인이다. 한국인 노동자는 月220萬원쯤 받고 있는 데 반해 필리핀人들은 그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月66萬원 수준이었다. 똑같은 기능을 갖고도 차별대우를 받는 것은 바로 국력의 차이 때문이다.
리비아의 大水路공사장 人力구조를 보면 한국인 다음의 高기능 人力은 필리핀人들이다. 세계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필리핀 기능인력이 넓게 퍼져있다. 이것은 필리핀 국내에 그런 고급 人力을 받아들일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人力을 조직화하면서 해외로 진출할 자본(회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리비아內 東亞의 공사현장을 갈 때마다 기자는 月刊朝鮮5월호에 실린 박종한(朴鍾漢)회장 소개 기자를 화제로 삼은 간부들을 많이 만났다. 서울 광화문에 한국 최강(最强)의 빌딩으로 불리는 세안(世安)빌딩을 짓고 있는 재일교포 건설업체 사주(社主)인 朴회장의 한국 건설풍토 비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능력이 있으면서도 시키는대로 하지 않아 부실건물을 짓는다』 는 지적이나 계단 하나도 제대로 만드는 데가 드물고 엘리베이터를 타보면 그 건물의 不實여부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고 있었다. 기자는 몇 달 前 서울 남산타워에 車편으로 올라갔다가 케이블카 선(線)과 거의 나란히 회현동 쪽으로 걸어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시멘트 계단의 높낮이와 폭이 제멋대로 돼 있어서 관절염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시멘트 반죽을 들이부은 다음 적당히 계단을 깎아내어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날 정도였다.
브레가 공장의 입지(立地)조건을 천혜(天惠)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가까운 곳에 자갈·모래 채취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관을 만드는 데 있어서 2大 원료물질인 자갈·모래를 바로 옆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의 경이를 토목기술자들은 한국의 악조건과 비교해가며 실감있게 설명했다. 그 현장에 가보았다. 한 도시의 넓이 만한 수십㎢의 땅에서 구들장 같은 돌들을 캐내고 있었다. 이것을 파쇄장치에 걸어 자갈로 부수어내는 시설은 巨大 공장 규모였다. 돌조각들이 0.5㎞ 길이의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오가면서 때로는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우당탕탕하는 굉음과 흙먼지가 났다. 골재장의 羅日永소장(46)은 『한달에 7만t의 돌을 캐내서 처리한다』면서 『두 골재 채취장의 매장량이 약 500만t, 모래장의 매장량은 470만t이나 된다』고 자랑했다.
씩씩한 사나이의 씩씩한 이야기
우리는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서남서쪽으로 약 7백km 떨어져 있는 아슈샤리프 관매설 본부로 가기 위해서였다. 부산에서 평양까지에 해당하는 이 길의 3분의 2쯤은 東亞가 관 수송을 위해 닦은 길이다. 東亞는 대형관 수송을 위한 목적으로 약 3500㎞ 길이의 도로를 새로 닦았다. 너비 7∼11m의 이 도로는 포장은 안 돼 있지만 무거운 관운반 차량이 오가면서 다져놓아 고속도로처럼 탄탄했다. 차량용 급수정류장에선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나고 있었다. 낙타 떼들도 물을 마시러 몰려와 있었다. 낙타는 주인이 이사를 간 집까지 찾아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귀소본능이 강하다고 한다. 우리는 군데군데서 東亞 콘소시엄에 참여한 대한통운의 도로유지보수팀을 만날 수 있었다. 약 300명의 인원이 200 대의 차량을 상시 가동하면서 관운송 도로를 24시간 작업 체제로 보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쪽 사하라 사막의 분위기는 사리르 지역과는 달랐다. 붉은 색이 도는 땅색깔로 미루어 점토질이 많은 듯했다. 붉은 야산이 풀 한 포기 없는 나체를 그대로 드러내어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오후 4시를 지나 「장성」으로 불리는 관운송 G캠프에 도착,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梁貞錫 소장(53)은 『지금 이 시간에도 240대의 관운송 트레일러가 달리고 있다』고 했다. 반은 빈차, 반은 관을 싣고 달리는 차라고 했다. 80t의 관을 운반하는 대형 트레일러의 대당 가격은 2억4000만 원. 『1970년대 초에 나주 비료공장에서 사고가 나 공장가동이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대한통운 트럭으로 70t짜리 보일러를 싣고 고개를 넘어 나주로 들어갔습니다. 경찰차가 선도를 해주고 주민들이 환영을 해줄 정도로 위험한 운반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정도는 장난감처럼 움직이고 있지요』
관수송에 투입되는 운전기사는 431명 정비사는 88명. 80%가 태국인이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태국인에 대한 칭송을 또 들어야 했다. 『착하고, 불평없고, 더위를 잘 견디며, 서로 싸우지 않고…』
梁貞錫 소장의 사무실에 마침 이웃에 있는 도로유지보수출장소 부소장 李康穆씨(40)가 와 있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張飛처럼 용맹스럽게 생긴 거구의 호남아였다. 그는 하루에 400㎞씩 관운송로를 주파하면서 도로 보수를 지휘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부다비에서 6년간 일하다가 귀국해서 15坪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학비를 벌기 위해서 한번 더 나가자』고 결심하여 5년 전에 리비아로 진출한 이래 연속해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 좁은 한국에서 노는 것보다는 이런 데서 마음껏 일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권한도 많고 여기에 오면 집안일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일에만 열중할 수 있어서 남자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국에 돌아가 봐야 사무실 한 구석에 앉아서 따분하게 서류작업만 할 것인데 이 드넓은 大地를 바람처럼 휘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부리는 쾌감이 좀 좋으냐는 식의 말투였다. 李 부소장은 『김포(金浦)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할 때「이 나이에 뭣 하러 또 나가십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신경질이 난다 』면서 『해외근무자에겐 아파트 청약시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신입사원들은 무조건 해외로 보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李부소장은 세금을 제하고 340만원의 월급을 받는데, 이것이 고스란히 아내 손에 넘어간다는 점이 「남는 것」이라고 했다. 梁소장과 李부소장은 「돌아 다니는 것」이 일이라서 그런지 사하라 사막의 동물 생태계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경험담을 신나게 들려주었다. 낙타는 의리가 강하다는 것이다. 시력이 나쁜 낙타는 도로를 가로지르다가 자주 차에 치여 죽는다. 죽은 낙타 옆으로 친구인지 가족인지 모르지만 서너 마리의 낙타들이 며칠간이나 계속 웅크리고 앉아 문상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고 했다. 李부소장은 들개들을 붙잡아 키우는데 태국인들이 보신탕용으로 좋아한다고도 했다.
아! 대한민국
G캠프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계는 5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막의 석양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미국 아리조나주의 모뉴먼트 밸리와 흡사한, 황량한 풍경이 오른 쪽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석양을 받아 검붉게 물든 산맥들을 향해 가는데 東亞의 관 운송대와 만났다. 관을 부리고 돌아오는 60대의 거대한 트레일러 軍團이었다. 맨앞에 선도차, 그 뒤로 車間 거리를 약 300m로 유지하면서 약 20㎞에 걸친 거함들의 행렬…. 일대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트레일러의 운전석에는 흰 두건으로 머리를 온통 감고 선 글라스를 낀 유령같은 모습의 운전사가 앉아 있었다.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굉음을 남기고 스쳐 지나갈 때는 우리가 탄 비크 승용차가 지축과 함께 흔들렸다. 기자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조국 근대화를 시작한 지 30여년, 中東건설시장에 진출한 지 20년, 이제 우리도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벅찬 감동이 전율이 되어 온몸을 감전시켰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으면 될 것 아니가!』라고 내뱉던 故朴正熙 대통령, 鄭周永, 李秉喆, 중동출의 개척자 崔鍾煥(三煥기업회장), 東亞그룹 崔元碩 회장… 후세에선 이 시대를 開發年代란 무미건조한 명칭으로서가 아니라 龍飛 시대, 巨人들의 시대, 영웅시대로 부르리라.
감동에 젖어 있는 기자에게 金洙吉이사는 『우리 회사가 사우디에서 콰디마 항만 공사를 따고 이어서 TEP공사(전국 종합 통신시설 공사)를 수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大水路공사로 연결되었으니 참으로 행운이지요』라고 한참 설명하는데 기자의 상상력은 만주로, 시베리아로 달리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야성은 한반도만으로선 차지 않아. 한국을 하나의 베드타운(Bed Town), 즉 숙소 정도로만 생각하고 생활 공간을 세계로 잡고 큰 무대에서 놀도록 해야지…. 이런 박력으로 밀어붙인다면 통일의 후유증쯤은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질풍처럼 달리는 관운송대가 북한을 향해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것이었다. 항공모함 같은 트레일러가 끝도 없이 스쳐지나가는데 차안에선 패티김의 청아한 목소리가 「눈이 내리는데…」를 부르더니 이어서 「마이웨이」를 열창하고 있었다. 석양이 빚어내는 자연의 교향곡, 관 운송대가 빚어내는 인공의 교향곡을 타고 「마이웨이」는 사하라의 깊은 곳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기자는 갑자기 「아! 대한민국」을 부르고 싶어졌다. 서울 광화문의 창백한 사무실 근무자들, 그리고 증오와 독선으로 비틀린 위선적 지식인들에게 이 장관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