商人이 움직인 해양국가 천년의 영광, 천년의 정치안정
자연과 인간의지의 鮮烈한 대결
기자는 리비아에서 동아건설의 大水路 공사장 취재를 끝낸 뒤 陸路로 투니시아까지 나와 거기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갔다가 한 나절만에 다시 베니스에 도착했다. 알프스 산맥 위를 두 번 지나가는 행운을 맛보았다. 쾌청한 날씨여서 눈덮인 頂上과 신록의 계곡, 그리고 짙푸른 호수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독일 상공에 들어오면 아래에 펼쳐지는 마을·도로·농경지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진다. 충실한 나라, 國富가 축적된 사회, 체격 좋은 행인들의 걸음걸이도 뚜벅뚜벅 힘차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야성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많이 순화되었지만 게르만 민족의 그 무서운 에너지는 로마문명과 중세의 질곡을 파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충격파의 원천이었다.
중국 문명에 대해서 북방 유목민족이 담당했던 공격적, 파괴적, 또는 창조적 역할을 게르만족이 로마 문명권에 대해서 해냈던 것이다. 알프스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프랑스 남부, 스위스, 오스트리아 동부, 독일 남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이야말로 예술과 자연과 질서와 富가 한 자리에 집합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곳이 아닐까 하는 감상을 가져보았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베니스行 알리탈리아 항공사의 여객기에 올랐다. 갑자기 훤해지는 느낌이었다. 스투어디스와 승객들의 용모와 옷차림이 벌써 달랐다. 리비아에서 많이 본 로마유적의 인물 조각상이 실물로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베니스 상공에 도달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베니스는 숨을 잠시 멎게 만들었다.
바다 위에 갑자기 나타난 밀집 건물군. 황토빛깔 지붕이 평원처럼 깔려 있다. 그 사이로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운하의 네트워크. 베니스엔 산이 없다. 땅도 거의 보이지 않고 지붕과 건물만 수면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人工과 자연이 직접 대결하고 있는 장면은 鮮烈했다. 자연에 도전한 인간의지의 궁극적인 모습, 그것이 바로 베니스의 본질이었다.
베니스를 처음 찾은 관광객이 언제나 그러하듯 기자도 그날 밤 모터 보트를 타고 대운하를 지나 산 마르코(San Marco) 광장을 찾아갔다. 세계 3大광장의 하나라 하기도 하고 가장 인간적 광장이라고도 한다. 반드시 연인끼리 와야 한다는 평도 듣고 있는 산 마르코 광장의 밤은 좋았다. 광장 양쪽에선 팝 오케스트라가 서로 경쟁적으로 귀에 익은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남자 주인공을 빼닮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날 밤의 스타였다. 관중들의 박수로 고무된 그의 흥겨운 연주와 제스처는 기자의 발걸음을 밤 12시가 지나도록 묶어놓았다.
다음날 오전에 다시 찾아간 산 마르코 광장은 지난밤의 여성적 무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해군력, 통상, 규율, 결전, 제도, 신앙, 도전과 응전 같은 남성적 이미지였다. 이것이 베니스 역사의 진면목이다. 베니스만한 감동적인 역사는 달리 없을 것이다.
1100년간의 공화국
베니스는 서기 697년 초대(初代) 국가원수(Doge라 부른다)가 선출된 이후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하여 망할 때까지 정확하게 1100년간 지속한 공화국이었다. 11세기 동안 한번도 국체(國體)가 바뀌지 않았다. 국체를 바꾸려는 쿠데타 모의는 두 번 있었을 뿐, 그것도 신속히 진압되었다. 최장기의 공화국, 최장기의 정치안정을 가능하게 한 베니스의 권력구조는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큐를 감동시켜 두 위대한 정치사상가의 저작에 베니스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3권분립의 원칙을 이론화한 몽테스큐의 「법의 정신」은 베니스를 연구한 결과이기도 했다. 법의 공정성과 국민의 애국심으로 해서 베니스는 「중세의 로마」로 불리기도 했다.
베니스는 1100년 동안 한번도 외국 군대에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갖고 있다. 1797년 5월16일 프랑스군이 진주하기 직전에 베니스 국회는 공화정을 민주제로 변경한다는 결정을 통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亡國조차도 명예롭게 처리했다. 베니스는 인구와 면적당 국력이 가장 강했던 나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15세기 전성기에 베니스市의 인구는 19만명, 이탈리아 본토에 확보한 속령까지 합쳐도 인구 100만명을 넘어서 본 적이 없는 나라였지만 막강한 해운·해군력으로 동방으로의 통상루트와 東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 오스만 터키 같은 세계적인 대제국과 자웅을 겨루기도 하였다.
베니스의 1100년史는 통상권을 지키기 위한 교활한 외교와 처절한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런 전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베니스 상인의 무역에 의하여 축적된 國富와 정치안정에 바탕을 둔 유사시의 국가 동원력이었다. 베니스는 상무(尙武)라기보다는 상무(商武)국가였다. 정치를 독점했던 귀족은 놀고 먹으며 권력을 남용하는 양반이 아니라 대상인들이었다. 상인계급에 의한 통치가 군인이나 文官에 의한 통치와 어떻게 다른지 독자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국가로서는 이미 죽어버린 베니스국의 유골들을 보고도 기자는 감동했다. 괴테도 베니스가 이미 쇠망의 나락에 떨어져 임종을 10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이 도시국가를 방문한 뒤 이런 감상을 남겼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고귀함으로 가득차 있다.(베니스는) 한곳으로 집중된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위대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작품이다. 이 멋진 기념비는 어느 한 君主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민족의 기념비이다〉
성당이 주체성의 구심점
인류 역사의 MVP임에 틀림없는 베니스 역사의 가장 유명한 기념비는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두 건물―산 마르코 대성당과 파라초 두칼레(국가원수의 궁전 겸 정부종합청사)이다. 이 건물 구경은 그대로 베니스 역사로의 탐험이 된다. 산 마르코 성당은 베니스 공화국의 정신세계, 두칼레 궁전은 권력의 세계를 보여준다. 붙어 있는 이 두 건물은 그 크기나 예술성에 있어서 세계적인 건물이다.
산 마르코 성당의 산 마르코는 성(聖) 마르코, 즉 신약의 마가복음을 쓴 마가를 가리킨다. 마가는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Peter의 한국식 발음)가 아끼던 제자였다. 그는 서기 6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했다. 서기 828년 베니스의 두 상인은 알렉산드리아의 한 성당에 보존돼 있던 聖 마르코의 시신을 매수하여 베니스로 갖고 왔다. 그 시신을 모시는 성당으로 지은 것이 이 건물이니(그 뒤 많이 증·개축되긴 했지만) 1100살을 먹은 셈이다.
이 건물은 비잔틴 및 오리엔트식이 많이 가미된 건물로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과 대조적이나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기념비적인 문화재이다. 네 개의 돔을 가져 회교사원을 연상시키는 이 건물의 용적은 옛 중앙청의 두 배쯤 되리라. 그 옆에 있는 두칼레 궁전은 옛 중앙청의 다섯 배쯤 되는 大건축물로서 그 자체가 독립된 성채란 느낌을 준다. 원래 베니스의 수호 聖人은 그리스 출신의 聖者 데오도르였다. 데오도르는, 그러나 성자의 서열중에서 3류쯤 되는 이였다.
로마의 수호성인은 베드로. 자부심이 대단한 베니스 사람들은 일류성인인 성 마르코의 시체를 가져오자 데오도르를 차석으로 밀어 내고 마르코를 수호聖人으로 삼았다. 『적어도 로마 다음은 가야지』하는 오기의 발로였다. 성 마르코의 시체 반입과 성당 건축은 베니스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베니스인들은 서기 810년 프랑크國 샬레마뉴 大帝의 아들 페핀의 침공에 의하여 수도인 말라모코가 점령당하자 방어하기가 좋은 바다 속의 사구(砂丘)인 지금의 베니스(당시엔 리보알토섬)로 옮겨가 도시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국가건설의 정신적 지주로서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삼고 한 국가의 정신적 주춧돌로서 그 성당을 지은 것이다.
비참의 극한에서 대오각성
베니스는 원래 패배자들의 피난지에서 출발한 비참한 도시국가였다. 서기 453년 훈족(族)의 아틸라가 이끄는 대군이 北이탈리아를 침략하자 목숨을 건지려고 바닷가의 뻘밭으로 달아났던 이들이 베니스인의 선조였다. 이들은 일단 내륙으로 복귀했다가 서기 568년 게르만族의 일파인 롬바르드族이 다시 침략하자 또다시 보 따리를 싸고 뻘밭으로 피난하여 거기에 水上 도시를 세운 것이다.
비참의 극한까지 가 보았던 베니스 사람들은 대오각성하여 다시는 그런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작심하면서 바다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었다. 베니스 사람들은 흔히 가장 非이탈리아적이라고 불린다. 과묵 검소 질박하고 실용적인 베니스 사람들은 오히려 영국이나 독일 민족을 닮은 것처럼 변신한 것이다. 그런 변신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곳까지 내려가 온갖 수모를 겪은 뒤의 깨달음이며, 바닥에서 솟구치는 생존의 투지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베니스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도 경험하지 않았던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기자의 소년기 1950年代의 풍경들이 있다. 찬물 마셔 허기진 배를 채우던 시절에 집집마다 아령과 역기, 곤봉이고 마을마다 평행봉, 거리마다 당수·유도·합기도·검도 도장들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한겨울에 냉수마찰로써 의지를 시험해보는 경쟁심리도 대단했다. 포연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겨루기의 투지가 솟아나고 있었을까.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어야 할 상황에서 그때 사회 분위기는 왜 활기(活氣)에 차 있었고 사람들은 잡초처럼 일어서고 있었을까.
1950年代에 한국인은 절망을 보았던 것이다. 生과 死의 경계선에 서 보았던 것이다. 벼랑 끝에 몰려보았던 것이다. 수많은 생명이, 그것도 혈육이 바로 눈 앞에서 죽어가던 그 엄숙한 장면들을 목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운 좋은 생존자들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원초적 희열, 그리고 희망뿐이었다. 더 낮아질 데도,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위안과 나상(裸像)으로 남은 자신에 대한 정직한 시선이었다. 우리는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空論과 위선과 환상 같은 것은 집어던지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한국인 모두가 리얼리스트가 된 것이다.
레판토 해전(海戰)의 승자로
마르코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수장품은 전차(戰車)를 끄는 네 마리의 말을 형상화한 청동상이다. 모조품은 성당 정문 위 테라스에, 진품은 성당內의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 이 청동말像은 서기 1204년 베니스와 프랑스 연합군으로 구성된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帝國)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시켰을 때 베니스軍이 약탈해 온 것이다. 이 청동말은 원래 로마 네로 황제의 개선문에 설치돼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의 경기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일부에선 그리스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이 청동상이 증언하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약탈은 십자군 전쟁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전해진다. 프랑스가 약 1만명의 기사단, 베니스가 약 200척의 군함과 1만명의 병력을 내어서 만든 제4차 십자군은 처음부터 장사속에서 출발했다. 베니스는 점령하는 땅의 반을 식민지로 확보한다는 계약을 맺은 뒤 거국적인 투자를 했던 것이다.
이들은 비잔틴 제국 내의 권력투쟁에 편승, 당초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당시 세계 최강국의 하나였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서기 1204년에 함락시킨 다음 불을 지르고 갖은 약탈을 4일간이나 했다. 이 약탈로 비잔틴 제국의 예술품과 문서가 많이 불타 없어져 인류사적인 일대 손실을 기록하게 되었다. 비잔틴의 예술품은 지금도 베니스에 가서 보는 것이 더 좋다는 평까지 듣고 있다. 이 4차 십자군 전쟁에 국가의 운명을 건 총력 투자를 한 결과, 그 수익은 대단한 것이었다.
베니스는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하여 지금의 크로아티아 서해안 도시들과 크레타 섬을 비롯한 東지중해의 여러 전략 요충지를 징검다리처럼 연결, 흑해와 카스피海 및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뻗는 바다의 고속도로, 특 통상루트를 확보했다. 그들은 유럽내륙과 東方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 유럽 최강의 해군·해군력을 건설, 국부를 축적해 간다.
베니스는, 15세기부터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회교권의 대제국 오스만 터키와 지중해의 재해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데, 교과서에도 나오는 레판토 해전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전이었다. 기독교 국가 연합군의 함대는 208척이었는데, 베니스 해군이 主力으로 110척. 병력은 총 5만, 그 가운데 베니스가 1만, 스페인軍이 2만 명이었다. 1571년 10월7일 새벽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부근에서 격돌한 기독교 對 회교권 대표선수끼리의 해전에서 오스만 터키 함대는 군함 180여척이 침몰되거나 포획되고 1만8000명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터키의 西進은 제동이 걸리고 서구의 회교화는 저지되었다. 마르코 성당 내부의 어느 벽, 어느 바닥, 어느 천장도 여백이 전혀 없이 모자이크·조각품 그리고 약탈품인지 수입품인지 모르는 오리엔트産 장식품으로 메워져 있었다. 초인적(超人的)인 건축물과 예술품의 뒤에는 반드시 종교적 열정이 깔려있음을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마르코 성당의 분위기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과 다르다. 베드로 성당이 더 크고 더 완벽하며 더 획일적인 데 비해 마르코 성당은 이국적이고 인간적이며 자유롭다. 이것은 베니스의 종교적 독립을 상징하기도 한다.
교황의 영향력에 맞선 베니스 교회
베니스의 교회도 중세 유럽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바티칸 교황의 지도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명목상의 지도력만 인정하고 실질적인 권한은 베니스 교회가 행사했다. 1606년 베니스 정부는 베니스 교회의 두 성직자에 대한 재판권을 놓고 교황과 정면 충돌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베니스 교회와 베니스 市民 전부를 파문해버렸다.
베니스정부와 교회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교황과 맞섰다. 교황이 파견한 제수이스트 신부들을 추방하고 홍보책자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1년 뒤 교황은 파문을 철회, 全유럽에서 그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이는 교황에 맞섰던 영국 성공회와 비슷한 경우이다. 즉 종교적인 對外 종속성은 사상적, 정치적 종속성 및 내부분열을 결과하므로 한 나라가 自主를 이루려면 신라의 호국불교처럼 종교가 국적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베니스의 역사엔 중세가 없다.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암흑기의 광기(狂氣)는 이 도시국가에 존재하지 않았다. 교황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반동(反動)종교개혁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피할 수 있었다. 광신을 거부한 곳에는 언론의 자유가 꽃피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금서(禁書)로 규정했던 루터, 에라스무스,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베니스에선 구할 수 있었다.
베니스는 유럽의 정신적 지배자인 교황과 물리적 지배자인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오리엔트의 지배자인 비잔틴 제국(뒤에는 오스만 터키)이란 3大 파워의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어느 쪽에도 복속하지 않고 오히려 균형자, 조정자의 역할을 하면서 국권(國權)을 지켰다. 베니스의 시선은 항상 동방의 시장으로 향해 있었다. 15세기에 베니스는 북으로 알프스 산록까지 속령을 확장, 배후를 든든히 했다. 16세기 합스부르그 황제 칼 5세가 이탈리아를 침범, 로마를 점령하고 全반도를 수중에 넣었을 때도 베니스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4大강대국 사이에 있는 한국에 베니스만큼 좋은 참고서도 없을 것이다. 주체적인 사상과 힘이 있을 때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부채의 손잡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런 힘이 없을 땐 구한말(舊韓末)처럼 강대국의 놀이터가 돼버리는 곳이니까.
영웅이 없는 법치(法治)의 국가
베니스는 國權을 지켰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人權도 확보할 수 있었다. 국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국내의 정치안정과 국민들의 실용정신, 무역으로 쌓아올린 國富에 의해 가능해진 막강 해군력의 유지, 이 모든 것에 바탕을 둔 힘 있는 실리(實利) 외교전략으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안정일 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엔 동상이 없다. 유럽에서 동상이 없는 유일한 광장일 것이다. 세계사의 최우등생 베니스의 찬란한 역사에 합당한 위대한 인물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도시국가는 개인숭배를 철저하게 봉쇄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앤티히어로(Anti-Hero), 즉 反영웅의 국가였다. 人治가 아니라 제도에 의한 통치, 즉 法治의 국가였다. 베니스 정치의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라 이 정치제도였다. 베니스의 권력구조는 근대 민주정치의 골간인 3權분립의 원형이 되었을 정도로 견제와 균형이 잘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공화국 국회에서 선출되는 원수(Doge)는 종신직이지만 여섯 명의 원수 보좌관과의 합의하에 國政을 이끌도록 돼 있었다. 元首의 편지는 반드시 검열관이 열람하게 돼 있었고 혼자서는 절대로 외국의 사절을 접견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서기 1297년 베니스는 당시 귀족과 그 후손이 영원히 정치를 독점하는 법령을 선포했고 이것은 베니스가 망할 때까지 지켜졌다. 이 조치가 민중의 반란을 부르지 않았던 것은 정치 귀족들의 솔선수범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정략론(政略論)」에서 「나는 특권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공화국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으나 베니스는 예외다」고 썼다. 「베니스 귀족이 가진 특권은 명목상일 뿐 그들은 부동산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으므로 사실상 귀족이라 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베니스의 귀족은 정치의 프로일 뿐 특권 계급이 아니며 권한은 있지만 특혜는 없다는 얘기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베니스의 공직사회는 유경험자를 중시하는 고령사회였다는 점이다. 45세 이상이 아니면 고위층에 오르기가 어려웠고 15∼17세기의 국가원수 평균연령은 72세였다. 복잡하고 독창적인 베니스 권력구조의 상징은 마르코 성당에 붙어있는 팔라초 두칼레, 즉 공화국 정부종합청사 건물이다. 1천년 전에 첫 건물이 들어섰으나 그 뒤 확장을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은 15세기에 갖춰졌다. 외양은 이슬람化된 고딕식이요 내부는 고전주의 양식이다.
元首집무실, 법원, 여러 정부기관, 감옥까지 다 들어있는 이 건물에 대하여 영국 소설가 러스킨은 「세계의 중심 건물」이란 표현을 했다. 이 건물 속을 한나절 헤매고 다니며 구경한 뒤 뇌리에 남은 이미지는 전쟁, 무역, 정복, 규율, 집념 같은 것들이었다. 중세의 칼, 투구, 石弓이 전시된 여러 개의 방들을 둘러보니 무기가 아니라 예술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태만상의 무기들―로보캅 같은 갑옷, 길이가 2m나 되는 스테인레스 칼, 피스톨의 원형들, 철퇴, 도끼…. 동양에선 일본 오사카성(城)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기 전시장 정도가 여기에 비견할 만한 장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중세 그림의 주제도 신앙이 아니라 전쟁·원정·정복·외교 같은 피를 튀기는 투쟁장면들이었다.
공화정에 도전한 元首를 참수
口자 모양의 이 장대한 요새 같은 건물 속에 내부정원이 있다. 거기서 2층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 위. 여기서 서기 1355년 국가 元首 마리노 파리엘은 금빛 나는 원수모를 벗기우고 백발의 머리를 잘렸다. 10인 위원회의 한 위원이 창 끝으로 머리를 찍어 이 건물의 발코니로 나가 청중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했다』고 소리쳤다. 元首 이외에 11명의 음모자들은 참수형보다 한 등급 낮은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파리엘 元首가 민중봉기를 선동, 공화정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쿠데타 미수였다. 비록 미수사건이라 해도 베니스 지배층은 그들의 國憲, 즉 헌정질서에 대한 도전에 가차 없는 응징을 한 것이다. 국가원수라 해도 용서가 없었다. 베니스 사람들은 1100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지켜온 찬란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그들이 쓴 글 속에서는 독립, 자유같은 말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베니스人들은 구호와 선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을 성공시켰던 박정희도 연설에서 개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인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 實利추구를 멋진 단어로써 미화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공화정을 피로써 死守한 것도 베니스人의 삶의 양식을 지탱하는 제도로서의 공화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것도 사회주의가 한국인의 행복을 보장해온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통일한국의 정치제도로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절충형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절충형은 있을 수도 없지만 아직도 체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國體변경을 간판 바꿔달기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 애국심은 바로 체제에 대한 충성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사유재산 제도·언론자유·사법의 독립·선거의 자유·인권의 보장―을 보존하자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남산 외인아파트를 폭파한 뒤 일부 언론에선 하얏트 호텔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것은 우리 체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私有재산제도를 부정하는 베니스식으로 얘기하면 國憲 문란의 행위에 준한다.
베니스 전쟁사
베니스 역사의 연표(年表)에서 주요 전쟁 기록만 모아 본다.
·서기 1204년 : 제4차 십자군 원정, 콘스탄티노플 정복
·1258년 : 제1차 對제노바 전쟁
·1294년 : 제2차 제노바 전쟁
·1350년 : 제3차 제노바 전쟁
·1378년 : 제4차 제노바 전쟁
·1470년 : 제1차 對오스만 터키 전쟁
·1499년 : 제2차 오스만 터키 전쟁
·1508년 : 칸브레 전투
·1538년 : 제3차 터키戰
·1571년 : 제4차 터키戰―레판토 해전
·1645년 : 제5차 터키전
·1684년 : 제6차 터키전
·1714년 : 제7차 터키전
동방무역의 숙적이었던 해양강국 제노바와의 네 차례 전쟁에서 베니스가 결국 승리한 이유는 국내 정치안정과 이에 따른 국가 동원능력의 우세였다. 제노바는 내부 권력투쟁으로 여러 차례의 호기를 놓쳤다. 베니스와 오스만 터키 사이의 일곱 차례 결전은 육군 강국 對 해군 강국의 대결이었다. 1645년부터 25년간 계속된 크레타 공방전은 强小國 베니스의 해군이, 터키 육군에 의하여 코너로 몰린 크레타섬의 칸디아 요새에 25년간이나 병력·병참 지원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되었다.
1667년 한 해의 칸디아 전투에서만도 베니스는 400명의 지휘관을 포함한 3600명의 전사자를 냈고 터키는 2만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유럽은 30년 전쟁이 끝난 직후라 어느 나라도 베니스를 원조해주지 않았다. 터키 진영에선 『이것은 인간이 싸우는 전쟁이 아니다. 25년간 죽은 베니스 병사들의 유령들이 싸우는 전쟁이다』고 말할 정도의 끈질긴 전쟁이었다. 25년간 베니스 해군총사령관 10명중 5명이 전사했다.
1669년 베니스는 이 전쟁을 더 계속하면 국력의 소진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터키와 명예로운 강화를 한 뒤 수비병력과 무기, 國旗까지 온전하게 철수시키면서 크레타에서 손을 뗐다. 베니스는 시민출신 전사자와 그 유족에겐 연금을 주었으나 귀족출신인 경우엔 일체 주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은, 특권을 가진 엘리트층의 당연한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란 책을 쓴 부르크할트는 「먼 나라에 사는 自國民에 대하여 베니스처럼 강력한 도덕적 힘을 미친 나라는 달리 없다」고 지적했다. 국가와 국민의 그런 일체감은 공동 이익을 피로써 지킨 집단적 경험이 누적된 결과였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면 국민들은 안심하고 해외로 나간다. 대여행가 마르코 폴로 父子는 20여년에 걸쳐 두 차례 元의 북경까지 와서 쿠빌라이 칸의 궁중에서 해외취업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바로 베니스 상인이었다. 그의 여행기는 제노바 軍에 포로가 돼 옥중에서 구술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서 해방되었나
영웅이 없는 (실은 국민 모두가 영웅임) 영웅적 强小國 베니스와 신라, 그리고 오늘의 한국은 유사점이 많다.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과 자유를 보존해야 한다는 숙명적 과제가 그것이다. 실용정신·해양정신·상무정신도 공통점이다. 문무왕과 金庚信이 이끌던 신라 지도부가 對唐결전의지로써 한민족의 독립을 보존한 것도 따지고 보면 고매한 이상에서 우러나온 결단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과 번영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金庚信의 통일대업은, 백제·고구려의 협공을 받아 벼랑에 몰린 신라를 살리자는 데서 출발했다. 통일이 되어야만 평화가 가능하고 민중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통일을 해 놓았더니 唐이 백제·고구려 유민을 부추겨 다시 분열작전을 썼고 여기에 저항한 것이 신라였다. 金日成의 自主는 민중의 實利에 기초하지 않는 광신적 선동에 불과하였다. 신라·베니스와 같은 「열린 자주」가 아니라 자폐증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시저 사당 앞에서
리비아에서 출발하여 朴正熙와 베니스와 신라를 넘나든 상념의 역사紀行은 로마에서 끝이 났다. 베니스에서의 2박3일 뒤 기자는 로마로 날아와 로만 포럼으로 불리는 도심의 유적지를 찾았다.
콜로세움(원형경기장)에서 캐피털(로마시청이 있는 언덕)까지 퍼져 있는 이 유적지의 한 가운데는 줄리어스 시저의 사당이 있다. 건물은 다 부서져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서기 전 29년 시저가 브루투스 일파에게 암살된 다음날 그의 시체는 여기에서 화장되었다. 시저의 뼈가 재로 변해 흩날렸을 사당 앞 쓰러진 돌기둥 위에 앉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저의 시체를 앞에 두고 브루투스가 아주 격조 높은 추도사를 통해서 시저 암살의 불가피성(공화정을 무너뜨리고 王政을 세우려 했다는…)을 역설한 뒤 시저의 친구 안토니우스가 연단에 올라 아주 감상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나는 시저를 묻으러 온 것이지 그를 칭송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악행은 죽은 뒤에도 따라다니지만 선행은 뼈와 함께 묻히는 법입니다. 고귀한 브루투스는 시저가 야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크나큰 과오입니다. 브루투스는 고귀한 분이니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시저는 흐느꼈습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그가 야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고귀한 분입니다. 여러분도 목격했다시피 내가 시저에게 세 번이나 왕관을 바쳤을 때 그는 세 번 다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야심입니까? 그러나 브루투스는 그가 야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겠죠, 브루투스는 고귀한 인간이니까요…』
브루투스를 추켜세우는 척하면서 시저를 변호해 가다가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브루투스 일파를 반역자로 단죄하는 안토니우스의 웅변에 의해 군중은 흥분하여 폭도로 변한다. 하루 전에는 암살자 브루투스를 義人이라 찬양하던 로마 시민들은 그를 향해 달려든다. 브루투스는 로마를 야반도주하고 시저는 죽어서도 그 추종세력을 통해 브루투스 일파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브루투스는 로마史에서 가장 고매한 인격을 가졌던 인물이고, 시저는 淸濁을 같이 들이마신 영웅이었다. 브루투스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되어 공화정을 지키려 했고 시저는 민중의 편에 서서 전제 王政을 꿈꾸었다.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는 쉬워도 선악을 가리기는 힘들다.
역사를 굴리는 「위대한 개인」
야콥 부르크할트는 「세계사에 대한 諸考察」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는 때로는 한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세계는 그 후 이 인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지향하도록 하는 것을 즐긴다. 이들 「위대한 개인」에 있어서는 보편과 특수, 정지한 것과 움직이는 것이 그 한 사람의 인격 속에 집약된다. 그들은 국가·종교·문화·사회·위기를 구현하는 존재이다. 위기에 있어서는 기성과 새로운 것이 서로 충돌하여 하나 되고 위대한 개인의 속에서 頂点에 달한다. 이들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이다.>
로마의 「위대한 개인」은 시저였다. 그는 공화정을 파괴하고 전제황제시대를 여는 길목에 서 있었다. 한국역사에서 시저와 비견되는 「위대한 개인」은 누구인가. 그 자신이 한 시대의 나이테이자 역사정신의 구현자이며 新舊를 합쳐서 새로운 질서를 내어놓고 역사를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굴러가게 만든 인물.
기자가 아는 범위 안에선 金庚信, 李承晩·朴正熙이다.
朴正熙가 남긴 마지막 말 『난 괜찮아』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一體化시킨 한 위대한 인간이 덮쳐 오는 역사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면서 스스로를 위로한 말이 아니었을까?
기자는 시저와 朴正熙를 생각하면서 로만 포럼을 떠나 캐피털 힐로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기자는 한 20대 한국 처녀를 만났다. 이 여자는 따분한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째 유럽을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도 非命에 간 朴正熙라는 한 남자의 생애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人情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했던」(「국가와 혁명과 나」) 한 사나이가 우리 역사에도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지의 鮮烈한 대결
기자는 리비아에서 동아건설의 大水路 공사장 취재를 끝낸 뒤 陸路로 투니시아까지 나와 거기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갔다가 한 나절만에 다시 베니스에 도착했다. 알프스 산맥 위를 두 번 지나가는 행운을 맛보았다. 쾌청한 날씨여서 눈덮인 頂上과 신록의 계곡, 그리고 짙푸른 호수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독일 상공에 들어오면 아래에 펼쳐지는 마을·도로·농경지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진다. 충실한 나라, 國富가 축적된 사회, 체격 좋은 행인들의 걸음걸이도 뚜벅뚜벅 힘차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야성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많이 순화되었지만 게르만 민족의 그 무서운 에너지는 로마문명과 중세의 질곡을 파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충격파의 원천이었다.
중국 문명에 대해서 북방 유목민족이 담당했던 공격적, 파괴적, 또는 창조적 역할을 게르만족이 로마 문명권에 대해서 해냈던 것이다. 알프스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프랑스 남부, 스위스, 오스트리아 동부, 독일 남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이야말로 예술과 자연과 질서와 富가 한 자리에 집합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곳이 아닐까 하는 감상을 가져보았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베니스行 알리탈리아 항공사의 여객기에 올랐다. 갑자기 훤해지는 느낌이었다. 스투어디스와 승객들의 용모와 옷차림이 벌써 달랐다. 리비아에서 많이 본 로마유적의 인물 조각상이 실물로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베니스 상공에 도달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베니스는 숨을 잠시 멎게 만들었다.
바다 위에 갑자기 나타난 밀집 건물군. 황토빛깔 지붕이 평원처럼 깔려 있다. 그 사이로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운하의 네트워크. 베니스엔 산이 없다. 땅도 거의 보이지 않고 지붕과 건물만 수면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人工과 자연이 직접 대결하고 있는 장면은 鮮烈했다. 자연에 도전한 인간의지의 궁극적인 모습, 그것이 바로 베니스의 본질이었다.
베니스를 처음 찾은 관광객이 언제나 그러하듯 기자도 그날 밤 모터 보트를 타고 대운하를 지나 산 마르코(San Marco) 광장을 찾아갔다. 세계 3大광장의 하나라 하기도 하고 가장 인간적 광장이라고도 한다. 반드시 연인끼리 와야 한다는 평도 듣고 있는 산 마르코 광장의 밤은 좋았다. 광장 양쪽에선 팝 오케스트라가 서로 경쟁적으로 귀에 익은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남자 주인공을 빼닮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날 밤의 스타였다. 관중들의 박수로 고무된 그의 흥겨운 연주와 제스처는 기자의 발걸음을 밤 12시가 지나도록 묶어놓았다.
다음날 오전에 다시 찾아간 산 마르코 광장은 지난밤의 여성적 무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해군력, 통상, 규율, 결전, 제도, 신앙, 도전과 응전 같은 남성적 이미지였다. 이것이 베니스 역사의 진면목이다. 베니스만한 감동적인 역사는 달리 없을 것이다.
1100년간의 공화국
베니스는 서기 697년 초대(初代) 국가원수(Doge라 부른다)가 선출된 이후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하여 망할 때까지 정확하게 1100년간 지속한 공화국이었다. 11세기 동안 한번도 국체(國體)가 바뀌지 않았다. 국체를 바꾸려는 쿠데타 모의는 두 번 있었을 뿐, 그것도 신속히 진압되었다. 최장기의 공화국, 최장기의 정치안정을 가능하게 한 베니스의 권력구조는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큐를 감동시켜 두 위대한 정치사상가의 저작에 베니스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3권분립의 원칙을 이론화한 몽테스큐의 「법의 정신」은 베니스를 연구한 결과이기도 했다. 법의 공정성과 국민의 애국심으로 해서 베니스는 「중세의 로마」로 불리기도 했다.
베니스는 1100년 동안 한번도 외국 군대에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갖고 있다. 1797년 5월16일 프랑스군이 진주하기 직전에 베니스 국회는 공화정을 민주제로 변경한다는 결정을 통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亡國조차도 명예롭게 처리했다. 베니스는 인구와 면적당 국력이 가장 강했던 나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15세기 전성기에 베니스市의 인구는 19만명, 이탈리아 본토에 확보한 속령까지 합쳐도 인구 100만명을 넘어서 본 적이 없는 나라였지만 막강한 해운·해군력으로 동방으로의 통상루트와 東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 오스만 터키 같은 세계적인 대제국과 자웅을 겨루기도 하였다.
베니스의 1100년史는 통상권을 지키기 위한 교활한 외교와 처절한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런 전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베니스 상인의 무역에 의하여 축적된 國富와 정치안정에 바탕을 둔 유사시의 국가 동원력이었다. 베니스는 상무(尙武)라기보다는 상무(商武)국가였다. 정치를 독점했던 귀족은 놀고 먹으며 권력을 남용하는 양반이 아니라 대상인들이었다. 상인계급에 의한 통치가 군인이나 文官에 의한 통치와 어떻게 다른지 독자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국가로서는 이미 죽어버린 베니스국의 유골들을 보고도 기자는 감동했다. 괴테도 베니스가 이미 쇠망의 나락에 떨어져 임종을 10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이 도시국가를 방문한 뒤 이런 감상을 남겼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고귀함으로 가득차 있다.(베니스는) 한곳으로 집중된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위대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작품이다. 이 멋진 기념비는 어느 한 君主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민족의 기념비이다〉
성당이 주체성의 구심점
인류 역사의 MVP임에 틀림없는 베니스 역사의 가장 유명한 기념비는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두 건물―산 마르코 대성당과 파라초 두칼레(국가원수의 궁전 겸 정부종합청사)이다. 이 건물 구경은 그대로 베니스 역사로의 탐험이 된다. 산 마르코 성당은 베니스 공화국의 정신세계, 두칼레 궁전은 권력의 세계를 보여준다. 붙어 있는 이 두 건물은 그 크기나 예술성에 있어서 세계적인 건물이다.
산 마르코 성당의 산 마르코는 성(聖) 마르코, 즉 신약의 마가복음을 쓴 마가를 가리킨다. 마가는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Peter의 한국식 발음)가 아끼던 제자였다. 그는 서기 6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했다. 서기 828년 베니스의 두 상인은 알렉산드리아의 한 성당에 보존돼 있던 聖 마르코의 시신을 매수하여 베니스로 갖고 왔다. 그 시신을 모시는 성당으로 지은 것이 이 건물이니(그 뒤 많이 증·개축되긴 했지만) 1100살을 먹은 셈이다.
이 건물은 비잔틴 및 오리엔트식이 많이 가미된 건물로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과 대조적이나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기념비적인 문화재이다. 네 개의 돔을 가져 회교사원을 연상시키는 이 건물의 용적은 옛 중앙청의 두 배쯤 되리라. 그 옆에 있는 두칼레 궁전은 옛 중앙청의 다섯 배쯤 되는 大건축물로서 그 자체가 독립된 성채란 느낌을 준다. 원래 베니스의 수호 聖人은 그리스 출신의 聖者 데오도르였다. 데오도르는, 그러나 성자의 서열중에서 3류쯤 되는 이였다.
로마의 수호성인은 베드로. 자부심이 대단한 베니스 사람들은 일류성인인 성 마르코의 시체를 가져오자 데오도르를 차석으로 밀어 내고 마르코를 수호聖人으로 삼았다. 『적어도 로마 다음은 가야지』하는 오기의 발로였다. 성 마르코의 시체 반입과 성당 건축은 베니스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베니스인들은 서기 810년 프랑크國 샬레마뉴 大帝의 아들 페핀의 침공에 의하여 수도인 말라모코가 점령당하자 방어하기가 좋은 바다 속의 사구(砂丘)인 지금의 베니스(당시엔 리보알토섬)로 옮겨가 도시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국가건설의 정신적 지주로서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삼고 한 국가의 정신적 주춧돌로서 그 성당을 지은 것이다.
비참의 극한에서 대오각성
베니스는 원래 패배자들의 피난지에서 출발한 비참한 도시국가였다. 서기 453년 훈족(族)의 아틸라가 이끄는 대군이 北이탈리아를 침략하자 목숨을 건지려고 바닷가의 뻘밭으로 달아났던 이들이 베니스인의 선조였다. 이들은 일단 내륙으로 복귀했다가 서기 568년 게르만族의 일파인 롬바르드族이 다시 침략하자 또다시 보 따리를 싸고 뻘밭으로 피난하여 거기에 水上 도시를 세운 것이다.
비참의 극한까지 가 보았던 베니스 사람들은 대오각성하여 다시는 그런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작심하면서 바다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었다. 베니스 사람들은 흔히 가장 非이탈리아적이라고 불린다. 과묵 검소 질박하고 실용적인 베니스 사람들은 오히려 영국이나 독일 민족을 닮은 것처럼 변신한 것이다. 그런 변신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곳까지 내려가 온갖 수모를 겪은 뒤의 깨달음이며, 바닥에서 솟구치는 생존의 투지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베니스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도 경험하지 않았던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기자의 소년기 1950年代의 풍경들이 있다. 찬물 마셔 허기진 배를 채우던 시절에 집집마다 아령과 역기, 곤봉이고 마을마다 평행봉, 거리마다 당수·유도·합기도·검도 도장들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한겨울에 냉수마찰로써 의지를 시험해보는 경쟁심리도 대단했다. 포연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겨루기의 투지가 솟아나고 있었을까.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어야 할 상황에서 그때 사회 분위기는 왜 활기(活氣)에 차 있었고 사람들은 잡초처럼 일어서고 있었을까.
1950年代에 한국인은 절망을 보았던 것이다. 生과 死의 경계선에 서 보았던 것이다. 벼랑 끝에 몰려보았던 것이다. 수많은 생명이, 그것도 혈육이 바로 눈 앞에서 죽어가던 그 엄숙한 장면들을 목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운 좋은 생존자들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원초적 희열, 그리고 희망뿐이었다. 더 낮아질 데도,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위안과 나상(裸像)으로 남은 자신에 대한 정직한 시선이었다. 우리는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空論과 위선과 환상 같은 것은 집어던지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한국인 모두가 리얼리스트가 된 것이다.
레판토 해전(海戰)의 승자로
마르코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수장품은 전차(戰車)를 끄는 네 마리의 말을 형상화한 청동상이다. 모조품은 성당 정문 위 테라스에, 진품은 성당內의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 이 청동말像은 서기 1204년 베니스와 프랑스 연합군으로 구성된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帝國)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시켰을 때 베니스軍이 약탈해 온 것이다. 이 청동말은 원래 로마 네로 황제의 개선문에 설치돼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의 경기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일부에선 그리스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이 청동상이 증언하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약탈은 십자군 전쟁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전해진다. 프랑스가 약 1만명의 기사단, 베니스가 약 200척의 군함과 1만명의 병력을 내어서 만든 제4차 십자군은 처음부터 장사속에서 출발했다. 베니스는 점령하는 땅의 반을 식민지로 확보한다는 계약을 맺은 뒤 거국적인 투자를 했던 것이다.
이들은 비잔틴 제국 내의 권력투쟁에 편승, 당초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당시 세계 최강국의 하나였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서기 1204년에 함락시킨 다음 불을 지르고 갖은 약탈을 4일간이나 했다. 이 약탈로 비잔틴 제국의 예술품과 문서가 많이 불타 없어져 인류사적인 일대 손실을 기록하게 되었다. 비잔틴의 예술품은 지금도 베니스에 가서 보는 것이 더 좋다는 평까지 듣고 있다. 이 4차 십자군 전쟁에 국가의 운명을 건 총력 투자를 한 결과, 그 수익은 대단한 것이었다.
베니스는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하여 지금의 크로아티아 서해안 도시들과 크레타 섬을 비롯한 東지중해의 여러 전략 요충지를 징검다리처럼 연결, 흑해와 카스피海 및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뻗는 바다의 고속도로, 특 통상루트를 확보했다. 그들은 유럽내륙과 東方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 유럽 최강의 해군·해군력을 건설, 국부를 축적해 간다.
베니스는, 15세기부터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회교권의 대제국 오스만 터키와 지중해의 재해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데, 교과서에도 나오는 레판토 해전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전이었다. 기독교 국가 연합군의 함대는 208척이었는데, 베니스 해군이 主力으로 110척. 병력은 총 5만, 그 가운데 베니스가 1만, 스페인軍이 2만 명이었다. 1571년 10월7일 새벽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부근에서 격돌한 기독교 對 회교권 대표선수끼리의 해전에서 오스만 터키 함대는 군함 180여척이 침몰되거나 포획되고 1만8000명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터키의 西進은 제동이 걸리고 서구의 회교화는 저지되었다. 마르코 성당 내부의 어느 벽, 어느 바닥, 어느 천장도 여백이 전혀 없이 모자이크·조각품 그리고 약탈품인지 수입품인지 모르는 오리엔트産 장식품으로 메워져 있었다. 초인적(超人的)인 건축물과 예술품의 뒤에는 반드시 종교적 열정이 깔려있음을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마르코 성당의 분위기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과 다르다. 베드로 성당이 더 크고 더 완벽하며 더 획일적인 데 비해 마르코 성당은 이국적이고 인간적이며 자유롭다. 이것은 베니스의 종교적 독립을 상징하기도 한다.
교황의 영향력에 맞선 베니스 교회
베니스의 교회도 중세 유럽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바티칸 교황의 지도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명목상의 지도력만 인정하고 실질적인 권한은 베니스 교회가 행사했다. 1606년 베니스 정부는 베니스 교회의 두 성직자에 대한 재판권을 놓고 교황과 정면 충돌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베니스 교회와 베니스 市民 전부를 파문해버렸다.
베니스정부와 교회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교황과 맞섰다. 교황이 파견한 제수이스트 신부들을 추방하고 홍보책자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1년 뒤 교황은 파문을 철회, 全유럽에서 그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이는 교황에 맞섰던 영국 성공회와 비슷한 경우이다. 즉 종교적인 對外 종속성은 사상적, 정치적 종속성 및 내부분열을 결과하므로 한 나라가 自主를 이루려면 신라의 호국불교처럼 종교가 국적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베니스의 역사엔 중세가 없다.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암흑기의 광기(狂氣)는 이 도시국가에 존재하지 않았다. 교황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반동(反動)종교개혁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피할 수 있었다. 광신을 거부한 곳에는 언론의 자유가 꽃피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금서(禁書)로 규정했던 루터, 에라스무스,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베니스에선 구할 수 있었다.
베니스는 유럽의 정신적 지배자인 교황과 물리적 지배자인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오리엔트의 지배자인 비잔틴 제국(뒤에는 오스만 터키)이란 3大 파워의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어느 쪽에도 복속하지 않고 오히려 균형자, 조정자의 역할을 하면서 국권(國權)을 지켰다. 베니스의 시선은 항상 동방의 시장으로 향해 있었다. 15세기에 베니스는 북으로 알프스 산록까지 속령을 확장, 배후를 든든히 했다. 16세기 합스부르그 황제 칼 5세가 이탈리아를 침범, 로마를 점령하고 全반도를 수중에 넣었을 때도 베니스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4大강대국 사이에 있는 한국에 베니스만큼 좋은 참고서도 없을 것이다. 주체적인 사상과 힘이 있을 때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부채의 손잡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런 힘이 없을 땐 구한말(舊韓末)처럼 강대국의 놀이터가 돼버리는 곳이니까.
영웅이 없는 법치(法治)의 국가
베니스는 國權을 지켰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人權도 확보할 수 있었다. 국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국내의 정치안정과 국민들의 실용정신, 무역으로 쌓아올린 國富에 의해 가능해진 막강 해군력의 유지, 이 모든 것에 바탕을 둔 힘 있는 실리(實利) 외교전략으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안정일 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엔 동상이 없다. 유럽에서 동상이 없는 유일한 광장일 것이다. 세계사의 최우등생 베니스의 찬란한 역사에 합당한 위대한 인물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도시국가는 개인숭배를 철저하게 봉쇄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앤티히어로(Anti-Hero), 즉 反영웅의 국가였다. 人治가 아니라 제도에 의한 통치, 즉 法治의 국가였다. 베니스 정치의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라 이 정치제도였다. 베니스의 권력구조는 근대 민주정치의 골간인 3權분립의 원형이 되었을 정도로 견제와 균형이 잘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공화국 국회에서 선출되는 원수(Doge)는 종신직이지만 여섯 명의 원수 보좌관과의 합의하에 國政을 이끌도록 돼 있었다. 元首의 편지는 반드시 검열관이 열람하게 돼 있었고 혼자서는 절대로 외국의 사절을 접견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서기 1297년 베니스는 당시 귀족과 그 후손이 영원히 정치를 독점하는 법령을 선포했고 이것은 베니스가 망할 때까지 지켜졌다. 이 조치가 민중의 반란을 부르지 않았던 것은 정치 귀족들의 솔선수범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정략론(政略論)」에서 「나는 특권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공화국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으나 베니스는 예외다」고 썼다. 「베니스 귀족이 가진 특권은 명목상일 뿐 그들은 부동산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으므로 사실상 귀족이라 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베니스의 귀족은 정치의 프로일 뿐 특권 계급이 아니며 권한은 있지만 특혜는 없다는 얘기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베니스의 공직사회는 유경험자를 중시하는 고령사회였다는 점이다. 45세 이상이 아니면 고위층에 오르기가 어려웠고 15∼17세기의 국가원수 평균연령은 72세였다. 복잡하고 독창적인 베니스 권력구조의 상징은 마르코 성당에 붙어있는 팔라초 두칼레, 즉 공화국 정부종합청사 건물이다. 1천년 전에 첫 건물이 들어섰으나 그 뒤 확장을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은 15세기에 갖춰졌다. 외양은 이슬람化된 고딕식이요 내부는 고전주의 양식이다.
元首집무실, 법원, 여러 정부기관, 감옥까지 다 들어있는 이 건물에 대하여 영국 소설가 러스킨은 「세계의 중심 건물」이란 표현을 했다. 이 건물 속을 한나절 헤매고 다니며 구경한 뒤 뇌리에 남은 이미지는 전쟁, 무역, 정복, 규율, 집념 같은 것들이었다. 중세의 칼, 투구, 石弓이 전시된 여러 개의 방들을 둘러보니 무기가 아니라 예술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태만상의 무기들―로보캅 같은 갑옷, 길이가 2m나 되는 스테인레스 칼, 피스톨의 원형들, 철퇴, 도끼…. 동양에선 일본 오사카성(城)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기 전시장 정도가 여기에 비견할 만한 장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중세 그림의 주제도 신앙이 아니라 전쟁·원정·정복·외교 같은 피를 튀기는 투쟁장면들이었다.
공화정에 도전한 元首를 참수
口자 모양의 이 장대한 요새 같은 건물 속에 내부정원이 있다. 거기서 2층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 위. 여기서 서기 1355년 국가 元首 마리노 파리엘은 금빛 나는 원수모를 벗기우고 백발의 머리를 잘렸다. 10인 위원회의 한 위원이 창 끝으로 머리를 찍어 이 건물의 발코니로 나가 청중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했다』고 소리쳤다. 元首 이외에 11명의 음모자들은 참수형보다 한 등급 낮은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파리엘 元首가 민중봉기를 선동, 공화정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쿠데타 미수였다. 비록 미수사건이라 해도 베니스 지배층은 그들의 國憲, 즉 헌정질서에 대한 도전에 가차 없는 응징을 한 것이다. 국가원수라 해도 용서가 없었다. 베니스 사람들은 1100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지켜온 찬란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그들이 쓴 글 속에서는 독립, 자유같은 말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베니스人들은 구호와 선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을 성공시켰던 박정희도 연설에서 개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인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 實利추구를 멋진 단어로써 미화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공화정을 피로써 死守한 것도 베니스人의 삶의 양식을 지탱하는 제도로서의 공화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것도 사회주의가 한국인의 행복을 보장해온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통일한국의 정치제도로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절충형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절충형은 있을 수도 없지만 아직도 체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國體변경을 간판 바꿔달기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 애국심은 바로 체제에 대한 충성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사유재산 제도·언론자유·사법의 독립·선거의 자유·인권의 보장―을 보존하자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남산 외인아파트를 폭파한 뒤 일부 언론에선 하얏트 호텔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것은 우리 체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私有재산제도를 부정하는 베니스식으로 얘기하면 國憲 문란의 행위에 준한다.
베니스 전쟁사
베니스 역사의 연표(年表)에서 주요 전쟁 기록만 모아 본다.
·서기 1204년 : 제4차 십자군 원정, 콘스탄티노플 정복
·1258년 : 제1차 對제노바 전쟁
·1294년 : 제2차 제노바 전쟁
·1350년 : 제3차 제노바 전쟁
·1378년 : 제4차 제노바 전쟁
·1470년 : 제1차 對오스만 터키 전쟁
·1499년 : 제2차 오스만 터키 전쟁
·1508년 : 칸브레 전투
·1538년 : 제3차 터키戰
·1571년 : 제4차 터키戰―레판토 해전
·1645년 : 제5차 터키전
·1684년 : 제6차 터키전
·1714년 : 제7차 터키전
동방무역의 숙적이었던 해양강국 제노바와의 네 차례 전쟁에서 베니스가 결국 승리한 이유는 국내 정치안정과 이에 따른 국가 동원능력의 우세였다. 제노바는 내부 권력투쟁으로 여러 차례의 호기를 놓쳤다. 베니스와 오스만 터키 사이의 일곱 차례 결전은 육군 강국 對 해군 강국의 대결이었다. 1645년부터 25년간 계속된 크레타 공방전은 强小國 베니스의 해군이, 터키 육군에 의하여 코너로 몰린 크레타섬의 칸디아 요새에 25년간이나 병력·병참 지원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되었다.
1667년 한 해의 칸디아 전투에서만도 베니스는 400명의 지휘관을 포함한 3600명의 전사자를 냈고 터키는 2만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유럽은 30년 전쟁이 끝난 직후라 어느 나라도 베니스를 원조해주지 않았다. 터키 진영에선 『이것은 인간이 싸우는 전쟁이 아니다. 25년간 죽은 베니스 병사들의 유령들이 싸우는 전쟁이다』고 말할 정도의 끈질긴 전쟁이었다. 25년간 베니스 해군총사령관 10명중 5명이 전사했다.
1669년 베니스는 이 전쟁을 더 계속하면 국력의 소진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터키와 명예로운 강화를 한 뒤 수비병력과 무기, 國旗까지 온전하게 철수시키면서 크레타에서 손을 뗐다. 베니스는 시민출신 전사자와 그 유족에겐 연금을 주었으나 귀족출신인 경우엔 일체 주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은, 특권을 가진 엘리트층의 당연한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란 책을 쓴 부르크할트는 「먼 나라에 사는 自國民에 대하여 베니스처럼 강력한 도덕적 힘을 미친 나라는 달리 없다」고 지적했다. 국가와 국민의 그런 일체감은 공동 이익을 피로써 지킨 집단적 경험이 누적된 결과였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면 국민들은 안심하고 해외로 나간다. 대여행가 마르코 폴로 父子는 20여년에 걸쳐 두 차례 元의 북경까지 와서 쿠빌라이 칸의 궁중에서 해외취업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바로 베니스 상인이었다. 그의 여행기는 제노바 軍에 포로가 돼 옥중에서 구술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서 해방되었나
영웅이 없는 (실은 국민 모두가 영웅임) 영웅적 强小國 베니스와 신라, 그리고 오늘의 한국은 유사점이 많다.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과 자유를 보존해야 한다는 숙명적 과제가 그것이다. 실용정신·해양정신·상무정신도 공통점이다. 문무왕과 金庚信이 이끌던 신라 지도부가 對唐결전의지로써 한민족의 독립을 보존한 것도 따지고 보면 고매한 이상에서 우러나온 결단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과 번영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金庚信의 통일대업은, 백제·고구려의 협공을 받아 벼랑에 몰린 신라를 살리자는 데서 출발했다. 통일이 되어야만 평화가 가능하고 민중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통일을 해 놓았더니 唐이 백제·고구려 유민을 부추겨 다시 분열작전을 썼고 여기에 저항한 것이 신라였다. 金日成의 自主는 민중의 實利에 기초하지 않는 광신적 선동에 불과하였다. 신라·베니스와 같은 「열린 자주」가 아니라 자폐증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시저 사당 앞에서
리비아에서 출발하여 朴正熙와 베니스와 신라를 넘나든 상념의 역사紀行은 로마에서 끝이 났다. 베니스에서의 2박3일 뒤 기자는 로마로 날아와 로만 포럼으로 불리는 도심의 유적지를 찾았다.
콜로세움(원형경기장)에서 캐피털(로마시청이 있는 언덕)까지 퍼져 있는 이 유적지의 한 가운데는 줄리어스 시저의 사당이 있다. 건물은 다 부서져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서기 전 29년 시저가 브루투스 일파에게 암살된 다음날 그의 시체는 여기에서 화장되었다. 시저의 뼈가 재로 변해 흩날렸을 사당 앞 쓰러진 돌기둥 위에 앉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저의 시체를 앞에 두고 브루투스가 아주 격조 높은 추도사를 통해서 시저 암살의 불가피성(공화정을 무너뜨리고 王政을 세우려 했다는…)을 역설한 뒤 시저의 친구 안토니우스가 연단에 올라 아주 감상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나는 시저를 묻으러 온 것이지 그를 칭송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악행은 죽은 뒤에도 따라다니지만 선행은 뼈와 함께 묻히는 법입니다. 고귀한 브루투스는 시저가 야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크나큰 과오입니다. 브루투스는 고귀한 분이니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시저는 흐느꼈습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그가 야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고귀한 분입니다. 여러분도 목격했다시피 내가 시저에게 세 번이나 왕관을 바쳤을 때 그는 세 번 다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야심입니까? 그러나 브루투스는 그가 야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겠죠, 브루투스는 고귀한 인간이니까요…』
브루투스를 추켜세우는 척하면서 시저를 변호해 가다가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브루투스 일파를 반역자로 단죄하는 안토니우스의 웅변에 의해 군중은 흥분하여 폭도로 변한다. 하루 전에는 암살자 브루투스를 義人이라 찬양하던 로마 시민들은 그를 향해 달려든다. 브루투스는 로마를 야반도주하고 시저는 죽어서도 그 추종세력을 통해 브루투스 일파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브루투스는 로마史에서 가장 고매한 인격을 가졌던 인물이고, 시저는 淸濁을 같이 들이마신 영웅이었다. 브루투스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되어 공화정을 지키려 했고 시저는 민중의 편에 서서 전제 王政을 꿈꾸었다.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는 쉬워도 선악을 가리기는 힘들다.
역사를 굴리는 「위대한 개인」
야콥 부르크할트는 「세계사에 대한 諸考察」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는 때로는 한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세계는 그 후 이 인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지향하도록 하는 것을 즐긴다. 이들 「위대한 개인」에 있어서는 보편과 특수, 정지한 것과 움직이는 것이 그 한 사람의 인격 속에 집약된다. 그들은 국가·종교·문화·사회·위기를 구현하는 존재이다. 위기에 있어서는 기성과 새로운 것이 서로 충돌하여 하나 되고 위대한 개인의 속에서 頂点에 달한다. 이들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이다.>
로마의 「위대한 개인」은 시저였다. 그는 공화정을 파괴하고 전제황제시대를 여는 길목에 서 있었다. 한국역사에서 시저와 비견되는 「위대한 개인」은 누구인가. 그 자신이 한 시대의 나이테이자 역사정신의 구현자이며 新舊를 합쳐서 새로운 질서를 내어놓고 역사를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굴러가게 만든 인물.
기자가 아는 범위 안에선 金庚信, 李承晩·朴正熙이다.
朴正熙가 남긴 마지막 말 『난 괜찮아』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一體化시킨 한 위대한 인간이 덮쳐 오는 역사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면서 스스로를 위로한 말이 아니었을까?
기자는 시저와 朴正熙를 생각하면서 로만 포럼을 떠나 캐피털 힐로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기자는 한 20대 한국 처녀를 만났다. 이 여자는 따분한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째 유럽을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도 非命에 간 朴正熙라는 한 남자의 생애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人情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했던」(「국가와 혁명과 나」) 한 사나이가 우리 역사에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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