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主流인 장로교파의 칼빈주의가 日帝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적인 힘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한국 개혁적 보수기독교단의 主流인 고신파와 합동파가 아시아 기독교중에선 유일하게 천황에 대한 경배를 거부하고 수많은 성직자들의 옥살이와 獄死로써 신앙의 자유를 지켜낸 뿌리를 갖고 있다. 반면 김일성 우상숭배주의에 호감이나 이해를 보이는 일부 기독교파의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日帝 때의 신사참배파와 만나게 된다. 천황과 김일성은 칼빈주의자들의 눈에는 똑 같은 우상들이다. 하나님을 참칭하는 사탄의 제자들인 점에서 같다. 그런 점에서 우상숭배에 넘어가는 기독교가 反共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반대하는 속성을 가진 점도 이해가 간다.
한국기독교의 칼빈주의 신학을 지켜온 가장 핵심적인 두 신학자가 있다. 순교정신과 개혁적 보수주의를 이어가는 高神派의 산실인 (부산) 고려신학교의 교장을 지낸 朴亨龍 朴允善 박사. 이 두 분은 미국 칼빈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제자였다. 메이첸 박사는 칼빈주의 신학의 本山이던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질된다고 판단하여 이 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을 세운 분이다. 朴亨龍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첸 교수로부터 칼빈주의 神學을 배운 뒤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한국의 초창기 장로교 총회는 신학의 정통성을 지켜가기 위하여 1901년에 벌써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朴亨龍은 '자유주의 신학'과 맞섰다. 그는 김재준, 송창근 같은 신학자들의 글을 학술지에 싣는 데 반발하여 편집위원직 사표를 내기도 했다. 日帝가 기독교에 神社참배, 즉 천황에 대한 경배를 강요하자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의를 하고 말았다. 이에 반대한 평양신학교는 자진폐교로써 대응했다. 朴亨龍 박사는 신사참배 강요가 없는 만주국 봉천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주기철 목사 등 많은 칼빈주의 목사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옥사했다. 특히 경남지방의 목사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주남선(거창읍교회), 최상림(남해), 황철도(진주), 김을길(거제), 이인제(경남), 손양원(경남), 한상동(경남), 손명복(경남), 이원영(안동) 목사들이 투옥되었던 분들이다. 주기철 목사 등 약50명이 獄死하였다.
광복 직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신도들이 박형룡 박윤선 박사를 모시고 세운 신학교가 부산의 고려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를 母胎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파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했던 기독교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 논란 과정에서 예장은 고신, 합동, 통합측으로 갈라졌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했던 사람들이나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김재준 박사의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세운 것이 기독교장로회이다. 基長은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있어선 고신파보다 더 활발하게 참여했다. 이 종파 소속 목사중에는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비판을 삼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칼빈대학교의 金義煥 전 총장은 최근에 쓴 '메이첸과 한국 보수신학의 형성'이란 논문에서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성경不信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칼빈주의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主權論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주재한다고 믿는데 어떻게 천황을 하나님처럼 숭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金총장은 "아시아에서 신사참배를 정면에서 거부하여 신앙의 정통을 지켜간 것은 한국뿐이다. 대만과 일본의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세가 미미하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했으나 소수의 반대자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불씨처럼 지켜간 것이 한국 기독교 전체의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다.
한국 칼빈주의 신학의 완성자인 朴允善 목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註釋集(주석집)을 완간한 분이기도 하다. 이는 칼빈주의 신앙을 한국화한 세계적 업적으로 꼽힌다.
칼빈주의는 준법정신, 근면 성실의 직업정신, 끊임 없는 자기반성과 개혁,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신념체계로 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딱 맞는 논리와 윤리를 제공했다. 칼빈주의 신앙은 개화기, 독립운동기,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의 교회들을 통해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유통일기에 무엇을 할 것이냐일 것이다. 이는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로써 결정될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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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님의 생애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는 1897년 경남 창원군(지금 진해시) 웅천에서 주현성(朱炫聲)씨의 4남 3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00년 가족과 함께 웅천 교회 교인이 되었다. 웅천 개통학교 졸업하고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오산학교에서 청년 주기철은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님과 고당 조만식 장로님으로부터 나라사랑과 민족정신에 대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915년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 ‘조선예수교대학’(후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도중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어떤 자료에서는 이복형제들의 유산 분쟁이라 하고 주기철 목사님의 4남인 주광조씨가 쓴 글에서는 어렸을 때 앓았던 안질 때문에 도저히 더 책을 읽거나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며 휴학의 이유를 들었다. 이듬해 그는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1917년 김해교회 출신으로 신교육을 받은 안갑수와 결혼하였다. 그러던 중 삼일운동을 겪었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의 체험을 한 후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1925년 졸업할 때까지 경남 양산읍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31년까지 부산 초량 교회 위임 목사로 시무하던 중에 일제의 신사참배 문제를 단호하게 거절해야 된다는 안을 노회에 제출하여 투쟁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누가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나?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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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1-17, 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