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흑인들이 마음 놓고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1965년부터였다. 흑인 民權운동이 거세지면서 미 의회가 흑인들에 대한 투표제한 조항을 전국적으로 금지함으로써였다. 남북전쟁 직후 미국은 헌법을 수정하여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으나 남부 여러 주에선 납세실적이 없는 사람, 문맹자, 非行 경력자 등에 대한 투표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어 흑인들의 투표율은 20%선에 그쳤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나서야 흑인들이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선진국 영국에서도 1754년에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당시 인구 약800만 명의 3.5%인 28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물론 귀족들이었다. 차츰 선거권이 확대되어 갔다. 1884년에 가면 세금을 내는 모든 남자 家口主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1918년엔 세금을 내는가의 여부와 관계 없이 모든 성인 남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여자들에 대한 보통 선거권은 1928년에 주어졌다. 영국 민주주의의 시작인 1215년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이후 713년만에 全국민이 선거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1790년 일정규모의 재산을 가진 납세자에게만 투표권을 주었다. 1815년엔 30세 이상의 年300 프랑 이상 납세자가 투표권을 가졌다. 1820년엔 일정 재산 이상을 가진 유권자는 1인 두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엔 25세 이상의 200 프랑 이상 납세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인구는 전체 성인의 170분의 1이었다. 1848년 모든 남자 성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가 2년 뒤 3년 이상 거주 납세자로 제한되었다.
1851년에는 다시 남자보통선거권으로 돌아갔다. 1945년에 모든 여성 성인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유럽에서 선거권의 확대는 점진적이었다. 그 확대의 방향은 신분중심(봉건체제)-납세중심(부르조아 체제)-남녀 모두(대중 민주주의 시대)였다. 이 선거권의 확대 과정에서 수많은 혁명과 학살과 전쟁이 있었다. 수많은 애국자와 독재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독립의 정신이었던 토파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고 자라는 나무이다'는 표현을 했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全無한 한국은 유럽에서 어렵게 발전시킨 선거권을 1948년부터 공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푼의 사용료도 지불하지 않고서.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法治주의에서 선거의 자유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거의 자유를 민주주의라고 착각한 나머지 法治를 소홀하게 여겼다. 선거 민주주의를 먼저 구현한 뒤 법치주의를 확립하여 가는 순서를 밟고 있다. 1993년 소위 민주투사들이 집권한 이후엔 대통령이 앞장 서서 헌법과 법치를 파괴하였다. 선거의 자유는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법치 확립이 따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金大中, 盧武鉉 정권은 김정일 정권과 손잡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무력화시키는 반역적 행태를 보여 한국의 민주주의에 정면도전하였다. 지난 10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 도전세력에 응전한 과정이었다. 즉 민주주의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가의 시험대였다. 이번 12.19 선거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친북좌파 정권의 반역을 선거를 통해서 진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만큼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는 컸다.
한국인은 선거에 의한 정권교대를 1987년 大選 때부터 경험하고 있다. 정권은 세습, 쿠데타, 내전, 암살을 통해서 차지하는 것인데 우리는 20년 전부터 선거를 통해서 정권 담당자를 결정해왔다. 유럽에서 가장 일찍 정권의 평화적 교체를 전통으로 정착시킨 나라는 영국인데 1688년 명예혁명부터이다. 영국의 1215년 대헌장과 한국의 1948년 건국, 영국의 1688년 명예혁명과 한국의 1987년 대통령 직선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리고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어린 민주주의가 좌파정권을 선거를 통해서 종식시키려 한다. 反헌법적 좌파정권을 선거를 통해서 교체한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에 비춰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치학자들이 더러 있었다. 남미식의 군사 쿠데타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 이도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평화적으로, 선거를 통해서 좌파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李承晩, 朴正熙 대통령의 공과 두 사람이 만들어낸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 건설의 결정적 공헌자이다. 한국인의 저력에 확신을 가졌던 李 대통령은 자유민주 체제 채택, 농지개혁, 교육확충, 한미동맹으로 민주주의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으로 민주주의의 제도적, 물질적 토대를 건설했다.
富者나라가 아니면 절대로 民主국가가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정치학자 아담 프저워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가 만든 통계이다. 1950-199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현재 가치 기준) 이하인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시험했을 경우 그 평균수명은 8년밖에 되지 않았다. 1500~3000 달러 사이에선 평균수명이 1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 이상인 민주국가가 전복되어 독재로 돌아갈 가능성은 500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0달러 이상인 32개 민주국가는 단 한 나라도 체제가 붕괴된 적이 없다. 반면, 그 이하 69개 국가중 39개가 민주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약56%의 사망률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도 되지 않았던 李承晩 정부 시절에 왜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왜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을 부자나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가도 알 수 있다. 좌파들이 독재자라고 욕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요소를 지켜갔다. 사유재산권이 보장되었고, 선거는 어쨌든 치러졌으며, 언론의 자유도 대통령 비판만 제외하고는 허용되었다. 어느 대통령도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한국적 변형을 요구했을 뿐이다.
미국의 인권기관인 프리덤 하우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972-73년과 1976-77년 사이 두번만 「자유롭지 못한 국가」로 분류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유신통치기였다. 이 두번을 뺀 朴正熙, 全斗煥 통치기간 내내 한국은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다. 한국은 盧泰愚 정권이 들어선 1988년에 처음 「자유로운 국가」로 승격했는데 점수는 정치적 자유에서 2점, 시민적 자유에선 3점이었다. 점수는 작을수록 자유롭다는 이야기이다. 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는 「자유국가」중 한 등급이 올라 2점 국가로 되었다.
위의 통계는 한국의 인권상황이 소위 군사정부 시절에도 말살된 적은 없었으며 부분적 자유는 항상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朴正熙 全斗煥 정권을 비난하는 이들은 파시즘이니 전체주의니 스탈린 체제와 같다느니 하는 비교법을 쓴다. 프리덤 하우스의 통계는 이런 비난이 과장된 것이며 「권위적 정부」라고 표현하는 정도가 맞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자유 이외에 물질적 자유, 즉 굶주리지 않을 자유를 소위 군사정부가 국민들에게 준 점까지 감안한다면 박정희, 전두환 정부의 인권 점수는 더 올라갈 것이다.
지난 10년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한국 민주주의의 울타리인 안보와 정신엔 국가정체성을 훼손했다.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추행한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러나 얻어맞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전통과 제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된 담당자들인 보수시민층이 레프트 훅을 맞고도 버티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실수를 견딘다'
미국의 북한인권운동가 마이클 호로위츠는 3년 전 필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한국의 위대한 기성세대는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세계사적인 영웅들입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은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면 안듣습니다. 그 대신 '너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이래 저래 잘못했다'고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언젠가는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기성세대의 업적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엉터리 대통령과 젊은 세대의 실수를 견디어낼 수 있는 제도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각 세대는 자신들에 대한 主權을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이 많은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맡기고 충고를 하는 정도는 좋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인 것 같다. 미래는 젊은 세대의 主權지대이기 때문이다.
반역수구좌파세력에 대한 한국 민주주의의 반격은 보수시민층을 중심으로 하여 이뤄졌고 드디어 청장년층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인구 구조의 변화가 있었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50세 이상 유권자가 2002년엔 30%이던 것이 2007년엔 34%가 되었고 이 추세는 더 심해진다. 어차피 좌익은 한국사회에서 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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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미국의 권위 있는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www.freedomhouse.org)의 세계인권상황에 대한 최신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쟁과 테러의 와중에서도 자유를 향한 인류의 진보는 계속되고 있다.
이 조사가 맨첨 시작되었던 1973년에 조사대상 150개국중 '자유국'으로 분류된 나라는 43개국(29%)이었다. 올해(2003년) 조사대상 192개국중 89개국(46%)이 자유국으로 분류되었다. '부자유국'은 지난 30년 사이 69개국(46%)에서 48개국(25%)으로 줄었다. 자유의 확대란 것이 세계사의 진보임을 잘 보여준다.
이 세계사의 진보에 저항하고 있는 것은 북한 김정일 정권이다. 지난 30년간 단 한번도 프리덤 하우스의 '최악의 인권탄압국' 명단에서 빠지지 못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 정권이 자유를 기준으로 할 때 세계사의 흐름을 역류한 守舊세력이란 것은 이런 통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1973년 아시아-태평양 국가 32개국중 자유국은 8개국이었다. 30년이 흘러 이 지역의 자유국은 18개국으로 늘어났다. 북한은 이 지역의 자유의 확대 행진에서도 탈락했다.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자유국으로 분류된 89개국(조사대상 192개국중 46%)의 국내총생산 합계는 세계 전체의 89%나 되었다. 부분자유국의 비중은 5%, 부자유국은 6%에 불과했다. 이는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지름길임을 보여준다. 프리덤하우스는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를 기준으로 하여 자유, 부분자유, 부자유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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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007년: 좌경화의 도전 15년
*金泳三 정부: 좌파宿主 정권의 현대사 파괴, 국가의 본질 훼손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 부정: 중앙청 파괴,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군사문화 부정. 권위와 기율의 파괴를 민주화로 오해.
-'민족이 이념과 동맹보다 우선한다'-좌파식 對北觀
-한완상, 김정남의 영향
-韓美 균열, 北核 대처 실패로 對北주도권 상실.
-전교조 복직 허용
-3당 합당 구도 파괴로 김대중 집권 길 열다: 김종필 탈당, 나중에는 이인제 탈당 방조
-12.12 사건, 5.18 사건 수사로 대구-경북세력 이탈
-개방경제의 관리실패로 외환위기 초래, 좌파집권 돕다.
*金大中 정부: 권력의 좌경화
-6.15 야합으로 김정일에 굴종, 하수인화.
-6.15 선언으로 친북세력에 반역면허증 발급한 셈.
-4억5000만 달러 對北불법송금으로 김정일에 약점 잡히다.
-反共언론사 세무조사로 좌파 강화.
-호남편중 인사로 지역주의 강화.
-헌법무시, 좌파단체 예산 지원.
-野圈 분열시켜 노무현 정권 탄생.
-김종필의 신원보증 역할
*盧武鉉 정부: 전면적이고 사회적인 좌경화
-청와대, 국회 등 정권 핵심에 김정일 추종자 포진.
-국가 공권력의 無力化, 또는 반역화
-국가이념 변조 기도
-韓美동맹 와해 단계
-남북한 정권의 反대한민국 공조
-헌법 파괴 솔선
-선동의 일상화, 정책화: 양극화, 계급갈등 선동
-對北퍼주기, 북한인권 외면, 국가채무 倍增, 낭비적 복지정책
11. 한국 민주주의의 반격: 反좌파 여론의 大勢化
*여론의 실용화: 경제중시, 능력중시
*여론의 우경화: 反김정일, 韓美동맹 중시, 현대사 긍정
*민주주의 제도의 작동: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사유재산 제도
*좌경화 15년에 대한 반동
*대한민국 세력과 김정일 세력, 무능 세력과 유능 세력, 헌법파괴 세력과 헌법수호 세력의 대결.
*쟁점: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가? 반공주의의 힘만으로는 안된다. 反共민주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15년은 한국 민주주의가 抗體를 만들어간 시기였나? 아니면 회복이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 시기였나? 두 차례 선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2.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
*한국의 민주주의는 富國强兵派(제도파)와 인권파의 경쟁과 견제로 이뤄졌다. 민주투사의 독점물이 아니라 두 세력의 합작품이다.
*어린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산세력에 의해 추행당했다.
*한국에서 정상적인 정부가 다시 들어서면 김정일 정권을 약화시키고 자유통일을 한 다음에 一流국가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
*쟁점: 한국의 민주주의가 국가엘리트와 교양 있는 국민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13. 우리는 민주시민인가?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白衣從軍, 大同단결, 分進合擊
'한반도의 이념-무장대치상황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善과 惡, 거짓과 진실이 대결하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1. 彼我구분의 顚倒: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主敵으로 삼아 공격했고 主敵 김정일 정권을 상전처럼 섬기고 굴종했다.
2. 좌경이념: 이런 彼我 식별능력의 마비현상은 그의 反헌법적-反국가적 좌경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좌경이념은 대한민국적 가치(헌법, 정통성, 국군, 보수층, 韓美동맹)에 대한 증오심, 계급투쟁적 분열책동, 從金(김정일에 대한 추종)정책으로 표현되었다. 盧 정권은 헌법에 담긴 대한민국의 국가이념과 반대되는 가치관에 사로잡혀 국가의 進路를 근본적으로 잘못 잡았기 때문에 이 정권의 정책의 타당성과 효율성을 따진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
3. 선동에 의한 國憲문란: 그의 국정운영 방식은 좌파적 거짓 선동과 法治(헌법 및 사법부)파괴를 특징으로 한 國憲문란행위의 연속이었다.
4. 좌익의 국가조종실 장악: 그는 측근과 정권 핵심부에 전향했다는 증거가 없는 極左공산주의활동가들(386 主思派)과 親北前歷者들을 대거 배치하여 식민지型 관료집단을 지휘하게 하였다. 90만 관료집단은 이들의 반역적(反헌법-反국가적) 정책을 맹목적으로 집행하는 부역집단이 되었다.
5. 간첩 등 비호: 노무현 정권은 송두율 민경우 강정구 한통련 한총련 등 反국가단체, 利敵단체, 간첩, 反국가 행위자 등의 反대한민국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비호하고 이런 반역행위를 저지하려는 공무원 등에게 불이익을 주었다. 김정일 정권의 對南赤化戰略에 동조하는 위헌적 정당 민노당에 대한 해산절차를 밟지 않고 友黨으로 대우했다.
6. 좌익의 외곽포진: 정부기관 및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의 핵심부서에 좌익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배치하였다.
7. 좌익무장폭동 방조: 盧 정권은 평택 등지에서 反美좌익무장폭동이 발생하자 군인들을 무장해제시킨 채 내어보내 얻어맞고 도망다니게 했다. 좌익들의 불법폭력 시위를 강경 진압한 경찰청장을 몰아냈다.
8. 태극기세력 구박: 盧 정권은 반역세력을 비호하는 한편으로 애국운동 세력을 감시, 탄압하고 태극기를 구박했다. 친북좌익의 깃발 한반도기를 위해 태극기를 내렸다.
9. 對南적화노선 동조: 盧 대통령은 6.15 선언이 열어젖힌 반역의 문을 통해서 김정일 정권의 對南적화공작을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핵무장 허용, 국가보안법 폐지기도, 韓美연합사 해체 추진, 연방제赤化통일 찬성 등.
10. 北核비호: 특히 김정일의 핵개발을 '일리가 있다' '방어용이다'라고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지원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최악의 위기에 빠뜨리는 利敵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北核에 대한 유일한 억지력인 韓美연합사 체제를 붕괴시키고 韓美동맹을 껍데기로 만들어감으로써 국가를 敵前무장해제시키려 하고 있다.
11. 조총련 비호: 盧 정권은 한통련과 짜고 民團이 反국가단체 조총련에 굴복하여 투항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
12. 反軍선동 및 害軍정책: 국군통수권자인 盧 대통령은 국군을 '인생 썩히는 곳'이라고 폄하하고 국군의 역대 지휘부 장성들을 공개적으로 저주함으로써 군 지휘계통을 문란시키는 反軍선동에 앞장섰다. 군복무기간 단축 계획 추진, 50만 감군 추진, 휴전선의 對北방송 중단 등 일관된 害軍정책으로써 국군의 戰力을 약화시켰다. 이런 反國軍 행위를 함에 있어서 허위사실 유포(자신은 戰時작전통제권이 없다는 식으로)에 의한 對국민사기숫법을 동원했다.
13. 국군포로 및 납북자 외면: 북한정권, 즉 김정일과 북한노동당 및 북한군을 강화시키는 對北퍼주기를 계속하고 김정일에게 충성한 간첩, 反국가단체(한통련)를 감싸거나 제휴하면서 국군포로, 탈북자, 납북자의 인권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국제사회의 對김정일 인권 압박을 방해함으로써 오히려 동족말살과 인권탄압을 비호했다.
14. 국가이념 變造: 국가위원회를 많이 만들어 이를 좌익들이 장악하게 한 뒤 대한민국의 과거와 약점을 캐도록 하는 한편 사법부의 확정판결을 뒤엎고 김일성 추종 공산폭력혁명 분자들의 반역행위를 표창하도록 하여 국가이념과 정체성의 變造를 계속하고 있다.
15. 세금폭탄: 盧 정권은 高額납세자를 적대시하고 양극화를 선동하면서 세금폭탄으로 거둔 세금을 김정일과 북한군을 돕는 데 낭비하였다. 자기 편의 억지(지율 단식투쟁)에는 쉽게 굴복하여 國富를 축냈다 .
16. 조국에 대한 적개심: 盧 대통령과 열린당 정권이 저지른 이상의 반역적 행태를 일관하는 흐름은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이고 김정일 정권에 대한 好感과 굴종이다. 대한민국은 그의 主敵이고 김정일 정권은 그의 主人이었다.
* 총괄: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인 대한민국의 건국을 북한의 김일성 괴뢰정권과 같은 '분열정권의 수립'이라고 저주했다. 그는 북한정권의 對南赤化전략의 핵심인 연방제안을 지지했다. 이는 대한민국을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과 同格으로 격하시키고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지역을 포기하자는 뜻이다. 그는 국가위원회가 대한민국 전복을 목표로 한 공산폭력혁명기도자들을 민주화운동가로 결정하여 국가의 이름과 예산으로 표창하고 보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또 지지자들을 향해서 '시민혁명'을 선동했다.
그는 反국가적 인사들과 조직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이런 反국가적 활동의 총본산인 김정일 정권에 대해선 굴종과 비호로 일관했다. 그는 한국의 대통령은 의무적으로 김정일 정권을 主敵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헌법의 명령을 거역했다. 그는 국군이 김정일 정권을 主敵으로 보지 말고, 북한군의 미사일과 핵을 위협으로 보지 말도록 강요하는 한편 대한민국의 敵인 북한정권, 간첩, 反국가단체, 利敵단체들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했다. 대한민국 수호 세력인 국군, 애국단체, 정통언론, 보수층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危害행위로써 국가수호 의지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는 정부의 공권력을 利敵목적으로 악용하고 거짓말을 퍼뜨리고 계급투쟁적 양극화를 선동하는 숫법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총공세를 지휘했다. 국군통수권자가 좌경이념-좌익인맥-좌경정책을 일체화한 정권의 힘으로써 국민국가와 민주제도를 공격한 것이다.
헌법제66조2항은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保全,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고 규정했다. 그는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추행했다. 잘 속는 국민들, 특히 북한동포의 떼죽음에 대한 동정심과 김정일에 대한 분노와 대한민국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국민들, 잃을 것이 많을수록 싸움을 피한 비겁한 부자들, 어떤 형태의 권력이든 무조건 추종하는 식민지型관료집단, 애국심이 없는 기업인들, 위선적 지식인들이 '노무현의 亂'을 불렀다.
2007년 大選과 2008년 총선은 국민들이 대각성하여 민주적 방법, 즉 선거에 의한 방법으로, 평화적으로, 이 國憲문란 사태를 진압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보여줄 것이다.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해지면 피를 흘리는 內戰的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로서는 속느냐, 죽느냐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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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엔 개발 기구가 매년 발표하는 삶의 질 랭킹에서 최근엔 26등이었다. 선진국 수준이다. 스위스의 국제경쟁력 측정 기관에서 올해 발표한 통계에선 한국의 경제부문 경쟁력이 세계 11위로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자부할 수 없는 것은 공직자 부패 때문이다. 좌파정권은 부패 척결을 내걸었으나 建國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의 아들 두 명이 부패 혐의로 구속되고, 현직 국세청장이 수뢰혐의로 구속재판을 받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정치부패 혐의로 실형을 받은 두 정치인을 사면복권시키자마자 장관으로 임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부패혐의로 실형을 살고 나온 아들을 출마시켜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부패가 만연하는 나라는 아무리 잘 살아도 선진국 대접을 받을 수 없다. 한국이 一流국가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부패문제를 재집권한 보수세력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5년 뒤 다시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
청렴국가 랭킹에서 한국은 43등
국제투명성위원회(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각국의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 랭킹이 있다. 정부와 공무원들의 부패를 측정하는 지수이다. 2007년 9월에 발표된 랭킹에서 한국은 179개국중 43등(수치가 낮을 수록 청렴)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179개국중 34등이다. 경제수준에 비교하여 공직자의 청렴도는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대체로 부자나라(1인당 국민소득 기준)가 깨끗한 나라이다. 청렴한 나라 랭킹과 국민소득 랭킹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1인당 국민소득 순위).
1. 덴마크(7)
핀란드(11)
뉴질랜드(27)
4. 싱가포르(24)
스웨덴((9)
6. 아이슬란드(4)
7. 네덜란드(10)
스위스(6)
9. 캐나다(14)
노르웨이(2)
11. 호주(16)
12. 룩셈부르크(1)
영국(12)
14. 홍콩(26)
15. 오스트리아(13)
16. 독일(18)
17. 아일랜드(5)
일본(19)
19. 프랑스(17)
20. 미국(8)
21. 벨기에(15)
22. 칠레(50)
23. 바르바도스(42)
24. 세인트 루치아(64)
25. 스페인(25)
우루과이(61)
27. 슬로베니아(32)
28. 에스토니아(41)
포르투갈(33)
30. 이스라엘(30)
세인트 빈센트 앤 그레나딘스(74)
32. 카타르(3)
33. 말타(37)
34. 대만(35)
마카오
아랍에미레이트(20)
37. 도미니카(77)
38. 보츠와나(56)
39. 사이프러스(28)
헝가리(45)
4. 체코(46)
이탈리아((21)
43. 한국(34)
남아프리카(68)
46. 바레인(29)
코스타리카(73)
부탄(119)
49. 케이프 베르데(101)
슬로베키아(46)
청렴도 上位 랭킹 20위 안에 든 나라들중 17개국은 1인당 국민소득 랭킹이 20위 안에 든다. 즉 가장 부자인 나라들의 공무원들이 가장 깨끗하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부자나라이면서도 청렴하지 못한 나라들이 몇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1위인 이탈리아는 청렴도 랭킹에선 41위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위인 카타르는 청렴도에선 32위이다.
반대로 부자 나라가 아닌데도 청렴도 랭킹은 높은 나라들이 있다. 말레이시아는 1인당 국민소득은 62위인데 청렴도는 우리나라와 같은 43위이다. 부탄은 179개국중 1인당 국민소득이 119등인데, 청렴도는 46등이다. 칠레는 1인당 국민소득은 50등인데 청렴도는 22등으로 선진국 수준이다. 청렴한 나라 20개국중 17개국이 기독교 국가이고 싱가포르, 일본, 홍콩 세 나라는 유교문화권이다. 부자일수록 깨끗하다는 원리는 사람이나 국가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보수세력의 大選패배를 예감하고 月刊朝鮮 '편집장의 편지'에서 이런 대목의 글을 남겼다.
<보수세력들은 세미나를 좋아합니다. 좋은 호텔을 골라 그런 모임을 열고 보수논객들을 불러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면 한때 한국 사회를 주름잡았던 인사들이 좋은 옷을 입고 나타나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나라를 걱정합니다. 그리고 그뿐입니다.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하여 싸우는 단체나 사람들을 위하여 손발도 돈도 빌려 주지 않습니다. 마음만으로써의 憂國, 거리로 나서지 않는 憂國이란 自慰, 또는 가짜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호텔에 들를 때마다 감탄합니다. 귀족 같은 모습을 한 善男善女들이 로비, 객실, 음식점에서 우아하게 어울려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태평성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들을 사정권 안에 넣고 있는, 시간 당 50만 발을 쏠 수 있는 북한군의 장거리포 같은 것들을 저분들이 의식하고 있을까, 좌익들이 국가를 배신하는 행동을 할 때 저분들이 맞서 싸울까, 저분들의 子弟들은 軍 복무를 다했을까, 저 돈많은 사람들이 좌익과 싸우는 보수세력을 위해서 체제유지비를 한푼이라도 낸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행동도 희생도 부담도 하지 않고 체제의 보호막만 공짜로 이용하려 든다면 그런 보수야말로 守舊, 寄生세력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귀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정신면에선 노예이고 창녀들일 것입니다. 한국 보수세력의 自力更生은 기본적으로 노예의식, 창녀의식을 버리고 조국의 주인이 되자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主人이 되자면 용기·희생·공부가 필요하고 親北좌익을 순화·전향시킬 만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主人이 되면 그래서 고생스럽습니다. 좌익 400만 시대에 보수세력이 대한민국과 함께 살아남으려면 그런 고생을 즐겨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준 5년이란 기회
그해 12월19일 밤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가 50만 표 차이로 노무현 후보에게 지는 것을 보고 나는 '편집장의 편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역사는, 대한민국은, 핏발 선 主流層의 손을 뿌리치고 盧武鉉 후보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하여 5년이란 기회를 주었다. 이 5년 사이에 한국의 주류층이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크나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 5년간 기성세대가 나서서 젊은, 좌파 세력을 설득하고 교육하여 이들의 위험한 國家觀과 對北觀, 때로는 저질로 치닫는 반항심을 순화할 수 있느냐가 5년 뒤의 大選 승자를 결정할 것이다. 이들 젊은, 좌파들에게 교양과 公民윤리와 정의감을 심어 주어야 하는 책무는 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에게도 주어졌다.
李會昌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左右대결의 체제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삼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했으나 이념 무장 대치상황의 한반도 조건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李會昌 후보는 마시기 싫어했던 쓴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그는 이 시련을 통해서 뒤늦었지만 이념적으로 무장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났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의 주류층도 수렁에 빠진 李會昌 후보를 건져내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우리 곁으로, 집 안으로 들어온 反美·親北 세력의 엄청난 힘을 알고 전율하였다. 그들은 金大中 정부 5년 동안 대한민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이번의 가정內 大選戰에서 보수층이 안간힘을 썼듯이 앞으로는 대담하게 나서야 한다. 보수층이 가진 현대사의 경험을 후배, 자녀와 나누고 金正日의 악마성과 대한민국의 苦鬪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미군이 6·25 전쟁 때 1000명 정도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학생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앞으로 5년간 보수층이 나서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매질하고 고쳐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점은 고마움일 것이다. 부모 세대에 대한,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 등 우방국에 대한, 우리 민족사의 위인들에 대한 고마움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보수층은 젊은 그들에게 제대로 미워할 줄 아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金正日과 그를 추종하고 굴종했던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북한동포들과 한국內의 소외층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이번 선거 과정과 그 결과는 우리의 거듭 태어남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主流 보수층은 盧武鉉 당선자를 도와야 한다. 그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를 기도해야 한다. 盧武鉉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서뿐 아니라 金正日에 대해서도 한국민의 자존심·국가이익·민족 정통성을 수호해 줄 수 있도록 보수층이 충고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아스팔트 우익'의 등장
그 석달 뒤 서울시청 광장에선 '反核反金 3.1국민대회'가 열렸다. 10만 명의 보수층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들의 머리 위로 대형 성조기와 태극기가 지나가는 장면을 상공에서 찍은 사진은 애국운동의 한 상징이 되었다. 애국단체들이 연합하여 주최했던 그해 6.25 국민대회, 그 다음해 10.4 국민대회는 한국의 보수층도 좌익 못지 않게 아스팔트 위로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2004년 10월4일 국민대회는 사상최대의 인파를 동원했다. 이날의 주제는 국가보안법 死守였다. 대회가 끝나고 청와대로 평화롭게 행진하는 것을 경찰이 막고 아버지뻘되는 6.25 참전용사들을 향해서 물대포를 쏘고 방패로 짓이겼다. 친북좌익 집단에 정권을 넘겨준 보수층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검찰은 대회가 있은 지 3년이 지난 지난 가을 이 대회의 운영위원장이었던 徐貞甲 국민행동본부장을 시위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하여 재판이 진행중이다.
'아스팔트 우파'의 상징적 존재가 된 국민행동본부의 徐 본부장은 좌익들로부터 가장 많은 고발 고소를 당한 인물이 되었다. 이 단체가 거의 매주 신문에 내는 선명한 광고는 1회당 300~400명이 1, 2만원씩 보내주는 후원회비로 유지되어 왔다. 2002년 대통령 선거의 패배 이후 많은 국민들이 '애국은 지갑과 손발을 통해 표현됩니다'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다.
보수층은 2004년 3월 국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에 기대를 걸었으나 상황은 하룻만에 逆轉되었다. KBS와 MBC의 선동방송이 반격에 나서고 親盧-親北세력이 촛불로 밤거리를 뒤덮자 70%의 국민들도 '어떻게 나랏님을 그렇게 할 수 있나'라면서 탄핵반대로 돌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전멸의 위기에 몰렸으나 朴槿惠 대표가 善戰하여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 재판에서 盧 대통령의 위헌적 행동을 인정하고 엄중경고한 뒤 대통령직 파면을 결정하지는 않고 改悛(개전)의 기회를 주었다.
그놈, 별놈, 인생 썩히는 곳
노무현 대통령은 복직하자마자 反헌법적 언동과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대학생들 앞에서 한 공개 강연에서 보수층을 개혁할 줄 모르는 '별놈'이라고 했다. 그 뒤 헌법을 '그놈'이라고 저주했다. 국군을 '인생 썩히는 곳'이라고 부정했다.
2004년 탄핵재판에서 그를 살려주었던 헌법재판소는 그해 가을 '신행정수도 이전'으로 위장한 '수도이전', 즉 遷都(천도)계획에 대해서 '사실상의 수도이전이므로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이다'고 위헌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을 받아내는 일을 뒷받침했던 이가 李明博 당시 서울시장이었다. 한나라당과 열린당은 그 뒤 수도를 사실상 분할하는 행정복합도시로 개념을 바꾸어주었고 이 사업에 투입된 토지보상비가 강남 일원의 부동산 값을 올렸다.
2005년부터 민심이 돌기 시작했다. 2004년 이후 치러진 모든 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도적 連勝을 계속했다. 노무현 정권과 친북좌익 세력의 무능, 부패, 행패가 국민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들은 국민과 역사 앞에선 안하무인이고, 김정일 앞에만 서면 한 없이 비굴해졌다. 국제통계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만족도와 국가운영에 대한 만족도가 팔레스타인 같은 內戰상태의 나라 수준으로 떨어졌다. 80% 이상의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든 대통령이었다.
2005년 여름엔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파괴하려는 친북좌익들과 이를 방관하는 盧 정권의 행태가 보수층을 분노케 했다. 6.25 때 중공군을 투입하여 北進통일을 막았던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공언했던 盧 대통령은 한번도 맥아더 장군을 옹호하지 않았다. 맥아더 동상 앞에선 70代 老兵들이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20, 30代의 좌익행동대를 향해 계란을 던졌다. 그 이듬해엔 평택에서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좌익폭도들이 쇠파이프로 무장하여 총검 착용이 금지된 군인들을 두들겨 패 군인들이 달아나게 만들었다. 그래도 KBS, MBC는 폭도들 편을 들었고 국무총리는 폭도와 경찰을 모두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盧 정권은 좌익들의 폭력시위를 엄정하게 진압한 경찰청장의 옷을 벗김으로써 '우리 편을 너무 심하게 다루면 안된다'는 암시를 주었다.
수도권 민심 잡은 청계천 복원, 교통체계 개편
자기편의 행패를 끔찍이 봐주던 노무현 정권은 지율이란 여승이 단식을 하면서 경부고속전철 공사를 막고나서자 멋대로 천성산 터널 공사를 중지시켜 대구~부산 구간의 개통을 수년간 지체시켰다. 대통령의 권한 남용으로 국가는 약2조5000억원의 손해를 보았다. 건축비가 1억 먹히는 근사한 집 2만5000채를 지을 수 있는 돈을 억지부린 여승에게 선물한 셈이다. 이래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었고, 성실한 사람들이 그래도 더 많았던 덕분이다.
2005년 가을 서울 청계천이 복원되었다. 盧 정권이 國論을 분열시키고 국가정체성을 해체해가는 가운데 그래도 건설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감동을 준 사업이었다. 李明博 서울시장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업적을 유형적으로 남겼다. 그는 또 대중교통체계 개선을 이룩하여 수도권 서민층의 민심을 잡았다. 유권자의 50%를 차지하는 수도권 民心이 결국 大勢를 결정지었다.
2006년 여름, 가을은 韓美연합사 해체와 북한 핵실험으로 시끄러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미국 대통령과 공유하고 있는 戰時작전지휘권을 '미국 대통령이 독점하고 있고 한국 대통령은 국군에 대해서도 지휘권이 없다'는 거짓선동으로써 韓美동맹 집행기구인 연합사 해체를 강행하려 했다. 올해 별세한 金聖恩 전 국방장관을 비롯한 老兵들과 전직 외교관들, 그리고 절대 다수 국민들이 반대했음에도 盧 정권은 미국의 마지 못한 동의를 얻어 연합사 해체 계획을 확정, 그 실천을 다음 정권에 넘겼다. 민주국가이지만 제왕적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매국적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더구나 북한이 핵실험을 하여 한미동맹의 강화가 절실해진 시점을 택해서 盧 정권은 안보에 구멍을 냈다. 이런 어이 없는 반역적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쌓이더니 드디어 거대한 민심의 변화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2006년 하반기였다.
차기 대통령감 여론조사에서 李明博 전 서울시장이 1위로 올라오고 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가 그 뒤를 따랐다. 좌파 인물들은 여론조사 지도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2006년 5월31일 지방선거에서 목에 칼질을 당하고도 한나라당을 완승으로 이끌었던 朴 전 대표였지만 韓美연합사 해체와 북한 핵실험이란 안보위기에서 失機했다. 李 전 시장도 마찬가지였으나 朴 전 대표가 더 많은 손해를 보면서 지지율이 逆轉되었다. 안보위기가 닥치자 국민들이 관리능력이 입증된 '유능한 남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를 넓힌 보수층
2007년 대통령 선거 결과는 사실상 8월19일의 한나라당 競選에서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경선에서 李明博 후보가 예상외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이후 그의 지지율은 50~60%, 鄭東泳 후보 지지율은 1 대 1 가상대결에서 20~25%였다. 李明博-朴槿惠 두 슈퍼스타가 근 반년 가까이 국민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바람에 좌파 후보들의 경쟁은 기사거리가 되지 않았다. 열린당은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위장폐업-야반도주-신장개업 같은 당의 해체, 통합, 재해체, 재통합의 쇼를 벌였다. 국민들은 속아주지 않았다. 김대업 사기 때보다는 훨씬 근거가 있는 BBK 폭로도 먹혀들지 않았다. 좌파들을 선거판에서 공황상태로 몰고간 것은, 다수 국민들이 李明博 후보가 BBK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찍겠다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파는 국민들을 속이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국민들의 방송에 대한 불신과 김대업 학습 효과를 李明博 후보가 거두어 들인 셈이다.
2005년 이후 강화되고 고착된 민심은 청장년층의 脫좌파 실용화와 기성층의 보수결집 흐름의 合流였다. 20代의 이명박-한나라당 지지율이 부모 세대의 지지율과 비슷해졌다. 이런 보수정치시장의 확대는 李會昌씨의 출마를 불렀다. 李會昌씨의 출마를 보수분열이라고 우려하는 시각이 강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보수경쟁에 의한 보수확대를 가져왔다. 李會昌 출마는 李明博 후보의 중도화를 견제하고 정동영 후보의 충청권 진출을 봉쇄하는 2중 효과가 있었다. 李明博 후보에 대한 테러 가능성도 줄여주었다. 李會昌 후보가 선거기간중 공약한대로 보수新黨을 만들어 총선에 임한다면 한국의 보수층은 선택의 여지가 넓어지고 李明博 대통령의 제2 金泳三화를 견제할 수단을 갖게 된다.
金泳三의 보수 배신
한국의 보수층은 보수를 자처했던 金泳三 대통령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다. 1992년 12월 大選에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약200만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金泳三씨는 盧泰愚 5년간의 민주화 실험기를 정리하고 한국을 一流국가로 도약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金大中씨는 은퇴를 선언했고, 국회에서 민자당은 안정 과방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文民대통령이란 그의 선전에 속아주는 국민들도 많았다.
그는 굴러온 복을 차버렸다. 그가 중용한 좌파적 참모들을 통해서 그의 뇌구조 속으로 좌경적 역사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좌파의 宿主로 변해 보수세력을 분열시켜 金大中의 정계복귀를 허용하고 나라를 外換위기로 몰고가더니 드디어 좌파정권 등장의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말자 좌경적 참모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부정적 역사관과 국가관, 그리고 애매한 對北觀의 포로가 되었다. 좌파 후원자 역할을 열심히 하면서 좌파들이 박수치는 일만 골라서 한 그였다. 무늬는 보수였으나 한 일은 좌파였다. 좌파 10년이 아니라 金泳三 시대까지 넣어서 좌파 15년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공부가 없는 보수가 전략전술에 능한 좌파에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金泳三이다. 李明博씨도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어 金泳三과 꼭 같은 유혹에 빠질 위험에 놓여 있다.
먼저 金泳三 대통령이 한 일들을 본다.
1. 좌경적 역사관을 가진 참모들을 요직에 썼다.
2. 취임사에서 북한정권의 對南전략에 동조했다. ‘민족이 동맹보다, 이념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했다.
3. 장기수 이인모를 북한에 보냈으나 기대했던 납북어부를 데려오지 못했다.
4. 건국 후의 자랑스런 현대사를 정통성이 없는 부끄러운 역사라고 깡그리 매도했다.
5. 소위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역대 대통령 집무실을 철거했다. 민족정기를 되찾는다면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건물인 옛 중앙청도 철거했다. 근대화의 상징인 남산외인아파트도 폭파시켰다. 이를 중계방송했다. 선배세대의 땀이 서린 건물이 무너질 때 박수를 쳤던 국민들은 한국 경제가 무너질 때 피 눈물을 흘려야 했다.
6. 6.25는 內戰이니 기념할 필요가 없다면서 전쟁기념관을 없애려다가 국민들의 반발을 사 계획을 거두어들였다.
7. 反자본주의적 언행을 많이 했다. 재산 많은 사람이 고통 받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직자 재산등록을 실시하고는 가장 재산이 많은 공직자는 犯法 여부에 상관 없이 물러나게 했다. 지금 법무장관인 정성진씨는 부인이 받은 유산이 많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사직해야 했다.
8. 박정희 시절 국회가 통과시켰던 국민 교육 헌장을 없애버렸다.
9.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日帝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유를 갖다대더니 초등학교로 改名했다. 국민학교 명칭 변경 운동을 주도했던 이는 북한 간첩으로 밝혀져 체포되었다.
10. 北核 위기가 닥쳐오자 對北강경책을 쓰려는 클린턴 행정부에 반대했다. 미국은 할 수 없이 한국정부를 따돌리고 북한과 제네바 협정을 맺고는 경수로 건설 등의 부담을 한국에 돌렸다. 韓美공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국이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하려고 하니 북한을 자극한다면서 반대했다.
11. 전교조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켰다.
12. 군사문화를 매도했다. 文民정부라는 말로써 군대를 소외시켰다.
13. 보수대연합 구도인 민자당을 해체하고 김종필을 추방하고, TK 세력을 배제하여 보수 분열을 가져왔다. 이것이 김대중 정권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14. 역사의 평가에 맡겼어야 할 12.12 사건과 광주사태를 소급입법으로 재조사하여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냈다.
15. 자신은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1000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선거자금으로 제공받았다. 그는 노태우 비자금이 폭로되자 “나는 결백하다”면서 “내가 청와대에 들어오니 금고가 있었다. 철거시켰다”고 자랑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퇴임할 때 그 금고에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넣어 인계했다고 한다.
16. 노태우 전 대통령이 비자금 수사로 구속되던 바로 그때 김영삼 정권은 간첩수사 등에 쓰여야 할 안기부의 돈(또는 대선잔금) 1000억원을 빼내 여당 선거운동에 쓰게 했다.
17. 일본을 향해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말했다. 일본은 외환위기 때 긴급지원을 애원하는 金泳三 정부의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한국이 IMF 관리체제로 갈 수밖에 없도록 했다. 일본이 그의 버르장머리를 고친 셈이다. 그는 퇴임 후 일본의 한 대학교에 출강하여 재일동포들이 민족적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18. 신한국당 총재인 그는 李仁濟씨가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하고 출마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19. 선거 직전에 터진 金大中 비자금 수사를 중단시켜 그의 당선을 도왔다.
20. 다른 사람을 실명제로 묶어놓고는 아들의 실명제 위반을 방치하다가 아들을 결국 감옥에 보내야 했다.
21. 그가 부정적 역사관에 빠져 보수세력을 배신하고 대한민국 건국의 선배들을 욕하고 돌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좌파의 집권은 없었을 것이다. 김영삼의 가장 큰 업적은 좌파정권 10년을 위한 카피트를 깐 점이다.
李明博과 金泳三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본다.
1. 두 사람 다 장로이고, 큰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는 오만의 근거가 될 수 있다.
2. 두 사람 다 안보나 이념문제의 중대성에 대한 自覺이 부족하다. 이런 상태에선 좌경적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다.
3. 제왕적 대통령직에 오르기만 하면 아부족들에게 둘러싸일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한국의 오랜 정치문화이기도 하다.
4. 좌파 경력을 가진 참모들이 주변에 많다.
5. 李明博씨는 큰 조직을 운영한 경험이 있고 서울시장 시절 행정능력을 평가받았다. 金泳三은 생산적 조직운영의 경험이 全無했다.
6. 李明博씨는 명분론을 싫어하고 金泳三은 명분론의 포로가 되었다.
7 .李明博씨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위선적 국정운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회사도 간부들 의견을 듣고 끌고 가야지 말단 직원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망한다. 대통령이 나라를 민중 중심으로 운영하려 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유권자들이 대통령의 선의에만 목을 매는 것은 보조 자일 없이 인수봉을 오르는 것과 같다. 정치이든 경제이든 견제와 경쟁구도에 놓여야 부패, 무사안일하지 않는다. 李會昌씨가 만들겠다는 선명보수 정당이 견제 및 경쟁 구도를 세울지 모른다. 한국의 보수층은 이명박씨가 배신하지 못하도록, 또 스스로 배신당하지 않도록 지혜를 짜내어야 한다. 속는 사람이 속이는 사람보다 더 나쁠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보수층이 깨어 있어야 한다. 不義를 보면 사나와지는 '야윈 늑대'가 되어야 한다. 이번 기회에 보수自淨이 이뤄지지 않으면 5년 뒤에 더 극악한 좌익의 등장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한 경제관료 출신의 전직 장관은 '이번에 보수세력이 정권을 되찾아오더라도 사회 지도층과 고위 공직자의 부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5년 뒤에는 좌파에 또 정권을 내주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정부내의 특권층 부패를 거론했다.
'검찰, 경찰, 감사원, 국정원, 국세청 직원과 고위 공직자 부패를 집중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정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었던 시절이 아닙니다. 공무원 부패는 엄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정치인도 한번 부패문제로 사법처리되면 영구적으로 공직취임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국민행동본부가 '보수自淨운동'을 제창하고 나섰다. 정직, 겸손, 용감해져야 정권을 다시 빼앗기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한국의 국가 청렴도는 1인당 국민소득 랭킹보다 훨씬 아래이다. 부자나라일수록 공직자는 청렴한데 우리나라는 거꾸로이다. 이는 한국인의 관습이나 민족성과도 관련이 있지만 이젠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을 때이다.
어느 나라이든 부패척결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깨끗한 보수가 아니면 보수의 자격이 없다. 깨끗하지 않은 지도층은 체제 위기가 닥쳤을 때 싸우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아스팔트 우파 속에서 富者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자유민주체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이들이 체제수호의 투쟁을 외면했다. 李明博씨 또한 '싸울 줄 아는 부자'는 아니었다.
一流국가를 여행해보니 하나의 법칙이 있었다. '싸울 줄 아는 장돌뱅이가 一流국가를 만든다.' 자본가들부터 깨끗해져야 싸울 줄 알게 된다. 기업인과 종교지도자들은, 상속문제를 투명하게 해야 싸울 줄 알게 된다. 비자금 조성을 포기해야 싸울 줄 알게 된다. 지도층의 마음이 가난해야 나라는 부자가 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부자들이 싸워서 만들어낸 제도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좌익 반란을 어떻게 진압했는가?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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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10, 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