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국은 무역액이 7000억 달러를 넘었다. 수출이 약3600억 달러였다. 1970년에 수출이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넘었다. 38년만에 360배 달성! 이런 기적적 성장의 뒤안길에는 수출작전의 사령탑 상공부 공무원들의 피눈물이 있었다. 1970년대 중화학 공업 건설의 실무 책임자였던 吳源哲씨(상공부 차관보 출신)의 회고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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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에 실패를 하면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드디어는 국가위기가 닥쳐온다.
우리나라도 수출에 실패해서 1997년에 소위 IMF사태를 맞고 현재(2001)까지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나라이건 수출을 장려하고, 어느 시대의 대통령이건 수출을 늘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나라에서는 성공을 하고, 어느 대통령은 실패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을 1960∼70년대의 우리나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1960∼70년 당시 우리나라의 수출진흥은 마치 군사작전과 같았다. 총사령관은 朴 대통령이고, 작전참모 본부는 상공부였다. 실제로 전투에 임한 것은 수출연관업체의 임직원인데 그 중에서도 최전선에서 싸운 것은 1960년대에는 여자 단순기능공이고, 70년대는 남자 기능공이었다. 그리고 온 국민이 합세했다.
우리국민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 즉, 「한 많은 보릿고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출제일주의」라는 것을 깨닫고, 온 국민이 똘똘 뭉쳐 수출에 매진했다. 매해 40%의 수출신장이라는 것은 바로 기적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기적을 이룩하는 길이 어찌 험하지 않겠는가? 어찌 고생스럽지 않겠는가? 이 고생의 표출은 '땀과 눈물'이었다. 당시 수출에 깊이 관여한 사람 중에 땀과 눈물을 안 흘려 본 이가 누가 있겠는가? 마치 군에 갓 입대한 신병 중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는 상공부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 朴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나 「수출 10억 달러 수출계획(시안)」 조차도 무시하고 「수출 40% 신장」만을 고집했다. 「밀어붙여라」가 그의 명령의 전부였다. 상공부에서는 이 목표를 향해 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출품목별, 회사별, 나라별, 날짜별, 금액별 등등 상세한 통계를 작성하고, 이것을 토대로 월별 수출계획을 수시로 체크해야 한다. 매달 매달의 실적은 무역확대회의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언론에 공개된다. 자기가 담당한 수출이 부진할 때는 막바로 그 담당자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수출애로사항이 생기면 자진해서 타부처와의 협력을 얻어내야 하고, 수출이 부진한 업자에 대해서는 직접 방문해서 독려해야 한다. 즉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그 달의 수출액이 목표액에 미달할 때는 선수금이라도 받아 수출액수를 채워야 한다. 그러니 각 담당자는 빚 독촉을 받는 사람처럼 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수출확대회의를 개최하는 것 자체도 보통 일이 아니다. 국가원수를 위시해서 국가의 중요인사를 망라하는 회의를 준비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 이것을 매월 개최해야 하니 담당부서(수출진흥과)로서는 고역중의 고역일 수밖에 없다. 만의 하나라도 실수를 하면 큰 문책을 당했다. 수출진흥과장의 증언을 들으면,
'왜, 한달이 그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전달 수출확대회의를 끝내고 하루 이틀 지난 것 같은데 또 다음달 수출확대회의가 온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수출확대회의에 대한 준비가 덜 됐는데 내일이 수출확대회의라는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게 된다'
'체중이 7㎏나 줄었다. 몸이 축나서 이대로는 못 배겨나겠다' 등등이다.
그래서 아무도 이 자리에 가려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자리야말로 수출진흥을 위해서는 중추적이고 중요한 자리이다. 그래서 가장 유능한 인사를 배치해야 한다. 할 수 없이 임기를 1년 기한으로 하고 1년이 끝나면 영전시켜 준다고 약속하는데도 아무도 수출진흥과장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상공부에서 유행한 노래가 있다. 「수출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노래이다. 당시 유행하던 '사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의 노래 중 사랑이라는 가사를 '수출'로 바꿔 부른 것이다. 수출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을까?
그러나 이러한 고생도 목표로 정했던 수출고지를 달성하고 나면 환희로 돌변했다. 이렇게 한해 한해가 힘겹게 지나고, 드디어 1970년에 10억 달러라는 수출고지를 돌파한다. 이로써 우리 국민은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됐다. 다음 고지는 수출 100억 달러이다. 이때 우리국민은 「쌀밥에 쌀 막걸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온 국민은 계속 뛸 수밖에 없다. 고생은 하면서도 신명나게 일할 때의 이야기이다.
1970년의 10억 달러 수출목표에 대해서 ― 국민이나 언론계에서는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 朴 대통령은「하면 된다」라며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 해 우리 국민은 10억 달러를 수출해냈다. 이때 비로소 국민들은 자신과 용기, 희망을 갖게 된다.
朴 대통령은 '우리 민족은 똘똘 뭉치면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수(隋)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 국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10억 달러 수출이라는 기적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 …… 선진국과 같이 잘 살려면, 먼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국민은「선진국 국민이 어떠한 방법으로 선진국을 건설했는가」를 본받아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 개개인의 능력이 선진국(당시는 일본)보다 못한 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하면 된다. 우리 국민도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경제면에서는「수출제일주의」, 정신면에서는「자조, 근면, 협동」과「근검, 절약, 저축」의 새마을 정신이다'라며「국가적 목적의식과 국민적 행동의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이때 비로소 위정자(정부 또는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의식구조가 혼연일치 하게 됐다. 그 후「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의식구조는 70년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 후로도 우리나라는 40%라는 수출신장을 계속 했다(註 : 1973∼79년의 평균 신장율 ― 39.6%). 그리고 1977년에는 대망의 100억 달러 수출을 하게 된다.
세계 언론계에서는 한국이「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있다고 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경이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 한국, 대만, 싱가폴, 홍콩 등 ― 4마리의 용(龍) 중 한국을 선두주자라고 했다. 한 저명한 미국의 잡지(「Newsweek」June 1977)는 커버스토리로「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are coming)」라는 특집 기사를 썼다. 이 글에서「한국인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공업구조와 국민생활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고 있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서「목적의식과 행동의식」을 제대로 심어주고 신념화하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민족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註 : 그 후「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목적의식과 행동의식은 크게 변질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국민적인 행동의식이「나도 할 수 있다」는 이기주의적인 행동의식으로 바뀌어지더니, 현재「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구절은 아예 삭제돼 버렸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개인주의가 성해지고 그 결과 오합지졸의 나라가 되어버린다. 당시의 국가적 목적의식의 근간이었던 수출신장률은, 1960∼70년대의 40%에서 전두환 정권에서는 15.8%, 노태우 정권 10.5%, 김영삼 정권 12.6%로 급감했다. 이런 의미에서 1960∼70년대는 정신면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특이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에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하면 된다. 우리(국민)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본래의 뜻대로 견지하고 ― 수출증가율을 1980년대에 평균 20%, 1990년대에 평균 15% 정도만이라도 유지시켰다고 가정한다면, 1999년에는 3,8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액수를 수출하게 된다. 그러려면 새로운 물품을 계속 개발해서 수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수입액 또한 대폭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건실한 정신상태를 갖는 당당한 선진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하면서 선진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새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한국은 4마리의 용에서 토룡(土龍, 지렁이)으로 변했다고 평한 외국 인사도 있었다).
그 후 30∼40년이 흘렀다. 1960∼70년대의 사건들은 역사 속에 파묻힌 일들로서 많은 부분이 망각속으로 사라졌다. 당시를 경험 못한 새로운 세대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감격은 현재까지 살아남아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실정을 모르거나 그 때도 지금과 같았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수출은 눈물의 씨앗"
- 오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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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04, 14: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