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南北共同宣言」 大解剖 [<월간조선> 2001년7월호]:
「하나의 文書」를 「두 개의 文書」로 바꾸는 解釋의 差異 - 「原則的 合意」의 宿命
I
재작년 6월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의 가시적 성과였던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통일방안」에 관한 「합의」는 실제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문제의 2항은 남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통일방안에 관하여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문은 여기에 언급된 남의 「연합제」 안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이 두 방안 사이에 인정된 「공통성」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오히려 그렇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공식적 통일방안은 1980년10월의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채택되었던 이른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 「연방제 통일방안」은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내용상의 손질이 있어 왔다. 우선 1988년4월2일 평양을 방문한 남의 文益煥 목사와 북의 許錟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사이의 공동성명이 그 것이다. 그 내용은 『쌍방은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된다』면서 『그 구체적 실현방도로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어서 이번에는 1991년1월1일자 金日成의 신년사가 등장했다. 이 신년사에서 金日成은 과도적으로 이른바 「느슨한 연방제」를 통일방안으로 제시했다. 그 내용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金日成이 말한 「느슨한 연방제」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뒤 보다 실무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북측의 부연설명이 있어 왔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심의위원회 위원장이었던 尹基福의 1991년4월28일자 발언이 그 하나의 예이다. 그는 『북과 남의 제도를 그대로 두고 연방제 통일국가를 세우자』면서 『그러나, 잠정적으로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 즉 외교․군사․내치권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韓時海도 『외교와 국방에 있어서 두 체제가 권한을 자치적으로 행사하는 등 연방정부의 기능을 처음에는 느슨하게 했다가 점차 강력한 연방정부를 가져 통일에 이르는』 통일방안을 제시했었다.
북측의 어느 누구도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에서 언급되고 있는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바로 尹基福과 韓時海가 말한 「느슨한 연방제」와 같은 내용이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일은 없다. 그러나 평양방문으로부터 서울로 귀환한 후의 金大中 대통령의 이에 관한 거듭된 언급 내용을 살펴보면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金日成이 1991년 신년사에서 운을 떼고 尹基福과 韓時海가 뒤에 윤색한 소위 「느슨한 연방제」를 지칭한 것임을 짐작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남의 「연합제」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남의 대한민국에서 그 동안 거론된 「연합제」 통일방안으로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를 우선 섭렵해 볼 필요가 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 가운데 가장 먼저 종합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한 정부는 全斗煥 정권이다. 전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1982년에 발표한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 그 것이다. 그러나, 이 방안에서는, 「연방제」건 「연합제」건, 특정 「통일국가 형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 「통일방안」은 『통일국가의 국호, 정치이념, 대내외 정책 기본방향, 정부 형태, 총선거의 방법과 절차 등의 문제는 「쌍방 주민의 뜻을 대변하는 남북한 대표들로 구성되는 민족통일협의회」에서 협의․해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통일방안」이 「민족통일협의회」의 구성과 관련하여 「남북 동수」 개념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 방안은 오히려 『쌍방 주민의 뜻을 대변한다』는 우회적 표현의 원용으로 「인구비례」 개념의 적용을 암시하고 있었다.
통일 후의 「국가형태」와 관련하여 「연합제」가 최초로 거론된 것은 盧泰愚 정권 때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에서였다. 「통일국가」 수립절차에 관하여 이 「통일방안」은 『남북대화의 추진으로 신뢰회복을 기해 나가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민족공동체 헌장을 채택하고 남북의 공존공영과 민족사회의 동질화, 민족공동 생활권의 형성 등을 추구하는 과도적 통일체제인 남북연합을 거쳐 통일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완전한 통일국가인 통일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全斗煥 정권 이후의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들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통일방안」을 만들어 내놓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고 있었다. 盧泰愚 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金泳三 정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金泳三 정권의 「통일방안」은 소위 「3기조 3단계 통일방안」이었다. 이 「통일방안」 역시 盧泰愚 정권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과 마찬가지로 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1단계: 화해협력 단계, 2단계: 남북연합 단계, 3단계 완전통일』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1998년에 출범한 金大中 정권은 예외가 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이 이끄는 이른바 「국민의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아무런 공식적인 「통일방안」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金大中 정권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의외의 사실이다. 왜냐 하면, 정치인 金大中씨는 1971년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이래 적어도 이 나라 정계에서는 통일논의의 주도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1971년 그가 朴正熙 대통령에 맞서 처음 대권에 도전했을 때 이 나라는 5.16 군사혁명의 후신인 민주공화당 정권의 『선건설․후통일』 정책의 그늘에서 일체의 통일논의가 동결되어 사실상 금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민당의 金大中 후보는 이른바 「남북교류론」과 「4대국 보장론」을 앞세워 그러한 금기를 깨뜨리고 일약 통일논의를 중심 선거 이슈로 키웠으며 선거에서 낙선한 다음 해인 1972년에는 그 여세를 몰아 소위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그가 1972년2월26일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제시하고 이어 7월13일 서울 외신기자클럽에서 재천명한 「3단계 통일방안」은 『1단계 평화공존, 2단계 평화교류, 3단계 평화통일』로 된 것이었다. 야당 지도자 金大中씨의 「통일방안’은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껍질 바꾸기를 반복해 왔다. 우선 명칭 면에서는 처음 「3단계 통일방안」이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1984년),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1991년)을 거쳐 최근에 와서는 다시 「(金大中의) 3단계 통일방안」(1995년)으로 환원되어 있다. 이 같이 명칭이 바뀔 때 내용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아니면 바뀐 것이 없는가 하는 문제는 뒤에 좀 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짚어두어야 할 분명한 사실은 1998년2월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金大中 대통령은 야당시절 그가 주장하던 문제의 「통일방안」을 정부의 공식적 「통일방안」으로 자리 매김을 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에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에서 언급된 김 대통령이 金正日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던 남의 「연합제」가 과연 구체적으로 어느 「통일방안」을 말하는 것인가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문제가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김 대통령 자신과 그의 보좌진들도 모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작년 6월 평양방문을 끝내고 서울로 귀환한 후 朴在圭 당시 통일부장관이나 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 그리고 黃源卓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등은 피치 못하게 이 문제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는 가급적 언급을 회피하던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문제의 「연합제」가 마치 盧泰愚 대통령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를 지칭한 것처럼 얼버무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김 대통령 자신도 서울귀환 이틀 후인 6월17일 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가진 단독 여야 영수회담에서 이 같은 얼버무리기를 시도했다. 그는 『연합제는 盧泰愚 대통령 당시 「남북연합」이라고 말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李會昌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의 회담에서의 김 대통령의 말은 물론 그의 측근들의 얼버무리는 말들은 진실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김 대통령은 그보다 하루 전인 6월16일 국무회의에서 이미 그와는 아주 다른 설명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김 대통령이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그 쪽에서 계속 통일을 얘기하면서 「연방제」를 주장하는 데 「연방제」는 군사와 외교권을 중앙정부가 갖고 내정은 지방정부가 갖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남북관계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구상해 온 3가지 통일방안」에 대해 설명했다. 1단계는 남북연합, 2단계는 연방, 3단계가 통일인데 1단계는 현재대로 가는 것이다.... 金正日 위원장이 배석한 金容淳 비서와 한참 얘기 끝에 「낮은 수준의 연방제」 얘기가 나왔다. 그 것은 내용적으로 「연합제」와 같은 얘기다. 그래서 접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밑줄은 필자]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김 대통령의 이 말은 그가 金正日과 논의한 「연합제」는 노 대통령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의 「연합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야당시절 제시한 하나의 개인적 사안이었던 「3단계 통일방안」의 「연합제」였음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김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국민적 합의의 차원에서 여과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정책의 차원에서도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는 어떠한 절차도 밟은 일이 없는 그 자신의 개인 사안을 가지고 남북정상회담 석상에서 金正日을 상대로 북측의 「통일방안」과의 「접점」을 모색하는 협상을 벌였다는 사실이 들어 난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이 같은 절차상의 문제보다 김 대통령이 金正日과 논의한 그의 「연합제」 통일방안의 내용에 있었다. 이 문제는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남북 양측 「통일방안」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되었다』는 대목과 관련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연합제」와 「연방제」 사이에는 「공통성」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에 『공통성이 있다』는 「합의」가 어떻게 해서 도출되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연합」은 「국가연합」(영어로는 Confederation/독일어로는 Staatenbund)의 준말로 「연방국가」(영어로는 Federation/독일어로는 Bundesstaaten)와 함께 「국가결합」의 다른 형태들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국가결합」의 형태간에 어떤 「공통성」이 있는지를 먼저 짚어둘 필요가 있다.
「연방」이란 2개 이상의 「주권국가」들이 「국가주권」을 포기한 「지방(支邦)」 정부가 되고 이들이 결합하여 국제법상 「단일 주권국가」가 되는 「연방」을 형성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방정부」가 외교권, 군사권과 같은 대외 주권을 행사하고 「지방정부」들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내정에 대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국가결합」의 한 형태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연방국가」란 『1개 국가, 복수 정부의 국가형태』라는 사실이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바로 이 때문에 『1민족, 1국가, 2정부, 2체제』라는 국가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연방」이란 『1개의 국가 안에서 중앙(연방)정부와 지역(지방)정부 사이에 형성되는 수직적 관계』를 말한다. 지금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나 말레이시아, 그리고 지금은 해체된 구 소련(USSR)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가연합」은 2개 이상의 「주권국가」가 「국가주권」을 포기함이 없이 서로 국제법상 동등한 「주권국가」간의 「조약」체결을 통해 상호 협조관계를 설정하는 매우 느슨한 「국가결합」의 한 형태이다. 「국가연합」의 구성국가들은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각기 독립적인 주권을 행사하면서 상호간 체결된「조약」을 통해 「위임」된 사항에 국한하여 공동보조 등 일정한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따라서 「국가연합」에는 「중앙정부」의 개념이 없으며 다만 구성국가 상호간의 협조․협력관계만이 존재한다.
즉, 『복수의 국가, 복수의 정부간에 형성되는 수평적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남북관계에 관하여 그 동안 盧泰愚 정권과 金泳三 정권이 제시한 「연합제 통일방안」은 모두 「연방」 또는 「단방(單邦)」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통일」이 완성될 때까지의 과도적 단계로 『1민족, 2국가, 2정부, 2체제』의 2개 국가 분립형태를 제시하고 있었다. 1778년부터 1787년까지의 미합중국, 1815년부터 1848년까지의 스위스연방, 1815년부터 1868년까지의 독일연방, 1750년부터 1795년까지의 네덜란드, 그리고 지금의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남의 「연합」과 북의 「연방」 사이에는 「2국가」와 「1국가」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즉, 「국가」라고 하는 「분모(分母)」를 달리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로 이 「분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분자」만 가지고 양자 사이에 발견되는 지엽적인 「공통성」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金大中 대통령이 야당시절 제시했던 모든 「통일방안」들이 문제의 「분모」에 해당되는 부분에 관하여 일관되게 애매모호한 입장을 고수해 왔다는 것이다.
金大中씨의 소위 「3단계 통일방안」은, 그 것이 초기의 「3단계 통일방안」이었건,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이었건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이었건 1995년 이래의 「3단계 통일방안」이었건, 이 같은 「연합」과 「연방」간의 본질적 차이, 즉 「2국가」인가, 「1국가」인가의 문제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의도적․계획적인 것인지 아니면 무지의 탓인지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김 대통령의 경우 시종일관 「연합」을 「2국가」로 보지 않는 시각에서 남의 「연합」과 북의 「연방」간의 「공통성」을 운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야당시절 그의 「통일방안」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는 1984년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을 때도 이 방안이 『북한의 「연방제」와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1991년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으로, 그리고 1995년 「3단계 통일방안」으로 그 명칭을 바꾼 뒤에도 물론 이들 「통일방안」에서 제1단계로 제시된 「연합제」가 북의 「연방제」와는 다른 것이라고 역설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발견되는 기이한 사실은 그가 1972년 「3단계 통일방안」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신의 「통일방안」을 주장하기 시작한 이래 김 대통령은 단 한 번도 그가 말하는 「연합」을 「2국가」의 개념에 입각하여 설명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그 동안 김 대통령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회수에 걸쳐서 그가 말하는「연합」에 대하여 설명해 왔다.
<월간조선> 1985년8월호에 게재된 <나의 조국, 나의 포부>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金大中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는 그가 말하는 「공화국 연방」의 국가형태가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의 「연방」과는 다른 것이라면서도 정작 그 내용에 대해서는 『1연방, 2독립정부』 체제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 그의 「통일방안」의 호칭과 거기서 설명된 「국가형태」의 내용은 북한의 「연방제」와 혼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그가 말하는 「공화국 연방제」가 실제로는 북의 「연방제」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시비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가 그 1991년 그의 「통일방안」의 명칭을 「공화국 연방제」에서 슬그머니 「공화국 연합제」로 바꾼 것은 그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명칭으로 인한 그러한 오해를 모면하기 위하여 이름만 바꾼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왜냐 하면, 그 뒤에도 그의 「공화국 연합」의 「국가형태」는 「연방」이라는 용어가 「연합」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기는 했지만 계속 「2국가」에 대한 언급은 없이 『2정부, 2체제』라는 표현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 동안 검색한 자료에 의하면, 야당시절의 김 대통령은 1991년4월에 발표한 글 <공화국 연합제 통일의 제창>, <말>지 1993년8월호에 게재된 글 <새로운 대북정책의 필요성>, 1994년2월28일 도산기념사업회/도산사상연구회 초청강론, 1995년3월12일자 카돌릭 <평화신문>에 게재된 <명동성당 4순절 통일특강>, 2000년6월15일 서울공항에서의 방북성과 대국민 보고, 9월8일 뉴욕에서의 Korea Society 주최 만찬연설, 10월1일 제52주년 국군의 날 기념연설, 11월17일 동남아연구소(ISEAS)에서의 특별강연, 12월10일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 12월12일 스웨덴 의회에서의 연설, 2001년6월15일 남북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각계 대표와의 회동 석상 발언 등에서 문제의 「공화국 연합」의 「국가형태」를 언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기회에 있었던 김 대통령의 언급 내용은 한 결 같이 『1민족, 2체제, 2독립정부』였다. 단 한번도 「2국가」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 사실이 없다.
이 같은 김 대통령의 표현방법은 몇 가지의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첫째로는, 그가 「국가연합」의 개념에 대하여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실상 「연합」과 「연방」을 혼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이 「2국가」를 언급하지 않는 대신 북한이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1국가」라는 표현 또한 사용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 것은 「연합」을 말하면서 『1민족, 2국가. 2정부, 2체제』라고 표현함이 없이 『1민족, 2정부, 2체제』라고만 표현해 버리면 이것을 북한의 『1민족, 1국가, 2정부, 2체제』와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당초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놓을 때나 그 뒤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도 이 「연방」의 「국가형태」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1민족, 1국가, 2정부, 2체제』라는 표현을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다. 북한의 金日成은 1991년 신년사에서 『우리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다』면서도 이 「연방」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히 다짐했었다.
바로 이 때문에 두 번째의 가능성이 거론된다. 김 대통령이 말하는 『1민족, 2정부, 2체제』의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은 사실은 이미 북한이 말하는 「연방」의 『1민족, 1국가, 2정부, 2체제』 국가형태를 수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 대통령은, 예컨대 1994년의 도산기념사업회 연설이나, 1995년의 명동성당 사순절 통일특강 내용을 보면, 『1공화국연합, 2독립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가 말하는 「연합」을 실질적으로는 「연방」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연합제」에서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남북한에 실존하는 2개의 「주권국가」간의 「수평적 관계」의 차원에서 「연합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앙정부」인 「공화국연합」과 「지방정부」인 남북한 사이의 「수직적 관계」의 차원에서 「연합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 대통령의 「연합제 통일방안」과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설혹 그 것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 하더라도)간에는 당연히 이미 상당한 「공통성」이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미 북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하면서 그 전제 위에서 통일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결과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김 대통령은 그 동안 일관되게 『외교권과 국방권을 「중앙정부」가 갖느냐 아니면 「지방정부」가 갖느냐』의 여부를 가지고 그의 「연합제」와 북의 「연방제」를 차별화 하는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구별 방법이 아니다.
「국가연합」에서 소속국가들이 외교권과 국방권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지 존재하지도 않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에 「권한배분」의 차원에서 조정되는 일이 아니다. 김 대통령이 외교권과 국방권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권한배분」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북의 「연방제」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고 그의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에서 거론하는 「연합」은 이름은 「연합」이지만 사실은 「연방」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의 선전매체들은 물론「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과 같은 남쪽의 친북 민간통일운동 단체들에서도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이야말로 『남측이 사실상 북측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동의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띄워진 「범민련」 공동사무국의 <6.15 남북공동선언 해설>에 의하면, 「범민련」은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통일원칙에 관한 합의는 『남한에서 그 동안 금기시 되었던 연방제 통일방안이 합법화되었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남 당국의 기본 통일방안인 「국가연합제」를 「연방제」로 끌어들여 사실상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합의한 것을 의미한다』는 해설을 내놓고 있다. 이 같은 해설은 6.15 선언 제2항이 『북측이 남측의 「연합제」에 접근해 온 것』이라는 金大中 정부와 민주당측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II
보다 근본적으로는 차제에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이 과연 「통일방안」으로서의 구색을 갖추고 있는 것이냐의 여부에 대한 검증의 필요가 제기된다.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은 1단계인 「공화국연합」 단계에 대해서는 추진할 내용과 방법을 어느 정도 구체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말한다면, 그의 전임자들이 내놓은 통일방안 가운데 「연합제」 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김 대통령의 「연합제」부분도 분단된 남북한간의 「분단관리 방안」이지 「통일실현 방안」은 아니다. 왜냐 하면, 「연합제」단계는 김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것처럼 『남북한간의 「평화공존」 속에서 「평화교류」를 하면서 「평화통일」의 조건․환경을 성숙시키는 단계』이다. 따라서, 이 단계는 좋게 말해서 「통일준비 단계」는 될지언정 「통일 과정」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실질적인 「통일 과정」은 제2단계인 「연방」의 단계에 진입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이 정작 「통일」 단계인 제2단계부터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사실상 백지상태라는 사실이다. 기껏 설명된 것이 있다면 이 「연방」은 『오늘날 미국의 연방체제와 유사할 것』이고 더 나아가 『현재 북한이 제안하는 연방제도 그 때 이를 논의하여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말하는 대로 『미국의 연방체제와 유사한 내용의 연방제』라면 그 것은 북한과 「합의」하기가 매우 어렵고 따라서 남북간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통일방안으로서는 실현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라는 통일방안에서의 「연방」은 그 창립방법, 「연방」의 기구와 운영방법, 정책 등 모든 영역에서 「미국식 연방」이 아니라 사실상 이미 세상에서 소멸된 「소비에트식 연방」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 대통령의 「연방제」는 매우 까다로운 「진입조건」이 설정되어 있다. 1995년에 발간된 <金大中의 3단계 통일론>(서울; 아태평화출판사)은 42~43쪽에 걸쳐 네 가지의 『연방으로의 진입조건』을 서술하고 있다. 그 것은 1) 북한이 복수 정당제와 자유선거 제도 등을 도입함으로써 민주화될 것, 2) 북한이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여 남북 경제공동체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화폐, 금융, 재정 등에 있어서의 통합이 가능해 질 것, 3) 남북이 군비통제 등을 통해 「축소지향적 군사력 균형」을 이룩하고 나아가 군대통합이 가능해 질 것, 4) 남북간의 사회․문화적 이질성이 상당부분 해소되어 민족적 일체감이 회복되고 더 나아가 사회․문화적 통합을 이루어 나갈 수 있게 될 것 등이다.
이 조건들은 누가 보더라도 金正日이 영도하는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임을 알 수 있다. 과연 어느 세월에 이 조건들이 충족될 것인가? 결국, <金大中의 3단계 통일론>은 제2단계부터는 열쇠로 열 수 없는 멍텅구리 자물쇠로 잠겨져 있어서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는 「사이비 통일방안」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제3단계 「완전통일」은 더구나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공의 세계」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국가에서 「연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국가형태」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연방」이냐, 아니면 「단방(單邦」이냐의 여부는 「선택」의 문제는 될지언정 「연방」을 거쳐서 「단방」으로 가는 「과정」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도 매우 인위적인 말장난에 불과하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내용 가운데 통일방안에 관한 제2항 못지않게, 어쩌면 제2항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조항은 통일원칙에 관한 합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제1항이다. 「햇볕정책」이라고 일컬어지는 金大中 정부의 대북정책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의 하나는 북한의 「혁명적 통일관」의 토대가 되고 있는 이른바 「조국통일 3대원칙」을 근본적으로 그릇되게 이해․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것이다. 그 내용은 「자주․평화통일․민족적대단결」로 되어 있다. 1972년 남측의 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에 이 같은 「조국통일 3대원칙」을 북한의 표현대로 수용하는 데 동의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왜냐 하면 이렇게 표기된 「조국통일 3대원칙」은 이에 대한 남북간의 상이한 해석 때문에 이에 토대를 둔 남북대화의 진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1972년 李厚洛이 실무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받아들인 것은 그가 직면하고 있던 정치적 필요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朴正熙 당시 대통령을 『통일까지의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유신개헌」을 준비 중이었고 7.4 「남북공동성명」은 그 명분용이었다. 따라서 시간에 쫓긴 李厚洛은 북이 주장하는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수용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성립시키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 뒤 역대 한국 정부들은 이 「조국통일 3대원칙」을 우리 식으로 해석하려 노력해 왔다. 즉, 보편적 가치의 차원에서 사전적 의미에 입각하여 합의한 「자주」․「평화」․「단결」이라는 3개의 원칙을 병기한 것으로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재작년 6월15일 평양에서 돌아온 김 대통령이 서울공항에서의 귀환회견과 다음 날 국무회의 석상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제1항에 표기된 통일원칙인 「자주」에 대하여 애써 설명한 내용도 그가 그러한 역대 정부의 일관된 입장의 연장선상에 서서 희망적으로 이 조항을 해석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즉, 6.15 「남북공동선언」 제1항의 「자주」의 원칙은 북한이 주장하는 「조국통일 3대원칙」의 「자주」의 원칙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김 대통령은 여기에 언급된 「자주」의 원칙에 대하여 『과거에는 자주가 외세를 배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좁게 볼 것이 아니라, 주변국가와 잘 지내며 우리 문제를 남북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북한측 언동 내용을 보면 이 같은 김 대통령의 해석은 그 자신만의 「해석」일 뿐 북한의 「해석」과는 상이하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북한의 입장에서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은 「자주」와 「평화통일」 그리고 「민족대단결」이라는 3개의 단어가 각기 독립적으로 사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은 이 세 개의 단어가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이라는 단어로 합성된 하나의 「고유명사」인 것이다. 따라서 「평화통일」이 「평화」로, 그리고 「민족대단결」이 「단결」이라는 「보통명사」로 치환되어 사용될 수도 없다. 이 합성어에 담겨진 3개 원칙은 북한이 1945년 이래 한반도에서 수행을 다짐하고 있는 「반제․반봉건․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에 관련된 원칙이다.
여기서 「반제」는 『미제에 대한 반대』, 「반봉건」은 『전통사회의 부정』, 「민족해방」은 『일제로부터의 해방』, 「인민민주주의」는 『공산화 이전의 단계로 「연공」 내지 「용공」 정권 수립의 단계』를 의미한다. 문제는 북한의 「통일관」이 남북한 전역에서 이 같은 「혁명」이 수행되는 것을『평화통일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한다는 데 있다. 이에 관한 북한의 일관된 입장은 『북한에서는 소련의 도움으로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이 같은 「혁명」이 완수되었으나 남한에서는 「미제」의 반대로 인하여 이 「혁명」이 아직도 수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남한에서도 이 같은 「혁명」이 마저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남조선혁명」이다.
북한이 말하는 소위 「평화통일」은 오직 그 같은 「남조선혁명」이 수행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다음 단계에 오는 문제이다. 『1단계로 「남조선혁명」이 수행되면 그 다음 단계는 「이미 공산화되어 있는 북한」과 「새로이 공산화되는 남한」이 「합작」을 통해 「평화적 방도」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남조선혁명」이 수행되지 않을 때는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다. 북한은 이 경우에는 『「비평화적 방도」에 의한 통일 즉 「무력통일」이 불가피해 진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이 곧 북한의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 이론」이다.
따라서,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은 『1945년 해방이후 소련의 도움으로 「반제․반봉건․민족해방․인민민주의 혁명」의 완수를 통해 「이미 공산화되어 있는 북한」』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의 적용 대상은 남한에 국한된 것으로 이의 적용을 통해 북한이 요구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주」의 원칙 아래 『남조선을 미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주한미군의 철수(또는 주한미군의 임무변경)와 한․미 안보유대의 단절 및 미․북간의 적대관계 해소 및 우호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로, 「민족대단결」의 원칙 아래 『남조선의 반공체제를 「연공」 내지 「용공」 체제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북조선에서는 전 인민의 공산주의자화로 이미 민족대단결이 이루어졌으나 남조선에서는 공산주의를 불허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정책과 법령 때문에 민족대단결이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민족대단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반공」을 「연공」 내지 「용공」으로 바꾸는 내용으로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폐지, 국가정보기관(중앙정보부 → 국가안전기획부) 해체, 「반공」 기관․단체 해산 및 「반공」 활동 불법화, 그리고 공산주의 활동의 합법화가 필요하다.
셋째로는 「평화통일」의 원칙 아래 『남조선이 이상의 두 「원칙」을 충족시킴으로 해서 북한측 조건에 의한「평화통일」실현에 불리한 조건․환경을 제거하고 유리한 조건․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통일노선은 이 같은 「평화통일」의 조건ㆍ환경이 마련되지 않을 때는 「비평화적 방도」 즉 무력통일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남북대화는 바로 이 같은 내용의 「조국통일 3대원칙」의 수용을 남측에 강요하는 무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문제의 북한판 「조국통일 3대원칙」의 수용을 남측에 강요함으로써 남한사회에서 이른바 「남조선혁명」의 수행에 방해가 되는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제거하고 유리한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북이 말하는 소위 「법률적․사회적 조건․환경론」의 실체이다.
이것은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 통일을 위하여 북한이 해방 이후 일관되게 추진해 온 「조국통일 3대혁명 역량」 가운데 두 번째 「역량」에 관계되는 것이다. 북한의 소위 「조국통일 3대혁명 역량」은 『첫째로 북한의 혁명기지를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화하고, 둘째로 남한의 혁명역량을 강화하며, 셋째로 국제적 혁명역량과의 단결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남북대화는 물론 미․일을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대화」를 통하여 경제적, 정치적 혜택의 획득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북한이 노리는 경제적, 정치적 혜택은 물론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북한의 개혁․개방은 남북대화의 주목적이 아니다. 문제의 「3대혁명 역량」 중 첫 번째, 즉 『북한을 혁명기지로 강화』하고 두 번째, 즉 『남한혁명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 있는 것이다.
1948년 한반도의 정치적 분단이 이루어진 뒤 북한과 남한을 비롯한 외부세계 사이에는 몇 차례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시종 문제의 「혁명적 통일관」의 테두리를 고수하는 일관된 협상행태를 고수해 왔다. 그 동안 북한이 외부세계와 가졌던 주요 협상은 도합 여섯 차례를 헤아린다. 첫째로는 1950년대 초 판문점에서 유엔군을 상대로 벌였던 한국전쟁 휴전협상, 둘째로는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전쟁의 정치적 종결을 위해 소집되었던 18개국 정치협상회의, 셋째로는 1970년대 초 남북조절위원회와 잠북적십자회담을 무대로 했던 남북대화, 네 번째로는 1990년대 초의 남북고위급회담, 다섯 번째로는 1990년대 초반의 북핵문제에 관한 미․북 협상, 그리고 여섯 번째로는 2000년6월의 金大中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시작된 일련의 남북대화 등이다.
1954년 제네바 정치협상회의만이 예외였을 뿐 그 밖의 모든 협상은 예외 없이 중요 합의문서를 생산했다. 1953년의 한국전쟁 「휴전협정」,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1992년의 「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약칭 「남북비핵화선언」), 1994년의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Agred Framework) 그리고 2000년6월의 「남북공동선언」이 그 것들이다. 그러나 이 협상들의 전후 과정은 북한의 경우 실천과 이행을 목적으로 이들 「합의문건」을 생산하는 것은 그들의 주목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어 왔다.
①
북한은 상대방과의 현안문제들을 「협상」의 방법으로 「합의」를 통하여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협상의 마당에 나온 적이 없었다. 북한은 항상 북한의 입장에서 급한 사정이 있을 때나 아니면 북한이 생각하는 현안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협상의 마당으로 나왔다. 북한은 거의 언제나 상호 양보와 합의를 통하여 쟁점사안들을 해결하는데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의 일방적인 요구사항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여 이를 수락시키는 방법으로 대화를 이용하는 협상기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 때 북한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협상기법이 「전제조건」의 활용이었고 빈번한 「벼랑 끝(Brinkmanship) 전술」의 사용 또는 사용 위협으로 그들의 일방적 요구의 수용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 동안 북한과의 협상은 언제나 「본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예비회담」 또는 「준비회담」 과정에서 탈진상태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북한이 「본회담」에 진입하기에 앞서 「예비회담」이나 「준비회담」 단계에서 주로 「전제조건」 놀음으로 그들이 「본회담」에서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들을 미리 관철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남측이나 미국 등 상대방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본회담 단계에 진입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북측이 축차적으로 내놓는 「전제조건」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을 수용하는 것이 항다반사였다.
본회담이 열릴 때쯤이면 회담에 대한 그들의 흥미는 이미 반감되어 있었다. 「예비회담」이나 「준비회담」 단계에서 이미 그들은 그들이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의 상당부분을 달성했거나 아직 달성하지 못한 목적은 달성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기에 이르고 있었다. 그 동안 북한측은 「전제조건」을 가지고 「본회담」 개최를 지연시키고, 우여곡절 끝에 「본회담」이 열리면 다른 「전제조건」을 내세워 「본회담」의 진전을 교착시키며, 다음에는 「본회담」을 다시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고, 또 「전제조건」을 내세워 중단된 「본회담」의 재개를 가로막거나 아니면 북한이 원하는 시기에 재개를 허용하며, 급기야는 「본회담」을 멋대로 결렬시키는 협상행태를 수 없이 반복해 왔다. 상대방은 「본회담」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북측에 매달려 북측의 「전제조건」들을 계속 수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본회담」이 열리면 거의 예외 없이 「합의문서」가 합의․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문서」들은 물론 부분적으로 「구체적 합의」들을 담기도 하지만 북한측의 고집으로 하나같이「원칙적 합의」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원칙적 합의」는 항상 「해석의 차이」를 수반하는 것이었고 이 같은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 「합의문서」는 생산은 되지만 이행이 불가능해 지기 마련이었다. 한 개의 「합의문서」가 쌍방간의 「해석의 차이」 때문에 두 개의 「합의문서」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그 동안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생산된 모든 「합의문서」들은 생산이 되기가 무섭게 반신불수가 되어 이행이 불가능해 지는 숙명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 같이 「합의문서」의 이행을 동결시킨 북한은 한편으로는 북한만의 독자적 해석을 앞세워 이들 「합의문서」의 이행 의지를 과시하면서 「합의문서」가 이행되지 않는 책임을 상대방에 전가시키는 선전전을 시끄럽게 전개하는 것이 능사였다. 이 상태에서 일정기간이 지나고 주변 상황에 일정한 변화가 생기면 기왕의 「합의문서」를 아예 휴지화하고 「새로운 협상」의 멍석을 까는 수법을 반복해 왔다.
III
특히 6.15 「남북공동선언」 공표 이후 2000년 하반기부터 보여 온 북한의 움직임은 이 같은 전통적인 협상행태를 거듭 반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金大中 정부가 북측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1972년의 7.4 「남북공동선언」과 마찬가지로 남북간에 존재하는 현격한 해석상의 차이 때문에 이미 실질적으로 한 개의 「합의문서」가 아니라 두 개의 기형적「합의문서」로 변질되어 있어서 원만한 실천․이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북한의 행태로 미루어 본다면 이번의 남북대화도 사실은 이미 중단되어 있는 상태로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지금의 상황은 1970년대 초 및 1990년대 초와 다른 점이 있다. 그 것은 金大中 정권에 대한 북한측의 기대가 과거 정권 때와는 다른 것이다. 현 정부에 대하여 북한측은 경제적 지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 것은 비단 식량과 비료 뿐 아니라 전력 지원과 함께 금강산 관광대금 수금에 대한 미련이다.
북한은 이제 앞으로 불과 8개월의 잔여임기를 남겨두고 있는 현 정권을 상대로 이 같은 경제적 혜택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집념을 보여주고 있다. 현 정권의 잔여 임기 안에 이 같은 경제적 혜택을 확보하려 하는 북한 측 노력은 지금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大選 정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크게 성공할 가능성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김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 총재직 사퇴에 그치지 못하고 탈당이라는 극한 조치까지 피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의 세 아들이 연루된 미증유의 부패 스캔들은 이제 남은 임기 중 김 대통령이 아무리 의욕이 있더라도 무리하게 북한이 희망하는 대로 대북경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북한의 金正日에게는 김 대통령의 남은 임기 중에 그가 바라는 경제적 지원을 남으로부터 확보하지 못한다면 차선책으로 오는 12월에 있을 남에서의 대통령선거전에 어떻게든지 작용하여 6.15 「남북공동선언」의 내용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승리를 저지하고 김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 상속자인 민주당의 盧武鉉 후보에게 도움을 주려고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한 차원에서 金正日의 수중에는 아직도 사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카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것은 金正日 자신의 서울답방 카드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의 大選 정국은 金正日의 서울답방이 투명성을 결여한 채 정략적으로 추진될 경우 여야 후보 가운데 누구에게 실익이 돌아가고 누구에게 피해를 줄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론적으로, 6.15 「남북공동선언」은 이 역시 내용상의 「원칙적 합의」를 둘러싼 「해석상의 차이」가 원인이 되어 실천․이행되지 못하고 사문화의 길을 걸어야 했던 모든 과거의 「합의문서」들이 갔던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6.15 선언의 운명은 이 후보가 관훈 토론에서 했던 것처럼 「부분적 폐기」를 운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단계에 이미 접어들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가령 오는 12월 이 후보의 大選 승리로 내년 초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경우 새로이 출범하는 한나라당 정권이 추진해야 할 대북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새 정권은 우선 북한을 상대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여 6.15 「남북공동선언」의 각 조항들, 특히 그 가운데 제1․2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진지한 논의를 시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이 선언이 과연 김 대통령이 말하는 것처럼 『분단관리의 장전』인가 아니면 金正日이 주장하는 것처럼 『통일실현의 장전』인가를 가려내야 한다. 물론 이 같은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 하면, 金正日의 북한이 그 같은 시도에 호응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6.15 선언의 진정한 성격을 가려내는 일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후의 정황으로 볼 때 김 대통령이 그려낸 6.15 선언의 화려한 꿈은 이미 북한에 대한 김 대통령 스스로의 무지나 오판 또는 환상적 대북관에 기인한 『한 여름 밤의 환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 졌기 때문이다.
새 정권이 추구해야 할 대북정책의 근간은 1992년의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화해․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기본합의서」)로 돌아가서 이를 전면적으로 실천하고 이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합의서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비단 이 합의서가 남북간에 언젠가는 체결되어야 할 「평화협정」이나 「기본조약」이 갖추어야 할 모든 내용을 갖추고 있다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합의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남북관계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합의의 도달』이 아니라 『합의의 실천』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환언하면, 『실천되지 않는 합의는 합의에 도달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교훈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실천․이행되지 않는 합의는 당연히 그 다음에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 다음에 이루어지는 합의가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2000년의「남북공동선언」이 金正日의 「작품」이라면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도 金正日의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인 「남북기본합의서」를 존중하지 않는 金正日이 역시 자신의 「작품」인 「남북공동선언」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따라서 새 정부는 金大中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일방적인 식량․비료․현금「퍼주기」로 金正日의 북한을 달래려 하다가 거꾸로 북한에 물려서 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전철(前轍)을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북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경제적 시혜를 「협상카드」화 하여 金正日로 하여금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의 전면적 실천․이행에 호응해 나오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
물론, 金正日의 북한이 이 같은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려 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북한이 그렇게 할 경우 북한에게 돌아가는 것은 경제의 자멸과 체제의 붕괴라는 것이 자명하다. 이 경우 북한이 궁지에 몰린 나머지 전쟁도발이라는 극한적 대응을 선택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그러한 도발 위협이 실제로 존재하는 동안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기초한 한․미 안보유대에 바탕을 둔 「전쟁억지력」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 말고 다른 처방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전쟁억지력」이 1953년의 한국전쟁 휴전 이후 이 땅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해 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2000년6월 평양방문 시 『통일 이전은 물론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하기로 金正日과 합의했다』는 金大中 대통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주한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는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초미의 선결과제』라고 강조하고 있는 金正日 자신의 어록이 입증해 주고 있다.
金大中 정부는 북한의 이 같은 전쟁도발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대북 「퍼주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논법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1938년 뮤니히에서 독일 제3제국의 광적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떼어주는 비밀협약을 체결하고 돌아와 소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운위했던 영국 수상 네빌 챔벌린의 고사(故事)로부터 그 같은 金大中 정부의 논법에 숨겨져 있는 위험성을 간파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 대통령은 평양방문을 끝낸 뒤 귀로 서울공항에서의 도착연설에서 그가 金正日과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엉뚱한 주장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뮤니히 밀약의 망령(亡靈)을 일깨워 주었다.
그 동안 김 대통령은 6.15 「남북공동선언」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지켜준다면서 이 선언이 이행되지 않으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 위협을 받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선언에는 남북간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관한 합의에 대한 언급이 없는 물론 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金正日의 입장에 의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미제의 식민통치의 주구』인 남한당국과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식민 종주국』인 미국과 논의할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남북공동선언」 발표 3개월 후인 2000년9월 제주에서 열린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남북간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논의하자』는 우리측 趙成台 국방장관의 제의에 대한 북측 김일철 인민무력상의 대꾸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대답은 『그 문제는 「남북공동선언」의 테두리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의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끝]
6.15 「南北共同宣言」 大解剖 [<월간조선> 2001년7월호] (발췌 再錄)
- 이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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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09, 06: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