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晩과 김일성: 하늘과 땅 차이

스탈린 앞에서 시험친 김일성, 미국 대통령을 面前에서 욕한 이승만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시험문제를 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답안을 잘 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 즉 소련의 꼭두각시로 선택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頂上회담을 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그의 등을 향해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라고 호통을 쳤다. 李 대통령은 김일성을 사대주의자로 규정했다. 아래 두 기사를 대조하여 읽으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아직도 김일성을 민족주의자, 이승만을 사대주의자라고 욕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이 글을 복사하여 주면 부끄럼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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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 앞에서 시험 쳐 합격했다고 이야기'


黃長葉 선생의 증언: '각자 다른 방에서 답안을 썼다고 김일성이 말하더라'
趙甲濟

작년 여름 黃長燁 선생과 대화하다가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었다.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직접 면접을 보고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주장이 러시아측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아래 자료 참조)'는 이야기를 꺼냈다. 黃 선생이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가 그런 말을 합디다. 제가 직접 들었어요. 스탈린한테 두 사람이 불려가 시험을 쳤다는 겁니다. 스탈린이 출제한 것을 가지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에 들어가 답안을 썼다고 해요. 여기서 김일성이 쓴 답안이 합격된 셈이지요'

黃 선생의 이 증언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다. 따라서 학자들이 하는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사자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박헌영 두 사람이 불려간 시기에 대해서 러시아 전문가들은 1946년 7월이었다고 증언하다. 이때 박헌영은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니 비밀리에 북한을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그해 10월에 미 군정의 추적을 따돌리며 북한으로 피신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데일리 엔케이 손광주 편집국장은 자신의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 앞에서 시험을 본 적이 있다. 누가 공산주의 지도자로 더 적합한가를 놓고 시험을 본 것인데, 사실은 누가 더 스탈린에게 충직한가를 따져본 것이다. 당시 스탈린이 무슨 문제를 ‘출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험이 끝난 후 스탈린은 박헌영의 답안지까지 김일성에게 주면서 “알아서 처리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기술은 황장엽 선생의 주장과 매우 비슷하다. 북한정권을 세울 때 스탈린은 김정일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國號(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와 헌법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희대의 독재자 앞에서 시험을 친 뒤 북한의 독재자로 결정된 김일성, 미 군정과 대결하여 대한민국을 자유民主의 초석 위에 세운 李承晩, 그 차이가 오늘의 한국과 북한의 차이이다.

*참고자료/
(유리 바닌 / 러시아 동방학 연구소) :
“두 명의 후보자가 있었습니다. 박헌영과 김일성이었죠. 1946년에 박헌영과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왔습니다. 스탈린은 그들을 만난 후에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했죠.”
“김일성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가 깨끗하고 오히려 그 점 때문에 투철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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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을 향해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이승만, 韓日 국교 수립을 강권하다가 거절당하자 회담장을 나가는 아이젠하워를 향해서 일갈.
趙甲濟

1954년 7월 李承晩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의회 연설에서 미국의 어중간한 對공산권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여 미국 행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7월30일 백악관에서 2차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묵고 있던 李 대통령에게 미 국무성 副의전장이 정상회담 후 발표할 공동성명서 초안을 들고 왔다. 이 초안에는 李 대통령이 싫어하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 운운'하는 대목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군 작전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여기에 李承晩 대통령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李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싫었고, 한국의 國力이 약한 입장이므로 일본과 수교하는 데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李 대통령은 즉각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백두진, 양유찬, 김정렬씨 등이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지'

제2차 韓美 장상회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인데 이승만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측근들이 '그래도 회담은 하셔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여 李 대통령은 10분쯤 늦게 백악관내 회담장에 도착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韓日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있는 한 일본 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해버렸다. 아이젠하워(愛稱이 아이크) 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李 대통령은 이때 아이크의 등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

물론 이 말은 통역되지 않았다. 아이크는 가까스로 화를 식히고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이승만 대통령이 일어났다.
'외신 기자 클럽에서 연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먼저 갑니다'

李 대통령에 이어 아이크도 나가버렸다. 양유찬 駐美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하여 실무자들끼리 회담을 계속했다. 그래도 미국은 군사원조 4억2000만 달러, 경제원조 2억8000만 달러, 도합 7억 달러의 對韓원조를 약속했다(한표욱 지음, '이승만과 한미외교' 참고. 중앙일보사 발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전선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독특한 웃음이 그의 매력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와 큰 차로 당선되었다. 이때 선거구호는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였다. 아이크는 당선자 시절 한국전선을 방문했다. 그는 6.25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했었다. 이때부터 李承晩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1875년생인 이승만은 정상회담 당시 79세로서 아이크보다 15세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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