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모씨는 올해 64세이다. 6.25가 났을 때는 여섯 살이었다. 그의 부친은 인천에서 중소기업을 하고 있었다. 형제가 가족을 이끌고 대전까지는 열차편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다. 금강을 건너기 위하여 지금 대청댐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룻배가 피란민들을 태워 건너게 해주고 있었다. 孫씨와 아버지, 그리고 삼촌이 먼저 배에 올랐다. 孫씨의 어머니는 양산을 잊어먹어 찾아다닌다고 배를 타지 못했다.
약100명쯤 탄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유엔군의 전투기가 나타났다. 급강하하더니 배를 향해서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여섯 살 난 소년은 여름날의 오후 하늘에서 내려꽂히는 비행기들을 신기하듯이 구경했다. 뱃사공은 흰옷을 벗어 깃대에 걸었으나 기총소사는 계속되었다. 소년은 아버지 품에 안겨 엎드렸다. 총소리만 들렸다. 비명도 들렸다. 그러다가 조용해졌다. 엎드린 소년의 입에 물이 들어왔다. 눈을 떠 보니 핏물이었다. 배는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소년이 둘러보니 다 죽은 듯했다. 아버지도 쓰러져 있었다. 당시 30대이던 아버지는 옆구리에 총격을 받아 창자가 흘러나왔고 숨이 끊어진 듯했다.
배는 강가로 붙었다. 한 주민이 물이 허리에 잠기는데도 걸어서 들어오더니 배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소년을 끌어내렸다. 세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살아 있었다. 생존자는 이 두명뿐이었다. 이 주민은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보살폈다. 시체를 실은 배는 떠내려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며칠 뒤 어머니가 孫 소년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잃어버린 양산을 찾는다고 배를 타지 못한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소년은 그 뒤 잘 자랐다. 지금은 65세의 중견 중소기업체 사장이다. 그는 서른 살을 넘기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함께 구조된 세살박이 여자아이가 자신의 천생 배필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그 여인을 만날 것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보살펴준 금강가 주민을 찾아갔다. 아들만 만나고 돌아왔다. 아버지 시신이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孫씨는 결국 다른 여성과 결혼했다. 아내에게 '내가 그 여자를 만나게 되면 이혼을 해달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 있는 작명가에게 아버지가 지어준 한자이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作名家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당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게 되어요.'
孫씨는 미국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서 서서히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북한군이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남침하면서 미군을 기습했다. 미군은 금강선을 넘어오는 사람은 敵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발포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인제공은 북한군이 한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서서히 反美감정이 풀렸다.
1980년대 후반 그는 용역 경비회사 사장이 되어 폭력 노조들과 대결하는 일을 했다. 이제는 행동적 우파이다. 그는 '반미감정을 극복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나와 같은 체험을 가진 이들이 복수심에서 반미로 흐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 문제는 관념의 포로가 된 요사이 철부지들이다.'라고 했다.
이 孫사장과 비슷한, 生死를 넘나던 체험을 한 세대들이 그 드라마틱한 추억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는 운동이 일어나야겠다.
여섯 살 소년의 6.25 체험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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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29, 15: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