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泰愚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폴란드, 헝가리에 이어 체코에서도 공산당 정권이 민중봉기로 무너지고 있던 1989년 11월 유럽을 방문하면서 영국 수상 대처와 회담했다. 1989년 11월 28일 오후, 그리고 그날 저녁 수상관저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은 盧 대통령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처는 그해 6월에 있었던 중국의 天安門 사건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었다.
'등소평은 문화혁명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해왔고, 조자양과는 홍콩 반환교섭 때문에 자주 만났는데, 교섭결과도 대체로 만족스럽고, 1997년 반환까지 잘 될 줄 알았는데... 등소평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조자양도 퍽 합리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무자비한 짓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외국 귀빈이 와 있어서 나라 체면도 있었다지만, 그 사람들은 최루탄도 없는지... 꼭 총을 쏘아 사람을 죽여야만 되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盧泰愚 대통령은 노사문제를 화제로 삼았다.
'우리는 지난 30년간 열심히 배우고, 일하고, 수출해서 많이 발전했습니다. 요즈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노사분규나 젊은층의 극단주의 등 어려움이 많습니다. 수상께서는 노사분규를 과감히 처리하여 산업평화를 이루는 데 성공하셨는데,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노사관계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일반 노조원들은 순진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합니다. 문제는 노조 지도층인데, 그들이 모든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노조지도자(union boss)가 파업을 하려면 노조원 전체의 비밀투표에 의한 동의를 받아야 되도록 법을 고쳤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그에 가담치 않았고, 간혹 파업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가 있으면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는 노조 지도층의 독재적 권위를 분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장 출입방해 등 부분 파업에 대하여도 규율합니다. 영국에서는 자동차 업체에서의 노사분규가 제일 심했었는데, 한 업체에 다수의 노조가 있어서 서로 경합적으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새로운 공장에서는 하나의 노조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원지주제를 실시해서 자기 회사뿐 아니라, 다른 회사의 것이라도 다만 몇 개의 주식이라도 소유하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가 소자본가가 되어 생각이 변하게 됩니다.'
**********************************************
기사 작성중
영국의 탄광은 산업혁명의 동력을 제공한 역사적 존재였다. 탄광노조는 그들의 희생으로 산업화가 이뤄졌다는 자부심을 가졌고 정부와 대중은 일종의 부채의식을 지녔다. 이것이 탄광노조의 규모와 결합되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드높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영국엔 3000개의 탄광에서 약100만 명의 鑛夫(광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연간 생산량은 2억9200만t이었다. 1946년에 노동당 정부는 탄광을 국유화했다. 이때의 광부수는 70만, 연간 생산량은 1억8700만t, 탄광수는 980개였다. 이즈음부터 탄광의 채산성이 나빠졌다. 시설과잉, 인원과잉 상태인데도 노조의 반발로 採算成(채산성)이 없는 탄광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1973~4년에 있었던 탄광노조의 총파업 직후 총선에서 테드 히스 보수당 정권이 패배했다. 탄광노조가 총파업을 하면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일종의 신화가 생겼다.
탄광노조는 1981년말에 아서 스카길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마가렛 대처 수상은 그 순간 대결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회고록에서 대처는 “노조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집단한테 넘어갔다고 판단했다”고 썼다.
1984~5년의 탄광노조 파업을 영국 언론은 ‘스카길의 스트라이크’라고 이름 붙였다. 스카길의 아버지도 鑛夫(광부)였고 영국 공산당원이었다. 스카길도 7년간 청년공산동맹원으로 일하다가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스탈린을 옹호했고,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비판했다. 사회주의를 흔든다는 것이 비판의 이유였다. 스카길은 소련으로부터도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파업이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자유를 앞세운 폴란드의 파업은 공산세계를 붕괴시키는 뇌관 역할을 했다. 철밥통을 지키려던 영국 탄광노조의 파업은 自滅(자멸)함으로써 대처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을 가능하게 했다. 두 상반된 노조운동이 全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사회주의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협력한 셈이다.
탄광정리를 결심하고 있던 대처 수상은 스카길이 노조 위원장에 뽑히는 걸 보고는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탄광이 파업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석탄 발전소였다. 대처는 석탄 在庫量(재고량)을 충분히 확보하도록 동력자원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탄광 파업이 시작되면 시위대가 석탄 반출을 막을 것이다. 발전소로 수송이 가능한 위치에 석탄을 가져다 놓아야 했다. 기름, 원자력, 가스 발전소도 시설을 최대한 가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대처는 탄광노조와 대결할 때 일선에 나설 동력자원부 장관과 탄광공사 사장도 투지가 있는 사람으로 앉혔다. 피터 워커 장관은 홍보에 강한 사람이었다. 대처는 언론이 탄광노조의 강경한 투쟁을 편들지 않도록 하여 여론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판단했다. 워커 장관은 신문사 편집책임자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거는 이였다. 탄광공사 사장이 된 아이언 맥그리거는 영국철강공사 회장으로 있을 때 파업사태를 원만히 수습 한 경험이 있었다.
1983년 10월 탄광노조 대의원회의는 공사측이 제시한 조건을 거부하고 연장근무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대처는 노조가 정부와 대결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용이라고 판단했다.
노동당 정부도 1974~9년 사이에 32개의 탄광을 폐쇄해야 했을 정도였다. 대처 정부가 들어서서 조사를 해보니 75%의 탄광이 적자였다. 연간 13억 파운드의 국가보조를 받고 있었다. 물론 이 돈은 납세자의 부담이다. 당시 광부수는 20만2000명이었다. 공사 사장이 된 아이언 맥그리거는 향후 3년 사이 인원 6만4000명을 줄이고 연간 2500만t 생산분의 시설능력을 폐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50세 이하 早期(조기)퇴직 보상제도도 발표했다. 퇴직신청자에겐 근무기간 1년마다 1000파운드씩 보상하기로 했다. 탄광노조는 채산성에 따른 탄광폐쇄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석탄 매장량이 바닥날 때까지는 폐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위원장 스카길은 “어느 정도의 적자라야 탄광을 폐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란 질문에 대해서 “적자는 무한정이라고 좋다”고 답했다.
1984년 3월 아이언 맥그리거 탄광공사 사장은 앞으로 1년 사이 20개의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1차로 요커셔의 콜톤우드坑(갱)의 폐쇄를 선언했다. 탄광노조는 내부 규약에 전국적인 총파업은 조합원으로부터 55%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노조는 투표를 했을 경우 55%의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편법을 썼다. 노조에 가입한 지역 탄광이 개별적으로 파업을 시작하고 중앙집행부는 이를 사후 승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파업 첫날 83개의 탄광이 파업, 81개는 가동했다. 탄광노조는 기동시위대를 조직하여 파업에 불참한 광부들을 협박했다. 경찰이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하니 겁을 집어먹은 광부들이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 곧 파업 탄광수가 100개를 돌파했다. 파업찬반 투표를 하려던 개별 노조도 기동시위대의 횡포에 눌려 투표를 연기했다.
대처는 일을 하고싶은 광부들을 정부가 보호해주지 못하면 노조와의 싸움에서 진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노조의 기동시위대가 불법행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형사범죄에 대해서는 경찰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3000명의 경찰력을 투입, 기동시위대의 협박으로부터 파업을 거부하고 일하러 가는 광부들을 보호해주도록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광부들은 지역노조별로 파업 찬반 투표에 들어갔다. 노팅햄셔를 비롯한 여러 군데의 탄광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7만 명이 투표했고 그 중 5만 명이 파업에 반대하는 데 표를 던졌다. 11개로 줄었던 가동 탄광수가 44개로 회복되었다.
대처는 1년간 계속된 탄광노조 파업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광부들이 일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경찰력을 사용했다. 善意(선의)가 惡意(악의)를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선량한 시민을 지키는 것은 시민의 힘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이다. 그 공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내는 국민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의무가 있다.
촛불시위가 불법화, 폭력화되었을 때 李明博(이명박) 정부의 경찰은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광화문 근처의 언론사를 폭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데도 실패했다. 지난 5월말에서 6월초 사이 보수신문들도 일시적으로나마 親(친)촛불-反(반)정부의 성향을 보였다. 폭도들의 협박으로부터 경찰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언론이 잠시 촛불시위대 편으로 기운 것이다. 방송과 신문이 다 같이 물대포 사용까지도 ‘과잉진압’이라고 비판하니 경찰은 폭력시위대를 진압할 의지를 잃었다. 폭력시위대를 진압할 때 발길질을 한 경찰관의 모습이 동영상에 잡히니 경찰은 그를 불구속 입건하고 지휘관을 직위해제했다. 이는 진압경찰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용기백배한 시위대는 언론이 자신들을 ‘正義(정의)의 사도’로 추켜준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거리로 몰려나와 경찰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주부들과 어린이들까지 촛불 시위대에 합류하는 것을 본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겁을 집어먹고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기로 하는 방향으로 추가협상을 해야 했다. 국민들을 제대로 설득하고 공권력을 엄격하게 사용하였으면 할 필요가 없었던 퇴각이고 협상이었다. 경찰의 엄정진압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여당은 거짓에 속은 민심을 ‘성난 民心(민심)’이라고 미화하곤 연행된 불법시위자들을 경찰이 선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대처 수상은 퇴임 후에 쓴 회고록에서 “폭동은 경찰이 정부로부터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뒷받침을 완벽하게 받아야 진압할 수 있다”고 썼다. 그는 “우리는 정치인들이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경찰이 폭동진압에서 취할 수 있는 법적 행동을 명백히 천명했다. 특히 파업거부 광부들을 위협하는 탄광노조측의 기동시위대에 대해선 집결하기 전에도 경찰이 사전에 해산시킬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대처 수상은 한 연설에서 경찰을 이렇게 지원했다.
“경찰은 법질서를 수호하고 있다. 그들이 정부를 지키는 게 아니다. 이 사태는 정부와 광부의 대결이 아니다. 이는 (파업) 광부와 (파업 거부) 광부 사이의 싸움이다. 정부는 그 사이에서 법을 수호하고 있다.”
대처는 경찰이 진압에 골몰하다가 보니 폭도들을 너무 적게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게 되었다고 반성했다. 시위대를 저지하는 데 주력하다가 보니 시위대에 대한 採證(채증)이 어려웠던 것이다.
탄광노조는 발전소 및 제철소로 수송되는 석탄이나 코크스를 저지하기 위하여 기동시위대를 투입했다. 경찰이 이를 진압하려 하니 충돌이 빚어졌다. 1984년 5월29일엔 5000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돌을 던졌다. 69명이 다쳤다. 다음날 대처 수상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은 어제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보셨을 줄 압니다. 어제 보신 광경은 법치(the rule of the law)를 暴治(폭치.the rule of the mob)로 뒤바꾸려는 책동이었습니다. 그게 성공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됩니다. 저들의 기도는 실패할 것입니다. 첫째, 훌륭한 경찰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용감하게, 그러나 공정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잘 훈련되었습니다. 둘째, 압도적 다수의 영국인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점잖으며, 법을 준수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위대를 뚫고 일터로 나간 분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법치는 暴治를 눌러야 합니다.”
두 달 뒤 대처는 의회연설에서 “광부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에 의한 통치(the rule of parliamentary democracy)'를 '폭도들에 의한 통치’(the rule of the mob)에 양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폭도들을 ‘내부의 敵’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포크랜드에선 외부의 敵과 싸웠지만 지금은 내부의 敵과 싸우고 있습니다. 내부의 敵은 자유에 대해선 더 위협적이고 더 싸우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대처는 의회의 토론에서 탄광노조의 파업을 지지하는 노동당에 대해서도 猛攻을 퍼부었다.
“노동당은 모든 파업을 지지합니다. 그 파업이 무슨 명목으로 하든, 어떤 손해를 끼치든 무조건 지지합니다. 이번에 노동당은 일하는 광부를 공격하는 파업광부들을 지지함으로써 이 나라에서 전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탄광노조와 대결함에 있어서 대처는 ‘수상의 말’을 가장 무서운 무기로 사용했다. 대처의 말은 논리적이고 단호하다. 이런 말은 탄광노조와 맞서는 경찰에겐 힘이 되고, 파업을 반대하는 대중에겐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노동당이나 파업광부들의 억지를 붕괴시키는 무기이기도 했다.
촛불시위가 불법-폭력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 李明博 대통령이 對국민 연설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산 쇠고기는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3억 미국인과 117개국의 사람들이 먹었지만 한 사람도 인간광우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거짓이냐, 진실이냐, 과학이냐, 미신이냐의 문제입니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미국산 쇠고기가 절대적으로 위험한 물질이라고 선동하는 MBC와 불법시위를 일삼는 촛불난동세력은 공공의 敵입니다. 거짓과 불법으로 法治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민주주의의 敵입니다. 국민이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선택한 이 정부는 거짓과 폭력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합법적 수단을 동원할 것입니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不義한 짓은 법치에 대한 도전입니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正義로운 일은 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李 대통령이 촛불시위 기간에 한 의미 있는 발언은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아침 이슬을 들으면서 수도 없이 자책했다” “나도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한 사람이다” 정도였다. 대처 연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불법행위에 대한 법질서 수호 책임자로서의 公憤心이 없었다. 촛불시위 때 李 대통령의 말은 경찰에 힘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폭도들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비판받는 대통령과 매맞는 경찰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 할 한나라당은 대통령 등 뒤에 숨어서 촛불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李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촛불시위대의 본질과 정체를 몰랐던 것 같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미국산 쇠고기를 절대적으로 위험한 물질이라고 선동한 것 자체가 反美운동의 한 표현이었음을 몰랐던 것 같다. 이념적 관점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대처는 탄광노조의 지도부를 노동운동가로 보지 않았다. 그들을 극좌 공산주의자로 보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탄광노조의 파업이 실패함으로써 영국은 파쇼 좌익(the Fascist Left)이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르크시스트들은 법이 지배하는 나라에 도전함으로써 경제의 법칙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들은 실패했다. 그럼으로써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로운 사회는 상호의존적임을 증명했다. 누구도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다>
촛불시위를 주도한 세력은 親北反美的 노선을 추종해왔던 인맥과 단체들이었다. 李明博 대통령은 주동세력의 정체를 직접 국민들에게 알려야 했었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여 선동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행위를 부끄럽고 두려운 것으로 여기니 我軍은 사기가 죽고 敵軍은 용기백배한 셈이다. 대처가 쓴 ‘파쇼좌익’이란 말은 촛불주동세력에게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좌익에게 말이 통하지 않고 힘만이 통한다. 민주정부의 가장 큰 힘은 법이다. 그 법을 갖고도 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도울 수 없다.
대처 수상은 파업기간에도 석탄공사와 탄광노조의 협상을 허용했다. 탄광노조는 ‘경제적 이유에 의한 폐광’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으니 협상이 지속될 수가 없었다. 탄광노조 협상 팀은 공사측과 회의를 마치면서 “우리끼리 더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나가라”고 했다. 노조측은 기자들에게 “공사측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대처는 ‘이 에피소드는 스카길 같은 자들과 협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고 썼다.
대처 정부하에서 장관들은 불법파업을 하는 탄광노조에 대하여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노조의 기금을 압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대처도 동조하고 싶었으나 사건담당인 피터 워커 동자부장관이 “그렇게 하면 여론이 탄광노조를 동정하게 된다”고 반대했다. 정부 차원의 소송은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탄광노조 내부에서 집행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는데 이것이 奏效(주효)했다. 대처는 파업이 끝난 뒤 “이른 시기에 집행부에 대해서 소송을 걸었더라면 일찍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고 아쉬워 했다고 한다.
1984년 7월9일 영국 항만노조가 탄광노조를 지원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으나 참여자가 적어 10일만에 끝났다. 대처는 석탄공사와 탄광노조 사이의 협상이 ‘채산성이 없는 탄광은 폐업한다’는 원칙이 모호해질까 걱정했다. 협상이 계속되니 직장에 복귀하는 광부들 숫자도 줄었다. 탄광노조가 협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 파업대열에서 이탈하는 숫자도 주는 것이다. 다행히 탄광노조측이 먼저 협상 종료를 선언해버렸다.
탄광노조의 파업에 정부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는 석탄발전소가 얼마나 가동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1985년 11월까지 정상가동할 수 있는 석탄재고량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석탄발전소용으로 석탄을 수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것이 광부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해서 포기했다. 탄광노조는 이탈자가 생기자 탄광촌에선 가족까지 협박하고 집을 공격하는 숫법을 썼다. 경찰은 파업불참 광부들 집에 비상전화를 놓아 경찰서에 직통으로 신고할 수 있도록 했고 정복 경찰의 순찰을 강화했다. 모든 싸움이 다 그렇지만 상대 진영의 내분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대처는 잘 알고 있었다.
1984년 8월7일 요커셔의 두 광부가 요커셔 탄광지부를 상대로 ‘찬반투표 없이 파업을 시작한 것은 불법’이란 이유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결정적 의미를 띠게 된다. 대처는 1984년 8월9일부터 27일까지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는 창가에 앉아 추리소설을 읽으려 해도 국내사태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무렵까지 영국 경찰은 불법행위를 한 탄광노조측 시위대를 5897명 체포했고, 1039명이 유죄를 받도록 했다. 최고형량은 징역 9개월이었다.
대처 수상이 이 무렵 가장 걱정한 것은 석탄공사와 탄광노조가 재개한 협상이었다. 대처 수상은 석탄공사의 아이언 맥그리거 사장이 좌익들의 생리와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업인의 편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대처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고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타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광부들이 파업을 끝내고 복귀하면 합의사항에 관계 없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는 오랜 경험상 아서 스카길 같은 인물들은 합의문의 모호성을 악용하여 문제를 원위치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도 ‘채산성이 없는 탄광은 문을 닫는다’는 원칙을 양보해선 안 될 일이었다. 경제성이 없는 탄광도 문을 닫게 해선 안 된다는 탄광노조의 요구는 분쇄되어야 하고, 분쇄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파업을 하는 행위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만 했다>
대처 수상이 정치인과 기업인의 차이를 설명한 부분이 흥미롭다. 대처가 보기에 정치인은 욕을 많이 먹지만 원칙과 이념을 걸고 싸울 줄 아는 직업인이다. 그가 보는 기업인은 타산적인데(그런 자신을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스카길 같은 좌익한테는 그런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다. 원칙(이념)을 떠난 합리성은 ‘장돌뱅이의 편법’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처 수상의 이 관찰은 촛불난동 사태를 전후한 李明博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해온 필자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李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이념을 포기한 실용주의’를 강조하여 좌익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善意를 베풀면 善意로 화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기업인다운 합리성인데 돌아온 것은 선동과 난동이었다. ‘원칙을 떠난 합리성’은 정치의 세계, 특히 좌익과 이념적으로 대결해야 하는 영국이나 한국에선 먹히지 않는다.
탄광노조의 파업기간중 대처 수상은 파업에 불참하고 일터로 돌아간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1984년 9월 그는 단체를 만든 파업불참 광부들의 부인들을 초청하여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李明博 대통령이 촛불시위로 피해를 본 광화문 일대의 상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부인들은 석탄공사의 말단 직원들이 노조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고 불평했다. 노조가 탄광촌의 상점주인을 겁주어 불참광부들에겐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고, “너희 부모들을 죽이겠다고”고 아이들까지 협박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1984년 9월1일엔 일하는 광부협회가 조직되었다. 대처 수상은 요커셔의 탄광촌을 방문했다. 파업중인 광부들은 밭에 나가서 채소뿌리를 캐내어 먹고 있었다. 여기서도 석탄공사의 홍보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처 수상은 그런 가운데서도 석탄공사의 한 간부(마이클 이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사람이라면 석탄공사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톤은 석탄공사 대변인이 되어 맹활약했으나 내부 견제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9월25일 대처 수상을 곤경에 처하게 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탄광을 가동시키는 데 필수요원인 坑안전요원들의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목적은 탄광노조를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이들이 파업을 하면 가동중인 탄광도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대처 수상은 이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더라도 파업 돌입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안전요원 조합의 온건파가 득세하여 파업결의를 철폐했다. 위기 뒤에는 好機가 온다고 했다.
1984년 8월 요크셔의 두 광부가 요크셔 탄광 노조를 상대로 '찬반투표를 하지 않고 불법파업을 했다'면서 적법성의 여부를 가려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10월에 영국 법원은 파업이 불법이라고 선고한 뒤 소환에 응하지 않은 노조위원장과 노조에 대해 20만 파운드가 넘는 벌금을 선고했다. 노조가 벌금을 내는 것을 거부하자 법원은 노조의 재산을 압류해버렸다.
이 무렵 영국의 탄광 노조가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소련의 비밀지원을 받았다는 폭로기사가 터졌다. 당시 탄광노조의 핵심 인사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영국인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에 대해서는 동정적이었으나 외국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파업을 하는 데 대해선 냉담해졌다. 여론의 지지를 잃은 파업임이 드러나자 파업대열에서 이탈, 작업현장으로 복귀하는 광부들이 늘어났다.
그해 12월엔 시위대원이 광부를 태우고 가던 택시를 향해 돌을 던져 운전자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다시 여론이 악화되고 직장으로 복귀하는 광부들이 늘었다. 다음해 2월이 되면 탄광노조원들중 과반수가 직장으로 복귀했다. 노조 대의원들은 그해 3월 파업 종료를 결의하였다.
*한국경찰의 부상자 통계.
"노조원은 순진, 문제는 지도부"
-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8-08-01, 2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