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 준비 태세
1984~5년의 탄광노조 파업을 영국 언론은 ‘스카길의 스트라이크’라고 이름 붙였다. 스카길의 아버지도 鑛夫(광부)였고 영국 공산당원이었다. 스카길도 7년간 청년공산동맹원으로 일하다가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스탈린을 옹호했고,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비판했다. 스카길은 소련으로부터도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파업이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자유를 앞세운 폴란드의 파업은 공산세계를 붕괴시키는 뇌관 역할을 했다. 철밥통을 지키려던 영국 탄광노조의 파업은 自滅(자멸)함으로써 대처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을 가능하게 했다. 두 상반된 노조운동이 全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사회주의를 약화시키는 방향에선 협력한 셈이다.
탄광정리를 결심하고 있던 대처 수상은 스카길이 노조 위원장에 뽑히는 걸 보고는 대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탄광이 파업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석탄 발전소였다. 대처는 석탄 在庫量(재고량)을 충분히 확보하도록 동력자원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탄광 파업이 시작되면 시위대가 석탄 반출을 막을 것이다. 발전소로 수송이 가능한 위치에 석탄을 가져다 놓아야 했다. 기름, 원자력, 가스 발전소도 시설을 최대한 가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대처는 탄광노조와 싸워야 할 때 일선에 나설 동력자원부 장관과 탄광공사 사장을 鬪士型(투사형)으로 앉혔다. 피터 워커 장관은 홍보에 강한 사람이었다. 대처는 언론이 탄광노조의 강경한 투쟁을 편들지 않도록 하여 여론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판단했다. 워커 장관은 신문사 편집책임자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거는 이였다. 국영인 석탄공사 사장이 된 아이언 맥그리거는 영국철강공사 회장으로 있을 때 파업사태를 원만히 수습한 경험이 있었다. 1983년 10월 탄광노조 대의원회의는 公社측이 제시한 조건을 거부하고 연장근무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대처는 노조가 정부와 대결하기 위해 투쟁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판단했다.
廢鑛 반대 파업 시작
노동당 정부도 1974~9년 사이에 32개의 탄광을 폐쇄했다. 대처 정부가 들어서서 조사를 해보니 75%의 탄광이 적자였다. 석탄공사는 연간 13억 파운드의 국가보조를 받고 있었다. 물론 이 돈은 납세자의 부담이다. 당시 광부수는 20만2000명이었다. 공기업인 석탄공사 사장이 된 아이언 맥그리거는 향후 3년 사이 인원 6만4000명을 줄이고 연간 2500만t 생산분의 시설능력을 폐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50세 이하 早期(조기)퇴직 보상제도도 발표했다. 퇴직신청자에겐 근무기간 1년마다 1000파운드씩 보태주기로 했다. 탄광노조는 채산성 악화에 따른 탄광폐쇄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석탄 매장량이 바닥날 때까지는 폐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위원장 스카길은 “어느 정도의 적자라야 탄광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란 질문에 대해서 “赤字는 무한정이라도 좋다”고 답했다.
1984년 3월 아이언 맥그리거 석탄공사 사장은 앞으로 1년 사이 20개의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1차로 요커셔의 콜톤우드坑(갱)의 폐쇄를 선언했다. 탄광노조도 신속하게 대응했다. 노조는 내부 규약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하려면 찬반투표에서 조합원으로부터 55%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노조 집행부는 투표를 했을 경우 55%의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편법을 썼다. 노조에 가입한 지역 탄광이 개별적으로 파업을 시작하고 중앙집행부는 이를 사후 승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파업 첫날 83개의 탄광이 파업, 81개는 가동했다. 탄광노조는 기동시위대를 조직하여 파업에 불참한 광부들을 협박했다. 경찰이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하니 겁을 집어먹은 광부들이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 곧 파업 탄광수가 100개를 돌파했다. 파업찬반 투표를 하려던 개별 노조도 기동시위대의 횡포에 눌려 투표를 연기했다.
대처는 일을 하고 싶은 광부들을 정부가 보호해주지 못하면 노조와의 싸움에서 진다는 판단을 했다. 경찰력을 투입, 기동시위대의 협박에 시달리는 파업불참 광부들을 지켜주도록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광부들은 경찰이 보호해주자 지역노조별로 파업 찬반 투표에 들어갔다. 노팅햄셔를 비롯한 여러 군데의 탄광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7만 명이 투표했고 그 중 5만 명이 파업에 반대하는 데 표를 던졌다. 11개로 줄었던 가동 탄광수가 44개로 회복되었다.
“정치인은 경찰을 지원해야”
대처는 1년간 지속된 탄광노조 파업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파업불참 광부들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경찰력을 집중배치 했다. 善意(선의)가 惡意(악의)를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선량한 시민을 지키는 것은 시민의 힘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이다. 그 공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내는 국민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의무가 있다.
촛불시위가 불법화, 폭력화되었을 때 李明博(이명박) 정부의 경찰은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광화문 근처의 언론사를 폭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데도 실패했다. 지난 5월말에서 6월초 사이 보수신문들도 일시적으로나마 親(친)촛불-反(반)정부의 성향을 보였다. 폭도들의 협박으로부터 경찰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언론이 잠시 촛불시위대 편으로 기운 것이다. 방송과 신문이 다 같이 물대포 사용까지도 ‘과잉진압’이라고 비판하니 경찰은 폭력시위대를 진압할 의지를 잃었다.
폭력시위대를 진압할 때 발길질을 한 경찰관의 모습이 동영상에 잡히니 경찰은 그를 불구속 입건하고 지휘관을 직위해제했다. 이는 진압경찰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용기백배한 시위대는 언론이 자신들을 ‘正義(정의)의 사도’로 추켜준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거리로 몰려나와 경찰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주부들과 어린이들까지 촛불 시위대에 합류하는 것을 본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겁을 집어먹고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기로 하는 방향으로 추가협상을 해야 했다. 국민들을 제대로 설득하고 공권력을 엄격하게 사용하였으면 할 필요가 없었던 퇴각이고 협상이었다. 경찰의 엄정진압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여당은 거짓에 속은 민심을 ‘성난 民心(민심)’이라고 미화하곤 연행된 불법시위자들을 경찰이 선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대처 수상은 퇴임 후에 쓴 회고록에서 “폭동은 경찰이 정부로부터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뒷받침을 완벽하게 받아야 진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정치인들이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고 했다. 영국 정부는 경찰이 폭동진압에서 취할 수 있는 법적 행동을 명백히 천명했다. 특히 파업거부 광부들을 위협하는 탄광노조측의 기동시위대에 대해선 집결하기 전에도 경찰이 사전에 해산시킬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대처 수상은 한 연설에서 경찰을 이렇게 지원했다.
“경찰은 법질서를 수호하고 있다. 그들은 이 정부를 지키는 게 아니다. 이 사태는 정부와 광부의 대결이 아니다. 이는 (파업) 광부와 (파업 거부) 광부 사이의 싸움이다. 정부는 그 사이에서 법을 수호하고 있다.”
대처는 경찰이 진압에 골몰하다가 보니 폭도들을 너무 적게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게 되었다고 반성했다. 시위대를 저지하는 데 주력하다가 보니 시위대에 대한 採證(채증)이 어려웠던 것이다. 파업기간중 영국 경찰은 불법시위자 1만1291명을 체포했고, 8392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최고 형량은 징역 9개월이었다. 시위대원 6명이 사망했다.
서울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촛불시위가 본격적으로 폭력화한 지난 5월24일 이후 7월18일까지 진압경찰은 464명이 부상당했다. 이들중 95명은 중상이다. 이 기간 경찰버스 120대가 파손되고 방패 무전기 방석모 등 1641점을 폭도들에게 빼앗겼다.
이 기간 경찰은 987명의 불법시위자들을 연행하여 13명을 구속, 886명을 불구속, 56명을 즉심에 넘겼다. 6월13일 MBC 뉴스데스크는 이런 시위를 두고, ‘누군가 조직하지 않았어도 광장을 가득 메웠던 시민들 그리고 이들이 보여준 비폭력 평화시위’라고 논평했다(계속).
대처, "정치인은 경찰을 지원해야"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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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8-23, 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