勞組에 대한 재산압류 조치가 결정타

대처는 어떻게 탄광노조를 굴복시켰나(4)
발전소가 얼마나 버틸 수 있나?

1984년 7월9일 영국 항만노조가 탄광노조를 지원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으나 참여자가 적어 10일만에 끝났다. 대처는 석탄공사와 탄광노조 사이의 협상과정에서 ‘채산성이 없는 탄광은 폐업한다’는 원칙이 모호해질까 걱정했다. 협상이 계속되니 직장에 복귀하는 광부들 숫자도 줄었다. 탄광노조가 협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 파업 이탈자도 감소하는 것이다. 다행히 탄광노조측이 먼저 협상 중단을 선언해버렸다.

탄광노조의 파업에 정부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는 석탄발전소가 얼마나 가동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1985년 11월까지 정상가동할 수 있는 석탄재고량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발전용 석탄을 수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광부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해서 포기했다. 탄광노조는 이탈자가 생기자 탄광촌에 사는 가족까지 협박하고 집을 공격하는 숫법을 썼다. 경찰은 파업불참 광부들 집에 비상전화를 놓아 경찰서에 직통으로 신고할 수 있도록 했고 정복 경찰의 순찰을 강화했다. 모든 싸움이 다 그렇지만 상대 진영의 내분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대처는 잘 알고 있었다.

1984년 8월7일 요커셔의 두 광부가 요커셔 탄광지부를 상대로 ‘찬반투표 없이 파업을 시작한 것은 불법’이란 이유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결정적 의미를 띠게 된다. 대처는 1984년 8월9일부터 27일까지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는 창가에 앉아 추리소설을 읽으려 해도 국내사태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대처 수상이 이 무렵 가장 걱정한 것은 석탄공사와 탄광노조가 재개한 협상이었다. 대처 수상은 석탄공사의 아이언 맥그리거 사장이 좌익들의 생리와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업인의 편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좌익에겐 안 통하는 ‘장돌뱅이의 타산’


대처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고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타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광부들이 파업을 끝내고 복귀하면 합의사항에 관계없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는 오랜 경험상 아서 스카길 같은 인물들은 합의문의 모호성을 악용하여 문제를 원위치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도 ‘채산성이 없는 탄광은 문을 닫는다’는 원칙을 양보해선 안 될 일이었다. 경제성이 없는 탄광도 문을 닫게 해선 안 된다는 탄광노조의 요구는 분쇄되어야 하고, 분쇄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파업을 하는 행위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만 했다>

대처 수상이 정치인과 기업인의 차이를 설명한 부분이 흥미롭다. 대처가 보기에 정치인은 욕을 많이 먹지만 원칙과 이념을 걸고 싸울 줄 아는 직업인이다. 그가 보는 기업인은 타산적인데(그러한 자신을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스카길 같은 좌익한테는 그런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다. 원칙(이념)을 떠난 합리성은 ‘장돌뱅이의 편법’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처 수상의 이 관찰은 촛불난동 사태를 전후한 李明博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해온 필자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李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이념을 포기한 실용주의’를 강조하여 좌익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善意를 베풀면 善意로 화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기업인다운 합리성인데 돌아온 것은 선동과 난동이었다. ‘원칙을 떠난 합리성’은 정치의 세계, 특히 좌익과 이념적으로 대결해야 하는 영국이나 한국에선 먹히지 않는다.

탄광노조의 파업기간중 대처 수상은 파업에 불참하고 일터로 돌아간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1984년 9월 그는 단체를 만든 파업불참 광부들의 부인들을 초청하여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李明博 대통령이 촛불시위로 피해를 본 광화문 일대의 상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부인들은 석탄공사의 말단 직원들이 노조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고 불평했다. 노조가 탄광촌의 상점주인을 겁주어 불참광부들에겐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고, “너희 부모들을 죽이겠다고”고 아이들까지 협박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노조 재산을 압류

1984년 9월1일엔 일하는 광부협회가 조직되었다. 대처 수상은 요커셔의 탄광촌을 방문했다. 파업중인 광부들은 밭에 나가서 채소뿌리를 캐내어 먹고 있었다. 여기서도 석탄공사의 홍보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처 수상은 그런 가운데서도 석탄공사의 한 간부(마이클 이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사람이라면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톤은 석탄공사 대변인으로 발탁되어 맹활약했으나 내부 견제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는 대처 수상이 탄광노조와 싸우면서 홍보를 얼마나 重視(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민주사회에선 엄정한 법집행에 여론의 뒷받침이 따르지 않으면 지속하기가 매우 어렵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촛불난동에 경찰력을 단호하게 행사할 수 없었던 것도 지지여론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홍보에 실패하여 상당수 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는 위험하다고 오해하고 촛불시위를 정당하다고 誤判(오판)하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對국민설득을 위한 가장 중요한 홍보기관은 대통령의 입이다. 李(이) 대통령의 입이 대처처럼 작동했더라면 촛불사태는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9월25일 대처 수상을 곤경에 처하게 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탄광을 가동시키는 데 필수요원인 坑안전요원들의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목적은 탄광노조를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이들이 파업을 하면 가동중인 탄광도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대처 수상은 이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더라도 파업 돌입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안전요원 조합의 온건파가 득세하여 파업결의를 철회했다.

위기 뒤에는 好機가 온다고 했다. 1984년 8월 요크셔의 두 광부가 요크셔 탄광 노조를 상대로 '찬반투표를 하지 않고 불법파업을 했다'면서 적법성의 여부를 가려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었다. 10월에 영국 법원은 이 파업이 불법이라고 판결한 뒤 불복한 스카길 노조위원장과 노조에 대해 법정모독죄를 적용하여 20만 파운드가 넘는 벌금을 선고했다. 노조가 벌금을 내는 것을 거부하자 법원은 노조의 재산을 압류해버렸다. 노조는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켰다. 법원은 도피재산을 추적하여 500만 파운드를 회수했다.

‘어중간한 승리’가 아닌 ‘완전한 승리’

이 무렵 영국의 탄광 노조가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소련의 비밀지원을 받았다는 폭로기사가 터졌다. 당시 탄광노조의 핵심 인사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영국인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에 대해서는 동정적이었으나 외국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파업을 하는 데 대해선 냉담해졌다. 여론의 지지를 잃은 파업임이 드러나자 파업대열에서 이탈, 작업현장으로 복귀하는 광부들이 늘어났다. 석탄공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11월19일까지 직장에 복귀하는 광부들에겐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첫 주에 2203명이 복귀했다. 그해 12월엔 시위대원이 광부를 태우고 가던 택시를 향해 돌을 던져 운전자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다시 여론이 악화되고 직장으로 복귀하는 광부들이 늘었다.

12월29일 피터 워커 동력자원부 장관은 “현재의 석탄생산량으로 보아 1985년에도 발전량을 줄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 발표했다. 과거 정부가 탄광노조의 파업에 굴복한 이유는 발전량의 감소로 제한送電(송전)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카길 탄광노조 위원장은 발전량이 곧 줄어들 것이고 정부가 굴복하고 말 것이라고 예고했으나 在庫(재고)를 미리 많이 확보했던 대처 정부는 “시간은 우리 편이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승리를 예감한 대처 수상은 ‘어중간한 승리’가 아니라 ‘확실한 승리’를 관철시켜야 영국 노조의 버릇을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코너로 몰린 탄광노조의 ‘체면을 살려주어야 한다’는 건의와 중재도 들어왔다. 수상은 중재에 참여하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1. 탄광업의 미래에 관한 논의는 파업을 끝내놓고 해야 한다.
2. 파업불참 광부들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드는 약속을 해선 안 된다.
3. 노조가 채산성 없는 탄광의 폐쇄 조치가 철회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어떤 약속도 해선 안 된다.
1985년 1월 중순 현재 파업에 불참한 광부들이 7만5000명에 달하고 매주 2500명꼴로 복귀하고 있었다. 대처는 탄광노조원의 과반수가 복귀하면 파업을 계속할 명분이 사라진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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