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다섯 명

박정희, 현신규 등.
녹화사업을 국가 정책사업으로 추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현사시나무를 만든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인 현신규 박사, 평생을 종자채집 등 나무와 함께 살아온 나무 할아버지 김이만옹, 전남 장성에 500ha가 넘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조성한 독림가 임종국씨에 이어 2002년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적 수목원으로 키운 민병갈(본래 이름 Carl Ferris Miller·79년 한국인으로 귀화) 전 원장 등이 모셔져 있다.
4월은 식목의 달이다. 4월이 되면 봄기운이 만연해지면서 겨우내 얼어붙었던 나무들도 새순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새순을 키우는 속도는 갓난 애기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보다 빠르다. 인간들은 나무를 통해서 1년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사계절의 순환을 나무들은 때로는 황량함으로, 때로는 신선함으로, 때로는 숲으로, 때로는 낙엽으로 다양한 모습을 선사하고 있다. 만약 나무가 없었다면 인간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삭막한 생활을 할까. 1년 중 4월 한 달만이라도 나무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무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이 숲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은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산림청은 2001년 새천년 첫 식목일을 맞이하여 지난 세기에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인 국토녹화사업을 기리기 위해 광릉국립수목원에 숲의 명예전당을 건립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을 헌정했다.

녹화사업을 국가 정책사업으로 추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현사시나무를 만든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인 현신규 박사, 평생을 종자채집 등 나무와 함께 살아온 나무 할아버지 김이만옹, 전남 장성에 500ha가 넘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조성한 독림가 임종국씨에 이어 2002년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적 수목원으로 키운 민병갈(본래 이름 Carl Ferris Miller·79년 한국인으로 귀화) 전 원장 등이 모셔져 있다.

숲의 명예전당에 이들 다섯 분 외에 앞으로 생겨날 또 다른 인물을 위해 여섯 개의 자리를 비워놓고 있다. 헌신적인 인물이 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국토의 70% 가량 산인 한반도에서 총 640만ha(1ha는 10,000㎡)에 이르는 산림면적에 침엽수와 활엽수 등 각종 수종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다. 이 중 조림지는 약 171만여ha에 달한다. 산술적으로 천연림과 조림의 비율이 7대3 정도 되지만, 천연림도 선각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온전하게 보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된 인물 중 임종국 선생은 2007년 4월호에 자세히 다뤘고, 산림녹화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은 71년 그린벨트 제도를 만들고 73년부터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세워 나무심기운동을 펼친 공로는 충분히 인정되지만 조림가라기보다는 정치인이었으므로 제외하고, 현신규 박사, 김이만옹, 민병갈 원장 등 나머지 세 인물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과학기술인 명예전당에도 올라

향산 현신규 박사(1912-1986)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생장과 재질이 우수한 리기테다 소나무를 육성 보급하고, 외국의 개량 포퓰러 330여 종을 도입 시험해서 목재자원 보급에 공로를 인정받아 62년 문화훈장 국민장, 64년 3.1문화상, 78년 5.16민족상 학술부문 수상, 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했다. 또한 산림청 초대 청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산림녹화사업에 매진했다. 그는 숲의 명예전당뿐 아니라 과학기술인 명예전당에도 헌정된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왜소하고 내성적이던 그는 일찍이 일본 유학을 갔다온 형에게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형은 일본 릿교(立敎) 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문학과 운동에까지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내성적이던 동생은 형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철학과 문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유학 가서 철학자가 되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휘문고보 졸업 즈음에 일본의 야마구치(山口) 관립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도 허락을 받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전혀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총독부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학교로 변질된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하라고 했다. 그가 여태까지 키워온 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갈등을 겪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입학하기로 했다. 그의 성적은 우수했다. 휘문고보 졸업성적은 78명의 졸업생 중 거의 수석에 가까웠을 정도였다고 그의 아들 현정오 서울대 농생대 교수와 주변인들은 전했다. 1930년 쉽게 입학했다.

수원고농에 들어갔지만 제대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꿈을 저버린 데 대한 갈등으로 거의 1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전기가 되는 책을 접하게 된다. 그 책은 일본의 유명한 사상가이면서 종교가였던 ‘우치무라 전집’이다. 그는 책을 읽다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구절을 접하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마음의 큰 동요와 감동를 받고 임업에 전념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는 그 정도로 자신에게 성실한 사람이었다. 이후부터 수림식물과 조림에 특히 관심을 갖고 매진했다.


리기테다 소나무·현사시나무 육종 성공

우치무라 전집이 그의 인생에 외적인 전환을 주었다면 수원고농에 다니면서 만난 정희섭은 현 박사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조림학자로 성장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다. 1933년 졸업 무렵 정희섭은 “내가 학비를 대줄테니 임업시험장에 취직하지 말고 일본 대학으로 진학하라”고 적극 권했다. 그러지 않아도 취직보다는 연구직을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귀가 솔깃하게 들렸다.



그는 정희섭의 제안을 받아들여 33년 졸업하자마자 바로 일본 구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36년 3월 구주대학 졸업 후 바로 귀국해서 청량리에 있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취직했다. 이곳은 당시 국내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다.

그는 39년 임업시험장장 자격으로 백두산 자원조사대를 구성했다. 산림, 축산, 지하자원 등을 탐사할 목적으로 지질, 광물, 기상, 동물학자 등 50여 명의 학자들이 함께 갔다. 그 업적이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백두산 생태조사에 관한 논문으로 발표됐다.

아쉽지만 일본 식물학회지에 발표된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을 또 한번 더 겪는 격이었다. 학문에 대한 갈증으로 다시 구주대학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박사공부를 하면서 해방 후 그가 능력을 발휘할 임목육종에 안목을 더 높였다.

임업분야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원고농에서 조교수로 있으며 해방을 맞은 그는 미군정청의 재건복구계획에 따라 유진오 박사 등과 함께 선진 학문의 견학을 위해 미국에 보내졌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법학공부를 하고 있던 그의 동생을 4년만에 만나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의 동생은 나중에 한국인 최초로 연방법원 판사가 된다.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 산림유전연구소에 있을 때 세계 각국의 소나무들이 서로 교배하여 만든 우수한 잡종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모습을 보고, ‘이게 바로 내 할 일이다’고 느꼈다. 그는 이후 ‘숙명적인 과제를 붙잡은 곳이 미국 산림유전연구소이며, 이곳이 내 학문의 성지’라고 회고했다.

그는 53년 리기테다 소나무 종자 수백 개를 얻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현대판 문익점이었다. 리기다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 구불구불하게 가지가 많고 송진이 많아서 재질이 좋지 않아 생장속도가 느린 것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테다소나무는 곧게 자라며 재질이 좋고 생장속도가 빠른 장점을 지녔다. 단점은 추위에 약하고 비옥한 땅에서만 자라는 것이 흠이었다.

현 박사는 이 둘을 교배했다. 생장이 우수하고, 곧게 자라며, 추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기적의 소나무인 리기테다 소나무를 탄생시켰다. 이 나무는 유럽의 잡종낙엽송과 에테뉴 라디아타소나무에 이어 교잡육종에 성공한 세계에서 세 번째 사례로 꼽혀 국제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아직도 미국의 주요 임업 교과서엔 현 박사의 업적과 리기테다 소나무 사진이 자세히 나와 있다.

속성 재배가 가능한 이태리포플러 나무도 잡종 교배해서 가로수와 녹음수로 보급했다. 한때 전국적으로 붐이 일었던 ‘포플러 나무 심기’ 운동도 그의 업적인 것이다.

남한의 빠른 조림을 위해선 생장속도가 빠른 나무들이 절실했다. 그의 육종연구도 이 분야에 집중됐다. 은백양나무의 빠른 생장력, 건조에 견디는 힘, 꺾꽂이가 잘 되는 점과 수원사시나무의 곧게 자라는 성질을 겸비한 은수원사시나무를 교배육종하기에 이른다. 이 나무는 평지뿐 아니라 산지에서도 빠르게 자라는 특징을 지녀 또 한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 박사를 찾아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은수원사시나무를 앞으로 현사시나무라고 개칭하도록 지시한다. 그 뒤부터 한국에서는 이 나무를 현사시나무로 불렀다. 그러나 국제학회에서는 아직 은수원사시나무로 불리고 있다.

그의 일생일대 철학은 한 마디로 산림부국론이었다. 즉 산림이 바로 국부의 척도이고, 산림의 성쇠가 국가의 성쇠와 비례한다는 게 그의 평생 소신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임업육종학자였다.

지난 2002년 과학기술부에서 전국의 대학교와 연구소로부터 추천을 받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우리나라를 빛낸 대표 과학자 14명을 선발했다. 고려시대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조선시대 물시계를 발명한 장영실, 한의학의 전통을 세운 허준,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 등이 해방 이전의 역사에서 뽑혔다. 대한민국 출범 이후 생명과학분야엔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 소개한 우장춘 박사, 유행성 출혈열의 병원균을 찾아낸 이호왕 박사, 그리고 현신규 박사였다. 특히 현 박사는 농업분야에서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과학계와 임학계 동시에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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