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은 누구일까? 크다는 의미는 세상을 크게 본다는 뜻이다. '큰 인물'은 세계를 머리에 넣고 정치를 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나라의 活路를 열고 민족사의 흐름을 바꾼 세 사람을 '큰 사람'으로 생각한다.
1. 金春秋(태종무열왕): 재상 시절에 목숨을 건 통일외교를 했다. 일본, 고구려, 唐을 다니면서 동맹을 모색한 끝에 당시 세계最大강국이던 唐과 손잡았다. 이 羅唐연합군이 그의 在位 때 三國통일의 첫 관문인 百濟를 멸망시켰다.
2. 李承晩(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무서운 自主정신으로 민족사 최초의 국민국가인 대한민국을 자유의 가치관 위에 세우고 韓美동맹을 구축하여 번영의 생명줄로 만들었다.
3. 朴正熙(근대화 대통령): 국가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한 시스템 관리의 鬼才로서 수출立國이란 對外개방정책을 통하여 富國强兵을 이룩함으로써 한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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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도층 1000명의 한심한 인물觀(2007년)
-민족사의 2대 쾌거인 대한민국 건국과 三國통일의 원훈들을 외면한 조사결과.
주간지 시사저널이 매년 발표하는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 조사 결과가 최근에 공개되었다. 이 조사엔 ‘한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이란 항목이 있다. 역사적 인물까지 포함한 조사이다.
이 조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각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했다. 즉, 행정관료,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기업인, 금융인, 사회단체 활동가, 문화 예술인, 종교인에서 각100명씩 100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이다. 따라서 한국의 지도층이 어떤 인물관과 역사관을 가졌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가장 자랑스런 인물 1위는 세종대왕으로서 28.2%의 지지를 받았다. 2위가 이순신 24.6%, 3위가 김구 24.3%, 박정희가 11.4%로서 4위였다. 이어서 반기문, 김대중, 광개토대왕, 박지성, 안창호, 정약용 順이다. 10위권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몇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민족사의 2대 쾌거인 대한민국 건국과 신라의 삼국통일 主役들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박찬호, 최경주보다 한참 뒤인 27등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3대 主役인 金庾信, 태종무열왕(김춘추), 文武王은 아예 이름이 없다. 조선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43위이고 을지문덕, 강감찬은 58위이다. 박지원, 유시민은 들어었는데 민족통일국가의 원훈들은 다 빠졌다.
한국의 지도층은 자신들의 實存을 가능하게 만든 대한민국 建國과 신라의 통일을 무시하거나 어느 면에선 敵對的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7위인데 신라통일대왕인 文武王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요사이 한국인들의 정신을 좀 먹고 있는 고구려 美化와 신라 죽이기의 흐름이 사회 지도층에도 스며 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 역사를 敗者의 입장에서 보는 이들, 역사의 건설자를 낮게 보는 二流인물들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한다. 민족혼은 이들 사이에 있지 않고 소수의 知性人과 건강한 생활인들 속에서 살아 숨쉴 것이다. 이승만과 김유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대로 대한민국 조종실에 들어가선 안된다. 역사관, 국가관, 인생관, 인물관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인물관을 보면 그 사람의 국가관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을 기리는가를 보면 그 국가의 품격을 알 수 있다.
내가 한국의 10대 인물을 순위를 매긴다면 이렇다.
1위: 金庾信 태종무열왕 文武王(공동)
2위: 李承晩 朴正熙 세종대왕(공동)
3위: 李舜臣
4위: 金方慶
5위: 李秉喆
6위: 元曉
7위: 王建
8위: 李成桂
9위: 柳成龍
10위: 광개토대왕 근초고왕(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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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넣을 세계 12명의 지도자를 골랐다!
-李承晩, 레이건, 대처, 드골, 아데나워, 케말 파샤, 등소평, 네루, 요시다, 만델라, 박정희, 트루먼.
(趙甲濟)
오늘 점심 식사 시간에 재미있는 토론이 있었다. 한 기업인이 리더십의 모범 사례가 될 만한 세계적 인물들을 12명 골라 그들의 사진을 싣는 달력을 만들어 나눠줄 계획이라고 하였다. 예술가, 군인에 이어 내년 달력은 정치인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20, 21세기에 한정하여 세계사의 발전에 기여한 12명의 지도자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同席한 4명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갔다. 정리하면 이렇다.
1. 선정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共同善에 기여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히틀러, 레닌, 스탈린, 체 게바라, 毛澤東 같은 독재자나 혁명가들은 탈락된다. 이들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기준으론 그 지도자가 통치했던 나라가 큰 나라이거나 선진국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3. 세 번째 기준으로는 그 지도자가 물러나거나 죽은 뒤 그의 정치적 유산(이념, 제도, 노선 등)이 계승되어 그로 해서 나라가 발전했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고슬라비아를 공산국가중 가장 먼저 개방시켰고, 스탈린과 맞서 독자노선을 걸었던 티토는 이 기준에 걸려 탈락했다. 그의 死後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內戰과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티토의 노선이 후계자들에 의하여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후계자의 成敗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
4. 네 번째 기준으론 建國, 獨立, 中興의 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결론적으로 결과물을 먼저 보고 그 결과물을 만든 인물을 선정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선 動機보단 결과이다. 문학이나 사회운동에선 動機가 중요할지 모르나 정치는 어디까지나 결과로 평가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서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먼저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는 4選을 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2차 大戰 승리를 주도했다. 해리 트루먼. 그는 東西 냉전에서 자유세계가 이길 수 있는 기초를 놓았고 전략의 기본 방향을 잘 잡았다. 원폭 투하, NATO 창설, 마셜플랜 추진, 트루먼 닥트린, 한국전 참전 등 큼직한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로널드 레이건. 그는 소련 공산제국을 해체로 몰고간 인물이다. 총 한 방 안 쏘고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영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2차 대전 초기에 홀로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맞서 자유세계의 보루를 지켜냈던 윈스턴 처칠, 그리고 신자유주의 개혁을 성공시킨 마거렛 대처 여사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
프랑스에선? 두 말할 것도 없이 드골 대통령이다. 독일군의 전격작전으로 6주만에 프랑스가 항복하자 망명정부를 세워 저항을 계속했고, 그 덕분에 2차 대전이 끝날 땐 프랑스가 戰勝國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10년간 은퇴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위기에 처하여 그를 다시 불러내자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여 5공화국을 10년간 통치하면서 고질적인 정치불안을 제도적으로 종식시켰다. 오늘의 프랑스는 드골이 중흥시킨 나라이다.
독일에선? 戰後 독일의 부흥을 주도했던 아데나워, 또는 독일통일의 기관차 콜 수상 중 한 명이면 오케이!
일본에선? 戰後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시킨 일본 중흥의 기수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이외의 인물이 있을 수 없다.
중국에선? 모택동은 魔王이니 젖혀놓는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혁 개방의 흐름을 만든 鄧小平일 수밖에 없다.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급성장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주의적 정치와 자본주의적 경제를 혼합한 鄧小平 노선의 승리이다.
머지않아 세계최대 인구국이 될 인도는? 간디는 정치 지도자로 볼 수 없으므로 제외한다면 인도 독립과 建國의 지도자 네루이다. 가난하고 복잡한 인도를 그래도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나라로 만들어 끌고 간 공로는 대단하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 여사 암살, 그의 아들 암살, 종교분쟁 등등 소란스럽기는 해도 민주주의식으로 굴러간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이다.
동남아에선? 월남의 지도자 胡志明을 거론한 이도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가였다는 점에서 失格되었다. 더구나 통일된 월남은 지금 사회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자본주의를 향해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수하르토를 꼽을 순 없다. 부패한 독재자였고 지금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모범적이지 않다.
南美에선? 달력에 넣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 세계 5대 富國 중 하나였던 아르헨티나를 포퓰리즘으로 망친 페론을 넣을 수도 없다. 칠레가 가장 잘 나가는 나라이지만 수천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는 곤란하다. 공산 혁명가 카스트로나 선동가 차베스를 모범으로 삼을 순 없다.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앞으로 잘 하면 몰라도.
아프리카에선? 한 사람이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언급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어 중동의 불씨 하나를 껐다. 그 代價는 암살이었다. 그런 점에선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지금 이집트의 상황이 말이 아니다. 사다트를 이은 무바라크가 근 30년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집트는 민주화도, 산업화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독재를 오래 했으면 경제라도 발전시켜야 할 것 아닌가?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있다. 남아프리카는 흑인 통치로 넘어간 후 살인사건이 너무 많이 난다. 이 부분에서 세계1등이다. 그럼에도 만델라의 도덕적 지도력이 백인 지배를 큰 유혈사태 없이 끝장 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스라엘? 단연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이다. 문제는 아랍 세력과 저렇게 싸우는 이스라엘 지도자를 영원히 기려야 할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가이다.
대만? 본토에서 쫓겨나 이 섬으로 건너온 장개석과 그 후계자들이 모범적인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일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래도 모택동에게 져서 본토를 빼앗긴 인물을 師表로 내 세울 순 없다.
이슬람圈의 대표 선수는 누구인가. 터키공화국을 거의 혼자서 세운 케말 파샤를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오스만 터키 제국은 해체되고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케말 파샤 장군이 군대를 모으고 그리스를 밀어내고 오늘의 터키를 세웠다. 그는 이슬람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개혁을 했다. 政敎분리, 여성 참정권 허용, 문자개혁 등. 지금의 터키 군부는 이런 케말 파샤의 노선을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유럽식 선진민주국가는 아니지만 오늘의 터키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력을 제어하면서 민주주의를 가꾸어 나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나라이다.
한국에서도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 물론이다. 한국의 국력이 세계 10위권이므로 당연히 대표인물을 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20세기에 국민국가로 출범한 여러 나라들 중 한국이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점에선 이론이 없다. 그렇다면 이 한국의 기적적 발전을 만든 지도자가 12명 안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더구나 한국의 발전모델은 후진국과 開途國의 교과서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독립과 건국의 이승만인가,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인가? 두 사람은 거의 同級인데, 나는 李承晩을 밀었다.
싱가포르의 李光耀는? 한 분이 추천했다. 토론을 해보니 탈락으로 결론이 났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싱가포르의 규모가 작다. 민주화도 안 되어 있다. 한국처럼 후진국과 개도국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 보편성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누가 대표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레닌, 스탈린은 자격 박탈이니 고르바초프가 남았다. 그는 소련을 개혁하는 데 실패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惡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니 인류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다고 달력에 넣어 지도력의 모범으로 기려야 할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니 말이다. 고르바초프에게 상을 줄 사람은 하나님뿐일 것이다.
내가 멋대로 달력에 넣을 세계적 지도자 12명을 결정한다면 이렇다. 李承晩, 레이건, 대처, 드골, 아데나워, 케말 파샤, 등소평, 네루, 요시다, 만델라. 두 명이 모자란다. 아무래도 이 달력을 보는 사람은 한국인이다. 한 명을 더한다. 朴正熙! 그래도 한 명이 모자란다. 미국에 한 자리를 더 주기로 한다. 한국을 두 번 살린 트루먼! 내가 너무 情에 약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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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야말로 변하지 않은 진정한 조선인'
徐廷柱 시인의 감탄.
趙甲濟
“부탁을 해도 당당하게 해”
1958년 9월 宋仁相 부흥부장관은 金泰東 조정국장과 재무부의 李漢彬 예산국장을 데리고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국의 對韓원조를 많이 얻어내고 이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교섭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경무대로 李承晩 대통령을 예방했다. 李 대통령은 '송 장관이 간다니 잘 해가지고 올 것으로 알아. 그러나 한 마디 꼭 해두고싶은 이야기가 있어'라고 했다.
'원래 우리 한국인은 남에게 돈 달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해.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그러지 않나.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억울한 이야기를 미국의 朝野에 널리 알리게. 38선 얘기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제 나라에서 치러야 했을 전쟁을 우리 땅에서 했으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지 않나. 원조를 좀더 많이 달라고 해봐. 그리고 '조그만 일에까지 너무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게.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잘게 굴면 위신이 서지 않아. 하물며 나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위신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네. 정정당당히 조리 있게 이야기해봐. 큰 성공이 있기를 바라네.'
李대통령은 외교하는 데 보태 쓰라고 흰 봉투를 하나 주었다. 미화 1000 달러가 들어 있었다. 100 달러 사용도 주저하는 李대통령으로서는 큰 돈이었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태평양을 날아가는 노스웨스트 항공기 속에서 宋장관 일행 세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 잠도 못 잤다고 한다(宋仁相 회고록 '復興과 成長').
6.25 동란기에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는 퇴임후 역사기록을 위한 증언을 하는 가운데 李承晩 대통령을 '국제정세에 관해서 최고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격찬했다. 무초는 또 李 대통령이 제퍼슨 민주주의자(Jeffersonian democrats)임을 자처했다고 말했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고, 3代 대통령을 지냈으며 루이지애나 매입(2300만 달러를 주고 프랑스로부터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지역을 사들임)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넓혔다. 미국 독립정신의 핵심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을 Jeffersonian democrats라고 부른다. 우리의 建國 대통령이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인물이었다면 그 흔적이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약점과 대중의 우매함을 잘 안 사람이었다. 그는 性善說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들의 분별력이 약하여 민주주의를 운영할 자질이 부족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제퍼슨은 그런 국민들로부터 主權을 회수하여 독재정치를 펼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을 교육할 것인가 自問했다. 결론은 後者였다.
제퍼슨 민주주의자
제퍼슨 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작은 정부와 代義 민주주의 존중: 미국 헌법 조문의 엄격한 해석으로 정부의 권력남용을 막는다.
2.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의무이다.
3. 국민의 알 권리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존중한다.
4. 정부는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교육을 중시한다.
6. 미국이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7.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종교의 자유 보호책이다. 종교는 정치부패로부터 자유로와지며, 정치는 종교갈등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李承晩 대통령이 新生 대한민국에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구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李承晩 대통령의 정책엔 제퍼슨식 민주주의와 유사한 면이 많다.
1. 政敎분리: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 신도였으나 정치에 기독교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믿었으나 기독교 국가를 만들거나 기독교를 우대하진 않았다.
2. 교육重視: 李 대통령은 언론과 학교를 통하여 한국인을 깨우치면 一流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 私有재산권의 신성시: 李 대통령은 농지개혁 때도 地主들에게 보상을 하도록 했고, 화폐개혁 때도 일정 액수 이상의 예금동결 계획에 반대했다.
4. 代義민주주의 존중: 李 대통령은 국회와 많이 갈등했으나 국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戰時에도 국회는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대통령을 퇴진시키려 했다. 戰時에도 대통령 선거는 이뤄졌고, 특히 시, 읍, 면의회, 도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선거 투표율은 90%나 되었다. 이때 선거로 뽑힌 의원들은 1만 명을 넘었다.
5. 언론자유의 존중: 李 대통령은 정부 비판을 많이 하는 언론에 불만이 많았으나 조직적인 탄압을 거의 하지 않았다. 戰時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다.
제퍼슨이 195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李承晩보다 더 민주적으로 할 순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가장 변하지 않은 조선인
李承晩은 미국과 미국인을 대함에 있어서 열등감이나 대책 없는 반항심을 일체 보이지 않고 당당하되 늘 감사했다. 나이 스물아홉 살에 쓴 ‘독립정신’에서 그는 <우리는 세계에 개방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동시에 <외국인의 횡포에 대해선 생명을 바쳐서라도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괴로움을 피하여 몇 만 리 떨어진 남의 나라로 가서 그 나라 국민이 되어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죽는다면 어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는 배재학당을 다닐 무렵 徐載弼이 “미국에선 좋은 강연을 들으면 이렇게 박수를 친다”고 가르쳐주었을 때 “뭐, 조선인이 박수까지 따라할 필요가 있나”라고 거부감을 느꼈다고 傳記를 쓴 徐廷柱 시인에게 털어놓았다.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등 미국의 名門 대학만 나오고 30대 초반에 이미 미국의 두 대통령(우드로 윌슨, 시어도어 루스벨트)을 만나고 親交했던 그였지만 徐廷柱에겐 ‘가장 변하지 않은 조선인’으로 33년만에 돌아온 사람이 李承晩이었다.
李承晩은 취재차 매주 찾아오는 徐廷柱에게 가끔 漢詩를 읊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자네는 시인이라면서?』라고 하더니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빛 좋은 사과를 한 개 건네주면서 『이거나 하나 먹어보게』라고 권한 뒤 미국 망명 시절에 쓴 漢詩를 들려주더라고 한다.
일신범범수천간(一身泛泛水天間)
만리태양기왕환(萬里太洋幾往還)
도처심상형승지(到處尋常形勝地)
몽혼장재한남산(夢魂長在漢南山)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대만/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李承晩의 시낭송을 듣던 徐廷柱 시인은 순간, <내 가슴 속이 문득 복받쳐 오르며, 저절로 두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李朝 말기부터 이 나라 자주독립운동의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도록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가슴속에 못 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한남산! 그 한남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徐廷柱씨의 속에서도 어느 사이인지 그를 한 민족의 아버지로서 확인하는 『아버지!』하는 감동이 안 솟아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李 대통령은 徐廷柱가 쓴 傳記가 출판되자 자신의 아버지 이름 뒤에 敬稱을 생략했다고 판매를 금지시켜버렸다. 李承晩의 거대한 생애는, 조선인이 조선인의 魂을 잃지 않을 때 세계적인 큰 인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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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토지개혁의 여파
-김용삼(월간조선 편집장)
해방 이후 너도나도 사업의 길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천당과 지옥의 문이 동시에 새겨져 있는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운이 좋아 때로는 거부(巨富)를 손에 쥐는가 하면 가정이나 가문 전체를 몰아넣는 패가망신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 쓰라린 패배의 사례는 박흥식 회장의 모습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해방 직후 남한은 전력이 부족해 북한으로부터 5만kW의 전력을 공급받아 왔었다. 그런데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미군정에 북한에서 송전한 전력의 요금 지불을 요청했다. 그들은 1947년 5월31일까지 남한에 공급한 전력의 대가로 400만 달러 상당의 기계와 전기용품, 기타 물자를 요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군정 당국은 그 동안 금지했던 남북 물자 교류를 허용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은 일제시대부터 화신무역을 통해 국제 교역 경험이 풍부한 박흥식 회장이었다. 박흥식 회장은 북한의 조선상사와 1년 동안 1000만 달러 어치 물자를 공급한다는 계약에 합의한 후 1948년 11월, 당시 우리 나라가 보유한 최대 규모의 무역선인 2000t급 앵도환(櫻島丸)호를 북한 지역으로 출항시켰다.
이 배는 생고무ㆍ구리ㆍ면포ㆍ가솔린 등 30만 달러 어치의 물자를 싣고 흥남항에 입항했다. 그런데 북한은 이 배와 선원, 물자를 압수하고 선원들을 억류시킴으로써 박흥식 회장은 앉아서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 시절에 상업이나 공업은 오늘로 치면 일종의 벤처 산업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경제의 주종이었던 농업은 소작료라는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 안정된 산업이었던 반면, 상업이나 공업은 리스크가 대단히 큰 산업이었다. 이윤만 생각한다면 공업이나 상업을 하기 힘든 시대적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각자들이 상공업에 뛰어든 것은 오늘로 치면 벤처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을 지배했던 유교는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는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상업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지기에 이른다. 정체된 사회에서 산업마저 태동하지 못했으니 상업 자본이 축적될 토양이 전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니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토지자본은 건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을 통해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 최대의 공업국이자 선진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 노숙하며 고급 교육을 받은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토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의 추진에 있어 북한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 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식 토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물수 유상분배 형태로 토지개혁이 진행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토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농지 예정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에 의해 단행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을 신속히 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그 후 3개월만에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란을 통해 막대한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1)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완전히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을 위한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자금으로 하나 둘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후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구조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고절적인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 정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유도
우리 나라 유일의 축적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25를 맞아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해 갔다. 다급해진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 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 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이 제도를 시행에 옮긴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찬스를 얻게 됐다.(2)
삼양사의 김연수 회장은 1950년대 초 울산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설립하면서 투자 대금의 일부를 지가증권으로 조달했다. 두산그룹의 박두병 회장은 동양맥주 불하 과정에서 34억원의 불하 가격 중 10%를 부친(박승직) 명의의 지가증권으로 납부했고, 나머지 대금도 액면가의 30%로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일부 충당했다.
선경직물의 창업자 최종건 회장도 선경직물 불하 과정에서 수원 지역 토착 지주인 차철순씨의 지가증권으로 매수 계약금 13만환을 지불했다. 또 한국화약 창업자 김종희 회장은 1951년 6월에 한국화약공판이란 회사를 불하 받는 과정에서 계약금의 일부인 1억원을 시중에서 싼값에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지가증권을 활용한 지주의 자본 전환 성공률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 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 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이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흥부장관, 재무부장관을 역임하며 경제정책 입안과 시행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송인상(宋仁相)씨(효성그룹 고문)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농지개혁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의해 지주ㆍ소작 제도가 아니라 농민이 그 땅을 소유한다는 원칙 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만에서 보듯이 농지개혁에서 얻은 지주자본이 귀속재산 불하와 연결되어 공업자본화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다. 토지개혁 직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연간 50%를 넘었다.
인플레 때문에 지주가 가지고 있던 지가증권의 가치가 폭락했고, 그 결과 산업자본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 자본이 공업자본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자본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 격이 김각중 경방 회장이다.
김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에 근대식 방직공장이 들어온 것이 1850년대. 그 후 일본은 산업혁명을 경험한 나라들이 겪은 코스를 그대로 답습하며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즉 방직업에서 기계산업, 중화학공업 등으로 이행한 결과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미국이나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세계적인 공업국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그들은 산업화에 대한 100여 년의 풍부한 경험과 기술진이 그대로 남았으며, 대규모 기업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경영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본만 뒷받침될 경우 손쉽게 전후(戰後)복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전주 지방에서 120정보를 소유하고 있던 이부영(李富榮)씨를 비롯한 지주들의 전주방직 실패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부영씨를 비롯한 전주 지방의 대지주 5명은 지가증권의 3분의 2씩을 투자하여 방직공장을 불하 받고 실무는 일제 때 근무했던 종업원들을 모아 그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근대적인 회사 경영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지주들에겐 예기치 않았던 부담이 뒤따랐다. 공장을 인수하여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불하자금 외에 운전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5명의 지주들은 다시 돈을 모아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운영자금 외에도 상당한 부담이 뒤따랐다. 결국 회사 운영을 포기하고 삼양사에 공장을 넘기고 말았다. 사업에 뛰어든 지 불과 1년만에 다섯 명의 지주는 지가증권을 다 날리고 빚만 잔뜩 지게 됐다. 이런 사례는 당시 우리 나라 지도층들이 산업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시키는 일반적 사례일 것이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사연을 가슴에 안은 채 시행된 농지개혁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차원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노출된 것은 예기치 못한 전쟁이 가져다 준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하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학자들은 세계의 여러 나라 중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도 소득 분배가 한국처럼 공평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유래를 찾기 힘들다고 평한다. 그 공로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동아시아에서 농지개혁에 성공한 일본, 한국, 대만은 중산층이 두텁게 자리잡아 경제 성장의 초석과 사회 균형자 역할을 수행한 반면, 남미(南美) 여러 나라들은 농지개혁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극단적인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된 것을 비교하면 그 뚜렷한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뿌리 깊게 이어졌던 반상(班常)의 계급 구분이 사라졌고, 건국 후 농지개혁으로 인해 부자와 빈자(貧者)의 격차가 무너졌다. 전 국민이 계급 없고, 빈부 격차가 사라진 ‘차별 없는 시대’가 열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 풍토가 훗날 한국인을 상징하는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의욕과 참여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3)
경제 안정 15원칙 시행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가 지도부의 긴급 과제는 치솟는 물가를 안정시키고 인플레를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1950년 1월1일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신년사를 국민에게 전했다.
<“금년 정월 초하루에 이르러 1년 전의 우리 경제와 비교해 보면 여러 갑절 진전된 것을 누구다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경제원조처)의 원조 물자를 받은 우리로서는 민중의 많은 노력과 정부 당국의 주야 근무 결과로 석탄 채굴량이 많이 늘었고, 따라서 전력이 크게 증가되었습니다. 식량도 추수가 풍족해서 강제로 미곡을 수집하던 제도를 다 폐지하고도 오히려 여유가 있어서 외국에 반출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을 극복하고 정크 무역과 마카오 무역으로 우리 나라 경제는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였다. 해방 직후의 시대를 살았던 기업가나 정치가, 정부 관리들은 어떻게 하든 당당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국민이 배불리 먹고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의욕으로 강하게 뭉쳐 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 총 수출액은 3500만 달러, 국민소득 1인당 50~60 달러에 불과하던 시기였다. 수출품도 김이나 한천, 머리카락, 텅스텐 정도였던 시절이다.
무엇보다 골치는 치솟는 물가, 주저앉는 통화가치였다.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뛰는 바람이 서민 생활은 물론, 사회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정부는 인플레 수습을 위한 중대조치로서 ‘한국 경제 안정 15원칙’을 1950년 2월23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같은 해 3월4일에 시행됐다. 이 제도를 입안했던 송인상씨는 “경제 안정 15원칙이 자유당 시절에 만든 정책 중 가장 잘된 것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4)
우리 정부가 시행한 ‘경제 안정 15원칙’은 패전으로 파탄에 직면해 있던 일본의 경제 재건을 위해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일본 경제 재건 조사단을 이끌고 온 닷지의 권고안(닷지 라인), 즉 ‘일본 경제 안정 9원칙’과, 일본 정부가 세제(稅制)개혁을 위해 초청한 세정(稅政) 전문가 샤우프의 권고안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부강한 일본’을 만든 것은 이 닷지 라인과 샤우프 권고안이라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러한 닷지 라인과 샤우프 권고안 모델을 참고로 하여 만든 우리 나라의 경제 안정 15원칙이 1950년 3월부터 시행됨에 따라 통화량 증가 추세는 한풀 꺾였고, 물가 안정과 사회 혼란이 수습되어 가기 시작했다.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제공되는 원조를 토대로 각 부분의 생산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방직ㆍ철강ㆍ도자기ㆍ카바이드ㆍ유지공업 등의 실태 조사와 생산 계획이 수립됐으며, 경인지구 군수공장 실태 조사, 공업 원자재 실태 조사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1950년부터 종합적인 생산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 원조자금의 지원을 얻어 제철ㆍ조선ㆍ시멘트ㆍ비료ㆍ판유리 등 주요 산업과 전력ㆍ지하자원 개발계획을 본격화한다는 청사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런 원대한 구상은 6ㆍ25로 인해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 서울 시내 곡가(穀價)는 쌀 한 가마에 2300백원이었다. 인민군 남침 하루 뒤인 6월26일에는 쌀 한 가마에 5000원으로 두 배 이상 폭등했다. 6월25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은행이 문을 닫았다. 6월26일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예금 인출 인파가 몰려들어 대혼잡을 이루었다. 은행에는 1인당 10만원까지만 지불하라는 긴급 지시가 내려졌다. 6월26~27일 이틀간 은행을 빠져나간 돈은 총 77억3000만원으로, 전체 화폐발행액의 13%에 달하는 규모였다.
당시 한국은행에는 현찰과 금괴, 은괴가 보관되어 있었다.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격해 오자 국방부는 김일환(金一煥) 대령의 인솔하에 한국은행 금고에서 금괴 1070kg, 은괴 2513kg가 든 상자 89개를 긴급 호송했다. 이 금괴와 은괴는 경남 진해까지 피난을 떠났다가 미국으로 이송되어 보관되었다가 우리 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에 가입할 때 그 기금 불입에 사용됐다.
그러나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 중이던 엄청난 양의 현금을 미처 대피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인민군들은 남한 점령지에서 이 현찰을 마구 사용해 물자 구입과 대금 지불에 사용하는 바람에 훗날 재무부장관이 이적 행위자로 몰리기도 했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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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물가지수는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을 100으로 할 때 1947년 855, 1950년 2974, 1951년 18753, 1952년 40605, 1953년 50863으로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양상을 보였다.
(2)6․25를 맞아 지가증권의 투매현상에 대해 조선일보(1981년 3월27일)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지가증권을 사면 돈 번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난 시절의 부산시 광복동 길거리에는 지가증권을 사고 팔겠다는 사람들로 붐볐다. 별의 별 이름의 증권회사 간판들이 즐비하게 나붙었고 가죽가방을 들고 “증권 사려”를 외치고 다니면서 거두어들인 것들로 신흥 중권업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정부로부터 정식 증권회사 인가를 받은 증권업자는 대한증권주식회사 하나뿐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머지 그 많은 증권회사, 업자들은 모두 무면허 가짜 증권업자들이었던 것이다.>
(3)송인상씨의 회고록 ‘부흥과 성장’을 보면 ‘하면 된다’는 구호뿐만 아니라 농촌자립운동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다음은 그 관련 내용.
<지역사회 개발계획은 1950년대 초 인도 파키스탄 등지의 촌락자조운동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정부는 물질적인 원조-예컨대 시멘트 철강 목재 등의 구입자금을 보조금으로 지급, 농촌의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낙후된 농촌을 부흥시키자는 운동이다. 자조운동은 ‘내 마을은 내 손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다리나 농로(農路), 공회당 등을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건설하는 것이다.
원래 미국의 대외 원조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조 수혜국의 참여의식이다. 스스로가 잘 살아보겠다는 강인한 정신을 갖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원을 적극적으로 원조계획에 보태어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1958년 김학묵(金學黙) 박사(후에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를 간사장으로 하여 지역사회개발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운동을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으나 누구의 이이디어에 의해 ‘지역사회개발’로 결정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매우 절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이 운동에 참가할 젊은 남녀대학 졸업생-즉 새로운 상록수가 되려는 학생들을 70명 정도 채용하여 전국 각지에 파견했다. 당시 국회의원 중에는 자기 선거구를 그 시범지역으로 해 달라는 요청이 많아 한때 지역선정에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각 도 2개군씩을 시범지역으로 선정, 균형을 맞추기로 했다.
당시 상록수로서 충남 연기군에 간 어떤 여자대학 졸업생은 마을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줌으로써 메마른 농촌에 새로운 정서와 훈풍을 불어넣으면서 중앙에서 보내준 지원을 불씨로 삼아 공회당(새마을회관)을 신축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한 경북 영일군에서는 선착장을 성공적으로 건립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수십 포대의 시멘트와 뱃줄을 묶을 쇠고랑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을 지원해 주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마을 사람들의 자조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4)경제안정 15원칙.
<전문>당면한 경제적 현실에 비추어 금후 경제정책은 무엇보다도 인플레 현상의 조급한 극복에 중점을 두어 재정의 균형, 금융의 건전 및 생산증강을 기하여 경제안정 15원칙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강력히 추진한다.
1.재정 및 금융의 건전화, 재정자금과 산업자금과의 긴밀한 상호조정을 기함으로써 통화최고발행제를 견지한다.
2.행정기구 간소화, 경비절약, 행정보조금 억제, 책임지출 중지 등 모든 실질적 방법에 의하여 세출을 철저히 긴축함과 아울러 회계의 운용을 규제한다.
3.조세부담의 조정 합리화, 징세사무의 능률화를 목표로 징세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한다.
4.귀속재산 및 관리물자의 급속불하에 의한 정부수입 및 세원의 증진을 도모한다.
5.정부사업특별회계 및 정부관리기업체의 수지균형을 기하도록 경영의 극력 합리화와 요금의 적정 인상에 의하여 독립채산제를 확립한다.
6.말단행정의 정리 및 합리화에 의한 경비절약과 지방 과세의 정상적 충실로써 지방행정의 자치적 건전을 촉진한다.
7.금융계획을 급속 확립하여 모든 용자는 반드시 본 계획 내에서 취급하는 한편 국민저축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고 국채의 신속한 소화를 촉진한다.
8.민간부동(浮動)잠재자력(資力)의 생산자본화를 촉진하여 기업의 자기금융력의 실질적 강화를 도모한다.
9.기초물자 및 생활필수물자 중 물가조정의 거점이 될 물품 등에 국한하여 이를 통제 대항으로 하고, 현유(現有) 재고량의 조사, 가격보정(補正), 적기방출 등의 방법에 의해 강력유효한 신물가안정의 기반을 확립한다.
10.수송력을 정비 강화한다.
11.정부물자 취급 대행기관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합리적인 정당배급기구 및 방법으로서 유통의 원활함을 촉진한다.
12.현유(現有) 생산조건(자재․기술․동력 및 경영능력)으로 단시일 내에 생산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국내 중요자원의 적극 개발 및 국내 생산품 및 수출 생산품의 극력 증산을 기한다.
13.긴급물자 부족량의 수입은 품목을 지정하여 수출량의 범위 내에서는 당분간 이를 전적으로 허용한다.
14.원조물자 활용 및 지정품목의 수출진흥을 위해 국내 생산체제의 합리적 조화를 기한다.
15.노무의 생산성을 앙양하는 한편 확고하고도 탄력성 있는 최저임금제도를 조속 확립한다.
<후문(後文)>본 경제안정 15원칙은 국무회의에서 결정, 이에 기준하여 관계 각부처에서 총동원적 구체안을 급속 실시한다.>
戰亂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다
-金容三(月刊朝鮮 편집장)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연재한다. 이 글은 ‘전경련 40년사’ 도입부에 수록된 것이다.
6ㆍ25의 파괴와 혼란, 산업화 시동
3년여 밀고 밀리는 전쟁이 휩쓸고 간 상처는 너무도 처참했다. 수백만의 인명 피해는 그 무엇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파괴의 대열에서 산업 시설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3년간의 전쟁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피해는 사회간접자본과 공업 시설의 60%, 주택의 16.9%가 파괴돼 총 피해액은 3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됐다. 이것은 19449~50 회계연도의 경상 GNP의 두 배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섬유공업의 67%, 인쇄업 75%, 기계공업 32%, 식품공업 30%, 화학 24%, 금속공업 26%가 폭격을 맞거나 부서져 가동 불능 상태가 됐다. 6․25 이전에 남한 유일의 경제적 규모를 갖춘 산업 분야로 가동됐던 면방직 분야는 전쟁 1년만에 방직기의 67%인 22만추, 직기는 47%인 5300대가 완전 파괴되어 고철 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전쟁은 신생 정부의 경제 안정에 대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고, 또 빈약한 산업 기반마저 붕괴시켰다. 산업의 심장이었던 경인공업지대가 인천상륙작전과 수도권 탈환 공방전의 전장(戰場)이 되어 쑥대밭이 되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산업 시설이 크게 파괴됐다.
덕분에 전란의 참화를 면한 영남 지역 기업가들이 전시경제를 등에 업고 성장 가도를 달렸다. 6․25로 인해 전통적 갑부로 행세하던 호남 지주 계급이 몰락하고 영남세가 등장하면서 자유당, 공화당을 거쳐 영남 권력 전성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전쟁의 포성이 멎고 부산 임시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는 전후 복구의 망치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경성방직은 6․25로 인해 30여 년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결과물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영등포의 방직공장을 비롯해 시흥의 염색공장, 쌍림동의 피복공장 등이 모조리 불타고 폭격을 맞아 폐허로 변한 것이다.
전쟁 전에는 일부 노동자와 엔지니어들이 좌익계 노동 단체인 전평의 영향으로 파업과 태업에 앞장서는 등 질서가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겪으면서 직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실히 깨달은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경방’의 깃발 아래 모여들어 전후 복구작업에 참여했다.
그들은 잿더미에 묻혔던 기계를 파헤쳐 끌어내고 파괴된 기계를 분해하여 쓸 만한 기계로 다시 조립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밤이면 전기가 없어 횃불을 켜 놓고 작업을 진행했다. 종업원들에게 줄 임금도 없었지만 그들은 무보수를 자원하여 폭격 맞은 다른 공장의 잿더미에서 뒹구는 철판과 부품을 주워다 철공소를 만들고 기계를 조립했다.
이러한 자력 복구작업에 감동한 미국 보도진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그 현황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 보도하여 세계에 알렸다. 고된 복구작업 끝에 1953년 4월11일에 공장 시동식을 가졌는데, 전 임직원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50년대 초반 한국의 사회ㆍ경제상은 이렇듯 비참한 것이었다.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은 그나마 6ㆍ25로 대부분 파괴되어 폐허로 변한 상황에서 국가 지도부와 정부 관료, 기업가들은 우리 경제를 산업화 쪽으로 방향을 잡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단서는 1950년 3월과 1951년 3월 동경서 열린 두 차례의 한일 무역회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회의에는 우리측에서 한통숙(韓通淑) 상공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여 송인상(宋仁相) 재무부 이재국장, 박충훈(朴忠勳) 상공부 무역국장, 김용진(金龍震) 기획처 물동국장, 김진형(金鎭炯) 한국은행 동경 주재원 등이 참석했다. 당시 우리 나 대표단은 동경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인상은 일본이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제반 분야의 기술은 물론, 자금을 만드는 시스템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패전국이지만 태도가 당당했다. 그것은 일본이 가진 산업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본은 패전으로 인해 경제 순환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유일한 동력원인 석탄 증산에 모든 경제적 역량을 총투입했다. 일본은 수입이 허용된 중유의 전량과 석탄을 철강 부문에 중점 투입하고, 증산된 철강을 다른 자재와 더불어 석탄 분야에 집중 투입했다.
여기서 증산된 석탄을 다시 철강산업에 투입하는 등 양 부문간의 투자 교류를 정책적으로 확대시켜 경제 전체를 부흥시킨다는 구상을 수립했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경사(傾斜)생산 방식’이었다. 그 시절 일본의 곳곳엔 ‘일본의 산업 부흥은 석탄으로부터’ 라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이런 모습에 감명을 받은 우리 대표단은 귀국 직후 일본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토대로 경제정책, 산업정책에 대한 청사진을 머리 속에 그렸고, 이런 내용을 토대로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내용에 대해 송인상씨는 시사잡지 ‘월간조선(月刊朝鮮)’과의 인터뷰(2000년 11월)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한일 무역 대표단은 동경에서 돌아와 돌아와서 장관께 동경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토대로 이런 설명을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는 토지개혁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그 좁은 토지를 들여다보면서 한국 경제 부흥을 꾀한다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우리도 일본처럼 빨리 산업화를 해야 한다. 경제 개발을 서두르기 위해서는 국가 전반을 리드할 수 있는 경제계획 같은 것을 만들어 통일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유지로 장관께 보고를 드린 기억이 나는군요.”
당시 정부 관료들도 대부분 송인상씨와 비슷하게 산업화, 공업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욕을 가지고 추진했던 경제 안정 15원칙은 집행 3개월만에 6․25를 만나 중단된 상황이었다. 전시 인플레로 물가가 치솟고, 피난민은 들끓는 가운데 전쟁의 양상은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우리 정부 관료들이 산업화, 공업화에 대한 의지를 가다듬게 된 계기는 ‘네이산 보고서’ 때문이었다. 1950년 12월 유엔총회는 한국 경제 부흥을 위해 유엔한국재건단(UNKRA:United Nationans Korea Reconstruction Agency)을 결성하고 1951년 7월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UNKRA는 전쟁 중 긴급한 구호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우선적으로 착수해야 할 공업시설 건설사업으로 판유리ㆍ연탄공장ㆍ시멘트공장ㆍ비료공장ㆍ전력시설 등을 내정하고 그 기초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1952년 전란이 한창이던 와중에 UNKRA는 전후(戰後) 한국 경제의 재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로버트 네이산씨에게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 결과 제출된 것이 그 유명한 ‘네이산 보고서’였다.
보고서 내용은 한국이 우선 농업에 집중 투자하여 농업부문의 생산성을 높이고, 증산된 쌀을 해외에 수출해서 얻은 외화로 긴급물자를 조달하는 방식으로 공업화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농업 근대화를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줄거리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1953~54년 미국 회계연도를 제1차연도로 하여 1959년까지 5년간 1억2000만 달러를 투자, 매년 국민총생산을 5000만 달러씩 증가시켜 목표연도인 1959년 국민총생산액을 25억1000만 달러로 높이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 보고서가 제출되자 많은 논란이 제기됐다. 우리 나라의 정부 관리들은 네이산 보고서 내용에 적극 반대하는 한편, 한국민의 높은 교육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공업화로 산업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이산 보고서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송인상씨는 자서전 ‘부흥과 성장’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네이산 보고서는 여러 각도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나는 반봉건적인 동양식의 영세농업구조와 관련, 농업 중심의 투자계획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달했다. 그러나 네이산씨는 자본의 축적정도나 기술수준, 경영능력에 비추어 볼 때 한국경제의 공업화를 지금 시작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 네이산 보고서는 결국 채택되지 못한 채 사문화(死文化)되고 말았다. 역사를 거꾸로 읽어갈 수는 없지만 당시 네이산 보고서가 그대로 정책으로 채택되어 우리가 농업국가로 되었다면 오늘의 우리 경제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지 흥미로운 일이다.>
송인상 효성 고문은 자서전에서 네이산 보고서와 관련, ‘나는 그 때 농업에 의해 한국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구상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곤 했다’고 기록해 놓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상공부 전기국장, 광업국장, 공업국장을 비롯해 부흥부차관, 부흥부장관을 지내며 중요한 산업정책을 입안, 집행했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그 시절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로 나가야 한다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국가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원칙이기도 했다.
우리 돈으로 철강공장을 지어라
정부가 겨우 안정을 찾은 것은 1955년 무렵. 이때부터 사회 각 분야 사람들이 산업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정부 관리나 국회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전, 피난수도 부산에서는 한국 산업사의 진행에 있어 중대한 의미를 갖는 두 가지 작업이 검토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전후 복구사업에 긴급한 철강공장 건설이요, 다른 하나는 수입대체산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제일제당 부산공장 건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이해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산업문명의 핵심이 철강공업에 있으며,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는 사실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과정에서 깨달은 화두(話頭)였다. 6ㆍ25의 휴전 문제가 흘러나오던 1953년 부산 임시정부는 이미 전후복구를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철강산업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 것은 1953년 4월4일의 일이다. 이날 이대통령은 내각에 다음과 같이 특별지시했다.
“전쟁이 끝나면 하루 빨리 부흥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건설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사업 건설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관계부처는 철강산업에 대한 기본 대책을 검토한 끝에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현재 인천제철)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는 작업으로 연산 5만t 규모의 평로(平爐:구식 용광로)를 건설하여 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을 때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무상원조액 4억 달러에 달하는 등 우리 나라의 모든 경제계획은 미국의 경제고문관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수립한 후 미국 원조기관에 철강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미국 원조당국은 “지금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무슨 철강공장인가. 시급한 민생문제부터 해결하자”며 우리측 요구를 거절했다.
보고를 받은 이대통령은 “못이나 양철이라도 만들어야 판잣집이라도 지을 것 아닌가” 하면서 미국이 돈을 못 낸다면 우리 정부가 보유한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지으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극심한 달러 부족으로 장관이 외국 방문을 할 때면 손수 달러를 세어 주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외환사정이 지극히 어려운 전시(戰時)에 철강공장 건설을 위해 140만 달러를 투자키로 결정한 것은 역사적 결단이었다.
이대통령은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해 부산에 와 있던 서독 적십자병원장 후버 박사에게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에 서독이 기술지원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이대통령이 서독과 교섭에 나선 이유는 미국이 우리 나라 철강공장 건설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서독은 2차대전 패전 후 마샬 플랜에 의해 전후복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서독 기업들도 해외 공사를 수주하여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후버 박사는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서독 정부에 알렸고, 서독 정부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유엔군에 물자를 공급하던 유태인 중개상 아이젠버그를 교섭 상대로 내세워 적극적인 수주 활동을 벌였다.
1954년 실시된 대한중공업공사의 5만t 규모 평로 제강공사 국제입찰에는 미국, 스위스, 서독의 전문회사가 참여하여 경합을 벌였다. 그 결과 서독 최대의 제철시설 제조회사인 데마그사(社)가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어 1956년 2단계로 실시한 380만 달러 짜리 압연공장 건설사업도 데마그사에게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강공장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 현장을 수시로 방문하여 건설작업을 독려했다. 마침내 1956년 하반기에 인천중공업의 평로 제강공장 건설이 완공되어 첫 출강식(出鋼式)이 거행됐다. 이것이 우리 나라 철강산업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다. 평로 제강공장에 이어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생산이 개시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정부는 철강공업육성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연산 20만t 규모의 제철소 건설안을 마련하여 미국 국제원조처(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에 건설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동해안에 건설하려 했던 이 제철공장은 코크스를 쓰는 용광로 제철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활용하는 전기제철공장 건설안이었다. 문제는 이 공장의 가동을 위해서는 전력공급을 위한 발전소 하나를 새로 지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58년 들어 대한중공업공사의 압연공장 건설공사가 진전되자 김일환 상공부장관이 서독을 방문하여 데마그사와 연산 20만t 규모의 제철소 건설문제를 협의하고 서독,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이 힘을 합쳐 국제차관단을 조직하는 문제를 협의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6ㆍ25 직후에 외국 차관 한푼 안 들이고 순수한 우리 자본으로 제강공장을 건설한 것은 2차대전 종전 후 후진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중공업 프로젝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자체보유불로 철강공장 건설이라는 결단을 내릴 정도로 국가 근대화에 대한 깊은 안목과 식견을 가졌던 지도자였다. 철강공장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의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서독에 가서 현대식 철강산업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 나라 철강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 때 양성된 인력들이 박정희 정권 시절 포항제철 건설에 대거 참여하여 오늘의 ‘포철 신화’를 이룬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업계 관련 인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우리 나라 중공업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라고 평한다.
전시(戰時)무역에서 제조업으로 전환
위기는 곧 기회의 다른 말이다. 포탄은 철통같은 방위선을 뚫지 못해도 상인들의 이재(理財)는 그것을 뚫고 들어가 물자를 교역한다. 물자가 교역되는 곳에서 경제가 싹트고 산업이 개화한다.
전쟁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허물고 새 질서를 창조하는 기회가 되었다. 졸지에 인민군의 남침으로 산업의 터전을 잃은 기업가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와 해외 무역을 통해 물자를 조달하면서 새로운 사업의 기초를 닦아가기 시작했다. 전쟁상황이던 당시 우리 나라의 주력 수출품은 고철과 탄피였다. 전장(戰場)에서 수집된 고철과 탄피는 일본이나 홍콩으로 수출되어 귀중한 달러 수입원 역할을 했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중간 규모의 무역회사였던 삼성물산의 경우 1951년 한해 동안 3억원을 출자하여 무역을 한 결과 1년 후에는 출자금이 출자금의 20배인 60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대부분이 고철과 탄피를 수출하고 생필품과 의약품을 수입해서 얻은 수익이다.
전시(戰時)의 무역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훗날 재벌의 반열에 올랐던 당대의 기업가들, 즉 삼성의 이병철, 럭키의 구인회, 두산의 박두병, 한일합섬의 김한수, 동양화학의 이정림, 쌍용의 김성곤 회장 등은 피난수도 부산에서 무역업을 통해 거부(巨富)를 축적한 사람들이다.(1)
당시 임시수도 부산은 6․25 전쟁물자가 부려지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각종 산업시설, 특히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던 경인공업지대가 파괴되면서 산업 활동이 거의 마비됐다. 전란으로 고통받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식량과 사치품이었다.(2)
이러한 무역을 통해 거부를 축적한 기업가들 중 선각자들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즉 단순히 무역으로 이윤을 축적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 생필품 공장을 지어 값싸고 질 좋은 소비재를 직접 생산해 공급하자. 그리하여 국민들의 의식(衣食)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전란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경제부흥에 일조하자는 착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축적된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이행되는 길이기도 했다. 그 상징적인 변모를 보여준 것이 이병철 회장의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었다. 제일제당은 그간 수입에 의존하던 기호품을 국내에 공장을 지어 수입대체화함으로써 상업자본의 산업화라는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제당공장 건설 아이디어는 한국무역협회를 이끌던 전용순씨로부터 나온 것이다. 전용순씨는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으로부터 설탕공장이 수지맞는 산업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점령했는데, 대만에서 공급되는 사탕수수를 원료로 설탕을 만드는 제당공장을 지은 기업가가 큰 재미를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마침 전용순씨는 야당 인사를 두둔했다 하여 집권층의 눈밖에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정치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부산에서 숨어 지내던 무렵, 이병철씨에게 제당공장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귀가 번쩍 뜨인 청년 사업가 이병철이 무역에서 번 돈을 집중 투자하여 제일제당 공장을 부산에 건설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제당공장 건설에 착수한 1953년은 아직도 6․25 전란의 포성이 멎지 않은 때였다. 참모들은 전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전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고 수지맞는 사업은 외국에서 소비재를 수입 해다 국내에 파는 무역업이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로 제당공장 건설에 나섰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모험이었고, 값비싼 투자였다.
당시 설탕은 100% 외국에서 수입되고 있었다. 만약 국내에 설탕공장을 지어 생산하면 수입품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대량 공급할 수 있다. 이런 확신이 이병철 회장을 제당공장 건설이라는 외길로 내몬 것이다.(3)
제일제당이 본격 가동되면서 이병철 회장은 돈벼락을 맞게 된다. 아침에 설탕 한 트럭을 싣고 나가면 오후에 한 트럭을 돈을 싣고 올 정도로 제당업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제당 설립 불과 2년만에 나는 거부(巨富)의 칭호를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53년 우리 나라 설탕 수입량은 2만3800t이었다. 수입가격은 t당 35달러선. 그때까지 수입의존도 100%였던 설탕은 제일제당의 가동으로 인해 수입의존도는 1954년에 51%, 1955년 27%, 1956년에 7%로 급격히 떨어졌다. 제일제당의 성공이 자극제가 되어 동양, 삼양, 대한 등 7개 제당업체가 난립하는 양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다음으로 도전장을 던진 분야는 의복 분야였다. 국민에게 질 좋은 양복지를 값싸게 공급하여 의(衣)생활을 해결하고, 수입에 의존하던 양복지를 국산화함으로써 외화를 절약한다는 사업구상이었다. 제일모직 건설과정은 우리 나라 기업사 뿐만 아니라 산업사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기업(企業)이란 업(業)을 기획하는 것” “경영(經營)에서 경(經)이란 밧줄이나 끈으로 줄을 쳐놓는다는 뜻. 영(營)이란 줄쳐 놓은 둘레를 두루 쌓는다는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경영이란 새로 집을 짓거나 길을 닦을 때 미리 해 놓는 측량계획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 시절 우리 나라 재계(財界)의 사업 규모가 일천하여 주먹구구식의 전근대적 경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모직의 건설 가정에서 이병철 회장은 근대화 된 선진 경영의 진수를 우리 사회에 보여주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오랜 검토 끝에 양복지를 생산할 주(主) 기계는 독일제로, 보조 기계는 영국ㆍ이탈리아ㆍ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제품을 선별 도입했다. 그리고 모직공장 건설에 필요한 온도와 습도 등 기상조건에서부터 전력ㆍ노동력ㆍ교통ㆍ용수ㆍ수질은 물론, 종업원에 대한 기술지도와 훈련에 이르기까지 48개 항목을 상세히 메모하여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우리 나라 기업 경영에 ‘기획 및 계획’ 개념이라는 최신 경영기법을 처음 도입 시행한 최초의 사례였다.
제일모직도 제일제당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전후(戰後)의 산업 질서는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에 누가 빨리 선착하느냐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병철 회장의 성공에 자극 받은 기업가들은 앞을 다투어 대한모직, 한국모방, 경남모직 등의 모직회사를 청업했고, 다른 기업가들은 전시(戰時) 무역으로 축적한 상업자본을 투자하여 락희화학, 한국유리, 대한양회, 동양제당, 삼양제당과 같은 근대적인 산업시설 건설에 도전했다.
이처럼 전후에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류의 흐름을 탄 기업들은 훗날 한국에서 대기업군 형성의 기폭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었고 대한모직은 신일그룹, 경남모직은 한일합섬 그룹으로 발전해 나갔다. 락희ㆍ개풍ㆍ삼호ㆍ삼양사ㆍ대한전선ㆍ금성방직ㆍ동양제당ㆍ대한제분 등 초창기 대기업그룹군은 모두 이 시기 흐름에 편승하여 성장의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반면 시대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상업자본에만 계속 매달려 현실안주를 택한 기업가는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해 갔다. 이러한 트랜드의 변화가 벌어진 현장은 피난수도 부산이었고, 대부분의 제조업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 밀집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산업화의 첫 토대는 부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거부(巨富)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은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이었다. 대구에서 양말공장을 운영하던 정재호 회장이 삼호방직을 창업한 것은 1950년. 양말업에서 방직업으로 전환한 삼호방직은 전란의 여파로 다른 지역에 위치하던 방직시설이 대부분 파괴됐으나 공장 시설이 대구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파괴를 면해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삼호방직 운영으로 부를 축적한 정재호 회장은 조선방직을 인수하고 대전방직을 복구하여 짧은 기간 내에 한국 제일의 방직왕 대열에 올랐다.
뒤를 이은 기업가는 개풍의 이정림 회장. 개성상인 출신인 이정림 회장은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56년 문경시멘트공장을 인수하여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대한산업의 설경동 회장도 당대에 주목받던 기업가다. 그는 부산에서 중석을 수출하고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여 부를 축적했고, 이어 방직업, 대한전선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포목상으로 출발한 구인회 회장도 부산에서 플라스틱, 치약, 비누, 전자공업에 손을 대 크게 성공했다. 이양구 회장은 설탕과 밀가루 도매업을 하다가 동양제과, 동양시멘트의 길로 진출했다.
이 시기에 성공한 기업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역업이나 도매업을 통해 축적한 상업자본을 산업 자본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또 일제시대 호남 지주들이 대부분이었던 재계의 주도권이 영남지역 재력가에게 넘어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6․25 때 공산군에게 점령돼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재산이 상실됐으나, 영남지역은 그나마 파괴를 면했기 때문이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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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우리 나라의 기업가들의 탄생 과정을 보면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정미소나 양조장, 제재소, 식료품 등 영세자본으로 손을 댄 중소 제조업 부문. 박흥식 회장은 10대에 미곡무역에 손을 대 거금(巨金) 5만원을 손에 쥐었다. 그는 쌀장사로 번 돈으로 인쇄소를 차렸고, 여기서 번 돈으로 백화점에 진출하여 1930년대에는 4대 갑부로 등장하게 된다. 이병철, 정주영, 최태섭씨 등도 일제치하에서는 영세자본으로 쌀가게,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두 번째 사례는 포목상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한 상업자본 계열. 태창그룹을 일군 백낙승 회장은 일제시대 포목상, 두산그룹의 박두병 회장, 럭키그룹의 구인회 회장도 첫 출발은 포목상이었다. 이밖에도 개풍그룹의 이정림 회장, 한일합섬 그룹의 김한수 회장도 포목상 출신이다.
셋째는 일인(日人)이 경영하던 기업에 근무하다 일인이 철수한 후 기업을 인수한 사례.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의 유일한 한국인 사원이었던 김종희씨는 일본 사람이 물러간 후 조선유지 인천공장을 인수하여 오늘의 한화그룹을 일구었다. 최종건 회장도 선경직물 기계주임으로 근무하다 이 공장을 인수받아 오늘날의 SK그룹을 일으켜 세웠다. 대한중기의 김연규 회장, 동일방적의 서정익 회장도 그들이 근무하던 일본인 회사를 인수받아 오늘의 대기업으로 키웠다.
(2)6ㆍ25 이전의 무역은 물물교환 형태의 윈시적인 무역이었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시장도 홍콩과 일본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전후복구를 위한 무역이 본격화되면서 무역 시장은 미국과 유럽으로 확대되어 본격적인 무역이 개시되었다.
(3)제당공장 건설을 결심하게 된 정황에 대해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국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비물자를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다가는 언제까지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화는 귀중하다. 우리 국민이 소비하는 것은 우리 나에서 만들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적 자원 외에는 자원다운 자원을 갖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그것을 다양한 상품으로 가공하여 수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과 가공․생산시설을 갖춘 제조업이야말로 불가결의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사의 가장 큰 사람은?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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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05, 14: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