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의 이루지 못한 사랑

한 해병대원의 6·25 추억
=언제 적군이 나타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密會는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이 민 영 충남 천안시 성정동 156-8




전쟁 중의 密愛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1950년도에 체험했던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쓰고자 한다. 나는 아군의 서울 수복과 동시에 해병대에 입대하였다. 1951년 3월께 내가 소속되어 있던 해병대 독립 5대대(당시 5065부대:부대장 오명복 소령)의 부대본부는 김포반도에 위치한 양촌면 소재 양촌초등학교에 있었다.

나는 전투정보대 일원으로 그해 8월께 개성 일원에서 피난을 나온 청소년들을 모집하여 15명 대원으로 특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지금은 북녘 땅으로 되어 있는 개풍군으로 파견되어 敵情(적정)을 수집하여 부대본부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현역군인으로 유일한 파견대장으로 공작대원 15명과 김포반도 북쪽에 위치한 「조강」 나루터에서 돛단배를 타고 임진강을 渡江(도강)하여 개풍군의 어느 촌락에 도착하였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敵情을 살피고 알아낸 정보를 무전기를 이용하여 본부에 보고하였다.

어느 날 부락 이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는 데 인민군 두 명이 부락에 와 있다는 것이다. 첩보를 받는 즉시 작전에 들어가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생포된 인민군 중 한 명은 입대 전 원산에서 전문대학 재학 중 인민군에 입대한 군관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병이었다. 권총 1정과 따발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로 인하여 해군 참모총장으로부터 1952년 3월 은성충무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전쟁 중이라 죽음과 공포, 두려움만 있을 것 같지만 아름다운 기억도 있다. 1952년 여름인 것으로 기억된다. 개풍군 어느 부락에서 개성에서 피난온 사람들 중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는 데 나이는 19세 정도였다. 개성시 만월동에 살았고 개성 명덕여자중학교에 다니다가 6·25 사변으로 자기집 인삼밭을 소작하는 사람의 집으로 피난을 왔다고 했다.

나는 수색 작전을 나갈 때 그 부락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집에 들어가 휴식을 하는 기회가 많아 그 여학생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입대 전 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마음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언제 적군이 나타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하늘의 별은 우리들의 만남을 축복하여 주기라도 하듯 이쪽 저쪽에서 반짝이고 풀 속의 벌레들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가는 줄도 모르고 있을 때 부근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권총을 빼들고 손전등을 비추어 보니 부락에 사는 처녀들이 우리들의 밀애 장면을 훔쳐보기 위해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거운 기분이었다. 그 여학생은 6·25 사변 전 서울市長을 역임한 김태선씨가 숙부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미와 같은 여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녀는 항상 개성에 위치한 덕물산, 어드니고개, 범고개, 고남문고개, 남산, 개성 등을 되뇌이며 빨리 돌아가고 싶어 눈시울을 적셨다.

그녀를 만나는 시기에도 수많은 잠복근무를 하였다. 그러던 중 1952년 12월 하순 눈보라 치는 날로 기억된다(당시 부대장은 이봉출 소령). 개풍군 全지역에 인민군과 중공군 혼성부대가 갑자기 남하하기 시작하여 우리 대원들과 나는 개풍군을 철수하게 되어 돛단배를 타고 임진강을 넘어왔는데 이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개풍군에서 피난을 와 있던 민간인들도 김포로 이주하였는데 그녀도 인천에 사는 친척집으로 가겠다고 하며 떠난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판문점 옆의 82m 高地戰

1953년 봄쯤 우리 해병 5대대는 김포에서 임진강 건너편 야산으로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우리는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매일 같이 매복근무를 하였다. 지금의 판문점 남쪽에 위치한 82m 高地(고지) 앞에 사천강이 흐르고 있다. 그 高地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야간에는 적군이, 주간에는 아군이 점령하고 수색작전을 하였다.

어느 날 밤 또 다시 야간 수색작전의 명령이 떨어져 우리 해병 2개 소대가 작전을 하게 되었다. 나와 다른 전우 한 사람이 전투정보대 일원으로 척후병의 임무를 띠고 선두에 서게 되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집합하여 부대장(당시 백남억 소령)의 격려가 있었다. 부대장이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나의 손목시계를 보시더니 야간에 시계가 빛에 반사되어 敵에게 발견될 수 있으니 소매 속으로 넣으라며 올려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출동 전에 부대원 전원에게 「위스키」 한 잔씩 따라주시며 분투하라는 당부 말씀을 가슴에 담고 얼굴에 위장칠을 하고 일렬로 출발하였다.

판문점 남쪽에 흐르는 그 사천강은 간만의 차가 심하다. 강물이 빠질 때는 발목 정도까지 물이 차지만 들어올 때는 물 깊이가 2m가 넘게 들어온다. 암흑 같은 자정에 강을 건너 사천강 둑을 가로질러 나는 가장 먼저 敵의 참호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뒤따라 오는 전투소대원들은 강을 건너 둑에 막 도달하였다. 소대원이 자동 소총을 엎드려 자세로 내려 놓는 순간 미리 잠복하였던 중공군이 자동 소총을 집어 들었다. 먼저 방아쇠를 당기는 차에 중공군도 따발총을 발사하여 순식간에 피아간 비명 소리만 들렸다.

朴중위의 용기

이로 인해 아군은 아수라장이 되어 퇴각하기 위해 사천 강물로 뛰어들었으나 강물은 밀물로 바뀌어 수심이 깊어져 수영하여 건너와야 했다. 82m 高地에서는 아군을 엄호하는 기관포로 요란하게 사격하고, 중공군 쪽에서는 박격포를 강물에 퍼부어 입고 있던 방탄조끼를 벗어 던지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敵의 매복에 걸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아군은 3명의 전사자가 있었고 중공군도 수명이 사살되었다. 다음날 강물이 썰물로 빠져나갔을 때 소대원들이 수색하여 방탄조끼를 회수하였다. 얼마 후 다시 소대원들과 82m 高地를 저녁 일찍 매복하기 위해 참호 속에 있는데 자정쯤 되었을 때 갑자기 나팔 소리, 피리 소리, 꽹과리 소리가 들리더니 마이크 소리로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으니 손을 들고 하산하면 살려준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신병들은 와들와들 떨면서 소총도 참호 속에 놓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때 선임 장교인 朴중위(성명 미상)와 고참병들이 『나가자! 해병대가』를 일제히 외치며 사격을 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때 참호 속에서 지휘하고 있던 朴중위 앞으로 敵의 수류탄이 날아 들어왔다. 朴중위는 카빈소총 개머리판으로 수류탄을 걷어내려는 찰나 폭발하고 말았다. 朴중위는 그때 부상으로 한 쪽 다리 잃을 만큼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

무전기(SCR 300)로 포병대로 연락하여 高地 중간 부분에 포사격 지원을 하자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아오고 전투가 끝난 눈앞에는 중공군 인민군 시체들이 철조망 부근에 수십 구 널려 있었다. 우리는 큰 전과를 세웠다.

당시 朴선임장교는 후송되었는데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전투로 해군 참모총장으로부터 1952년 3월 무성충무무공훈장 그리고 1953년 11월에는 은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나는 그후 부산 용두산에 위치한 해병대 사령부 정보국으로 전속되어 대구육군정보학교에 위탁교육을 2회 받았으며 1954년도에 해병대 제1여단 정보참모실에서 근무하다가(당시 경기도 금촌) 전역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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