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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대중(金大中) 국장(國葬) 조문이 계기가 되어 남북간에는 또 한 차례의 ‘대화 국면’이 전개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23일 아침에 있었던 북측 ‘사절단’의 청와대 방문과 그 내용을 쉬쉬 하는 청와대의 움직임으로 볼 때 아무래도 남북관계는 또 한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소동을 겪게 되는 것 같다. 남북관계에 생산적ㆍ건설적 돌파구가 마련될 것인가의 여부를 좌우하는 두 개의 변수(變數)가 있다. 그것은 김정일(金正日)의 북한의 태도와 자세에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했느냐의 여부와 그 같은 변화를 통하여 북한이 앞으로의 남북관계와 남북대화를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것을 과연 수용할 것이냐의 여부다. 그러나, 이번 김대중 국장을 이용한 대남 조문외교(弔問外交)를 통해 드러난 북한의 태도와 자세에는 기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명박(李明博) 정부는 김정일이 소위 ‘특사 조의사절단’을 통하여 슬그머니 내민 ‘독(毒) 묻은 사과’를 덥석 받아먹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대중ㆍ노무현의 ‘햇볕정책’을 계승하려 하는 것 같다. 이번 북한의 조문외교에 감지덕지 호응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정부의 대응에서는 북한에 대한 치명적인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이 짙게 배어나는 것 같다. 혹시라도 정부 관계자들이 북한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 필자가 1995년 한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논문을 아래에 싣는다.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래 본다. - 李東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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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體制로의 轉換을 위한 協商戰略
- 과거 對北會談을 기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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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군사연구회 주최 “韓國의 휴전체제와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 방향”에 관한 세미나(서울: 199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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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발표할 논문 [발표자: 李東 馥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초청연구위원(당시)]
1. 서론 - 문제의 제기
오늘날 지구상에는 모두 200개에 가까운 국가가 존재한다. 1994년 9월 현재 국제연합(UN)에 가입한 국가만도 184개에 달한다.1) 아마도 이 나라들 가운데 가장 고립되고 폐쇄된 나라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라는 기다란 국호를 가지고 있는 북한일 듯하다.
공산국가로서 물론 북한은 다른 공산국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 왔었다. 동서냉전시대 공산국가들 간에는 일반적으로 국가들 간에 존재하는 관계와는 상이한 관계가 존재했었다. 이들 나라 간에는 전통적으로 ‘정부 대 정부’ㆍ‘당 대 당’ㆍ‘군 대 군’의 3개 차원으로 관계가 형성되었다.
통상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는 경제외교가, ‘당 대 당’의 차원에서는 정치외교가 그리고 ‘군 대 군’의 차원에서는 군사외교가 수행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북한과 그 밖의 그 어느 나라들 사이에도 과거 공산국가들 사이를 특징 지웠던 그러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은 이제 지구상에서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남아 있는 공산국가는 중국, 월남, 쿠바, 북한 등 4개국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중국과 월남에서는 사실상 자본주의화가 진행 중이어서 이미 전통적인 공산국가와는 다른 실용주의적 외교관행을 보여 주고 있다. 구소련으로 부터의 경제원조 중단으로 생명의 밧줄이 끊긴 쿠바는 활로 개척을 위해 노선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선 퇴장을 요구하는 미국이 카스트로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쿠바의 그러한 변화를 불허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따라서 북한은 순수한 의미에서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일무이의 공산국가이다.
공산국가로서 북한이 비공산 서방 국가들과 가졌던 상호관계는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1970년대 북한은 나름대로 추진하던 경제건설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등 외부 지원의 획득을 위해 서독,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든, 스위스 등 서구 국가들과 민간차원에서의 관계 구축을 모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북한의 노력은 대외개방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북한 특유의 정치•경제관행과 공신력 부재 등으로 인하여 얼마 안 가 좌초를 면할 수 없었다.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시도했던 서구 기업들은 북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립성, 폐쇄성 그리고 배타성(XENOPHOBIA)의 장벽을 뚫는데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대부분 북한으로부터 철수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한에 남겨 진 것은 1백억불 이상에 달하는 엄청난 외채1)와 미완공 공장 및 호텔들 그리고 신용의 파산뿐이었다. 아마도 일본은 북한이 그 동안 계속 유지해 온 서방세계에 대한 유일한 대외 창구일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의 대일관계 또한 주로 친북•반한 성향의 재일본 조선인 조직인 조총련과 공산당 및 사회당 등 일본 야당세력 그리고 역시 친북•반한 성향의 집권 자민당 내 비주류세력을 상대로 하는 비정상•비합법적인 것에 머물러 왔다.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는 판문점에 위치한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간접적인 관계에 국한되었다. 남쪽의 한국에 대해서는 1971년부터 간헐적으로 이어 졌다 끊어 졌다 계속되어 온 여러 가지 형태의 남북대화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하나의 조선’ 노선을 집요하게 견지, 관계 정상화는 외면한 채 오직 ‘통일전선’ 전술에 기초한 전복전략만을 추구해 왔다.
북한의 이 같은 비정상적인 대외관계는 당연히 북한이 서방의 비공산 국가들과 가질 수 있는 ‘협상’의 기회를 제한해 왔다. 북한이 하나의 주권국가로 등장한 1948년 이래 북한이 외부세계와 가졌던 ‘협상’의 기회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계속되었던 판문점 휴전회담,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담, 1953년 정전이후 계속되어 온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산하의 각종 회의, 1971년 이래 간헐적으로 명멸해 온 각종 남북회담, 1990년대에 들어 와서 시작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회담 그리고 1992년 이후 북한 핵문제를 위요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및 미국과의 회담 정도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혹을 둘러 싼 최근의 국제적 위기는 북한에게 전무했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을 상대로 하는 1대1의 쌍무회담의 문호가 열려 진 것이다. 미국과 북한 간에는 1992년3월12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이 3개월의 예고시한을 충족시켜 발효되기 직전인 6월초 뉴욕에서 이른바 ‘고위급회담’의 형태로 시작한 쌍무회담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는 그 동안 뉴욕•제네바•베를린•베이징•평양•쿠알라룸퍼 등의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의 쌍무회담이 개최되었고 이를 통해 몇 건의 합의문서들이 생산되었다.
이 같은 쌍무회담의 목적은 ‘협상’을 통하여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작년 10월21일의 제네바 ‘기본합의’와 금년 6월13일의 쿠알라룸퍼 회담 타결의 결과로 그 동안의 미•북 쌍무회담은 적어도 당분간은 북한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간의 쌍무회담으로 대체되게 되어 있다. KEDO의 당면한 주임무는 북한에게 제공할 2기의 1천 메가와트급 ‘한국형’ 경수가압형 원자로 공급주체로 기능할 ‘국제 콘소시엄’의 입장에서 북한과 문제의 경수로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협상’은 난항을 예고하고 있고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십중팔구는 지난 1993년에서 1994년 사이에 있었던 IAEA와 북한 사이의 ‘협상’이 그랬던 것처럼 얼마 안 가 KEDO와의 회담도 벽에 부딪쳐서 결국 미국과의 회담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뿐만 아니라 최근 북한은 미•북 쌍무회담의 주 의제를 핵문제로부터 1953년 이래 유지되어 온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소위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문제로 이행시키려는 움직임을 점차 가시화시키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 같은 시점에서 과거 각종 남북회담과 기타 외부세계와의 ‘협상’ 과정에서 나타 난 북한의 협상전략과 전술 및 행태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앞으로 특히 현존 정전체제를 한국을 소외시킨 가운데 미국과의 ‘평화협정’으로 대체시키는데 목적을 둔 북한의 ‘협상’ 공세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대응 전략과 전술을 검토해 보는데 있다.
2. 공산주의자들의 ‘협상’관 - 냉전시대의 협상논리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전 세계를 양분한 ‘철의 장막’(아시아에서는 ‘죽의 장막’)의 출현으로 막을 올린 동서 ‘냉전’(COLD WAR)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체프(MIKHAIL GORBACHEV)가 구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한 것을 계기로 그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미국과 구소련을 두개의 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체제의 퇴장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독의 소멸 및 ‘역 흡수통일’ 방식에 의한 통일독일의 출현, 동구라파 공산국가들의 탈 공산화 그리고 1991년 불발 쿠데타에 이은 고르바체프의 실각과 이에 수반된 구소련의 와해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이로써 세계는 ‘탈냉전’의 ‘냉전이후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탈냉전’의 과정은 그보다 앞서 1985년 구소련에서 고르바체프 체제가 등장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시작된 것이 사실이다. 고르바체프의 소위 ‘신사고’(NEW THINKING)가 바로 그 같은 변화의 촉매가 되었다. 구소련에서 그의 “신사고”는 ‘개방’(GLASNOST)과 ‘개혁’(PERESTROIKA)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쫓는 과정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의 퇴장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구소련의 변화는 동서냉전의 대결구조는 물론 이 대결구조 하의 동서 양대 진영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수단으로서의 ‘협상’의 양상에도 근본적 변화를 가져 왔다. 동서냉전 완화추세의 금자탑들인 ‘스톡홀름 협약’ (STOCKHOLM DOCUMENT - 1986년 체결•1987년 발효), ‘중거리 유도탄 폐기조약’(INF - 1987년 체결•1988년 발표), ‘1단계 유럽지역 재래식 무기 감축조약’(CFE-I - 1990년 체결•1992년 발효), ‘전략무기 감축조약’(START - 1991년 체결)의 체결이 모두 고르바체프 체제 등장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웅변해 준다.
과거 ‘냉전시대’의 동서관계는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의 ‘제로•섬’ (ZERO-SUM) 관계로 특징 지워져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사고 때문에 ‘냉전시대’에는 동서 양대 진영 간에 기본적으로 ‘협상’의 토대가 마련되기 어려웠다. 쌍방 간에는 전 지구적 차원은 물론 지역적으로도 긴장완화•전쟁방지•군비감축•관계개선•교류협력•평화공존 등 ‘협상’을 필요로 하는 산적한 사안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의미 있는 ‘협상’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 하면 특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체제경쟁에서 이미 자신감을 상실한 공산진영 쪽에서는 자신감을 잃으면 잃을수록 “전쟁터에서 쟁취하지 못한 것을 ‘협상’테이블에서 쟁취하겠다”는 강탈적 협상논리2)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협상’이란 “내 것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상대방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기술”로서의 일방통행로로서만 그 의미가 인정되는 것이 예사였다.
과거 ‘냉전시대’ 기간 중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가를 말해 주는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일화중의 하나가 미국과 ‘중공’(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냉전시대의 호칭)간의 소위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에 관한 얘기이다. 아직도 대만의 ‘중화민국’만을 인정하는 미국과 이미 중국대륙의 임자가 된 ‘중공’간에는 한국전쟁의 정치적 뒷마무리를 위한 제네바 회담이 결렬된 뒤인 1955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무대로 하여 양국의 폴란드 주재 대사였던 알렉시스 존슨(U. ALEXIS JOHNSON)과 왕병남(王炳南) 간의 대화통로가 마련되었다.
존슨 대사는 1957년 말 주 타일란드 대사로 전임하면서 바르샤바를 떴고 그의 후임으로는 제이콥 빔(JACOB BEAM)이 바통을 이어 받았지만 미국과 ‘중공’간의 이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은 그로부터 17년 후인 1972년 미•중 국교정상화가 이루어 질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미•중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은 사실은 말이 ‘회담’이었었지 통상적 의미의 ‘회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회담’은 어떤 때는 매주 열린 적도 있었지만 때로는 몇 달 만에 한번 씩 열리는 것이 예사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1년 내내 열리지 않은 적도 없지 않았다. ‘회담’이 열리는 경우에도 어떤 때는 한 쪽만 얘기하고 다른 한 쪽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듣기만 하는 적도 있었고 심지어는 어느 한 쪽도 말하지 않은 채 몇 시간씩 침묵의 대좌를 하다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에 생겨 난 신문용어중의 하나가 ‘담벼락과의 대화’(TALKING TO THE WALL)이다. 대화의 ‘일방통행성’에서 연유된 비유이다.
1970년대 초 남북조절위원회 우리측 대변인으로 남북대화에 참가한 필자는 북한과의 대화 양상이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쳤던 미•중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을 방불케 하는 것임을 실감했다. 필자는 특히 외신기자들로 하여금 남북대화의 실제 모습을 실감하게 하는 하나의 고육지계로 새로운 신문용어를 등장시켰다. ‘귀머거리들의 대화’ (DIALOGUE OF THE DEAF)가 그 것이다.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는 한 귀머거리들은 자기들의 얘기만 일방적으로 말할 뿐 상대방의 얘기는 들을 수 없다. 이 역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가 갖는 ‘일방통행성’을 상징하는 ‘조어’였다. 이 ‘조어’는 당시 특히 외신기자들의 기사에서 한동안 회자되었었다.
그런가 하면 외신기자들은 남북대화의 “일방통행성”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은유를 즐겨 사용했었다. 남북한이 “서로 다른 주파로 얘기한다” (SPEAK ON DIFFERENT WAVE-LENGTHS)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협상’은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우호적 협상’과 ‘적대적 협상’이 그 것이다. ‘우호적 협상’은 비록 만족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협상’의 결과에 의하여 ‘협상’ 당사자들이 일정한 비율로 만족을 “공유”(WIN-WIN)하게 되는 ‘협상’이다. ‘우호적 협상’은 협상 당사자들이 앞으로 공유할 만족의 상대적 비율을 조정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반면 ‘적대적 협상’은 그와는 반대로 ‘협상’에 임하는 어느 일방이 ‘협상’의 결과를 ‘독식’(ZERO-SUM)하려 하는 경우가 통례이다.
따라서 ‘적대적 협상’은 타결 그 자체가 매우 어렵기도 하지만 비록 타결되는 경우라도 타결된 합의 내용이 성실하게 이행•준수되기 보다는 일정한 시일이 경과하는 과정에서 ‘파기’되거나 아니면 ‘사문화’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왜냐 하면 ‘적대적 협상’을 통하여 생산되는 합의사항이 어느 일방에 의한 ‘독식’을 허용하는 내용이라면 당하는 쪽에서 마음으로 이에 승복하지 않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 내용이 어느 일방에 의한 ‘독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될 때는 강자의 편에서 그 결과를 불만스럽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동서 양 진영 간의 ‘협상’은 ‘적대적 협상’의 대표적 경우였다. 이 시기 대공 ‘협상’에 수반되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험을 통한 많은 경구가 축적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 경구는 미•소 1단계 전략무기 감축협상(SALT-I)시 미국 대표단의 전략고문으로 참가했고 뒷날 레이건 행정부의 국방차관을 역임한 협상학의 권위인 프레드 찰스 이클레(FRED CHARLES IKLE) 박사가 저술한 협상학 교과서 《국가간의 협상기법》(HOW NATIONS NEGOTIATE)3)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클레 박사의 경구(警句)는 원론적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 ’에서는 “원칙적 합의를 피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원칙적 합의’에 도달하는 경우 공산주의자들은 후일 이 ‘원칙적 합의’를 실천•이행하는 단계에서 합의된 원칙에 대한 일방적 해석을 내세워 이의 실천•이행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이의 ‘재해석’을 위한 ‘재협상’을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이 통례라고 경고했다.
이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이클레 박사의 처방은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할 때는 ‘원칙적 합의’나 ‘원칙에 관한 합의’는 피하고 후일 해석상 이견의 발생 여지가 없는 구체적 표현과 용어로 합의를 이룩하라”는 것이었다.4)
냉전시대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이론과 관행에 관해서는 알프레드 D. 윌헬름 주니어(ALFRED D. WILHELM, JR.) 저 《중국인들의 협상기법 - 방식과 특징》(THE CHINESE AT THE NEGOTIATING TABLE (談判) - STYLE &;;;;;;;;;;;CHARACTERISTICS)4)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윌헬름은 국가간 ‘협상’을 다루는데 있어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용어와 그 용어들 간에 존재하는 개념의 차이를 지적한다.
즉,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영어의 ‘NEGOTIATION’을 직역한 중국어는 ‘담판’이지 ‘협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담판’에는 ‘우호적 협상’과 ‘적대적 협상’의 개념이 함께 함축되어 있으나 ‘적대적 협상’ 쪽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우호적 협상’의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들이 ‘회담’, ‘회상’, ‘협상’ 등으로 이 가운데 ‘협상’이 가장 우호적 분위기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적대적 협상’의 경우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협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협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사전에 ‘협상’ 당사자들 간에 “상당한 상호 신뢰와 원칙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5)
‘중국어’와 ‘조선어’의 차이 때문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관련 용어들을 북한이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협상’ 관련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똑같은 ‘협상’ 논리를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북한은 남북한 당국 간의 대화의 경우 ‘협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접촉’이나 ‘대화’이다. 심지어는 이 경우 ‘회담’이라는 용어의 사용에도 지극히 인색하다.
‘협상’이라는 용어가 적용되는 것은 이른바 남북 ‘정치협상’의 경우에 국한된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다. 남북 간 ‘정치협상’은 ‘우호적 협상’의 한 형태로 이 같은 형태의 회담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참가 쌍방 간에 “상당한 상호 신뢰와 원칙에 관한 공감대”가 미리 형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때쯤 되면 자연 남쪽의 경우에는 그 참가 대상이 ‘정부 당국자’들은 배제된 가운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에 국한되게 된다.
그와는 달리 남북 간에 진행되는 ‘접촉’과 ‘대화’는 그 목적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의 ‘협상’을 추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개념에 입각한 ‘협상’ 추진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그 같은 ‘협상’에 유리한 환경과 조건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구실하는데 국한되는 것이다.
이클레에 의하면 ‘협상’이란 “서로 상충되는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 공통의 이해를 상호 교환하거나 실현시키는데 관한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상호 제안을 제시하는 과정”이다.6) ‘협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협상 당사자들이 서로 타협하고 양보해야 하며 어느 쪽도 자기의 입장을 100% 충족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협상’ 결과는 당사자 간에 50대50을 축으로 하여 70대30 또는 30대70으로 유•불리의 차이는 생길지언정 어느 일방에 의한 ‘독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우호적 협상’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론일 뿐이다.
윌헬름에 의하면 냉전시대 공산중국과 서방세계간의 ‘협상’은 ‘적대적 협상’의 전형적인 한 형태였다. 당시 공산중국은 서방세계와의 ‘협상’을 “제국주의와의 투쟁의 한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었다.7) 대서방 ‘협상’에서 공산중국에게는 ‘전술적 타협’은 있어도 ‘전략적 양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술적 타협’도 무제한이 아니었다. 이 것 역시 “장기적 또는 전략적 목표 달성에 필요한 원칙적 입장을 양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8)
‘협상’을 한다고 해도 상대방과 서로 중간지점에서 만난다거나 아니면 공평성의 차원에서 양보를 주고받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협상’이란 “자기측 관점에 대한 상대방의 반대를 완화시키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측의 입장의 도덕적 정당성을 받아 들여서” 결국 “상대방이 자기 측의 입장을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었다.9)
윌헬름은 공산중국의 서방세계와의 ‘협상’은 대체로 다음의 5단계로 진행된다고 보았다.10)
<1단계 - ‘협상’ 이전 단계>
- ‘협상’ 개시 이전 단계에서의 공산중국의 행동은 “전투 개시 이전의 정찰활동”과 방불하다. 이 단계에서 공산중국은 특정 현안에 관한 중국의 원칙적 입장과 상대방에 대한 요구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전을 전개하는 것을 포함하여 상대방의 의도와 입장 파악을 위한 우회적 활동을 전개한다. 제3자를 활용하여 상대방과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의 반응을 측정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과의 입장차이의 정도와 상대방의 중국 입장에 대한 반대의 정도를 평가한다.
- 우호협회, 스포츠 단체, 학교와 교회, 언론인과 과학자 및 경제인과 정치인 등 이익단체와 집단들을 통하여 상대방의 정계•언론•재계 등을 상대로 공산중국측 입장에 대한 여론 순화공작을 전개한다.
- 공산중국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사전 정지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될 때 상대방과의 대면 ‘회담’ 준비에 착수하나 이 경우 대면 ‘회담’을 갖는 목적은 여기서 현안을 논의•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3자를 통해 충분히 탐색된 해결방안을 공식적으로 추인 받는 장소로 이를 이용하는데 있다.
- 이 단계에서 공산중국은 ‘회담’이 성립되지 않거나 도중에 결렬되었을 때에 대비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한다. ‘회담’이 실현되지 않거나 도중 결렬될 때는 반드시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조치를 강구한다.
- ‘회담’에 대한 사전준비는 철저하고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가장 유능한 대표단을 구성하는 것과 과거의 기록을 철저히 검토하는 것이 포함된다.
<2단계 - ‘회담’의 개최 단계>
-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회담’에 임할 때는 바둑을 둘 때처럼 ‘선수’를 중시한다. 그들은 항상 상대방이 ‘후수’를 두도록 그들의 협상전략을 운영한다. 이를 위하여 그들이 중시하는 회담전략은 우선 ‘회담장소’를 그들에게 유리한 곳으로 관철하고 그 다음에는 전반적 회담 운영을 “주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회담의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설정하는 ‘회담의제’는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제3자를 통하여 상대방에게 미리 알려 지는 것이 통례이며 만약 이 과정에서 상대방이 “회담의제는 회담석상에서 논의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반응을 유보하면 그들은 상대방이 그들이 설정한 ‘의제’를 받아들인 것으로 간주한다.
<3단계 - 상대방에 대한 평가 단계>
- 이 단계에서는 자기 측의 속셈은 최대한 감춘 채 상대방의 입장이 최대한 들어 나도록 회담전략을 운영하며 이 같은 회담전략 가운데는 무력의 사용 또는 그 위협은 물론 회담의 결렬 위협과 상대방에 대한 모욕적인 중상•비방 발언 등 각종 심리전적 수단의 활용이 포함된다. 여기서 동원되는 하나의 회담전술이 이른바 “담담타타(談談打打)” 전술이다.
- 이 단계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1백년 안에 해결되지 못하면 1천년을 기다릴 수 있다”는 ‘여유’(?)를 과시하기도 하고 특히 상대방의 체제가 민주사회일 경우 상대방의 정계, 언론, 학계, 종교계를 분열•이간시켜 상대방 대표단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책략을 구사한다.
- 이 단계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특히 서방세계의 인내성 결여를 약점으로 이용하여 필요할 경우 회담을 일시 중단시키고 합의 도달을 지연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그들이 원하는 내용의 합의 생산이 가능해 질 때까지 회담운영의 ‘선수’(주도권)를 유지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한다.
<4단계 - 흥정과 종결 단계>
- 이 단계가 되면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견지해 온 ‘원칙적 입장’을 재천명하면서 이미 상대방이 그들의 ‘원칙적 입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정사실화하여 이를 ‘합의사항’으로 정리하고 이에 대한 신속한 공식화 절차를 촉구한다. 이 때 상대방 대표들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내용 뿐 아니라 말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도 충분히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 이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합의 내용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원칙’들을 충분히 반영시키지 못할 때에는 그들은 다음 날 ‘재협상’을 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이 반드시 합의 내용에 포함되도록 한다.
- 회담이 합의 도달 없이 종결될 때는 물론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킨다.
<5단계 - 회담이후 단계>
- 회담이 끝나면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즉각 회담에서 도달된 합의사항들을 그들의 ‘일방적 해석’에 입각하여 실천•이행함으로써 합의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노력에 착수한다. 그들은 합의서의 문면보다는 ‘합의의 정신’을 빙자하여 합의 내용에 대한 그들의 ‘일방적 해석’에 의한 합의의 이행을 상대방에게 강요한다. 또한 상대방의 민주사회에서 회담타결 후 반드시 조성되기 마련인 ‘축제분위기’와 ‘합의사항’ 이행에 대한 일반의 기대심리를 역이용하여 ‘합의사항’들이 그들의 ‘일방적 해석’에 입각하여 이행되게 하거나 그렇지 못할 때는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심리전 활동을 전개한다. 그들의 그 같은 노력은 빠르면 회담의 ‘종결발언’에서 부터 가시화되는 것이 통례이다.
3. 북한의 ‘협상’행태① - 휴전협상과 정전체제의 경우
그동안 많지 않았던 외부세계와의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보여 준 행태는 앞서 윌헬름이 정리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행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행태에 대해서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진행된 끝에 한국전쟁 정전협정을 탄생시킨 휴전협상의 유엔군측 수석대표였던 C. 터너 조이(C. TURNER JOY) 제독이 그의 경험을 토대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기법》(HOW COMMUNISTS NEGOTIATE)11)이라는 명저를 남겨 놓고 있어서 이 분야의 후학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조이 제독은 그의 저서에서 휴전협상 과정에서 그가 관찰한 북한측의 협상행태를 열두 가지로 정리해 놓았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12)
① 그들이 깔아 놓은 멍석(조건)위에서만 협상하려 한다.
② 대표단을 전문가들로 구성한다.
③ 회담의제에 그들이 추구하는 결론이 미리 표기되도록 노력한다.
④ 회담 도중 “엉뚱한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그들의 협상목적이나 홍보목적에이용한다.
⑤ 협상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전제조건 등)을 조성하여 상대방의 인내를 시험한다.
⑥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후일 위반하거나 파기한다는 계산 하에 일정한부분적 합의를 허용한다.
⑦ 일단 이루어 진 합의에 대해서는 실천•이행 단계에서 거부권을 유보한다.
⑧ 회담 도중 돌연 “엉뚱한 문제”를 제기하여 이 “엉뚱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양보의 대가로 본래의 협상안건에 대한 상대방의 양보를 유도한다.
⑨ 회담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거짓말과 사실 왜곡을 서슴치 않는다.
⑩ 상대방의 양보는 항상 “약세의 표현”으로 간주하여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식의 흥정을 시도한다.
⑪ 이미 이루어 진 합의는 필요에 따라 합의사실을 부인하거나 합의 내용에 대한해석상의 차이를 유도하여 이의 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⑫ 일방적 주장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상대방을 지치게 만들어 상대방의양보를 강요한다.
그 자신은 휴전협상의 완결을 보지 못하고 협정의 타결은 그의 후임자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중장(육군)의 손으로 이루어 졌지만 1953년 7월 27일자로 발효하여 3년여의 한국전쟁의 전화를 종식시킨 정전협정에 대한 조이 제독의 평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정전협정에 대한 그의 평가는 한마디로 “합의된 내용대로라면 휴전협상은 결코 타결시키지 말았어야 했다”13)는 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유의 수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인 경우에 국한하여야 하며 단순히 그들이 협상을 희망한다고 해서 이에 응해서는 안 된다”14)고 갈파했다. 이 같은 부정적 평가는 해리슨 중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전협정 발효 후 동 협정에 따라 소집되게 되어 있는 ‘정치회담’ 개최 문제로 ‘중공’ 및 북한측과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을 갖게 된 미국의 아더 딘(ARTHUR H. DEAN) 대표가 해리슨 중장에게 ‘훈수’를 요청하자 해리슨 중장은 “그들과는 아예 협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5)
조이 제독은 그의 저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기법》에서 뒷날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다시 ‘협상’하게 될 후진들을 위해 몇 가지 충고를 남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6)
① 상대방이 ‘휴전’(협상)을 희망한다고 해서 공세(압력)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럴 때일수록 공세(압력)를 배가해야 한다.
② ‘협상’을 장기화시키면 상대방은 우리측의 약세로 오인할 여지가 있음으로‘협상’은 가급적 단기전으로 가져가야 한다.
③ 상대방의 ‘협상’ 제의에 대해서는 서두름이 없이 느긋하게 대처해야 한다.
④ 대표단은 반드시 전문가들로 구성해야 한다.
⑤ 상대방의 상호주의에 입각한 양보가 없는 한 일방적 양보는 절대 금물이다.
⑥ ‘협상’을 서두름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측이 시간에 쫓기고 있다고 믿게 해서는 안 된다.
⑦ ‘협상’에 앞서서 회담의제 설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래에서 그들의 성실성이나 ‘선의’에 기대를 거는 것은 금물이다.
⑧ ‘협상’ 개시 이전에 우리측의 정치적 목표를 확정하고 ‘협상’ 과정에서는아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정치적 목표를 수정 없이 고수해야 한다.
⑨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한다고 해서 우리측이 무력 사용을 포기한다고 믿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조이 제독은 공산측이 전쟁을 선택할 때는 전쟁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은 상대방에 의한 무력 사용 위협을 실감할 때라야 비로소 실질적 ‘협상’에 호응하는 것이 통례라고 지적했다.]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3개월 이내에 교전당사국간의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①한반도로부터의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②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를 협의하며 (제4조 60항)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대체될 때까지 정전협정은 계속 효력을 유지한다”고 (제5조 62항)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1954년 4월 26일 부터 6월 15일 까지 제네바에서 19개 관련국가(UN군측: 한국과 남아연방을 제외한 참전 15개국공산군측: 북한•‘중공’•‘소련’)들이 참가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으나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결국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오늘도 한반도에는 1953년의 정전협정이 명목상으로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전쟁도 평화도 아닌” ‘비전비화’의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정전협정에 의하면 동협정의 이행은 군사정전위원회(이하 군정위로 약칭)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하 중감위로 약칭)의 운영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두 기구의 운영은 북한측에 의하여 완전히 마비되어 있다.
- 중감위의 기능이 마비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북한측이 정전협정 발효 직후부터 남북한 지역에 대한 군사장비의 신규 반ㆍ출입을 감시ㆍ통제하는 임무를 지닌 북한 배치 중감위 시찰소조의 활동을 방해ㆍ봉쇄하고 남한지역에 배치된 자기측 중감위 시찰소조를 간첩활동에 종사시키는 등의 불법행위를 자행하는데 반발한 UN군측이 1957년 6월 21일 군정위 제75차 본회의에서 정전협정의 해당 조항인 제2조 13항 (라)목의 ‘잠정 폐기’를 선언했으며 이로써 중감위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판문점의 공동경비구역내로 그 행동반경이 제한된 채로 명목상의 기능만을 유지해 오던 중감위는 그나마도 1990년대 초 동구라파 공산체제 자유화 이후 북한이 본래 자기측 중감위 멤버였던 폴란드와 체코 대표단을 북한지역으로부터 축출하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의 중감위 회의실을 일방적으로 폐쇄함으로써 사실상 그 ‘명목상의 기능’마저도 정지되었다.
- 군정위 역시 ①정전협정의 집행 ②공동감시소조의 운영 ③정전협정 위반사건의 협의•처리라는 본래의 기능 수행이 마비된 것은 군정위 활동 개시 직후부터이다. 그 동안의 통계를 보면 군정위는 도합 460회의 ‘본회의’17)와 508회의 ‘비서장회의’18)를 개최했다. 그 가운데 ‘본회의’의 경우를 보면 전체 소집회수의 74%인 341회가 북한측의, 그리고 26%인 119회가 UN군측의 요구로 소집되었다19)
여기서 다루어 진 정전협정 위반사례는 군정위의 통계가 누락되어 있는 1980년 10월부터 1985년 12월까지의 기간을 제외한 전 기간을 통하여 UN군측이 주장한 북한측 위반사례가 352,427건, 북한측이 주장한 UN군측 위반사례가 620,283건에 달하며 그 가운데 UN군측이 ‘시인’한 위반 건수는 100건인 반면 북한측이 ‘시인’한 위반 건수는 단 2건에 불과하다.20)
이 같은 위반 건수 통계는 마치 UN군측이 상습적으로 협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그릇된 이미지를 조성함으로써 여론을 기만하면서 북측이 도발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적반하장으로 군정위 ‘본회의’ 또는 ‘비서장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UN군측 위반 사례를 조작•고발함으로써 사건에 대한 책임을 UN군측에 전가시켜 왔음을 보여 준다.
북한은 최근 핵문제를 놓고 미국과 쌍무회담의 길이 열리자 이를 이용하여 한국의 참여를 배제한 가운데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미국과 쌍무조약의 차원에서 체결하기 위한 책략을 노골화시키고 있고 이 같은 책략을 뒷밭임하기 위하여 군정위 기능의 완전한 마비와 나아가서 정전협정의 사문화를 조직적으로 책동하고 있다.
한•미 양국은 당초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논거 차단을 위하여 군정위의 ‘한국화’를 추진하면서 그 일환으로 1991년 3월 25일 군정위 수석대표에 미군 장성을 임명하던 관례를 깨고 한국군 황원탁(黃源卓) 소장을 임명했다. 그러자 북한은 이를 기회로 이용하여 쌍방 군정위 수석대표 명의의 전화통신문과 서신 교환 및 군정위 ‘본회의’ 소집을 거부하는 등 군정위의 기능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에 앞서서 쌍방 간에 역시 한국은 배제시킨 가운데 과도적인 ‘평화보장조치’를 마련할 것을 제의했다.
북한이 말하는 과도적 ‘평화보장조치’란 군정위를 없애고 그 대신 북한과 미국이 판문점에 ‘군사대표단’을 설치하여 쌍방 ‘군사대표단’간에 쌍무회담을 열어 당분간 정전협정 이행문제를 협의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북한의 움직임은 정전협정의 지위에 대한 미국측의 불안감을 자극•유발하여 결국은 이 문제에 관한 쌍무회담을 수락하도록 미국에 가하는 압력을 서서히 배가시켜 나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북한측이 거론하는 ‘평화보장조치’와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중요한 착안점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발효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국군과 주한미군이 공동으로 효과적인 전쟁억지력과 이에 바탕을 둔 북한군과의 군사력 균형을 유지해 왔었기 때문이지 결코 정전협정과 이에 근거한 군정위와 중감위의 활동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최근 소위 ‘평화보장조치’와 ‘평화협정’만 있으면 전쟁은 재발되지 않는다는 도식화된 허구적인 단순 논리를 앞세워 궁극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연합방어 체제의 파괴에 목적을 둔 대미 평화협정 공세를 전개하고 있고 이 같은 집요한 위장 평화공세에 농락당한 한•미 양국의 일부 여론계층에서는 이러한 북한의 평화공세를 일부 수용함으로써 이를 역이용하여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자는 본말전도의 위험한 발상이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1992년 2월 19일 남북한 간에 합의하여 발효된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기본합의서’로 약칭)가 제5조에서 문제의 ‘정전체제’문제에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합의서’는 제5조에서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관해서는 ‘기본합의서’ 내용 협상단계에서 우리측은 정전협정과 이를 대체할 평화협정의 주당사자가 남북한임을 명백히 해 두기 위하여 ‘정전체제’와 ‘평화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려 했었다. 그러나 북한은 대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의 논거 유지를 위하여 문제의 제5조 설정 자체에 반대했으나 결국은 문제의 조항을 설정하는데 동의하는 대신 표현은 ‘체제’가 아닌 ‘상태’로 완화시킴으로써 ‘체제’의 주체는 남북한이라는 우리측 주장에 대해 남북한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이라고 상이하게 주장하는 상호편의주의적 해석의 여지를 묻어 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남북한이 어쨌든 ‘기본합의서’ 제5조에서 ‘정전상태’가 ‘평화상태’로 전환될 때까지는 현 정전협정을 계속 준수하기로 상호 합의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정전상태’가 다른 ‘평화상태’로 대체되기 이전에 현 정전협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일련의 조치를 일방적으로 취하고 있는 북한의 행동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남북한 간의 ‘기본합의서’에 대한 난폭한 유린행위임에 틀림없다.
4. 북한의 ‘협상’행태② - 남북대화의 경우
1971년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회담이 시작된 이래 남북한 간에는 간헐적으로 끊임없이 ‘대화’라는 이름의 회담이 추진되어 왔다. 그 동안 남북한 간에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생산되었고 ‘적십자회담,’ ‘조절위원회,’ ‘경제회담,’ ‘변칙대좌,’ ‘체육회담,’ ‘국회회담,’ ‘고위급회담’이라는 명칭의 ‘총리회담’ 등 여러 가지 명칭과 형태의 ‘대화’가 명멸해 왔다.
1990년 9월에 시작된 ‘고위급회담’은 회담의 지속성이나 성과 면에서 과거에 있었던 다른 ‘대화’들과는 판이한 양상을 보여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고위급회담’에서 쌍방은 1992년 2월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하 ‘비핵화선언’으로 약칭) 등 앞으로 통일될 때까지의 남북관계를 규율하게 될 두 건의 기본적인 합의문서를 탄생시켰다. 남북한은 이들 합의문서에 의거하여 ‘정치,’ ‘군사,’ ‘교류•협력’ 등 3개 분과위원회와 ‘핵통제공동위원회’를 발족시켜 본 회담 말고도 100여회의 각급 회의를 평양과 서울 및 판문점에서 진행시켰다.
남북한은 이 과정에서 ‘기본합의서’의 “구체적 이행•준수 대책”을 담은 3건의 분야별 (‘화해,’ ‘불가침’ 및 ‘교류•협력’) ‘부속합의서’를 생산해 냈으며 이들 ‘기본’ 및 ‘부속’ 합의서의 실천•이행기구로 ‘화해(정치),’ ‘군사,’ ‘경제’ 및 ‘사회문화’ 등 4개의 분야별 ‘공동위원회’를 발족시키는데 이르렀다.
그러나 ‘고위급회담’이라는 이름의 ‘총리회담’을 통로로 하는 남북대화도 역시 여기까지 뿐이었다. 남북한 간에는 1992년11월중 4개 ‘공동위원회’ 회의를 판문점에서, 12월에는 제9차 ‘고위급회담’ 본회의를 서울에서 열기로 합의되었으나 북한은 한•미간의 연례적 합동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93 실시를 트집 잡아 이들 모든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과거 모든 남북대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의 ‘고위급회담’의 경우에도 ‘합의’는 이루어 냈지만 이루어 낸 ‘합의’는 이행되지 않은 채 사문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위급회담’이 북한의 핵문제를 가지고 미•북 쌍무회담 개최를 위한 북한의 노력이 절정에 이를 무렵에 중단되었다는 것은 북한의 ‘협상’전략의 관점에서 시사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 여겨 살펴야 할 사실은 기본적으로 ‘고위급회담’의 중단은 ‘고위급회담’의 주산물로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합의문서”인 ‘기본합의서’ 내용, 특히 이 ‘기본합의서’에 근거한 남북한 간의 ‘특수관계’의 성격에 관한 합의 내용에 대한 쌍방 간의 해석 차이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밝혀 두어야 할 사실은 문제의 ‘기본합의서’가 결코 “통일 이후의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문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통일을 이룩한 ‘하나의 나라’안에서는 남북 간에 ‘기본합의서’로 규율해야 할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기본합의서’는 어디까지나 아직 “통일되기 이전”의 분단되어 있는 남북한 간의 관계를 과도적으로 규율하는 합의문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서 이 합의문서의 원만한 실천•이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북한의 두 ‘분단주체’가 ‘분단’이라는 ‘과도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두 ‘분단주체’는 누구인가. 그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남북의 두 ‘정치실체’라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결국 ‘기본합의서’가 규율할 남북 간의 관계는 곧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관계인 것이다.
‘기본합의서’는 “통일 이전”의 한반도에서 남북관계가 갖는 특이한 “이중성의 상황”을 수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합의서’는 전문에서 이 합의서에 의거한 남북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가 “국제법에 의한 국제관계와는 다른 관계”임을 명백히 했다. 동시에 ‘기본합의서’는 제15조에서 “민족경제의 통일적•균형적 발전,” “민족 전체의 복리” 그리고 “민족내부교류에 의한 경제교류”에 언급함으로써 동 합의서에 의거한 남북관계가 하나의 ‘민족내부관계’로 상정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합의서’는 같은 전문에서 이 같은 남북 간의 ‘특수관계’가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관계라고 규정함으로써 이 합의서에 의거한 남북관계가 첫째로 “통일 이전”에 남북한에 실재하는 두 ‘분단실체’ 간에 형성되는 관계이며 둘째로 “분단 고정적”이거나 “분단 지향적”이 아니라 “통일 지향적”인 동태적 관계임을 명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명백한 사리에도 불구하고 북한측이 ‘기본합의서’ 성립 이후에도 여전히 이같은 남북관계의 이중성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있다. 북한은 ‘기본합의서’에 의거하여 형성되는 남북관계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기본합의서’ 전문 중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대목은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라는 대목만을 거두절미하여 인용하고 이에 대한 일방적 해석을 앞세워 오히려 ‘기본합의서’를 이용하여 북한의 이른바 ‘하나의 조선’ 논리의 정당화를 기도하는데 만 급급함으로써 동 합의서의 이행을 가로 막은 것이다.
심지어 북한은 1991년 9월 남북한 동시가입을 수용한 것도 ‘하나의 한국•하나의 조선’이라는 현실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선’으로 가는 길로서 이를 수용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논리로서는 남북대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하나의 조선’ 논리는 한마디로 ‘해방의 논리’에 입각한 ‘분단’과 ‘통일’의 ‘상황논리’이다. 즉 북한의 주장은 한반도 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만이 존재할 뿐 남쪽의 대한민국은 “미국의 점령 하에 존재하는 하나의 위(僞)정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분단의 다른 일방인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시하여 ‘해방의 대상’으로 간주할 뿐 ‘협상의 상대’로는 인정치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이 그 동안 시종일관 추진하고 있는 미•북 ‘평화협정’ 주장은 물론 작금 핵문제에 관한 미•북 쌍무회담의 과정에서 한국의 소외를 고집, 남북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문제의 ‘하나의 조선’ 논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의 조선’ 논리에 입각한 북한의 통일노선은 첫 단계로 ‘미국의 식민지’인 ‘남조선의 해방’을 추구한다. 우선 “남조선을 ‘해방’시켜 ‘공산화’시키고” 다음 단계로 “‘이미 공산화되어 있는 북반부’와 ‘새로이 공산화되는 남반부’ 사이에 ‘합작’을 이룩”함으로써 “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조선’ 논리에 입각한 북한의 통일이론인 소위 ‘남조선 혁명에 기초한 조국통일’ 이론의 정체이다.21)
여기서 ‘남조선 해방’의 수단으로 북한이 추구하는 전술이 ‘통일전선’ 전술이다. 즉 대한민국을 ‘전복의 대상’인 정부당국과 ‘제휴의 상대’인 인민대중으로 양분하고 인민대중과의 ‘제휴’(통일전선)를 통해 정부당국을 고립시켜 전복시키려 하는 것이다.
‘고위급회담’의 경우처럼 북한이 대한민국의 ‘정부당국’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에 호응하는 것은 소위 ‘상층 통일전선’ 전술에 따른 것으로 이 경우 남북의 ‘당국 간 대화’는 그 목적이 오직 반정부적 인민대중을 상대로 하는 ‘하층 통일전선’으로 가기 위한 ‘교량’으로 이를 이용하는데 국한된다.
남북대화는 결국 ‘하층 통일전선’로 옮겨 가기 위한 하나의 ‘교량’으로서의 ‘상층 통일전선’의 한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맥락 속에서 북한은 한편으로는 한국과 ‘당국 간 대화’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당국 주도’ 또는 ‘당국’은 배제하는 대화방식인 이른바 ‘정치협상회의’를 거론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당국 간 대화’ 석상에서는 주한미군 철수,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 국가보안법 폐지, 구속자 석방 등을 거론하여 ‘비 당국 주도’의 ‘정치협상회의’ 추진에 유리한 환경과 조건의 조성에 이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이 요구들을 ‘전제조건’화하여 때로는 대화의 진전을 교착시키고 때로는 대화의 중단을 강요하며 또 때로는 중단된 대화의 재개를 가로막는 작태를 반복하는데 이를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북한이 여전히 ‘하나의 조선’ 논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남북관계를 운영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남북 간의 ‘당국 간 대화’가 갖는 한계성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대한민국도 ‘하나의 나라’ 논리, 즉 ‘하나의 한국’ 논리로 북에 대응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흔히 망각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하나의 한국’ 논리는 ‘수복의 논리’였다. 즉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북한지역을 ‘미수복 지역’으로 규정, 북한지역만의 자유선거나 아니면 남북한 전역에서의 자유총선거를 통하여 북한지역을 ‘수복’함으로써 ‘실지 회복’을 통해 통일을 완성한다는 통일정책을 추구했던 것이다. 1948년 5월 30일 대한민국의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을 때 북한지역의 ‘수복’에 대비, 북한지역 몫으로 100석의 국회의석을 공석으로 남겨 두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22)
결국 냉전시대 한반도의 통일상황은 남의 ‘하나의 한국’ 논리와 북의 ‘하나의 조선’ 논리사이의 팽팽한 대치로 특징 지워 졌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탈냉전 지향의 세계조류 속에서 대한민국은 대결상황의 극복을 위하여 ‘하나의 한국’을 고집 하는 입장에서 일보 후퇴하여 통일까지 잠정적으로 남북 간에 ‘하나의 한국’과 ‘하나의 조선’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과도적 특수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노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대한민국의 노력이 성공적인 북방외교의 추진과 남북한의 동시 UN가입 실현을 거쳐 ‘고위급회담’에서의 ‘기본합의서’ 타결로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 간에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들이 성립된 뒤에도 북한은 여전히 냉전시대의 왜곡•전도된 한반도 상황논리인 ‘하나의 조선’ 논리에 집착하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북한은 ‘기본합의서’ 채택을 위한 ‘고위급회담’이 아직 계속 중이었던 1991년 9월 UN헌장 제4조에 의거 UN에 ‘동시가입’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UN헌장이 요구하는 ‘독립된 주권국가’(STATE)라는 회원국 자격요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용함으로써 사실상으로는 ‘하나의 조선’ 논리를 포기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23)
또한 남북한 UN 동시가입 시점에서 대한민국이 수교하고 있는 171개 국가 중 118개 국가가 북한과도 동시에 수교하고 있으며 남북한은 UN을 비롯하여 108개 국제기구에 이중으로 가입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북한 동시 UN가입을 수용한 것이 오히려 “‘하나의 조선’을 실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궤변으로 ‘하나의 조선’ 논리 고수를 고집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이 고수하는 이 같은 냉전시대의 ‘상황논리’와 ‘기본합의서’에 명문화되어 있는 탈냉전시대의 ‘대화논리’ 사이에 빚어지는 괴리 때문에 북한은 ‘기본합의서’ 이후의 대화를 이어 가지 못하는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이다.
‘기본합의서’의 해석의 차원에서 남북한이 근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문제가 소위 ‘통일 3원칙’의 해석에 관한 문제이다. 남북한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 ‘평화,’ ‘단결’의 ‘통일 3원칙’에 합의하여 이를 천명한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재확인해 왔다. ‘기본합의서’ 또한 전문에서 이를 재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7.4 남북공동성명 때나 마찬가지로 북한은 이번에도 남북이 합의한 ‘통일 3원칙’에 대한 자의적이고도 일방적인 해석을 고집함으로써 ‘기본합의서’의 성격을 크게 왜곡•변질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의 실천•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통일 3원칙’을 해석함에 있어서 남북한 간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자주의 문제>
통일문제 해결에 적용되는 원칙으로서 ‘자주의 원칙’은 두개의 측면이 있다. 즉 외세간섭 배제의 측면과 당사자 해결을 요구하는 민족자결의 측면이다. 근세에 들어 와서 한반도 상에서의 열강의 각축과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 그리고 국토와 민족의 분단 등 외세의 간섭으로 온갖 시련에 시달려 온 우리 민족으로서는 통일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다시는 외세의 간섭으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다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의 상황과는 달리 국제화•개방화•세계화가 구가되는 가운데 상호 의존성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지구촌 시대에 와서는 소위 ‘외세의 간섭’은 하나의 관념적인 상대적 개념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자주의 원칙’과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원칙의 문제는 통일문제를 비롯하여 남북 간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직접 당사자인 남북 쌍방이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인 선택과 합의에 의하여 해결한다는 ‘민족자결’ 원칙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체제와 이념 그리고 관행을 달리 하는 남북한이 상호간의 문제를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하여 외부의 개입 없이 당사자 사이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상대방의 존재와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상대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북한은 각기 자기측의 고유한 법질서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당사자 해결’과 ‘민족자결’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은 우선 서로 상대방의 법질서를 존중해야 하며 서로 상대방의 정부당국이 자기측 지역의 주민들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각기 자기측 지역에서 쌍방 간의 합의사항의 실천•이행을 보장할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냉전시대의 ‘해방의 논리’에 입각하여 ‘자주의 원칙’을 논하고 있다. 북한은 “북한지역에서는 ‘자주’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주’의 문제가 없으며 따라서 ‘자주’의 문제가 존재하는 곳은 남한지역 뿐”이라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북한의 주장은 남한에서의 ‘자주’의 문제는 “미제에 의한 남조선 강점으로 인하여 제기되는 문제”라는 것이며 따라서 “남조선을 미제의 식민통치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자주의 원칙’의 본질이라는 억지 이론을 펴고 있다24).
북한은 이 같은 억지 이론에 근거하여 ‘자주의 원칙’의 미명 아래 주한 미군 철수라든가 UN군 사령부의 대안 없는 해체라든가 미•북간 한국의 참여 없는 ‘평화협정’의 체결 요구 등을 정당화•합리화 시키려 하고 있다. 요컨대 북한이 거론하는 ‘자주의 원칙’은 오로지 한•미 안보유대의 단절•파괴만을 그 실체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북한측 입장의 부당성은 자명하다. 첫째로 이 문제에 관한 북한측 입장은 ‘외세’ 문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분단의 원인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만약 분단의 원인으로 ‘이데올로기’가 중요하지 않다면 통일은 보다 용이하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북한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간단히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통일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외세’ 때문이기 보다는 북한은 공산주의를 버리려 하지 않고 있고 반면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를 수용하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문제에 관한 북한측 입장은 한반도의 경우 주한미군 문제는 ‘자주’의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1949년 한반도를 떠났으나 다음해인 1950년 북한의 6.25 불법 남침을 격퇴시키기 위한 UN군의 일부로 다시 한반도로 돌아 왔으며 1953년 휴전이후에는 정전상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전쟁재발 억지력으로 대한민국과의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대한민 국의 요청으로 잔류하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는 ‘자주의 원칙’의 차원에서 북한이 시비할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 위협 제거 문제와 관련하여 한•미 양국 간에 협의•해결할 문제인 것이다.
<평화의 문제>
다음으로 ‘평화의 원칙’은 통일의 방법에 관한 문제이며 이때의 ‘평화’의 문제는 당연히 그 뿌리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도발된 6.25 전쟁에 두고 있다. 즉 ‘평화의 원칙’은 통일을 달성함에 있어서 다시는 6.25 때와 같이 무력이나 폭력의 사용을 배제하고 반드시 평화적 방법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은 북한이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통일’을 명분으로 하여 대한민국을 기습적으로 전면 남침함으로써 일어 난 전쟁이다.25) 이 때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공격한 대상은 대한민국이지 미국이 아니다. 따라서 6.25 전쟁은 어디까지나 침략자인 북한과 피침략자인 대한민국 사이에 수행된 전쟁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의 경우 전쟁당사도 남북한이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의 복귀”(STATUS QUO ANTE)를 요구하는 ‘평화’의 당사자도 당연히 남북한일 수밖에 없다.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미국을 비롯한 16개 UN회원국들이 UN 안보리의 결의에 호응하여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했다. 이들은 침략을 당한 대한민국이 침략을 격퇴시키는 것을 지원하기 위하여 참전한 것이지 이들이 대한민국을 대신하여 전쟁을 가로 맡기 위해서 참전한 것은 아니다.26)
전쟁의 효율적 수행을 위하여 역시 UN 안보리의 결의에 의거하여 미군 장성이 지휘하는 UN군 사령부라는 통합 지휘체제가 구축되었고27) 한국군 역시 작전지휘권을 UN군 사령관에게 위임함으로써 UN군의 일부가 되었다. 1953년7월27일 미군 장성인 마크 클라크 (MARK CLARK) 대장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UN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다른 참전국 지휘관들을 대리하여 서명한 것이지 미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서명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정전협정은 교전 쌍방의 야전 사령관 간에 조인된 것이지 국가 간에 체결된 것이 아니다.28) 미군은 16개 참전국군과 한국군 중의 일원일 뿐이고 따라서 미국은 결코 6.25 전쟁의 주당사자도 아니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전협정의 배타적인 조인 당사자도 아니다.
6.25 전쟁 기간 중 미군 장성이 UN군을 지휘했고 정전협정이 미군 장성에 의하여 서명되었기 때문에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이고 6.25 전쟁은 남북한 간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간의 전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평화’의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라는 북한의 억지가 통용되려면 “미군 장성이 나토군 사령관으로 나토군을 지휘하고 있으니까 모든 나토 회원국가들은 미제의 식민지”라는 논리도 성립되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은 어느 경우에나 남북한인 것이다.
한반도 평화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이 가지고 있는 입장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평화’의 토대로서 신뢰문제에 관한 북한 태도이다. 북한은 6.25 남침 사실을 부인할 뿐 아니라 1.21 사태, 문세광 사건, 랑군 사건, KAL기 폭파사건, ‘남한조선로동당’ 사건 등 수없이 반복되어 온 각종 대남 폭력도발 사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시인한 사실이 없다. 북한은 오히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이들 대남 폭력도발 사건들을 깡그리 한국측의 ‘자작극’으로 몰아붙이는 적반하장의 모습으로 일관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 간에 신뢰가 조성될 리 없고 신뢰가 조성되지 않는 가운데 평화가 뿌리를 내리기를 바란다는 것은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 남북 간에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시는 6.25와 같은 선전포고 없는 동족상잔의 참변이 재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이 같은 보장은 당연히 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6.25전쟁은 우발적 전쟁이 아니라 북한의 통일정책에 의하여 도발되었기 때문에 이의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북한의 통일정책의 수정과 이에 수반되는 일련 의 ‘신뢰구축조치’가 이루어 져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하여 남북 간의 군비축소와 통제조치는 이 같은 ‘신뢰구축조치’의 선행이 없이는 무망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의 원칙’의 허구성은 그 실체로서 오로지 주한미군의 철수만을 요구하고 있다는데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선 신뢰구축•후 군비축소’의 당연한 수순을 외면하고 “먼저 군비를 축소하면 신뢰는 자연 조성된다”는 선후가 뒤바뀐 논리를 전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선 군 축’ 주장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단결의 문제>
‘단결의 원칙’은 통일을 지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남북의 같은 민족사회 간에 화해를 바탕으로 ‘단합’을 도모함으로써 통일을 위해 유리한 내적 조건과 환경을 성숙시키는 것을 명제로 한다. 남과 북에 상호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사상과 제도 그리고 이념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단합’은 상호 일정한 ‘공통분모’의 형성 없이는 어렵지 않을 수 없다. 이때의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인권보장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이념을 벗어 난 민족적 동질성이라야 한다.
따라서 남북 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족적 단결’을 추구하기 위해서 쌍방이 추구할 당면과제는 우선 각자의 사회 안에서 민족 구성원 개개인이 이념에 의한 속박으로 부터 해방되고 복수의 의견과 가치가 허용되며 UN의 인권선언이 보편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기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신장시키고 이에 대한 저해요소들을 제거하면서 상호 간에는 대화와 교류를 통해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복원하여 그 안에서 민족적 동질성이라는 ‘공통분모’를 키워 나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말하는 ‘단결의 원칙’은 여전히 시대도착적인 ‘해방의 논리’의 범주 안에서 이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근거하여 상대방의 내부 문제에 대한 일방적 간섭을 정당화시켜 주는 ‘면허장’으로 이용되는데 그 의미가 국한되어 있다.
북한의 체제는 ‘주체사상’(헌법 제3조), ‘일당독재’(헌법 제11조), ‘계급노선’(헌법 제12조), ‘군중노선’(헌법 제13조) 등을 표방하면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헌법 제63조)에 기초하여 “전체인민의 정치 사상적 통일”(헌법 제10조)을 강조하는 ‘획일적 유일사상 체제’이다. 북한은 이 같은 ‘획일적 유일사상체제’의 구축으로 북한지역 안에서는 “단결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라고 강변하면서 ‘단결’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측 체제 내부 문제에 대한 일체의 간섭을 배제하고 있다.
반면 상대방인 대한민국의 체제가 자유민주 체제라는 사실에 편승하여 북한측의 일방적 해석에 바탕을 둔 ‘단결의 원칙’을 상대방에게만 적용시킴으로써 상대방 체제에 대한 간섭을 합리화시키는 데만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폐기하고 특정 구속인사들을 석방하면 북한측과 연계된 불법적 정치세력에게 합법적 활동 공간을 제공하라고 요구하는 등의 북한측 주장은 바로 이 같은 강탈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한국이 북한의 ‘획일적 유일사상 체제’와 이에 바탕을 둔 북한식 ‘민족적 단결’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획일적 유일사상 체제’가 존속하는 한 남북 간에 ‘민족적 단결’을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함이 분명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북 간의 ‘민족적 단결’을 거론하는 것은 북한에서 ‘획일적 유일사상 체제’가 포기된 후라야 가능해 지지 않을 수 없다.
5. 북한의 ‘협상’행태③ - 미•북 ‘핵’회담의 경우
북한의 핵문제는 미국과 북한 간에 작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기본합의’
(AGREED FRAMEWORK)가 타결된 데 이어 지난 6월 13일 쿠알라룸퍼에서 ‘공동언론발표문’ (JOINT PRESS STATEMENT)라는 또 하나의 합의문건이 생산됨으로써 소강 국면을 보여 주고 있다.
표면상 미국과 북한 간에는 북한 핵문제 해결에 수반되는 몇 가지 조치들에 관한 합의사항이 이행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미국으로 부터는 지난 1월 1차로 제공된 5만 톤에 이어 2차분 10만 톤의 중유가 북한으로 수송되고 있는 도중이고 북한이 가동 중인 영변의 5메가와트 흑연로에서 꺼내 냉각수조에 보관중인 8,100개의 폐연료봉의 보다 안전한 장기 보관을 위한 조치가 추진되고 있는 중이며 또 북한에 공급하기로 약속된 2기의 경수형 원자로의 건설용 부지 조사가 착수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과 한국•일본 등 세나라는 작년의 제네바 ‘기본합의’에 의거하여 대북 경수로 공급주체로 발족된 KEDO를 정식으로 가동시켰다. 이같은 일련의 상황전개는 일견 북한 핵문제의 해결 전망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냐는 낙관론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고 있고 그 결과로 북한 핵문제 자체에 대한 일반의 관심권으로부터 멀어 지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이러한 낙관론은 타당한 것인가.
작년 10월 21일의 제네바 ‘기본합의’에는 하나의 중심 메시지가 담겨 져 있다. 즉 북한의 핵무기 개발 포기와 미국의 대북 경수로 제공을 서로 맞바꾼다는 것이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촉발된 위기국면 타개를 위하여 그 행 6월 미•북 ‘고위급회담’이 개시된 이래 도합 6건의 합의문건들이 생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다음과 같은 ‘소득’을 거두어 들였다.
- UN 안보리의 대북 제재를 성공적으로 예방하였다.
- 미•북 쌍무회담의 무기한 장기화를 실현시켰다.
- 북핵 문제에 관한 ‘국제공조체제’를 사실상 와해시켰다.
- 영변과 기타 지역에 대한 IAEA의 ‘사찰’(‘임시,’ ‘정기,’ ‘특별’ 포함)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 1992년 2월 19일 남북한 간에 합의•발효된 ‘비핵화선언’의 이행을 저지시켰다.
- 미•북 회담을 단순히 ‘핵 회담’이 아닌 ‘정치회담’으로 변질시켜 미•북 국교정상화와 경제협력의 길을 열었다.
- 수십억불 상당의 1천 메가와트급 경수로 2기의 사실상 ‘무상공급’을 약속 받았다.
- 1995년 중 15만 톤에 이어 사실상 무기한으로 연간 50만 톤의 무상 중유공급을 확보했다.
- 북한이 임의로 5메가와트 흑연로에서 꺼낸 폐연료봉(8,100개)에 대한 미국 기술과 자금에 의한 무상 장기보관의 길을 열었다.
이같은 ‘소득’과 교환하여 북한이 지불한 ‘대가’들은 다음과 같다.
- 북한 보유 핵시설 중 핵무기 개발용의 혐의가 있는 시설(가동 중인 5메가와트 흑연로, 건설 중인 50 및 200 메가와트 흑연로, ‘재처리시설,’ 핵 연료가공공장)들의 해체•철거를 ‘약속’했다.
※단 해체•철거 ‘약속’의 이행은 대북 경수로 완공 시(2003년 이후)까지 유예
하고 그동안은 “북한 책임 하에” ‘동결’이라는 이름 아래 ‘가동중지’
또는 ‘건설 중지’의 가수면 상태 유지하여 언제든지 북한 임의로 ‘가동재
개’ ‘건설재개’가 가능하다.
- IAEA 사찰을 수용하기로 ‘약속’했다.
※단 그 수용 시기는 ‘동결’ 시설에 대해서는 ‘동결’과 동시이나 이에 대한
‘사찰’의 내용은 ‘임시’ 또는 ‘정기’ 사찰이 아닌 “동결상태에 대한
관찰”에 한정되고 ‘비동결’ 핵시설에 대한 ‘임시’ 및 ‘정기’ 사찰은
앞으로도 부지하세월인 대북 경수로 ‘공급계약’ 체결 이후라야 허용되며 가
장 민감한 대상인 2개 미신고 지하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은 사실상 묵살되
었다.
- NPT 체제 잔류를 ‘약속’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의 NPT 탈퇴선언의 공식 ‘취소’ 또는 ‘철회’ 조치
를 취함이 없이 “NPT 체제 ‘잔류’”를 ‘약속’하는 선(1995. 6. 13 쿠알
라룸퍼 회담 합의)을 고수함으로써 현재의 시점에서는 북한은 “NPT에 완전히
복귀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의 ‘특수지위’”라고 주장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미•북 핵회담에서 북한이 양보한 사항들은 대부분 ‘어음’이고 미국이 양보한 사항들은 대부분 ‘현금’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양보한 사항들은 언제든지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부도’ 처리가 가능하게 되어 있고 그 밖의 양보 가운데 ‘현금’으로 ‘가지불’된 부분은 일부 민감한 핵시설을 그 역시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동결’시켜 놓은 데 불과하다.
미•북 핵회담의 경과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회담에 임하는 쌍방의 기본입장 간의 차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문제는 이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이 해결하고자 하는 ‘핵문제’가 하나의 동일한 ‘핵문제’인가 아니면 서로 상이한 두개의 다른 ‘핵문제’인가 하는 문제이다. 미•북 핵회담이 쿠알라룸퍼 회담을 통과한 현재의 시점에서도 쌍방이 다루는 ‘핵문제’는 ‘하나의 동일한 핵문제’가 아니라 ‘두개의 상이한 핵문제’라는 것이 명백하다.
미국이 ‘북한의 핵문제’를 거론하고 있는데 반하여 북한은 ‘조선반도의 핵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에 의한 핵무기 개발의혹을 문제 삼고 있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문제는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북한의 주장에 의한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7월 8일 사망한 김일성은 생전에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기술도, 자금도, 의도도 없기 때문”에 만약 조선반도에서 핵문제가 있다면 그 것은 북한과는 “무관한 문제”라는 입장을 거듭 공언했었다.
김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반도의 핵문제’는 사실은 ‘미국의 핵문제’였다. 즉, “남조선에 대량의 핵무기를 배비•비축해 놓고 이를 이용하여 우리를 ‘압살’시키려 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에서 파생되는 문제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그 동안 미국과의 회담에서 일관되게 쌍방 간에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핵문제’는 “북한에 적대적인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수정하는 문제”의 차원에서 ‘조선반도의 핵문제’로 다룰 것을 주장해 왔다.
지난 6월의 쿠알라룸퍼 회담에 이르기까지의 미•북 핵회담은 그 타결 내용에 대한 시비곡직의 차원에 앞서 타결 사실 자체만으로도 종래의 한반도 안보상황을 일전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작년 10월 21일의 제네바 ‘기본합의’와 관련하여 분명한 사실은 이 합의를 계기로 북한을 ‘가상 적’으로 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제 위에 토대를 두고 있었던 한반도 안보상황에는 이로써 불가피하게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미•북 회담의 주역이었던 로버트 갈루치(ROBERT L. GALLUCCI) 대사를 비롯하여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은 미•북 회담이 “신뢰에 기초를 두지 않고 있다”라는 주장을 반복해 왔다.29)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신뢰의 바탕’이 없다면 제네바 ‘기본합의’는 한 장의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미•북 간의 핵회담 타결 내용이 충실히 이행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신뢰의 바탕’이 없다 하더라도 미•북 핵회담 타결 내용의 부분적인 이행이라도 이루어지면 “이에 상당하는 정도의 상호신뢰의 관계”는 조성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것만으로도 한반도의 안보상황. 즉 미국과 남북한 간의 3각관계는 근본적인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미•북 관계에 ‘상호신뢰의 영역’이 생긴다면 한•미 간의 ‘전통적 안보유대’는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경우 북한이 한•미 간의 ‘전통적 안보유대’가 존속하는 것을 방임할 리도 만무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미•북 간의 핵회담 타결 내용은 이제 ‘합의’의 단계를 벗어 나 ‘이행’의 단계로 접어듦으로써 쌍방 간에는 본격적인 ‘참호전’이 막을 올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북 간의 제네바 ‘기본합의’는 철저한 ‘단계화’ 개념에 입각하여 ‘부분적 합의’들은 상호 연계시켜 교환조건화 해 놓았으나 이들 ‘교환조건’들의 내용들은 구체성이 결여된 채 ‘애매’하게 되어 있는 부분이 허다하다. 북한은 이들 ‘부분적 합의’들은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합의’ 내용중 ‘애매한 부분’에 대한 북한만의 독자적 ‘해석’을 내세우거나 아니면 ‘이행조건’을 상향 조정하여 미국으로 부터 ‘추가적 양보’를 짜낸다는 전술을 추구하고 있다.
실제로 1950년대 판문점에서의 휴전회담과 1971년 이래의 여러 가지 형태의 남북대화의 경과 그리고 제네바 ‘기본합의’ 이후 쿠알라룸퍼 회담이 타결되기까지의 그 동안의 상황은 이들 회담들이 하나 같이 바로 그러한 협상전략의 산 무대가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북한의 협상전략으로 인하여 1953년의 정전협정은 사실상 사문화되다 시피 되어 있고 남북한간에는 허다한 ‘합의’가 생산되었지만 생산되는 ‘합의’마다 이행은 되지 않고 사실상 휴지화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왔다. 문제는 이번의 미•북 핵회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듯 하다는 데 있다.
쿠알라룸퍼 회담의 타결은 한동안 미•북 핵회담을 파국으로 치닫게 했던 경수로 문제를 둘러 싼 쌍방 간의 이견을 일단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네바 ‘기본합의’의 이행단계에 들어 가 있는 미•북 핵회담은 아직도 그 앞길을 많은 지뢰밭이 가로막고 있다. 북핵문제 해결의 향후 과정이 문제의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은 정전협정과 그 동안의 남북한 간의 합의들처럼 제네바 ‘기본합의’도 ‘이행’되지 않은 채로 사문화•휴지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미•북 간의 핵회담은 북한을 일방으로 했던 과거의 다른 ‘협상’들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그 것은 제네바 ‘기본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때는 북한이 그들의 ‘핵동결’을 일방적으로 해제하고 다시 핵무기 개발을 재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우려’ 때문에 미국은 북한이 일방적인 ‘해석’을 앞세워 ‘요구조건’을 에스컬레이트 시킬 때마다 북한측의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를 피동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 탈퇴선언이라는 강수로 나왔을 때 미국이 취한 대응으로 미루어 보면 북한이 앞으로 가령 ‘핵동결’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미국의 대응이 어떻게 나타 날 것인가도 예측이 불가능하지 않을 듯 하다. 더구나 만약 북한이 내년 11월로 박두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선거에 편승하여 그러한 강수를 써서 배수진을 칠 경우 미국이 과연 어떻게 이에 대처할 것인가. 미국은 결국 이를 응징하기는커녕 북한이 ‘핵동결’ 해제를 실천에 옮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북한이 원하는 대가를 지불할 가능성이 없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때 북한이 원하는 대가가 무엇이 될 것인가이다.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비밀이 아니다. 북한은 1993년 7월 제네바에서 있었던 2단계 미•북 ‘고위급회담’에서 한반도 핵문제의 ‘포괄해결’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대해 ① 대북 핵무기 불사용에 대한 문서 보장 ② 핵무기의 한반도 불배치 선언 ③ 팀․스피리트 등 일체의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 ④ 정전협정을 대체한 미•북 간의 쌍무적 ‘평화협정’ 체결 ⑤ 북한에 대한 테러 국가 지정 철회 ⑥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 지지 등 전통적 한•미 관계의 실체를 건드리는 사항을 요구한 바 있다.
물론 미국이 이 여섯 개의 항목을 미•북 ‘고위급회담’의 ‘토의의제’로 수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문제의 여섯 개 항목 가운데 ①항은 작년 10월21일자 제네바 ‘기본합의’의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핵무기 불사용 및 불위협을 공식으로 보장한다”(THE U.S. WILL PROVIDE FORMAL ASSURANCE TO THE DPRK AGAINST THE THREAT OR USE OF NUCLEAR WEAPONS BY THE U.S.)는 대목의 형태로, ②항은 1991년9월28일자 조지 부시(GEORGE BUSH) 당시 미국대통령의 “해외 배비 전술 핵무기 철수” 선언과 12월18일자 노태우 당시 한국대통령의 “남한 내 핵무기 부재” 선언의 형태로, 그리고 ③항은 아직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의 형태로 각기 이미 수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대미 핵회담 과정에서 시기의 조만의 문제는 있겠지만 북한이 나머지 세 항목을 거론하리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같은 북한의 입장은 지난 4월 2일 〈동아일보〉가 특종 보도한 북한 당국이 그들의 UN 대표부에 보낸 ‘비밀훈령’ 내용에 의해서도 뒷밭임 되고 있다. 이 ‘비밀훈령’에서 북한은 북한이 미국과의 회담에서 거론하고 있는 경수로와 미•북 관계의 개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북한이 노리는 것은 경수로와 미•북 관계 개선을 ‘교량’으로 이용하여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안보유대 파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 ‘훈령’은 심지어 북한이 미국에 대하여 제기하고 있는 경수로 지원 및 부대시설을 위한 “10~20억불의 추가지원” 요구도 그 목적이 이를 실제로 획득하는 것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시간을 필요한 만큼 끌면서 미국의 양보를 더 얻어내는데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30)
6. 북한의 ‘협상’행태④ - ‘전술’과 ‘전략’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북한은 외부세계를 상대로 ‘협상’을 할 때 아직도 여전히 냉전시대 특유의 공산주의자들의 논리와 행태, 그리고 ‘전략’과 ‘전술’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글의 모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의 세계는 전 지구적으로 ‘탈냉전’의 ‘냉전이후 시대’를 구가하고 있고 세계의 모든 다른 지역에서는 과거 냉전시대의 동서관계를 제약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전통적 ‘협상’ 행태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유독 한반도에서는 냉전적 상황이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의 여러 가지 형태의 회담 과정에서 북한의 행태를 통해 나타난 ‘협상전술’은 다양하다. 예컨대 그들은 ① 항상 ‘일방적 해석’의 여지를 함축한 ‘원칙적 합의’를 고수함으로써 일단 이루어 진 ‘합의’의 이행에 제동을 거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고 ② 필요할 때마다 일방적 ‘전제조건’과 엉뚱한 문제를 제기하여 회담의 페이스를 조절하는가 하면 ③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으로 회담의 ‘선수’(주도권)는 장악하면서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고 ④ 일단 합의 후에도 ‘새로운 문제’ 제기로 ‘합의’ 이행에 제동을 걸면서 ⑤ ‘협상’기구를 탄생시킨 뒤에도 이의 개편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협상’기구에의 합의를 요구하여 ‘협상’기구의 운영을 마비시키는 ‘전술’을 때에 따라 번갈아 가며 구사해 왔다. 이같은 북한의 ‘협상전술’을 유형별로 살펴보자.
‘일방적 해석’의 여지를 함축한 ‘원칙적 합의’ 고수:
이 경우의 대표적 실례는 앞에서 상세히 검토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원칙’이다. 이 ‘통일 3원칙’은 그 뒤 남북 간에 ‘합의서’가 채택될 때마다 ‘한약의 감초’격으로 반드시 언급되어 왔다. 1992년의 ‘남북 기본합의서’의 전문에도 이 ‘원칙’이 언급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원칙’은 실천이 불가능한 원칙이었다. 왜냐 하면 앞에서 검토된 바와 같이 이 ‘원칙’의 해석에 있어서 남북 간에는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이와 유사한 경우는 허다했다. 예컨대 남북대화 초기의 적십자회담의 경우를 보자. 1970년대 초 남북적십자회담은 회담이 열릴 때마다 ‘합의서’에 ‘합의’하는 ‘열성’을 과시했다. 그런데 이들 ‘합의서’의 대부분이 실체가 없는 ‘원칙’에 관한 합의서였다. 예컨대 제1차 본회담(평양: 1972.8.29~9.2) ‘합의서’는 문제의 ‘통일 3원칙’을 재확인하는데 추가하여 ‘자유로운 방문,’ ‘자유로운 상봉,’ ‘자유로운 서신거래’라든가 ‘적십자 인도주의 원칙’ 등의, 그리고 제2차 본회담(서울: 1972.9.12~16) ‘합의서’는 ‘온 겨레의 의사와 염원,’ ‘민주주의적 원칙,’ ‘자유로운 원칙,’ ‘남북공동성명의 정신,’ ‘동포애’ 등의 표현을 담고 있었다.
최근 미•북 핵회담에서 생산된 ‘합의서’도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미•북 1단계 ‘고위급회담’(뉴욕: 1993.6.11) ‘공동발표문’(북측 표현은 ‘공동성명’)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지지,’ ‘전면적 핵안전조치의 공정한 적용,’ ‘한반도의 평화통일 지지.’ ‘평등과 공평의 기초’ 등의 표현을 담고 있다. 이 합의사항들은 쌍방 간 근본적인 해석상의 차이를 바닥에 깔고 있는 ‘원칙적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년 10월 21일의 제네바 ‘기본합의’나 금년 6월 13일의 쿠알라룸퍼 회담 ‘공동언론 발표문’도 쌍방 간에 해석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이 같은 ‘원칙적 용어’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들 문제표현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가 극복되지 않는 한 이 표현들이 포함된 ‘합의’들은 이행이 불가능하다. 프레드 이클레가 ‘국가 간의 협상기법’에서 갈파한 것처럼 이같은 ‘원칙적 용어’들을 담고 있는 ‘합의’들은 본래 부터 이를 성실하게 실천•이행하지 않겠다는 북한측의 저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원칙적 합의’를 통해서 북한이 노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북한은 ① 우선 “해석상 이견의 여지가 있는 애매한 표현”을 담은 ‘원칙적 합의’의 생산을 관철하고 ② 이 ‘원칙적 합의’의 실천단계가 되면 문제의 ‘원칙적 합의’의 ‘재해석’을 위한 ‘재협상’을 강요하여 ‘재협상’ 과정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추가적 양보’를 확보하며 ③ 이 같은 ‘재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원칙적 합의’가 생산되면 또 다시 앞의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합의’사항의 실천이 없거나 부분적인 이행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하나의 ‘합의’를 또 하나의 ‘합의’로 끊임없이 대체해 나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의 ‘남북고위급회담’의 경우 북한은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뒤 이 ‘기본합의서’를 “원칙에 관한 합의”라고 규정하고 “‘원칙적 합의’ 뒤에는 ‘규칙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주장하면서 이른바 ‘규칙에 관한 합의’로 포괄적 ‘부속합의서’의 채택을 고집했으며 우리측의 양보로 포괄적 ‘부속합의서’가 난산 끝에 채택되자 이번에는 “‘규칙’ 다음에는 ‘세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분야별 ‘공동위원회’의 ‘운영세칙’이라는 것에 합의할 것을 고집하는 도중에 ‘고위급회담’ 자체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그 동안 여섯 건 ‘합의문’을 생산한 미•북 핵회담의 경우도 ‘합의서’로 ‘합의서’를 대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왔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1993년6월11일의 ‘공동발표문’(JOINT STATEMENT), 1993년7월19일의 ‘개별 언론발표문’ (SEPARATE PRESS STATEMENTS), 1994년2월25일의 ‘합의된 결론’ (AGREED CONCLUSION), 1994년8월12일의 ‘합의성명’ (AGREED STATEMENT), 1994년10월21일의 ‘기본합의(AGREED FRAMEWORK), 1995년6월13일의 ‘공동언론발표문’(JOINT PRESS STATEMENT)가 그 것들이다.
회담 도중 엉뚱한 문제 제기로 회담 페이스 조절:
북한은 어떠한 회담에서든지 ‘합의’를 생산하는 단계에서나 실천하는 단계에서 일방적인 ‘전제조건’을 기습적으로 들고 나와 ‘합의’ 도달이나 실천을 가로 막는 것이 예사였다. 또 진행 중인 회담을 ‘전제조건’을 내세워 중단시키고 ‘전제조건’을 내세워 중단된 회담의 재개를 가로 막는 행동을 반복해 왔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북한은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을 시작하자 ‘군사문제 우선해결’ 주장을 ‘회담진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들고 나와 회담의 진전에 제동을 걸었다. 북한의 주장은 “남북 간의 현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대화를 할 수 없고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도 없으며 나라의 통일과 관련된 어떠한 문제도 성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31).
구체적으로는 북한은 ① 무력증강과 군비경쟁 중지 ② 각자 군대의 10만 이하로의 감축과 군비의 대폭 축소 ③ 일체 외제 무기와 작전장비및 군수물자 반입 중지 ④ 미군을 포함한 일체 외군의 철수에 합의할 것과 이를 내용으로 하고 상호 ‘무력 불행사’를 다짐하는 ‘평화협정’의 우선적인 체결을 요구했다.32)
북한은 1973년 8월 일본에서 김대중 씨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실로 남북조절위원회의 운영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그 뒤 북한은 한국에 대해 ① ‘6.23 선언’(박정희대통령의 1973년 6월 23일자 남북한 동시 UN가입 제안) 철회 ②반공정책 포기, 반공법•국가보안법 폐지, 공산당 활동의 합법화, ③ 주한미군 철수 ④ 북한측의 통일방안 수락 등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일방적 요구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함으로써33) 남북조절위원회 운영의 재개를 가로막았다.
1973년 북한은 진행 중이던 적십자회담 본회담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남북 간에는 한동안 판문점에서 본회담 재개를 위한 ‘실무회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북적측은 본회담 재개를 위한 몇 가지 ‘전제조건’들을 제시했다. 그 것은 한국이 ① 반공법•국가보안법 및 1972년 ‘유신개헌’을 전후하여 공포한 ‘긴급조치’들을 폐지하고 ② 반공단체와 반공기구들을 해체하며 ③ 반공정책과 군사도발을 중지하고 ④ 정당•사회단체들의 적십자 사업 참가와 이에 수반되는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며 ⑤ 이상 조항들의 실천을 보장할 법률적•행정적 조치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34)
1993년 남북 간에 북한 핵문제 논의를 위한 ‘특사 교환’ 문제가 거론되자 북한은 ‘특사 교환’ 실현의 ‘전제조건’으로 ① 대 북핵 국제공조체제 추구 중지와 ②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를 요구했다.35) 1994년7월 남북 간에 합의된 ‘정상회담’은 회담 실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으로 유산되었다. 김일성 사망 후 ‘정상회담’의 재개 문제가 거론되자 북한측에서는 세 가지의 ‘전제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즉 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② 북핵문제에 관한 ‘국제공조체제’ 추진을 포기하며 ③ 한국내의 미전향 좌익수들을 석방하여 북으로 송환하라는 것 등이다. 여기에 더하여 작년 김일성 사망 시 한국정부가 한국국민들의 조문을 금지한데 대해 사과하라는 요구가 여전히 ‘전제조건’의 하나로 살아 있다.
요컨대 회담과 관련하여 북한이 내놓는 각종 ‘전제조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 것은 이 ‘전제조건’들이 하나 같이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일방적인 것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제조건’들은 상대방더러 수락하라고 내놓는 ‘협상용’이 아니다. 이들은 상대방의 ‘거부’를 유도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담의 진도 조절과 함께 회담을 중단시키고 또 재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 주도권을 북한이 장악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회담 도중 엉뚱한 문제 제기로 회담 진전 봉쇄:
북한은 회담 도중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와 회담의 진전을 가로 막기가 예사였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 석상에서 대한적십자사(한적)측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권장하는 ‘심인사업’ 방식에 따라 이산가족 재회사업의 조속한 실시를 제안하자 북한적십자회(북적)측은 엉뚱하게도 ‘적십자 요해 해설인원’ 교환 주장을 들고 나왔다. 북적의 제안은 ‘이산가족 심인사업’에 착수하기에 앞서서 먼저 “서로 ‘적십자 요해해설인원’을 교환•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대측 지역에 가서 흩어진 가족•친척들의 실태를 ‘요해’(파악하고 해설)하는 사업을 벌이게 하자”는 것이었다.
북적은 “상대측 이(동)당 1명씩의 ‘요해 해설인원’을 보내 시•군(구역) 단위로 활동하게 하되 이들에게는 언론•출판•집회•통행 등 활동의 자유와 편의를 보장하고 인신과 휴대품의 불가침권을 인정하자”고 주장했다. 북적측의 제안대로 한다면 북측에서는 36,000여명, 그리고 남측에서는 4,300여명의, ‘요해 해설인원’들이 상대측 지역으로 가게 된다는 계산이 된다.36)
더구나 북적은 이산가족의 생사여부와 주소를 확인•통보하는 문제에도 쌍방 적십자사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당사자 본인들이 직접 상대측 지역으로 가서 자유롭게 다니면서 찾아내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이야 말로 한반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도외시한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북적은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가 이산가족 찾기 사업 실시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북적의 주장은 “우리나라의 인도주의는 궁극적으로 분단조국의 통일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문제의 일환으로 다루어 져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방해하는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선행되어야 인도주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이었다.37) 적십자회담에 나온 북한측의 마음은 ‘염불’(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관심은 오직 ‘잿밥’(남한의 반공체제 무너뜨리기)에만 있었다.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
북한의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은 회담 당사자 사이의 모든 현안 문제들에 관하여 ‘일괄합의’를 이룩하고 이를 ‘동시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북한측 주장은 “우선 합의할 수 있는 문제부터 합의하고 합의된 문제는 합의되는 대로 즉시 실천에 옮겨서 합의 이행의 실적으로 통해서 신뢰의 기반을 쌓아 올려 나가자”는 우리측의 ‘부분합의•즉시실천’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이다.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장이었던 연형묵 정무원총리는 1992년2월19일 평양에서 열린 제6차 회담에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을 발효시키는 절차를 끝낸 뒤에 행한 기본발언을 통하여 “건당 합의하고 합의하는데 따라 실천하자는 종전의 귀측 주장은 일견 문제해결의 빠른 방도인 것 같지만 쌍방이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먼저 해결하자는 분야와 문제들이 각각 서로 다른 현실적 조건에서는 오히려 그 것이 문제해결을 더 지연시킬 것”이며 “더우기 합의서의 매 조항들이 서로 밀접히 련관되어 있는 조건에서 어느 한 문제가 합의되었다고 하여 그 것을 곧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38) 사실은 연형묵은 이 발언을 통하여 바로 이날 쌍방이 합의하여 발효시킨 두개의 합의문서들이 즉각 이행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북한은 모든 형태의 남북대화 석상에서 이 주장을 강력히 폈다.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은 일견 적극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합의하기 용이한 문제’와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가 혼재해 있는 현실상황에서는 ‘일괄합의’ 주장이란 실제로는 ‘합의’ 도달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접근방식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여기에 더하여 ‘동시실천’ 주장은 가령 ‘일괄합의’의 두터운 벽을 뚫고 그나마 일부 ‘부분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합의되지 못한 다른 부분’에 관한 합의가 이룩될 때까지 ‘이미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의 실천 유보를 강요함으로써 일체의 진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발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은 일견 외견상의 적극성을 가장하여 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실제로는 ‘일괄’과 ‘동시’의 겹 자물쇠를 이용하여 아무 것도 이루어 지지 못하게 봉쇄하는 ‘지연전술’(FILIBUSTER) 논리 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단 합의 후 새로운 문제 제기로 합의 이행 봉쇄:
남북 간에는 1989년9월에서 11월에 걸쳐 판문점에서 1985년 1차로 실시된 바 있는 ‘이산가족 노부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을 재차 실시하는 문제를 가지고 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이 진행되었다. 쌍방은 도합 여덟 차례의 접촉을 갖는 과정에서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규모와 교환방문 시기 및 기타 필요한 절차에 대부분 합의를 이룩했다.
그런데 당초 북한측의 속셈은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1회성 교환방문에 동의하는 대가로 같은 해 3월과 7월 불법적인 북한 방문 후 구속•기소되어 있는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학생의 석방을 얻어 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북한의 속셈은 한국정부가 문익환•임수경에 대한 사법절차를 강행함에 따라 빗나갔고 그렇게 되자 북한의 생각은 달라졌다.
북한은 예술공연단의 상대측 지역에서의 공연 내용에 관하여 ① 민족적 내용 ② 건전한 내용 ③ 상대방을 중상•비방하지 않는 내용이라는 3개 원칙에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음39)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북측 공연단의 서울 공연 시 ‘이데올로기’ 색채가 농후한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 이른바 ‘혁명가극’을 공연하겠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이를 고집함으로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 자체를 유산시키고 말았다.40)
1992년5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석상에서 쌍방은 이 해 8.15 광복절을 기념하는 뜻에서 “조건 없이”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을 조직하여 교환하기로 합의했다.41) 이 합의사항의 이행 여부에 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회담 종료 후의 기자회견 석상에서 북측의 안병수대변인은 특히 이 합의의 ‘무조건성’을 애써 강조했다.42)
이 합의의 구체화를 위하여 남북 간에는 또 다시 여덟 차례의 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이 판문점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때도 ‘무조건성’을 강조한 북한측의 흉중에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북한은 문제의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방문 실현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한국측이 자진하여 북한이 요구하는 이인모의 북송에 동의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인모의 북송은 실현될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북한은 생각이 바뀌었다.
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에서 북한은 “무조건 실시” 약속을 식언하고 또 다시 ‘전제조건’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① 이인모의 무조건 송환 ②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국제공조체제’의 포기 ③ 또 다른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포커스․렌즈의 취소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43) 결국 “무조건 실시하기로” 다짐했던 이산가족 노부모와 예술단의 교환 방문은 실현되지 않았다.
회담기구의 개편 또는 새로운 회담기구로의 대체 요구:
남북조절위원회가 1972년 말 가동을 시작하자 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와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병행 개최하자고 제의해 왔다. 1973년8월 불과 세 차례의 본회의 끝에 남북조절위원회의 운영을 중단시킨 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 재개의 조건으로 동 위원회의 확대•개편을 요구했다.
1973년11월 남측의 장기영부위원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남북조절위원회 재개의 조건으로 ① 6.23 선언의 취소 ②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자 처벌 중지 ③ 남북조절위원회의 확대•개편을 요구했던 북측의 유장식 부위원장은 그 해 12월부터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회의가 시작되자 여기서 북측이 말하는 남북조절위원회의 확대•개편 방안을 제시했다. 즉 “각기 5명 이상의 당국 대표, 각기 60~70개의 정당•단체에서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 5~20명씩의 대표 그리고 그 밖에 각계각층 인민 대표”등으로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이렇게 되면 남북조절위원회는 한쪽에서 최소 350여 명, 최대 1,500명의 ‘위원’들이 참가하는 군중집회로 변모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경우에는 “통일에 반대하는 정당•단체나 개인은 참여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에 반대하는”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북한측 설명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이란 뜻이었다. 왜냐 하면 북한의 논리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민족의 단결에 반대하는 것이고 민 족의 단결에 반대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44)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이것은 남북조절위원회를 하지 말자는 것이지 확대•개편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북한의 협상‘전술’들은 하나의 중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 것은 이 협상‘전술’들이 하나의 일관된 협상‘전략’의 테두리 안에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윌헬름이 냉전시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협상행태 연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북한의 경우도 ‘전술’에는 신축성이 있으나 ‘전략’에는 추호의 융통성도 없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북한의 협상‘전략’은 오직 하나의 기본목적에 집착하고 있다. 즉 ‘협상’이 아닌 ‘회담’을 통해 ‘적화통일’의 과도적 단계로 “남조선의 공산화 내지 용공화”를 성취하는데 이바지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 같은 ‘회담’(또는 ‘접촉’)을 통해 “남조선의 공산화 내지 용공화”가 이루어지면 그렇게 ‘공산화’ 내지 ‘용공화’된 ‘남조선’을 상대로 ‘협상’하여 ‘적화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조선혁명에 기초한 조국통일’ 이론으로 이른바 ‘하나의 조선’ 논리가 설정해 놓고 있는 한계이다.
남북대화를 하든지 미국과 핵회담을 하든지 또는 일본과 국교정상화회담을 하든지 이 모두를 관류하는 북한의 유일무이의 기본목적은 이를 통하여 “남조선의 공산화 내지 용공화를 이룩하는데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협상‘전략’은 북한이 추구하는 협상‘목표’의 차별화를 요구한다. 즉 북한은 북한이 추구하는 ‘적화통일’ 목표와 관련하여 ‘전략적 목표’인 ‘적화통일’ 그 자체와 ‘전술적 목표’인 이를 위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문제”를 차별화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것을 ‘조선의 통일문제’와 ‘조선의 통일에 관한 문제’로 구별한다. 여기서 ‘조선의 통일에 관한 문제’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조선의 통일문제,’ 즉 ‘적화통일’ 목표 그 자체는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를 위한 북한의 협상‘전략’은 남북대화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로 상징되는 반공체제의 와해를, 대미 핵회담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로 집약되는 한•미 안보유대의 파괴를, 그리고 대일 수교회담에서는 대한민국의 ‘유일합법성’ 훼손을 ‘비타협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북한이 협상‘전술’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융통성’과 ‘신축성’은 ‘회담’이 이들 ‘비타협적 목표’ 달성의 ‘수단’으로 구실할 경우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다.
6. 결론 -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미•북 핵회담의 진도가 KEDO와 북한 간에 ‘경수로 공급계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는 단계에 와 있는 시점에서 북한의 다음 단계 행동 수순은 미국과의 쌍무회담에서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논의하려 하는 것이라는데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북한의 궁극적 목표는 미•북 쌍무회담을 통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라는 이름 아래 1953년의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실현시키겠다는 것이다.45)
그러나 북한은 최근 그러한 종착역까지 가기 이전 “정전협정이 휴지화”된 상황에 대처할 과도적 ‘평화보장조치’로 우선 군정위와 중감위를 ‘안락사’시키고 그 대신 이들의 기능을 대체할 기구로 미군과 북한군의 판문점‘대표부’ 설치와 이들 간의 ‘쌍무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그 동안 북한은 이를 위한 일련의 정지작업을 진행시켜 왔다.
즉 1994년4월28일 북한측 군정위 대표를 일방적으로 철수46)시켰고 5월24일에는 소위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설치47)했으며 12월15일에는 군정위 중국‘지원군’ 대표를 철수48)시켰다. 북한은 1993년4월 중감위의 체코 대표단을 철수시킨데 이어 1995년2월28일에는 폴란드 대표단마저 철수시켰다.49)
또 1995년5월3일자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명의의 성명을 통해 중감위 사무실 폐쇄, UN군측 군정위•중감위 요원들의 공동경비구역 출입 금지 등의 일방적 조치를 취하면서 “만약 미국이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에 불응할 때는 ‘추가조치’를 강구하겠다”고 협박했다.50)
북한은 1994년4월28일 군정위 비서장 접촉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는 현 정전협정을 준수하여 적대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며 군정위 공동일직 장교 간의 판문점 직통전화는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엇갈린 움직임으로 1995년6월22일자 신문들에 의하면 북한은 군정위 공동일직 장교 간 접촉에서 북한이 “1995년6월25일을 기해 정전협정과 주한UN군사령부(UNC)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정전협정을 파기시키겠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할 것”이라고 비공식 통보해 왔다는 보도가 있었다.51)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이 ‘통보’는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같은 북한의 ‘평화보장조치’ 공세에 대처해야 한다. 북한의 ‘평화보장조치’ 공세의 특징은 한국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는데 있다. 북한은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 문제는 정전협정 체결의 당사자인 우리와 미국 사이에 협의하여 해결할 문제”이기 때문에 “남조선괴뢰들은 거기에 끼어 들 초보적인 권능도 자격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52)
물론 현 단계에서 미국은 이같은 북한의 주장을 결단코 수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미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측면에서 이에 조력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미국의 입장에는 몇 가지 불확실성의 그늘이 있다. 우선 문제는 앞으로 북한 핵문제의 ‘해결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북한이 또 다시 배수진을 치고 이른바 ‘벼랑 끝 외교’(DIPLOMATIC BRINKMANSHIP)를 전개한다면 과연 미국이 버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북한이 앞으로 어떤 시점에서 미국에 대해 “만약 평화보장체계 문제에 관한 미•북 쌍무회담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핵동결’ 조치를 일방적으로 해제하겠다”고 위협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내용으로 하는 ‘평화보장체계’를 위한 미•북 쌍무회담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군정위 대체 기능 마련을 위한 과도적 ‘평화보장조치’ 논의를 위한 쌍무회담은 해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쪽으로 ‘전술적 차원’을 빙자한 방향 전환을 고려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군정위 기능의 계속되는 마비로 판문점에서 UN군과 북한군 사이에 일체의 접촉 창구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 오래 지속될 때는 미국 쪽에서는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사태에 대비하는 기능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제기되고 이 같은 논리에 입각하여 미군과 북한군 간의 쌍무회담을 수용하는 쪽으로 ‘여론의 압력’이 형성될 가능성도 충분히 예견된다.
이것이 대북 협상전략과 전술의 차원에서 우리가 대비해야 할 상황들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처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는 치명적인 제약은 북한이 미국만을 상대할 뿐 우리는 결단코 상대하려 하지 않는데 있다. 북한은 만의 하나 어떤 형태의 남북대화를 수용하더라도 여기서 한국을 상대로 소위 ‘평화보장체계’는 물론 과도적 ‘평화보장조치’를 논의할 생각이 없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과거 북한의 행적으로 미루어 본다면 가령 남북대화 석상에서 문제의 ‘평화보장체계’나 ‘평화보장조치’를 논의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기서는 ‘평화보장체계’나 ‘평화보장조치’의 ‘실체’나 ‘본질’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보장체계’와 ‘평화보장조치’를 실현시키는데 “유리한 조건•환경을 조성하는 문제”의 차원, 즉 “한국이 미국에게 북한과 그러한 문제들을 논의하도록 권유하는 문제”의 차원에서만 그러한 논의를 허용하려 할 것이 틀림없다.
북한이 이 같은 태도를 견지하는 한 우리의 입장에서 여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유의해야 할 일은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1953년 정전협정 발효 이후 지난 42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되지 않은 것은 정전협정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전쟁재발 억지장치로서 정전협정의 기능은 1957년 UN군측이 이미 북한측의 조직적인 사보타지로 실효상태였던 동 협정 제2조 13항 (라)목의 ‘잠정 폐기’를 선언함으로써 결정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동안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북한측이 전쟁 재도발 유혹을 느꼈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시기가 1975년 4월 월남전이 공산월맹의 승리로 종식될 무렵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정전상태는 정전협정이 아니라 한국군과 주한미군이 보유하는 전쟁억지력과 이에 토대를 둔 남북한 간의 군사력균형에 의하여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오늘까지 평화를 지켜 준 전쟁억지력이 오늘도 존재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사실상 오랜 기간 동안 실효상태가 지속되어 온 정전체제가 더 이상 마비된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서 ‘공황’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공황’이 발생하지 않고 우리의 대처가 의연할 때 구속력이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정전체제가 마비되어 있는 상황으로 인하여 보다 큰 불안감을 갖게 되는 쪽은 당연히 북한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북한의 불안은 당연히 최근의 심화되고 있는 북한의 외교적 고립과 특히 북한의 전통적인 대러시아•대중국 관계의 변화로 인하여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 단계에서 조성되는 안보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는 공고한 한•미 안보유대를 보다 확실하게 다지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상황은 우리 정부나 마찬가지로 미국 행정부도 지나치게 ‘치적주의’의 차원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북한문제에 접근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특히 내년 말로 닥아 오는 대통령선거를 의식하여 작년 10월21일의 제네바 ‘기본합의’와 지난 6월13일의 쿠알라룸퍼 회담 타결 사실을 ‘성역화’ 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반복되는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을 통해 북한이 끊임없이 기도하는 기존 ‘합의’ 내용의 변질을 수용하거나 북한의 ‘공갈•협박’ 전술에 굴복하여 ‘추가적 양보’를 되풀이 할 가능성을 염려하게 해 주고 있다.
여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대미 외교는 종래처럼 정부 대 정부 간의 공식 외교통로에 의존하는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대미 안보외교는 이스라엘이나 대만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학계와 언론계 및 합법적 로비스트 등 미국사회 특유의 전문가 및 이익집단의 활용을 통하여 GRASS ROOT 차원의 저변에서 우리의 국익을 미국의 국익으로 치환시키는 ‘전략적 제휴’(COALITION-BUILDING)의 차원으로 이를 승화시키는 노력에 치중할 필요가 있다. “막히면 돌아가라”는 속담처럼 오늘의 남북관계에서는 미국을 확실히 잡아 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북 협상‘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북한과 ‘대화’해 온 전 과정은 ‘좌절’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북한의 협상‘전략’을 그릇되게 ‘희망적’으로 판단하여 ‘과잉기대’를 가지고 북한과의 ‘대화’에 임하는데서 비롯되었다. 필자는 1993년 7월 북한과의 1•2 단계 ‘고위급회담’을 끝내고 우리 정부와 협의차 내한한 갈루치 미국측 수석대표를 만나 다음과 같은 소감을 들려 준 일이 있다.
“나는 4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남북대화에 종사하면서 늘 다음과 같은 좌절감에 시달려 왔다. 내가 그동안 상대해 온 북한사람들은 1950년대 초 조이 제독이 판문점에서 상대했던 북한인들 그대로였다. 그러나 전혀 변화가 없는 똑 같은 북한인들을 상대하는 나는 조이 제독이 그의 체험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경고했던 모든 금기들을 나 스스로 어기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미•북 핵회담의 양상을 보면 당신이 상대하는 오늘의 북한인들도 과거 조이 제독이 상대했고 또 내가 상대했던 북한인들 그대로인데 당신도 내가 했던 대로 조이 제독의 모든 금기를 어기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아마도 나나 마찬가지로 이미 많은 좌절을 맛보고 있던지 아니면 멀지 않아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미•북 핵회담 초기 북한은 미국이라는 황소의 후면에서 꼬리를 잡고 황소의 몸을 흔들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더니 인제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전면으로 돌아 와서 두 뿔을 잡고 정공법으로 황소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혹시 북한이 미국을 얕잡아 보기 시작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남북대화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남북대화의 기본성격이 아직도 ‘적대적 협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크게 보아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로는 ‘민족’의 ‘신화’에 도취한 나머지, 적어도 남북관계가 그 동안의 ‘적대적 공존관계’로 부터 ‘평화적 공존관계’로 변모할 때까지는, 북한의 ‘인민’들은 몰라도 ‘지배집단’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회담 때마다 철저하게 북한에게 농락당하면서도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우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피아식별기능’(IFF=IDENTIFICATION FRIEND OR FOE)이 마비되는 ‘인식의 혼란’이 초래되었다. 심지어는 우리측 대표단을 구성함에 있어서 북측 대표단에게 청탁하여 우리측의 특정 인사를 대표단에서 배제하려 하는 괴이한 로비활동을 벌이는 우리측 대표가 있는가 하면 특정 현안에 대한 우리측 특정 대표의 입장이 바뀌도록 설득하는 일을 북측 대표에게 부탁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둘째로는 북한에 대응함에 있어서 대체로 ‘전문적’(PROFESSIONAL)이 아니라 ‘비전문적’(AMATEURISH) 접근방법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향은 특히 남북관계 분야에서의 인사관리 면에서 현저했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경우 남북대화를 포함한 남북관계는 하나의 고도의 ‘전문분야’가 되어 있어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자들은 사실상 ‘종신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경우는 남북대화 종사자들까지도 ‘전문직’이 아니라 ‘순환보직’의 대상이 되어 ‘정치’ 또는 ‘정실’인사의 차원에서 인사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당연히 우리측의 회담요원도 대폭 물갈이가 이루어 져야만 했다.
우리측의 ‘비전문적’ 회담요원들에게 공통된 자질의 하나는 “근거 없는 일방적 낙관론‘을 앞세워 북한에 관한 ‘전문가 집단’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측 ‘전문가 집단’의 ‘보수성’(?)을 기피(?)한 나머지 북한의 기도를 판단함에 있어서 흔히 오랜 경험의 축적에 바탕을 둔 ‘전문가 집단’의 의견은 불신하고 그 보다는 그들이 대면 상대하는 북한 대표들로 부터 직접 듣는 ‘얘기’나 또는 북한 요인들과 직접 ‘얘기’ 를 나눈 사람들의 ‘얘기’를 더 ‘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대면 상대하는 북한측 대표나 요인들이야 말로 북한의 정수 ‘대남사업 전문가’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셋째로는 역대 정권이 모두 남북대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역대 정권 모두가 남북대화를 통해 무언가 ‘정치적 업적’을 이룩하려고 서둘렀고 그러한 ‘치적주의’에 쫓기다 보니 북한에 의해 농락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역대 정권의 정치지도자들이 하나 같이 보여 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집념과 미련은 그러한 ‘치적 주의’의 소산이었다. ‘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우리와는 다르다. 북한은 과거 우리측의 ‘정상’회담 제의에 대해 통상 ‘정치협상회의’ 제안으로 대응해 왔다. 북한이 말하는 ‘정치협상’이란 남북 쌍방의 정부당국은 배제하거나 아니면 참가를 허용하는 정도로 그 역할을 한정시킨 가운데 쌍방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동수로 참가하는 회의를 열어 여기서 통일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의 조선’ 노선을 버리지 못하는 북한이 대한민국의 정부당국을 ‘인정•상대’함으로써 ‘두개 국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여 ‘하나의 조선’ 노선을 파산시키는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남북 간 1대1의 ‘정상’회담은 당연히 ‘두개 국가’의 현실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89년 신년사에서 남측의 민정당 총재(노태우), 평민당 총재(김대중), 민주당 총재(김영삼), 공화당 총재(김종필)와 천주교 김수환추기경, 문익환 목사, 백기완 씨 등을 평양으로 초청하면서 이들과 평양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갖자고 제의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정당 총재’로 다른 정당•사회단체 대표들과 함께 그들 중의 한사람으로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1994년7월 김일성의 사망으로 유산되기는 했지만 그의 사망 직전 남북한 간에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의 주선에 의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주석 간의 회담 개최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 졌을 때도 북한은 이를 ‘정상’회담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북한의 호칭은 ‘남북최고위급회담’이라는 것이었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문제 뿐 아니라 남북 간의 모든 현안 문제에 관하여 북한과 대화함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황금률은 모든 문제를 1992년 남북한이 합의하여 발효시킨 남북 ‘기본합의서’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철의 원칙’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키는 문제는 문제의 ‘기본합의서’를 전면적으로 실천•이행할 경우 자동적으로 원천적으로 해결되는 것이고 그러한 뜻에서 본다면 ‘기본합의서’는 남북 간에 언젠가 체결될 ‘평화협정’의 모든 ‘실체’를 갖추고 있는 문서이다. 따라서 ‘기본합의서’가 충실히 이행된다면 별도의 ‘평화협정’은 불필요할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으로 말하여 ‘기본합의서’가 이행되지 않는다면 설사 ‘평화협정’이라는 제목의 또 하나의 ‘합의문서’가 생산된다고 해서 그 것이 이행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만약 북한이 ‘기본합의서’의 이행을 보이콧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은 북한과 또 다른 ‘합의문서’를 논의할 것이 아니라 북한 내부의 변화에 의하여 ‘기본합의서’의 이행 쪽으로 북한의 태도가 바뀔 때까지 의연하게 지켜보며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과거 남북대화의 과정에서 북한은 ‘원칙’은 배타적으로 고수하고 다만 ‘원칙’을 실현시키는 ‘방법’만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던 반면 우리는 ‘대화’를 하는 외양에만 집착한 나머지 항상 우리가 제시한 ‘원칙’을 스스로 흥정의 제물로 삼아 양보해 버리는 주객전도의 ‘사석’작전을 일삼아 왔다는 점을 깊이 자성해야 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