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우남 이승만 박사
1961년 하와이에서 큰 절 올려
금년은 아버님 이승만박사께서 돌아가신지 어언 44주기가 되는 해이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시간 영시35분 마우날라니 요양원 202호실에서 운명하신 아버님 곁에는 프란체스카 어머님과 나 그리고 아버님의 제자 최백렬(崔栢烈)씨와 간호원 한 명이 지켜봤었다.
영구(靈柩)를 뫼시고 23일 서울에 돌아와 2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 후 이렇게 빨리도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들어 요즈음 일모도원(日暮道遠)이라는 말이 생각나는데 '뉴데일리' 인보길(印輔吉)사장의 권유로 생각나는 몇 가지를 적어보기로 하였다.
내가 입양(入養)하여 하와이에 가서 휴양 중에 계신 아버님 우남어른과 프란체스카 어머님을 뵙고 당시 윌버트·최씨가 소유한 매키키 2033번지의 집에서 정성(定省)을 하게 된 것은 1961년 12월부터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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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잘 돼간다는 말 믿지 말라'
근검 절약, 기도, 독립운동때의 습관
'한국민족 앞날에 축복과 은총을' 식사때마다 같은 기도
국산 신발에 '우리 한인 재주가 정말 좋아'
'통일은 남이 시켜주는 일이 아니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이렇게 부자간의 열띤 대화가 오고가는 것을 아신 어머님은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날무우를 벗겨가지고 오셔서 맛이 있으니 먹어보라고 권하시어 아버님과 나는 그 싱싱한 맛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님은 나에게 ‘지금도 아버님은 나라 걱정이 많으시단다’고 웃으신다.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시려는 듯 어머님은 고달픈 하와이 생활에서 아리랑의 노래를 곧잘 부르셨다. 아리랑을 부르고 한국을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니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한국민요는 물론 평소에 아버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지만 아버님은 그 가사도 어머님을 위해 다음 같은 문구를 넣어서 재미도 있었지만 두 분의 기구한 만남의 생애를 새삼스럽게 생각하였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오다 가다가 만난님 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
TV가 없던 매키키 집에는 어머님의 아라랑 노래와 간혹 아버님의 한시낭송과 만가(輓歌)의 곡조를 듣는 일이 있었는데, 어머님은 이것을 아버님의 멜로디(melody)라고 하셨다. 매우 조용하게 읊으시는 한시에는 의미심장한 강개가 잠겨 젊은 날의 의기를 상기하시는 듯 하였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들어 아시는지 부르시는 만가의 곡조에는 영원을 향한 인생의 애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어 나를 슬프게 하였다.
이밖에 우리 가족은 함께 앉아 찬송가를 즐겨 불렀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하여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찬송가를 골라서 어머님과 함께 불렀다. 특히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부를 때면 함께 합창하시며 ‘매우 씩씩해서 좋다’고 기뻐하셨다. 이렇게 찬송가를 부르고 나면 우리 모두 마음이 한결 후련하고 즐거웠다.
독립운동중에 부모 돌아가셔도 못 가본 고국....'懷鄕病'에 눈물
그리고 어머님은 혼자서 바쁘신 살림 중에도 아버님의 기분전환을 위해 외출의 기회를 만들어 집 근처의 탄탈루스 산길이나 좀 먼 곳에 있는 가내오에 해변을 드라이브하셨다. 모두가 평상시에 자연을 사랑하고 즐기시는 아버님의 성품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아버님이 이렇게 외출을 하셔도 전과 같이 즐거워 하시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것이 아버님의 회향병(懷鄕病)이라 설명을 하셨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에 동의를 하면서 아버님이 1935년 독립운동당시 조국의 강산을 그리워하며 쓰신 한시 ‘태평양 주중작(太平洋 舟中作)’을 생각하였다. 우남께서는 천부의 시인이었으며 예술의 향기를 지닌 어른이셨다. 그러나 풍운의 시대가 이 어른을 시인이나 예술가로 머물게 하지를 않았다. 우남의 나라 사랑은 조국강산과 직결된 것이었고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 어른은 평생토록 가슴에 안고 사신 것이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조국강산에 비할 사랑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하루는 우리 세 식구가 앉은 자리에서 아버님은 1896년에 돌아가신 어머님 말씀하시며 눈물을 지으셨다. 구국운동으로 집을 비었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시 아버님의 별세를 알았으나 돌아갈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버님은 부모님께 해야 할 일을 못했다는 말씀이었고 이제는 조국 땅에 돌아가 죽는 것이 오직 하나의 소망이라고 하셨다.
1962년 3월 17일...출발 직전 '귀국 중지' 통보
아버님의 이같이 간절한 귀국의 소망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어머님과 나는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1962년 3월 17일자 한국행 비행기표를 마련하여 준비가 완료되었지만 이날아침 박정희정부에 의해 귀국이 저지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결심으로 나만이 혈혈단신 귀국하여 정세를 살피기로 하고 곧 아버님은 모날라니 요양원의 호의로 그곳에 입원을 하셨으며 어머님은 요양원의 종업원별실에 기거하시어 간호원 보조로 아버님을 보살피며 사시게 된 것이었다.
입원 후에도 아버님은 귀국의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자기 생명과 같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기에 몽매에도 그 마음은 한결같으셨다. 아버님은 자기 뼈를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하셨고 어머님과 나는 정부에 진정서를 내서 국립묘지 안장을 탄원하였다.
태평양의 장엄한 낙조(落照)와 같이 한국의 현대사, 대한민국을 만든 우남의 마지막 길, 장례의 행렬은 모든 예장(禮葬)을 사양한 순수한 국민정성의 표징이었으며 우남이 사랑하였고 우남을 사랑한 국민들과의 만남이었다. 아아 - 한국민족을 광명의 길로 인도한 영도자 우남 어른이시어 ! 국민이 태산같이 의지한 고결한 어른이시어 ! 그 인자하신 아버님이 그립습니다. 이제 우남을 그리워하는 그 착하고 어진 국민들의 마음은 국립묘지 이승만 대통령 묘역에 다음같이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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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갈라디아서 5장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장 13절-15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22절: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良善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6장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