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성 연 충남 공주시 금흥동
꿈
나는 남북으로 길게 뻗친 길에 서서 북쪽을 바라본다. 갑자기 황소 한 마리가 뛰어 나와서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온다. 나는 무섭고 다급하여 남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황소가 뛰는 것이 빨랐다. 나는 당황하여 길 옆의 문 대신 가마니로 막은 방으로 들어가서 숨었다. 밖을 내다보니 황소는 이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부릅뜨고 숨을 헐떡거리며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다른 곳으로 숨을 곳을 찾으려고 둘러보니 방 아랫목에 어떤 여인이 흰 옷을 입고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는데 나는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놀라서 소리쳤다.
『엄마-!』
가위에 눌려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때가 「6월25일 새벽 4시」께다. 영원히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그 악몽, 그때부터 이 국가와 이 민족 그리고 내 가정에 비극이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오전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왠지 안색이 변한 남편이 방 한가운데 서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여보,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는데, 오늘 새벽에 38선에서 인민군이 국군 쪽으로 쳐내려와 지금 전투를 하는 모양이야!』
남편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쉬며 『전쟁이 터진 것같아…』하며 말 끝을 맺지 못하고 방을 왔다갔다 했다. 꿈에서의 무서움이 삼팔선이 터진 것과 똑같이 놀랍고 초조하여 나는 그 밤을 잠 못 이루고 그이와 함께 앞으로 닥칠 무서운 일들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밤 라디오만 쳐다보며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 하고 귀를 기울이고 밤을 지새웠다. 방송은 간단히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시켰다는 말뿐이었다. 방송을 들으면 안심이 되는 때도 있었으나 그래도 불안한 밤이었다.
패전한 순경들의 행군
다음날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도 등교하여 어린아기와 셋째, 그리고 78세이신 친정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는데 행길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궁금하여 나는 길가로 나왔다.
평상시 입는 양복차림의 남자들이 70명쯤 줄을 지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양복은 때가 묻고 얼굴들이 기가 팍 죽어 보이며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축 늘어진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보니 전방에 있는 순경들인데 인민군에 패전하여 여기까지 후퇴하여 다시 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벌벌 떨리는 발길로 집으로 뛰어오는 길에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새 소식이라도 있는지 궁금하여 그리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젊은 청년 4~5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셔츠바람으로 신도 짝짝이를 신고 있어 이유가 궁금하였다. 누구이며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울을 인민군이 점령하여 다급하게 뛰어나와 한강을 건너 고향 서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들은 말을 잘 받아주지도 않고 무엇인가 두려워했다. 순경들의 행군이나 그 청년들의 말을 듣고 방송과 실제는 다르다고 느꼈다.
나는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학교에 전화를 했다. 전화받은 여선생이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그냥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시국에는 누가 빨갱이인지 알 수 없는 때라 모두가 의심이 나서 변변히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하고 서로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었다.
식구들이 다 모였다. 나는 무조건 직장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남편은 내 생각과 달랐다.
『대전 본청에서 최후까지 직장을 死守(사수)하라는 무전이 왔구료. 만약 사수하지 않으면 총살이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송에서는 인민군이 후퇴했다고 하는데, 서울이 점령당했다고 하니 좌우간 정부를 믿고 기다려 봅시다』
순진한 공무원들이 이런 방송과 명령으로 인하여 피난을 못 떠나고, 남아 있던 병사들과 공무원들이 충남 홍성에서만 사백하고 수십 명이 공산당에게 붙잡혀서 학살당했다.
그 비극이 역사의 한토막이요, 30만 과부와 수백만의 고아들을 전국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대전본청 지청장님은 부산으로 피난갔는데 자동차에 닭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후일 소문으로 들었지만…, 사실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해 봄에 일본인 후지가와데이 여사의 글을 읽었다. 2차대전 종전을 남편과 만주에서 맞이하고 북한을 지나서 달구지를 타고 오다가 걸어서 삼팔선을 넘는 도중 남편은 죽고 구사일생으로 자기 나라로 가서 공산당에게 그 무서운 고초를 당한 것을 글로 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산당이 무서웠다. 남편은 말했다.
『어린것들을 데리고 걸어갈 것이 막연하기도 하고 또 공산당과 그 이데올로기가 무섭다지만 그 사람들도 다 같은 민족인데 무조건 죽이진 않을 거요』
남편은 말을 계속했다.
『공산당을 취조할 때도 한 번도 억울하게 해본 일이 없고, 사형을 내린 일도 없었으니 화를 받을 일은 한 번도 안했소. 또 정부방송을 믿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국민이 정부를 믿고 각 부서를 지켜야 질서가 무너지지 않지, 공무원된 가정이 서둘러서 피난길을 먼저 떠나면 남은 일반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소』
남편의 이런 생각과 말들이 나의 초조한 마음을 늦추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부터는 서울서 오는 피난민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피난길
결국, 우리 가정은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시내에서 떨어진 서기과장댁으로 가기로 하고 남편은 그 다음날 그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기저귀 보따리만 들고 집을 떠나 큰 길에 나오니 피난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모두들 뭉쳐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서기과장댁에 찾아가서 그집 사랑방에서 밤을 새우는데 먼 곳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잠을 못 이루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남편이 뛰어왔다. 물병을 둘러멘 것을 빼고는 빈 손 그대로였다.
남편은 인민군이 예산 오가까지 왔으니(오리쯤 되는 곳) 빨리 떠나자고 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재촉하여 청양 방면으로 길을 정하고 떠났다. 그 길은 부여·논산을 거쳐 대전으로 갈 수 있다고 해서 그 길을 택했다.
오후쯤 되어서 어떤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남편은 이 동네에 사는 분의 자제가 서울본청 검사인데 친분이 있으니 요기 좀 하고 가자고 했다. 그 집을 찾아가니 서울서 아들이 아직 오지 않아 걱정을 하고 계셨다. 음식을 정성껏 차려주셔서 아이들도 잘 먹고 어머니께서는 처음 그렇게 많이 먹었다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초조해 밥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 집을 하직하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자고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그때 길에서 배낭을 짊어진 남자 한 분이 다가왔다.
『아니! 한형 아니오?』
남편이 반가워했다.
『서울에서 왔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보안관계로 할 수 없고 한형은 나와 같이 정부가 대전인지 대구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좌우간 정부가 있는 데로 찾아갑시다』
『여보, 그 길이 최선인 것 같아요. 우리 부녀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은 별탈 없을 것이니 저분과 같이 가세요』
나는 이렇게 남편에게 권했다. 그러나 남편은 우리 식구들과 그분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가족들을 길가에 두고 떠나기가 무엇하니 형씨나 먼저 떠나시오. 나도 곧 갈 수 있겠지요』
그분도 인정하시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며 우리와 멀어졌다. 나는 왠지 마음에 아쉬움과 무엇인가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참 원통한 기회였다. 남편이 그분과 동행했더라면 전라도로 해서 부산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자기의 피난을 용기 있게 강행 못 하셨다. 가셨더라면 살아서 만났겠지….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남편의 불길한 육감
그날 밤은 얼마 못 가 어두워졌다. 우리는 공산당이 무서워, 어떤 동네에서 떨어진 창고 추녀 밑에 앉아 밤을 새웠다. 모기는 손에 칭칭 감길 정도로 많아서 남편은 네 살짜리 셋째아들을 안고 기저귀로 모기를 쫓고 나는 백일된 막내를 안고 모기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선 어머니와 두 아들이 수건을 덮고 자고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있다가 조용하게 말문을 열었다.
『여보, 내 짐작이랄까? 내 육감에 공산당이 나를 죽일 것 같소. 공산당이 인텔리는 싫어한다니 큰아이와 당신은 노동을 해야 될 거요. 밭에 김도 매고 말이야. 내가 죽은 후에도 낯선 곳에 가서는 남편 경력을 이야기하지 말고 살아요』
나는 깜짝 놀라 핀잔을 주었다.
『그런 불길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이런 대화를 들으셨는지 주무시던 어머니께서 일어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가 늙어서 너희들에게 짐만 되는구나. 이젠 기력이 없어 너희들을 따라갈 수가 없구나. 또 방해만 되고 하니 여기 남아 있겠다. 세상이 평정이 되면 만나자꾸나. 나는 강당골 老장로님 댁이 여기에서 가까우니 그 집에 가서 피난을 하겠다. 너희들은 걱정 말고 떠나가라』
우리는 안된다고 말렸지만 어머니께서 깊이 생각하신 결론이라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老장로님께 보내는 간단한 메모를 남편이 피우던 담배갑 종이에 몇자 적어서 어머니께 드리고 작별하였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서서 어서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가슴이 막히고 샘 솟는 눈물을 닦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정오쯤 되어서 우리는 장곡면까지 왔다. 그곳 村民(촌민)들은 전쟁이 걱정도 안되는 듯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인지 주고받으며 웃고들 있었다. 우리 가족은 무서웠다. 남편도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우리는 장곡면에 남편과 친분이 있는 지방 유지집을 찾아갔다. 그 집주인이 우리에게 정중한 식사대접을 해주어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後聞(후문)에 의하면 그 집주인도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산을 넘으니 청양면이었다. 임씨라는 분이 그곳에 사는데 당시 국회의원이었다. 남편은 그 집을 찾아볼까 했지만 나는 반대하고 빨리 부여로 향하여 가자고 했다.
청양면 앞에는 젊은 청년들이 꽤 많이 모여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들은 해방이 되면 면 창고 곡식도 모두 나누어 준다는데 왜 인민군을 피하여 피난을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고향이 부여라서 그리로 가는 것이라고 하며 그곳을 재빨리 떠났다. 그때는 인민군만 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삼중의 고생이 있었다. 첫째가 인민군, 둘째가 지방 빨갱이, 셋째가 공습이다.
고개를 넘어 부여로 가는데 논길에서 뱀 한 마리가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갔다. 나는 마음이 섬뜩했다. 마귀의 상징인 뱀이 왜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갔는가. 무슨 화근이 될 징조인지…. 초조했다.
무량사 주지 스님의 도움
우리는 온종일 걸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부여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으니 그곳 사람은 턱으로 저기라고 했다. 그렇게 간단히 가르쳐주는 곳이 왜 그다지도 멀고도 먼지….
둘째가 열한 살인데 아버지의 물병을 받아서 둘러메고 불평 없이 따라왔다. 천성이 순하고 말이 없으며 아버지를 좋아해서 같이 가는 것이 신이 났는지 그대로 따라왔다. 아버지는 셋째를 업었고 나는 아기를 업고 있었다. 장남은 기저귀 보따리를 둘러메고 따라온다.
우리는 그날 밤을 부여 무량사에 가서 쉬기로 했다. 무량사 주지가 내 사촌동생과 우리 집에 왔던 것을 생각하고 그리로 결정했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다. 그때야 무량사로 올라가는 입구가 보였다. 그길에는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사람들 말이 옆바위 나루턱으로 가는 버스라고 했다. 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이 동네사람과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저 군인에게 부탁하여 옆바위로 가자고 했다. 남편도 갈까말까하고 망설이는데 어떤 사람이 옆바위는 지금 건너편 국군과 이쪽 인민군의 전투가 터져서 나룻배 같은 건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무량사로 올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은 빨갱이가 보낸 선동자였던 것 같다. 그때 건너갔으면 부산까지 갈 수 있었겠지. 아니 고생이 되더라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자꾸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 가는 모양이다.
대포 소리는 이산 골짜기까지 간간이 들려왔다. 무량사를 찾아가니 주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방을 하나 치워 주어서 우리는 오랜만에 쉬게 되었다. 식사는 적은 양의 꽁보리밥에 반찬은 콩알 같은 감자를 소금에 삶아서 주는데 그것도 감사했다.
3일이 지났는데 홍성에서 같이 근무하던 李검사가 찾아왔다. 남편이 이곳을 가르쳐 준 것이다. 갈 곳이 없으면 오라고…. 주지께 사정을 말하니 쾌히 승낙했다. 이 산중에는 스님 행세를 하는 사람이 몇명 있는데 진짜 스님 같지는 않았다. 모두가 우리와 같은 처지였다.
며칠 지나서 李검사는 홍성에 가서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고 오겠다고 떠났다.
그 다음날 주지는 남편에게 이곳도 치안대가 조직돼 곧 조사가 있을 것 같으니 상좌아이를 데리고 논산을 지나서 고향길로 가고 우리 가족들은 차차 자기가 선처하겠다고 했다. 그 말대로 우리는 준비했다. 나는 남편에게 『여보, 만약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신을 찾으세요』 이렇게 당부하니 남편도 『응!』하고 대답했다. 주지스님이 치안대에 가서 가짜 증명서를 한 장 얻어 남편에게 주었다.
남편은 열일곱 살인 상좌와 같이 떠났다. 조금 있으니 홍성에 갔던 李검사가 되돌아왔다. 모든 유지들도 다 붙들려가고 치안대가 날뛰어서 할 수 없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이곳도 조사가 심하여 남편이 떠났고 李검사의 고향이 논산이라고 하니 그리로 떠나라고 말했다.
그때 내 마음도 불안해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먼저 떠났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였다. 그래서 李검사는 주지스님께 부탁하여 머리를 깎고 장삼을 한 벌 얻어서 입고 우리와 같이 절을 떠났다. 물론 李검사는 가짜증명서를 가지고 떠났다.
그분은 우리 가족 덕분에 화를 면했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훗날 우리 유가족은 그분에게 멸시를 많이 받았다. 이것이 세상 인심이지만….
무량사 주지스님은 내 사촌동생의 친구인지라 모든 편의를 도와주셨다. 지금도 건재하신지….
우리 가족은 李검사와 같이 무량사를 떠나 십 리쯤 되어 냇물을 끼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곳까지 나왔다. 동네에서 꽤 떨어진 곳인데도 치안대 완장을 두른 그 동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피난민을 조사하고 괴롭혀 말 한 마디라도 수상하면 무조건 잡아갔다. 우리들은 겁에 질려서 그 후미진 곳까지 왔는데 먼 곳에서 남편이 그 상좌와 돌아오고 있지 않은가. 나는 놀랍고 안타까웠다. 무사히 떠났다는 남편이 돌아오니 말이다. 치안대가 알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손짓으로 불렀다.
『왜? 돌아오세요』
『논산치안대에 끌려가서 조사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도로 서울로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나루를 건너서 오는 길이야』
천추의 恨
고지식한 남편은 그대로 순종한 것이다.
『여보, 왜 나루를 건너오는 거예요? 옆길 산으로 해서 대전으로 가시지 않고요』
나는 핀잔을 주고 너무나 안타까워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남편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루를 건너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 있으시오. 나는 청양에 가서 국회의원 임선생을 만나서 지혜를 짜보겠소』
단신으로는 행동하기가 편하다고 무량사로 가서 주지스님과 상의하여 그 밤을 지내겠다고 했다. 남편은 손수건이 없으니 천조각이 필요하다고 하여 나는 아기 기저귀를 하나 드렸다.
남편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기의 똥이 지워지지 않아 누렇다고 하면서 냇물로 내려가서 부비고 빨아가지고 길로 올라온다. 다급한 그 상황에도 침착을 유지하던 그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기가 울고 동네에서 사람이 나와서 이리로 오는 것을 보고 먼저 가라고 손짓을 했다. 李검사와 남편이 앉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우리 가족은 산모퉁이를 떠났다.
그때, 그이를 보내지 말고 함께 왔더라면…. 천추의 恨이여, 지금도 절실하게 느낀다.
얼마를 걷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큰아이를 달랬다. 다리가 아프더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때쯤 그이는 무량사에 갔었을 것이다. 우리 모자 다섯 식구는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보고도 이별의 인사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이별을 한 것이다. 원통하고 그 어리석음은 나의 가슴속에 영원히 영원히 깊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나는 길가에서 쉬면서 큰아이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또 애원했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한 그애는 싫다고 했다. 그때 내가 왜 죽을 힘을 다해 그이를 불러오지 못했는지…. 그 허무함과 그 어리석음…. 우리들은 바보였다.
치안대에 붙들려간 남편
해질 무렵에 옥산 李전도사님댁을 찾아갔다. 같은 종교이고 우리 교회에 오셔서 李전도사님이 설교하신 일도 있었다. 나중에도 그분은 우리 가족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그 집은 넓고 富農(부농)인 것 같았다. 나는 李전도사님과 상의하여 그곳 교회의 여집사 노인 한 분께 무량사로 가서 남편을 모시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노인은 쾌히 승낙하고 산길을 질러서 가면 금방이라고 하시면서 떠났다. 오후쯤 되어서 여집사님은 혼자 돌아오셨다. 무량사에 가보니 남편은 청양으로 떠나고 없더라고….
나는 가슴을 치며 울고 울었다. 왜 그다지도 슬픈지….
얼마 후 李전도사님댁에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동네 치안대가 조직되어 李전도사님이 종교인이라고 주목받아서 산으로 피하는 형편이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발붙일 만한 곳이 없었다. 모두가 열렬한 공산당이요, 사상가인 것이다.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남편은 그날 청양의 임의원 댁에서 치안대에게 붙들려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에 못 이겨 내가 홍성재판소에서 근무하던 아무개요라고 고백하여 그날 밤중에 홍성경찰서로 끌려갔다가 그 다음날 대전형무소로 넘어갔다고 훗날 들었다.
우리는 남편이 빨갱이한테 끌려간 줄도 모르고 그곳에서 더 있을 수 없어 고향을 향하여 옆바위 나루턱까지 왔다.
백마강은 조용하고 해는 뜨거우며 강가의 백사장은 반짝이는데 나룻배는 피난민을 건너주느라 바빴다. 강 한가운데쯤 와서는 사공할아버지가 『저기 모래사장에 검은 것이 사람이 죽은 시체요. 조금 전에 인민군이 이동네 사람을 무슨 이유인지 총을 쏘아 죽여서 저곳에 버렸다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동네는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큰애는 아빠 대신 셋째를 업었고, 둘째는 물병을 메고 나루를 건넜다.
날이 저물어 동네를 찾아가니 그곳이 「월계」라는 동네라고 했다. 그 동네 어떤 집 마당에서 모기와 싸우며 밤을 지내고 십자로라는 동네를 지나 논산수리조합까지 갔다. 가던 길에 우리는 너무나 무서워 배가 고프다던가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단숨에 간 것이다.
아이들도 긴장된 분위기를 느꼈는지 불평없이 잘 따라왔다. 수리조합 둑길에는 지프차와 전차가 동일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운전석만 푹 꺼지고 부서져서 얼른 보기에는 그냥 세워둔 것인 줄 알았다. 모두가 인민군의 차와 전차였다. 미군 폭격기가 폭격한 모양인데 얼마나 정확하게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놀라 그 길을 피하여 논두렁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촌동생집에서도 쫓겨나다
얼마 후 나의 시선은 한 곳으로 멈추었다. 논에서 물이 흐르는데 붉은 피 같았다. 논 옆에 풀로 덮은 흙더미를 발견하였다. 물이 줄줄 흐름에 따라 그 흙더미는 떨어져 나간다. 그곳에서 보인 것은 사람의 발이었다. 인민군 시체를 무더기로 쌓아 흙을 덮어둔 것이 논옆의 도랑물에 씻겨서 시체가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허겁지겁 갈림길로 나왔다. 길에는 「지뢰주의」라고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선두로 간 인민군이 뒤따라오는 인민군들을 위하여 새워 놓은 길 안내판이라고 짐작했다. 나는 기도하였다. 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아이들에게 길가의 풀은 밟지 말고 아무리 뜨거워도 길 가운데로만 다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무량사 주지스님이 가르쳐준 내 사촌동생의 처가댁이 근처에 있다기에 찾아갔다. 동생 내외는, 처가집 동네에서 떨어진 누구 집인지 모르는 곳에 있다고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안내해 주어서 찾아갔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동생네에서 지냈다. 다음날 아침 동생은 정색을 하고 어서 떠나라고 했다. 동네 치안대가 조사오면 누이는 죽는다고 하면서 자기도 산으로 피해 숨을 곳을 찾아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동생이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았다. 이 공포는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해질 무렵에 논산에서 대전으로 가는 길목인 고개에 있는 집에서 피난민 몇 명과 같이 한 방에 앉아서 밤을 새웠다. 무섭고 사람이 그리워서 한 방에 모였어도 인사도 없고 말을 주고 받지도 않았다. 그저 같이 앉아서 밤을 새웠다. 아침을 굶고 서대전까지 갔는데 대전에 폭격하는 것이 보였고 비행기 소리가 온몸을 몸서리치게 하였다.
서대전 근처에서 어떤 노인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주머니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대전시내로 지나가기가 너무나 위험하니 저 보문산 밑을 지나서 가시요. 좀 길이 멀더라도 폭격이 없으니 갈 수 있을 거요』
우리는 온종일 보문산을 뱅뱅 맴돌면서 대전시를 내려다보고는 서대전에서 동네앞쪽으로 갔다. 굶기를 밥먹듯하였고 말도 잊어버렸다. 그저 걸어가다 어디선가 사람을 만나 자고 하며 고향까지 가는 일만 생각하였었다.
그날 밤 머문 집 주인은 방에서 자고 우리들더러는 그 집 부엌에서 자고 가라고 하여 너무나 고맙고 마음이 좀 놓였다. 부엌바닥에 세 아이들은 누웠고 나는 아기를 안고 앉았는데 그 동네 치안대가 완장을 팔뚝에 차고 와서 그 집 안주인 남동생을 불러갔다. 안주인 말이 의용대로 나오라고 하여 불려 갔다는 것이다. 그날이 딘 소장이 포로로 잡혀간 날인 것을 후일에야 알았다. 우리 식구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고향으로 간 셈이다.
어디든지 해방됐다는 소문과 동시에 치안대가 생기고 치안대는 피난민을 쫓아내고 있었다. 너무나 빠르게 치안대가 조직되어 꼭 거짓말 같았다. 후일에 알았는데 간첩이나 비밀정보대가 피난민 속에 숨어 곳곳에 먼저 가서 소문을 내며 공산당과 사전준비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주여, 우리를 폭격이 없는 길로 인도하소서』
고향 영동을 가려면 보문산서 대전시 대동시장을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길을 물어보니 보문산 뒤 도라지 고개라고 하는 높은 고개만 올라가면 바로 세천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고개의 옆 골짜기는 수천명의 보도연맹 사람들 시체가 꽉 찼다는 것이다.
썩는 냄새가 너무 많이 나고 무덤도 못 만들 정도로 시체가 많아 도저히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시내를 거쳐 세천고개를 향해 갔다.
인동시장 옆 굴다리쯤 지나는데 인민군이 장총을 메고 앞으로 지나갔다. 우리는 무서움도 두려움도 마음에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큰 비극에 마음이 마비된 모양인지 나는 아이들을 재촉하여 걸어갔다. 그때 비행기가 날아왔다. 나는 폭격맞은 함석조각을 머리 위에 얹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큰 아이가 말렸다.
『엄마, 비행기에서 망원경으로 다 보고 있으니 함석조각을 버려요. 차라리 여자인 것을 보여요』
우리는 무방비 상태 그대로 폭격에 부서진 길에 우뚝 서 있었다. 반면 인민군은 육교 밑에 바짝 붙어 있었다. 비행기는 빙빙 돌아보더니 떠나갔다. 하느님의 도우심이다.
그리하여, 세천길로 달음박질치는데 세천길 앞에는 아직도 폭격이 계속된다고 들어 우리는 신작로 길을 가면서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폭격이 없는 길로 인도하소서』
국군의 후퇴를 도우려는지 그 수많은 비행기의 폭격은 참으로 어마어마하였다. 우리는 피난을 간 것이 아니라 전투를 따라 간 것이다. 후방은 조용하였지만 치안대라는 무서운 조직이 있어 도저히 숨어 살 곳이라고는 없었으니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아기를 업고 가고 있었는데 아기가 갑자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아기를 길에 내려놓고 보니 숨을 헐떡거렸다. 나는 당황하여 먹는 물을 찾아보니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논의물을 젖병에 넣어서 아기의 입에 대주니 마구 빨아 먹는다. 목이 말라 아기가 숨이 가빠서 그런 동작을 한 것이다. 아기는 숨을 돌렸다.
또다시 우리 가족은 걷기 시작하였다. 길 옆의 작은 초가집에는 인민군이 그 술집 색시들과 같이 누운 것이 보였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세천고개를 올라갔다. 그 아래는 기차 터널인데 인민군이 장총을 『탕탕』 쏘아댔다. 우리는 그저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서 그 굴을 지나니 신작로 길이 나왔다. 다행히 폭격은 맞지 않았다. 우리는 한숨을 돌렸다. 옥천읍으로 들어가는 동네가 텅 비었고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우리는 무서워 이원으로 가는 길로 그대로 달음박질쳤다.
십 리쯤 갔는데 중년쯤 되는 남자 한 분이 책상보에다 무엇인지 싸서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음박질쳤다.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지나가 마음이 좀 놓였다. 길 양쪽에 큼직하고 번쩍번쩍한 대포알이 수없이 버려져 있었다. 미군이 후퇴시 버린 것 같았다. 큰아이가 그것을 만져보려고 했다. 나는 깜짝놀라 소리쳤다.
『위험하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아라』
전투만 따라다닌 내 아들
대전서 아침부터 굶고 아이들을 재촉하여 이원까지 60리 길을 왔는데 하늘을 보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시고모님댁은 산으로 피난가시고 아무도 없었다. 그때는 피난이라면 산으로 가는 것만이 최선인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었지만 우리는 그 산으로 악을 쓰며 올라갔었다.
멍석으로 텐트를 치고 옹기종기 앉았다가 『고모님』 하고 부르는 통에 고모님은 놀라서 말을 못 이으셨다. 그래도 살붙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좋았고, 십여일을 무서움에 떨다가 친척의 얼굴을 보니 우리는 긴장이 풀리고 한숨을 돌렸다. 영동으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하였다.
공습이 없는 때를 틈타 보리밥을 지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오랜만에 먹는 밥이라 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기는 젖이 안 나와 숭늉물을 먹였다. 이틀을 지내고 나니 고모님은 우리들더러 떠나라고 하셨다.
『공산당이 산에 올라오면 피난민은 그 자리에서 죽인다고 하니 빨리 떠나거라』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 식구를 몰아내는 것이다. 참으로 막막하였다.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엄마, 오늘만 여기에 계세요. 제가 林山 할머니댁에 가보고 올게요』
高2인 큰애가 시집책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산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못 가게 막으려고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가슴을 조이며 그날을 그 산에서 큰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엄마-!』
큰아이가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반가움과 그 기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임산까지 왕복 200리길을 다녀왔어요. 관터동리 할머니댁까진 못 가고 장터에 할아버지 계시던 집만 가보았는데 피난 가시고 아무도 없었어요』
큰애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가던 길에 황간 철교 밑에서 폭격에 맞아 죽은 사람들 모두가 팔다리가 하나둘씩 떨어져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 무서워 마구 달렸어요. 얼마 후 또 비행기가 날아와 아카시아 숲속에 숨었더니 가버렸어요』
후일에 들었는데 황간에서 큰 전투가 있었고 국군이 후퇴한 날이라고 한다. 내 아들은 전투만 따라다닌 셈이었다. 200리를 하루 만에 다녀왔으니 그건 필시 겁에 질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마구 달리기만 했겠지.
『돌아오는 길에 길가 주막집 마루에 사람이 누워 있어서 쉴 수 있나 가보았더니 미군병사가 꼼짝도 않은 채 누워 있었어요. 죽은 것 같아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무서워서 돌아나오는데 발 밑에 카드가 한 장 있길래 주워왔어요』
큰아이는 성경구절이 인쇄된 카드를 나에게 보였다.
「시편 23편, 하느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네…」 라고 번역해 주며 『엄마에게 보이려고 주워왔어』 했다.
그 다음날 아침 고모님 말씀대로 떠나기로 하고 아이들을 들쳐 업고 산을 내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고모님은 통곡을 하고 계셨다. 우리는 산길로 논길로 걸었다. 고모님 말씀대로 큰고모님이 십 리쯤 되는 덜역동네서 피난한다는 곳을 찾아갔다. 그 동네는 집집마다 피난민으로 가득찼다. 이원서 대서하는 아무개라고 묻고 물어서 찾았다.
큰고모님은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우리를 마당 한구석에 앉히시고는 저녁밥을 자기들 먹는 중에서 몇 숟갈 되게 주셨다. 아이들에게 먹이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웠다. 하늘에 별은 총총하고 여름밤인데도 이슬이 내려 습기 때문에 아이들의 옷들이 젖어, 나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그 밤을 새웠다. 아침에 큰고모님은 어디를 가던지 듣는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인민군 보고 울어버린 둘째아이
『떠나거라. 낯선 피난민을 보면 손톱을 빼는 등 취조한다고 하는구나. 내가 어찌 그 꼴을 보겠느냐. 임산은 산중이니 인민군이 없을지도 모르고 대대로 살던 고향이니 설마 큰일이야 없을 것이니 가는 것이 좋겠다』
그 동네를 떠나오는데 큰 길에는 인민군이 장총을 메고 설쳐 너무나도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 어느 길로 가야할지…, 앞이 캄캄했다. 좌우간 아침만 되면 떠나는 것이 우리 식구의 생활방식이 되었다. 그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전투 중에는 큰 길로는 민간인을 왕래 못하게 하니 이 산을 넘어서 ○○동네를 지나 영동시내로 들어가지 마시고 설천으로 가서 그 뒷산 고자리고개만 넘으면 고자리요. 20분만 가면 임산이니 그리고 가는 것이 안전할 거요』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원서 큰길을 옆에 두고 산을 넘어서니 골짜기 논에는 벼가 퍼렇게 서있고 동네는 텅텅 비어 있었다. 빈 집은 언제 보아도 무서웠다. 그 골짜기 논을 끼고 빠져나오는데 길고도 길었다. 햇볕은 쨍쨍 쪼이고 바람 한 점 없는데 사방이 고요해서 우리가 헐떡거리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이다. 간간이 까마귀가 『깍-깍』 울고 『퍼더덕-』 하면 그렇게도 무서울 수가 없다. 어떻게 된 셈인지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안보였다. 큰 길은 전투용이요, 동네마다 피난하여 한 군데에 모여 있으니 빈 골짜기는 죽어도 살아도 소리쳐 보아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 긴장된 골짜기를 3시간이 지나서야 빠져나왔다. 산도 끝이요, 골짜기도 끝이요, 큰길이 훤하게 보였다. 아이들도 말 한 마디 없다가 둘째가 『엄마, 저기가 신작로인가 봐』 했다. 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등에 업은 우리 아기가 얼마나 순한지 아기가 없었어도 걸어오는 데 무척 불편했을 텐데 神의 도움인지 아기는 한번도 울지 않았다. 셋째도 형이 업고 오는데 아무 말도 없이 형의 어깨만 붙잡고 울지 않았다. 환경에 맞추는 것도 신의 은혜라고, 나는 기적이라고 늘 생각하고 감사했다.
그때 건너편에서 사람이 보였다. 지게에 무엇인지 짊어지고 지나간다. 무척 반가웠다. 나는 그 사람을 불러 고자리고개로 갈 수 있는 설천동네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 농부는 대답 대신 턱으로 『저기요』하고는 지나갔다. 우리는 큰길을 건너서 논길을 또 미친 듯이 걸어갔다. 얼마 후에 보따리를 둘러멘 남자들이 먼 곳에서 그 골짜리로 가는 것이 보였다. 설천이 저 길로 가는가보다 하고 짐작하고는 해 지기전에 어서 가자고 아이들을 재촉했다.
그때 인민군이 그 골짜기 길에서 이리로 오고 있었다. 우리와 마주쳤다. 나는 태연히 길을 비키었다. 큰아이도 나를 따라 비키었다. 그런데 둘째가 웬일인지 그 길에서 꼼짝도 안하고 섰다.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니 엉엉 울어댔다. 인민군이 무서워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애가 탔다.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아이는 울기만 했다. 큰아이가 돌아와서 동생을 마구 때려준다. 억지로 끌고 갔다. 속히 그곳을 지나갔는데 지금도 그 아이가 왜 울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저기가 고자리야?』
그 길고 긴 골짜기를 찾아가니 설천동네가 있었다. 그런대로 목적지까지 왔으니 반가웠다. 그 동네는 영동읍에 살던 피난민으로 꽉 차 있었다. 좌우지간 온종일 무인도 같은 길을 걸어 왔는데 사람 구경을 하니 살 것만 같았다. 마당 구석에 아이들을 앉혀 놓고 집주인 아낙네에게 양재기를 빌려 몇몇 집을 찾아가서 저녁식사 중에 먹던 밥을 얻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그때만 해도 처음 당하는 때라 인심이 후해서 얻어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물을 많이 퍼 먹어 처음으로 배가 불렀다. 모기가 깨물든 말든 사람들과 같이 있고 고개만 넘으면 고향땅이라서 그런지 안심이 돼서 그대로 마당에 쓰러져 잤다. 아침에도 동네 집에 가서 보리밥을 좀 얻어 아이들과 먹고는 고개를 쳐다보며 일어섰다.
『한시라도 빨리 고향인 임산에만 가면 살 수 있겠지…. 고개는 앞에 있다』
참나무가 빽빽하고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길은 없는데 전투가 있던 날 남자 두 사람이 올라갔다고 동네사람이 말했다. 풀도 키만큼 크고 나무는 빽빽하여 도저히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곳 사람 말이 그대로 직선으로는 도저히 못 가니 지그재그 형식으로 옆으로 가서 또 반대로 옆으로 가면 나뭇가지가 꺾인 데가 나오니 그곳으로만 가면 산꼭대기가 나온다고 했다.
나는 기도했다. 『길을 인도하소서』라고. 풀 없는 돌을 밟고 참나무를 헤치고 옆으로 올라가면 나무가 꺾여 있어 그것을 표적으로 해 반대로 또 올라가면 아래가 보이고 차츰 산으로 올라가는 셈이다. 그 고개까지 올라가는데 큰애는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해서 쉬고 또 쉬고 했다. 쉬는 곳도 나무 속에서 쉬어 동서를 분간 못했다. 정오도 지나고 오후 몇시인지 됐을 때 우리는 드디어 산꼭대기에 도달했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고자리 동네를 본 순간 그립고 반가워 큰애는 소리치고 셋째는 『엄마』 하고 부르며, 둘째는 내 치마를 붙잡고 『저기가 고자리야?』 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도 무서움도 없고 그저 고향에 다 왔다는 생각뿐이라 솔밭을 헤치고 동네를 바라보며 마구 내려왔다. 치맛자락은 찢기고 내가 신은 고무신이 코가 찢어져서 할 수 없이 벗어 던지고 양말 신은 채로 걸었다.
어둠이 깔려서 겨우 한 집을 찾아 자고 갈 것을 청하니 뜰에 있는 돗자리 위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종일 굶은 것도 잊어버리고 누웠다. 모기가 손과 발, 얼굴 할 것 없이 마구 물어 뜯고, 산중기후라 쌀쌀한 습기가 입은 옷들을 썰렁하게 했지만 우리는 죽은 듯이 잤다.
아침에 집주인이 겉보리를 맷돌에 갈아서 죽을 끓인다고 이웃집 맷돌 있는 집으로 갔다. 이 동네는 옛적부터 아침 한 끼 밥을 먹으면 점심, 저녁은 나물죽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들었는데 과연 먹을 것이 없었다.
임산리 20리이다. 우리는 그대로 떠났다. 맑은 공기와 옥같이 맑은 냇물에 아낙네가 개를 잡아서 가죽을 불에 그을려 그 가죽을 바윗돌에 비벼가며 씻고 있었다. 아마 먹을 것이 없어 개를 잡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이 왜 그렇게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지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한 점이라도 먹으라고 준다면 삶을 것도 없이 그대로 먹을 것 같았다.
아이들도 무척이나 시장했겠지만 무섭고 외로우며 고생된 전투 사이로 지나온 여행이라 먹을 것이 없어도, 다리가 아파도 아무 말도 없이 엄마가 가자면 가고 서라면 섰다. 시냇물을 마시고 아기에게도 먹였는데 설사도 배앓이도 안했다. 신의 은총이요, 기적인 것이다.
당숙모 집을 찾아가다
임산으로 가는 길은 산골로 냇가를 따라서 계속 빠져나가는데 산모퉁이를 돌고는 주저앉아 흙밭에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보아도 산중이요, 여름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느긋했다. 고향집에 가까이 왔으니까 쉬고 또 쉬며 20리길을 온종일 걸어서 어둠이 깔릴 때 임산에 도착했다.
냇물을 건너 관터로 가야 하겠기에 우리는 어두운 냇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발이 부르트고 다리는 절뚝거렸다. 장터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칠흑같은 밤이었다. 그때는 다리가 없었다. 깊은 곳도 어디인지 모르고 어디가 물살이 센 곳인지 짐작도 못하고 무조건 건너갔다. 좁은 길을 천방지축으로 내가 앞장서고 큰아이는 뒤에서 두 아이를 보호하며 그곳을 지나 드디어 도착했다. 앞으로 닥칠 모든 시련을 상상도 못하고 그저 갈 집이 있고 길거리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지 않아도 되는 고향으로 왔다.
긴장이 늦추어져서 그런지 장터의 조그만 냇물을 건너서 산밑 시어머니댁까지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쪽 당숙모가 사는 오두막집을 찾아갔다.
당숙모는 너무도 놀라서 귀신이 아닌가 했다. 그집도 숙부는 우리 시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가고 어린아이들과 숙모만 계셨다. 이 집은 가난하여 평상시에도 굶주리는 집이었다. 단칸방인데 숙모님은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시고 누우셨다. 우리는 손님이라고 그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배 고프다고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볼 시절이 아니라 피차 말 없이 드러누웠다.
얼마 후 목이 말라 참을 수가 없었다. 다리와 허리가 결리고 아파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물을 떠 먹으려고 부엌으로 갔다.
한참 만에 정신이 났는데 부엌에 나가서 그대로 쓰러져 기절한 모양이었다. 나는 부엌바닥에 누워 겨우 모기소리만하게 숙모님을 불렀다. 숙모님은 놀라 나를 부축해 뜰에다 앉히고는 허기가 져서 그러니 이것을 마시라고 했다.
그릇에 입을 대고 마시려고 하니 무엇인가 쿡쿡 찌르고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이에요?』
『통보리를 맷돌에 갈은 것인데 죽을 끓여먹는 가루야』
어디를 가도 식량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요즘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고 상상도 못하는 그 환경들, 그것이 그때의 실정이요, 현실이었다. 그러나 미개함과 가난 속에서도 순수성은 있었다.
『왜 왔느냐, 그곳에서 살지…』
그때부터 나는 병자가 되었다. 아침에 불쌍한 우리 아이들을 앞세우고 작은 냇물을 건너고 논두렁을 지나 산밑의 우리 시어머니댁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들어가니 시어머니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우리 가족임을 알고 마중나오셨다.
『왜 왔느냐. 그곳에서 살지…』
이것이 생명을 걸고 십여 일을 걸어서 온 고향집에서의 첫 환영의 인사말이었다. 우리 식구는 열적고 실망이 돼 마루에 힘없이 걸터 앉았다.
바로 그때 어디서인지 『탕-』 하는 총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손들엇-』 하면서 장총을 내 가슴에 겨눈다. 너무나 놀라 네살 된 우리 셋째까지 조그만 손을 들었다. 총든 청년은 이 마을에 사는 재철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부모는 우리집에 와서 일을 해주고 품을 파는 가난한 가정의 아들이다. 재철이는 나를 보고 물었다.
『남편은 어디 갔소? 바른대로 말하시오』
나는 입이 굳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겨우 대답했다.
『홍성에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들은 임산으로 왔소』
나는 선뜻 둘러댔다.
『남편은 그대로 그곳에서 일하라고 인민군이 명령해서 그대로 근무하고 우리 식구는 폭격이 너무 심해서 고향에 가 있다가 완전 해방이 되면 그때 오라고 했어요』
『인민의 피를 많이도 빨아 먹었지…. 치안대로 갑시다』
뒤에 안 사실인데 우리가 그곳에 온 것을 알고 치안대에 연락하여 우리집 뒤에는 총을 멘 치안대가 둘러싸고 우리를 심문한 것이라고….
나는 아기를 업고 세 아이는 집에 두고, 신발이 없으니 양말 신은 맨발로 장터에 있는 前 지서인 치안대까지 따라갔다.
가보니 다른 몇사람들도 붙들려와 있었다. 치안대장이란 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후에 알았는데 대학생이 피난가다가 후퇴를 못하고 감투를 썼다고 들었다. 남편의 직업과 왜 고향에 왔는지 심문했다. 우리집에서 치안대 재철이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실이냐고 다그쳐 사실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등에 업고 있는 아기의 궁둥이를 꼬집었다. 아기는 아파서 사정없이 울었다. 너무 요란하게 우는 바람에 다시 부를 때까지 집에 가서 있으라고 하면서 꼭 아무데도 가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반공호에 가뒀는데 나는 아기를 울린 덕분에 풀려난 것이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난 것이다. 냇물을 건너 돌아오는 길에 남편친구 부인을 만났다. 그분도 붙들려 갔다가 대기 명령으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시냇가에 돌짝밭에는 시커먼 송장이 버려져 있었다. 윗마을 사람인데 인민군에게 대답을 잘못하여 반동분자라고 몰려 총살당했다는데 시체도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살벌함은 어디로 가도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다. 전쟁이 터진 직후에 그렇게도 빨리 치안대가 조직이 되어 이 산골짜기 구석까지 공산당의 조직이 신속하게 퍼져 있는 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사상이란 것, 이데올로기란 것은 사람의 눈을 뒤집고 인정도 없이 오로지 충성뿐이었다. 온몸을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은 무서움을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이해 못할 것이다.
비행기 공습, 식량난, 정치불안과 공포의 三重苦
식구들은 피난을 다 가고 남은 식구라고는 시어머니 한 분뿐인데 이분이 세상 물정을 알지 못했고 이웃들도 모두 변해서 잘 살던 사람들은 죄인이요, 남의 집 머슴 살던 자들은 큰소리를 치는 판이었다. 총살한다, 죽인다는 말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 대상자였다. 밤중에 불려가면 그만이었다. 비행기 공습, 식량난, 정치불안과 공포라는 三重苦(삼중고)가 우리를 묶어두니 갈 곳도 없고 그 심적 고통은 참으로 무서운 고문이었다.
시어머니는 매일매일 살던 곳으로 가라고 하신다. 시어머니는 남편이나 우리 속 사정을 이야기해도 이해할 수 있는 분이 못되고 만약 우리가 살던 곳으로 가면 죽는다고 하면 죄인인 줄 알고 떠들어댈 정도의 분이셨다. 죽어도 할 수 없다고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시어머니는 점쟁이에게 점을 보겠다고 그 귀한 보리쌀을 한 사발이나 주고 점을 본 모양이었다. 점쟁이가 막내 아들은 인민군 식사당번을 하고 있는데 잘 지낸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아주 기뻐하셨다. 그런 시골할머니를 모시고 혹시나 큰아이나 내가 말을 실수할까봐 조심조심했다.
아침 한 끼는 보리밥 두 그릇쯤을 식구대로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물론 점심은 없었다. 저녁은 겉보리 한 술잔에 물을 축여서 절구공에 넣고 찧으면 그 보리가 가루가 된다. 그것을 솥에 붓고 물을 얼마든지 넣고는 된장을 풀고 호박잎새를 한 광주리 비벼 씻어서 넣어 끓이고 또 끓이면 보릿가루가 둥둥 뜨고 퍼런 물에 호박냄새가 나는 쇠죽보다 더 멀쭉멀쭉한 죽이 된다. 그 죽 한 그릇을 먹는 것이 이 집의 저녁 식사였다. 셋째는 호박잎새가 껄끄러워서 수저로 뒤적뒤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부족하여 허둥지둥 먹어댔다.
어미가 먹는 것이 부실하니 젖이 나오질 않았다. 아기는 안고 있으면 울었다. 배가 고픈 것이다. 등에 업으면 고개를 엄마 등에 대고 울지 않았다. 아기 배가 엄마 등에 딱 붙어 배고픔을 좀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저녁 잘 때까지 계속 업고만 있었다. 평생 아기 한번 업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환경이란 것이 나에게 순종이란 것을 가르쳐주었다. 용케도 참은 것이다. 보리밥물을 한 종지씩 받아서 아기 젖병에 넣어서 빨리면 젖꼭지가 떨어지도록 빨았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낮에는 등에 업혀 있지만 밤이 되면 방바닥에 뉘여도 그대로 새록새록 잘잤다. 이런 것도 神의 은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셋째하고 아기는 병도 안 나고 뼈와 가죽만 남은 것 같아도 그런대로 살아갔다. 밤이면 나는 등에 아기가 없으니 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틈을 타서 방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서 오래오래 기도했다.
『주여! 이 환란 중에 이 아이들이 비록 먹는 것이 부실할지라도 다니엘에게 하시던 異蹟(이적)을 우리에게 주시사 강건하게 하시고 내 남편을 다시 만날 때까지 생명을 해함없이 지켜주소서. 또한 이 국가의 존망을 주께서 건져주소서』
바느질삯으로 번 보리 한 말
7월 말경이 되니 식량은 부족한 것이 아니고 아예 동이나고 없었다. 감나무 밑에 가서 꼭지 빠진 풋감을 주워다 아이들에게 주면 껍질도 벗기지 않고 먹었다.
이 동네 사는 사람 중에 큰아들이 6·25전부터 공산당으로 활동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이 동네 부녀동맹위원장이 되었다. 그집 큰아들이 굵직한 벼슬을 한 모양이었다. 그 가정은 경사가 난 것처럼 좋아하였다. 추석이 가까우니 손주들과 작은 아들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그 폭격 중에 옷을 파는 사람도 없고 양복을 만들려고 하는데 촌사람들 중에 바느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무명베의 양복감을 한 아름 안고 우리집에 왔다. 시어머니는 반가워하셨다.
『이댁 자부가 바느질 솜씨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집 아이들 양복을 좀 부탁하러 왔소. 국민학생 남자복 네 사람 것이라네』
나는 기뻤다. 그러나 실도 없고 재봉틀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니 재봉실은 어디가도 구할 수 없으니 옷 깁는 실로 손으로 꿰매달라고 했다. 선선히 대답하고 그 아이들 헌옷에 치수를 맞추어 재단을 해가지고 아기를 업고 우물가에서나 부엌 앞에서든지 그늘진 곳이면 서서 그 학생복을 열심히 꿰맸다. 바늘에 찔려서 둘째 손가락이 연일 피가 났다. 그러나 결국 네 벌을 손으로 바느질을 해서 다 만들었다. 그 위원장은 좋다고 칭찬하며 보리쌀을 한 말 보내 주었다. 죽거리도 없던 때라 아이들은 너무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큰아이가 졸라댔다.
『엄마 한 끼 먹고 굶어죽더라도 한번 잔뜩 밥 좀 먹어봐요』
나는 보리쌀을 한 바가지 퍼서 밥을 지었다. 된장을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는 좋아했다. 그동안 굶주림이 이루 말할 수 없다가 피난 나온 후 처음 먹는 밥이라 그 위원장이 고마웠다. 추석이 가까운데 우리 집은 먹을 것이 없었다. 시어머니는어서 떠나라고 성화다.
『이 폭격에 어디로 가서 곡식을 구하겠느냐? 죽을 때가 되면 그대로 이 산 밑에서 죽겠다. 너희들은 애비가 고생되게 혼자 두지 말고 살던 데로 가거라』
광에는 감자가 조금 있는 모양인데 막내 아들이 돌아오면 먹는다고 광문을 꼭 잠그고 누워 계신다. 이렇게 욕심으로 일관하던 시어머니가 그렇게 무던한 내 남편같은 인격자를 두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도하던 끝에 결심했다. 천지가 혼란하고 가족이나 윤리도 없는 이 환란 중에 내가 체면이나 자존심을 앞세울 때가 아니다. 약한 생각은 하지 말고 고통을 받더라도 어린 자식들을 살려야 나를 믿고 있는 남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용기를 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거지질을 하다
아침에 아기를 들쳐업고 벽에 걸린 바구니를 들고 앞동네로 갔다. 추석이 가까워 일손이 바빠서 그런지 모두 다 아침을 일찍 먹었다. 아무 말 없이 빨갱이 감투 쓴 집에 찾아가서 부엌 앞에 서 있었다. 그집 어머니가 쳐다보더니 자기가 먹던 밥을 바구니에 쏟아주고 또 된장국에다 밥을 몇 숟갈 말아서 나에게 내밀며 먹고 가라고 했다.
나는 돌아서서 그 국에 말은 밥을 퍼먹고 그 집을 나왔다. 몇 집을 거치니 너무나 엄청난 내 행동에 동네 사람들이 여지없이 무조건 있는 대로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시어머니께 상을 차려 드리고 아이들에게도 주었다. 시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셨다.
『남편에게나 갈 것이지 왜 거지짓을 하느냐. 나는 안 먹는다』
무리도 아닐 테지. 이 지방에서는 유지에 속하는 축인데 며느리가 걸식을 해왔으니 먹을 수 없었겠지…. 그러나 나는 당당했다. 빨갱이들이 볼 때 반항심이 적어 보일 것이고, 이 어지러운 시기에 내 변신이 우리 식구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는 자신이 섰다.
『엄마, 면사무소에 청년 학생들이 모여서 선전벽보를 그린다고 하는데 나도 가서 그림을 그려주고 배급보리쌀을 받아올까? 그림은 나도 자신 있어』
큰아이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좌우로 저었다. 그 행동 속에는 복잡한 사연이 가득했지만…. 아침에 매일 같은 집으로 가서 구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큰 동네로 가보자 하고 용기를 냈다. 논길을 지나서 한참 가고 있었다. 그때다. 인민군 4명이 저쪽 산으로 올라가는데 배낭도 없고 바지는 물에 빠져서 척척 감기고 대포를 분해하여 한 토막씩 둘러메고 골짜기로 올라갔다. 어디선가 먼 곳에서 대포 소리도 들린다.
「옳다. 국군이 가까이 왔구나. 인민군이 후퇴하느라고 저 대포를 메고 가는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그날 아침 나는 다리가 떨려서 구걸을 중지하고 집으로 왔다. 이 기쁜 생각을 표시할 데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건너편에 사시는 당숙모가 아이를 업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당숙모는 입을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질부, 국군이 올라온데. 그래서 인민군이 도망을 간데나봐. 장터에 소문이 났어. 장터에 사는 명환이도 어디론가 간다고 짐을 꾸린대』
나는 벅찬 가슴을 감추고 안 그런 척했다.
『아직 몰라요. 그저 아무 말씀 마시고 지켜보시기만 하세요. 인민군도 대단한데 쉽게 도망을 가겠어요』
한편 나는 걱정이 되었다. 큰아이가 열일곱 살인데 만약 인민군이 후퇴할 때 끌고가면 어쩌나…. 나는 큰아이를 불러 나무 밑에 감을 주우러 가는데 따라오라고 했다. 감나무 밑에 아이를 앉히고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너는 배웠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엄마가 믿고 말하는데 지금은 제일 무서운 것이 동네 빨갱이야』
그후 우리 모자는 온종일 콩밭에서 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뒷문을 열어두고 만약 빨갱이들이 우리를 찾으면 큰아이는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산으로 도망가라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내가 혼자서 있으리라 마음을 굳히고 있었지만 그 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서 수군수군댔고 마을 전체가 술렁거렸다. 우리집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선 시급한 것이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었다. 국군이 대전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굶어도 구걸을 하지 않았다.
다시 남편 꿈을 꾸다
그날 밤이었다. 남편이 의사들이 사용하는 거울을 머리에 쓰고 환자의 입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집게로 내 입 안의 어금니를 쏙 빼는 것이다. 나는 『악』하고 놀라 깨었다. 악몽이었다. 그날 밤부터 남편의 生死(생사)가 걱정되고 불안하여 일손이 안 잡히고 좌불안석이었다.
좌우간 이 집을 떠나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신속히 알 수 있는 곳으로 갈 생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무조건 장터로 나왔다.
장터 면사무소 앞,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살던 큰 집이 있었다. 그 집은 부녀동맹사무소로 사용했는데 텅 비었고 방들은 하나같이 몸둘 곳이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우선 방을 청소하고 아이들을 놀게 했다. 먹을 것을 구해야 되겠는데 막연했다. 아랫방을 들여다 보니 인민군이 도망가면서 두고 간 모양인데 그동안 집집마다 보릿가루를 만들어 거둬 갔던 보릿가루가 몇 주머니 남아 있었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구세주 같았다. 그 가루로 죽을 쑤었다. 우리는 보리죽이나마 배를 채우고 처음으로 장판방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그 밤에 별안간 대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간다고 대답을 하고는 큰아이에게 뒷문으로 나가서 숨으라고 말하고 아기를 안고 대문을 열었다. 인민군 두 명이 들어오면서 호통을 친다.
『왜 빨리 문을 안 열었소?』
『저는 피난민인데 자느라고 몰랐어요』
『아랫방에 보릿가루 주머니가 있으니 가져오시오』
『네? 그런 게 있었어요?』
인민군은 아랫방에 그 보릿가루 주머니를 둘러메고 나와 나에게 먹으라고 한 주머니 꺼내주고는 가 버렸다. 그 몇분 안되는 시간에 꼭 죽을 것만 같아서 벌벌 떨었다.
그날밤부터 며칠 동안 어둡기만 하면 집 앞에 길이 꽉 차게 사람들이 지나갔다. 남자, 여자, 아기를 업은 여자, 인민군도 있고 평상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낮에는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태백산을 따라 이북으로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방 빨갱이들이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지나가다 면사무소 창고에 가서 부잣집, 반동분자의 살림을 압수한다는 명목으로 코트, 털옷, 겨울옷을 전부 짊어지고 갔다.
밤에는 인민군공화국
밤새도록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백 명인지 수천 명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식구는 무서워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지방 빨갱이들이 태백산 능선을 타고 이북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낮에는 경찰, 미군과 국군이 전차까지 끌고와서 산으로 대포를 쏘았다. 그러나 해가 지면 후퇴해 동네 민간인만 남았다. 밤이면 인민군이 지나가면서 태극기가 보이면 누가 달았냐고 욕을 하며 죽인다고 호통을 쳤다. 그러니 밤에는 인민군 공화국이었다. 음력 8월20일쯤인데 논에 벼이삭이 누르스름하게 익었다. 손으로 벼알을 눌러보면 액체가 아니고 쌀이었다. 시아버지가 심은 벼도 누렇게 됐다. 나는 논에 가서 손으로 벼를 훑어 불을 때고 솥에다 볶았다. 그것을 절구통에 넣고 찧으니 쌀동가리가 나와서 죽을 쑤어 먹었다.
미군이 전차로 처음 이 산골로 들어오는데 나는 반가워서 울었다. 자꾸 눈물이 났다. 미군은 나에게 양담배를 한 갑 던져 주며 『오케이?』 했다. 그 담배는 내 옆의 아랫방 남자가 낼름 주워갔다. 하루는 인민군 한 명이 도망쳐 동네로 내려왔다. 그 사람을 뒷방에 재워 주었다. 다음날 경찰이 데려갔다. 아마 포로수용소로 갔겠지. 신고 안했더라면 민간인이 됐을 텐데….
남편의 죽음
하루는 대전에서 왔다는 남자를 만났다.
『대전형무소는 빨갱이들이 후퇴시 우익 사람들을 죽여서 우물에 버려 우물에는 시체가 마치 김치나 단무지처럼 가득 찼어요. 성당 뒤에 있는 형무소 뒷산 골짜기는 사람들을 꿇어앉혀 죽여서 시체가 산같이 쌓였는데 모두들 상해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어 그대로 국군들이 묻어 버렸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요동을 쳤다. 이렇게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대전을 거쳐 홍성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그 다음날 신발이 없어서 거름 무더기에서 고무신 한 짝을 주워 흰 것과 검정을 짝짝이로 신고 아이들을 앞세워 황간으로 걸어나왔다. 매곡을 지나 안골쯤 오니 피난갔다 돌아오시는 시아버지를 길에서 만났다. 나는 경황이 없어 반가운 줄도 모르고 할 말이 없어 그저 쳐다보고는 홍성으로 간다고 말씀드렸다. 시아버지도 그것이 좋겠다고 어서 가라고 하셨다.
황간에 가보니 객차는 없고 군수물자를 실은 화물차만 가득했다. 역전에 가서 동정을 살펴보니 지프차만 실은 기차가 정차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 기차에 올라탔다. 빈 자리에 아이들을 앉히고 밖의 동정을 살필 때 기차가 떠났다. 하룻밤이 지난 후 대전에 도착했다. 우리는 재빨리 내렸다. 이렇게 타고 내리는 것이 그 시절의 교통수단이었다.
나는 무조건 대전재판소로 갔다. 아직 정돈이 안되었고 어수선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남편과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다.
『남편을 찾으러 왔어요』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우리들은 직장이 대전이라서 교통이 편해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대전이 9월25일에 탈환됐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경찰관들과 함께 와서 형무소로 가보니 인민군이 수백 명을 죽였는데 성당 뒷산에 가보니 시체가 이루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형무소 사무실에서 수감자 명단서를 발견하여 살펴보니 홍성, 천안재판소 사람들 명단 중에 한형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형자 명단은 그 놈들이 아예 작성을 안했는지 없었습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도 엄청난 사실에 나는 정신이 없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짝짝이 고무신을 신고 지청장댁을 찾아가니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말도 없이 현관에서 찾으니 부인이 내다보다 쑥 들어가고 만다. 나는 소리쳤다.
『내 남편은 죽었소. 당신들이 최후까지 직장을 死守(사수)하라는 무전을 친 덕분에 말이오. 당신네들은 닭까지 싣고 갔다지요』
악을 썼다. 보초 서는 헌병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큰아이가 가자고 했다. 뒤돌아서 기차역으로 가면서 『죽었다고, 죽었다고, 죽었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아이들이 있다. 이 무거운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울 시간도 없다. 뒷일 처리를 생각해야지…』
먹지도 못한 몸에 여름옷을 입은 그대로 9월에 군수물자를 실은 화물차에 올라탔다. 화물차는 뚜껑이 없었다. 머리는 마구 날리고 옷은 돌돌 말렸다. 아기는 울고 아이들은 눈에 까만 것이 멍하니 앉았다. 열한 살짜리 둘째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에 철든 형보다 먼저 통곡을 했다.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다.
『아버지- 아버지-』
둘째는 아버지와 뜻이 잘 맞아 아버지가 낚시를 갈 때는 꼭 같이 가서 다래끼를 메고 오며 신나서 좋아하던 아이였다. 둘째가 너무도 서럽게 우는 통에 나는 눈물보다 가슴이 답답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비수로 이 가슴을 찔러보면 피가 날까, 아플까….
남편의 집무실
군용기차는 천안으로 갔다. 나는 아이들을 재촉하여 천안에서 내렸다. 천안서 의사이신 金장로님댁을 찾아갔다. 친절히 대하는데 그 집도 빨갱이들에게 다 압수당하고 사람만 남았다고 했다. 몇 시간 쉬었다가 홍성으로 길을 떠났다. 그 길에는 군용차도 안 지나가 걸어가야만 했다. 예산까지 가서는 어떤 동네에 가니 사랑방에 피난민이 몇 사람 자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방 구석에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이들에게 밥알이 조금 둥둥 뜨는 숭늉 한 사발을 얻어주고는 또 걸었다. 40리길을 걸어서 신곡리까지 갔다. 10월1일 정도인데 무척 추웠다. 큰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가 여기 길가집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계시면 제가 혼자 홍성에 들어가서 정세를 살펴보고 올게요. 너무 외관이 초라하니까 집에 옷이 남아 있으면 가져올게요』
세 아이와 나는 길가 주막집 방에서 쉬고 큰애만 보냈다. 몇 시간 후 아이가 돌아왔는데 교회 金전도사님과 같이 왔다.
『우리집에는 꼬챙이 하나 없이 지방 빨갱이가 다 가져갔어』
金전도사님이 자기 솜바지와 치마 목도리를 가지고 오셨다. 그분 집도 비워두었던 사이에 옷 상자가 다 털렸다고 하셨다.
나는 그 옷을 얻어 입고 그 짝짝이 고무신을 신고는 홍성 우리 집에 갔다. 가보니 사택인데 임시 서기라는 사람이 살면서 비워줄 생각도 안했다. 할 수 없이 그 옆 적산집을 우리가 한 채 얻어가지고 들어갔다. 이웃과 재판소 직원들이 모두들 왔다갔다. 그러나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너무나 큰 일 뒤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홍성의 피난 못 간 지방유지와 관리들은 모조리 지방 빨갱이들에게 430명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알던 사람은 얼마 없었다. 또 국군이 이곳을 탈환할 때 좌익 중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은 죽고 식구들은 도망가 전부 빈집이라고 했다. 읍장이 인사차 왔다가 우리집에 이불은커녕 입을 옷도 없는 것을 보시고는 빨갱이가 도망간 집에서 주운 광목 홑이불 하나와 담요 하나를 보내주었다.
이틀쯤 되어서 강당골에서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오셨다. 우리 친정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사위가 죽은 줄도 모르시고 밭에 콩잎새도 따주시며 3개월을 계셨다고 하셨다. 하루는 그 장로님이 오셔서 『난리가 끝났으니 할머니께서는 홍성으로 가 보세요. 딸이 돌아왔을 거예요』라고 해서 빨리 오셨다고 하셨다. 어머니도 옷이 없으셨다. 담요는 아이들 윗도리를 만들어 입히고 광목 홑이불은 내 치마 저고리를 만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밤새도록 바느질을 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정신을 집중시켰다.
어머니께서 몸이 가려워 죽겠다고 하셔서 속옷을 벗겨보니 이게 웬일인가, 온몸에 이가 득실거렸다. 밤새도록 이를 잡았다.
11월에 재판소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죽은 네 사람들의 위령제를 지내주고 유가족에게 30만원씩 위로금을 주었다.
그때는 물가가 올라 화폐가치가 없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위령제 때 재판소에 갔다가 식이 끝나고 남편의 집무실을 보았다. 남편이 앉아서 일하던 그 의자와 책상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남편이 생각났다. 생전에 평상시에는 이곳에 한번도 못 와보고 이제 죽고 없는 이 빈 책상을 구경하는구나.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한 원통함과 분함과 부끄러움이 앞섰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밖에서 남편의 구둣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고 꼭 퇴근해서 들어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 죽음….
다시 기차 꼭대기에 올라 南行
미처 정신 차릴 새도 없이 1·4 후퇴를 해야 했다. 이번에는 남보다 먼저 떠난다고 서둘러서 12월26일에 떠났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홍성을 떠났다. 그때는 기차가 있어 천안을 가니 서울과 北에서 온 피난민이 너무 많아서 기차 꼭대기밖에는 자리가 없었다. 눈은 펑펑 오는데 어머니를 부축하여 꼭대기에 올라와 아이들을 헌담요 조각으로 감아 앉히고 우리는 南으로 향했다.
그 기차는 순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다. 역에 서기만 하면 석탄 싣고 물 넣고 천안에서 황간까지 4일 동안 그대로 기차 꼭대기에 앉아서 먹지도 못하고 추위와 싸웠다. 아이들은 그래도 졸고 있는데 내가 만일 잠이 들면…. 기차가 흔들리면 땅으로 떨어질 판이니 그야말로 몇 사람을 내가 붙들고 가는 꼴이었다.
부산까지 가는 모양인데 우리는 방한 준비도 너무 부족하고 또 황간서 내려 임산 시댁에 가서 행동을 같이 하려고 하차를 했다. 내리려고 보니 어머니께 둘러준 이불이 얼어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두고 우리는 하차했다. 황간역에 내리니 그 추운 때 피난민들이 이불을 몸에 두르고 그 광장에 주욱 누워 있었다. 오죽이나 피로하면 맨땅에 누웠을까. 상상도 못할 광경들이다.
우리는 임산까지 걸어갔다. 몇 시간을 갔는데 어머니는 지팡이를 잡고 숨을 쉬느라고 「쌕쌕」 소리가 났다. 그래도 셋째와 둘째는 큰댁에 간다니 생기가 나는 모양이었다. 큰아이는 네 살 된 동생을 업고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는 큰댁에 오니 시부모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방위대가 밥을 해주고 식구가 얻어 먹고 있었다.
시부 말씀이 인민군이 한강을 아직 건너지 못한 것 같으니 만약 오산까지 왔다면 돈 한푼 없더라도 부산으로 같이 떠나자고 하셨다.
우선 시모 사는 집 길가에 있는 골방을 비워달라고 하여 거기에 살기로 하였는데 너무 작아서 여섯 명은 무리여서 어머니는 관터 시모댁에 가서 사돈간에 함께 있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결정이 매우 잘못됐다.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오죽이나 불편하며 시장도 하셨을 것이다. 방이 작더라도 모시고 있었으면 옆구리도 아프지 않고 더 오래 사셨을는지….
나는 멍텅구리였다. 나이 서른아홉 살이나 되어도 부모님의 괴로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편한 것만 생각했으니 한이 된다.
다시 홍성으로
그 다음해 3월이 되어서 인민군과 중공군이 후퇴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식구는 다시 홍성의 살던 집을 향하여 가기로 했다. 생활이 막연하고 아이들 학교 관계도 있고 해서….
그때는 피난민들이 北으로만 가는데 기차편은 새로 규칙이 생겨 화물차도 못 타게 됐다. 모두 다 걸어갔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데 어머니는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시며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걸음이 둔해지고 괴로워하셨다. 황간에서 대전까지 가는데 이원 못 가서 어떤 젊은 남녀가 서울을 간다며 따라왔다. 여자말이 대전인동교회 백목사님과도 잘 안다고 했다. 크리스천인데 잘 믿는 척했다. 가면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대전 가면 남자형님이 사는데 점심값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 몇 달 생활하고 난 후라 겨우 몇 푼밖에 없었다.
순진한 나는 내 마음 같은 줄 알고 그 사람에게 점심값을 빌려 주었다. 이 사람들은 계속 같이 갔는데 시고모댁에까지 따라 왔다. 윗방에서 같이 잤다.
60리를 종일 걸어서 대전까지 와서 어머니는 홍성에 안 가신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이나 가서 살길을 연구해 보라고 하시고 대전 사촌 오빠집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 남녀가 그때도 따라오면서 신발이 없으니 돈을 좀 꾸어 주면 저녁 때나 내일 아침에 형을 만나니 꼭 갚겠다고 사정을 했다.
나는 한푼 없이 남은 돈을 다 주었다. 신발을 사 신고 와서 우리가 자는 방에 같이 자는데 자다가 보니 남녀가 없었다. 도망간 것이다. 나는 그 돈을 한푼도 못 받고 공주, 예산을 거쳐 홍성까지 오면서 먹지 못하고 아이들을 고생시켰다.
일생을 두고 잊어버리지 못할 괘씸한 이북남녀. 그렇게 종교를 팔고 어린 자식이 있는 여인의 돈을 송두리째 털어 가다니…. 무서운 악질들이 괘씸하였다.
6.25手記(2)/네 아이를 데리고 戰線을 누빈 한 여인의 남편 찾기
- 임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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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29, 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