手記/초등학교 6학년생이 본 전쟁과 愛犬
영문도 모른 채 피난민 행렬에 끼이다
「강원도 명주군 현남면 입암리」
이것이 6·25 전쟁이 일어날 당시 내 고향의 주소다. 지금도 꿈 많은 소년 시절을 보낸 그립기만 한 내 고향이다. 산과 들과 화상천 냇가에 지천으로 피고 지던 진달래, 개나리, 이름 모를 야생화, 들풀들의 그 독특한 풀내음들은 耳順(이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철따라 내 가슴에 피어나 문득문득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강아지도 기르고 토끼도 닭도 기르던 소년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한데 지금 나는 삶의 정서를 잃어버리고 만 것 같아 옛날을 회상하는 것이 어쩌면 사치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났고 그 평화롭던 마을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내 고향은 38선에서 12km쯤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해방 전 일제시대에는 행정 구역이 양양군이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나라가 38선으로 분단되면서 양양군의 중간을 38선이 지나게 되어 38선 이남인 내 고향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강릉이 市(시)로 승격하면서 溟州郡(명주군)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6·25 전쟁으로 양양이 수복되고 그 북쪽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내 고향 현남면은 다시 양양군으로 환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남북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내 고향 이름은 파란 많은 조국의 운명만큼이나 수난을 겪은 셈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둑방길을 다니며 광주리에 토끼풀을 뜯다가 북쪽에서 울려오는 요란한 포성과 함께 南負女戴(남부여대)하고 북쪽에서 밀려 나오는 피난민 행렬을 보았다. 우리 마을도 온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사연도 모른 채 남들 따라 피난길 행렬에 끼이게 되었다. 어머니는 옷가지와 식기를 챙긴 보따리를, 나는 쌀자루를, 국민학교 3학년인 여동생은 이불보따리를 각각 이고 지고 오후에 집을 나섰다.
누렁이와의 이별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설왕설래하며 의견들이 분분했다. 가까운 산에 가서 오늘 밤만 피했다가 오면 된다는 의견도 있고 큰길을 피해 산길을 따라 南(남)으로 멀리멀리 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산길을 따라 밤 늦게까지 한 30리를 南行(남행)하여 산골 어느 외딴 집에 들어갔다. 작은 초가집인데 방이건 헛간이건 많은 피난민들로 꽉 찼다. 우리는 부엌에 자리를 얻어 멍석을 깔고 저녁 밥도 굶은 채 총알을 막는다고 여러 사람이 불도 밝히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엎드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고 나니까 인민군이 밤새 우리보다 앞질러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 집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아 집에 돌아오니 누렁이(기르던 개)가 내 얼굴까지 길길이 뛰어 오르며 반가워한다.
이후로 인민군이 멀리 남쪽까지 내려가는 동안 人共(인공) 치하에서 인민학교에 석 달을 다녔다. 전쟁 전에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교장이 되었고 학교 사환이었던 사람이 교사가 되었다. 그 전부터 비밀로 공산당에 관여했었다고 한다.
인민학교에 다니는 동안 공부는 별로 한 것이 없고 공산당을 선전하는 노래와 연극을 연습하여 마을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동네별로 소년단을 조직하여 마을 對(대) 마을 소년단의 전쟁 놀이를 밤낮 없이 계속하였다.
9·28 수복으로 국군이 北進(북진)한 후 다시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국군이 1·4 후퇴를 하게 되자 이번엔 본격적인 피난길에 나섰다.
앞마당을 파서 쌀과 옷가지 등을 넣은 커다란 독을 몇 개 묻고 그 위에 짚단과 나뭇단을 쌓아 위장해 두었다. 가지고 떠날 보따리로는 역시 쌀, 식기, 옷가지, 이불을 챙겼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떠나면서 언제 다시 돌아와 살게 될지 알 수 없는 집과, 정을 주어 기르던 개와 토끼 닭 생각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누렁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안절부절 못했다. 낳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끼 강아지 네 마리가 있는 부엌에 들어갔다가는 다시 달려나와 우리를 쫓아오고, 오다가는 다시 부엌 쪽으로 달려가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누렁이가 우리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결국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제 새끼가 있는 부엌으로 가고 말았다. 나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어른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떠난 피난길이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걷고 걸어서 南行하여 울진까지 내려가 눌러 앉아 피난살이를 하였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빈 들에서 겨울 냉이를 캐며 허기진 배고픔의 고통과 함께 겨울을 나고, 봄·여름이 지나서 北進하는 국군의 뒤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와 보니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 버려 잿더미만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온 마을이 空洞化(공동화)되었고 폐허가 되었다. 마을이 깡그리 불타 폐허가 된 것은 비행기 폭격이나 포화 때문이 아니었다. 후퇴하는 국군의 군사작전 때문이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38선부터 우리 마을 부근까지 약 20km 안의 모든 가옥과 구조물을 소각시킨 것이다. 이른바 淸野戰法(청야전법)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진지 구축이나 야영, 취사 등 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모든 구조물과 시설을 불태워 적의 작전에 차질을 가져오게 하고 추격 시간을 지연시키는 작전이란다.
옛날도 그 옛날 춘추전국 시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륙에서나 쓸 수 있는 고대 전술일 터인데 우리나라처럼 좁은 戰場(전장)의 현대전에는 가당치도 않은 전술이었다. 전쟁 후 해당 지휘관이 문책, 처벌되었다는 얘기를 풍설로 들었다.
지휘관 한 사람의 誤判(오판)과 작전 미숙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통과 피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 집에는 6·25 이전의 것은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릴 때 가끔 다락방에 올라가면 수많은 古書(고서)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그 책들을 대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불타 주저앉은 집터의 잿더미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헤치고 정리하여 그 위에 통나무를 베어다가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오두막집을 세워야 했다.
구들고래로 들어간 사연
피난 갈 때 마당에 파묻었던 쌀독의 쌀과 옷을 꺼내니 모두 누렇게, 까맣게 타고 말았다. 집이 탈 때의 地熱(지열)로 그렇게 된 것이다. 쌀을 퍼내어 너무 심하게 탄 것은 버리고 좀 덜한 것을 가려서 물에 담가 울구고 씻고 해서 밥을 지었지만 역한 냄새 때문에 참으로 먹기가 힘들었다. 냄새 나는 탄 쌀밥으로 연명하면서 오두막집을 세워 나갔다. 구들(방바닥)을 만들기 위하여 구들장을 하나하나 들어내다가 구들장 밑 구들고래에 누렁이(어미개)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물이 확 쏟아졌다. 피난 떠날 때 우리를 따라 오고 싶어 그렇게 애쓰던 누렁이 아닌가! 학교 갔다오면 들로 산으로 함께 쏘다니며 情(정)을 나누던 내 친구 누렁이의 주검이다.
누렁이가 구들고래 속에 기어들어가 죽은 사연은 이러할 것이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제 새끼 네 마리를 위해 집 주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부엌에서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다가 집이 불타자 혼자서는 불을 피해 밖으로 뛰어나갈 수도 있으나 걷지 못하는 새끼들을 품에 안고 버티다가 몸에 불이 붙고 다급해지니까 부엌 아궁이를 통해 구들고래 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오늘의 패륜을 보면서 누렁이가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피난민 행렬에 끼이다
「강원도 명주군 현남면 입암리」
이것이 6·25 전쟁이 일어날 당시 내 고향의 주소다. 지금도 꿈 많은 소년 시절을 보낸 그립기만 한 내 고향이다. 산과 들과 화상천 냇가에 지천으로 피고 지던 진달래, 개나리, 이름 모를 야생화, 들풀들의 그 독특한 풀내음들은 耳順(이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철따라 내 가슴에 피어나 문득문득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강아지도 기르고 토끼도 닭도 기르던 소년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한데 지금 나는 삶의 정서를 잃어버리고 만 것 같아 옛날을 회상하는 것이 어쩌면 사치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났고 그 평화롭던 마을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내 고향은 38선에서 12km쯤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해방 전 일제시대에는 행정 구역이 양양군이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나라가 38선으로 분단되면서 양양군의 중간을 38선이 지나게 되어 38선 이남인 내 고향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강릉이 市(시)로 승격하면서 溟州郡(명주군)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6·25 전쟁으로 양양이 수복되고 그 북쪽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내 고향 현남면은 다시 양양군으로 환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남북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내 고향 이름은 파란 많은 조국의 운명만큼이나 수난을 겪은 셈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둑방길을 다니며 광주리에 토끼풀을 뜯다가 북쪽에서 울려오는 요란한 포성과 함께 南負女戴(남부여대)하고 북쪽에서 밀려 나오는 피난민 행렬을 보았다. 우리 마을도 온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사연도 모른 채 남들 따라 피난길 행렬에 끼이게 되었다. 어머니는 옷가지와 식기를 챙긴 보따리를, 나는 쌀자루를, 국민학교 3학년인 여동생은 이불보따리를 각각 이고 지고 오후에 집을 나섰다.
누렁이와의 이별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설왕설래하며 의견들이 분분했다. 가까운 산에 가서 오늘 밤만 피했다가 오면 된다는 의견도 있고 큰길을 피해 산길을 따라 南(남)으로 멀리멀리 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산길을 따라 밤 늦게까지 한 30리를 南行(남행)하여 산골 어느 외딴 집에 들어갔다. 작은 초가집인데 방이건 헛간이건 많은 피난민들로 꽉 찼다. 우리는 부엌에 자리를 얻어 멍석을 깔고 저녁 밥도 굶은 채 총알을 막는다고 여러 사람이 불도 밝히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엎드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고 나니까 인민군이 밤새 우리보다 앞질러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 집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아 집에 돌아오니 누렁이(기르던 개)가 내 얼굴까지 길길이 뛰어 오르며 반가워한다.
이후로 인민군이 멀리 남쪽까지 내려가는 동안 人共(인공) 치하에서 인민학교에 석 달을 다녔다. 전쟁 전에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교장이 되었고 학교 사환이었던 사람이 교사가 되었다. 그 전부터 비밀로 공산당에 관여했었다고 한다.
인민학교에 다니는 동안 공부는 별로 한 것이 없고 공산당을 선전하는 노래와 연극을 연습하여 마을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동네별로 소년단을 조직하여 마을 對(대) 마을 소년단의 전쟁 놀이를 밤낮 없이 계속하였다.
9·28 수복으로 국군이 北進(북진)한 후 다시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국군이 1·4 후퇴를 하게 되자 이번엔 본격적인 피난길에 나섰다.
앞마당을 파서 쌀과 옷가지 등을 넣은 커다란 독을 몇 개 묻고 그 위에 짚단과 나뭇단을 쌓아 위장해 두었다. 가지고 떠날 보따리로는 역시 쌀, 식기, 옷가지, 이불을 챙겼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떠나면서 언제 다시 돌아와 살게 될지 알 수 없는 집과, 정을 주어 기르던 개와 토끼 닭 생각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누렁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안절부절 못했다. 낳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끼 강아지 네 마리가 있는 부엌에 들어갔다가는 다시 달려나와 우리를 쫓아오고, 오다가는 다시 부엌 쪽으로 달려가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누렁이가 우리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결국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제 새끼가 있는 부엌으로 가고 말았다. 나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어른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떠난 피난길이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걷고 걸어서 南行하여 울진까지 내려가 눌러 앉아 피난살이를 하였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빈 들에서 겨울 냉이를 캐며 허기진 배고픔의 고통과 함께 겨울을 나고, 봄·여름이 지나서 北進하는 국군의 뒤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와 보니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 버려 잿더미만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온 마을이 空洞化(공동화)되었고 폐허가 되었다. 마을이 깡그리 불타 폐허가 된 것은 비행기 폭격이나 포화 때문이 아니었다. 후퇴하는 국군의 군사작전 때문이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38선부터 우리 마을 부근까지 약 20km 안의 모든 가옥과 구조물을 소각시킨 것이다. 이른바 淸野戰法(청야전법)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진지 구축이나 야영, 취사 등 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모든 구조물과 시설을 불태워 적의 작전에 차질을 가져오게 하고 추격 시간을 지연시키는 작전이란다.
옛날도 그 옛날 춘추전국 시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륙에서나 쓸 수 있는 고대 전술일 터인데 우리나라처럼 좁은 戰場(전장)의 현대전에는 가당치도 않은 전술이었다. 전쟁 후 해당 지휘관이 문책, 처벌되었다는 얘기를 풍설로 들었다.
지휘관 한 사람의 誤判(오판)과 작전 미숙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통과 피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 집에는 6·25 이전의 것은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릴 때 가끔 다락방에 올라가면 수많은 古書(고서)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그 책들을 대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불타 주저앉은 집터의 잿더미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헤치고 정리하여 그 위에 통나무를 베어다가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오두막집을 세워야 했다.
구들고래로 들어간 사연
피난 갈 때 마당에 파묻었던 쌀독의 쌀과 옷을 꺼내니 모두 누렇게, 까맣게 타고 말았다. 집이 탈 때의 地熱(지열)로 그렇게 된 것이다. 쌀을 퍼내어 너무 심하게 탄 것은 버리고 좀 덜한 것을 가려서 물에 담가 울구고 씻고 해서 밥을 지었지만 역한 냄새 때문에 참으로 먹기가 힘들었다. 냄새 나는 탄 쌀밥으로 연명하면서 오두막집을 세워 나갔다. 구들(방바닥)을 만들기 위하여 구들장을 하나하나 들어내다가 구들장 밑 구들고래에 누렁이(어미개)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물이 확 쏟아졌다. 피난 떠날 때 우리를 따라 오고 싶어 그렇게 애쓰던 누렁이 아닌가! 학교 갔다오면 들로 산으로 함께 쏘다니며 情(정)을 나누던 내 친구 누렁이의 주검이다.
누렁이가 구들고래 속에 기어들어가 죽은 사연은 이러할 것이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제 새끼 네 마리를 위해 집 주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부엌에서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다가 집이 불타자 혼자서는 불을 피해 밖으로 뛰어나갈 수도 있으나 걷지 못하는 새끼들을 품에 안고 버티다가 몸에 불이 붙고 다급해지니까 부엌 아궁이를 통해 구들고래 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오늘의 패륜을 보면서 누렁이가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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