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1)
朴正熙와 金泳三의 화해― 金泳三대통령의 역사관 문제, 그는 역사의 계승자인가 파괴자인가
모택동(毛澤東)을 보호한 등소평(鄧小平)의 역사관이 중국개방의 성공을 보장했다
한국 현대사와 역대 대통령에 대한 金泳三대통령의 부정적인 역사관은 그의 국정운영에도 반영되어 국기(國基)의 수호와 대통령의 역할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건국―반공―경제발전―민주화로 이어진 국가건설의 흐름이 아니라 투쟁과 반대의 노선에 정부 정통성의 입각점을 두고 있는 金대통령은 특히 朴正熙 지지세력의 반발을 사고 있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국력과 국부(國富)에 치중한 李·朴·全대통령 진영의 대표선수와 민주와 정의에 치중한 盧泰愚·金泳三 진영의 대표선수가 역사적 화해를 해야만 우리의 國基가 든든해질 것이다. 과거와 화해한 바탕에서만 미래로, 세계로 나갈 수 있다.
<1993년 11월 월간조선>
살아 있다는 데 감사해야
金泳三대통령의 생일은 음력으로 1928년 12월4일이다. 6·25동란이 터졌을 때 만 22세였다. 이 연령층은 6·25를 전선에서 몸으로 때워 나라를 지켰다. 그 흔적이 인구구조에서 나타난다.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1925∼29년생 사이에서는 여자 1백명에 남자가 80명뿐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남자의 손실률이 20%나 달한 불행한 세대였다. 공식통계로 이 전쟁의 한국군 전사상자수(실종자 포함)는 약30만. 金泳三대통령은 다행히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기간중 장택상(張澤相)의원(총리역임)의 비서로서 전선 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金대통령과 동년배인 육사 8기생들의 경우, 전투병과의 약 40%인 4백19명이 전사했다. 주로 소대장으로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다. 金泳三씨는 대통령이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점에서 정말 복 받은 한국남자이다. 인구 구조를 보여주는 삼각형 그림에서 정말 움푹 파여 날아가 버린 전중세대. 강물처럼 흘렸던 그들의 피와 눈물이 제단을 딛고 이 나라가 서 있다.
「전쟁」이란 말에 대해서도 거부감
金泳三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전몰장병들에게 대해선 감사의 말씀 없이 「민주화의 도정에서 오늘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먼저 가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 머리를 숙인다」고만 했을 뿐이다. 민주화를 위한 희생도 숭고하지만 전몰장병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민주화 운동의 대상인 국가 자체가 존립할 수 없었다. 지난 6월 金泳三대통령은 옛 육군본부자리에 지은 전쟁기념관을 민족기념관으로 개편하고 여기에다가 국립박물관을 포함시킨다는 부하들의 발상에 동의했다가, 군 관계자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취소한 일이 있었다. 金대통령의 측근에서 언론에 흘린 전쟁기념관 개편의 논리 중에는 동족상잔의 내전(內戰)인 6·25동란을 굳이 기념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기념관이 군사문화의 잔재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두 가지 무식을 드러낸 발상이었다.
한 민족의 정신적 유산의 집결체인 국립박물관을 다른 용도로 만든 건물에다가 느닷없이 옮길 수 있다는 문화적 무식, 그리고 전쟁기념관의 성격에 대한 무지가 그것이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 바로 옆에는 「앵발리드(Invalide)」로 불리는 군사 박물관이 있다. 이 두 곳을 둘러 본 사람들은 루브르미술관의 그 화려한 예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앵발리드의 총과 칼이란 것을 실감한다. 군사력과 거기에 기반을 둔 문화, 그것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전쟁기념관은 6·25를 상기하고 다시는 그런 참화를 당하지 말자는 다짐을 담는 곳이지 호전성을 고취하자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해 보지 못한 한국인이 아닌가. 가장 큰 문제는 6·25를 내전으로, 전쟁을 군사문화의 유산으로 보는 사고방식이다. 한완상(韓完相) 통일원장관의 한국전쟁관(觀)이 내전적 시각을 갖고 있다고 함은 월간조선 8월호 기사를 통해 이미 보도된 대로다. 내전적 시각은 金日成의 남침행위에 의해 일어났던 국제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성격규정함으로써 전쟁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데 이용당하기도 한다.
구한국군이 6·25 때 싸웠나?
전쟁기념관 해프닝은 金泳三정부의 전쟁관과 국가관에 대한 또 하나의 시사였다. 金대통령은 지난 10월1일 국군의 날 치사에서 「신한국군의 원년」이란 말을 썼다. 그렇다면 6·25동란 때 나라를 지킨 군대는 구한국군이었던가. 그 구한국군은 해체돼 버렸는가. 金泳三대통령이 즐겨 쓰는 문법에 따른다면 「신한국군의 원년」이란 말은 적합하다. 새 정부의 구호 「신한국의 창조」는 신한국군의 창조와 구한국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신한국 창조」 「신경제」 「신외교」 따위의 말에는 金대통령 이전의 한국 현대사와 단절하겠다는 뜻이 있다. 그런 뜻이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임시정부 다섯 요인의 유해가 봉환되자 金대통령과 그 주변에서는 『임정의 정통성은 문민정부로 바로 연결되고 있다』는 취지의 의미를 부여했다. 한 국가의 정통성이 李承晩―尹潽善―朴正熙―崔圭夏―全斗煥―盧泰愚 등 역대 정권을 건너뛰어 金泳三대통령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전기도 선이 끊어지면 흐르지 못하는데 한 민족의 총체적인 삶의 역정인 국가의 정통성이 그런 식으로 반세기를 점프할 수 있다는 무모하고 오만한 생각, 여기에 金泳三대통령의 역사관·국가관·인간관을 문제 삼는 이유가 존재한다.
한국 현대사가 청산대상?
金泳三대통령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자리에서 『누가 그런 정신빠진 일을 했는지, 국립박물관을 어떻게 총독부 건물 안에다 갖다 놓느냐 말이야』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립박물관이 들어설 땐 그 건물은 총독부가 아니라 중앙청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제헌국회가 열리고 건국이 선포된 곳, 6·25때 서울 수복의 태극기가 올라갔던 곳, 그리고 한국인들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던 국정의 주요 결정과 조치가 이루어지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건물을 철거하면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국 현대사의 영욕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역사의 현장」과 「역사의 추억」도 일제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는 것. 이런 고민이 있었기에 역대 대통령들은 철거를 미루었던 것이지 「정신 빠진」 때문은 아니었다. 철거엔 고민이 따르지 않지만 보존엔 고뇌가 있는 것이다.
김정남(金正男) 교육·문화담당 수석비서관은
『金대통령은 중앙청 건물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현대사가 정부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그 건물에 대해 크게 애착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의 그런 역사관은 청와대 안에 있던 역대 대통령 집무실 건물을 철거하는 데서도 잘 나타났다. 이 건물은 총독관저로 지은 것이지만 더 긴 세월 동안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살림집으로 쓰여 그야말로 현대사의 진로를 좌우한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일반인들의 시야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일제의 치욕을 떠올리게 할 일도 없다. 철거업자가 이 건물을 옮겨서 보존하도록 해달라는 건의를 하자 金대통령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아직 친일파가 있는 모양이지…. 벽돌 한 장까지도 깨어 없애버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개혁에 반대하면 수구세력, 옛 중앙청의 철거에 반대하면 친일파라는 수사관식 어법(語法)은 정부에 반대하면 불순분자라고 몰던 시대의 말투를 연상시킨다.
세계적 금자탑을 「역사 후퇴」라고
한국 현대사와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金대통령의 부정적 시각은 취임 1백일 기념 기자 회견 때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 일본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金대통령은 『5·16은 우리의 역사를 후퇴시킨 큰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이 말도 과학적이지 못하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백 달러로서 말레이시아(2백71달러) 필리핀(1백69달러) 태국(1백15달러)보다 못했다.
그 말레이시아의 국민소득이 지금은 한국의 반밖에 되지 않으니 지난 30년간 한국은 말레이시아보다도 다섯 배나 빨리 달렸다. 지금 필리핀의 1인당 GNP는 한국의 약 10분의 1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17배나 빨리 뛰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세계 최빈국을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변모시킨 것이 朴正熙 대통령을 지도자로 하는 5·16 주체세력과 국민들이었다. 더욱 가슴 뿌듯한 것은 삶의 질 부문에서도 한국은 세계 35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UNDP의 인간개발지수 랭킹). 우리 외무부장관이 자랑했듯이 한국은 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金泳三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했어야 했다.
『5·16은 정치적인 면에서 나라를 후퇴시켰으나 경제적인 면에선 나라를 발전시키는 시작이 되었다. 따라서 종합적이고 정확한 판단은 후세의 역사평가에 맡기자』
역사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총체적 축적이다. 그 시대의 지도자가 밉다고 역사마저 부정하면 그 역사의 건설자들 전체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신중하고 섬세한 용어 선택을 해야 한다.
대통령의 역사관은 왜 중요한가
역사가 뿌리라면 국가와 민족은 줄기이고 이념은 거기에 매달린 나뭇잎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에서 파생된 산물이 국가요 민족이며 이념이다. 따라서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자세는 국가관과 인간관과 이념체계와 직접 관련된다. 더구나 대통령의 경우엔 역사관이 바로 국정의 방향잡기와 직결된다. 인간으로서는 더 오를 데가 없는, 대통령이란 정상에 선 사람은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그의 국정운영은 역사를 의식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바로 역사와 바둑을 두는 사람이다. 대통령은, 그가 혁명으로 집권하지 않았다면, 본질적으로 역사의 계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 왕이 사직의 수호자였던 것처럼, 종손이 가문의 계승자인 것처럼. 역사의 계승자란 의미는 국기(國基)를 수호하고 역대 정권과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역대 대통령의 맥을 잇는다는 뜻이다.
지나간 역사를 총론적으로는 긍정하되 각론적으로는 비판적·선별적 계승을 해 가는 자세이다. 한국의 정통성은 독립운동―반공―건국―6·25 동란―경제개발―민주화로 이어진다. 金泳三대통령은 역대정권과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반면 자신의 문민정부가 3·1운동―4·19의거―5·18광주사태―6월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건설이 아닌 반대의 노선에 정부의 정통성을 귀착시키고 있는 듯한 말이다. 이런 시각은 야당 지도자나 재야 지도자일 때는 무리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정부의 정통성을 그런 좁은 기반 위에 둔다면 대통령도 정권도 불안해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스스로 축소시키고 있다. 국정의 흐름에 있어서 반대하는 편만을 대통령이 대변한다면 역사건설에의 참여파는 배제되거나 소외되거나 불만세력으로 남게 된다.
논리적으로도 그런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민주투쟁 세력과 문민세력, 즉 일부 국민만 대표하게 된다. 대통령은 영욕의 역사를 통 크게 아우르고 참여와 반대, 문민과 무민을 포괄하는 전체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옛 중앙청·옛 대통령관저 철거에서 보듯이 金대통령은 역사의 처녀성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좋은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이런 역사관이 청교도적 인간관과 결합하여 최근에 「도덕국가」란 비전으로 나타난 것 같다. 인간이란 존재는 능력 면에선 개인차가 크지만(예컨대 한 시즌에 홈런을 다섯 개 치는 타자와 그 열 배를 치는 타자가 있다) 도덕 면에선 비슷하다(보통사람보다 열 배나 성스러운 인간이 있는가). 그런 세상에서 순결·도덕·정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필연적으로 독선과 위선이 된다. 단테가 「신곡」에서 말했듯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우고 남에게 도덕성을 강요해서 지상에서 도덕국가를 만들려다가 결과적으로는 지옥을 만든 사례가 역사엔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도덕성 강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毛澤東을 보호한 鄧小平의 계산
우리 모두의 기억에 생생하고 직접 오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평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있다.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그것이다. 1981년 6월27일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모택동(毛澤東)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문헌이다. 이 문헌의 기초사업은 鄧小平과 호요방(胡耀邦)이 주재하였다. 毛澤東이 일으킨 10년간의 대재난―문화대혁명이 남긴 악몽에서 깨어난 중국의 진로를 개방쪽으로 선회함에 있어서, 중국의 정치지배 엘리트들이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정리한 뒤 새출발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담긴 문헌이다. 이 문헌(사계절 출판사에서 1990년에 「정통 중국 현대사」란 제목으로 전문번역 출판)을 읽어본 기자는 숙연한 느낌을 받았다.
역사의 피해자(鄧小平)가 그 가해자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쓴 흔적, 그 가해자(毛澤東)와 그가 주도한 한 시대의 역사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한 덩어리로 파악함으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도출하고 그리하여 피해자와 가해자가 다 같이 승리자가 되는 결론을 내려가는 역사관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毛澤東에 의하여 두 번이나 숙청 당함으로써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鄧小平은 이 결의문의 초안에 대한 의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 동지가 만년에 이론과 실천면에서 범한 오류를 언급하려면 객관적이고 절절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주된 내용은 올바른 것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역사에 부합됩니다. 모택동 동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거할 때까지 줄곧 우리 당의 영수였습니다. 모택동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도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됩니다. 도를 넘게 되면 모택동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당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납니다」
이 결의문은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당과 국가와 인민에게 건국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게 한」 재난이라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鄧小平은 「우리도 일부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조건 아래서는 사실상 반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피하지 말고 책임을 져도 나쁠 것이 없고 오히려 좋은 점이 있습니다.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와 진운 동지는 정치국상무위원이었으므로 적어도 우리 두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대통령 주도의 역사 평가
鄧小平식의 역사관에 따르면 5·16이 군사쿠데타라면 그것을 막지 못한 책임의 일단을 당시의 현역 정치인 金泳三씨도 져야 한다(군사쿠데타를 부른 가장 큰 원인은 민주당 신구파 싸움에 의한 정권불안이었다). 유신시대에 약 3년간 야당당수로서 朴대통령의 정치적 상대자였던 金泳三씨는 만약 그 역사가 후퇴한 역사라면 그 후퇴에 대해서 일부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자책을 전제로 한 역사평가일 때만 피해자의 한풀이가 아닌, 새출발의 동력자원이 되는 생산적인 역사평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金泳三 개인에 의해서 즉흥적으로 주도되는 역사평가는 우리 시대가 딛고 있는 뿌리를 잘라냄으로써, 또 우리가 기대고 있는 역사의 언덕을 무너뜨림으로써 북한 金日成 정권의 정통성만 상대적으로 강화해주는 자해행위, 그리고 소모적인 국론의 분열로 연결될 위험이 있다.
지나간 현대사를 대통령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려면 그것은 깊은 고뇌와 실증적인 연구가 뒷받침되는 정정당당한 정면승부여야 한다. 그러나 金泳三정부하의 역사논쟁은 우발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황인성(黃寅性)국무총리가 국회에서 12·12 사건에 대해서 애매한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청와대에서 「쿠데타적 사건」이란 해석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5·16에 대한 평가도 일본 기자의 질문이 없었더라면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깊은 생각 없이 툭툭 던진 말 몇 마디를 언론과 지식인들이 받아서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과거사 논쟁, 현대사 격하 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최근에 또 金대통령과 金正男수석이 경제개발 주체세력과 민주투쟁 세력간의 역사적 화합을 외치고 나왔다. 극단적으로 나쁜 평가를 해 버린 뒤에 참여파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쳐 보았자 선뜻 응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내부의 적」에겐 무기를 들어야
역사에서 배울 만한 교훈이 하나 있다. 전(前)정권이나 역사를 격하시킨 지도자는 대체로 실패했다. 스탈린을 격하시킨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를 부정한 고르바초프는 실패했으나 毛澤東을 보호한 등소평은 성공했다. 毛澤東을 격하하면 毛澤東 지지세력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당의 내분은 물론이고 국론의 분열이 예상된다. 그러한 정치불안을 안고는 경제 개방 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다. 毛澤東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鄧小平은 돈 안들이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시키고 안정시켰다. 경제발전은 안정된 권력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金泳三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전(前)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의 연장선상에서 국민들을 상대로 「내부의 적」 「기득권층」 「조직적 반대세력」 「수구세력」 「반 개혁세력」이란 대결적, 갈등촉진적, 분열적 이미지의 말들을 거침없이 쏘아붙이고 있다.
『돈 없는 사람이 부끄러웠던 시대가 가고 오히려 돈 많은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을 했던 金대통령이 요사이는 청부(淸富)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으나 먼저 뱉은 말을 지우기는 어려운 법이다.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세법을 개정하겠다』는 대통령의 말도 있었다.
국민에게 고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정하는 대통령? 이런 말은 빚이 된다. 북한의 악마적 정권을 향해서는 동반자라고 부르면서 국민을 향해서 「내부의 적」이라니, 적은 전투와 제거의 대상이다. 「내부의 적」은 혁명정부나 전체주의 국가가 쓰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의 뒤에는 계급적, 반역사적, 그리고 반자본주의적 논리가 스며 있다.
金대통령의 반공적 의식구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알게 모르게 어떤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는 보장도 없다(북한의 영향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의 기본 원리인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배치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의 영향을 가리킨다). 취임사에 나온 문제의 구절―「어떤 동맹국·사상·이념보다도 민족이 중요하다」는 말은 북한의 對南통일전략에 있어서 기축이 되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엉터리다. 사상이 민족보다 더 중요하기에 한반도와 독일은 분단되었고 이민족의 집합체인 미국은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동의함으로써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북한정권이 문제의 이 구절 때문에 처음엔 金泳三정부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취임사에 이런 구절을 끼워 넣은 세력이 「수구세력」 「내부의 적」 따위의 계급적 시각에 기초한 용어와 反자본주의적 용어를 대통령과 그 주변에 공급하고 있는 인맥과 일치한다면 이것은 「언어의 유희」 수준에서 넘길 일이 아니다. 문민 대통령은 총칼이 아닌 말로써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이야말로 국정운영의 풍향계인 것이다.
反YS로 돈 朴正熙 평가세력
金泳三대통령은 이런 말로써 득을 보고 있는가. 아닌다. 그는 큰 손해를 보고 있다. 쓸데없이 많은 적을 만들고 있다. 정말로 金대통령의 개혁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으면 구체적인 증거를 잡아내어 거명해서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내부의 적」 「기득권층」이란 계급적·혁명적 말을 쓰면 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기성세력 전체를 한 묶음으로 삼아 매도하는 결과를 빚고 만다. 기성세력은 비록 숫자에선 소수일지 모르지만 한 조직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층이다. 우리 사회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책임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인기에 연연하여 국정을 이끈다면, 즉 선거운동 하듯이 나라를 끌고 간다면 결과는 뻔하다. 기업경영가 출신의 한 국회의원은 말했다.
『회사를 경영할 때 보니까 아래층 80%가 하자는 대로 하니까 망하더라. 어차피 장(長)자 붙은 관리층의 의견대로 해야 잘 된다』
한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단순시간을 연장시켜서 개발연대의 주인공으로서 세계사의 금자탑을 이룩한 오늘날의 기성세력을 매도하여 마음에 상처를 낸다면 金대통령이 딛고 있는 권력구조와 중앙부부터가 내려앉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정치성향을 대표하는 세 사람이 있다. 金泳三, 金大中, 그리고 죽은 朴正熙다. 지지계층의 넓이에 있어서는 朴正熙가 제일이다. 지난해 가을 동아일보사가 (주)동서조사연구소에 의뢰해서 조사한 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평가를 보자.
朴正熙는 수 52.9% 우 33.9% 미 9.9% 양 1.9% 가 1.3%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全, 盧 두 사람은 미의 분포율이 가장 높았다). 朴正熙는 호남지방에서도 60% 이상의 지지율을 보였다. 金대통령이 역사를 후퇴시킨 장본인이라고 못박은 인물에 대한 국민의 판단은 전혀 다른 것임을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이 朴正熙 세력은 지역·계층면에서 金泳三 세력과 많이 겹친다. 金대통령이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면 할수록 朴正熙 지지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고 그의 지지 기반은 분열될 것이다. 실제로 요사이 金泳三대통령의 역사관·인간관·反자본주의적 시각을 가장 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朴正熙 지지세력이지 金大中 지지세력이 아니다.
金正男 수석비서관은 최근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경제적 에너지와 민주화를 이룩한 도덕적 에너지의 생산적 통합이 되어야만 신한국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화 세력은 환상과 전투성을 버려야 하고 「경제파」는 부정과 부패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경제파는 부패하고 민주파는 도덕적이란 전제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본 것이다. 두 세력의 차이는 도덕성의 차이가 절대로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도덕면에선 인간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두 세력의 차이는 방법의 차이였다. 경제파는 빵 뒤에 자유가 따라온다는 신념으로 빵의 크기를 키우는 데 전념했고, 민주파는 빵과 자유를 동시에 추구하였다. 두 세력의 상호작용이 위기 때마다 생산적으로 통합돼 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두 세력간의 관계는 이렇게 정의돼야 한다. 경제가 발전했기에 민주가 가능했고 민주파의 견제와 저항이 있었기에 경제파의 독재화가 예방되었다. 金泳三 대통령이 「우리는 깨끗하고 너희는 부패한 세력」이란, 도덕적 잣대를 깔고 두 세력을 통합하려고 접근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민주파와 경제파가 서로의 역사적 역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이해해야만 통합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힘 기르기에 치중한 세 대통령
권력과 인간의 관계를 꿰뚫어 본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역사에 남을 정도의 국가라면 두 가지 요소에 기반을 두어야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그것은 정의와 힘이다. 정의는 국내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힘은 국외의 적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힘을 경제, 정의를 민주화로 대체해 본다면 이런 틀을 하나 만들 수 있다. 국가의 흥망은 경제와 민주화를 어떤 순서로, 또 어떤 비중으로 결합하느냐에 의해서 좌우된다. 필리핀과 구소련은 힘(경제개방)과 정의(정치개혁)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쇠락한 좋은 예이다. 한국과 중국은 경제를 먼저 민주화를 뒤에 놓아서 성공한 경우이다. 이것은 물질적 토대가 바뀐 뒤에 제도와 의식이 바뀐다는 이 세상사의 일반원칙에도 맞는 방법이다. 인간이 걸음을 걸을 때도 한 발이 먼저 나간 뒤에 다른 발이 더 앞으로 나가는 방식이다. 두 발이 동시에 나가려면 깡충깡충 뛰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경제발전과 민주발전 사이의 간격이 적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간격이 너무 커지면 혁명이 일어나 간격을 단숨에 좁혀 버리고 그 간격이 좁아지면 보폭이 짧은 꼴이 돼 발전속도가 늦어진다. 정치학자들이 「희생적 간격」이라고 부르는 경제와 정치의 격차를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성공적으로 관리해 왔다.
李承晩―朴正熙― 全斗煥 세 대통령은 힘의 문제에 더 비중을 두었고 盧泰愚―金泳三 두 대통령은 정의의 문제에 치중한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다. 양진영의 대표선수는 역시 朴正熙와 金泳三 대통령이다. 金대통령도 내심 朴대통령을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경제파와 민주파의 통합은 朴正熙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金대통령의 이해와 인정을 바탕으로 해서만 이뤄질 수가 있다. 朴正熙와 金泳三의 화해는 毛澤東과 鄧小平의 화해에 비견되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 올 것이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라는 신념 가졌던 朴正熙
李, 朴 두 대통령은 그들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朴正熙(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는 그의 정치철학을 담은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출간)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의 실정에는 알맞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경제·정치·사회적으로 균형되지 못한 우리 현실에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연륜을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어버이의 심리와 같다」
그가 직접 쓴 19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치사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국군의 역사는 건군 초기부터 공산침략자들과의 투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그들과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기 위해서, 또 우리들의 후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생존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공산침략자들이 우리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이겨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평화와 번영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체제는 공산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입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 알거나 또는 절제할 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큰 자유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침략자들은 우리의 내부에 어떠한 헛점이 생기는 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우리도 남과 같이 달고 맛있는 것은 다 먹고 다 누리려고 한다면, 또 그러면서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너무나 세상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朴正熙는 역사의 악역 자임
이석제(李錫濟) 전 감사원장에 따르면 朴正熙대통령은 金日成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와 승부를 한 번 해보겠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김일성과 맞설 인물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도 강했습니다. 세 金씨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朴正熙는 金日成에 대한 감정을 일기책에서도 원색적으로 나타냈다. 1976년 6월25일의 일기를 본다.
「6·25 26주년이다. 대역(大逆)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은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치죄해야 하나」
朴대통령은 그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시기상조라고 단호히 거부하고 그에 따른 비난을 감수하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유아독존의 자세를 한 치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북의 金日成과 국내의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협공을 당하면서도 오직 국부증진의 길로 매진하였다. 그의 장기집권은 권력욕보다는 일에 대한 욕심, 조국근대화는 나 아니면 안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 金日成은, 확인된 것만 해도 네 번 朴대통령의 생명을 노리는 암살·특공작전을 명령했다. 그의 아내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다. 아내의 죽음은 인간 朴正熙의 내면을 붕괴시면서 그의 지도력에 금이 가게 했고 그의 종말을 단축시켰다.
그러나 金日成은 朴正熙를 분기시킴으로써 한국인의 집단적 신바람을 폭발시켰다. 그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열매맺었다. 朴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시간중 50∼60%를 안보에, 30%쯤을 경제에, 10%쯤을 국내정치·사회문제에 배분하였다. 경제정책도 안보적 발상에서 추진하였다. 농민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게 새마을운동이었다. 자주국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수공장을 만들려고 하다가 그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로 들어갔다.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만큼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구된 것이 행정수도 구상이었다. 안보적 관점에서 출발한 경제정책이 대성공을 이룬 데는 역사의 시운과 함께 朴正熙가 담당한 역사적 악연의 뒷받침이 있었다.
1972년의 유신선포로 朴대통령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예약하고 독재자란 국내외의 비난을 자초하였다. 그 대신 그는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국력을 경제 발전에 집중시켰다. 특히 1973년부터 추진한 중화학공업 투자에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하였다. 1973년과 79년의 두 차례 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투자에 국가의 운명을 건 일대 모험을 감행하도록 한 것은 朴正熙의 긴 안목과 역사의지였다. 남덕우(南悳祐) 당시 경제기획원장관은 최근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에 도저히 재정적 뒷받침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朴대통령은 이런 말씀을 합디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국민이 이를 따라 주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전쟁도 아니지 않는가.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해주어서 되나」 당시엔 무리로 보였던 게 돌이켜 보면 최고의 기회였음을 알게 됩니다. 세계 시장에서 최신 설비를 최저가격으로 도입할 수 있었어요. 다른 나라에선 투자를 엄두도 내지 못할 때이니까요. 그 시기를 놓쳤더라면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을 지금처럼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화학공업은 한국을 차원이 다른 나라로 만들었다. 포항제철, 현대중공업·자동차, 삼성전자 등으로 상징되는 세계적 대기업을 가진 한국의 발전 잠재력은 대만·싱가포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요사이의 수출부진 속에서도 중화학공업만이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金泳三대통령도 그런 면에선 朴正熙의 덕을 보고 있다. 1980년대의 물가안정(기초소재가 헐값에 공급돼 수출제품의 경쟁력이 높아졌다)은 유신시대에 이루어진 중화학공업 투자 덕분이었다. 朴正熙 자신은 중화학 투자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오히려 투자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오르고 이것이 정치불안과 겹쳐 그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朴正熙와 인권
유신시대에 朴正熙는 金日成과의 체제경쟁에서도 압승을 거두었다. 유신선포와 같은 시기에 金日成은 개인 숭배를 강화함으로써 朴正熙의 길을 따랐다. 朴正熙는 정치적 통제를 경제발전의 엔진으로 활용했지만 金日成의 종교적 사상통제는 북한 경제를 고사시켜 갔다. 7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연간 군사비 투자도 남한에 뒤지게 되면서 경제전의 승리는 군사면에서의 우위로 연결되었다. 朴正熙의 대전략은 선(先)경제발전 후(後)군사력 강화의 자원배분 방식이었다. 그 반대로 金日成은 60년대에 군사제일 노선을 추구하면서 경제의 기반을 망가뜨려 70년대부터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동시에 침하하게 되었다. 朴正熙의 선 경제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보호막이 주한미군이었음은 물론이다.
朴正熙를 역사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를 던져볼 필요가 있다. 朴正熙는 과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인권을 억압했나? 체육관선거, 불법 연행과 고문, 정보정치, 야당탄압 등 드러난 사실은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朴대통령이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민주화와 노사분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경제기반이 내려앉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민주화가 가능했을까. 민주화로의 대전환이 된 1987년의 6월사태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넥타이 맨 사람들의 정의감 폭발이었다. 이 중산층의 성장, 그리고 그들의 반란이 가능했던 토대를 만든 것은 朴正熙와 그 시대의 국민들이었다. 인권의 가장 기초는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이다.
1960년 말까지만 해도 신문에는 영양실조에 의한 변사사건이 자주 보도되었다. 필자가 기자생활을 시작한 1970년대 초에도 달동네에서는 영양부족으로 얼굴이 부어오른 허깨비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朴대통령 시절에 배고픔의 문제가 유사 이래 최초로 극복되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려는 이들은 아직도 이밥과 고기국 먹는 것을 제1의 국정지표로 삼고 있는 북한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가장 비참해지는 상태가 배고픈 상태라면 朴대통령은 인권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해결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항산(恒産)에서 항심(恒心)이 생긴다. 이 항심에서 인권·민주·문화도 발양되는 것이다.
야당 지도자의 시각·문법 버려야
1970년대에 부산에서 사회부기자로 일하면서 필자는 『정부를 비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의 취재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때 쓴 기사의 80%쯤이 반대편에 선 것이었다. 특히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꼬집는 기사로 일관하였다. 새마을운동 단체의 간부가 통행금지 위반으로 유치장에 들어와도 가십 기사로 조졌다. 그것이 사회정의라고 믿었다. 새마을 운동이 농촌 근대화의 세계적 성공사례라는 것은 朴대통령이 죽고 나서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金泳三대통령의 정치 노선도 필자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던 많은 정치인·지식인들은 암흑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정의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살 맛을 느끼기도 하였다.
20세기 국가근대화의 세계적인 성공사례가 그 순간에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朴대통령은 너무 무섭고 차고 음험해 보였다. 지금 읽어보면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이철승(李哲承)씨의 중도통합론은 사쿠라로 몰렸고 비타협적 반정부투쟁을 외치는 이들은 위대해 보였다. 反朴투쟁 노선에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정계의 주도권을 쥔 이들은 온건·합리 노선이 아니라 선명투쟁의 金大中·金泳三씨였다. 정치투쟁은 논리의 싸움이 아니라 힘 겨루기이므로 양金씨의 노선은 역사 발전의 한 흐름을 장악하였다. 휘어진 나무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반대 방향으로의 무리한 힘이 필요하듯이 朴正熙 정권의 철권통치를 반대하는 양金씨의 무리한 발언도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서는 양해사항으로 넘어갔다.
1979년 10월 金泳三 신민당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시키는 도화선이 된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 내용엔 무리가 있었다. 金泳三총재는 미국 정부가 朴정권에 대해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관리들이 그런 압력을 내정간섭이 된다고 말하는 데 대해서 金泳三 당시 총재는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3만의 지상군을 주둔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정간섭이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이런 거친 말들이 거친 시대에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적어도 지식층이나 언론에 의해서는 金泳三씨의 역사관과 국가관이 제대로 검증된 바가 없었다.
문제는 金泳三씨가 역사·국가·국민을 상대하는 자리인 대통령이 된 뒤에도 독재와 투쟁하던 당시의 제한적 시각과 거친 문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金대통령이 자신을 탄압한 역대 군사정권에 대한 개인적인 정서·감정을 공식적인 용어로 나타내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자신을 과거의 포로로 묶어 두게 되고 미래로, 세계로 나갈 찬스는 놓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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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 구속은 正義를 구현했나?
11년 전에 썼던 기사를 다시 읽어보니 한국의 보수세력이 自滅해간 과정이 보인다.
趙甲濟
*아래 기사는 김영삼 정부가 5.18 특별법이란 위헌적 소급입법을 통해서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라고 지시하여 전직 두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태의 한가운데서 쓴 것이다. 요사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진압을 나치군대의 유태인 학살처럼 그린 영화가 나와 1980년 5월과 그 전해 12월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1년 전에 썼던 기사를 再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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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구속은 정의를 구현하고 있나? - 조갑제의 15년 취재기
釜馬사태 10·26 12·12 5·17 광주사태 5共비리 사건 全斗煥 구속의 全과정 속에서 正義를 찾아 헤맨 月刊朝鮮의 記錄
< 1996년 1월호 월간조선>
● 鄭昇和 총장에 대한 물 고문에서 신군부에 대한 저주는 시작되었다.
● 1989년 12월15일의 1盧3金「5共청산 대타협」은 어디로 갔나? 金泳三 총재는 그때 『내년부터는 5共청산이란 네 글자는 안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었다.
● 武士의 잘못으로 한 칼에 죽여버려야 했을 사형수에게 두 번, 세 번 칼질을 하는 것이 과연 正義인가.
● 全斗煥구속은 金泳三의 윤리적 결단인가 이기적발상인가.
● 광주사태를 거칠게 손대면 국가와 국군의 존립근거와 작동원리를 무너뜨린다.
● 全斗煥 전 대통령을 가두어 놓고 벌이는 역사재판은 불공정게임
● 1980∼90년 사이 경제성장률 세계1위. 서울올림픽의 세기적 성공·북방정책·민주화는 지울 수 없는 全, 盧의 역사.
● 한 장교의 불만 : 「차라리 전쟁이 났으면…그래야 군대 고마운 줄 알 것」
● 군대 안 간 사람들에 의한 軍매도는 군인들의 분노를 축적시키고 있다.
● 前職 대통령은 국가의 중요한 구성 요소.
현존 권력에는 맞서고 前권력에 대해서는 따뜻한 시선을 견지해 온 月刊朝鮮은 당대의 권력에 굴종한 과오를 그 권력이 시체가 되었을 때 난도질로써 씻으려 하는 작금의 언론 풍토를 목도하면서 正義구현의 원칙과 저널리즘의 原点을 생각해 보았다. 침묵하는 다수의 온건한 생각이 봉쇄되고 과격한 일부세력의 거친 숨소리가 텔레비전畵面과 신문 紙面을 거의 독점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청산」은 또다시 「恨 많은 세력」을 남기고 말 것이다. 공평한 진실규명과 상식적인 法집행을 외면하면 당대의 敗者는 후대에 가서 늘 勝者로 되살아난다. 지금은 金泳三-全斗煥 재대결의 공정한 게임 규칙을 확립할 때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오늘이 싸우다가 내일을 잃고 마는 악순환을 여기서 끊을 때이다.
正義는 구현되고 있는가
盧泰愚 전 대통령의 구속기소를 몰고 온 일련의 사건 흐름에서 최초의 한 방울을 떨어뜨렸던 기사는 1995년 6월호 月刊朝鮮에 실렸던 함승희(咸承熙) 변호사의 동화은행 수사 축소·은폐에 대한 폭로(김연극.金然極기자의 기사)였다. 이 기사를 기폭제로 하여 기자들과 정치인들의 6共 비자금에 집중적으로 파고들게 되었고 그런 시류 속에서 박계동(朴啓東) 의원의 결정적 폭로가 터졌다. 全斗煥 전 대통령의 감옥行을 몰고 온 12·12-5·18사건 再起의 과정에서도 月刊朝鮮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5년 9월호의 부록으로 공개된 「12·12사건 保安司감청 테이프」는 장군들의 긴박한 현장 육성으로써 12·12사건을 「군사반란」으로 자연스럽게 규정하도록 만들면서 신군부 사법처리 요구 운동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月刊朝鮮 기자들은 全, 盧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에 대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정의는 구현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공평한 진실규명에 입각한 상식적인 法적용은 정의구현의 2大 조건이다. 권력의 큰손이 검찰권에 개입하여 일반의 진실만 노출시키고, 다수 언론사가 앞장선 선전·선동의 바람이 일어나 상식을 휩쓸고 허문 다음 그 황폐한 心象에다가 法을 갖다대었을 때는 정의구현 대신에 마녀사냥만 있을 뿐이다.
月刊朝鮮은 12·12사건, 비자금, 광주사태에 대한 공평한 진실규명을 지향해 왔다. 月刊朝鮮 기사가 5共 청문회 때 여야 국회의원 양쪽에 의해서 가장 많이 인용된 것도, 우리는 항상 사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사건의 전체상을 그리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의 축적물들이 정의구현이 아니라 現代史파괴의 영상테러에 도용되는 작금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기자는 「차라리 특종을 하지 말았을 것을」하고 느낄 때도 있다.
서민의 정의감이 10·26 불렀다
月刊朝鮮은 지난 15년간 12·12사건을 우리 시대의 최대 정점으로 만드는데 최대의 기여를 한 매체이다. 12·12사건을 금기의 章에서 끌어낸 역사적 인터뷰(1987년 9월호 鄭昇和 증언)에서 12·12사건 녹음테이프 발굴까지 月刊朝鮮은 이 군사반란과 관련된 특종들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2·12사건의 뿌리는 그 두 달 전인釜馬(부마)사태이다. 釜馬사태는 朴正熙 철권통치에 대한 최초의 시민적 저항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중산층이 主流인 도시의 서민층이 본격적으로 학생들과 합세하여 反정부 시위를 벌인 것은 朴正熙 시대 18년 중 이것이 최초이자 최후였다. 현지를 시찰한 김재규(金載圭) 당시 정보부장은 부마사태를 민란(民亂)으로 인식했다. 이런 인식이 8일 뒤 「유신의 심장을 향하여 야수의 마음으로」방아쇠를 당기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10월16일 밤, 그때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부산 남포동 앞 대로에서 경찰 진압 트럭이 시위대의 손에 넘어가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불타오르는 현장에 있었다. 그 화염은 많은 시민들을 흥분시켰고 朴정권에 대한 공포감을 일순 마비시켰으며 카니발 같은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기자는 그 순간 문득 「아, 이 사태는 결국 계엄령을 부르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부산시민들과 학생들을 용기있는 행동으로 내몬 것은 정의감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朴正熙정권은 YH사건, 金泳三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국회의원 제명 등 잇따른 무리수를 두었다. 권력의 도구가 된 法과 정당, 그리고 어용화된 언론을 동원한 朴正熙의 强攻 드라이브는 군사작전처럼 일사불란했으나 서민들의 마음 속에선 反感이 쌓여갔던 것이다. 이 反感을 분석해보면 장기 집권에 대한 싫증, 金泳三 제명에 대한 분노, 어용언론에 대한 증오, 그리고 물가폭등과 과중한 세금에 대한 상인층의 불만이 나타난다. 그런 여러 요인들이 통합된 하나의 표현은 「비열한 권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었다.
요즘처럼 자유선거가 있었다면 『좋다, 선거 때 혼내주겠다』고 벼를 수 있었겠지만 그런 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부산 사람들은 「화가 나서」행동으로 나섰던 것이다. 釜馬사태 때 계엄군으로 투입된 것은 서울에서 급파된 공수부대였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권력의 하수인 같은 검찰과 경찰보다는 국민의 군대인 국군에 대해서 아주 높은 친근감과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믿음을 배신한 것이 공수부대였다. 그들은 단순히 「겁을 준다」는 목적하에서 무고한 행인들까지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 「대한민국에 이런 군대가 있었나」하고 기자도 놀랐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물샐 틈이 없이 계속되었던 民軍우호 관계에 최초의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우리 軍지휘부는 이 현상을 「문제」로서가 아니라 「성공사례」로 해석했다. 시위엔 공수부대를 풀어 조기에 강경진압하면 된다는 교훈, 그것을 여섯 달 뒤 광주에서 다시 적용했던 것이 民心을 모르는 우리 군 지휘부였다.
鄭昇和 총장의 비극
12·12사건, 5·17쿠데타, 광주사태 뿐 아니라 최근 일고 있는 소위 역사청산 논쟁은 10·26사건과 朴正熙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서 기인(起因)하고 있다. 朴正熙란 巨木의 그늘 아래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치 논쟁이고 권력투쟁이니, 한국은 아직도 朴正熙 시대라는 터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朴正熙의 죽음을 「민주화의 好機」로 본 것은 대다수 국민과 공화당·유정회를 포함한 기성정당이었다. 「국가안보의 위기」로 인식한 것은 일부 국민과 全斗煥 장군 그룹이었다. 金載圭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사회에서는 朴正熙 격하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부에서는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노장·非정규 육사 출신들이 朴正熙 친위세력화한 하나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나회가 뿌리를 둔 것은 육사11기 이후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이었다. 이 집단은 朴正熙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따라서 정치권과 사회에서 일고 있는 朴正熙 격하운동과 金載圭 미화 움직임에 대해서 불안 분노하고 있었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정규육사 출신들은 또 非정규육사 출신인 군상층부에 대해서 일종의 경멸감까지 갖고 있었다. 이런 장교들에게는 鄭昇和 총장의 10·26사건 당시 행적이 「지울 수 없는 의혹」으로 다가왔다. 신군부측에선 아직도 鄭昇和 장군이 그날 기회주의적 자세를 취해 결과적으로 金載圭를 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의 판단은 확고하다 鄭昇和 장군은 그날 밤 거의 최선의 대응을 했다. 金載圭와의 공모는 물론 없었다. 초기에 정보 부족으로 다소 흔들렸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인간도 그런 엄청난 상황에서는 겪을 수 밖에 없는 당황과 주저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선비 같은 장군」鄭昇和 총장의 비극은 朴正熙 대통령이 피살되는 그 현장 가까이에 金載圭와 함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이 사실은 의혹으로 증폭됐다. 역사적 변동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고 인식이다.
정규육사 장교단의 인식은 「鄭昇和 장군이 의심스럽다」는 쪽이었다. 이런 의혹은 12·12사건 그날 밤 全斗煥측에서 『이건 쿠데타가 아니야. 鄭昇和 장군을 10·26사건 수사와 관련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상사에 불과해. 그러니 육군본부측의 군출동 요구에 응해선 안돼!』라고 설득할 때 많은 지휘관들이 납득하도록 만든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鄭昇和 총장이 10·26 직후 도의적 책임을 지고 계엄사령관직을 사임했더라면, 혹은 崔圭夏 대통령이 鄭장군을 교체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1987년에 鄭昇和 장군을 처음으로 인터뷰한 것이 계기가 돼 기자는 지금까지도 그를 가깝게 만나고 있다. 鄭장군은 6·25 때는 용감한 지휘관이었고 육군참모총장으로서는 오로지 본연의 임무에 헌신하여 駐韓미군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군인이다. 국내 정치엔 무관심했지만 그것이 비난의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좋은 군인이 역사의 敗者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역사에서 과연 正義가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화두(話頭)를 던진다.
12·12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정권까지 잡게 되다
12·12 사건의 핵심은 「계획에는 없었던 쿠데타」, 즉 결과적 쿠데타라는 점이다. 군부의 패권을 잡기 위한 의도에서 수사차원의 강제연행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군사반란으로, 더 나아가서는 정권장악으로 발전한다. 요사이 신군부 출신들이 당시 합수부(合搜部) 수사과장이던 이학봉(李鶴捧)씨에게 『왜 그때(鄭총장) 연행을 서툴게 하여 지금 까지 우리를 골탕먹이나』라고 불평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李씨는 『내가 실수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나』라는 취지의 응수를 했다는 것이다. 이 농담은 진담이다.
그날 鄭昇和 총장 공관에서 총격 없이 조용하게 총장 연행이 이루어졌다면 全斗煥 장군과 하나회는 군부의 헤게모니를 잡는 데 만족하고 집권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관에서의 총격과 崔圭夏 대통령의 결재거부, 그리고 陸本측의 진압 움직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편의 병력을 동원하고 국방장관을 끌고 다니며 崔대통령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쿠데타的 군사반란」이 돼버린 것이다. 12월12일 초저녁에는 군부의 한 실력자에 불과했던 육군소장 全斗煥도 13일 새벽에는 대통령까지도 눌러버린 최강자(最强者)가 돼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反亂의 다리를 건넌 셈이었다. 살기위해서라도 정권을 향해 질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2·12사건의 10시간 동안 우리 나라 權府와 軍部의 내장 프로그램이 바뀌어버렸다. 겉으로는 헌정질서와 명령계통 같은 하드웨어가 여전했으나, 그것을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全斗煥 그룹의 장악하에 들어갔다. 권력구조의 작동에 필요한 指示語는 이제 합수부에서부터 발신되기 시작했다. 이런 2중 구조는 1979년 12월13일부터 1980년 9월1일 全斗煥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5·17 계엄확대, 국보위설치 같은 모든 중요한 사안은 崔圭夏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루어졌다. 겉으로는 合憲的 모습을 보여주었다.
全斗煥 그룹이 崔대통령을 협박한 흔적도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崔대통령은 자신이 신군부에 의해서 포위되고 고립되었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崔대통령휘하의 주요 참모 및 행정조직이 몽땅 신군부의 명령권 내지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신군부의 권력의지뿐 아니라 권력에 영합하려는 일부 한국인들의 적극적 추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保安司 정보처장으로서 신군부 집권과정에서 프로그래머役을 맡았던 權正達 정보처장은
『12·12사건 뒤에는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권력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를 실력자라고 생각해서 선을 대려고 몰려드는 이들이 끊이질 않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권력의 풍향에 너무나 민감하게 대응하는 한국 기성세력의 자세가 신군부를 「권력의 신화」로 둘러싸게 했고 그 신화는 점차 실체로 변해갔다. 권력이란 것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라 「누가 세다」고 하는 데 대한 다중의 동의인 것이다.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의 시국인식
1979년 12월12일∼1980년 9월1일 사이의 이 기간을 金泳三 정부는 이번에 쿠데타라고 못박았다. 지난 95년 7월18일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검찰부가 발표한 「5·18관련 사건수사결과」(全文은 月刊朝鮮 1995년 9월호에 수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앞에서 본 일련의 조치들(전국계엄확대·國保委 설치 등)이 外形的으로는 비록 崔圭夏 대통령의 國事行爲 또는 그 집행행위의 外觀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實質에 있어서는 朴正熙 대통령의 예기치 않은 死亡으로 초래된 권력의 공백기에 12·12사건으로 軍의 주도권을 장악한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제5공화국이란 새 正權을 창출(創出)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을 이용하여 국군보안사령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地位를 최대한 활용하여 입안, 추진한 政治的 性格의 행위들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련의 조치 과정은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그가 장악하고 있던 軍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正權과 헌법질서(憲法秩序)를 創出해 나간 정치적 변혁(政治的 變革) 과정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검찰의 고민스러운 성격규정은 정확하다. 쿠데타라고 보기에는 대통령을 협박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합헌적(合憲的)으로 보기에는 全斗煥 장군의 월권이 심하다. 「대통령의 소극적 동의에 의한 군부의 정권장악」이란 이상한 현상을 쿠데타로 보느냐, 쿠데타的 사건으로 보느냐, 合憲的 정권이양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법률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정치의 영역, 즉 힘의 관계 하에서 이루어질 성질이다. 지금은 권력을 쥔 金泳三 정부가 쿠데타로 규정, 그 수괴인 全 전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낸 상황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崔圭夏 대통령의 시국 인식이 시간이 흐를수록 全斗煥 장군과 비슷해져갔다는 점이다.
3金씨로 대표되던 당시의 정치세력과 계엄령 하에서도 파업·시위를 감행했던 학생·노조 등에 대한 대통령의 시각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당시 정치권은 崔대통령의 우유부단을 경멸했는데 崔대통령도 정치권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생각이 그를 신군부 쪽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崔대통령이 1980년 6월12일에 발표한 「국가기강 확립에 관한 담화」중에서 그는 신군부와 비슷한 시국관을 보였다. 「일부 정치세력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독점물인 양 내세우면서 국민간의 분열과 대립을 초래할 무책임한 言動을 하는가 하면, 사회불안 요인을 오히려 자극함으로써 무질서와 혼란을 가중시킨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쿠데타라면 가장 큰 피해자여야 할 崔 전 대통령은 지금껏 한번도 全斗煥측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고 있다. 95년 여름에 全斗煥 전 대통령측이 검찰에 답변서를 제출할 때는 그 초안을 연희동 측으로부터 받아서 검토한 적이 있을 정도로 崔-全 두 사람이 지금껏 가까운 것도 이 사건을 쿠데타로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부분이다.
3金도 5·17에 공동책임 져야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로 불리기도 한 이런 희한한 정권장악 과정은 12·12사건의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신군부는 朴正熙처럼 확고한 개혁의지와 비전을 가지고 주체집단을 조직한 다음 정권을 장악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우발적으로 쿠데타의 길을 가게 되었다. 12·12 그날 밤 저질러 놓은 상황이 너무 엄청났고, 그 상황이 그들을 정권 쪽으로 강박해간 면이 강하다. 全斗煥 장군은 崔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라는 통보를 받고 나와 노태우(盧泰愚) 당시 보안사령관을 불러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닌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고 말했다고 한다(盧 전 대통령 증언). 全斗煥 장군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한동안은 청와대 집무실의 그 의자에 앉아 있기가 송구해서 소파에 주로 앉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全斗煥 장군의 이런 미안함과 주저는 10·26 이후 국민들의 염원이 민주화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에서도 연유한다. 군부의 재등장은 민주화라는 대세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것을 그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1979년 12월13일∼1980년 5월17일 사이에 우리나라의 정치세력이 슬기롭고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군사정권의 재등장은 저지될 수도 잇었다는 가정이 부분적으로 성립한다. 3金씨 그중에서도 金泳三, 金大中씨가 단합하여 사회 각 부문의 욕구분출을 통제하면서 민주화 쪽으로 여론을 주도해 갔더라면 과연 신군부가 집권할 수 있었을까. 기자는 신군부의 집권은 불가능했으리라고 판단한다.
許和平 의원(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도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그래도 결국은 신군부가 집권했을 것이다」고 믿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3金씨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신군부의 집권은 그것대로 책임을 물어야 하며 3金씨가 단합 못한 책임은 또 그것대로 따져야 하는 것이다. 3金씨 중 쿠데타 기획의 경험자인 金種泌씨는 가장 정확하게 신군부의 집권 공작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崔대통령 정부나 全斗煥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야권의 두 金씨와 연대하여 군부의 재등장을 막아보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은 채 다소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
金泳三 당시 신민당 총재는 10·26사건을 결과한 것은 자신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는 확신 아래서 신민당을 민주화 세력의 정통이라 내세우고 金大中씨와 재야세력을 흡수통합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한편, 군부의 등장說에 대해선 3金씨 중 가장 안이한 판단을 했다. 金大中씨는 군부의 등장을 우려하면서도 재야세력을 활용하여 가장 도전적인 입장을 취했다. 재야·학생 세력을 결집, 활성화시킴으로써 군부의 집권의지를 꺽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추리를 가능하게 한다.
중산층은 왜 침묵했나
이때의 상황을 돌이켜 볼 때 金泳三, 金大中 두 사람이 왜 강자인 신군부를 主敵으로 삼지 않고 崔圭夏-신현확(申鉉碻.당시 총리) 민간정부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신군부의 등장을 단호하게 경고하면서도 崔圭夏 민간정부에게는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더라면 崔대통령을 全斗煥 편에서 떼내어 신군부를 고립화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崔圭夏정부로 하여금 신군부와 협조하도록 만든 것은 양金씨의 너무 가혹한 정부비판이 대통령 및 각료들로 하여금 「저런 사람들보다는 군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때문은 아닐까. 당시 崔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S씨는 이렇게 말했다.
『崔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년 정도를 잡고 이듬해 봄에 정부를 이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참아주어야 했어요. 결국 양쪽의 정치 일정이란 것이 몇 달 차이밖에 안 나는 것 아닙니까(기자 注·金泳三 총재는 1979년 11월 초 「3개월 이내에 헌법개정, 그후 2개월 내에 대통령 선거」를 주장). 양金씨가 정치일정 단축을 자주 조급하게 주장하니 혼란에 빠진 겁니다. 내각에선 양 金의 행태를 크게 우려했습니다. 정권이양이 이사가는 정도는 아닐 텐데 몇 달을 못 참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어요』
양金의 분열, 계엄령 하 학내시위 격화, 노사분규, 사북사태, 학생들의 가두 진출로 이어진 대혼란을 기다린 것은 신군부였고, 불안해진 것은 중산·서민층이었다. 부마사태 때 도심으로 몰려나온 학생들에게 콜라 사주고 담배 던져 주었던 부산 광복동·남포동의 상인들은 1980년 봄에 와서는 『생업에 지장이 있으니 시위를 자제해달라』는 호소문을 내기에 이른다. 金泳三-金大中씨의 분열은 행정부 뿐 아니라 민주화를 바라던 중산층까지도 등을 돌리게 했다. 광주를 제외하고는, 1980년 5월의 학생시위에 시민들의 응원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야당세력과 학생들은 군부-행정부-중산층이란 우리 사회의 主流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었다. 중산층이 학생편을 든 부마사태, 2·12총선, 6월사태는 정치적 변화를 몰고 왔지만 중산층이 외면한 1980년 봄, 그리고 1991년 봄(姜慶大 치사사건)의 시위는 좌절되었다. 경제발전에 의해 巨大한 세력으로 성장한 중산층이 국론분열이나 정치투쟁의 최종 심판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한국정치의 제1원리인 것이다. 5·17 후 15년, 이제 당시의 피해자였던 3金씨는 당시의 가해자였던 全, 盧 두 전직 대통령과 崔圭夏 당시 대통령을 심판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요사이 3大 방송은 金泳三 대통령이 5·17의 최대 피해자인 것처럼 강조하면서 그에 의한 全, 盧 단죄가 역사의 정의인 것처럼 보도(혹은 선전)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의 3金씨는 5·17의 피해자이면서 공동책임자이기도 하다 불의의 기습으로 정권을 빼앗긴 5·16 당시의 張勉 총리에게 우리가 그 무능함과 비겁함을 따져왔다면, 12·12사건으로 이미 예고된 쿠데타를 사전에 막지 못하고 敵前 분열로써 민주화의 기회를 8년이나 늦추어버린 3金씨, 특히 양金씨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양金씨가 全, 盧 두사람을 단죄한다는 의미는 보기에 따라서는 공동책임자들끼리의 책임전가로 해석될 소지도 있는 것이다. 최소한 역사와 국민 앞에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서 단죄의 칼을 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자격 있는 사람에 의한 단죄인가 하는 문제는 正義구현 여부를 가름하는 핵심적인 사항이다.
광주에서 5일간 느꼈던 점
기자는 1980년 5월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유혈사태를 취재했고, 그 뒤에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그 현장에서 기자가 본 광주사태의 본질과 요점은 이러했다.
경상도 출신인 기자는 그곳에서 취재를 하는 데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지역감정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아니란 느낌이 왔다. 계엄당국이 광주사태의 본질을 지역감정 쪽으로 돌린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한 진압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럴 수가』하는 분노가 정의감으로 승화된 것이다.
신군부에 의한 金大中씨의 연행도 한 촉발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金大中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는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았다(최근 검찰조사에서도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를 조종했다는 說은 부정되었다).
『全斗煥 타도!』란 구호 뒤에는 『金日成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 주기도 했다. 광주사태의 기본이념은 反共·민주화였다.
이른바 「시민군」은 軍紀를 비교적 엄정히 잡아 시민들에 대한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20사단의 광주 재진입작전은 희생자를 최소화한, 효율적인 것이었다.
기자는 5월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 구경나온 시민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청년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그는 전남도청 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관(상경)인 南모씨였다. 경북대학교 정외과 2학년에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5월21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 다행이 고마운 아저씨 집에 숨어들어 7일간 지냈다는 것이었다. 南상경을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부동산업을 한다는 50代 초반의 광주 아저씨는 아내와 함께 기자를 맞아들이더니 푸짐한 점심대접을 해주면서 『제발 지역감정 치원에서 이 사태를 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南상경도 『공수부대원들이 몽땅 경상도 군인들이란 얘기도 틀렸고, 광주시민이 경상도가 밉다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고 역설하면서 과잉진압의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기자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부산에 돌아와 광주시민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때 부산의 일부 지역에선 경상도 사람들이 광주에서 당했다고 전라도 사람이 갖고 있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군경(軍警)사망자 27명의 문제
1985년 7월초 月刊朝鮮은 광주사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 南상경을 찾아내 다시 만났는데 대우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 南씨는 『지금도 저를 살려주신 그분을 찾아 뵙고 있다』면서 「광주 아버님」이란 표현을 했다. 그때 취재차 다시 광주에 내려가 보니 광주사태 사망자 유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정보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응어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月刊朝鮮은 이 특집에서 취재기자 좌담회 기사를 실었다. 그 때 月刊朝鮮部에서는 기자 이외에도 吳 효鎭, 趙南俊 기자가 광주사태 취재경험자였다. 당시는 안기부의 언론탄압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공수부대」라는 말 대신에 「계엄군」이란 표현을 써야 했다.
기자는 이 좌담회 기사에서 과잉진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부측 통계를 나열했다.
『 계엄사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1백44명의 시민측 사망자 가운데 18%인 26명이 타박상 두부손상 자상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고, 23.6%인 34명이 19세 이하라는 겁니다.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고, 65세 노인도 있습니다』이 좌담회에서 月刊朝鮮 기자들은 그때 쟁점이 돼 있던 사망자수에 대해서 2천명說을 배척하고 2백명說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대목으로 해서 月刊朝鮮은 다소 곤욕을 치렀으나 결국은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광주사태 사망자 2천명說은 이 사태에 대한 과장이 5共 때 널리 퍼져 있었고 지금껏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광주사태를 목격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욱 과장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서울지검의 95년 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백93명이다. 민간인은 1백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이 통계에서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부분은 군경 사망자 27명이다. 요사이 여권과 일부 언론은 「광주학살」이란 표현을 쓰는데 군경사망자 27명이란 숫자는 「학살」이란 단어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학살」이란 용어는 보통 非무장의 사람들을 무장집단이 일방적으로 죽이는 것을 가리키는 데 광주사태에선 <민간인 6 對 군경1>의 비율로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학살」 은 非과학적 표현이다. 군인 사망자 23명중 12명은 상호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자로서 시민측의 공격에 의한 순수 군경 사망자는 15명이다.
1988년 민화위(民和委) 증언에서 소준열(蘇俊烈) 당시 全南北 계엄 분소장은 『민간인 사망자의 검시 결과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이었다』고 말했었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민간인 사망자 45명 對 군경 사망자 15명」즉 3대1의 비율이 된다.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바라보던 광주사태를 공수부대 입장에서 취재하기로 한 것은 1988년에 접어들어 민주화의 물결에 따라 언론자유가 만개하기 시작할 때였다. 광주사태 8년째가 되는 그 해 5월29일 오전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앞에는 30代 청년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광주사태 부상자들이었다.
20사단 출신 이명규(李明珪)씨는 5월27일 새벽 광주로 진입하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공수11여단 출신인 金東哲·경기만(慶箕萬)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김은철(金殷鐵)·배동환(裵東煥)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났다.1980년 중반까지는 특전사와 육본에서 신경을 써주고 화환도 보내주곤 했는데 그 뒤로는 참배객도 수백명에서 수십명으로, 다시 수명으로 줄러들었다. 그 열흘 전 광주 망월동 묘역에 모여들었던 수만 인파에 비해서 이곳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국가와 軍이 먼저 그들을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수부대원의 시각
기자는 광주사태 현장에선 저승사자같이 보였던 공수부대원들을 그 뒤 수십명 만났다. 악귀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한국인이었다. 평균적 한국인보다도 오히려 더 순진하고 우직한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서 취재한 결과는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에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란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공수부대의 시각으로 본 광주사태는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경험했던 사태와는 크게 달랐다. 광주사태의 출발점이 된 공수7여단의 광주투입. 신우식(申佑植) 당시 여단장은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계통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이희성(李熺性) 당시 계엄사령관은 民和委에서 『광주사태의 발단은 계엄군이 전국 31개 대학에 진주, 평정을 회복시켰는데 유독 전남대학교에서만 투석(投石)으로써 도전하였으므로 강경진압에 나서게 되었다』고 증언, 사태의 원천적 책임을 학생들의 「불법시위」로 돌렸다. 7여단 35대대 3중대장이었던 박병수(朴炳洙)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기자가 취재차 만났을 때 그는 부평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이 가장 많았다』면서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갖고 놀러가는 심정으로 이동했다』 고 말했다. 시위진압 기구로는 사과탄과 진압봉이 전부였고, 방석모·방패·최루탄 발사기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학생이 돌을 던지니까. 우리도 강하게 나간 것입니다. 시위대가 군인이 나타났는데도 흩어지지 않으니 기분이 상합디다. 동료들이 돌을 맞아 다치니 부하들이 흥분했어요』충분한 시위진압 장비 없이 투석에 노출되자 공수부대는 더욱 가혹한 진압으로 나왔다. 이 과잉진압이 백주의 도심에서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 벌어지니 시민들도 흥분했다. 이런 감정의 상승작용이 광주의 비극으로 치닫게 된 원인이 됐다.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를 통해서 기자는 그때까지 견지해왔던 시각과 인식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물을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가 가치판단에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새삼 실감하였다. 공수부대도 시위대와 시민들에 대하여 대단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11여단의 副지역대장 김태룡(金泰龍)씨(1988년 당시 40세·회사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부상당해 한쪽 다리를 못쓰고 있다. 광주시민이나 우리나 같은 피해자다. 차라리 진상조사가 철저히 됐으면 좋겠다. 너무 군인들만 몰아붙이는데, 나는 내 부하가 시위대의 APC장갑차 돌진에 의해 치여 죽는 것을 목격했었다. 우리는 광주로 갈 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어떤 선입견 없이 진압에 임했다.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동료가 다치니까, 아무리 부하를 말려도 강경 진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압봉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가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지리에 밝아 더 열심히 진압에 나섰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현역대령은 『부하들이 군중 속에서 고립되어 실탄을 달라고 무전으로 수십 번 호소해왔다. 나는 참모장에게 실탄지급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는데 참모장이 선무에 주력하여 좀 참아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야 이 xx야, 네가 현장을 모르니까 그따위 소리하는 모양인데」라고 상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발포지시는 없었다
발포는 상부 지시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의 기사를 일부 인용한다. <5월21일 오전 공수부대는 수십만으로 불어난 광주시민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취재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전 10시54분 : 땅을 파고 통곡하는 군인들의 모습 보임.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와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5월21일 오후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는 수십만의 시위군중과 약1천2백명의 7, 11여단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금남로를 맡은 11여단의 3개 대대 병력은 분수대 앞에 APC장갑차 한 대를 세워놓고 그 장갑차를 믿고서 횡대로 서 있었다. 시민과 공수부대원 사이의 거리는 10여m도 되지 않았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시민 측에서는 이날 새벽 아세아 자동차에서 빼앗은 장갑차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은 카빈·실탄 등으로 무장한 이들도 있었다. 도청앞 광장에서는 헬리콥터가 자주 내렸다가 떴다가 하면서 서류 등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팽팽한 대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장갑차 때문이었다.
11여단 소속 통신병 우기만(慶箕萬)씨의 증언.
『우리 등 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측 장갑차 한 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 명이 깔리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공수부대 대열의 뒤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南東成 상경은 이렇게 기억했다.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동료가 치여죽는 장면을 목격한 공수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실토했다>
1988년까지는 정웅(鄭雄) 31사단장(88년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은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반대한 義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기자의 취재 결과 그는 과잉진압 부대인 공수부대 5개 대대를 자신의 지휘권 下로 배속받았으므로 지휘 책임을 모면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호용(鄭鎬溶)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내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鄭雄씨의 주장대로 공수부대에 대한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검찰이 밝힌 사실관계가 가장 정확
95년 7월에 발표한 5·18사건 관련 수사 결론에서 서울지검은 기자의 이상 취재 결론과 거의 일치하는 판단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1995년 9월호 月刊朝鮮에 全文게재).
첫째, 검찰은 공수7여단의 광주투입은 정권장악에 필요한 유혈사태를 유발하기 위한 음모였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둘째, 발포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들의 공분(公憤)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發砲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將校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自衛 目的)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휘권 二元化는 없었다.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31사단장(鄭雄)과 戰敎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되었다.
넷째, 헬機 기초소사의 증거는 없다.
다섯째, 全斗煥 합수본부장과 盧泰愚 수경사령관은 광주사태 진압작전에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다. 광주사태 진압은 보안사령부가 아닌 계엄사령부의 전권 하에서 이루어졌다.
여섯째, 5월21일에 광주지역에 투입된 20사단은 광주가 무장시위대의 손에 넘어간 뒤 광주 재진압작전에 참여했을 뿐 문제의 과잉진압과는 무관하다.
일곱째, 약 20명의 무고한 시민이 광주시 외곽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오인사격 및 보복사격을 당해 사망했다. 기자는 적어도 사실관계에 관한 한 검찰의 이 조사결과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검찰이 밝힌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反論이 별로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재수사가 실시되어도 검찰이 2백69명의 관련자를 조사, 이미 확정한 사실관계는 뒤집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무슨 죄명으로 기소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최근 언론과 여권은 광주사태의 책임을 全斗煥 당시 합수본부장에게 물으려고 하는데 직접적인 연결성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언론은 또 박준병(朴俊炳) 당시 20사단장을 광주사태 진압 책임자로서 구속할 것이라는 한 여권 소식통의 말을 검증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20사단의 2개 연대는 광주가 무장시민들에게 넘어간 뒤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광주 외곽에 도착했고, 27일 재진입작전 때 광주의 서구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는 작전을 했을 뿐이다. 과잉진압이나 학살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무장시민군과 교전한 것밖에는 없다. 그런 20사단의 사단장을 구속한다는 것은 무장시민군에 대한 무력진압 자체를 불법화하는 것을 뜻하며 군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마도 朴의원이 金泳三 대통령의 직접 만류를 뿌리치고 자민련(自民聯)으로 옮겨간 데 대한 괘씸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 검증 없이 보도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사태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 있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저지른 기자들과 그런 미숙한 기자를 이용한 정치인들은 결과적으로 국가와 국군을 무력화시키려는 작당의 공범관계인 셈이다. 대통령의 결단을 전폭적인 응원이라 믿고 일부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벌이는 마구잡이식 보도와 선동, 그리고 음모는 그 자체가 또 다른 보복을 부를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자중자애(自重自愛)할 때이다.
국가와 군대의 존립근거를 건드리는 민감한 사안
광주사태의 과잉진압을 문책대상으로 삼는다면 우선 공수부대의 지휘자인 31사단장 鄭雄씨가 사법처리 대상이 된다. 검찰이 지휘권 二元化는 없었다고 했으므로 鄭鎬溶 의원의 사법처리는 불가능하다. 요사이의 보도대로라면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신군부의 당시 실세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야 일부 국민이 만족할 것인데, 鄭雄씨를 처벌하면 또 어떻게 될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과잉진압을 처벌대상, 무장한 시위대에 대한 정상적인 진압 작전은 합법적으로 판단하여 면책하는 것이 현재의 사실관계로서는 합리적 선택인 것 같다. 진압행위 자체를 불법화해버리면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어진 군대를 거세해버리는 결과가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선량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무기를 들어도 군대가 진압을 꺼리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특히 연대장이 대대장 등 실병 지휘관을 처벌하면 상황에 따라 상관의 명령을 거부해도 좋고 그래야만 후세에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기회주의적 사고방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 광주사태를 관용으로 해결하는 데도 반대가 많지만 응징으로써 정의를 세우자는 논리도 실제에 적용할 때는 국가와 군대의 존립근거와 관계되는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게 된다는 점에 고민거리가 있는 것이다.
鄭총장을 물고문한 업보
기자는 1980年代에 5공화국의 출생과정을 취재하면 할수록 12·12사건이야말로 일련의 사태에서 뿌리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작가 천금성(千今成)씨가 신군부의 지원하에서 썼지만 출간이 금지되었던 「12·12사건 비록.秘錄」의 초고는 이 사건과 관련된 기초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인 文書였다. 全斗煥의 시각을 반영한 이 문서에 대응할 만한 최초의 기사는 1987년 9월호 月刊朝鮮에 실렸던 「鄭昇和증언 : 10·26과 12·12」였다.
이 인터뷰를 통해서 기자를 신뢰하게 된 鄭 전 총장은 기자에게 구술 녹음테이프 16개(30시간 분)를 넘겨 주었다. 12월12일 연행되었다가 내란방조죄로 유죄확정 판결을 받고 1980년 여름에 출소했던 鄭장군은 자신의 恨을 녹음테이프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내가 온갖 치욕을 참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는 국민들에게 진실된 증언을 하기 위해서다』라는 대목도 있었다. 기자는 이 녹음테이프를정리하며 「12·12사건 鄭昇和는 말한다」는 회고록으로까지 출판사에서 출간되도록 하였다. 이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기자가 이를 부드득 갈면서 화가 났던 대목이 있었다. 鄭장군은 다소 처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녹음을 두었다.
<내가 갇혀 있던 건물 옆에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다. 2층으로 끌고 가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는데 그 방이 보기에 고문하는 방인가 싶었다. 그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긴 철제의자에 앉히더니 거기다가 비끌어 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놈들이 나를 고문하려는 구나 직감하면서 주위에 있는 5∼6명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날 고문을 할 모양인데 내가 육군대장으로서 너희들에게 고문당할 수는 없다. 고문들 당하기 전에 내 예비역 편입원을 써놓고 당해도 당해야겠다.』 그중 한 명이 『그런 것 안 써도 이미 예편되었으며 참모총장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두 명이 나를 의자에 비끌어 매며 머리를 뒤로 잡아 젖히고 여러 명이 소리를 꽥꽥 지르고 위협을 하며 분위기부터 살벌하게 만들더니 곡괭이 자루인 듯한 몽둥이로 내 허벅지 위를 치고, 정갱이를 치고, 목뒤를 치기도 하며, 마치 미처 날뛰는 것처럼, 서로가 격려라도 하는 것처럼, 신명이 난 듯 교대로 치며 무조건 나더러 『바른대로 말해, 이 자식, 김재규하고 공모했지. 다 알고 있는데 이 자식, 거짓말해야 소용없어』하며 마구 날뛰었다. 그러한 고문은 견딜 수 있었으나 머리를 제끼고 얼굴에 물수건을 씌운 다음 주전자 물을 계속 얼굴 위에다가 들어붓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6·25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가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군사반란의 지휘자를 낙선시키려고
合搜部측에선 물고문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기자는 鄭장군의 인격에 비추어 그의 증언이 진실이라 믿고 있다. 장교는 사익(私益)이나 영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국익(國益)을 수호하는 직업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직업과는 다른 의무를 하나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을 기꺼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장교의 명예심은 거국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재판에 넘어가도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현역 대우를 받고 군복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도 신군부는 鄭총장을 마치 절도범 다루듯 하였다.
오늘날 그들이 받고 있는 갖은 모욕·모함·선동·비난의 출발점은 鄭총장에 대한 비열한 대우일 것이다(그들은 鄭총장에게 죄수복을 입혀 법정에 서게 했고 사진을 찍어 언론에 선전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힘이 있었을 때 12·12사건 敗者측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위로하고 배려했더라면 그 뒤의 사태전개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기자는 갖고 있다.
12·12사건에 대한 신군부측의 당시 발표문에 따르면, 또 신군부측 인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鄭昇和측 경비병들이 먼저 합수부(合搜部) 수사요원들에게 발포, 12·12사건이 유혈사태로 치닫는 원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記者는 1987년에 鄭昇和 총장공관의 당시 당번병·관리주임을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合搜部 요원들이 비무장 상태의 鄭총장 부관·경호장교를 등 뒤에서 먼저 쏜 것이 확실했다. 1994년 검찰조사에서도 그렇게 밝혀졌다. 신군부는 비열한 행동을 비열하게 조작·발표한 것이다. 1987년 大選을 앞두고 기자는 盧泰愚 후보를 「군사반란의 주모자」로 단정하는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군부 인사들을 인간적으로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29선언이후 언론자유는 상당히 확대되었으나 「군사반란」이란 표현은 기자의 영역 밖이었다.
기자는 격문 같은 글을 써 통일민주당 선거 대책본부의 핵심 참모에게 건네주면서 수십 만 장의 팸플릿으로 만들어 뿌리면 盧후보를 낙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선동했다. 그 며칠 뒤 기자는 그 사식 원고가 언론사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자의 교정 필적을 알아본 어느 선배기자가 나한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金泳三 후보 측근은 그 원고를 여러 부 복사하여 가자들에게 돌린 모양이었다. 기자는 왜 그런 무모하고 신의 없는 짓을 했는지, 왜 그 자료는 끝내 인쇄물로 되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이 무렵 회고록 「12·12사건 鄭昇和는 말한다」가 인쇄소에서 제판작업을 막 끝낸 직후 정보형사에게 발각돼 필름이 압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자는 책이 출간될 수 없다면 鄭장군이 기자회견을 갖고 책 원고를 공개하도록 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3백페이지 책의 사식 본을 수십 부 복사하여 「거사」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찰이 필름을 돌려주었다. 이 무렵 鄭昇和 장군은 통일민주당에 부총재로 영입되어 大選운동기간중 12·12 반란을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鄭柄宙(12·12 당시 육군헌병감)도 기자회견을 갖고 과거의 상관을 도왔다.
이 두사람은 장태완(張泰玩씨.당시 한국증권전산 사장)를 합류시키려고 애썼으나 張씨는 거절하고 신병치료차 渡美했다.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정병주(鄭柄宙)씨였다. 12·12사건 때 부하에게 총격을 당해 팔을 다쳤고 비서실장(김오랑 소령)을 잃었던 그는 신군부 측의 회유를 거절한 채 분노를 가슴에 묻고 등산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신군부의 핵심이 특전사 출신들이고 거의가 자신의 부하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욕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鄭鎬溶이는 참 의리있는 친구요』라면서 기자를 말리는 입장이었다. 鄭柄宙씨는 1989년 초에 변사체로 발견됐는데,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타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억지와 생떼가 활보하는 中世사회
1987년 12월16일 大選에서 盧泰愚 후보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은 金泳三·金大中 두 후보였다. 두 사람은 정권이 눈 앞에 보이자 1980년 봄에 이어 또 다시 분열했다. 두 사람이 단합했더라면 盧泰愚비자금사건이 생길 이유도, 이제 와서 全 전 대통령이 새삼 감옥에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선진국 같았으면 양金씨는 정계를 물러나야 했겠으나, 지역감정 구도는 두 사람에게는 늘 피난처가 돼 주었다. 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13代 大選 개표과정에 컴퓨터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재개표는 요구하지 않았다. 선거개표 과정과 컴퓨터에 대한 초보적 상식만 가져도 웃고 치워버릴 이 억지는 놀랍게도 그 뒤 상당기간 사실인양 살아서 꿈틀거리면서 사회를 어지럽혔다. 어느 언론기관도 딱 부러지게 컴퓨터 부정설은 거짓이라고 못박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말에 컴퓨터 부정설 같은 허위가 맞아죽지 않고 대낮을 활보할 수 있는 나라는 중세암흑기에 있어야 할 나라일 것이다. 그런 억지를 봉쇄할 용기가 없는 지식인 사회는 권력남용과 선전·선동 앞에 서면 작아져 버린다. 오늘날 이 땅을 휩쓸고 있는 선정적 분위기는 바로 이 컴퓨터 부정설을 용인한 지식인의 비겁성과 닿아 있는 것이다. 月刊朝鮮과 기자는 1987년 大選결과에 승복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곧 盧泰愚 정부를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6·29선언에 이은 大選을 통해서 국민은 「12·12사건의 주모자」를 대통령으로 뽑음으로써 적어도 5共, 6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타협적 선택을 한 것이다. 5, 6共의 정통성을 전면 부정하는 사람들은 盧대통령을 뽑은 36%의 투표자들을 무시하는 오만한 者들이다. 더구나 이 선거에서 金泳三 후보는 12·12를 부각시켜 「군정종식」을 구호로 걸었으나 패배했다. 이는 12·12사건이 정치적으로 일단 심판을 받았음을 뜻한다.
6共출범 이후 記者는 5共비리 취재에 몰두하게 되었다. 특히 全斗煥대통령의 정치자금 부분을 깊게 파고 들었다. 1988년 5월호 기사 「全斗煥의 인맥과 금맥」, 1989년 1월호의 「全斗煥 잔금 1백39억원의 비밀」은 全斗煥 정치자금의 모집·관리·사용에 대한 심층보고서였다. 1989년 1월호 기사에서 기자는 全斗煥 정치자금의 총규모를 약 6천6백억원으로 추산해냈다. 이 기사는 야당에서 지금도 全斗煥측을 공격할 때 활용하고 있다.
현존권력과의 관계 하에서만 正義는 구현된다.
記者는 全斗煥 전 대통령의 과오를 폭로하는 기사도 많이 썼지만 그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오해·과장·조작을 밝히는 글도 많이 썼다. 사실에 충실하게 기사를 쓰다가 보면 결과적으로 때로는 불리하게 때로는 유리하게도 되는 법이다. 의도를 갖고서 미리 설정된 방향으로 사실을 조작하고 꿰맞추어 가는 버릇을, 月刊朝鮮은 선정적 보도가 판치는 시대에도 피하려고 애썼다. 記者가 쓴 기사는 5共청문회때 질문의 근거로 많이 활용되었다. 하지만 기자는 全斗煥측을 과장된 文法으로써 난도질하는 기사나 청문회가 결코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5共시절 안기부의 압력과 맞서 가면서 한 줄의 진실이라도 더 지면에 반영하려고 바득바득댔던 때가 더 정의를 구현하고 있었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정의란 것은 현존권력과의 관계下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이미 시체가 돼버린 前권력에 아무리 칼을 근사하게 꼽아보았자 복수나 한풀이는 될지언정 정의의 구현은 아니란 생각이 소신으로 되었다. 현존권력, 쉽게 말하면 현직 대통령과는 늘 긴장관계를 유지하되 전직 대통령에 대해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것이 月刊朝鮮의 正義감정이 되었던 것이다.
5共 때는 鄭昇和 장군측 사람들과 친했던 기자는 6共 때는 許和平 張世東 같은 신군부측 인사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신군부의 시각으로 12·12사건이나 5·17, 광주사태를 바라보면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인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양쪽과 다 친해진 관계로 해서 기자는 똑같은 사실을 놓고도 인식·해석하는 방식이 정반대가 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자신이 개입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철할 수 있으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에 대해선 절대로 객관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9년 月刊朝鮮 6월호에 기자는 「6·29선언, 全斗煥 작품이다」는 題下의 기사를 썼다.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가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뜻을 거슬려 감행했다고 알려졌던 6·29선언이 실은 全斗煥 대통령이 먼저 발상하고 盧대표를 설득하여 수용하도록 한 거대한 정치 쇼였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또 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1987년 大選때 약 1천5백억원의 선거자금을 모집, 盧후보를 지원했고 퇴임 때는 5백50억 원의 잔금을 盧대통령에게 인계했다고 보도했다. 全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면서 국가에 헌납한 1백39억원도 사실은 청와대에서 50억원을 보태서 만든 돈이라는 사실도 폭로했다. 이들 내용은 그 뒤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다.
현존 권력의 가장 아픈 급소를 강타한 이런 종류의 기사가 공개될 수 있었다는 점은 盧泰愚 대통령이 언론자유를 얼마나 신장시켰는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6共 때는 어느 기자도 기사와 관련해서 정보기관에 불법적으로 연행되지 않았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관한 한 金泳三 정부 때보다 盧泰愚 정부 때가 훨씬 좋았음을 많은 기자들은 체험 사례로써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때처럼 지금 한국언론이 金泳三 대통령의 급소, 예컨대 14代 大選자금문제를 과감하게 보도할 수 있겠는지 자신이 없다. 金泳三대통령은 야당총재 시절에 자주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만드는 자유다』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언론자유의 후퇴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아부者의 완장
1988년∼89년 사이의 5共비리 보도 선풍 때 기자가 발견한 또 하나의 언론풍토는 5共시절 권력에 아부했던 언론사·언론인들일수록 全斗煥 죽이기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지금도 비슷한 현상이 3大방송을 중심으로 하여 되풀이되고 있다. 죽은 권력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김으로써 前정권시절의 어용을 면책받으려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요사이 全斗煥 죽이기, 金泳三 높이기에 앞장서고 있는 상당수의 언론인들은 옛날에 金泳三 죽이기, 全斗煥 높이기에 발벗고 나섰던 인물이다. 현직 대통령에겐 아부를, 그가 전직 대통령이 되는 순간부터 돌멩이를 던지는 언론의 행태는 그 책임의 일부가 권력으로 언론자유를 놀러놓은 대가를, 그리고 검찰과 언론사 社主를 통해 진실을 덮어버린 그 앙갚음을 퇴임뒤에는 몇 배로 당하는 것이다.
「남자다움」이란 기준으로 얘기한다면 현존권력과 정정당당히 맞서고 그 권력의 퇴장 뒤에는 화해하는 것이 사나이다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현직 대통령부터 권력의 힘을 빌지 않고 당당한 승부를 벌여야 한다. 金泳三대통령이 盧·全 양 전직대통령 구속사태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재임기간에는 검찰과 언론의 힘을 빌어 大選자금 문제를 덮을 수 있을지 모른다. 퇴임 뒤에는 반드시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불공평하게 당할 가능성이 있다.
「전직 대통령」이란 자리는 집안의 할아버지와 비슷하다. 아무 것도 생산하지는 않지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한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金泳三대통령 시절에 와서 전직 대통령 세 사람이 모두 불행하게 되고 망가져 버린다면 이 상처를 복원하는 데는 또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1989년 12월16일의 「5共청산 大妥協」
1989년 12월16일자 한국일보 1면 톱의 통단컷 제목은 「5共청산 大妥協」이었다. 15일 밤 청와대에서 열린 盧泰愚 대통령 金大中 평민당 총재 金泳三 민주당 총재 金種泌 공화당 총재 사이의 6시간 회담에서 5共청산 문제를 연내에 종결짓고 90년대를 화합의 분위기로 맞아들일 것에 대하여 완전히 합의했다는 보도였다. 11개 합의사항도 발표되었다. 백담사에 은든중이던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국회로 불러내 1회에 한해 증언을 듣고, 鄭鎬溶의원을 광주사태 해결 차원에서 공직에서 사퇴시키며, 광주시민 명예회복·보상법을 제정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 다음날 金大中총재는 『이번 회담결과로 광주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가』란 기자 질문에 대해서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할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金泳三총재는 『내년부터 5共청산회의를 안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정치권이 그 넉자를 쓰지 않는게 좋다』고 말했다. 1989년 12월31일, 갈등의 80년대를 청산하는 마지막 통과의례의 희생물처럼 국회의 5共비리-光州특위 연석회의장에 끌려나온 全斗煥 전 대통령은 온갖 모욕과 욕설을 다 받아야 했다. 참의원 회의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全斗煥 전 대통령의 증언을 듣기 위해 기자도 2층 방청석에 자리잡았다. 1盧3金의 약속대로 한 시대의 아픔을 총괄적으로 마무리하는 그 역사적 자리에 있고 싶었던 것은, 기자의 개인적 삶의 궤적도 全斗煥과 유관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기자는 全斗煥 권력에 의해 두 번 해직되었다). 기자의 다소 감상적 기대는 구역질 나는 정치쇼에 의해 능욕되고 말았다.
이날 야당 국회의원들은 全 전 대통령을 상대로 엄정한 질문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자세가 아니라 누가 전직 대통령에게 더 많은 창피를 줄 것인가 하는 경쟁을 벌였다. 全 전 대통령의 답변서 낭독을 다 듣고 질문을 하도록 돼 있었는데 답변서 낭독 도중도중에 야당의원등이 뛰쳐나와 욕설과 삿대질을 해대는 바람에 일곱차례나 정회(停會)가 되었다. 급기야는 全斗煥 전 대통령의 증언대를 향해 노무현(盧武鉉)의원(민주당)이 명패를 던지는 작태까지 벌어졌다. 全 전 대통령은 밤 12시 직전 기자들을 대기실로 불러 낭독을 못다 한 답변서를 15분 정도 읽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평민당의원 및 보좌관들이 몰려나와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全 전 대통령을 1990년대로 보내버렸다.
기자는 연출자의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저질연극을 구경하면서 1980년대의 마지막날을 보낸다는 것이 억울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국회를 나오는 길로 순복음교회로 직행하여(기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새해맞이 예배에 참석, 그 더러운 80年代의 탁한 공기를 날려보냈다고 믿었던 것이다.
김윤환(金潤煥) 증언 : 『金泳三 총재가 盧대통령이 나서서 全斗煥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감동』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근거는 盧대통령이 1990년 1월1일 신년사에서 과거사 문제의 종결을 선언했고, 金泳三 총재도 「5共청산을 통해 심화되었던 사회 각 부문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할 것」을 다짐하였기 때문이다. 1월4일자 朝鮮日報 사설도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5共문제에 매달리기엔 90년대의 과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거는 이정도로 마무리짓고 이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진정한 5共청산의 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5共청산을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는 것이 당시 정치권과 국민의 합의였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며칠 뒤 金泳三총재는 5·16 쿠데타 세력의 대표자 金種泌 총재, 5·17세력의 대표자 盧泰愚 대통령과 손잡고 3黨합당을 결행했다. 3당합당은 이른바 5공청산을 바탕으로 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이 민자당 정권에서 金泳三 대표는 盧泰愚 대통령과 동거하면서 국정을 이끌었다. 6共후반기의 잘, 잘못에 대해서 두 사람은 공동책임자이다. 金泳三 대통령에 의한 6共청산은 자신을 먼저 부정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3당 합당의 막후 조정자였던 金潤煥씨(現 신한국당 대표)는 1994년 8월호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89년 1월에 차남 賢哲씨 집으로 가서 金泳三 총재를 만났습니다. 3당통합을 제의했더니 金총재의 반응은 이랬어요. 「잘 알았다 그러나 5共청산도 하지 않고 어떻게 민정당과 손잡나. 盧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나. 全斗煥씨가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全斗煥씨를 살려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아무리 정치판이지만 사람이 신의를 지켜야지, 全斗煥를 살리려면 모든 것을 걸고 중간평가를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나 같으면 그렇게 하겠다」나는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990년 1월 경제개발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보수대연합이란 민자당이 창당되었을 때 대한민국의 그 누구가 그 5년 뒤 5共청산이 다시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다른 사람도 아닌 金泳三 대통령에 의해서 全斗煥 전 대통령이 감옥으로 가는 사태를 꿈에라도 짐작이나 했을까. 더구나 5共문제 마무리에 합의했던 金大中·金種泌 총재까지도 金泳三 대통령보다도 더 강경한 처벌방식(특별검사제 도입)을 주장하였으니 우리는 혹시 타임캡슐을 타고 1980年代로 돌아간 게 아닐까(최근JP는 태도 완화). 1992년 大選때도 12·12, 5·17, 광주사태는 쟁점이 되지 않았었다. 金大中후보는 故 朴正熙 대통령의 묘소에까지 참배, 역사와의 화해를 선언했다. 金泳三 후보는 민자당內 경선에서 이기자 全斗煥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일곱 대통령을 위한 변호
月刊朝鮮은 大選의 해인 1992년에 대통령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하나는 5共청와대의 통치사료담당 비서관이었던 金聲翊씨가 쓴 「全斗煥 육성증언」, 다른 한 권은 1993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 만든 「한국의 대통령」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에는 「우리의 일곱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윤보선(尹潽善) 朴正熙 崔圭夏 全斗煥 盧泰愚 金泳三 이야기」란 부제(副題)가 붙었다. 기자는 부제를 붙이면서 잠시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대통령이 일곱 명, 더구나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 곧 세 사람으로 늘겠구나 하는 든든함과 안도감.
이 책은 金泳三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그 다음날 시중에 나와 기록적 판매량을 보였다. 이 책의 머리글에서 기자는 月刊朝鮮식 대통령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月刊朝鮮은 그동안 「대통령은 국민들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는 뜻이 담긴 기사들을 주로 써왔다. 그런 시각을 한번 바꾸어 「국민들도 대통령의 고독과 고민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이 책에 그런 시각이 투영돼 있다. 즉, 국민과 대통령은 서로 마주보아야 하는 사이라는 얘기다>
이런 記者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역사는 요동치며 흘러갔다.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이념이나 우방보다도 민족이 더 중요하다」면서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나라 안을 향해서는 한국병의 병소를 「도려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대조적인 태도는 그 뒤 국정운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북한(안보·외교·이념문제 등) 및 現代史 관련정책
미전향사상범 이인모(李仁模)노인 무조건 송환, 北核문제에선 對北유화정책, 굴욕적 쌀 북송(北送), 제86우성호 및 안승운(安承運) 목사 납북에 속수무책, 金日成사망에 金대통령은 『정상회담 성사 안돼 아쉽다』고만 논평, 태극기 강제 하강사건, 비너스호 선원 억류에 굴욕적인 對北사과, 사회주의 지향의 운동권 출신이 여권 깊숙이 진출, 국사교과서에서 대구공산폭동을 항쟁으로 美化하기도, 日帝잔재 및 前 정권의 상징물 제거 차원에서 옛 중앙청과 역대 대통령 집무실 철거, 훈령조작사건 때 3급비밀문서를 야당의원에게 누출시킨 혐의자(현직각료)를 적발하고도 계속 重用, 「임수경 밀입북사건의 배후총책」이라고 안기부가 발표했던 윤한봉씨를 일체의 신문절차 없이 입국 허용, 국무총리는 물론이고 안보수석 포함 차관급 중 42%가 군대 안갔다온 사람….
對內정책
하나회 숙청, 민자당에서 金種泌 제거,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 『5·16은 역사를 후퇴시켰다』, 文民정부 강조, 정부의 정통성을 4·19-광주사태-6월 사태의 연장선상에 설정, 「5천년 썩은 역사」云云, 훈령조작사건 때 電文유출자는 보호하고 對北강령론자 李東馥씨는 면직, 전직 대통령 두 명 구속…. 이런 양대 정책흐름의 성격을 보수층 일각에선 「北韓과 좌익에 대해선 온건하고 보수·우익에 대해선 가혹하다」는 평을 하고 있다. 한 12·12 관련자는 『어떻게 된 게 우리를 공격하는 데 앞장서는 이들은 군대 안간 사람들뿐인가. 군대기피는 부패보다도 더 나라에 유해하다』고 까지 말했다.
金泳三 대통령은 과거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부정적 과거」 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金대통령은 『나는 지금부터 돈을 안 받는다』고 선언하며 결백을 과시한 뒤 司正드라이브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공평성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과거문제로 따진다면 金대통령을 필두로 하여 돈으로부터 결백을 주장할 정치인은 거의 없는 데 무슨 기준으로 감옥 보낼 사람과 봐줄 사람을 결정하느냐는 것이다. 그 기준은 권력을 쥔 쪽에서 결정하는 것이고, 그러니 저절로 金泳三 대통령을 도왔던 사람, 현정권에서 힘 있는 정치인들은 법을 빠져나와 버렸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검찰의 권위가 손상받게 되었다. 관용이 없는 과거지향적 司正은 공평성이 결여된, 즉 正義가 없는 사정이 돼버릴 소지를 안고 있었다. 과거지향식 司正은 또 필연적으로 거의 모든 정치인들을 권력기관에 의해 약점 잡힌 사람들로 만들게 되었다. 이런 정치판에선 논리나 정책대결이 될 리가 없다. 여당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훤히 아는 대통령에게 굴종하고 야당의원들은 억지, 트집, 또는 음모로써 공세적 방어를 할 수밖에 없으니 國事는 늘 뒷전이고 정치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돼버린다.
결투-문화가 없는 사회의 모습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출발점은 말(言) 事故였다. 1993년 봄 황인성(黃寅性) 총리가 야당국회의원의 질문에 대해서 『12·12를 불법으로 볼 수 없다』 고 대답했다. 그 며칠 뒤 청와대에서 12·12 사건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발표문을 내놓으면서 12·12사건에서 연유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역사를 해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단죄까지 하겠다는 태도가 오늘의 상황을 만든 결정적 인자였다. 신군부와 맞섰던 鄭昇和 장군측이 12·12사건을 형사고발함으로써 최초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어서 호남 및 재야세력이 5·17, 광주사태 관련자를 고발하였다.
기자는 鄭昇和 장군에게, 12·12의 피해자들이 역사적 사건을 법률로써 시비하려는 자세는 기자의 정의감정에 비추어 좋지 않게 생각된다는 뜻을 전했다. 鄭장군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들이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라고 했다. 月刊朝鮮은 12·12사건 및 하나회 관련 기사를 통해서 정치군인들의 실상을 알리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해왔으나 1993년 8월호에선 처음으로 12·12사건의 敗將들을 비판했다(崔普植 기자-「12·12사태의 패장(敗將)들이 져야할 역사적 책임은 무엇인가」).
이 기사는 「막강한 무력을 갖고도 치밀한 계획도 없는 소수의 合搜部측 기습을 받고 어이없이 손을 들어 민주화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 敗將들은 역사 앞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하나」라고 질문했다 최보식(崔普植) 기자는 「崔圭夏대통령을 보위하지 못한 책임,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부대를 장악하지 못한 책임, 陸本지휘부가 진압병력의 동원을 포기한 책임, 계엄사령관이 合搜部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한 책임,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차장이 지휘권을 포기한 책임」을 물었다. 한국은 결투의 전통이 없는 사회다. 따라서 당대의 승부에 승복하지 않고 후세에 가서 前代의 승부는 새로 가려진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식 「역사청산」의 핵심이다.
당대의 승자(勝者)는 후대에 가서 패자가 되고 당대의 패자가 역사의 승자가 되는 이런 청산방식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①패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일과
②부적격자가 소위 역사청산의 칼자루를 잡는 일이다.
다수의 침묵 속에서 자라난 처벌요구 운동
12·12, 5·17, 5·18 이 1995년의 말에 와서 다시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이슈가 되리라고 믿었던 국민은 93년 당시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몇 차례의 여과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역사의 章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던 다수 국민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불씨는 서서히 자라 번지기 시작했다. 처벌요구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그 세력의 일거수 일투족을 친절하게 보도해온 대다수 언론이었다. 광주사태를 가장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시절에 겪고 1980년대의 캠퍼스를 호흡하면서 체질적으로 反 全斗煥이 된 30代기자들은 이제는 돌 대신에 활자와 화면을 통해 全斗煥 세력에 복수할 수 있는 위치에 포진하고 있었다. 다수 간부 언론인들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명분에 눌려 관련자 처벌을 지지하는 쪽으로 신문과 방송을 끌어갔다. 그래도 金泳三 대통령과 민자당 검찰은 「심판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12·12사건 기소유예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보수세력은 시종 침묵하였다. 『다 지나간 사건인데… 대통령이 막아주겠지』하는 생각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서 全斗煥·신군부 처벌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았다. 이런 조건하에서 金泳三 대통령의 대변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동안 5·18 관련자 처벌 요구는 주로 민주당, 국민회의, 재야세력, 좌익세력, 호남지역민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金大中 지지도가 가장 높은 그룹이기도 하다. 5·18관련자 처벌운동에 반대한 세력은 金대통령을 비롯, 안기부·군·검찰·경찰등 공안기관을 위시하여 非호남세력, 중산 보수층이었다. 1992년 大選때 金泳三 지지도가 높았던 세력이다. 5·18 처벌로 선회함으로써 金泳三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버리고 金大中씨의 지지기반을 향해 뛴 셈이 되었다. 이것은 고뇌어린 윤리적 결단이었던가, 아니면 大選자금 공개 공세를 면하고 金大中 총재를 치기 위한 이기적 발상인가.
윤리적 결단인가. 이기적 발상인가
金泳三 대통령이 보수층을 배신했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에 金大中·金種泌 두 정치 지도자가 먼저 「1989년 12월15일의 5共청산 대타협」 약속을 깨고 全斗煥씨 등의 사법처리를 요구했던 사실을 잊어선 안될 일이다. 金대통령의 변신에 불평을 하는 보수층은 그들부터 먼저 나서서 당당하게 『5·18 사법적 심판은 안된다』고 말했어야 했다. 김동환(金東煥) 변호사 등 극히 일부 지식인들만이 그런 태도를 취했었다. 보수층은 그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데도 아무런 응원을 하지 않았으니 배신감을 느꼈던 이는 오히려 金泳三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金泳三 대통령은 혼자선 버틸 수 없었나. 그렇지는 않다. 헌법재판소가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다는 선고를 해 버리면 金대통령으로서는 한결 짐을 덜게 될 것이었다. 법치국가에서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견 불공평해 보이는 이런 원칙을 수용하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金대통령은 오히려 헌재(憲裁) 의 선고를 이용해서 국민들에게 법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수 있는, 그리하여 金泳三 정부는 人治가 아닌 法治정부란 사실을 널리 알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金대통령의 대변신을 윤리적 결단으로 보기엔 이 변신으로 상처받은 「윤리」가 새로 세워질 「윤리」보다도 더 크다는 지적이 있다.
1989년 12·15 대합의를 비롯해서 3당합당의 정신과 全斗煥 전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를 무시한다는 것은 국가지도자로서의 정직성과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정직과 신뢰를 버린 대가로 살 수 있는 또 다른 윤리는 무엇일까. 金泳三 대통령측에선 역사에 正義를 세운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역사에 정의를 세우려면 여소야대(與小野大)의 6共시절에 했어야 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낼 때 한꺼번에 계산하여 그를 절간이 아닌 감옥으로 보냈어야 했다. 사형집행인의 실수로, 한 칼에 죽게 만들어야 할 사형수를 두 번, 세 번 찍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 아닌가(옛날엔 사형집행의 실수로 죽지 않은 사형수는 살려주었다). 2년 前에 했던 율곡비리 수사를, 똑같은 사람을 상대로 하여 되풀이하고 있는 것도, 2년 전의 수사가 부실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검찰과 정치권이 자신들의 나태를 뒤늦게 깨닫고 『다시 한번 하자』식으로 나온다면 그들의 과오에 기인한 대가를 국가와 국민이 매번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95년 10월30일 밤 한 모범택시 운전사(52)는 승객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金씨가 힘이 셀 때인 6共의 여소야대 시절에 청문회를 열어 그렇게 닦달을 하고 백담사로 보냈으면 그걸로 끝내야지요. 그때는 뭘 해놓고 지금 와서 또 족치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全 전 대통령의 구속은 보복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떻게 된 게 한국 사람들은 남이 못되는 것만 보고 좋아들 하는 민족이 됐는지…. 우리는 항상 李씨조선 당파싸움을 하는 식으로 살아가야 되는 모양이지요』
남이 못되는 것만 보고 즐겨하는 민족
충북 옥천이 고향이라는 이 운전기사를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욕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분의 말 한 마디-『우리민족은 남이 못되는 것을 보고 기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지난 두 달 동안 소환, 사법처리, 사전영장, 구속, 수감 같은 「잡아넣는」 것과 관계되는 기사가 신문의 1면 머리를 채우는 분위기 속에서 단죄, 처벌, 청산만 요구하는 목소리만 일색인데 용서하자는 갸날픈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金대통령의 대변신이 고뇌 어린 윤리적 결단이라면 對국민 발표부터 성실히 했어야 했다.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을 통해 「말씀자료」를 발표할 게 아니라 직접 발표했어야 했다. 국민들에게 대전환의 배경과 논리를 길게 설명하여 납득시켰어야 했다.
1994년 11월에 검찰이 12·12사건에 대하여 군사반란이라 인정하면서도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던 바로 그 때 대통령이 그 결정을 뒤집는 특명을 왜 내리지 않았는지, 1995년 5월에 검찰이 5·18 관련자에게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렸을 땐 왜 묵인했는지, 바로 그때 역사를 바로잡았으면 혼란이 없었을 것을 왜 뒤늦게 정의를 세운다고 나섰는지를 국민에게 간곡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의무가 있었다. 그 동안 金대통령의 소신만 믿고 따라다니면서 『12·12, 5·18은 역사의 심판으로 돌려야』『광주사태는 양면성이 있다』고 열심히 맞섰던 정부·여당·국군·안기부·검찰은 대통령이 사전 예고나 설명 없이 혼자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버리는 바람에 집단적으로 바보가 돼버렸다.
金대통령만 다수 언론에 의하여 영웅으로 치켜 올려졌고 검찰은 미아가 된 것이다. 최초의 발표문에는 5·17 쿠데타와 5·18광주사태 관련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특별입법을 한다는 내용만 있었지 12·12 사건을 수사한다는 구절은 없었다. 그런데 특별법이 통과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全斗煥 전 대통령을 12·12사건과 관련하여 조급히 구속시켰다. 특별법을 통과시킨 뒤 5·17 관련으로 수사한 뒤 구속시키자는 게 당초 발표문의 정신일 텐데 특별입법 없이도 구속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검찰은 대통령의 의지만 뒷받침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공포를 주고 있다. 검사와 판사는 전직 대통령을 「도주자」로 몰아 잡범처럼 구속 수감했다.
한 경상도 촌로(村老)는 『이불 속에서 전직 대통령을 끌어내가는 식이 아니냐』고 흥분했다. 全斗煥 구속 이후 많은 사람들이 『金泳三 대통령은 전직이 되었을 때 또 어떤 대우를 받을까』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民心의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金泳三 대통령은 1984년에 「나와 조국의 진실」이란 책을 냈다. 金正男씨(전 청와대 敎文수석비서관)가 구술을 받아 정리한 책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즉흥적인 선택이란 그 대개가 첫째로는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 것이 십상이요, 둘째로는 고뇌를 거친 것이 아님으로 해서 시행착오적인 것이 될 위험이 그만큼 크다. 말하자면 즉흥적인 정책이란 비민주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또한 고뇌를 거치지 않는다는 얘기는 정책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어떠한 정책이든, 그것이 지도자가 그 정책의 선택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뇌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불쑥이요,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다. 지도자의 결단과 관련한 고민의 흔적이 국민에게 공개될 때, 국민의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할 때, 국민은 언제 어떻게 어떤 정책이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힐 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金泳三의 「돌아오지 못할 다리」
盧泰愚 비자금이 폭로되고 金大中총재가 먼저 20억원 수수를 고백했을 때 金泳三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 갈래가 있었다. 가장 어려운 길은, 스스로도 盧泰愚 자금과의 관련부분을 털어놓은 다음 『자, 이것이 지난날 우리 정치의 실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취임 뒤 한푼의 돈도 안 받고 있다. 이걸 계기로 깨끗한 정치가 가능한 제도와 풍토를 기성정치권이 만들어내자. 盧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 잔액은 몰수하되 구속기소는 그분의 국가적 기여와 우리나라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보류하자. 6共 때 2인자였던 본인도 이 문제에는 공동책임이 있다. 고 나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민 앞에 스스로를 투척하는 일대 승부수가 되었을 것이다. 온갖 비난이 쏟아졌겠지만 결국은 다수 국민들의 상식과 관용이 金대통령을 지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金大中, 金種泌 총재도 큰 소리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金대통령은 가장 쉬운 길-전면부정을 선택했다. 이 전면부정이 金대통령에게 「돌아갈수 없는 다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12·12사건의 한 교훈은 신군부가 그날 밤에 저지른 일로 해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지났고 살기 위해서라도 정권을 향해 돌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金대통령도 똑같이 「자신에게 결벽 공언」을 보호하기 위해 검찰과 언론을 믿고 大選자금 이외의 다른 분야로 수사를 확대하고 5·18 관련자 처벌 쪽으로 돌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렇다면 全斗煥 前 대통령은 프로그램에도 없었던 제물이란 얘기가 된다.
25년 만에 처음 보는 언론의 선전·선동기관화
盧, 全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함으로써 한국검찰은 약점 있는 자에겐 가장 무서운 기관임을 증명했으나 동시에 대통령의 권력 앞에선 스스로를 부정·경멸하는 일도 할 수 있는 무력하고도 자존심 없는 기관임을 드러냈다. 검찰이 결정했고 헌법재판소가 그 정당성을 인정했던 12·12 기소유예 결정을 아무런 고민이나 사과 없이 하루아침에 취소했다. 국가대사를, 국민학생이 지우개로 연필글씨를 지우듯 손쉽게 변경한다면 국민들은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아야 한다. 朝鮮日報 등 몇 개 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도 사실보도와 정직한 논평이란 저널리즘의 원칙을 저버렸다.
95년 12월8일 밤9시 MBC 뉴스에서 앵커맨은 『오늘로 全斗煥씨의 단식은 6일째, 그러나 국민들의 시선은 차디찹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적어도 국민 한 명의 시선은 차갑지 않고 동정적이었으니. 그는 정직하게 말했어야 한다. 『…6일째, 그러나 나의 시선은 차디찹니다』 거의 모든 언론은 「모든 국민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모든 국민들」의 이름을 빌어와 全斗煥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언론의 이런 철저한 선전 선동기관화는 기자 생활 25년 동안 단 한번도(朴정권하에서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현상이다.
이는 한국의 언론인들이 권력과 명분에 얼마나 약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KBS까지도 그 동안 공안기관이 친북세력 내지 친북인사로 규정했던 사람들을 등장시켜 신군부를 비난하고 金대통령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사상전쟁이 지금도 첨예하게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국영방송인 KBS가 그 이념전선을 스스로 허물고 있었다. 신군부가 저지른 惡行을 생각한다면 언론의 선동적 보도는 면책될 뿐 아니라 당연하다는 논리가 언론계를 흽쓸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린치(私刑)의 논리」이다. 내가 한 대 얻어맞았으니 때린 자를 붙들어 뭇매를 가하는 것은 正義라는 식이다.
이는 法治가 정착되기 한참 이전 미개시대의 논리이다. 全斗煥과 신군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징벌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정당당한 법 집행과 냉철한 보도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시체가 된 지 오래인 , 全斗煥 전 대통령을 다시 한번 죽이기 위해 머리 좋은 검사와 기자들까지 정치인들의 들러리가 되어야 한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후세 교육을 위해서라도 全斗煥에 대한 응징은 절차와 예절을 따라서 엄정하고 상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한 조간신문(95년 12월6일자) 사설의 두 문장만 인용해본다.
<…그럼에도 쿠데타 가담 세력과 그 일부 옹호세력들은 해괴한 논리로 조직적 반발과 저항을 서슴지 않는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이런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불순한 언동이야말로…시대착오적 책동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언어가 판치는 사회에서 과연 사람들의 심성이 비틀려지지 않고 배길까. 95년 12월7일자 모든 조간엔 「全씨, 崔 前대통령 권총협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1면 톱 내지, 준톱으로 크게 보도됐다. 다음날엔 1단기사, 또는 다른 기사에 붙은 꼬리로서 이양우(李亮雨) 변호사가 「권총협박」운운(云云)한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는 내용이 실렸을 뿐이었다.
저널리즘의 원칙을 설명할 때, 「동쪽에서 해가 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쪽에서 뜬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내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우스개가 인용된다. 오늘날 한국 언론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실수는 金泳三 대통령의 코치에 대한 반론과 全斗煥측을 옹호하는 견해를 반영시켜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침묵하는 온건한 견해는 반영되지 않고 과격한 큰 목소리는 과잉대표되고 있다.
全斗煥은 한국인의 거울
金泳三·全斗煥 두 사람의 결투로 상징화된 오늘의 국면은 어디로 갈 것인가.
民心이 반전하고 있다.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한 거친 구속집행 이후 民心은 反YS性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시킴으로써 金대통령은 비장의 펀치를 날린 셈이 된다. 全 전 대통령은 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욕은 다 먹었으니 이젠 더 당할 것이 없는 밑바닥 삶으로 떨어졌다.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상태는 비참의 극치이면서 또한 용기와 도전의 시작이 된다. 全 전 대통령이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을 하고 있다면, 그러다가 정말 사망한다면 한국인은 巨大한 심리변화를 겪을 것이다. 全斗煥이란 특이한 존재는 항상 인간적 흥미를 자극해 왔다. 그가 늘 話題의 대상이 돼 왔다는 것은 그가 재미있는 인간형이란 의미이다.
그의 매력은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이다. 「순 국산 土種」이란 말로 그의 성격을 평한 옛 부하도 있었다. 「토종 한국인」全斗煥 전 대통령은 이제 모든 한국인들의 거울이 되고 있다. 全斗煥이란 거울을 통해서, 그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알게 되고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고 우리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만약 全斗煥 전 대통령이 사망하는 불행이 생긴다면 역사 청산론자들의 입장에선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청산이 될 것이다. 갖은 비난과 욕설, 위선과 증오를, 지난 역사의 찌꺼기로서 감싸안고 거창하게 쓰러지는 모습은 그들 청산론자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 꿈이 이뤄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全斗煥에게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을 냉정하게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우리의 시선과 손가락이 金대통령 쪽으로 지향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96년 총선에서 평가받을 것
언론의 선동성과 비례하여 보수층의 반감도 커지고 있다. 정보화사회에서 여론에 끼치는 언론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기자는, 언론의 일방적 보도를 비난하다가 『선거 때 보자고』벼르면서 입을 닫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고 있다.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이 金대통령이나 신한국당의 득표강화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투표성향의 결정적 인자인 지역구도는 아직도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金潤煥 대표의 말대로 요사이 높아진 金泳三지지율 중에는 金大中 지지표가 숨어 있고 선거 때는 이들이 金大中씨 편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라는 분석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내각제 개편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한 사람도 온전하지 못한 것은 그 인간의 결함보다는 제도의 결함 때문이라는 시각을 갖게 한다. 대한민국 검사는 대통령 한 사람뿐이란 얘기가 나오고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을 알면서도 고치는 것은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며, 강력한 대통령 밑에선 정치가 없어지고, 천문학적이 돈이 드는 대통령 직선으로 당선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가장 부패한 정치인이 돼 버리며, 정보·수사권을 독점한 대통령 때문에 엘리트들이 권력 기생적 체질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는 등등의 문제들이 이제는 일반 시민들도 공감하는 사항이 되고 있다.
YS에 대한 결정적 폭로
金泳三 대통령에 대한 결정적 폭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최근 두 달 동안 金대통령이 쌓아올린 「5, 6共단죄」란 벽돌집은 겉으로는 강고한 것 같이 보이지만 대단히 불안정한 바탕위에 서 있다. 朴啓東의원의 폭로 같은 결정적 폭로가 金대통령을 향해 터질 때는 이 벽돌집이 三豊백화점처럼 붕괴해 수많은 정치적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盧泰愚·全斗煥 비자금 수사를 통해서 검찰은 국민들이 양해하고 넘어갔던 大選자금·정치 자금 등 과거의 非理까지도 새삼 문제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 칼날이 盧, 全 두 사람을 벤 뒤엔 金대통령 쪽으로 향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盧대통령을 파렴치범으로 만들었던 6共시절의 정치자금과 金泳三대통령후보가 재벌회장들로부터 직접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또 일부 확인되기도 한) 엄청난 14大 大選자금 사이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金대통령이 받은 大選자금은 장차 공무원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에게 미리 주어놓은 「사전수뢰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보는 법조인도 있다. 大選자금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盧泰愚 전 대통령은 구속되기 전 가족에게 그 정보를 인계해주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보는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으며 터질 때까지도 계속해서 일정한 위협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지난 大選 때 金泳三 후보의 3大 모금책으로 알려져 있는 이원조(李源祚),이용만( 李龍萬), 금진호 세 사람의 입도 문제이다. 중립내각 안기부의 기조실장으로서 경북도민회 회장이 돼 金泳三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엄삼탁(嚴三鐸)씨의 입도 있다. 金泳三 대통령의 남은 大選자금이 그 뒤 어떻게 관리되었고 지금 어떻게 돼 있느냐 하는 의문도 언젠가는 풀려야 할 사항이다.
全斗煥 구속·특별입법의 진짜동기가 大選자금 공개를 피하기 위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다수 국민들 사이에 정착되는 날에는 金대통령은 한국 보수층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 대패할 가능성이 높다. 金泳三 대통령이 치밀한 계획없이 일을 벌여 수습도 어렵게 되고 장기적 혼란으로 빠져든다는 것이 확실해져 중산층의 입에서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총체적 위기 국면이 전개될 것이다. 大選 자금 문제와 이른바 역사청산 문제는 인간 金泳三과 정권의 본질적인 바닥을 드러내게 만들 것이다. 金대통령은 이념노선·역사관·의리 같은 총론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들이 뒤엉겨 있는 민감한 이슈를 만들었기 때문에 성패가 어디로 나느냐에 따라서 상처나 성취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차라리 전쟁이 났으면 한다
12·12, 5·17, 5·18 사태의 주역은 군부였고 오늘날의 일대 소용돌이가 귀착하는 곳도 결국은 군대이다. 金泳三 대통령은 「선량한 군인들의 명예심을 더럽힌」신군부를 처단하여 국가에 헌신하는 군대의 명예를 되찾아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하려면 아주 섬세한 손을 가진 외과의사가 필요하다. 「군부」라는 건물의 내력벽이었던 하나회를 허물 때는 봉을 세워가며 했어야 했고, 소수의 정치군인에 대한 비판이 전체군대에 대한 비판으로 혼동되지 않게끔 신경썼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군대 안간 사람들이 역대 정부의 정통성을 허물고 군사文化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는 이 부조리의 극치를 저지해야만 했었다.
한 장교는 요사이의 군대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하나회 출신이 물러나니 소신 없는 장교들이 나타나 무사안일만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회」가 되었기 때문에 출세한 것이 아니라 뛰어났기 때문에 하나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과거의 군통수권자를 잡범 다루듯 하는데, 지금 군통수권자의 국방정책을 우리가 어떻게 병사들에게 교육시키겠습니까. 기동훈련을 하려고 나간 전차가 민간차량을 피해 다녀야 하고, 외출 나가면 술주정뱅이들이 「야 장교 이리 와 봐!」하고 시비를 거는 판입니다. 광주사태 진압에 관계한 현역 지휘관들의 명단을 언론에 공개하면 그 지휘관은 부하를 통솔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일부 장교들은 차라리 전쟁이라도 났으면 하고 기다리는 심경입니다. 그래야 군대의 가치와 고마움을 국민들과 정치꾼들이 알게 될 것이니까요』
청산이 불가능한 全, 盧의 업적들
金泳三 대통령은 『全斗煥 구속은 5, 6共 인맥과의 전면적 단절이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 언론은 몇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든 惡의 근원을 全, 盧두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다. 全씨는 1989년에 백담사를 찾아온 불교신도들과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러분들 중에는 전직 대통령이 어떤 꼴로 지내고 있는지 구경하려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바깥에서는 재임 기간에 나쁜 짓만 한 사람이라고 저를 욕하고 있는데, 사람이 실수로써도 잘한 일 하나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잡는 식으로 말입니다』 全, 盧 두 사람이 「소발에 쥐잡기」식으로 이룬 실적은 이미 수치로 나타나 있다.
1980∼90년의 11년간(이 시기는 두 「군사반란 수괴」의 재임기간이다)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의 약2백개 나라 중에서 1위였다. 1980∼89년 사이 한국의 공업 성장률은 연평균 12.4%로서 세계 5위였다. 朴正熙 시대인 1965∼80년 사이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9.5%로서 세계 9위였다. 全斗煥씨는 경제성장 성적표에서 오히려 朴대통령을 앞질렀다. 서울올림픽은 이념의 벽을 부순 상징적 사건으로서 동구공산권의 붕괴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세계적 행사의 세기적 대성공은,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단했던 全대통령과 조직위원장으로 일했던 盧대통령을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全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평화적 정권이양을 하고 나온 최초의 군출신 대통령이다. 어찌 보면 평화적 정권이양은 반쪽만 성공했다. 권력자가 순순히 정권을 넘겨준 점에선 평화적이었으나 그 정권을 받은 편이 그를 백담사로 보냈다가 다시 감옥으로 보낸 점에서 「평화적」이란 표현이 걸맞지 않다. 盧대통령이 적기에 추진한 북방정책은 북한의 후방을 우회적으로 포위한 대전략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시킨 쾌거였다. 누가 뭐래도 그는 민주화를 실천한 대통령이었다. 위의 사실은 두 사람이 사형당한 뒤에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기록이고 절대로 청산할 수 없는 역사 그 자체이다.
全斗煥 가두어 놓고는 공정한 경기가 안 된다
金대통령과 일부 국민들이 이왕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고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나섰으니 그 게임이라도 공정하게 해야 한다. 1989년 말에 끝났던 1차 게임결과를 몰수하고 재경기를 하게 되었다면 세 번째 경기를 또 다시 하지 않도록 이번에만은 공정하게 하자. 우선 全斗煥 전 대통령을 불구속 상태에서 이 게임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근대 재판의 기본 규칙은 피고인과 검찰 사이의 공방전이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증거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는 전직 대통령, 유죄확정시까지는 무죄인의 대접을 받아야 할 한 시민으로서의 全斗煥씨를 가두어놓고,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정치재판·여론재판을 다해버린 이 재경기에 누가 승복하겠는가.
全斗煥씨가 오늘날 겪고 있는 수모의 근원은 15년전 그가 鄭昇和 장군에게 가했던 모욕이다. 한 인간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것, 비굴해지도록 강압하는 것 이상의 惡行은 없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한 사람들은 全斗煥씨를 「제2의 鄭昇和 총장」으로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全斗煥씨가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고 검사도 당당하게 구형하고, 판사도 당당하게 선고하면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로 가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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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중대 고비에서 용기와 냉철함을 견지하자
6.15 반역 선언 다음 날에 썼던 글.
趙甲濟
*月刊朝鮮 2000년 7월호 편집장의 편지
反共은 正義고 냉전논리는 무장대결 상황의 행동윤리.
反共의 부정은 自我의 부정, 냉전논리의 부정은 현실의 부정.
「냉전구조 해체」란 「공산당 해체」란 의미이다
趙甲濟 (mongol@chosun.com)
지난 6월13일 金大中 대통령을 평양 순안 공항에서 영접한 金正日이 텔레비전을 통해 全세계에 알려지자 우리 일부 언론들은 상당히 감상적인 보도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가 「온화하고 당당하게」 언동했다면서 마치 기존의 金正日觀이 왜곡되었다는 식으로 몰고 가기도 했습니다. 저한테도 어느 매 체에서 전화를 걸어와 논평을 요구했습니다. 저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정치인의 평가는 얼굴을 갖고 해선 안되고 行蹟(행적)을 갖고 해야 한다 . 아웅산 테러로 17명, 대한항공 858편 폭파로 115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수 백만 명을 굶어 죽게 한 일, 그리고 申相玉·崔銀姬씨를 납치한 점으로 그 를 평가해야지 人相으로 한다는 건 觀相家나 할 일이다』
남한內 親北세력은 앞으로 새롭게 부각된 金正日의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 여 그들의 활동 공간을 넓히려고 애쓸 것입니다. 남북회담의 분위기를 타고 이미 남한內 좌익세력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주요 신문과 방송까지 도 黃長燁씨와 國情院이 「북한 노동당 비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단정 한 在獨인사 宋斗律씨에게서 남북통일에 대한 기고문을 받거나 발언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방송 진행자는 『宋교수는 군사정권 시절 해외에서 민주 화 운동에 헌신한 분이다』고 소개했습니다. 집권 여당의 한 핵심간부는 宋斗律씨의 귀국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對南적화 전략의 기본은 2대 1 구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소위 북한 의 혁명기지를 1로 두고 남한 內에서 親北정권을 세워(이를 그들은 민주기 지라고 부름) 1을 추가한 뒤 이 親北정권과 손잡고 남한 內의 소위 反動세 력(1)을 2대 1의 구도로 무력화시킨 다음 통일한다는 것입니다. 이 통일과 정에서 미군의 增派(증파)를 막기 위한 위협용으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이런 전략은 정치, 문화, 선동, 심리전을 주된 수단으로 삼고 남한 내부를 主전장으로 삼는 우회전략입니다(군사적 위협이 정면전 략이라면).
북한은 남한 內에 容共정권(즉, 북한세력에게 행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정부 )을 세우고 이를 조종하든지 약점을 잡아 親北정권으로 변질시킨 다음 이 정부와 통일을 논의하여 한반도에 한 개의 공산정권을 세운다는 전략입니다 . 남한內에서 親北 정치력을 총동원하여 容共정권→親北정권→공산정권 수 립으로 권력구조를 끌고 가겠다는 북한의 전략은 金正日의 관상과는 아무 관계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전략을 포기하는 그날이 바로 金正日 정 권 최후의 날이 된다는 것을 그들도, 우리도 압니다. 모르는 것은 감상적 보도에 치우친 일부 언론이 아닐까요.
이제는 냉정하게 지난 6월13~15일의 金大中-金正日 평양회담 수지타산을 해 볼 때입니다. 남북 頂上 공동선언문을 놓고서 말입니다. 金대통령은 너무 중요한 것을 주고 너무 작은 것을 얻었습니다. 북한측의 駐韓미군 철수 요 구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통일문제를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표현, 통일조국의 이념과 체제에 대해 남북이 同床異夢(동상이몽)을 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으로 통일문제를 논의하기로 한 점, 1980년대에도 있었던 이산가족 상호방문 같은 1회성 행사와 非전향 장기수 北送(북송)을 맞바꾼 점, 우리가 돈을 부담할 經協을 약속한 대신 再侵과 도발 방지에 대한 보장을 받지 못한 점들이 그것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의 연합제 통일방안은 남북간의 평화공존과 경제협력을 통해 서 북한을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변화시킨 다음 통일한다는 전략 입니다.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은 남북한의 두 이념과 체제와 지역 정부를 인정하고 다만 한 개의 연방국가로 묶어놓자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 상 이념이 다른 연방국가는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으므로 이 연방제 통일방안은 赤化통일로 가는 과도기의 전술일 뿐입니다.
이 기만 전술과 金大中 대통령의 고뇌의 산물인 연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詐欺와 正直에 공통점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통일 방안은 목적지가 다릅니다. 자유민주주의驛으로 갈 것인지, 사회주의驛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도 하지 않고 통일열차를 발차시키고 同乘(동승)하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쌍방이 열차 안에서 싸워서 목적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 든지 한쪽이 중간역에서 내리든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연합 제 통일방안은 국회나 국민의 동의를 받은 적이 없는 私的인 통일방안입니 다. 이게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으로 昇格하려면 金大中 대통령이 야당 시절 주장했던 대로 국민투표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金正日은 남북 쌍방이 통일을 논의한다는 이 분위기를 십분 활용할 것입니 다. 북한에 대한 사상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으로는 남한內 親北·공산 주의자들의 활동에 자유를 주도록 압력과 선동을 가해올 것이고 鼓舞(고무 )된 親北세력은 이에 호응할 것입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안에서 심각한 國論 갈등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힘 겨루기에 의해 「대한민국의 자유를 파 괴하려고 작심한 세력」에게 활동의 자유를 줄 것인지 아니면 규제할 것인 지가 결판날 것이고 이것이 우리 체제의 미래를 결정할 듯합니다. 일본에서 1998년에 나온 「金正日 조선통일의 날」이란 책에서 親北 인사로 추정되는 김명철이란 著者는 金正日의 입장에서 아주 자신만만하게 통일전 략을 피력합니다.
<북한은 敵이란 생각이 건국 이래 50년 이상에 걸쳐서 한국의 존재 이념이 었다. 이 기본 전제가 소멸하면 국가보안법도 소멸한다. 그 집행기관인 국 가안전기획부도 해체될 것이다. 국가보안법과 안기부가 소멸하는 것과 동시 에 한국도 사라질 운명이다. 폴란드 등 東歐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 사회 주의가 부정되었을 때 사회주의 정권은 자동적으로 붕괴하고 反共 활동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이 부활하여 정권을 잡았다. 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날 것이다. 한국에 擧國일치연립정부를 수립하고 북한과 연방제 통일교섭을 통하여 남북연립정부의 수립을 발표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정권의 中樞 (중추)에 앉는 인물들은 金正日의 입김이 먹혀드는 동조자들이다. 물론 그 시점에선 남북조선인 모두가 金正日 동조자, 지지자, 열렬한 팬이 되어 있 을 것이다>
그는 金正日이 「북조선의 정치·경제제도를 한국에 강요하는 제도 통일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지만 권력적 측면에서는 남한이 이미 金正日정권의 식민지로 변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일 뿐입니다. 金大中식 연합제 통일방안은 기본적으로 남한의 강점-경제력과 민주화를 무 기로 하고 있는 반면 金正日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그들의 강점-선전·선동 술·내부 통제·남한內 親北세력의 존재 등 주로 정치공작력을 활용하려고 합니다. 즉, 남한의 경제력과 민주력이 북한 체제를 끌어안아 그 毒素를 녹여버릴 것인지, 북한의 정치공작이 우리 내부를 파고들어 권력관계를 장 악할 것인지, 이런 競走가 시작된 것입니다.
金大中식 연합제 통일방안이 연방제를 누르기 위해선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이념이 통합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우선 金大中 정부와 그 뒤에 들어설 정부가 헌법에 적힌 대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이며 민족사 의 정통성을 대표한다는 확신과 그에 따른 희생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남북頂上회담에서 金대통령이 非전향 간첩들을 北送해 주 기로 사실상 약속한 반면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송환 약속을 받아내지 못 한 것은 크나큰 유감입니다. 金正日 정권은 체제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들을 이스라엘처럼 끝까지 챙겼고 金大中 정부는 自國民 구출에 또 한번 실패했 습니다.
이 책에 실린, 月刊朝鮮 金容三 기자에 의해 구출된 30년 전 납북어부 李在根씨 기사를 읽으면 가슴 속을 뒤집어 놓는 문장이 나옵니다. 李씨는 부인 과 아들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하여 여러 차례 제3국의 우리 외교 공관을 찾 아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自國民 보호가 공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데 외교관들은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국민의 구조 요청 을 거절했습니다. 李씨가 그 외교관과 통화할 때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李在根:나는 선생님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는데요. 외교관:제 얘기는 거 친척들 있잖아요. 예를 들면 그냥 국가에 부담 안되게 끔 하란 말이에요. (신경질적으로) 왜 국가에다 자꾸 부담을 주려고 그래요 ?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렇게 해서 李在根씨는 북한을 탈출하고도 2년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 다가 이번에 月刊朝鮮과 대전방송 취재진을 만나는 바람에 生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3국의 한국대사가 이들 세 사람에게 여권과 같은 효과를 갖 는 여행증명서를 끊어준 것은 큰 勇斷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론 아라드를 다 압니다. 유명 배우여서가 아닙니다. 그 는 1982년 레바논 전선에서 격추된 뒤 실종된 공군 전투기의 항법사입니다 . 이스라엘 정부는 아라드가 이란이 조종하는 테러단체에 의해 억류된 것으 로 판단하여 지금까지 끈질긴 탐색 및 구출공작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스라 엘의 모든 외교관은 외국 외교관을 만날 때 『아라드에 대한 정보를 혹시 갖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1994년 5월21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시리아군의 관할지인 레바논의 베카 계 곡으로 들어가서 한 무장단체의 두목인 디라니를 납치, 헬기 편으로 압송, 투옥했습니다. 디라니는 1988년에 30만 달러를 받고 아라드를 이란 혁명수 비대에 넘긴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정보수집을 위하여 납치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李在根씨가 만약 이스라엘 국적을 갖고 있 었고 그가 어디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면 이스라엘 특공대는 북한에 武力을 행사해서라도 그를 구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외국에서 유학중인 이스라엘 젊은이 들이 자원해서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만 알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총력을 다한다는 것, 그래서 유사시에 그런 국가를 위해서 국민들 이 목숨을 바치려고 한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이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 . 국민과 국가 사이에도 상호주의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李在根씨에게 『왜 국가에 자꾸 부담을 주려고 그래요?』라고 말한 외교관만 나무랄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대통령을 나무라야 할 것입니다. 그 외교관만 아니라 다른 외교관들도 李在根씨의 구조요청을 일제히 거절 한 것을 보면 이들의 행동은 개인적 무능이나 부도덕성에서 빚어진 것이라 기보다는 조직의 윤리와 논리를 따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 조직, 즉 정부의 책임자인 金大中 대통령이 궁극적으로 반 성하고 점검할 일이란 말입니다. 정상 정부하에서는 生과 死의 갈림길에서 방황중인 自國民을 나 몰라라 하는 외교관이 적발되면 최소한 파면되든지 심할 경우엔 직무유기로 감옥에 갔을 것입니다.
機務司의 한 對共수사관은 간첩 잡는 일이 무슨 범죄나 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첩 사건으로 확정판결을 받아 약 10 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이 복권되고 지난 총선에 출마하는가 하면 간 첩행위를 통일운동으로 미화하는 분위기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납북자를 당당하게 외면하고 간첩수사를 눈치 보면서 하는 대한민국 정부라 면 아무리 경제력과 재래식 군사력에서 북한을 압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월 남 공산화의 사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력과 군사력에 서 월등했던 월남이 무장은 형편없었으나 사기충전했던 베트콩과 월맹군에 게 넘어간 과정은 이번 호에 실린 李大鎔 당시 주월대사관 공사의 이야기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는 홈페이지의 주소를 www.natizen.com으로 쓰고 있는데 natizen은 Nati onal Citizen의 略字(약자), 즉 국민이란 말입니다. 영어엔 국민이란 말이 없습니다. 인민(People)이나 시민(Citizen)이란 말 뿐이라서 그런 造語를 만든 것입니다. 국민이란 말이 요사이 별로 인기가 없게 된 것은 국민이라 고 할 때 국민의 의무만 강조하고 국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는 가볍게 취급 되어 온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가의 의무는 너무나도 엄격하여 단 한 사람의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서 국가가 수만, 수십만 명의 희생을 각오하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라이언 일 병 구하기」란 영화를 보면 한 사병을 구출하기 위해 수십 명이 죽는데, 이 것은 결코 억울한 것도 무모한 것도 아닙니다. 원래 국가의 윤리란 그런 것 입니다.
自力으로 敵地를 탈출한 용감한 李在根씨를 거부할 수 있는 정부는 국가의 의무를 포기한 것이고, 이것이 일반화되면 국가임을 포기하는 선까지 떨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와 외교관의 이런 자세는 어디서 淵源(연원)하는 것일까요. 공직 자 사이에서도 대한민국과 그 정통성에 대한 확신·자부심·애정이 부족하 기 때문입니다. 그런 확신은 민족의 형성과 대한민국의 탄생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선 지금 민족의 탄생을 가져온 신라의 통일과 대한민국 건국과정을 깎아내리는 것을 業으로 삼는 사람들을 민주 적이니 진보적이니 민족적이니 하면서 칭송하는 분위기가 퍼져가고 있습니 다.
나의 존재 이유이자 우리 민족과 국가의 뿌리인 신라통일과 대한민국 건국 을 부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自虐史觀(자학사관)입니다. 그런 史觀이 지배하 는 사회나 국가는 자멸해야 합니다. 자신의 출생을 비관하고 부모를 원망하 는 自虐의 인간이 걷는 末路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自虐사관을 퍼뜨리는 親北세력은 요사이 남북관계를 활용, 반공과 냉 전논리를 惡으로 몹니다. 대한민국은 이념적으론 反共立國, 경제적으로는 貿易입국하여 大成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大성공은 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줄을 설 때 李承晩이란 위대한 영도자를 만나 공산주의의 줄이 아니라 反共 자유민주주의의 줄에 서게 된 데서 유래합니다. 反共을 惡으로 몰면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부정된다는 것을 그들 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反共을 빙자한 권력남용과 권력기생이 많았습니다. 그런 점은 그런 대로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런 부작용을 과장 하여 反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살인사건이 많이 난다고 칼을 못 만들게 하는 것과 같은 억지입니다.
냉전논리란 냉전상황을 살아가는 행동윤리에 다름 아닙니다. 예컨대 세계적 으로 사라지고 있는 軍징집제도 같은 것이 전형적인 냉전의 산물입니다. 우 리의 主敵(주적)인 북한 공산당이 있는 한 한반도에서 냉전은 불가피하고, 그 냉전상황에서는 젊은이들이 군대복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냉전적 논리고 윤리입니다. 냉전시대에 살 면서 평화시대에 사는 행동논리와 윤리를 따른다면 기피자가 되어야 합니다 . 한반도가 냉전상황이란 데 異議가 없다면 냉전논리와 윤리는 지극히 현실 적이고 합리적인 자세입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냉전이 완화되는 흐름에 적응하여 국내의 냉전체제를 많이 변화시켜 갔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수정이 나 신중한 적용, 反헌법적인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의 허용, 駐韓미군 철수 주장의 자유화, 前 간첩의 국회의원 출마 허용, 主思派(주사파) 출신들의 국회 진출 허용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고 반공과 냉전논리를 뭉뚱그려 惡으로 모는 것이 유행인 데 이는 결국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논리와 윤리의 파괴, 그리고 自我의 부 정을 지향하는 짓입니다. 이런 식의 대한민국 약화시키기 운동이 진행되면 서 국가의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노력-自國民 보호, 국가의 상징물인 國旗와 國歌의 존중, 국가 정통성의 엄수,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보아야 한다는 헌 법정신의 固守 등이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휘둘리는 공무원들은 自國民 보호도 하지 않고 간첩을 잡을 의 욕도 잃게 됩니다. 이런 自虐史觀과 자기 부정의 분위기가 국가 지도층까지 지배하게 되면 金大中 대통령의 對北 협상력은 약해질 것이며 이번 평양회 담처럼 金正日에게 상황의 주도권을 내줄지 모릅니다. 국군통수권자인 金大中 대통령의 主敵은 북한군 최고사령관 金正日과 남한內 친북세력이고, 보 수·애국세력은 대통령편이라는 彼我 구분은 확실해야 합니다. 反共이 惡이란 논리가 지금 이상으로 확산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漢字가 외국어라는 억지 논리의 확산이 가져온 한글전용의 폐해가 그것입니 다. 한자가 외국어라면 1945년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외국어를 쓴 외국인이 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민족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이 언어이니까요 .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쓰여졌습니까. 우리 문중의 족보가 한글로 쓰여졌 습니까. 亂中日記가 한글로 쓰여졌습니까. 李舜臣이 외국어인 한자를 사용 했으니 그는 중국사람입니까. 이렇게 무지막지한 「한자=외국어」란 억지는 그러나 너무나 쉽게 먹혀들어 한글전용을 확산시켰고 지금과 같은 일대 문 화적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이것은 합리가 억지에 밀리면 그 억지가 한 사회를 변모시킨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억지도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반공과 냉전논리는 惡」이란 또다른 억지를 우리 사회가 방치하면 그 결과는 대한민국의 약화, 또는 사 실상 해체가 될 것입니다.
반면 反共과 냉전논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정착된다면 정의로운 통일과 선진국 건설이 가능해집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냉전구조 해체입니다. 세 계의 냉전종식은 1989년에 동구권 공산주의가 차례로 무너지고 1991년에 소 련이 해체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즉, 냉전해체란 공산당 해체를 의미했습 니다. 이 세계사적 원리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반도의 냉전구 조 해체란 북한 공산당 해체를 뜻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제가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남한에선 이제 냉전구조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 국정원, 駐韓미군 같은 것은 냉전구조가 아니라 金正日의 再侵 (재침) 을 막기 위한 국가 안보구조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 노력은 북한을 향해서 집중되어야 합니다. 對南 적화통일 전략, 핵-미사일 개발, 인권·언론 탄압, 마약 밀제조, 테러, 수령독재 체제 등 이런 공산 당의 냉전구조와 그 작동원리가 해체될 때 냉전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북한의 냉전구조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지도 않은 남한의 냉전 구조를 해체하자고 떠드는 것은 敵前 무장해제를 선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동이 평화와 민족이란 美名으로 잘 포장되어 있는 것 같지만 이 허 구의 논리를 깨는 것 또한 간단합니다. 親北세력이 평화를 내세울 때는 正義를, 그들이 민족을 내세우면 국가를 들이대야 합니다. 한반도에서 정의로 운 평화를 실천하려면 惡, 이단, 戰犯집단인 북한 공산당이 붕괴되어야 합 니다. 국가는 민족보다도 더 선진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민족은 감성적, 인종적, 혈연적 존재이지만 국가는 이성적, 객관적, 법률적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통일은 민족통일이 아니라 국토통일이며 이념통일입니다. 민 족통일을 한다면 만주까지 점령하여 조선족을 포괄해야 합니다. 민족통일이 란 감상적 논리로써 접근할 때 주변국들의 경계심을 촉발시키고 이념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념통일이란 말은 통일조국의 이념이 수령절대주의·사회주의이든지 자유민주주의이든지 하나로 택일되 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평화통일을 한 독일에서도 과거 동독지역에 있었던 훔볼트 대학의 경우 공 산당 치하에서 이데올로기 부문에 종사한 교수들은 모두 퇴직시켰다고 합니 다. 이념적 正體性이나 국가의 정통성을 견지하려는 엄정한 노력에 대해 反 평화·反통일·反민족적이란 비판을 가하는 것은 국가의 통합성을 파괴하려 는 행동입니다.
한 언론사의 논설이 남북한 관계를, 냉정한 비즈니스적인 접근방법으로 이 끌어가야 한다고 쓰니 다른 언론사는 「민족정서보다 값진 가치는 뭔가」라 면서 「민족문제 해결은 비즈니스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필자는 민족을 합리성보다 위에 있는 뜨거운 그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한민족은 최초의 민족통일국가인 통일신라 이후 장기간 1민족 1국가 체제 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일치합니다. 민족의 이익을 달성하는 방법이 바로 國益(국익)의 추구입니다. 민족의 이익이라 할 때 그 민족의 범위는 대한민국 국민과 북한 주민이 포괄되지만 金正日 집단은 제외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이익」과 金正日 집단의 이익은 대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彼我, 善惡 구별을 생략하고 민족적이란 말을, 무조건 용서하고 도와 주자는 의미로 쓰게 되면 그 결과는 反민족적으로 나타날 위험성이 있습니다.
북한정권에 의한 핵-미사일 개발도 민족적 관점에서(통일된 다음은 우리 것 이 된다는 생각에서) 허용하고, 북한정권에 대한 일방적인, 때로는 뇌물 같 은 현금지급도 민족적이란 말로 용인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金正日의 反민족적 범죄-아웅산 테러·대한항공기 폭파·정치囚 수용소 운영-를 추궁하는 애국적 행동까지도 「민족적」이지 못하다는 억 지로 비판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민족적」이란 말은 이성과 도덕이 실종된 감상과 본능과 기 분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金대통령의 訪北 이전부터 일부 언론이 주도하 여 한국 사회에서 조성한 이런 감성적 분위기에 그대로 먹혀든 것이 金正日 이미지였습니다. 감성적인 인간형(金正日)이 감성적인 매체(TV)를 통해서 감성적인 사람들에게 파고든 것입니다. 민족사의 중대 고비에서 우리는 용 기와 냉철함을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를 흥분시켜 놓고 대한민국을 소매치 기하려는 세력이 있으니까요.
민족과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비즈니스적인 태도입니다 . 즉, 따질 것은 따지고 주고받을 것은 확실히 하는 것이 합리적이요 그렇 게 함으로써만 민족의 이익을 도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에게 개방과 개혁, 그리고 시장경제를 가르쳐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비 즈니스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비즈니스적이란 곧 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2대 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에선 으뜸가는 사회윤리 입니다. 비즈니스적인 것을 민족적인 것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 은 잘못입니다. 북한주민에겐 민족적으로, 金正日 정권에겐 상황에 따라 적 대적으로, 비즈니스적으로, 또는 그들이 改過遷善(개과천선)할 경우 우호적 으로 대하면 됩니다.
지난 4월5일 토마스 슈왈츠 駐韓미군사령관은 미국 중앙정보부(CIA) 내부 보고회에서 「한반도 안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지난 12개월 동 안 북한은 전쟁준비 태세의 약화를 막고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지난 5년 동안 한 일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240㎜ 장거 리 다연장 로켓포대들과 170㎜ 자주포들을 휴전선 근방의 강화된 요새로 배 치시켰으며 휴전선과 평양 사이의 중요한 도로를 따라 戰鬪要地를 신설했고 , 전투기들을 구매하는 등 활발한 노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 난해 여름과 가을의 훈련강도는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지난 겨울의 訓鍊강 도도 기록적인 것이었으며 미사일, 전투기, 잠수함, 포병무기의 장비 생산 도 계속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북한군은 포대를 前進시키지 않고 도 시간당 50만 발의 포탄을 수 시간 동안 퍼부을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 다. 슈왈츠 장군의 이 보고는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경제난으로 크게 약 화되고 있다는 추측을 뒤엎는 것입니다. 한 駐韓미군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해 북한이 대규모 동계 기동훈련을 했는데 우리가 면밀히 관찰하고 놀랐습니다. 기계화부대가 기동하는 것을 추적하니 장비의 고장률이 아주 낮고 기동공간도 좀처럼 가기 어려운 곳으로 잡는 등 역량이 대단히 뛰어났 습니다. 그동안 북한군이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했던 우리는 誤判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죽어가는 줄 알았던 북한의 군수산업이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經協이란 명목으로 북한에 남 한이 일방적 지원을 한다면, 특히 電力을 지원한다면 저들의 군사력 증강을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金正日에게 돈을 주는 대신 안보를 사와야 합니다. 돈을 주는 데 따른 조건으로서 남한에 대한 군사적 모험 중지, 군사력 증강 중지 , 經協자금의 군사 목적 轉用 금지를 내걸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 지 않는 상황에서, 또 북한의 군수산업과 군사력이 살아 있고 증강되고 있는 가운데서 조건 없이 주는 돈(금강산 관광개발에 따른 6년간의 9억4200만 달러 지원 같은 것)은 군사력 강화와 남한에 대한 위협 증대로 돌아올 것이 확실시됩니다. 이렇게 북한 군사력을 증강시켜 주는 무모함까지도 평화 ·통일·민족이란 이름으로 합리화된다면, 또 이런 억지논리를 우리 사회가 제어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은 쇠망에 이르는 길을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언론이 有史이래 없던 흥분된 보도로써 하루를 지샌 6월13일 주식시장은 4.1포인트나 暴落했습니다. 언론의 과잉흥분이 우리 서민들과 중산층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한 증거일 것입니다. 상당수 정치인, 지식인, 언론의 감정적 반응과 대조되는 證市 투자자들(이들이 우리 사회의 중추세력이다)의 차분함, 이것이야말로 북한을 「비즈니스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유력한 근거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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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長의 편지] 역사는 한국 보수층에게 5년의 기한을 주었다!
5년 동안 기성세대는 젊은, 좌파 세력에게 고마워하는 방법과 제대로 미워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핏발 선 보수층
역사는, 대한민국은, 핏발 선 主流層의 손을 뿌리치고 盧武鉉 후보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하여 5년이란 기회를 주었다. 이 5년 사이에 한국의 주류층이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크나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 5년간 기성세대가 나서서 젊은, 좌파 세력을 설득하고 교육하여 이들의 위험한 國家觀과 對北觀, 때로는 저질로 치닫는 반항심을 순화할 수 있느냐가 5년 뒤의 大選 승자를 결정할 것이다. 이들 젊은, 좌파들에게 교양과 公民윤리와 정의감을 심어 주어야 하는 책무는 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에게도 주어졌다.
李會昌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左右대결의 체제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삼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했으나 이념 무장 대치상황의 한반도 조건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李會昌 후보는 마시기 싫어했던 쓴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그는 이 시련을 통해서 뒤늦었지만 이념적으로 무장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났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의 주류층도 수렁에 빠진 李會昌 후보를 건져내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우리 곁으로, 집 안으로 들어온 反美·親北 세력의 엄청난 힘을 알고 전율하였다. 그들은 金大中 정부 5년 동안 대한민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이번의 가정內 大選戰에서 보수층이 안간힘을 썼듯이 앞으로는 대담하게 나서야 한다. 보수층이 가진 현대사의 경험을 후배, 자녀와 나누고 金正日의 악마성과 대한민국의 苦鬪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미군이 6·25 전쟁 때 1000명 정도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학생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앞으로 5년간 보수층이 나서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매질하고 고쳐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점은 고마움일 것이다. 부모 세대에 대한,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 등 우방국에 대한, 우리 민족사의 위인들에 대한 고마움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보수층은 젊은 그들에게 제대로 미워할 줄 아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金正日과 그를 추종하고 굴종했던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북한동포들과 한국內의 소외층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이번 선거 과정과 그 결과는 우리의 거듭 태어남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主流 보수층은 盧武鉉 당선자를 도와야 한다. 그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를 기도해야 한다. 盧武鉉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서뿐 아니라 金正日에 대해서도 한국민의 자존심·국가이익·민족 정통성을 수호해 줄 수 있도록 보수층이 충고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2002 大選의 마지막 이틀은 요동 치는 역사의 變轉을 실시간으로 느끼게 해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 가운데서 기자는 그 어떤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다. 나의 인터넷 사이트(www.natizen.com)에 올렸던 일기를 재생해 본다.
『지금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12월18일 오후 4시쯤 서울 중구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전화 자동응답 방식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있던 한나라당 간부는 마치 중계방송하듯이 흥분된 말투로 이렇게 전했다.
『지금 실시간으로 李會昌 후보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李후보가 10% 뒤졌는데, 이것이 6%, 3%로 좁아지더니 오늘 드디어 역전을 하고 있어요. 중구는 출신지 인구 분포상 서울의 평균인데 여기가 이렇게 나오면 서울 전체가 뒤집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12월18일) 저녁 서울 광화문 근방 음식점에는 손님들이 붐볐다. 내일 투표일이 공휴일인 이유도 있을 것이고, 선거 前夜에다가 送年會 약속도 겹쳐서인 것 같다. 會食 자리마다 선거 이야기로 꽃이 피었다. 기자가 참석한 모임에서도 始終 선거 이야기였다. 모두가 선거 추이를 궁금해하면서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빨리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가라! 그리고 전화를 돌려라.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 답해 주었다.
요사이 내가 만나는 나이 든 사람들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는 것 같다. 걱정의 핵심은 盧武鉉 후보가 당선되면 체제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나라가 망한다」느니 「나라가 넘어간다」는 말들이 예사로 튀어나온다. 그들은 이번 선거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망이 걸린 싸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보수층의 다수가, 李會昌 후보가 당초에 걸었던 부패 청산 정도의 문제의식이 아니라 左右 대결, 즉 赤化냐 체제 유지냐 식으로 이번 선거의 의미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金正日이 핵개발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받아 盧武鉉 후보가 전쟁이냐, 평화냐고 비수를 들이댄 것은 보수층의 위기의식을 증폭시켰다. 한나라당 朴槿惠 의원이 어제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戰犯(김정일)에게 군자금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전쟁론자』임은 명백하다. 盧武鉉 후보는 對北 현금 지원 등 金正日의 공갈에 강력하게 대응하려는 자세를 전쟁불사론자로 규정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대한민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金正日에게 엄정한 자세를 취하려는 사람들을,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으로 매도하는 초유의 사태가 전개된 것이다.
이런 左右 대결을 李會昌 후보는 피하고 싶었으나, 선거판은 한국사회 내부의 이념 대결 구도와 국제사회의 美北 대결 구도의 영향을 받아 막판에 左右 정면 대결로 치달은 것이다. 이는 필자가 여러 번 주장했지만 바람직한 것이다. 이번 선거는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도였던 것이다.
『우리는 애국하고 싶다』
육해공군 해병대(예) 대령연합회(서정갑 회장)는 12월19일자 朝鮮日報에 이런 광고를 냈다. 「우리는 애국하고 싶다. 선관위의 反美·親北 비판 광고 不許 방침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12월17일에 중앙선관委 위원장이 언론사 등에 보낸 신문광고 중지요청에는 근거법규로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93조와 제271조의 2를 들었다. 271조에 따르면 광고 중지를 요청할 수 있는 광고는 「후보자의 당락이나 특정 정당에 유리 또는 불리한 광고」를 뜻한다.
선관委는 反美·親北을 비판하면 자동적으로 이것이 어느 후보에게 불리하고 어느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어느 후보가 불리하다는 의미는 그가 反美·親北 성향이거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反美·親北은 대한민국의 공직자가 되어선 안 되는 성향이다. 우리 헌법 정신도 그런 사람의 공직 취임을 금하고 있다.
反美·親北은 우리 헌법체계 안에서는 비판대상이라기보다는 고발대상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의 애국심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金正日에 반대하는 것, 즉 親北에 반대하는 것이다. 親北을 반대하는 권리를 제한한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반대행위, 즉 애국적 행동을 고발조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과연 우리 헌법체계 안에서 가능한 일일까.
朝鮮日報 2면에 자유시민연대는 이를 빗대 「선거 때는 나라 걱정도 하지 마!」라는 제목의 광고를 냈다. 이 광고는 「도대체 어떤 후보이길래 나라 걱정이 그 후보에게 불리하다는 얘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고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한 인사는 月刊朝鮮 기자의 질문에 대해 이런 취지의 설명을 했다. 『그러한 광고들은 보수 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단체들에서 내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후보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공약들에 동조하는 것이다. 또한 진보 쪽 공약을 갖고 있는 후보자도 있다.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후보자도 있지 않나. 보수단체의 신문광고들은 그 후보들에게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게재 중지 결정을 내렸다』
헌법기관이 親北(親김정일을 뜻하므로 조국에 대한 반역과 같은 의미)과 애국 사이에서 중립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공무원은 또 反美·親北을 「진보」라고 해석한다. 金大中 정권下 공무원들의 혼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鄭夢準, 盧武鉉 지지철회의 의미
오늘(12월18일) 밤 9시를 넘어 여러 군데서 숨가쁜 첩보가 기자의 휴대전화로 들어왔다. 곧 鄭夢準 대표가 盧武鉉 지지를 철회할 것이란다. 단일화로 시작된 선거전이 단일화 정신이 깨지는 것으로 끝나는구나 하는 感想이 생겼다. 국민통합21의 金杏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서 『오늘 서울 명동 합동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썼다』면서 『정몽준 대표는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며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뒤 의미를 유추해 보면 鄭夢準 대표는 盧武鉉 후보가 선거과정에서 제시한 對北 정책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盧후보는 서울 종로 유세에서 『北美 간 핵무기를 둘러싼 싸움이 있다』며 『한국이 중심을 잡아야지 끌려 다녀선 안 된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심을 잡고 북한과 미국에 양보를 요구해야 한다』는 요지로 말했다고 한다(朝鮮日報 12월19일자 보도).
盧武鉉 후보의 발언은 北核 문제에 대한 韓美 공조를 부인하고 美北 간에 중립을 선택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韓美안보 동맹의 핵심은 안보·군사동맹이다. 北核 문제와 같은 결정적인 군사문제에 대해서 韓美 공조를 부인하고 美北 사이에서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것은 韓美동맹 관계를 결정적으로 훼손시키는 자세다.
우리의 혈맹 미국과 우리의 主敵 金正日 사이에서 중립에 서겠다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는 판단을 鄭夢準 대표가 했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런 취지로 해석된다.
2002 大選의 역사적 의미
모든 국민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는 대통령 선거는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 斷面, 맥박과 고동, 염원을 드러낸다. 2002년 大選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산업화 세대 對 정보화 세대의 대결: 산업화 시대의 主力軍이었던 50代 이상의 기성세대는 다수가 李會昌 후보를 지지하고 정보화 시대의 총아 인터넷 세대인 20, 30代는 다수가 盧武鉉 후보를 지지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돈과 직위, 전문성과 경륜을 종합한 영향력 면에서는 산업화 세대가 優位에 있지만 선거판에서는 행동력과 머릿수가 더 중요하다.
●反共 대 反美: 산업화 세대의 정통 이념은 反共·親美였다. 정보화 세대는 무장 대치상황에서 彼我구분 능력을 마비시킨 金大中 정권의 햇볕정책에 물들어 反共을 우습게 알고 反美를 패션처럼 추종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反美 책동 정권이 북쪽에 존재하는 한반도의 이념 대치상황에서 反美는 불가피하게 親北(親북한동포가 아닌 親김정일 정권)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反共 대 反美」가 「反共(즉 親韓) 대 親北」 구도로 악화되면 이는 「我(한국) 대 敵(김정일)」의 내란적 상황을 의미한다.
선거판에서 親北좌익 세력의 발호를 방치하고 이를 이용했던 정치인들은 선거 후 이들의 반역적 행동을 제어해야 할 책무를 지게 되었다.
●좌파 문화 확산: 反美운동을 선봉으로 삼아 선거판에 퍼져 간 좌파 문화의 이념적 핵심은 사회주의 혁명논리이며 기성세대와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사회주의 혁명논리는 모든 인간이 가진 증오심과 저질성을 격려하고 충동질한다.
이런 이념에 포로가 된 젊은 좌파가 정권의 손발이 되면 1960~1970년대 中共의 홍위병과 1970년대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가 된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좌익 홍위병이 정권을 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낙관만 할 수 없는 것은 북한의 金正日 정권이 후원세력으로서 이들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이 존재하지 않는 서구의 좌파와 북한정권이 개입하고 있는 한국의 좌파는 다르다. 서구의 좌파는 비판세력이지만 한국의 親北좌파는 반역세력이다. 젊은, 좌파 에너지는 파괴적으로 흐를 때 국가에 재앙이 되지만 성숙한 지도자들에 의해 생산적으로 전환될 때는 늙은 우파보다도 더욱 큰 위업을 만들어 낸다. 정치인과 기성세대가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金大中의 작품: 大選에서 盧武鉉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金大中 시대 5년의 유산 덕분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정치권력을 엔진으로 삼고 햇볕정책을 간판으로 삼아 한국 사회를 자신의 이념에 따라 좌회전시켰다.
애국세력은 위축되었고 좌파가 득세했으며 對北觀이 모호해졌고 국가의 彼我 식별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렇게 달라진 이념 地形 위에서 2002 大選이 전개되었다. 金大中 정권의 영향을 크게 받는 親與방송과 신문들, 국가기관들, 親與 사회단체가 盧武鉉 후보를 지원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깐 레일 위를 盧武鉉 기관차가 달린 것이다.
●거듭 태어난 민주당과 낡은 한나라당: 민주당은 2002년 정치변화를 주도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대선판의 주도권을 잡았다. 정권 再창출이 거의 無望하다는 판단에 따라 起死回生의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민주당과 盧武鉉은 이른바 국민경선, 단일화 드라마를 만들어 내었고 낡은 정치 청산이란 구호에 實感을 불어 넣었다.
李會昌 대세론 위에서 잠자던 권력기생 체질의 한나라당은 관료화되어 현실에 안주하다가 민주당처럼 거듭 태어나지 못했다. 자연히 한나라당은 한국인들, 특히 젊은 층의 염원을 정확히 診斷하지 못했으며, 달라진 한국 사회에 먹혀들 수 있는 선거전략과 전술도 개발하지 못했다.
●산업화 세대의 마지막 기회: 이번 선거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 우파 주류층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子女들의 이념 교육권을 좌파에게 넘겨 주면 언젠가는 정권과 체제가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건강이 유지되는 기간 안에 젊은 좌파들을 잘 가르쳐 그들이 시멘트에 달걀을 던지는 「젊은 악마」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이 기간에 親北 좌익세력의 本山인 金正日 정권을 제거하여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투표를 마치고
오늘(12월19일) 오전 10시 투표를 하고 나와 회사로 오는 택시를 탔다. 경기도 평택이 고향이라는 50代 초반의 기사는 『나는 무조건 야당만 찍는다. 李會昌이 잘나서도 盧武鉉이 못나서도 아니다. 정권교체를 해야 권력으로 해먹지 못하게 된다. 이런 정권교체를 한 열 번쯤 해야 깨끗해진다』고 했다.
오늘 기자가 간 투표장은 지난 6월의 지방선거 때보다는 붐비는 편이었다. 40代 이상층의 얼굴이 다소 많은 듯 보였다. 투표는 질서정연하게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지면을 통해서 중계된 후보들의 험악한 이야기와는 다른 성숙한 민주사회의 한 풍경이었다. 1830년대, 즉 미국이 독립한 지 60여 년이 지난 시대에 미국을 紀行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란 不朽(불후)의 名著(명저)를 남겼던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스 토크빌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이렇게 썼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음모는 더욱 활발해지고 선동은 더욱 격렬해지며 확산된다. 온 나라 전체가 열병에 걸린 것처럼 되고 신문과 대화에서는 선거가 일상적 主題가 되며 사람들의 모든 언동과 생각은 이 주제에만 쏠려 있는 것 같다. 결과가 공표되면 열정은 흩어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 조용해지며 둑을 넘었던 강물은 다시 내려 앉는다. 그러나 이런 폭풍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닌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미국인들은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결정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를 누군가가 비판하면 조국을 옹호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난당하고 있는 것은 미국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2년 한 해를 줄곧 뒤흔들었던 大選의 결과가 오늘 발표되면 우리나라도 이처럼 될 수 있을까. 모든 소란과 갈등과 말싸움의 끝이 애국심을 강화시키는 방향, 즉 대한민국과 우리를 하나로 묶는 방향으로 정리될 수 있어야 그동안 수많은 국민들이 걱정·초조·분노가 헛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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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長의 편지] 한민족과 金正日의 정면승부 구도
7000만 민족은 金正日을 主敵으로 규정하고 이 한반도 巨惡의 사령부를 근원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愛國 기독교의 大궐기 현장에서
1. 오늘(1월1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된 北核반대·反美반대 기도회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6월의 월드컵 거리 응원 때처럼 수만 명의 군중이 광장을 꽉 메웠습니다. 통상적인 우익 집회 때와는 달리 남녀노소 구분 없이,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참여한 집회였습니다. 플래카드, 태극기, 성조기, 파란 풍선을 든 군중들이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꽉 들어찬 광장은 사랑과 회개, 애국과 憂國의 마음으로 뜨거웠습니다.
2. 6월의 월드컵 응원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지난 달 여중생 애도 시위는 증오의 무대였다면 오늘의 광장은 사랑과 애국이 主調였습니다. 기도회의 主題는 핵개발로 불장난을 하고 있는 金正日에게 보내는 경고, 미국에서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나오게 만든 反美운동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월드컵 응원 때나 여중생 집회 때는 쓰레기와 종이가 흩어져 있었는데 오늘 광장은 시작과 끝이 아주 깔끔한 질서정연 그 자체였습니다. 惡意가 아니라 善意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3. 「한국과 미국은 혈맹의 우호관계이다」,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하라」, 「우리는 反美운동을 반대한다」는 피켓·플래카드가 이날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의 걱정을 요약해 주었습니다. 기도회를 주관한 목사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이유를 먼저 「우리의 회개 부족」으로 돌렸습니다. 反美집회에 가 보면 모든 惡의 근원이 미국이고 他人인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여 비난해마지 않는데 이날 모인 분들은 먼저 自責으로 시작했습니다.
4. 김홍도 목사가 기도를 통해서 『온갖 인권유린을 다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을 하나님께서 무너지게 해주십시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을 때 저는 속이 시원했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도들은 金正日을 구제불능의 「사탄의 세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탄의 세력은 인간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여 저 악마적 인간을 제거해 달라는 절규 같은 기도였습니다.
5. 이날 기도회는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했습니다. 국민일보, 극동방송, 기독교TV, 기독교언론사가 후원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趙鏞基 목사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6. 이날 광장에는 右派 단체 사람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대령연합회 서정갑 회장, 탈북자동지회 홍순경 회장, 자유시민연대 지도자 유기남 회장, 故 李承晩 대통령의 아들 李仁秀 박사 부처, 최근 反美 반대-주한미군 철수 반대 사이트를 만든 대학생들 등등. 이날 모임을 미리 알고 자발적으로 친구, 친척, 친지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함께 온 60代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대규모의 자발적 애국시위는 최근 10년간 처음이었습니다. 左派뿐 아니라 右派도 광화문과 시청 거리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實證한 점에서 이번 행사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 이번 행사의 의미는 세계를 향하여 애국시민들이 『反美는 일부 철부지들의 운동이지 대다수 한국인은 미국을 좋아하고 주한미군을 환영하며 金正日을 반대한다』고 집단적인 의사표시를 하였다는 점입니다. 소수의 극렬한 친북좌익 세력이 화염병과 달걀과 증오와 선동과 위선으로 무장하여 시위를 주도함으로써 마치 그들이 한국의 여론을 대표하는 것처럼 위장했었는데 이를 분쇄한 것이 이번 기도회였습니다.
8.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과, 대한민국과, 미국 사람들과 애환을 같이 해오면서 日帝 및 북한 독재정권과 싸워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개화기 때 미국 선교사들은 교회뿐 아니라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日帝 강점기 때 한국 교회는 독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섰고 미국은 미래의 지도자 李承晩 대통령을 지원했습니다. 건국기에 한국 기독교는 李承晩 박사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金日成의 박해를 받아 越南한 북한 기독교 세력은 남한에서 기독교를 확산시켰으며, 6·25 전쟁 때 숱한 피해를 당하면서도 공산주의 무신론과 맞서 싸웠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또 근대화의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윤리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고 민주화 운동의 요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金正日 정권은 북한 주민들을 버림으로써 수백만이 평화時에 굶어 죽도록 방치하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드문 범죄를 자행하였습니다만, 한국의 기독교는 버림받은 북한 주민들과 탈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지금도 돈을 쓰고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9. 한반도 통일은 결국 金正日의 증오를 한국 기독교의 사랑이 녹여버릴 때 이뤄질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평화통일일 뿐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통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사탄의 세력인 金正日은 회개하지 않는 한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0. 저는 오늘 시청 앞 광장에서 소수의 義人(A Few Good Men)이 아닌 다수의 義人들을 보았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赤化는 저지될 것이고 자유통일은 기필코 달성될 것이라는 든든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기도회를 이끈 진성윤·길자연·김기수·최성규·최해일·조용기·지덕·김홍도·최병곤·신신묵·이만신·예종탁·박영률·고상권·정연택·김준곤·노승숙 목사님들을 하나님과 대한민국이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11. 하나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민족중흥의 기수 朴正熙를 민족반역자 金正日보다 더 미워하는가 하면 북한에서 벌어진 대규모 미국 규탄 시위는 보도하고 한국內 애국 시위는 묵살해 온 어용·친북 언론들은 이번 행사도 의도적으로 축소 보도하거나 아예 생략할 것입니다. 크게 보도되고 작게 보도되는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고 그 기도에 응답하는 분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너무 화를 내지 마십시오. 德과 사랑은 절대로 고독하지 않습니다.
한민족과 金正日의 정면대결 구도
어제 서울시청 광장 기도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애국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한 국민들이 金正日의 핵전쟁 책동을 저지하여 우리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려고 궐기했다는 의미는 간단치 않습니다. 우선 대결구도가 간단명료해졌습니다.
애국시민들은 北核 공갈과 때를 맞춰 한국에서 일어난 反美운동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北核이 나오면 反北운동이 나와야 정상인데, 왜 反美가 등장하는가. 왜 우리 與野 정치인들은 이 反美에 경쟁적으로 편승하는 추태를 보였는가. 한국內의 친북좌파 책동은 결국 金正日의 조종을 받아 일어나고 있다. 한반도의 左派·전쟁·독재세력, 그 사령부는 결국 金正日이다. 대한민국 수호 세력이 이 金正日을 민족의 主敵, 악의 사령부로 규정하고 정면승부를 걸어 그를 근원적으로 제거하여야만이 한국內의 萬惡도 해결할 수 있다.
이제는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 된 입장에서 민족의 公敵 金正日과 정면 대결한다. 이제는 한국내 친북좌파 세력도 결단해야 한다. 애국인가, 반역인가.
한국의 右派 애국세력이 이런 각성에 도달했다는 것은 지난 大選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右派는 민족사의 정통 세력이요, 대한민국을 만든 주류세력이며, 자유와 正義를 신념화한 진정한 진보세력이다.
2002년 12·19 大選에서 진 것은 한국의 右派가 아니다. 右派로 위장한 기회주의자들이 진 것이다. 李會昌과 한나라당은 右派는커녕 보수란 말도 듣기 싫어한 無이념 정당이었다. 그들이 이념도, 전략도, 용기도 없는 선거전을 벌여서 질 수 없는 구도에서 진 것이다. 이 패배로써 李會昌도, 한나라당도 右派가 아님을 스스로 실증했다.
이념적 右派,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세력은 건재하다. 오히려 더 투지를 불태우면서 자기 혁신과 전투적 행동에 나서고 있다. 공부도 열심히, 설득도 열심히, 조직도 열심히 하고 있다. 특히 젊은 右派들이 움직이고 있다. 진정한 右派는 지지 않았다. 진 것은 살찐 돼지들이고 건재한 것은 愛國右派이다.
愛國右派가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친북좌익도, 金正日도, 미국도, 盧武鉉 정권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나라와 가족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右派들이 알아둘 일이 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것을, 右派와 金正日의 정면승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역사와 상황의 주도권
만약 서울시청 광장 시위가 국민운동으로 확산되고 3·1절에 맞춰 광화문에서 北核규탄 100만 시위가 제2의 3·1운동으로 일어난다면 한반도의 역학관계는 급변할 것입니다.
1. 미국 등 우방국은 한국의 主流가 金正日의 핵공갈에 대해서 엄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고 北核 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金正日 정권 제거라는 점을 再확인할 것이다.
2. 金正日이 친북좌익 세력을 조종하여 反美, 反대한민국 운동을 벌이려고 해도 기세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도 어정쩡한 자세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 한국의 右派 애국세력이 행동력과 동원력에 자신감을 갖고서 國政에 대한 발언을 하기 시작하면 「침묵하는 다수」가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진 다수가 되어 나라가 중심을 잡는다.
4. 국민들의 총궐기로 金正日의 核공갈이 국제사회의 공조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다면 통일의 주도권은 대한민국 편으로 넘어온다. 국민들이 역사 만들기의 수동형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金正日과 히틀러 공갈
한때 金正日의 스승이었던 黃長燁 前 노동당 비서는 金正日이 히틀러를 숭배한다고말했습니다. 金正日이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核공갈의 패턴을 보면 히틀러가 1930년대에 유럽을 상대로 공갈외교를 벌여 속속 영토를 확장해 가던 수법이 생각납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부가 결전의지를 갖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거대한 환상」과 같은 反戰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는 프랑스 지도층의 정신이 썩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히틀러가 라인란트에 군대를 불법적으로 진주시키고(1936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1938년) 체코슬로바키아까지 먹어치우고(1939년) 한 것은 『이렇게 해도 영국과 프랑스는 무력으로 독일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는 판단下에서 모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여론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중민주정치에선 정치인들이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英佛 지도층의 전쟁의지 박약을 그들에게만 책임추궁할 수는 없습니다.
金正日이 1993년에 이어 작년에 다시 시작한 核공갈의 전개과정을 보면 한국과 미국 지도부는 전쟁을 결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도권 인구 2000만이 북한군 장거리포의 사정권에 들어 있는 데다가 한국內엔 평화세력으로 위장한 金正日 추종세력이 있다, 미국이 아무리 金正日을 치려고 해도 한국이 말릴 것이고 결국은 대화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깐 것입니다. 金正日의 계산이 먹혀들지 않으려면 한국의 여론이 일전불사 쪽으로 선회해야 합니다.
히틀러를 가장 정확히 알고 연구했던 사람이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양보는 결국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경고했지만 여론과 언론, 그리고 정계에서 따돌림만 당했습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처칠은 수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전쟁위험을 과장한 우익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존 루커스가 쓴 「히틀러와 처칠의 대결」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40년 영국 상공의 공중전을 무대로 설정하여 인류의 문명을 건 두 사람의 결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루커스는 이 책에서 처칠이 결국 히틀러를 이기게 된 것은 히틀러가 처칠에 대해서 안 것보다도 처칠이 히틀러에 대해서 안 정도가 훨씬 깊었고 정확한 점과 관계가 있다고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1940년에 처칠이 히틀러의 제1 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현대사에서 처칠이 히틀러를 이해한 정도로 외국의 라이벌을 熟知한 경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랬기 때문에 처칠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처칠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선동가일 때부터 그를 관찰했다고 합니다. 1930년 히틀러 집권 3년 전 처칠은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면 독일의 再무장과 세계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예언했습니다(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 참사관이 이런 처칠의 발언을 본국에 보고한 문서가 있다).
역사가가 언젠가 이렇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2003년에 盧武鉉 대통령이 金正日의 제1 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였다. 현대사에서 盧武鉉 대통령만큼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熟知한 경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던 것이다>
혹은 이렇게 쓰여질지도 모릅니다.
<2001년에 부시가 金正日의 제1 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전후 현대사에서 부시만큼 북한 지도자의 본질을 熟知하고 있었던 예는 달리 없다. 그랬기 때문에 金正日 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애국심과 적개심
「히틀러와 처칠의 대결」에서 필자 루커스는 두 사람의 인간됨을 아주 재미있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1. 히틀러가 국가주의자였다면 처칠은 애국자였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敵에 대한 증오심이 主流이지만 애국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主流이다.
2. 히틀러는 처칠을 호전적인 독일인의 적, 시대착오의 반동주의자로 보았다. 처칠은 히틀러가 야만시대 惡의 재현인데, 과학기술로 무장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3. 히틀러는 증오심이, 처칠은 관대함이 성격의 主調였다.
4. 히틀러는 유머감각이 없었으며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처칠은 눈물을 잘 흘렸고 위기 때도 항상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5. 히틀러는 남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처칠은 약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6. 두 사람 모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독서를 많이 했다. 히틀러는 말을 중시했고 처칠은 글을 중시했다.
7. 히틀러보다 처칠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했다. 처칠은 「운명의 여신은 관습에 등을 돌리는 사람에게 분노한다」고 쓴 적도 있다. 처칠은 히틀러를 유럽 문명의 파괴자로 보았고 자신을 수호자로 보았다.
8. 처칠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교묘하게 융합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독일인 특유의 관념론에 기울었다. 히틀러는 독일군대가 강력한 이유로서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독일 병사들의 정신력을 들었다. 히틀러가 관념론자라면 처칠은 원칙론자였다.
이런 비교표를 읽고 있으면 金正日과 히틀러가 비슷해지고 부시와 처칠이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부시가 金正日에 관해 언급한 내용은 짧지만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주민들을 굶겨 죽여가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거대한 정치수 수용소를 운영하는 악의 축, 그 자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
이런 부시의 대통령 재임 중 盧대통령이 다수 국민들의 正義感을 딛고서 金正日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끌려가지도 않고 버틴다면 최소한의 경비를 지불하고 金正日 정권을 끝장내어 2000만 북한 주민들을 좀더 나은 생활로 인도하면서 4500만 한국민들이 편히 잠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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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長의 편지] 거대한 국민혁명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을 우습게 보았던 세력이 우습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최소 10만 명의 애국시민들이 모였던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는 3억원 미만의 국민성금으로 치러졌다. 1700명이 넘는 시민들이 2000원에서 수백만원의 성금을 보냈다. 100여 개의 참여단체들은 30만원씩 참가비를 내었다. 정당 집회 같으면 주최 측이 돈을 주면서 동원할 터인데 돈을 내면서 대회에 참여한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대회를 정당에서 주최했다면 수십억원이 들었을 것이다. 자발성이란 위대한 경제학이다. 우리는 지금, 애국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갑과 손발로 한다는 말이 실천되는, 거대한 국민혁명의 序曲을 감상하고 있다.
친북좌익세력명단공개추진본부(본부장 徐貞甲 육해공군 예비역 대령 연합회 회장)는 지난 1년 사이 신문지상에 「대한민국이 김대중을 고발한다」, 「간첩을 골키퍼로 세워두고는 공격도 수비도 할 수 없습니다」 등 아주 공격적인 제목의 의견광고를 신문에 내어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던 단체이다. 이 단체는 지난 3월6일자 조선일보 광고에서 3·1절 국민대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행동 친북좌익척결본부」를 발족했다고 알렸다.
3월6일자 「국민행동 친북척결본부」의 광고를 읽은 한 노인이 이 본부 앞으로 이런 팩스 편지를 보내왔다.
<국민행동 친북좌익척결본부 출범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축하합니다. 나는 정부 여당 친북좌익 세력에게 묻고 싶습니다. 남한의 군사독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대 투쟁하면서 유독 북한 김정일 독재자에게는 관대한지?
남한의 소위 군사독재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한결같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장기집권욕 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제한된 점은 있지만….
김일성처럼 정권을 세습화하고 대를 이은 독재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비판을 삼가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한술 더 떠서 비밀리에 뇌물까지 바치다니 정말 울분을 참지 못하겠습니다.
친북 세력이 날뛰는 동안 정말 나라를 걱정하는 우리들은 할 말 못하고 속만 태우다가 마침내 의미 있는 단체가 탄생하여 정말 다행입니다. 북한 김정일에게 비밀 송금한 일당들을 꼭 색출하여 의법처리하여야 합니다.
2003년 3월1일 안양 거주 애국노인.
♥용돈을 절약하여 소액이나마 회비를 입금했습니다.
우리은행 119-363436-02-001 박근.
나라가 바로 서고 진정한 통일이 될 때까지 친북좌익 세력 척결에 동참하겠습니다>
국민행동 친북좌익척결본부는 조선일보 3월12일자 2면에 낸 광고에 이 편지를 실었다. 이 광고를 보고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팩스 편지가 또 날아왔다.
<저는 누구보다도 제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해외교포입니다. 이곳에서 매일 YTN을 통해서 한국 소식을 접하다가 보면 일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대통령 선거일에 레저 여행객들로 공항이 붐비고 유원지마다 사람들로 넘쳤다는 현실에 참담함을 떠나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다행히 침묵하는 다수의 의식을 깨우고 행동에 나서는 용기에 진심으로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는 뒤에서 걱정이나 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살기엔 너무 위험수위에 이른 것 같습니다. 부디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마시고 강력하게 행동으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빕니다. 성금 10만원을 국내에서 송금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국민행동 친북좌익척결본부의 회원가입 계좌는 「국민은행 813001-04-000546 국민행동본부(서정갑)」이다.
20, 30代 애국 청년 기자 다섯 명이 라면을 끓여 먹어 가면서 운영하는 인터넷 독립신문(independent.co.kr)을 후원하기 위한 홈페이지상의 모금도 잘되고 있다고 한다. 후원회비 모집 社告를 낸 지 20일 만에 300여 명이 보낸 1400만원이 모였다고 한다(우리은행 107-174251-02-001, 신혜식).
돈 있는 국민들이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는 단체를 위해서 일종의 체제유지비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 변화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金正日의 走狗들에게 나라를 소매치기당하겠구나 하는 위기감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존재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지난 5년간 대한민국을 우습게 보면서 권력과 선동을 믿고(金正日이나 金大中을 든든한 후원세력이라 생각하고) 온갖 악행을 자행했던 세력은 곧 알게 될 것이다. 피, 땀, 눈물의 금자탑인 대한민국이 화를 내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반역세력들은 국가가 생존본능을 발휘할 때 얼마나 비정해질 수 있나 하는 것을 역사 속에서, 가까이는 6·25 戰史 속에서 배워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침묵하던 다수의 궐기는 근대화의 완성이란 의미가 있다. 朴正熙의 근대화에 의해 한국의 근대화가 끝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西歐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뤄졌던 근대화를 우리가 한 세대 만에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誤算이다.
朴正熙에 의해 물질적인 근대화가 이뤄지고 그런 物的 바탕 위에서 민주화의 단계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을 들여다보면 前近代的 요소가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近代性의 핵심은 합리와 과학이다. 물질적 근대화와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은 합리와 과학으로의 의식혁명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런 의식혁명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다. 전통적인 전근대화 세력과 金正日에게 세뇌당한 세력이다. 이들은 위선과 선동으로 합리와 과학을 마비시키려 든다. 金正日과 그 추종 세력은 이런 전근대성에 뿌리박은 정치집단이다. 선동에 잘 넘어가는 사람들, 즉 마음속에 합리와 과학 대신 열등감, 불만, 편견, 증오심, 미신, 狂信이 가득 찬 사람들이다. 金大中·盧武鉉 세력의 상당 부분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盧武鉉 대통령의 장점인 솔직담백한 면이 희망을 갖게 한다. 盧武鉉 대통령의 성공에 필수조건은 金大中·金正日 세력과 단절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아직도 前近代에 머물러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현상이 있다. 金正日의 선전선동 전략인 소위 민족공조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뻔한 사기와 미신에 속을 만큼 합리성과 과학성이 결여된 이들이다. 金日成은 외세(스탈린과 毛澤東)와 공조하여 동족을 친 인간이다. 그런 자의 아들이 말하는 민족공조란 사기임에도 이에 넘어가 『金正日의 핵은 민족의 공동자산이다』라고 떠드는 세력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 않고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데서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이 입증된다.
대한민국의 대립 상황은 요사이 명백해졌다. 한국적 상황에선 휴전선이 바로 적과 동지를 가르는 기준일 수밖에 없다는 원점으로 회귀한다. 金正日 편인가, 대한민국 편인가, 독재 편인가, 자유 편인가, 애국인가, 반역인가이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는 오늘의 상황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다. 金正日에 반대하면 그가 사회주의자이든(金正日은 권력세습과 주민탄압에 의해 진정한 사회주의자의 敵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자유주의자이든 대한민국 편이다.
이는 동시에 先進과 後進, 近代와 前近代의 대결이다. 대한민국 편은 선진과 근대와 과학과 합리를 대표한다. 金正日 편은 後進, 守舊, 前近代를 대변한다. 金正日의 선전선동에 넘어가 대한민국에 반역한 세력들은 金大中과 金正日의 권력을 믿고 대한민국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우습게 보았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정통성을 무시하기를 예사로 하였다.
이런 공격과 모욕을 묵묵히 견디고 있던 대한민국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 3·1절 국민대회였다.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끌고 가는 主流 정통 세력이었다.
前 총리, 前 장관, 現 국회의원, 기업인, 언론인, 과학자, 종교인, 장군 출신, 장교, 대사, 주부, 학생, 공무원 등 그야말로 국민국가 한국을 대표하는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골고루 모였다. 이들이 가진 염원의 공약수는 「反核反金 자유통일」이었고 공식구호 「우리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였다.
이들은 국민대회 全과정을 통해서 민족반역자 金正日과 그에게 부화뇌동하는 반역세력에 대해 행동개시를 선언하였다. 이제 대한민국을 우습게 본 세력들이 우습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을 만든 주체세력,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 만들어진 主流 선진세력인 공무원 집단·기업인·군대·언론·종교계·과학자·전문직 종사자들이 前近代·후진·반역세력의 진압에 나선 것이다. 이 주류층은 많은 자원과 수단을 갖고 있다.
애국세력으로 행동을 개시한 이 주류층이 전문성, 머릿수, 나이, 돈, 직위 등 자원들을 총동원하면 엄청난 힘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결국 金正日 추종 세력이 동원할 수 있는 힘을 압도할 것이다. 삼국통일의 元勳인 金庾信이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正直으로 적의 굽은 곳을 치면 이긴다』
대한민국 세력은 합리와 과학에 근거하므로 정직하다. 金正日 세력은 선동·기만·허위·광신·우상숭배에 기초한 굽은 세력이다. 대한민국 세력이 도저히 질 수 없는 게임인 것이다. 지금 일어나기 시작한 국민혁명은 모든 국민들이 「이 나라의 주인은 나다. 내가 책임 지고 나라를 지킨다」라는 각성의 확산이며 집합이다.
군대가, 안기부가, 경찰이, 검찰 공안부가, 기무사가 敵을 막아 주겠지. 그 뒤에서 나는 적당히 비판하고 놀아도 되겠지. 이런 노예근성을 청산하고 『우리가 주인이다』고 선언하고 주인답게 행동하는 것이 국민혁명의 시작이다.
이 국민혁명을 통해서 金正日 추종세력은 숙청될 것이다. 金正日 추종세력의 무력화는 사령탑인 金正日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국민들이 이런 自衛力을 갖게 될 때 대한민국은 赤化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항상 뒷다리를 걸었던 後進 세력이 치워지면 우리는 자유통일을 넘어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非서양 국가로서는 일본 다음에 두 번째로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지금 우습게 보고 있는 세력은 그 代價를 반드시 치르고야 말 것이다. 국민혁명의 과정에서 對北 불법송금에 관련된 金大中과 그 측근들은 단죄될 것이다. 金大中 정권이 지난 5년간 한 일들을 제대로 알아야 설득도 공격도 가능하다.
망해 가던 金正日 정권을 살려 주고, 미국과 협조했으면 막을 수 있었던 金正日의 핵무장을 사실상 허용하고, 애국은 숨어서 반역은 대놓고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韓美동맹 정신을 파괴하면서 金正日의 對南 공작기관에는 수억 달러를 송금하고, 간첩들을 돌려 보내고, 탈북자·납북어부·국군포로들을 모른 척하고…. 한국인은 金大中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지 그에게 반역 면허증을 준 적은 없다.
반역적 범죄를 단죄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 가치가 없다. 대한민국은 그런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다. 피, 땀, 눈물로 쌓은 인류사의 금자탑이 아닌가.●
아주 조그만 애국
이 글은 趙甲濟 기자 홈페이지(www.natizen.com)에 방문자가 올린 글이다.
이름:린자이(jk1117@chosun.com) (40, 남, 자영업)
전 조그만 횟집을 운영합니다.
들어오는 물건 외상없이,종업원 월급 미루는것없이 세금 내면서
열심히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일한답니다.(아내 고생다시키지요)
자유 민주주의!
열심히 일해서 저축하고 애들 학교 보내고 부모님 병원 보내드리고
저도 가끔식 한잔....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이런 자유가 선배들의 피,땀,눈물없이 이루어졌을까요?
자라나는 우리애들을 위해서,거창하게 말하면 자유대한민국을 위해서
열심히 오늘도 아나고를 잡는답니다.자유대한민국만세!자영업자 힘냅시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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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長의 편지] 9人의 손에 들린 조국의 운명, 한국의 민주주의
국회와 憲裁를 지키는 것이 헌법과 체제를 지키는 일이고, 이를 협박하는 것이「내란 선동」이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지난 3월12일 오후 2시쯤 月刊朝鮮 팩스로 열린당의 긴급 성명서 한 장이 들어왔다.
<-정권찬탈을 위한 趙舜衡과 趙甲濟의 악마적 거래-
盧武鉉 대통령 당선에 분을 삭이지 못하던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일찌감치 정권찬탈의 음모를 갖고 탄핵을 이야기하며 趙舜衡 대표에게 거래를 제시했다. 趙甲濟는 『野 3당이 협력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대통령 탄핵이 가능하다. 무엇을 망설이냐. 탄핵 뒤 趙舜衡 대표를 차기 대통령으로 하고 대신 개헌의 조건을 달자』고 정권찬탈의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에 趙舜衡 의원의 대권 욕심과 한나라당의 권력찬탈 음모가 맞물려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추악한 공조가 이뤄진 것이다. 趙-趙 간의 악마적 거래에 국민은 분노한다. 못하는 짓이 없는 더러운 인간들의 악마적 거래는 국민의 철퇴를 맞을 것이다>
나는 개인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 성명서를 올리고 이런 논평을 달았다.
<나는 趙舜衡 의원을 꼭 16년 前에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 뒤로는 통화 한 번이 없었다. 그러함에도 내가 쓴 글과 趙舜衡 대표가 한 일이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면 그 以心傳心의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1. 나라에 대한 걱정과 해법이 같았다.
2. 헌법이 권력남용을 견제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같았다.
3. 정의감이 대충 비슷했다.
4. 盧武鉉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盧武鉉이 잘해야 나라가 잘 된다고 생각한 점에서도 같았다>
내가 趙舜衡 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이었다. 나는 釜馬사태와 10·26 사건을 다룬 「有故」란 책을 냈는데, 趙의원의 부인 金여사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 쓴 적이 있었다. 첫 만남에서 그것이 화제가 되었다. 두 번째는 1988년 총선에서 趙의원이 낙선한 직후였다. 月刊朝鮮에서 「낙선자는 말한다」는 기획을 했는데, 내가 趙의원에게 원고를 부탁했던 것이다. 趙의원이 쓴 글은 자신의 敗因 중 하나로 이런 이유를 들었다.
<위법인 개인벽보를 붙이지 않는 등 선거법을 충실히 준수하면서 정상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편집장으로서 나는 趙의원에 대한 기사를 최근 두 건이나 게재 보류시킨 적이 있다. 인물기사는 화제와 기복이 많아야 하는데 趙의원에 대한 기사와 인터뷰는 너무나 단조롭고 상식적이라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호에 탄핵을 主導한 그를 다루기 위하여 묵혔던 기사를 꺼내 읽어 보니 재미있는 대목이 있었다. 올해 초 한 점쟁이가 「趙대표는 敵將의 목을 벨 괘」라고 했다는 것이다.
열린당이 낸 성명서는 아마도 내가 작년 12월31일에 홈페이지에 올렸던 「탄핵 뒤 趙舜衡 차기 대통령론」이란 글을 음모론의 근거로 삼는 듯하다. 이 글이 政界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던 나로선 여당이 「악마적 거래」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공상과 조작과 욕설을 쏟아 놓는 것을 보고 새삼 느낀 바가 있었다. 그 하루 전 盧武鉉 대통령이 전국에 생중계된 기자회견에 나와서 뇌물을 받은 형을 동정하고 뇌물을 준 사장을 경멸하는 발언을 하여 그 사장을 자살로 몰아간 것과 이 여당 성명서는 同祖同根의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권력을 잡은 집단의 교양 수준을 보여 주는 것―말이야말로 인간과 집단 그 자체이니까.
이 성명서가 퍼진 직후부터 나한테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전화기를 들면 욕부터 퍼붓는 전화공세였다.
『야, 이 개새끼야!』
『예, 제가 개새낀데요. 말씀하시죠』
이렇게 받으면 『어이쿠, 미안합니다』라면서 끊어 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염치가 있구나 하는 안도가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왜 盧武鉉 대통령 지지자들은 말과 글을 이렇게 험하게 할까. 盧武鉉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 사회의 언어생활이 저질화된 것, 그 가장 큰 책임자는 지금은 직무가 정지되어 있는 대통령의 입이다. 숭배자 집단은 지도자를 모범으로 삼고 모방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구해서 들어 본 盧武鉉씨의 「노사모」 집회 발언 중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그 악질적인 언론 한 개는 내가 반드시 퇴출시키겠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이제는 그가 퇴출위기에 몰렸다. 집단의 교양은 지도자를 닮아 간다는 나의 가설을 입증시켜 준 자료가 또 있다. 지난 3월8일 열린당의 李海瓚 의원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조선닷컴).
『탄핵이 결의되면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다. 이는 내란음모 선동이다』
헌법 절차에 따라 국회가 대통령을 상대로 탄핵소추 과정을 밟는 것을 내란음모 선동이라니? 헌법 절차를 방해하기 위하여 국회를 점거한 열린당이 내란음모선동에 더 가깝다. 만약 줏대가 없는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지 않아 탄핵소추안이 처리되지 않았더라면 폭력으로 정권의 평화적 교체 가능성을 막은 경우에 해당하므로 이야말로 헌정 중단이고 쿠데타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닌가.
열린당은 또 국회 본회의장 점거 농성을 「실력저지」라고 불렀다. 정당의 실력은 의석수이다. 정당의 실력저지는 표결로써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한 「실력저지」는 「폭력저지」이다. 열린당은 폭력을 실력으로 보는 정당이다. 열린당은 黨名을 「열린우리당」이라고 정해 열린당원이 아닌 사람들은 이 黨名을 읽을 때마다 「당신당」을 「우리당」이라고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盧武鉉 후보가 청와대까지 옮기는 遷都를 「수도 이전」이라고 하지 않고 「행정수도 이전」이라고 속였던 것도 같은 수법이다.
이런 정당의 교양 수준이니까 16년 동안 만난 적도 없는 나와 趙舜衡 대표 사이를 「악마적 거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짐승도 아닌 인간을 향해서 「악마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여당은 제정신이 아니거나 「악마적 본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月刊朝鮮 3월호에 실렸던 宋復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마음 내키는 대로 정당을 부수고 새로 만드는 사람은 세상을 부수고 더럽히는 사람이다. 열린당의 鄭東泳은 세상을 더럽히는 수괴이다. 그걸 盧대통령이 조종했다면 수괴의 조종자이다』
『천금의 말을 해야 할 자리에서 일전짜리 말을 한다』
盧대통령은 품위 없는 惡談으로써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 사건이 국회의원들을 결속시켜 그를 파면당할 처지로 몰았다. 自業自得이다.
내가 盧武鉉 탄핵사유를 쓴다면 「저질언어를 확산시켜 한국 사회의 저속화를 가져온 죄」를 맨 처음에 올릴 것이다. 毒氣 서린 말, 지저분한 말, 애매모호한 말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는가 말이다. 이는 대통령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적 행위이다.
193 대 2. 이것이 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국회, 그리고 국민의 평가이다. 親北·어용방송에서 쏟아 내는 선동적 여론과 거리의 군중이 국민의 뜻이 아니라 代議기관인 국회의 표결이 국민의 진정한 主權的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193 대 2라는 표차는 지역과 이념과 정당을 넘어선 그 어떤 合意를 보여 준다. 민주당 金景梓 의원이 말한 대로 『盧武鉉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인 듯싶다. 「교양 없는 盧武鉉 대통령이 나라를 망칠 것 같다」는 위기감과 그와는 정치를 함께 하지 못하겠다는 공통인식이 압도적 다수의 의원들로 하여금 지역 정책 이념을 넘어 한 덩어리로 뭉치게 했던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盧武鉉 대통령을 국회에서 탄핵 파면 결의를 하도록 만든 까닭과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 힘이 과연 열린당이 주장하는 대로 쿠데타적이고, 내란음모적인 것인가.
1. 盧武鉉 대통령은 자신을 당선시켜 준 민주당을 깨고 열린당을 만들도록 사실상 배후조종했다. 이로써 그는 代議 민주정치의 근간인 정당정치의 원칙을 망가뜨렸다. 그를 민주당 후보인 줄 알고 뽑아 주었던 지지층을 배신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칙을 파괴한 것이다. 민주당이 앞장서지 않았으면 탄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따라서 盧武鉉의 배신이 그의 함정을 판 것이다. 이번 탄핵의결의 핵심적 의미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盧武鉉씨가 여론조사에서 밀려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그를 끝까지 밀어 주었던 趙舜衡 현 민주당 대표가 「저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판단을 했다는 점이다.
2. 盧武鉉 대통령은 헌법과 법치의 바탕이 되는 역사관과 국가관과 도덕성이 결여되었다. 대통령은 국가이념과 국민도덕의 기준이고 師表(사표)이다. 그는 국민국가이자 민족사의 정통국가인 대한민국을 金日成 괴뢰와 동급으로 간주하여 분열정권이라고 폄하했던 후보자 시절의 역사관을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대로 유지했다.
3. 그는 헌법이 主敵으로 봐야 한다고 모든 국민에게 강제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에 대해서는 굴종하고 헌법이 보호의무를 강제한 북한동포는 외면했으며, 대한민국의 정통 수호세력을 적대시했고, 동맹국인 미국을 사실상 「침략과 간섭의 상징」으로 몰았다. 그는 좌파적이고 부정적인 역사관과 국가관에 근거하여 헌법과 정면으로 배치된 彼我 개념을 국가정책화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4. 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필수적 조사항목 중의 하나는 북한정권의 적화통일 방안을 수용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反헌법적인 「국가연합」, 「지방정부」 발언이다. 그는 또 통일수도로서 開城이 적당하다고 거론하여 민족사의 중심인 수도 서울이 갖는 優位를 主敵에게 넘겨주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5. 盧대통령은 자신·측근·친인척·선거캠프가 전부 연관되는 거대한 부패구조 속에서 선거를 치렀으면서도, 가장 깨끗한 정치인이라고 국민들을 속였다. 그는 「10분의 1 무죄론」을 주장하여 국민들의 도덕기준을 망가뜨렸다. 그는 또 정치자금을 개인 빚을 갚는 데 횡령하였으며, 자신과 친·인척의 비리에 대해서는 국민들에게 수많은 거짓말을 되풀이하였고, 뇌물받은 형을 비호하고 뇌물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1000만 명이 시청한 텔레비전을 통해 인격모독적 발언을 서슴지 않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6. 이런 대통령 개인의 도덕적 붕괴는 국가 도덕의 붕괴로 이어졌다. 국가이익의 핵심인 국가적 자존심을 가볍게 여긴 그는 金正日 정권의 공갈에 굴종하여 애국단체가 인공기를 불태운 것에 대하여 사과했다. 그는 또 북한동포들이 처한 인간 말살의 참상을 외면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가 이 문제를 거론하려고 할 때마다 사실상 방해하였다. 惡에 대해서는 굴종하고, 동정받아야 할 동포에게는 잔인했다. 그의 행태는, 국민교육의 핵심인 애국심과 정의감과 정직성을 망가뜨렸다.
7. 盧대통령의 이런 反역사적·反국가적·反교육적 행동양태는 反헌법적 행동으로 집약되었다. 그가 행한 反헌법적 행동의 핵심은 民意의 대표기관인 국회와 헌법을 무시하는 행태로 나타났다. 그는 국회가 문제 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켰을 때 해임을 거부했다. 그는 국회가 與野 합의로 반대한 親北 편향자를 對北 정보기관의 요직에 임명했다. 그는 국회시정연설을, 수사 중인데다가 개전의 정이 전혀 없는 비밀노동당원 宋斗律 선처 호소에 이용했다. 거의 상습적으로 보여 준 정당정치의 원칙 파괴, 국회 무시, 그 연장선상에서 선관委 결정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던 것이다.
8. 그는 국민의 代議기구를 무시하는 일방 친위 대중조직을 선동정치의 한 요소로 존중해 주고,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지배세력 교체」, 「시민혁명」 운운했다. 그의 친위세력은 권력의 비호에 자신감을 가져서인지 60代 예비역 대령연합회장을 대낮에 폭행하고도 같은 행패를 계속하는 등 애국 인사들과 단체들이 불안한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다.
9. 부정적인 역사관과 국가관을 가진 대통령은 반드시 反헌법적 행동을 하게 됨으로써 항상적인 국가 불안 요인이다. 이것이 선관委, 국회 등 헌법기관의 自衛 본능을 자극하여 그를 파면당하는 길로 몰아 간 것이다.
10. 이번 국회의 결단은 국민의 결단으로 해석해야 한다. 국민의 결단을 합헌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기관은 국회뿐이다. 국회가 3분의 2 이상으로 대통령 탄핵을 결의한 것은 국민의 다수 의사를 대표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원칙을 街鬪, 어용방송, 여론조사로 대체하겠다는 것이 전형적인 내란 선동이고 헌법 파괴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만든 탄핵소추안에는 盧대통령이 저지른 핵심적인 反헌법적 사례들이 적시되지 않았다. 盧대통령에 대한 가장 큰 탄핵사유는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포기하거나 파괴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의 언동이어야 했다. 이런 핵심이 빠졌기 때문에 일부 국민들은 너무 사소한 것으로 대통령을 몰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野黨이 盧대통령에 대한 이념적 관점을 정리하지 않고 만든 탄핵소추안은 따라서 아주 지엽적이고 가볍다. 탄핵사유가, 그의 본질적 위험성을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국민들에 대한 설득력, 즉 왜 현직 대통령을 파면해야 하는지를 잘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이 헌법 3, 4조가 대한민국 헌법의 「심장」이다. 이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대통령은 영토의 반을 강점하고 있는 북한정권을 주권국가, 즉 독립국가로 인정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의무를 진다. 동시에 우리 정부는 남북한 주민 전체를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로 흡수통합하는 통일정책을 평화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金正日 정권이 한국 측에 대해 수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연방제 통일방안은 남북한이 각각의 체제, 즉 北의 수령독재체제와 南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단일 국호 아래 합치자는 것이다.
이 연방제 통일방안은 북한정권이, 남한에서 金正日 세력에게 대한민국을 파괴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함으로써 赤化통일을 해내려는 핵심적 전략이다. 우리 검찰과 법원은 따라서 연방제 통일방안을 주장하는 사람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처벌해 왔다. 북한을 주권국가로 본다든지,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한다든지 하는 행위는 우리의 체제와 자유를 지켜 주는 가장 중요한 헌법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盧武鉉 대통령이 그런 헌법 위반에 해당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지난 2월 말 방송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우리의 통일은 독일처럼 흡수통합이 아니라 오랫동안 일종의 국가연합 체제로 갈 것이다. 이 체제는 끝을 기약할 수 없이 멀리 갈 것이다. 정치적 통합단계에서도 통일수도는 연합국가의 의회 사무국이 위치하는, 상당히 상징적으로 만들어질 것이고 실질적 권한은 지방정부가 갖는다. 통일수도는 판문점이나 開城 일대에 서울이나 평양보다 작게 만들어질 것이다』
「국가연합」은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헌법 위반이고, 지방정부는 대한민국을 지역 정부로 격하하려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에만 있는 개념이다. 그의 발언 중에 나오는 핵심적인 단어―「국가연합, 지방정부, 흡수통일 반대, 통일수도 판문점」은 헌법 준수를 서약한 대통령이 우리 헌법의 핵심적 조항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북한 쪽으로 기운 발상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문제는 月刊朝鮮과 일부 네티즌 이외에는 어떤 정당이나 언론도 이 중대한 헌법 위반 행위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한다면 탄핵소추의결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선거법 위반은 사소하게 보인다. 야당과 언론이 主敵의 對南적화 통일방안에 동조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침묵했다는 것은 앞으로 계속될 左右대결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親北좌익은 철저하게 이념적으로 무장하여 전략을 펴는데, 右派는 애써 이념적 대결을 피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左派의 본질적 약점을 타격하지 못하게 된다. 한반도에서 이념은 가장 큰 전략이다. 이념적 관점에 바로 서지 못한 두 야당의 탄핵소추결의는 그래서 역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盧대통령은 그 일주일 뒤인 3·1절 기념사에서 용산기지가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이라고 했다. 용산기지를 「안보와 번영과 혈맹과 협력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정상인의 생각이고 한국의 정체성과 부합된다. 국가 정체성을 수호해야 하는 책무를 진 대통령이 金正日만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盧대통령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아야 할 우방을 공격했다고 보도했다. 盧대통령은 이 기념사에서 金正日 정권 감싸기를 계속했다.
『북한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나 결국 한민족으로서 보듬어 가야 하고 끝내 우리가 책임져 가야 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따뜻하게 문을 열고 대화로써 풀어 나가자』
盧武鉉 대통령과 그 지지세력의 언동을 분석해 보면 헌법이 규정한 主敵개념을 거의 반대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主敵이어야 할 金正日을 친구로, 대한민국을 지방정부로, 동반자인 야당과 언론을 敵 또는 악마로, 동맹국을 침략자로 보고자 하는 의지를 그들의 언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국민행동본부가 신문에 낸 의견광고문안 그대로 많은 국민들은 「盧武鉉 머리에는 金正日이 들어가 있는가」라고 불안에 휩싸였다. 盧武鉉 세력의 이러한 反국가성과 反헌법성은 저질 선동과 결합되어 있다. 반역성과 저질성의 惡性 교배인 것이다. 이 세력이 한국사회에서 계급혁명(시민혁명)을 획책하고, 국내 정치에 金正日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음모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악몽을 꾸고 있던 국민들은 국회가 盧武鉉 탄핵소추를 의결했을 때 환호성을 질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에도 바깥 광화문 지역으로부터는 국회의 합헌적인 탄핵소추결의를 대중집회의 힘으로써 무력화시키려는 함성이 들려오고 있다. 이 집회에는 親北단체, 金正日 추종세력, 좌파단체들도 대거 참여했다. 金正日 전위대인 한총련이 盧武鉉 대통령 보호에 앞장서 나서고 있는 것은 이제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어용화한 방송매체들은 보도의 윤리를 저버린 지 오래이고 지금은 좌파세력의 선전선동기관으로 전락하여 민중봉기를 부추기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인 국회의 결정을 불법행위로 뒤엎도록 유도하는 행위가 바로 「내란 선동」이다. 좌파정권·어용방송·親北단체가 합세한 세력권의 꼭대기에 盧武鉉 대통령이 앉아 있고, 그 뒤에 金正日의 그림자가 보이는 그런 악몽은 이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인가.
그럼에도 이 모든 反國家·反憲法的 좌경화를 일거에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헌법재판소 재판관 9人에게 주어졌다.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이런 소수의 인물들에게 넘어간 경우는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부실하기까지 한 탄핵소추안에서 잘 표현되지 않은 엄청난 정치적·역사적 의미가 아홉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 발굴되고 해석될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지금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이제는 朝變夕改하는 여론과 언론으로부터도 독립되어야 하며, 특히 저질 좌파의 선동과 위협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전근대 守舊 좌파 세력과 先進 자유 세력이 대결하고 있는 형국이다. 先進세력이 의지할 수 있는 힘은 헌법이다. 국회가 反헌법적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憲裁가 그를 파면할 수 있는 힘도 헌법에서 나왔다. 역사와 국가를 움직이는 힘은 아우성이나 억지가 아니라 헌법임을 확실히 해줄 때도 된 듯하다. 헌법적 가치의 최종 수호기관인 憲裁가 100년 뒤의 조국을 내다보면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기를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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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長의 편지] 2004년 4월의 말, 말, 말
[긴급특집] 4·15 총선 이후의 세상
우리는 헌법을 지키고, 헌법은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敵이 아닙니다. 친구로서 다시 만나야 합니다』
한국 사회의 본질적 위기의식을 드러낸 걱정과 격정의 인터넷 글 모음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시대의 본질을 드러낸 선거
17代 총선은 盧武鉉 대통령 탄핵 문제로 해서 정권을 놓고 싸우는 大選처럼 치러졌다. 기자가 가진 인터넷 홈페이지(www.natizen.com)에도 보통 때보다 4배나 많은 접속자가 들어와 하루에 400건 이상의 글을 토론방에 남겼다. 기자는 「최신정보 파일」에 글을 쓰는 것 이외에 「토론방」에 올려진 좋은 글들을 뽑아서 「최신정보 파일」로 옮기곤 했다. 이렇게 하다가 보니 한국 사회의 축도판이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민주국가에서 선거는 그 사회가 가진 본질적 문제점을 드러낸다. 정권을 놓고 싸우는 선거는 표로써 결판 내는 권력투쟁이다. 옛날에는 총칼로써 결정했던 것을 표로써 하려고 하니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더구나 한국은 태평성대의 민주국가가 아니다. 인구의 절반이 사는 수도권이 변덕 심한 독재자가 방아쇠를 쥐고 있는 장거리 포대의 사정권 안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 선거를 치러야 했다.
북한정권은 주민들을 굶겨 죽이면서도 돈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투입하여 한국의 정치권력 안에 對南적화공작의 기지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들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지난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애써 왔다. 북한정권은 이번에 자신들이 공천한 후보가 있는 듯이 선전·공작기관을 총동원하여 總選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반도 이념대결 상황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善과 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지는 모든 선거의 가장 큰 主題는 「안보」, 다음이 「경제」일 수밖에 없다. 17代 총선에서 안보 문제, 즉 北核 문제와 親北좌익세력의 국회진출 위험성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잘 나가는 아시아에서 작년에 거의 꼴찌권에 머물렀던 盧武鉉 경제도 주요 쟁점이 되지 못했다.
두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했어야 할 보수야당은 그렇게 할 만한 이념무장도 전략·전술도 없었다. 어용·親北언론은 좌파정권의 약점이 될 이런 쟁점을 덮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통 언론마저도 親北사회주의적 정강정책을 가진 민주노동당을 「진보정당」이라고 분칠해 주는 식으로 비겁한 보도를 함으로써 유권자들이 상황의 핵심을 직시할 수 없게 초점을 흐려 버렸다.
한국 사회의 정통 주류세력이 선거판의 主題 설정력을 상실했지만 인터넷만은 달랐다.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시민들이 쓴 글이 프로 기자들보다도 훨씬 정확하게 한국의 위기를 전하고 있었다. 親北을 진보라고 불러 주는 비겁한 기자들보다는 親北을 親北이라고 쓰는 인터넷의 애국 네티즌들이 훨씬 정확한 언론활동을 한 무대가 이번 17代 총선이었다. 大選 같았던 총선 기간, 한국의 현대사가 또 한번 요동친 2004년 4월의 말들을 뽑아 보았다. www.natizen.com에 남긴 나의 글과 네티즌의 글들 중에서 의미 있는 말들을 뽑았다.
[4월13일] 헌법에 대한 예의도 없는 鄭東泳
열린당은 지금 합헌적으로 처리된 3월12일자 국회의 盧武鉉 대통령 탄핵소추의결을 「의회 쿠데타」라고 공칭하고 있다. 여기서 의회란 헌법이란 뜻이다. 국회가 헌법이 정해 준 절차대로 했고, 국회는 가장 중요한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鄭東泳 열린당 의장은 헌법이 쿠데타를 했다고 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치인으로서 헌법에 대한 예의가 도무지 없는 행동이다. 노인들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보다 정치인으로서는 더 치명적이다. 정치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헌법이므로 헌법을 욕하고 헌법을 무시하는 정치인은 정치인임을 포기하고 선동꾼으로 직업을 바꿔야 마땅하다. 본질을 따지고 들면 노인에 대한 예의 없음이나 헌법에 대한 예의 없음은 일맥상통한다. 인간에 대한 윤리를 딛고 국가와 헌법에 대한 윤리가 설 수 있기 때문이다.
[4월13일]「비 오는 달밤에 단 둘이 홀로 앉아…」
<4·15 총선은 선거가 아니라 역사라는 본질을 지켜내지 못한 죄인으로서 사죄했습니다. 선거의 역사성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탄핵세력들이 다시 커져서 4월15일 이후에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끝내 탄핵시키고 말겠다는 음모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나라, 민주, 자민련 3당이 대통령을 탄핵해 놓고 4월15일 저녁 승리했다고 만세 부르는 광경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탄핵관철 음모 저지를 위해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살려내기 위해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위의 鄭東泳 선대위원장 사퇴 성명서는 문법이 안 맞는 구석이 너무나 많다. 어떻게 이런 문장력을 가진 사람이 집권 여당의 당수로 있는지, 또 전직 기자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4·15 총선이 선거가 아니라 역사」라고? 「선거가 선거가 아니다」라니? 그러면 무엇인가? 역사라고? 선거가 선거가 아닌데 역사가 될 수 있나? 역사를 강조하려다가 선거를 죽여 버린 과장 왜곡 논법이다. 「역사적 선거」라고 하면 될 터인데 「선거」를 죽이고 「역사」만 살리려 한다. 문제는 이런 문법을 쓰는 사람들은 목표하는 바를 위해서 정상적인 사리판단을 희생해 버린다는 점이다.
「탄핵 관철 음모」를 저지한다니? 지금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하는 소추안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아홉 명의 재판관 손에 달려 있고, 심리가 진행 중이다. 야당이 탄핵 관철 음모를 한다면 헌법재판관과 짜고 하든지, 헌법재판관을 매수하든지, 아니면 협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鄭東泳 의장은 사실상 헌법재판소를 음모의 공모자로 공격하고 있는 셈이다.
鄭東泳 의장은 짧은 성명서 안에서 의회 쿠데타, 역사, 음모, 무한책임, 본질, 단식, 죄인, 사죄 등 과격하고 감정적인 단어들을 너무나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근사한 단어들을 연결하면 모순투성이이다. 아래 글처럼 말이다.
「비 오는 달밤에 단 둘이 홀로 앉아 미래의 옛추억을 생각한다」
[4월13일] 17代 총선이 보여 준 내전적 상황
1. 대한민국은 왜 세계에서 거꾸로 가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나. 무엇보다도 한국의 중산층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르러 넥타이 맨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내었을 때 『나는 중산층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약 70%였다. IMF 경제위기와 좌파정권 6년을 거친 지금 『나는 중산층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60% 선으로 줄었다. 중산층 의식에서 탈락한 10%는 거의가 하류층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중산층 의식이란 국가공동체에 대한 주인의식이다. 중산층은 위기에 처하면『이 나라는 우리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중산층은 근대화의 산물이자 민주화의 주력군이었다. 중산층 의식이 약해진 원인은 경제난뿐 아니다. 중산층을 겨냥하여 주인의식을 갖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략해 온, 2代에 걸친 좌파정권과 그 정권에 복무한 어용·親北 언론의 선동이 「중심세력 10% 탈락」이란 결과를 빚은 것이다. 이 10%만큼 한국號의 重心과 복원력은 약해진 셈이다.
2. 한국의 이념지도는 대강 이러하다. 여론조사 때마다 「金正日은 善」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10%의 親北세력이 있다. 이들은 잘 조직되고, 이젠 정권 지지세력화하여 그 비호까지 받고 있으며, 어용언론을 장악하고, 젊으며, 행동력이 있다. 약 30%는 金正日이 惡인지 善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부동층이다. 金正日을 惡으로 보는 것은 약 60%다. 이 수치는 중산층 비율과 일치한다. 이 60% 가운데 촛불시위·선동방송·햇볕정책 등 어떤 바람에도 넘어가지 않는 요지부동의 애국·자유세력은 절반 가량, 즉 全인구의 약 30%이다. 대한민국의 기본적인 이념 대결 구도는 잘 조직된 10%의 親北세력과 요지부동의 30% 애국세력 사이에서 이뤄진다. 이 30%는 돈, 직위, 나이, 머릿수, 전문지식이 무기이다. 10%는 조직, 행동력, 선동력, 정권, 방송이 무기이다.
3. 이번 총선은 말로써 한 內戰이었다. 선거를 내전적 상황으로 만든 것은 金正日 정권과 親盧세력과 열린당이었다. 그들은 국회의 합헌적인 대통령 탄핵소추의결을 「의회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열린당과 盧武鉉 지지세력은 高建 정부의 방임 아래 불법 야간 촛불시위를 도심지에서 개최하여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그들은 선거를, 의회 쿠데타 세력 타도·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저지라는 「역사적 상황」으로 설정했다. 재야단체가 아니라 공권력을 지배하는 여당이 국회의 합헌 행위를 쿠데타라고 섬뜩하게 규정한 선거, 방송이 이런 열린당을 응원한 선거판에서 意外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층적 경멸감을 깐 鄭東泳 열린당 의장의 발언―『60·70代 노인들은 집에서 쉬어도 좋다』는 말이 기성세대와 보수층의 눌려 있던 분노와 불안감에 불을 당겼다. 合憲 행위를 쿠데타라고 규정하던 그 선동의 말버릇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임자를 만난 것이었다.
4. 세계에서 국민 평균 IQ 가 가장 높은 한국인들의 상당수가 왜 「국회와 헌법이 쿠데타를 했다」는 식의 선동에 넘어갔는가? 여기에 한국 사회의 후진성, 그 본질이 숨어 있다. 盧武鉉 정권과 그 지지세력은 한국 사회에 시대착오의 계급혁명식 적대감을 동원하여 노년층·보수층·조선일보·한나라당·미국을 공격함으로써 「좋은 학교 나오고, 출세하고, 돈 많이 벌고, 전문기능을 가진 집단과 조직」에 불만을 품은 다수를 아군으로 끌어 모으는 전략을 구사했다. 1등을 공격하면 2등 이하는 공격자 편에 선다. 한국인의 지나친 질투심(「배고픈 것은 견디지만 배 아픈 것은 못 견딘다」)은 이런 식의 선동에는 밥이 된다.
국가통합의 중심이고 상징인 대통령과 여당이 증오심과 적대감을 담은 막말을 하여 나라를 갈라 놓고 불안에 빠뜨리더니 드디어 한 사장을 자살로 몰고가고도 뉘우침이 없다가 노인들을 분노에 떨게 하는 막말을 하여 스스로 상처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건한 李秀英 목사(새문안교회)가 한 말―『공산당式 선동술, 홍위병式 여론몰이, 인민재판式 인격살인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거꾸로 가는 나라』를 만든 세력에 대해 이 정도의 반격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 기적에 가깝다.
정권과 방송이란 한국 사회의 2대 무기가 선동세력의 손에 넘어갔는데도 애국세력이 이 정도의 방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다. 이번에 한국의 정통 애국자유세력은, 親北세력을 사주하여 盧武鉉 정권 편을 노골적으로 든 金正日 정권과도 싸워야 했다. 남북한의 두 정권과 맞선 것이 한국의 보수층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선거결과에 대한 평가가 정확해진다.
5. 이번 선거가 보여 준 내전적 상황의 다른 예가 또 있다. 촛불시위에는 親盧·親北 단체가 참여하고 이를 金正日 정권과 盧武鉉 정권의 선동매체가 응원했다. 이를 두고 한 애국단체는 「내란을 선동하는 KBS를 심판하자」고 했다. 이런 범법행위에 대한 高建 행정부의 조치는 온건했다. 이 사태를 두고 반역음모가 진행 중이라고 진단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진보세력」의 의로운 행동이라고 치켜세워 주는 세력도 있다. 이 두 세력의 평화적 공존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적과의 동침이 이뤄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위험한 상황이 이번 선거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직은 말로써 하는 內戰 상황이지만 이것이 총칼로 하는 內戰상황으로 폭발하지 않으려면 크고 작은 권력을 잡은 세력의 신중한 용어선택, 자신의 이념고백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념 실명제가 금융 실명제보다 더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6. 머리가 가장 좋은 한국인이 너무나 뻔한 선동에도 넘어가는 비밀을 천착해 보면 한국 사회가 극복해야 할 前근대적 요소와 만나게 된다. 미신, 거짓, 사기, 명분, 위선, 압제, 백성 근성 같은 것들이다. 한국어의 약 70%를 차지하는 漢字語의 표현수단인 漢字를 버리고 한글전용으로 가 버린 것은 선동이 잘 먹히는 思考구조를 만들었다.
한글전용의 논리는 전형적인 위선적 선동이다. 漢字 사용자를 사대주의자로 몰고, 한글전용을 독립운동처럼 여기도록 한 논리는 漢字에 약한 사람, 漢字에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을 포장하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漢字는 생각을 유도하고 한글 단어(춥다·즐겁다, 눈·머리·바람 등)는 원초적인 느낌으로 이어진다. 두 글자를 함께 써야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한다. 한글전용에 익숙해지면 생각보다는 느낌이 발달한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思考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언어이다.
생각보다는 느낌이 발달한 사람들에게는 활자보다는 텔레비전과 영화가 더 친숙하다. 지난 6년 사이 한국의 방송과 영화는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金正日 정권을 감싸며, 북한동포의 비참한 실상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언론매체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생각이 짧고 느낌이 빠른 한글전용 세대의 의식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단적인 예가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동맹국인 미국을 主敵인 金正日 정권보다도 더 미워하는 망국적인, 패륜적인, 反역사적인, 反사실적인 경향이 감지된다. 17代 총선은 이런 상황변화 속에서 치러졌던 것이다.
7. 정권의 홍위병이 된 젊은이들은 가끔 朝鮮日報 벽에 수백 개의 달걀을 던진다. 달걀물이 흘러내려 늪을 이룬다. 이 정도의 달걀이라면 굶어 죽고 있는 북한 주민 수백 명에게 근사한 저녁식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런 행패를 부릴 수 있게 하는 공돈을 제공해 준 부모의 책임이 크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돈을 대어 주는 풍습, 이것이 돈에 대한 책임의식을 무디게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대한 윤리가 무너지면 공동체, 특히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철부지 홍위병들에게 공돈을 대어 준 기성세대가 그 代價를 치른 것이 또한 이번 선거였다.
8.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소득은 온건하고 얌전하던 국민들까지도 「우리가 구경만 하고 있는 사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공산당 세상이 되겠구나」 하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특히 反共기독 세력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점이 주목된다. 애국시민은 있지만 애국세력은 없다는 비관론도 있지만 30%의 핵심보수가 일어나 위기의식과 이념으로 무장하여 60%를 깨우치게 되면 거짓과 守舊와 독재 편에 선 세력은 의외로 쉽게 무너지든지 순화될 것이다. 애국세력이 『이제 우리의 친구는 정권이 아니라 헌법이다』라고 자각한 다음 그 헌법을 활자상태로부터 불러내어 체제수호의 가장 유용한 무기로 활용할 때 상황은 反轉될 것이다. 盧武鉉 권력을 묶은 힘도 총칼이 아닌 헌법 조문이었다.
[4월12일] 비수 같은 글을 쓴 유세환씨는 누구인가
「최신정보」 파일 3850번에 실린 유세환씨의 글 「권영길 위원장에게 보내는 질문서」는 내가 최근에 읽은 가장 감동적이고 힘 있는 글이었다. 그는 질문의 형식을 빌렸지만, 민주노동당의 정강정책과 행태를 분석하고 민주노동당은 결코 진보정당일 수 없으며 親北사회주의 정당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특히 민주노동당이 北送된 공산 빨치산 출신들을 「애국자」라고 칭송한 것과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민주노동당의 조국이냐」고 묻는 대목에서는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같은 박력을 느꼈다. 이 글의 필자 유세환이란 분이 궁금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기자들이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민주노동당을 그들이 주문하는 대로 「진보정당」이라고 불러 준 기자들은 국민들이 이 黨의 정체를 직시하는 것을 방해했다. 유세환씨의 글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은 우리 헌법이 금하고 있는 중대한 정강정책을 갖고 있다. 사회주의적 이상을 표방하고, 金正日 정권의 통일정책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으며, 한 번도 金正日 정권의 反헌법성과 反민족성을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과오를 씻을 기회는 있다. 헌법정신에 입각하여 기자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민주노동당에 대하여 親北사회주의적 정강정책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짐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親北사회주의적인 정강정책을 폐기하지 않고 국회에 진출한다면 이는 유세환씨 표현대로 「對南적화통일의 도구당」이 국회에 교두보를 구축하는 것이 된다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지 않는가.
한국의 정통 언론들조차 金正日의 전위대 한총련을 「친북」, 「반역」이라 부르지 않고 「진보」라고 추어주었다. 이런 비겁한 언어 사용은 국민들의 彼我식별기능과 경계심을 마비시켰다. 주로 말을 무기로 삼아 싸우는 左右 이념전쟁에서 한쪽은 예리한 선동의 무기를 들고 나와 진짜 진보세력인 한국의 정통 주류를 「守舊」로 모는데, 언론은 親北 퇴보세력을 향해 「진보」라고 감싸 주니 이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좌경화는 한국의 이념대결 상황의 본질을 애써 흐려 버린 언론의 책임이다.
[4월12일] 鄭東泳의 쿠데타
조금 전에 鄭東泳 열린당 의장은 「3·12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 되는 날」이라면서 선대위원장직을 사퇴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왜 선거가 치러지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高建 총리가 권한대행으로 건재한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군인이 거리에 보이지 않는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KBS·MBC가 이른바 쿠데타 세력을 낮이고 밤이고 공격하나. 그 쿠데타 세력은 지금 어디 있나. 혹시 열린당 당사 안에 있는 게 아닌가.
여당 당수란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헌법절차를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이런 사람이 집권하면 북한군이 실수로 쏜 소총을 『북한이 지금 핵무기를 터뜨렸다』고 과장한 뒤 北進을 명령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집권하면 노조의 농성을 쿠데타라고 규정하여 군대를 투입할 가능성도 있다. 한총련의 화염병 시위에 대해서도 쿠데타라고 규정하여 사격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막는 야당을 쿠데타라고 규정하여 공수부대를 투입할지도 모른다.
鄭東泳 의원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된 지금 그래도 열린당을 찍겠다는 사람들은 『憲裁의 탄핵결정에 대해서는 무조건 승복한다』는 보증서를 후보들로부터 받아야 할 것 같다. 가정하여, 여당이 만의 하나 헌법재판소의 盧武鉉 파면 결정에 불복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것이 바로 내란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그런 사태를 예방하여야 할 책임이 지지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4월4일] 盧武鉉은 한국인의 거울이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詩人 로버트 프로스트 추모연설(1963년 10월27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나라는 그 나라가 배출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그 나라가 기리는 인물, 기억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A nation reveals itself not only by the men it produces but also by the men it honors, the men it remembers.)
우리나라는 어떤 인물을 배출했고, 기리고, 기억하고 있는가. 李承晩·朴正熙 같은 일류인물을 배출했던 한국은 왜 盧武鉉 같은 삼류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았는가. 역사 인물 조사에서 세종대왕보다도 더 위에 오르고 있는 朴正熙를 기리는 기념관 건축은 왜 이뤄지지 않고, 젊은이들은 왜 李承晩을 金日成보다도 더 미워하는가. 대한민국을 건국한 李承晩 기념관은 없고 건국에 반대한 金九기념관은 만들어지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한국과 한국인이 어떤 나라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盧武鉉의 투지·저질성·말장난·책임전가술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준 다수 한국인의 얼굴과 마음이 아닐까. 盧武鉉이야말로 한국인의 자화상이 아닌가. 그가 가진 장점과 단점은 한국인의 특성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한 나라는 그 나라의 수준과 어울리는 지도자를 갖게 된다고 볼 때, 朴正熙를 지도자로 가졌던 오늘의 60, 70代는 盧武鉉을 지도자로 선택한 20, 30代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盧武鉉의 실패에 책임감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 지도자는 국민 수준의 거울이다.
[4월5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 누가 敵이고, 누가 경쟁자이며, 누가 아군인가
1. 金正日과 그 추종자는 우리의 敵이다. 이들에게는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 敵의 구분법: 연방제 통일-보안법 폐지-주한미군 철수 주장자 및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는 자.
2. 敵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구제 및 교육 대상이다.
3. 金正日 편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우리 편이라고 본다.
나. 무엇을 할 것인가
1. 어용·親北 방송을 무력화시킨다.
2. 金正日 추종자들을 공직에서 추방시킨다.
3. 신문의 광고란을 돈으로 사서 애국세력의 의견을 발표한다.
4. 강연을 통해서 젊은 세대와 접촉하고 대화한다.
5. 기독교의 反共전통을 살린다. 기독교인들과 함께 金正日을 惡으로 규정하고 북한동포 해방 운동을 펼친다.
6. 젊은층에게 북한동포의 참상을 전하여 義憤心을 갖고 일어나도록 교육한다.
7. 애국 변호사 모임을 조직하여 범법하는 좌익들을 모조리 고소, 제소한다.
8. 「보수」라는 말 대신에 「애국세력」, 「자유세력」이란 말을 쓴다.
9. 「진보」라는 말 대신에 잘 가려서 「좌익」, 「좌파」, 「반역」세력이란 말을 쓴다.
10. 애국인사들이 돈을 쓸 수 있도록 창조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11. 직업적인 애국 운동가들을 1만 명 양성한다.
12. 언제든지 출동 가능한 애국행동대 10만 명을 확보한다.
13. 위험한 國史 교과서 대신 부모·선배들이 나서서 체험한 현대사를 이야기하여 젊은이들을 깨우친다.
14. 분석과 논평만 일삼는 지식인들이 행동하도록 한다.
15. 공무원들이 좌파정권下에서도 헌법을 수호하도록 격려, 견제, 감시한다.
16. 군인들이 親北化되지 않도록 충고·감시·격려한다.
[4월6일] 패러디―鄭東泳 의장님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토론방)
정동영 의장님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별 볼 일 없는 60, 70대 촌로들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용서 구하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한국i닷컴 독자 와룡)
[4월6일] 대통령 나빠요(토론방)
불법자금 150억 거둬서 대통령 당선됐어요
측근들도 수십억 먹었어요
형님도 많이 먹었어요
먹은 돈 내어놓지 않았어요
그러고도 사과 한 마디 안 했어요.
직무 중에 열린우리당 선거운동했어요
노사모 동원해서 시민혁명하자 했어요
대의정치를 부정했어요
경고 먹고도 열린우리당 선거운동 또 했어요
선거법 위반 아니라고 억지 썼어요
선관위를 무시했어요
야당의 사과 요구 묵살했어요.
방송에 나와 부정한 돈 먹은 형님과 측근 두둔했어요
남상국 대우 사장을 인격적으로 매도했어요
그에 충격먹은 남 사장 자살했어요
그러나 사과 한 마디 없었어요.
국회에서 탄핵이 발의되었을 때 안 되는 줄 알았어요
국회의장과 야당대표의 대화제의를 묵살했어요
양보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근 탄핵됐어요
그러고도 자신이 부덕의 소치라고 사과 한 마디 없었어요
잘못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어요.
이게 뭡니까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는 게 상식이고 순리이거늘
상식과 순리를 어기는 게 정의고 민주란 말입니까
대통령이 그것밖에 안 됩니까.
대통령 나빠요
노무현 나빠요
아주 나빠요.<정신차린386(펌)·42·남·웹프로그래머>
[4월6일] 이 눔들아!(토론방)
우리는 5인치 반 플로피 디스크 넣던 XT시대 늙은이다. 모질게 태어나서 8·15니 6·25니 4·19니 5·16이니, 팔자 사납게 다 겪고, 이제는 어디론지 돌아갈 날이나 기다리고 앉아 있는 뒷방 늙은이다.
너희 눔들 타고난 팔자 좋아 잘 먹고 잘 살고 흥청거리는 거야 뭐라겠냐?
너희 눔들 세상 모르고 한심한 발광을 해도 뒷방 구석에서 혀나 차며 엎드렸다.
그저 우리가 하도 가난하고 못난 거 한이 돼서, 자손들이나 한번 잘나 보라고, 사람질하는 것 못 가르치고 ○× 찍는 거나 가르친 죄니, 누굴 원망하랴! 그러고 말이다.
그나마 그게 궁상스런 꼴 안 보이는 거지. 그러고 참고 또 참은 거다.
그런데 다 산 세상 늙은이 입에서 「이 눔들아!」 소리가 저절로 나오니 이젠 어쩔 수 없이 말 좀 해야겠다.
이 눔들아!
너희들은 너희 조국이 어떤 조국인지나 아냐? 너희 조국의 어제가 어땠는지 아냐?
그리고 어떻게 하다 어째서 지금이 됐는 줄이나 아냐?
지금 너희 아비 어미들은 먹일 것 입힐 것 쌓아 놓고 「안 먹는다」고 끌탕하며 너희 길러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먹을 것 입을 것 없어서 「그만 좀 먹어라!」 그러면서 길러냈다. 콩나물 함지박 머리에 인 어머니 등판 엉덩이에 걸쳐 울지도 못해 보고 자랐다. 울어 보았자 어머니한테 얻어나 맞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 어머님들이 고마워서 지금도 눈물이 난다.
이 눔들아!
말 좀 한번 바로 해보자!
우리 조국의 역사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는 그런 찬란한 역사인 줄 아냐?
36년간 일본한테만 당했냐?
반만년 강대국 중국에 수모와 멸시를 받으며 빌붙어 먹은 거지 같은 조국이었다.
가난과 착취에 하늘에 한을 뿌리며 살아온 조국이었다.
일본에 당한 정신대 할머니만 불쌍하냐? 중국에 당한 화냥년 할머니들은 어떻고! 화냥년 할머니들은 너희 조국이 뽑아다 바쳤다더라.
그것도 꽃다운 몸 버리고 한 많은 고생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면 제 민족으로부터 환향년이 되어 천대받고 따돌림받은 불쌍한 할머니들이다.
말 안 하고 넘어가 버리지 그랬지만 이 눔들아! 총독부 건물도 그렇다.
역사라는 게 네 눔들 고사리만 한 손바닥으로 가려지는 게 역사냐?
총독부 건물이 수치고 그렇게도 보기 싫었으면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앉아 있던 시절 폭파를 했을 거지, 그게 무슨 창피하고 못난 수작이냐?
이제 와서 총독부 건물 부수고 거기다가 콘크리트 광화문 레플리카를 세워 놨다구 못난 체면이 서는 건 줄 아냐?
이런 용렬한 것들!
이 눔들아!
너희를 그 따위로 길러 논 게 우리니 할 얘기도 없다마는, 그래도 우리는 변명거리라도 있다.
우리는 하도 엉망 가난 속에 살아서, 잘나 보기는커녕 너희 먹여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잘나는 거보다도 너희 먹일 거가 더 급했다. 육사교장의 편지?
이 눔들아 그게 단 줄 아냐?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소원이 뭐였는 줄 아냐? 뭐? 언론자유? 민주주의?
그냥 「새벽종이 울렸다! 잘 살아 보세!」가 꿈이었다. 밤이 있었냐? 낮이 있었냐? 눈 뜨면 일이고, 쓰러지면 잠이다.
라면 끓여 먹을 시간이 없어서 깨물어 먹었다.
이 눔들아!
그래 맞다! 박통이 군부독재했다.
나도 젊어서는 네 눔들보다 더 간덩이가 부었어도 벌벌 떨고 살았다.
그래 그것도 맞다! 정치하고 거리가 먼 나도 젊어서 박통 미워했다.
그러니 정치해 보겠다고 나선 이들이야 어떻겠냐? 박통 그러면 치가 떨리고 경기가 날 거다.
그렇다구 이 눔들아!
양심이 있고 제 정신이 든 놈들이라면 어디라고 박통을 김일성이 김정일이에 갔다 댈 수나 있냐?
이 눔들아! 김정일이한테 가서 길거리에 머리띠 두르고 돌팔매질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 모르냐?
너희 눔들 이를 가는 박통·전통한테는 너희 눔들 머리띠 두르고 돌팔매질했어도 지금 살아서 잘났다고 끄떡거리지 않냐? 그게 민주주의다!
도대체 기가 막히고 땅을 치고 통곡을 해야 하는 일이, 군부독재 물리치고 민주화했다는 눔들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이를 황송하게 껴안는 눔들이 민주투사냐?
이 눔들아!
배달민족 치고 통일조국 그거 안 바라는 눔이 어디 있냐?
한 맺힌 이산가족의 원을 나 몰라라 그러는 눔이 어디 있냐?
그런데 누가 반대를 못 해서 민족통일이 안 되는 거냐!!
너희 눔들이 싸고 도는 김정일이란 눔 때문에 안 되는 거지!
지금 당장이라도 조국통일이 되려면 김정일이 아가리에 남조선이고 뭐고 다 쑤셔 넣어 주면 통일이다.
이 눔들아! 너희가 바라는 조국통일이라는 게 바로 그거냐?
언필칭, 너희 눔들은 조국·민족 그러고 나오는데, 김정일이가 조국이고 민족이냐? 김정일이 지금 이북에 있는 동포 인민들을 무얼 만들어 놨냐?
세계에 없는 어릿광대 바보 같은 인민을 만들어 놓은 거는 놔두자!
풀뿌리 캐 먹으러 다니는 거지들을 만들어 놓고도 위대한 수령이란다.
기왕에 말이 났으니 말 좀 더하자!
상해 임시정부 세우고 청산리 벌판에서 싸워서 대한독립했냐?
일본 군국주의가 간이 부어서 진주만 폭격하고 대륙본토 쳐들어가서 대일본제국 만들려다 미국한테 원자탄 맞고 꿇어 엎드리는 바람에 미국한테 얻은 원조독립!
이 눔들아!
아무리 창피해도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거다. 우리 못나 병신 짓 하다가 나라 빼앗겼고 남이 뺏어 줘서 얻은 독립이란 말이다.
그것도 소련이 뺏어 준 것도 아니고 미국이 뺏어 준 거다.
그래서 압록강 두만강, 마라도를 경계로 세계가 나라로 인정한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헌법이 있는 합헌 민주국가가 된 거다.
소련을 등에 업고 대한민국 영토 내에 불법집단을 만든 것이 김일성이고 그건 합법적인 권리를 가질 수 없는 말 그대로 마적 집단이다.
그리고 그런 불법집단이 남한을 먹어치우려고 든 것이 쓰라린 민족상잔의 6·25란 것이다. 제 민족이 제 민족을 살육하고 때려부수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어처구니없는 전쟁을 저지른 것이 김일성이다.
이 눔들아! 더 좀 말해 보자!
세상은 힘의 원리로 운영된다. 정치사회 이념으로 갈라진 세계 판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다. 그리고 두 판도의 괴수가 미국이고 소련이며 극동에서 만나는 데가 한국이다. 그리고 그 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국이 있고 일본이 있다.
너희 유식한 교수 박사들한테 6·25 때, 맥아더가 만주 치자고 그랬는데 왜 미국이 안 치고 38선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물어봐라!
이 눔들아!
미국이 침략이 목적이었다면 만주벌판을 왜 안 쳤냐? 중공군이 꽹과리 치고 넘어왔는데?
소련, 중국이 무서워서?
일본이 원자탄 맞는 거 보고 그때는 스탈린도 마오(毛)도 떨고 있을 때다.
그거 문질러 버리려도 어쩔 수 없는 막강한 미국이었다.
이 눔들아!
오히려 공산권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게 미국 쪽의 속셈이었다.
저지하려는 정책하고 침략하려는 정책하고는 하늘하고 땅이다.
너희들은 미국이 뭔지나 알고 그러냐?
미국이란 나라가 너희 나라나 불란서 같은 조막만 한 나라인 줄 아냐?
도대체 페더레이션이라는 거가 뭔 줄 아냐?
50여 개의 나라들이 함께 이익을 위해 모여 연합한 공동체고 밖으로도 20~30개의 나라들이 같은 노선을 맞추어 나가고 있는 거대한 유엔 같은 페더레이션의 나라다.
이 철딱서니 없는 것들아!
왜 미국은 핵무기를 갖는데, 김정일이는 왜 못 가져?
그걸 말이라고 하냐?
김정일이나 후세인 한 눔이 제 기분대로 스위치 누를 수 있는 원자탄하고, 70여 나라의 페더레이션이 갖는 원자탄하고 같으냐?
이 눔들아!
너희 미쳐 날뛰며 미국기 찢는 거 보고 미국 눔들 느낌은 어땠겠느냐?
이 늙은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그 전쟁통에 크리스마스라고 쓰리쿼터에 선물 싣고 와서 나누어 주던 생각이 난다.
그때 내가 받은 선물이 고양이 소리 나는 장난감통을 받았다.
도나스(도넛)도 얻어먹었다. 그리고 그 도나스가 무지하게 크고 맛있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우리는 그때, 검정물 들인 유엔 잠바, 똥 가방, 망짝 구두….
미군들 쓰다 버린 거나 얌생이질한 군 보급품 물감 들여 입고 신고 다녔다.
너희들이 이를 가는 미국 눔들이 전쟁에 부서진 집 지으라고 시멘트, 유리, 목재도 배급해 주었다.
그것뿐이냐? 말로 할 수 없이 많다.
이런 천하에 배은망덕한 눔들아!
도대체 미국 눔들한테 뭘 그리 뼈저리게 당했냐? 나라를 뺏어 갔냐? 못 먹고 못 살게 했냐?
미국 눔이 아니라 미국님이다!
좌우간 네 눔들이 미국 때문에 덕을 보았으면 보았지 손해 본 거가 뭐냐?
그리고 네 눔들이 김일성·김정일한테 은혜 입고 덕 본 거는 뭐냐?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이 눔들아!
아무리 인터넷이란 것이 숨어서 별 더러운 소리, 치사한 짓을 다 해도 되는 거지만 뭐가 치사하고 비겁한 줄은 알아야 하는 거다.
아니꼽고 메스껍고 치사해도, 민주 자본주의라는 거는 돈을 아주 잘 벌어야 하는 거다. 인민공산주의라는 거는 잘 먹으면 다 같이 잘 먹고, 못 먹으면 다 같이 못 먹자 그러는 거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냐? 공산주의가 패가망신하고 민주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어떤 교수 박사란 녀석이 박통 때문이 아니라 시대여건이 바뀌어서 경제가 살아난 거라고 그러더라. 어찌 반만년 배달 역사 중에 박통 시절이 되니까 여건이 바뀌냐?
정주영이 누군데 울산 모래사장에 조선소 차릴 인물일 것 같으냐? 박통이 책임진다고 정주영의 배수진을 쳐준 덕이다.
너희 눔들 에비타 아냐? 세계 6대 富國 아르헨티나를 에비타가 작살을 내놨다. 벌써 너희 나라도 김비타 노비타가 작살을 다 내놨다.
이 죽일 눔들아!
너희 조국이 어떤 나라인 줄 아나?
우리한테 우리 조국은 우리 평생을 바친 귀한 조국이다!
그리고 김정일이한테 갖다 바치라고 있는, 고생 없는 고생으로 빚어 만든 조국이 아니다.(한 늙은이·65·남·은퇴)
[4월7일]「盧武鉉은 한국인의 거울이다」를 읽고(토론방)
역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동안 거추장스러우리만치 우리 사회에, 특히 정치분야에 드리워져 있던 권위주의를 걷어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불과 1년이었지만, 많은 변화가 있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현직 대통령에게 「삼류인물」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 과거 정권下에서라면 어디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정말 세상 많이 변했습니다.
정당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 그 대통령이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하고, 어떻게든 끌어 내리려는 시도야말로 그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입니다.
정말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조갑제 선생님의 글은 짧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조갑제 선생님의 마음이 절절히 배어난 글이라 생각합니다. 과연 저 스스로 선생님처럼 이 나라를 걱정해본 적이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의 가벼움을 탓하기 전에 선생님과 같은 영향력 있는 분들께서 언행에 역사적인 관점을 싣고 신중을 기하셔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선생님과 같은 분을 보며 배우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조갑제 선생님께서 글 머리에 인용하신 케네디 대통령의 말, 깊이 공감합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가 배출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그 나라가 기리는 인물, 기억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A nation reveals itself not only by the men it produces but also by the men it honors, the men it remembers.)
조갑제 선생님께선 대통령을 빗대서 하신 말씀이지만, 조금 각도를 달리해보면, 조갑제 선생님과 같은 분들께서 그 말을 깊이 새기셔야 할 듯싶습니다.
이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 그분들이야말로 또한 이 사회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케네디 대통령도, 조갑제 선생님처럼 문인이었던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면서 한 말 아닌가요?(봄바람·39·남·사업)
[4월8일] 朝鮮日報에 났다가 빠진 광고(국민행동본부)
투표장이 낙동강 전선… 어른들이 다시 일어나 나라를 구하자!
―낙동강 전선에서 피 흘려, 수출전선에서 땀 흘려, 생활전선에서 눈물 흘려 세운 나라가 기울고 있습니다. 국회마저 좌익 손에 넘어가면 공산화를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소매치기 당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親盧·親北·북한정권·KBS·MBC가 한 덩어리가 되어 거짓과 불법을 선동,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헌법재판소와 국회를 협박하고 공명선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개혁·진보·민주투사로 위장한 좌익이 국회까지 장악하면 국가보안법이 사라지고 공산당이 활보하는 세상이 됩니다.
▲겁을 먹은 신문들마저 위기의 본질을 피해 가며 변죽만 울립니다. 여당은 공산당을 모르는 20, 30代만 투표하고, 공산당을 잘 아는 60, 70代 노인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북한정권의 對南공작기관은 그들이 공천이라도 한 듯이 특정세력을 국회에 진출시키려고 연일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권과 방송이 넘어가 버린 지금 국회는 자유민주체제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입니다. 여기까지 무너지면 남북한의 좌익이 야합하여 연방제 赤化통일로 달려갈 것입니다. 나라가 죽느냐 사느냐, 우리의 자유·재산·가정이 빼앗기느냐 지켜지느냐의 최후 결전이 4·15 총선입니다.
▲공산당과 싸워 이긴 우리 어른들이 앞장섭시다. 눈물로 호소하고 설득하여 젊은이들을 일깨워 구국전선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이제는 유엔군도 맥아더도 오지 않습니다. 믿을 것은 우리 자신, 우리 자식들뿐입니다. 어른들이 먼저 일어나 나라를 구합시다.
[4월8일]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民勞黨(洪官憙·통일연구원 평화안보실장)
민주노동당이 4월7일 한국정책학회가 주최한 주요정당 정책공약토론회에서 미군철수를 주장했다. 아울러, 韓·美·日 공조는 중국과의 관계나 한반도 평화에 장애가 된다고 언급했다.
現 시점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것은 지난 수십 년간 북한이 추구해 온 對南적화정책을 뒷받침하는 反국가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북한이 자체적으로 분석한 남한 정세, 곧 『남한에서 친북연공세력이 역량상 우세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끼리」라는 대명제 아래 남조선 인민들의 민족자주의식, 反美자주의식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지난해 9월 조선노동당출판사 발간 자료)이 최근 한국內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法체계나 공권력이 과연 어디까지 이러한 단체들을 방치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국민들의 둔감한 안보의식을 앞으로 어떻게 啓導(계도)해야 할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4월9일] 鄭東泳 의장의 이상한 진실게임(李東馥·前 국회의원)
4월8일 수도권 일원에서의 유세를 시작한 열린당의 鄭東泳 의장은 그동안 물의의 대상이 되었던 60~70代 노인에 대한 그의 폄하 발언에 대해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해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TV 방송들은 鄭의장이 『사실은 20~30代의 젊은이들이 하도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에 60~70代의 노인들처럼 젊은이들도 적극적으로 투표를 하라고 말했던 것』이라고 해명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鄭의장의 이 해명 발언은 사실과는 터무니 없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왜냐 하면 문제가 되었던 그의 본래 발언 내용은 『60代 이상 70代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였기 때문이다. 그의 본래 발언은 어떻게 해석을 해도 『60~70代 노인들처럼 젊은이들도 적극적으로 투표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국민일보 기자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을 자세히 읽어 보면 문제가 된 발언에서 鄭의장은 『20~30代가 투표를 하지 않는 현상』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와서 분위기가 달라져서 20~30代의 투표참가가 늘어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 같은 현상을 「환영」하는 연장선상에서 「60~70代 노인」들 관련 발언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鄭의장의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20, 30代의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냉소주의…. 이것이 현실이죠. 근데 최근에 변화가 왔죠. 촛불집회의 중심에 젊은이들이 있단 말이죠. 작년, 재작년에 월드컵 그 다음에 미선이, 효순이 또 1987년 6월 항쟁, 이런 게 이제 복합돼서 축제이면서 분노의 표출이면서 즐거운 평화적인 그… 독특한 한국판 아크로폴리스 문화라고 그럴까요. 그리스에 대화의 광장, 토론의 광장이 있었다면 촛불 집회가 한국 민주주의의 주역인 20, 30代 젊은이들의 표현의 광장, 최근에는 분노 표출의 광장, 그래서 이게 그분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로 상당 부분 그렇게 줄은 것 같아요. 투표하겠다 하는 사람이나 20, 30代가 많이 늘어난 것은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 굉장히 바람직한 거죠』
鄭의장의 얼렁뚱땅한 해명 시도에서 짙게 배어나는 정직성의 결여는 그가 어떻게 해서든지 불을 지르려 하는 대상인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겠는가? 아무래도 鄭의장은 다시 소년기로 되돌아가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벚나무를 도끼로 잘랐던 어린 조지 워싱턴의 고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다.
[4월9일] 데스크가 없는 MBC 9시 뉴스데스크
방금 택시 중에서 들은 MBC 9시 뉴스에서 앵커맨이 『(탄핵재판정에서) 느닷없이 색깔론이 제기되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어진 기자의 보도를 들어보니 색깔론이 아니었다. 소추위원 측의 李珍雨 변호사가 盧武鉉 대통령의 이념성향에 문제를 제기한 것을 9시 뉴스 진행자는 「느닷없이」, 「색깔론」이란 변칙적인 보도용어로 설명한 것이었다.
李珍雨 변호사의 문제제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시청자들에게는 진행자의 「느닷없이」라는 표현이 「느닷없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념문제를 제기한 李珍雨 변호사는 그야말로 느닷없이 색채론을 제기한 畵家(화가)로 돌변했다. 李변호사는 색깔을 논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사상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것을 「색깔론」이라고 사석에서야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중파 방송이 엄중한 이념문제를 「색깔론」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이념 논쟁을 통해서 정체성이 드러나면 곤란해지는 측에서 만든 선동적 용어를 기자가 그대로 받아쓰는 것을 뜻한다. 「차떼기」 같은 선동적 용어을 기자가 받아쓰면 기자가 아닌 대변인이 된다.
「느닷없이」, 「색깔론」이란 용어로 해서 MBC 9시 뉴스 제작진이 누구 편을 들고 싶은지 짐작이 간다.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뉴스 보도가 의도를 드러내면 다른 보도 전체도 신뢰성과 공정성을 의심받는다.
「느닷없이」와 「색깔론」이란 말에서는 경멸감과 오만함이 느껴진다. 이런 감정적 단어가 논평이 아닌 보도에 나오니까 더욱 문제인 것이다. 李珍雨 변호사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느닷없다」고 느낀 사람들에게는 앵커맨과 기자의 「느닷없이」란 말이 시청자의 감정의 자유까지 앗아가는 것이고 「정당하다」고 느낀 시청자들에게는 짜증을 보태 주었다. 요사이 시중에서 MBC 보도에 대한 격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도 감정이 부른 또 다른 감정이다. 결국 오늘 MBC의 두 단어는 쓸모없는 감정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이다.
MBC 9시 뉴스데스크에는 데스크가 없는 모양이다.
[4월10일] 우국충정이 죄인가?(「국민행동본부」 성명서)
경찰은 대한민국을 탄압하려는가?
왜 親北좌익의 발호를 경고하는 애국시민을 잡아가고 북한정권의 선전원들을 방치하는가. 태극기를 死守하려는 행동이 범죄인가? 애국시민이 저항권을 행사해야 한단 말인가?
1. 선관위와 경찰이 법률을 과잉해석하고 남북한 좌파 권력의 눈치를 보는지 親北좌익의 국회진출을 저지하려는 애국시민들을 잡아가면서 親北 사이트의 선거개입을 방치하고 있다.
2. 선관위는 국민행동본부가 朝鮮日報에 낸 광고를 선거법에 위반된다면서 게재 중단시켰다. 이 광고는 「투표장이 낙동강 전선… 어른들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자!」라는 제목이었다. 설명문은 「낙동강 전선에서 피 흘려, 수출전선에서 땀 흘려, 생활전선에서 눈물 흘려 세운 나라가 기울고 있습니다. 국회마저 좌익 손에 넘어가면 공산화를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소매치기 당할 수는 없습니다」로 되어 있다. 이 글에 무슨 범법혐의가 있다는 말인가. 憂國의 충정이 죄인가.
3. 경찰은 애국투사 池萬元 박사가 신문에 낸 좌익의 국회 진출 경고 광고를 문제 삼고 있다. 경찰관이 사복차림으로 새벽에 池박사의 집을 찾아와 연행하려 하자 테러를 당해 본 적이 있었던 池박사는 위기를 느껴 피신하기도 했다.
4. 경찰은 또 「미래한국」 신문에 난 「총선 후 국회·국가의 친북화 우려, 전대협 前 간부 18명 등 주사파 출신 대거 출마」 題下(제하)의 기사를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낸 청년을 긴급체포하여 조사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조직에서 활동한 前歷者를 유권자들에게 알려 주는 것은 선관위와 경찰이 장려해야 할 일인데도 이런 애국행위를 범죄시하는 경찰은 누구를 위해 복무하는가.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을 받아 먹고 살면서 金正日과 그 추종세력을 위해 반역하겠다는 것인가.
5. 月刊朝鮮이 입수한 북한노동당 비밀문서는 이렇게 자랑했다(月刊朝鮮 2004년 3월호). 「남조선 인터넷망에는 우리의 선전물을 그대로 전하는 친북 인터네트 싸이트가 무려 2000여 개나 있는데 이 통로를 통해 위대한 장군님의 문헌과 로동신문 등이 당일로 게재되고 있다」
우리 경찰과 선관위는 金正日 정권의 눈치를 보는지 이 親北 사이트가 지금 야당을 집중공격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다. 이런 비겁한 공권력이 바로 공명선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번 선거에서 金正日 추종자들이 개혁·진보·민주인사로 위장하여 국회에 진출, 적화통일을 위해 복무하게 된다면 선관위와 경찰은 민족사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역사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월10일] 애국시민은 있으나 애국세력은 없다
혹자는 한국의 애국세력 운운하지만 사실 애국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右派세력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결론을 먼저 얘기하면 그들이 다들 배가 너무 불러서 그렇다.
현재 소위 자칭 「右派」라고 하는 사람들이 몇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실제 우파라고 타칭·자칭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론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첫째, 도망자형―이미 해외에 상당 재산 옮겨 놓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이 분산되어 있으므로 아무 일도 못 한다. 흔한 기회주의자들 중 상당 부분이 여기 있다. 마치 일본군 들어오면 일장기 흔들고, 빨갱이 들어오면 빨간 깃발 흔드는 그런 사람들.
둘째, 이익추구파―빨갛든, 파랗든, 세상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돈만 벌면 되는 파인지라 이념이나 뭐 그런 일에 관심없다. 뇌물을 주든 오입을 하든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다. 오직 이익만을 위한 기회주의자들이다.
셋째, 낙천파 - 막연히 그냥 잘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지난 몇십 년 일없이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문제 없을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다. 역사의식이 없고 경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주역이다. 꿩이 도망갈 데 없을 때 눈 속에 머리 처박는 것과 비슷한 사람들이다.
넷째, 포기파―생략해도 다 안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인가 싶다. 실직, 카드문제, 각종 가정불화, 이혼, 자살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이들의 손에 있다. 하늘은, 진리는, 눈물 흘리는 사람들 편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하늘을 의지하는 파―진정한 신앙인들이다. 일의 시작과 결말을 알기 때문에 세상만사가 다 헛되다는 것도 안다. 세상 연락을 즐기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산다. 남을 위한 기도와 자기를 위한 간구함과, 기쁨과 감사의 찬송과 말씀 묵상을 주야로 하는 사람들이다. 성경대로 복 있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당신은 어느 파에 속하시나요?(증거·50·남)
[4월10일]「누구에게도 원한을 갖지 않고…」(盧에게 주는 링컨 연설문)
계급적 적대감과 증오심을 깔고서 국가를 분열시키고 국민들을 반목하게 만든 盧武鉉 대통령이 링컨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는 또 月刊朝鮮이 펴낸 「위대한 영어 연설문」에 나오는 링컨을 읽고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한 듯하다. 오늘 그 책을 꺼내 새삼 유명한 문장을 다시 읽었다. 미국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말하는 이것은 1865년 3월4일에 있었던 두 번째 취임 연설 중 마지막이다. 링컨은 이 연설을 한 40일 뒤 암살된다.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with firmness in the right as God gives us to see the right, let us strive on to finish the work we are in, to bind up the nation's wounds, to care for him who shall have borne the battle and for his widow and his orphan, to do all which may achive and cherish a just and lasting peace among ourselves and with all nations.〉
<누구에게도 원한을 갖지 않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神께서 우리에게 보게 하신 그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일을 끝내기 위해, 이 나라의 성처를 꿰매기 위해, 이 싸움의 짐을 져야 하는 사람과 그 미망인과 고아가 된 아이를 돌보고 우리들 사이의, 그리고 모든 나라들과의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일을 다하기 위해 매진합시다>
[4월11일] 親北이 파쇼이다
오늘 만난 일본 공산당원 하기와라 료(萩原遼)씨는 한국의 親北·反美 세력을 「極右파쇼 守舊 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親北세력은 金正日을 추종하는데, 金正日은 폭력적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군국주의적 「先軍정책」을 추구하며 계급적 적대세력에 대해서 인종말살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와 같은 전형적인 極右파쇼이다.
히틀러는 그래도 독일의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國富·國力을 쌓은 사람이라 守舊라고 규정하기에는 다소의 문제가 있는데, 金正日은 개혁·개방을 거부함으로써 1990년대 말의 북한주민 생활 수준을 100년 전의 朝鮮朝 철종·고종 시절 수준으로 되돌려 놓은 守舊의 표준이다.
「極右파쇼 守舊」인 親北세력은 그 본질이 「진보민주」인 한국의 정통 주류세력을 「守舊 꼴통」이라고 비난한다. 전형적인 공산당式 선동술이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의 평양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金賢姬 소녀의 사진을 찍기도 했었던 하기와라 료씨는 金日成·金正日의 악마성을 꿰뚫어 본 뒤에는 북한정권 타도를 필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아직도 공산당원인 그는 『金正日 정권은 양심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적이다. 이제부터 일본이 그를 요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300만의 동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1995년 이후의 대기근 사태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金正日에 의한 계급적 학살(아사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책을 쓰고 있다.
[4월11일]『진보가 아니라 金正日의 기쁨조』
하기와라 료(萩原遼)씨는 자신을 『부모도 없고 처자도 없고 돈까지 없으니 죽고 싶지도 않다』는 일본의 도쿠가와 시절 名言으로 설명한다. 그는 6·25 전쟁 때 미군이 압수한 북한 문서만 가지고 「朝鮮戰爭」이란 책을 썼다. 북한군의 작전계획서를 토대로 설명하면 자연스럽게 6·25 남침 준비과정과 開戰상황이 나온다. 남침, 북침을 따진다는 게 의미가 없게 된다. 북침설이라는, 요괴들의 요설에 종지부를 찍은 책이었다.
그가 쓴 「북조선에서 사라진 친구와 나의 이야기」라는 책은 유명한 논픽션 賞도 받았다. 그는 『일본 공산당 안에서는 나의 행동에 대하여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金正日 타도를 위해 나의 생애를 걸었는데 누가 말리겠는가』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左派 지식인답게 그의 언어는 폐부를 찌른다. 그는 金正日을 「눈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난롯가에 오면 녹는 눈사람」, 즉 개방을 하면 사라질 운명의 독재자라는 것이다.
오늘 그는 또 名言을 남겼다. 남한의 親北좌파 세력은 「金正日의 기쁨조」라는 것이다. 金正日은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받으면 짜증을 내지만 남한상황을 보고받을 때는 미소를 짓는다고 한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들만 골라서 하는 親北좌파 세력들이 열심히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미국에 반대하는 행동을 해주고 있으며, 이들이 드디어 정권의 핵심부에도 들어가 있고 머지 않아 국회에도 대거 진출할 형국이니 이 親北좌파들이야말로 「金正日의 기쁨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기와라 료씨는 자신을 反北좌파라고 이야기하면서 親北좌파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납치범에 잡힌 인질은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납치범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병적 상황이다. 金正日을 납치범, 한국 사회를 인질로 설정한 논법이다. 하기와라 료씨는 『한국의 좌파가 진보임을 증명해 보이려면 북한주민들이 겪고 있는 인권탄압에 대해 분노하고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동포들이 당하고 있는 인권탄압을 냉소적으로 보는 자들은 진보가 아니라 파쇼이며 守舊라는 이야기이다.
[4월11일] 金槿泰 의원 심야토론 유감(토론방)
金槿泰 열린당 의원님을 그렇게 안 봤는데 오늘 KBS 심야토론에서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먼저, 토론 패널로 자리했으면 토론자와 눈을 맞추며 토론하는 것이 예의인 데 반해 시종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굳이, 金槿泰 의원의 과거를 따지지 않더라도, 정확히 따질 필요도 없겠지만, 어제 토론의 결과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1. 과거 인식의 不在
朴世逸 한나라당 선대위장과 朴正熙 前 대통령의 경제발전 부분에 대한 토론에서 朴世逸씨는 『역사를 단면만 보지 말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자. 경제발전의 功은 제대로 평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주장에 金槿泰 의원은 『그건 그때 당시의 농민, 상인, 기업인 등 모두의 작품이었지 朴正熙 개인만의 功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답했다.
그런데, 탄핵에 관해 토론을 할 때 金槿泰 의원은 사뭇 경제에 대해 다른 인식을 피력했다.
『경제 물론 잘되어야 한다. 정치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경제는 잘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가 잘되지 않으면 경제가 잘될 수 없다. 정치가 안정되고』
그렇다면, 朴正熙 경제 개발에 대한 功은 대강 朴正熙의 정치력이 경제성장을 이끌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인가?
아니면, 그때와 지금은 다른 상황이라 각각 다른 설정을 하는 것인가? 도대체, 시청자에게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떻게 이해하라고 하는 건지 각각 다른 金의원 주장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리둥절하다.
2. 법을 초월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세
민주당 孫鳳淑 위원장이 『열린당은 憲裁에서 탄핵이 가결되면 그대로 수용하시겠습니까?』란 질문에 金의원은 『절대,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을 것이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재차, 반복되는 질문에 『국민의 80%가 탄핵 철회를 원하고 있고, 표결 당시에 70%가 반대했다. 동의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법은 국민이 원할 때 지켜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탄핵은 국회의 손을 떠나 헌법재판소에 넘어간 상황이니만큼 충분한 검토를 통해 憲裁는 판단을 할 것이고, 국민과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까지도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 수용하면 그뿐이다.
만일, 憲裁에서 대통령 탄핵을 가결한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사뭇 긴장된다. 혹시라도, 이런 생각을 가지게끔 하여 투표와 헌재에 압력을 가하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또한, 탄핵이 가결되지 않음을 확신한다면 얼마든지 국민을 안정시키기 위해 憲裁의 판단을 적극 수용할 것이며 차후에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표명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3. 탄핵에 대한 시각
金의원은 대통령 탄핵에 대한 사건을 설명할 때마다, 「의회 쿠데타」니 「폭거」니 하는 섬뜩한 용어들을 계속 사용했다.
말은 만들어서 적용시키는 게 아니라, 있는 말을 얼마나 適材適所(적재적소)에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표현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해 「예」를 들기도 하고 「비유」도 한다. 일단, 「의회 쿠데타」는 어느 한 편이 규정한다고 해서 옳게 인식될 단어 조합이 아니다. 국민의 선택→국회의원→의회→의회 쿠데타 결국 뿌리를 들추면 국민에 의한 「쿠데타」가 된다.
일단, 쿠데타라 하면 「정권찬탈」의 목적성이 있어야 하고, 기습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탄핵 발의 과정에서부터 표결까지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與·野 합의를 도출해 내기 위한 수단을 강구했었던 측면을 살펴볼 때, 이는 결코 쿠데타의 성격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행위였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4. 국민의 뜻이 다 「법」을 어길 수 있는 잣대는 아니다
金槿泰 의원은 국민이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탄핵은 부당한 것이고, 민주주의는 참여와 개입이라고 했다. 맞다. 그래서 국민은 투표를 해 민주주의에 참여를 하고, 선거에서 「선택」을 해 개입을 한다.
金槿泰 의원의 논리대로 한다면, 「투표」는 필요 없는 하나의 절차요, 시간과 비용의 낭비만 초래하는 소비적인 「과정」의 하나일 뿐이란 얘기가 된다. 여론조사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자치단체장을 뽑으면 된다. 정말, 이것이 참여와 개입이라 생각하면 그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는 것이다.
金槿泰 의원도 느끼는 바와 같이 여론조사란 것은 그때 그때의 사안에 맞춰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고, 지속적인 思考의 표출이기보다는 일시적인 감정의 표출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탄핵의 폭풍이 잦아들면서 여론조사 추이도 변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열린당에서 터져나오는 「위기론」이다. 굳이, 여론조사가 민주주의의 참여와 개입에 있어서 절대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면 탄핵안 발의 및 가결, 그리고 憲裁의 판단은 불필요했다. 1년 내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지하는 여론은 고작해야 20%대였다. 나머지가 부정적이거나, 다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측면을 고려할 때 얼마든지 여론조사를 통해 대통령이 탄핵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정신차린386(펌)>
[4월11일] 두 가지의 글
金正日을 감싸고, 북한주민들을 냉대하며, 대한민국에 흠집을 내고, 朝鮮日報를 집중적으로 음해하며, 6·25 때 한국을 구해준 미국을 증오하는 대신에 6·25 남침의 공범자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쓰는 글과,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金正日에 분노하며 북한주민들을 동정하고 미국에 감사하며 朝鮮日報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은 이런 차이가 있다.
1. 前者의 글은 짧다. 거의가 욕지거리이기 때문이다.
2. 後者의 글은 길다. 논리적이고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 前者의 글에서는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주장만 있기 때문이다.
4. 後者의 글에는 풍부한 사례와 경험이 들어 있다. 그게 설득의 무기이니까.
5. 前者의 글에서는 증오심이 발견된다.
6. 後者의 글에는 걱정이 많다.
7. 前者와 後者의 대결에서 승부는 명백하다. 지금 이 사이트의 토론방에 들어가 보면 위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성 세대가 인터넷을 배워 젊은 세대의 좌경화·홍위병화를 막기 위한 교사로 총출동하는 형국이 확산되면 대한민국은 구제될 것 같다.
[4월11일] 대한민국은 앞뒤로 포위되었는가?(토론방)
朴槿惠 한나라당 대표는 2년 전, 이미 金正日을 만나고 왔습니다. 만일 朴대표가 金正日과의 만남에서 金正日의 惡함을 읽었었다면, 지난 2년간 어느 곳 어느 자취에서라도 그러한 인식을 보이는 발언이 조금은 새어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전혀 그런 흔적을 접한 일이 없습니다.
朴대표가 金正日의 정체를 2년 전 꿰뚫어보았다면, 다시 평양에 들어가 그 악마와 회담을 갖겠다는 발언은, 아니, 희망일지라도 나올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申相玉 감독이나 崔銀姬씨가 두 번 다시 그자를 대하고 싶어하는지 ? 그분들의 증언을 읽어 보면 金正日은 장미꽃 기름 바른 악마로 나옵니다.
역사는 악마와 회담하느라 절절매다가 인류를 악마의 발 아래 희생시킨 여러 병신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체임벌린이 그러하며, 키신저가 그러했습니다. 朴대표는 제2의 체임벌린이 되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녀가 제2의 체임벌린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 그녀를 매도하기 위해가 아니라 - 저는 이 글을 씁니다.
朴대표는 金正日의 정체를 읽는 일에 실패한 것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악마들은 빛의 천사처럼 위장하고 온다고 하느님의 아들께서 말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빛나는 겉모습만 보고 악마를 천사로 여길 것입니다. 朴대표는 상식의 오류 속에 들어섰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평양 악마의 내면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탈북자들의 아우성이 아무리 귀에 빗발칠지라도, 자기 시야를 통해 직접 입력된 거짓 허상의 농간에 계속 놀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제가 확신컨대, 金正日과의 첫 회담에서 金正日이 악마임을 그녀가 깨닫지 못했다면, 두 번째 회담에선 더 더욱 그 자에게 끌려들 것입니다. 金正日은 朴대표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그녀는 껍질만 남고 멍들 것입니다.
악마에게 멍든 지도자를 믿을 수 있습니까?
金正日보다 덜하던 金日成을 당신의 부친이신 위대한 朴대통령조차 평화적으로 요리하지 못하고 오직 대결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하신다고요 ? 핵무기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 평양의 악마가 무엇이 아쉬워 당신의 말을 듣겠습니까? 앞에선 귀 기울이는 척할지라도 뒤에서 비수를 꽂을 것입니다. 당신의 등만 비수를 맞는다면 제가 말을 말 것이나 대한민국의 뒤에 꽂을 비수가 되리니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은 제2의 이라크戰을 치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제2의 한민족 상잔이며 제2의 6·25가 될 만한 내전상태로 들어선 중에 있습니다. 남한에는 親김정일 세력이 10%를 넘어섰습니다. 불행히도 10%의 좌익들은 70%의 우익보다 훨씬 지독하고 악랄합니다. 수가 많다고 이기는 것 전혀 아닙니다. 우리들이 저 어리석은 지도자들에게 독하게 냉철하게 굴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목숨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朴대표가 두 번째로 金正日을 만나 평화에 대해 회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朴대표는 오만을 벗기 바랍니다. 악마와의 평화회담은 악마의 수명연장과 노예 불리기에만 사용될 뿐입니다.
한반도에서 반란수괴 金日成이건 金正日이건 단 한 번이라도 만나고 돌아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뢰를 그에게 두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그를 親北인사, 親김정일 인사로 여겨야 합니다. 서럽지만, 이것이 우리의 냉정한 현실입니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이야 제가 알았겠습니까? 여러분이 짐작했겠습니까? 저는 오늘도 제 의무를 다합니다. 제 소리가 헛소리이기를 바랍니다.(파아란)
[4월15일] 우리는 敵이 아니다
총선 투표일을 맞아 지난 한 달간의 글쓰기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사이트에 나라걱정·나라사랑의 글을 올린 분들의 생각을 정리하면, 그 핵심은 이단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열정일 것이다.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민족사적 정통성이란 의미는 이렇다.
1. 대한민국만이 한민족의 정통국가이며 북한정권은 이단이다.
2. 한민족은 하나의 정통국가만 갖는다.
3.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어느 체제가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느냐이다.
4. 대한민국이 민족사, 그리고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국가이므로 북한은 자동적으로 이단이요 反국가단체가 된다.
5. 이런 정통史觀을 헌법에 담은 것이, 한반도 전체와 그 부속도서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한 조항이다.
6. 이 헌법 규정에 따라서 북한정권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반란집단이고 主敵인 것이다.
7. 민족사적 정통성과 헌법에 따라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8.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정통 역사관과 헌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행위이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면 자동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여(휴전선을 국경선으로 만들어) 통일을 포기하게 된다. 이는 헌법이 우리 영토라고 규정한 북한지역을 포기하는 매국행위이기도 하며 탈북자들을 국민으로 여길 수도, 구출할 수도 없게 된다.
9. 매국노, 반역자, 헌법파괴자가 되지 않고서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
10. 대한민국 건국을 정통국가의 건설이 아니라 분열정권으로 여기는 盧武鉉 대통령은 통일방안으로서 국가연합(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남한과 대등한 국가 간 관계의 연합을 맺자는 발상)을 주장하고 있다. 열린당의 상당수 의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통일강령으로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방식의 통일」을 내세우고 있다. 盧대통령, 열린당, 민주노동당의 생각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포기하는 反헌법적 견해이다.
11. 한나라당도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에 대한 확신이 약하다. 한때는 북한을 영토로 규정한 헌법조항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이 당에서 나온 적도 있다.
12. 따라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헌법과 손잡고 수호하려는 정당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이 대한민국의 절대 고독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남북한의 반역세력으로부터 얻어맞고 뜯어먹히고 있는 「동네북」이다. 대통령도, 국군도, 국정원도, 한나라당도 이렇게 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위해 변호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국선 변호인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3. 기자와 많은 애국 네티즌들이 애가 타서 국선 변호인을 자임하면서 지난 한 달 많은 글을 썼다. 글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역사는 체험이고 내일의 역사는 기록이다. 여기에 남겨진 글들은 내일의 역사를 만드는 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14. 민족사적 정통성이 타협 불가능한 가치이고, 이것을 포기하면 남북관계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점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매우 적다. 아마도 북한의 소위 통일 일꾼들이 한국의 지식인들보다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가진 의미를 더 무겁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정권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파괴하기 위하여 정교하고 끈질긴 선전·선동을 해왔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인 통일신라와 거기에서 연원하는 최초의 국민국가인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신라와 대한민국 흠집내기! 이것이 對南 적화통일 전략의 핵심이었다.
15. 민족을 대표하는 정통성은 하나뿐이므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뿐인 생명체를 두 동강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을 두 동강 내어 하나를 버리는 행위이다.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국가적 자살을 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16. 민족사의 정통성은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도덕기준이다.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민족이 善惡 판단 능력을 버림으로써 非도덕적 존재로 전락한다는 의미이다. 동포 300만 명을 사실상 굶겨 죽인 金正日 정권을 한국과 동급의 국가로 인정해 놓고는 도덕 교육도, 역사 교육도 불가능한 것이다.
17. 盧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1961년 3월4일 취임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국가도 자신의 소멸을 위한 조항을 기본법에 규정한 예가 없습니다. 위헌적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연방을 해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북한정권을 대한민국과 동급에 놓는다든지, 국가연합식 통일을 주장하는 행위는, 국가의 이름으로써는 원천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란 의미이다.
18. 링컨은 위의 연설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소수가 헌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다수는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부가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헌법에 담아 놓았는데, 이를 부정하는 소수가 있다고 해서 다수마저 헌법을 무시하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헌법을 지키고 헌법은 우리를 지킨다」는 생각을 공유한 분들의 글들을 지난 한 달 동안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고 안도였다.
19. 대한민국에 대한 자랑과 애착이 없고 金正日 정권에 대한 분노가 없으며 북한동포에 대한 사랑과 동정이 없는 이들이 주로 적개심과 증오심에 가득찬 극악무도한 언어로써 우리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하고 온건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비난도 고소도 당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였다.
20. 저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링컨의 말이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첫 번째 대통령 취임식 연설의 마지막 문단이다. 그가 美합중국연방을 파괴하려는 남부 사람들에게 호소한 말이다.
<여기서 내 말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이 나빠졌다고 해서 그 감정 때문에 애정의 유대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이 광활한 땅의 수많은 전쟁터와 애국자의 무덤, 그리고 사람들과 가정을 이어 주는 신비로운 기억의 선율에, 언젠가는 우리의 천성에 숨어 있는 천사 같은 마음의 손길이 와닿을 것이고, 그때는 연방의 합창이 다시 울려퍼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敵이 아니다. 언젠가는 웃는 낯으로 다시 만날 것이다.●
편집장의 편지 後記
[4월16일 이 밤에 생각나는 金言들(裵振榮)
휴전협정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를 보면 매 章이 시작되기 전에 金言들이 나온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금언들을 소개한다.
*칼은 부러졌다. 그러나 부러진 칼의 한 조각을 가지고 끝까지 싸우겠다.
*절망은 어리석은 자의 결론이다. 희망은 힘의 원천이요, 절망은 無力의 어머니다.
*고난을 당할 때 동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칭찬해야 할 인품의 증거다.
*나를 최후까지 정복할 수 있는 자는 나뿐이다.
*국가는 말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실행이 중요하다. 이제는 더 기다릴 여유가 없다.
*내가 자유라고 일컫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질서를 동반한 자유다.
*세상에는 참과 거짓이 있다. 거짓은 또 하나의 거짓을 낳는다.
*썼다, 사랑했다, 살았다. 인생을 全力 투구했다.
*생각하는 것이다. 철저히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파괴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조화만이 우리를 강하고 크게 한다.
*理想은 우리 자신 속에 있다. 동시에 理想의 실현을 저해하는 장애도 또한 우리 자신 속에 있다.
*유능한 사람은 언제나 배우는 사람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학생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곧 투쟁이다. 무엇이든지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시간은 귀중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욱 귀중하다.
*인생을 살되 사랑을 원리로 하라. 그리고 질서를 기초로, 진보를 목표로 삼아라.
*지도자의 길은 오직 하나다. 天下를 움직이기 전에 먼저 자기를 움직여야 한다.
*위대한 나라는 위대한 인물을 많이 낳는 나라이다.
*어떠한 이상도 희생을 지불하지 않고 성공할 수는 없다. 누구도 상처 없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전쟁은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오랫동안 싸우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비전이 없을 때 그 국민은 망한다.
*전쟁에는 결단, 승리에는 관용, 패배에는 鬪魂, 평화에는 선의.
*최대의 영광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이다.
[4월16일] 애국세력의 起死회생
언론과 여론의 예상보다 朴槿惠의 한나라당이 善戰한 이번 총선의 의미를 적어본다.
1. 정치권력의 분야에선 좌파 세상이 되었다. 정부와 국회까지 장악한 좌파의 내부 변화가 예상된다.
2. 이 좌파 속에서 反金正日 좌파가 주류가 되면 한국은 위기를 벗어날 것이다. 극좌, 즉 親金正日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 한국은 내전적 상황으로 몰려갈 것이다.
3. 이제 좌파는 국정운영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이 되었으므로 경제와 안보 분야의 실패에 대한 변명이 불가능해졌다. 권력과 책임을 함께 지게 되었다.
4. 한나라당은 싸우는 자유세력, 또는 신보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 확보한 의석과 지지율은 한반도의 거대한 좌파세력 연합체와 赤手空拳(적수공권)으로 맞서 쟁취한 것이다. 과거 어떤 보수당이 얻었던 지지율과 의석 수보다도 값진 진짜이다.
5. 한나라당 당선자들 중에는 金文洙, 鄭亨根, 金容甲, 洪準杓 같은 투사형이 많다. 이념무장에서 우러나는 투지와 대중동원력의 부족이 한나라당을 살찐 돼지에 머물러 있게 했었다. 이제 낙동강 방어선에서 살아 돌아온 한나라당은 여윈 늑대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한나라당이 가장 많이 변했다는 말이 들린다.
6. 한나라당이, 盧武鉉 정권의 「신행정수도 건설」로 위장된 「遷都」에 들러리를 섬으로써 수도권 선거의 가장 큰 카드를 포기한 일, KBS 시청료 분리징수 법안의 처리를 포기한 일이 결국 이번 선거에서 표로 계산되었다. 이념적 기회주의가 가장 큰 전략적 실패를 가져온다는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7. 이번 선거를 통해서 기성세대, 중산층 등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주류층이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이 각성이 주류층의 지속적인 救國행동으로 이어진다면 이번 선거 결과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것이다.
8. 열린당과 민노당은 대한민국 헌법질서에 반하는 언동을 많이 해 왔다. 그런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헌법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예견된다. 헌법을 지키는 일은 이제 여당이나 정부의 몫이라기보다는 국민 전부의 일이 되었다. 우리가 헌법을 지키려 할 때 헌법은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9. 한나라당이 확실한 개헌 저지선을 확보함으로써 국체변경, 연방제 통일추진 같은 亡國의 사태를 일단 막을 수는 있게 되었다. 한나라당이 여의도에 안주하는 실내형 정당이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 속으로, 인터넷 속으로, 필요하면 거리로 나설 수 있는 행동력을 갖추려면 그 운동을 이끄는 이념무장이 先行되어야 할 것이다.
10. 어쨌든, 대한민국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가 이제 겨우 교두보를 확보했다. 반격을 할 수 있는 戰力의 정비, 교육과 훈련, 그리고 반성의 시간인 것 같다. 돈과 직위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한국의 주류층이 총력을 다해서 젊은 세대와 대화하고 토론하여 그들을 교양 있는 한국인, 책임 질 줄 아는 시민, 애국심을 지닌 국민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근대화의 주인공들이 선진화의 騎手를 육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류국가의 꿈을 접고 스스로 3류의 길에 접어들고 말 것이다. 헌법과 체제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도덕이다.●
역사를 기록하면서 역사를 만들어간 趙甲濟의 논설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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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16, 2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