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수기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의 내 생애 일부의 기록입니다. 우리 민족은 日帝로부터 해방이 되어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남북의 분단을 만났고 급기야는 이북의 김일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해괴한 6·25 동란을 겪게 되었던 역사적 아픔이 있습니다.
나는 1950년 6월 25일 이전엔 38선 이북의 공산치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나의 가족은 형언하기도 어려운 슬픈 삶을 겪었습니다. 6·25가 나던 해엔 이산가족이 되었고 6가 난 이후엔 나와 할머니는 동해 중부전선에 남아 공산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방군이 대치하여 공방전을 치르는 와중에서 생명의 위험이 경각에 달린 처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1952년 이후엔 이산가족이었던 나와 할머니는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6·25 때 헤어졌던 가족과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국민 모두가 다 그랬듯이 우리도 쓰라린 피난민 생활을 하였습니다. 내가 겪은 6·25 동란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992년이 지난 언제인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역사 속에서 이미 다 알려진 진실되었던 사실들이 점차로 왜곡되는 방향으로 부풀려 지고, 있지도 않은 일들이 새롭게 기록되어 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6·25 를 생생하게 경험한 많은 이웃들이 당황하게 되었고 나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6·25 동란 때의 기억나는 일들을 상기하여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글을 쓴 목적은 첫째, 우리 국민들 누구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그리고 옳게 찾아서 알아야 하고, 후손들에게는 이를 교육적으로 정확하게 전수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형태의 전쟁도 이 땅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입니다. 셋째,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정신으로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모범된 자세를 앞세워야 되겠다는 바람입니다.
처음 이 글의 시작은 2005년 1월 29일부터 5월 6일까지 내가 조선일보 닷컴의 회원이 되어 블로그에 3개월간 연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연재를 하는 동안에 독자들이 나에게 많은 의견을 주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6·25 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 이야기가 아직도 도처에서 숨겨져 있는데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이 자꾸 소멸되어 가는 현실에서 나와 같은 생생한 수기의 내용이 반드시 책자로 기록되어 후대에 알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독자들의 뜻을 소중하게 받들어 기록되지 못한 나의 기억들을 다시 보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더 보충할 내용을 다듬고 중복된 이야기들을 간추리곤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내용의 서술이 되지를 않아 심히 송구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실을 세상에 알림이 더 소중하다는 일념에서 크게 용기를 내어 이 책자를 내 놓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제작하려는 초기부터 망설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각계에서 많은 분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또 진실 됨을 증거함에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비로소 밝힙니다만 조선일보 닷컴의 운영자님과 관계자님들이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나의 아내와 가족 모두가 하나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글자 한 자 문장 한 구절에 관심을 가져 주었던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감동했던 마음을 소개합니다.
수필가 김두수님의 문장 작성에 대한 세심한 일깨움 및 수기 내용의 검토와 수필가 김용진님, 시조시인 이정오님의 교육적인 바람과 서석용 박사의 우국의 조언에 감사드리며 수원 가톨릭 사진 작가회 한상국님이 동해안 속초에서 강릉, 부산 그리고 거제도까지의 여정을 통하여 우정 어린 촬영 동행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이 책이 나오기 처음부터 나의 부족한 점을 내치기에 앞서 더욱 격려하며 나라사랑의 열정으로 이 책자를 펴내어 나의 뜻을 기려 주신 명문당 김동구 사장님의 따뜻하고 우정 깊은 마음에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표지부터 본문 활자 그리고 사진 배열에 이르기까지 전체 구성을 빈틈없이 이루어 주신 도서출판 팬더북 채희걸 사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전체적인 제작을 주관하여 주신 양승웅 부장님의 배려에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2007년 6월 20.화곡(華谷) 김찬수(金燦洙) 식(識)
차 례
1. 귀향(歸鄕) / 12
2. 인공치하(人共治下) / 14
3. 아버지의 설악산 잠적 / 28
4. 감시 대상 우리 집 / 28
5. 깊은 밤중에 본 아버지 / 30
6. 금강산 수련과 아오지 탄광 / 31
7. 고향에 남은 할머니와 나 / 36
8. 김일성의 기습남침 / 42
9. 양양 군청 철수 이동 / 49
10. B-29 항공기의 강현 역과 철다리 폭파 / 54
11. 낙동강 패잔병 인민군의 퇴각행렬 / 57
12. 1950년 10월 1일―나의 태극기 사랑 / 60
13. 동해 중부전선의 끔찍한 전쟁터 와중에서 / 66
14. 인민군 총사령관 무정 / 71
15. 끊이지 않는 우리 동네의 상흔(傷痕) / 74
16. 인민위원장의 말로 / 79
17. 눈이 많이 온 해 1ㆍ4 후퇴 / 82
18. 설악산 전투 / 87
19. 전쟁 유행병 장티푸스 / 92
20. 소금재 고개 / 95
21. 1951년 최전방 국방군 주둔지 강현면 / 97
22. 양양군 남대천 하류 / 102
23. 비목(碑木) / 109
24. 동해안 삼팔교 / 111
25. 강릉의 피난민 생활 / 113
26. 전방 신병 전투훈련소가 된 복골 / 118
27. 전선야곡(戰線夜曲) / 123
28. 내 고향 진달래 피는 마을 / 127
29. 총기사고 / 132
30. 쌍천(雙川) / 134
31. 아버지의 난중일기 / 144
32. 선영이의 죽음 / 147
33. 거제도 인민군 포로수용소 / 150
34. 포로수용소 폭동과 연초중학교 개교 / 156
35. 재회를 약속한 할머니와의 이별 / 159
36. 부산 거제리 병영의 하우스보이 생활 / 164
37. 장승포 항에서의 아버지와 만남 / 166
38. 피난민 집합지 거제도 연초면 / 170
39. 생이별한 이산가족 / 175
40. 대한민국이 배척하는 마르크스 레닌 사상 / 176
41. 할머니 거제도 도착, 이산가족 상봉 / 179
42. 명견 에쓰와의 만남 / 183
43. 할머니의 발병과 동생 선심이의 사망 / 184
44. 한 많은 내 할머니의 애환(哀歡) / 189
45. 아버지의 가정교육 / 192
46. 절약정신 / 193
47. 가고파 / 197
48. 고현 미군부대 위문 활동 / 200
49. 친구 영희 언니의 애절한 이야기 / 204
50. 기초학업 손실 / 207
51. 학습 불안심리 / 209
52. 상담 심리치료 방식으로 학업 상실감 해소 / 211
53. 우선해야 할 교육풍토 확립 / 213
54. 아버지의 용단 부산으로 이사 결정 / 215
55. 명견 에쓰와의 이별 / 219
56. 자갈치 시장과 청구중학교 / 223
57. 학습 지진아 열등생 / 227
58. 멍드는 동심 / 231
59. 깡패천국 / 234
60. 부산 거인 노장군 / 238
61. 부산 대 화재 / 241
62. 이별의 부산 정거장 / 243
63. 아미동 판자촌 / 244
64. 판잣집 철거 수난 / 249
65. 남동생 웅수 출생 / 252
66. 영도 청학동 후생주택 27호 / 254
67. 내 아버지의 자녀교육(동행) / 258
68. 1955년도(6 5년 뒤) 부산 거리 / 262
69. 최의준 선생 / 266
70. 독립운동가 후예 / 269
71. 휴전반대와 영도다리 난간 / 274
72. 대연동 재한 UN 공원 / 276
73. 영도다리 아래 점보는 집 / 278
74. 상표 없는 밀가루 포대 / 279
75. 장갑송 아저씨의 피난 이야기 / 281
76. 원산 형무소 / 289
77. 친구 김승엽의 피난 이야기 / 292
78. 친구 이영일의 1 후퇴 직후 피난 이야기 / 297
79. 오신혜 선생님 / 300
80. 서부영화 / 309
81. 사춘기 / 312
82. 신문배달 고학생 / 317
83. 부두 노동자 / 322
84. 막내 여동생 선옥이의 출생 / 326
85. 한찬식 선생님 / 327
86. 영도 고갈산 / 331
87. 학창시절 나의 애국심 / 334
88. 좌파괴수 김일성의 종교탄압 / 337
89. 전쟁고아 / 343
90.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 345
후기 / 349
1. 귀향(歸鄕)
나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중복리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높고 수려하며, 앞으로는 푸른 동해바다가 펼쳐져 바라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특히 늦가을이 되어 물치 장거리에서 우리 동네로 올라올 때 설악산 대청봉을 올려다볼라치면, 마을에는 집집마다 감나무 가지에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송암산 너머 저 멀리 우뚝한 대청봉 산마루엔 눈이 하얗게 덮여 동해바다를 장엄히 내려다보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가을과 겨울이 한눈에 보이는 놓치기 아까운 장관이 연출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곳은 나의 선조들과 부모가 태어난 곳이고 선영들이 모셔진 곳이기에 정신적인 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안고 어른들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와 1952년까지 8년간 살면서 끔찍했던 6ㆍ25 동란 전후의 아픈 추억만 가득한 곳일 뿐이다. 태생도 그곳이 아니고, 온전히 성장한 곳도 그곳이 아니다. 지금까지 객지에서만 살았기에 많이 산 곳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서울이 고향이요, 동심이 묻혀 있는 청소년기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시원하고 아름다운 항도 부산이 내 고향이고, 태생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조선조 세종대왕 때 김종서 장군이 육진을 개척 시 진영을 쳤다는 함경북도 종성군 행영면 영리가 나의 고향이고, 사랑하는 내 아내가 자란 내륙의 호반도시 춘천에서 36년 동안이나 행복을 간직하고 오가며 지내고 있으니 이곳 또한 내 고향이랄 수도 있겠다.
1945년 8ㆍ15 해방 이후 그 해 11월, 29세인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정리한 뒤 우리 식구를 데리고 함경북도를 떠나 고향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왔다.
그때 기차에 자리가 없어서 기차 화통이 있는 맨 앞 차량 꼭대기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오는데, 거기도 사람이 빼곡히 들어차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판이었다. 게다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 다리를 오랫동안 깔고 앉은 것이 원인이 되어 고향에 도착한 뒤에 절뚝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치료를 위해 민간요법으로 탄 볏짚재에 오줌을 부어 재운 것을 짓이겨 보리개떡 반죽같이 두툼하게 만들어 아픈 부위에 붙여 놓고서 붓기를 빼곤 했다. 이때 아픈 무릎께가 한동안 몹시 근질근질하고 못 견디게 따끔거렸던 생각이 난다.
함경북도에서 원산 쪽으로 내려올 때 기차가 달리다가 굴이 나타나면 앞에 있는 사람들이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는 기차소리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엎드려!” 하고 외치면 화통의 맨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납죽 엎드려 가며 여러 차례 기차 굴을 빠져 나갔었다.
그러던 중에 원산 근처 덕원 역에서 승객들이 잠시 쉴 때였다. 로스께(소련군인)가 갑자기 귀중품과 사진 등 온갖 소중한 자료가 들어 있는 우리아버지의 커다란 가방을 날치기해 도망간 일이 있었다. 이를 목격한 아버지는 도망가는 로스께를 쫓아가고 나를 업고 있던 할머니는 한참을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큰 소리로 울면서,
“아범이 오지 않는걸 보니 소련군 놈이 필시 총질을 하였을 것이다. 아범이 오지 않으니 내가 살아서 뭣하랴!”
하면서 기차 바퀴에 몸을 던져 죽겠다고 하던 절규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임박해서야 우리 집 全 재산이었던 가방을 잃어버린 채로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알거지 행색이 되어 고향 강현 역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나를 안고, 어머니는 8ㆍ15 해방이 지나 갓 태어난 여동생을 안고, 할머니는 아기 옷가지 몇 개 달랑 손에 들고서 다섯 식구가 지친 모습으로 집도 없는 고향 마을로 향했던 것이다.
뒷날 할머니는 이때를 떠올리면서 두고두고 말하기를,
“예전에는 강현 역에서 우리 집 동네를 오갈 때는 발걸음도 가벼웠었는데, 해방되었다고 기쁜 마음으로 客地에서 고향에 가다가 덕원에서 귀한 물건 들치기 당하여 다 잃어버리고 맨주먹으로 오게 되다니……. 고향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고, 10리도 못 되는 길을 초겨울에 들어서서 우리 텃밭까지 걷는데 그렇게도 멀게 느껴져 보기는 처음이었다.”라고 했다.
고향에 온 우리 가족은 택호가‘반재집’이라는 친척집 뒷방 하나를 빌려 살게 되었다. 38선 이북 공산 치하의 생활은 그렇게 무일푼으로 시작되었다.
2. 인공치하(人共治下)
아버지는 1946년 봄부터 초가을까지 간성에 있는 오호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그 해 가을부터 소련 공산주의 앞잡이 김일성 우상화와 공산정권의 세력 다지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부터 우리 집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개울마을 어느 잔칫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을 ‘인민위원장’인 지씨의 집에 가서 젊은 사람들끼리 사상 논쟁을 벌이다가 공산주의 패들과 싸움이 붙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힘이 모자란 아버지 일행 세 사람, 개울마을 봉근 아저씨와 과수원집 종대 아저씨 등이 숫자가 많은 그들에 밀려 무수히 구타를 당하여 들것에 실려 온 것이었다.
온 몸에 선혈이 낭자하였고, 특히 왼쪽 눈두덩이는 인민위원장 지씨가 아버지를 들어 거꾸로 문지방에 내리 꽂는 바람에 찢어졌는데, 나는 왼쪽 눈썹께에 또 하나의 커다란 눈이 있는 것처럼 벌겋게 찢어져 살이 너덜 너덜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 생존시에 왼쪽 눈썹 가운데의 길고 커다란 흉터만 보면 어린 시절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집에 와 정신을 차리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할머니더러 어서 빨리 바늘을 가져와 생살을 꿰매라고 연신 고함을 쳤는데,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면서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가 뒤뜰 장독대의 된장 항아리에서 된장을 한 움큼 떠다가 생살 갈라진 상처에 붙이고는 헝겊으로 싸매어 주었다. 머리를 동인 나의 아버지…… 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내던 내 아버지…… 나는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사흘쯤 지나 물치 내무서에서 내무서원이 몸져누운 아버지를 조사할 일이 있다면서 데리고 갔다. 인민위원장 지씨 패거리의 고발로 연행된 것이다.
양양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면회를 다녀온 어머니 말로는 혹독한 고문에 온몸이 퉁퉁 부어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몽둥이로 온 몸을 맞아 전신이 구렁이 감아 놓은 것처럼 얼룩덜룩 무섭고 끔찍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외아들인 아버지는 나의 할머니, 즉 당신 어머니가 놀랠까봐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어머니에게 가서 내가 이렇게 무서운 매를 맞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 신신당부하였다 한다. 할머니가 너무 애통하여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서 한 말이었다.
얼마 뒤 내무서원들과 양양 정치보위부 놈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와 할머니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여러 차례 짓이기며,
“감춰둔 서류 어디 있어! 모두 죽여버리겠어!”
하고 윽박지르면서 위협했다.
그들은 새로 한 집 천정을 마구 뜯어내며 아버지가 썼다는《공산주의의 허구성》,《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사회주의의 비판》등 논문집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난리를 쳤다. 다행히 그 논문과 글들은 어머니가 집 뒤 장독대 근처의 큰 돌 밑에 숨겨 놓아 발각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할머니는 아버지가 쓴 논문과 다른 글들을 모두 찾아서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1945년 8ㆍ15 광복 이후 1950년 6ㆍ25가 발발할 때까지 이북의 통치 방식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시골 우리 동네까지 철저히 행해졌다.
먼저 이북의 위정자들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종교를 탄압했다. ‘종교는 아편이다!’ 이 말은 6ㆍ25 전 이북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귀가 아프도록 들은 말이다. 이렇게 해야 김일성을 살아있는 신으로 온전히 숭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종교도 용납하지 않았고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음으로 친일청산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강조했다.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과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까지 친일파로 몰아세워 숙청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례와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것도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민족을 위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사리사욕을 채우는 타락한 정치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이북 주민들은 갑자기 낮도깨비같이 나타난 공산당 패거리들이 억압적으로 내세우는 그들의 명분(?)을 대놓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김일성과 그를 돕는 자들이 자행했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들은 친일청산이란 명분을 업고 정당화되었다. 친일청산을 비롯한 과거청산의 문제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로 재산의 몰수와 재분배를 실시했는데 대 地主나 잘 사는 사람들은 물론, 인민군에 지원한 집안에 경작지를 나누어 주기 위해 다른 집의 토지를 빼앗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모두 다 잘 살게 해주려고 재산을 몰수해 재분배한다는데 성실하게 일하면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일시에 죄인으로 전락하고,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가난했던 사람들이 일시에 위세를 떨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전통시대의 신분적인 한계로 인해 가난했던 이들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사회적인 구조가 가져다준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기도 했다. 노력하지 않고 남 잘되는 것만 보면 배가 아파하는 이들이 무조건 몰수와 분배만 떠들어대고 있었다.(계속)
이 수기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의 내 생애 일부의 기록입니다. 우리 민족은 日帝로부터 해방이 되어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남북의 분단을 만났고 급기야는 이북의 김일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해괴한 6·25 동란을 겪게 되었던 역사적 아픔이 있습니다.
나는 1950년 6월 25일 이전엔 38선 이북의 공산치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나의 가족은 형언하기도 어려운 슬픈 삶을 겪었습니다. 6·25가 나던 해엔 이산가족이 되었고 6가 난 이후엔 나와 할머니는 동해 중부전선에 남아 공산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방군이 대치하여 공방전을 치르는 와중에서 생명의 위험이 경각에 달린 처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1952년 이후엔 이산가족이었던 나와 할머니는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6·25 때 헤어졌던 가족과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국민 모두가 다 그랬듯이 우리도 쓰라린 피난민 생활을 하였습니다. 내가 겪은 6·25 동란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992년이 지난 언제인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역사 속에서 이미 다 알려진 진실되었던 사실들이 점차로 왜곡되는 방향으로 부풀려 지고, 있지도 않은 일들이 새롭게 기록되어 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6·25 를 생생하게 경험한 많은 이웃들이 당황하게 되었고 나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6·25 동란 때의 기억나는 일들을 상기하여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글을 쓴 목적은 첫째, 우리 국민들 누구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그리고 옳게 찾아서 알아야 하고, 후손들에게는 이를 교육적으로 정확하게 전수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형태의 전쟁도 이 땅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입니다. 셋째,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정신으로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모범된 자세를 앞세워야 되겠다는 바람입니다.
처음 이 글의 시작은 2005년 1월 29일부터 5월 6일까지 내가 조선일보 닷컴의 회원이 되어 블로그에 3개월간 연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연재를 하는 동안에 독자들이 나에게 많은 의견을 주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6·25 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 이야기가 아직도 도처에서 숨겨져 있는데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이 자꾸 소멸되어 가는 현실에서 나와 같은 생생한 수기의 내용이 반드시 책자로 기록되어 후대에 알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독자들의 뜻을 소중하게 받들어 기록되지 못한 나의 기억들을 다시 보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더 보충할 내용을 다듬고 중복된 이야기들을 간추리곤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내용의 서술이 되지를 않아 심히 송구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실을 세상에 알림이 더 소중하다는 일념에서 크게 용기를 내어 이 책자를 내 놓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제작하려는 초기부터 망설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각계에서 많은 분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또 진실 됨을 증거함에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비로소 밝힙니다만 조선일보 닷컴의 운영자님과 관계자님들이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나의 아내와 가족 모두가 하나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글자 한 자 문장 한 구절에 관심을 가져 주었던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감동했던 마음을 소개합니다.
수필가 김두수님의 문장 작성에 대한 세심한 일깨움 및 수기 내용의 검토와 수필가 김용진님, 시조시인 이정오님의 교육적인 바람과 서석용 박사의 우국의 조언에 감사드리며 수원 가톨릭 사진 작가회 한상국님이 동해안 속초에서 강릉, 부산 그리고 거제도까지의 여정을 통하여 우정 어린 촬영 동행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이 책이 나오기 처음부터 나의 부족한 점을 내치기에 앞서 더욱 격려하며 나라사랑의 열정으로 이 책자를 펴내어 나의 뜻을 기려 주신 명문당 김동구 사장님의 따뜻하고 우정 깊은 마음에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표지부터 본문 활자 그리고 사진 배열에 이르기까지 전체 구성을 빈틈없이 이루어 주신 도서출판 팬더북 채희걸 사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전체적인 제작을 주관하여 주신 양승웅 부장님의 배려에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2007년 6월 20.화곡(華谷) 김찬수(金燦洙) 식(識)
차 례
1. 귀향(歸鄕) / 12
2. 인공치하(人共治下) / 14
3. 아버지의 설악산 잠적 / 28
4. 감시 대상 우리 집 / 28
5. 깊은 밤중에 본 아버지 / 30
6. 금강산 수련과 아오지 탄광 / 31
7. 고향에 남은 할머니와 나 / 36
8. 김일성의 기습남침 / 42
9. 양양 군청 철수 이동 / 49
10. B-29 항공기의 강현 역과 철다리 폭파 / 54
11. 낙동강 패잔병 인민군의 퇴각행렬 / 57
12. 1950년 10월 1일―나의 태극기 사랑 / 60
13. 동해 중부전선의 끔찍한 전쟁터 와중에서 / 66
14. 인민군 총사령관 무정 / 71
15. 끊이지 않는 우리 동네의 상흔(傷痕) / 74
16. 인민위원장의 말로 / 79
17. 눈이 많이 온 해 1ㆍ4 후퇴 / 82
18. 설악산 전투 / 87
19. 전쟁 유행병 장티푸스 / 92
20. 소금재 고개 / 95
21. 1951년 최전방 국방군 주둔지 강현면 / 97
22. 양양군 남대천 하류 / 102
23. 비목(碑木) / 109
24. 동해안 삼팔교 / 111
25. 강릉의 피난민 생활 / 113
26. 전방 신병 전투훈련소가 된 복골 / 118
27. 전선야곡(戰線夜曲) / 123
28. 내 고향 진달래 피는 마을 / 127
29. 총기사고 / 132
30. 쌍천(雙川) / 134
31. 아버지의 난중일기 / 144
32. 선영이의 죽음 / 147
33. 거제도 인민군 포로수용소 / 150
34. 포로수용소 폭동과 연초중학교 개교 / 156
35. 재회를 약속한 할머니와의 이별 / 159
36. 부산 거제리 병영의 하우스보이 생활 / 164
37. 장승포 항에서의 아버지와 만남 / 166
38. 피난민 집합지 거제도 연초면 / 170
39. 생이별한 이산가족 / 175
40. 대한민국이 배척하는 마르크스 레닌 사상 / 176
41. 할머니 거제도 도착, 이산가족 상봉 / 179
42. 명견 에쓰와의 만남 / 183
43. 할머니의 발병과 동생 선심이의 사망 / 184
44. 한 많은 내 할머니의 애환(哀歡) / 189
45. 아버지의 가정교육 / 192
46. 절약정신 / 193
47. 가고파 / 197
48. 고현 미군부대 위문 활동 / 200
49. 친구 영희 언니의 애절한 이야기 / 204
50. 기초학업 손실 / 207
51. 학습 불안심리 / 209
52. 상담 심리치료 방식으로 학업 상실감 해소 / 211
53. 우선해야 할 교육풍토 확립 / 213
54. 아버지의 용단 부산으로 이사 결정 / 215
55. 명견 에쓰와의 이별 / 219
56. 자갈치 시장과 청구중학교 / 223
57. 학습 지진아 열등생 / 227
58. 멍드는 동심 / 231
59. 깡패천국 / 234
60. 부산 거인 노장군 / 238
61. 부산 대 화재 / 241
62. 이별의 부산 정거장 / 243
63. 아미동 판자촌 / 244
64. 판잣집 철거 수난 / 249
65. 남동생 웅수 출생 / 252
66. 영도 청학동 후생주택 27호 / 254
67. 내 아버지의 자녀교육(동행) / 258
68. 1955년도(6 5년 뒤) 부산 거리 / 262
69. 최의준 선생 / 266
70. 독립운동가 후예 / 269
71. 휴전반대와 영도다리 난간 / 274
72. 대연동 재한 UN 공원 / 276
73. 영도다리 아래 점보는 집 / 278
74. 상표 없는 밀가루 포대 / 279
75. 장갑송 아저씨의 피난 이야기 / 281
76. 원산 형무소 / 289
77. 친구 김승엽의 피난 이야기 / 292
78. 친구 이영일의 1 후퇴 직후 피난 이야기 / 297
79. 오신혜 선생님 / 300
80. 서부영화 / 309
81. 사춘기 / 312
82. 신문배달 고학생 / 317
83. 부두 노동자 / 322
84. 막내 여동생 선옥이의 출생 / 326
85. 한찬식 선생님 / 327
86. 영도 고갈산 / 331
87. 학창시절 나의 애국심 / 334
88. 좌파괴수 김일성의 종교탄압 / 337
89. 전쟁고아 / 343
90.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 345
후기 / 349
1. 귀향(歸鄕)
나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중복리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높고 수려하며, 앞으로는 푸른 동해바다가 펼쳐져 바라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특히 늦가을이 되어 물치 장거리에서 우리 동네로 올라올 때 설악산 대청봉을 올려다볼라치면, 마을에는 집집마다 감나무 가지에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송암산 너머 저 멀리 우뚝한 대청봉 산마루엔 눈이 하얗게 덮여 동해바다를 장엄히 내려다보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가을과 겨울이 한눈에 보이는 놓치기 아까운 장관이 연출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곳은 나의 선조들과 부모가 태어난 곳이고 선영들이 모셔진 곳이기에 정신적인 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안고 어른들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와 1952년까지 8년간 살면서 끔찍했던 6ㆍ25 동란 전후의 아픈 추억만 가득한 곳일 뿐이다. 태생도 그곳이 아니고, 온전히 성장한 곳도 그곳이 아니다. 지금까지 객지에서만 살았기에 많이 산 곳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서울이 고향이요, 동심이 묻혀 있는 청소년기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시원하고 아름다운 항도 부산이 내 고향이고, 태생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조선조 세종대왕 때 김종서 장군이 육진을 개척 시 진영을 쳤다는 함경북도 종성군 행영면 영리가 나의 고향이고, 사랑하는 내 아내가 자란 내륙의 호반도시 춘천에서 36년 동안이나 행복을 간직하고 오가며 지내고 있으니 이곳 또한 내 고향이랄 수도 있겠다.
1945년 8ㆍ15 해방 이후 그 해 11월, 29세인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정리한 뒤 우리 식구를 데리고 함경북도를 떠나 고향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왔다.
그때 기차에 자리가 없어서 기차 화통이 있는 맨 앞 차량 꼭대기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오는데, 거기도 사람이 빼곡히 들어차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판이었다. 게다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 다리를 오랫동안 깔고 앉은 것이 원인이 되어 고향에 도착한 뒤에 절뚝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치료를 위해 민간요법으로 탄 볏짚재에 오줌을 부어 재운 것을 짓이겨 보리개떡 반죽같이 두툼하게 만들어 아픈 부위에 붙여 놓고서 붓기를 빼곤 했다. 이때 아픈 무릎께가 한동안 몹시 근질근질하고 못 견디게 따끔거렸던 생각이 난다.
함경북도에서 원산 쪽으로 내려올 때 기차가 달리다가 굴이 나타나면 앞에 있는 사람들이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는 기차소리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엎드려!” 하고 외치면 화통의 맨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납죽 엎드려 가며 여러 차례 기차 굴을 빠져 나갔었다.
그러던 중에 원산 근처 덕원 역에서 승객들이 잠시 쉴 때였다. 로스께(소련군인)가 갑자기 귀중품과 사진 등 온갖 소중한 자료가 들어 있는 우리아버지의 커다란 가방을 날치기해 도망간 일이 있었다. 이를 목격한 아버지는 도망가는 로스께를 쫓아가고 나를 업고 있던 할머니는 한참을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큰 소리로 울면서,
“아범이 오지 않는걸 보니 소련군 놈이 필시 총질을 하였을 것이다. 아범이 오지 않으니 내가 살아서 뭣하랴!”
하면서 기차 바퀴에 몸을 던져 죽겠다고 하던 절규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임박해서야 우리 집 全 재산이었던 가방을 잃어버린 채로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알거지 행색이 되어 고향 강현 역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나를 안고, 어머니는 8ㆍ15 해방이 지나 갓 태어난 여동생을 안고, 할머니는 아기 옷가지 몇 개 달랑 손에 들고서 다섯 식구가 지친 모습으로 집도 없는 고향 마을로 향했던 것이다.
뒷날 할머니는 이때를 떠올리면서 두고두고 말하기를,
“예전에는 강현 역에서 우리 집 동네를 오갈 때는 발걸음도 가벼웠었는데, 해방되었다고 기쁜 마음으로 客地에서 고향에 가다가 덕원에서 귀한 물건 들치기 당하여 다 잃어버리고 맨주먹으로 오게 되다니……. 고향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고, 10리도 못 되는 길을 초겨울에 들어서서 우리 텃밭까지 걷는데 그렇게도 멀게 느껴져 보기는 처음이었다.”라고 했다.
고향에 온 우리 가족은 택호가‘반재집’이라는 친척집 뒷방 하나를 빌려 살게 되었다. 38선 이북 공산 치하의 생활은 그렇게 무일푼으로 시작되었다.
2. 인공치하(人共治下)
아버지는 1946년 봄부터 초가을까지 간성에 있는 오호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그 해 가을부터 소련 공산주의 앞잡이 김일성 우상화와 공산정권의 세력 다지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부터 우리 집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개울마을 어느 잔칫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을 ‘인민위원장’인 지씨의 집에 가서 젊은 사람들끼리 사상 논쟁을 벌이다가 공산주의 패들과 싸움이 붙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힘이 모자란 아버지 일행 세 사람, 개울마을 봉근 아저씨와 과수원집 종대 아저씨 등이 숫자가 많은 그들에 밀려 무수히 구타를 당하여 들것에 실려 온 것이었다.
온 몸에 선혈이 낭자하였고, 특히 왼쪽 눈두덩이는 인민위원장 지씨가 아버지를 들어 거꾸로 문지방에 내리 꽂는 바람에 찢어졌는데, 나는 왼쪽 눈썹께에 또 하나의 커다란 눈이 있는 것처럼 벌겋게 찢어져 살이 너덜 너덜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 생존시에 왼쪽 눈썹 가운데의 길고 커다란 흉터만 보면 어린 시절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집에 와 정신을 차리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할머니더러 어서 빨리 바늘을 가져와 생살을 꿰매라고 연신 고함을 쳤는데,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면서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가 뒤뜰 장독대의 된장 항아리에서 된장을 한 움큼 떠다가 생살 갈라진 상처에 붙이고는 헝겊으로 싸매어 주었다. 머리를 동인 나의 아버지…… 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내던 내 아버지…… 나는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사흘쯤 지나 물치 내무서에서 내무서원이 몸져누운 아버지를 조사할 일이 있다면서 데리고 갔다. 인민위원장 지씨 패거리의 고발로 연행된 것이다.
양양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면회를 다녀온 어머니 말로는 혹독한 고문에 온몸이 퉁퉁 부어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몽둥이로 온 몸을 맞아 전신이 구렁이 감아 놓은 것처럼 얼룩덜룩 무섭고 끔찍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외아들인 아버지는 나의 할머니, 즉 당신 어머니가 놀랠까봐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어머니에게 가서 내가 이렇게 무서운 매를 맞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 신신당부하였다 한다. 할머니가 너무 애통하여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서 한 말이었다.
얼마 뒤 내무서원들과 양양 정치보위부 놈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와 할머니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여러 차례 짓이기며,
“감춰둔 서류 어디 있어! 모두 죽여버리겠어!”
하고 윽박지르면서 위협했다.
그들은 새로 한 집 천정을 마구 뜯어내며 아버지가 썼다는《공산주의의 허구성》,《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사회주의의 비판》등 논문집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난리를 쳤다. 다행히 그 논문과 글들은 어머니가 집 뒤 장독대 근처의 큰 돌 밑에 숨겨 놓아 발각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할머니는 아버지가 쓴 논문과 다른 글들을 모두 찾아서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1945년 8ㆍ15 광복 이후 1950년 6ㆍ25가 발발할 때까지 이북의 통치 방식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시골 우리 동네까지 철저히 행해졌다.
먼저 이북의 위정자들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종교를 탄압했다. ‘종교는 아편이다!’ 이 말은 6ㆍ25 전 이북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귀가 아프도록 들은 말이다. 이렇게 해야 김일성을 살아있는 신으로 온전히 숭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종교도 용납하지 않았고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음으로 친일청산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강조했다.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과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까지 친일파로 몰아세워 숙청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례와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것도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민족을 위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사리사욕을 채우는 타락한 정치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이북 주민들은 갑자기 낮도깨비같이 나타난 공산당 패거리들이 억압적으로 내세우는 그들의 명분(?)을 대놓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김일성과 그를 돕는 자들이 자행했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들은 친일청산이란 명분을 업고 정당화되었다. 친일청산을 비롯한 과거청산의 문제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로 재산의 몰수와 재분배를 실시했는데 대 地主나 잘 사는 사람들은 물론, 인민군에 지원한 집안에 경작지를 나누어 주기 위해 다른 집의 토지를 빼앗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모두 다 잘 살게 해주려고 재산을 몰수해 재분배한다는데 성실하게 일하면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일시에 죄인으로 전락하고,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가난했던 사람들이 일시에 위세를 떨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전통시대의 신분적인 한계로 인해 가난했던 이들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사회적인 구조가 가져다준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기도 했다. 노력하지 않고 남 잘되는 것만 보면 배가 아파하는 이들이 무조건 몰수와 분배만 떠들어대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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