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 설악산으로 종적을 감춘 아버지

1. 全국토를 국유화.


이들은 훗날 점차적으로 극렬하게 “북조선 인민의 어버이는 김일성 수령님이다!”라고 외쳐댔다. ‘어버이 수령’이라는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족’의 해체를 앞당겨야만 했던 것이다. 젊은 여성들을 정치 선전도구로 이용해 ‘호주제’를 폐지하고, 자식들이 친부모를 고발하는 행위를 장려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가 서서히 커져 부모나 스승, 그리고 어른을 공손히 대하던 우리의 미풍양속이 붕괴되었다.

여기에 배급제까지 실시하며 全 국토를 국유화하였는데 농지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면서 핍박하였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이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빼앗아 놓고서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니! 그야말로 선량한 농민들을 굶어 죽이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인민군에 자식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경작할 토지와 온갖 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현상으로 가득 찬 사회가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는 ‘인민의 나라’, ‘공산주의’의 실태였던 것이다. 이런 양상은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아버지의 연행과 구금 소식에 온 동네 친척들은 야단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속마음으로 두 패로 갈라진 것이다. 친척들을 중심으로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우리 門中에서 아버지의 형님뻘 되는 종순 아저씨가 적극 나서서 구명운동을 하였고, 아버지는 달포 반이 지나서야 풀려났다. 집안 아저씨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몸을 숨길 것을 제안했고,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동네에서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 종적을 감추었다. 외갓집 동네인 설악동 상도문을 지나 그 윗동네 몇 집이 살지 않는 핏골 마을 위 설악산 신흥사로 몸을 피한 것이다. 이 때부터 1952년까지 나는 두세 번밖에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1949년 여름이 조금 지나 우리 동네와 이웃 동네에서는 갑자기 우리보다 나이 많은 형들과 젊은 아저씨들이 모두 인민군에 입대를 하였다. 어른들 말이 “농사짓는 젊은이들이 모두 다 일시에 군대를 가니 마을이 둘러빠진 것처럼 여자들만 남았다.”라고도 했고, 또 “근본도 모르는 젊은 조선노동당, 공산당 애놈의 새끼들이 위아래도 없이 설치는데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다.”라고도 하였다.

동네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을 비롯해 마을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작은댁 아재들이 인민군에 입대하던 1947년, 작은댁 할머니와 나의 할머니는 위험할 때 군대 간다고 몇날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아재들이 입대한 후 작은댁 할머니는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이북 전체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심지어 나보다 예닐곱 살 많은 어린 형들도 모두 군대로 끌려갔다. 6ㆍ25가 일어난 뒤의 이야기이지만 인민군대가 된 어린 병사들이 자신의 키만큼 큰 총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 해 아주 늦은 가을 즈음인가 해서 우리 마을엔 또 커다란 사건이 하나 터졌다. 한밤중 자정이 넘어서 개울말에서 갑자기 여러 차례 총성이 콩 볶듯 난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양짓말 사람들이 모두 방안에서 궁금해 하고 있는데 얼마간 있다가 갑자기 우리 집 툇마루 밑에서 나직하게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양짓말

“형님, 저예요! 저 종익이에요! 지금 쫓기고 있으니 어서 문을 열고 집안에 숨겨 주세요!”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 어린 둘째 여동생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창호지 문틈으로 내다보니 총을 든 사람 여럿이 마당 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었다. 사태를 짐작하신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문 밖을 향하여 나직하게 말했다.

“종익 서방님, 찬수 애비가 어디로 갔는지 집에 없고, 여기는 어머니와 애들과 저만 있는데 지금 총소리가 콩 볶듯 나니 여기는 아주 위험합니다. 또 우리도 지금 지목을 받고 있으니 깊은 산속으로 어서 피하세요.”

그러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잠시 조용하더니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공포에 떨었다. 종익 아저씨 일행들이 사라지고 조금 있으려니 총을 든 내무서원 여럿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문을 열라고 고함을 치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문을 열었고,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방안 구석구석을 모두 뒤졌다. 장독대부터 심지어 부엌 아궁이 속까지 속속들이 뒤진 다음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하고는 양짓말 여러 집을 똑 같은 방법으로 다 뒤졌다.



2. 말뼉다구 라는 별명을 가진 종익 아저씨.



고요한 한밤중에 총성이 있은 연후에 내무서원들이 “나와라!”, “저기 숨었을 게다!” 어쩌고 하면서 총을 들고 이집 저집 드나들며 설치는 바람에 온 동네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고는 새벽까지 청룡산 뒤쪽으로 쫓아가면서 총질을 해대는데 온 동네 사람들의 간이 콩알만 해질 지경이었다.

이튿날, 겁에 질렸던 마을 사람들은 다시 일하러 나갔고, 집안 아저씨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야!” 하면서 종익 아저씨와 그 일행들의 용맹스러움을 귓속말로 쑥덕이면서 영웅시하였다.

이때의 사건은 우리 마을에서 유명한 얘깃거리 중 하나이다. 양양 우리 집안 가운데 개울마을 종면 아저씨의 동생 되는 "말뼉다구"라는 별명을 가진 종익 아저씨가 남조선으로 넘어갔다가, 호림부대 첩보대의 중대장이 되어 38 이북 고향 일대의 군사 동정을 정탐하려고 동료 여럿과 함께 잠입하여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을 인민위원장 패거리가 이 사실을 눈치 채고 물치에 있는 내무서에 신고를 하였다. 급히 총을 들고 온 내무서원들이 우리 동네로 들이닥쳐 아저씨와 일행이 한밤중에 달아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먼 뒷날에서야 안 일이지만 아저씨 일행은 우리 집 뒤 ‘청룡언덕’ 허리를 타고 ‘넘은들’(소금재 고개 너머 벌판. 넓은들이라고도 한다)을 지나 상도문 위(지금의 설악동 성당 설악산 쪽 마을) 핏골을 지나 능선을 치달아 멀리 ‘권금성’ 건너편 달마봉 아랫길을 넘어서 금강산까지 잠입하여 움직였다고 했다. 아저씨는 젊었을 때부터 배짱이 대단했고 눈빛이 샛별처럼 빛났으며, 몸이 날래기가 비호와 같았다고 나의 부모가 말했다.

그 이후 6ㆍ25가 발발한 해 10월에 국군이 진격해 우리 고향에 들어왔을 때 함께 들어온 아저씨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허리에 권총을 차고서는 대뜸 한다는 말이 내 아버지와 우리 집을 지칭해,

“그 형님이 이북 원산으로 올라갔다구요? 그러면 그렇지 빨갱이구만! 아, 내가 그때 밤중에 도망해 그 형님 집엘 가서 몸을 좀 숨겨달라고 하니까 문도 열어주지 않더니만 과연 빨갱이구만! 그 쌍년 지금 내 앞에 있었으면 이 권총으로 쏴 죽였을 거야!”

하며 아저씨한테는 형수가 되는 나의 어머니를 지칭해 종익 아저씨가 함부로 말하는 것이었다. 할머니와 내 면전에서 들으라고 함부로 떠들어 무안을 주었는데 할머니와 나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죄인처럼 가만히 있었다.

먼 훗날 1967년인가, 종익 아저씨가 6ㆍ25 사변 전 남북 정세 기록 책자를 편찬하기 위해 자료 수집차 서울로 올라왔다가 아버지를 만나러 서울 성북동 우리 집엘 다녀간 적이 있었다. 대화 도중 나의 아버지가 그때까지 참고 있던 그 당시 상황을 말하면서

“그때 자네 형수가 자네에게 문을 열고 숨겨주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살아났지 그놈들이 조금 있다가 들이닥쳐 온 동네와 우리 집을 이 잡듯이 뒤질 때 자네가 잡혔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자네도 죽었고 마을사람 전체가 어떻게 됐겠느냐 말이야! 다행이 먼 곳으로 피했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하며 호되게 야단을 쳤고 종익 아저씨도 6ㆍ25때 젊은 기백으로 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한다고 해서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6ㆍ25 이후부터 최근까지도 그 아저씨를 집안 어른이기에 함부로는 못 대했지만 속으로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어서 데면데면 하게 대했다. 아저씨도 올해 여든셋 되었고, 오랜 동안 강릉에서 사는데 얼마 전 갑자기 병약해져서 외롭게 투병 중이란 얘기를 전해 듣고는 그로부터 연락을 취하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드리곤 한다.


3. 아버지의 설악산 잠적



당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내세운 38 이북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며 김일성만 숭배하라는 시대여서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악산 신흥사엔 많은 스님들이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다만 얼굴이 넓적스레하고 눈에 눈곱이 더께더께 낀 나이 많은 절 지킴이 스님 한 사람만 있었는데 이름을 한흥운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그 스님의 이름이 만해 한용운 선생과 비슷하여 한용운 선생의 동생이 아닌가 하였는데 이름이 비슷한 것뿐이었다.



한용운 선생과 우리 집안의 인연은 내 외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해주 오씨이고 함자가 진(振)자 환(煥)자를 쓰는 어른이다. 사찰 같은 큰 건물을 짓는 상도문(지금의 속초시 설악동)의 대목(大木)이고, 소시 적엔 인제의 용대리에서 살다가 다시 고향인 도문으로 왔는데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 신흥사, 낙산사, 홍련암 등 우리지방 근처엔 외할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형 사찰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해 선생보다 6살이 아래였는데 호형호제 하는 사이라 하였고, 봄철에 백담사 절의 밭에 옥수수를 심어 놓고 여름이 조금 지나 일이 없을 때는 늘민령(저항령의 별칭)을 넘어 옥수수를 한 지게씩 얻어 수북이 담아 지게에 지고 왔다고 한다.





어머니의 소싯적 기억 속에도 만해 선생이 집에 들르던 정경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가 1962년에 우연히 서울 만해 선생 댁 이웃에 이사를 가서 그분의 딸과 병약한 만해 선생 부인을 처음 만나 나의 어머니와 만해 선생의 딸이 옛날 얘기를 하면서 친하게 지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있지 않아 만해 선생 부인은 그 곳 성북동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신흥사에 숨어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초에 탁발 나갔던 스님이 허겁지겁 돌아와 지금 밖의 공기가 수상하니 피하라고 하여 설악산 울산바위를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흔들바위 옆에 있는 계조암으로 또 피신하였다. 주로 그곳에서 나무껍질, 산나물, 풀뿌리 등으로 생식을 하면서 1947년부터 1950년 1월 하순까지 있었으니 참으로 오랜 동안 숨어 지낸 시절이었다.



가끔 어머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 만나보면 아버지 모습은 머리는 어깨 너머로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수염을 깎지 않아 흡사 산 귀신 으시미(이무기?) 같아 아주 우스운 꼴이라 하였다. 이때 아버지는 설악산 일대의 모든 역사와 일화들을 기록해 두었다.



아버지가 안 보이는 사실을 이튿날 아침에야 안 나는 아버지가 어디 갔느냐고 자꾸 물었는데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때마다 어린 나를 보고 아버지는 저 멀리 돈 벌러 갔는데 이담에 돈 많이 벌어 올 거라고만 하였다. 아버지의 행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어머니는 한밤중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설악산 깊은 산골에 식량을 준비하여 아버지에게 비밀리에 가져다주고는 밤새도록 왕복 40리 길도 넘는 거리를 목숨을 걸고 다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948년 봄 4월 회룡인민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할머니의 손만 잡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그 때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학교 교실 쪽으로 다가가 교실 안을 신기한 장소로 알고 호기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여기가 어떤 곳인가’ 하는 생각에 유심히 여러 차례 들여다보던 어린 시절의 느낌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지난 30여 년간 교직생활을 하면서 항상 학교를 사랑하고,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게 만들어준 ‘학교’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47년 우리 집의 얼마 되지 않는 농경지는 모두 김일성 집단에게 몰수당하였다. 인민군에 입대한 아버지의 4촌형제 종각, 종숙 두 아재의 어머니(나에게는 작은댁 할머니)는 밭일도 할 줄 모르는 분이었는데 우리 텃밭은 작은집의 소유가 된 것이었다. 우리 집은 농사지을 손바닥만한 땅도 그나마 없는 완전한 거지꼴이 되었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 때 작은댁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집에 땅이 공짜로 생긴 일을 두고 “에이그! 세월이야 참 잘 됐지 뭐유.”라고 말하여 나의 할머니에게 평생의 한을 심어 주었던 일도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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