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선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진행중이다. 북한은 지난 20년간 크게 변했다. 이는 긴 혁명의 과정이다. 市場혁명이나 反봉건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100% 배급체제에 의존하던 북한에서 지금 약 80%의 주민들이 시장에서 돈을 벌어 먹고 살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가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20%, 시장세력은 80%의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향력이 정치권력으로 바뀌면 김정일 정권은 뒤집어진다. 사회적 변화는 정치적 변화를 몰고 온다.
사회 밑바닥에 일어난 시장의 확대와 맞물려 북한정권 안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2008년 여름 김정일이 重病(중병)에 걸린 뒤 북한정권의 사령탑에 고장이 생긴 것이다. 1인 전체주의 체제에서 지도자는 바쁘다. 중요한 결정을 혼자서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밤에 파티도 많이 열지만 새벽까지 결재를 해야 한다. 배우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의 창에 커튼을 쳐도 되는가까지 김정일이 결정해주어야 한다. 버스에 커튼을 쳐선 안 된다는 지시가 내려가 있는데 배우가 옷을 갈아 입을 때 창을 가리기 위하여 커튼을 치려면 지도자 동지의 결재가 나야 한다.
김정일이 사실상 북한정권을 경영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북한노동당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김정일이 제도적 운영을 하지 않고 1인 결정으로 밀고 나가니 최고 지도기관인 당의 정치국이 껍데기로 변했다. 이렇게 되니 정책이 실패한 책임도 黨이 아니라 김정일한테 돌아가게 되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은 이후 김정일이 하는 게 제대로 된 경우는 햇볕정책 역이용 공작뿐이었다.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나아지지 않았다. 수백 만이 굶어죽었다. 북한주민들과 생각 있는 당원들 마음속엔 김정일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자라고 있다. 2008년 李明博 정부 등장 이후엔 남한을 과거처럼 뜯어먹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때 김정일이 重病에 걸린 것이다. 1주일에 정상적으로 집무할 수 있는 날은 이틀 정도일 것이다. 과거처럼 많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김정일이 하던 일을 누가 대신하고 있는가, 이게 궁금하다.
김정일의 發病(발병)과 함께 셋째 아들 김정은이 후계자로 擧論(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언론과 정보기관에서 김정은 후계자설을 흘리거나 다루니 세계 언론도 따라왔다. 북한 내부에서 이뤄지는 전화 통화 등을 감청해보면 權力기관에서 김정은의 영향력이 感知(감지)된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주민들에게 김정은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름도 모르고, 사진도 공개된 것이 없다.
김정일 우상화는 김정일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비밀로 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남한에선 다 아는 김정일의 결혼 前歷(전력)과 아들 이야기가 북한에선 1급 비밀이다. 이번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공개적으로 등장하면 남한사람들보다 북한사람들이 더 놀랄 것이다. 김정일로서도 김정은을 공개적으로 등장시키는 일은 일생일대의 도박이다.
김정일이 과연 자신이 죽은 이후의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느냐에 대하여는 엇갈리는 분석이 오고간다. 來世(내세)를 믿지 않는 독재자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의 安全에만 신경을 쓴다는 주장이 있다. 스탈린, 히틀러가 이런 경우였다. 스페인의 프랑코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는데, 그는 자신의 死後에 王政을 복구시켜서 정권을 넘기는 준비작업을 치밀하게 하였다.
후계자가 확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김정일이 죽으면 이번에 再建(재건)되는 정치국이 권력을 승계하게 될 것이다. 정치국 안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1인 독재자가 등장하든지 內戰 상태로 빠져들 수도 있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內定한 상태에서 김정일이 죽어도 권력투쟁은 피할 수 없다.
스탈린, 毛澤東(모택동) 같은 神格化(신격화)된 지도자가 죽은 뒤엔 집권층 안에서 권력투쟁이 생긴다. 스탈린이 죽은 직후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가 맨 먼저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흐루시초프가 3년 안으로 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를 젖히고 최강자로 등장,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다.
毛澤東이 죽자 6개월 안에 그 측근들이 제거되고 그의 후계자 화국봉은 허수아비가 되더니 1년 후 鄧小平(등소평)이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김정일의 죽음은 북한주민들과 노동당을 옥죄고 있던 공포의 사슬이 풀리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북한주민들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데 더 과감해질 것이다. 노동당 내부에서도 욕구분출이 일어날 것이다. 사회와 노동당의 변화가 권력투쟁과 맞물려 돌아가면 북한체제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이때는 군대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북한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市場이다. 市場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단련시키고, 교육시킨다. 市場에서 돈을 벌려면 외부 정보를 많이 알아야 한다. 시장을 통하여 私有(사유)재산이 축적된다. 시장에서 번 돈으로 권력기관을 매수하여 경제적 이득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돈이 독재체제의 통제력을 상당히 완화시킨다. 북한의 市場은 또 남한의 영향력이 들어가는 창구이다. 북한의 시장은 절대로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市場은 인민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죽음을 딛고 선 것이다. 피로써 산 것이 북한 시장이다. 그만큼 생존력이 강할 것이다.
市場의 확대, 김정일 권력의 축소와 분열, 여기에 남한의 힘이 작용하면 북한정권은 과거와 같은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지고 사회적으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북한인민들의 봉기, 노동당 내부의 개혁 움직임, 군대의 내분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북한체제 전체가 유동화 된다. 얼음이 풀리고 녹고 조각나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그 속성이 金家王朝이다. 조선조보다 더 낙후된 봉건체제이다. 市場의 확대와 노동당 권력의 약화는 反봉건 혁명의 진행을 뜻한다.
한국은 이 혁명적 변화를 자유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통일의 기회가 오면 萬難(만란)을 무릅쓰고 낚아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全국민의 30%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여론으론 통일의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 적극적인 자유통일 세력이 여론조사에서 70%는 되어야 한국이 통일의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지도층은, 통일의 당위성뿐 아니라 통일이 가져다 줄 구체적인 이득을 국민들에게 설명하여 통일공포증을 해소시켜주어야 한다.
남한의 여론이 통일지향으로 바뀌고 북한주민들의 여론 역시 남한동포와 합치겠다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남북한 주민들이 협력하여 김정일 세력을 응징해야 한다. 자유통일은 대한민국이 북한정권에 확실하게 이기는 것을 뜻한다. 북한정권을 主導(주도)하였던 세력을 정치적으로 제거하여야 통일이 되는 것이지 이들과 타협하고 이 민족반역 세력을 溫存(온존)시켜서 통일할 순 없다.
김정일 정권의 종말은 남한의 從北세력을 恐慌(공황)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의지하던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從北세력은 變身(변신)을 꾀할 것이다. 이들은 남한 내에 통일공포증을 확산시킬 것이다. 한편으론 통일된 한국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올 것이다. 통일에 대한 중국의 동의를 받기 위하여 韓美동맹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 북한의 核과 주한미군을 맞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모두 '中立國化' 주장으로 수렴될 것이다. 중국, 북한의 김정일 잔존세력, 남한의 從北세력이 ‘한미동맹 해체에 의한 통일한국의 중립국화'를 부르짖고 나온다면 정통보수 세력은 ’韓美동맹과 韓日우호 관계의 강화’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한미동맹을 해체한 代價(대가)로 얻는 통일은 매우 위험하다. 韓美동맹이란 생명줄을 놓은 한국은 중립국이란 명분하에서 급속히 親中化할 것이고, 김정일 세력은 親中反美세력으로 변신, 국가를 분열시키려 들 것이다. 韓美동맹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통일할 바엔 통일을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인 한국은 중립국으로는 國益(국익)을 지킬 수 없다. 주변 강대국의 善意(선의)에 의존하자는 것이 중립국論이다. 한국이 중립국이 된 뒤에도 안정을 지켜내려면 상비군이 200만, 국방비는 국내총생산의 10%는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처럼.
통일의 찬스는 왔는데 한국은 국민교양의 不實(부실)과 國家엘리트층의 약화로 기회를 놓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다. 한글專用과 漢字말살은 국민교양의 기초인 韓國語를 파괴하고 左翼得勢(좌익득세)의 토양을 만들고 있다. 엘리트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부족하고 鬪志(투지)가 약하다. 이는 풍요 때문이다. 고난은 인간정신을 강하게 하고 풍요는 약하게 한다. 한국은 가난과의 싸움에선 이겼으나 풍요와의 싸움에선 지고 있다. 통일과정에서 위기가 생겨도 이것이 국민들을 단련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오히려 藥이 될 것이다. 모험을 두려워하면 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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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후계자 확정'이란 과장
언론의 예상과는 반대로 정치국 위원에도, 조직비서에도 뽑히지 않았다.
趙甲濟
북한 중앙통신은 “조선노동당 대표자회가 28일 김정일 동지께서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됐다”면서 “김정일 동지를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하는 추대사를 김영남이 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의 참석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통신은 또 “黨 대표자회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지도기관을 선거하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의 2010년 9월 전원회의 결정 내용이 통보됐으며, 김영남이 폐회사를 했다”고 했다. 黨 대표자회는 하루만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
노동당의 최고 지도기관인 黨 정치국 상무위원에는 김정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영림 내각 총리,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이영호 軍 총참모장 5명이 뽑혔다.
김정은과 함께 ‘군 대장’ 칭호를 받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당 경공업부장)는 黨 정치국 위원에 임명됐고,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당 행정부장 겸임)은 黨 정치국 후보위원과 중앙군사위 위원이 됐다.
정치국 위원으로는 김정일 위원장 등 17명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는 장성택 외에 최룡해 등 15명이 뽑혔다. 이영호는 정치국 상무위원과 함께 黨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정치국 위원 등의 요직을 여러 개 차지했다.
모두 4명이던 비서국 비서 중에는 김기남, 최태복만 재임명되고, 최룡해 전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를 비롯해 문경덕, 박도춘, 김영일, 김양건, 김평해, 태종수, 홍석형까지 8명이 새로 비서로 임명됐으나, 누가 어떤 분야 업무를 전담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 부장으로는 기존의 장성택, 리영수, 홍석형, 김경희, 오일정, 김양건, 김정임, 채희정, 태종수 등이 건재한 가운데 김기남 비서와 김평해, 주규창, 최희정이 새로 선임됐다.
김정일이 여동생을 남편 장성택보다 높은 자리에 임명한 것이 눈에 뜨인다. 피붙이밖에 믿을 게 없다는 생각인 듯하다.
한국언론은 김정은이 정치국 상무위원이나 黨 조직비서를 맡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黨 중앙군사위 副위원장에 그쳤다. 그는 우선 군대 안에서 實權(실권)을 구축하는 기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 것이지 후계자로 확정되는 것은 자신의 實力과 내외의 환경에 좌우될 것이다. 한국언론이 '김정일-김정은 공동정권 출범'이라고 표기한 것은 과장이다. '후계자 공식화'도 아니다. '후계자 구축 본격화'란 표현이 맞을 것이다.
김정일은 1960년대에 후계자 수업을 시작, 1974년에 후계자로 확정된 뒤, 그 10년 뒤부터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라 불릴 만큼 實權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후반기에는 김정일-김일성 공동정권이라고 불릴 정도로 김일성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앞으로 북한권력층 안에서 내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고 김정은이 자신의 權力을 구축하려는 과정이 사회적 동요와 맞물린다면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빚어질 것이다. 이런 流動的(유동적) 시기를 김정은이 버티어낼지, 아니면 권력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몰락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의 언론이나 정부가 북한노동당 선전선동부보다 앞서 나가면서 '김정은 후계자 확정'이라고 기정사실화할 필요는 없다. 이는 김정은의 세습노력을 도와주는 일이 된다. 한국의 言論과 정부가 全力을 다하여 북한정권을 흔들어 김정은 세습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게 자유통일을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
북한정권은 아직도 김정은이 누구인지를 당당하게 노동당원들과 주민들에게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주민 다수는 남한사람들보다 김정은에 대하여 더 모른다. 후계자로 공식화되었다는 사람이 주민들에게 비밀로 붙여졌다는 게 말이 되는가?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후계자로 확정되려면 김정일의 후원에다가 김정은의 實力이 결합되어야 한다. 김정일의 건강 악화 때문에 김정은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 神格化(신격화)된 독재자가 사망한 이후 경험 없는 아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매우 어렵다. 과거 국제 공산주의 역사를 보면 성공확률이 매무 낮은 일이다.
黨 대표자회가 생중계되지 않은 것은 김정일이 참석하였으나 건강이 동영상을 내보낼 정도가 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김정은이 김정일 생존시 후계자로 확정되는 날은 그가 노당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나 조직 비서로 임명될 때이다. 그날이 올지 말지는 대한민국에 달렸다.
*한편,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김정은의 등장은) 북한 내 권력승계 절차 개시를 확인시키는 것이지만, 3대 권력세습의 성공 여부는 미지수”라고 분석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 재단 소장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김정은의 노동당 고위직 등 선임에 대해 “권력 승계는 아니며, 단지 승계절차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리는 첫 공개적인 조짐”이라고 말했다. 플레이크 소장은 “김정일은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으로 재선임되고, 여전히 국방위원장”이라며 “그가 살아 있는 한 김정일이 통치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북한의 사람들과 제도들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북한에 있는 사람을 포함해 그 누구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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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세습 시도'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나?
화폐개혁을 실패로 몰고갔던 市場세력과 역사의 大勢가 또 다시 김정일을 大敗시킬 것이다.
趙甲濟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J.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大作에서 文明(민족과 국가와 문화와 사회)의 興亡을 挑戰과 應戰의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어느 文明이 도전을 극복하면 새로운 차원의 발전을 하고 또 다른 挑戰에 직면한다. 이 도전을 물리치면 또 한 단계 더 발전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 어느 순간 挑戰에 실패하는 경우가 생긴다. 再도전한다. 다시 실패한다. 세 번째, 네 번째 도전에서도 실패한다. 이렇게 되면 문명의 衰亡이 시작된다. 그는 이 과정을 ‘大敗(rout)-반격(rally)-大敗-반격-大敗-반격-大敗’의 공식으로 설명하였다. 3.5 박자의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즉 세 번 반격하여 그때마다 일시적으로 쇠퇴를 막지만 결국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물론 2.5, 4.5 박자도 있을 수 있다.
1. 북한은 언제 처음으로 挑戰에 실패하였던가? 1970년대 후반이다.
북한은 1971년부터 신6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면서 서방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자본도입을 시도하였다. 북한은 1970년에 서방으로부터 30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는데 72년부터는 서방선진국 차관이 공산권을 앞지르게 되었다. 1973년의 경우 서방차관이 3억7500만 달러, 소련차관이 1억900만에 달러였다. 북한은 대외 무역의 확대도 꾀하였다. 그러나 수입증가로 무역수지의 赤字 폭이 늘어나면서 1975년부터는 外債 상환이 늦어지게 되었고 76년부터는 외국자본을 거의 끌어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북한 최초의 對外 개방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남한과의 경제개발 마라톤에서 隔差는 더욱 넓어져 갔다. 1966∼70년 사이 남한은 10.4%, 북한은 5.8%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1971∼75년 사이엔 남한이 연평균 9.7%, 북한은 2.3%에 그쳤다.
북한의 1970년대식 대외개방시도가 실패한 것은 외국기술과 자본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내부 체질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에 金日成은 金正日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여러 가지 무리를 범했다. 金日成은 金正日을 위해서 黨과 軍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金正日은 金日成을 위한 神格化 작업을 지휘함으로써 父子간에 북한체제를 경직화시키는 相乘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주체사상의 經典化, 유일체계의 확립, 중국 문화대혁명시의 홍위병을 본 딴 金正日직속의 3대 혁명소조활동 등등으로 체제의 창의성과 자율성, 그리고 신축성을 말살하였다. 국가발전 단계상 대중의 창의와 자율을 촉진하고 국제교류를 확대해야 할 시점에서 金日成은 주체사상과 세습체제로써 북한의 역사적 진행방향을 거꾸로 돌려놓고 말았다. 역사발전의 흐름을 탄 남한과의 격차는 1970년대에 결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발전도상에서 도전은 늘 있는 법이다. 국가의 흥망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방식의 결정에 지도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비서실장을 9년간 지낸 金正濂씨는 이렇게 말했다.
“朴대통령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사색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在任時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거듭되는 도전을 깊은 사색에서부터 나오는 면밀한 계획과 무서운 추진력으로 하나하나 헤쳐가면서 나라를 이끌고 갔습니다.”
1970년대에 남한은 발전했지만 朴대통령의 고민은 더 깊어졌고, 북한은 침체했지만 金日成은 우상화 운동에 의해 더 즐거워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남북한 격차를 있게 한 두 지도자의 차이점이란 얘기다.
1970년대의 10년간 북한의 군사비 지출은 1.5배가 늘었는데 남한은 2.4배나 늘었다. 1976년부터 남한의 군사비 지출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 1인당 GNP가 북한을 앞선 지 7년 뒤의 일이었다. 북한은 1974년부터 인민군에 대한 白米지급의 관례를 수정해 옥수수를 섞어 주기 시작하였다. 건설 공사장에 現役군인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경제 성장의 둔화는 서서히 북한의 군사력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조해진 북한정권은 核개발이란 또 다른 자충수를 생각하게 된다.
2. 1978년부터 중국의 실력자 鄧小平은 개혁 개방 정책을 펼 때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같이 가자고 설득하였다. 새로운 외부 환경의 도전에 북한을 살릴 수 있는 應戰이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식 개혁 개방의 길이었다. 김일성 김정일은 중국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같은 시기 새로운 도전이 한국으로부터 왔다. 全斗煥 정부가 88 서울 올림픽 유치권을 따낸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정권은 여기에 응전하였다. 최악의 방법으로. 아웅산 테러, 김포공항 테러, 김현희-김승일에 의한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을 일으켜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犯人이 잡히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올림픽에 대항, 유치한 게 89년 세계청년 祝典이었다. 이 준비에 약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는 바람에 경제는 더욱 멍들었다. 북한은 두 번째 應戰에도 실패하였다.
3. 북한정권에 대한 세 번째 도전은 1989~91년의 소련-東歐공산권 붕괴와 이를 활용한 盧泰愚 정부의 북방외교였다. 북한정권은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修交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김일성-김정일은 이 위기에 核개발로 應戰하였다. 이 應戰은 일시적으로 성공하였다. 1994년 미국은 북한정권과 제네바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군사력으로 북한체제를 무너뜨리거나 核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한 셈이다.
4. 북한정권에 대한 네 번째 도전은 1994년 김일성의 죽음과 그 직후의 大飢僅이었다. 김정일은 체제개혁을 거부하고 버티기式 應戰을 하였다. 그 결과로 정권은 건졌으나 수백 만 명이 굶어죽었다.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市場을 만들었다. 이 市場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거대한 ‘市場세력’이 생기고 이들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아래로부터 허물면서 정권의 장악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5. 북한정권에 대한 다섯 번째 挑戰은 好材이고 기회였다. 한국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김정일은 햇볕정책 逆利用 공작으로 應戰하였다. 10년간 약100억 달러의 金品을 뜯어갔다. 核실험도 성공시켰다. 한국에 거대한 친북세력을 만들어냈다.
6. 김정일의 햇볕정책 逆利用 공작은 그러나 한국 보수층의 應戰을 불렀다. 각성한 보수층이 2007년 大選, 2008년 總選에서 친북세력을 정권으로부터 몰아냈다. 새로 등장한 李明博 정부는 對北퍼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런 가운데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북한주민들의 市場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7. 작년 11월 김정일은 市場세력의 확산이란 도전에 화폐개혁으로 應戰하였다. 市場세력이 반발, 개혁은 실패하고 책임자는 희생양이 되었다. 김정일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자 김정일은 黨 대표자 대회로 應戰하였다. 1인 지배로 망가진 黨의 지휘부를 再建하고 셋째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첫 발걸음을 떼었다.
8. 이 應戰(당의 재건과 후계체제 구축 시도)은 성공할 것인가? 토인비는 한번 기울기 시작한 사회는 영웅적 노력에 의하여서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1970년대 이후 북한정권의 應戰은 거의 모두 실패하였다. 햇볕정책 역이용 공작처럼 일시적으로 성공적인 듯 보였던 것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붕괴되는 사회에서 應戰은 일시적 성공밖에 거둘 수 없다고 한다. 화폐개혁을 실패하게 만든 市場세력이 김정은 세습 체제 시도를 좌절시키는 원동력이 될지 모른다.
체제가 흔들리는 가운데 김정은을 성급하게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은 權力투쟁을 유발할 것이다. 김정일의 건강이 좋지 않고, 김정은의 권위가 全無하고, 市場세력이 세습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민간 부분이 자원을 동원, 김정은 반대세력을 지원하면 權力갈등은 더욱 노골화될 것이다. 權力갈등의 와중에 김정일이 죽는다면 流血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정권은 1953년에 끝난 스탈린 체제가 57년 동안 延命하고 있는 경우이다. 스탈린이 죽었을 때 소련에서 일어났던 변화가 지금부터 북한에서 압축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소련에선 스탈린 死後 강제수용소가 폐지되고, 流血숙청과 학살이 중단되었으며, 스탈린의 하수인 베리아는 체포 처형되었다.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市場세력의 강화, 김정일 권력의 약화, 지배층내의 권력투쟁, 외부의 영향력 증대는 그러나 한 방향으로 수렴될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 체제의 붕괴, 對南혁명 노선의 포기, 경제적 실용정책의 추진 등이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 一族의 생존을 보장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김일성-김정일에 의하여 목숨을 빼앗긴 700만 명의 가족들이 복수를 요구할 것이고 寃魂들의 저주는 一族에게 쏟아질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가장 무서운 힘은 복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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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역사의 창조자인가, 역사의 도망자인가?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趙甲濟
역사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역사적 사명은 ‘한반도의 守舊반동세력을 제거하고 자유통일을 이룩하여 7000만 자유인이 一流국가를 건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역사발전의 결정적 걸림돌인 守舊반동세력의 本山 김정일 정권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제 자유통일의 기회가 왔다. 김정일 정권은 작년의 무모한 화폐개혁으로 북한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결국 후퇴하더니 올해는 천안함 爆沈을 저질러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었다. 중국의 지원도 한계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 서둘러 3代 세습체제를 세우려 하나 이는 권력투쟁을 부를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헤어날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자유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이요, 의무이며, 大勢이다. 대한민국 헌법 1, 3, 4조는 영토의 일부인 북한지역을 수복하여 한반도 전체에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자유통일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이는 짐승보다 못한 민족반역 세력을 제거하고, 짐승처럼 사는 대한민국 國籍의 북한주민들을 구출하는 일로서 우리의 인도주의적 의무이며 '인간존중과 행복추구'를 향하여 나아가는 역사의 大勢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자유의 방파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저력을 살려 이젠 '자유의 파도'가 되어야 한다. '자유의 파도'로써 평양의 민족반역자들을 쓸어버리자!
우리의 눈앞에서 손짓 하는 자유통일의 기회를 살릴 것인가, 놓칠 것인가. 國力은 충분하다. 문제는 정부와 국민의 마음이다. 정부가 철학과 戰略을 가졌는가, 국민들은 용기와 희생정신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다.
정부는 從北세력이 퍼뜨리는 통일공포증을 누를 수 있는 통일 大戰略을 제시하여 국민들 속에서 통일의 熱情을 조직해야 한다. 자유통일의 역사적, 헌법적, 도덕적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통일이 가져오는 민족적 利得이 통일비용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야 한다. 통일은 한반도의 모순을 해소하고 국내외의 제반 문제점을 타파할 수 있는 기회이다. 북한지역을 수복한 다음엔 여기에 無에서 有를 만들 듯이 남한보다 더욱 발전된 모습의 新天地를 건설할 수 있다. ‘북한 프로젝트’는 많은 일자리와 투자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통일은 남한의 고질적인 이념, 지역, 계층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통일은 한국인을 오랫동안 짓눌렀던 강박관념과 피해의식을 벗겨줄 것이다.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一流국가로 달려가는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통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두려워하면 재앙이 될 것이고, 즐겁게 이 역사적 宿命을 받아들이면 발전의 動力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축적된 國力은 통일과정의 부작용을 소화할 수 있다. 우리가 중심을 잡으면 일본도, 국제사회도 통일비용의 상당부분을 댈 것이다.
놓칠 수 없는 역사적 好機를 맞아 통일의 文法을 바꿔야 한다. 우리, 즉 대한민국은 통일의 主語이고 북한은 목적어가 되어야 한다. ‘언제, 어떻게 통일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 어떻게 북한을 통일할 것이냐’이다. 통일主導세력은 우리일 수밖에 없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확고하게 서서, 韓美동맹과 韓日우호관계를 강화하고, 중국과 한반도의 오랜 역사적 親善관계를 복원하는 길인 통일로 매진할 때 방해할 세력은 없다. 통일된 한국은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 전체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되고, 자유롭고, 번영하고, 강력한 한반도'는 東北亞 번영의 안전판이다.
한국인은 가장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가장 비열한 짓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같이 맞았다. 용기와 희생정신, 그리고 정확한 현실인식만 가지면 자유통일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기주의와 분파주의, 그리고 나태함의 포로가 되어버리면 역사적 기회를 놓치고 분열하거나 自滅할 것이다. 역사의 창조자인가, 역사의 도망자인가, 선택은 나와 너, 그리고 여러분의 몫이다.
大動亂(대동란) 前夜의 북한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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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9-26, 2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