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와 과학자들

정치력이 없는 과학자들을 감싸고 밀어준 대통령을 못 잊어...
1970년대 초 과잉생산으로 시멘트가 남아 돌았다. 業界의 호소를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내무장관에게 남은 시멘트와 철근을 인수, 농촌 마을에 나눠주도록 지시하였다. 1년 뒤 그 시멘트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조사하고 보고하는 회의가 열렸다.
어떤 마을은 全주민들이 나눠 가지고 말았다. 어떤 마을은 주민들의 宿願 사업이던 다리를 놓고 우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이런 저런 보고를 다 들은 朴 대통령은 딱 한 마디 논평을 하였다.
"앞으로 잘 하는 마을만 지원하라. 못하는 마을은 自助心이 생길 때까지 지원하지 말라."
이 말이 새마을 운동의 성공을 가져온 지침이 되었다. 잘하는 마을만 지원하니 못하는 마을은 더 분발하였다. 전국의 3만 이상 마을들이 경쟁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軍政시절이던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보고하였다. 다 듣고 나서 朴 의장이 질문하였다.
"그런데 기술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적 측면만 고려하였던 관료들은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고 한다.
송정범 차관은 "기술수급계획은 별도로 작성하여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의 과학기술 개발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과학자나 경제관료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점을 지적한 朴正熙의 말 한 마디는 그가 평소에 지녔던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지난 10월26일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故朴正熙 대통령 31주기 추도식에서 박원훈 전 KIST 원장은 추도사에서 朴 대통령이 정치력 없는 과학자들을 감싸고 밀어준 이야기를 회고하였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첫째 정부의 적극적이며 일관된 과학기술정책, 둘째 기업의 부단한 기술개발 노력, 셋째 과학기술자들의 시대적 사명감의 세 가지 요소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정책의 일관성 및 영도력,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안타까운 일이며 그래서 오늘 과학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감회가 더욱 깊어집니다. 연구개발밖에 모르는 과학기술자에게서 정치력을 기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통치자가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이를 아시고 과학 기술자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대통령님의 과학기술 사랑은 큰 영애이신 박근혜 의원을 전자공학도로 진학케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朴 대통령은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한국의 과학기술을 국가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과학 기술자들을 정치적으로 엄호해주었다. KIST 출신 과학자들은 이 은혜를 잊지 못하여 硏友會를 중심으로 ‘박정희 과학기술기념관기념관' 건립에 나서고 있다.
1970년대에 과학기술처 기획실장으로서 국가 과학 기술 정책 수립과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全相根 회장(LC종합건설)이 1982년에 쓴 '한국의 과학기술정책-한 정책입안자의 證言'(正宇社)은 이 방면의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은 과학기술의 不毛地에서 정책입안자들이 어떻게 하여 오늘의 과학기술 大國을 건설하였는지를 알게 한다. 특히 경제개발계획과 과학기술진흥 계획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朴正熙 대통령의 관심과 격려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애국적인 관료들이 어떤 고심을 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군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감수성이 좋아서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진흥 정책을 뒷받침하였다는 證言은 새롭다.
이 책 가운데 국가적 과학기술 정책이 태동하는 순간에 대한 증언을 著者의 허락을 받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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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질문

1962년 1월 초, 新正연휴가 막 끝난 첫 주의 어느날 아침이었다. 하얗게 겨울 햇살을 받은 서울 세종로 1번지 중앙청 석조전은 유난히도 쌀쌀했다.
석조전 서쪽에 자리한 옛 부흥부(復興部) 청사는 이날따라 이른 아침부터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겨울 날씨와 함께 분위기는 더욱 차고 무거웠다. 바로 그 건물 2층 경제기획원 회의실은 벌써부터 기라성같은 장성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이들은 6개월 전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주체세력들과 군사정부의 軍人장관들이었다.

이윽고 뭇 별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제히 일어나 차렷자세를 취했다. 나지막한 체구에 카키색 잠바를 입고 큼직한 검은 안경을 쓴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회의실로 들어온 것이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뒤 민간인의 金裕澤 경제기획원 장관이 앞에 나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1962년도 경제기획원 업무보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리하여 그해 국가 최고 통치자의 연두순시(年頭巡視)의 막은 올려졌다. 경제기획원의 이날 보고는 바로 1월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계획의 내용을 브리핑한 사람은 한국은행에서 임시로 차출되어 온 안종직(安鍾稷) 종합계획국장이었다.

박정희 의장 앞에 나온 그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더듬거리면서 앞으로 5년 간의 경제성장 목표부터 시작하여 투자계획과 내외자 동원계획에 이르기까지 차분히 설명해 나갔다. 場內의 무거운 분위기 탓일까, 그의 이마에는 차츰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김유택 장관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러나 安국장은 끝까지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장장 1시간의 브리핑을 마무리지었다.
기침소리 하나 없는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金장관은 불안한 표정으로 朴의장의 얼굴을 힐끔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朴의장은 아무 소리도 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아들였다. 한참 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기술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음성은 낮고 말투는 아주 정중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뜻밖의 질문이었다. 金장관은 물론 이 계획 수립에 참여했던 主役들의 표정에는 당황한 빛이 흘렀다. 사실 이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당시 경제기획원의 직업공무원들과 엘리트로 自他가 공인하던 한국은행 조사부 출신의 경제전문가들, 그리고 대학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기술>이라는 것은 노동력의 일부분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술요인(技術要因)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이 계획의 대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전문가들 중에서 이같은 최고통치자의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의장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자리에서 불쑥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송정범(宋正範) 차관이었다.
「각하, <기술수급>(技術需給)에 대해서는 계획을 별도로 수립하여 차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朴의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宋차관은 성미가 급하지만 판단력이나 결단력이 뛰어난, 유능하고 노련한 행정가로 알려진 분이었다. 이때 宋차관이 말한 <기술수급>이라는 용어는 몰론 그가 임기응변으로 창작한 새로운 용어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宋차관의 기지에 찬 답변으로 경제기획원은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기술수급과 송(宋)차관의 지시


브리핑을 무사히 마친 참석자들은 긴 숨을 내쉬면서 회의실을 나왔다. 나도 아래층에 자리한 기술관리과장실로 돌아왔다. 궁금해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직원들이 몰려왔다.
「과장님, 브리핑은 잘 치렀습니까?」
나는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들에게 다시 설명해주었다. 직원들도 박의장의 뜻밖의 질문에 대해 모두 감탄하고 있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宋차관의 비서였다.
「전(全)과장님, 차관님께서 곧 뵙자고 하십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나는 옷매무시를 고치면서 차관실로 들어갔다. 宋차관은 방금 치른 회의실에서의 아슬아슬한 경험으로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 표정이나 말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全과장, 오늘 의장 각하께 말씀드렸던 그 기술수급 계획을 곧 만들어 주어야 하겠소.」
나는 宋차관의 지시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두려운 생각도 났다.
<…기술수급이란 처음 듣는 말인데, 그 계획을 세우라고 하니 어떻게 한담?>
「차관님, 그 <기술수급>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런 반문에 宋차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세, 그게 무엇일까?」
이때 宋차관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그는 머리의 회전속도가 남달리 빠른 분이었다.
「全과장, 그 5개년 계획 있지. 그걸 보면 우리가 5개년 동안 새로 지을 공장들이 쭉 나와요. 말하자면 그 공장에 필요한 기술과 기술자들을 추정해서 수급계획을 세우면 되는 거야.」

나는 이런 송차관의 설명을 듣고서도 구름잡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뿐이었다. 더구나 이 기술수급계획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부라면 우리가 맡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생각되어 宋차관의 지시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당시 5개년 계획과 같은 장기계획을 수립하는 主務國은 종합계획국이었기 때문이다. 직제로 보아도 기술관리과가 맡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차관님, 이 일은 저희들 과의 업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宋차관에세 기술관리과가 하고 있는 일들을 새삼스레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기술관리과는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시절의 기술관리실이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 주로 외국원조사업에 의한 해외 기술훈련 파견업무를 맡고 있었다. 해마다 정부의 관계부처에서 선발·추천하는 1000명 안팎의 해외파견 기술훈련생의 파견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관련되는 외국원조기관들과의 연락업무가 大宗을 이루어 당시 기술관리과의 직원 10명으로서는 업무량도 벅찼다. 사실은 기술관리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주로 해외파견 기술연수생의 여권수속이나 해주는 곳이었다.

나는 宋차관에게 이런 설명을 한 뒤 그의 지시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비쳤다. 宋차관의 얼굴빛이 별안간 달라졌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全과장, 하라는 대로 해요! 기술관리과에서 할 만한 일이기 때문에 일부러 지시하는 것 아니겠소. 당신네 科는 科長을 비롯해서 직원이 거의 모두가 기술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래서 기술에 관한 계획인만큼 그 科에서 하는 것이 가장 適格이라는 생각이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지시가 못마땅했으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응낙하고 그 방을 나왔다.

기술수급 대신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宋차관실에서 물러나온 뒤 나는 별안간 깎아지른 절벽과 마주치듯 중압감에 휩싸였다.
<…전례도 없는 주제(主題)의 계획을, 더욱이 국가발전에 관련된 중요한 계획을 경험도 없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제 와서 맡은 일을 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강제로 떠맡은 일이라고 해도 일단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기 시작했다.
나는 宋차관이 비친대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부터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내가 바라던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宋차관의 말대로 그 계획서에서 어떤 공장을 몇 개 짓는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찾으려고 했으나 산업별로 5개년간 달성해야 할 생산목표와 그 투자계획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기본계획의 숫자를 바탕으로 내 멋대로 공장을 몇 개 짓는다고 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이런 추정을 근거로 기술수요 계획을 수립한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가치가 없는 계획이 될 뿐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며칠 동안 입맛을 잃고 밤잠을 설쳤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한가지 대안이 머리에 떠올랐다.
<…송차관이 지시한 기술수급 계획은 일단 젖혀두고 그보다 넓고 높은 차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어떤 계획을 수립해보는 것이 어떨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는 한편 경제분야 외의 다른 모든 부분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과학기술 진흥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구상을 전개하면서 다시 불안해졌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계획의 범위와 수립방법은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외국의 사례가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곧 주한 미국원조기관인 유솜(USOM, United State Operations Mission)의 기술훈련과장인 윌리엄 윔즈 박사(Dr. William Weems)를 찾았다. 기술협력 관계로 전부터 안면이 있는 그는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시킨 초창기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 태생이며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지내다 한국에 와서 근무하고 있었다.
「윔즈 박사, 혹시 선진외국의 장기 과학기술 개발계획에 관한 자료가 있으면 주실 수 없을까요?」
「미스터 전, 유감스럽게도 나라의 先後進을 막론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장기 종합계획을 세워 개발하는 나라는 아직도 없는 실정입니다.」
많은 기대를 걸었던 나는 그의 말에 적이 실망했으나, 그는 미국의 연구개발 활동에 관한 자료를 일부 건네주었다.

「미스터 전, 필요하시다면 일본의 과학기술관계 자료는 구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또 다른 기술자료도 힘 자라는 데까지 구해드리지요.」
사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정식으로 國交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자료를 구하기 어렵던 때여서 그의 친절은 무척 고마웠다.
며칠 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宋차관실을 노크했다.
「차관님, 일전에 하명하신 기술수급 계획은 그동안 계획 구상을 위해 많이 연구해 봤습니다마는 도저히 수립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과학기술 진흥계획을 세워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동안의 구상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굳어졌던 宋차관의 얼굴이 점점 풀리면서 이따금 고개까지 끄덕였다. 설명이 모두 끝난 뒤 그의 표정은 완전히 나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 같아 보였다.
「全과장, 좋아요. 그렇게 한번 해보도록 해요. 그러나 한 가지 단서를 붙이겠소. 그 계획의 형태는 아무래도 좋으나 반드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보완하는 것이어야 해요.」
「차관님 말씀은 명심하겠습니다.」
앞을 가렸던 안개가 별안간 확 걷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宋차관은 또 다른 하나의 단서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全과장, 그 계획에서 과학이라는 용어는 되도록 빼도록 하시오. 과학이란 경제개발계획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순전히 학문적인 분야 같은데 그것은 빼야 하겠소.」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기술관리과 직원들은 송차관의 승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잘됐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송차관님 말씀대로 과학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계획은 절름발이가 될 것인데 어떡허지?」
나의 걱정에 대해 어느 사무관 한 사람이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하실 것 없을 것 같습니다. 계획서의 표제는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라고 붙여두고 계획 내용과 범위는 과학과 기술을 모두 다루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宋차관이 단서로 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보완>이라는 뜻은 그대로 옮겨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의 부제로 달기로 했다.
이리하여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던진 한 마디 질문을 계기로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장기 종합계획을 세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계획의 산실(産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종합계획 작성을 주도한 경제기획원 물동계획국(物動計劃局) 기술관리과는 宋차관이 지적한 것과 같이 대부분이 자연과학의 배경을 가진 공무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과장인 나는 미국 퍼듀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뒤 귀국하여 문경(聞慶)시멘트공장을 거쳐 충주(忠州)비료공장의 생산부장으로 근무하다 이곳에 왔고, 직원으로는 이응선(서울대 건축과 출신, 현 직업훈련관리공단 이사장), 조경목(趙庚穆,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출신, 현 과학기술처 심의실장), 도정섭(都定燮,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출신, 현 과학기술원 행정처장)씨 등 20대의 젊은 공학도 출신과 조남욱(趙南昱, 서울상대 경제과 출신)씨 등 행정가들이 일하고 있었다.

별안간에 큰 임무를 맡게 된 기술관리과의 유래를 찾자면 1961년 5·16혁명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박기석(朴基錫) 대령이 부흥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부흥부가 맡은 주요한 업무는 미국의 대한경제원조에 관한 일 외에도 이보다 앞서 민주당(民主黨) 정권이 착수했던 국토개발 업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육군 공병 출신인 박대령이 장관으로 임명된 배경은 부흥부의 기능이 건설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되었다.

박장관의 임명과 때를 같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월26일자로 부흥부의 이름을 건설부(建設部)로 바꿔버렸다(국가재건최고회의령 제14호).

두 달 뒤인 1961년 7월22일, 건설부는 개편 강화되어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이 되었고 광범위한 기능을 갖게 되었다. 기획원은 첫째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을 전담하는 종합계획국, 둘째 미국과 유엔의 원조업무를 전담하는 물동계획국, 셋째 오늘날의 새마을 사업과 비슷한 업무를 관장하는 지역사회국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물동계획국은 종전의 부흥부가 관장하던 대외경제협력 업무를 다루는 경제협력과, 시설투자과, 물자수급과, 감사통계과 그리고 기술관리과 등 5개 과를 밑에 두었다.
종전의 부흥부 시대에는 기술관리실(1959~1961)이라는 임시부서가 하나 있었다. 이 부서는 정부직제령에 따라 설치된 것이 아니라 부흥부령으로 만든 것이었다. 기술관리실이 다루는 업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미국원조기관인 미국대외원조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USOM의 전신)의 기술원조 계획으로 우리나라 기술요원을 해외로 파견 훈련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ICA 전속 기술용역회사인 스미드 힌치맨 &그릴스 어소시에이션회사(Smith Hinchman &Grylls Association Inc.)가 제출하는 ICA원조사업에 관한 기술타당성 조사보고서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기술관리실은 그 뒤 부흥부가 건설부로 바뀌면서 정식으로 기술관리과로 승격되었고, 다시 경제기획원으로 개편되자 자연과학을 전공한 기획원내 직원은 모두 이 과로 옮기게 되었다.

계획은 무르익어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과우리나라 과학기술 개발의 기본계획을 수립한다는 벅찬 사명감에 20대에서 30대 초인 젊은 공무원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의 모두가 자연과학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일찍이 나라의 부흥은 과학기술의 진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 나름대로의 사명의식에서 전공을 택한 터에, 이제 국가의 과학기술 진흥계획 수립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을 무척 행운으로 생각하고 젊은 정열을 모두 쏟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는 사명감이나 정열만으로 짜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업이었다. 그것은 자칫 탁상공론에 흐르기 쉬웠다. 나는 우선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과학 기술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주기를 바라고 있는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국내 산업계, 학계와 기술계의 지도급 인사들의 의견은 이 계획 수립에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송차관을 찾아가 나의 이런 뜻을 설명하고 자문위원회 구성을 건의했다. 송차관은 선선히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과학기술계의 각 분야 대표 40명으로 구성된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 40여명의 위원 중에는 산업계를 대표한 정인욱(鄭寅旭, 강원산업 대표), 조홍제(趙洪濟, 효성물산 대표), 전택보(全澤珤, 천우사 대표)씨 등과 학계를 대표한 안동혁(安東赫, 한양대 교수) 金東一(김동일, 서울공대 교수), 현신규(玄信圭, 서울농대 교수)씨 등 그리고 국공립 연구기관의 책임자로 이채호(李采鎬, 국립중앙공업연구소장), 정남규(鄭南圭, 농촌진흥원장)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사혁명정부는 당시 국가정책을 입안하거나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전문가들과 학자들을 되도록 많이 참여시키는 것이 하나의 특징으로 되어 있었다.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도 그런 뜻에서 혁명정부의 방침에 부합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한편 계획수립 책임자로서 나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첫째, 전통적으로 기술을 천시해오던 우리의 사회풍토와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과학기술을 숭상하는 뿌리가 내리고, 이것을 가꾸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국민 모두가 지난날의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탈피하여 근대적인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스스로가 과학기술 진흥에 참여할 수 있는 태도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정책적인 방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과 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을 선진공업국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은 물론, 그 수준에 이르는 기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 실정은 이 두 가지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형편이었다. 우선 기술과 기능을 천시하는 경향은 우리나라 국민의 실생활뿐만 아니라 정부의 시책면에도 널리 번지고 있었다. 우리의 지식층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반만년의 오랜 우리의 고유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직도 미개발국가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유럽의 근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기에는 불리한 거리에 있었다는 탓도 있었겠으나, 근대국가로서 발돋움할 중요한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에게 강점되어 과학기술이 도입될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1945년 우리 민족은 8·15광복을 맞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나 국토의 분단과 6·25동란이라는 민족적인 비극과 참화로 그동안 축적한 보잘 것 없던 과학기술이나마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1953년 여름 3년여를 끌던 민족의 비극 한국동란은 끝났다. 그러나 정부나 민간을 막론하고 전화(戰禍)를 복구하고 당장에 어려운 민생고를 해결하는 데 정신이 쏠려 과학기술의 종합적인 개발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6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0여년간 장기집권을 누려오던 자유당 정권은 그동안 누적된 적폐와 부정선거로 4·19학생의거를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10년 야당으로 통치기술이 미숙한 민주당 정부는 고삐가 풀린 자유의 분망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고, 경제는 마비되어 민생고는 극도에 이르렀다. 이런 혼란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 5·16군사혁명으로 질서는 회복되었고 새 정권은 경제적인 자립을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힘을 이 계획을 추진하는 데 쏟게 된 것이다.
공업국가를 지향하는 이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될 무렵의 우리나라는 농업 위주의 대표적인 저개발국가였다. 2500만명의 남한 인구 중 67.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 안팎에 연간 수출고는 4000만 달러 정도였다. 1961년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1차산업 40.3%, 2차산업 20.6%, 3차산업 39.1%였으며 경제성장률은 2.8%, 인구증가율은 2.9%였다.
그 당시 공업의 주축을 이룬 것은 경공업이었고 섬유공업은 대표적인 업종이었다. 화학공업은 외국원조로 건설된 충주비료공장과 나주(羅州)비료공장이 8만톤의 비료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밖에 연간 약 70만톤의 시멘트가 생산되고 있었다. 또 이무렵 전력생산은 시설용량 37만KW였고 경성전력(京城電力), 중선전력(中鮮電力) 그리고 남선전력(南鮮電力) 등 3개 회사가 통합해서 한국전력주식회사(韓國電力株式會社)로 막 발족하고 있었다.

바꿔 말해서 이 무렵의 우리나라 경제는 60만 국군의 유지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외국원조에만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절의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기반조차 갖추지 못한 낮은 수준에 있었다. 구체적인 그 개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산업활동에 있어서의 기간이 되는 기술은 거의 모두가 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둘째, 국제시장에서 경쟁할 만한 공업제품은 거의 없었다.
셋째, 기술행정을 효율적으로 시행할 종합적인 행정체제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넷째, 국공립 과학기술 연구기관은 활동이 부진했고, 사립연구소는 거의 없었으며 과학기술을 선양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기관은 없었다.
다섯째, 기초적인 과학기술의 연구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창의적이고 주동적인 발전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여섯째, 교육연구 및 생산분야에서 활동해야 할 우수한 과학기술자를 보충할 인재양성면의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일곱째, 기술자, 기술공 및 기능공의 구성이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예컨대 기술자(engineer), 기술공(technician) 및 기능공(craftsman)의 이상적인 구성비율은 1:5:25이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1:1.3:33이었다.
여덟째, 일반국민의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과 교양수준이 아주 낮았고 기업가의 기술혁신으로 경영합리화를 시도하려는 의욕이 부진했으며 과학기술 활동을 본격적으로 펴나갈 만한 기반이 빈약했다.
아홉째, 과학기술 진흥을 목표로 하는 종합적이고 중점적인 시책이 없었다.

기본방향의 틀을 세워

우리는 이런 현황을 면밀히 검토하고 앞서 설치된 과학기술정책자문위원회의 위원들은 물론 그밖의 과학기술계, 학계 그리고 산업계의 전문가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지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나아갈 길을 꾸준히 모색했다.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 위원들은 여러 차례 소집된 위원회 모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열의를 보여 주었고 회의는 진지하고 건설적인 토의로 시종했다. 이리하여 이 위원회는 마침내 우리나라와 같은 저개발국가 과학기술을 짧은 시일 내에 획기적으로 진흥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 모두 뜻을 같이 했다.

첫째, 과학기술의 진흥개발은 국가사업으로 책정하고 정부의 예산 및 행정지원으로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
둘째, 정치권력의 최고책임자(최고회의 의장)가 몸소 앞장서서 과학기술 개발에 대해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이 사업이 혁명정부의 최우선사업(最優先事業)이라는 것을 국민과 공무원들에게 강력하게 시현(示現)해야 한다.
이같은 위원회의 건설적인 건의는 우리 실무자들이 과학기술 개발의 기본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모두 큰 보탬이 되었다.
4개월 남짓한 산고(産苦)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첫째, 인력(人力)을 우리의 가장 큰 가용자원(可用資源)으로 보고 과학자, 기술자, 기능자 등 과학기술계 인력개발을 우리나라 과학기술 진흥의 주축사업으로 한다. 입안 중인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그밖의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도 필요한 인력까지 통틀어 그 수요를 전망하고 이를 공급할 구체적인 방안과 양성계획을 수립하여, 이것을 문교부의 과학 및 실업교육과 산업계의 직업훈련 계획에 강력히 적용되도록 한다.
둘째, 산업기술의 개발은 국내의 미약한 과학기술 연구능력에만 기대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가서, 이미 선진외국에서 개발하여 실용화되고 있는 최신의 선진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한편 도입기술을 소화개량하고 기술이식(技術移植)에 대한 노력도 적극적으로 편다.
셋째, 종래에 지극히 비능률적으로 운영해 오던 국공립 연구기관을 근본적으로 개편 강화하고 나아가서 국내외에 산재되어 있는 우리의 과학두뇌(科學頭腦)를 유치하고 조직화하여 연구활동 중심의 과학집단(科學集團, Scientific Community)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저력을 배양하는 한편 기술도입의 소화와 기술이식의 매개체 구실을 맡도록 한다.
넷째, 우리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건전하고 지속적으로 진흥 육성되게 확고한 과학기술기반(科學技術基盤)을 구축한다. 이 기반(Infrastructure)을 구축할 목적으로 ①과학기술 진흥계획을 국가의 장기개발사업으로 책정하되 정부의 투자자원배분(投資資源配分)과 행정지원면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부로서 또는 같은 수준으로 그 우선순위를 인정하고 ②과학기술 진흥계획 수립과 이에 필요한 행정을 전담하게 하는 정부조직상의 과학기술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③과학기술 진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기술 진흥에 필요한 여러 법령을 제정 실시한다.
다섯째,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이해를 드높이고 우리의 생활과 사고에 과학적인 풍토를 토착화(土着化)하기 위해 과학풍토 조성사업을 범국민운동화한다.


돛은 오르고

1962년 5월21일, 봄은 어느새 가버리고 산뜻한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세종로 관청거리는 푸른 가로수로 뒤덮여 싱싱한 생기가 온누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날 오랜 산고 끝에 낳은 <산물>을 소중하게 들고 중앙청 건너 자리한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로 들어섰다. 뒤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된 이 건물 8층 회의실에서는 그날 제39차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당시 최고회의는 국가의 입법권은 물론 정부의 모든 예산과 계획에 대한 심의권을 갖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그동안 경제기획원이 입안한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다루게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각수반 겸 기획원 장관이던 송요찬(宋堯讚) 장관 대리로 참석한 송정범 차관을 수행하여 기술진흥 계획의 입안자로서 이 회의에서 브리핑을 하게 된 것이다.
회의실에 들어선 나는 기라성같은 장성들의 엄숙한 표정과 무거운 분위기에 금방 압도되어 버렸다. 두 어깨에 번쩍이는 별들을 단 최고위원(最高委員)들의 위엄당당한 모습에 비하면 민간인 옷차림의 한 서기관(書記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대조적이었다.
마침내 별 셋을 단 육중한 체구의 이주일(李周一) 부의장은 사회봉을 들고 개회를 선언했다. 나는 새삼 마음을 가다듬고 회의장 앞으로 나가 이들에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나는 현대국가에 있어서의 과학기술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역설하는 일로 말문을 열고 인력개발, 산업기술 개발전략, 연구개발 등으로 이어지는 계획의 주요한 내용을 차분하고 요령있게 설명해나간 다음, 결론적으로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국가의 장기사업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격으로 투자와 정부지원 등 모든 면에서 우대해줄 것을 힘주어 요청했다.

브리핑 도중에 나는 여러 번 실수를 했다. 더듬거리거나 뛰어넘은 것이다. 그때마다 옆에서 宋차관이 보충설명을 해주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회의에 나오기 전에 그렇게도 많은 예행연습을 했으나 막상 현장에 나오니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굳어버렸던 것이다.

브리핑은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이 브리핑에 대한 최고위원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너무나 좋았다. 위원들은 차례로 의견을 말하고 질문도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계획>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위원은 얼굴에 홍조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다.
「…5·16혁명의 목적은 바로 지금 소개된 기술개발 계획과 같은 국가계획을 만들어 국가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 계획을 혁명정부의 최우선사업으로 설정하고 추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사회자인 李周一 부의장은 토의가 끝난 뒤 可否를 묻기 바쁘게 방망이를 내려쳤다. 만장일치로 이 계획은 통과된 것이다.
나는 이 순간 온 몸이 저리는 듯한 커다란 감격의 물결 속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4개월 반 전의 기획원 연두순시 때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최고집권자의 뜻밖의 질문과 관심은 과학기술의 진흥을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터전을 마침내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국가의 장기 개발계획 사업의 하나로 역사적인 출범을 하게 되었다.
누를 길 없는 감격에 휩싸인 채 브리핑 차트를 접어들고 최고회의 문을 나선 나는 싱싱하고 푸른 가로수 위로 한없이 뻗은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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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과학 대통령 그 자체셨습니다"
-故 朴正熙 대통령 31週忌(주기) 추도사
朴元勳(KIST연우회장)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
지난 9월8일에 <과학 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이라는 책의 출판 기념회가 바로 대통령님께서 건축을 시작하신 ‘과학기술회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책의 저자는 무려 16명으로써 과학기술처 초대 장관 김기형 박사를 비롯하여 대통령님께서 손수 돌보아 주셨던 KIST, KAIST, ADD, 과학기술진흥재단 등의 대표들이 한 마음으로 집필하였습니다. 이 책이야말로 과학 대통령님의 제31주기에 임하여 진정한 지도자를 추모하는 우리 모두의 추도사이기도 합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1960년대 초 ‘과학입국 기술 자립’이야말로 ‘조국근대화’의 선행조건이요, 또 필수요건이라는 대통령님의 선견적 기본철학과 비전, 이를 위한 헌신적인 추진력, 그리고 일관된 리더십을 기반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은 2010년 현재 과학 경쟁력 4위, 기술 경쟁력 18위, 총체적 국가경쟁력 23위, 경제 규모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민족중흥’ 노력과 함께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을 구축해 주셨음에 우리 모두 감읍하고 있습니다.

‘빈곤퇴치’와 ‘자주’라는 정치적 신념하에 수출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병행하여 과학기술 진흥 5개년 계획을 별도로 수립하고 ‘인적자원’의 결집 및 육성을 그 첫 번째로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966년 KIST의 설립은 ‘해외 두뇌’를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두되 집단을 중심으로 산업기술 개발이 기획되고 산업진흥이 추진되었습니다.

1967년에는 중앙정부조직으로서 과학기술처 설치, 1970년 자주국방을 위한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1971년 KAIST 설립을 통한 석·박사급 고급 두뇌의 양성, 1972년 산업기술진흥법 제정으로 민간 연구의 촉진, 1973년 대덕 연구단지 건설 착수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전문연구소들의 설립, 1977년 기초연구진흥을 위한 한국과학재단 설립으로 이어지는 ‘先기술 後과학’의 국가발전 모델은 지금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선지자적 과학기술정책의 추진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미 과학 대통령님은 기술 대통령으로서 자동차 산업, 조선 산업, 전자 산업, 그리고 기계공업의 진흥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는 방위산업 육성과 연계된 중화학 공업 추진의 초석이었습니다.

과학 대통령님이 마지막으로 수립하여 1977년부터 시작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과학기술부문 계획은 총 11개의 세부 주요정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기술용역의 육성, 두뇌산업의 육성과 장기적 대형 연구개발의 추진, 원자력 기술개발, 자원개발과 환경보전 및 기상업무의 강화, 정보산업의 육성이라는 5개 항목은 새로이 강조된 것으로서 오늘날 제철,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반도체 및 전자산업이 세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국민 일인당 GDP 20,000달러라는 경제적 번영이 과학 대통령님의 은공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민족적 자신감을 심어준 ‘새마을 운동’과 연계된 ‘생활의 과학화’는 1973년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과학의 합리성이 투영된 ‘공정한 사회’건설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1967년에 설립하신 과학기술후원회는 과학기술진행재단으로 발전하였고 다시 이 기관은 오늘날에는 과학문화와 창의교육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 시민으로서의 소박함을 항상 지니시고 스스로 모범이 되셨던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생활철학을 우리 모두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20,000달러 선을 넘어 30,000~40,000달러 선의 선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첫째 정부의 적극적이며 일관된 과학기술정책, 둘째 기업의 부단한 기술개발 노력, 셋째 과학기술자들의 시대적 사명감의 세 가지 요소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정책의 일관성 및 영도력,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안타까운 일이며 그래서 오늘 과학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감회가 더욱 깊어집니다. 연구개발밖에 모르는 과학기술자에게서 정치력을 기대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통치자가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이를 아시고 과학 기술자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대통령님의 과학기술 사랑은 큰 영애이신 박근혜 의원을 전자공학도로 진학케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과학 대통령님의 ‘과학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코자 합니다. 특히 KIST 연우회를 중심으로 ‘박정희 과학기술기념관’을 건립하여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기술진흥을 통한 경제성장의 모델’ 개발도상국가에 전수하여 경제성장을 지원함으로써 국가 간 빈부의 격차축소를 통해 세계 평화에 공헌코자 합니다. 이는 어쩌면 해외 원조의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은 한국만의 영도자가 아닙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 ‘과학 대통령 박정희 리더십’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학 대통령님의 리더십을 자랑하며 세계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박정희 과학 대통령님,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가르침대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계속 정진하여 ‘조국의 最선진화’를 완수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과학 대통령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2010년 10월26일
KIST연우회장 박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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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長燁의 李承晩, 朴正熙 변호: "경제발전의 선결조건은 치안과 법질서 확립"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의 전통을 이어가야"

요즘 햇볕정책 지지하는 자들이 계속 박정희 대통령을 헐뜯는 그런 발언을 합니다. 저는 그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적도 없고 만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여기 와서 좀 알아봤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훌륭한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요.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직후에 우리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가 여기에서 미국하고 동맹하고 민주주의 길로 나가야겠다, 소련의 공산주의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양반이 미국 가서 오래 있었고 또 기독교 신자고 그러니까 그런 길로 확고하게 나가고, 또 그것이 남북이 이렇게 차이를 가져온 데 있어서 기본 조건으로 됐고 그것 때문에 6·25 전쟁 때도 우리 민주주의 체제를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의 사회발전 수준이 어땠습니까. 그것은 미국하고 아예 대비도 안 됩니다. 그런 조건에서 만약에 미국의 민주주의를 그냥 갖다 도입했더라면 우리나라 수습 못했습니다. 아마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과의 대결에서 어려운데 그런 식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갔다 해서 되겠습니까?
미국 사람들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렸습니까?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서부 활극을 봐도 얼마나 상태가 복잡합니까. 지금 와서 人種(인종)차별도 없어지고 민족차별도 없어지고 그런 大합중국을 건설한 그 자유를 그냥 우리 해방 직후에 거기다 갖다 대서 되겠소, 안되죠. 아마 이승만 대통령이 계속 그런 식으로 정치했으면 여기도 너무 일어나서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또 4·19라는 것이 그래서 일어난 것 아닙니까.
停戰(정전) 직후 아주 어려웠습니다. 이산가족은 많았습니다. 천만이나 되는 이산가족에다가 전쟁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고 생활형편은 북한보다도 더 못했고 그런 형편에서 거기다가 또 북한 측에서는 停戰이다, 이런 시기를 타고 계속 공작을 해야 하겠다 해서 자꾸 파괴자를 내려 보내고 내부 와해시키기 위해서 모든 장난을 다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治安이 말이 아니고 비상사태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보다 못해서 이러다가는 망한다. 그러니까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비상대책을 세웠습니다.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비상대책을 세웠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이 경제를 발전시킨 공로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이 비상사태를 수습했다는 이 공로가 그보다 못지 않게 더 큰 공로입니다. 英斷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쿠데타라는 게 생명을 내놓고 하는 일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몇 번 암살당할 뻔했고 마지막에는 암살을 당했습니다. 가족까지 다 희생됐죠. 이렇게 해서 수습을 했습니다.
경제나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은 治安부터 유지해야 됩니다. 나쁜 놈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서 어떻게 문화를 발전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겠습니까. 경제발전을 시키고 문화발전을 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치안부터 확고하게 법적 질서부터 세워야 합니다. 어떤 방법을 세우든지 말입니다.
그렇게 비상대책을 세웠습니다. 비상대책을 세우다 보니까 거기서 우리 문화수준도 낮고 정치수준도 낮고 더군다나 경제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일률적으로 취급함으로써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본 것보다도 그때 治安을 바로 잡았기 때문에 경제 건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 지금 명예도 회복시켜주고 보상을 해주는 것은 반대 안합니다. 또 그 이후에 우리 수준이 높아진 다음에 우리 김영삼 대통령처럼 文民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한 것도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때 비상상태에 있을 때 비상대책을 세운 공로 이것을 독재라고 하면서 자꾸 깎아 내리는 것,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애국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당하게 문제를 평가하지 않는 그런 양심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그 비상대책을 세우는 데서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까? 이런 큰 英斷(영단)을 내려갖고 그 만한 용기를 낸 사람이 쉽지 않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세우고서 강력한 대책을 세웠는데 그런 것을 다 나쁘다고 하게 되면 역대 왕들 가운데서 일 잘하는 사람들 다 나쁘다고 봐야 합니다. 자기 견해를 갖고 치안을 세우고 말하자면 富國强兵策(부국강병책)을 쓴 사람들이 정치를 잘 했지요. 실제 우리들이 우리와 같이 독재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격분하지 않을 수 없고 격분하다 못해 슬픈 감이 나옵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런가. 문제를 옳게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에 빠져 죽으러 들어가는 아이를 때려서 끌어 내오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도적놈이 우글우글하고 거기 간첩들이 와서 자꾸 흐르는 판에서 자유를 제한하고 그것이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경제발전 위해서는 첫째는 치안을 유지해서 법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거래에서 부정 없이 일한 것만큼 차려지도록 질서 세우는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도 둘째로도 나쁜 일들 못하게, 파괴분자들이 날뛰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 군대가 여기 와서 주둔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경제발전에서도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감히 어디 전쟁도 못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正義를 펴기 위해서는 不正義를 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적 힘이 필요합니다. 공권력이 필요합니다. 이거 뭐 간첩이 와도 잡지 못하고, 파이프 갖고 경찰도 때리고 國軍까지 때려도 가만 내버려둡니다. 그러니까 자꾸 노동자들이 임금 달라 그러지, 파업하죠. 그러니까 시끄럽다 해서 우리 자금이 자꾸 외국으로 나갑니다. 그럼 여기 공동화됩니다. 여기 실업자 많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중요한 것이 여기서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법적 질서를 세우고 여기서 안전하게 기업가들이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여기서 일하게 되면 그렇게 이윤을 볼 수 있게 조건을 만들어주고 그래서 질서를 세워놓고 거기서 또 다른 것보다도 그때 우리의 생명이 어디 있었습니까? 우선 먹고 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만사를 제치고 경제발전에다가 힘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100년 200년 걸려야할 것을 몇 십 년 만에 해냈습니다.
왜 이런 위대한 인물을 어째서 그렇게 소홀히 하는 것입니까. 우리 민족적 자랑으로서 자꾸 선전을 해야 할 사람인데 말입니다. 私的 감정 갖고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객관적인 사실에 의해 그때 비상사태다,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비상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비상사태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은 정당하게 평가해주고 명예도 회복시켜줘라 우리는 그것을 반대 안합니다. 또 그 이후에 우리나라가 수준이 높아진 다음에 文民정권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노력도 평가해 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경제건설을 할 때에 불도저 앞에 누워서 포항제철소 울산공업단지 건설 반대했던 사람, 그것이 또 김정일 찾아가서 햇볕정책이오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좋은 의도에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 공업 상품들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분들의 행적을 봐서 내가 와서 물어봤는데 돈 한 푼도 다르 게 쓴 것 없고 일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단호하게 해 나갔습니다. 하여튼 우리 나라를 건설하는 데서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우리가 계승해서 계속 지켜야 됩니다. 지금 뾰족한 수가 필요 없습니다. 이런 전통을 잘 지켜만 나가면 우린 그냥 승리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같이 걱정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경제발전 했고, 미국과 동맹만 강화해 나가게 되면 중국이 또 전쟁을 반대하는 조건에서 (북한정권이) 전쟁을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김정일이라는 녀석 핵무기 아무리 갖고 있어도 소용 있습니까? 그 건사하기나 힘들었지 소용 있습니까. 내 필리핀 가서 거기서 필리핀이 한때 우리보다 앞섰습니다. 근데 지금 꼼짝 못하지 않습니까. 계속 공산당 때문에. 공산당이 그런 것 하는 데는 아주 발전됐습니다. 그런 지하공작하고 내란 조작하는 데 아주 여기 민주주의 사회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발전했습니다. 김정일도 그런 두뇌는 아주 발전됐습니다.
자유주의, 우리 북한에서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렇게 압박하고 자유가 없는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난 거기 있을 때도 체코나 동독에 가 보면 이 정도면 무슨 자유가 없다고 하는가 했습니다. 뭐 부러운 게 없지 않았습니까. 체코하고 동독이 제일 수준이 높았습니다. 루마니아는 좀 자유를 제한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87년인가 그 전에는 난 루마니아 갈 때마다 부러웠습니다. 다른 데는 너무 자유가 많아서 야단인데. 소련도 그렇지 소련도 가 봐도 무슨 자유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前 북한노동당 비서
출처:자유북한방송 http://www.freen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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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는 왜 혁명가인가?
守舊的 양반문화와 싸우다가 戰死한 사람. 그는 실용적, 현실적, 자주적 노선으로 관념적, 위선적, 사대적 생리와 토양을 바꾸려 하였다.



대통령 연설이 現代史를 이끈 말



한국의 現代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1급 文書는 가장 재미없는 문서이기도 하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펴내는 歷代 대통령 연설문집이 그것이다. 대통령중심제下에서 대통령의 주요 정책과 결정, 비상조치 같은 것들은 전부가 연설문으로 발표되었다. 이 연설문들은 대체로 딱딱한 형식의 무미건조한 문체로 돼 있으나 대통령의 철학과 인간됨이 직접적으로 담겨있는 1차 자료이다.
필자는 대통령 연설이나 인터뷰의 녹음을 듣는 걸 즐긴 적이 있다. 인간의 육성에는 활자가 담을 수 없는 복합적이고 多元的인 정보가 담겨 있다. 격식이 별로 없는 인터뷰나 선거유세의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면 대통령들의 숨결과 맥박까지도 들리는 듯, 역사 속의 인간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朴正熙의 경우 1960년대의 연설은 패기에 넘치고 도전적인데 1972년 10월17일 유신선포 이후의 연설은 守勢的이며 변명이 많아지고 힘이 빠진 느낌을 준다.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오면서 시대 정신을 구현하고 국가를 건설해온 조국근대화, 민족중흥, 공업화, 수출입국, 자주국방, 自立·自主·자조(自助), 민주화, 정의구현, 단임 실천, 신한국건설, 개혁과 司正 같은 말들의 산실(産室)은 바로 대통령들의 육성연설이었다. 대통령 연설문의 그런 낱말은 실천력을 가진 힘센 말이란 점에서 문학작품의 아름다운 단어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朴正熙의 정확한 용어선택


최고회의 의장 시절의 朴正熙 육성 연설은 패기에 넘친다. 1961∼63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조국근대화의 여명기이자 경제개발의 始動이 걸린 시기이다(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것이 1962년이다). 44세의 朴正熙소장이 해병대와 공수단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와 정권을 잡은 직후의 목소리답게 격정과 열정을 담은 연설이었다.

● 朴正熙의 말은 과장과 수식이 최소화되고 용어 선택이 아주 정확하다. 1963년 10월7일 5代 대통령 선거 진주유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녹음테이프).
"지게 목발을 두드리던 불우한 농촌청년들이 끌려 나와 나라를 지켰습니다…그들은 그후 싸우다가 죽어 지금은 저 동작동 국군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유세장 같은 들뜬 분위기에선 그냥 "그들은 지금 저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굳이 "싸우다가 죽어"라고 하여 "농촌청년들 중 전사한 사람들"이 동작동에 묻혀 있다고 정확을 기하고 있다.
얼렁뚱땅 적당하게 넘어가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정리·정돈된 모습을 좋아했던 그의 면모는 이런 話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그는 연두순시 때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탁자위에 종이와 볼펜이 직선이나 직각으로 놓여져 있지 않으면 꼭 스스로 바로잡아놓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 朴正熙 의장의 육성연설을 다 듣고나니 한 마디가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맹글라야 하겠습니다"란 경상도 사투리. 이것은 즉석연설, 선거유세, 기자회견 같이 격식이 덜한 원고 없는 연설·대화에서 등장한다. 기공식, 개통식, 입주식, 준공식 같은 건설현장에서 한 연설이 많고 朴正熙가 국가건설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강조하며 돌아다니던 때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 그의 연설에는 통계수치가 많이 등장한다. 5·16 후 행정에 군대의 기획제도가 도입되면서 심사·분석업무가 정착되고 조직운영이 효율적으로 되어가고 있던 '계획의 시대'였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병출신인 朴正熙는 수치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 연설 내용도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다. 1962년 5월1일 연설 '농민에게 드리는 부탁의 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실질적인 농촌 발전은 환경정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뜰 안이나 집앞에 습관적으로 버려둔 쓰레기나 우물들은 깨끗이 치워야 할 것이며 짚이나 나뭇가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울타리와 담은 흙과 돌로써 아담하게 새로 쌓아야 할 것이며 마을 앞을 흐르는 계천(溪川)은 양쪽 제방을 돌로 쌓고 잔디를 입히고 나무를 심고…>

국민을 질책한 최후의 대통령

● 그림을 잘 그렸던 朴正熙는 肉眼과 함께 기억과 상상의 눈도 좋았던 것 같다. 1963년 10월7일 진주유세 연설에서 6·25 때 정찰기를 타고 국민학교 상공을 날면서 관찰을 하던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는 플라타너스의 모습과 지붕의 색깔까지도 6·25 당시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10월9일 부산 유세에서는 "맑고 푸른 가을하늘, 키 큰 코스모스, 코스모스보다 낮은 주막집, 두 농부, 막걸리…"라고 가을 풍경을 詩的으로 묘사하고 있다.
朴正熙는 독도법(讀圖法)에 능통했고 헬기를 타고 국토를 내려다보면서 대사업을 구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지방시찰을 다녀와서는 "꼭 내가 그린 작품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한 적도 있다 朴正熙는 일종의 시각적 기억력(Photo memory)을 같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능력이 그의 장대한 비전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 朴正熙 연설에서는 요즈음의 대중정치인들로부터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국민들에 대한 요구와 질책이 자주 나온다. 1961년 12월10일 공영주택 입주식 치사에서 그는 주민들에게 "우리가 집을 지었으니 길을 넓히고 포장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주어야 하겠다. 그런 것까지 정부가 해줄 수는 없다"고 自助노력을 요구했다. 1962년 연두사에서도 그는 이렇게 요구했다.
"하나의 민족이란 영원한 生命體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理想이 있어야 하고 희망과 꿈이 있어야 하며, 시대적인 사회환경(社會環境)을 극복하고 生成發展 해 나갈 생명의 약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타의적(依他的)인 인습과 숙명론적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은 민족의 발육을 장해(障害)하고, 진취 활달한 민족적인 氣象을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1963년 5월2일 황지(黃池)본선철도 개통식에 참석한 朴正熙는 청중들이 국기의례와 애국가 봉창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데 대해 단단히 질책을 한 뒤 "다시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는 대중정치가들처럼 국민을 영합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민중운동가처럼 숭배의 대상으로도 보지 않았으며 교도(敎導)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2년여만에 그만둔 朴正熙는 평생 교사였다.


그때는 재미없던 연설이…


● 朴正熙의 연설은 재미가 적다. 기자는 高2년 재학시절 1963년 10월9일 부산유세(부산공설운동장)의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朴正熙의 연설은 한 마디로 '잠 오는 것'이었다. 소년시절 더러 보았던 이른바 舊정치인(민주당·자유당 정객들)의 웃기고 울리던 대중연설에 비하면 더욱 그러했다. 다시 그 녹음 테이프들을 다시 들어보니 그 재미없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선전·선동·과장·우스개의 재주가 없는 朴正熙는 너무 성실하게, 너무 단정하게, 너무 딱딱하게, 너무 선생님처럼 청중들을 가르치려 들고 시키려 들고 따지려 들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너무 진지한 것이다. 진지한 연설에 무슨 재미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서 들어보니 그때는 못 느꼈던 감동이 생기는 것이었다. 30여년 전의 그런 진지한 자세가 국가 근대화의 집념으로 승화되어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한국을 GNP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그 실적의 증명이 있기 때문이리라. 기차소리 들리는 삭막한 式場(식장)에서 그가 절규하다시피 했던 조국의 미래상은 예언 이상의 달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는 그가 '무장한 예언가'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무장한 예언가의 비전은 말장난으로 끝나지만 銃口(총구)에서 나온 權力의 뒷받침을 받은 朴正熙의 권력은 국가 근대화라는 거대한 비전을 실현하도록 한 유일무이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李朝 잔영(殘影)에 대한 도전자

박정희의 육성연설에서는 頂上에 도달한 권력자의 여유나 오만이 느껴지지 않는다. 챔피언의 느긋한 자세라기보다는 도전자의 오기·분노·정의감 같은 것이 스며 있는 말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돌파매질을 하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봉건적 잔재, 李朝, 양반, 한민당, 舊정치인, 尹潽善…. 이 시기 朴正熙의 연설 테이프와 1963년 가을에 나온 朴正熙 著 '국가와 혁명과 나'를 함께 읽고 들으면 그의 내면 속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다. 근대화혁명가로서 朴正熙가 가졌던 열정과 꿈을 담고 있는 '국가와 혁명과 나'는 朴相吉씨(前 청와대 대변인·水協 회장)가 대필한 것이지만 朴正熙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한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朴相吉씨는 '나와 제3공화국'이란 회고록에서 1963년에 가까이서 지켜 본 朴正熙를 이렇게 묘사했다.

비장감 속의 憂愁

<1963년 1월 중순 어느 날 최고회의 의장께서 만나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안내하는 대로 지정된 곳까지 따라갔다. 장소는 한남동 중턱의 어느 外人주택이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들어섰다. 朴正熙 의장을 선두로 당시의 실력자 몇 분이 뒤따르고 있었다. 단 둘이 되자 박 의장이 말했다.
"도무지 틈이 나야지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이것저것 번거로운 말이나 완곡한 표현은 전혀 없고 간결, 소박한 딱 한 마디였다. 얼굴을 쳐다보니 眼光은 바위를 뚫을 듯한데 어딘가 피곤하고 憂愁가 스쳐 가는 비장감 같은 게 엿보였다. 나는 별로 말을 안 했고 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완전히 믿고 마음 한 구석에 점쳐 있던 어떤 초점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통고해 버리는 식 같기도 했다. 나로서는 바로 내 앞에 국가가 서 있고, 무서운 운명의 주체가 서 있는 듯한 엄숙감과 절대자의 번쩍하는 결심과 단심(丹心)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었다. 며칠 후 朴 의장은 밤 열시가 넘어 나 혼자만을 은밀히 불렀다. 이 날 비로소 본론이 나왔다.
"혁명인가 뭔가 했는데 국민들도 그렇고, 심지어 다리(漢江)를 같이 넘은 자들까지도 정확하게 내 심정을 몰라주니 미국X들도 그렇고…. 접장인가 교수라는 자들도 무얼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만 하고…가슴 속에 있는 생각을 시원하게 정확하게 털어놓을 방법이 없을까요?"
"…"
"정치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이놈 말 다르고 저놈 말 다르고 앞으로 그때그때 요긴한 대목에…의견을 좀 말해 주십시오."
"…"
"혁명이라고 하지만 헤이따이(兵隊)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도대체 구정치인들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이때 가난을 벗고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벗지 못하면 언제 기회가 있겠느냐?"고도 했고, "특권층의 黨爭, 勢道가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해방이 되고 민주세상이 되었다는 마당에 또 특권층이 설치니 원… 이 나라 백성들은 언제 햇빛을 봅니까?"라고도 하면서 노기 띤 안광에 슬픔이 가득차 있기도 했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입을 꽉 다물면서 지그시 결심했다. 이분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리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이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쇄(忙殺)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같은 담론은 성질상 단 두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였으며 그같은 기회는 미리 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시로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메모한 예정된 내용이나 때로 그분이 말하는 자유로운 의견들을 중심으로 대충 골간을 잡아 당초 세운 논술 구성방향에 따라 글을 써내려 갔다.
나는 이 책을 쓴 전후 6개월 이상을 그 분이 마련해 주겠다는 워커힐의 호화로운 별채를 마다하고 남산 밑의 3류 여관인 회현여관의 6첩 다다미방에서 지냈다. 50장에서 100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곤 하였는데 바로 이 前後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체로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難題(난제)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 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이런 중에서 어느 사이 내 스스로도 그분의 일부 의논상대가 되어 버리기는 하였으나, 무엇보다도 그분의 책을 저술함에 있어 최대한 정확을 기하는 데에 기본적인 도움이 되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 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 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민족적 민주주의론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朴正熙의 主敵은 李朝의 지배계급, 즉 양반이며 그 정치문화를 이어받은 한민당 계열의 舊정치인이요 그들의 당파성이다. 李朝, 李朝의 殘影, 그리고 李朝的인 것을 통틀어 그는 봉건적 잔재라느니 前근대적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제시한 조국근대화 혁명의 핵심은 李朝的인 것, 즉 양반정치 문화의 청산이었다. 朴正熙는 양반정치 문화의 전통이 한민당·자유당·민주당 계열 舊정치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고 규정하고 이들을 가식적·사대적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즉, 양반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서 권력쟁취를 위해서 편의상 자유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들고 나왔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박정희가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지적한 양반정치 문화의 병폐는 분열성, 사대성, 부패·무능·독선으로 요약된다.
<언(言)으로는 수(首)를 가고 행(行)으로는 말(末)을 차지하면서, 거기다가 시비와 패거리라면 창자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던 이 악유전(惡遺傳)을 우리는 이제 거부할 때도 되지 않았던가.>
朴正熙는 1963년 9월23일 5代 大選 방송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는 법입니다.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강압이다', '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라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인 것입니다. 본인이 가진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그 자세와 조건이 다릅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건전한 민족주의의 바탕 위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朴正熙는 저서와 연설에서 '건전한 민족주의'의 各論을 전개하고 있다. 自立경제, 自助的 태도, 自主정신이 그것인데 自立경제 건설을 이 모든 것의 제1 가는 기본으로 삼고 있다. 즉 국가예산의 52%를 미국원조에 의존하는 나라는 독립국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우선 自立경제를 건설해야 그 뒤에 自主정신도 생기고 自主국방, 복지국가 건설, 최종적으로 통일도 가능해진다는 논리이다. 朴正熙가 저서와 연설에서 제시한 이런 우선 순위의 국가발전 戰略은 代를 이어 한국에서 실천되었고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 朴正熙는 이런 방향의 국가 근대화는 정치안정 속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선거유세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李朝的 당파싸움 체질을 강화시킨 인맥 중심의 붕당(朋黨)을 대체할 이념중심의 公黨이 생겨야 정치안정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고 그는 보았다.


봉건과 싸워 戰死


그러나 朴正熙가 조직한 그 公黨은 19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JP 對 反JP 세력으로 분열했다. 동시에 야당은 다시 舊정치인의 朋黨으로 돌아가 朴正熙가 말살하려 했던 양반정치 문화는 되살아났다. 1963년 초의 연설에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그의 좌절과 분노가 처절하게 스며 있다. 자신의 민정불참을 선언한 2·27선서식에서 朴正熙는 "본인은 오늘 혁명 정부가 당초 기도했던 '세대의 교체'라는 정치목표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음을 솔직히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고백하면서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서둘러 연설을 끝내고 있다.
朴正熙가 3·16선언으로 2·27선언에서 약속한 民政불참 약속을 파기한 뒤 자신을 '불행한 군인'으로 부르면서 군복을 벗고 5代 대통령에 뛰어든 번의와 번의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표차 15만6000이라는 힘겨운 승리를 거머쥐었다. 軍政 2년6개월의 업적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朴正熙로서는 15만6000표차의 선택은 섭섭한 것이었다. 그는 前근대적 양반정치 문화의 벽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두터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朴正熙는 尹潽善 후보에 대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사대적으로 맹종하는 가식적 민주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大義명분이 돼 있었고 '한국적 민주주의'니 '민족적 민주주의'니 하는 自主的 변용을 이단으로 몰아버릴수 있는 힘을 쌓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한민당-민주당-민정당으로 이어진 야당의 주류는 朴正熙에 의하여 양반 정치 문화의 잔재로 비판받긴 했지만 민주화 정통세력이란 명분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朴正熙가 물리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에도 정치와 언론, 그리고 지식인 사회에서 그는 챔피언이 될 수 없었고 기껏해야 도전자였다. 야당, 또는 양반정치 문화 세력은 항상 强者였고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한국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한반도의 좌익세력도 反朴正熙 전선에 동참했다.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식 민주주의, 당파성과 위선적 명분론에 강한 전통적 정치문화, 여기에다가 증오의 과학이자 기만과 선동의 기술인 공산주의 이념까지 뒤섞여 비빔밥이 되긴 했지만 바깥으로 발사되는 구호는 '민주화'로 통일되었다.
10·26 그날 밤 朴正熙는 가슴이 관통당하는 총격을 받고도 "난 괜찮아"라고 했을 때 그는 3面초가 상태였다. 그는 북한, 미국, 국내의 민주화 요구 세력으로부터 3面의 포위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 출신인 다나카 메이(田中明)교수(日本拓殖대학)는 "그는 한국의 봉건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말했다.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정치분야에서 勝者는 양반(민주화세력)이고 敗者는 朴正熙였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는 1992년 大選 직전에 쓴 '例外시대의 종언'이란 논문('한국정치를 투시한다'란 책에 수록. 吉安社 발행, 1995년)에서 주목할 만한 분석들을 제시했다.

富國强兵을 외면한 양반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언급해 온 바 있지만, 1961년 朴正熙 장군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와, 그로 말미암아 성립된 軍人정권은 한반도의 정치·문화사상 참으로 희귀한 존재였다. 한국의 역사상에서 軍人정권의 前例를 찾아본다면, 700년 전의 고려시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로부터 조선시대 600년 동안 文民우위·武人멸시의 풍조로 일관해 온 것이 한국사회였다. 따라서, 朴正熙 장군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군인이라는 '人種'이 집권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65년, 즉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년 후에, 해방 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나는 당시 一流 지식인으로부터 참으로 놀라운(나로서는) 고백을 들었다.
"우리들은 군사혁명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정부를 넘어뜨릴 수 있는 무장집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우리들의 시야에 있었던 것은 학생이나 노동자들뿐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사정에 어둡고, 역사적으로 武人정권에 익숙해 있었던 일본인들은 그것이 예외라는 것을 모르고 '通常의 한국'이라고만 착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눈부신 경제건설을 이룩함으로써 일본인의 착각을 한층 더 북돋웠다. 그만큼 성과를 올린 정권이니 기필코 한국의 체질에 맞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지, 예외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通常'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회에 있어서 '통상'이란, 그 사회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때문에 그 사회의 토양에 가장 알맞은 인간의 존재양식일 것이다. 한국 정치에 있어서 '통상'이란 보수유산층(保守有産層)의 인사들이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면서 벌여 온 권력쟁탈전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연면히 명맥을 유지해 온 한국의 정당은, 공산세력의 진출에 위기감을 느낀 地主·사업가·관료들에 의해서 조직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계열로서, 김영삼씨다 김대중씨도 이 계열 속에서 정치가로서의 기량을 연마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부정하고 도전해 온 공산세력이 모험주의로 치달아, 美군정의 탄압으로 以北으로 도망하고 난 후부터는 부전승자(不戰勝者)로서 한국정치를 독점해 왔다.
이들은 거의가 왕조시대의 지배층·양반의 가문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며, 으레 전통적인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이 양반이라는 것은 중국의 학예를 습득하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도덕(修己)과 정치(治人)를 두 기둥으로 하는 유교의 학습자였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백성을 敎化하고 지배하는 有資格者라고 굳게 믿어마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춘추의 필법을 구사하여 대의명분(이데올로기)을 논함에 있어서는 능하나, 대개의 경우 실용적인 학문에는 어두워 육체를 쓰는 무예나 노동을 천시했다.
그들이 풍기는 태연자약한 大人의 풍모에는 동양인의 정신적인 고향을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지만, 그러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과제를 어쩔 수 없이 수행해 나가야만 하는 근대국가의 경영자로서는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조선시대 말기, 일부 志士들이 그런 중세적인 사상 풍속으로부터 벗어나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亡國의 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을 때이며 탈피의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는 조선인에게 근대政治의 훈련장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해방한국의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전통사회로부터 양반들의 작풍과 그 정치감각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양반의 나라와 민초(民草)의 나라

<그들(朴正熙와 그 부하들)을 舊시대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가'감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반정치가들의 '나라'와 압도적인 농촌출신자들이 많은 군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교들(박정희 장군을 비롯해서 빈농출신이 많다)의 '나라'와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양반의 후예이며, '나라'라는 것은 인민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자기들의 관장물이라고 생각해온 조상의 피를 이어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자에 대해서는 격렬한 저항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라'를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지도·지배를 받는 일반 백성들은 '나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소유자'인 양반은 하층의 백성들보다 훨씬 애국자(오늘날의 의미에서)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유교라는 초국경적(超國境的)인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이며 모화사상(慕華思想)에 흠뻑 젖어있던 양반의 '나라'는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국가보다도 훨씬 상대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韓末(한말)의 의병투쟁 때 조상의 忌日이 다가오면 戰場(전장)에서 이탈, 황망히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선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현대에서는 60년대의 말엽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有名인사들의 자제가 징병을 기피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던 정부가, 그러한 젊은이들과 부친의 이름을 나란히 해서 신문에 광고 형식으로 발표한 것을 본 적도 있다.
서양에서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즉 귀족의 의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朴정권은 그러한 종래의 '나라'를 농민들도 '내 나라'라고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근대 국민국가로 재편성하려고 했다. 박정희씨는 군인이었지만, 군사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함이 없이 오로지 경제건설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국민에게 안정된 사회를 보장한다. 그렇게만 하면 거기서 얻어지는 안정감이 이번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 상호간에 유대(紐帶)를 형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한국정치를 더듬어 보면, 어떤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전통에 반역해서 '예외'를 지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때까지 야당이나 학생 등 反정부운동 그룹들은 독재자의 가혹한 탄압으로 자기들이 얼마나 학대를 받아왔는가를 정력적으로 호소해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한 정부·여당, 약한 야당'이라는 통념을 구축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체포하고 투옥하는 권력측은 한없이 강해 보인다. 하지만 선거에서 나타나는 정치력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야당도 결코 약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국민들은 '예외'의 정부가 쌓은 성장의 과실은 향수(享受)하면서도, 한국의 토양에 알맞는 야당인들의 언설·행동에는 심정적으로 공명하고 야당에 한 표를 던져왔던 것이다.
朴정권 성립 이래 실시된 9회의 총선거 중 야당 전체의 득표율이 여당의 득표율보다 밑돈 것은 불과 세 번뿐이었다. 더구나 그 중 두 번은 4.3%, 0.7%라는 미세한 차였다. 따라서 '예외'의 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서 정신없이 뛰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권이 그나마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名士 정당의 고질(痼疾)로서 야당이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과, '예외'측에 朴正熙라는 카리스마가 있어서 가까스로 劣勢를 부축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죽은 뒤엔 어쩔 수 없이 쇠퇴의 길로 들어갔으며, 90년대에는 여당이 김영삼씨를 영입함으로써 政界는 舊야당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게 되었다. '예외'의 시대는 완전히 끝장이 난 것이다.
여기서 또 착각이 생겼다. 군인정권이 퇴장하고 '예외'로부터 '통상'으로 추이(推移)하는 과정을 민주 저항의 승리, 즉 민주화의 진전이라고 보는 착각이다. 야당 세력이 민주화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권력에 항의하고 저항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화를 부르짖은 사람이 곧 민주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된 후의 서울의 봄(80년)이라고 불린 시기나, 1987년 말의 대통령 선거, 혹은 이듬해 봄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 때―각종 규제가 소멸되고, 민주화 열기로 전국이 들떠 있던 시기―에 어떤 광경이 벌어졌는가를 알고 있다.
지난날 권력의 폭력을 규탄하고 민주화를 절규하고 있었던 兩金氏의 지지자들이 각목을 휘두르면서 난장판을 벌인다든가, 돌이나 화염병으로 반대파 후보의 연설을 방해하는 등, 폭력 광경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政界 일부의 현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에 '민주세력이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 언어 모순적인 현상을 빚었으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 언론의 자유마저 위협을 받는다는 사태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정치가 '예외'의 시대를 매장해 버리는 '통상'으로 복귀한 것은, '예외'라는 것을 참아가면서 새나라 건설을 추진해 온 견인차 격인 지도자가 없고, '통상'과의 갈등에 견디어낼 만한 에너지가 체제측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에너지가 없어지면 한국의 정치토양에 알맞는 '통상'이 부활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다.>

"朴正熙 18년은 한국 역사상 例外의 시대"

다나카 교수는 全·盧정권을 예외의 시대, 즉 武人시대로 보지 않고 있다. 이 두 군인출신 지도자는 朴正熙와 같은 논리와 배짱을 갖지 못하고 양반정치 文化에 굴복해 갔기 때문이란 평가이다. 金泳三 대통령의 이른바 文民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쓴 이 논문에서 그는 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예외에서 통상으로 복귀했을 때, 즉 한국인의 기질에 알맞는 文民정치가 되돌아오려 할 때 금방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기체질에 맞지 않는 예외의 시대에 건설과 성장이 이루어지고 체질에 맞는 정치가 부활하려 할 때 막다른 골목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다나카씨가 지적한 兩班(양반)정치, 즉 통상적 한국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는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한일합병의 예를 들어 양반정치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조의 지배엘리트는 임진왜란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국가 위기 관리에서 똑같은 실수를 그 뒤 세 차례나 되풀이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가져왔다.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통신사의 正使 黃允吉의 전쟁임박론에 대해 副使 金誠一이 전쟁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것은 다분히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의 운명과 관계된 문제에 대한 판단에서도 당파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사람이 어떻게 존경받는 학자로 지금껏 추앙될 수 있는가―이런 분위기가 바로 국가나 국민에 대한 애정 없이 오직 권력투쟁만 해온 양반文化의 전통이 아니겠는가―라고 다나카 교수는 지적했다.
다나카 교수는 또 金誠一을 옹호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들어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지식인의 풍토를 비판한다.
<요컨대 선생(김성일)은 군자인(君子人)이고 소인편(小人便)은 아니다. 일본 수신사로서는 적격자이지마는 탐정군(探偵軍)으로는 대부당(大不當)한 것이다. 참으로 왜군이 쳐나올 것을 몰랐다면 탐정군으로서의 자격은 없었던 것이지만 王命을 존봉(尊奉)해서 굴욕은 당하지를 않았으니 수신사로서의 임무는 다하시었던 것이다. 수신사는 최고의 인물을 선견(先遣)하는 것이나 탐정군은 최하의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최고의 인격만이 할 수신사의 임무는 수행하였는데 최하의 인간만이 할 탐정군의 자격은 없다고 해서 충신을 간신으로 폄하(貶下)시키는 자는 탐정군의 편(便)이고, 수신사의 편(便)은 아닌 것이니 그러면 그는 최고의 인물이 아니라 최하의 인물이 아닐까(柳正基, '國譯 鶴峰全集' 해설에서).>


文民정부는 양반정치문화로의 복귀인가


조선조의 양반은 보통인간과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명분론을 정치무기로 삼아 政敵제거 게임을 벌이는 데는 열정을 불태웠으나 自主국방이나 民草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은 약했다. 自主국방에 무관심하니 외교감각도 둔감했다. 망해가는 明에 충성하다가 신흥제국 淸에 두 번이나 국토가 유린당한 뒤에도 또다시 국제정세를 오판하고 내부분열을 일으켜 韓日합병을 불렀다. 국방과 외교와 경제에 대한 무관심과 反비례한 내부권력투쟁의 격화라는 양반 지배층의 본질은 일본에 나라를 내준 뒤에도 제대로 비판받지 않고 온존되었다.
해방 뒤에는 자유민주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국정치를 주도하다가 6·26남침을 당했으나 이번에도 외국의 힘을 빌어 겨우 國體를 보존했다. 반성이 없는 이 양반정치세력은 朴正熙 18년의 예외적 시대를 견뎌낸 뒤 全, 盧 정권하의 과도기를 거쳐 金泳三 시대에 와서 만개(滿開)하고 있다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다. 여기서 다나카씨는 위대한 건국대통령이자 개혁가인 李承晩을 한민당類의 守舊的 양반정치인과 구별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文民이란 말은 먹물, 선비, 士, 또는 양반으로 통한다. 金泳三의 소위 문민정부에서 이뤄진 있는 학자우대, 역사관논쟁, 옛 중앙청 철거, 군사 문화 비판, 국방·외교정책의 혼란, 더 극렬해진 정치판의 권력투쟁, 관념적 정치구호의 범람. 이런 것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한국의 통상적인 양반정치 文化에 알맞는 정상적 행태라는 것이 다나카 교수의 해석이었다.
朴正熙는 유교적 관념론에 문제를 제기한 유교적 실용주의, 즉 실학의 실천자였다. 실학의 핵심은 士農工商의 신분제도에서 생산성이 약한 양반계급, 즉 士를 약화시키는 대신 商工을 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商工農士식의 계층서열을 주장하였다. 1962년 5·16기념식에서 그는 '농민, 노동자, 소상인, 기업인, 지식인, 학생'의 순번으로 호칭했다. 朴正熙는 생산계층을 키우면 양반계층이 자연스럽게 약화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민주화가 되자 한국에선 士를 대표하는 현대의 양반세력인 정치인, 검사, 기자가 칼자루를 잡고 기업인과 군인들(공교롭게도 구속된 두 대통령은 工高출신이고 구속시킨 현직 대통령은 문리대 출신이다)을 벌벌 떨게 하였다.
양반적 政治문화는 관념적, 위선적, 사대적이란 점에서 한국식 좌익문화와도 많이 닮았다. 한국의 좌익세력이 끈질긴 것은 양반문화의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린 때문이다. 李承晩, 朴正熙 노선은 이런 토양을 바꾸려 한 실용적, 현실적, 자주적 노선이었다. 이승만의 建國혁명,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은 한국 정치문화의 기반이 되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개선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자유와 자율을 기반으로 한 한국사회의 力動性을 창출하였다. 이 力動性이 한국 정치의 문제들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남북한의 守舊세력을 역사의 쓰레기더미로 던져버리는 마지막 혁명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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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근대화 혁명가의 육성과 숨결, 그리고 꿈
-朴正熙의 '국가와 혁명과 나'의 재발간에 붙인 해설문


권력을 쥐고도 부패하지 않는 혼

근대화 혁명가로서 비장한 생애를 살다가 간 박정희(朴正熙)의 국가관, 혁명관, 인간관을 보여주는 박정희 저 "國家와 革命과 나"(1963년 9월 1일 향문사에서 초판 간행)를 34년 만에 다시 출간(지구촌 출판사, 1997년)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담고 있는 격정과 비전이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을 소망했고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했다.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은 자주적인 통일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미완성의 대업(大業)으로 남아 있다. 그는 부하의 권총에 의해서 생이 끝나고 지식인들에 의해 사후(死後) 격하를 당했으나 서민의 인정(人情)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 한국인의 가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박정희 시대 18년. 박정희 사후(死後)18년을 다 거치면서 우리는 이 거목(巨木)이 드리우고 있는 큰 그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아낌없이 주고 간 이 나무를 좀 떨어진 자리에서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이 책에서 토로했던 포부를 이해하고 또 그의 성취와 비교해가면서 채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혁명아 박정희의 인간을 그 숨결까지 느끼게 해준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반 0시……"로 시작되는 서문과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로 시작되는 마지막 쪽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분기(噴起)시킴으로써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분기시켰던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18년 만에 세계 최빈국(最貧國)을 선진국의 문턱까지 끌어올려다 놓은 그의 지도력을 지탱한 것은 권력을 잡은 뒤에도 부패하지 않은 그의 혼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가원수의 저서에 실리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國家와 革命과 나』의 초고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를 도와주고 있었던 박상길(朴相吉, 전 청와대 대변인, 水協 회장) 씨의 회고이다. "그날도 장충동 공관에서 박 의장과 담론을 나눈 끝 무렵이었습니다. 화제는 아마도 박 의장이 겪었던 가난이었을 겁니다. 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朴 의장이 다른 방에 갔다가 오더니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게 하나 있는데 넣을 데가 있겠습니까'하고 메모지를 건네주는 거예요. 받아보니 친필로 쓰고 고친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조판이 다 돼 있었던 책에 무리를 해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인지, 그분 자신의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도 창작일 겁니다. 지방 출장 때의 체험에 근거한 시작(詩作)이 아닌가 합니다."
박상길 씨는 자신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을 도와서 이 책을 정리하던 때(1963년)의 이야기를 '나와 제3, 4공화국'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공개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쇄(忙殺) 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 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메모한 예정된 내용이나 때로 그분이 말하는 자유로운 의견들을 중심으로 대충 골간을 잡아 당초 세운 논술 구성 방향에 따라 써 내려갔다. 50장에서 100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 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고 하였는데 바로 이 전후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체로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난제(難題)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하나의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용성과 주체성이 혁명의 논리

모든 성공한 혁명에는 논리와 철학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박정희 식 근대화 모델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근대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논리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은 적다. 이 책의 재출간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사상에 대한 재조명일 것이다. 박정희 사상이 지금까지 별로 정리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논리를 어렵고 고상하고 정교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투박하게 툭툭 여기저기 던져놓기만 했던 몇 줄의 글들을 다시 모아서 지나간 세월의 캔버스에 배열해놓으면 비로소 이 혁명아가 그리고 있었던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설계도, 그 밑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1급 지식인이자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겨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타파해간 혁명가였다. 삼국통일로써 우리 민족사에서 공간적인 현상 타파를 가져온 김유신(金庾信), 그리고 한글 창제로써 정신적인 현상 타파를 꾀했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될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였다. 그는 청빈(淸貧)을 위선자와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경멸하고 우리 민족의 숙명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사의 물질적인 제약을 타파해간 사람이다.
혁명가 박정희의 진정한 혁명성은 그가 생전에 자신의 혁명논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점에 있다. 혁명이 이념화되면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혁명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주의나 학설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어떤 주의나 학설도 거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실용성과 주체성이 그의 진정한 혁명논리였다. 그는 섣부른 이념이 없을 때 영구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박정희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어디에도 합헌(合憲)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박정희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제적 이식(移植)과 맹목적 추종을 비판했으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정신이 강한 그로서는 외래 정치사상을 부정하고 싶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란 이름이 붙지 않는 한국식 정치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자신과 한국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 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각양(各樣)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바로 이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 요인은 유교의 실용성과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동원하여 이를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한 영원한 자전력(自轉力)을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장점을 뽑아내어 종합한 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주체적 관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게적 발전 전략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 전략은 자조-자립-자주의 정신적 근대화 과정(이를 그는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인간 개조라고 했다)을 그 추진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겠다는 자조(自助)정신이 생겨야 자립경제가 건설될 수가 있고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자주국방을 할 수가 있다. '자주국방능력이 없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다'는 생각을 확집(確執)처럼 갖고 있었던 점에서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에서 김유신과 가장 닮은 자주적 국가관의 소유자이다. 박정희는 국토통일도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건설한 다음에야 우리 주도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통일관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밝힌 내용이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녹음 테이프에서 가감 없이 풀어본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 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 빤해졌다 해서, 소강 상태라 해서 안심을 한다든지 만심을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박정희가 말한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어떤 객관적 여건'이 지금 조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호기를 잡아챌 만한 주체성과 의지력과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이 없다는 점이다. 주변 4대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남한 주도에 의한 통일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통일한국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중국 편으로 기울까 걱정하고 있다. 차라리 기울어 가는 북한을 연착륙이란 이름 아래서 지원하여 분단의 항구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 정부의 목표가 북한체제의 흡수통일인지 평화 공존의 항구화인지 알 수가 없다. 북한 당국은 민족의 원수, 반(反)국가단체, 그리고 우리의 적이며 북한동포는 김정일(金正日) 집단에 의하여 인질로 잡혀 있는 구조의 대상이다. 이런 구분 없이 북한 당국과 북한 주민을 다같이 북한이라고 표기하니 화해의 대상에 민족의 원수가 포함되어 있다.

一流국가에의 염원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이 당시 지식인의 패션이었던 민주주의에의 맹목적 추종을 거부한 주체성에서 비롯되었듯이 한반도 통일도 요사이 주변 강국과 국내 지식인들의 패션이 되고 있는 위선적 평화통일론을 우리가 거부하고 피아 구분, 목표, 전략이 분명한 승공통일, 즉 북한을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의 체제로 흡수하는 통일로 나갈 때만 선진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마지막 관문 통과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가 이 책에서 약속했고 그가 실천했던 '민족중흥―조국 근대화'의 대업은 통일이란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서 그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34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읽을 때 우리에게 던지는 박정희의 물음은 '당신들은 어떤 통일을 하려고 하는가'이다.
삼국통일과정에서 신라도 지금 한국과 비슷한 기로에 섰던 적이 있다. 당(唐)은 신라와 손잡고서 백제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내친김에 신라까지 쳐서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이때 대책회의가 열렸다. 김춘추(金春秋), 즉 태종무열왕은 '아무리 그렇지만 우리를 도와서 백제를 멸해준 당(唐)을 상대로 어찌 싸울 수가 있겠는가'하고 약한 태도를 보인다. 이때 병권(兵權)을 쥐고 있던 김유신이 나서서 이런 취지의 말을 한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개는 주인을 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김춘추와 김유신의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김춘추는 당을 우호적 강대국으로 생각하고 평화적 현상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요사이 미국을 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진 시각은 이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당이 비록 우방이라고해도 조국의 자존심과 생존권을 위협한다면 사생결단의 자세로써 대결하여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박정희가 가졌던 미국에 대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한 감사를 항상 간직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 정책적 표현이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 건설이었다.
삼국통일과정에서는 결국 김유신의 대당(對唐) 결전의지가 채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통일이라 하면 김춘추보다는 김유신을 먼저 연상하는 것도 김유신의 대당(對唐) 결전 전략에 의해서 한민족의 삶터가 확보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북한통일과정에서는 과연 박정희식 대미(對美) 자주노선이 계승될 것인가. 아니면 김춘추식 평화론이 선택될 것인가. 김유신과 박정희 노선에는 희생이 따른다. 전쟁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희생정신, 그런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있어야 한다. 그런 희생과 고통과 결단과 단련을 통해서 일류국민이 되고 일류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유신―박정희 노선은 바로 일류국가가 되는 전략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열전(列傳) 김유신과 박정희의 이 저서를 같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두 사람이 꿈꾸었던 통일조국은 二流국가로 자족하는 수준의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방 뒤에 이승만(李承晩)이란 위대한 자주적 지도자의 영도 아래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이 잡아놓은 터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건실한 보금자리를 건설했다. 이제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간 형제를 다시 찾아와서 온전한 가정을 마련하는 단계에 올라섰다. 그래야만 이웃에서 우러러보는 가정, 즉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국가가 될 것이다. 이승만―박정희를 이어서 누가 우리 나라를 이끌고 일류국가로 가는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것인가. 그가 어떤 지도자여야 할 것인가. 이런 화두(話頭)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한국인에게 이 책은 많은 감흥과 감명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또 선진 통일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웅지를 품은 정치인들에겐 있어서도 필독서가 될 만하다.

봉건적 잔재와 싸우다가 전사

정치인이 자신의 포부를 미리 밝히고 이를 충실히 실천해간 예로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있다.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우월성과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줄기차게 추구하다가 세계를 2차세계대전의 참화로 몰고 갔다. 박정희도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國家와 革命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 전술, 정책적인 수정은 있었지만 본질적이고 전략적인 수정은 없었다는 사실을 3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언어감각의 천재이고 화가는 색감(色感)의 천재이듯 영웅은 행동의 천재이다. 복잡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의 본질을 간단하게 파악한 다음 단순화된 목표와 전략에 일생을 투척하는 도박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영웅이다. 영웅의 생애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행동의 집중적 투자를 위해서는 생략하고 무시해야 할 인정, 사정, 과정, 때로는 인명의 희생 때문이다. 이런 영웅의 생애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범인(凡人)은 살았을 때의 그를 알아주지 못하고 그가 죽고 나서는 그가 성취한 것들만 공짜로 즐기려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죽음은 그가 혁명의 대상으로 삼았던 봉건적 잔재, 즉 사대주의, 위선적 명분론, 당파성과 그가 도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식 민주주의가 연대하여 그를 삼킨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국내 민주화세력에 내재(內在)된 사대성과 명분성을 중시하는 시각이다. 1979년 10월 그는 미국의 인권 압력과 국내 민주화세력의 도전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뉴욕 타임즈>와 한 기자회견이 미국의 내정간섭을 요청한 것이라 하여 화를 낸 박정희는 김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게 되었고 이는 부마(釜馬)사태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불안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권부(權府) 깊숙한 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드디어 김재규(金載圭)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된다. 이 김재규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여러 요인 가운데는 차지철(車智澈)에 대한 증오심과 차 실장을 편드는 박정희에 대한 원한 이외에 민주화세력으로부터의 영향과 미국의 어떤 작용을 상정할 수 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밤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면서 궁정동 식당으로 들어가 총을 쏘았고 법정에서는 박정희가 사력(死力)을 다해서 추진한 자주국방정책을, 한미(韓美) 안보협력체제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조선조의 양반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사대적 정치인으로 보았고 김영삼은 박정희를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독재자로 보았다. 미국과 국내의 지식인, 학생세력은 김영삼 편을 들었다.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다.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
요즈음 들어서 박정희에 대한 인기가 갑자기 높아진 것같이 말하지만 서민 대중 속에서 그의 인기는 변함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 정치인(그것도 민주계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평가가 높아진 것이 새로울 뿐이다.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를 앞당긴 것은 '민주화의 기수' 김영삼의 실정(失政)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상징하는 민주화세력의 나상(裸像)을 알게 됨으로써 박정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의 죽음을 예약한, 봉건적 잔재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당돌한 도전의 가치를 범인(凡人)들도 이제는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國家와 革命과 나』의 재출간은 시공(時空)을 뛰어넘어서 고독했던 이 혁명가의 육성과 숨결을 직접 느끼며 역사와 대화하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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