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1993년 11월호에 실렸던 글('金泳三과 朴正熙의 화해')중 일부.
'내부의 敵'에겐 무기를 들어야
역사에서 배울 만한 교훈이 하나 있다. 전(前)정권이나 역사를 격하시킨 지도자는 대체로 실패했다. 스탈린을 격하시킨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를 부정한 고르바초프는 실패했으나 毛澤東을 보호한 등소평은 성공했다. 毛澤東을 격하하면 毛澤東 지지세력을 敵으로 돌리게 된다. 당의 내분은 물론이고 국론의 분열이 예상된다. 그러한 정치불안을 안고는 경제 개방 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다. 毛澤東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鄧小平은 돈 안들이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시키고 안정시켰다. 경제발전은 안정된 권력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金泳三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전(前)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의 연장선상에서 국민들을 상대로 「내부의 敵」 「기득권층」 「조직적 반대세력」 「수구세력」 「反개혁세력」이란 대결적, 갈등촉진적, 분열적 이미지의 말들을 거침없이 쏘아붙이고 있다.
『돈 없는 사람이 부끄러웠던 시대가 가고 오히려 돈 많은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을 했던 金대통령이 요사이는 청부(淸富)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으나 먼저 뱉은 말을 지우기는 어려운 법이다.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稅法을 개정하겠다』는 대통령의 말도 있었다.
국민에게 고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정하는 대통령? 이런 말은 빚이 된다. 북한의 악마적 정권을 향해서는 동반자라고 부르면서 국민을 향해서 「내부의 敵」이라니, 敵은 전투와 제거의 대상이다. 「내부의 敵」은 혁명정부나 전체주의 국가가 쓰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의 뒤에는 계급적, 反역사적, 그리고 反자본주의적 논리가 스며 있다.
金대통령의 반공적 의식구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알게 모르게 어떤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는 보장도 없다(북한의 영향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의 기본 원리인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배치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의 영향을 가리킨다). 취임사에 나온 문제의 구절―「어떤 동맹국·사상·이념보다도 민족이 중요하다」는 말은 북한의 對南통일전략에 있어서 기축이 되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엉터리다. 사상이 민족보다 더 중요하기에 한반도와 독일은 分斷되었고 異民族의 집합체인 미국은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동의함으로써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북한정권이 문제의 이 구절 때문에 처음엔 金泳三정부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취임사에 이런 구절을 끼워 넣은 세력이 「수구세력」 「내부의 敵」 따위의 계급적 시각에 기초한 용어와 反자본주의적 용어를 대통령과 그 주변에 공급하고 있는 인맥과 일치한다면 이것은 「언어의 유희」 수준에서 넘길 일이 아니다. 文民 대통령은 총칼이 아닌 말로써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이야말로 國政운영의 풍향계인 것이다.
反YS로 돈 朴正熙 평가세력
金泳三대통령은 이런 말로써 득을 보고 있는가. 아니다. 그는 큰 손해를 보고 있다. 쓸데없이 많은 敵을 만들고 있다. 정말로 金대통령의 개혁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으면 구체적인 증거를 잡아내어 擧名해서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내부의 敵」 「기득권층」이란 계급적·혁명적 말을 쓰면 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기성세력 전체를 한 묶음으로 삼아 매도하는 결과를 빚고 만다. 기성세력은 비록 숫자에선 소수일지 모르지만 한 조직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층이다. 우리 사회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敵으로 돌리고 책임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인기에 연연하여 國政을 이끈다면, 즉 선거운동 하듯이 나라를 끌고 간다면 결과는 뻔하다. 기업경영가 출신의 한 국회의원은 말했다.
『회사를 경영할 때 보니까 아래층 80%가 하자는 대로 하니까 망하더라. 어차피 장(長)자 붙은 관리층의 의견대로 해야 잘 된다』
한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단순시각을 연장시켜서 개발연대의 주인공으로서 세계사의 금자탑을 이룩한 오늘날의 기성세력을 매도하여 마음에 상처를 낸다면 金대통령이 딛고 있는 권력구조와 중앙부부터가 내려앉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정치성향을 대표하는 세 사람이 있다. 金泳三, 金大中, 그리고 죽은 朴正熙다. 지지계층의 넓이에 있어서는 朴正熙가 제일이다. 지난해 가을 동아일보사가 (주)동서조사연구소에 의뢰해서 조사한 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평가를 보자.
朴正熙는 수 52.9%, 우 33.9%, 미 9.9%, 양 1.9%, 가 1.3%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全, 盧 두 사람은 미의 분포율이 가장 높았다). 朴正熙는 호남지방에서도 60% 이상의 지지율을 보였다. 金대통령이 역사를 후퇴시킨 장본인이라고 못박은 인물에 대한 국민의 판단은 전혀 다른 것임을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이 朴正熙 세력은 지역·계층면에서 金泳三 세력과 많이 겹친다. 金대통령이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면 할수록 朴正熙 지지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고 그의 지지 기반은 분열될 것이다. 실제로 요사이 金泳三대통령의 역사관·인간관·反자본주의적 시각을 가장 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朴正熙 지지세력이지 金大中 지지세력이 아니다.
金正男 수석비서관은 최근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경제적 에너지와 민주화를 이룩한 도덕적 에너지의 생산적 통합이 되어야만 신한국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화 세력은 환상과 전투성을 버려야 하고, 「경제파」는 부정과 부패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경제파는 부패하고 민주파는 도덕적이란 전제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본 것이다. 두 세력의 차이는 도덕성의 차이가 절대로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도덕면에선 인간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두 세력의 차이는 방법의 차이였다. 경제파는 빵 뒤에 자유가 따라온다는 신념으로 빵의 크기를 키우는 데 전념했고, 민주파는 빵과 자유를 동시에 추구하였다. 두 세력의 상호작용이 위기 때마다 생산적으로 통합돼 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두 세력간의 관계는 이렇게 定義돼야 한다. 경제가 발전했기에 민주가 가능했고 민주파의 견제와 저항이 있었기에 경제파의 독재화가 예방되었다. 金泳三 대통령이 「우리는 깨끗하고 너희는 부패한 세력」이란, 도덕적 잣대를 깔고 두 세력을 통합하려고 접근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민주파와 경제파가 서로의 역사적 역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이해하여야만 통합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힘 기르기에 치중한 세 대통령
권력과 인간의 관계를 꿰뚫어 본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역사에 남을 정도의 국가라면 두 가지 요소에 기반을 두어야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그것은 正義와 힘이다. 正義는 국내에 敵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힘은 국외의 敵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힘을 경제, 正義를 민주화로 代替해 본다면 이런 틀을 하나 만들 수 있다. 국가의 흥망은 경제와 민주화를 어떤 순서로, 또 어떤 비중으로 결합하느냐에 의해서 좌우된다. 필리핀과 舊소련은 힘(경제개방)과 정의(정치개혁)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쇠락한 좋은 예이다. 한국과 중국은 경제를 먼저, 민주화를 뒤에 놓아서 성공한 경우이다. 이것은 물질적 토대가 바뀐 뒤에 제도와 의식이 바뀐다는 이 세상사의 일반원칙에도 맞는 방법이다. 인간이 걸음을 걸을 때도 한 발이 먼저 나간 뒤에 다른 발이 더 앞으로 나가는 방식이다. 두 발이 동시에 나가려면 깡충깡충 뛰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경제발전과 민주발전 사이의 간격이 적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간격이 너무 커지면 혁명이 일어나 간격을 단숨에 좁혀 버리고 그 간격이 좁아지면 보폭이 짧은 꼴이 돼 발전속도가 늦어진다. 정치학자들이 「희생적 간격」이라고 부르는 경제와 정치의 격차를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성공적으로 관리해 왔다.
李承晩―朴正熙― 全斗煥 세 대통령은 힘의 문제에 더 비중을 두었고 盧泰愚―金泳三 두 대통령은 正義의 문제에 치중한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다. 양진영의 대표선수는 역시 朴正熙와 金泳三 대통령이다. 金대통령도 내심 朴대통령을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경제파와 민주파의 통합은 朴正熙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金대통령의 이해와 인정을 바탕으로 해서만 이뤄질 수가 있다. 朴正熙와 金泳三의 화해는 毛澤東과 鄧小平의 화해에 비견되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 올 것이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라는 신념 가졌던 朴正熙
李, 朴 두 대통령은 그들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朴正熙(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는 그의 정치철학을 담은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출간)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의 실정에는 알맞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경제·정치·사회적으로 균형되지 못한 우리 현실에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연륜을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成人이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어버이의 심리와 같다」
그가 직접 쓴 19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치사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국군의 역사는 建軍 초기부터 공산침략자들과의 투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그들과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또 우리들의 후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생존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공산침략자들이 우리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이겨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평화와 번영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체제는 공산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입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 알거나 또는 절제할 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큰 자유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침략자들은 우리의 내부에 어떠한 헛점이 생기는 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우리도 남과 같이 달고 맛있는 것은 다 먹고 다 누리려고 한다면, 또 그러면서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너무나 세상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朴正熙는 역사의 惡役 자임
이석제(李錫濟) 전 감사원장에 따르면 朴正熙대통령은 金日成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와 승부를 한 번 해보겠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김일성과 맞설 인물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도 강했습니다. 세 金씨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朴正熙는 金日成에 대한 감정을 일기책에서도 원색적으로 나타냈다. 1976년 6월25일의 일기를 본다.
「6·25 26주년이다. 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國土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은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朴대통령은 그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시기상조라고 단호히 거부하고 그에 따른 비난을 감수하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유아독존의 자세를 한 치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北의 金日成과 국내의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협공을 당하면서도 오직 國富증진의 길로 매진하였다. 그의 장기집권은 권력욕보다는 일에 대한 욕심, 조국근대화는 나 아니면 안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 金日成은, 확인된 것만 해도 네 번 朴대통령의 생명을 노리는 암살·특공작전을 명령했다. 그의 아내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다. 아내의 죽음은 인간 朴正熙의 내면을 붕괴시면서 그의 지도력에 금이 가게 했고 그의 종말을 단축시켰다.
그러나 金日成은 朴正熙를 奮起시킴으로써 한국인의 집단적 신바람을 폭발시켰다. 그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열매맺었다. 朴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시간중 50∼60%를 안보에, 30%쯤을 경제에, 10%쯤을 국내정치·사회문제에 배분하였다. 경제정책도 안보적 발상에서 추진하였다. 농민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게 새마을운동이었다. 자주국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수공장을 만들려고 하다가 그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로 들어갔다.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만큼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구된 것이 행정수도 구상이었다. 안보적 관점에서 출발한 경제정책이 대성공을 이룬 데는 역사의 時運과 함께 朴正熙가 담당한 역사적 악연의 뒷받침이 있었다.
1972년의 유신선포로 朴대통령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예약하고 독재자란 국내외의 비난을 자초하였다. 그 대신 그는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國力을 경제 발전에 집중시켰다. 특히 1973년부터 추진한 중화학공업 투자에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하였다. 1973년과 79년의 두 차례 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투자에 국가의 운명을 건 일대 모험을 감행하도록 한 것은 朴正熙의 긴 안목과 역사의지였다. 남덕우(南悳祐) 당시 경제기획원장관은 최근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에 도저히 재정적 뒷받침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朴대통령은 이런 말씀을 합디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국민이 이를 따라 주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전쟁도 아니지 않는가.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해주어서 되나」 당시엔 무리로 보였던 게 돌이켜 보면 최고의 기회였음을 알게 됩니다. 세계 시장에서 최신 설비를 최저가격으로 도입할 수 있었어요. 다른 나라에선 투자를 엄두도 내지 못할 때이니까요. 그 시기를 놓쳤더라면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을 지금처럼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화학공업은 한국을, 차원이 다른 나라로 만들었다. 포항제철, 현대중공업·자동차, 삼성전자 등으로 상징되는 세계적 대기업을 가진 한국의 발전 잠재력은 대만·싱가포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요사이의 수출부진 속에서도 중화학공업만이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金泳三대통령도 그런 면에선 朴正熙의 덕을 보고 있다. 1980년대의 물가안정(기초소재가 헐값에 공급돼 수출제품의 경쟁력이 높아졌다)은 유신시대에 이루어진 중화학공업 투자 덕분이었다. 朴正熙 자신은 중화학 투자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오히려 투자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오르고 이것이 정치불안과 겹쳐 그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朴正熙와 인권
유신시대에 朴正熙는 金日成과의 체제경쟁에서도 압승을 거두었다. 유신선포와 같은 시기에 金日成은 개인 숭배를 강화함으로써 朴正熙의 길을 따랐다. 朴正熙는 정치적 통제를 경제발전의 엔진으로 활용했지만 金日成의 종교적 사상통제는 북한 경제를 枯死시켜 갔다. 7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연간 군사비 투자도 남한에 뒤지게 되면서 경제전의 승리는 군사면에서의 우위로 연결되었다. 朴正熙의 대전략은 선(先)경제발전 후(後)군사력 강화의 자원배분 방식이었다. 그 반대로 金日成은 60년대에 군사제일 노선을 추구하면서 경제의 기반을 망가뜨려 70년대부터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동시에 침하하게 되었다. 朴正熙의 先경제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보호막이 駐韓미군이었음은 물론이다.
朴正熙를 역사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를 던져볼 필요가 있다. 朴正熙는 과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人權을 억압했나? 체육관선거, 불법 연행과 고문, 정보정치, 야당탄압 등 드러난 사실은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朴대통령이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민주화와 노사분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경제기반이 내려앉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민주화가 가능했을까. 민주화로의 대전환이 된 1987년의 6월사태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넥타이 맨 사람들의 정의감 폭발이었다. 이 중산층의 성장, 그리고 그들의 반란이 가능했던 토대를 만든 것은 朴正熙와 그 시대의 국민들이었다. 인권의 가장 기초는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이다.
1960년 말까지만 해도 신문에는 영양실조에 의한 변사사건이 자주 보도되었다. 필자가 기자생활을 시작한 1970년대 초에도 달동네에서는 영양부족으로 얼굴이 부어오른 허깨비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朴대통령 시절에 배고픔의 문제가 有史 이래 최초로 극복되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려는 이들은 아직도 이밥과 고기국 먹는 것을 제1의 國政지표로 삼고 있는 북한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가장 비참해지는 상태가 배고픈 상태라면 朴대통령은 인권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해결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항산(恒産)에서 항심(恒心)이 생긴다. 이 항심에서 인권·민주·문화도 발양되는 것이다.
야당 지도자의 시각·문법 버려야
1970년대에 부산에서 사회부기자로 일하면서 필자는 『정부를 비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의 취재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때 쓴 기사의 80%쯤이 반대편에 선 것이었다. 특히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꼬집는 기사로 일관하였다. 새마을운동 단체의 간부가 통행금지 위반으로 유치장에 들어와도 가십 기사로 조졌다. 그것이 사회正義라고 믿었다. 새마을 운동이 농촌 근대화의 세계적 성공사례라는 것은 朴대통령이 죽고 나서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金泳三대통령의 정치 노선도 필자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던 많은 정치인·지식인들은 암흑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정의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살 맛을 느끼기도 하였다.
20세기 국가근대화의 세계적인 성공사례가 그 순간에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朴대통령은 너무 무섭고 차고 음험해 보였다. 지금 읽어보면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이철승(李哲承)씨의 중도통합론은 사쿠라로 몰렸고 비타협적 反정부투쟁을 외치는 이들은 위대해 보였다. 反朴투쟁 노선에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政界의 주도권을 쥔 이들은 온건·합리 노선이 아니라 선명투쟁의 金大中·金泳三씨였다. 정치투쟁은 논리의 싸움이 아니라 힘 겨루기이므로 양金씨의 노선은 역사 발전의 한 흐름을 장악하였다. 휘어진 나무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반대 방향으로의 무리한 힘이 필요하듯이 朴正熙 정권의 철권통치를 반대하는 양金씨의 무리한 발언도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서는 양해사항으로 넘어갔다.
1979년 10월 金泳三 신민당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시키는 도화선이 된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 내용엔 무리가 있었다. 金泳三총재는 미국 정부가 朴정권에 대해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관리들이 그런 압력을 內政간섭이 된다고 말하는 데 대해서 金泳三 당시 총재는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3만의 지상군을 주둔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정간섭이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이런 거친 말들이 거친 시대에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적어도 지식층이나 언론에 의해서는 金泳三씨의 역사관과 국가관이 제대로 검증된 바가 없었다.
문제는 金泳三씨가 역사·국가·국민을 상대하는 자리인 대통령이 된 뒤에도 독재와 투쟁하던 당시의 제한적 시각과 거친 文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金대통령이 자신을 탄압한 역대 군사정권에 대한 개인적인 정서·감정을 공식적인 용어로 나타내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자신을 과거의 포로로 묶어 두게 되고 미래로, 세계로 나갈 찬스는 놓치게 되는 것이다.
가장 큰 人權향상은 배고픔의 해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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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14, 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