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자주국방 大戰略: 그 역사적 배경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1. 朴正熙의 국가 근대화 대전략은 自助-自立-自主-自由의 4단계로 요약된다.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겠다는 自助정신이 생겨야 自立경제가 건설될 수가 있고 自立경제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자주국방을 할 수가 있다. 그는 '자주국방능력이 없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다'는 생각을 確執처럼 갖고 있었다, 그는 자주국방력을 방패로 삼아 전쟁을 막아 평화의 시간을 얻은 뒤 국력을 키우고 그 힘으로 북한정권을 녹여 韓民族 전체가 자유를 누린다는 원대한 꿈을 지녔다. 정신, 경제, 정치, 군사를 통합한 국가 대전략이었다.
2. 그의 자주국방과 통일관은 주체적 역사관에 기초한다. 이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밝힌 내용이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녹음 테이프에서 가감 없이 풀어본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武力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 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武力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殺生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敵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 빤해졌다 해서, 소강 상태라 해서 안심을 한다든지 만심을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3. 朴正熙의 통일관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자유통일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제4조의 통일관과 일치한다. 평화적 자유통일은 자주국방력과 민족주체성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위의 논평에서 드러나는 박정희의 한반도 상황 인식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북한 대결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4. 자주국방과 관련한 朴正熙의 語錄.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하고 이웃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해 가지고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이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1972년1월11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결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6.25와 같은 적의 침략을 또 다시 받을 때에는, 全國土를 초토화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1968년3월7일 전국 지방장관, 시장, 군수, 구청장 대회 유시에서)
박정희는 경제를 희생하더라도 전쟁에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안보를 늘 경제에 우선시켰다.
5. 그의 머리엔 늘 전쟁 地圖가 입력되어 있었다. 1971년 8월5일, 朴正熙 대통령은 을지연습 종합강평 때 실감 나게 이야기한다.
<敵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를 한번 가상해 보자. 敵은 全전선에 걸쳐서 일제히 공격할 것이며, 동시에 그 시간을 전후해서 동·서해안으로 敵이 기습 상륙할 것이다. 또한 敵은 공수부대를 우리의 후방 깊숙이 대량으로 공중투하할 것이다.
만약에 앞으로 공산당이 우리 대한민국에 지하조직을 가지게 된다면, 이러한 조직이 敵의 기습에 호응해서 일제히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동시에 敵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空軍 세력으로 공중공격을 해올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동이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어떠한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겠는가. 제일 먼저 움직이는 것은 역시 軍일 것이다.
다음에는 정부가 즉각 계엄령을 선포한다든지 동원령을 하달한다든지 戰時(전시) 국가지도회의를 소집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충무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대응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들은 초기에 반드시 상당한 불안과 공포에 싸여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해야 할 것이다.
초기에 우리 軍이 신속 과감한 행동으로 敵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고, 또한 정부가 침착하고 자신 있는 행동으로 사전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잘 처리해 나가게 될 때, 처음에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던 국민들도 점차 냉정을 되찾게 될 것이고,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신뢰감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공포감은 오히려 敵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해서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하여 자진해서 적극 협력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초기 대응책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은 우리가 충분히 버티고 나갈 수 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북한군의 기습은 同時多發的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이다. 휴전선상의 全面 공격, 東西해안 지역에 대한 上陸작전, 특수부대의 후방 공중투입, 空軍에 의한 폭격, 그리고 國內 종북세력의 반란. 核무장한 북한은 여기에다가 하나를 보탤 것이다. 서울을 포위한 뒤, '한국군이 반격하면 서울에 原爆을 투하하겠다.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말자. 현위치에서 휴전하자'고 제의할 것이다. 이런 제의에 맞추어 남한內 從北세력이 들고 일어나 '휴전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정부를 압박하면 '평화를 위하여 휴전안을 수용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2000만 수도권이 포위된 상태에서 休戰을 받아들이면 대한민국은 그 길로 소멸한다.
김정은의 손에 있는 두 개의 神器-核무기와 從北세력 중 적어도 하나를 빼앗지 않으면 한국은 다른 모든 면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밀린다. 30여 년 전의 박정희 시절에 비하여 경제는 발전되고 민주화도 많이 되었지만, 尙武정신과 自主국방 의지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자주통일 철학을 再해석하고 이를 현재적으로 활용해야 할 이유이다.
7. 朴正熙의 자주국방 전략은 역사적 뿌리가 있다.
서기 660년 唐은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여세를 몰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태종무열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多美公(다미공)이란 사람이 나와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백성을 백제 사람으로 위장하여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唐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金庾信이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라고 했다. 태종무열왕은 내키지 않았다.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 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
이에 金庾信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金庾信이 한 말은 삼국사기에 '自救'로 표현되어 있다. 신라가 개노릇을 하여 唐을 섬길 용의는 있다. 唐이 신라를 존중해 주면 말이다(이것은 '자주적 사대주의'이다). 만약 唐이 크고 힘센 것만 믿고 신라의 자존심과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한다면 신라는 唐을 물어뜯어서라도 自救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新羅와 같은 小國이 大國을 옆에 두고도 自我를 지켜갈 수 있게 한 정신무장의 핵심 논리이다.
신라가 臨戰태세를 갖추자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은 백제 포로들만 데리고 귀환했다. 당시는 唐의 전성기 고종시대였다.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의 대답은 그대로 신라에 대한 세계 최강국의 최고 찬사이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謨也)
8.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 이것이 신라의 공동체 의식이요 公民 윤리였다는 것이다. 요사이 식으로 번역하면 '신라는 대통령이 어질어 국민을 존중하며, 관료는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들은 가족처럼 서로 아낀다'이다.
신하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게 아니라 '나라를 섬긴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국가를 임금보다 더 上位 개념으로 본다. 이는 헌법을 대통령보다 위에 놓는 국민국가의 원리이기도 하다.
신라는 자주성을 지켜내는 방식에서 국력을 초과하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북한처럼 유아독존으로 모험을 하다가 必亡의 길을 걷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리고 그 唐의 패권을 인정하고 唐에 감사하려고 했다. 唐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唐과 결전할 때도 외교적으로는 항상 유화책을 썼다. 자존심을 뱃속에 숨겨 놓고 펼친 强穩 양면의 실용노선이 신라의 독립을 성취했다.
9. 韓民族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침략을 받으면 決死抗戰하는 전통이 있다. 이런 기질 덕분에 세계최강의 나라, 최고의 문화 옆에서도 민족적 自我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韓民族은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다섯 번의 決死抗戰을 치른 기록이 있다.
*612~645년: 고구려의 對隋, 對唐 항전. 612년 영양왕 때의 살수대첩, 645년 보장왕 시절의 안시성 싸움으로 대표된다. 세계 최강국인 수와 당을 상대로 혈전을 벌여 한반도가 중국화되는 것을 막았다. 을지문덕과 양만춘 등이 영웅이다.
*670~676년: 신라의 對唐결전. 당이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마저 속국화하려 하자 최전성기에 있던 세계최강국의 정예군을 상대로 육지와 바다에서 전쟁을 벌여 이김으로써 한반도를 민족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250년간 지속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열었다. 韓民族과 韓國語가 이 決戰으로 만들어졌다. 金庾信과 文武王이 지도자였다.
*1231~1270년: 고려의 對夢抗戰. 세계최강 기마군단을 보유한 몽골군은 아홉 차례나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武臣정권이 이끌던 고려 지도부는 강화도로 들어가 결사항전, 40년을 버티었다. 몽골군을 상대로 가장 오래 저항한 기록을 남겼다. 몽골도 이런 투지를 높이 사 항복 후의 고려 왕조를 우대하였다. 고려 武臣 정권, 僧兵, 삼별초 등이 영웅이다.
*1592~1598년: 세계최강의 육군인 일본군을 상대로 한 국제전쟁에서 宣祖의 조선은 水軍과 義兵이 버티는 사이 明의 도움을 받아 이겼다. 李舜臣, 柳成龍, 義兵 등이 영웅이고, 선조의 전쟁 지도도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1950~1953년: 세계최강의 육군국인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을 받은 한국은 軍官民이 李承晩을 중심으로 뭉쳐 저항하였고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이 파병되어 침략 의도를 분쇄,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았다. 한국전을 계기로 대만이 살고, 일본이 경제부흥, 서독은 재무장, NATO는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다. 한국은 戰後 경제발전과 민주화에도 성공, 자유의 방파제 겸 자유진영의 모델 하우스 역할을 하였다. 미국은 군사비를 세 배로 늘리고 병력을 倍增시켜 본격적인 對蘇 군비경쟁을 시작, 40년 뒤 공산진영이 무너지게 하였다. 한국전에서 韓美軍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버틴 덕분에 세계 수십억 인구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으니 韓國戰은 세계가 이긴 전쟁이다. 李承晩, 국군, 트루먼, 맥아더, 릿지웨이 등이 영웅이다.
10. 다섯 차레의 결사抗戰은 모두 當代 최강의 군사강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고 그 영향도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프로 군대끼리 싸우는 유럽 식 전쟁이 아니라 軍官民이 한덩어리가 된 총력전이었다. 다섯 차례의 전쟁 중 결과가 가장 좋은 것은 신라의 對唐결전과 대한민국의 한국전 승리이다. 韓民族뿐 아니라 東아시아 및 세계 전체의 평화, 자유, 번영에 기여한 승리였다. 그런 점에서 7세기 말의 신라 사람들과 20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세계사적 영웅들이다. 가장 위대한 세대이다.
11. 5大 결전의 교훈은 모두가 공격전이 아니라 수비전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땅에서 싸운 수비전이었으므로 군인뿐 아니라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무장, 익숙한 地理 속에서 총력전으로 저항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韓國史의 이런 戰略개념을 이어 받았다. 자주국방의 근거는 자존심이다. 힘센 나라에 도전도 하지 않고 굴종도 하지 않고 오로지 自我(민족적 삶)를 지키겠다는 자존심을 戰力化한 것이 신라였고 그 연장선상에 박정희 식 자주국방의 철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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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미국은 朴正熙의 核개발을 이렇게 좌절시켰다!
(출처: 朴正熙 傳記)
1975년 3월 4일 헨리 키신저 美 국무장관은 망해 가는 월남 대책에 바쁜 가운데서도 서울·캐나다·프랑스·일본·오스트리아 주재 미국대사 앞으로 電文(전문)을 보내 한국 정부의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지시한다. 이 훈령은 구체적으로 이런 정책들을 제시했다.
〈1. 미국은 국제적 공급 국가들과의 공조 속에서, 한국이 민감한 기술과 장비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국에 대한 원자로 판매에 완전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자체적 핵무기 개발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민감한 기술과 장비들의 판매를 제한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이 (캐나다에서) 캔두(CANDU)형 원자로를 획득하는 것이 再처리 기술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2. 한국으로 하여금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토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캐나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3. 한국의 핵시설에 대한 우리의 첩보 및 감시능력을 높이고, 관련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적 상태에 대한 정보를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핵에너지 관련 기관들에 대한 정기적 방문조사를 더 자주 할 계획이며 훈련된 기술자들로 하여금 사찰 횟수를 늘리도록 할 생각이다〉
駐韓(주한) 미국대사관도 1975년 3월12일 국무부에 보낸 다음의 電文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는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0년이 훨씬 안 될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가 확보한 여러 정보들에 따르면, 한국의 지도부는 핵무기 개발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으며 1980년대 초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저돌적 추진력과 그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높은 기술 수준, 그리고 외국의 전문 인력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상부로부터의 강한 독려 등을 감안할 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제3국으로부터 핵무기 관련 장비와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한국의 구매력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 개발에 따른 정치적·경제적 부담이 한국의 움직임을 저지할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국이 제3국으로부터 (관련 물질과 기계) 구입을 선택할 경우, 한국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한국은 아주 위험한 목적을 가진, 끈질기고 거친 고객이다. 우리가 早期(조기)에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상의 성공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韓美 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였다. 그는 朴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고, 본부에 대해서 한국의 의도를 적극 개진하고 자신의 대안을 설명했음이 최근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서 나타난다.
다음 電文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을 개발해야겠다는 朴 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스나이더 대사의 지적이다.
바로 하루 전 사이공으로 월맹군이 진주하여 베트남戰(전)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나 서울이 위기감에 휩싸여 있을 때인 1975년 5월 1일,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요지: 어제 스나이더와의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朴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미사일 기술에 대한) 한국과 록히드社(사)의 계약을 승인해 주지 않은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나는 미국 정부가 그동안 한국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여러 차례의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이는 미국 정부가 일본이나 西(서)유럽 국가들 같은 선진국에도 개방을 통제하는 첨단 기술의 수출 문제이며, 미국은 이 분야에서 강력한 독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요청에 대해서는 우리가 韓美 양국 간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되는 한국의 장기적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며, 분명히 알려준다면 개별 항목들에 대해서는 수출허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향후 수년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하면서, 국방과학연구소장을 나와 접촉토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향후 3~5년 이내에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미국이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한국으로서는 제3국으로부터라도 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朴 대통령은 그로 인한 한국의 재정적 부담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駐韓미군의 철수 계획을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할 때까지 미사일 개발을 늦춘다면 그것은 너무 늦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朴 대통령에게 미사일 개발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바람직한 방법은 미국과 협력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朴 대통령은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는 군수품 조달에서 自立(자립)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며,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중시하고 있으니 미국이 이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駐韓미군 철수에 관한 朴 대통령의 우려를 다시 한 번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미사일 전략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그처럼 중차대한 전략적 결정은 상호 합의가 따라야 하니 향후 안보협의회에서 다루자고 제안했다. 朴 대통령은 한국의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내가 워싱턴에 신속히 보고할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상세히 브리핑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의견: 지금까지 수차에 걸친 면담에서 朴 대통령은 駐韓미군 철수에 대비한 한국의 자주국방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혀 왔다. 이번 면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駐韓미군 철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그래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는 동안 자립적인 군수산업을 신속히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朴 대통령의 국방 정책에 대해 충분하고도 조속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현재 美 의원들의 태도를 감안할 때,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朴 대통령의 우려도 무시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그의 계획도 무시할 수 없다〉
이 電文에서 보듯이, 朴 대통령은 이날 3~5년 이내에 地對地(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스나이더 대사에게 밝혔는데, 그 3년 4개월 뒤인 1978년 9월, 사정거리 180km의 국산 地對地 미사일인 ‘백곰’의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朴 대통령이 목표달성의 시기를 밝힌 계획들은 거의 이뤄진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公言(공언)한 것은 지켰다.
駐韓 미국대사 스나이더에게 朴 대통령이 직설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예상하고 있다고 밝힌 점은 인상적이다. 朴 대통령은 월남이 망해 가는 과정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미군이 파리휴전협정에 따라 월남에서 철수한 뒤엔 對월남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고 월맹의 명백한 협정위반을 방치한 사실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을 휩쓸고 있는 反戰*반전)여론에 휘둘리는 美 의회가 미국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 대통령의 對韓 방위공약도 믿을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닉슨의 對월남 방어공약을 무력화시킨 것이 美 의회의 ‘인도지나 반도 무력사용不可(불가) 결의’가 아니었던가.
駐韓미군이 수년 내 철수할 것이라는 朴 대통령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다음해(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후보는 駐韓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하여 철군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朴 대통령이 월남 패망과 駐韓미군 철수의 예감 속에서 추진한 핵무기 개발은 그러나 再(재)처리 시설 도입 교섭 단계에서부터 미국의 정보망에 걸려 외교적 압력을 받게 된다.
朴 대통령도 굳이 핵무기 개발의지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거의 半(반)공개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은 核(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아 국제법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막을 명분이 미국엔 없었다. 그렇더라도 1974년에 인도가 핵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란 미국이 작심하고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로 결심한 것을 모를 리 없는 朴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아주 비싼 값에 포기하는 代案(대안)도 생각한다.
프랑스製(제) 사용後(후) 핵연료 再처리 시설 도입계획을 둘러싼 韓美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朴 대통령은 1975년 6월 7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미국의 시사평론가 로버트 D 노박과 인터뷰했다.
朴 대통령은 “우리는 핵무기 개발능력을 갖고 있으나 개발계획에는 착수하지 않았다”면서도 “만약 미국의 핵우산이 철수된다면 자구책으로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갈 것이다”고 말했다.
朴 대통령의 이 발언이 미국 언론에서 보도된 직후 작성된 美 국무부의 정책건의서가 최근 공개되었다. 이 문서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는 물론 프랑스(재처리 시설 도입 대상국)와 캐나다(NRX 연구로 도입 관련)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1975년 7월 2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대통령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로버트 잉거솔 국무장관 代行(대행)의 정책 건의서 요지.
〈한국의 핵무기 획득은 극도로 위험하며 미국의 주요한 이해관계에 대해 직접적 타격을 줄 것이다. 이같은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再처리 시설 및 플루토늄을 보유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두 번째 원자로인 고리 2호기를 도입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에 1억 3,200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고, 추가적으로 1억 1,700만 달러의 신용을 요구했다. 수출입은행의 케이시 총재는, 한국內 사용後 핵연료들의 문제에 우리가 안심해도 좋다고 통보할 때까지 이 차관에 대한 청문회를 연기하기로 의회와 합의했다. 우리가 의회에 대해, 한국이 再처리 시설 계획을 포기했다고 확인해 주지 않는 한 이 차관을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와 프랑스의 태도: 지난 3월의 정책 지침에 따라 우리는 캐나다 정부와 접촉했다. 캐나다는 향후 한국에 대한 원자력 지원 문제에서 우리와 긴밀히 협의키로 했다. 우리는 또 최근 런던에서 열린 (핵 관련 기술 및 장비) 공급자 회의에 앞서 프랑스와 접촉했다. 우리는 프랑스에 대해서,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알려 주었다.
프랑스는 우리의 관심에 이해를 표시했고, 再처리 시설 판매는 큰 상업적 이해가 걸린 것은 아니며, 만약 프랑스 회사가 계약 종결에 따른 비용을 보상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계약 포기 요구에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한국에 대한 접근: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인 한국 측 원자력 분야 인사들과의 협의에서 미국이 제공한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 핵연료의 再처리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확인을 다시 요청했으며, 그들의 확인을 들은 후에라야 (짓고 있는) 고리 1호 원자로에 대한 美 핵통제위원회의 수출 허가를 요청할 것이다〉
禪(선)문답 같았던 朴·슐레진저 회담
위의 문서는 미국이 국가적인 의지를 실어 한국에 대해서 핵포기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우선 고리 2호 원자로 건설계획과 관련하여 한국 측이 신청한 약 2억 5,000만 달러의 미국 차관 및 신용대출을 약점으로 잡아 묶어 두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이와 함께 프랑스와 캐나다에 압력을 넣어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것이 뻔한 再처리 시설과 연구용 원자로 판매를 중지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국 측은 또 韓美 원자로 협정에 의거하여, 한국에서 미국 회사가 지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 핵연료를 再처리할 경우의 모든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런 법적 권한에 대해서 한국 측의 확인을 받고 나서야 당시 건설 중이던 고리 원자력 1호기에 대한 미국 측의 사용승인이 떨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미국은 2중 3중으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朴 대통령에게 직접 압력을 넣으면 오기가 센 대통령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래로부터 계통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원자력 기술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과기처 장관·외무 장관을 만나고, 金正濂(김정렴) 실장에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청와대의 관례에 따라 스나이더 대사를 주로 상대한 사람은 金正濂 실장이었다. 金 실장은 정기적으로 스나이더 대사의 관저에 가서 점심을 들면서 韓美 간의 공통 관심사에 대해서 의견을 나눴다.
스나이더 대사는 核개발 포기를 위한 설득의 창구로 金正濂 실장을 활용했다. 金 실장은 “스나이더 대사로부터 핵폭탄이란 말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다만 프랑스로부터 사용後 핵연료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는 것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만 했다고 한다.
再처리 시설이 없으면 아무리 원자력 발전소가 많아도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없다. 그래서 스나이더 대사는 ‘핵개발’이란 직설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再처리 시설 포기만 요구했던 것이다.
스나이더 대사의 핵개발 포기 설득 작전을 지원하러 나선 것은 포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1975년 8월 26일, 27일 양일 간 서울에서 열린 韓美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했다. 美 국방장관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1971년 이후 처음이었다. 슐레진저 장관은 8월 27일 徐鐘喆(서종철) 국방장관과 함께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언급을 했다.
“駐韓미군의 地上軍(지상군)이 막강하므로 핵무기를 쓸 기회가 없겠지만 핵무기를 최후 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朴 대통령이 걱정하는 미국의 핵우산이 건재함을 밝히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언명이었다.
8월 2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42분까지 거의 네 시간 동안 슐레진저 장관은 청와대에서 朴 대통령을 만났다. 朴 대통령은 처음 한 시간 20분 동안은 소접견실에서 슐레진저 장관, 스나이더 대사, 브라운 美 합참의장, 스틸웰 駐韓 유엔군사령관, 위컴 군사보좌관, 徐鐘喆 국방부 장관, 盧載鉉(노재현) 합참의장, 金正濂 비서실장,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과 환담했다. 이들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직후 슐레진저 장관과 스나이더 대사는 朴 대통령과 40분간 만나 심각한 이야기를 나눴다.
슐레진저는 朴 대통령과 일종의 禪(선)문답을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비밀 핵개발계획을 인정하지 않았고, 슐레진저는 한국의 핵개발계획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슐레진저는 그러나 “朴 대통령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듯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슐레진저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한 것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韓美관계가 와해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이 해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워싱턴에서는 필립 하비브 東아시아·태평양담당 국무차관보가 咸秉春(함병춘) 駐美 한국대사를 통해서 압력을 넣었다. 하비브는 스나이더의 전임 한국대사였다. 하비브는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취소해 줄 것을 요구했다. 咸 대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국가적 신의에 관한 문제’라면서 미국 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다음은 1975년 10월 3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駐韓 미국대사관의 電文.
〈한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실험용 再처리 시설의 구입을 취소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두 번째로 거절했고, 현재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곤경에 처해 있다. 한국의 이 같은 거절은 朴 대통령의 주관下에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로 하여금 계약이 최종적으로 체결되기 전에 판매 계획을 중단토록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① 더 이상 추가적인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로 하여금 核(원자력 발전 등) 분야에서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일 추진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안.
② 재처리 시설의 판매 문제는 묵인하고, 국제적 사찰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쌍무적 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한국의 방안을 허용하는 방안.
③ 再처리 시설 구입 계약의 일시 중단이라는 중재안을 가지고 다시 한 번 朴 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
④ 非(비)타협적 태도로 계속 朴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방안.
①案(안)과 ②案의 경우, 계산된 부담을 감수하면서 상황을 방치하면, 그 결과 미국에서는 한국에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美 의회는 군사원조의 삭감은 물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도 부결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압력을 받게 되면 한국은 결국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런 여론에 시달릴 것이며, 그것은 한국에서 우리의 이해관계에 적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再처리 시설 확보가 기정사실화됨으로써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②案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용도 변경을 막기 위해 査察(사찰)을 굳혀 나가는 방안이다. 그러나 ②案의 약점은 한국이 NPT 또는 IAEA의 사찰이나 제3국의 사찰을 거부하려 들 경우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韓美 양국 사이에 심리적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장차 이곳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③案과 ④案, 즉 朴 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만이 성공의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카드가 있으며, 朴 대통령도 결국은 현실주의자다. 따라서 우선은 朴 대통령을 접촉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에게 도전장을 던질 것이냐, 아니면 중재안을 갖고 그를 만날 것이냐이다〉
고리 2호기 차관 중단, 군사원조 지원 중단 등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던 한국 정부는 1975년 12월부터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소개되는 駐韓 미국 대사관의 電文들은 한국 정부가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관련 협력을 받는다는 代價(대가)를 선택,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1975년 12월 10일, 국무부로 보내는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의 電文.
〈워싱턴에 있는 咸秉春 駐韓 한국대사를 가급적 빨리 우리 측의 고위급 인사가 만나 우리의 관심 사항을 전달해 주기 바란다. 그 만남의 내용이 朴 대통령에게 충분히 전달된 후 나는 다음주에 朴 대통령을 만날 것이다. 나는 金鍾泌(김종필)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만약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강행할 경우 韓美 관계에 미칠 엄청난 악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咸 대사와의 면담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단지 원자력 분야에서의 협력만이 아니라, 美 의회의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에 대해서도 부정적 행동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방향과 목표도 함께 제시함으로써 韓美 양국의 관계를 유지, 강화시키기 위해 협력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같은 날,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미국대사의 또 하나의 電文.
〈12월 10일 南悳祐(남덕우) 부총리는, 12월 9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총리 주재의 고위 대책회의가 있었으나, 자신은 국회 출석 관계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한국이 우리의 요청을 거부할 경우 초래될 부정적 영향들에 대해 언급했고, 그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총리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金鍾泌 씨는 최근 “朴 대통령은 이때 핵개발을 강행하면 韓美관계가 결단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핵무기를 당장 만들지 않되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구, 비축해두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1975년 12월 16일,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미국대사관의 電文.
〈국무총리의 지시로 과기처 장관 대신 과기처 차관 등이 스나이더 대사를 면담했다. 이들은 만약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원자력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협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가를 문의했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생략)
스나이더 대사가 “한국의 이런 질문에 대한 미국의 구체적 답변이 있을 때까지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문제에 대해 결정을 미룰 것이냐”고 묻자, 과기처 차관은 “한국은 공식적으로 再처리 시설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과기처 차관은, 미국의 기술적 지원이 아주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기술적 지원을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앞으로는 그 기술 제공자를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좀더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金正濂 대통령 비서실장을 접촉했는데, 현안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우리 측 답변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되리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접촉한 사람들의 보고를 받았다며 朴 대통령도 이 사안의 정치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답변이 도착하면 朴 대통령의 주관下에 문제를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내가 朴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것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빛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나는 물론 이 문제를 놓고 金東祚(김동조) 외무 장관과도 접촉해 왔다. 그는 이 문제의 정치적 중요성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계획이 취소되는 쪽으로 대세가 굳혀짐에 따라 駐韓 미국대사관은 비교적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76년 1월 우리 정부는 프랑스의 SGN社와 맺었던 再처리 시설 건설 계약의 파기를 프랑스에 요청했으며 프랑스도 이를 받아들여 핵개발 계획은 외형상 좌절하게 된다.
1976년 1월 5일, 국무부로 보낸 駐韓 미국대사의 電文.
〈요지: 한국의 프랑스 再처리 시설 도입을 취소시킴으로써 核 확산을 막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목표는 朴 대통령과의 정면 대립을 불사하거나 또는 그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달성될 수 있다. (중간 부분이 대거 삭제됨) 따라서 나는 본부의 훈령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A) 미국 정부는 한국이 프랑스와 맺은 계약에서 再처리 시설 도입을 再검토키로 한 결정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한다.
(B) 우리는 한국이 미국의 깊은 우려감을 인식하고, 이 문제가 향후 韓美관계 전반에 갖고 있는 중대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한다.
(C) 미국의 희망은 바로 이 시점에서 再처리 시설 계약의 완전한 취소이다.
(D) 이 계약이 완전히 취소되지 않을 경우 美 의회와 미국인들의 의혹은 더욱 더 증폭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고리 2호기의 차관 문제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E)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우리의 합의 도출 능력을 신뢰한다면 미국은 상호 협력의 범위에 대해 조속히 합의한다는 목표 아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킬 태세가 되어 있다.
(F) 따라서 우리는 한국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韓美 양국의 상호 협력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미국의 대표단을 파견할 태세가 되어 있다.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한국·프랑스·캐나다 사이의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서 “이 에피소드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한 정부가 아무리 완강한 의지력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도 능히 저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후 스나이더 대사는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電文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여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하고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朴 대통령의 열망과 의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朴 대통령이 이런 모험을 하게 된 데는 미국 측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1975년 6월 미국 정부에 대해서 韓美관계를 전면적으로 再검토하여 새로운 관계 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는 12페이지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의 불확실한 태도 때문에 朴 대통령은 언젠가 닥쳐올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서 남한內에서 반대자 탄압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었다.
柳炳賢(유병현) 당시 합참본부장은 “朴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깔끔하게 했다. 관련 서류나 시설을 숨겨놓고 비밀개발을 계속하라는 식의 지저분한 지시가 아닌 깨끗한 단념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 뒤 朴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의 기술 사이클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기 개발에도 쓰일 수 있는 관련기술을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에도 성공하지만, 핵폭탄을 직접 제조한다든지 플루토늄을 밀수입하는 식의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미국 측도 플루토늄 再처리 시설이 없다면 핵무기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핵개발 문제는 이로써 종결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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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전문가가 쓴 한국의 핵무장 잠재력 보고서
작년 봄, 미국의 한 정상(頂上)급 핵무기 전문가가 한국의 핵무장론과 관련된 흥미로운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과학자연맹(FAS) 회장인 찰스 퍼거슨 씨는 지난해 핵 비확산 전문가 그룹에 비공개로 ‘한국이 어떻게 핵무기를 확보하고 배치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이유는 퍼거슨 씨의 권위 덕분이다. 그는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핵잠수함 부대에서 근무하였고, 핵공학 분야를 연구한 뒤 국무부 핵정책 부서의 물리학자, 핵무기 관련 연구소 상담역, 그리고 유명한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핵정책 담당 국장, 그리고 2010년부터는 미국 과학자연맹의 회장이다. 실무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핵전략에 정통한 이다. 그가 쓴 문제의 보고서는 비공개로 회람되다가 최근에 NPEC(비확산정책교육센터) 홈페이지를 통하여 전문(全文)이 공개되었다.
읽어보고 놀랐다. 최고 전문가들의 글이 항상 그렇듯이 주장이 간명(簡明)하고, 구체적이다. 한국의 핵무장 능력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핵무장의 길을 갈 가능성도 높게 본다. 한국이 결심하면 국제사회가 막지 못할 것이란 주장도 소개하였다.
37쪽짜리의 보고서에는 한국 안에서 핵무장을 반대하는 이들이 내어놓는 근거를 반박하는 내용도 있다. 한국 내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자위적 핵무장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꼽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제재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경제제재를 당할 경우 견디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퍼거슨 회장은 한국의 거대한 경제력이 오히려 제재를 돌파할 것이라는 견해를 소개하였다. 인도의 예를 들었다.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 곧 無力化될 것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국제화된 국가 중 한 곳이다. 경제력이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이며 삼성과 LG가 만들어내는 우수한 제품들을 세계에 공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국이 핵무장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은 인도가 그랬듯이 경제 제재라는 폭풍우를 뚫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인도는 1998년 5월 핵 실험을 실시한 뒤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를 받게 됐다. 하지만 제재는 1년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인도가 (한국처럼) 훌륭한 제품을 생산해내지는 못했지만 (국제사회는) 거대한 인구를 가진 인도 시장을 무시할 수 없었고, 미국은 이러한 인도가 급성장하는 중국의 군사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다섯 번째의 공업력, 세계 여섯 번째의 수출국인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는 하는 쪽에도 타격을 주므로 오래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나 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의 핵무장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그다지 큰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견해도 피력하였다.
퍼거슨 회장은,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강력한 수호자이고, 원자력 기술 수출국이므로 제재를 감수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소개하였다. 즉, NPT 체제는 한국의 국익(國益)을 위하여 도움이 될 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핵개발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NPT 10조에 의하여 NPT에서 탈퇴할 것이다. 한국의 원자력 산업은 수출 분야에서 미국, 프랑스, 일본 등과 합작하고 있으므로 한국에 대한 제재는 이들 나라에도 타격을 주게 되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해칠 것이고 일본 및 중국과 핵무장 경쟁을 부를 것이란 주장에 대한 반론도 소개되었다. 미국은 '아태 지역으로의 회귀'라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국의 안보를 지원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餘力)이 줄어들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보고 핵전략을 소홀히 여긴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중국과 북한의 핵위협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미국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면 각자 핵 능력을 보유하려 할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핵무장이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진지하게 추진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도 거둘 것이라고 계산할 것이다. 중국과 북한의 핵위협을 혼자서 막기 힘들게 되면 미국도 속으론 한일(韓日) 두 나라의 핵무장을 반길지 모른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 핵개발 할지도
퍼거슨 회장은, 북한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서 북한의 핵은 묵인하고 한국의 핵개발에는 반대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대응 방안에 대하여 아주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내놨다.
그는 한국의 핵무장을 세 단계로 가상한다. 첫째 단계에선 핵분열 물질 등을 준비해두었다가 '외교적 압박을 목적으로 한 핵폭탄' 몇 개를 만든다. 이는 미국과 중국에 대하여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하는 외교용이다.
둘째 단계에선 '외교적 핵폭탄'이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본 한국이 매년 10여 개의 핵폭탄을 만드는 핵강국의 길을 질주하는 것이다. 여기엔 5~10년이 걸릴 것이다. 한국은 북한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핵위협에 대응하기로 한다. 특히 북한정권이 무너질 때 중국군이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는 핵무기가 유용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본격적인 핵전력 건설이 시작된다. 한 척 이상의 핵무장 잠수함을 항상 바다로 보내놓아야 하므로 적어도 4~5척을 운용해야 한다. 한국은 2주간 잠수할 수 있는 1800t급 잠수함에 이어 3000t급 잠수함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핵탑재 크루즈 미사일을 싣고 다닐 수 있다. 한국은 서울~베이징이 955km, 서울~도쿄가 1155km인 점을 감안, 사정거리가 1500km인 크루즈 미사일 현무-3C와 함께 탄도 미사일인 현무-2를 개량할 것이다. 한국은 이미 조기경보기와 공중급유기를 도입, F-15와 F-16을 이용한 핵공격력를 확보해놓고 있다. 공중급유를 받으면 전투기의 체공(滯空) 시간이 70~90분 길어진다.
세번째 시나리오는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에 협력하여 중국과 북한에 대응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환영할지 모른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해묵은 적대감을 감안하면 한일공동 핵개발은 지나친 상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국의 방위력이 약해지고 북한과 중국의 핵위협이 강해진다고 판단하면 핵무장을 위하여 협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상호 기술 협력이 필요한데 일본은 퓨렉스 형의 재처리 시설과 몬주 증식로를, 한국은 발전된 크루즈 및 탄도 미사일 기술과 수소폭탄의 원료인 3중 수소를 제공할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이 핵전력(核戰力)을 증강하고 미국이 제대로 대응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판단하면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여 핵무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내밀히 환영할 것이다. 물론 이는 이 지역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핵경쟁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매년 416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생산
한국의 핵무장은 보수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북한에 대한 유화책이 파산되었음을 성공적으로 설득시키면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최근의 정치정세와 여론 동향은 보수층의 핵무장론에 유리하다.
퍼거슨 보고서는,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려면 핵분열 물질, 핵폭탄 설계능력, 그리고 운반수단을 갖추어야 하는데, 한국은 쉽게 이들 요소들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소폭탄 제조에 필요한 중수소나 3중수소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월성에 있는 4기의 중수로(重水爐)가 핵폭탄 제조의 원료물질을 생산하는 데 적합하다. 지금 월성에 저장된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면 2만6000kg의 '무기화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이는 4330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1개당 6kg 소요). 월성 원자로 4기를 이용하면 매년 416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2500kg의 '거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한국은 결심만 하면 단순하면서도 속도가 빠른 재처리 공장을 4~6개월 안에 지을 수 있다. 월성 원전(原電) 등을 통하여 증강핵폭탄이나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중수소나 3중수소를 이미 만들고 있다. 수소폭탄에 필요한 리튬-6은 자연 리튬에서 빼내는데 한국은 볼리비아로부터 리튬 전지를 만들기 위한 천연리튬을 수입하기로 계약한 바 있다.
한국의 수준 높은 컴퓨터 기술 등으로 볼 때 핵폭탄 설계에 필요한 초고속 전자 기폭장치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핵폭발에 필요한 핵분열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고성능 폭약은 한화그룹이 만들 수 있다. 한국의 컴퓨터 기술 수준으로 볼 때, 핵분열탄, 증강핵폭탄, 수소폭탄도 실험할 필요가 없다. 실험을 한다면 핵보유국임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이다.
한국이 첫 핵폭탄을 외교적 목적으로 쓰려고 할 경우, 북한의 비핵화와 맞바꾸려 할 것이다. 즉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우리도 포기한다는 식이다. '외교적 핵폭탄' 정도로도 중국과 일본에 한국의 엄청난 핵능력을 과시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다.
秘話/미국은 박정희의 核개발을 이렇게 좌절시켰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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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13, 1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