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파워인터뷰> “‘천안함’ 유사사건 또 발생땐 ‘3배 보복’안하면 정권 위험” |
|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
| 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
1971년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후 40년간 그의 직책은 남북적십자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에서 중앙정보부장 특보, 국가안전기획부 남북회담 사무국장, 남북총리회담 준비회담 대표 등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늘 남북대화의 현장에서 명쾌한 논리로 남북현황을 진단해온 최고의 전문가다. 34세때 남북대화에 투신한 이래 정부와 기업, 정치, 시민운동계를 두루 섭렵하며 살아온 그는 벌써 74세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사무실에서 마주 앉자마자 그는 남북대화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질문할 틈도 주지 않았다. 어느 한 대목에서도 막힘이 없었다. 은발의 ‘열혈 청년’이었다. 햇볕론자들의 북한 접근법을 비판할 때엔 독설가였지만 북한의 인권과 이산가족 문제를 얘기할 때엔 행동하는 휴머니스트였다. 필생의 업으로 삼아온 남북대화가 끊긴 지 오래고 남북관계도 점점 꼬여가지만 그는 낙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북한 변화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보수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수미일관 보수주의의 관점을 견지하는 그의 발언엔 거침이 없었다. #1 이산가족, 인권문제로 보자 그를 만난 곳은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사무실이다.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이북5도청 3층에 있는 이 위원회는 이산가족문제를 전담하는 비정부기구(NGO)인데 그는 이 단체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고향은 분명 강원도인데 웬 이산가족위원회 고문이냐고 했더니 “물론 나는 이남 출신이지만 처가가 이북 출신(부인 이상희씨는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의 여동생이다)이니 나도 절반은 이산가족”이라고 답했다. 처가가 이북 출신이어서 자연스레 이산가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인데, 이산가족 상봉 및 재결합문제는 그가 1971년 남북대화에 관여할 때부터 핵심 관심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는 “남북관계에 관여해온 이후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의 고문 역할도 해왔다”면서 이렇게 얘기를 풀어놨다. “적십자회담의 목적은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소하는 문제로 시작한 것인데 그동안 예비회담, 본회담 등 150회의 각종 회담이 열렸지만 성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적십자회담에서 의제를 정해 회담을 진행해야 하는데 남북 양측은 40년이 지나도록 의제를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산가족 중 원하는 모든 이들의 주소와 생사를 확인해 통보하고, 서신 교환 및 상호 방문을 주선하며, 원하는 지역으로 재결합시키자는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원칙을 의제로 제시했으나 북측은 그것을 부인하며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으로 일관해왔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2000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받았을 때 12만5000명이 나왔습니다. 1972년 적십자사의 이산가족 상봉 참여 신청 접수 당시엔 한 사람도 없었는데 그새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 뒤 17차례 상봉이 이뤄졌고, 12만5000명 중 1750여명이 가족 상봉을 했습니다. 40년간 150회 회담을 해서 1750여명이 겨우 가족을 만났는데 그새 4만5000명이 별세해 지금 8만명의 이산가족이 남았습니다. 이런 속도로 추진된다면 나머지 8만명이 이산가족을 만나는 데 앞으로 500년이 걸릴 겁니다. 지금의 적십자회담 방식은 이산가족 상봉에 별 효과가 없다는 게 입증된 셈입니다. 그래서 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적십자운동의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이산가족문제를 국제적십자사 운동의 원점으로 돌린다는 게 어떤 뜻인가요. “그간 이산가족문제는 피란민문제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만 다뤄져왔는데 1980년대 중반 유엔에서는 일반 피란민과 실향민을 나누기 시작했고 1988년 실향민지침이 발표됐습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실향민 가운데 이산가족이 생기면 재결합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노력하고 재결합은 이산가족의 권리인만큼 주소 확인 및 편지 거래를 허용해야하며 실향민들의 경우 고향 방문이나 선영 묘소 참배 등을 모든 기관이 보장해줘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앞으로 유엔인권이사회가 북한 인권문제를 결의할 때 이런 관점에서 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주장입니다. 한반도의 이산가족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북한이 인권의 사각지대이기 때문인 만큼 북한 주민들에게 인권을 숙지시키는 일을 유엔이 권장해달라, 그리고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에 이 대목을 넣어서 앞으로 북한 국영방송을 통해 세계인권선언을 반복하라는 결의를 해달라고 호소하려 합니다.” ―그게 과연 실현될까요. “될 때까지 압력을 넣어야죠.” 그는 낙관주의자였다. 북한의 변화가 내부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만큼 북한이 변할 때까지 국제사회에서 압력을 넣고, 변화의 바람을 북측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산가족문제를 남북간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인권문제로 공론화하기 위해 오는 13일부터 18일까지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유엔 인권이사회, 인권 고등판무관실, 북한인권상황보고관 등을 만나 한국의 이산가족 실태를 얘기하고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실향민지침에 의거해 조치를 취해달라고 촉구할 방침이다. # 2. 천안함 사건 1주기, 천안함을 기억하라 ―오는 26일이면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한 지 꼭 1년이 되는데 이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분단 이후 남북한 도발 중 9할9푼2리는 북한이 한 것입니다. 대남 도발해도 탈이 없다는 심리가 북한 사람들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자존이 있는 나라라면 저런 공격 당했을 때 자위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한대 맞고 한대 때리는 게 아니라 한대 맞았을 때 열대 가격해 다시는 때리지 못하게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천안함 침몰사건때 자존의 차원에서 자위권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씀인가요. “그간 우리는 1953년체제 하에 살아왔습니다. 미국은 휴전협정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절대로 한국이 사전도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물쇠를 채워놓았는데 그게 교전수칙입니다. 여기에 상대방이 우리를 때려도 전쟁 발발 수준으로까지 반응하면 안된다는 것을 진보정권의 세력들이 지난 10년간 인식시켜 우리 대응의 한계를 낳았습니다. 그런 정서가 지난해 천안함사건 때까지 지속되어온 것인데 거기서 46명이 산화하면서 사람들이 반성하게 된 것입니다. 천안함사건은 논자에 따라서는 북한 소행임이 분명치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연평도 포격 도발이 발생하면서 북한의 명백한 침범에 대한 민중적 폭발이 있었던 것이죠. 앞으로 유사사건이 남북간에 발생하면 3배 이상의 보복이 이뤄질 것이고 그렇게 안하면 이쪽의 정권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만큼 천안함·연평도사건의 의미는 큰 것입니다. 한국인들 속에서 잠자고 있던 자기방어 본능을 일깨우고 애국심을 깨워준 것이죠. 두 사건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소용돌이치는 내면적 동요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앞으로 남북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봅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는데 북핵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북한의 핵이 외부에 나타난 것은 딱 한번입니다. 2004년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를 영변 재처리시설에 데리고 가서 유리병가루를 보여주면서 이게 우리 공화국이 갖고 있는 핵억지력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플루토늄이라고 했을 경우 모르겠는데 이것을 핵억지력이라고 한 것은 말이 안됩니다. 더구나 북한의 핵기술은 1940년대 기술, 말하자면 책을 보고 익힌 도서관 기술입니다. 그러니 북한의 핵능력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핵 위협론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요. “미국은 그간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북한의 핵문제로 춤출 때마다 거기에 맞춰 춤을 췄습니다. 북한의 핵능력이 과장됐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임을 걸어오지 않았죠. 중국은 일관되게 북한의 핵능력이 과장됐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옳을 수 있는 겁니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도 핵문제에 대한 애매모호함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써왔습니다.” ―통일부에서는 북핵문제를 남북간에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통일부가 통일정책 차원에서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핵문제는 핵비확산조약(NPT)문제이지 남북문제가 아닙니다. 통일부는 북핵문제를 남북관계에서 다루려는 노력을 할 게 아니라 통일에 대한 국민의 꿈과 비전을 어떻게 만들까 모색해야 합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통일부의 역할을 바꾸자고 얘기해왔습니다. 통일부는 통일 관련 정책만 담당시키고, 남북대화와 협상은 대통령 직속기구를 만들어 담당케 해야 합니다. 통일부와 남북대화는 이혼을 시켜야 합니다.” 그의 비판은 끝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2기 보수정부가 출범하면 통일부 조직 변화를 먼저 관철시켜야 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네요. “이 대통령은 국정과제 설정을 잘못했습니다. 530만표 차로 당선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반영된 것입니다. 10년의 대북정책 결과 또 한번 진보정권이 탄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기류가 있었죠. 여러 군데에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치매에 걸린 노인을 몇달간 연습시켜 투표시킨 사례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대통령은 경제제일주의를 견지하며 경제로 승패를 가르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틀린 얘기입니다. 또한 비핵개방 3000도 실현되기어려운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전후해 남북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이어져온 지난 10년이 임동원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이동복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이 대표의 현정부 평가는 신랄했다. 10년 동안 진보진영의 공공의 적이 됐던 이 대표가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에 축복을 하기는커녕 장외에서 쓴소리를 하는 것은 어렵게 탄생시킨 보수정권이 정책을 잘못 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과 임 전 원장을 비교하자 그는 1990년대 남북회담시대의 훈령조작사건에 대해 한참동안 설명했다. 1992년 발생한 이 사건을 그는 사진 찍듯 훤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진보정권 10년을 거치며 이 사건이 마치 남북 화해 반대론자들의 음모처럼 일방적으로 해석되는 데 대한 불편한 심기도 드러냈다. 말이 나온 김에 슬쩍 임 전 원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임동원과 이동복은 마치 미실과 덕만공주처럼 적대적 공존관계에 있는 존재같이 비치기도 하는데, 경쟁자였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1998년 이후 김대중시대가 열리면서 임동원씨가 두드러진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1990년대 남북회담시대때 그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어요. 그의 햇볕정책에 대한 생각이 좀 공허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남북회담은 어떤 자리에 있든 간에 제가 기획하고 준비했죠.” # 3. 남북기본합의서, 평화협정의 원형이다 ―올 11월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 지 20주년이 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금 기본합의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는 상태인데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봅니다. 남북관계가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단계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면 남북기본합의서를 그대로 원용하면 됩니다. 뭘 더 추가할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평화협정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그런 합의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운데요. “제가 만들었는데 동서독 기본조약에 한반도의 현실을 대입해 기본 틀을 잡은 것입니다.” ―기본합의서에 북방한계선(NLL)을 유효한 해상경계선으로 규정한 것은 상당한 성과입니다. “우리가 잘 처리했죠. 모든 평화협정의 핵심은 경계선에 대한 합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평화협정이 아니고 하나의 예비문건인 만큼 선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고 구역으로 표현하는 게 옳다고 봤습니다. 북한이 논리적으로 우리를 당할 수 없습니다. 국제적으로 실정법은 10~20년간 이론의 제기가 없을 경우 법적 효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1953년 NLL 선포후 1972년까지 한번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쌍방 관할 구역을 준수한다는 문구가 들어갈 수 있었고, 북한의 NLL 불인정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겁니다.” ―기본합의서는 요즘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인데. “기본합의서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승인을 받았고 김일성 주석이 비준했습니다. 더구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당시 남북기본합의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남북 고위급회담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지시하며 지침을 내렸습니다. 우리측에서는 국회 비준이 안됐지만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서명했으니 거의 비준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조만간 기본합의서 부활시대가 올 것이라고 봅니다.” #4. 남북협상가에서 북한 민주화 운동가로 그는 평생 써왔던 많은 직함 중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데,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난해 세상을 떠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얘기를 꺼냈다. “황장엽씨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북한에 김정일 정권이 있는 한, 북한의 어떤 문제도 해결 안되고 남북한의 어떤 문제도 해결 안되고, 어쩌면 대한민국의 어떤 문제도 동아시아의 어떤 문제도 해결이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평양을 떠날 때 내 일생을 김정일체제 무너뜨리는 데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동지들도 동참해주세요.’ 그래서 나와 조갑제, 류근일이 북한 민주화에 투신하겠다고 결의했고 이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황 전 비서의 유지를 잇기 위한 게 바로 북한민주화포럼이라는 것이다. 그는 2003년 황 전 비서와의 결의 이후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라는 명함을 써왔지만 요즘에 이 단체의 활동은 뜸한 편이다. “초기 1~2년은 서로 갹출해 활동했는데 요즘엔 단체에 기부하는 사람도 없고 해서 활동이 많이 죽은 편이죠. 저는 요즘 휴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북한민주화포럼 일보다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세미나 열심히 나가고 글을 쓰고 합니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 부장대우 musel@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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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 는 변화 거부하는 세력’?… “검증된 방법으로 ‘완만한 변화’ 추구할 뿐” |
―‘이동복 = 골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변호를 하신다면. “운동권 인사들 가운데는 나를 골보수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나와 대화의 장을 만들어 상대해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국민들의 공동선, 공동이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저널리스트였을 때나 남북협상 대표가 됐을 때나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글과 말로 생각을 펴왔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관점에서 글을 쓰시고 말씀을 해오셨는데, 일관되게 보수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은. “지금 우리나라의 진보·보수 논쟁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진보의 핵을 이루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놓고 친이(친이명박)냐 반이(반이명박)냐, 북한을 놓고 친이냐 반이냐로 나눠져 있는데 그것은 진보·보수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보수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1948년부터 대한민국을 발전시켜온 세력은 보수입니다. 진보가 뭘 했나요. 삽 한자루 들었나요. 곡괭이를 들었나요. 보수가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아요. 다만 보수는 검증된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완만한 방법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