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惡行(악행)에 대하여 눈을 감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메리카 연합국은 다릅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학살과 집단 매장의 映像(영상)들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Some nations may be able to turn a blind eye to atrocities in other countrie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s different. And, as president, I refused to wait for the images of slaughter and mass graves before taking action.”>
지난 월요일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리비아 作戰(작전)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연설의 한 귀절이다. 미국은 국가利益(이익)을 定義(정의)할 때 경제적, 안보적 이익뿐 아니라 도덕성과 가치관을 고려하는 세계의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미국 군부가 전략적 가치가 약하다고 해서 이미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한국이 南侵(남침)당하였을 때 트루먼 대통령이 큰 고민 없이 派兵(파병)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國益(국익)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와 人權(인권)이란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自國(자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 나라는 일단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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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교도소에서도 곤드레만드레
일곱 남자의 운명과 그들 가족 수십 명의 명예가 걸린 ‘근하군 살해 사건’ 재판은 1968년 8월26일 오전 10시 부산지방법원 법정에서 그 세 번째 공판을 맞았다. 이날의 주제는 김금식씨의 대구교도소 1일 불법 출소 문제였다. 이원형 검사는 김씨를 범행일 하루 동안 외출 보내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대구교도소 직원 여광석, 이석연, 고화욱, 정시식 피고인 등 네 명을 신문했다. 이들 피고인은 기소 전 검찰 신문에서 자신들의 범행을 자백했다. 뿐 아니라 기소 뒤 담당 판사가 증거보전 관계로 여 교도관을 신문했을 때도 그는 김금식씨의 불법 출소를 도와주었다고 시인했었다.
그러나 이날 네 피고인은 태도를 표변, 검찰의 기소 사실을 딱 잡아떼기 시작했다. 검사가 “전번에는 왜 그렇게 진술했느냐”고 따지자 李 교도는 “검사의 강압에 의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그는 또 "김금식의 얼굴조차 모른다“고 말했다. 교도관들은 왜 이처럼 ‘범행 시인’에서 ‘범행 부인’으로 돌아서버렸는가?
여 교도관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검사가 나를 간첩 사건과 자꾸만 연루시키기에 정신을 잃고 엉터리 자백을 했었다. 1회 공판 때 나는 간첩 사건에 관련되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알고 어리석은 자백을 뉘우쳤다. 나는 기소 뒤(공판 시작 이전) 판사가 증거보전 관계로 검사와 함께 교도소에 와 ‘돈 만원 때문에 그런 엄청난 짓을 할 수 있는가? 무슨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뒤에 밀수를 하면 한번 봐달라고 한다든지…’라면서 고새를 흔들기에 김 검사와 함께 옆방에 가서 ‘영감님, 이렇게 말하면 석방시켜준다고 하기에 그렇게 했는데 뭡니까?’고 대들기도 했었다.”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신세를 망치는 것보다는 저지르지도 않은 대수롭지 않은 범행을 시인해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그들은 검사가 말한 ‘간첩 사건’은 존재하지도 않은 일임을 뒤늦게 알아차리자 ‘용기’를 되찾고 허위 자백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검찰은 곤경에 빠진 것같이 보였다. 이럴 때마다 그들은 기댈 곳을 갖고 있었다. 믿음직한 김금식씨―. 그는 이날 검사의 신문에서 자신의 불법 출소 과정을 술술 불러댔다. 변호인단의 반대 신문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서윤학 변호사의 반대 신문이 점심시간을 넘기자 그는 “변호는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남의 사정(배고픔)도 모르고 속행이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9월2일에 열린 4차 공판에서도 김금식씨는 검사들을 싸고도는 철옹성 구실을 다했다. 그는 검사가 제시한 증거물―마분지 상자, 노끈, 칼이 범행 때 사용된 것임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金씨의 國選(국선) 변호인이 “다른 공범 세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데 하필 교도소에 있는 자네를 빼내 가담시키려 했을까?”라고 따지자 김금식씨는 “그들은 나를 가담시켜 알리바이를 조작, 완전범죄를 성립시키려 했다”고 답했다.
이렇게 검찰 측에 고맙게 대하는 金씨는 교도소 안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감방 안에서도 수갑을 차고 면회마저 일체 금지돼 있었던 최형욱씨의 말을 들어보자.
“김씨는 감방 안에서 주인처럼 멋대로 행동했다. 우리한테 적용되는 규율은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官食(관식)은 먹지도 않았고 누가 넣어주는지 私食(사식)만 먹었으며 술에 취해 고래고래 고함을 칠 때도 있었다. 인원 점호도 안 받고 낮잠은 멋대로 잤다. 기분이 틀리면 ‘교도소장 오라!’ ‘검사 불러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으나 교도관들은 그를 깍듯이 대했다. 나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바싹 말랐지만 그는 피둥피둥 살찌고 있었다. 나는 그런 꼴불견을 대할 때마다 속이 뒤집혔으나 그것이 어디 처음이었던가? 기소 전 대구교도소 현장검증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간에서였다. 김태현 검사가 김금식과 정대범에게 맥주를 권하고 세 사람이 서로 ‘야, 금식아’ ‘잘 모셔야 한다’ ‘김 부장님 한잔 하십시오’라면서 다정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지 않는가. 살인피의자와 검사의 술자리, 그건 참 희한한 장면이었다.”
흔들리는 김금식의 마음
김금식씨는 어떤 면에서는 법의 세계와 그 생리를 검사보다도 더 소상하게 읽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대가 없이 검찰에 봉사할 그런 쑥맥은 아니었다.
<4회 공판을 끝낸 다음 金 검사와 나는 ‘묵계’를 맺었다. 그는 ‘공판이 끝날 때까지 순순히 범행을 시인하면 사형을 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유괴살해범이 살아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더 산들 무엇하겠느냐? 다만 死後(사후) 처리할 돈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김 검사는 이 사건에 현상금 130만원이 걸렸는데 그중 30만원을 떼어주마고 했다. 5회 공판 직전 어느 날 이모와 나는 검사실에 불려갔다. 이모는 소위 ‘묵계’의 입회인이 될 참이었다. 그러나 김 검사는 이모에게 느닷없이 이모부의 과거를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이모는 기겁을 했다. 이모는 나를 향해 ‘이놈아, 죽어도 너만 죽어라’고 소리쳤다.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모는 현상금이고 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이 사건 중 나는 이때 가장 큰 슬픔을 느꼈다.”(1969년 12월10일 <국제신보> 김씨 수기)
그 이모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금식씨에겐 친어머니나 같았다. 홀어머니가 있긴 했으나 生計(생계)를 잇는데 지쳐 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 김씨 이모의 따뜻한 정을 더 받고 자랐다고 한다. 이런 이모의 저주 섞인 부르짖음은 김금식씨의 가슴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서윤학 변호사가 은밀히 김금식씨의 설득에 나선 것은 이즈음이었다. 徐 변호사는 네 교도관들의 변호사로 선임돼 있었으나 김씨의 자백 번복이 없는 한 최형욱, 김기철씨는 물론이고 네 교도관들의 무죄 입증은 매우 어렵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피고인들 가족은 두 명의 서로 다른 변호인을 뽑았고 國選(국선)변호인 한 명이 추가돼 모두 세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됐으나 사건의 성질상 따로따로 변호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 변호사는 하나의 변호인단처럼 기능하게 됐다. 그 핵심은 徐 변호사였다. 그는 6척 장신에 서글서글한 얼굴을 한 전직 검사였다. 그는 1947년에 고시에 합격, 1964년까지 부산지검에서 일했다. 3·15 마산의거 때에는 고문 경찰관을 붙잡아 들이는 데 앞장서 상당한 인기를 모으기도 했었다. 김태현 검사와도 함께 오랫동안 근무,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徐 변호사는 여러 차례 교도소로 김금식씨를 찾아가 ‘참말을 해달라’고 졸랐다. 그때마다 김씨는 “나는 이제 참회하고 있는 몸이다. 기독교로 改宗(개종)하여 하느님을 믿고 있다”면서 코웃음만 치는 판이었다. 徐 변호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검찰 쪽의 논리구조는 김금식의 1일 불법 출소에 모든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불법 출소’는 김씨의 자백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김씨의 마음을 돌려놓지 않고서는 검찰의 그 방벽을 깰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마침 김금식씨는 김 검사에게 형량을 십 년 밑으로 해주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김 검사는 각서만은 써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일 때여서 김씨의 양심을 일깨울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최형욱씨는 “그즈음 김금식씨는 검사와 흥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소 전의 대구 현장검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간에서 나의 아내가 그를 달래며 ‘제발 참말을 해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했을 땐 눈도 껌벅하지 않았었는데 이즈음 재판정에서 만나면 ‘바른 말을 해버릴까?’라고 농담 같지 않은 말들을 슬쩍슬쩍 던지곤 했다”고 회고했다.
“다음 공판에서는 참말 하겠소”
9월16일의 5회 공판에서는 김기철씨의 알리바이 문제가 주로 거론되었다. 서윤학 변호사는 근하군이 살해된 10월17일 아침에 김씨는 여느 때처럼 개금동 동일교통 주차장에서 배차일을 했다고 말하고 그 증거로 김씨가 써넣은 배차표와 그 근방 식당의 외상 장부를 내보였다. 검찰측의 기록에는 기철씨가 17일 아침 대구로 올라가 불법 출소하는 금식씨를 마중하는 걸로 돼 있었다.
徐 변호사의 증거 제시에 대해 검사들은 조작된 장부라고 맞섰고 변호사는 “필적을 보면 알 것이다”고 반박했다. 이날엔 근하군 시체가 든 마분지 상자를 들고 탄 범인을 시청 뒤 바닷가까지 실어다 주었던 택시 운전사 장태룡씨(가명)가 증인으로 나왔다. 검찰은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던 정대범씨를 불러내 장씨와 대질시켰다. 장씨는 “정씨가 그때 그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徐 변호사의 반대신문에서도 같은 대답을 하자 서윤학씨는 화를 버럭 냈다.
“야, 이 새끼야! 너의 말 한 마디에 사람 목숨이 달려 있다. 너는 전에도 범인과 비슷하다고 해서 여러 사람들을 골탕 먹이더니 오늘은 누구를 죽이려 하느냐!”
성격이 느긋한 徐 변호사도 이때만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씨는 이미 근하 살해 사건 뒤 18일 동안 경찰에 끌려 다니면서 전과자 사진 150여 장과 용의자 100여 명과 대면하는 바람에 한때 정신 상태에 혼란을 겪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쯤 되면 진짜 범인이 나타나더라도 못 알아보기가 십상이다. 장씨는 어찌된 영문인지 근 1년이 흐른 이날 법정에서는 정대범씨가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이날 공판엔 박태형씨도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출소하는 금식씨를 마중 나가 목욕을 시키고 팬티를 갈아입게 한 것은 1967년 10월17일(검찰 주장)이 아니라 그해 11월17일이었다고 말했다. 김금식씨는 이 말에 화를 내더니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고 朴씨를 타이르기도 했다. 1심 재판은 이제 김금식씨의 불법 출소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을 굳히고 있었다.
재판부는 10월11일 대구교도소에서 현장검증을 했다. 이 자리에서 변호인단은 몇 가지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했다. 검찰 조서에 따르면 여광석 교도는 운동장에서 목욕 대기 중이던 김금식씨를 불러내 교도소 바깥으로 빼돌린 것으로 돼 있었다.
徐 변호사는 “그렇다면 김씨는 팬티만 입고 불법 출소했다는 말이 아닌가?”고 따졌다. 목욕 대기중일 때는 죄수들을 겉옷을 벗게 돼 있음이 현장 검증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에 대해 김금식씨는 지금까지의 진술을 고쳐 “여 교도가 불러서 1사 14방에 다시 들어가 죄수복을 입고 나왔다”고 말해다. 변호인단에선 또 교도관이 색안경에 私服(사복) 차림으로 근무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검찰 조서에 나타난 김금식씨의 진술을 반박했다.
정대범씨도 변호인단의 공격을 받았다. “여 교도의 손에 있는 흉터까지 기억할 수 있는 정씨의 기억력을 시험해보자”고 변호인단에서 걸고 들어간 것이다. 변호사들은 먼저 정씨에게 “대구역에서 부엉이집(범행모의 장소)까지 찾아가 보라”고 했다. 鄭 피고인은 머뭇거렸다. “그러면 달성공원에서 부엉이집까지 찾아가 보라”고 했다. 鄭씨는 할 수 없이 찾아가는 시늉을 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잡아, 보는 이들을 실소케 했다.
검사들은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김금식씨가 나서 그들을 곤경에서 건져주었다. 변호사들이 뭐라 하든 김씨는 자신의 불법 출소 과정을 거침없이 재연해보였다. 徐 변호사가 꼬치꼬치 따지자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억보소리 하지 마소!”라고 대들기까지 했다.
김금식씨는 장판교를 지키는 장비처럼 완강하게 변호사들의 화살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는 일류 변호사들의 예리한 공격이 뚫을 수 없는 방패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 그가 버티고 있는 한 검사들은 그 성채에서 안주할 수 있으며 변호사들이 찾아내려는 진실 확인의 길은 차단될 터였다. 재판은 질질 끌었다. 9회 공판이 열린 것은 10월21일, 1심 재판이 시작된 지 만 석 달이 흘렀다.
신문들은 재판 기사를 3, 4단으로 작게 취급, 이 재판에 흥미를 잃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자들이나 독자들이 워낙 ‘출소했다’ ‘안했다’란 엇갈린 얘기를 많이 듣고 있었으므로 근하 사건이라면 ‘알쏭달쏭’이란 낱말이 연상 작용으로 떠오를 지경이었다. 9회 공판에선 김금식씨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백 모씨가 증인으로 나타났다. 그는 1967년 10월17일 밤 김씨와 함께 감방에서 잔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증언, 불법 출소 주장을 부정했다.
이제 김금식씨 혼자만을 빼놓고는 모든 사건 담당자나 관계자들이 김씨의 불법 출소 주장을 부정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본인이 불법 출소 했다는 데야…. 더구나 그렇게 말하면 자신이 사형을 당할 것임을 알고도 그러는 데야…. 제가 죽을 자백을 기꺼이 하는데 그 자백이 설마 거짓일 리가 있겠는가. 아무래도 범행을 부인하는 피고보다는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는 피고를 더 믿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때문에 金씨가 계속 자신의 불법 출소를 고백하는 한 아무리 反證(반증)이 많이 나타나도 결정적인 타격은 줄 수 없는 법이었다. 9회 공판에서 金씨는 지나가는 말처럼 기자들에게 말했다.
“다음 공판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겠소.”
“날 죽여?”
김금식씨의 심경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징조는 그 며칠 앞에 있었다.
<대구교도소 현장검증을 마치고 대구역에 나갔을 대 나(김기철)는 금식이와 마주쳤다. 나는 그를 원망에 찬 눈초리로 쳐다봤다. 이때 그는 대뜸 ‘지금까지 한 일은 모두 연극이었다. 어쩔 수 없이 너를 몰고 들어갔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사진에 말려서 나온다는 이름이 너밖에 없더라. 한 열 달만 고생해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이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 그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가 심각한 것을 보고는 ‘이제 제정신이 돌아오나 보다’고 생각했다.>(<부산일보> 1969년 8월1일 김기철씨 수기)
김금식씨는 자신의 심경 변화를 뒤에 이렇게 설명했다.
“형세는 점점 우리에게 불리해져갔다. 불법 출소가 굳어지면 범행을 부인해보았자 흉악범의 발버둥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임은 뻔한 일이었다. 이때 나는 연극을 너무 깊숙하게 끌고 가 이제 헤어날 길이 어렵게 됐음을 깨달았다.
검찰이 기소하기 직전에 사실을 털어놓아 ‘검찰 우롱’에 대한 벌을 받는 것으로 연극의 종장을 삼으려 했던 나의 계획은 金 검사의 사건 해결에의 집념에 부딪쳐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徐 변호사의 끈기 있는 설득과 이모의 울부짖음이 남긴 충격이 그의 전환을 몰고 온 요인들이었다.
10월28일 10회 공판이 열렸다. 법정에서 김금식씨는 최형욱씨와 스치자 “오늘은 바른말 하겠다”고 했으나 崔씨는 믿지 않았다. 공판이 시작된 직후 박정표 재판장은 김금식씨에게 “이제까지 한 말에 잘못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 지루한 공판을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고 판단, 금식씨의 진술을 의례적으로 재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朴 판사의 물음에 金씨는 폭탄선언으로 답했다.
“지금까지의 진술은 모두 허위 자백이었다. 나는 전과자를 믿어주지 않는 법을 우롱하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 능력을 테스트하려고 했다. 나는 불법 출소한 일이 없다. 불법 출소한 날에 했다는 행동은 모조리 만기 출소한 날에 한 행동이다. 허위 자백은 검찰정 직원 구영근씨가 시키는 대로 맞춰 했다. 검사는 나를 자수자로 취급, 가벼운 형을 구형하기로 했으며 항소심의 관할 법원도 대구가 아닌 곳으로 바꿔주기로 했었다(필자주 : 그가 대구교도소 교도관들을 물고 들어갔으므로 대구교도소를 피하자는 뜻). 정대범은 모르는 사람이며 검찰 조사 때 가르쳐주어서 알게 됐다. 검찰이 말하는 박영태는 유령 인물이며 실제로는 박태형이 박영태란 이름으로 나를 면회했을 뿐이다. 옆에 서 있는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억울한 고생을 하고 있다. 이 연극의 발단은 지난 3월 서부서에 낸 나의 투서로서…”
이것은 검사들에게 있어서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동안 쌓아올렸던 범행 立證(입증)의 구조물이 그 뿌리에서부터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수사 기간 중, 그리고 재판 진행 중 변덕 심한 金씨를 달래는데 그토록 공을 들인 보람도 없이 그는 ‘인간 선언’을 하고 만 것이었다. 이날 김기철씨의 형 이만씨는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뒤를 돌아보는 금식씨와 눈이 마주쳤다.
“나의 성난 얼굴을 보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아 잘못을 사죄하는 시늉을 하더군요.”
그때까지 김금식씨의 진술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온 힘을 기울여왔던 검찰은 이제부터는 前科者(전과자) 김금식씨는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인간인가를 증명해야 할 입장으로 뒤바뀌게 됐다. 검찰 측은 일단 다음 공판 때 김금식씨의 자백 번복을 다시 번복시킬 자료를 제시하겠다고 재판부에 밝힌 뒤 이 충격을 가누어야 했다.
7일 뒤 열린 제11회 공판에서 감찰 측이 내세운 증인은 성 모였다. 그는 1967년 가을에 김금식씨와 술을 마셨는데 날짜는 17일이었고 그때 금식씨는 얇은 잠바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검찰 측은 ‘얇은 잠바’를 입었다면 10월17일이 틀림없다는 궁색한 논리를 펴려고 했던 것이다.
이어서 김태현 검사의 서기 방두환씨와 구영근씨가 증인으로 나타났다. 방씨는 수사과정을 이야기하면서 김금식씨가 수십 번이나 시인과 번복을 되풀이 했다고 말했다. 구씨는 금식씨의 간첩 관계 거짓말 때문에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군 병력, 함정까지 동원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증언은 김금식씨의 변덕보다는 그런 金씨를 유일한 길잡이로 하여 수사를 해온 검찰 측의 작태를 폭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넉 달을 끈 이 재판의 구형 공판은 11월12일 오후 2시부터 부산지법 제1호 법정에서 열렸다. 방청석은 피고들의 친척, 친지, 가족, 그리고 기자들로 꽉 메워졌다.
이날 <국제신보> 사진부 김상업 기자는 김금식씨와 또 마주쳤다. 금식씨와 취재 기자들은 이젠 낯이 익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돼 있었다. 金 기자는 넉 달 동안 거의 출근하다시피 부산지법을 드나들고 있었다. 금식씨는 金 기자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싱긋 웃었다. 金 기자는 금식씨가 ‘오늘 나는 사형 구형을 받게 될 것이다’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金 기자는 “한 번 더 해봐”라고 했다. 금식씨는 같은 몸짓을 했다. ‘찰칵!’ 김 기자는 셔터를 눌렀다. 그날 <국제신보>엔 ‘나를 죽여?’라는 설명이 달린 금식씨의 冷笑(냉소)하는 사진이 실렸다.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의 금식씨는 뱅긋 웃고 있었다. 이때쯤 거의 모든 취재 기자들은 피고인들이 무고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사진 기자라는 직업상 머리를 푹 숙이고 참회하는 모습의 피고인을 찍으려고 애썼습니다. 보통 피고들은 못에 힘을 주고 있다가도 재판이 진행되면 풀이 죽기 시작하여 고개를 떨구게 되고 그때를 기다려 셔터를 누르지요. 그런데 이들은 통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들고 성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김상업 기자)
이날 검사들은 두 시간에 걸쳐 준엄한 斷罪(단죄)의 논고를 했다. 검찰 측은 이번 사건은 사상 최고의 지능범죄라고 말하고 다섯 가지의 범죄 특색을 들었다. ①완전범죄를 꾀한 치밀한 계획성, ②칼을 근하군의 가슴에 꽂아둔 채 뽑지 않아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한 잔인성, ③살해 장소를 근하군 집 근처로 택하고 시체유기 장소를 人家(인가) 근처인 해안통으로 선택한 대담성, ④인간성을 팔아가며 돈에 눈이 뒤집힌 외삼촌의 비인도적 소행, ⑤교도관과 짜고 당당히 불법 출소,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를 조작한 기상천외의 지능. 김태현 검사는 이번 사건의 특수성을 그렇게 요약한 뒤 “이들의 천인공노할 범죄에 하늘은 편들지 않았기에 시체는 유기되기 직전에 발견되고 책가방 등 유류품이 남아 근하군의 원혼을 달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검찰 측은 최형욱, 김금식, 김기철씨 등 세 사람에게 사형, 여광석 교도에겐 징역 15년, 이석연 교도보에겐 징역 10년, 나머지 두 교도에겐 징역 1년씩을 구형했다
사형이 구형되어도 피고인들이나 방청석의 가족들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 또한 보통 재판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김금식씨는 싱글싱글 웃으며 형사소송법 제309조를 기자들이 들으라고 줄줄 외고 있었다.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 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지 못한다.”
“내 죄를 아직도 모른다”
기철, 형욱씨는 표정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고 울음보를 터뜨리는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검찰의 이 정도 구형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억울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방청석에 나가 앉아 있어도, 사진 기자들이 셔터를 눌러대어도 도무지 부끄러운 줄을 모르겠더군요.”(최형욱씨의 아내 ㄱ씨)
서윤학, 한봉세 두 변호인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변론을 했다.
‘검찰이 쫓고 있는 주범 박영태가 실존인물인지 가공인물인지 기록상으로 보아 희미하다. 변호인측은 박태형씨와 박영태는 동일 인물로 본다. 박영태가 없는 이상, 또 박태형이가 主犯이 아니라면 공소 유지를 할 수 없다. 검찰의 기소 사실과는 정반대로 근하군의 아버지는紙物(지물)을 밀수한 적이 없고 형욱씨는 기철, 금식씨와는 알지 못하는 사이다. 여 교도가 이 중대사건에 큰 돈은 커녕 외상 약속만 받고 죄수를 불법 출소시키겠나?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는 것들이다. 수사에 관여해선 안 될 사람이 수사에 관여했다. 수사권이 없는 자가 어찌 검사를 보좌했는지…. 검찰 입회 서기가 참여하지 않고 한 검사의 피의자 신문은 증거 능력이 없다.’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요지는 이러했다.
최형욱 : 내가 왜 구속됐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억울한 죄를 받지 않도록 재판부서 잘 밝혀주었으면 싶다.
김금식 : 나는 어떠한 벌을 받아도 무방하다. 나의 거짓 자백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욕보이고 있으니 미안할 뿐이다. 검찰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 말에 따라 증거를 만들었다.
김기철 : 자다가 생각해도 괘씸하다.
여광석 : 몇 사람의 연극에 의해 15년 징역이라니 억울하다. 죄가 있다면 그날 당직한 죄밖에 없다.
이석연 : 억울하다.
고화욱 : 잘 판결해달라.
정시식 : 직무 유기했다면 천벌을 받겠다. 왜 이 법정에 섰는지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룬다.
정대범도 자백 번복
구형 공판 다음날인 11월13일 군수기지사령부 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선 정대범 피고인에 대한 사실 심리가 있었다. 이날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의 범행을 자백해오던 그는 고분고분하던 태도를 바꿔 약 30분 동안 검찰관의 신문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재판장은 30분 동안의 휴정을 선포했다. 속개된 공판에서 鄭씨는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근하군을 죽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구영근 사범이 시킨 대로 한 거짓 자백이다. 나는 최형욱, 김금식, 박영태는 전혀 모른다. 김기철은 고등학교 다닐 때 알았고 구영근은 고교시절 유도 사범이었다. 지금껏 거짓 진술을 계속해온 것은 김태현 부장검사가 식사와 술, 용돈까지 주는 등 나에게 무척 잘 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또 구영근이 금식씨의 진술대로 말하지 않으면 간첩으로 고발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고 징역도 조금만 준다고 해서 허위 자백을 해온 것이다. 근하군이 살해된 1967년 10월17일 밤에는 친구 영철이하고 탁구를 쳤다.”
변호인은 ‘왜 갑자기 심경변화를 일으키게 됐느냐?’고 물었다. 鄭씨는 방청석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입을 뗐다.
“오늘 법정에서 어머니를 보니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났다. 부산지법에 증인으로 나가 증언할 때도 허위 진술을 한 것은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법정에 서기 전 김태현 부장검사실에 불려갔다. 金 검사는 ‘김금식과 최형욱은 범행을 부인하고 너 혼자를 범인으로 몰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저들만 살려고 한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고 그래서 네 사람이 공모, 근하군을 죽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대범 피고인은 검찰이 제시했던 물증까지 ‘조작’이라고 몰아 붙였다.
“범행 당일에 입었다는 청색 바지, 잠바, 흰 무늬 운동화도 전부 날조된 것이다. 구영근이 그렇게 말하라고 해서 그랬을 뿐이다.”
이로써 검찰 측에 가장 열성을 내어 협조를 해왔던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와서 자신들의 진술을 뒤엎으며 검찰 수사의 진상을 폭로하고 나온 것이었다. 검찰의 성채를 지키고 있던 두 수문장은 스스로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변호인단에 투항한 셈이었다.
정대범씨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바로 전날 검찰이 형욱, 기철, 금식씨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속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철모르는 애숭이 청년 정대범씨는 “군대 생활하는 정도의 징역을 주겠다”는 具 사범의 말을 믿고 있었던 듯하다.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 금식, 대범씨 모두가 이모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가슴속에 잠재워둔 양심과 용기를 다시 일깨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1심 선고 공판은 求刑(구형) 열흘 뒤인 11월22일에 있었다. 그동안 세 판사들은 부민동의 한 여관에 틀어박혀 공판 서류를 검토했다. 검찰의 공소 사실 기록만 해도 1만3000여 쪽에 이르렀고 변론 기록은 56쪽으로 매우 짧았다. 판사들은 이 방대한 기록을 세 번씩 검토했다.
선고 공판 날 부산지법 법정에는 오전 10시부터 방청객들이 몰려들기 시작,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10시37분 말쑥하게 면도를 한 일곱 피고인들이 입장했다. 김금식씨는 늘 깨끗한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양심선언’ 이후에는 남루한 囚衣(수의)로 옷차림이 바뀌어져 있었다.
死刑선고로 난장판이 된 법정
그는 히죽히죽 비웃는 웃음을 떠올렸고 다른 피고인들은 무표정했다, 11시2분쯤 김태현 검사 등 세 명의 검사가 들어왔다. 뒤이어 박정표 판사 등 세 판사가 입장했다. 피고인들은 모두 일어났다. 박정표 재판장은 “김금식, 김기철, 최형욱”이라고 세 사람을 차례로 부르더니 “사형을 선고한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朴 판사는 이들에게 한 번 더 알려주려는 듯 “너희들 알았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오른쪽의 송기방 판사에게 판결 이유문을 읽도록 했다. 이런 선고 방식은 퍽 드문 것이었다. 판결 이유문을 먼저 읽고 刑量(형량)을 적은 主文(주문)을 낭독하는 것이 상례인데 박 판사는 거꾸로 진행했던 것이다.
宋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때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법정의 공기를 가르는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이놈들아, 날 죽여라.”
여광석 피고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하나의 신호였다.
“판결 이유는 읽어서 뭘 해!”
“판사 앞에서 왜 말 못해? 여기는 억울한 사람뿐이다.”
“억울하다, 나도 죽여라!”
그때까지 넉 달 동안 얌전하게 재판을 지켜보아왔던 피고 가족들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 간수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일부 방청객들은 판사 자리에까지 뛰어올라갔다. ‘이게 무슨 재판이냐’고 주저앉아 통곡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찰관들이 들어와 가족들을 법정 바깥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들은 바깥복도에서 법정 문을 두들기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高 피고인은 ‘욱’하면서 졸도해버렸다. 최형욱씨는 “어떤 놈들이 이런 판결을 내렸느냐?”고 절규했다. 김금식 피고인은 “이 따위 판결이 어딨어?”라고 고함을 내질렀다.
宋 판사의 판결 이유문 낭독을 듣는 사람은 그를 에워싼 취재 기자들뿐이었다. 이유문 낭독 소리는 피고들과 가족들의 저주와 고함 소리에 눌려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김금식이다. 증인 구영근이가 쇠고랑을 차고 내가 증언대에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김금식씨는 여유 있게 웃음을 띠고 적당히 성도 내어가면서 이 북새통 속에서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를 받기에 바빴다. 그는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연배우의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宋 판사가 읽은 판결문의 알맹이는 이러했다.
<검사의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검찰과 재판부가 현장검증을 마치고 채택한 증거품인 노끈, 마분지 상자, 칼을 확실한 증거품으로 인정하는 한편, 피고인 김금식이 9회 공판 때까지 시종일관 범행을 시인한 진술과 이에 따른 물증 및 증언, 그리고 대두교도소를 출소한 날짜가 근하군이 살해된 10월17일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모두 충분하다고 인정한다. 진술을 번복하기 시작한 10회 공판 이후의 피고들 진술은 증거와 타당성이 없는 횡성수설에 불과하다.>
박정표 재판장은 또 여광석 교도에겐 징역 5년, 이석연 교도보에 징역 2년, 고·정 두 교도에겐 징역 여덟 달씩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대해 김태현 검사는 “준엄한 법의 正義(정의)를 보여주는 지당한 판결이었다”고 평했다. 서윤학 변호사는 격한 말을 했다.
“한심한 판결이다. 재판소는 부산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죄를 밝혀내고야 말겠다.”
서변호사나 한봉세 변호사는 그러나 1심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두 사람은 피고인들에게 몇 번이나 “여기서는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최형욱씨도, “결과가 그렇게 나올 줄 예측은 했었다”고 말했다. “재판진행이 피고들에게 불공평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억울한 사정을 진술하려고 하면 번번이 판사가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막는 등 편파적인 진행을 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장소는 부산이었다. 부산의 검찰이 사건을 조작하기엔 편리한 곳이었다. 근하군이 살해된 그날 밤에 나는 집에서 잠을 잤고 이 사실을 옆방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검찰 측이 철도 공무원인 옆방 사람이 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었다.”
피고들이 재판부를 덜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막판에 가서 금식, 대범씨가 범행을 부인하는 등 피고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져 은근히 희망을 갖게 됐는데 死刑(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니 그들의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김기철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는 말이 떨어졌을 때 나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같이 느꼈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아침 우리를 호송해간 교도관들이 ‘선고를 받거든 조용히 해! 무엇을 부수거나 해서는 안 돼!’라고 주의를 준 것이 사형 선고를 예감케 했지만, 나는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감방으로 돌아온 나는 몸뚱이를 가눌 길 없어 벌렁 자빠졌다.>(<부산일보> 1969년82일, 김기철씨 수기)
이 드라마의 각본을 쓴 장본인 김금식씨도 불안했다.
<死色(사색)이 된 동료들 때문에 나도 일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2심이 있고 마지막 대법원에서의 재판이 있으니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질 것이라 믿었지만 ‘誤判(오판)은 선진국에서도 흔히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국제신보> 1969년 12월15일 김금식씨 수기)
일부 취재 기자들에게도 유죄 선고는 뜻밖이었다. 처음부터 수사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신상욱씨(당시 합동통신 기자)는 “이럴 때는 정말 하느님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피고들은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검찰도 교도관들의 선고 형량에 불만이 있다는 형식상의 이유를 들어 항소했다.
형제 69노 26 항소이유서
서기 1969년 1월31일
대구고등법원 귀중
대구교도소 재감 피고인 김기철(32세)
본적 경남 밀양군 무안면 무안리 828번지의 18
현주소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2동 14통 5반
본 피고인은 서기 1968년 11월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등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판결에 불복코 항소를 제기합니다.
항소 이유 사실
법은 분명 뭇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몇몇 수사관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법은 죄인을 벌하고 죄 없는 사람은 벌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본 피고인과 같은 경우는 위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방증이 없는 진술은 유죄로 인정치 못할 것인즉 어떻게 유죄로 판결을 내렸는지 본 피고인에게는 정말 이상한 누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약하고 무식한 피고이지만 흉측한 누명을 쓰고 죽어야 하겠음은 생명이 있는 한 본건 사건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말 것입니다.
정신이상자와도 같은 두 사람의 방증이 없는 진술을 인정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오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피고인의 누명을 쓰게 된 시초를 다음과 같이 서면으로 올리오니 재삼 관찰하시와 사필귀정의 판결이 내리시기를 바라면서,
1. 본 피고인은 서기 1961년 7월에 제대하여 그 후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하여 생계유지를 해오던 중, 서기 1967년 친우 최두영이의 알선으로 9월1일부로 부산시 개금동 소재 동일교통주식회사에 종업원으로 종사 중 서기 1968년 5월4일 오후 9시경 본 피고인의 본가에서 뜻 아닌 수사관들의 습격을 받아 감금된 이후 말 못할 정도의 흉측한 고문을 받고서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오던 중 흉측스럽게도 본건 사건의 진범으로 누명을 쓰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2. 혹독한 고문으로 흉측한 누명을 씌워놓고 현장 조사를 다닌다면서 본 피고인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짐승을 끌고 다니듯 하면서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최형욱이(注-필자가 붙인가명)와 정대범이를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같이 검사님은 허위진술, 조작하였던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흉측한 고문 자체가 위법이 아니겠습니까. 본 피고인도 법에는 응해야 하는 피고입니다. 그러기에 법을 다스리는 수사관님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매를 맞았습니다. 이렇게 누명을 쓰는 데는 법이라 해도 응할 수 없습니다. 본 피고인이 죄가 있다면 정신이상자를 알았다는 죄뿐입니다.
그리고 검사님의 엉터리 공소사실을 보면 교묘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만 본 피고인이 모르는 공소사실을 누가 만든 것인지 의문이며 오늘날 법치국가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식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면 백성들은 공포심에 살아가기가 곤란할 것이며 사회는 무법국가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검사님의 엉터리 조서를 인정하고 병만을 만들어 약만 팔아서 자기의 이욕만 채우려는 돌팔이 의사에 비할 바 없는 위법 검찰관님의 엉터리로 작성된 조서만으로 오인을 하고 유죄로 판결을 내렸음은 부당한 판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송기간 6개월을 두고 조사를 하였지만 어느 누구가 진범이다 하는 증인도 없고 증거물도 없는데 단순히 정신이상자와 같은 김금식이와 정대범 피고인의 방증이 없는 진술로 죄 없는 사람을 진범으로 인정하였음은 법치국가에서는 행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4. 분명 본 피고인은 사건 당일 동일교통주식회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서면과 같이 근무한 사람으로서 경남 영업용 1195 차주 김항구와 경남 영업용 1194 차주 김상태, 그리고 동일교통주식회사 내 조수 이석우 등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검사님은 증인을 거절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회사에서 모든 잡일을 보았습니다. 오전 6시부터 배차를 하고 있는데 배차원이 아침 일찍 나오지 않기 때문에 본 피고인은 회사에서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오전 6시부터는 본 피고인이 배차원이 나올 동안 보아주고 배차원이 출근을 하면 배차 일지를 인계하여줍니다.
배차를 보아주라는 회사에서의 지시는 없지만 배차원을 생각해서 보아주고 했습니다. 본 피고인이 근무하는 날까지는 이런 식으로 근무하여 왔습니다. 사건당일 본 피고인이 배차표에 기재되어 있는 필적도, 배차일지에도 본 피고인 필적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사님은 허위조작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본 피고인의 회사에서는 배차 일지와 배차표가 있습니다. 배차 일지는 회사에 보관되고 배차표는 각 차에 한 장씩, 아침 첫 배차할 적에 가지게 됩니다.
혹시 이런 수는 있습니다. 본 피고인이 글씨가 나빠서 배차원이 출근하여 배차 일지를 보고 글씨가 나쁘면 다시 작성할 수 있지만 차들이 가지고 다니는 배차표는 잊어버리든가 찢어지면 다시 작성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다시 작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기 1967년 10월18일 사건 이튿날 배차 일지에는 본 피고인의 필적이 아니고 배차표에는 본 피고인의 필적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사님은 조작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서기 1967년에는 만나보지도 못한 김금식이를 만난 것처럼 하고 본건 사건을 조작하였던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서기 1968년 1월 초순경에 김금식이가 찾아와 만난 사실은 있습니다. 서기1968년 1월 초순경에 만난 김금식이를 검사님은 서기 1967년 10월17일에 만난 것처럼 하고 본 피고인이 대구에 간 사실도 없는데 대구에 올라가서 불법 출소한 김금식이를 만나 볼 박스를 사가지고 부산으로 내려와 미리 약속한 정대범이를 본 피고인이 인사를 시키고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 소재 진주상회에 가서 술을 먹고 또다시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 소재 돼지국밥집에 가서 술과 국밥을 먹고 거기서 9시경에 사건 장소에 가서 김금식이와 본 피고인은 망을 보고 있었다고 검사님은 주장하고 있지만 본 피고인은 사건장소도 모르고 죽은 사람의 얼굴도 모르는 것만도 아니라 몇 살이나 먹었는지도 본 피고인은 모릅니다.
5. 현명하신 재판장님. 끝으로 재삼 관찰하시와 사필귀정의 판결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유서를 대합니다.
서기 1969년 1월31일
대구교도소재감 피고인 김기철
본인의 무인임을 증명함 교도보 이상억
피고들과 그 가족들에게 있어서 1심 선고 날부터 2심 공판 시작까지의 석 달간은 피를 마르게 하는 고통의 계절이었다.
그들이 억울하다는 울부짖음은 사형 선고라는 ‘유죄 公認(공인)’으로 제3자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어져버렸다. 더구나 1968년 12월3일 군사법정에서 정대범씨마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기철이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 나는 방청석에서 잠시 기절해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고물상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계속 술만 퍼마시기 시작했지요. 이웃과 만나는 것도 겁이 납디다. 내가 아무리 변명을 하고 이웃사람들이 아무리 위로 말을 해도 그들은 속으로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김이만씨의 말)
기철씨가 잡혀간 뒤 화병으로 자리에 누웠던 그의 어머니가 “너희들 면회 가지 마라. 기철이는 곧 나올 거야”라는 헛소리를 하다가 숨을 거둔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감방 속의 피고들이 느꼈을 불안은 상상만으로 족할 것이다. 법정에서 아무리 애절하게 자신들의 무고를 외쳐대도 ‘현명한 ’ 판사들에겐 흉악범들의 몸부림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확인 했을 때의 무력감과 배신감, 이런 誤判(오판)이 앞으로도 되풀이돼 ‘법정살인’의 희생물이 되고야 말 것이란 불안감은 그들의 가슴을 죄고 속골을 쑤셨을 터이다.
“내 목 갖고 가십시오”
무대는 이제 대구로 옮겨졌다. 그것을 큰 변화였다. 부산지검이 부산교도소나 부산지법이나 부산의 기자들과 부산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대구교도소, 대구고등법원, 대구의 기자들과 대구 사람들에게는 통할 리가 없었다.
“대구교도소로 옮겨오니 우선 대우가 달라집디다. 부산에 있을 때는 줄곧 가죽 수갑을 차고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풀리고 모두 동정의 눈초리로 저희를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교도소 직원들은 동료 직원들과 우리가 모두 억울하게 엮이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는 훌륭한 판사들이 사건을 맡았으니 안심해도 좋은 것이라고 위로도 해주더군요.”(최형욱씨의 회고)
2심의 재판장은 공교롭게도 김태현 부장검사 이름과 한자까지 꼭 같은 김태현 부장판사였다. 검찰은 김태현, 정경식, 이원형 검사를 임시로 대구고검에 발령, 이 사건을 맡게 했다. 항소심 첫 공판은 해가 바뀌어 1969년 2월21일 대구고법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모든 피고인들은 검찰의 기소 사실을 부인했다. 김금식씨는 검사들을 비웃듯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더 농락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법정 신문도 김금식씨의 불법 출소 여부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
검찰의 신문은 거의가 1심에서 되풀이된 내용이었다. 변호인단(서윤학, 박찬)에선 “2심 구류 만기가 3월22일이니 원심에서 신문한 사실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첫 공판이 끝난 뒤 김태현 부장판사는 어떤 확신을 얻었는지 “이 재판은 질질 끌 필요가 없겠다”고 徐변호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7일 뒤 두 번째 공판, 이날에도 불법 출소 문제가 주로 거론됐다. 김금식씨는 거듭 “검찰 신문 조서에 기록된 내용은 전부 거짓말이다. 항소심에서 진술하는 것만이 사실이다”고 말하며 불법 출소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또 검사들을 향해 “당신네들을 위해 죽어달라면 죽어줄 용의도 있다”고 내뱉기도 했다. 2차 공판을 끝낸 뒤 재판부는 검사들과 변호인단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정대범씨를 신문하기 위해서였다.
정대범씨는 1968년 12월3일 군수기지 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서울 고등군법회의에 넘어가 있었다. 서울행 기차간에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함께 탔지만 재판 이야기는 서로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의 군 교도소로 정대범씨를 찾아간 그들은 바로 신문에 들어갔다. 정씨는 물론 범행 일체를 부인했다. 金 검사가 “1심에서는 시인하다가 왜 번복을 하느냐?”고 물었다. 정씨는 “그건 김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 하고 싶어 시인을 했습니까? 내 목숨이 그렇게 갖고 싶거든 갖고 가십시오”라고 쏘아붙이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이어서 鄭씨는 金판사에게 “대구로 내려가시거든 피고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재판부는 鄭씨에 대한 출장 신문을 끝으로 법정 신문을 끝냈다. 3월7일 검찰 측은 1심 형량과 꼭 같은 구형을 했다. 이제 피고인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꼭 같은 검사에 꼭 같은 구형은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다.
“피고인 등은 각 무죄”
선고 공판을 3월21일에 열렸다. 김태현 부장판사는 200자 원고지 약 200장분의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주로 피고인들의 진술이 고쳐지고 추가되고 번복되어간 과정을 짚어가며 논고를 해갔다.
“…김금식은 1968년 5월9일 검찰 진술에서는 범행을 저지른 날 밤 대구로 돌아와 사창가에서 잤다고 했다가 5월13일에는 참새구이집에서 잤다고 수정했다. 5월18일 검찰 진술에선 마분지 종이를 살 때 정대범이 함께 따라갔다고 또 진술을 수정했으며 5월26일에는 만기 출소날은 1967년 10월16일이라고 했다가 사흘 뒤 11월17일이라고 또 고치고 6월5일에는 이 사건은 공산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 하여 박영태 위에 최형욱, 그 위에 김마담, 다시 그 위에 황선생이 있고 자신도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횡설수설했다. 7월18일에는 또 칼과 노끈을 산 것은 자기였다고 앞의 진술을 뒤엎었고 10월4일의 진술에선 불법 출소할 때 1舍 14방에 다시 들어가 죄수복으로 갈아 입었다고 또 앞의 진술을 고치는 등…”
김판사는 정대범씨의 진술 내용도 시간별로 나열, 대비하여 범행 사항이 진술 때마다 바뀌어져간 과정을 설명한 다음 결론에 들어갔다.
“무릇 살해 사실인 무거운 사실을 자백하는 사람이 그 주변적 사실인 가벼운 사실을 자백하게 됨은 우리의 경험률이다. 이와 반대로 주변적 사실이 여러 번 변경 또는 추가되는 경우는 무거운 사실에 관한 자백도 허위라고 보아야 한다. 김금식과 정대범의 진술을 볼 것 같으면 오로지 공소사실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주변적 사실이 변경 또는 추가되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이는 숨겼던 사실을 점차 자백해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런 경우는 가벼운 사실을 점차 자백하고 무거운 사실을 숨겼던 자에 해당하는 이론이고 이 사건과 같이 무거운 사실을 먼저 자백한 경우는 가벼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하는 자가 공소 사실에 맞추어가는 과정이며 이는 필경 무거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한 자가 허위 자백한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살인이란 무거운 사실을 이미 자백한 金, 鄭 피고인이 범행 모의, 범행 도구 구입, 불법 출소 따위의 가벼운 주변적 사실의 진술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은 얘기를 되풀이한 것으로 미뤄 무거운 사실(살인)의 자백 자체도 믿을 수 없다는 논고였다. 金 판사는 또 정대범의 현장검증 때 칼질과 剖檢(부검)에 나타난 상처가 서로 맞지 않다는 사실, 김기철의 배차표에 의한 알리바이 성립, 김금식의 감방 동료에 의한 알리바이 증명, 가공인물 박영태의 문제 따위를 들어 검찰의 기소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金 재판장은 판결 이유문을 다 읽은 뒤 주문을 짤막하게 낭독했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등은 각 무죄. 검사의 소를 기각한다.”
피고인들의 침통했던 얼굴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선고가 끝났는데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최형욱씨는 “내가 무죄선고를 받아서 기쁜 것이 아니다. 조카를 잃고 범인으로 몰려서야 말이 안 된다”고 울먹였다. 김금식씨는 “흑백이 가려질 줄 알았다. 정의는 꼭 승리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별로 기쁜 줄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광석씨는 “사필귀정이다”고 했다.
한편 이 지긋지긋한 사건과 씨름해온 김태현, 이원형, 정경식 검사의 얼굴에는 피로한 빛이 완연했다. 이때까지 피고인들을 노리개처럼 갖고 놀며 온갖 저주, 모욕, 비난, 꼬집음, 경멸을 다 쏟아 부었던 신문들은 뒤집힌 선고에 ‘그럼 그렇지’란 제목을 달기도 했다.
검찰은 2심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다. 1969년 7월15일 이 기괴한 사건에 또 다른 기록을 덧붙이는 판결이 나왔다. 육군 고등군법회의는 정대범 피고인에게 또 사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같은 사건에 대해 상반되는 판결이 나온 것이었다. 재판장 홍순호 대령은 鄭씨의 자백은 진실성이 있다고 판단, 鄭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그같이 판결한 것이었다.
아무리 판결이 판사의 자유심증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이처럼 같은 사건에 대해 한쪽은 ‘죽음’을 요구하고 다른 쪽은 무죄를 선고한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7월19일 검찰은 738쪽에 달하는 상고이유서를 대법원에 냈다. 큰 사건이래야 상고이유서는 30~40쪽인데 이 상고이유서는 한국 재판사상 가장 긴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이 상고이유서를 만들기 위해 김태현 검사 팀은 한 달 동안 다른 업무를 젖혀놓고 호텔에서 철야작업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때 金 검사는 서울지검으로 전보발령을 받은 뒤 였으나이 사건에서 손을 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검찰은 이 상고이유서에서도 “이 사건은 초인적인 지능 범죄의 특수성을 갖고 있으므로 특수한 논리로써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범인들이 미리 준비한 계략에 따라 허점을 남기는 진술 전법을 쓰는 등 다른 사건과 다른 점이 많은데도 2심 재판부가 이를 입체적 총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합리적인 이유 없이 증거를 배척했다”고 주장했다.
이 상고이유서를 읽어본 나의 소감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논리성이나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끔찍이도 긴 상고이유서는 언어의 타락, 언어의 낭비성을 연구하는 데 꼭 참고해야 할 자료일 것이다.
“대한민국을 다 뒤져도 다른 범인은 없다”
1969년7월25일 오후 대법원 형사1부(재판장 홍순엽, 주심 주재광, 배석 양희경·이영섭 판사)는 상고심 선고 공판을 열고 검찰 측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 원심대로 일곱 피고인들에게 無罪(무죄)를 확정 시켰다. 이날 재판부는 “공소 사실이 적법한 증거에 의해 유죄의 확신 단계에 들어서지 않는 한 법원은 그 피고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전제, “검사가 제출한 증거자료를 분석해볼 때 범행을 정황적으로 보강해주는 피고인들의 자백 진술 등 증거만이 대강을 이루고 있고 이런 진술을 제외하면 나머지 증거들은 단독으로나 종합적으로나 피고인들이 진범임을 증명시켜주지 못하고 있음은 기록상 명백하므로 原審(원심)에서 피고인들이 이 같은 진술을 하게 된 과정과 그 내용에 비추어 신빙성이 없다 하여 배척하고 무죄를 선고한 것은 採證(채증) 법칙에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1년 반 동안이나 피고인들을 生死(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하게 했던 근하군 수사와 재판은 終章(종장)을 맞았다. ‘정의의 승리’나 ‘법의 현명한 판단’으로 부르기에는 그동안의 인권 침해가 너무나 심했다.
이날 오후 2시 김기철씨는 감방에서 교도관이 달려와 “기철아! 모두 무죄가 되었단다”는 알림에 접했다. 그는 기쁨보다는 허탈감을 느끼고 ‘무죄, 무죄, 당연하지’라고 중얼거려다.
최형욱씨도 무죄 확정 소식에 별 기쁜 줄을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판결이었고 ‘이젠 더 당할래야 당할 수가 없다’는 악이 치받쳐 올라와 있어 어떤 판결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기철씨와 형욱씨는 구속된 뒤로는 한 번도 가족과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혈육과의 再會(재회)가 임박했다는 설레임을 안고 그들은 출소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근하 사건의 스타 김금식씨는 교도소장실에 불려나가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그는 너털웃음까지 터뜨리며 勝者(승자)의 기분을 냈다.
“전과자를 무시하는 사직 당국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 그는 “억울한 관련자에게는 미안하나 통쾌하다”고 했다. 한편 1심에서 전원 유죄를 선고했던 박정표 판사는 “증거에 대한 법관들의 견해 차이에서 온 결과이며 법관으로서 양심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으므로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고 했다. 서윤학 변호사는 “검찰의 수사 잘못으로 그렇게도 인권이 짓밟힌 것은 유감이며 이로써 眞犯(진범)을 잡는데도 커다란 지장이 초래됐고 자칫하면 이 사건은 영영 풀리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정경식 검사는 “수사 재기는 당치도 않다”면서 “할 일은 다했다”고 말했다, 김태현 부장 검사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국 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재판 결과야 어떻든 피고인들이 진범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全수사력을 동원한다 해도 다른 진범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피고인들의 진술이 번복되어 신빙성이 없다고 하나 그것 말고도 범행을 증명할 증거는 충분한 것이며 지금 마음 같아서는 모든 기록을 법조계에 공개하여 의견을 묻고 싶다.”
이 金 검사의 마지막 말은 누명을 벗고 이 사회에 나온 김기철씨 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한번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영원한 꼬리표
보통 사람들은 워낙 근하 사건이 어지럽게 엎치락뒤치락하는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시 일반인들의 판단 자료는 거의 신문에서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판단의 준거를 제공해야 할 신문기자들이 더욱 종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취재 능력이 없는 일반 독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이 범인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다만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으니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던 모양이다’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7월26일의 <조선일보> 사설은 “자백을 증거의 여왕이라고 했던 야만적 시대를 우리는 또다시 이 나라에 부활시킬 수는 없다. 기분이나 추리로 수사를 전개할 때 이 땅에는 다시 중세기적 암흑이 엄습하게 될 것이다”고 검찰을 나무라면서도 “그들이 진범이야, 아니냐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검찰 측의 불만도 약간은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金 검사가 “재판이야 어찌 되었든 저들은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역시 그들은 범인인데 유죄 증거가 없어 풀려난 것이구나’라는 의혹을 갖게 됐다고 해도 놀랄 일이 못된다.
金 검사의 소감 피력은 감옥에서 풀려난 여덟 명의 무고한 사람들(정대범씨도 얼마 뒤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에게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의혹의 꼬리표’를 선물한 셈이었다.
요절한 김기철씨가 끝내 이웃 사람들로부터는 완전 결백의 公證(공증)을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어간 것이나 최형욱씨가 이웃의 이상한 눈길이 싫어 출감 뒤 이사를 해버린 일들은 그들이 평생 이 의혹의 꼬리표와 싸우며 살아가야 할 것임을 생생한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3심제란 것을 만들어 착오에 의한 ‘사법 살인’ 같은 것을 막아보려 했다.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3심제는 인간이 만든 지혜의 소산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일단 승복해야 할 의무를 진다.
金 검사는 이런 법조인의 직업윤리에서 벗어나 440여 일간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감옥을 나서는 김기철, 최형욱씨 등에게 ‘저들이 진범이다’고 말했다. 어느 기자는 “김 검사도 잘못했지만 그런 말을 기사화한 기자들의 양식도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듣고도 흘려버렸어야 했을 애기를 필요 없이 보도했다는 뜻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범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유죄 확정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수가 있다. 더구나 근하 사건의 경우, 범인이 안 잡혔기 때문에 그들은 ‘저것 봐라, 나는 정말 무고하지 않느냐’고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무죄를 설명할 수도 없게 됐다. ‘범인으로 벌할 수 없다는 증명’은 법정의 무죄 확정으로 이루어진 셈이지만 그것이 곧 사회에서 ‘결백의 증명’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취재한 나의 견해를 굳이 여기에 밝힌다면 근하 사건 피고인들은 의심할 바 없는 결백의 인간들이란 것이다. 검찰이 증거를 못 세워 無罪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처음부터 무고했던 것이다. 김태현 검사 팀도 어떤 점에선 이 사건의 피해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드라마의 작가나 연출가라기보다는 배우들이었다. 이 인형극의 진정한 연출가는 김금식씨였다. 가해자를 꼽으라면 金씨를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출감 뒤 <국제신보> 기자를 통해 구술한 수기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은 물론이다. 수사기관이나 법을 우롱하겠다는 발상부터가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다. 마지막에 내가 생명을 빈 것은 법이었으니까. 이제 그 어둡고 긴 터널에서 만났던 잊지 못할 사람들에게 사죄를 해야 할 차례다. 나와 같이 생사의 기로를 헤맨 사람들에게는 죄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그중에서도 기철에게는 더욱 더―. 그는 나 같은 못난 인간을 알았다는 죄 하나로 지독한 고행을 치렀다. 나는 이겼지만 진 것이기도 했다. 내가 불신했던, 그래서 우롱하려 했던 ‘법’은 건재하고 있었다. 나는 송구스럽게도 그 법에 의해 목숨을 건진 것이다.>
검사들은 출세가도 달려
김금식씨는 출감 뒤 운전사가 됐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는 과속으로 택시를 몰다가 부산시 남구 수영동에서 세 사람을 들이받아 그 가운데 두 사람을 죽게 했다. 운명이란 참 기묘한 것이었다. 운명의 손은 법을 통해 金씨의 목숨을 구해 올렸으나 그를 통해 또 두 사람의 생명을 끊었으니.
金씨는 그 뒤에도 업무상 과실치상, 폭력 등 자질구레한 혐의로 몇 번 교도소 신세를 졌고 서윤학 변호사의 변론 도움을 받기도 했다. 김씨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김기철씨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김기철씨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 김금식씨를 ‘법이 없었더라면 벌써 전에 맞아 죽었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은 결국 ‘법이 없었다면 맞아 죽었을 사람’과의 운명적인 인연에 의해 요절해버렸다.
근하 아버지 김용선씨는 환갑을 넘긴 노인이 됐다.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에 말을 제대로 못하는 그에게서 근하군 사건의 지워지지 않은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친척들을 사건의 충격으로 중풍에 걸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 교도관은 무죄 확정 뒤 모두 복직, 대구교도소에 근무하다가 세 명은 퇴직, 다른 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여 교도관은 어느 교도소의 과장으로 근무 중이다. 나의 전화를 받고 그는 “그 사건 생각만 하면 또 열이 난다”고 치를 떨었다.
이 사건 수사는 전경렬씨를 병자로 만들었고 김기철씨의 어머니를 화병으로 죽게 했으며 김기철씨를 나이 42세에 요절케 했고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하게 했다. 근하군 살해 사건 수사는 또 외삼촌의 인생행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날씨만 흐리면 그 지긋지긋한 기억과 함께 어김없이 옆구리의 통증이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김태현 검사는 그 실수 뒤에도 승진을 거듭 1973년에 대전지검 차장, 1974년에 서울지검 차장, 1975년에 대검 검사 겸 검찰 사무부장, 1978년에 대검 공안부장, 1979년에 대검 송무부장, 1980년에 부산지검장 등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치고 퇴직,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그는 홍조근정훈장도 받았다. 이원형 검사는 지금 신정당 국회의원 이원형씨로 변신해 있고, 정경식 검사는 서울지검 부장검사로 활약하고 있다(필자 주 : 그 뒤 이원형씨는 12대 총선에서 낙선, 지금은 변호사로 있고, 정경식 검사는 서울지검 차장을 거쳐 법무부 고위직에서 근무 중이다). 한봉세 변호사와 김태현 판사는 그 뒤 대법관으로 임명돼 법조계의 정상에서 일하다가 물러나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서윤학씨도 줄곧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 차례 <마당>에 실린 기사는 헛된 수사, 그것도 범인을 잡으려다가 생사람을 잡은 지나간 수사에 대한 얘기 뿐이었다. 결국 수사관들이나 기자들은 이 사건의 허상을 좇다가 주저앉아버린 셈이 됐다. 범인은 저만큼 달아나 있는데 수사관들과 기자들은 그의 그림자를 향해 몽둥이질을 하다가 무고한 사람들에게만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발생지 관할 경찰서인 서부경찰서의 동대신동 담당 형사들에게도 근하 사건 수사는 벌써 전, 그러니까 김태현 검사가 “저들이 진범이다. 다시 수사할 필요도 없다”고 했을 때 끝나버렸고 지금은 고전적인 永久未濟(영구미제) 사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수사는 흔히 끈기가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건 발생 뒤 한두 달 전력투구를 하여 범인을 못 잡으면 손을 떼어버리는 것이 관습처럼 돼 있다. 언론이 그 사건에 흥미를 잃고 취재를 중단하는 것과 경찰이 수사에서 사실상 손을 떼는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경찰은 언론을 위해 수사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다.
상부로부터의 책임추궁이나 언론의 질타가 경찰을 몰아붙이는 動機(동기)이지 범법자를 붙잡아야겠다는 정의감이나 사명감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의 근본 원인을 캐보면 경찰에 대한 처우가 사명감을 살릴 수 없는 수준이라는 데 귀착된다. 형사들이 수사본부에 얽매여 한두 달 담당지역에서 떠나 있으면 副수입원을 잃게 되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버스를 타고 다니며 수사를 하게 된다.
이런 경제적 문제가 해결된다면 한국의 형사들도 일본처럼 평생 전담 수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3억 엔 탈취사건’은 1975년에 공소시효 완성으로 수사가 끝났다. 그때까지 일본 경시청이 보여준 집념의 수사는 그 결과야 어떻든 간에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10년 동안 전담반을 해체하지 않고 그 수사만 맡겼으며 범인 체포 실패로 공소시효가 끝나자 수사 책임자가 사직하는 책임 수사의 모범을 보였었다.
근하 사건의 경우, 경찰 및 검찰이 수사의 잘못을 속죄하고 김기철씨의 원혼을 달래며 무고한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방법은 범인을 잡는 길 밖에 없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런 수사를 할 바에야 처음부터 수사를 하지 말았더라면 범인은 못 잡더라도 엉뚱한 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근하군의 가족은 근하군의 죽음에서보다도 그 수사에서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메리카 연합국은 다릅니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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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30, 1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