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을 개발하라"
李承晩 대통령은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4월26일에 下野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났다. 그해 2월2일 국무회의 기록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5. 군사와 경제의 근본정책에 관하여
○김정렬 국방: “미국은 그 원조에 있어서 무기(비행기)나 별식(別食)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어오고 있는 형편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명년도 예산에 우리 세입에서 300억의 국방비를 더 부담하여 가야 할 것인 바 금반 제출된 산업개발 3개년 계획에는 이것이 고려되고 있지 않으니 차제에 국방력 강화냐, 경제부흥이냐의 근본문제를 결정하여야 할 것인 바 만일 前者를 택한다면 後者를 희생하여야 하며 따라서 현 심의 중의 3개년 계획은 휴지로 화할 것이라”고 보고.
○이승만 대통령: “日人들은 外援(외원)을 거절하고 자립하여 나가고 있으며 잠수함 기지 무기를 自家 생산하는 현재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하여 시작한 對韓원조이지만 이것을 언제까지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가 자립하지 못하면 노예밖에 될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원자력을 개발하고 군비에 관한 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代를 이을 만한 기술자를 기르고 그를 위하여 필요하면 돈을 좀 쓰도록 할 것이며 현재 잘 안 되고 있는 조선공사 시설을 잘 조작하여 무엇을 만들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는 분부.
○김정렬 국방: “일본은 자가생산 무기를 자유로 사용하여 평화선을 침략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미국인의 눈치만 보고 있어야 할 형편이니 중대한 문제이며 이런 중요한 정책은 국방위원이 논의하기에 앞서서 全국무위원이 논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구신.
○이승만 대통령: “말로만 할 것이 아니고 실지에 하도록 하라”고 분부.
○신현확 부흥: “원자기술자 양성에는 目下 주력하고 있으며 국방과 경제의 어느 쪽에 치중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서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보고.>
미국의 對韓원조가 끊어지는 날에 대비하여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 말은 원자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李 박사는 1950년대에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하고 원자력원을 설립했으며 서울工大에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 한 목적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기술축적이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대목이다.
吳源哲 보고서
朴正熙 대통령이 추진한 핵폭탄 개발은 증언자에 따라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마치 朴대통령이 핵폭탄을 만들기 직전에 피살된 것처럼 소설을 쓰기도 한다. 이 비밀 핵개발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문서는 月刊朝鮮이 2년 전에 발굴했던, 吳源哲(오원철) 당시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작성한 ‘原子核연료개발계획’이란 9페이지짜리 문서이다. 이 문서는 核彈(핵탄) 개발의 방향과 전략을 쓴 것인데, 그 뒤의 추진과정과 맞추어보면 朴대통령이 이 문서대로 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문서는 2급 비밀로 분류되었다가 해제된 것으로서 정부기록보존소에 있었다.
吳 전 수석은 자신이 이 문서를 작성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일체의 설명을 거부했다. 그는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그리고 무기개발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核개발에 있어서도 실무 책임자였다.
이 보고서에서 吳 수석은 플루토늄 核彈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라늄 核彈을 만들 경우에는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투자액은 약9억 달러, 건설기간은 8년이 들고 이를 가동하는 데는 200만kw가 소요된다고 했다.
플루토늄彈의 경우에는 재처리 시설에 3900만 달러, 건설기간 6년이 소요되고 대규모 電力이 필요하지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으로 국내개발이 가능하다’고 했다. 吳 수석은 재처리 시설에 공급할 사용後핵연료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도 검토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만드는 重水爐(중수로) 원자로를 이용하면 연간 200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플루토늄 생산을 전문하는 연구로를 도입할 경우에는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다. 吳 수석은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지을 때 캐나다 CANDU型 중수로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1980년대 초에 가면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吳수석은 결론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과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彈을 개발한다.
*1973년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核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한다.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한다.>
프랑스 재처리 회사와 교섭
原爆의 원료 물질 생산을 뜻하기도 하는 '핵연료 재처리'라는 이 민감한 낱말이 우리정부 문서에 처음 의미 있게 등장한 것은 1969년 5월 제172차 원자력위원회가 확정한 원자력 연구개발 장기이용 계획서였다. 원자력 연구소가 작성한 이 계획서는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2∼76년)에 재처리 체제에 관한 기술적, 경제적 검토를 한 뒤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7∼81년)에 재처리 시설의 설치를 추진한다'고 했다.
1971년 1월 당시 원자력청 산하에 있던 원자력 연구소는 재처리 사업계획서를 원자력 청에 제출하였다. 1974∼80년을 건설기간으로 잡고 경남 온산공업단지 인접지역에 하루에 우라늄 1t을 처리할 수 있는 대단위 공장을 만든다는 요지였다.
1972년 7월에는 영남화학(주)이 핵연료 재처리 합작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였다. 미국의 스켈리 석유나 NFS사(Nuclear Fuel Services), 일본의 미쓰비시 석유가 국제합작 하여 1978년 가동목표로 고리 원자력발전소 인접지역에 年 처리능력 900t 규모의 재처리공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두 계획중 국제합작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었다. 이 계획에는 핵 확산금지와 관련한 국제적 규제 강화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전에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전략적 고려가 있었던 것 같다.
원자력연구소는 1972년 원자력 연구개발의 최우선 과제를 핵연료 週期 기술의 확립으로 설정, 그 핵심 거점 기술인 재처리기술과 핵연료 가공 기술의 연구를 위한 시설 도입 교섭에 들어갔다. 미국 측은 냉담했다. 원자력연구소와 자매결연관계에 있던 알곤 국립연구소도 재처리분야의 기술훈련협조 요청을 거절하였다.
정부는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1972년 5월 崔亨燮 과학기술처장관은 프랑스 영국을 공식 방문했다. 원자력 협력, 특히 재처리 기술도입에 관한 협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에는 프랑스 원자력 청(CEA)의 장피에르씨 등이 한국에 왔다. 핵연료가공 및 재처리 사업에 관한 양국간의 기술협력 문제를 의논하였다. 1973년 3월 프랑스의 원자력청과 그 산하의 재처리 시설 용역회사인 SGN사(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대표단이 와서 원자력연구소와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였다.
SGN사는 재처리기술이 세계에서도 가장 발달된 프랑스에서도 이 분야의 대표회사였다. 프랑스 원자력청 산하의 국영회사로서 1952년부터 가동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일단 SGN사에 대해 시험용 재처리설의 개념 설계를 요청, 용역계약을 맺었다. 1973년 9월 尹容九 원자력 연구소장은 CEA와 SGN사를 방문하였다. 재처리사업과 발전소용 핵연료 가공사업의 협력 방안을 의논한 끝에 정부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하자고 합의하였다. 1975년 4월에는 원자력 연구소와 SGN사이에 재처리 시설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이때 핵연료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에서 독립시키겠다는 自立전략을 설정, 재처리이외에 핵연료 제조기술의 도입도 시도하였다.
제1 핵연료 가공 시설인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 시설의 도입선은 프랑스의 CERCA사로 정했다. 1975년 1월 원자력 연구소와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부는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에 의해 분리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原電 핵연료로 재 순환시키는 데 필요한 혼합핵연료 가공시험시설(제2 핵연료 가공시설)의 도입에 대해서는 벨기에의 핵연료 주기기술 용역 전문업체인 BN사(Belgonucleaire)와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1974년 1월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장 李炳暉(이병휘)씨는 벨기에를 방문, 플루토늄 가공기술 및 연구시설의 도입을 위한 벨기에 정부차관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해 9월에는 崔 과기처장관이 벨기에를 방문, 기술용역 및 기술훈련 협의를 거쳐 11월에 혼합 핵연료 가공 시험시설의 개념설계를 BN사에 맡기는 계약을 했다.
인도의 개발 모델에 관심
이것은 미국을 따돌리고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원자폭탄의 폭약에 해당하는 플루토늄 분리 및 그 취급 기술을 종합적으로 손에 넣으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었다. 핵 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재처리사업은 崔亨燮 과기처장관, 朱載陽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金哲 원자력연구소 대덕분소 공정개발실장을 축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뒤에 원자력 연구소의 재처리사업과 연구로 개발사업 국방부산하 국방과학 연구소의 핵 폭탄 설계와 유도탄 개발사업을 통합 조정하여 朴대통령을 보좌한 것은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담당 수석비서관이었던 吳源哲씨였다.
핵 폭탄 개발은 플루토늄을 생성시키는 연구로와, 연구로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에서 그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재처리공장, 그리고 플루토늄을 폭약으로 하여 核 폭탄을 설계·제조·시험하는 시설 및 운반수단인 미사일 연구의 종합 시스팀이다.
재처리 사업 실무책임자 朱載陽씨는 미국 MIT대학에서 化工분야를 전공한 뒤 핵연료 관계의 연구를 했던 在美학자로서 1973년 3월1일에 원자력 연구소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우선 과제는 人力확보였다. 그때는 국내외 어디를 찾아보아도 재처리공장에 근무했거나 재처리를 전공한 학자가 없었다. 그는 그해 5월 23일부터 7월12일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 젊은 한국학자들을 찾아내 이 특수사업에 끌어들이기 위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金哲씨의 경우는 서울대 화공과출신으로서 뉴욕 주립대학(스토니 브룩소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 매사추세츠주의 나티크 육군연구소에서 근무중 朱載陽씨에게 설득 당하여 귀국하였다.
金박사는 육군 연구소에서 폐기 문서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보안상의 목적으로서, 종이를 분해, 셀루로즈 성분을 포도당으로 변화시키는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재처리 사업을 위하여 해외로부터 유치된 과학자들은 약 20명이었다. 거의가 화공·화학전공자였다. 재처리 과정이 기본적으로 용매 추출에 의한 플루토늄 분리라는 화학 공정이기 때문이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金哲씨 밑에서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 李哲洙씨를 비롯한 유치 과학자들의 과반수는 서울 공대 화공과 출신이었다. 서울대 화공과의 입학 점수가 전국에서 가장 높던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상반기에 화공과에 들어갔던 이들이었다. 유치 과학자들은 주택제공, 높은 월급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캐나다서 NRX 연구로 도입추진
朱載陽씨는 재처리 기술도입 뿐 아니라 연구로 확보의 실무 책임자이기도 했다. 朱부소장은 1973년 11월9일에 재처리 사업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프랑스의 SGN사 등을 한 달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만과 인도를 보름 동안 방문하였다. 朱 부소장 외 2명의 대만, 인도 방문사유를 "원자력 연구소 20년사'는 'NRX 원자로 도입에 따른 기술 문제 협의차'라고 적고 있다. 이 짧은 기록은 朴대통령의 핵 폭탄 개발 전략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던지고 있다. 1974년 3월23일 朱부소장은 드디어 NRX 원자로 도입 사업 추진차 프랑스와 캐나다를 24일간 방문한다. 프랑스의 재처리공장과 캐나다의 NRX연구로 도입이란 두개의 기본 축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인도는 캐나다의 NRX연구로를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핵 폭탄 제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朱 부소장 등 실무 책임자들을 인도에 보내 인도의 개발 전략을 우리의 모델로 배워 오도록 했던 것 같다. 핵 폭탄 개발과 관련하여 일반의 오해가 있다. 상업용 원자력 발전에서 타고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얻은 플루토늄이 핵 폭탄 제조에 쓰일 수 있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핵 폭탄용 플루토늄은 군사용 원자로와 연구용 원자로에서만 생산된다.
우리나라 고리에 있는 경수로 原電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핵폭발에 방해가 되는 플루토늄 240이 23.8%나 들어있다. 핵폭발용이 되려면 플루토늄 동위원소들 중 플루토늄 240이 7%이하, 플루토늄 239가 90%이상이어야 한다. 경북 월성에 있는 캐나다 중수로의 경우에는 플루토늄 240이 26.6%로서 이 역시 폭탄용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商用 原電의 사용 후 핵연료에서 핵폭발용 플루토늄 239가 순도 미달이 되는 것은 핵연료가 3년간이나 타기 때문이다.
군사용 원자로나 연구용 원자로는 핵연료의 연소 시간을 짧게 함으로써 핵 분열성 플루토늄을 90% 이상의 순도로 생산할 수 있다. 북한을 포함하며 지금까지 핵폭탄을 개발했거나 개발을 시도했던 나라는 모두 연구로에서 폭발용 플루토늄을 얻었다. 따라서 어떤 형의 연구로를 확보하느냐가 핵폭탄 개발전력의 제1관문이 된다. 웨스팅 하우스 자료에는 1977년 현재 핵무기 개발용으로 돌릴 수 있는 연구로는 인도, 이스라엘, 캐나다(3개), 대만, 노르웨이, 서독, 이탈리아, 스위스 등 8개국에 11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NRX 연구로를 도입, 인도에서 채굴된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집어넣어 태운 사용후 핵연료에서 폭발용 플루토늄을 생산하였다. NRX연구로는 중성자 감속재로 重水를 사용하는데 이 중수 제조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여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인도 핵실험의 충격
朴 대통령은 연구로 가동에 필요한 중수와 천연 우라늄 공급선도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확보해야 했다. 朴 대통령의 핵개발 의지와 한국이 처한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선 것이 이스라엘 국제상인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1950년대부터 한국에 거점을 마련하여 턴 키 베이스의 기간산업 건설과 이에 따른 외자 알선으로 떼돈을 벌었던 아이젠버그는 1969년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 고위층에 캐나다의 重水爐(중수로) 원자로를 소개하였다. 핵개발을 위해서 편리하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朴대통령은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에 대하여 미국이 화끈한 대응을 하지 않고 1969년에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한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핵폭탄 개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상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72년11월에 아이젠버그가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와 독점 대리인 계약을 맺으면서부터였다. 1973년4월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존 그레이 사장은 한국에 와서 청와대, 상공부, 과학기술처, 韓電 등을 차례로 방문, 월성에 세워질 60만㎾짜리 원자력 3호기 건설 계획에 참여할 뜻을 비쳤다. 73년 11월에 호주 대사에서 韓電 사장으로 임명된 閔忠植씨는 상공부와 한전의 일부 실무자의 반대를 꺾고 직접 朴대통령의 의중을 받들어 원자력 3호기 主계약자로 AECL을 선정하는 쪽으로 밀고 나갔다. 이때 우리 정부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 원자로 이외에 3만㎾짜리 NRX 연구로를 같이 수입하기로 하고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NRX 연구로에 쓸 중수로와 천연우라늄 연료는 캐나다 중수로(CANDU)에도 공급되므로 미국의 간섭을 피해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형 중수로는 연료의 일부를 매일 교체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바꾸는 데 비해 중수로는 수시로 사용 후 핵연료를 끄집어 낼 수 있다.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는 핵 개발 야심을 가진 나라가 중수로를 가지면 사용후 핵연료를 몰래 빼내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내기가 쉽다고 판단하여 경수로보다도 훨씬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다.
1974년 5월에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했다. 라자스탄 사막의 L자 모양 참호속에서 이루어진 핵실험 장치는 나가사키 투하 원폭보다 약간 작은 15kt짜리 였다. 인도가 핵폭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출신인 핵 물리학자 호미 바바박사의 집념 덕분이었다. 그는 1945년에 벌써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 평화 목적의 이용이란 명분을 내걸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자금은 초기에 인도의 재벌들이 부담했고 네루 수상이 적극 뒷받침했다. 바바 박사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核 선진국의 기술 협조를 받는 데도 폭넓은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핵폭발용 플루토늄이 생산되었던 캐나다製 NRX형 연구로 사이러스(4만㎾)는 캐나다가 경제원조의 일환으로 인도에 공급한 것이었다. 사이러스 원자로에서 태워진 사용후연료에서 플루토늄을 뽑아낸 재처리 공장은 미국 회사의 기술적 도움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미국이 비밀분류를 해제한 휴렉스 방식의 재처리 공장이었다.
原爆제조 막을 길 없다
이들 국가가 인도에 核관련기술을 마음 턱 놓고 넘겨준 것은 세계 평화를 부르짖으며 비동맹 외교를 선도해 온 인도를 믿었던 때문이었다. 인도도 핵폭발 실험의 목적을 건설 등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인도는 핵 확산금지 조약이 평화목적의 핵폭발까지 금지하고 있는 데 반발하여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인도의 핵폭발 실험 이후 뒤늦게 낭패한 캐나다는 NRX 연구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을 앞으로는 핵 폭발물 제조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인도에 요구, 거절당하자 인도에 대한 원자력 기술협력을 두절시킴으로써 캐나다 회사가 짓고 있던 중수로 1기는 완공되지 못하였다. 인도 핵실험은 가난한 나라도 정치 지도자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으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核 보유국을 경악케 했다.
핵 보유국들은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단결하여 핵폭탄 개발과 관련 있는 연구로 농축 재처리 기술 및 이와 관련된 주요 기자재의 對外 판매나 이전에 따른 규제를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인도식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한국이었다.
인도 핵실험 이후 개발도상국에 의한 핵개발이 국제 문제가 되었을 때 미국 의회 자료실(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은 뉴욕의 폴리 테크닉 연구소 원자력공학 부장인 존 R 라마쉬 박사에게 의뢰하여 개발도상국 및 小國의 비밀 핵폭탄 개발 가능성에 대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라마쉬 박사는 이들 나라가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핵 선진국의 도움 없이 만들 수 있느냐에 대해 "어렵지 않은 일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소국 및 개발도상국에 의한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건설에 관하여'란 對의회용 보고서에서 "1년에 10㎏의 플루토늄(20kt급 원폭 한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는 1300만∼2600만 달러를 들이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재처리 시설도 쉽다
라마쉬 박사는 또 "설계에 필요한 정보는 이미 공개된 문헌에 다 있으며 건설에 필요한 부품과 자재는 공개된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 우라늄은 세계 도처에 부존돼 있어 큰 부담 없이 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핵확산의 금지를 위한 국제적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가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오히려 핵개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핵폭탄 하나를 만들기 위한 최소량의 플라토늄은 4㎏이다. 농축 우라늄 핵폭탄의 최소량은 우라늄 11㎏이라고 한다.
라마쉬 박사는 (북한처럼)원자력 발전소가 없는 나라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연구로는, 천연우라늄을 그대로 연료로 쓸 수 있고, 흑연을 감속재, 가스를 냉각재로 쓸 수 있는 원자로라고 분석했다. 이런 원시적 원자로는 1942년에 原爆 제조의 선구자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원자로와 같은 型이다.
이런 초기 형식의 원자로는 그 상세한 설계도가 이미 공개돼 있어 이를 모방하여 만들기는 간단한 일이다. 라마쉬 박사는 건설 기술자 1명, 전기기술자 1명, 기계 기술자 2명, 금속 기술자 1명, 核공학자 3명만 있으면 그 설계와 건설을 지휘·감독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건설 시작 후 4년 뒤에는 원자로가 가동될 것이고, 1년 뒤에는 그 핵연료 중에 작은 핵폭탄 하나를 만드는 데 충분할 정도의 플루토늄이 생성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라마쉬 박사의 이 보고서를 베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비슷한 연구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 원자력 연구소가 자체 기술로 완성한 다목적 연구로(K-MRR‥Korea Multi-Purpose Research Reactor)의 사업단장인 金東勳 박사는 "북한의 연구로는 지독하게 간단하다. 그런 것을 짓고 싶었으면 벌써 전에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 K-MRR에 비교하면 공학적으로 형편없는 저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硏究爐가 고도의 기술로 만들었지만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데 대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북한 것은 플루토늄 생산에는 적합하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라마쉬 박사는 개발 도상국의 재처리 능력에 대해서도 검토 보고서를 냈다. 그 결론도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의 경우와 같았다. 개발 도상국들이 이미 공개된 문헌과 공개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부품으로 어렵지 않게 재처리 공장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폭용 플루토늄을 재처리 방법으로 뽑아내려면 연구용 원자로에서 1년쯤 태운 연료를 꺼내 재처리 공장에 걸어야 한다.
2만5000㎾짜리 연구로의 천연 우라늄 연료는 약 60t이고, 여기에서 생성되는 플루토늄이 9㎏이다.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 후 핵연료는 물 속에서 129일간 저장하여 방사능을 감소시킨다.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경우 120일이 지나면 방사능은 t당 5만5000 큐리 정도이다. 이것은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방사능 1t당 200만∼300만 큐리의 50분의1 쯤이다.
재처리의 가장 큰 기술적 문제는 방사능이 강한 사용후핵연료를 차폐시설 속에 집어 넣어놓고 원격 조종으로 운반, 해체, 절단, 분석, 용해, 분리시키는 일이다. 여기에 필요한 방사능 차폐 시설과 원격 조종장치의 제작 및 설치와 운영이 재처리 과정의 핵심적 사항이다. 상업용 原電 재처리 시설보다 훨씬 약한 방사능을 취급하는 핵무기용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 시험시설이 제작이나 운전면에서 훨씬 쉽다는 얘기이다.
플루토늄 재처리 공장 설계도 공개된 것이 많다. 라마쉬 박사에 따르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반웰의 재처리 공장 설계도는 도서관에서 구할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마쉬 박사는 재처리 시설을 설계, 건설, 감리 하는 데는 고급인력도 필요 없고 다음과 같은 7명의 엔지니어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化工 기술자 2명과 건축 기술자, 전기 기술자, 기계 기술자, 금속 기술자, 핵 공학 기술자 1명씩. 그는 작은 플루토늄 추출용 재처리 시설을 미국에서 만든다면 2500만 달러쯤 들 것이라고 계산했다.
미국, 核개발 저지 결심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들은 핵탄제조에 쓰일 기술과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에 뻗어 있는 정보망을 동원하여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가 '항공공업계획'이란 위장명칭하에서 地對地 미사일개발에 착수한 사실과 함께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캐나다와의 수상한 거래를 주시하게 되었다.
1974년10월28일, 駐韓미국대사관은 국무부로 보낸 電文에서 '대사관은 현재 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분석중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地對地(지대지)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측은 한국이 개발에 착수한 地對地 미사일이 核彈 운반용이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이다.
1975년2월4일 美 국무부는 백악관의 대통령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우그로프트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단정한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미사일뿐 아니라 핵무기의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는 한반도 정세에 대단히 심각한 전략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그해 3월4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서울, 오타와, 파리, 도쿄, 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긴급발송한 電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의 정보기관들은 한국이 향후 10년안에 제한된 범위의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한국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직접 관련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불안정 요인이 될 것이다. 이는 분쟁이 생길 경우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지원토록 만들 것이다. 韓美동맹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개발계획은 미국의 對韓 안보공약에 대해서 한국측의 신뢰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朴대통령은 對美군사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우리의 근본적 목표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그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거나, 핵무기 또는 그 운반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多者間 협력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최근 프랑스에 대해 한국에 재처리 시설을 제공할 것인가의 여부를 묻고 있는 상태이다. 가까운 시일내에 한국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정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핵관련 기술과 장비판매의 제한
1975년3월4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망해가는 월남 대책에 바쁜 가운데서도 서울, 캐나다, 프랑스, 일본,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 대사 앞으로 電文을 보내 한국 정부의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지시한다. 이 훈령은 구체적으로 이런 정책들을 제시했다.
〈1. 미국은 핵기술 공급 국가들과의 공조 속에서, 한국이 민감한 기술과 장비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국에 대한 원자로 판매에서 완전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자체 핵무기 개발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민감한 기술과 장비들의 판매를 제한한다. 현재 마련된 법령들 외에도, 향후 무기로 轉用될 가능성이 있는 물질들의 이전을 금지하는 방안을 연구중이다. 우리는 한국이 캔두(CANDU)형 원자로를 획득하는 것이 재처리 기술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2. 한국으로 하여금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토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캐나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은 우리의 이런 초기 요구들에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캐나다 정부와의 협력 아래 추가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3. 한국의 핵시설에 대한 우리의 첩보 및 감시능력을 높이고, 관련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적 상태에 대한 정보를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핵에너지 관련 기관들에 대한 정기적 방문조사를 더 자주 할 계획이며 훈련된 기술자들로 하여금 사찰회수를 늘리도록 할 생각이다.〉
駐韓(주한) 美대사관도 1975년 3월12일 국무부에 보내는 다음의 電文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며, 한국의 지도자들도 핵무기 개발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0년이 훨씬 안 될 것으로 판단하며, 설령 10년 가까이 걸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판단에 기초하여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확보한 여러 정보들에 따르면, 한국의 지도부는 핵무기 개발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으며 1980년대 초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저돌적 추진력과 그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높은 기술 수준, 그리고 외국의 전문 인력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상부로부터의 강한 독려 등을 감안할 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제3국으로부터 핵무기 관련 장비와 기술을 도입할 한국의 구매력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거절해도 핵무기 개발에 따른 정치적 경제적 비용 문제가 한국의 움직임을 저지할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국이 제3국으로부터 (관련 물질과 기계) 구입을 선택할 경우, 한국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국과 접촉할 때 하나하나의 구체적 행동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본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한국은 아주 위험한 목적을 가진, 끈질기고 거친 고객이다. 한국은 최근 NPT의 비준 문제를 놓고 대단히 신속하게 움직였으며 캐나다와 프랑스와의 안전 규약 수용에 대해서도 아주 신속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들에게 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려 한다는 조짐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은 필요하다면 이중적 자세도 불사하려는 듯하다. 이 계획의 중요성, 그들의 거친 추진력, 우리의 깊은 우려를 감안할 때, 우리가 조기에 확고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상의 성공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原電 건설 어려워질 것"
朴대통령이 핵무기 개발 용의가 있음을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밝힌 직후 작성된 美 국무부의 정책건의서도 수년 전 공개되었다. 이 문서에는 한국의 핵개발 의지에 대한 美 정부의 불안감과 대책이 들어 있다. 이 문서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는 물론 프랑스(재처리 시설 도입 대상국)와 캐나다(NRX연구로 도입관련)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1975년 7월2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대통령 안보보좌관에게 보내는 로버트 잉거솔 국무장관 代行의 정책 건의서 요지.
〈배경: 한국 정부는 핵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하기 위해 소규모 실험용 재처리 시설을 프랑스로부터 도입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중간 삭제됨). 한국의 핵무기 획득은 극도로 위험하며 미국의 주요한 이해관계에 대해 직접적 타격을 줄 것이다. 만약 한국이 플루토늄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아니면 조만간 갖게 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같은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재처리 시설 및 플루토늄을 보유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한국은 원자력 발전 분야에서 재처리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이 미국 및 캐나다 등과 협상중인 원자로들이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두 번째 원자로인 고리2호기를 도입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에 1억3200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고, 추가적으로 1억1700만 달러의 신용을 요구했다. 우리는 이 차관들과 미국의 원자로 수출이 한국 경제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우리의 비확산 정책 목표(필자 注-한국의 핵무기 개발 저지)를 달성키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수출입은행의 케이시 총재는, 한국 내 사용후 핵연료의 문제에 우리가 만족하고 있다고 통보할 때까지 이 차관에 대한 청문회를 연기하기로 의회와 합의했다. 우리가 의회에 대해, 한국이 재처리 시설 계획을 포기했다고 확인해주지 않는 한 이 차관을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와 프랑스의 태도: 지난 3월의 정책 지침에 따라 우리는 캐나다 정부와 접촉했다. 캐나다는 향후 한국에 대한 원자력 지원 문제에서 우리와 긴밀히 협의키로 했다. 우리는 또 최근 런던에서 열린 (핵관련 기술 및 장비) 공급자 회의에 앞서 프랑스와 접촉했다. 우리는 프랑스에 대해서,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알려주었다.
프랑스는 우리의 관심에 이해를 표시했고, 재처리 시설 판매는 큰 상업적 이해가 걸린 것은 아니며, 만약 프랑스 회사가 계약 종결에 따른 비용을 보상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계약 포기 요구에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한국에 대한 접근: 우리는 현재 진행중인 한국측 원자력 분야 인사들과의 협의에서 미국이 제공한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확인을 다시 요청했으며, 그들의 확인을 들은 후에라야 고리 1호 원자로에 대한 美 핵통제위원회의 수출 허가를 요청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우리의 우려에 대해 아주 유연하게 반응해 왔다. (일부 삭제) 우리는 따라서 한국이 자체적인 재처리 시설 확보 계획을 포기할 가능성이 꽤 있다고 믿는다. 한국은 지역적인 재처리 시설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재처리 시설은 한국의 바깥에 위치할 것이며, 그들의 향후 재처리 수요를 경제적이면서도 안전하게 충족시킬 것이다.
향후 행동 지침: 1. 우리는 한국의 자체적 재처리시설 확보계획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밝히고, 이같은 상황은 고리 2호기 原電 도입에 필요한 차관 제공 등 미국의 核 기술 지원을 매우 어렵게 할 것이며, 2. 한국 측에 현재 계획중인 실험용 재처리 시설 계획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3. 동북아를 대상으로 한 다자적-지역 차원의 재처리 시설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는 방침을 취한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취할 외교적 수단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일 필요는 없으며 또 多者的 재처리 시설은 한국밖에만 위치하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禪문답 같았던 朴·슐레진저 회담
위의 문서는 미국이 국가적인 의지를 실어 한국에 대해서 핵포기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우선 고리 2호 원자로 건설계획과 관련하여 한국측이 신청한 약 2억5,000만 달러의 미국 차관 및 신용대출을 약점으로 잡아 묶어 두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이와 함께 프랑스와 캐나다에 압력을 넣어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것이 뻔한 再처리 시설과 연구용 원자로 판매를 중지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국 측은 또 韓美 원자로 협정에 의거하여, 한국에서 미국 회사가 지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 핵연료를 再처리할 경우의 모든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런 법적 권한에 대해서 한국측의 확인을 받고 나서야 당시 건설 중이던 고리 원자력 1호기에 대한 미국 측의 사용승인이 떨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미국은 2중 3중으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朴 대통령에게 직접 압력을 넣으면 오기가 센 대통령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래로부터 계통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원자력 기술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과기처 장관·외무 장관을 만나고, 金正濂 실장에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청와대의 관례에 따라 스나이더 대사를 주로 상대한 사람은 金正濂 실장이었다. 金 실장은 정기적으로 스나이더 대사의 관저에 가서 점심을 들면서 韓美 간의 공통 관심사에 대해서 의견을 나눴다.
스나이더 대사는 核개발 포기를 위한 설득의 창구로 金正濂 실장을 활용했다. 金 실장은 “스나이더 대사로부터 핵폭탄이란 말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다만 프랑스로부터 사용後 핵연료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는 것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만 했다고 한다. 再처리 시설이 없으면 아무리 원자력 발전소가 많아도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없다. 그래서 스나이더 대사는 ‘핵개발’이란 직설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再처리 시설 포기만 요구했던 것이다.
스나이더 대사의 핵개발 포기 설득 작전을 지원하러 나선 것은 포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1975년 8월26일, 27일 양일간 서울에서 열린 韓美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했다. 美 국방장관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1971년 이후 처음이었다. 슐레진저 장관은 8월 27일 徐鐘喆 국방장관과 함께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언급을 했다.
“駐韓미군의 地上軍이 막강하므로 핵무기를 쓸 기회가 없겠지만 핵무기를 최후 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朴 대통령이 걱정하는 미국의 핵우산이 건재함을 밝히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언명이었다.
8월2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42분까지 거의 네 시간 동안 슐레진저 장관은 청와대에서 朴 대통령을 만났다. 朴 대통령은 처음 한 시간 20분 동안은 소접견실에서 슐레진저 장관, 스나이더 대사, 브라운 美 합참의장, 스틸웰 駐韓 유엔군사령관, 위컴 군사보좌관, 徐鐘喆 국방부 장관, 盧載鉉 합참의장, 金正濂 비서실장, 崔侊洙 의전수석과 환담했다. 이들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직후 슐레진저 장관과 스나이더 대사는 朴 대통령과 40분간 만나 심각한 이야기를 나눴다.
슐레진저는 朴 대통령과 일종의 禪(선)문답을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비밀 핵개발 계획을 인정하지 않았고, 슐레진저는 한국의 핵개발 계획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슐레진저는 그러나 “朴 대통령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듯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슐레진저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한 것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韓美관계가 와해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이해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워싱턴에서는 필립 하비브 東아시아·태평양담당 국무차관보가 咸秉春 駐美 한국대사를 통해서 압력을 넣었다. 하비브는 스나이더의 전임 한국대사였다. 하비브는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취소해 줄 것을 요구했다. 咸 대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국가적 신의에 관한 문제’라면서 미국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다음은 1975년 10월 3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駐韓 미국대사관의 電文.
〈한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실험용 再처리 시설의 구입을 취소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두 번째로 거절했고, 현재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곤경에 처해 있다. 한국의 이 같은 거절은 朴 대통령의 주관下에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로 하여금 계약이 최종적으로 체결되기 전에 판매 계획을 중단토록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더 이상 추가적인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로 하여금 원자력(原電 등) 분야에서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일 추진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안.
(2) 재처리 시설의 판매 문제는 묵인하고, 국제적 사찰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쌍무적 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한국의 방안을 허용하는 방안.
(3) 再처리 시설 구입 계약의 일시 중단이라는 중재안을 가지고 다시 한 번 朴 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
(4) 非타협적 태도로 계속 朴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방안.
(1)案과 (2)案의 경우, 계산된 부담을 감수하면서 상황을 방치하면, 그 결과 미국에서는 한국에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美 의회는 군사원조의 삭감은 물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도 부결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압력을 받게 되면 한국은 결국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런 여론에 시달릴 것이며, 그것은 한국에서 우리의 이해관계에 적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再처리 시설 확보가 기정사실화됨으로써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2)案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용도 변경을 막기 위해 査察을 굳혀 나가는 방안이다. 그러나 (2)案의 약점은 한국이 NPT 또는 IAEA의 사찰이나 제3국의 사찰을 거부하려 들 경우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韓美 양국 사이에 심리적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장차 이곳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3)案과 (4)案, 즉 朴 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만이 성공의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카드가 있으며, 朴 대통령도 결국은 현실주의자다. 따라서 우선은 朴 대통령을 접촉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에게 도전장을 던질 것이냐, 아니면 중재안을 갖고 그를 만날 것이냐이다〉
고리 2호기 차관 중단, 군사원조 지원 중단 등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던 한국 정부는 1975년 12월부터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소개되는 駐韓 미국 대사관의 電文들은 한국 정부가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관련 협력을 받는다는 代價를 선택,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1975년 12월 10일, 국무부로 보내는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의 電文.
〈워싱턴에 있는 咸秉春 駐韓 한국대사를 가급적 빨리 우리 측의 고위급 인사가 만나 우리의 관심 사항을 전달해 주기 바란다. 그 만남의 내용이 朴 대통령에게 충분히 전달된 후 나는 다음주에 朴 대통령을 만날 것이다. 나는 金鍾泌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만약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강행할 경우 韓美 관계에 미칠 엄청난 악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咸 대사와의 면담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단지 원자력 분야에서의 협력만이 아니라, 美 의회의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에 대해서도 부정적 행동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방향과 목표도 함께 제시함으로써 韓美 양국의 관계를 유지, 강화시키기 위해 협력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같은 날,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미국대사의 또 하나의 電文.
〈12월 10일 南悳祐 부총리는, 12월 9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총리 주재의 고위 대책회의가 있었으나, 자신은 국회 출석 관계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한국이 우리의 요청을 거부할 경우 초래될 부정적 영향들에 대해 언급했고, 그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총리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金鍾泌 씨는 최근 “朴 대통령은 이때 핵개발을 강행하면 韓美관계가 결딴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핵무기를 당장 만들지 않되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구, 비축해두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1975년 12월 16일,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미국대사관의 電文.
〈국무총리의 지시로 과기처 장관 대신 과기처 차관 등이 스나이더 대사를 면담했다. 이들은 만약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원자력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협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가를 문의했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생략)
스나이더 대사가 “한국의 이런 질문에 대한 미국의 구체적 답변이 있을 때까지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문제에 대해 결정을 미룰 것이냐”고 묻자, 과기처 차관은 “한국은 공식적으로 再처리 시설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과기처 차관은, 미국의 기술적 지원이 아주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기술적 지원을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앞으로는 그 기술 제공자를 多元化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좀더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金正濂 대통령 비서실장을 접촉했는데, 현안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우리 측 답변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되리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접촉한 사람들의 보고를 받았다며 朴 대통령도 이 사안의 정치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답변이 도착하면 朴 대통령의 주관下에 문제를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내가 朴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것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빛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나는 물론 이 문제를 놓고 金東祚 외무 장관과도 접촉해 왔다. 그는 이 문제의 정치적 중요성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계획이 취소되는 쪽으로 大勢가 굳혀짐에 따라 駐韓 미국대사관은 비교적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포기는 했지만...
1976년 1월5일, 국무부로 보낸 駐韓 미국대사의 電文.
〈요지: 한국의 프랑스 再처리 시설 도입을 취소시킴으로써 核확산을 막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목표는 朴 대통령과의 정면 대립을 불사하거나 또는 그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달성될 수 있다. (중간 부분이 대거 삭제됨) 따라서 나는 본부의 훈령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A) 미국 정부는 한국이 프랑스와 맺은 계약에서 再처리 시설 도입을 再검토키로 한 결정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한다.
(B) 우리는 한국이 미국의 깊은 우려감을 인식하고, 이 문제가 향후 韓美관계 전반에 갖고 있는 중대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한다.
(C) 미국의 희망은 바로 이 시점에서 再처리 시설 계약의 완전한 취소이다.
(D) 이 계약이 완전히 취소되지 않을 경우 美 의회와 미국인들의 의혹은 더욱 더 증폭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고리 2호기의 차관 문제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E)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우리의 합의 도출 능력을 신뢰한다면 미국은 상호 협력의 범위에 대해 조속히 합의한다는 목표 아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킬 태세가 되어 있다.
(F) 따라서 우리는 한국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韓美 양국의 상호 협력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미국의 대표단을 파견할 태세가 되어 있다.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한국·프랑스·캐나다 사이의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서 “이 에피소드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한 정부가 아무리 완강한 의지력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도 능히 저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후 스나이더 대사는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電文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여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하고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朴 대통령의 열망과 의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朴 대통령이 이런 모험을 하게 된 데는 미국 측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1975년 6월 미국 정부에 대해서 韓美관계를 전면적으로 再검토하여 새로운 관계 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는 12 페이지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의 불확실한 태도 때문에 朴 대통령은 언젠가 닥쳐올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서 남한內에서 반대자 탄압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었다.
柳炳賢 당시 합참본부장은 “朴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깔끔하게 했다. 관련 서류나 시설을 숨겨놓고 비밀개발을 계속하라는 식의 지저분한 지시가 아닌 깨끗한 단념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 뒤 朴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의 기술 사이클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기 개발에도 쓰일 수 있는 관련기술을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에도 성공하지만, 핵폭탄을 직접 제조한다든지 플루토늄을 밀수입하는 식의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미국 측도 플루토늄 再처리 시설이 없다면 핵무기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핵개발 문제는 이로써 종결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NRX연구로 도입 좌절
미국 버클리 대학의 피터 헤이즈는 '한국에서의 미국 核 딜레머'라는 논문에서 朴 대통령이 1971년에 병기 개발 위원회를 조직,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1∼72년에 있었던 주한 미군 7사단의 철수에 자극 받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는 장비 현대화 5개년 계획(1971∼75년)을 위한 무상 원조액을 한국의 人權 상황에 연계시켜 삭감하기 시작, 당초 약속한 액수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
1988년에 미국 콜럼비아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핵 폭탄 없이'(Without the Bomb)란 책에서 영국 전략문제 연구소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저자 미첼 라이스는 한국 핵개발의 경과를 한 章으로 다루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재처리 시설 도입에 대해 압력을 넣은 상황을 이렇게 썼다.
<한국은 1975년 4월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을 비준했다. 이것은 미국무성과 의회의 압력이 있은 뒤였다. 미 의회는 수출입 은행에 대해 고리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 지원을 보류하도록 결의했던 것이다. 75년 가을에 프랑스는 한국측에 재처리 시설의 機材를 20년 동안 복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이자고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제 원자력 기구, 한국, 프랑스 3자간의 안전조치(원자력 시설에 대한 사찰의 규정)협정도 맺어졌다.
1975년 말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원자력 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중단할 것이며 캐나다도 중수로 판매를 유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 대통령은 한국이 核개발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미군과 핵무기를 남한에 붙들어 두려고 했던 것 같고 그런 작전은 성공한 것 같다.>
1976년 1월 한국 정부는, 프랑스의 SGN와 맺었던 재처리 시험 공장 건설계약의 파기를 프랑스 정부에 요청하였다. 프랑스 정부도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한 잡지는 "한국이 핵기술 도입선을 다변화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미국의 私有地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한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중수로 1기와 함께 한국에 끼워 팔기로 돼 있었던 NRX 연구로 판매 협상을 중단하였다. 캐나다의 중수로를 사줌으로써 플루토늄 生成用 연구로 등 여러 가지 민감 기술을 얻으려던 한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월성에는 중수로 두 基를 지을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1호기 도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7년 11월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벨기에 BN사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사용한 제2 핵연료 가공 사업도 취소되었다. 핵폭탄 개발에 필수적인 연구로, 재처리 사업이 문서 작업 단계에서 움도 터보지 못한 채 죽어 버린 것이었다.
재처리 공장 설계서의 내용
朱載陽 원자력 연구소 부소장 밑에서 재처리 사업 담당 실무 책임자였던 金哲 공정개발 실장(아주대학 교수)은 프랑스와의 계약을 파기할 당시 SGN사와 개념 설계를 끝낸 상태였고 기본 및 상세 설계의 용역 계약을 완성한 직후였다고 회고했다. 기자는 모 연구기관에 보관돼 있는 SGN사의 개념 설계서를 볼 수 있었다. 1974년 10월1일에 작성된 개념 설계서는 두 권의 큰 책으로 돼 있다. 재처리 공장의 규모는 1년에 200일간 가동하는 것으로 잡고 하루 처리량을 사용후핵연료 20㎏(우라늄 기준)으로 했다.
1년에 우라늄 4t을 재처리한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추출되는 핵 분열성 플루토늄 239는 약 20㎏으로서 나가사키 투하 원폭 (20kt짜리 TNT 2만t의 폭발력과 같음)두 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었다. 이 제조 시설은 시험 공장 개념으로서 캐나다에서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던 NRX 연구로와 경수로 및 중수로의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가동 목표일은 건설 확정일로부터 5년 뒤로 잡았으며 건설 설비는 약 3900만 달러였다. 이 시설은 그 중요성에 비해서 건물 자체는 소규모였다. 길이 54m, 너비 46m, 높이 27.5m, 하루에 소요되는 냉각수는 80㎥, 食水는 50㎥, 증류수는 20㎥으로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이 공장 운영에는 15명의 책임자급 엔지니어, 165명의 기술자, 74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었고 6∼12개월의 훈련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개념 설계에는 '핵 분열성 물질의 회수'(Fissile Material Recovery)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이것이 핵무기 제조용임을 분명히 했다.
1976년에 미국의 압력으로 플루토늄 관련 사업은 포기된 듯하였으나 朴 대통령은 재처리를 맡고 있던 원자력 연구소의 특수 사업 담당 부서를 大德 공학 센터로 분리시킨 뒤 1976년 12월1일에는 그 자신이 설립자가 되어 한국 핵연료 개발 공단을 발족시켰다. 핵연료 개발 공단은 포기한 재처리 사업을 우라늄의 정련·변환 시설, 조사후(照射後)시험 시설, 방사성 폐기물처리 시설 도입 사업으로 대체하여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화학 처리代替사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재처리代替사업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인데 재처리 때문에 워낙 미국인들로부터 시달려 화학처리란 말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그 뒤 우리나라의 원자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재처리란 말은 禁忌語(금기어)가 돼 버렸다.
朴대통령의 우회전략
金哲 교수는 화학 처리 대체 사업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재처리 기술을 우회적으로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재처리와 연관된 여러 가지 기술을 따로 따로 배워 놓았다가 나중에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체 사업은 照射後(조사후) 시험시설이었어요.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의 연소 상태나 변형 상황 및 방사성 물질 조성비 등을 검사하는 것을 조사후 시험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하자면 사용후핵연료를 水曹와 방사능 차폐 시설 안에 두고 바깥에서 원격 조정 장치로 해체, 절단, 측정하고 용해, 분리시켜야 합니다. 이런 과정은 재처리 과정의 핵심 부분과 같은 성격으로서 재처리 기술의 일부를 익히는 일인 것입니다. 재처리를 하면 강한 방사능을 가진 폐기물질이 생깁니다. 대체 사업에는 방사능 폐기물 처리 기술과 시설도 도입하게 돼 있었습니다."
金哲 교수는 "대체 사업시설 도입은 재처리 사업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프랑스 정부 차관 2000만 달러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업을 '佛차관 사업'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했다. 시설 및 기술 도입선은 프랑스의 SGN사 그대로였다. 관련 기자재는 金哲 실장이 프랑스에 가서 구매했다. 핫셀(Hotcell 방사능 차폐시설), 글로브 박스(Glove Box) 등 조사 후 시험시설과 방사능 폐기물 처리시설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核工團은 또 20여 명의 우수 인력들을 핵 재처리 시설이 있는 유럽 여러 원자력 연구소로 보내 재처리 관련 기술을 연수해 오도록 했다. 출발시킬 때는 "재처리 기술 관련 정보나 자료를 많이 얻어 오고 가능한 한 재처리 관련 연구를 하도록 해 보라"고 지시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던 金康鎭(고려대 화학과 교수) 박사의 경우 벨기에의 BN연구소에서 다른 두 연구원과 플루토늄 定量 분석법을 1년간 연구하였다. 이런 정량 분석법은 재처리 과정을 추적, 감시하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金교수에 따르면 BN사는 재처리 시설 등 민감 기술분야에 대해서는 한국 연구원들을 접근시켜 주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그레노블 원자력 연구소에서는 박현수(원자력 연구소 사용 후 핵연료 관리부장 역임), 박헌휘 연구원(원자력 연구소 방사성 폐기물 관리부장 역임)이 연수를 했다. 이 두 사람은 재처리 관련 부문의 국내 권위자가 되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수시로 과학관 로버트 스텔러씨를 핵공단으로 보내 연구상황을 점검하곤 했다.
그는 미국 국기를 단 승용차를 타고 나타나 핵공단의 시험실과 사무실을 샅샅이 조사했다는 것이다. 일반 사무실까지 열어 보라고 하며 한국 연구원들의 감정을 건드리기도 했다. 스텔러씨 등 주한 미국 대사관의 歷代 과학관들은 모두 핵기술에 관한 교육을 받고 부임, 장기 근무하면서 한국의 핵연구 상황을 감시하는 役을 맡았다. 朴 대통령은 두 번 핵공단을 방문했다고 한다. 유도탄 개발을 맡고 있던 국방과학연구소에 들르는 길에 핵공단을 찾았는데 이때 朴 대통령의 주된 관심은 국방과학연구소에 쏠려 있었다고 한다.
미국, 핵공단 수시로 감시
핵공단은 화학처리 代替사업 이외에 핵연료 成型가공시험 시설 도입을 프랑스의 CERCA사로부터 추진, 성공하였다. 外資 280만 달러, 內資 9억 원으로 핵연료 가공 기기를 구매하고 1200 평의 시험시설을 이용하여 중수로 핵연료의 제조기술 개발을 시작, 1980년대에 성공하게 된다. 정부 일각에서는 한때 파키스탄 방식으로 핵개발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핵 재처리사업이 벽에 부딪치자 유도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는데 미국의 감시를 피해 제3국으로부터 유도탄을 공해 에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自力 개발에 고심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방식의 핵무기 제조는 주로 지하 공작과 산업 스파이식 접근법이었다.
압둘 칸이라는 파키스탄 기술자는 네델란드의 우라늄 농축 회사 와렌코社에 遠心분리 기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의 기술 상담역이 된 것을 기회로 삼아 와렌코로부터 농축 기술의 핵심인 遠心(원심)분리법에 대한 극비자료를 수집, 1975년 말에 파키스탄으로 달아났다. 파키스탄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자체적인 농축 공장 건설에 나서서 스위스 등지에서 부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핵개발에 필요한 기자재가 트리거 리스트란 이름의 국제 금수 품목에 들어 있긴 했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유령 회사들을 통해서 이것들을 사 모았다. 1980년대 초에 파키스탄 정부가 카후타에 세운 농축공장에서 순도높은 우라늄을 생산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1987년 2월 칸 박사는 인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이 원자 폭탄을 이미 만들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그 발언을 부인하였다.
당시 대덕의 국방 과학 연구소에서 추진하던 국산 유도탄 개발은 朴대통령 앞에서 시험 발사에는 성공했으나 후속 연구가 따르지 못하여 정확도가 보장되지 않고 실용화되지는 못하였다. 독자개발의 한계였다. 국방 과학 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 책임자로 일한 이는 서울공대 원자력과 교수 출신인 李모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알곤 연구소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부장 직책을 맡았던 그는 핵폭탄의 부품 재료를 구하는 일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뇌관용 HMX 폭약을 미국에서 수입하긴 했는데 미국측이 이를 그리셀린과 섞어 수출해 HMX를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朴 대통령의 집념을 등에 업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던 화학처리代替사업은 1978년에 朱載陽 소장이 물러나고 1979년에 朴 대통령이 피살된 뒤 후견인을 잃었다. 1980년에 핵공단이 원자력 연구소에 통합돼 에너지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사업은 일단락 돼 버렸다.
핵폭탄 설계도 연구
全斗煥 정권은 출범초기에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핵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 이름에서까지 원자력이라는 말을 떼 버렸다. 영문 약어 표기는 KAERI를 그대로 썼다. 여기서 A는 Atomic이 아니고 Advanced를 뜻했다. 1979년 당시 핵 공단의 핵심 연구원들을 보면, 물자 관리 실장 金康鎭, 개발 제2 연구부장 金哲, 機電과장 南章洙(원자력연구소 정책부장 역임), 안전관리실장 魯聖基(원자력연구소 안전시험 해석부장 역임), 개발 1연구부장 朴元玖(인하대 교수 역임. 핵연료성형 가공담당), 품질관리 기술실장 徐庚壽(원자력연구소 핵연료 사업부장 역임), 물리 제2 연구실장 徐斗煥(원자력연구소 원자로 관리실장), 화학 3연구실장 李哲洙(고려대 화학과 교수 역임)씨 등등이었다.
1980년 12월19일 핵연료 개발 공단이 에너지 연구소에 통폐합되었을 때 人力은 266명, 그 해 예산은 45억4800만 원이었다. 예산의 대부분은 시험시설 건설비였고 순수 연구비는 보잘것 없었다. 한편 인도 핵실험의 여파로 캐나다製 NRX연구로의 도입이 불가능하게 되자 원자력연구소는 1970년대 후반에 자체 개발 설계에 의한 연구로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이 사업의 책임자는 金東勳 박사였다.
金 박사팀은 4만㎾짜리 재료 시험로 설계에 착수 5년 만인 1979년에 상세 설계까지 끝냈다. 연구로의 이름은 TFTF(Thermal Flux Testing Facility)였다. 제작에 옮기려면 중요 부품 및 기재는 외국에서 조달해야 하고 중수 등 몇 가지 품목은 국제 원자력기구가 정한 규제품목에 걸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 정부는 이때도 한국이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이 사업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비분리 처리'란 묘안
1982년에 에너지 연구소와 韓電은 사용후핵연료 관리의 문제점을 보고서로 만들어 한미 원자력공동 상설 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 측은 재처리 시설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서기 2020년에 가면 한국의 原電은 25기(시설 용량 6천만㎾)로서 더 이상 늘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라늄 原鑛 확보의 가능성을 분석해 볼 때 2000년대에 고속 증식로의 도입은 불가피하다. 고속증식로의 도입이 지연될 경우 우라늄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서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가 필요하다.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시설이 1990년대에 부족해 질 것이다. 1991년부터는 사용후핵연료가 한 해에 360t씩 생기며 1992년부터는 고리 1호기의 저장조가 한계에 달해 고리 2호기의 저장조로 옮겨 보관하면 1995년까지 임시 조치가 가능하다
1992년부터 年처리능력 250t 규모의 재처리 시설을 가동시키고 이를 단계적으로 늘려 1995년에 500t, 2천년에 1000t 규모로 확장한다면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이 공장을 미국측과 기술 제휴로 운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한국측은 2000년대에 가면 고속 증식로의 도입이 불가피하고 고속 증식로의 핵연료는 재처리 시설에서만 생산되므로 어차피 장기적으로는 재처리 시설을 갖출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서 중·단기 전략으로서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묘안을 찾고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측은 '非分離 처리'(Coprocessing)라는 아이디어를 미국측에 던졌다.
비분리 처리란 아이디어는 1977∼80년까지 한시적으로 가동했던 국제 核週期 평가위원회(INFCE)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재처리, 농축 등 민감 기술의 도입에 핵보유국이 심한 제동을 거는 데 개발도상국들이 반발하자 정치성을 배제한 과학 기술자 중심의 국제회의체를 만들어 대안을 연구하도록 했던 것이다.
비분리 처리는 경수로의 사용후핵연료에 함유돼 있는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고 중수로의 핵연료로 재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경수로에 들어가는 핵연료에는 우라늄 235가3.3%이다. 이것이 타고 나오면 우라늄 235는 0.9%로 줄어들고 플루토늄이 0.6% 생긴다. 미국이 이 플루토늄의 분리에 의한 핵무기 개발을 자꾸 의심하니 아예 결백 증명으로서 이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는 상태에서 처리하여 우라늄 235농도를 0.7%로 줄이면 중수로 연료로 재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는 경수로와 중수로가 공존하고 있고 이런 비분리 처리를 하면 경수로 4기의 사용후핵연료에서 중수로 1기의 핵연료를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중수로 연료는 따로 사올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해결된다는 얘기다.
미국, 한·캐나다 협력 방해
우리는 핵공단 시절에 이미 이 아이디어를 개발, 미국의 바텔 연구소에 공동 개발을 제의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1982년에 다시 미국에 공동 연구를 제의한 것이었다. 미국이 신통치 않는 반응을 하고 있는 사이 韓電과 에너지 연구소는 캐나다의 원자력공사(AECL)와 협의하기 시작했다. 캐나다로서는 이 기술이 개발되면 캐나다의 중수로를 국제 판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에너지 연구소 기술자들이 AECL산하 연구소를 방문, 이 문제를 협의하는 단계에서 미국쪽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미국제 경수로에서 태운 사용후핵연료의 이동, 변형, 저장에 대해 사전 동의권을 갖고 있는 미국은 한국과 캐나다 정부 양쪽에 압력을 넣어 이 공동 연구 계획을 무산시켰다. 한국과 캐나다는 密會를 꾀하다가 질투심 많은 애인의 훼방을 만난 격이었다. 미국은 캐나다에 대해서 한국이 非分離(비분리) 처리 연구를 통해서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얻으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한국의 원자력 기술자들은 미국 측의 반대 이유는 멀쩡한 거짓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하에 있고 플루토늄 생산용 시험로도 없는데 완전한 재처리 기술도 아니고 비분리 처리 기술 도입까지 봉쇄하려는 것은 미국측이 캐나다측의 原電 판매 전략에 쐐기를 박고 한국에 대한 핵연료 공급 루트를 계속 틀어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한국측은 그 뒤에도 6년간 이 비분리 처리 문제를 가지고 미국 국무성, 에너지성, 군축위원회 등을 끈질기게 설득해 왔다. 한국, 미국, 캐나다의 세 당사국이 공동 연구하되 그래도 관련 연구 시설을 한국에 들여오는 것이 미덥지 못하다면 미국 연구 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개발도상국에서 연구로 설치는 연구 목적 이외에 핵 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심을 사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가동한 250㎾급 미국제 트리가 마크(TRIGA MARK)2, 1972년부터 가동한 2000㎾급 트리가 마크 3호기를 갖고 있었다. 이 두 개는 출력이 너무 낮아 연구 수준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원자력연구소는 1970년대 초에 캐나다로부터 NRX 연구로를 도입하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포기했었다. 70년대 후반에는 자체 설계를 꾀하다가 역시 미국의 압력을 받고 유보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이 계획은 다시 추진된다. 연구로 건설에는 많은 돈이 드는 대신에 뚜렷한 생산품이 없어 예산 관료들을 설득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월성 1호기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을 추진하던 1982년 試製品의 성능을 검사하기 위하여 캐나다까지 가져다 40만 달러의 시험료를 지불하면서 NRU 연구로에 집어넣어 갖가지 항목의 체크를 한 적이 있어 국산 연구로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연구소가 서울에서 대덕으로 옮기면 트리가 마크 연구로는 서울에 두고 가게 되어 연구로 없는 연구소가 될 판이었다.
국산 연구로 건설 급진전
원자력연구소는 과학기술처의 검토를 거쳐 1984년 4월의 제207차 원자력 위원회에 다목적 연구로 사업계획을 상정했으나 심의조차 받지 못하였다. 희미했던 이 연구로 사업은 1984년 9월경 경제기획원이 83년에 에너지 연구소가 타당성 연구에서 제안했던 추진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사업예산을 확정하였으니 85년부터 사업에 착수하라고 과기처에 통보함으로써 급히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확정된 건설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위로부터의 결정에 의하여 추진되게 된 것은 정부 고위층이 그때 진행되고 있던 북한의 연구로 건설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적 의도로 밀어붙인 덕분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압력으로 취소되었던 1970년대 후반기 연구로 건설계획에 참여하였던 기술진은 에너지 연구소에 남아 있었다.
金東勳 박사가 실장으로 있던 원자로 계통 연구실의 연구원 20여명은 이 다목적 원자로의 모델을 캐나다의 메이플X 연구로로 정했다. 캐나다 원자력 공사는 NRX를 폐쇄하고 메이플X 라는 새 연구로를 설계하고 있었다. 1985년 1∼2월 에너지 연구소 설계팀은 캐나다 원자력공사 팀과 공동으로 K-MRR로 이름이 붙여진 연구로의 개념 설계를 했다. 설계를 한국측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이 연구로를 국산으로 부르는 것인데 부품은 캐나다 차관에 의해 주로 캐나다 원자력 공사로부터 수입하였다.
한국-캐나다에 의해 K-MRR건설 계획이 급진전되자 그 동안 두 번이나 연구로 건설 계획을 저지했던 미국 정부는 이번에는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기본 설계가 시작되는 1986년부터 매년 20명씩을 연구소에 파견하여 설계 내용을 검토해 주겠다는 제의였다.
한국측에서는 미국 정부의 이 제안이 K-MRR연구로 건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다는 의도로 파악했던 것 같다. 혹시 군사용 의도가 숨어있는지 아닌지를 설계 검토 단계에서 탐지하여 설계변경 요구를 하는 식으로 귀찮게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연구소에는 오해를 막기 위해 핵연료를 20% 농축 우라늄으로 못박아 놓고 있었다. 북한처럼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쓰면 군사용 플루토늄을 생성시킬 수 있지만 20% 농축 우라늄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K-MRR은 동위원소 생산, 原電건설에 쓰이는 각종재료의 성능시험, 핵연료의 건전성 확인 등등의 다목적 용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K-MRR을 설계 건설 운영하는 과정에서 핵 폭탄 제조나 재처리에 원용될 수 있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비상시에 구조를 변경하면 플루토늄을 생성시킬 수도 있으나 이런 것까지 의심하고 막으려는 것은 "화약고에 불을 지를지 모르니 성냥을 긋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과기처의 한 간부는 말했다.
照射後 시험시설의 역할
한국측은 미국의 지원 제의에 대해서 설계가 완성된 후에야 검토가 가능할 것이니 검토가 요구되는 분야를 연구소가 필요로 할 때 지원 요청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실제로는 1년에 4명 정도의 미국 기술자를 불러 검토를 시켰고 미국측도 이를 통해서 K-MRR의 성격을 파악한 것이다. 당초 500억 원 예산으로 출발하였던 K-MRR 건설사업은 700억 원으로 늘었다.
1989년 3월 25일에 대덕 원자력 연구소 내에서 기공식이 있었다. 2만3000 평의 대지에 연건평 6322평의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는데 1992년부터 연구로는 가동된다. 연구로 자체는 품에 안을 정도이지만 갖가지 부대시설이 붙어 원자로 건물은 높이가 33m, 건평은 1800평이다. 연구소는 이 원자로 건물에 덧붙여 기존 시설보다 확대된 照射材(조사재) 시험시설 (건평 1137평)을 짓고 있다. 이 시설에 약 400억 원이 들어 K-MRR건설은 부대시설까지 합치면 약1200억 원 공사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1976년에 재처리공장 건설계획이 취소된 뒤 핵연료개발 공단이 대체 사업으로 추진한 것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照射後 시험시설이었다. 지금 원자력연구소 안에 있는 이 시설이 제대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였다. 과기처의 한 간부는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이 시설이다"고 했다.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 팀은 세 달에 한 번씩 이 시험시설을 찾아와 조사를 벌이고, 주한 미국 대사관, 미국 에너지성, 미국의 군축위원회 사람들도 수시로 들린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미량이지만 플루토늄이 취급되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시험실은 고리 1호기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를 갖고 와서 연소상태, 연료의 변형, 설계 성능과 실제 연소성 등을 검사하고 비교함으로써 원자로와 핵연료의 건강도를 진단하는 일을 한다.
핵연료 병원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한국의 原電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가 바깥으로 반출되는 경우는 이 시험실이 유일하다. 韓美 원자력 협정에 따르면 미국제 원자로에서 쓰인 핵연료나 미국이 공급한 핵연료의 事後처리는 반드시 미국정부의 허락을 받아 하도록 돼 있다. 고리 1호기의 사용후핵연료 중 극히 일부를 이 시험실로 가져오는 데는 한미간에 몇 년에 걸친 협의가 있어야 했다.
1985년 5월24일에 서명된 한미 합의서에 따라 원자력 연구소는 고리 1호기의 사용 후 핵연료를 12개 다발까지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한 다발에는 길이 4m의 연료봉 179개가 들어 있다. 이 합의서는 한 다발 당 20개 이하의 연료봉만 꺼내 검사할 수 있고 검사시는 4m짜리를 15㎝이하로 잘라야 하며 이 15㎝짜리를 다시 3㎝씩 5개로 잘라 試料(시료)로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시료로 각종 시험과 검사를 한 뒤에는 파편 등을 다시 모아 중간 유출이 없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재처리에도 원용될 기술
사용후핵연료 다발이 이 시험실에 들어오면 세 개의 水槽(수조)를 거치면서 水中 원격 조종 작업에 의해 해체, 절단된다. 작은 시료로 잘려진 것은 핫셀(Hotcell)이라고 불리는 여섯 개의 차폐시설 속을 거치면서 갖가지 검사를 받는다. 핫셀은 두께 85㎝의 방사능 차폐벽으로 격리돼 있다. 바깥에는 원격 조종용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 손을 써서 핫셀 안에 있는 기계 손을 움직여 작업을 한다. 기계손이 느끼는 중량감이 이 조종용 손을 타고 조작자도 그 무게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작동에 실수가 없도록 하고 있다. 이 핫셀은 재처리 공장에 있는 것과 비슷한 설계로 돼 있다. 이 조사 후 시험시설은 200억 원 짜리다. 프랑스 차관에 의하여 SGN사로부터 도입한 시설·기재가 90억 원어치고 나머지는 국내외에서 조달한 것이다. 고압수 제염(除染)장치 등 국내에서 설계, 제작한 것도 많다.
사용후핵연료 시료는 용매 추출 방식으로 처리하여 ppb((10억분의 1)정도의 극미량 플루토늄을 정략 분석하기도 한다. 액체 속에 용해된 이 플루토늄을 분리, 회수하지는 않으므로 군사용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시험용 사용후핵연료는 국제 기구의 엄격한 감시하에서 시험시설 水槽 속에 저장된다. 이런 조사후 시험시설의 건설 운용은 핵무기 제조 기술개발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만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의 건설 운용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미국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는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하면서 재처리 시설을 짜집기 식으로 만들려고 그 주요 부품인 핫셀을 조사후 시험시설용 핫셀로 代用하려고 이를 이탈리아의 SNIA사로부터 수입했었다. 1980년에 SNIA사 건물은 이스라엘 정보 기관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 테러를 당했다.
원자로 설계기술 국산화 임박
100만㎾짜리 원자력 발전소의 1년간 출력을 일순간으로 모아 폭발시키면 40개의 원자폭탄과 맞먹는 파괴력이 생긴다. 原電은 이런 원자 폭탄의 폭발적 에너지를 장기간에 걸쳐 인간의 통제하에서 안전하게 빼 쓰도록 고안한 장치다. 즉 핵분열이 빨리 일어나면 原爆이 되고 서서히 일어나면 原電이 된다. 따라서 공학 기술상 상업용 원자로 설계가 原爆 설계보다 수십 배나 어렵다. 힘을 폭파시키는 것보다 그 힘을 제어하는 장치가 더 정교할 수밖에 없고 인간을 죽이는 기술보다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원자력 기술의 최고봉은 원자로 설계 기술이다.
설계된 원자로의 제작이나 그것을 담을 건물의 건설은 개발 도상국에서도 할 수 있지만 원자로 설계를 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소련, 영국, 캐나다, 프랑스, 서독, 일본뿐이다, 영광 3, 4호기 건설이 미국의 CE(Combustion Engineering)사에 낙찰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CE가 원자로 설계의 主계약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원자로를 만든다는 것은 원자로를 설계한다는 의미다. 한국 전력은 1990년에 발주된 울진 3호기의 원자로 설계자로 원자력 연구소를 선택하였다. 한국이 원자로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 정부는 영광 3, 4호기의 원자로 설계자로 CE社를 선택한 다음 원자로 설계(원자로 설계란 기술용어로는 핵증기 공급계통의 설계라고 불린다)에 원자력 연구소가 1 對 1의 관계로 공동 참여하도록 했었다. 공동 설계인 셈인데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CE가 책임을 졌다.
원자력 연구소의 전략은 공동 설계를 진행하면서 CE社로부터 극비자료와 기술을 이전받아 자체 설계기술을 확립하고 그 바탕에서 100만㎾짜리 한국형 표준 원자로(KSN1000)의 설계 개념을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울진 3호기 건설 때는 원자력 연구소가 93%의 원자로 설계 자립율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설계를 하고 그 제작을 한국중공업이 맡았다. 이 공동설계 작업의 실무 책임자는 원자력 연구소 발전로 계통 사업부장 金炳九 박사였다.
金 박사는 "이런 큰일은 과학기술자로서 평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다"고 말했다. 金 박사는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박사 학위(기계공학 전공)을 받았다. 1972년부터 미국 우주항공국(NASA) 산하의 제트기관 연구소(Zet Propulsion Laboratories)에서 화성 탐색선 바이킹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金박사는 미국시민권까지 포기하고 1975년에 귀국, 원자력연구소에서 일해오고 있었다. 1990년에 필자가 만난 그는 197명의 연구원 人力을 지휘, CE와의 공동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설계된 부분은 창원의 한국중공업으로 넘겨져 동시 제작되었다. 金박사는 1986년 12월에 92명의 기술전수팀을 조직 100여 명의 가족과 함께 CE 본사가 있는 미국의 코네티컷주로 보냈다. 그들은 작은 마을에 한국인 집단촌을 이루고 CE 기술진과 한 덩어리가 돼 공동설계 작업을 벌였다.
이 공동설계를 통해서 원자력 연구소는 4308점의 설계도면, 특허자료 등과 201개의 극비 전산프로그램을 입수할 수 있었다. 원자로의 가장 중요한 컴퓨터 코드는 핵연료와 原子爐心 계통에 관한 것이다. 원자력 연구소는 중수로 및 경수로 핵연료 설계·제작·사업을 통해서 또 영광 3, 4호기 원자로 공동 설계를 통해서 이 중요한 코드를 확보하였다. 한 원자력 공학 전문가는 "그런 코드는 핵폭탄의 설계 및 실험 제작에도 원용될 수 있다"고 했다.
최후 관문
국가간 협정으로서 韓美 원자력 협정처럼 主權을 무시한 불평등 협정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1974년 6월16일부터 발효된 이 협정은 미국이 한국에 수출한 원자로의 핵물질이 군사용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미국 정부기관이 한국을 미국 땅처럼 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관련 시설을 조사하고 핵 물질의 이동·변형을 감시할 수 있도록 보장한 장치다.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용 핵연료인 농축 우라늄의 對韓 수출 상한선을 '시설 총량 5000 메가와트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을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고 까지 정해 놓기도 했다(뒤에 개정됨). 원자력연구소가 큰 용량의 美製 컴퓨터를 도입하려고 해도 미국 정부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몇 년 전 연구소는 콘트롤 데이터社에서 만든 사이버 17-875 컴퓨터를 도입했는데 미국 국방성, 에너지성, 군축 위원회, 상무성의 허가를 다 받아야 했었다.
슈퍼 컴퓨터를 과학 기술원에서 수입하면 문제가 없지만 원자력 연구소에서 수입하려면 제동이 걸릴 것 같다고 한다. 가동중인 9基의 원자로와 건설중인 2基의 원자로 등 모두 11기의 원자로 가운데 8基는 미국 회사가 지었고 그중 6基는 웨스팅하우스가 主공급자였다. 웨스팅하우스는 한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를 지은 이래 우리 원자력 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으나 한국의 자체 기술력이 성장함에 따라 기술 이전에 인색해 하는 등 견제가 심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1980대 들어 한국정부는 원자력 부문에서 미국과 웨스팅하우스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향으로 일해 왔다. 미국의 정권 교체기인 1980년에 울진 1, 2호기 건설을 프랑스의 프라마톰에 맡긴 것이라든지 영광 3, 4호기의 主계약자 선정에 있어서도 기술이전을 더 많이 해주기로 한 後發업체 CE사를 선정, 웨스팅하우스를 제외시킨 것이 그런 움짐이의 대표적인 사례다.
원자력기술 自立이라고 하면 원자로 설계기술 확립, 핵연료 설계 및 제작기술, 농축·재처리 등 민감기술을 확보, 原鑛에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까지의 핵연료 공급주기의 완성, 운전기술 확립 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원자력 발전소의 운전기술은 이미 확립되었고 핵연료 설계 및 제작기술의 국산화는 지난 2월에 끝났으며 원자로 설계기술의 자립은 앞으로 3∼4년 안에 이루어질 전망이다.
아직 전망이 서지 않는 것이 재처리 시설로 대표되는 핵연료週期기술의 완성이다. 재처리 문제야말로 한국원자력 기술 자립의 마지막 관문인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 원자력 산업이 상당한 自立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공의 큰 몫을 朴正基 전 한국전력사장과 韓弼淳 전 원자력연구소소장에게 돌리는 이들이 많다. 돈줄을 쥔 朴사장과 두뇌 집단을 가진 韓소장이 원자력 自立이라는 목표에 의기투합했었다는 것이다. 핵연료 국산화나 영광 3, 4호기 공동 설계 같은 일은 사용주인 韓電의 자립의지와 원자력연구소의 기술력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사가 되었던 것이다.
핵연료기술 전수작전
韓 전 소장은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공군사관학교 물리학과 주임교수로 있다가 1970년에 국방과학연구소로 옮겼다. 제3사업단장으로 일하다가 1982년에 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소장 84년부터는 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공군대령 출신답게 원자력을 전략적 차원에서 다루려는 경향이 강하다. "에너지 자립은 자주국가·자주경제·자주국방의 원동력이다"고 주장한 그는 "석유 파동이 5년 내에 닥치기 전에 원자력 기술자립을 이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업을 국산화나 自立의 관점에서 평가하여 결정하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1990년 원자력연구소란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국제 원자력 시장이 원자로나 핵연료 공급자가 큰소리치는, 파는 자의 시장(Seller's market)이었다. 그러나 1977년에 카터 대통령이 재처리·농축 등 민감한 원자력 기술의 국제간 이전을 금지하기 위한 新에너지 경제정책을 발표하고 1979년에는 미국에서 스리마일 아일랜드 原電의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하자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다 지은 원자력발전소도 까다로운 규제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 형편이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뜸하게 되자 자연히 사는 쪽에서 큰소리칠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말까지 한국은 8基의 원자로 건설에 착공함으로써 이런 변화를 適時에 이용하였다. 짓는 쪽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상황을 활용하여 우리는 핵심 기술을 이전 받는 自立전략을 폈던 것이다. 그 한 예가 1990년 2월 고리 원자력 1호기에 장전된 경수로 핵연료의 국산화 전략이었다.
한국에너지연구소와 그 산하의 한국핵연료주식회사는 1984년 8월 경수로 핵연료 설계기술 도입 및 機器 구매를 위한 입찰안내서를 여러 회사에 보냈다. 응찰회사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CE 및 엑슨, 프랑스의 프라즈마, 서독의 지멘스社였다. 韓 소장은 에너지연구소전문가들로 40명의 평가반을 구성, 이들 회사가 제출한 조건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도록 하였다. 평가의 기준으로는 기술성과 경제성을 6 대 4로 하여 기술이전 가능성에 더 비중을 두도록 하였다. 기술 중에서도 설계기술을 제조 기술보다도 7 대 3의 비율로 더 중시하도록 했다.
이런 도입선의 결정에는 정치적 압력이 들어오기 쉬우므로 결정권을 평가 팀에 맡겨버린 것이었다. 연구소에서는 입찰회사에 대해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자료를 요구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평가에 의하여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웨스팅하우스와 지멘스였다. 연구소에서는 핵연료 설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전산 프로그램까지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웨스팅하우스에서는 그것만은 안 된다고 반발하다가 마지 못해 제공의사를 밝혔다. 결국은 서독의 지멘스社가 기술도입先으로 낙찰되었다. 한국의 원자력산업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웨스팅하우스로서는 역습을 당한 셈인데 그 뒤 영광 3, 4호기 입찰에서도 패배를 맛보게 된다.
경수로용 핵연료 설계에 있어서 원자력연구소는 지멘스 기술진과 연구소 기술진이 공동 설계하는 조건을 붙였었다. 설계를 같이 하게 되면 장기간 양쪽 기술진이 붙어다녀야하고, 지멘스의 자료와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한국은 공업 소유권료를 지불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설계 기술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농축-미국과 프랑스가 독점
1990년대, 한국의 원자력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쓴 말은 '핵연료 週期의 자립'이란 말이었다. 핵연료 週期의 자립 없이는 원자력自立은 불가능하다고 할 때의 진짜의미는 농축 및 재처리 공장을 국내에 건설하지 않고서는 미국에의 종속성을 탈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핵연료週期란 핵연료의 순환 사이클을 뜻하는데 우라늄 原鑛에서 시작된다. 한국전력이 1990년에 수입한 우라늄 원광은 약 1300t이었다. 이 가운데 100t은 중수로 연료로서 간단한 가공 과정을 거쳐 바로 월성 1호기 연료로 들어갔다.
韓電은 우라늄 原鑛을 캐나다에서 40%, 호주에서 33%, 나머지는 가봉과 니제르에 있는 프랑스 회사에서 구매하고 있었다. 韓電은 또 미국, 호주, 캐나다의 우라늄 광산 개발회사에 자본 참여를 하여 1991∼93년부터 원광을 확보하게 돼 있었다. 한전은 이 원광을 미국과 프랑스의 농축 공장에 맡긴다. 천연 우라늄 235의 농도 0.7%를 3.3%로 올려 경수로 핵연료의 원료 물질로 만든다. 이때 무게가 8분의 1로 줄어든다.
미국 에너지성 산하의 농축 공장에서 55%, 프랑스 농축 공장에서 45%를 농축해 왔었는데 1989년 무렵엔 소련으로부터도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기로 하였다. 소련으로부터의 도입량은 年20t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경수로 연간 소비량(150∼60t)의 약 8분의 1이었다. 韓電의 1990년도 핵연료구입비는 약 1500억 원인데 原鑛 값이 약 500억원, 농축비가 약 500억원, 핵연료의 형태로 만드는 가공비가 약 400억원, 기타 공정비가 약 100억 원이었다.
즉 핵연료 순환 사이클에서 농축 공정은 약 40%의 부가가치를 점해 가장 이문이 많다. 당시 농축 공장을 상업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나라는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뿐이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본, 남아프리카가 농축공장 건설을 추진중이었다. 농축 공정에서 천연 우라늄 235의 농도를 90% 이상으로 만들면 이게 바로 우라늄 핵폭탄의 폭약이 돼 버리므로 재처리 기술과 함께 아주 민감한 부문이다.
사용된 핵연료 보관에 골치
농축 우라늄은 성형 가공과정을 거쳐 핵연료다발로 변형돼 경수로 원자로에 들어간다. 1990년, 한국에서 가동중인 9기의 원자로 중 월성 1호기(중수로)를 뺀 8기가 경수로였다. 세계적으로 경수로형 原電이 가장 많다. 3년간 경수로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는 원자로 속에 있는 저장 水槽에서 6개월 이상 머문다. 그 사이 방사능이 많이 줄어든다. 재처리 공장이 있는 나라에선 6개월 뒤 재처리 공장으로 이 사용 후 핵연료를 옮겨 플루토늄을 분리한다. 우라늄 235와 공존하던 우라늄 238은 원자로 속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때 중성자를 받아 플루토늄으로 변한다. 즉 플루토늄이란 마성의 물질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재처리 공장에서 분리된 플루토늄을 다시 우라늄과 섞어 경수로 연료로 재순환시킨다. 재처리의 원래 목적은 자원의 재활용이며 그 부수적 효과는 사용後핵연료의 양을 줄여 보관을 쉽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재처리 공장이 없는 나라에서는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해야 하는데 방사능이 엄청난 이것의 관리에 돈이 많이 든다. 고리 1호기의 사용後핵연료 저장조는 1990년 말에 포화될 예정이었다. 韓電은 고리 3호기의 저장조에 밀집 저장대를 설치 1호기의 것을 옮겨 보관하기로 하였다. 우리나라는 재처리 공장을 언제 짓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발전소 내에 보관하고 있던 사용후핵연료를 1997년까지 별도의 중간 저장 시설을 만들어 옮기기로 하고 부지를 찾고 있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韓電의 한 간부는 "요사이 우라늄 값이 떨어져 재처리의 경제성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짧게, 좁게 보면 경제성이 없지만 한국 에너지 自立 전략이란 측면에서 장기적인 전망을 한다면 경제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韓電 측의 계산에 따르면 영광 1호기에서 한 해에 배출되는 20.2t의 사용후핵연료를 30년간 중간 저장했다가 영구 폐기하는 데는 1070만 달러가 든다고 한다. 이를 해외 재처리 공장에 위탁,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회수하여 연료로 재활용한 뒤 영구 폐기하는 데는 1560만 달러가 들어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증식로 도입에는 재처리가 전제조건
한국 전력은 1989년 12월에 아주 대학교 부설 에너지 문제 연구소에 의뢰하여 '2000년대 원자력전망 및 대처 방안 수립에 관한 연구'라는 3500 페이지 짜리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서기 2025년 후에는 고속 증식로를 도입해야 하며, 2015년까지는 商用 농축 공장을 가동시켜야 하고, 재처리 공장 건설은 국제적인 이해를 얻은 뒤 추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원자력 업계에서는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상당히 적극적으로 재처리 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들고 나왔다. 농축과 재처리 두 부문의 국산화가 이루어져야만 핵연료 週期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 진정한 원자력 에너지 自立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원자력 전문가들은 언론과 외교관들이 그런 공감대를 뒷받침하여 對美 설득을 강력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한 전문가는 "원자력 自立을 막고 있는 벽은 미국뿐이다"고 했다. 고속 增殖爐(증식로)의 도입은 그 전 단계로서 재처리공장 건설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고속 증식로의 연료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의 혼합물인데 이것이 원자로에서 연소되면 핵분열로 소모되는 플루토늄보다도 1.3배가 많은 플루토늄이 새로 증식된다.
이런 방식의 발전은 현재의 우라늄 자원 활용도를 50-60배쯤 높이는 것이다. 인류 에너지 문제의 최종 해결책인 핵융합 발전이 가능해질 때까지의 과도기에 主役이 될 만한 발전 방법이다. 원자력 기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프랑스가 120만㎾급 슈퍼 피닉스 고속 증식로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업 운전하고 있었다.
1984∼86년부터 원자력연구소는 프랑스 원자력청과 공동으로 '고속 증식로 도입에 필요한 기술능력 확보방안 수립'을 연구, 세 권의 보고서를 냈다. 그 결론 부문에서 이 보고서(연구책임자 趙滿)는 "고속증식로 1호기는 2012년에 운전개시 할 수 있고 6호기와 고속 증식로 센터는 2025년까지 완성 될 수 있다. 이 센터에는 재처리 공장 등 핵주기 시설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에서 소개한 아주대학교의 보고서는 이런 전제하에서 원자력협력 외교정책의 기본목표로 原電핵심기술(농축 재처리 기술)의 이전 및 자체개발 여건의 조성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추진 방향으로는 우리나라 原電 산업에 대해 국제 사회가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즉 평화 목적임을 납득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1970년에 재처리 공장 설계를 프랑스의 SGN社에 맡겨 끝냈었다. 1972년에 도카이(東海) 재처리 공장을 착공, 75년에 완공했다. 일본은 이 공장에서 처리되는 사용후핵연료가 미국에서 공급된 것임으로 미국의 동의를 받는 교섭을 벌여야 했다. 美日 정상회담 때마다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1982에 겨우 공장을 돌려도 좋다는 미국의 동의를 받아서 이해부터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외교적 노력 따라야
일본은 미국에 대하여 플루토늄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려고 온갖 성의를 다한 것이다. 헌법에 핵무장이 금지돼 있고, 핵무장한 선박의 자국내 입항까지 금지할 정도로 핵무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일본조차도 재처리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는 끈질긴 미국 설득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 1989년 통계에 따르면 원자력 발전국 27개중 재처리 공장을 돌림으로써 核연료주기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은 핵 선진국 등을 포함한 17개국이었다. 한국처럼 사용後핵연료를 중간저장하면서 재처리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8개국이며 사용後핵연료를 영구 폐기하는 나라는 스웨덴과 미국이다. 일본은 1973년에 농축 우라늄 시험시설을 짓기로 결정, 1983년부터 상업적인 농축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핵폭탄을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인 재처리와 농축시설을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재처리의 방향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농축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원자력 연구소는 새로운 농축기술인 레이저를 이용한 선택적 光이온화 기술개발을 기초 연구의 한 테마로 설정, 1989년부터 착수했다.
핵확산금지 조약에 가입하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1990년 현재 가동중인 원자력 발전소 9기 중 경수로 8기에서는 국제원자력기구가 설치한 감시카메라가 1기 당 두 대씩 작동중이었다. 원자로에 하나, 사용후핵연료 저장조에 하나가 설치돼 있었다. 국제 원자력 기구는 두 달마다 한 번씩 두 명의 조사관을 각 原電에 보내 이 카메라의 필름을 빼보고 현장을 점검한다. 중수로인 월성 1호기에는 감시 카메라가 20대나 있다. 핵연료가 출입하는 통로를 따라 붙어 있다.
월성1호기는 매일 핵연료를 16다발씩 교체하며 그 다발이 야구 방망이 정도로 작기 때문에 특별히 감시가 심한 것이다.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조에는 물을 빼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는 예스 노 모니터가 붙어 있다. 금속물질이 이 구멍 속을 통과하는지의 여부(Yes or NO)를 감지하도록 한 장치다.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는 한달 반만에 한 번씩 4명의 조사관을 월성에 보내고 있었다.
그 몇 년 전에는 월성 1호기에서 페인트칠 작업을 하던 人夫가 감시 카메라에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헝겊으로 싼 적이 있었다. 조사관들은 이 카메라에서 필름을 뽑아보고 시커멓게 나오는 부분이 있어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에서 나쁜 평가가 나오면 그 나라는 요주의 국가로 낙인돼 원자력 기술을 도입하기가 어렵게 된다.
비밀 핵개발은 절대 불가능
국제 원자력 기구는 미국, 소련, 영국 등 핵보유국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격이 강하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본부가 있다. 핵확산 금지조약의 이행을 책임지고 있는 이 기구의 운영에 있어서는 냉전시절에도 미국과 소련이 협조적이었다. 소련은 공산세계의 핵확산방지를, 미국은 자유세계 안에서의 핵확산 방지를 책임지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돼 있었다.
국제 원자력 기구와 함께 주한 미국 대사관, 주한 미 CIA, 주한미군 정보기관, 미 군축위원회, 에너지성 등 미국의 주요 기관들도 유기적으로 한국의 원자력 연구 상황을 감시하고 있었다. 국제 원자력 기구와 미국의 이런 감시체제 밑에 옴싹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절대로 핵폭탄을 비밀로 개발할 수가 없다는 것이 衆論이었다.
당시韓電의 한 간부는 이제는 외교력이 원자력산업과 과학자들에게 울타리를 쳐주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원자력산업과 두뇌수준에 걸 맞는 원자력 외교人力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원자력은 교과서나 유토피아의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의 필수품으로 한국사회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1989년 말 현재 원자력 발전소 9기의 설비용량은 716만6000㎾로서 북한의 전체 전력용량(약 700만㎾)을 앞지르면서 남한의 전체 발전설비용량(2100만㎾)의 36.3%를 차지하였다. 설비용량으로는 세계 제10위의 원자력大國이 되었다. 발전량에서는 89년에 전체의 50.1%를 차지하여 석탄화력(22.4%)과 석유화력발전(22.7%)을 압도하였다. 이는 韓電이 원자력발전을 基底(기저)부하담당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전소 운영기술을 나타내는 原電 이용율에서 韓電은 세계평균을 약 10%포인트 웃돌고 있었다. 월성 1호기는 그 몇 년 전 세계에서 최고의 운전 효율을 가진 중수로 발전소로 꼽힌 바 있었다.
일단 명령만 내린다면…
1990년 현재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單價는 ㎾/H당 26.63원으로서 석탄, 석유보다 훨씬 쌌다. 원자력 발전 덕분으로 한국의 전기요금은 세계적으로 값이 싸 물가 안정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원자력 발전의 가장 큰 장점은 간편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100만㎾급 原電의 1년간 소비 연료는 25t인데, 같은 크기의 유연탄 발전소 연료는 10만t급 선박 22척이 수송해야 할 분량이다. 석유 발전소의 경우라면 20만t급 유조선 7척이 동원돼야 실어 나를 수 있는 연료(820만 배럴)가 먹힌다.
폐기물의 양을 보면 100만㎾급 原電에서는 1년에 525t이 발생하고 유연탄 화력에서는 약 40만t이 생긴다. 원자력 산업이 거대화되면서 원자력 두뇌의 용량도 커졌다. 1990년 현재, 韓電과 산하 회사들의 원자력 관계 기술 人力은 약1만 명에 달하며 원자력 두뇌의 총본산인 大德의 원자력 연구소는 2298명의 직원을 가진 한국의 最古, 最大 연구소였다.
원자력병원 인력을 제외한 연구소만의 인력은 1500명, 그중 연구 기술직 인력은 936명이었다. 그 가운에 242명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1990년 예산은 1365억4000만 원인데 정부가 대 주는 순수연구비는 약328억 원이었다. 원자력연구에 대한 투자는 미래에의 투자란 인식으로 선진국들은 연구 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을 넣고 있다. 당시 일본에는 두 개의 원자력 관계 국립연구소가 있었는데 연구 인력은 8500명, 1년 예산은 약 1조8360억원이었다. 연구비의 반은 정부투자, 반은 ㎾당 0.445엔씩을 電源 개발촉진세로 거두어 충당하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순전히 21세기를 위한 장기적 연구만 하고 있다. 프랑스 원자력청 직할 연구소의 인력은 약2만 명, 영국의 하웰 연구소 인력은 1만6000여 명, 인도의 원자력연구소도 그 정도 수준이었다.
한국이 가진 이런 엄청난 용량의 시설과 두뇌는 남북한간에 핵개발 경쟁이 벌어지면 남한의 우위를 지켜주는 바탕이 될 것이다. 재처리 기술이나 핵폭탄 설계기술을 우리가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국가의 의지가 핵폭탄 제조 쪽으로 기울게 되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핵개발 관련산업 및 학계의 기술과 人力과 시설은 단기간에 동원되고 조직될 것이다. K-MRR 연구소는 개조돼 플루토늄을 생성시킬 것이고 照射後 시험시설의 운용기술은 재처리 공장건설 및 운용으로 동원될 수 있으며 핵연료 설계와 원자로 설계기술은 원폭설계 및 제조에 응용될 수 있다.
1970년대 핵 개발 때 축적되었던 재처리 공장 설계서·핵 폭탄 설계 자료 등의 노우하우도 참고가 될 것이다. 북한은 핵 폭탄을 개발하기까지는 선수를 칠지 모르지만 그 뒤 본격적인 핵병기 체제건설 경쟁이 벌어지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재처리는 국가의 死活 문제
1960년대에 폴란드 정부는 작은 核부대를 창설하는 데 드는 경비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10년에 걸쳐 폭격기 10-15대, 핵탄두 20-30발, 중거리 유도탄 100기, 미사일 발사 잠수함 2척을 만드는 데는 약 56억 달러가 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측 위원회는 1976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은 1990년대에 가면 6081㎏의 분리가능 핵 분열성 플루토늄을 (사용후핵연료의 형태로)축적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작은 原爆 수백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일본에는 약 3만6000㎏의 플루토늄이 축적될 것으로 이 보고서는 예상했다. 1977년에 미국 군축위원회는 핵실험 가능 국가들을 3등급으로 분류한 적이 있었다. A급은 핵무기 개발을 결심하면 1-3년 사이에 핵폭발 실험을 할 수 있는 나라들로서 대만, 일본, 남아프리카, 이스라엘 등 10개국이었다. B급은 4-6년 뒤에 가능한 나라로서 파키스탄, 한국 등 10개국이었다. C급은 7-10년 뒤에 핵실험이 가능한 나라로서 이란, 터키, 멕시코 등 10개국. 북한은 이 3개 그룹에 끼이지 못 했었다.
한국은 1970년대에 아직 원자력 산업과 기술능력이 토대를 굳히기 전에 외국 기술을 들여와 짜집기 식으로 原爆을 개발하려다가 미국이란 장벽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 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부문(발전)에 國力을 쏟음으로써 1990년대엔 原爆제조 기술쯤은 우습게 볼 정도의 크고 정교한 기술적인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한 핵 물리학자는 "평화적 이용을 집념 있게 추구하다가 보니까 군사능력까지 자연스럽게 얻은 것이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북한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좋은 원폭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갖고는 있지만 재처리 분야에서 미국이 덜미를 잡고 있어 우리는 당장은 원자력 自立도, 原爆 제조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한 원자력 공학자는 "북한의 고민은 기술이고 우리의 고민은 국제관계다"고 했다.
實錄/核을 향한 한국의 집념 50여 년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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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01, 14: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