銃口에서 나온 권력이 人口를 살렸다!

5ㆍ16 군사혁명은 국가주의적 열정으로 무장한 장교단이 폐쇄노선을 거부하고 개방노선을 선택, 경제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민주복지국가의 토대를 쌓은 희귀한 예이다. 5ㆍ16은, 신라의 삼국통일, 대한민국 建國과 함께 민족사 최대의 사건이다.

1962년 1월 초, 朴正熙 의장의 경제기획원 年頭(연두) 순시가 있었다. 공군잠바를 입고 큼직한 검은 안경을 쓴 朴 의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움직이는 군인들을 데리고 회의장에 들어왔다. 金裕澤(김유택) 경제기획원 장관이 앞에 나와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경제기획원의 이날 보고는 그해 1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용이 핵심이었다. 보고자는 한국은행 安鍾稷(안종직) 종합계획국장이었다. 그는 긴장된 태도로 한 시간 가량 수치가 많은 보고를 했다. 설명이 끝나자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朴의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아들였다. 한참 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기술 분야에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마당에 현재 갖고 있는 기술수준과 기술자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어떤 대책이 서 있는지요? 이 점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고회에 배석하였던 全相根씨(과학기술처 기획실장 역임)의 회고에 따르면 <朴 의장의 음성은 낮고 말투는 아주 정중하였으나 이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뜻밖의 질문이었다>고 한다.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당시 경제기획원의 직업공무원들과 한국은행 조사부 출신의 경제전문가들, 그리고 대학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술’이라는 것은 노동력의 일부분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술요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이 계획의 대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전문가들 중에서 이 같은 최고통치자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회의장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자리에서 불쑥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宋正範(송정범) 차관이었다.
“각하, 기술수급(技術需給)에 대해서는 계획을 별도로 수립하여 차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朴 의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박정희 의장의 이날 질문은 결정적인 문제의식이었다. 그 뒤 넉 달간 경제기획원은 경제개발을 뒷받침할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만들어 5월21일 최고회의에 보고하게 된다. 이 브리핑에 대한 최고위원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다. 위원들은 차례로 의견을 말하고 질문도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계획’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위원은 얼굴에 紅潮(홍조)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다.
“…5·16혁명의 목적은 바로 지금 소개된 기술개발 계획과 같은 국가계획을 만들어 국가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 계획을 혁명정부의 최우선 사업으로 설정하고 추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이로써 군인이 기업인에 이어 과학기술자를 밀어주게 된다. 군인들은 과학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였다. 武器(무기)의 질이 전쟁에서 勝敗(승패)를 좌우하듯이 과학기술의 뒷받침이 없는 경제개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박정희는 알았다. 그는 과학기술자들은 정치력이 약해 권력자가 밀어주지 않으면 관료들에게 눌려 뜻을 펼 수 없다는 현실도 꿰뚫어 보았다. 박정희는 과학자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군사혁명이 근 반세기 전의 사건으로 흘러갔다. 2010년, 한국은 유엔개발기구(UNDP)가 발표하는 ‘삶의 질’ 랭킹에서 스위스, 프랑스, 영국을 젖히고 ‘세계 12위’로 올랐다. 세계 7위의 수출국, 세계 9위의 무역국, 세계 5위의 원자력 대국, 세계 10위권의 과학기술력, 종합적 공업력은 세계 5~6위권으로 평가된다.
이는 군인과 기업인과 과학기술자가 손을 잡고 ‘자주적인 개방정책’(또는 ‘열린 자주 노선’)으로써 대기업을 만들어 국민들을 이끈 결과물일 것이다. 5ㆍ16 군사혁명은 군인, 기업인, 과학기술자를 역사의 主役(주역)으로 등장시켰다. 조선조적인 士農工商(사농공상) 신분차별-직업차별이 강한 한국에서 이는 일종의 계급혁명이었다. 박정희는 근대화 혁명의 핵심을 士農工商을 商工農士로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업인과 기술자가 양반과 선비의 기질이 강한 守舊的(수구적)인 士(정치인, 학자, 언론인 등)를 누르고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5ㆍ16 군사혁명 이후, 역사적 문화적 토양으로 본다면 도저히 대기업을 만들 수 없는 한국에서 세계적 대기업이 생겨났다. 石工(석공) 출신 노동자가 大企業群의 창업자가 되고, 대기업 전문경영자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 사이 북한에선 일종의 王權(왕권) 세습체제가 정착하였다. 계급혁명은 한국에서 성공하였다.
대기업은 좋은 상품과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外貨(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며, 세금을 많이 내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며 지역사회에 공헌한다. 일종의 복지기관이기도 하다. 대기업을 만들 수 있는 나라인가, 아닌가가 先進國(선진국)과 後進國(후진국)을 가른다.
경제와 과학에 대한 感受性(감수성)과 문제의식이 뛰어난 박정희는 기업인과 과학기술자들을 후원, 대기업을 많이 만들어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이지만 돈 그 자체에 대하여는 淸貧(청빈)한 마음을 유지하였다. 그는 淸濁(청탁)을 가리지 않고 들이키대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였다. 부패하지 않은 권력자였다. 그가 더러운 강물을 들이마셔 바다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 비결이었다. 銃口에서 나온 권력이 人口를 살렸다.
5ㆍ16 군사혁명은 국가주의적 열정으로 무장한 장교단이 폐쇄노선을 거부하고 개방노선을 선택, 경제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민주복지국가의 토대를 쌓은 희귀한 예이다. 5ㆍ16은, 신라의 삼국통일, 대한민국 建國과 함께 민족사 최대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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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정권은 2008년에 집권한 이후 헌법과 국가 정체성을 위반하고 애국시민들을 배신하고 從北반역세력에 굴복하는 역사적 범죄를 저질렀다. 애국세력이 들고 일어나 역사 앞에 한나라당을 고발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자유진영 안에서 치열한 노선투쟁이 일어나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내기 위하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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