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사 및 학생용 참고자료(1)

고등학교 韓國史 교과서의 反軍 내용과 비판

*한국사 교과서의 反軍的 기술

 

6ㆍ25 南侵전쟁의 진실 왜곡ㆍ축소

공산당원 피카소의 反美선동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실어

대한민국을 지켜낸 軍人의 역할을 왜곡ㆍ묵살

국방백서 내용을 조작, 국방비 지출을 과도한 것으로 설명

 

 

1. 6ㆍ25 南侵 전쟁 왜곡

 

6ㆍ25의 직접적 원인인 김일성의 赤化야욕 은폐하고 ‘애치슨 선언’ 탓으로 돌림

김일성의 전쟁의지 美化(미화)

중공군의 개입을 ‘참전’이라고 표기해 유엔군 참전과 同格(동격)으로 표현

중공군의 人命(인명)피해를 국군의 피해보다 더 부각

16개 참전국에 대한 설명 부족

북한 공산군의 남침 저지에 큰 역할 한 트루먼 美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에 대한 설명 부족

최초의 양민학살인 북괴군의 ‘서울大병원 국군 부상병 학살사건’ 누락

 

6種(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6ㆍ25의 직접적 원인인 김일성의 ‘赤化야욕’은 은폐한 채 애치슨 美 국무장관의 ‘애치슨 선언’이 전쟁의 원인인 것처럼 기술했으며 ▲중공군 개입과 김일성ㆍ스탈린ㆍ모택동의 불법 남침 共謀(공모)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공산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참전한 16個國(개국)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유엔군의 즉각적 參戰(참전)을 주도한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인천상륙작전의 主役(주역) 맥아더 장군의 역할도 거의 묵살하였다.

 

 이런 기술로 인해 학생들은 북한군의 남침행위가 가진 불법성과 反민족성에 대하여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 友邦(우방)인 미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위험도 있다.

각 교과서는 애치슨 장관의 발언이 6ㆍ25의 직접적 원인인 것처럼 서술했다. 애치슨 선언이란, 1950년 1월 애치슨 美 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킨다’고 말한 것을 의미한다.

 

6ㆍ25의 직접적 원인인 김일성의 ‘赤化야욕’은 은폐한 채 엉뚱한 내용 記述

 

“美 국무장관 애치슨은 중국과 소련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방어선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한반도가 제외되었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조치였다.”(천재교육刊, 325페이지)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 알류샨 열도로부터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을 포함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지학사刊, 276페이지)

“… 이에 따라 한국과 중화민국이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6ㆍ25 전쟁의 발발에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법문사刊, 323페이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도 이러한 좌ㆍ우 대립을 부추겼다. 냉전이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국무 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킨다고 선언하였다.”(비상교육刊, 324페이지)

“미국은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삼화출판사刊, 317페이지)

 

교과서들은 애치슨 선언의 배경 설명을 기술한 다음 ‘6ㆍ25전쟁이 시작되었다’는 式으로 교묘하게 편집ㆍ기술했다. 이 같은 배치 방식은 학생들이, 애치슨 장관의 발언 때문에 6ㆍ25 전쟁이 발발한 것으로 해석할 소지를 낳는다. 애치슨 선언이 김일성에게 誤判(오판)의 빌미를 줬을 수 있지만 6ㆍ25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김일성의 赤化(적화)야욕’ 이다.

 

교과서는 가장 기본적인 6ㆍ25南侵(남침)전쟁의 원인을 看過(간과)한 채 양비론적 접근을 도입해 6ㆍ25전쟁의 발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비상교육刊, 324페이지)

“한반도에 세워진 두 개의 정부(注: 북한을 정부라 지칭한 것은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권이란 표현이 옳지만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정부라고 표기했다)는 서로 상대를 비난하면서 … 갈수록 심해지는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이런 대립을 부추겼다.”(삼화출판사刊, 318페이지)

“남과 북은 각기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지역을 토대로 나머지 지역을 통합하겠다는 전략을 추진하였다.”(천재교육刊, 325페이지)

 

김일성-스탈린 대화록 수록 의도 의심스러워

 

高校 한국사 교과서들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전쟁을 벌인 것처럼 기술했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활동’ 코너(325페이지)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화록을 제시했다. ‘舊소련 문서’를 출처로 밝힌 이 대화록은 페이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김일성: … 모택동 동지는 중국 혁명만 완성되면 우리를 돕고, 필요할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조선 통일을 이루겠습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스탈린: … 기본적으로 공격은 3단계로 작성하시오. …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김일성은 … 공격은 신속히 수행되어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남조선 내 빨치산 운동이 강화되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김일성과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대화록을 실어 전쟁에 정당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특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 조선 통일을 이루겠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말은 학생들에게 김일성의 전쟁 의지를 美化(미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설명 하단에 나온 질문도 “김일성이 전쟁을 마음먹게 된 국내외적 배경을 정리해 보자”고 기술해놓아 외부 요인에 의해 전쟁을 결심한 것처럼 기술했다. 이 교과서는 중공군의 한반도 침공을 ‘참전’이라고 표현(327페이지), 유엔군 참전과 同格(동격)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유엔군 참전은 유엔 安保理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것이나 중공군의 침공은 불법이다. 유엔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였다.

 

중공군 침략을 ‘참전’이라 記述

 

천재교육刊 교과서 325페이지 하단에는 ‘소련과 중국의 북한군 지원’이란 코너가 있다. 여기에는 1948년 2월 인민군 창설부터 1950년 5월까지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제공해준 무기와 군대, 스탈린과 모택동의 역할 등이 시대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는 그러나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이 저지른 전쟁의 불법성을 지적하지 않았다. 본문에도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뚱을 방문하여 전쟁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다(325페이지)”는 설명만 덧붙였을 뿐이다. 김일성이 南侵에 ‘동의’를 구했다고 표현해 자칫 6ㆍ25 전쟁이 주변국의 동의를 얻고 벌인 것처럼 인식할 수 있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도 중공군의 침략을 ‘참전’이라고 표현(319페이지)했다. 특히 6ㆍ25 전쟁 직후의 피해 사진을 화보로 실었는데 남한의 경우 무너진 건물, 피난촌 사진을 실은 반면, 전투 중 사망한 중공군의 屍身(시신) 사진(321페이지)을 따로 실어 중공군 人命(인명)피해가 많은 것처럼 부각시켰다.

 

한국을 살린 참전 16개국 무시

 

교과서들은 6ㆍ25 전쟁 당시 16개 참전국에 대하여 거의 다루지 않았다. 비상교육, 법문사, 삼화출판사, 지학사刊 교과서가 참전 16개국과 관련한 내용을 수록했으나 그 분량은 한 줄 정도에 그쳐 김일성-스탈린의 대화록 분량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16개 국가의 이름을 모두 실은 것은 비상교육刊 교과서뿐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지학사刊, 277페이지)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법문사刊, 323페이지)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였고…. ” (삼화출판사刊, 319페이지)

“6ㆍ25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타이,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디오피아, 콜롬비아가 군대를 파견하였다.” (비상교육刊, 326페이지)

 

전투부대 파견국 : 16개국

 

국명

참전연인원(명)

인명피해 규모

계

전사/사망

부상

실종

포로

미국

1,789,000

137,250

36,940

92,134

3,737

4,439

영국

56,000

4,908

1,078

2,674

179

977

오스트레일리아

8,407

1,584

339

1,216

3

26

네덜란드

5,322

768

120

645

-

3

캐나다

25,687

1,557

312

1,212

1

32

뉴질랜드

3,794

103

23

79

1

-

프랑스

3,421

1,289

262

1,008

7

12

필리핀

7,420

398

112

229

16

41

터어키

14,936

3,216

741

2,068

163

244

타이

6,326

1,273

129

1,139

5

-

그리스

4,992

738

192

543

-

3

남아프리카공화국

826

43

34

-

-

9

벨기에

3,498

440

99

336

4

1

룩셈부르크

83

15

2

13

-

-

콜롬비아

5,100

639

163

448

-

28

이디오피아

3,518

657

121

536

-

-

계

1,938,330

154,878

40,667

104,280

4,116

5,815

 

의료지원 및 시설파견국 : 5개국

 

국명

참전연인원(명)

참전규모(명)

스웨덴

1,124

170

인도

627

70(333)

덴마크

630

100

노르웨이

623

105(109)

이탈리아

128

72

계

3,132

 

• ※ 참전 규모의 병력은 전쟁 말기 최대수준을 유지한 병력(1953.7)

• ※ ( ) 내의 병력은 전쟁 말기가 아닌 최대수준을 유지한 병력

• ※ 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통계 중 [통계편]

 

 

전쟁 승리에 주도적 역할 한 트루먼과 맥아더 거의 언급 안해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에 대한 설명도 상대적으로 적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24일(미국시각), 고향에서 주말을 보내던 중 북한군의 남침소식을 전해 듣고 “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 자들에게 代價(대가)를 치르도록 해주겠다”라며 신속하게 미군 등 유엔군의 파견을 주도했다. 이 같은 결정으로 대한민국은 공산군의 南下(남하)를 제때 방어할 수 있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15일)은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개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6ㆍ25전쟁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에서만 트루먼 대통령이 등장하는데 그에 따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주장했지만 전쟁의 확대를 우려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이를 거부하였다.”(326페이지)

 

이는 트루먼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은 간과한 채 지엽적 논란만을 다룬 것으로,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의 방식을 두고 양측은 지루한 협상을 계속하였고 … 마지막 순간까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남북한은) 치열한 전투를 계속…”이라며 양비론적 서술을 했다. 포로교환 방식을 두고 협상이 길어진 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반공포로를 보내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고귀한 인도적 원칙을 고수하기 위하여 유엔군은 수많은 人命(인명)손실을 감수하였다. 교과서는 이 점을 강조하였어야 하였다.

 

보도연맹 사건을 남한 탓으로 돌리고 북괴軍의 양민학살은 은폐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보도연맹 사건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좌익혐의자에 대한 대량학살은 인민군 치하의 보복을 불러왔다. 치안대와 보도연맹원 유가족과 인민군 등 좌익 측이 경찰과 공무원 등을 포함한 우익인사들을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하는 일이 점령지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천재교육刊, 327페이지)

 

‘좌익혐의자에 대한 대량학살은 인민군 치하의 보복을 불러왔다’는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마치 남한이 먼저 학살을 자행한 것처럼 기술한 셈인데 최초의 양민학살은 북괴군이 서울에 진주하자마자 저지른 서울대병원 국군 부상병 학살이다. 1950년 6월28일, 인민군들은 서울대병원을 점령해 이곳에 입원해있던 전쟁 국군 부상자들을 총으로 쏴 학살했다. 국군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총을 亂射(난사), 당시 인민군이 죽인 시민들의 시체가 혜화동 일대에 즐비했다고 전해진다.

 

보도연맹원들이 우리 軍警(군경)에 희생된 것은 1950년 7~9월의 일이다. 따라서 서울대병원 학살이 먼저 이루어진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인민군 치하의 보복을 불러왔다’는 것은 사실날조다. 보도연맹 사건은 남침한 공산군과 남한좌익들이 軍警(군경) 가족과 부상병을 학살한 게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인민군과 좌익이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했다’는 설명은 마치 정당한 절차에 의해 학살이 이뤄진 것처럼 誤認(오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6 ㆍ25 南侵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부족과 날조된 기술 많아

 

교과서들은 6ㆍ25전쟁의 책임을 북한이 아닌, 미국 혹은 多者(다자)의 공동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을 보였으며 김일성의 남침야욕은 상대적으로 적게 기술하거나 아예 다루지 않았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업적도 거의 누락시켰다. 良民(양민)학살의 경우, 북괴군이 먼저 자행했음에도 남한의 軍警이 먼저 일으킨 것처럼 惡意的(악의적)으로 기술해 학생들이 부정적인 역사관을 갖도록 유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2. 피카소의 反美선동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이 실린 교과서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의 선동 그림을 실은 두 개의 교과서

 

미래엔컬쳐그룹刊 고교 韓國史(한국사) 교과서 8단원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 정세의 변화’의 ‘그 때 그 사건,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부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에스파냐의 화가 피카소는 6·25 전쟁 중 양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맨몸의 여성과 어린아이를 총과 칼로 공격하는 모습은 전쟁의 참상과 공포, 인간성 파괴 등을 표현하고 있다. 6·25 전쟁 중 북한 측은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인민재판을 행했고. 남한 측은 수복한 지역에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처벌하였다. 점령과 수복의 과정에서 처벌과 보복이 자행되어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경남 거창, 충북 영동의 노근리, 황해도 신천 등지에서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344페이지)

 

미래엔컬쳐그룹刊 교과서는 위의 설명과 함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그림을 함께 실었다.

 

피카소와 공산당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피카소는 1944년 10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공산당에 入黨(입당)한다. 그는 공산당 기관지《New masses》와의 인터뷰에서 “공산당 입당은 나의 논리적 귀결이다. 나는 진정한 혁명가로서 그림을 위해 항상 투쟁해 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공산당을 찾았다”고 밝혔다. 그는 물리학자 폴 랑주뱅, 시인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했다. 이후 노동절에는 노동조합원들과 街頭(가두)행진을 벌이기도 했으며, 공산당 창당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비둘기를 안고 있는 사람을 그려주기도 했었다. 피카소의 그림이 공산당의 선전선동에 이용된 것이다.

 

美國, 공산당원인 피카소의 입국 不許

 

1950년 3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 공산당원인 피카소가 ‘평화빨치산 세계총회’란 단체의 대표 12명을 이끌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것을 入國(입국) 금지시켰다. FBI(연방수사국)는 피카소를 안보에 危害(위해)한 공산주의자로 분류, 그가 죽을 때까지 감시 파일을 유지하였다. 평화빨치산 세계총회는 소련공산당 간부 주다노프가 조종하던 공산당의 선전 조직이었다. 피카소가 美軍이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실제로 이런 학살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을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의 그림에 담은 것은 訪美(방미)가 좌절된 이듬해였다. 세계 공산주의자들은 이 그림을 反美 선동에 악용했다. 이 선동 그림은 미국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적으로도 惡評(악평)을 받았다. 미국이 공산당원 피카소를 入國금지시켰다고 해서 미국을 욕하는 이는 없다. 미국 정부는 예술이 반역의 면허증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예술엔 國境(국경)이 없지만 예술인엔 國境(국경)이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피카소는 1944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가 1973년에 죽을 때까지 열성 당원이었다. 수백만 프랑의 기부도 했으며 黨의 선전에 필요한 그림도 그려주었다. 그림 ‘비둘기’는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평화공세에 악용되었다. 소련과 중공의 우표에도 실렸고 휴전회담 때 판문점에도 등장했다. 6ㆍ25 전쟁 이후 휴전을 담당했던 조지 클라크 장군(前 유엔군사령관)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정각 美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北의 남일 중장이 커다란 나무 건물 안(판문점 안에 있던 휴전협정 조인식이 이뤄진 건물을 뜻함)에 앉았다. 북한 공산군은 평화의 상징임을 선전하고자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으로 내부 전체를 꾸미려 했다. 나는 도쿄에서 이 얘기를 전해 듣고 해리슨 장군에게 전화해 “만약 공산당의 속임수를 상징하는 그림을 없애지 않는다면 저들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294페이지)>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행한 학살을 '인민재판'이라고만 표현, 마치 적법한 재판을 거친 것처럼 誤導(오도)하였다. 양민 학살이 이뤄졌다는 地名(지명)에서도 북한군과 좌익들에 의한 학살지(서울대 병원, 대전형무소, 전라남도 등)는 제외하였다. 신천 대학살이란 미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북한 정권이 창작한 거짓말이다. 교과서의 이런 악질적인 서술에 등장한 피카소 그림을 전교조 교사들이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이 정부가 좌익정권이 아니라면 이 그림이 실린 과정을 조사하여 시정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反국가적 교과서를 채택, 학생들이 조국에 원한을 갖도록 만드는 亡國的(망국적) 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박스] 인민군과 左翼에 의한 민간인 학살 통계

 

6.25 전쟁당시 인민군과 左翼(좌익)에 의한 학살 유형은 주로 비무장한 敵에 대한 대량의 보복 처벌이었으며 그 형태는 대개 ‘인민재판’ 혹은 ‘처형’의 형태를 취했다. 특히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는 인민군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지방 左翼들이 右翼인사와 그 가족들을 인민재판을 통해 죽창이나 칼·낫과 같은 원시적 무기를 사용해 학살을 자행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경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처형을 했다.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다.

 

그 대상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대거 포함되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당했다. 1950년 9월 20일 김일성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살려둔 수감인사들에 대한 ‘제거 조치’를 전체 점령지역의 행정기구에 하달했다. 후송을 하되, 후송 곤란 시에는 즉결 처치하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장 먹을 군량미도 다 떨어져가는 마당에 어떤 인민군이 민간인을 먹여가며 재워가며 후송하겠는가? 이것은 사실상 ‘전면적 학살’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6·25 사변 피살자 명부』(공보처 통계국, 작성일 1952년 3월31일)에는 5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명부는 凡例(범례)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軍警(군경)을 제외한 非(비)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 지역 피살자만 43,511명 (전체의 72.6%)

 

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4,008명, 여자가 15,956명이다. 여성 피살자 15,956명 가운데 1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에 가까운 7,914명이다. 이와 함께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가운데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지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이외에도 6.25 전쟁 기간 중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인민군, 평양 칠골리에서만 2,500여명 학살

 

미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인민군은 北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숱한 학살극을 벌였다. 김일성은 6.25남침 때에 북한지역에서 이른바 북한 내 불순분자 색출을 모토로 豫備檢束(예비검속)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는 악명 높은 ‘정치보위부’에서 실시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국군과 미군의 평양 입성 후에야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주민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뒤 시체를 우물 속이나 창고, 방공호에 차곡차곡 쌓아놓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평양의 칠골리에서 2,500여명, 평양 승호리 인근의 사도리 뒷산에서 4,000명 정도가 학살당했고, 평양의 기림 공동 묘지터와 용산 공동묘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함흥에서는 함흥감옥에서 700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명,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300명, 덕산의 니켈 광산에서 6,000명, 반룡산 방공굴에서 8,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 『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 사건의 전모』, 박계주 著)

 

이처럼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학살을 당한 민간인이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이고, 납북자 수는 84,532명,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이 244,633명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의 대량 학살 책임을 보여주는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주>

 

▲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妖言(요언)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 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 (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 “숨어 있는 반동도배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반동분자들과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당일꾼들에게 만연되고 있는 현상은 극렬히 비판해야 한다.” (1951년 1월 21일, 『적에게 일시 강점당하였던 지역에서의 반동단체에 가입하였던 자들을 처리함에 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 3개항을 설명하면서)
▲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한반도 분단의 재인식』)

 

표2. <남한 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현황>

(출처: 공보처 통계국 '6.25 사변 민간 피해 조사표')

지역

사망(명)

학살(명)

납치(명)

서울

29,688

8,800

20,738

경기

62,621

7,511

16,057

충북

24,320

3,409

6,312

충남

23,707

5,562

10,022

전북

40,462

14,216

7,210

전남

23,707

69,787

4,171

경북

35,485

6,609

7,534

경남

19,963

6,099

1,841

강원

17,122

6,825

10,528

총계

244,663

28,945

84,532

 

 

3. 대한민국을 지켜낸 軍人의 역할을 무시, 비방 一色

 

‘建軍’의 의미 축소

전쟁영웅은 아예 무시, 전쟁책임은 南北韓 모두에 轉嫁(전가)

5ㆍ16 군사혁명의 업적 비판 一色

光州사태를 왜곡ㆍ조작한 反軍영화를 학생들에게 추천

 

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나온 國軍(국군) 관련 내용을 분석한 결과, ‘建國(건국)’과 함께 ‘建軍(건군)’이라는 용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으며 6ㆍ25 南侵전쟁 당시 북괴군의 기습을 방어한 전쟁영웅에 대한 설명도 수록되지 않았다. 특히 5ㆍ16 혁명(교과서에는 주로 ‘군사정변’, ‘쿠데타’라고 서술), 5ㆍ18 광주사태(교과서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기술)를 다룰 땐 軍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두드러졌다.

 

‘建軍’의 의미를 무시

 

‘건군’에 대해 소개한 교과서는 6種 중 두 개(지학사, 삼화출판사)였다. 설명도 간단했다. 지학사 교과서는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은 5개 여단에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갖췄다. 국군의 주요 인사에는 한국광복군, 일본군, 만주군이 섞여 있었다”(270페이지)가 전부였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 역시 “남한에서도 조선경비대를 국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318페이지)고만 적었다. 建軍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듯 했다.

 

나머지 교과서는 국군의 탄생 과정에 대한 설명을 수록하지 않았다. 6ㆍ25 남침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용문산 전투’, ‘영천 전투’ 등 주요 戰功(전공)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6ㆍ25전쟁 당시 국군의 역할에 대한 교과서에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에 도달할 즈음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여 12월에는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단행하였다(법문사刊, 324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고 압록강까지 다다랐을 때,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였다(천재교육刊, 326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이 총공세를 펼친 낙동강 방어선에서 1개월 이상 혈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수복하였다(지학사刊, 277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켰다(삼화출판사刊, 319페이지).”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반격을 시도하였다(비상교육刊, 326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은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는데, 8월에 이르러 마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왜관을 거쳐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미래엔컬쳐그룹刊, 343페이지).”

 

전쟁영웅 무시, 전쟁책임은 南北韓 모두에 轉嫁(전가)

 

교과서들은 주로 유엔군과 국군의 역할을 포괄적으로만 기술했을 뿐 당시의 치열한 접전과 북괴군의 만행, 중공군의 개입 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다루는 데 그쳤다. 6ㆍ25 전쟁영웅인 白善燁(백선엽 ㆍ당시 육군참모총장), 金鐘五(김종오ㆍ당시 6ㆍ9사단장, 후에 육군참모총장) 장군의 활약상도 다루지 않았다. 미래엔컬쳐그룹과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인천상륙작전을 설명하면서 맥아더 장군의 이름도 記述(기술)하지 않았다.

 

전쟁 中 벌어진 남북간 대립에 대해서는 남한에 비판적으로 기술한 것이 있었다.

지학사刊 교과서 288페이지 <일상다반사>란 코너에서는 6ㆍ25 당시 학도병으로 활약한 한 소년이 자신의 어머니께 보낸 편지와 함께 “북한 인민군에도 17, 18세 소년병이 많았다. 소년병들은 전술요령을 알지 못하고 전투 경험을 쌓지 못하여 희생이 더욱 컸다”란 설명을 덧붙였다. 이러한 서술은 북괴군도 전쟁의 피해자란 인상을 준다. 비상교육刊 교과서 327페이지에는 左派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故 리영희(前 한양대 교수) 씨의 著書 《분단을 넘어서》를 소개했다. 책의 내용 중 “얼마나 많은 동포가 서로 쏘고 찌르고, 죽고 죽였는가”라는 부분이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이는 남북한 모두가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식의 서술이다. 일종의 양비론적 記述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증명된 5ㆍ16혁명의 업적도 비판 一色

 

5ㆍ16 혁명과 5ㆍ18 광주사태와 관련한 軍에 대한 설명은 더욱 비판적이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5ㆍ16 혁명과 5ㆍ18 광주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세력들은 장면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을 구실로 삼아 1961년 5월16일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장악한 후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 한편, 군사정부는 반대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중요한 정보를 독점하고 비판 세력을 탄압하였다(351~352페이지).”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벌이던 전남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며…(357페이지)”

 

이어 혁명 정부의 시책인 ‘농가 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 ‘화폐 개혁’ 등을 설명하면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썼으며, “군사정부는 반대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활동 정화법’, ‘반공법’등을 실시하여 정치인의 활동을 금지시키고…”라며 비판적 서술만을 적었다.

 

2011년 3월14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5·16, 우리에게 무엇인가’란 학술 세미나에서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5ㆍ16은 단기적 관점에서는 쿠데타지만 5ㆍ16세력이 민족사적 빈곤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경제력을 이끌어 냈기 때문에 사후적 정당성(事後的 正當性)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정희 시대 18년은 장기적ㆍ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혁명을 성취한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宋復(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월간조선》2011년 5월호에 기고한 <5ㆍ16없이 지금의 대한민국 없다>에서 “5ㆍ16이 일어나던 1960년대 초에서 민주화로 이행되던 1980년대 말까지, 불과 30년 사이에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 탈바꿈의 속도는 너무 빨랐고, 그 탈바꿈의 과정은 너무 치열했다. GNP증가율이 연 10% 내외로 30년간 계속되었다. 그 사이 우리는 수천 년 꼭 같았던 한 모델의 ‘낡은’ 국가체제에서 완전히 다른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델의 다른 국가체제로 전환했다. 그것은 곧 새로운 국가의 창건, 바로 국가개조였다”고 5ㆍ16 혁명을 평가했다.

 

光州사태를 왜곡한 ‘화려한 휴가’를 추천 영화로 소개

 

5ㆍ18 광주사태 부분을 교과서가 다룰 때에도 軍에 대한 일방적 비판이 主를 이뤘다. 1995년 검찰 조사와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계엄군 역시 시민군에 의해 人命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발포 명령자 또한 없었다고 확인된 바 있다. 당시 11공수여단 61대대장(중령) 이었던 安富雄(안부웅ㆍ예. 육군대령) 씨가 趙甲濟 기자의 著書《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서 증언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이다. … (1지역대장이 무전으로)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을 해 달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다.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10여 명 정도가 200여 명의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 다니고 있었다. …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교과서들이 광주사태를 기술한 내용을 보면 軍의 입장은 반영돼 있지 않다.

 

“신군부는 공수부대 등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지학사刊, 307페이지).”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삼화출판사刊, 356페이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 공수부대원들의 과잉진압은 시위를 광주 전체로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고 마지막까지 도청에서 저항하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천재교육刊, 367페이지).”

“계엄군은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점차 시민 봉기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법문사, 347페이지).”

“급파된 공수부대는 폭력을 휘두르며 학생과 시민을 대거 체포하였고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붙였다(㈜미래엔컬쳐그룹刊, 367페이지).”

 

계엄군 역시 시민군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음에도 교과서는 객관적인 시각을 배제한 채 서술했다. 자세한 因果(인과)관계를 싣지 않아 학생들은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만 가한 것처럼 인식할 소지가 있다. 정확한 사실을 균형있게 다뤄야 하지만 대부분의 교과서가 이 원칙을 외면했다.

 

특히 미래엔컬쳐그룹刊 교과서는 광주사태 당시 공수부대원들을 집단 학살범으로 왜곡한 영화 ‘화려한 휴가(2007)’ 를 보도록 추천하기도 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광주시민군 궐기문’ 中 ‘계엄당국이 무차별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아닌 주장을 그대로 실기도 했다. 당시 계엄당국이 ‘무차별 발포’를 명령한 적이 없다는 것이 5ㆍ18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확정됐기 때문이다.

 

2007년 ‘화려한 휴가’가 상영되었을 때 국방부는 이 영화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영화사에 항의도, 국민들에게 진실도 알리지 않았다. 이 영화는 진압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을 잔인하게 왜곡해 묘사했음에도 ‘사실에 기초했다’고 설명했다.

 

 

4. 국방비를 ‘反평화’ 비용으로 매도

 

4조의 ‘평화비용’으로 155조의 ‘분단비용’ 절약했다는 황당한 설명

《국방백서》 내용도 捏造(날조)

 

國防費(국방비)란 ‘국가가 외국의 침략에 대비 태세를 갖추고 국토를 방위하는 데에 쓰는 비용’을 가리킨다. 특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우리나라에서 국방비는 好不好(호불호)의 영역이 아닌, 필수불가결의 지출이다. 이런 중요한 국방비가 高校 교과서에서 자세한 설명 없이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다뤄지고 있는 사실은, 유독 ‘국방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현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의 내용은 한국이 국가살림을 과다한 국방비로 낭비하고 있으며, 국방비 비율 감소가 단순히 평화 증진으로 연결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음은 미래엔컬처그룹刊 高校 한국사 교과서 394페이지에 실려 있는 <탐구활동>의 내용이다.

 

<다음 자료를 보고 모둠 활동을 해보자.

자료1) 평화 비용과 분단 비용

“한국 국방 예산 규모는 26조 6490억 원(국내 총생산의 2.7%)으로 세계 군비 지출 평균 보다 부담률이 높다.” -국방부, “2008 국방백서”-

“1988년 남북이 대결을 지양하고 교류 문호를 개방한 이후 남한은 ‘평화 비용’ 3조 9800억 원을 지출한 반면, 155조 8800억 원의 ‘분단 비용’을 절약해 결과적으로 약 152조 원의 이익을 얻었다. 지정학적 리스크 감소, 사회․문화적 갈등 감소 등의 실제 부가가치는 더 클 것이다.” -“통일 경제”, 2009년 제3호- >

 

우선, 첫 번째 자료의 “ ”안의 내용은 출처로 밝혀져 있는 《2008 국방백서》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실제 국방비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국방비의 적정 규모는 안보위협에 상응한 군사적 소요와 국가의 재정적 부담 능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직접적인 군사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군사적 대치국의 경우 ‘안보위협의 정도’에 비례하여 국방비 부담률을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안보위협의 정도’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쟁·대치국에 비해 국방비가 낮은 비중으로 배분되고 있는 실정이다. 분쟁·대치국의 국방비 비율은 【도표 8-6】과 같다> (《2008 국방백서》, 163~164페이지)

 

엄연히 출처를 밝힌 상황에서 이 정도면 捏造(날조)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내용을 읽는다면, 우리나라 국방비의 수준이 결코 높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방비 증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스웨덴의 연구기관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SIPRI)’의 보고서를 인용한 ‘세계 국방비 리스트’(2009년)를 보면 한국의 국방비 총액은 154개 국 中 11위, GDP 대비 비중은 2.8%로 48위다. 이는 한국이 休戰(휴전) 상태임을 감안할 때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다. GDP 대비 15~30%로 추정되고 있는 북한의 국방비나 戰力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없다.

 

남북협력기금의 효과로 국방비를 ‘절약’했다는 황당한 계산

 

교과서의 국방비에 대한 偏憎(편증)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교과서는 ‘평화 비용’과 ‘분단 비용’이라는 개념을 등장시켜 국방비를 ‘反(반)평화 비용’으로 둔갑시켰다. ‘분단 비용’은 이전부터 ‘통일 비용’이라는 용어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익숙한 단어다. 이에 비해 낯설게 다가오는 ‘평화 비용’은 과연 무엇일까.

 

자료 속 간략하게 표기되어 있는 출처 ‘통일 경제’는 현대그룹 계열사 현대경제연구원이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보고서다. 위의 내용은 2009년 3월호인 ‘남북관계 평가와 개선과제-주요국 사례와 한국민의 의식 조사’에서 발췌된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평화비용’을 “정부의 남북협력기금을 통해 남북 경협 확대와 인도적 지원, 북한 SOC(사회간접자원) 개발 지원 등 한반도의 안보 불안 해소와 위기관리 차원에서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지출되는 비용”으로, ‘분단 비용’은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의해서 발생하는 비용으로 국방비와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 사회 문화적 갈등과 불안 심화 등”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실제로 분석에 사용된 ‘평화 비용’은 각 기간별 남북협력기금 지출 실적, ‘분단 비용’은 국방비의 수치였다. 이 수치를 사용해 1989년 이후 ‘평화 비용’ 즉 남북협력기금이 3조 9800억 원이 지출된 기간 동안 155조 8800억 원의 국방비가 ‘절약’되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국방비 감소 효과는 화해모색기(1988년 7·7선언 이후~김영삼 정부 이전 시기)의 3조 4900억 원에서 교류확대기(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106조 8100억 원으로 증가”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남북협력기금은 국가 차원에서 인적 교류나 남북경협 등을 위해 북한에 지원되는 돈이다. 실제 북한 주민에게 혜택이 돌아가기는커녕 김정일 독재 체제를 延命(연명)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남북협력기금에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더욱이 이는 ‘국가차원’에서 지급한 돈에 불과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무수한 민간단체들이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목 하에 7억 3148만 달러 상당의 현금․물품을 북한에 제공했다. 이는 1달러=1000원 환산으로만 해도 7314억 8000만 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확실시된 김대중 정권 시기의 對北(대북) 비자금 4억5000만 달러 외에도 각종 對北비자금의 의혹이 존재한다.

155조 8800억 원의 국방비를 ‘절약’했다는 것도 황당한 분석이다. 보고서에서의 계산은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분단비용 절감(B)’의 수치는 기간 별로 국방비 비중 4.0%(1988년도 비중)일 경우의 국방비를 계산해 놓은 후 실제 국방비의 수치를 뺀 것이다. 계산대로 한다면 ‘교류확대기’(1998~2007년)의 경우, 원래 100만원 중 4만원(4%)이 필요한 국방비가 2만6000원(기간 평균 2.6%)만 사용되었으니 1만4000원(B)이 ‘절약’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절약의 功(공)을 남북협력기금의 효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국방비 총액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국방비 총액을 기준으로 하면 분단 비용은 늘 증가해왔다고 봐야 한다. ‘GDP 대비 국방비(%)’나 ‘정부재정 대비 국방비(%)’ 등의 수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재정과 GDP가 증가함으로써 GDP 대비 비중은 줄고 총액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1981년 이후 국방비 총액이 줄어든 해는 1999년 한 해로, 1998년보다 510억 원이 줄어든(국방비 증가율 -0.4%) 13조 7490억 원이었다.

 

이렇게 계산된 국방비 절약 액수에서 남북협력기금을 뺀 수치에 대해 ‘남북이 대결을 지양하고 교류문호를 개방한 이후’ 얻은 이익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대결 시기’로 분류되고 있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의 수치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평화 비용’이 없었던 두 정권 시절에도 재정대비 국방예산 비율이 감소하는 시기가 엄연히 존재했다. 이에 대한 《국방백서》의 분석은 다음과 같았다.

 

<국방비가 국내총생산(GDP) 및 정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안보 및 사회여건에 따라 변화하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국방비는 국내총생산 대비 5%, 정부재정 대비 30% 수준을 점유하였다. 이는 율곡사업 등 1970년대 중반부터 추진된 우리 군의 자주적 전력증강 계획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예산이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사회복지 수요의 증가, IMF 금융위기 등에 따라 국방비의 하향 배분 현상이 지속되었다. 국방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국방비 배분 수준은 다소 개선되었다> (《2008 국방백서》, 163페이지)

 

문제의 <자료1>에 대해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자료1을 바탕으로 통일의 필요성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이다. 과연 위의 자료로 ‘통일의 필요성’을 논의할 수 있을까.

 

捏造(날조)된 자료와 검증되지 않은 용어의 사용, ‘분단 비용 절약’이란 자의적 개념과 황당한 기준으로 구성된 자료가 국가 검정에 통과된 고등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학습한 고등학생들은 남북한의 현 대치 상황과 對北지원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게 될까. 이 보고서가 발간된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위원 연석회의에서 한 국회의원이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연합뉴스의 보도(2009년 8월3일)도 있었으나, 교과서 제작 과정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방비는 反평화비용인가

 

국방비는 정말 必要惡(필요악)인 것일까. 줄이면 줄일수록 좋은 것일까. 국방비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국방비의 順(순)기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국방비의 사회·경제적 기여에 대한 《국방백서》의 설명이다.

 

(1) 국방비의 산업 연관 효과: 적정 국방비 확보를 통한 확고한 안보태세 유지는 경제 성장과 국가 발전을 뒷받침한다. 또한 국방비는 국가 안보라는 본연의 기능 이외에도 다양한 산업 분야에 지출되어 광범위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낳고 있다. 국방비 가운데 군인·군무원 봉급을 비롯한 인건비는 가계지출을 통해 유효 수요를 창출하여 산업 생산을 활성화시킨다. 무기체계 획득, 군수물자 보급, 군사시설 건설 등을 위한 사업비는 제조업, 건설업 등 각종 산업 부문으로 지출되어 산업생산과 고용을 증대시키고 국내소득을 창출한다.

한국국방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국방 부문의 산업 연관 효과는 산업 평균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국방비 1000원을 지출하면 1709원의 생산 유발이 일어나고 764원은 국민의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국방비 지출은 10억 원당 약 21명의 취업 유발 효과를 가져와 국가 일자리 창출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한다.

(2) 국방 R&D(Research and Development, 연구 및 개발) 투자를 통한 민간 산업기술 발전: 국방연구개발 과정에서 산출된 첨단기술은 민간 부문으로 파급되어 민간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회를 제공한다. 1986년 이후 군수용으로 개발된 첨단기술은 민간 업체로 이전되어 전자통신 및 기계산업 등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3) 사회간접자본(SOC), 기술인력 등의 제공: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공항, 항만, 교량 등은 지역 사회와 공동으로 사용되어 국가 예산을 절감하고 사회간접자본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軍에서는 국가기술 자격자를 배출하고 자체 병과교육을 통해 ‘국가기술 인력의 공급원 역할’을 수행한다. 1975년부터 2007년까지 기계, 화공, 전기, 전자 분야 등 120여 개 분야에 걸쳐 산업기사, 기능사 등 27만 6000여 명의 국가기술자격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통신, 항공, 정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간 5만 4000여 명의 전문 기술인력을 사회에 배출하고 있다.

 

광범위한 경제적 파급효과, 첨단 기술의 이전, 사회간접자본 및 기술인력 제공 등으로 요약되는 이러한 국방비의 사회·경제적 順기능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녹아 스며들어 발휘되고 있다. 경제 성장과 국가 발전을 뒷받침하는 본래의 기능은 말할 필요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아 소중함을 잊고 살지만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空氣(공기)처럼, 國防 역시 우리가 그 존재의 소중함을 자주 잊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방비야말로 진정한 ‘평화 비용’으로 불려야 할지 모른다. 더불어 국방비의 증가에 대한 원망의 화살은 쉴 새 없이 軍力 증강 및 核(핵)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김정일 정권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국방부, 高校 교과서 軍 왜곡 서술에 “모르고 있었다”

 

조갑제닷컴은 2011년 5월11일 국방부 대변인실에 公文(공문)을 보내 高校 한국사 교과서의 국방백서 원문 왜곡 문제(미래엔컬처그룹), 6󈽕 전쟁 학살책임을 國軍과 美軍에 전가한 문제(천재교육), 反軍(반군)영화인 ‘화려한 휴가’ 등을 추천 영화(미래엔컬처그룹)로 소개한 문제 등에 대해 국방부의 공식적인 답변을 요청했다.

 

국방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5월16일 조갑제닷컴과의 전화 통화에서 國軍과 관련된 高校 한국사 교과서의 왜곡 記述(기술)과 反軍 의식화 문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래엔컬처그룹 발간 교과서의 2008년도 국방백서 原文(원문) 왜곡 기술 문제와 관련해 출판사와 집필진을 상대로 法的(법적) 문제를 제기할 의사가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교과부를 통해 교과서의 왜곡 기술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할 예정”이라고만 했다.

 

관계자는 또 교과서에 6·25 전쟁의 학살 책임이 國軍에게 전가된 점, 피카소의 反美선동 그림인 ‘한국에서의 학살’이 실린 점, ‘화려한 휴가’와 ‘웰컴 투 동막골’ 등 反軍영화가 추천 영화로 소개된 데 대해 “답변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했다.

 

관계자는 위와 같은 입장을 공문을 통해 전달할 의사가 없느냐는 질문에 “그렇게는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답변이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참고자료>

▲《한국전쟁사》제1권(국방부 刊)

▲《6 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기파랑 刊)

▲《6ㆍ25와 이승만》(기파랑 刊)

▲《6ㆍ25派兵 결단으로 한국을 살린 트루먼 이야기》(조갑제닷컴 刊)

▲《광주사태와 공수부대》(조갑제닷컴 刊)

▲《2008 국방백서》(국방부 刊)

▲ 영화《나는 고발한다》(1959년 作)

▲ 영화《포화속으로》(2010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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