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서독시절 포함)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정당은? 많은 사람들은, 독일통일의 두 巨人 아데나워와 콜 수상을 배출한 기독교 민주당(基民黨)이나 동방정책의 기수 브란트와 슈미트를 수상으로 만든 사회민주당(社民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답은 자유민주당(自民黨)이다. 서독과 통일독일은 내각책임제이다. 1948년 12월에 창당한 자민당(FDP)이 정권을 잡지 못한 경우는 두 번뿐이다. 기민당이 선거에서 절대 과반수를 차지한 1957년부터 1961년까지와 基民黨이 社民黨과 聯政(연정)한 1966-1969년 사이이다.
최근의 예를 보자. 2005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10%의 득표율과 61의석을 얻었으나 基民黨과 基社黨(기독교사회당)이 부진하여 세 정당을 합쳐도 안정 과반수를 만들 수 없었다. 사민당까지 참여하는 大聯政이 구성되었다. 2009년 선거에선 자민당이 14.6%의 득표율로 93개 의석을 차지, 사민당을 밀어내고 기민당-기사당-자민당의 연립정권을 만들 수 있었다. 정부 14개 부처 중 自民黨이 차지한 5개 부처는 외교, 경제, 법무, 보건, 개발 장관이다. 특히 자민당의 정책을 반영하는 데 핵심적인 경제부 장관을 자민당 뢰슬러 대표가 맡고 있다. 그는 부총리 자격으로 내각회의에 참여한다. 자민당은 늘 의석분포 비율보다 많은 장관직을 차지, 自黨의 노선을 관철시키려 한다. 冷戰시절엔 외무장관직, 통일 이후엔 경제장관직을 선호한다.
자민당은 黨名이 상징하듯이 독일政黨중 가장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충실하다. 개인의 자유 존중과 시장 경제의 경쟁 원리를 핵심적인 黨 이념으로 삼는다. 기업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정부 財政의 건전성을 중시, 복지포퓰리즘을 견제한다. 자민당이 좌파인 社民黨과 공동으로 정권을 구성할 때는 社民黨의 브란트와 슈미트 수상이 對동독 유화정책을 펼 때이다. 이때도 자민당은 對동독 정책이 너무 왼쪽으로 나가지 않도록 견제하였다. 자민당은 親서방 일변도의 기민당과 달리 親서방 기조하에 동유럽과 東獨과의 교류 협력을 추진하였고, 통일독일의 중립화나 양다리 외교를 추구한 社民黨을 견제, 기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게 하였다.
이러한 自民黨의 원칙 견지는, <상반되는 정책을 가진 기민당과 사민당의 정책이 극단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서독 정부의 주요정책들이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염돈재,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김종필의 自民聯이 DJP 연합을 구성하였으나 김대중의 對北굴종 정책을 견제하지 못한 것은, 독일은 내각제이고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란 점과 자민련의 이념무장이 철저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콜의 독일통일까지 서독의 외무장관은 自民黨 출신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였다. 그는 1972년에서 1994년까지 16년간 외무장관직(2년간은 내무장관)을 맡으면서 1989~1990년의 독일통일 작업을 콜 수상과 함께 주도하였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 자민당의 대표였으므로 수상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1927년생인 그는 戰後 동독에서 살다가 어머니를 떠나 西獨으로 탈출, 자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反인도주의 범죄'를 주제로 삼았다. 나치와 공산주의의 인권탄압을 체험하고, 그 자신은 이산가족이 되었으니 그의 정치 생활에서 人權은 핵심적인 주제였다. 分斷국가의 정치인이 人權과 정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연설은 감동적이다.
"데탕트(동서화해)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정책이지만 독일인들에겐 삶과 직결된 매우 현실적인 정책이다. 당장은 가능한 것부터 실천하면서도 바람직한 것을 결코 視野에서 놓쳐선 안 된다. 독일인들은 데탕트를 애매모호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더 많은 인간 접촉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1975년의 헬싱키 선언은 소련과 동구 공산권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이 공통된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기초로 하여 유럽의 현상유지와 평화공존, 그리고 人權보호 등의 원칙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역사적 문서이다. 소련은 이 선언에 적힌 人權보호의 원칙을 수용함으로써 反체제 세력의 성장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이 소련 공산제국의 自滅을 가져온 내부 요인이 되었다. 헬싱키 선언을 만들어내는 多者間 협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겐셔 외무장관이고 그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한 게 자민당이었다. 늘 제3당이던 自民黨은 선명한 이념무장과 겐셔라는 출중한 정치가 덕분에 基民黨과 함께 독일통일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겐셔가 통일정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산주의 집단과 거래하면서 人權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하여 체험적이고 철학적인 정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헬싱키 선언의 제3 바구니(Basket)에 대하여 의회에서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가족을 방문할 수 있는가, 이산가족이 재결합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결혼할 수 있는가, 유럽全域에 걸쳐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가 등등에 관한 것으로서 實效를 거두어야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남북관계의 人權정책도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다. 이산가족끼리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가, 만난 뒤 재결합할 수 있는가로 그 성과를 측정해야 한다. 동물원 쇼에 불과한 이산가족 상봉방식은 人權향상이 아니라 人權을 학대하는 것이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한 가족도 같이 살게 된 경우가 없으니 이는 정책이 아니라 쇼인 것이다. 겐셔의 기준으론 김대중-노무현-민노당-민주당식 화해와 협력 노선은 구체적인 삶의 향상을 가져오지 못하였으므로 파산선고를 받아야 할 가짜이다.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겐셔의 통일외교를 '이상을 잃지 않은 현실주의 노선'으로 극찬하였다. 통일 전 서독은 2차대전 戰犯국가로서, 통일을 이야기하면 주변국들로부터 견제를 당하고, 통일을 말하지 않으면 분단이 고착되는 외교환경 속에 있었다. 그 사이의 狹路(협로)를 통과하면서 통일에의 열정과 전략을 일관되게 관리한 것이 자민당과 겐셔였다. 1982년 자민당은 사민당과의 聯政을 깨고, 기민당을 파트너로 삼는 바람에 콜 수상이 등장하였다. 독일통일은 콜과 겐셔의 콤비 플레이에 의하여 1년만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질 수 있었다.
자민당은 보편적 가치를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현실 문제에는 유연성 있게 대처, 젊은 지지자들이 많은 게 특징이다. 기민당 지지자들은 자민당의 존재의미를 높게 평가하여, 의도적으로 표를 갈라주기도 한다. 서독정부는 1962년부터 1989년까지 27년간 총34억6,400만 마르크(1990년 환율로 약1조8,400억 원)를 들여 東獨이 억류한 정치범 3만3755명과 그 가족 25만 여 명을 서독으로 데리고 왔다. 이 사실은 통일 이후 밝혀진 것이다. 서독정부가 극비사안으로 분류, 민간인에게 이 일을 맡겼고, 언론도 협조한 덕분이다.
줄곧 제3당을 유지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에 투철한 이념과 정책으로 독일통일의 주체세력이 된 자민당과 겐셔의 사례는 한국의 정치현실에 하나의 암시를 던진다. 한국엔 보수층은 있으나 (李明博 정부와 한나라당의 중도기회주의 노선에 의하여) 보수정치 세력이 사라졌다. 30~60%의 보수층은 정치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정치적 배신만 당하고 있다. 민노당, 민주당, 진보신당은 좌파 여론을 대변하기 위하여 경쟁하는데, 한나라당은 보수층을 버리고 이들 좌파정당과 경쟁하다가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아무리 잘 봐주어도 한나라당은 중도좌파 정당이다. 本妻를 버렸다가 愛妾한테도 버림 받을 날이 다가온다.
약30%의 골수 보수층은 보호세력도 대변세력도 없는 상태에서 벌거벗겨져 있다. 오늘의 정치상황은 독일 自民黨과 같은 이념정당의 출현을 요구한다. 이 우파이념당은 대한민국 헌법에 담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라는 국가 정체성을 양보할 수 없는 핵심 가치로 삼고 자유통일을 至上의 목표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反헌법적 從北이념으로 무장한 민노당이 민주당을 왼쪽으로 끌고 가고 한나라당은 그 민주당에 끌려가는 게 작금의 한국 정치상황이다. 한국판 자민당이 나오면 30%의 골수 보수층의 지지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3당은 무난할 것이다. 한국판 自民黨의 출현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한나라당일 것이다. 내년 총선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자민당의 협조를 받아야 국회를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자민당은 20~40석으로 한나라당뿐 아니라 좌경화한 민주당도 오른쪽으로 끌고 올 수 있다. 민주당과 민노당이 과반수에 미달한 다수의석을 가질 경우, 자민당의 협조를 받기 위하여는 從北노선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판 자민당은 헌법정신을 한국 정치의 기준으로 삼고, 黨의 이념으로 드높임으로써 헌법의 범위를 이탈한 從北정치세력까지 헌법의 울타리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역사적 업적도 이룰 수 있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한국판 自民黨의 도움 없이는 내년 大選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다. 自民黨은 협력의 조건으로 6.15 반역선언의 폐기 등 '헌법에 기초한 통일정책'의 수용을 요구할 수 있다. 보수층이 오는 두 차례 선거를 호기로 삼아 한국판 자민당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영원히 乙의 입장이 되어 좌익 정상배로부터는 공격을 당하고 중도 정상배로부터는 배신을 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독일의 자민당이 그러하였듯이 한국판 自民黨도 대한민국 정통세력의 힘을 모아 從北세력을 척결하고 자유통일 주체세력을 길러내는 역사적 임무를 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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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독일 한국 대사관 보고: 독일 자유민주당(FDP) 전당대회 결과 (종합)
□ 자민당(FDP) 전당대회 결과 (필립 뢰슬러 경제부 장관 당대표 선출)
ㅇ 2011년 5.13(금)-15(일) 독일의 4대 정당 중 하나인 자유민주당(FDP)는 13일부터 3일간 전당대회를 열어 당수인 기도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의 뒤를 이어 새 당수로 필립 뢰슬러 (전 보건부)경제부 장관을 선출.
- 뢰슬러 당대표는 (정부 14개 부처 중) 자민당이 차지하고 있는 5개 부처(외교, 경제, 법무, 보건, 개발) 장관 중 자민당의 정책반영에 핵심적인 경제부 장관을 맡게 되었으며 베스터벨레 前 당대표를 이어 부총리(Visekanzler) 자격으로 내각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음.
- 자민당은 지난 4월6일 당 간부회의에서 3월 말 실시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라인란트팔츠 주 의회 선거에서 참패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베스터벨레 당수의 후임으로 뢰슬러 장관을 후보자로 지명. (이로써 독일은 터키인 출신 공동 당수를 배출한 녹색당에 이어, 외국인 출신 정당 당수를 두 명 갖게 됨)
- 필립 뢰슬러 새 당수는 올해 38세로 독일 정계에서 보기 드물게 빠른 속도로 성장. (36세에 아시아계 최초 독일 연방정부 보건장관, 38세에 외국계 최초 경제부 장관, 자민당 당수 및 연방정부 부총리) 그는 자민당이 지난 총선에서 승리한 뒤 기민당·기사당 연정이 구성되면서 당의 추천으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 의해 보건장관으로 임명됨으로써, 독일 연방정부의 첫 외국인 출신 각료가 된 바 있음.
- 일부 정계 전문가들은 유연하고 겸손한 이미지의 뢰슬러가 베스터벨레를 비롯한 前당수들이 보여주었던 ‘투지(Kampfgeist)’를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도 있으나 2010년 말부터 독일의 의료보험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현행 제도에 대폭 손질을 가한 의료개혁안을 저돌적이고 끈질기게 추진해 온 정치적 경력을 고려한다면 단기간이내 자민당의 개혁을 추진하고 지지율을 회복하는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평가.
- 뢰슬러는 베트남 전쟁중인 1973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고아로 자라다가 생후 9개월에 한 독일군 장교에게 입양됨. 양부모가 이혼하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하노버에서 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전공한 후 군의관을 거쳐 의사가 됨(의학 박사). 학생 시절부터 자민당에 입당한 그는 27세에 니더작센 주 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주 당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기민당과의 연정에서 주경제장관을 거친 뒤 연방정부 각료가 됨. (의사 출신 부인과 쌍둥이 딸)
- 우수한 두뇌와 냉철한 사고력, 뛰어난 정치 감각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당 안팎의 중론이며 당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특히 전 당수인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의 적극적 지지를 받고 있음.
- 최근 내홍을 격고 있는 자민당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 정치 평론가들은 비교적 나이가 어리고 정치계의 경험이 부족하여 실질적 당권을 장악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
- 그러나 전문가들은 베스터벨레 당수가 이끄는 동안 자민당 지지율이 5% 선 이하로 하락한 점을 지적하며 최악의 상황만은 개선할 수 있으리라 기대. 자민당은 2013년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빠른 시일내에 당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
ㅇ 뢰슬러 자민당 당수는 당대회에서 자민당의 기본 정강에 입각한 ‘인권 강화, 규제 완화, 교육계혁, 중산층의 복지 강화, 규제완화 등을 역설.
- “자민당은 향후 독일 국민들이 가진 일상의 문제점에 대하여 자민당의 고유하고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기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세금감면’만을 주장하던 기존의 정책을 탈피하여 정책외연을 확장하고 저소득 및 중산층의 문제의 실질적 해답을 찾기위해 노력할 것 이라고 밝힘.
- 뢰슬러 당대표는 자민당의 친경제적이고 선언적인 정강을 강하게 주장하던 베스터벨레 전 대표와는 상반되게 섬세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며 대중에게 공감을 획득하는 소통을 시도하고 있음.
- 당대회 당대표로서 매우 소탈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설득력있는 연설을 통해 당원들로부터 ‘우리들 중 하나(einer von uns)’라는 강한 소속감을 일구어 내었다고 평가.
ㅇ 자민당은 당 대표선출 외 유로구제금융, 에너지 정책, 대테러 관련 법, 향후 세금 정책에 대한 입장을 결의.
- 자민당은 유로 구제 금융의 현행 기본 내용에는 찬성하나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 에너지 정책과 관련 핵발전의 단계적 폐기는 찬성하나 정확한 폐기년도는 확정할 수 없다는 입장. 대테러 관련 법 연기와 관련 자민당은 대테러법 연기에 반대하며 필요시 관련 법규의 개정을 통한 협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대테러법 연장을 주장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내무부 장관(CSU)과 정책갈등이 예상됨. 세금정책과 관련 기민당측에 뚜렷한 세금감면일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저소득층 및 중산층 중심의 세금 감면에 대한 실재적 가능성을 타진할 전망.
주독일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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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련의 족쇄가 된 헬싱키 선언
黃長燁씨는 ‘광견을 겁내지말라’는 책에서 소련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네 개로 꼽았다.
1956년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 스탈린은 소련뿐 아니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스탈린 격하운동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를 끌어내림으로써 이 운동의 단결이 붕괴되었다. 毛澤東의 중공이 흐루시초프에 반발함으로써 소련과 중국이 분렬되고 미국에 대한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공격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던 것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건: 흐루시초프가 미국의 코앞인 쿠바에다가 미사일과 핵무기를 반입, 설치하려는 모험주의는 케네디 대통령의 반격을 받았다. 미국이 소련과의 핵전쟁을 각오하고 쿠바를 해상봉쇄하자 소련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철수했다. 이는 소련의 권위를 떨어뜨려 1964년 흐루시초프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1975년 헬싱키 선언: 소련이 서방세계로부터 제안된 인권조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공산권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의 자진 해체: 그는 공산권 쇠퇴의 원인이 人權사상과 자본주의의 침투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계급 독재 등 사회주의에 내재한 모순 때문이라고 확신,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해체하고 말았다는 것이 黃長燁씨의 분석이다.
헬싱키 선언이 한국에 주는 교훈
헬싱키 선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본다. 1969년 3월17일 소련의 주도하에 있던 동구 공산권의 집단안보체제인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방세계에 대해 유럽안보회의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소련의 목적은 1년 전에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봉기를 소련이 무력진압한 데 따른 후유증을 해소하는 한편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닉슨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일종의 선제공격을 거는 것이었다.
소련은 닉슨을 강경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소련이 제안한 議題는 서구와 동구의 화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 과정에서 형성된 현재의 유럽 국경이 변경될 수 없다는 점의 확인, 그리고 독일내부의 분계선에 대한 재확인 등이었다.
닉슨과 키신저는 이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베를린市에 대한 자유 접근권의 보장 및 유럽의 재래식 군사력 감축과 연결시켜야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답했다.
이 회의가 실제로 열린 것은 1973년6월이었다. 이 회의에서 서방측은 소련에 대해서 '현재의 유럽 여러 나라들 국경선을 존중한다'는 양보를 해주는 대신 많은 것을 얻었다.
이 회의가 열렸을 때 서독 사민당 빌 브란트가 시작한 동방정책에 의해 동독과 서독은 내부 분계선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서독으로 하여금 ‘국경선의 평화적인 변경’이란 단서조항을 이 회의에서 관철시키도록 밀어주었다. 즉, “국경선은 국제법에 따라 합의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변경될 수는 있다”는 조항을 헬싱키 선언에 포함시킨 것이다.
東歐의 해방을 가져온 인권조항
이 조항은 1990년에 독일 통일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서독이 소련을 설득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이 ‘평화적인 변경’ 조항에는 또 “서명국가는 국제조직, 군사적 동맹을 포함한 多者間이나 상호 조약 기구에 가입하든지 가입하지 않든지 하는 자유를 가지며 중립 선택의 자유도 가진다”는 규정이 덧붙여졌다. 이 규정도 東歐 공산권이 해체될 때 위성국가들이 主權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개입을 저지하는 법적인 장치가 되었다. 이런 조항을 내심 반긴 것은 소련의 무력적 내정간섭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동구 위성 국가들이었다.
이 회의는 유럽 안보 협력 회의(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CSCE)로 불리게 되었고 1975년의 헬싱키 선언 이후 존속된 조직체의 명칭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th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였다.
黃長燁씨가 말하는 헬싱키 선언이란 유럽안보회의가 1975년 헬싱키에서 채택한 인권선언을 가리킨다.
이 조항은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교류, 인권, 기본적인 자유의 보호를 규정한 것이다. 이 조항은 유럽국가들이 제안한 것이다. 그 목적에 대해서 키신저는 회고록 (Years of Renewal)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목적은 국제협정에 의하여 소련이 1968년의 체코 및 1956년의 헝가리 봉기나 시위 같은 것을 앞으로는 탄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벨이나 바웬사 같은 비전과 용기의 지도자들은 헬싱키 선언에 들어 있는 이 조항을 이용하여 공산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근거로 삼았으며 마침내 동구유럽의 해방을 가져왔다>
헬싱키 선언에서 반영된 人權 조항의 교섭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였다. 최근 프랑스 지식인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열정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유럽안보회의는 ‘군사적 신뢰조치’에 대한 합의도 이루었다. 예컨대 사단급 부대를 이동할 때는 30일 전에 관련국가에 통보해야 한다는 조항을 둔 것이다. 이런 조항도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세한 소련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휴지?
포드 대통령이 헬싱키 회의에 참석하여 한 연설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은 이 회의가 합의한 원칙들을, 인류를 위해 보전해야 할 유럽 문명의 위대한 유산의 하나로 간주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공허한 말이나 진부한 표현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작업과 말들을 심각하게 여길 것이다. 여러분들은 미국 정부와 국민들이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해서 갖고 있는 깊은 신념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포드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역사는 오늘 우리가 말한 것이나 우리가 약속한 것으로 이 회의를 평가하지 않고 우리가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지켜낼 것인가로 평가할 것이다.”
포드는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일부러 맞은 편에 앉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눈을 노려보았다고 한다. 서방세계는 포드의 이 약속을 지켰다. 따라서 헬싱키 선언은 말장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서방세계는 소련에 대해 헬싱키 선언을 계속해서 상기시킴으로써 이 선언이 소련의 행동을 규율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1991년에 남북한이 맺은 기본합의서는 우리측의 주도로 이루어진 합의였다. 이 합의대로 하면 남북한은 평화공존의 길을 걸으면서 통일로 가는 前段階의 교류와 협력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북한은 이 합의서의 이행을 거부했다. 남한은 이 합의서의 이행을 북한에 강제할 수단이 없었다. 그 뒤의 정권-金泳三, 金大中, 노무현 정권은 이 합의서를 잊었다. 북한과 대화할 때 항상 이 합의서의 이행을 촉구했어야 했는데 다른 정권에서 만든 것이라고 그랬는지 그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72년의 7.4 공동 성명은 통일3원칙으로서 북한이 주장해온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뒤 북한이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 공동성명보다도 훨씬 구체적으로 진전된 실천계획이 남북기본합의서였다. 교류, 경제협력, 군사적 긴장완화 등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이 문서는 대한민국측의 의지부족으로 휴지가 되고 있다.
金大中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평양회담 이전까진 기본 합의서를 강조하더니 평양會談에선 7.4공동성명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金大中은 왜 7.4공동성명과 함께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가장 중요한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가. 盧泰愚 정부의 가장 큰 성과인 남북기본합의서를 스스로 무효화시킨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 합의한 조항은 북한측으로선 남북 대화 30년만의 일대 성과라고 환호할 만한 일이었다.
남북관계의 기본 문서에 한국측이 북한의 통일원칙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원칙이어야 할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 한 마디도 반영시키지 못한 것은 과연 한국측이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마저 갖게 한 사건이었다.
헬싱키 선언도 휴지가 될 수 있었다. 미국 등 서방세계가 이를 선언으로만 인식했다면. 그러나 미국의 歷代 정권은 헬싱키 선언을 對蘇정책의 기본틀로 인식하고 이를 근거로 소련을 압박하여 공산권의 붕괴를 촉진했던 것이다. 남북간에 아무리 근사한 합의가 있어도 그것을 관철시킬 만한 지도자의 신념과 국력과 국민들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선언은 좋은 말로써만 기억될 뿐이다.
공산제국을 붕괴시킨 헬싱키 선언 연구
조갑제
인간의 사고능력이란 무서운 것이 세계를, 역사를 바꾸는 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사이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경비를 지불하고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킬 것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고가 될 만한 역사적 事例를 찾아보면 1975년 헬싱키 선언이 있습니다. 앞서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가져오는 데 있어서 이 선언의 중요성에 대해서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소련측에서 이 선언을 어떻게 보았는지 검토해보기로 합시다.
아나톨리 도브린이란 사람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1962년에 미국 주재 소련 대사로 부임하여 그 뒤 24년간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까지 여섯 대통령과 그 정부를 상대했던 거물 외교관이었습니다.
도브린이 은퇴후에 쓴 회고록 'In Confidence'(비밀로)가 1995년 미국의 타임스 북스(Times Books)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그는 헬싱키 선언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헹싱키 선언은 1975년8월1일에 서명되었다. 이 선언은 그 뒤 소련과 동구 공산국가 내부에서 자유화 운동이 오랫동안 골치아프게 진행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결국 이들 국가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냉전이 종식되도록 하였다.'
헬싱키에서 열렸던 회의의 공식 명칭은 유럽의 안보와 협력에 관한 회의(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iope)였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35개국이 참여했는데, 이는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한 1815년 비엔나 회의 이후 최대규모였습니다.
이 회의는 소련이 유럽과 미국을 이간질시키려고 제안했던 것인데 미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묵혀 있다가 1973년 닉슨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이 참석하면서 예비 회담이 2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의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안보, 경제협력, 인도적 협력. 소련은 안보와 경협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국측은 인도적 협력 즉 인권의 원칙을 이 선언에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소련은 인권문제는 국내문제라는 전제하에서 국제협정으로 이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미국측은 소련이 인권 조항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보 및 경협 부문에 대해서 동의해줄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소련은 이 회의에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 책정된 폴란드 등 동구 공산국의 국경선을 서방으로부터 보장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방에서 인권조항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낭패한 것입니다. 인권조항에는, 서명국은 인권, 이동의 자유, 사상 교류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 선언의 초안을 정치국 회의에 보내 토론하게 했습니다. 정치국 위원 중 수스로프, 코시긴, 포드고르니, 안드로포프는 인권조항을 받아들인다면 국내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간섭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면서 반대했습니다.
많은 소련 대사들도 이 조항 때문에 국제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를 준비했던 그로미코 외무장관이 이 초안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무엇이 내정 간섭인가 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소련정부뿐이다. 우리는 우리 집의 주인이다'고 말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브레즈네프도 그로미코 편을 들었습니다. 그는 헬싱키의 거대한 국제정상회담장에 나가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는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이 2천만 명 이상의 인명을 희생시켜가면서 확보한 국경선을 서방이 인정해준다는 것은 기가 막힌 선전 무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이것을 소련 국내 선전에 잘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권조항에 대해서는 소련 국내에 간단하게 소개하면 그만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헬싱키 최종 협정(Helsinki Final Act)라고 불리는 선언에 서명했던 것입니다.
도브리닌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브레즈네프의 판단은 잘못된 것임이 곧 밝혀졌다. 소련의 반체제 세력은 이 역사적 문서에 의해 크게 고무되었다. 프라우다에 보도된 이 선언의 全文은 소련 정부의 공식 문서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문서는 반체제 자유 세력의 헌장처럼 되었다. 이것은 소련 지도층이 상상하지 못한 사태 전개였다>
재미 있는 것은 브레즈네프를 함정에 빠뜨려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도록 한 초석을 놓았던 포드 대통령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성토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소련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공화당내 포드의 경쟁자였던 레이건 지사(뒤에 대통령)도 포드를 공격했습니다.
미국 포드 대통령은 키신저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이 회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양보를 소련으로부터 받아냈습니다. 동구권 국가의 국경선을 인정해준다면서 단서 조항을 하나 끼웠던 것입니다. 즉, 평화적 방법으로써 국경선을 변경하는 것은 합법적이란 조항이었습니다. 이 조항은 서독 정부의 부탁을 받아 미국이 밀어붙인 것이었습니다.1990년 동서독이 통일될 때 이 조항으로 해서 소련은 동서독 사이의 국경변경에 대해 불법이란 항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헬싱키 선언이 동구 공산국가들에게 미친 영향도 큰 것이었습니다. 인권조항 때문에 폴란드 같은 데서 反共시위가 일어나도 과거처럼 소련 군대를 보내 탄압하기가 논리상 어렵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바웬사 같은 지도자들이 폴란드에서 반공 노조 운동을 열심히 벌여 공산권 붕괴의 불길을 당겼던 것입니다.
자, 위의 헬싱키 선언 공식을 북한의 김정일 정권에 어떻게 적용하면 될까요. 김정일이 자멸의 길을 열지로 모르는 인권의 원칙을 수용할 리가 없습니다. 그가 약한 입장에 빠지게 밀어붙인 다음 국제사회가 강력한 입장에서 협상해야 김정일은 울며겨자먹기로 인권의 원칙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예컨대 유엔 안보리 결의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對北 경제 제재를 걸어놓습니다. 중국도, 한국도 참여하여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은 물론이고 무역도 중단시킵니다. 이렇게 해두고 기다리면 김정일 정권은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입니다.
국제사회가 유리한 입장에서 김정일과 협상이 가능해질 때 협상 의제로 인권조항을 넣는 것입니다. 인간 이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 정치수 수용소 폐지, 이산 가족 재회 등등을 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의 내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교두보가 생겨 민주화 운동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만약 김정일 정권이 인권 조항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간섭을 받아야 하게 됩니다.
인권문제는 內政이 아니라 국제사회 공통의 문제이므로 인권탄압을 하는 국가를 국제사회가 응징하는 것은 합법적인 행위, 때로는 경찰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생각해봅시다. 김정일의 핵공갈에 대해 한국 미국이 인권을 들고 나와 대응한다면 누가 이길지. 인권, 즉 사랑의 원자탄이 김정일이 만들려고 하는 공포의 원자탄을 녹일 것입니다. 인권은 세계 여론, 특히 NGO와 진보세력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003-01-22, 22:56 ]
*대한민국 憲法에 담긴 理想과 현실(趙甲濟)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의 유명한 귀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실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神聖(신성)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창조되었으며, 그런 평등한 창조로부터 빼앗길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받았는데 생명의 保全(보전)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거기에 속한다>
제퍼슨이 名文으로 소개한 생명권, 자유권, 행복권은 그 뒤 등장하는 나라의 민주주의 헌법에 기본권으로 정착된다.
*1904년 李承晩이 獄中에서 쓴 '독립정신'의 한 귀절: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活力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活力이 생겨서 몇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根本이다>
李承晩은 자유가 가진 정신적 가치뿐 아니라 생산성을 간파하였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나라에 활력이 넘쳐 경제가 발전하고 군대도 강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유를 주는 게 富國强兵의 길이라고 보았다.
*崔南善이 기초한 1919년 3.1 독립선언서의 마지막 문단: <우리가 본디 타고난 自由權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 피우리라>
자유가 풍성한 삶과 창조의 길이란 뜻이다. 독립선언서가 밝힌 한민족의 독립운동의 길은 인간해방과 민족해방이었던 것이다.
*李承晩이 建國을 주도한 대한민국의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人權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 조항은 <우리나라 기본질서의 이념적 정신적인 출발점인 동시에 모든 기본권의 가치적인 핵심으로서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우리나라 헌법질서의 바탕이며 우리 헌법질서에서 절대적이고 양보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적인 Konsens를 뜻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는 헌법개정은 물론,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적 가치를 침해하는 기본권 제한은 절대로 합헌적인 국가작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許營)
위의 역사적 文書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기본권의 핵심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데 공통점이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 토마스 제퍼슨은 인간의 기본권을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으로 규정하였다. 국가도 개인의 이런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것이 개인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고, 人權의 바탕이 되는 人間觀이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이런 思想은 그 뒤 後發국가가 민주주의를 건설할 때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19세기말 시작된 한국의 開化운동은 미국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자유민주주의를 理想으로 삼게 된다. 그 理想을 가장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가장 줄기차게 실천하였던 이가 李承晩이었다. 그가 온몸으로 담아내었던 開化의 꿈은 韓日倂合으로 좌절되었으나 그 불씨는 이어졌고 3.1 독립선언서로 재확인되었으며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에 자리 잡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다.
제퍼슨-李承晩-三一운동-建國-憲法의 연결망에서 빠져버린 것이 북한이었다. 북한은 인간생명의 신성함, 人權의 존중, 자유-평등-행복을 추구하는 역사의 大勢에서 제외됨으로써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위의 4大 문서에 등장하는 키 워드는 자유, 생명, 평등, 존엄, 행복, 풍요, 삶의 즐거움 등등 희망적이고 낙관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삶을 긍정한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행복해질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가르친다. 북한정권과 從北세력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를 부정하는 집단이므로 헌법敵對세력으로 분류된다. 공산화가 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는 존재는 김정일 一家뿐이다.
*국민의 권리와 국가理念을 담은 憲法 조문 10개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主權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수령과 黨이 主權을 쥔 북한식 공산주의는 헌법의 敵이다.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지역을 불법점거한 김정일 정권은 反국가단체이다.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이다.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통일하여 한반도 전체를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국가의지이고 목표이다.
제5조 ①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국군은 外敵뿐 아니라 內敵으로부터도 국가를 보위하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중립하라는 말은 특정 정당 편을 들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군은 정치를 해선 안 되지만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정치를 알아야 한다.
제8조 ④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
-민노당과 같은 從北정당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부정하고 폭력을 일삼으므로 위헌정당으로서 해산되어야 한다.
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인 漢字는 韓國語의 2大 표기수단중 하나이므로 國字로 가르쳐야 한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人權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개인 개인의 人權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개인의 人權을 인정하지 않고 계급의 특권을 강조하는 공산주의는 헌법상 용납할 수 없다.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에게 평등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노동자와 농민계급의 특권과 이들에 의한 독재를 인정하는 공산주의는 反헌법적이다.
제23조 ①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私有재산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핵심으로서 이를 보장하는 것이다. 私有재산권을 부정하는 북한정권과 從北세력은 공동체의 敵이다.
제37조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헌법敵對세력에 대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주어선 안 된다.
*결론: 대한민국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키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불법단체가 점거한 북한지역을 자유통일, 한반도에서 민주공화국을 완성해야 할 의무를 헌법으로부터 받았다. 모든 한국인은 생명을 保全하고, 자유를 누리며, 평등한 대우를 받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북한 공산정권과 남한의 追從(추종)세력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하여 제거되어야 한다.
法治주의에 도전한 금융마피아들의 大逆罪
-노무현 정부로부터 ‘최우수 사회공헌대상’ 및 ‘서민금융 최우수경영대상’을 받은 금융사기단 正體-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광주일고 출신 금융마피아들이 뇌물을 銃口처럼 이용, 자본주의의 윤리를 허물고 法治주의에 정면 도전한 일종의 大逆罪이다.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왜 작아지는가?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본질은 不實경영이 아니다. 建國 이래 최대, 최악의 금융사기 사건이다. 이 사기 사건의 主犯은 광주일고 출신 경영진(대주주)이고 비호세력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에 걸쳐 있다. 비호세력은 공무원 집단뿐 아니라 언론, 사회단체 등도 포함된다. 大檢 중수부에 의하여 구속되었거나 수사대상이 된 사람들은 금감원, 감사원, 청와대, 국회의원, 기자, 국세청 직원이다. 아직은, 경제관료와 경찰관 및 검사와 판사가 빠져 있다.
이런 권력형 부패사건이 일어나면 발 벗고 나서 목소리를 높이던 자칭 진보세력이 침묵하는 것도 이상하다. 지역 언론과 지역 국회의원이 조용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특히 야당이 진상 조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의심을 自招한 행위이다.
부산저축은행은 한국의 권력층을 부패시킨 최대의 汚染源(오염원)이었다. 오염된 권력자들은 금융사기단에 코가 꿰여서 저들을 비호하고, 부정을 덮는 데 합세하였다. 2004년과 2009년 두 차례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은 대규모 금융 부정사건으로 實刑을 선고 받았다. 법원과 검찰과 금감원이 그때 예방조치를 제대로 취하였더라면 같은 一黨에 의한 세 번째 범죄는 막을 수 있었다.
부산저축은행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권력층(法 집행권과 여론 형성권을 가진 세력)의 이상한 행태는 저축은행 비리의 규모와 深度를 짐작하게 한다. '금융사기단+비호권력층=범죄 카르텔'은 앞으로도 필사적으로 이 사건을 축소하거나 덮으려 할 것이다. 그들은, 부산저축은행과 같은 추가 도산이 이뤄지면 자신들의 부정이 또 다시 드러날 것이라고 판단, 兆 단위의 국민세금을 투입, 일단 도산을 막으려 들 것이다. 이런 시간 연장 조치는 不實금액을 불리게 될 것이고 결국 국민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피해자인 부산시민들도 이상하게 조용하다. 현지 언론과 정치인의 의도적 침묵 때문에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수 국민들도 예금 피해자만 아니면 "나 하고는 무관한 사건이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일부의 예상대로 저축은행 부실 규모가 최종적으로 30조 원에 이르게 된다면 국민 1인당 60만 원, 4인 家口당 240만원의 부담이 생긴다. 그래도 "내 일이 아니다"고 눈을 감는, 계산이 안 되는 국민들이라면 더 당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사법제도, 금융감독 제도, 언론과 정치는 부산저축은행 금융마피아들에 의하여 농락되고 무장해제 되고 일부는 共犯이 되었다. 이 마피아들을 금융업에서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두 차례 드러났던 부정
예컨대,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은 2002년에도 대규모 주식時勢 조작 등을 벌인 혐의로 2004년 10월18일에 부산지방법원(판사 김동진)으로부터 실형을 선고 받았다. 증권거래법위반, 商法(상법)위반,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 적용된 관련자들은 박연호(부산저축은행 최대주주), 김후진(부산2상호저축은행 감사), 강성우(부산상호저축은행 감사), 염공헌(현대페인트공업 대표이사), 김양(부산상호저축은행 대표이사)이었다. 이 5명은 모두 광주-전남 출신이다.
부산지방법원 김동진 판사는 <피고인 박연호를 징역 1년에, 피고인 김후진을 징역 8월에, 피고인 염공헌을 벌금 10,000,000원에, 피고인 주식회사 부산상호저축은행을 벌금 30,000,000원에, 피고인 현대페인트공업 주식회사를 벌금 10,000,000원에 각 처한다. 김후진에 대하여 이 확정판결로부터 2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피고인 강성우에 대해여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 피고인 김후진에게 12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한다>는 주문의 판결을 내린다.
박연호, 김후진, 강성우, 염공헌은 <부산상호저축은행의 주식거래량이 발행주식수 대비 1%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으로 너무 적어서 2002년 8월1일 경 코스닥등록위원회로부터 투자 유의 종목으로 지정되는 등 자본의 원활한 조달에 문제가 생기자, 2002년 12월 경 유상증사를 실시하기로 예정하는 한편, 그 사이의 2-3개월 동안 차명계좌 등 총 19개의 증권계좌를 이용하여 위 은행 주식에 대한 時勢(시세)조종을 감행하여 株價(주가)를 끌어올리고, 有償(유상)증자 실시 당시 주식시세가 높은 수준으로 형성되게 하는 등 시세차익을 공모한 혐의(판결이유로 지목된 범죄사실 요약)"로 유죄 및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다. 박연호, 김후진, 강성우에겐, "현대페인트공업을 인수한 다음 제3자에게 매각하여 시세차익을 취득하기로 마음먹고, 위 회사의 주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차명계좌 등 총 15개의 증권계좌를 이용하여 위 회사 주식에 대한 시세조종을 감행하여 주가를 끌어올리기로 공모한 혐의"가 적용되었다(박연호는 2심에서 집행유예형으로 감형됨).
부산저축은행의 피해자대책위원회의 김옥주 위원장은 "2004년 박연호(부산저축은행 회장)의 금융비리와 2008년도 김양 부산저축은행 대표이사의 영남알프스 사건만 사법부가 엄정하게 처리를 하고, 이를 언론들이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알렸어도 부산저축은행의 금융사기꾼들은 이렇게 큰 피해를 부산서민들에게 입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산저축은행 그룹의 김양 부회장 등은 2008년엔 영남알프스컨트리클럽(골프장) 건설과 관련된 금융부정(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으로 또 다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는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울주군에 골프장을 짓겠다고 부산저축은행 예금 수백 억 원을 대출형식으로 빼돌려 투자한 사업이 본질적으로 사기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김양 등에 대한 기소장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사업타당성 검토를 전혀 하지 않았고, 여러 법규에 의하여 골프장 허가를 받을 수 없는 곳이란 사실을 무시하였으며, 2005년7월13일에 골프장 허가신청이 최종적으로 반려된 뒤에도 투자를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이 수사를 통하여 이 은행의 금융사기 수법을 파악한 검찰은, 금감원에 알렸으나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의혹이 있다. 이 사건 수사 자료엔 부산상호저축은행, 부산2상호저축은행 임직원 일동 이름으로 낸 탄원서가 붙어 있다.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의 正體가 은행이란 이름을 건 금융사기단이었다는 점에 유념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금융사기단에 준 ‘최우수 사회공헌 대상’
<저희 임직원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고, 덕분에 2006년 업계 최초로 ‘저축의 날’에 국무총리 표창수상과 함께 ‘최우수 사회공헌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07년 서민금융 최우수경영대상인 재정경제부장관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부산2상호저축은행은 2007년 대통령 표창인 ‘성실납세 포상증’과 부산광역시장으로부터 ‘성실납세 표창증’을 수여 받았습니다.>
<저희 은행은 사회를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 은행은 2008년까지 한국예술종합대 문화 컨텐츠 지원을 위해 6억 원, 인문학 지원을 위한 인디고 청소년 북 페어 후원금으로 5억 원, 정산장학재단에 3억 원을 기부하여 742명의 불우학생들에게 장학금 지원, 통영 윤이상음악제에 4억 원 지원, 전남대학교 호남학 연구소에 1억 원, 전남 대학 경영대학에 1억 기부와 향후 매년 1번씩 총 5억 기부 예정, 전라도 눈피해 성금 1억 원 지원, KBS 불우이웃돕기 1억 원, 통도사 영산전 벽화보존을 위해 5,000만 원 지원, 한국과학영재학교 장학후원금 3,000만 원 등 지역사회의 복지, 문화, 영호남 화합, 한국문화 선양 등을 위하여 다양한 지원 사업을 진행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후원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정부가 수여한 ‘서민금융 최우수경영대상’은 금융사기단에 날개를 달았을 것이다. 부산저축은행 그룹은 7조원을 대출하였는데, 5조3400억 원은 대주주(경영진)에게 대출한 것이고(불법), 일반인 합법 대출은 1조6600억 원에 불과하였다. 서민 예금을 받아 경영진(대주주)이 갈라먹은 것이다. 이게 재정경제부장관이 준 ‘서민금융 최우수경영대상’의 正體(정체)인 것이다. 이런 상은 예금자들을 속이는 데 활용되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준 ‘최우수 사회공헌대상’은 수많은 서민들의 눈물어린 돈을 사취하여 한국사회를 멍들게 하는 데 보조 도구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 은행의 규모로 볼 때 사회 기부금의 액수가 너무나 크다. 예금자의 눈물 어린 돈을 詐取하여 선심을 쓰고, 이로써 형성된 이미지를 사기에 이용한 것이다.
2009년과 2010년 부산 및 부산 제2 저축은행은 1조3000억 원의 적자를 봤는데도 3660억 원의 흑자를 봤다고 국세청에 허위보고를 하였다. 이 허위보고에 근거하여 경영진 4명은 배당금 상여금 등의 명목으로 63억 원을 받아 챙겼다. 알 카포네의 은행 강도는 이들에 비교하면 양반이다. 알 카포네보다 못한 범죄집단에 ‘성실납세 포상증’과 ‘성실납세 표창증’을 준 공무원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사기단의 손실까지 정리해준 정부
2009년 4월29일 부산저축은행의 영남알프스 골프장 사업 관련 비리를 수사 중이던 울산지방검찰청(담당 검사 趙柱衍)은 사기대출로 인한 不實채권까지 자산관리공사가 高率(고율)로 매입해준 데 따른 혐의를 잡고 자산관리공사 직원들을 불러 신문하였다. 검찰은, 이 은행의 불법행위로 인한 부실까지 정부가 나서서 정리해준 데 의혹을 품었을 것이다.
<문(검사측): 부실채권을 인수하기 위한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는가요?
답(자산관리공사 직원): 자산공사 자본금, 차입금, 社債(사채)발행 등의 방법으로 조달합니다. 참고로 2009년 1월30일 기준으로 자산공사 자본금이 6600억 원입니다.
문: 인수 경위가 어떤가요?
답: 2008년 12월3일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의 저축은행 PF 대출 사업장 실태조사 결과 및 대책에 따라 두 차례 인수하였는데 1차는 발표 후부터 2009년 12월29일 까지 상호저축은행 중앙회와 매입대상 채권의 기준을 협의하여 대상 채권을 취합한 자료를 토대로 2008년 12월30일 약 5000억 원 규모로 부실채권을 매입하였고 두 차례 2009년 2월부터 3월 중순 경까지 대상 채권을 취합하여 2009년 3월18일 약 1조2000억 원의 부실채권을 인수하였습니다.
문: PF 대출채권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요?
답: 저희 자산공사에서 제시한 매입전제 조건이 상호저축은행의 PF 대출 채권이고 그 기준에 따라 상호저축은행 중앙회로부터 제출받았기 때문에 PF 대출채권으로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문: 부산저축(1, 2)은행은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하는 등으로 직접 투자 사업을 하다가 발생한 채권으로 PF 대출이 아니라고 한다면 자산공사에서 위 부실 채권을 매입했을까요?
답: 매입 당시에 PF 대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자산공사에서 매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매입조건이 PF 대출 채권인데 대출 채권이 아니라고 한다면 매입기준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매입할 수도 없습니다.
문: 매입가격은 어떤가요?
답: 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1차는 채권금액의 약 56% 정도의 금액이고 2차는 채권금액의 약 85% 정도의 금액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매입대금은 언제, 얼마를 지급하였나요?
답: 매입대금은 각 계약 당일 公社債로 지급하였는데 유통되지 못하도록 모두 質權(질권) 설정하여 저희 자산공사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금융감독원, 자산관리공사, 저축은행 중앙회의 결탁
검찰은 수사를 하던 중 어마어마한 부정을 밝혀냈다. 금감원과 자산관리공사와 저축은행 중앙회가 합작한 일괄적인 저축은행의 이른바 PF 대출(부동산 개발 사업에 대출한 것) 不實(부실) 채권 매입과정에서 부산저축은행의 ‘가짜 PF 대출 채권’(장부價 약870억 중 약420억원)까지 매입해준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즉 자산관리공사가 장부價의 50~ 85%로 매입해준 부산저축은행의 부실채권은 진짜 PF 대출이 아니라 이 은행의 경영진이 남의 이름을 빌어 세운 가짜 회사에 대출해준 것인데(즉 경영진이 대출인 것처럼 위장, 직접 사업용 자금으로 빼돌린 것), 이 사업에서 부실이 나자 자산관리공사가 나서서 사기대출 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부실채권을 매입해준 것이다. 자산관리공사 직원은 검찰 신문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상호저축은행 중앙회로부터 (서류를) 제출받았기 때문에 PF 대출채권으로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라고 변명하였다. 眞僞(진위)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실토였다.
울산지검은 다음날 부산저축은행 강성우 감사를 불러 위장 대출로 인한 부실채권을 자산관리공사에 불법적으로 넘긴 경위를 추궁한다.
<문: 자산공사에 매각한 부실채권은 모두 PF 부실채권인가요?
답: 아닙니다. 1차 매각분은 모두 PF 대출이고, 2차 매각분은 외관상으로 PF 대출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저희들이 법인을 설립하여 직접 골프 개발 사업을 하면서 발생한 것들인데 해당업체에서 PF 대출받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강 감사는 PF 대출이 정상적인 부동산 사업 대출이 아니고 은행 경영진이 대출인 것처럼 위장, 예금을 빼돌린 것임을 솔직하게 시인한 것이다. 울산지검은 2009년 5월4일 부산저축은행 안아순 감사를 불러 더 구체적으로 신문하였다.
<문: 저축은행 자체적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절차가 있는가요.
답: 네. 상호저축은행 감독업무시행세칙의 자산 건전성 분류기준에 따라 正常(정상) 채권, 요주의 채권, 고정 채권, 회수 의문 채권, 추정 손실 채권, 등으로 나뉘는데 추정 손실 채권의 경우 貸損(대손)충당금으로 상각 처리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번처럼 정부시책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문: 강성우는 진술인과 상의하였다고 하는데 상의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답: 강성우가 자산관리공사에서 PF 대출 중 부실화 된 것을 매입해 준다는데 영남알프스 대출 건도 PF로 되어 있으니 이것도 자산공사에 넘기는 것이 어떠냐고 해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문: 겉으로는 PF 대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상으로는 저축은행이 대출형식을 빌어 직접 골프장 개발 사업을 하다가 발생한 PF 대출이라고 하였는데 무슨 뜻인가요?
답: 그것은 IMF 이후 부실채권이 많이 발생하여 이를 정리하기 위하여 골프장 개발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는데 금융관련 법상으로 금융기관인 저희 은행이 직접 收益(수익)사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 골프장 개발 사업을 할 법인을 세우고 저축은행은 위 법인에 대출해주는 것처럼 하였으나 실제로는 저희 은행에서 직접 법인을 운영하면서 사업을 했다는 뜻입니다.
문: 2차 매각분은 저축은행의 자금으로 저축은행이 직접 개발 사업을 한 것이라면 누가 貸主(대주)이고 누가 借主(차주)인가요?
답: 겉(서류상)으로는 貸主(대주)가 저축은행, 借主(차주)가 골프장 개발 사업을 하기 위해 설립된 법인과 법인이 설립되기 이전의 일부 개인들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貸主(대주) 및 借主(차주) 모두가 저축은행인 꼴입니다.
문: 그럼 대출이 아니지 않은가요?
답: 실질적으로 보면 대출이 아닌 것이 맞습니다.
문: 손실(대출 형식을 빌어 집행된 돈이 회수가 안 되는 경우)이 나면 어떻게 조치하여야 합니까?
답: 貸損(대손)상각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상각처리하려면 금융감독원의 승인 등 절차가 복잡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마침 정부에서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정부시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매각 요청한 것입니다.>
서류검사만으로 수백 원어치를 매입한 금감원
안아순씨는 “이번처럼 정부시책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한 사례는 없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당시 부산저축은행은 公示(공시) 지표상 최우량 은행이었다. 그런데 왜 자산관리공사가 나서서 이런 은행의 부실채권까지 국가부담으로 매입해주었을까? 안씨도 놀란 모양이다. 더구나 정부는 PF 대출로 인한 부실채권을 매입, 저축은행의 도산을 막아준다는 취지로 정책을 결정하였는데, 부산저축은행은 이를 악용, PF 대출로 위장한, 경영진의 예금 빼돌리기로 발생한 빚(부실채권)까지 그것도 高率로 자산관리공사에 팔아넘긴 것이다. 이때 매도한 부실채권의 장부상 액수는 약444억원이고, 매입비율은 약80%였다. 부산저축은행이 公社債(공사채)로 받은 금액은 355억원이었다. 금융사기단의 손실까지 국가가 자상하게 챙겨준 꼴이다.
5월6일 울산지검은 부산저축은행 부회장 김양씨를 불러 신문한다. 김씨도 "이번처럼 정부시책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한 사례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듯한 표현을 하였다. 저축은행 검사를 오래 한 崔鍾峯(최종봉) 전 금감원 반장은 여러 차례 "저축은행(그것도 우량은행)의 부실채권을 자산관리공사가 매입해주는 것은 屍身(시신)을 만져야 할 장의사가 의사행세를 하면서 수술을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문: 마치 정상적인 PF 대출인 것처럼 자산공사에 서류를 접수시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김양): 서류상으로 대출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 시책에 따라 은행의 자산 건전성 확보를 위해 강성우 감사가 매각결정을 한 것입니다.
문: 저축은행이 영남알프스에 대출해준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저축은행에서 직접 개발 사업을 하다가 발생한 손실임에도 대출이라고 답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 강성우 감사가 금감원의 검사에 대출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고, 제 생각에도 직접 투자 사업을 했다고 하면 저축은행 관련법령에 따라 무거운 행정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저축은행에서 영남 알프스에 대출해 준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 외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문: 진술인을 비롯한 저축은행의 임원들은 수사과정 및 법정에서는 본건 자금 집행 성격에 대해 투자라고 하면서도 금융감독원의 검사에 대해서는 대출이라고 하고 자산관리공사에는 마치 대출채권인 것처럼 하여 부실채권을 매각하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감독원에서는 대출서류 중심으로 검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고, 자산공사에 대하여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양이, 재판정에선 이 사업에 들어간 돈이, 가짜 회사를 만들어 여기에 대출한 것처럼 속인 것이라고 실토해놓고, 금감원에는 정상적인 대출인 것처럼 허위 보고(PF 부실채권으로 분류), 자산관리공사에 팔아넘기기까지 한 과정이 확인된 것이다. 김양은 금융감독원에서 서류 검사만 하였으므로 이런 속임수가 통할 수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금융비리의 파수꾼이 400억 원대의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데 형식적인 서류검사만 하였단다. 검사 직원이 전화 한 통만 하였더라면 부실채권의 불법성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금감원 등이 고의로 저축은행의 비리에 가담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저축은행 중앙회가 부실채권 매입과 관련, 전국의 저축은행에 통보한 안내문엔 <회계법인 실사를 생략하고 장부가액으로 매입>이란 대목이 보인다. 금융감독원이 채권과 액수의 眞僞(진위) 확인을 생략하고 장부가액을 믿고 일률적인 매입비율을 적용한다는 이야기이다. 자산관리공사가 이런 식으로 매입해준 저축은행 부실 채권은 약5조 원 규모라고 한다. 신도시 몇 개를 지을 수 있는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공돈 쓰듯이 이렇게 허술한 짓을 한 것은 고의성이나 犯意(범의)가 있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당시는 김양 등 경영진이 영남 알프스 골프장 사업과 관련한 不法행위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였다. 김씨는, 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 나 있는 동안에 또 다른 불법행위(가짜 PF 채권 매도)에 관련하였다. 이들이 사법기관을 얼마나 우습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행태이다.
이 부정의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다.
1. 부산저축은행은 법적 규제로 부동산 개발 투자를 할 수 없음에도 가짜 회사를 세워 여기에 대출해주는 것처럼 위장, 골프장 사업을 직접 하다가 수백억 원대의 손해를 보았다.
2. 금감원, 저축은행 중앙회, 자산관리공사는 저축은행이 불법 대출로 생긴 부실 채권을 高率(고율)로 매입해주는 수상한 정책을 집행한다. 부산저축은행처럼 우량은행으로 公示(공시)된 은행의 부실까지 덜어주는 전례 없는 특혜를 준다.
3. 이런 특혜를 줄 경우엔 문제의 부실채권이 정상적인 대출로 인한 것인지 사기대출로 인한 것인지 가려야 하는데 금감원 등은 서류검사만 하여 부산저축은행의 사기에 넘어갔다.
유착된 금감원 부국장이 검사반장으로 파견되다
2009년 부산저축은행그룹의 영남알프스컨트리클럽 不法투자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드러난 비리를 근거로 금융감독원에 검사를 요청하였다. 금감원이 검사반장으로 보낸 사람은 이자극 부국장이었다. 그는 지난 5월 大檢 중수부에 구속되었는데, 오랜 기간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에 보도된 혐의내용 요지는 이렇다(구속된 그는 혐의내용을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부터 지난해 말까지: 명절마다 부산저축은행 강성우 감사로부터 100~200만원 정기적으로 상납 받음.
*2002년 10월: 부산저축은행 뒤를 봐주는 대가로 강성우 감사로부터 1억 받음.
*2005년 10월: 처조카 최씨의 사업자금 명목으로 강성우에게 대출 요구, 無담보로 2억2990여 만 원 대출 받음.
*2010년 2월: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예금보험공사와 금감원의 공동조사가 시작되자 강성우는 감사 질문서를 구해달라고 이자극에게 요구, 지적사항이 담긴 감사 질문서(대외비로 분류)를 강성우에게 등기우편으로 보내줌.
이자극 부국장은, <2009년 2~3월 검사반장을 맡아 부산상호저축은행에 대한 부문검사를 시행하게 됐는데, 강성우 감사로부터 ‘검찰에서 문제된 SPC의 주주 및 임원들은 내용을 모른다.향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할 테니 이번 검사에서 내용을 문제삼지 말고 은폐해달라’는 취지의 청탁을 받고 대손충당금 646억여원이 과소 적립된 사실을 숨기는 등 직무유기를 했다>(한국경제신문)고 한다.
"법원의 송방망이 형량이 사건을 키웠다"
국제신문은 영남알프스컨트리클럽 사건 2審(심)에서 부산저축은행 경영진의 형량이 대폭 낮아진 데 의혹을 제기하였다. 배임과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박연호 회장 등 대주주·경영진이 2審에서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양 부회장만 뇌물공여 혐의가 인정됐지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1심(징역 4년)보다 대폭 감형되었다(현재 대법원 계류중). 이 신문은 부산저축은행 前 직원의 傳言(전언)을 소개하였다.
“2009년 울산지검 특수부가 담당했던 골프장 사업 비리수사와 관련해 대주주ㆍ경영진이 刑量(형량)을 낮추기 위해 검찰 쪽에도 접촉했다. 당시 두 명의 정치권 인사가 은행 측과 거래를 시작했으며 서로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들이 검찰 윗선과 접촉했는데 담당 검사가 오히려 더 세게 수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거론된 두 사람은 부산지역 정치권에서 활동해 온 박 모 씨와 호남 지역 정치권에서 친분을 맺어온 또 다른 박 모 씨라고 국제신문을 전했다. 국제신문은 <로비가 금융당국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고 했다.
김옥주씨(부산저축은행 사건 비상대책위 위원장)는 "그동안 검찰은 부산저축은행의 범죄에 대하여 성실하게 조사하고 끈질기게 기소하였는데 판사들이 그때마다 솜방망이 처벌을 하여 대형 사건으로 키운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두 차례의 수사와 재판을 통과하였는데, 국가가 再犯-3犯을 막지 못한 책임은 법원도 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10년간 깊어만 간 부산저축은행 非理가 제대로 알려지고, 응징 받지 않도록 작동한 거대한 비호세력이 벽처럼 버티고 있었고, 막강한 검찰도 이 앞에선 無力한 존재가 된 셈이다.
검찰이 밝힌 요지경
大檢 中搜部는 부산저축은행 사건 중간 발표 자료에서 <상호저축은행은 미처 제1금융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서민, 중소기업 등에게 대출을 해 줌으로써 서민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업무범위는 예금 및 積金의 수입, 자금 대출, 어음할인 등 자금 중개 행위로 엄격히 한정되고, 부동산 투자나 제조업 진출 등 직접 사업을 영위하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허용되지 아니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부산저축은행은 부동산 개발을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수사 결과 <부산저축은행그룹의 실체는 전국 최대 규모의 시행사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서민용 금융을 하라고 허가를 내주었더니 PF 대출로 위장, 건설회사 행세를 하고 있더란 이야기이다. 金監院(금감원)이 이런 불법을 눈감아 준 때문이다.
부산저축은행은 적법 대출임을 위장하기 위하여 120개 SPC(특수목적법인)를 설립, 각종 사업을 직접 운영하였는데 실태를 점검해보니 고객 돈을 빼돌리기 위한 투기판 내지 사기극이었다. 2006년 5월부터 작년 10월까지 고객 예금 4조 5942억 원을 SPC에 쏟아 부어 직접 개발 사업을 운영한 것은, <사업이 실패하면 예금자들이 손해를 부담하고, 사업이 성공하면 대주주 등이 그 수익을 챙겨가는 ‘밑져야 본전’식의 무책임한 사업 추진이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SPC는 저축은행으로부터 불법대출을 받아 법이 금지하는 부동산 개발업을 하기 위하여 만든 가짜 회사이다. 검찰은 <처음에는 직접 임직원 知人들의 借名(차명)으로 SPC를 설립하다가 2004년경부터는 컨설팅 회사, 공인회계사 등의 도움을 받아 총 120개의 SPC를 설립하고 全國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각종 투기적 개발 사업을 벌임으로써 도저히 금융기관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했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해야 할 회사가 서민예금으로 투기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상 유령회사인 120개의 SPC는 부산저축은행 영업 1~4팀 직원들이 법인 인감, 통장 등을 관리하며, SPC의 임직원을 추천하는 등 실질적으로 직접 지배하였다.
이 유령회사 운영은,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SPC가 대주주 측과는 무관한 독립된 사업체인 것처럼 위장하여 천문학적인 금액의 대출을 받음으로써 대주주 등에 대한 신용공여 금지 위반행위를 은폐한 것이다>고 검찰은 확인하였다. 대주주의 私金庫(사금고)로 전락하기 쉬운 저축은행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상호저축은행법에서는 대주주 등에 대한 대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부산저축은행은 SPC 설립 과정에서 명의만 빌린 SPC 대표이사 등 임원들에게 월 50~200만원 상당의 급여 및 4대 보험료를 지급하고, 사무실 임대료 등 法人 운영비로 월 150~200만원 사용하는 등 SPC별로 월 1,000만 원 정도의 쓸데없는 비용을 지출함으로써 불법을 감추기 위한 비용으로 연간 130~150억 원 가량을 낭비하였다. 필자가 금융사기단이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불법인 SPC의 사업내용을 보면, 골프장, 아파트 등 건설업 83개 업체, 해외개발사업 10개 업체, 선박사업 9개 업체, 금융 관련 6개 업체, 기타 12개 업체 등으로서 부산저축은행은, 고유 업무는 뒤로 한 채 재벌처럼 문어발식 직접 투자사업만 확장해 왔다.
가짜 회사 유지비로 연간 150억 원 지출
시작부터 사업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추진되었고, 16명에 불과한 전문성 없는 은행 직원들이 120개에 이르는 SPC를 관리한 결과, 대부분의 SPC들은 관련 인허가 지연 혹은 자금부족 등으로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부산저축은행그룹의 돌려막기식 대출에 의해 간신히 연명할 뿐이었다. 작년 12월 말 기준 SPC 120개 중 사업을 완료하거나 인허가를 받아 施工(시공)에 들어가는 등 사업이 진행 중인 업체는 21개에 불과하고, 나머지 99개 업체는 정상적인 사업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사기목적의 사업이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나마 부산저축은행그룹 계열은행들이 영업 정지된 2월19일 이후로는 더 이상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해 대부분의 사업이 사실상 정지된 상태라고 한다.
부산저축은행 그룹의 계열은행 與信(여신) 총액 7조원 중 약 5조3,400억 원 가량을, 직접 사업 추진을 위해 SPC 및 대주주 등에게 불법 대출하고, 그 외 일반인들에게 대출된 것은 약1조 6,600억 원에 불과하다. 부산저축은행은 경영진이 돈을 빼먹기 위하여 설립한 범죄 조직으로서의 임무를 75%, 본연의 임무를 25%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사건이 터진 뒤에도 금융당국이 저축은행의 PF 대출이 진짜인지, 사기인지를 구별하여 구제책을 마련하려 하지 않고, 천문학적인 추가 公的 자금 투입을 결정한 점이다. 부산저축은행 등 다섯 개 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이후 진행된 大檢 중수부 수사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금감원 간부는 10명이다. 새로운 저축은행의 부도사태가 발생하면 금융당국자 중에서 추가 구속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태를 막는 방법은 저축은행을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兆(조) 단위의 국민세금을 투입하는 길밖에 없다. 이를 막아야 할 법 집행기관(국회, 금융감독기관 등)과 여론 형성 기관(언론, 사회단체 등)엔 저축은행 금융마피아들의 오랜 비호세력이 포진하여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악질적이고 큰 권력형 부패사건 수사가 대통령의 분노나 검찰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축소지향으로 가는 느낌마저 든다. 금융마피아+비호권력=범죄카르텔의 구조적 힘이 대통령보다 세다는 한 前職 금감원 간부의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광주일고 출신 금융마피아들이 뇌물을 銃口(총구)처럼 이용, 자본주의와 법치주의에 정면 도전한 일종의 大逆罪이다.
※ 현재 이자극은 구속수감 되었으며.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짐.
한국경제신문 기사 全文 (2010년 5월30일字)
금융감독원 부국장이 10년 가까이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명절 때만 되면 100만~200만원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이 부국장은 대가로 분식회계를 덮어주고 감사 내용 등 대외비를 유출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검사장 김홍일)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뇌물)과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이자극 금감원 부국장 검사역(52)을 구속기소했다고 30일 밝혔다.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지난해까지 10년 가량 매년 설과 추석 명절 무렵마다 부산저축은행 감사 강모씨로부터 100만~200만원을 받았다.2006년10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최근 5년 동안 ‘앞으로 부산저축은행그룹 계열 은행을 검사함에 있어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해주고 편의를 봐달라’는 취지로 받은 돈만 총 1800만원으로 집계됐다.
그는 또 앞서 2002년 부산저축은행 감사 강모씨에게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1억원을 달라.금감원 검사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관리·감독 업무와 관련해 여러가지 배려를 해주겠다’는 취지로 금품을 요구해 같은해 10월 박연호 부산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서울 반포동 팔래스호텔 옆 공터에서 현금 1억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대출에 있어서도 특혜를 받았다.그는 2005년10월 강씨에게 “처조카 최씨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나를 믿고 무담보 신용대출 형태로 3억원을 대출해달라.향후 금감원 관리·감독 업무에 각종 편의를 봐주겠다’는 취지로 요구했다.이에 강씨는 최씨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사업으로 인한 수익은 얼마인지,담보로 제공할 수 있는 동산과 부동산은 없는지 등을 전혀 알아보지 않고 2005년10월 무담보로 최씨에게 2억9900만원을 신용대출해주고 2006년9월부터 2008년10월까지 이자 2200만원도 신규 대출금으로 대납했다.
이씨는 이처럼 뇌물을 받은 대가로 부산저축은행의 비리를 눈감아줬다.울산지검이 2008년8월 골프장 건설 시행을 위한 특수목적법인(SPC)인 영남알프스컨트리클럽이 부산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받은 수백억원 규모의 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의 적법성 여부에 관해 수사에 착수해 비리를 밝혔다.검찰이 이후 금감원 상호저축은행 서비스국장에게 검사를 요청해 이씨가 2009년2~3월 검사반장을 맡아 부산상호저축은행에 대한 부문검사를 시행하게 됐다.이씨는 그러나 강씨로부터 ‘검찰에서 문제된 SPC의 주주 및 임원들은 내용을 모른다.향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할 테니 이번 검사에서 내용을 문제삼지 말고 은폐해달라’는 취지의 청탁을 받고 대손충당금 646억여원이 과소 적립된 사실을 숨기는 등 직무유기를 했다.
이씨는 금감위 비밀을 빼내 부산저축은행에 넘겨준 혐의(금융위법 위반)도 받고 있다.감사원이 2010년2월 금감원과 예금보험공사에게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공동검사를 실시토록 조치하자 강씨는 이씨에게 공동검사의 배경을 물었다.강씨는 이씨가 감사원 금융기금감시국에서 금감원 양모 부원장에게 보낸 감사질문서의 답변 내용을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감사질문서를 요청했고,이에 이씨는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지적사항이 드러나 대외비로 분류된 감사질문서를 등기우편으로 보내준 것으로 조사됐다.
선명한 자유 이념 정당으로 창당된 '한국판 자민당'은 한나라당뿐 아니라 좌경화한 민주당도 오른쪽으로 끌고 올 수 있다. 從北정치세력까지 헌법의 울타리안으로 다시 끌어들이고 자유통일의 주도세력이 될 수 있다.
보수층이 오는 두 차례 선거를 호기로 삼아 한국판 자민당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영원히 乙의 입장이 되어 좌익 정상배로부터는 공격을 당하고 중도 정상배로부터는 배신을 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독일의 자민당이 그러하였듯이 한국판 自民黨도 대한민국 정통세력의 힘을 모아 자유통일 주체세력을 길러내는 역사적 임무를 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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