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사 및 학생용 참고자료(3)

교과서 집필기준 및 선진국의 역사 교과서 논쟁사례

1. 憲法과 理念을 외면한 교과부 ‘歷史교과서 집필기준’

 

집필기준 대한민국 헌법정신과 이념문제 원천적 배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업적 폄하

憲法에 의한 대한민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원칙 배제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은 교과서 著者(저자)들이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가이드라인’으로 현행 기준은 2007년 7차 교육과정이 수정-고시되면서 마련됐다.

 

교과부는 새로운 집필기준의 특징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내용을 강화하고, 건국과 국가발전 과정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총 18페이지(세계사 영역제외) 분량의 집필기준은 크게 전반적인 역사 서술 지침을 밝힌 총론 성격의 ‘서술방향’과 시대별 서술에서 지켜야 할 점을 정리한 ‘各論’(각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理念을 배제한 집필기준 ‘서술방향’

 

서술방향은 총 10개 항목으로 이 가운데 문제가 되고 있는 항목은 4항과 7항이다. 각각의 항목은 “특정이념이나 역사관에 편향되지 않고 우리 역사를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한다”, “학문적, 교육적, 이념적으로 논란이 많은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에 대한 평가보다는 객관적 사실 중심으로 서술한다”고 摘示(적시)하고 있다.

 

언뜻 보면 두 조항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집필기준의 이 같은 서술방향은 대한민국 憲法精神(헌법정신)과 이에 따른 이념문제를 원천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의 지위를 對等的(대등적) 관계로 배치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역사교육에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된 관점이 전제되어 있을 때 局限(국한)되는 원칙이다.

 

주된 관점이 잘못 설정되어 있거나 흔들리는 경우에는 이러한 원칙 자체가 설정될 수 없다. 여느 사회든 이념, 계층, 지역, 성별, 종교 등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또 역으로 사회를 다양하게 하며 긴장시키고 나아가 역동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차이를 크게 묶는 틀이 없다면 그 사회는 안정될 수 없으며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작은 차이들을 묶는 큰 틀이 바로 國家와 國益이고,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傳統과 文化이며 그리고 그 사회를 규율하는 憲法과 法律이다.

自國史 교육은 국민통합을 위한 국민의식 형성을 기본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第1國是(국시)는 이념적으로 反共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의 입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李承晩-朴正熙의 부정적 측면 강조

 

서술방향과 관련된 문제점과 더불어 집필기준은 各論 제8장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부분’에서 ‘대한민국의 수립’, ‘6.25 전쟁’,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시련’, ‘6월 민주 항쟁과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 개발과 자본주의 발달’, ‘사회 문화의 변화’, ‘북한 사회주의의 변화’, ‘대한민국의 통일 정책과 평화 통일 문제과제’ 등 8개 항목에 대한 서술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1) 구체적으로 집필기준은 各論의 ‘대한민국의 수립’ 부문에서 “광복 직후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와 관련된 미국과 소련에 대한 서술에서 특정국가, 특정이념에 치우친 편향된 시각은 지양하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특정국가, 특정이념에 치우친 편향된 시각은 지양하라는 집필기준은 그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 미국의 국가이념은 자유민주주의이며 소련의 이념은 공산독재이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토대로 건설된 나라이다. 북한 정권은 소련을 따랐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교과서는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긍정적이고, 소련과 공산주의에 비판적이야 한다. 특정국가나 특정이념에 치우친 편향된 시각을 지양하란 말은 객관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좌경적 필진은 이를 우방국과 敵國, 한국의 국가이념과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의 이념을 놓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것이다. 祖國의 국가이념과 우방국을 높이지 말고 敵國과 공산주의를 너무 비판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敵과 我, 善과 惡 사이에서 중립하라는 뜻이다. 李明博 정부의 중도노선과 비슷하다.

 

이와 함께 집필기준의 各論은 대한민국 건국의 핵심 지도자인 李承晩이 참여하거나 주도한 애국-민권-독립 운동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단지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한다. 또한 UN의 결의에 따른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UN에 의해 합법 정부로 승인되었음을 강조한다”고 간략하게 기준을 제시했다.

 

제대로 된 나라의 공무원이라면 “대한민국의 建國 과정을 집필함에 있어서 建國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북한정권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사실에 기초하여 분명히 함으로써 학생들이 자유민주 체제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갖도록 기술해야 한다”고 집필기준을 기록했어야 했다.

 

國史 교과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학생들이 국가와 체제에 대하여 긍정적 생각과 애국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공산주의를 상대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死活을 걸고 대결하는 조건에서 국가가 國史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와 우방국에 대한 확신과 긍정적인 평가를 제외하도록 명령한 것은 自我상실과 자기부정의 극치이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을 기술하는 집필기준이라면 아래와 같은 항목이 추가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 대신 ‘건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건국에 앞서 ‘총선거’, ‘국회구성’, ‘헌법제정’, ‘정부수립’의 과정을 거쳤다. 정부수립은 건국의 마지막 단계이다. 새로 발간된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좌파성향 필진들은 대한민국 ‘건국’이란 표현을 배제함으로써 헌법상 반(反)국가단체인 북한을 남한과 동일선상에 놓았다. ▲대한제국 말기의 선각적 애국-민권-계몽운동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을 소개해야 하며, 李承晩이 이들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이들 활동으로 인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사실을 서술해야 한다. ▲3.1운동 직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주 지역 동포들의 독립촉구 대회와 행진 등을 소개하며, 그 주도자 2인 중 한 사람이 李承晩이었음을 언급하도록 해야 한다. ▲1920~1930년대 해외 각지의 다양한 세력의 독립운동을 소개함과 동시에 이 시기 李承晩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소개해야 한다. ▲2차 대전 발발 후 미주 동포들의 독립운동을 서술하면서 李承晩의 관련 활동을 소개해야 한다. ▲李承晩의 대표적 외교 활동인 신탁통치반대, 단독정부수립추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소개한다.

 

집필기준은 또 대한민국의 건국과 관련, 대한민국의 건국-유지-발전을 방해한 북한과 남한 내 좌익세력들의 방해책동에 대한 서술기준을 아래와 같이 추가해야 한다.

▲1920년대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세계 공산화를 목표로 한 것임을 지적한다.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를 소개하고, 그것이 소련공산당이 제공한 공작금을 사용해 개최됐으며, 공산당의 임시정부 와해공작 음모와 연관된 것이었음을 소개한다. ▲신간회 관련 서술에서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신간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신간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자 그것을 와해시켰다는 사실을 밝힌다. ▲일제치하 노동자 농민 운동과 공산주의자들 간의 연결 관계를 언급한다. ▲미국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을 서술하면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마자 일방적으로 38선을 봉쇄, 한반도를 분단의 길로 몰아넣은 점을 소개한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당시 북조선 공산당이 정립한 ‘북조선 민주기지론’을 소개해야 한다. ‘북조선 민주기지론’은 북한의 대남정책의 기조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항이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서술하고, 그와 관련된 북한 정권의 동향에 대해 언급한다. 이를 통해 평양에서의 남북협상회의에서 채택된 문서들의 내용이 사실상 ‘공산화 통일’을 지지하는 것이었음을 소개한다.

 

2) 집필기준은 각론의 ‘6.25전쟁’ 부문에서 북한의 남침 사실과 함께 전쟁의 처참한 피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국군이나 국민의 노력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이 UN군의 활약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6.25전쟁과 관련된 집필기준은 반드시 안보교육의 요건을 명확하게 서술해야 한다. 즉 6.25전쟁은 북한에 의한 ‘불법적인 남침’이며, 여기에 대항해 국군과 學徒兵(학도병) 그리고 UN군이 나라를 지켰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 공산군의 정체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어서 국민의 반공의식(反共意識)이 더욱 굳어졌고, 나아가 戰後(전후)에도 안보를 위해 집단안전보장 훈련,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의 노력을 했음을 명시해야 한다.

 

특히 남다른 용기와 결단력으로 미군의 신속한 6.25전쟁 참전 결정을 내린 트루먼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을 소개해야 한다. 아울러 대한민국은 李承晩 대통령의 영도아래 반공포로 석방 등을 통해 끝까지 休戰(휴전)에 반대했음을 소개해야 한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들을 자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UN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취해진 조치로 李承晩 대통령의 가장 훌륭한 외교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3) 집필기준은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시련’에서 “4.19 혁명은 장기 집권을 위한 李承晩 정부의 정치적 탄압과 부정 선거 등에 맞서 일어났음을 설명하고, 그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 한계를 서술한다.”, “李承晩 또는 李承晩 정부의 역할 서술 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긍정적인 면과 독재화와 관련한 비판적인 점을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기준을 정해놓아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도록 해놓았다.

朴正熙 대통령과 관련해서도 “朴正熙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군사 정부를 세웠음을 기술한다. 이후 두 차례 헌법 개정을 통하여 1인 장기 집권 체제가 성립되었음을 다룬다”고 규정해 놓아 李承晩 대통령과 더불어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어 있다. 建國의 아버지 李承晩과 近代化의 기수 朴正熙에 대한 집필기준의 부정적인 서술방향은 새로 발간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미래엔컬처그룹 발간의 교과서는 李承晩에 대해 ‘야당과 반대세력을 누르고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고 쓰면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국내파를 제거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고 만 했다. 李承晩은 언론-선거의 자유와 의회의 활발한 토의를 인정했지만, 김일성은 독일의 나치, 소련의 스탈린을 능가하는 전체주의 체제를 만들었다는 차이를 설명하지 않았다. ▲6종 교과서의 대부분이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인정한 李承晩 주도의 남한 농지개혁과 그것을 부인한 북한의 토지개혁을 비교하여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으므로 북한의 개혁이 더 성공적이었다고 기술, 세계적 성공사례인 남한을 비판하고, 세계적 실패사례인 북한을 칭찬해 놓고 있다. ▲천재교육 발간의 교과서는 공산당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 ‘농민 저항 운동’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반면 고도성장의 출발점이 된 5.16에 대해서는 “군사독재가 시작되다”는 제목으로 욕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개방에 나서다”라고 터무니없는 선전을 해주었다. ▲朴正熙 대통령이 주도한 ‘새마을운동’이 교과서에서는 維新體制(유신체제) 유지에 이용되고(미래엔컬처그룹), 朴正熙 정부의 지지도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였으며(비상교육), 획일적인 농촌의 모습과 생활양식을 가져오게 했다(천재교육)는 비판을 받았다고 서술해 놓았다.

 

4) 집필기준은 ‘6월 민주 항쟁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소개하면서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와 국민의 기본권 확대를 바탕으로 한 새 헌법이 제정되었음을 기술한다. 이후 독재 정치 아래서 억압되었던 기본권이 점진적으로 신장되었음을 유의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갔음을 서술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집필기준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민주화 운동 세력 가운데 혁명적 학생운동 세력이 침투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1980년대 이후 左傾勢力(좌경세력)의 발호와 이에 따른 理念的 갈등이 심각하게 전개되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대남도발 및 혁명공작과 관련된 사건 배제

 

5) 집필기준은 ‘북한 사회주의의 변화’ 부문에서 “북한의 주체사상 및 수령 유일 체제의 문제점, 경제 정책의 실패, 국제적 고립 등으로 인해 북한 주민이 인권 억압, 식량 부족 등 정치·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서술한다” 정도로 摘示(적시)해 놓고 6.25 전쟁 휴전 후 북한의 대남도발과 혁명공작과 관련된 사건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울러 남북관계를 저해하는 최대 문제인 북한의 핵개발과 이것의 대한민국에 대한 위협의 강도를 언급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집필기준이라면 ‘1.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 ‘미(美) EC-121기 피격사건(1969)’, ‘8.15 대통령 암살미수사건(1974)’,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1983)’, ‘KAL기 폭탄 테러사건(1987)’, ‘천안함 폭침사건(2010)’ 등 북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주요 도발사건과 함께 1999년 연평해전, 2002년 서해교전, 2009년 대청해전 등 북한의 해상(海上) 도발사례를 소개해야 할 것이다.

 

憲法이 규정하고 있는 통일원칙 배제

 

6) 집필기준은 ‘대한민국의 통일 정책과 평화통일 과제’ 부문에서 “남북 사이의 경쟁과 대립이 오랜 동안 계속되고 있다”면서 남북한을 대등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역대 정부 차원의 통일 정책과 민간 차원의 통일 노력을 서술하라”고 해놓아 대한민국 憲法 제4조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중에서 평화적 통일의 관점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통일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통일문제와 관련한 서술에서 대한민국 憲法이 규정하고 있는 통일원칙은 1987년 헌법이후 개정된 모든 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과제는 통일이며, 현행 憲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원칙으로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제5차 및 제6차 에서는 분단현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대결태세의 완화를 강조하는데 포인트를 두고 있으며, 제7차 에서는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간의 화해와 교류협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올해 교과부 검정을 통과한 6종 교과서에서는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강조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의 관점에서 통일정책을 접근하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점이야말로 우리 역사 교과서의 심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교과서 집필기준은 흡수통일을 전제해야 한다. 북한의 3대 세습독재가 무너지고 북한 동포가 결의해 대한민국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憲法 제4조를 제대로 해석하면, 그 내용은 자유통일+평화통일=흡수통일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대한민국 憲法 제4조의 내용은 흡수통일을 하라는 국민적 합의이며 국민의 명령이다. 따라서 교과부도 흡수통일 정책을 집필기준에 명확히 밝히고 이를 추진할 헌법적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게을리 할 때는 憲法상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이 직무를 게을리 한 교과부는j 憲法을 위반한 것이다.

 

세상은 글로벌화 되어가고 다문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모든 다양성을 포괄하는 틀 또한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 기본 틀은 바로 史觀(사관)이며, 그 史觀의 基礎(기초)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이다.

 

 

2. 美國과 英國의 역사교과서 논쟁

 

憲法과 國父 조지 워싱턴을 배제한 美國의 ‘역사표준서’

美보수, 18개월 동안 대대적인 對좌파투쟁 전개

英國, 국가수반이 직접 나서 自國史 긍정하는 역사교육 도입

 

 

■ 護憲 세력의 승리로 끝난 美國의 ‘歷史교과서 논쟁’

 

“조지 워싱턴은 지나가는 인물로 묘사될 뿐이다. 미국 헌법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대공황은 세 차례나 언급된다. 학생들이 토머스 애디슨, 알버트 아인슈타인에 대해 배우지 않게 된다. 전 세계를 보다 낫게 만든 미국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중략) 매카시즘은 19차례나 언급하면서 미국이 자유국가의 방패가 되고자 했던 냉전의 본질은 언급하지 않았다” (美상원 역사표준서 논쟁, 1995년 1월18일 슬레이드 고튼 美상원의원)

 

조지 부시(George Bush) 美 대통령은 1989년 미국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로 만든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역사학을 포함한 5개 교과의 표준서 개발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91년 ‘전국 역사표준서 프로젝트’(National History Standards Project)가 수립되어 초등 및 중등학교에서의 ‘역사교육을 위한 표준서’(이하 ‘역사표준서’, National History Standard) 개발 작업이 추진됐다. 1992년 봄부터 시작된 역사표준서 개발 작업은 당면한 역사교육의 현안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 및 논의과정을 거친 뒤 1994년 완성됐다. 그러나 역사표준서는 출간-공표되기도 전에 미국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애국적 인물들을 누락시키고, 소수의 관점을 지나치게 대변하고 있다면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역사표준서 출간을 위해 거액을 지원했던 린 체니(Lynne Cheney) ‘전국인문학기금’(NEH) 前 의장은 “역사표준서가 정치화된 역사를 통해 반란을 꾀하는 기성학자(좌파)들의 작품”이라고 비판했다. 린 체니의 뒤를 이어 미국의 보수 진영은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역사표준서를 비판하고, 표준서를 작성한 학자들의 정치적 의도를 문제 삼는 등 표준서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역사표준서를 비판한 미국 내 보수인사들의 입장을 요약하면 표준서를 통해 좌파세력이 미국의 역사를 정치화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특히 역사표준서에서 서양문화의 위상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인문주의우파’(The Humanist Right)로 알려진 교육비평가 집단의 윌리엄 베넷, 앨런 블룸, 린 체니, 저투르드 힘멜파브 등의 인물들이 “인문학 교육은 서양문화에 뿌리를 둔 이상과 지식을 전수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유럽의 정치적, 철학적 문학적 유산이 미국의 다원(多元)적인 국민을 결속 시킨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문화적 통일성이 1960년대 이후 대학을 장악하고, 서양 대신 인종, 계급, 성(性)에 관한 교과목을 가르치는 ‘막시즘’(Marxism)과 ‘페미니즘’(Feminism) 성향의 좌파들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인문주의우파’ 인사들은 경고했다.

 

서양에 관한 교육을 강조하는 두 번째 집단은 앨버트 샌커가 의장으로 있는 ‘미국교사연합’(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의 전국본부가 그 중심이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冷戰(냉전)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살아남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민주주의의 지속여부는 미국인을 결속시키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적 비전(vision)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주는데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서양 민주주의의 역사가 교과과정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문주의우파’와 ‘미국교사연합’은 모두 학생들이 고대 아테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17세기 영국 등지의 고전 문헌에서 언급한 정치-철학-미적 진리를 탐구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세계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사건이나 변화도 그 중요성이 고전(古典)의 진리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역사표준서 문제 제기와 더불어 1994년 11월14일 미국의 저명한 보수논객인 존 레오(John Leo)는 ‘미국 역사의 납치’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미국의 표준서가 1960년대 학생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에 의해 反(반)문화적 관점에서 쓰였다”고 비판했다. 존 레오는 당시 “역사표준서가 크든 작든 모든 봉기와 반란을 언급했는데, 이는 그들이 미국을 억압적인 국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백인에 대항해 점점 더 많은 반란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밖에 이야기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역사표준서는 다문화주의가 과도해서 백인이나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온데간데없고, 인디언, 흑인, 여성(페미니즘)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미국이 이제껏 자유와 평등을 강조해 온 것은 엘리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서 인디언 학살과 흑인의 노예화만을 강조했다”고 존 레오는 비판했다. 이 같은 이유로 존 레오는 역사표준서를 공식표준서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보수진영의 적극적 대응은 결국 의회 논쟁까지 이어졌다. 공화당의 슬레이드 고튼(Slade Gorton) 상원의원은 1995년 1월18일 상원 연설을 통해 “표준서가 반(反)서양적이고 미국 역사교육에 위협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고튼 의원의 문제 제기로 이날 상원은 99대 1로 역사표준서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여야 滿場一致(만장일치)였다.

 

당시 역사표준서는 상원으로부터 非(비)미국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은 세계 자유와 번영을 증진 시킨 미국 역사에 대해 존중해야 한다”는 권고까지 받았다. 미국에서 공교육이 시작된 이래 줄곧 州(주)정부의 소관이던 교육문제에 상원이 관여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큰 것이었다. 1994년 가을부터 시작된 역사표준서에 대한 보수진영의 문제 제기는 1996년 봄까지 무려 18개월이나 지속됐다.

 

이로 인해 좌파 성향의 표준서 개발자들은 어쩔 수 없이 修正(수정)주의 史觀(사관)에 입각해 작성된 역사표준서를 개정, 1996년 4월 새로운 표준서를 출간해 역사교과서 논쟁은 막을 내렸다. 당시 역사표준서 개정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초교육회의(Council for Basic Education)를 비롯한 몇몇 재단이 구성한 패널의 권고에 따라 문제가 됐던 ‘학습예제’를 삭제했다. 둘째, 과학, 기술, 경제사, 지성사를 강화했다. 논란이 됐던 ‘헌법’이라는 단어가 포함됐고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제임스 메디슨 등의 이름이 삽입됐다.

 

■ 保守의 대승리로 끝난 英國의 역사교과서 논쟁

 

영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역사교육이 위기에 처했다’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역사교과목의 비중 축소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으나, 무엇보다도 사회 일각의 역사교육무용론이 위기감을 부추겼다. 이에 영국의 보수진영은 1970년대부터 이념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적극적인 대(對)좌파 공세를 취했다. 이들 가운데 新(신)보수 세력은 역사학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지하고 ‘역사학의 위기’를 나름의 방식대로 해석해 대안을 마련했다.

 

당시 영국의 교육현장 일반이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을 위기로 받아들였다면, 신(新)보수는 좌파적 급진사학, 곧 수정주의에 입각한 현대역사학의 대두를 위기의 징후로 판단했다. 신(新)보수는 또 1960~70년대의 비판사학과 이른바 ‘밑으로부터의 역사’의 득세를 우려했으며, 이 같은 좌파적 현대역사학의 성과가 교육현장에서 반영되고 있음을 비판했다.

 

일례로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견해와 정치적 소신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항상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경험은 바람직한 정책이나 제도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영향을 주고 색깔을 입힌다”고 지적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경제사가인 하트웰(Ronald M. Hartwell)의 경우 “지식인들은 계몽시대 이후 진보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들은 18~19세기에는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그리고 20세기에는 개입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가졌다”면서 좌파를 공격했다.

 

당시 정권의 담당자였던 ‘철의 여인’ 대처 수상 역시 발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사(National History)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 절하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진 바로 그 시기(산업혁명, 빅토리아 시대)를, 영국이 다른 국가보다 가장 앞서 나갔던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고 했다.

영국은 대처 수상의 취임과 함께 그동안 보수진영이 우려해온 역사학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역사수정주의’(History Revisionism)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제도화하는데 힘썼다. 대처 수상은 81년 보수당의 실세 정치가였던 키스 경(Sir Keith Joseph)을 교육부 장관에 임명했으며, 장관은 보수성향 역사학자인 엘튼(Geoffrey Elton), 토머스(Hugh Thomas) 등의 도움을 받아 중등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과과정의 국정화를 추진했다.

 

이들은 모두 영국사를 긍정하는 역사 서술을 교과과정에 도입하는데 주력했다.

핵심요소는 祖國과 祖國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함양하는 애국주의, 역사적 변화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보수주의, 참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도덕주의 등이었다. 이들은 노예무역, 제국주의, 외국에서 저지른 악행 등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히 기술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여겼다.

 

영국의 이 같은 ‘국가교육과정’은 권위, 규율, 위계질서, 국가, 강력한 정부를 강조했다. 국가교육과정을 통해 영국의 보수세력은 종래의 영국교육, 즉 교사가 마음대로 주제를 선택해 가르쳐 왔던 것을 중지시키고 국가가 교육에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역사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과목에 대한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1986년 케니스 베이커(Kenneth Baker) 교육부 장관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다. 보수성향의 베이커 장관은 정부 중심의 교육통제와 국가교육과정의 도입을 강력히 추진했다.

 

1987년 1월 베이커 장관은 한 모임에서 영국 교육의 실패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개별학교와 교사에게 교육과정을 맡긴 데 있다고 주장하며, 국가교육과정을 영국에 도입할 계획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베이커 장관의 이 같은 계획은 결국 ‘역사논쟁’을 일으켰다.

좌파 성향 역사가와 교사들,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이 역사 논쟁에 참여했다. 전문 역사가들은 내용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역사교육의 중요한 목표인 ‘역사적 탐구 기능’ 위축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좌파 성향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자율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노동당 정치인들 그리고 일부 일반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1988년 ‘교육개혁법’(Education Reform Act 1988)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1989년 1월 새로운 교육과정을 초안할 ‘역사분과 초안그룹’(History working Group)이 정부에 의해 임명되어 작업에 들어가 1990년 1월 최종보고서가 완성됐다.

이후 국가교육과정은 1995년 그 첫 번째 개정을 보았고, 두 번 째 개정이 1999년 9월9일 확정되었으며, 11월에 각 학교로 보내져 2000년 9월부터 시행됐다. 대처 수상을 이어받은 새로운 보수당 출신의 존 메이저는 교육에 관한한 대처 보다 더 보수적 경향을 보였다. 그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제2차 국가교육과정은 영국사 부분이 더 강화됐다. 제3차 교육과정은 영국사 중심의 학습내용을 계속 지켜 나가면서 교사들에게도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영국 역사 교육의 성공은 잘 구성된 국가교육과정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학습 성취 목표와 학습 프로그램, 그리고 양자 사이의 체계적인 연결이 영국 역사교육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대처 수상 집권 이후 지금까지 영국의 역사교육은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다. 초등학교 뿐 아니라 중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은 타 교과목에 비해 두드러진 성취를 보이고 있으며, 교사들은 이에 고무 받아 自國史(자국사)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박스] 美國의 護憲세력을 결집시킨 린 체니

출처: 1994년 10월20일자 美월스트리트저널(WSJ)

필자: 린 체니, 美전국인문학기금(NEH) 前의장

 

美國史를 소개하면서 建國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에 대한 설명이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환경보호단체인 ‘시에라 클럽’(Sierra Club)과 페미니스트 단체인 ‘全美女性同盟’(NOW)의 설립은 대대적으로 다루고, 美의회소집 등 역사적인 사건은 다루지 않았다. 이는 사실이며 조만간 공개될 ‘미국역사표준서’의 역사인식 수준이다.

 

만일 이 같은 역사표준서가 클린턴 행정부가 주도한 ‘2000년을 위한 목표’(Goal 2000) 법안 통과로 조직된 ‘국가 교육 진흥 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면, 전국의 5학년~12학년 학생들은 표준서의 지침에 따라 美國史를 배우게 될 것이다. 역사표준서는 미국사를 10개 시기로 나누고, 이들 각 시기에 2~4개의 標準(표준)을 세워 총 31개의 標準을 제시해 놓았다.

 

각 標準은 시기별로 학생들이 학습해야 할 내용을 짧게 설명한 뒤, 교사들에게 학습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250페이지에 달하는 역사표준서는 누구라도 한 번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31개의 표준 가운데 미국의 憲法(헌법)이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이와 함께 역사표준서의 작성자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물, 장소, 사건들에 대한 근거 없는 경외심을 정치적 의도를 섞어 표현해 놓았다. 일례로 역사표준서는 “1450년 이래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가 의미심장한 상호 교류를 시작했다”면서 “14세기 말리 국왕 ‘만사 무사’(Mansa Musa) 통치 시기의 사회 관습과 부(富)에 대해 분석하라”고 해놓았다.

 

이것은 美國史를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 왕국 ‘만사 무사’의 통치가 美國史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美國의 기업가 존 D. 록펠러에 대해서는 “개인의 부(富)를 증대시키기 위해 공공의 법을 위반하는 등 비(非)도덕적인 관행을 남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역사표준서는 모든 社會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 주민들과 美國 원주민들의 失敗史에 대해서는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아즈텍 문명에 대해서는 “건축술, 노동 시스템, 그리고 농업기술이 발달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즈텍이 人身供養(인신공양)을 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역사표준서는 또 주요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 前後 관계를 설명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조셉 멕카시’와 ‘멕카시즘’으로 총 19차례 언급되어 있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u Kulux Klan)도 17차례 등장했다. 역사적 인물로는 아프리카계 美國人으로 노예 신분에서 탈피, '언더그라운드 철도사'에서 성공적인 감독관이 된 해리에트 터브먼(Harriet Tubman)에 대해서는 6번 언급하고 있다.

 

同時代에 白人으로 南北戰爭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로버트 E. 리 장군에 대해서는 1번,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알렉산더 그래함 벨, 토마스 에디슨, 알버트 아인슈타인, 조나스 샐크(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라이트 형제와 같은 美國史를 빛낸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

 

筆者(필자)는 이 같은 역사 표준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筆者는 ‘전국인문학기금’(NEH)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역사표준서의 개발을 지원했다. NEH는 총 역사표준서 제작을 위해 총 525,000달러를 제공했으며, 교육부는 865,000달러를 지원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학생들이 美國史와 世界史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지원비를 받아 역사표준서를 제작한 단체는 UCLA의 ‘전국역사교육센터’로 과거 ‘Lesson From History’와 같은 훌륭한 역사관련 저작을 낸 조직이다.

그러나 역사표준서는 ‘Lesson From History’와 비교해 수준이 한 참 낮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일례로 ‘Lesson From History’는 19세기 미국 흑인 여성으로 奴隸制(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소저너 트루스를 포함한 주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공정한 기술과 함께 로버트 E. 리 장군 그리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해 놓았다.

 

‘Lesson From History’는 또 자본주의의 富(부)의 개념에 대한 긍정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1815~1850년대 미국의 도시와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자본가들의 활동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서술했다. 이와 함께 ‘Lesson From History’는 미국의 실패사례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서술을 했으며, 미국의 독립혁명에 대해서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를 갈망하는 미국인들의 투쟁이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역사표준서는 多文化에 초점을 맞춰 美國革命의 의의를 서로 다른 그룹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Lesson From History’의 경우 미국의 정치 시스템 및 정치 조직을 구성한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 공정한 기술로 일관하고 있다.

 

헨리 클래이와 다니엘 웹스터와 같은 정치가를 두 번에 걸쳐 기술했다. 반면 역사표준서는 클래이와 웹스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유명한 연설에 대해서도 한 줄도 서술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팻 부케넌의 1992년도 공화당 全黨大會(전당대회) 연설을 학생들로 하여금 분석하도록 해 놓았다. 역사표준서는 또 레이건 대통령을 ‘오만한 치어리더’라고 했던 팁 오닐 前 하원의장의 발언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하게 소개해 놓았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역사표준서의 문제점을 눈감아 준 ‘역사표준서 국가회의’(NCHS)의 한 관계자는 이미 1992년 선거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잃었던 인물이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국가회의 관계자는 이른바 역사 수정론자였다. 그는 미국 내 흑인조직 및 인디언 그룹 등 다양한 정치 조직들과 연계되어 있다.

 

미국역사표준서와 함께 세계역사표준서가 곧 공표될 예정이다. 문제의 표준서는 미국역사표준서 보다 더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계역사표준서는 서구 문명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양심적인 ‘역사표준서 국가회의’의 한 관계자는 세계역사표준서 작성을 주도한 미국역사협회(AHA)에 대해 “세계사가 AHA에 拉致(납치)당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UCLA의 ‘전국역사교육센터’는 자신들이 작성한 역사표준서에 대해 아직 결정판이 아니며 아직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작성한 역사표준서는 클린턴 행정부에의해 한 곳도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濃厚(농후)하다.

 

문제의 역사표준서가 정부 승인을 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할 만한 가치는 있다. 우리 美國人은 역사표준서에 언급되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 자녀들은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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