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사 및 학생용 참고자료(4)

기업·기업인을 폄하하고 계급史觀에 오염된 교과서

기업‧기업인 폄하, 노동자 美化: 계급史觀를 가르치는 교과서

 

대부분의 교과서, 기업인들의 역할 묵살

전태일 부각시키고 이병철ㆍ정주영 무시

경제발전은 노동자, 농민, 貧民  덕분인가?

용산放火사건, 도시貧民 문제처럼 소개

[사진분석] ‘민주화 人士’에 가려진 경제인들

 

 

1. 기업인들의 역할 묵살한 한국사 교과서

 

경제 발전 주체가 朴正熙라는 사실 얼버무려

재벌엔 비판적, 노동자는 긍정적으로만 기술

경제 분량, 민주화의 약 40%

 

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기업 및 기업가에 대한 서술은 부정적인 내용이 압도적이다. 지난 60여 년간의 기적과 같은 한국 경제의 발전을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그 主體와 주인공에 대한 설명은 얼버무린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설명하면서 기업·기업가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日帝시대의 독립운동을 설명하면서 독립 운동가들을 묵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주인공과 영웅을 애써 무시

 

교과서의 反기업 정서는 특히 천재교육과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에서 두드러졌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그 요인을 우수한 노동자와 유학생 및 전문 공무원들에게 돌리고 있을 뿐, 박정희 대통령과 기업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외자 도입 이후 경제 성장은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수출은 연44%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잠재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였다.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우수한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배출되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에도 성실하게 일하는 근면성과 열정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생들도 경제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해외 연수 등의 경험을 갖춘 전문 공무원들이 경제 개발 관련 부서에 배치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천재교육刊, 375페이지)

“정부는 1967년 한․일 협정으로 얻게 된 자본의 일부를 제철소의 설립에 투자하였다. 제철소 설립은 1973년 포항 제철소의 준공으로 결실을 맺었다. … 한편 1970년 준공된 경부 고속 국도는 수출 물량의 이동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 시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천재교육刊, 376페이지)

“같은 해(1973년) 정부는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하고 철강, 비철 금속, 화학, 기계, 조선, 전자 등을 6대 전략 업종으로 선정하였다.” (천재교육刊, 376페이지)

“1973년부터 이듬해까지 국제 유가가 4배 이상 급등하는 오일 쇼크가 있었지만, 중동의 건설 붐이 일어나 여기에 한국 기업이 대거 참여하면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1977년 말에는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4년 앞당겨 달성하였다.” (천재교육刊, 376페이지)

“외환 위기 이후 각 대기업 집단은 부실 부분을 정리하고 주력 기업 위주로 구조를 재편하였다. 이에 따라 반도체, 휴대전화, LCD, 자동차, 조선 등의 분야에서 대규모 기업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국 경제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이들 분야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이들 주력 분야는 지속적인 기술 개발에 힘입어 세계에서 1~6위 안에 들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천재교육刊, 383페이지)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IT, 자동차, 선박 산업과 세계 점유율 2위의 휴대 전화 생산 등 경제적인 면에서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천재교육刊, 406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에서는 기업 및 기업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全無(전무)했다.

“우리나라가 1960~70년대에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경제 개발의 의지가 강한 정부가 외자를 도입하여 수출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높은 교육열과 근면성을 지닌 국민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79년 1인당 국민 소득은 1962년에 비하여 20배나 성장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刊, 376페이지)

<사진자료: 1960~70년대, 성장 신화의 숨은 주역들>(미래엔컬처그룹刊, 375페이지)

- 베트남에서 도로를 건설하는 우리 근로자들: 총 40여 만 명의 병사와 산업 인력이 8억 5천만 달러 규모의 베트남 특수를 얻어냈다.

- 이란에서 조선소를 세우고 있는 우리 기술자들(1976): 산유국들은 유가 폭등으로 풍부해진 재정으로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다.

 

재벌엔 비판적, 노동자는 긍정적으로만 기술

 

이에 반해,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많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대기업 즉, 재벌 중심의 불균형한 산업구조, 政經유착 등을 중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미래엔컬처교육 刊 교과서 역시 정부가 대기업에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한 결과, 고도성장은 유지했지만 국민들의 금융 부담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이 低임금에 시달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역 적자와 더불어 무리한 외국 자본의 도입은 외채의 급속한 증가를 가져왔다. 또한 외국 자본은 수출품 생산의 단기적인 증대를 위해 주로 대기업에 지원되어 중소기업의 육성을 가로막았다. 이는 결국 대규모 기업 집단 중심의 불균형한 산업 구조를 만들어 냈다.” (천재교육刊, 377페이지)

“ …이 과정에서 경제의 자율화를 내세운 정부의 정책과는 달리 권력에 의한 인위적 산업 구조 재편은 오히려 정부와 대규모 기업 집단 간의 유착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정경 유착에 대한 부정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천재교육刊, 377페이지)

“ …1997년 1월 한보 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여러 대기업 집단이 도산하였다. 이는 이들 대기업 집단이 과도하게 은행 빚과 외자를 차입하여 몸집 불리기를 해온 결과였다. 게다가 동남아시아에서 외환 위기 사태가 일어나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에서도 투자한 자금을 거두어가기 시작하였다.” (천재교육刊, 383페이지)

“…그 결과 1979년 1인당 국민 소득은 1962년에 비하여 20배나 성장하였다. 그러나 소득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에 시달렸고, 빈부의 차도 커졌다. 영호남 간 개발의 불균등과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격차 확대도 문제였다. 한편, 정부 주도의 성장 정책은 재벌 중심의 한국적 기업 문화를 형성하였다. 수출을 주도하는 몇몇 대기업이 정부의 특혜로 성장하면서 여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서로 다른 업종에까지 진출하여 재벌이 되었다. 이때 기업이 정부의 혜택을 얻어내기 위한 부적절한 거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경유착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으로 내수보다 수출입의 비중이 커지면서 우리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재벌 중심이며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은 1990년대 말에 직면한 외환 위기의 한 원인이었다.” (미래엔 컬처그룹刊, 376페이지)

 

경제 분량, 민주화의 약 40%

 

분량 면에서도 ‘경제’ 는 ‘민주화’ 에 비해 적다. 두 교과서의 경우, 민주화의 약 40% 정도이다.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경우, 단원상 민주화 과정을 다루는 부분은 20페이지인 데 비해, 경제 발전 과정을 다루는 부분은 10페이지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도 2페이지는 노동·농민운동과 사회·시민운동을 다루고 있어, 엄밀히 말하면 20 對 8 페이지의 비율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2페이지 분량의 각종 노동·사회운동 부분의 서술이다. 전태일이 썼던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이 부록으로 길게 소개되는가 하면,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교조는 물론 ‘크리스천아카데미’나 ‘도시산업선교회’,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같은 단체명이 직접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는 경제 관련 부분 중 기업이나 기업가를 직접 언급하는 내용이 1997년의 大기업 도산을 설명하면서 언급되는 ‘한보 철강’ 뿐이라는 사실과 비교되는 점이다. 이런  反기업-反자본주의적 관점은 사회주의 특유의 계급史觀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正體性으로 담고 있는 헌법정신에 배치된다.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기업인들을 미워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으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의 경우 단원상으로는 16 對 10의 비율이지만, 경제 부분 10페이지 중 4페이지가 도시빈민 문제, 노동·농민운동 등을 다루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16 對 6페이지의 비율이다. 이 교과서 역시 전태일은 1페이지 반을 차지하며, 철거 이주민의 천막촌 사진이나 단식 농성 중인 농민들의 사진이 등장한다. ‘新자유주의와 한국경제’라는 제목이 붙은 단원에서는 新자유주의를 악마로 묘사해 지구를 비틀어 짜서 돈을 빼내는 삽화와 함께 “新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우리 경제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자”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한국을 “경제 성장과 민주화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성공한 나라”라고 평가한 미국의 학자인 ‘노엄 촘스키’의 말을 인용했다.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미국 내 대표적인 反戰(반전)운동가이자 左派(좌파) 지식인이다. 그는 미국을 ‘帝國주의’라고 비판하고, 新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교과서는 노엄 촘스키의 이름 앞에 ‘세계에 양심적 지성인으로 널리 알려진’이라는 편향된 수식어를 붙여서 소개했다.

 

“국가의 富를 축적시키는 主役은 기업인”

 

 조재호 울산대 교수는 著書(저서)《한국의 경제발전과 기업가 정신》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일약 근대 공업국가로 도약하며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런 경제기적에는 1960~70년대 ‘정부 주도적’ 개발 전략이 주효했다. 그리고 조국 근대화에 동참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하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기업가, 그 기업가와 뜻을 같이 하는 근로자의 동참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창업 1세대 기업가들이 ‘국가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발휘하였던 기업가 정신은 無形(무형)문화재와 같은 국가적 資産(자산)이라는 것이다.

 

 조 교수는, ‘국가의 富(부)를 축적시키는 주역은 기업인’이라고 말한다. 人的(인적)자본, 제도, 경제정책 자체가 경제 성장을 자동적으로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이 기업가 정신과 화학적으로 반응할 때 비로소 경제 성장이 가능해진다. 1960년대 初 한국이 30~40년 후에 자동차, 造船, 철강, 전자제품을 생산하여 수출할 것이라고 예측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그러나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과 저력 있는 기업가들이 등장하면서 꿈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기업가들의 업적은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쓴 반면, 노동자ㆍ농민들의 희생은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학생들은 이런 교과서로 공부했을 때, 기업가는 惡(악), 농민ㆍ노동자는 善(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힐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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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박스)

‘산업화 世代’가 일군 한국의 주요 산업들

 

다음은 교과서에서 간략히 소개된 주요 성과들을, <한국의 경제발전과 기업가 정신>을 참고해 재구성한 것이다.

 

<철강 산업> 우리나라가 자동차, 조선, 전자 등의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는 산업 경쟁력 뒤에는 포항제철(現 포스코)이라는 버팀목이 있다. 우리나라 철강 산업은 황무지에서 시작하여 40년 만에 세계 일류 수준으로 발전했다. 朴泰俊(박태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빼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朴 회장은 한국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국제적인 평가를 무시하고, 불과 20여년 만에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를 이룩했다. 그는 포항제철소를 건설하면서 對日청구권 자금의 轉用(전용), 제2종합제철 사업의 획득, 설비 및 원료 구입선의 확보, 건설工期의 단축 등 탁월한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선 산업> 16~17세기에는 스페인이 바다를 지배했고 18~19세기에는 영국이 조선강국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950년대부터는 일본이, 그리고 21세기는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조선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1960년대 鄭周永(정주영)은 외국의 선진 조선업체들과 합작으로 대형 조선소를 설립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일본, 이스라엘, 노르웨이 등을 접촉했다. 그러나 이들 회사가 조선소의 운영권을 요구해오자 합작 투자를 포기하고, 장기 低利(저리)의 차관을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한국 조선산업의 성공은 정부의 장기적인 안목과 鄭周永의 기업가 정신으로 세계 조선업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適時에 기회를 포착한 결과이다. 만일 鄭周永이 前後方(전후방) 효과가 큰 조선공업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면, 우리나라의 산업 및 경제발전 인프라들은 지금보다 뒤쳐졌을 것이다.

<자동차 산업>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자체의 힘으로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하고 완제품을 그대로 수입하거나 선진국 자동차 업체를 대행, 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자동차를 독자 개발하여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10여 개국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선진국을 제외하고 개발도상국에서 성공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자동차 산업은 기계, 철강, 전자, 유리, 섬유, 고무, 화학, 정유, 운수, 관광 등 前後方 연관 산업의 발전과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산업이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鄭周永은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면서 해외 大메이커와 제휴를 모색했으나, 각각의 견해차에 부딪히자 合作투자 자체에 회의를 품고 독자경영의 길을 모색했다. 국제규모의 量産체제를 갖추고 좁은 국내시장보다는 수출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독자적인 고유 모델의 자동차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성공했다. 현대 자동차는 2010년, 포드를 젖히고 세계 4위의 자동차 메이커가 되었다.

 

<반도체 산업> 반도체 산업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후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것은 미국 등 선진국보다 30여년 정도 늦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현재는 수출 1위 산업으로, 반도체 산업의 성공은 한국이 휴대전화나, 컴퓨터 산업 등을 기반으로 IT강국이 되는 데 초석이 되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은 철강, 조선, 자동차와 다르게 산업발전 초기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민간 기업들이 적극 참여하여 이룩한 것이다. 창업자 李秉喆(이병철)은 반도체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탁월한 리더십과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한 기업인의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건립된 삼성전자는 세계 반도체 업계의 매출과 기술발전에 있어서 많은 신화를 창조했다.

 

 

2. 분량 비교: 전태일 vs. 이병철ㆍ정주영

 

‘계급투쟁적 史觀’으로 쓰여진 교과서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 전태일에 가장 많은 비중 할애

천재교육刊, 노조의 강경투쟁이 옳다는 式으로 記述

삼화출판사刊, 교과서 中 유일하게 이병철ㆍ정주영 사진 게재

 

 

高校 한국사 교과서가 노동운동가 전태일과 기업인 이병철ㆍ정주영을 얼마나 많은 비중으로 다뤘는지 비교ㆍ분석한 결과 전태일에 관한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를 제외한 다른 교과서들은 이병철ㆍ정주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체적으로 전태일은 산업화 시대의 희생양처럼 기술했으며, 기업과 기업인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거나 아주 작게 취급했다.

 

교과서에 ‘계급투쟁적 史觀(사관)’

 

 교과서의 이런 기술방식은 계급투쟁적 史觀에서 기인한다. 사회주의적 이념의 핵심이 바로 계급투쟁說(설)이다. 이들은 역사의 발전을 계급투쟁의 결과로 보고, 국가를 지배계급의 도구로 간주한다. 급기야는 국가보다 계급을 우선시한다. 左派(좌파)는 노동자ㆍ농민ㆍ민중 같은 특정 계급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민주주의라고 강변한다.

 이런 모든 생각은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된다. 대한민국은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채택하여 계급적 特權(특권)을 부정한다. 어떤 계급이나 계층보다도 국가와 憲法(헌법)을 우선시 한다. 노동자, 농민, 민중, 자본가란 이유로 특혜도 차별도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좌파적 관점에서 쓰여진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자연히 이승만, 박정희, 군인, 기업인들보다 노동자, 농민들을 우대한다. 高校 한국사 교과서의 계급주의적 사관이 전태일과 이병철ㆍ정주영을 다룰 때 어떻게 드러났는지 각 교과서별로 살펴보았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 전태일에 가장 많은 비중 할애

 

 전태일을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룬 것은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였다. 382페이지에서 이 교과서는 ‘시련 속에서 성장한 노동운동’이란 小제목 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60~70년대 고도성장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피땀 흘린 대다수 노동자의 희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 따라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위협받는 처지에 내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태워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며 죽었다.”

 

 교과서는 “그 후 지식인과 대학생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노동운동이 본격화 되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강경하게 탄압하였다”는 왜곡, 과장된 記述을 덧붙였다. 같은 페이지 하단 ‘탐구활동’ 부분에는 1970년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도 실었다. ‘전태일이 위와 같은 탄원서를 작성하게 된 당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다각도에서 추론해보자’라는 유도성 질문도 달았다. 

 이 교과서는 383페이지 전체를 할애해 전태일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小제목도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 ‘지켜지지 않은 근로 기준법’,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고 기술해 당시 정부가 전태일의 죽음에 가해자인 것처럼 記述(기술)했다. 반면, 경제성장을 이끈 이병철ㆍ정주영에 대한 설명은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천재교육刊, 노조의 강경투쟁이 옳다는 式으로 記述

 

천재교육刊 교과서에서도 전태일은 비중 있게 다뤄졌다. 교과서는 380페이지 ‘노동과 농민운동’이라는 제목 하에 “1970년 11월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은 고도성장의 시대에 가격 경쟁력을 위해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일해 왔던 노동자들의 주장을 대변한 것이었다”며 “(전태일 사건 이후) 기존의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투쟁을 진행하였다”고 썼다. 같은 페이지 하단에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과 전태일이 분신했던 청계천 6街(가)에 세워진 동판 사진도 첨부해 전태일의 生涯(생애)를 부각시켰다. 이 교과서 역시 이병철ㆍ정주영은 언급되지 않았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370페이지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1970년대 평화시장 재단사인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하였다. 이에 큰 자극을 받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며…”라고 기술했다. 같은 페이지 하단 <활동>이라는 코너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란 제목을 달았다. 우측에는 전태일의 영정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전태일의 모친(이소선 씨) 사진과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을 실었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 中 유일하게 이병철ㆍ정주영 사진 게재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6種 교과서 中 유일하게 이병철ㆍ정주영을 실명으로 소개하고 사진을 실었다. 지학사 교과서는 316페이지 좌측 상단에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이후의 신문기사를 실었다. 본문에서는 “1970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권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고만 기술했다. 제목 역시 <노동운동>이라고만 하여 대체적으로 중립적인 관점에서 썼다. 

 법문사刊 교과서는 전태일에 대해 한 문장으로만 기술해 가장 적은 분량을 다뤘으며 사진 역시 따로 싣지 않았다. “1970년에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의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354페이지)”고만 기술했다. 이 교과서 역시 이병철ㆍ정주영의 경제개발 성과를 다루지 않았다.

 

李秉喆 (1910~1987)

鄭周永 (1915~2001)

生涯

生涯

이병철은 경남 의령 地主家(지주가)에서 출생했다.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入學했으나 1931년 身病으로 중퇴했다. 1934년 기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1945년 정미소, 농지개간, 양조장을 경영했다. 해방 後, 1948년 무역회사 삼성물산을 창업했다.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해 우리나라 생산재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1957년 한일은행 인수, 1958년 삼척시멘트 인수 등으로 한국 최대의 資産家(자산가)가 되었으나 5ㆍ16 혁명 직후 軍事정부에 의해 不正(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그와 함께 경제개발사업을 추진해 나간다.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現 전경련의 前身)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방송국, 신문사, 병원, 製紙(제지)공장 등 많은 사업체를 만들었다. 1967년 密輸(밀수)사건으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67년 삼성전자를, 1974년 삼성중공업을 설립했다. 1978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삼성반도체를 설립함으로써 오늘날 한국의 전자산업과 반도체산업 육성에 功을 세웠다.

 

이병철은 ‘事業報國(사업보국)’의 일념으로, 대한민국 근대화에 앞장 선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그는 人才(인재)양성을 중요하게 생각, 인재개발에 주력한 뛰어난 경륜가이기도 했다. 이런 우수한 인재들을 바탕으로 오늘 날 삼성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해 全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의 貧農(빈농)의 집안에서 출생했다. 1933년까지 세 차례 가출해 철도ㆍ부두ㆍ건물 공사판을 전전했다. 1938년 최초의 사업체 경일상회를 열어, 1945년까지 자동차수리업, 화물운송사업을 했다. 해방 後,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 1950년에는 두 회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을 설립, 한 때 국내 건설업체 도급한도액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67년에는 현대자동차 설립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 1972년 현대자동차 설립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독려로 현대조선소를 起工(기공)했다. 1977년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생산해 해외수출에 성공했다.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被選(피선)됐으며, 1978년 서산 간척사업에 착수, 1984년 완공했다. 1983년엔 전자사업, 1991년엔 석유화학사업에도 진출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이후 사망하기까지 對北(대북)사업에 매진했다.

 

그가 남긴 저돌적 경영의 수많은 일화는 고도성장기 한국인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소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의 선박 경영자와 담판을 벌인 일화, 서산 간척지 매립에 유조선을 이용한 이른바 ‘정주영工法’ 등은 그의 도전적 경영리더십을 잘 보여준다. 현대그룹은 1990년 후반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를 굳건히 이어갔다.

 

 

 

‘계급투쟁적 史觀’을 매개로 연결된 左派세력과 북한 정권

 

 거의 모든 교과서들이 고도성장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경제개발의 의지가 강한 정부'와 '국민들의 값싼 노동력'을 들었을 뿐 기업인의 기여는 외면했다. 이런 계급적 역사관을 가진 교과서를 검ㆍ인정한 敎科部(교과부)는 헌법정신을 위반한 것이다. 북한노동당 정권과 남한의 좌파는 계급투쟁설을 세계관과 역사관과 인생관의 기초로 공유하므로 친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反北좌파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이런 親緣性(친연성) 때문이다. 좌경, 좌파, 좌편향은 모두 反헌법적이고 反국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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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박스)

[사진분석] ‘경제 人士’보다 ‘민주화 人士’가 부각된 교과서

 

 高校 한국사 교과서에는 ‘민주화 人士’가 경제 人士보다 더 부각되어 있었다. 現 6종 교과서 중 현대사 부분인 8~9과의 사진 이미지 1195건을 분석한 결과다. (사진에 등장한 주요 인물은 총 88명으로, 횟수는 266회) 빈도수 10위권 內로는 박정희(17)-이승만(16)-김구(15)-김대중(13)-김일성(12)‧김정일(12)-마오쩌둥(10)-여운형(8)-전두환(7)-고르바초프(6)‧김규식(6) 순이다. 6種 모든 교과서에서 한 번 이상 사진이 실린 인물은 김구(15), 김대중(13), 김정일(12), 마오쩌둥(10)이었다.

 

이병철ㆍ정주영, 백선엽 등 거의 안 다뤄 공평성에 의문

 

 등장한 인물 중 민주화 및 노동 운동 관련자는 전태일(5), 박종철(3), 이한열(3), 이경해(1), 장준하(1) 등이다. <삼화출판사刊 344페이지 ‘역사의 창’ 코너에 소개된 이경해는 농민운동가로, 2003년 9월, 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自殺(자살)한 인물이다>

 산업화 기여 인물이 사진에 실린 경우는 정주영(3), 이병철(1) 뿐이다. 본문이 아닌 사진 밑 설명에 짧게 소개되어 있다. 3회 등장한 정주영의 경우에도 2회는 소를 몰고 北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경제와는 무관하다. 대한민국의 創軍(창군) 주역이자 6.25 남침전쟁의 영웅인 백선엽 장군도 보이지 않는다. 

 

 

3. 용산放火사건을 도시貧民 문제처럼 소개

 

放火사건을 廣州대단지 사건과 비교

전문시위꾼 주도의 도심테러, 화염병 제조·투척

 

 

용산放火사건 vs. 廣州대단지 사건

 

미래엔컬처그룹刊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도시 빈민 관련 부분에서 1971년의 ‘광주 대단지 사건’과 2009년 용산放火(방화)사건을 同質(동질)로 다루었다. 전문 시위꾼이 주도한 용산放火사건을 슬그머니 ‘도시 빈민’ 문제에 포함시켜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이주 후 새 주거지의 기반시설 부족과 분양가의 비합리적인 책정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광주 大단지 사건’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광주 大단지 사건은 서울시의 판자촌 주민들을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971년 8월 10~12일, 개발 지역 주민 수만 명이 정부와 서울특별시의 조치에 항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안전부 장관과 서울특별시장, 경기道지사를 파견하여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요구조건을 수용함으로써 이 시위는 3일 만에 진정되었다.

 

放火의 主犯인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회)’, 화염병 제조해 투척

 

용산放火사건은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재개발 지역에서 농성자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울경찰청 특공대 소속 김남훈(30) 경장과 양회성(56)씨 등 농성자 5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회적 약자의 항거가 아닌, 철거민 시위현장마다 나타나 불법 과격시위를 선동한 전문 시위꾼이 일으킨 도심테러 수준이었다.

 사건의 배경이 된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은 2006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어 2008년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관련된 세입자는 모두 890명이었는데, 이 중 85.7%인 763명의 보상이 완료되었고(약 84억원 지급), 보상에 반발하는 86세대 상가세입자들은 2007년 용산세입자대책위원회를 조직해 2008년 2월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에 가입했다. 두 달 후인 2008년 4월,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여기에서 탈퇴하고 26세대만 남아 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009년 1월19일, 세입자 10명과 외부인 22명이 복면을 쓴 후 남일당 건물을 점거했다. 수백 개의 화염병, 염산병 등을 무차별적으로 집어 던져 인근 상가와 차도·인도 등을 방화했다. 당시 경찰은 여러 차례 해산을 설득했지만 거부당하자 경찰 특공대를 진입시켰다. 농성자들은 시너를 통째로 부으며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불이 옮겨 붙으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농성자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경찰 20명이 다쳤다. 사망 농성자 5명 중 용산 세입자는 2명뿐이었으며, 현장에서 연행한 화염병 시위 가담자 28명 중 보상금 지급 대상인 세입자는 7명, 나머지 21명은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회원들이었다.

 대법원 2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2011년 4월28일, 사건 당시 망루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으로 기소된 남경남(57) 前 전국철거민연합회 의장에게 징역 5년에 벌금 1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2009년의 용산放火사건을 다룬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1999년에 발생한 제1차 연평해전, 2002년의 제2차 연평해전, 2009년의 대청해전, 2010년의 천안함 爆沈(폭침) 등 北의 對南 도발을 다루지 않았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 건설의 主役(주역)인 이승만, 박정희, 국군, 기업인, 과학자의 역할을 축소시키거나 가혹하게 비판하고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활동은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북한 정권의 만행을 덮었다. 이는 전형적인 계급투쟁적 역사관의 기술이다. 계급투쟁적 역사관은 학생들에게 法治(법치)주의보단 혁명을 위해선 폭력이 우선시 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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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박스)

교과서에 실린 反세계화 ‘할복자살’ 農民 (사진첨부)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WTO의 국내 농업개방에 반대하며 할복자살한 농민 이경해 씨의 사진(344페이지)과 설명을 게재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회장 출신의 이 씨는 2003년 9월11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WTO 각료회의 농업개방협상에 반대하며 시위 도중 할복자살 했다. 전북 장수 출신의 이 씨는 1989년 농어민 후계자로 선정됐고, 1991년에는 전북道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1990년 유럽 제네바에서 열린 GATT 반대 시위에서도 할복한 바 있으며, 2003년 2월에는 제네바 WTO본부 앞에서 단신으로 단식농성을 벌였던 전업 농민운동가다.

 

 12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한농연은 1981년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양성한 농어민 후계자들이 전국적 조직을 갖추면서 1987년 출범한 조직으로, 원래 명칭은 ‘농어민후계자연합회’였다. 회원 대부분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中農(중농) 이상의 규모를 갖췄으며, 이 씨 본인도 대학을 졸업한 學士(학사)농민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농장을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농연은 그러나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를 앞두고 농산물 수입개방반대 및 한-칠레 FTA체결반대(2001년), 한미FTA협상저지 미국 원정 투쟁단 파견(2006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반대(2005년) 등 反美(반미), 反자유무역, 反세계화 운동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제11, 12대 회장인 서정의 씨가 親北(친북)좌파 단체인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의 공동회장으로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이수호 前 민노총 위원장, 정재돈 前 전국농민연대 상임대표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한농연의 現 회장인 박의규 씨의 경우 2008년 5월 ‘남북농민대표자회의’에 남측 단장으로 농민 20여명과 함께 평양을 방문, 북한의 강창욱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중앙위원장 등과 함께 반(反)헌법적 6ㆍ15공동선언과 10ㆍ4선언의 존중 및 실천을 협의하기도 했다.  현재 한농연의 연대 단체로는 전국농민회총연대(전농)를 비롯, 전국민중연대(민중연대) 등의 좌파단체로 이들은 모두 국보법 폐지, 남북한 연방제, 주한미군 철수 운동을 벌여온 단체다.

 

 삼화출판사는 세계화 문제 부분에 이경해 씨의 할복자살 사건을 다룸으로써 대한민국의 주력산업이 마치 농업인 것과 같은 착각과 함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기구인 WTO(세계무역기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갖도록 서술했다.

 

 2010년 농협경제연구소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농림수산업 총산출(47.9조원)이 전체 산업 합계(2605조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농업은 또 다른 산업과 비교해 성장속도가 낮아서 관련 산업이 전체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5년 16.4%, 2000년 13.8%, 2005년 11.3%, 2008년 10.3%로 감소추세에 있다. 농림수산 관련 산업 부가가치는, 총산출과 마찬가지로 1995년 55.5조원, 2000년 69.8조원, 2005년 80.2조원, 2008년 86.4조원으로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5.0%, 2000년 13.0%, 2005년 10.3%, 2008년 9.4%로 계속 감소해왔다.

 

 한국의 농업시장 개방은 1989년 GATT 쇠고기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일정 물량의 쇠고기를 의무적으로 수입하게 됨에 따라 시작됐다. 이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도하개발아젠다(DDA)협상, 여러 FTA 협상을 통해 농산물의 시장개방이 확대되어 왔다. 물론 이 같은 농업시장 개방에 대해 국내 농민들은 강도 높게 저항했다. 그러나 시장개방으로 경쟁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한 참다래(키위) 농업의 발전이 보여주듯이, 시장개방에 따른 피해가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한국 농업의 국제경쟁력은 대체로 취약한 편이지만 부문별로는 적지 않은 잠재적 경쟁력을 지니고 있으며, 경쟁력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일례로 2000년과 2005년 농업센서스를 비교하면, 고학력 농업 경영자가 증대하고 있으며, 농업경영규모가 커지고 있고,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축산물, 과일, 화훼를 생산하는 농가가 증대했다. 이뿐 아니라 과일과 화훼는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또한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親(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2000년 이후 매년 70%이상 성장하고 있으며, 각 지역별로 다양한 작목의 친환경농산물 생산이 증대되고 있다.

 산업으로서 농업만이 아니라 지역 단위로 농촌을 개발하려는 전략도 지방자치 단체와 농민단체에 의해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다. 일례로 2000년부터 시작된 농촌관광사업에 따라 전국 500여 곳이 관광마을로 지정됐다. 한국 농업의 이 같은 변화는 한 농민의 할복자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경영능력을 갖춘 농업인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경쟁적으로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등 국내 시장 환경을 개선해 외국자본과 기업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같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해 일자리 상실을 우려한 선진국의 노동조합과 외국 기업 진출에 위협을 느낀 후진국의 시민단체가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통합은 지식기반 IT산업의 급격한 발전과 더불어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한국은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인 1960년대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전략을 선택해 자유무역의 확산과 세계경제의 통합으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본 나라다. 1980년대부터는 정부주도형 발전의 부작용에 대한 반성으로 국내시장의 자유화와 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이미 세계화 흐름에 상당한 수준의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주요 국제기구들이 공동 작성하는 ‘G20 주요 경제지표(PGI)에 따르면 2009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 비중은 43.4%로, G20 회원국 가운데 1위(사우디 제외)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의 GDP 대비 수출 비중은 2005년 33.7%를 기록한 이래 2006년 34.2%, 2007년 35.4%, 2008년 45.3%로 거의 매년 증가해왔다. 2010년 한국 경제의 국내총생산(GDP)은 1172조 8000억 원으로, 달러 기준으로 全 세계 15위 규모다. 특히 반도체, 휴대전화, 조선 등의 분야에서 한국의 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자료>

▲《대한민국 기업사》(신산업전략연구원 지음, 주영사 刊)

▲《박정희와 대한민국 경영》(설봉식 著, 중앙대학교 출판부 刊)

▲《한국의 경제발전과 기업가정신》(조재호 著, 울산대학교 출판부 刊)

▲《湖巖自傳(호암자전)》(이병철 著, 중앙일보사 刊)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著, 제삼기획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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