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國의 정당성 부정>
 
김구, 김규식의 대한민국 建國 방해 美化
공산주의자 呂運亨에 대한 긍정적 서술
6종 교과서 중 5종의 교과서 김일성 抗日 집중부각
공산당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로 美化
建國 초기 美군정에 대한 부정적 측면 부각
 
1. 中道·中立을 美化하는 교과서
 
대한민국의 탄생을 中立化에 실패한 결과처럼 기술
김구, 김규식의 建國방해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기술
‘左右합작’과 ‘남북협상’에 대해 호의적 서술로 일관
 
 6種의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호의적으로 서술했다. 성사되지 못한 두 움직임을 교과서는 ‘실패’로 표현하면서 통일의 기회를 놓친 듯 아쉬워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마치 중립화에 ‘실패’한 결과처럼 기술한 것이다.
 
 교과서의 광복 직후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서술된다. 右翼(우익), 左翼(좌익), 그리고 中道(중도)다. ‘우익’, ‘우익 측’, ‘우익인사’, ‘우익세력’, ‘우파’라는 표현은 교과서 내에서 反共․자유민주주의를 따랐던 대한민국 건국 세력을 지칭할 때 등장한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좌익’, ‘좌익 세력’, ‘좌파’, ‘공산당 세력’으로 불린다. ‘중도’는 양쪽의 주장을 일부씩 수용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兩非論에 빠진 교과서
 
 과거 6차 교육과정의 國定(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우익’, ‘좌익’, ‘중도’ 같은 구분 없이 ‘이승만 등의 정치 지도자들’, ‘여운형, 안재홍 등’,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 등으로 표기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내용을 서술한 과거 국정교과서에 비해, 現 6종 교과서는 3인칭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사실 관계를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 4항의 “특정이념이나 역사관에 편향되지 않고 우리 역사를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한다”와, 7항의 “학문적, 교육적, 이념적으로 논란이 많은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에 대한 평가보다는 객관적 사실 중심으로 서술한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교과서가 兩非論(양비론)에 빠진 나머지 ‘中道(중도)’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익, 좌익, 중도세력이 격렬하게 대립한 사건이었던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의 내용에 잘 나타난다.
 
 교과서들은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을 추진한 中道 세력에 대해 호의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총선거를 통한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 움직임을 ‘민족 분단’, ‘민족(동족)상잔의 비극 초래’,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판한 中道파의 주장이 교과서에 자세히 소개된다.
▲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 좌우 합작과 민족 통일을 중시하는 중도파 세력들은 이를 지지했고, 한국 독립당의 김구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고 하면서 적극 찬성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刊, 331페이지)
▲ (총선거를 통한 남쪽 지역의 정부 수립에 대해) 반면, 김구가 이끄는 한국 독립당과 김규식 등의 중도파 세력들은 남쪽만의 선거는 민족 분단의 길이며, 장차 한민족이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벌이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중략) 김구와 김규식 일행은 서울로 돌아온 후 총선거에 반대하면서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남북 양쪽에서 추진하는 정부 수립 작업을 모두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민족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刊, 332페이지)
▲ 남북 협상은 광복 이후 처음 있었던 남과 북의 지도자 회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 연합 전선 운동과 그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법문사刊, 311페이지)
▲ 8.15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은 좌우 합작 운동, 남북 협상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좌우의 대립과 냉전 체제의 심화에 따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법문사刊, 314페이지)
▲ 김규식, 홍명희 등 중도파들은 민족 자주 연맹을 결성하고 미소 양군 철수와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 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를 주요한 정책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김구가 민족 자주 연맹 측의 주장을 수용하는 의견을 표명하자, 이후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 분단 정부 수립과 동족상잔의 전쟁 발발을 우려한 김구와 김규식은 이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남북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천재교육刊, 316페이지)
▲ 김구 등은 이남에서 총선거를 거쳐 정부가 수립되면, 이북 역시 정부를 수립할 것이고, 이는 결국 남북 분단을 초래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를 막기 위해 김구, 김규식 등은 이북에 남북한 정치 지도자 회담, 이른바 '남북 협상'을 제안하였다. (비상교육刊, 315페이지)
▲ 한국 독립당의 김구와 민족 자주 연맹의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에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가 함께 모여 통일 정부 수립 방안을 협의할 것을 북한 당국에 제의하였다. (지학사刊, 267페이지)
 
이에 반해 당시 치열했던 한국 左右(좌우) 세력의 이념 대립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파 지도자들이 단독정부 노선을 취했던 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左右의 대립을 반공주의(右) 對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리의 급진적 해결(左)의 구도로 설명했다. 이는 학생들에게 ‘우익 측’은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 반공주의를 내세워 단독 정부 노선을 취했던 우익 측과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리의 급진적 해결을 추구했던 좌익 측은 좌우합작운동에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파괴적 행동을 일삼고 좌우 합작을 반대하는 공산 분자와 합작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한국 민주당은 유상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면 국가 재정이 파탄날 것이라고 하였다. 공산당의 박헌영은 토지의 유상 몰수는 지주를 위한 것이며, 입법 기구는 미군정의 거부권을 넘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刊, 331페이지)
 
그 외 교과서들도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 등에 있어서 좌우익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실패했다는 간단한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北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에 불과한 ‘남북 협상’에 대해서도 결렬된 탓을 南北 모두에게 돌리며 兩非論(양비론)을 폈다.
▲ …합작 7원칙 가운데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벌 문제에서 좌익과 우익은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고, 좌우 합작 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구성 이후에도 좌우 합작 위원회의 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좌우 합작 운동은 미군정, 우익․좌익 세력의 이해관계가 대립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법문사刊, 310페이지)
▲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법문사刊, 311페이지)
▲ 8.15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은 좌우 합작 운동, 남북 협상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좌우의 대립과 냉전 체제의 심화에 따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법문사刊, 314페이지)
▲ 그런데 좌우파는 각각 서로가 받아들이기 힘든 합작의 원칙을 발표하였고, 토지 개혁 문제나 친일파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천재교육刊, 312페이지)
▲ (남북 회담 후 채택된 공동성명서에 대해) 이 성명은 이남의 단독 선거 추진 세력들에게 환영받기 힘들었으며, 유엔이나 미군정도 단독 선거 일정을 변경하거나 중지하지 않았다. (천재교육刊, 316페이지)
▲ 그러나 7원칙 중 신탁 통치 문제, 토지 개혁 문제, 친일파 처벌 문제에서 좌익과 우익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게다가 당시 영향력이 컸던 김구와 이승만, 조선 공산당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합작 운동은 약화되었다. …냉전이 격화되자 미군정은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우익을 옹호하였다. 게다가 운동을 이끌었던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을 통한 중도 통일 정부 수립 시도는 중단되었다. (비상교육刊, 314페이지)
▲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지도자 회의에서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남북 협상은 당시 형성된 냉전 체제라는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 역시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면서 남북협상은 힘을 잃었다. (비상교육刊, 315페이지)
▲ 냉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는 미소의 협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외 좌우 세력은 궁극적으로 통일 국가의 수립을 지향하였지만, 한반도의 분단을 몰고 오는 냉전의 파도를 극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지학사刊, 264페이지)
 
김구, 김규식의 建國방해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美化
 
 특히 교과서들은 거의가 김구, 김규식이 1948년 4월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한 것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고 美化하고 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생각 열기’란 항목에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을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김구, 김규식이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란 감상적 문장을 소개하면서 ‘김구, 김규식은 왜 남북협상에 나섰을까?’라고 유도성 질문을 던졌다. 이 교과서는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사실을 소개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평양회담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란 제목 하에서 기술,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하여 만난 것처럼 왜곡했다. 네 金 씨의 회동은 대한민국의 建國을 방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관했다.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赤化를 위한 노력’이었다.
 
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한 金九, 金奎植
 
李承晩의 建國 노선에 반대한 金九, 金奎植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金九, 金奎植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建國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접경)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兩金 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南侵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南侵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金九, 金奎植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 성명서는 또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金九, 金奎植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李承晩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金九, 金奎植은 철저히 이용당했다.
 
이에 대해 梁東安(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이것은 美蘇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美蘇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 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 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한 것이었다. 요컨대 4.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金奎植은 평양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이 주최한 초대연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 차관만 가져오고 여기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5월6일)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남조선에는 도처에 부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조선의 공장은 남조선의 공장보다도 충실한 생산을 하고 있다. 소련인은 그다지 표면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 미국인은 너무나 간섭이 심하여 현재 군정부에는 부패가 심하다.”
 
金九, 金奎植은 5월6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4.30 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自讚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했다.”
 
4.30 성명대로 통일조국이 건설되면 자유진영이 배제된 공산국가가 될 것이다. 金奎植, 金九는 사실상 공산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당시 이미 북한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북조선 당국자’란 말 자체가 정부를 전제로 한다. 남한엔 ‘남조선 당국자’로 불릴 만한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美軍政이 있을 뿐이었다.
 
4.30 성명은,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과 만나 발표한 6 선언이 연합제-연방제 혼합방식의 反헌법적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구, 김규식이 했던 역할과 비슷한 役을 김대중이 再演했다.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의 대변자 비슷한 말을 한 것이나 김대중이 김정일의 대변자 같은 말을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5.10 선거를 惡評한 金九, 金奎植
 
두 金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는 투표율 90% 이상의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김구는 그러나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는 논평을 냈다. 유엔감시기구도 공정하다고 평한 선거를 惡評(악평)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이렇게 논평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제헌국회가 開院되고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말한 데 대하여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7일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김구, 김규식은 나중엔 북한에 대해서도 정부 수립 움직임을 비판하여 兩非論을 보이기도 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분단정권 반대는 남한의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줄 뿐 북한의 단독정권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한의 정치체제가 개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평했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은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으니 남한의 갈 길은 북에 조직된 공산군의 武力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 국가를 세워서 반공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진행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金九와 金奎植, 兩金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建國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소련과 북한공산정권의 편을 들어 정부수립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해방정국의 迷兒가 되고 말았다.” (아래 대화록 참조)
 
그는 또 이렇게 설명했다.
“金九와 金奎植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金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성명을 하였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建國 반대였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이었다. 金九는 西山大師의 漢詩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愛誦(애송)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金九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 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였던 공로는 1945년까지 혁혁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 사회가 지금도 金九예찬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金九-劉馭萬 대화 비망록
 
UN 한국위원회의 중국 대표인 劉馭萬(유어만) 公使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金九의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劉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李承晩에게 전달했다. 이 문서는 梨花莊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대한민국 建國에 반대하는 일에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金九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劉馭萬: 나는 선생님의 어떤 면보다도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해 왔습니다. 나도 비록 외교관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하게 된 것은 나로선 최초의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입니다.
金九: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
劉: 유엔 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上海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며느님과 아드님께서 중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엄 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 나를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자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金: 귀하가 말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없어도 귀하를 위하여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劉: 나는 오철성이 보내는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중국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蔣介石 총통께서도 편지를 직접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쓰시도록 건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통의 편지가 같은 메시지를 선생께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李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李 박사와 선생과 金奎植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호하는 데 협조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중국 格言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형제들이 다툴 순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自招해선 안 된다.” 선생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다고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나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만, 제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적 敵手로서 서로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金: (심각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실거죠?
劉: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시지 않도록 권하고 싶어요.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金: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을 지음)
劉: 내가 李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李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하실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나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그런 점에 대하여 제가 언급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님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李 박사와 협력하시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과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右翼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선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한 지도자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런 기록에 타격이 되었습니다. 북중국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입니다. 그 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찬란한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金: 나도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귀하께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李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습니다.
劉: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바깥에서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합니다. 李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님의 동지이셨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 씨 같은 분들을 麾下(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李 박사께서 國益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李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버리신다면 李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함부로 농단하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金: (정치싸움 등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 한 다음)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하여 反美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 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劉: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李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惡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소환될 것입니다. 가도 괜찮습니다. 귀측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 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金: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劉: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金: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劉: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注: 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劉: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 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 (끝)
 
<서울 주재 중화민국 공사였던 劉馭萬은 장개석 총통의 뜻을 받들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화합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하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劉馭萬은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뒤 유엔주재 중화민국 대표부 처장, 駐韓 대사 등을 역임, 1966년에 별세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일행이 1948년 1월8일에 서울에 왔다. 유어만(劉馭萬: Liu Yu-man)은 이승만, 김규식, 김구가 한 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 점심에 초대했다. 그것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위원들이 “한국의 지도자들이 장래성이 없이 분열되어 있고 서로 마주 보지도 않을 정도라는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는” 불행한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창인)>
 
金九와 劉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金九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金九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注: 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內戰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金九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金九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좌우 합작’으로 통일됐어야 했다?
 
교과서가 中道에 치우쳐 있다는 증거는 또 있다. 교과서의 광복 직후 및 6 전쟁 직후 부분에서 오스트리아를 바람직한 예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재교육과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지면을 할애해 자료로 제시하며 오스트리아가 ‘좌우 합작’과 ‘중립화’로 분단을 피한 좋은 예라고 설명한다.
▲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그러나 좌우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정치 세력이 참여하여 종전 직전에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모태로 연합국 점령 아래에서 10년간 통일된 행정 체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연합국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1955년 5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오스트리아의 재건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고, 10월에는 4개국 점령군이 모두 철수하였다> (천재교육刊, 312페이지, '연합국의 분할 점령을 슬기롭게 극복한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종전 후 독일과 마찬가지로 연합국 4개국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었다. 그러나 분단된 속에서도 모든 정당이 참여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 후 좌우 진영의 인사가 포함된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고, 분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스위스식의 영세 중립화가 이상적 모델임을 깨달았다. 국민당과 사회당은 중립화 통일 방안을 정치 강령으로 채택하였으나 냉전으로 전망은 밝지 않았다. 연합국은 오스트리아 독립을 위한 회담을 실시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로 제대로 진전되질 못하였다. 그러나 중립화를 내건 오스트리아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5년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오스트리아 재건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을 계기로 연합국 점령군은 철수하고 통일된 독립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삼화출판사刊, 333페이지 <역사의 창> ‘좌우합작으로 분단을 피한 오스트리아’)
 
위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는 좌우합작으로 중립화되어 통일되었어야 하는데 당시 좌우익의 무리한 대립으로 지금까지 분단국으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한보다 앞서 단독 정부수립을 추진하면서 ‘남북 협상’을 이용한 북한 측의 내용도 다뤄져 있지 않으니,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 등 대한민국 건국 세력인 ‘우익’과 소련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 및 공산주의자의 ‘좌익’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양동안 교수는, 남한에서 좌우합작이 성공하고 그를 토대로 남북합작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통일정부에서는 좌익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 분명했다고 말한다. 좌익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부가 통치하는 한반도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화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양 교수는, 좌우합작이 성공하여 통일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한반도가 공산화 통일이 됐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밝혔다.
 
左右 합작으로 통일 임시정부 수립됐어도 곧 와해 됐을 것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치열했던 이념 대립이 단지 ‘미․소의 협상’, ‘냉전의 파도’, ‘좌우의 대립과 냉전 체제의 심화’ 등의 양비론적 서술로 처리된 점 역시 지적되어야 할 문제다. 이로 인해 ‘좌우 합작’을 뿌리치고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탄생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국의 의의가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세력 연구》의 저자 남시욱은 著書에서, 당시 상호타협이 불가능한 이념을 가진 우익과 좌익 세력이 동거하는 연합 정권의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설사 일시적으로 좌우 연합 정권의 통일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해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 좋은 예가 박헌영이 수립한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의 실패다. 그런 연합정부가 탄생하여 와해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해방 직후의 한반도는 통일 이전의 중국 대륙이나 베트남 또는 예멘처럼 혁명과 內戰(내전)의 수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45~1948년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이념 대립이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대립 양상이 가장 첨예한 시기였다. 당시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들의 체제와 이념에 강력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국력에 있어서도 전성기였다.
 그 당시 한반도 내 좌우세력 간의 사상 대립 역시 치열했다. 교과서의 짧은 설명처럼, 단지 합작 7원칙 가운데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벌 문제에서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소련의 지원 하에 순조롭게 권력을 장악한 북한의 김일성 세력은 처음부터 타협을 모르는 스탈린주의자들이었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등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해방 직후 힘의 공백기를 이용해 남한 지역에서 기선을 잡고 ‘사회주의 노선’을 건설하기 위해 소련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이 같은 ‘좌익’에 대해 ‘우익’들은 경계심과 불신, 증오심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타협이지 혁명세력과의 타협은 불가능했고, 여기에 중간파의 입지는 처음부터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으나 좌우세력으로부터 이용당했을 뿐이다. (《한국 보수세력 연구》, 285~6페이지)
 
양동안 교수 역시 당시 한반도의 정치 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 중국의 공산화 등을 고려할 때, 5년 동안 신탁 통치를 거쳐 독립이 됐을 경우 한반도는 전체가 공산화되거나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상황은 한반도와 달랐다. 이에 대해 양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오스트리아에 대해선 강대국들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바가 없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 5월 오스트리아를 분할 점령한 미, 소, 영, 프랑스 군대는 오스트리아를 신탁통치하는 협정을 체결한 것이 아니라 점령 통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선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
2. 외국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직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정치세력들은 통일된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며, 한 번도 4개 외국 군대 점령지역별로 별개의 독립된 정치, 행정기관이 구성된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美蘇(미소) 양국 군대의 점령 지역 진입과 동시에 남북한에 별도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각 지역을 상이한 내용으로 통치했다.
3. 오스트리아에서는 각국 군대의 분할, 점령지역 간에 교통, 통신, 상거래가 단절되지 않았다. 각국 군대 간에 군사분계선이 존재했지만 그 분계선은 군사 활동에 관한 경계선에 그치고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마자 교통, 통신을 차단하여 북한 지역을 남한으로부터 분리함으로서 미소 양국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었다.
4. 오스트리아의 좌익 세력은 소련에 대해 자주적 자세를 취하고 좌우연합에 의한 통일정부 유지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우익진영에 인민당(舊기독교사회당), 좌익 진영에 사회당(舊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있었다. 온건 좌익 노선의 사회당은 공산당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黨勢(당세)를 유지하고 있어 좌익 진영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회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면서도 오스트리아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은 절대 피하려는 입장이었으며,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미, 소, 영, 프 4개 외국 군대에 대응함에 있어 우익 정당인 인민당과 확고한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좌익 진영의 주도권을 소련에 맹종하는 極左(극좌)노선의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은 우익 진영과의 협력을 외면하고 소련의 한반도 정책 실천에 협력하려고만 했다>
 
남시욱 역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달랐던 환경을 지적한다.
“오스트리아는 미, 영, 불, 소, 4개 연합국 군대가 진주하기 3개월 전에 이미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인 칼 레너 박사가 수반이 되어 각파를 망라한 연합 정권인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합구역으로 하는 행정을 실시했다. 즉, 오스트리아에는 미소 두 나라가 국토의 반씩을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김일성 같은 소련의 대행자나 박헌영 같이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수립하려는 볼셰비키도 없었다.” (《한국 보수세력 연구》,286페이지)
 
 
[박스] 대한민국을 ‘南側’(남측)이라 표기한 교과서
 
“(제네바 정치협상 결렬) 이후 북측은 평화통일론을 앞세우며, 전후 복구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반면 남측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주력하였다.”
 
천재교육이 올해 펴낸 高校 한국사 교과서 330페이지의 上記 기술은 문제가 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美 국무장관 사이에 서울에서 가조인되고, 1953년 10월1일 미국의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1954년 11월18일부터 발효되었다. 제네바 정치협상은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시작되었으므로 韓美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것은 그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이다. 교과서는 북한 정권은 평화통일과 戰後 복구를 추진한 데 반하여 한국은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주력했다고 대칭시킴으로써, 학생들에게 김일성 정권은 긍정적인 일을 하고 李承晩 정부는 부정적인 일을 한 것처럼 그릇된 인상을 심을 가능성이 크다. 평화, 통일, 복구 같은 낱말과 동맹강화, 군사력 보강 같은 낱말이 주는 인상은 北에 유리할 것이다.
 
이 교과서는 ‘북측’, ‘남측’이라고 적었다. 이는 헌법정신 위반이다. 한반도엔 합법성과 정당성을 가진 민주공화국은 대한민국뿐이다. 북한 정권은 대한민국 영토를 강점하고 남침전쟁을 일으킨 ‘反국가단체’이다.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을 同格으로 놓아선 안 된다. 특히 한국사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이 가진 정통성과 정체성을 헌법에 기초하여 정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과 反국가단체를 同格으로 놓음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國格을 폄하하고 북한 정권을 대한민국 수준으로 추켜세워 주었다. 북한 정권에 유리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일종의 利敵행위이다. 이 교과서는 建國 과정을 기술함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북한 정부 수립’이란 표현을 써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 즉 국가가 두 개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북한 정권’이라고 해야 하는데 ‘정부’라고 호칭함으로써 집단을 국가로 승격시켜 준 것이다.
 
역사적 영향력에 있어서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결’은 북한 정권의 거짓 평화통일 전술과 대칭하여 설명할 수준이 아니다. 戰後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韓美동맹이란 울타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자유와 번영을 지켜주는 생명선이다. 韓美상호방위조약에 의한 韓美동맹 확보는, 李承晩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고, 민족사의 가장 성공적인 외교활동이다. 이 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해 李 대통령은 단독 北進論(북진론)을 펴고, 1953년 6월18일에는 反共포로를 석방하여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압박하는 등 처절한 노력을 다했다.
 
이 교과서는 햇볕정책이란 利敵행위는 김대중의 이름을 들면서 美化하고 韓美동맹 구축이란 偉業(위업)은 주인공 李承晩의 이름을 ‘남측’으로 대체하여 그 의미를 축소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 설명은 30줄이 넘고, ‘남측의 한미상호방위 조약 체결’은 한 줄이다. 민족사의 가장 큰 쾌거중 하나인 韓美동맹을 ‘남측 군사력 보강’ 운운하면서 애써 그 의미를 흐리고 폄하한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이나 대한민국 건설세력에 유리한 사건은 축소 내지 묵살하고 북한 정권에 유리한 사건은 과장하고, 불리한 사건은 축소 내지 묵살하는 左편향성을 일관성 있게 보인다.
 
문제는 ‘남측’이란 反헌법적 용어를 삭제하지 않고 검정해준 李明博 정부의 敎科部(교과부)이다. 학생들이 대한민국을 ‘남측’, 북한의 민족반역정권을 ‘북측’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정의감, 애국심, 통일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자료] 韓美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1일)
 
▲근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당시 헌법(1952년 7월7일 공포, 헌법 제2호) 제52조에 따라 체결되고 제42조에 따라 국회에서 비준되었으며, 제7조에 따라 발효되었다.
▲배경: 미국은 우리나라 외교에 있어서 가장 긴밀하고 실질적인 우호·협력관계를 맺어온 나라이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정부수립을 후원한 가장 중요한 우방일 뿐만 아니라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우리나라 방위에 앞장섰었다.
1953년 7월 정전이 성립되자 북한의 재침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한·미간에 동맹의 체결을 촉구하였다. 이보다 앞서 6월에 로버트슨 미국 대통령 특사가 방한했을 때 양국간의 절충이 시작되었고, 두 달 후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美 국무장관의 회담이 ‘한미상호방위조약’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내용: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미합중국간의상호방위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美 국무장관 사이에 서울에서 가조인되고, 1953년 10월 1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1954년 11월 18일부터 발효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문과 6조로 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全文)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확인하며, 또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평화 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당사국 중 어느 1국이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고립되어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가 갖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동의 건의를 공공연히 또한 공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또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이 발달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제1조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전쟁이라도 국제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국제연합에 대하여 부담한 업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제2조 당사국 중 어느 1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으로나 공동으로 자조(自助)와 상호 원조에 의하여 무력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 강화시킬 것이며 본 조약을 이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하에 취할 것이다.
제3조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 지배하에 있는 영토와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 지배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무력 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제4조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제5조 본 조약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에 의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 효력을 발생한다.
제6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후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終止)시킬 수 있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한다.
본 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문과 영문 두벌로 작성되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변 영 태
미합중국을 위하여 존 포스터 덜레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이루어진 미군의 한국주둔과 미국의 핵우산정책은 지금까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유지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5139
 
 
2. 교과서, 공산주의자 呂運亨을 민족주의자로 美化
 
建國에 惡영향을 미친 呂運亨의 左右합작 활동 긍정적 서술
呂運亨의 親日-親北 행적에 대한 기술 全無
법문사, 공산주의자 金午星의 呂運亨 美化 글 그대로 인용 게재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해방기 左翼(좌익)의 간판 인물인 夢陽(몽양) 呂運亨(여운형)을 기술하면서 그의 親日행적을 지적하지 않았으며, 건국에 惡영향을 끼친 左右合作(좌우합작) 활동에 대해 긍정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 교과서는 呂運亨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準)과 조선인민공화국(人共)이 ‘종이정부’에 불과했던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人共은 그러나 미군의 진주를 앞두고 수세에 몰린 建準이 택한 자구책이었고, 李承晩 등 명망 있는 지도자들을 인민 대표위원으로 임명했으나 과시용 展示(전시) 내각에 불과했다.
 
■ 법문사 발행 한국사 교과서는 두 번(288, 304페이지)에 걸쳐 여운형의 사진을 게재해 그의 좌우합작 활동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교과서는 金午星(김오성, 본명 김형준)의 《지도자 군상》을 그대로 인용해 親日 행적이 명백한 呂運亨에 대해 “모든 지사들이 절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對日 협력을 감행하고 있을 때에도 呂運亨 씨는 끝끝내 고상한 절개를 지키고 불응하였다(288페이지)”고 기술했다.
金午星은 공산주의 이론가로 1944년 8월 呂運亨과 조동호가 결성한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3黨이 합당되어 남조선로동당 창당과 함께 남로당 중앙위원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 1947년 越北(월북)했다.
김오성은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이후 북한에서 문화선전부 부상을 지내는 등 요직을 겸한 인물이다.
 
■ 천재교육의 경우 법문사와 더불어 여운형의 親日행적에 대한 언급 없이 1945년 8월16일 呂運亨의 휘문고보 방문 사진을 게재했다.
교과서는 사진설명에서 呂運亨이 조선총독부 엔도(遠藤柳作) 정무총감을 만나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조선인들의 건국 활동을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準)를 결성하였다고 기술했다. 천재교육은 또 呂運亨 중심의 건준(建準)에 대해 306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정부 수립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미군이 들어오기 전인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각지의 조직을 인민위원회로 바꾸어 나갔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외형적으로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각료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해외에 있던 당사자들과 우파 정치인들은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노선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교과서는 이처럼 呂運亨이 左右를 아우르는 정치조직을 구성하려 했던 점만 강조하고, 親日행적과 建國에 악영향을 끼친 左右合作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았다.
 
■ 삼화출판사는 한 페이지(288페이지) 전체를 할애해 呂運亨의 조선건국동맹에 대해 기술했다. 교과서는 구체적으로 呂運亨의 조선건국동맹에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을 강조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독립동맹, 조선건국동맹은 각각 활동하는 지역이 달랐지만, 모두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건국을 준비하였다. 세 단체가 만든 건국 강령은 광복 후 민주 공화국을 만드는 데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하였다”고 기술했다.
 
■ 미래엔컬쳐그룹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신탁통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좌우익의 협력이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가하여 민족전체의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결과 1946년 미군정의 지원 아래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개최되었다(330페이지)”고 서술했다.
 
■ 비상교육과 지학사의 경우도 다른 역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呂運亨의 조선건국동맹과 좌우 합작 운동을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극복한 건국 준비 활동(비상교육, 296페이지)”, “분열된 정국을 통합하기 위한 활동(지학사, 263페이지)” 등 긍정적인 서술로 일관했다.
 
 
[해설] 親日-親北으로 얼룩진 ‘呂運亨의 生涯’
 
6種의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呂運亨을 민족주의자로 포장하고 그가 마치 建國에 큰 業績(업적)을 남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운형의 행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명백한 歷史歪曲(역사왜곡)임을 알 수 있다. 소련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우리말로 옮긴 呂運亨과 그가 주도한 건준(建準)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정국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1945년 8월10일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 내의 일본인 생명과 재산이 위협 받게 될 것을 우려해 宋鎭禹(송진우)에게 국내 치안유지의 모든 권한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宋鎭禹는 이를 거절했으며 金俊淵(김준연)도 동일한 교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러한 宋鎭禹와 金俊淵의 거절에 놀란 총독부는 제3의 인물로 1945년 8월15일 아침 8시 여운형을 정무총감 관저로 급히 초대해 조선이 해방을 맞아 정치적 공백기에 처했을 때의 치안유지의 협력을 요청했다. 呂運亨은 이를 즉석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이때부터 ‘치안유지의 협력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呂運亨은 그 날로 좌익계의 鄭栢(정백), 崔容達(최용달) 등과 함께 建準을 조직하고 동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建準의 깃발아래 1945년 8월30일까지 145개의 建準 지방위원회가 결성됐다. 조직기반이 취약한 여운형은 남로당의 당수 朴憲永(박헌영)과 제휴, 建準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여운형은 建準 결성 후 ‘건국치안대’를 조직 했는데, 이 치안대는 9월2일자로 建準에 통합됐다.
 
그러나 建準이 좌경으로 변질되자 건준 부위원장 안재길 및 민족진영 인사들은 建準을 사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1945년 9월3일 2차 개편대회를 열고 李康國(이강국)을 비롯한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간부로 등용한 뒤,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과 연합했다. 같은 해 9월4일 건준은 박헌영, 여운형, 정백 등 4명에 의한 인공설립준비위원회를 거친 뒤,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人共)을 선포했다.
 
建準은 人共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1945년 9월6일 해외에서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민족진영 인사들 가운데 李承晩을 주석으로, 金九를 내무장관에 정해 놓는 등 일방적으로 내각 명단을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욱이 인공의 중앙인민위원회의 내각구성원을 살펴보면 전체 인원 52명 가운데 72%인 38명이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종오著, 《변질되어가는 한국사의 진상(上)》, 43페이지 인용)
이것만 봐도 呂運亨의 建國(건국) 구상과 행적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전위역할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呂運亨은 또 일제치하에서 입건되어 서울지방법원 재판과정에서 일본을 위해 獻身(헌신)하겠다는 ‘충성서약’을 한 親日(친일) 세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동신문> 1946년 2월 17, 18일자에 따르면 呂運亨은 1943년 2월6일 일본 검사에게 제출한 진술서에서 “일본을 위해 對(대)중국 공작을 할 수 있으니 기회를 달라”며 漢詩(한시)까지 지어 충성을 맹세했다. 詩의 내용은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砲煙彈雨又經筆·포연탄우우경필) 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爲國請纓捨一身, 위국청영사일신)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千億結成共榮日, 천억결성공영일)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太平洋水洗戰塵, 태평양수세전진)”이다. 여기서 ‘천억’은 일본이 중심이 된 東洋을 말한다.
 
또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에서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2000만 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950년 11월 UN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도 그를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趙炳玉(조병옥) 박사는 《나의 회고록》(도서출판 해동, 1986, 163~164페이지)에서 여운형의 親日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여운형, 안재홍 두 사람은 日政(일정) 말기에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전에는 항일파요, 민족적 지도자로 관록을 가진 여운형, 안재홍 씨 두 분은 영국령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필리핀의 마닐라가 일본에 의하여 점령당한 후 미-영 연합국이 패전하고 일본이 승리한다고 오산한 나머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끼(小磯國昭)에게 불려가서 소위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과 황국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만약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여기에 그 증거로서 매일신보에 실린 담화와 논문과 사진들이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보시오. 누구의 필적이며 누구의 사진인가를(이하 생략)”
 
이기하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급조》와 한국일보사가 1987년 발행한 《한국의 정당》에는 呂運亨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韓人(한인) 제1호’라며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議政院(의정원) 대의원, 임정 외교부장관과 노동청년단장을 역임하는 한편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뒤, 이르쿠츠크 재건공산당 상해지부당원, 소련 공산당 한인(韓人) 제1호 입당, 조선공산당 해외부원, 中共黨江蘇省黨입당 활동 중 상해에서 일본 영사경찰에 체포, 본국에 압송되어 3년간 복역 후 中外日報 사장 등을 거치며 활동하다가 權泰錫(권태석)을 만나게 된다…….(중략) 그러나 얼마 후 日本世話會 주선으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여운형의 약속으로 일본인 대표로부터 70만원의 거액을 받고 사태가 수습됨으로써 건준 활동은 재개했다.”
 
한민성의 《추적 여운형》(갑자문화사, 1982년, 100페이지)에는 呂運亨이 처음부터 ‘대한민국’이란 국호(國號)를 극력 반대하고 ‘조선공화국’을 주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여운형의 족적이라면 한 마디로 말해서 소련공산당의 세계적화 공작에 뛰어들어 그 주구(走狗)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적화 공작에 앞장서서 그 하수인으로서 죽는 날까지 놀아났다. 일급 하수인답게 그의 당적(黨籍)도 화려하다. 즉 상해파, 고려공산당원 이르크츠크파 공산당원, 소련공산당원, 조선공산당원, 중국공산당원, 중국국민당원(중국 적화 공작을 위해 침투), 장안파 공산당의 비밀당원 공산분자들이 일야(一夜)에 날조(捏造)한 소위 인민공화국의 부주석, 인민당 당수, 가짜 김일성파인 사회노동당위원장, 북로당계인 노동인민위원장 등으로 소련공산당 지령에 따라 조국과 민족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공산당원답게 공산당을 위해 광분하였다.”( 《추적 여운형》, 갑자문화사, 1982년, 187페이지)
 
‘현대공론’(이현택, 1988년 9월호 432~433페이지)에 게재된 ‘여운형의 딸들은 왜 서울에 올 수가 없는가’에는 월북(越北)한 여운형 일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몽양의 유가족들이 생존의 보호막을 찾아 월북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가슴 속에서 통곡한 사람은 여운구 씨의 선친인 여운홍 씨였다. 1985년 가을 이산가족 방문단이 평양에 갔을 때 여연구 씨가 인민회의 부의장으로 환영회장에 나왔었다는 것이 공식적 확인이었다. 그 밖에는 단편적인 미확인자료이지만 큰 누님(장녀) 난구(鸞九)는 이미 연로했으니까 알 길이 없고, 둘째 연구는 무슨 단체의 사무총장, 그리고 4남 붕구(鵬九)는 수산업 관계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3남 영구의 소식은 전혀 모르겠다고 여운형 일가의 최근 상황까지 밝히고 있다.”
이처럼 呂運亨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정국을 올바른 길로 수습해야 할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越北해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그의 딸 여연구(1996년 사망)는 생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북한 정권에 충성을 바쳤다. 여연구는 문익환, 유원호 등의 訪北을 알선하기도 했다. 이러한 呂運亨을 순수한 민족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誤導(오도)하는 극히 위험스러운 행위다.
 
 
3. 高校 한국사 교과서, 김일성 ‘抗日’(항일)집중 부각
 
김일성 등 공산주의 계열 抗日운동 집중부각
李承晩 독립운동, 2종의 교과서만 간략하게 기술
 
6種 高校 한국사 교과서 中 5種의 교과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계열의 抗日(항일)운동을 집중 부각시켜 서술했다. 반면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2종의 교과서가 독립협회 활동, 1930년대 이후 독립 운동만을 간략하게 다뤘다.
 
5種의 교과서는 김일성의 ‘東北抗日聯軍’(동북항일연군)을 기술하면서 이들이 물자 보급을 위해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을 구별하지 않고 강탈행위를 했던 점,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 약탈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점 등을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북한은 김일성·최현·김책·최용건 등 북한 정권의 핵심 세력이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정치·군사간부로 활동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주장 및 문헌을 일본에서는 和田春樹(와다 하루키) 등 親北성향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 저작 활동을 했다.
 
하루키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은 북한에 있으며,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국내에 소개된 하루키의 저서로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년), ‘역사로서의 사회주의’(1994년), ‘한국 전쟁’(1999년), ‘북조선-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2002년),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2004년) 등 다수가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서동만, 이종석 등 좌파 학자들이 하루키의 저서를 대거 수용,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기정사실화 했다. 1992년 이종석은 하루키의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의 번역서를 출간했으며, 서동만은 2002년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를 번역했다. 새로 발간된 6種의 高校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5種 교과서는 김일성의 抗日운동 문제를 기술하면서 위와 같은 국내외 좌파학자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 高校 한국사 교과서 8명의 집필진 가운데 6명이 좌파성향인 천재교육은 7장 ‘전체주의의 대두와 민족 운동의 발전’에서 한 페이지(280페이지)를 할애, 韓人공산주의자 주도의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중국 공산당 주도의 ‘동북항일연군’을 집중 부각시켜 서술했다.
 
■ 미래엔컬처그룹 역시 7장(301페이지)에서 중국 공산당 중심의 ‘동북인민혁명군’(훗날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의 抗日(항일) 및 ‘보천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전후 북한의 정치-경제 변화’(347페이지)에서 反김일성 세력 숙청을 소개하며 “북한 정권은 김일성과 그를 따르는 항일 유격대 출신 인사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후 복구 사업을 주도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고 기술했다.
 
■비상교육은 7장 ‘만주 지역의 항일 유격 투쟁’(290~291페이지)에서 “1920년대 초부터 만주 지방에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우리 농민들의 의식도 변화하였다”며 ‘동북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를 소개했다. 비상교육은 ‘조국광복회’를 ‘동북항일연군’ 내의 민족 운동가들이 이념의 차이를 초월해 反日 공동 전선을 만들기 위해 결성한 단체로 설명했다.
북한은 ‘조국광복회’를 “조선인민의 역사에서 최초의 주체형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이며,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를 통일전선운동에 철저히 구현한 강력한 지하혁명조직”으로 규정한다. 특히 조국광복회 결성으로 항일무장투쟁 승리를 가져왔고 결국 조선해방을 앞당기게 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조선로동당력사》, 1979년 판, 118∼140쪽),《력사사전Ⅱ》, 1985년 판, 299∼301쪽, 《현대조선력사》, 1983년 판, 제4장 2절).
 
■삼화출판사는 7장 279페이지에서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단결을 추구하였다”면서 ‘동북항일연군’이 마치 만주지역 항일 운동 주도단체인 것처럼 서술했다. 또한 비상교육과 마찬가지로 ‘조국광복회’를 “이념과 민족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이루기 위해 결성된 단체”로 기술했다. 삼화출판사는 ‘역사의 창’에서 한낱 난동에 불과했던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소개했다.
 
■지학사는 7장 242페이지에서 ‘만주에서의 항일 유격 투쟁’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만주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전파되었다”면서 ‘동북항일연군’을 소개했다.
 
 
[해설] 김일성 抗日(항일)운동의 實體
 
북한은 1871년 辛未洋擾(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金日成의 증조부인 金膺禹(김응우)가 주도한 것으로 조작했다. (《조선력사》, 3권 93~94쪽) 金日成은 또 자신의 경력을 조작해 북한 정권 수립을 正當化(정당화) 하고 스스로 수상이 됐다.
 
金日成(본명: 金成柱)은 李承晩의 대한민국을 가리켜 “親日부역배들인 한민당과 李承晩이 결탁하여 세운 美帝의 傀儡(괴뢰)정부이므로 正統性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서 민족사적 正統性이 북한에 있고 그 근거는 抗日 빨치산 투쟁을 했던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나 金日成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필요한대로 親日派(친일파)를 등용했다. 金日成의 동생이자 현재까지 북한의 실력자인 金英柱(김영주)는 과거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으며 국가부주석을 지낸 김일성의 외척 康良煜(강양욱)도 종교-문화 부문의 친일파였다. 과거 남로당 실력자로 6.25 전쟁기간 중 서울시 인민위원장이었던 李承燁(이승엽)의 경우 일제시대 인천양곡조합 간부였다. 남로당 간부였던 鄭栢(정백) 등도 친일파였다.
 
金日成은 또 뼈 속 깊은 事大主義者(사대주의자)였다. 젊은 시절 滿洲(만주)를 전전하던 金日成은 1940년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직후 스탈린은 한반도 분할과 소련군 진주에 대비해 극동군 정치부와 정보당국에 38도선 이북의 지도자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소련극동군 산하 88특별여단 제1대대장 金日成이 8명의 후보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다. 스탈린은 “북조선을 소련의 뜻에 맞게 이끌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하라”는 지시에 따라 소련 극동군이 金日成 심사에 나섰다.
당시 스탈린의 비공개 심사에서 “소련의 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충성을 맹세하여 합격한 金日成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부하들과 함께 소련 군함을 타고 추석 전날 원산으로 귀국하면서 자신을 金成柱라 소개했다.
 
마중을 나간 원산인민위원회는 소련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金日成 장군은 없다”고 하자 소련 사령부는 “金成柱가 바로 金日成”이라고 했다. 이 날은 소련 극동군 산하 제25군이 평양에 주둔군 사령부를 개설한 1945년 8월26일로부터 24일이 지난 9월19일이었다.
金日成이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1945년 9월22일,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스탈린이 의도한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소련의 비호로 귀국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해방자 소련군 환영대회´에 등장한 김일성은 33세 애송이였다. 그는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을 선포하고, 7월에 스탈린에 의해 북한 정권의 통치자 최종 낙점을 받았다.
 
1945년 10월14일 金日成의 입국환영 평양 군중대회에서 사진을 보면 그의 뒤에는 여러 명의 소련군 고위급 장교들이 소련깃발 아래 서 있다. 이것은 金日成이 소련군의 영향력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의 공식간행물에 나오는 바로 이 동일한 사진에는 당시 소련군 장교들과 소련기가 지워져 있다.
 
보천보 전투의 實體
 
북한은 그동안 金日成의 ‘普天堡 戰鬪’(보천보 전투)를 역사적 사변으로 일컬으며 金日成의 抗日무장투쟁사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선전해왔다.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西崗(서강)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교과서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金日成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몇 명의 전투원이 참가하고 몇 명을 사살했다는 등 구체적 戰果(전과)에 대해 일체 설명이 없다. 단지 보천보 전투를 통해 “조선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할 것을 외쳤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주장만 있을 뿐이다.
 
金日成 및 일부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다. 1937년 6월4일 金日成은 90여 명을 인솔해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을 맞고 사망했다.
 
金日成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이렇듯 보천보 전투는 戰果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敵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戰果(전과)라면 戰果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한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戰果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중국 공산당 주도의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 등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金日成 부대의 單獨(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해왔다.
 
抗日유격대 수십 명이 金日成 이름 사용
 
일제시대 滿洲와 극동지역 일대의 抗日유격대에는 수십 명이 金日成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金日成 장군을 연구하다 수년 전 타계한 이명영 前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김일성 열전》을 통해 북한의 이 같은 역사조작을 지적한 바 있다. 李 교수는 자신의 著書에서 “보천보 전투의 金日成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金光瑞(김광서)라는 사람”이고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 정권이 해방 후 북한의 공산 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소련 지휘 하에서 훈련받았던 滿洲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金日成의 본명은 金聖柱(김성주)로 북한에 들어와서 초기에는 金英煥(김영환)이란 變名(변명)으로 행세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가짜 金日成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金聖柱로 하여금 金日成으로 행세케 해 金聖柱가 金日成 장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前 평안남도지사 박인각 씨는 “연설에 앞서 스티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金聖柱가 金日成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출신의 이영훈 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金日成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金聖柱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金日成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金聖柱가 抗日투쟁의 金日成 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김일성 평전 續(속)》을 발간한 허동찬 고려대 교수이다. 在日동포로 조총련 전문가인 허 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金日成 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金日成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金聖柱였다”고 말했다.
 
1945년 <해방신문> 기자로 6.25 동란 후 越北(월북), 북한 외무성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金日成 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보여주며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이 金日成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 전투의 일본 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美 극동사령부 군사정보국은 1952년 7월31일 작성한 북한군 보고서를 통해 金日成(Kim Il Sung)의 본명은 金聖柱(Kim Sung Chu)이며, 1885년 출생해 1935년 사망한 ‘장백산의 호랑이’ 金日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90, 91페이지에서 金日成으로 알려진 金聖柱는 길림성의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했고 1929년 학교를 떠나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해방 이후 소련군 대위로 북한에 돌아온 金聖柱은 曺晩植(조만식)에게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며 정체를 속이면서 접근했고, 曺晩植은 그해 10월3일 평양에서 열린 해방 기념행사에서 金日成을 민족주의자로 소개함으로써 金日成이 일약 북한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고 밝히고 있다. 극동사령부는 金日成을 개인적으로 아는 非공산주의자들은 金日成이 목이 굵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행정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했다고 기록한 뒤, 게릴라 지도자로서는 유능하다고 덧붙였다. 결국 이 같은 증언과 국내외 기록들을 통해 북한에서 주장하는 金日成의 抗日투쟁이 사실을 美化하고 왜곡·과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스] 金日成 보천보 전투 조작 사실 재확인
美의회도서관, 北정권 수립 관여 고려인 81명 手記 마이크로필름 제작
 
1950년 당시 金日成이 스탈린을 방문해 6·25 작전계획을 작성한 사실과 金日成이 普天堡(보천보)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조작한 사실 등이 최근 마이크로필름(美 의회도서관 자료)으로 제작된 고려인들의 手記(수기)에서 재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장학봉 前 북한 정치사관학교장이 수집한 고려인 81명의 수기 모음집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우리들의 력사》에 기록돼 있다가 최근 국내에 공개됐다. 6·25 작전계획 수립과 보천보 전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유성철 前 작전국장의 수기《피바다의 비화》에 실려 있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쓰딸린을 방문…(중략) 6·25전쟁 작전계획은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성되었는바…(중략) 소련 고문단 와씰리예브 중장, 뽀쓰트니꼬브 소장…(중략) 들이 주동 역할을 하였다.”
“1937년 보천보 파출소를 습격한 유격대는 진짜 金日成이 지휘했지만, 그는 파출소 습격 후 추격을 받다 조우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戰死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이른바 ‘金日成 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 대해서는 “金日成이 연단에 올랐다.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중략) 33세의 청춘이었다. 내가 아는 진짜 金日成은 50성상이 된 노(老)장군이시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박인각 前 평안남도지사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박 씨는 “연설에 앞서 스티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金日成 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金聖柱가 金日成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보천보 전투의 金日成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 陸士(육사) 출신의 본명이 金光瑞(김성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親北성향의 국내 左派 학계를 중심으로 북한 金日成과 보천보 전투의 金日成 장군이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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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기사] 교과서에서 찾기 힘든 李承晩의 독립운동
 
高校 한국사 교과서에서 李承晩(이승만)은 ‘현대사’ 부분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 시기에도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6種 교과서 모두 이승만이 첫 등장하는 부분은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다룬 내용에서다. 앞부분에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인물이 갑자기 ‘대통령’으로 깜짝 등장하는 셈이다.
6種 교과서 중 특히 미래엔컬처그룹,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黙殺(묵살)하고 있었다.
 
언급없다가 갑자기 ‘대통령’으로 깜짝 등장 후 바로 탄핵되는 李承晩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에서 이승만의 첫 등장은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술 부분의 “임시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선임되었다”는 문장에서다. 교과서 상으로는 독립운동 부분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갑자기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 뒤 “미국에는 구미위원부를 두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라는 한 줄의 활동 설명이 있은 후, “이에 임시 정부는 미주 지역의 독립 자금을 독점하면서 대통령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을 고쳐 국무령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240페이지), “미국 정부에 일본 대신 국제 연맹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241페이지, ‘탐구활동’에서 신채호의 주장으로 소개)의 내용이 ‘독립운동’ 시기 이승만을 언급한 내용의 전부다.
 
천재교육刊 교과서에서도 이승만의 첫 등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부분의 한성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하였다는 내용에서다. 이후 “9월11일 제6차 임시의정원은 개정 헌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 임시정부의 내각을 조직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업무를 계속하였으며, 11월3일에 내각 취임식이 있었다”(235페이지), “19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는 이승만 등이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36페이지) 등의 내용이 등장한다.
 
그러다가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서 제출 사실이 언급된 후, “국민대표 회의 이후 임시 정부는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대신할 대통령 대리 제도를 두려 하였다.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여 미주 동포들로부터 거둔 독립자금의 송금을 끊었다”(p.239)는 설명과 함께 대통령 탄핵의 내용이 등장한다. 활동 내용으로는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하고 외교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21년 하와이에서 동지회를 설립하였다”(p.247)는 내용이 전부다.
 
李承晩이 주체하거나 참여한 사건에도 생략
 
그 외 李承晩이 주체·참여한 사건이나 행사에서도 그는 생략되어있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의 경우,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의 무효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는 부분에서, “특히 미국에 지원을 호소했다”(176페이지)는 내용이 소개되지만 이를 위해 밀사로 파견된 이승만은 언급되지 않는다. ‘미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232페이지) 부분에서도 이승만은 찾아볼 수 없다. 대한인국민회 소개와 함께 실린 안창호의 사진, 스티븐스를 사살한 장인환・전명운, 하와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무장투쟁론자 박용만의 이름과 사진이 등장할 뿐이다.
 
3·1 운동 부분에 언급되어 있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는 미주 지역 동포들이 모여 3일간 한인 자유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였다”(236페이지)는 부분에서도 행사를 주도한 이승만, 서재필 등은 생략되어 있다. ‘독립군 자금 지원에 앞장 선 미주 동포들’(265페이지) 부분에서도 안창호가 중심이 되었던 ‘대한인국민회’만 소개될 뿐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등은 언급되지 않았고, ‘미주 지역에서도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다’(309페이지)에서 임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받아내려는 외교 활동을 소개하면서도 이승만은 언급되지 않았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미주 지역 교민들의 활동을 다루는 내용이나 3·1 운동 후 필라델피아에서 진행된 한인자유대회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승만은 언급되지 않았다. “미군 OSS(美 육군 전략처)가 임시 정부와 협의하여 50명의 대원들을 선발하여 시안에서 첩보 훈련을 시작하였다”(279페이지)는 내용에서도 처음 미국 측에 이를 제안하고 추진한 李承晩의 노력은 생략되어 있다.
 
이러한 두 교과서로 학습하는 경우, 학생들에게 남는 ‘李承晩’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은 李承晩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해 박사를 취득한 명망 하나로 대통령이 되었는데, 완전독립에 반하는 위임통치를 요청하기도 하고, 대통령 대리 제도를 두려하자 자금을 끊어버린 외세의존적이고 몰상식한’ 사람으로 기억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뒤에 등장하는 현대사 부분은 ‘독재자’ 이미지이니 앞뒤가 맞는 셈이다.
 
反이승만파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교과서에 등장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분열 시기에 등장하는 李承晩에 대한 비판이다. 미래엔컬처그룹刊 등 5種 교과서가 모두 李承晩의 3·1 운동 직전에 있었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요청’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법문사刊 교과서만이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정부 내 지도자들 사이에 대립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활동’(236페이지)에서 李承晩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요청’이 담겨진 청원서와 ‘반대파’들이 제출한 ‘이승만 불신임안 주문’ 내용 일부를 수록한 후, ‘이승만이 생각하는 독립의 방향을 말해보자’라는 질문을 던진다. ‘불신임안 주문’에는 “현임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 사업을 빙자하고, 미주에서 동포가 정부 상납하는 재정을 모아서 마음대로 사용하였고, …헛된 선전으로 동포를 유혹하며 외교비 모집을 계속하여서 그 재정으로 자기의 지지자를 매수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에는 탐구활동(237페이지)에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이승만의 ( )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임시 정부의 ( )노선을 비판하고 해체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라는 괄호안 넣기 문제가 등장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과 李承晩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파리강화회의를 소집했다. 在美(재미) 한인사회는 이 회의가 한국 독립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이승만, 정한경을 평화회의 대표로 선출했지만, 이들은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이승만과 정한경은 서재필 등과 의논한 결과,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차선책으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청원을 내는 것이 미국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한 것으로 봤다. 2월25일자로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완전독립을 담보로 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청원을 보냈으며, 실제 제출된 날짜는 3월3일이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이승만이 반대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것이 된다. 3·1 운동이 일어났는데도 위임통치를 요청했다는 것은 독립 의지를 버린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대로 추대된 사실을 5월 하순경에야 알게 되었는데, 한성정부는 정통성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진다. 다양한 노선이 함께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하나로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안창호였다. 6월28일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미주의 이승만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통합이 어렵다고 생각해 양자의 중재에 나선다. 안창호는 7월20일 이승만에게 전보를 통해, 한국인들이 지지하고 있으며 위임통치 청원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상하이로 와 줄 것을 요청했다.
 
‘지나간 일’인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국무총리 이동휘였다. 1920년 12월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 후 1921년 1월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이동휘는 첫날부터 위임통치청원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승만은 위임통치는 3·1 운동 이전의 일이고 독립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맞섰다. 이동휘는 제2차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에게 대통령이 상하이에 없을 때 행정의 결재권을 국무총리, 즉 자신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했다. 이승만이 대미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거부하자, 이동휘는 1월26일 국무총리를 사직한다고 선언했다. (이동휘는 이후 고려공산당 창당에 나선다)
 
이어 다른 간부들이 사표를 던지게 되면서 여론은 악화되어 갔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의 반대파는 주로 러시아 일대에 근거지를 둔 무장투쟁론파였는데, 이들은 한, 중, 러 3국이 협력해 독립전쟁을 치를 것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의 군사관계 기관은 노령이나 만주로 옮길 것을 내세웠다. 그동안 외교노선에 큰 성과가 없었다는 점, 미국에서 건너온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던 이승만으로서는 이들을 제압하거나 설득할 만한 특별한 명분이 없었고, 이런 식으로 상해 임시정부는 계속 사분오열되어 갔다. 이러한 임시정부에 희망을 찾지 못한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결국 대통령에서는 탄핵되었으나, 이후에도 임시정부를 존중하면서 임시정부의 미주 지역 활동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무장투쟁론파 등 反이승만파의 비난구실이었던 ‘국제연맹 위임통치 제안’ 건을 5種 교과서에서 크게 다룬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그 문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단지 이승만이 그의 비판자들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는 구실이 되었을 뿐이다. 사실 그 문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와 <신한민보>가 그 내용을 싣고, 그것을 상해에 전달함으로써 이승만을 비난한 수단으로 이용됐다”고 평가한다.
 
그나마 이승만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는 교과서는 삼화출판사와 법문사刊 교과서였다. 법문사刊 교과서는 ‘미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부분에서 이승만의 활동 내역을 소개했다.
“1930년대 미주 지역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꾸준하게 전개하였다. 1931년의 만주 사변으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멀어지자, 이를 기회로 삼아 이승만은 외교 활동을 강화하였다. 먼저 그는 1933년에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회의에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삶을 추적한 저서를 제출하여 국제 연맹의 회원국들이 한국인의 인권 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럽의 여러 신문에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고발하는 글을 기고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하였다. 또, 이승만은 일본의 미국 공격이 있기 직전인 1941년에 일본의 미국 침공 가능성을 다룬 책(《일본, 그 가면의 실체》, 원저 JAPAN INSIDE OUT)을 출간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였다”(p.283)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인물탐구: 이승만과 한국 근・현대사>라는 코너를 통해 이승만의 일생을 요약하여 소개했다.
“이승만(1875~1965)은 배재 학당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개화사상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독립 협회 활동을 하면서 만민 공동회 연사로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고종의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한성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인들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국제 연맹에 위임 통치를 청원한 사건으로 탄핵을 받아 임시 정부 대통령직에서 면직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구미 위원부 대표로서 국제 연맹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김구, 김규식 등과 주도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946년 북한이 공산화되어 간다고 판단한 그는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남한만의 총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일생을 마쳤다.”(326페이지)
 
이승만이 배재학당을 다닐 당시 서재필의 제자였다는 것, 그 유명한 ‘독립협회’의 열성 회원이었다는 것, ‘만민공동회’의 인기 연사였다는 것, 1898년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한 것,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5년 7개월의 옥살이를 한 것, 그의 첫 도미(渡美)는 대한제국의 독립 지지를 미국에 요청하는 고종 황제의 밀사 자격(민영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하와이에서 박용만과 함께 한인고등교육 기관을 세우고 양성한 것,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버드, 프린스턴 등에서 수학해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점, 유학 당시 일본에 호의적인 분위기였던 미국 내에서 어렵게 독립운동을 벌여나간 것, 미국 시민권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의 불편과 위험을 겪으며 독립운동 여행을 다닌 것, 독립운동 시절에도 좌우합작 등으로 치열했던 이념전 속에서 반공(反共)을 지킨 것, 미국조차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당당하고 깐깐했던 독립운동가이자 反共주의자였던 점 등이 제대로만 알려진다면 일부의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이승만’이라는 오해는 풀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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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산당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로 美化한 교과서
 
천재교육, ‘10월폭동’을 ‘10월봉기’ 및 ‘농민저항운동’으로 기술
폭동의 주축이 공산당인 사실, 경찰과 농민을 학살한 사실 생략
 
한국은 단일 민족이 오래 동안 모듬살이 한 덕분에 다른 나라에서 많이 있었던 종교 분쟁, 종족 갈등이 비교적 적었다. 同族끼리의 대규모 학살은 2000년간 한 번도 없었다. 1946년 10월1일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공산폭동은 한국인이 계급적 증오심을 품고서 다른 한국인을 학살한 최초의 사건이다. 공산주의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同族끼리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주동자들은 민족반역의 反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천재교육刊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남과 북의 체제 정비’(314페이지)란 소제목 하에서 이렇게 썼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교과서는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10월 폭동’으로 통용되던 단어를 ‘10월 봉기’ 및 ‘농민 저항운동’으로 바꿨다. ‘폭동’을 ‘봉기’, ‘저항’으로 바꾸면서 폭동 주동자인 공산주의자들의 민족 반역적 惡行을 덮는 정도가 아니라 美化하였다. ‘봉기’와 ‘저항’이란 낱말을 결합시키면 민중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용감하게 들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교과서는, 사실을 왜곡하고 동족학살 행위를 ‘저항운동’으로 성격 규정한 뒤, 이런 결론을 위해 공산당이 주동한 폭동이란 사실, 공산당이 경찰관과 농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을 생략, 은폐하였다. 이 교과서 필자는 동맹국인 미국을 비방하고, 主敵인 공산당을 비호할 목적으로 이런 왜곡된 記述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를 교과서로 채택,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한 이 정부이다.
 
공산당의 선동에 속아 넘어가 10월 폭동(대구폭동)에 가담하였던 학생의 증언을 소개한다.
 
김계철(金桂澈)은 대구사범 학생으로 10월 폭동에 가담했다가 월북, 공산주의의 실상에 절망한 뒤 중국으로 탈출, 1994년 44년 만에 귀향한 사람이다. 김계철은 광복이 되자 좌익 학생들이 대구사범 김용하 교장을 연단으로 끌고 나와 여러 학생들이 보는 데서 ‘민족반역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특별하게 親日행동을 한 적도 없는 김 교장의 머리를 신발짝을 벗어 때리는데 교사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김계철에게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金군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네 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쪽지를 전달받은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하고 물었다. 그 학생이 金군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잠겨 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 있는 송장들을 보여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10월1일 대구에서 좌익 노동자들이 ‘쌀 배급’ ‘日給制 반대’ ‘박헌영 선생체포령을 취하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자위적인 발사로 시위대원 한 사람이 맞았다.(이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아 과연 사망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다음날 흰 까운을 입은 대구의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 나와 시위를 선동하는데 이용한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김계철 소년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다.
 
이날 대구경찰서는 폭도화한 시위 군중에 항복하고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무기를 탈취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준 극렬세력은 同族을 상대로 한 살육의 祭典을 벌인다. 표적은 경찰과 地主들이었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 살육의 방법도 그 뒤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공산당식 이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로는 그 가족까지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고 찍어 죽였다. 공산당이 加虐(가학)취미적 학살을 즐긴 것은 이른바 ‘반동학살’을 ‘위대한 혁명적 행위’로 합리화해 양심을 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선동한 폭동에는 깡패와 양아치, 부화뇌동한 민중이 대거 참여하여 절제되지 않는 살육에 도를 더했다. 좌익 의대생과 의사들이 人命살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립의원에 실려 온 부상 경찰관들은 화단 주변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맞아죽었다.
 
“그중 몇 사람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죽음 직전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청년들은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확인 사살을 했다(당시 대구의대 3년생 김만재 증언)”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 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 나왔다.(이원만 《나의 政經50년》)”
이날 10월2일 오후 미군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장악했다. 좌익 폭도들은 그러나 대구 근교로 진출하여 살상의 피바람은 경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칠곡군 약목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약목지서를 먼저 습격하여 주재중인 세 경관을 기둥에 결박한 다음 낫과 도끼로 全身을 참살했다. 또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사택을 파괴하고 서장, 수사 과장 외 4명의 경찰관을 도끼로 참살했다. 특히 장 서장은 頭部(두부)로부터 밑으로 절반을 째 죽였다.”(《대구시》 1946년 10월 13일자)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가 주동한 구미폭동은 위에 묘사된 살육극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구시보> 정치용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선산군 민전(民戰,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조직) 사무국장이자 선산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이던 박상희는 20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赤旗(적기)가를 부르면서 구미에 있는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여 배철상 서장에게 全機能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金聖東(前 통일원 비상계획국장)소년은 경찰서 옆에 살고 있었는데 이때 구경삼아 거리로 나왔다. 폭도들이 곡괭이와 쇠스랑을 둘러메고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종술 경사가 경찰서 뒤편 철조망을 넘다가 곡괭이에 얻어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더니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日帝 때 기마부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민전간부 김정수가 무기고를 열고 총과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좌익폭도가 처음으로 쳐들어간 곳은 대성당 약방주인 송대헌의 집이었다. 폭도들은 송 씨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더니 기름통을 가져와 2층 건물 현관에 석유를 붓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려는 찰라 “야, 이놈들아”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송대헌의 아들 송재욱은 구미초등학교 음악선생으로 이 사건을 목격했다) 박상희였다.
“누가 이 집에 불 지르라카더노. 어느 놈이 시켰노. 앞으로 투쟁과업을 계속하다가 보면 부상자들도 나올 낀데 약방을 태우면 느그들은 어데 가서 약 바를 거야.”
청년들은 호랑이 같은 박상희의 호통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벅였다. “약방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송재욱 선생은 학교에서 노래 가르치지 느그들한테 욕 가르치나. 이 할아부지(宋秉根 목사)는 독립 운동했는데 느그들한테 뭐 잘못한 거 있노. 그런데 왜 불 질러. 집에 안 가나.”
 
박상희는 청년들이 흩어지자 멍하니 서 있는 송재욱을 향해서 야단을 쳤다.
“조사부 차장은 여기서 뭘 하노. 신분도 안 밝히고.”
송재욱은 광복 직후 박상희의 지도 하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의 조사부 차장이었다. 박헌영 세력이 조종한 10월 폭동을 봉기라고 미화하고 사태의 책임을 美軍政에 轉嫁(전가)한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꼭 기억해야 할 공산주의자들의 민족 반역적, 反인륜적 행위를 모르게 된다. 오히려 공산당이나 농민들이 의로운 저항을 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교과서를 채택, 학생들을 가르치는 李明博 정부는 '이념은 낡은 것'이라 외치고 ‘중도실용’을 자처한다.
 
한국인이 가져야 할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이다. 이는 진실, 正義(정의), 자유를 3대 가치로 한다. 이런 이념을 버린 집단은 별 고민 없이 진실을 팔아넘긴다. ‘중도실용 집단’은 학생들에게 미국을 싫어하고 敵을 좋아하도록 가르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을 일제히 채택, 열심히 反국가적 교육을 시키고 나라를 亡國의 길로 이끌고 있다.
 
 
[박스] 9월총파업·10월대구폭동, 소련이 조선공산당에 지시
해방 전후 北최고 실력자였던 ‘스티코프 일기’로 본 당시 실제 상황
 
해방 직후 남한 전역에서는 조선공산당과 좌익세력이 일반대중을 선동하여 전개한 대규모 폭력투쟁이 잇따랐다. 특히 1946년 남한을 뒤흔들었던 9월총파업 당시 북한의 소련軍政(군정)은 조선공산당 측에 200만 엔을, 이어 발생한 10월대구폭동 기간 중에도 세 차례 추가자금(300만 엔 이상)을 지원했으며, 파업투쟁에 대한 행동지침까지 지시했다.
 
이는 당시 소련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겸 군사평의회위원이었던 테렌치비치 스티코프(1907∼1964)가 작성한 일기에 나타나 있다.
스티코프는 1945년 4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47~1948년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이면서 북한군정청의 사실상 총사령관역할을 했고, 1948~1951년에는 북한주재 초대 소련특명전권대사를 지냈다. 그는 북한 정권수립(1948년)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권수립 후에도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북한의 최고 실력자였다.
 
스티코프는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될까 개인적 기록을 남기지 않은 다른 소련 지도층 인사와 달리 60권의 일기를 남겼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 북한정권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니콜라이 레베제프(예비역 소장)는 후에 ‘그(스티코프)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북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스티코프 일기》는 1995년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이 발굴해 일부 내용이 일간지에 연재됐다. 1996년 연재물을 묶어《발굴자료로 쓴 한국 현대사》를 출간했다. 10년 뒤인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스티코프 일기 중 한반도 관련 내용을 발췌 번역하여 《쉬띄꼬프 일기(1946∼1948)》를 냈다.
 
‘스티코프 일기’ 무시하고 10월대구폭동을 ‘10월 봉기’로 왜곡한 교과서
 
천재교육刊 한국사 교과서는, 1995년에 발굴된 ‘스티코프 일기’라는 중요한 史料(사료)를 무시하고 10월대구폭동을 ‘민중봉기’ 및 농민 ‘저항운동’으로 기술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314페이지)
 
이 교과서는 9월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이 미군정의 수매제 때문에 자연 발생한 것처럼 썼다. 삼화출판사의 교과서는 9월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미군정의 미곡 수집제 실시 설명) 그럼에도 경제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노동자들도 열악한 노동 조건과 빈곤에 허덕이는 가운데 美군정의 정책에 불만이 커져갔다. 이는 미곡 수집제 폐지, 토지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美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314페이지)면서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법문사 교과서의 경우, 본문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남북한의 정치적 혼란’이라는 지도(315페이지)에서 10월대구폭동을 ‘대구 10·1사건’으로 썼다.
2003년도까지 高校에서 사용된 국사 교과서(국사편찬위원회 편찬)에 법문사 교과서의 것과 거의 같은 지도가 ‘반공 의거와 공산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지도에는 ‘대구10·1폭동사건’으로 명시되어 있다.
9월총파업·10월폭동, 蘇군정 지시 받은 조선공산당의 유혈폭력투쟁
 
9월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은 1946년 7월 조선공산당(후에 남로당)이 美군정에 타협적이었던 자세를 철회하고 채택한 유혈폭력투쟁 노선, ‘新戰術(신전술)’의 결과물이다. 7월 중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은 ‘신전술’에 따라 더욱 조직적이며 집단적인 대중적 파업투쟁을 10월에 전개하기로 계획했으나, 조선공산당은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월로 당기라고 지시한다. 이는 조선공산당이 그해 8월말 美軍政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나머지 직원에 대해 月給(월급)제를 日給(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구조조정을 호기로 인식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왔으나, 스티코프의 일기는 이것이 소련군정의 지시였음을 말하고 있다.
 
스티코프의 1946년 9월9일자 일기에 따르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련당국에 문의했다.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을 9월11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 이때는 10월로 예정됐던 총파업을 한 달 당기도록 조선공산당이 전평 지도부에 지시한 무렵으로, 파업시작단계에서부터 조선공산당이 소련당국의 지령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46년 9월23일 부산철도 노동자 7000여 명이 일급제 반대 등을 요구하며 계획대로 파업에 들어갔다. 24일 조선공산당은 ‘남조선 노동자 제군에게’라는 제목의 파업선동전단을 살포했다. 전국의 철도 종업원도 이날 파업에 들어간다. 26일 전평 산하 출판노조가 철도 총파업에 동조하여 ▲좌익계 신문의 복간 ▲좌익인사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한다. 이를 기점으로 29일까지 전평 산하의 전국 각 산업별 노동조합들(전신, 전화, 전기, 운수, 섬유, 금속, 화학, 신문 등)이 전평 주도하에 파업에 들어가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파업으로 확대됐다.
 
9월총파업, ‘스탈린-소련군정-조선공산당-전평’의 지휘계통에 의해 발생
 
이 기간의 스티코프 일기에는 소련군정이 9월26일, 28일 두 차례에 걸쳐 파업의 투쟁 방향을 지시하고 투쟁기금 200만 엔을 지급했음이 기록되어있다. 일기에서 드러난 소련군정의 파업투쟁 지시사항과 남한 파업 시위자들의 요구사항이 일치하고 있는데, 이는 9월총파업이 스탈린-소련군정(스티코프)-조선공산당-전평의 지휘계통에 의해 발생된 사건임을 잘 보여준다.
▲9월26일: 로마넨코(평양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의 취소,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9월28일: 로마넨코가 보고하다.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 및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묻다. 경제적인 요구들,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해도 되는지 묻다. 500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00만엔을 지급하다. 회담에는 로마넨코, 샵쉰(前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영사), 여운형, 김일성, 문일(김일성의 부관)이 참석했다.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다. 경제적인 요구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이다.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한다.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은 미군정이 탄압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여운형과의 회담 및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암호전문을 보낸다.
 
파업투쟁 지침 내용까지 지시
 
소련군정이 지시한 파업투쟁 지침 내용에는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 정치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조선공산당 간부를 포함한 당원 16명을 체포하고 전국의 공산당 본부를 수색했다. 정판사는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인쇄소로, 일제 때 조선은행의 지폐를 찍던 조폐공장이었다. 경찰은 조선공산당이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어 유포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하고 공산당 간부들(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리는 한편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의 3개 좌익신문을 폐간, 10여명의 신문사 간부들을 체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공산당이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태도를 바꿔 ‘신전술’을 선언하고 소련군정의 지시로 9월총파업을 계획·실행한 것이다. 9월총파업은 10월대구폭동으로 연결됐다. 10월1일 대구에서 1000여명의 부녀자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파업 노동자 등이 가세해 시위가 확대되자 경찰이 진압을 위해 위협발사하는 과정에서 군중 한 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사망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고 사망 사실조차 확실치 않다). 다음 날 조선공산당은 좌익학생들을 동원해 시체 한 구를 전날 경찰의 총탄에 사망한 학생의 시체라고 주장하며 들것에 싣고 각 학교를 돌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학생과 시민 등 흥분한 시위자들은 대구경찰서 등 26개 지서와 파출서를 습격, 무기를 탈취했다. 무기를 탈취한 폭도화된 시위자들은 경찰관과 행정관리, 우익인사의 집을 습격해 방화하고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美군정은 2일 오후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병력을 파견해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폭동은 대구 인근지역으로 번졌고, 12월까지 경북 全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서울 등에서 계속됐다. 폭동이 끝난 후 각 농촌지역의 좌익분자들은 산악지대로 잠입, 게릴라화됐다.
 
박헌영, 10월폭동기간 중 소련군정에 향후 투쟁 방침에 대한 ‘교시’ 요청
 
스티코프 일기는 10월대구폭동 역시 조선공산당 지도부와 소련군정이 직접 관여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10월대구폭동이 계속된 약 3개월 동안 소련군정이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조선공산당에 보낸 돈은 300만 엔(10월2일), 39만 엔(12월6일), 122만 루블(12월7일)이었다. 10월대구폭동이 한창이던 10월 일기에는 조선공산당 및 전평이 소련군정의 ‘투쟁방침’을 받아 폭동에 개입했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있다. 소련군정의 ‘지시’를 얻기 위해 전평 의장이 방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과 박헌영 역시 향후의 투쟁 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10월8일: 남조선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의장 허성택이 도착했다. 김일성이나 로마넨코와 회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시를 내리다. (注: 허성택은 10월7일 평양에 나타나 이그나찌예프와의 회담에서 파업투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동지들과 접촉하여 지시를 얻기 위해 방북했다“고 설명했다)
▲10월21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이 향후의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빨치산 부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 할지를 문의하고 있다. 박헌영과 대화하다.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해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들의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
 
 
<스티코프 일기 중 9월총파업·10월대구폭동 관련 부분 발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9월9일: 남조선 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 좌파에 대한] 지원 대책을 강구한다. 박헌영(조선공산당 당수)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 1946년 9월 8일자 서울의 라디오방송 보도에 의하면 박헌영과 이주하(공산당 제2비서) 및 이강국(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注: 미군정이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사회교란 및 폭동 음모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을 가리키는 듯)
▲9월11일: 로마넨코(소련군 민정부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다.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한다.
▲9월16일: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출판물의 반입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하고, 북조선에서 개최된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행동을 폭로하는 시위를 어떻게 보고있나 점검한다.
▲9월26일: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의 취소, 좌익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한다. 로마넨코가 4만명의 철도 종업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고 보고하다. 남조선에서는 파업투쟁이 진행 중이다. 철도 종업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9월25일 오후부터 출판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
▲9월28일: 로마넨코가 보고하다.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 및 요구조건의 관철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묻다. 경제적인 요구들,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해도 되는지 무다. 500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00만 엔을 지급하다. 회담에는 로마넨코, 샵쉰, 여운형, 김일성, 문일이 참석했다.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다.
경제적인 요구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이다.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한다.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에 대해 미군정이 탄압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여운형과의 회담 및 남조선 파업투쟁 상황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암호전문을 보낸다.
▲9월29일: 남조선 파업투쟁의 진행과정에 대한 전문을 스탈린 동지에게 보내다.
▲10월1일: 로마넨코가 보고하다. 남조선에서 공산당 기관지를 제작하는 노동자들이 넘어왔다. 그들은 파업투쟁이 지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조선의 반응은 어떠한가?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2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00만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 동지들에게 300만엔을 지원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
▲10월2일: 김일성과 통화하다. 300만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허용하는 지시를 내리다.
▲10월7일: 이그나찌예프가 보고하다. 1946년 10월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해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
▲10월8일: 남조선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의장 허성택이 도착했다. 김일성이나 로마넨코와 회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시를 내리다. (注: 허성택은 10월7일 평양에 나타나 "파업투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동지들과 접촉하여 지시를 얻기 위해 방북했다"고 설명하고 로마넨코나 김일성과의 회담도 요청했다. /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42, 목록 540935, 문서철1, 116~122페이지에 수록된 대담 기록)
▲10월21일: 부산에서는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 파업운동은 어느 정도 축소됐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은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빨치산 부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 할지 묻고 있다. 박헌영과 대화하다.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전환됐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들의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
▲10월22일: 발라사노프(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 정치고문)와 샵쉰(前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영사)을 호출해 남조선 정세에 대한 정보보고를 청취하다.
▲11월4일: 김일성(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박헌영과 회담한다. 회담 때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한다.(파업, 시위, 무장투쟁)
▲12월6일: 로마넨코에게 전화하다. 박헌영에 대한 재정지원을 신속히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문일(김일성 비서)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하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박헌영과 김일성이 가깝게 지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다.
▲12월7일: 로마넨코를 접견하다. 그의 구좌에 있는 돈 122만 루블에 대해 논의하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구좌를 정리하라고 명령하다. 박헌영에게 지출된 돈의 총계를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하다. 특별히 필요한 곳에 122만 루블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전문을 박헌영에게 보내라고 지시하다.
 
 
5. 制憲(제헌)헌법 ‘민족 사회주의 국가’ 추구(?)
 
삼화출판사刊,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 벌인 서상일의 발언 게재
제헌 헌법 어디에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내용 없어
 
삼화출판사刊 한국사 교과서는 ‘탐구활동’(313페이지)에서 ‘제헌 국회 속기록’을 例文으로 제시하고, 당시 制憲 憲法의 정신을 아래와 같이 ‘민족사회주의 국가’로 소개했다.
 
다음 제헌 국회 회의록을 읽고, 제헌 국회가 만들려고 하였던 나라는 어떤 모습인지 말해 보자.
<우리의 노선은 두 가지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재주의 공산 국가를 건설하느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느냐 하는 데 있어서 이 헌법 정신은 민주주의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는 한 기본 설계도를 여기에 만들어 낸 것입니다. ……헌법의 정신을 요약해서 말씀하자면 어데 있는고 하면 우리들이 민주주의 민족 국가를 구성해서 우리 3천만은 물론이고 자손만대로 하여금 현 시국에 적응한 민족 사회주의 국가를 이루자는 그 정신의 골자가 이 헌법에 총집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헌법 기초 위원장 국회의원 서상일, ‘제헌 국회 속기록’ 제1회 17차- >
 
위 자료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徐相日(서상일) 의원이 헌법기초위원회의 보고 및 헌법안 제1독회(1948년 6월23일, 제17차 회의)의 첫 보고 발언 내용이다. 徐相日은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로 1945년 광복 후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韓民黨(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1946년 비상국민회의 의원에 취임했으며,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선의원으로 당선됐다. 1948년에는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발기해 최초로 헌법개정안을 제기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됐으나 신병으로 활동하지 못하다가 병사했다. 서상일은 혁신계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벌여 進步黨(진보당), 사회대중당 등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삼화출판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과서는 建國 주체 세력으로서의 국내 保守右派(보수우파) 그룹과 이승만을 비롯한 在美(재미)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을 축소-배제했다. 그 결과 脫(탈)식민 사회의 예정 코스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 혹은 ‘자주적 민족국가와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을 제시하면서 마치 이것이 당시 사회 전체의 黙示的(묵시적) 합의였던 것처럼 誤導(오도)했다. 교과서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제화보다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제헌국회가 만들려 했던 대한민국의 국가체제는 서상일이 언급한 것처럼 ‘민족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制憲 憲法은 애초부터 主權이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체제와 질서를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와 자유경제체제임을 확실히 했다. 권력구조로는 내각제적인 요소가 결합된 국회 선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다.
 
또한 制憲 憲法은 당시 현실을 감안해 주요 자원과 산업에 대한 국유화 내지 국-공영 원칙이나 노동자의 이익배분 균점권과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가 어느 정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신생독립국가에서 나타나는 초기 현상이었을 뿐이다. 그 이후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착실히 실현해 오늘에 이르렀다.
 
 
[참고자료] 制憲 憲法의 주요 내용 및 의미 (출처: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제헌 헌법은 자유권의 보장, 권력분립, 단원제 국회, 대통령중심제, 통제경제정책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였다. 제헌 헌법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헌법 전문에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할 것을 천명하였으며,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것임을 밝혔다.
둘째, 총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고 천명하였으며,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국민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고 하였다.
셋째, 국민의 기본권을 폭넓게 보장하였다. 즉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으며,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 신앙과 양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등의 내용을 명시하였다. 그 밖에도 일사부재리의 원칙, 구속적부심사제 등의 자유권, 사회적 기본권으로는 교육받을 권리 및 초등 의무 교육, 근로의 권리, 근로자의 근로3권,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생활 무능력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 결혼·가족의 건강에 대한 국가의 보호 등을 규정하였다. 청구권적 기본권으로는 청원권, 재판청구권, 형사보상권 등을 규정하였다.
넷째, 정부형태는 3권 분립을 통해 권력집중을 막고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을 꾀했으며,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였다. 임기 4년의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한 차례에 한해서 중임을 허용했다.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국회 재적의원 2/3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에게는 긴급명령권, 긴급재정처분권, 계엄선포권을 부여하여 국가 비상사태 시에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밖에도 법률안 제출권, 법률공포권, 법률안 거부권, 조약체결 및 비준권, 선전포고 및 강화권, 국군통수권 등의 권한이 있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는 국무원을 중요정책의 의결기관으로 설치하였다.
다섯째, 국회는 단원제 국회를 채택했으며, 보통·직접·평등·비밀 선거에 의해 선출된 4년 임기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제헌국회의 의원 임기는 국회 개회일로부터 2년으로 규정하였다. 국회의원은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을 가졌다. 국회는 국정감사 권한을 비롯하여 예산심의권 및 의결권, 법률제정권, 대법원장 임명승인권, 중요 공무원 탄핵소추권 등의 권한이 있었다. 국회의 회기는 정기회와 임시회로 구분하였다. 정기회는 매년 12월 20일에 집회 하였으며, 임시회는 대통령 또는 국회의 재적의원 1/4 이상의 요구로 소집되었다.
여섯째, 사법권 독립을 위해 대법원장 임명에 대한 국회 승인제와 법관의 임기제(10년)를 채택하였다. 아울러 위헌법률의 심사·결정을 위해 헌법위원회를 설치했으며, 대통령 등 고위공직자의 탄핵심판을 위해 탄핵재판소를 별도 로 구성하였다.
일곱째, 통제경제를 바탕으로 한 경제 질서를 마련하였다. 중요 지하자원, 수산자원 등을 국유로 하였을 뿐만 아니 라,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전기, 수도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였고 대외 무역을 국가의 통 제 하에 두었다. 아울러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발전을 기본으로 삼았다.
여덟째, 국회는 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 제정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아홉째, 헌법 개정의 제안은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 1/3 이상의 찬성으로 발의할 수 있었으며, 국회에서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가능토록 하였다.
 
제헌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대한민국은 새로운 독립국가로 출범하였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의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하여 민주주의, 법치주의, 국민의 기본권 보장, 권력 분립 등 현대적 의미의 통치 질서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마련된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