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ㆍ이승만 貶下, 김대중ㆍ노무현 美化>
 
李承晩, 朴正熙 등 歷代 대통령 업적 축소ㆍ누락 金大中ㆍ盧武鉉 대통령은 업적 부각되어 강조 北정권보다 南정부에 ‘독재’라는 단어 더 많이 사용 李承晩, 朴正熙는 과연 독재자인가
 
 
1. 建國 建設 대통령 업적을 축소ㆍ외면한 교과서들
 
역사적 업적 누락시키고 兩非論으로 축소 金大中, 盧武鉉 대통령은 업적만 부각
 
高校 한국사 교과서들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업적을 축소하거나,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6種 교과서 중 특히 좌편향이 심한 미래엔컬처그룹刊, 천재교육刊 교과서를 대상으로 대통령 관련 記述(기술) 내용을 분석해본 결과, 특히 李承晩(이승만), 朴正熙(박정희),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을 축소, 누락하고 金大中(김대중),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업적을 미화하는 편향된 서술이 많았다.
 
두 교과서에서 다뤄진 역대 대통령의 업적을, 2002년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ㆍ한국대통령학연구소(소장 咸成得)가 공동으로 엮은 《한국 역대 대통령 평가》에 수록된 역대 대통령의 업적을 바탕으로 비교해 보았다. (재임기간이 짧았던 張勉 총리, 尹潽善ㆍ崔圭夏 대통령은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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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
천재교육刊 |
미래엔컬처그룹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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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정부수립의 정통성, 반공정책, 의무교육, 농지개혁, 해양평화선, 한미상호방위조약, 국가보안법 제정, 반공포로 석방, 근로기준법 제시, 남녀평등권 및 참정권 보장, 전쟁복구 경제 안정화 |
한미상호방위조약, 농지개혁, 의무교육 |
한미상호방위조약(주체無), 농지개혁, 전후 경제복구, 공산주의 막아냄, 자본주의 정착, 통일에의 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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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7.4남북공동성명, 평화통일 3대 원칙 천명, 포항제철, 구미공단, 경부고속도로, 사채동결 조치, 새마을 운동, 국토종합개발계획,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직장의료보험제도, 의료보험법, 국민연금제도, 월남 파병 |
경제개발 5개년계획, 7ㆍ4남북공동성명,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베트남 파병, 7ㆍ4남북공동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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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올림픽 유치, 7년단임제(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3低(저) 호황(경제안정화시책), 이산가족 방문단 실현, 아시안게임 개최, 일본 공식 방문, 시중은행 민영화, 공정거래 법률제정, 수입자유화, 경상수지 흑자 실현, 물가 안정화 정책 |
3低 호황, 물가안정화정책 |
3低 호황, 야간통행금지 철폐, 교복자율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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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
북방정책, 남북한유엔동시가입, 지자제 실시, 남북기본합의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러시아와 수교, 주택 200만호 건설, 최저임금제, 서해안개발착수, 신도시 건설, 공적연금제도 의료보험확충,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한중수교, 대학평가안정제 도입 |
북방정책,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방자치제 부분 실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
북방외교, 올림픽 개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남북기본합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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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
금융실명제, 세계화 정책, 정치개혁법안 입법, 월드컵 유치, 고용보험제도 실시, OECD 가입, 대전EXPO 개최, 여성발전기본법, 노동관계법 제정 |
금융실명제,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OECD 가입 |
금융실명제,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OECD 가입 |
 
 
李承晩의 업적 축소, 누락시켜
 
李承晩 대통령의 경우 업적이 다수 누락되었고 부정적인 서술이 主를 이루었다. 업적이 다루어져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것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교과서 전체적으로 깔려 있는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경우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 ‘반공독재의 강화’가 사용됐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에도 ‘4.19혁명,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다’라는 中제목 하에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이라는 小제목이 再등장한다.
 
李 대통령의 중요 업적 중 하나인 韓美상호방위조약의 경우, 조약을 추진‧체결한 主體(주체)를 흐리거나 아예 미국인 것처럼 소개되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미국 측이 먼저 추진한 것이 아니다. 6ㆍ25 전쟁 이후 한반도 赤化(적화)를 우려한 李 대통령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 조약에 의해 한반도에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은 UN의 토의와 결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남측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여…”라고 서술, 대한민국이나 李 대통령이 아닌 ‘남측’이라는 말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주체를 흐리고 격하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刊은 “6ㆍ25전쟁 후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켰고…”(344페이지)라며 오히려 그 주체를 미국으로 묘사했다. 대한민국이 추진하여 성사시킨 성공적인 韓美동맹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체결한 것처럼 왜곡한 것이다.
 
李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傾向(경향)은 교과서 전체에 나타난다. 천재교육刊의 경우, ‘교육제도의 정비’(335페이지)에서 李承晩 정부가 마련한 6-3-3년제와 의무교육제 확립을 다루면서도, “이 시기에 현재와 같은 6-3-3년제의 교육제도가 마련되었고…”라고 설명할 뿐 李承晩 정부의 업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교육확충은 李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중 하나이다. 이때 양성한 인력이 산업화의 主役이 된다. 反共정책 실시, 동해 평화선 설정(이승만 라인)과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사실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戰後(전후) 경제복구 내용이 다루고 있으나 李承晩 정부의 노력이라고 표현하지 않았고, 제1공화국의 경제안정 정책도 다루지 않았다. 특히 1950년대 미국 원조를 다룬 부분은 왜곡되고 악의적이다. 교과서는 “전후의 경제 재건은 미국의 원조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서술하면서도 원조액(대충자금)의 절반 정도가 미군의 유지비와 무기 구입 자금으로 쓰이면서 미국의 무기 체계에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고 왜곡하고 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는 미공법 480호(미국의 농산물 무역 원조법)에 의해 농산물이 중심을 이루었다. 한국은 원조 받은 농산물을 시장에 팔아 그 대금을 한국은행에 예치하였다. 이 예치금을 대충자금이라고 하는데 정부는 한미합동 경제위원회의 감독 아래 이를 사용하였다. 재정 수입에서 대충자금의 비중은 평균 38%였다. 대충자금은 절반 정도가 미군의 유지비와 무기 구입 자금으로도 쓰임으로써 한국군의 국방력이 강화되었지만, 미국의 무기체계에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알아봅시다’, 대충자금과 미공법 480호, 346페이지)
 
우선 미국의 對韓원조가 농산물 중심이었다는 記述(기술)은 과장이다. 1950년대 미국 및 유엔을 통해 한국 정부에 제공된 원조는 ECA&SEC, CRIK, FOA&ICA, UNKRA, PL480 등 다양하다. 농산물과 관련된 미공법 480(PL480)은 그 중 하나인데, 1945~1959년까지의 전체 원조액 중 미공법 480에 의한 원조액은 5.12%, 미공법 480이 개시된 1956~1959년간을 보아도 전체의 약 11%에 불과하다. 여러 원조를 통해 수입된 물품 중 농산물은 약 17% 정도였으며, 원료‧중간재를 포함한 공산품이 더 많았다.
 
對充資金(대충자금)이란 對外원조의 한 형태로, 미국이 예치한 자금으로 한국 정부가 미국 등 타국에서 물자를 구매한 후 그것을 국내에 판매한 돈을 한국은행에 적립하는 방법이다. PL480에 의한 판매 대금뿐만 아니라, 모든 원조 물자의 판매 대금이 대충자금으로 적립되었다. 대충자금은 한국 정부의 재정자금으로 이전되었는데, 1953~1960년 대충자금은 총 재정수입 중 평균 38%를 차지, 1957년에는 50%를 넘기도 하는 등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再建(재건)의 밑바탕이 되었다. 주로 농지개량사업, 치산치수사업, 토목사업, 상하수도, 통신 등 정부의 공공사업에 투입되거나 민간 부분에 융자로 제공됐다. 대충자금 중 미공법 제480호에 의한 농산물의 판매대금은 주로 국방비로 분류되어 쓰였는데, 1950년대 연평균 국방비의 34.7%에 달했다.
 
1950년대 국방비 중 77.2%가 봉급 및 급식비로 지출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이 대충자금의 절반이 미군의 유지비와 무기 구입 자금으로 쓰였다고 記述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주한미군 유지에 부분적으로나마 직접적인 비용을 분담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로, 1953~1973년까지는 토지와 시설의 무상공여, 세금 및 공공요금의 면제나 감면 혜택 같은 간접비용을 분담하는 데 그쳤다.
 
무기 구입 자금에 쓰였다는 서술과 관련해서는, 1950년대 국방비 지출 내역이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의 수행, 전란 수습 및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어려운 재정상황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연평균 정부 일반재정의 50.7%에 해당하는 예산을 국방비로 편성했다. 이 중 77.2%가 봉급 및 급식비를 포함한 개인유지비로 지출됐으며, 17.9%가 부대 유지비, 전력증강비와 전투준비비는 각각 2.3%, 2.6%에 그쳤다. 한국군이 사용한 무기는 경제원조와는 별도의 경로인 군사원조를 통해 제공된 것이었다. 1954년부터 1961년까지 국군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군사원조는 약 13억 8000만 달러에 달한다.
 
李承晩 정부 당시 부흥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宋仁相(송인상) 前 장관은 “미국 원조는 우리 산업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日帝가 물러난 이후 그들의 자본과 기술력이 빠지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국의 원조가 있어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충자금은 산업자금에 융자·투자 방식으로 방출되기도 했다. 중소기업 지원금으로 2700만 달러와 대충자금을 묶어 400여 개가 넘는 중소기업에 대출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신진자동차 같은 기계공업을 지원했고, 종로3가에서 안경점 하던 분이 플라스틱 안경테 제조를 신청하여 자금을 배정했다. 이 자금이 경제 각 분야에 지원되어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불씨가 됐다> 《전경련 40년史》 ‘이승만의 경제리더십 연구’ 中
 
당시 원조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 생각이 달랐던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원조財源의 구성 비율과 운용 방식을 두고 자주 충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 정부는 원조를 사회 기반설비와 생산재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싶었지만, 미국은 원조가 생활 물품 및 자재의 공급과 정부財政의 균형유지에 사용되길 희망했다. 이 사이에서 고군분투한 李承晩 대통령의 노력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李承晩 정부 때 재무부 장관을 지낸 印泰植(인태식) 씨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로 들어갔다. 李 대통령은 印泰植 장관에게 “지금까지 재무부 장관이나 다른 장관들이 미국 측에 대충자금(원조물자 판매대금) 사용방향을 바꿔 달라고 여러 수십 차례 교섭을 해왔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나로서는 경제건설을 해야 할 우리나라 입장에서 이 대충자금은 공장을 세우는 데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 서 있다. 나의 뜻을 명심하고 미국 사람들을 이해시키도록 힘써 달라…”>《전경련 40년史》 ‘이승만의 경제리더십 연구’ 中
 
허술했던 교과부의 수정권고안
 
 高校 교과서의 미국의 경제원조에 대한 몰이해와 악의적 평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8년 좌편향적 서술로 수정권고를 받은 금성출판사刊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등장했었다.
 
 이에 대해 교육과학기술부는 수정권고안에서 “대충자금(對充資金, counterpart fund) 한자 표기가 잘못되었으므로 수정이 필요함(代充이라고 표기했었음). 또한 고등학교 수준에서 미공법 480호와 같은 사료를 다루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함”이라고만 간단히 지적하는 데 그쳤다.
 

2010년 새로 발간된 미래엔컬처그룹刊 고교 한국사 교과서(346페이지)
 
 

左편향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금성출판사刊 고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324페이지)
 
 
6種 中 지학사刊 교과서는 이승만 정부가 자유 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비교적 충실히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원조 지원, 戰後 복구 및 경제 재건을 위한 ‘이승만 정부’의 노력이 明示(명시)되어 있다.
<이승만 정부는 미 군정의 정책을 이어받아 일제 말기의 통제 경제를 철폐하고 자유 경제를 확립해 나갔다. 1948년 9월에 수립한 경제 정책의 기본 방향은 농업과 공업의 균형 발전, 소작 제도의 철폐, 기업 활동의 자유, 사회 보장 제도의 실시, 귀속 재산의 정부 인수, 인플레이션의 극복과 미국 경제 원조의 적극 도입이었다. 가능한 한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고 지원하는 방침을 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한‧미 원조 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으로부터 경제 안정과 시설 복구를 위한 원조를 받았다(1948. 12.).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금융기관의 공공성 유지와 경영 건실화를 도모하였다. 또 북한이 電力(전력) 공급을 중단하자 미국의 협조로 發電船(발전선)을 도입하여 긴급 송전을 실시하고, 수력‧화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전력 부족에 대비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 정책은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여 1950년 초에는 면방직 공업이 일제 말기의 생산 수준을 넘어섰고, 물가도 안정되어 갔다> (지학사刊 교과서, 27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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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기사] 黑白論理로 매도된 이승만의 경제 업적, 재평가 되어야
 
좌파 진영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무관심 내지 무지했기 때문에 그의 집권기간 남한에서의 경제발전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라고 喝破(갈파)했고, 이에 따라 상공업과 무역의 진흥을 통해 국민경제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는 구상을 했다. 그는 집권 초 우선적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면서 상공업과 무역을 발전시키려 했다. 이승만의 집권기간 남한에서는 소폭이지만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일례로 1953~1960년간 年평균 경제 성장률은 4.9%였다. 다른 후진국들의 평균 성장률은 4.4%였다.
1960년에 달성된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 역시 다른 후진국들의 경우에 비해 낮은 것은 아니었다. 李 대통령은 6?전쟁 후 미국으로부터 31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받아내어 戰後복구사업을 추진, 1955년까지 戰火(전화)로 파괴된 경제시설 및 기타 설비를 거의 완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김인서 著,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4, 90~100페이지)
 
1958년 復興部(부흥부) 산하에 신설된 ‘산업개발위원회’는 경제발전 계획 수립에 착수, 1960년 4월15일 ‘3개년 경제발전계획 시안’을 국무회의에 제출해 승인을 받았다. 이 계획은 며칠 후 발생한 ‘4.19 군사혁명’으로 인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지만 그 후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활용됐다.
 
李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농지개혁이다. 그는 과거 조선공산당의 지도급 간부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 제시된 농지개혁의 구상을 실현하려 했다. 정부에서 마련한 농지개혁 법안은 地主출신 의원이 다수였던 국회에서 견제를 받다가 1950년 3월에 통과, 4월에 공포됐다. 주요 내용은 3정보를 上限으로 하고 그 이상의 농지는 국가가 유상으로 수용하고, 이것을 다시 3정보의 한도 내에서 영세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지주의 토지를 연평균 생산액의 1.5배로 사들여 小作人들에게 분배하고, 5년간 現物로 상환토록 했다.
 
농지개혁은 6 25 전쟁 발발 후 일시 중단됐다가 1951년 4월 ‘농지개혁법 시행규정’을 통해 재개되어 남한 전역에 실시됐다. 그 결과 총경지의 약 40%에 달하는 89만 2000정보의 땅이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재분배됐다. (변태섭 著, 《개정판 한국통사론》, 521페이지, 한영우 《우리역사》, 554페이지)
李 대통령이 실현한 ‘농지개혁’은 삼림과 임야 등 非耕地(비경지)가 제외되고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첫째, 농지개혁은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사상 중요한 의의가 있다. 둘째, 이 개혁은 한국의 전통사회를 지배한 양반지배층의 몰락을 초래, 지주 배경의 한국민주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정치적 효과를 유발했다. 셋째, 6?발발 직전에 개시되어 전쟁 중 완료된 이 개혁은 전쟁기간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내부 동요를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공산화를 막는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는 농민이었다. 그중 80%가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부르짖는 좌파(남로당)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치하에서 완결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기에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토지개혁이었다. 흑백논리(黑白論理)에 의해 매도된 이승만의 경제분야 업적은 이제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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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非論으로 貶下된 업적들
 
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을 다룰 때 두 교과서는 억지나 트집잡기로 그 의미를 희석시켰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1964년 체결된 韓日國交(한일국교) 정상화를 다루면서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체결했다…”는 서술 뒤에 “집권 과정의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해…”(360페이지)라는 표현을 사용해 업적을 폄하하고 5대 대통령에 직선제(1963년)로 선출된 朴正熙 정부를 정통성이 없는 것처럼 묘사했다.
베트남 파병을 다룰 땐 “외화획득과 경제성장에 기여했다”(361페이지)고 썼지만, 파병 결단의 주체가 朴正熙 대통령이었음은 밝히지 않았다. 당시의 국가안보, 한미관계, 경제발전 등 여러 가지 환경에 대한 설명은 不在(부재)하고, 고엽제 문제나 민간인 학살 등 불가피하게 발생한 부작용을 덧붙여 ‘베트남 파병’의 業績(업적)을 흐렸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설명에서도 “소득 증대, 복지후생 등으로 확장돼 농촌의 생산 증대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설명에 이어 “국가의 기획에 의한 새마을 운동은 획일적인 농촌의 모습과 생활양식을 가져오기도 했다…”(379페이지)는 부정적인 면을 대비시켰다. 새마을 운동을 추진한 朴正熙 대통령의 노력과 취지 역시 거의 다루지 않았다. 경제개발의 礎石(초석)이 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375페이지)도 교과서에 등장했으나 주체가 ‘정부’나 ‘군사 정부’로 처리됐을 뿐 이를 기획하고 추진한 朴正熙 대통령은 등장하지 않았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 역시 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주체인 朴正熙 대통령도 소개하지 않았다. 특히 ‘한강의 기적’이었던 대한민국 산업화의 과정을 서술하는 장면에서 그 주체를 朴正熙 대통령이 아닌 ‘정부’로 처리했다. “제3,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81년)은 중화학 공업 육성에 주력하여 포항제철을 시작으로 경상도 해안 지역에 대규모 조선, 자동차, 정유, 전자 단지가 들어섰다”(375페이지)고만 서술할 뿐, 朴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노력은 다루지 않는 식이다.
 
오히려 교과서는 “소득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에 시달렸고, 빈부의 차도 커졌다. 영호남 간 개발의 불균등과 도시와 농촌간의 소득격차 확대도 문제였다”(376페이지)며 산업화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켰다. 이어 “수출을 주도하는 몇몇 대기업이 정부의 특혜로 성장하면서 여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 이때 기업이 정부의 혜택을 얻어내기 위한 부적절한 거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경유착의 문제가 되었다”(같은 페이지)고 썼다.
 
朴正熙 정부 때 재벌이 성장한 것은 당시의 국가 사정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산업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에는 基幹(기간)산업 구축을 담당할 기업이 몇 개 없었다. 이에 朴 대통령은 5ㆍ16 혁명 이후 基礎(기초)산업을 육성하는데 大企業(대기업) 자본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朴 대통령의 정책은 경제성장과 부국강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교과서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특혜’, ‘정경유착’이라는 말을 사용해 기업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이끌었다.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내용도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 및 사회운동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368페이지)고 썼다. 全斗煥 대통령의 ‘야간 통행금지 해제’, ‘졸업정원제’ 등의 치적을 다룰 땐 ‘宥和(유화)정책’(368페이지)이라는 말로 그 의의를 축소시켰다.
全斗煥 정부는 중화학공업으로 과잉 및 중복 투자된 부분을 조정해 경제 안정화 시책을 단행, 물가 안정을 이뤘다. 그 결과 유래 없는 3低 호황(저금리, 저유가, 저환율)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3低 호황’이라는 말은 교과서에 등장하지만(383페이지), 全斗煥 대통령의 업적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3低 호황’에 대해 교과서는 “전두환 정부가 중복 투자와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금융시장을 개방하면서 다시 회복되었다”(378페이지)며 그 주체가 ‘전두환 정부’임을 밝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전두환 정부에 대한 부정적 표현이 긍정적 서술보다 더 많았다. “(전두환 정부가) 유화정책을 펼쳤다”, “친인척 비리, 정권 장악 과정의 불법성”, “국민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이상 368페이지)라는 기술이 대표적이다.
두 교과서 모두 全 대통령의 업적인 올림픽 유치, 憲政史(헌정사)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수입자유화 및 경상수지 黑字(흑자)달성 등은 소개하지 않았다.
 
盧泰愚(노태우) 대통령 업적 기술은 두 교과서 모두 비교적 객관적이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盧 대통령 관련 부분에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지방자치제의 부분적 실시, 북방 외교의 시작, 남북한 UN동시가입(370페이지) 등을 서술했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 역시 ‘지방자치제의 부분적 실시’,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中蘇와 修交(수교)’, ‘남북기본합의서’(이상 370페이지) 등을 수록했다. 단 두 교과서 모두 盧泰愚 정부의 경제 치적인 경부고속철도, 영종도 新공항, 新도시 건설 같은 국가 基幹(기간)산업 육성 내용은 다루지 않고 있었다.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서술도 비교적 사실에 입각해 썼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금융ㆍ부동산 실명제, 지방자치제의 전면실시, OECD 가입(370~371페이지) 등을 실었고,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지방자치제의 전면실시’, ‘공직자 윤리법 제정’, ‘금융실명제 실시’, ‘OECD 가입’(이상 371페이지) 등이 실었다.
 
金大中, 盧武鉉 대통령은 업적만 부각
 
앞의 내용처럼 역대 대통령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 두 교과서지만, 金大中ㆍ盧武鉉(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金ㆍ盧 두 대통령에 대해서는 失政(실정)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업적만 부각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두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서술은 특히 남북관계 부분에서 두드러졌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적극적인 대북포용 정책을 펴면서…”(397페이지), “6월15일 남북 공동선언을 통해 전면적인 남북 화해와 교류 협력의 시대가 열렸음을 발표…”(397페이지), “햇볕정책이라는 큰 틀을 내세워…”(397페이지) 등의 긍정적 표현을 사용했다. 盧武鉉 정부의 정책을 설명할 때도 “남북교류를 크게 활성화…”, “시민단체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시민 사회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려 노력하였다…”(372페이지)고 썼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中제목 하에 나열된 김대중 정부의 업적을 보면 ‘여성부 신설과 性차별 극복’, ‘국민 기초생활 보장법 제정’, ‘4ㆍ3사건의 진상 조사’(이상 371페이지) 등이었다. 특히 南北정상회담을 비롯한 대북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으로만 기술되어 있을 뿐 현대그룹을 앞세워 저지른 불법 對北송금 내용은 빠져 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권위주의를 탈피한 서민 대통령’이란 제목 하에 ‘국가보안법 폐지 좌절’, ‘(과거사 진상규명법 제정해) 왜곡된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 ‘대북지원과 협력사업 지속적 추진’, ‘제2차 남북정상회담 성사’(이상 372페이지) 등의 긍정적인 부분을 주로 열거했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불거진 친인척 비리와 부동산 가격 폭등에 관한 내용은 실리지 않았다.
 
두 대통령의 부정적인 기술은 이전 역대 대통령들의 분량보다 적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경우 ‘~하지 못하였다’는 식의 기술이 主를 이뤄 마치 불가항력적인 요인으로 失政(실정)을 한 것처럼 썼다.
- 金大中 대통령 : “지역감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측근들의 비리를 막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 盧武鉉 대통령 :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급증, 부동산 가격의 폭등, 사교육비 급등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372페이지)
또한 金大中 정권이 현대그룹을 앞세워 4억5000만 달러를 김정일에게 몰래 송금한 對北송금 사건, 盧武鉉 대통령 一家가 저지른 부정과 비리에 대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 역시 失政에 관한 언급은 김대중 정부 시절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빈부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371페이지)는 내용과, 노무현 정부 시절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을 받은 것(372페이지) 뿐이었다. 이런 분량 차이 및 구도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서술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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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한국사 교과서의 햇볕정책 홍보
 
李明博 정부가 올해 채택한 高校 한국사 교과서 6種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 난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파격적인 紙面을 할애, 美化하고 있다. 이를 위해 햇볕정책의 부정적인 면을 묵살하거나 축소했다.
교과서들은, 김대중 정권이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불법 對北송금 사건을 일으켜 4억5000만 달러를 국민들을 속이고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약 100억 달러에 이르는 對北퍼주기를 하고도 국군포로나 납북자를 한 사람도 송환받지 못한 사실도 지적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 北이 不法 핵개발을 하여 핵실험까지 한 사실도 거의 묵살했다. 北이 햇볕정책 기간에 西海에서 두 차례 군사적 도발을 한 사실도 쓰지 않았다.
 
북한 정권이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 회담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은 사실도 지적하지 않았다.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정부 시절에 있었던 발전에 대하여는 항상 꼬리를 달아 비판하던 교과서들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대하여는 홍보기사처럼 기술했다. 교과서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대중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비호 내지 편을 들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記述 태도를 보였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이런 역사관은 학생들에게 비뚤어진 국가관과 도덕관을 심을 것이다.
 
경제발전을 설명하면서 '박정희'를 한 번도 쓰지 않은 교과서
 
6種 교과서들은 이승만‧박정희는 깎아내리고, 김대중은 추켜세우고, 김일성‧김정일은 민족반역적-反인류적 범죄행위까지도 감싸주는 일관된 기술방침을 보인다. 김대중‧김일성‧김정일에겐 好意的(호의적)이고, 이승만‧박정희에겐 敵對的(적대적)이란 사실은 교과서 집필진이 가진 이념적 성향에서 나온 가치관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편향성이 높은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경우, 박정희가 주도한 ‘한강의 기적’을 설명하면서 ‘박정희’란 이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결심하고 추진하였던 주요정책의 주체는 ‘군사정부’나 ‘정부’로만 표현된다. 학생들에게 ‘박정희’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그에 대한 好感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국의 경제발전이나 ‘한강의 기적’을 ‘박정희’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은 훈민정음의 創製를 ‘세종대왕’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 교과서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이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유발시켰다'고 기술한 뒤 정작 무역흑자로 돌아서게 한 1980년대의 全斗煥 정부 시절 경제에 대해선 부정적인 記述만 하고 있다. 全斗煥 정부 시절과 겹치는 1980년대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0%를 넘어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김대중, 노무현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목에선 ‘정부’라고 하지 않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식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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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32년의 再평가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1965∼1980년 사이, 즉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年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19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달러로서 말레이시아(271달러), 필리핀(169달러), 태국(115달러)보다 못했다. 軍人(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국정)을 운영하던 30여 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軍人출신 세 대통령들이 국가를 끌고 가던 시절 한국은 경제성장과 고른 분배 및 人權향상이란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이야기이다. 朴正熙-全斗煥-盧泰愚 대통령은 1961~1993년의 32년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국가 경영자였다는 게 객관적 통계로 입증된 셈이다. 이 세 대통령의 在任(재임) 기간에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학생, 지식인, 언론은 민주화를 요구하고 민주화를 위하여 싸웠다. 이들의 민주화 노력은 세 군인출신 대통령이 독재화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군인 대통령이 안보와 경제를 튼튼히 하였으므로 민주화 세력은 나라가 망가지는 걱정을 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 싸웠지만 결과적으론 대한민국이 잘 되도록 경쟁한 셈이다. 단,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從北세력은 이런 好評을 받을 자격이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군인 출신 대통령들을 독재자라고 매도하고 從北쓰레기들을 민주투사라고 우기는 자들이 있다. 교과서가 이런 억지를 담고 있다. 세 군인 대통령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역사는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역사를 법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학을 수학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다.
 
 
 
2. 두 교과서, 南韓정부에 23회, 北정권에 5회 ‘독재’ 지칭
 
 
6種의 高校 한국사 교과서들은 ‘독재’라는 단어를 북한 전체주의 체제보다 민주화 과정을 밟아온 대한민국 역대 정권에 더 많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6종 교과서를 모두 살펴본 결과 남한에는 36회, 북한에는 21회 ‘독재’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 14:3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총 14회에 걸쳐 ‘독재’라고 표현을 사용했다. 이 교과서의 현대사 記述이 가장 심한 좌편향을 보이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반면 북한 체제를 ‘독재’라고 쓴 횟수는 3회에 불과했다. 北에 대하여는 “독자적 자주 노선을 추구하는 한편,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338페이지)고 한 데 비해, “이승만 정부는 反共(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야당과 반대세력을 억누르고 독재 권력을 구축하였다”(345페이지), “박정희 정부는 경제성장과 반공을 내세워 장기집권을 추구한 독재 정권이었다”(364페이지)고 기술한 식이다.
 
이 교과서는 박정희 체제를 ‘영구집권’, ‘종신집권’이라고도 표현했다. “영구집권을 꾀한 권위주의적인 유신체제”(365페이지),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실현시키고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강화하여 민주주의를 기만한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365페이지)라고 감정적으로 규정지었다. 북한 김일성ㆍ김정일 父子 세습 독재체제에는, “김정일, 권력을 계승하다”(388페이지), “김정일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같은 페이지)고 썼다.
 
미래엔컬쳐그룹刊 교과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단속도 독재라는 말과 연결해 설명했다.
“한편, 군사독재정권은 사회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대중문화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방송에서는 반공 의식을 고취하거나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도록 하였다.”, “대중문화와 국민의 일상에 대한 통제와 억압 속에는 정권의 안정을 통해 장기 독재를 추구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미래엔컬쳐그룹刊, 385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가 북한 체제를 ‘독재’로 지칭한 부분은 세 군데였다.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라는 단어가 1회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 군데 중 한 군데는 “남북의 두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를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391페이지)라고 서술하며 이승만과 김일성을 同級(동급)의 독재자로 처리하는 내용이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 9:2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남한 정부를 총 9회 독재라고 표현했으나 북한 정권을 독재라고 칭한 횟수는 2회뿐이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북한의 권력 투쟁과 김일성 독재가 등장했다”(333페이지), “1인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였다”(391페이지)고만 짧게 언급했다. ‘김일성 개인숭배’(391페이지)라는 표현이 2회 등장하기도 했으나 이는 김일성 반대파가 숙청된 8월종파사건을 설명할 때 등장한 ‘김일성 반대파’의 의견으로서 등장한 것이었다.
 
반면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는 “야당과 언론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맹을 탄압하고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ㆍ기소하여…”라는 식의 비판적 서술이 主를 이뤘다. “(이승만 정부가)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330페이지), “이승만 독재 하에서 진보혁신 정당을 결성하여…”(332페이지), “(박정희 정부가) 3선 개헌을 통해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다”(362페이지)며 거의 예외 없이 ‘독재’라고 표현했다.
 
그 외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북한에서 유일체제가 확립되다’(378페이지)라는 章(장)에서 독재라는 표현보다, 북한 정권이 사용하는 용어인 ‘수령 중심의 강력한 통치체제’, ‘우리식 사회주의’,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더 많이 소개했다.
법문사刊 교과서는 남한 정부를 세 차례, 북한 정권을 두 차례 독재라 표현했다. 지학사와 비상교육 교과서는 북한을 독재라고 표현한 횟수가 남한을 독재라고 표현한 것 보다 많았다. 지학사 교과서는 북한 정권이 한국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저지른 아웅산 테러를 사진과 함께 실어 다른 교과서들과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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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엔 컬처그룹 |
남한(14) |
-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야당과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독재 권력을 구축하였다“ (345페이지) - "독재 권력은 기업가들에게 특혜를 주고~" (345페이지) - "4.19혁명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다" (中제목, 358페이지) -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 혁명" (小제목, 360페이지) - "4.19 혁명은 고등학생들이 앞장서고 대학생과 시민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민주 혁명이었다" (360페이지) - "박정희 정부는 경제 성장과 반공을 내세워 장기집권을 추구한 독재정권이었다" (364페이지) - “유신 체제는 … 민주주의를 기만한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였다" (365페이지) - "박정희는…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장기독재를 지속하였다" (365페이지) - "미국 대통령 카터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 탄압 비난하였다" (366페이지) - "6월 민주항쟁은… 군사 독재를 끝내고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369페이지) - “(많은 개헌이 이루어진 이유에 대해) 집권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여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장기 집권을 도모했던 까닭이다” (373페이지) - "한편, 군사 독재 정권은 사회 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대중문화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385페이지) - “…장발은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과 자유의 상징으로 통하였다“ (385페이지) - "…정권의 안정을 통해 장기 독재를 추구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385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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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3) |
- "그러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1인 독재와 부자세습이 이뤄졌으며~" (388페이지) - "사회주의 헌법 제정되어 독재 체제가 완성되었다" (388페이지) - "남북의 두 지도자인 이승만 김일성이 자신들의 장기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391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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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교육 |
남한(9) |
- (이승만 정부에 대해)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 (中제목, 330페이지) - “반공 독재의 강화” (小제목, 332페이지) - (조봉암 사건 설명하며) "이승만 독재 하에서 진보 혁신 정당을 결성하여 평화 통일을 주장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332페이지) - (사진설명)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의 행진” (356페이지) - “군사 독재가 시작되다” (中제목, 358페이지) - “3선 개헌과 1인 독재 체제 구축" (小제목, 362페이지) - …박정희 대통령이 "1인 장기 독재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동안 민주화의 열망이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362페이지) - (전두환 정권에 대해) "이러한 유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반독재 운동은 계속되었다" (368페이지) - “노무현 정부는 정경 유착의 단절, 권위주의의 청산, 친일․ 독재 등 과거사의 정리를 위해 노력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372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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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2) |
- “북한의 권력 투쟁과 김일성 독재의 등장” (小제목, 333페이지) -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 체제가 성립되었다“ (333페이지) |
 
 
3. 李承晩, 朴正熙는 과연 독재자인가?
 
李承晩, 朴正熙는 독재자가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건설자이다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을 기술하면서 ‘역사성’을 빼버렸다. 그래서 역사 교과서가 아니고 선전물 같은 책이 되고 말았다. 역사성이란 시간의 흐름이다. 西歐(서구)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기복과 進退(진퇴)가 있었고 한국은 그 과정을 어떻게 밟았느냐를 설명해야 역사를 알게 된다.
1948년 8월15일부터 민주주의를 하기 시작한 나라에서 과연 수백 년이 걸린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었느냐를 학생들에게 설명한 다음 李承晩(이승만), 朴正熙(박정희)를 비판해야 한다. 교과서 筆陣(필진)은 그런 역사성을 생략한 채 李承晩, 朴正熙 정부에 대하여는 서구식 민주주의 기준을 적용, 독재라고 비판하고 북한 정권에 대하여는 북한식 기준을 적용, 비호한다. 李承晩, 朴正熙를 독재자라고 호칭하는 것은 反역사적이란 사실을 아래에 설명한다.
 
서기 1215년 영국의 존 왕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귀족회의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물리지 않고 법원의 구속영장 없이는 자유민을 구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약속을 했다. 마그나 카르타(大章典, 대장전)의 탄생이다. 그 후 국회와 王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內戰(내전), 암살, 처형 등으로 피를 흘리다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王의 권한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국회가 국민을 대표하여 主權(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세계 민주주의 발달의 최선진국 영국에서도 1754년에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당시 인구 약 800만 명의 3.5%인 28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물론 귀족들이었다. 차츰 선거권이 확대되어 갔다.
 
1884년에는 세금을 내는 영국의 모든 家口主(가구주)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1918년엔 세금을 내는가의 與否(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成人(성인) 남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여자들에 대한 보통 선거권은 1928년에 주어졌다.
프랑스에서도 1790년 일정 규모의 재산을 가진 납세자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1815년엔 30세 이상의 年 300프랑 이상 납세자가 투표권을 가졌다. 1820년엔 일정 재산 이상을 가진 有權者(유권자)는 1인 두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엔 25세 이상의 年200프랑 이상 납세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인구는 전체 成人의 170분의 1이었다. 1848년 모든 남자 成人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가 2년 뒤 3년 이상 거주 납세자로 제한되었다. 1851년에 다시 남자 보통선거권으로 돌아갔다. 1945년에 모든 여성 성인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안심하고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1964년 民權法(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이 통과된 이후였다. 흑인의 경우 한국보다 정치적 자유를 맛보는 것이 늦었다.
 
수백 년에 걸친 과정 생략한 대한민국
 
이상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선거권 확대’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폭이 확대되는 과정이란 사실이다. 동시에 선거권 확대는 점진적이었고 신분중심(봉건체제)-납세중심(부르조아 체제)-男女 모두(대중 민주주의 시대)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투표권의 확대는 法 개정을 통하여 이뤄졌다. 法治(법치)의 확립과정이 민주주의 발달 과정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수백 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1948년 헌법 제정과 동시에 보통선거를 하게 되었다. 재벌 총수도 한 표, 직원도 한 표이다. 無職者(무식자)도 한 표, 교수도 한 표이다. 세금을 수백억 원 내는 사람도 한 표, 안 내는 사람도 한 표이다.
 
유럽에서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 과정은 투쟁의 과정이고 민주주의 학습과 실천의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그 결과물로서의 男女 불문한 1인 1표제를 도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서양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민주주의 제도에 無賃乘車(무임승차)한 셈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럽 민주주의 국가 사람들의 苦鬪(고투)를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의무를 진 셈이다.
 
메이저리그의 기준으로 동네 야구선수 혹평하는 격
 
1948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서양에서 수백 년 걸려[영국의 경우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부터 시작하면 보통선거 쟁취까지 약 800년이 걸렸다] 발전시킨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과정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란 연극, 민주주의란 연습을 해온 셈이다. 연극과 연습을 많이 하면 實演(실연)이 되긴 하지만 외래 제도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선 엄청난 代價(대가)를 치러야 한다.
 
西歐의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李承晩과 朴正熙를 독재자라고만 단정하는 것은, 메이저 리그의 통계를 기준으로 삼아 동네 야구 선수들을 혹평하는 것과 같다. 세종대왕에게 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설을 퍼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의 先進(선진) 민주주의를 판단기준으로 하여 李承晩, 朴正熙가 독재를 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 10~30년 만에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를 성취한 나라를 발견해야 한다. 세계사에는 물론 그런 예가 없다. 李, 朴 두 대통령 시절의 민주주의는 19세기의 유럽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었다. 10~30년짜리 한국 민주주의가 유럽의 수백 년짜리 민주주의보다 더 발전되었다면 두 전직 대통령을 과연 자신 있게 독재자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링컨이 1950~1970년대의 한국을 다스려도 李, 朴 대통령만큼 하진 못하였을 것이다.
 
일본과 비교하면 李, 朴 두 대통령 시절의 민주주의는 1910~1920년대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보다 못하지 않다. 북한과 중국은 아예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으로 좌익들은 李承晩, 朴正熙를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것일까. 그들이 가진 기준은 地上(지상)의 것이 아니라 天國(천국)의 기준이든지 자기 꿈속의 기준일 것이다. 그들의 잣대는 북한 정권에 들이댈 때는 갑자기 눈금이 넓어지는 요술 자(尺)이기도 하다.
 
李承晩은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적이 없고,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적이 없다. 그를 독재자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자진하여 물러난 점에서도 그렇다. 朴正熙는 물론 두 번(5·16과 유신) 쿠데타를 하였다. 그러나 1963, 1967, 1971년 세 차례 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이 기간은 독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독재적 기간이 있었다고 하여 독재자 운운하며 그의 통치기간 전체를 독재로 모는 방식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당위성을 부정한 적도 없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후진국에, 그것도 전쟁 중인 나라에 무조건 적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민주주의의 조건을 먼저 만들겠다고 작심한 사람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는 경제력과 제도를 만든 점에서 그를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건설자로 보는 게 타당한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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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朴正熙를 미워하다가 존경으로 바뀐 카터 참모의 고백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윌리엄 H. 오버폴트가 1990년대 중반에 쓴 《중국의 浮上(부상)》(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한때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反韓的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著者가 朴正熙의 한국을 재평가하면서 開途國의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터 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 戰略의 정당성에 설득 당하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民權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 文化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文化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 신봉자들이 講壇(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한국 방문해 새마을 운동 목격한 후 충격
 
예일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터 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 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圖式的(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人權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人權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으로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人權문제와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先行(선행)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後進(후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西歐(서구)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正門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포퓰리즘을 꺾고 개혁 이룩한 朴正熙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國益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私有化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 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敵對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外資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이다.
朴 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過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同時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正熙는 현대식 國家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美軍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高位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식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가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朴 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 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式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오버홀트는 동아시아式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式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式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터 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오버홀터 씨의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주요 저서로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朴正熙를 보는 시각의 교정을 통해서 이 세계를 보는 눈이 맑아져간 그의 과정은 감동적이다.
 
 
<참고자료>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로버트 올리버 著, 동서문화사 刊)
이승만 다시보기(인보길 著, 기파랑 刊)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이한우 著, 해냄출판사 刊)
朴正熙 전집(全13권)(조갑제 著, 조갑제닷컴 刊)
만화 박정희(全3권)(조갑제(원작), 이상무 著, 기파랑 刊)
漢江의 새벽(조갑제 著, 조갑제닷컴 刊)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62년 생애의 62개 장면)(조갑제 著, 기파랑 刊)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오원철 著, 동서문화사 刊)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김상선, 금동화 외 2명 著, MSD미디어 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