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제목: 建國-건설세력에 敵對的 편집
 
 1. 군복에 굳은 얼굴 朴正熙, 웃으며 악수하는 金大中
 
6種 교과서 사진 이미지 분석(대통령 비교): 등장 횟수, 박정희-이승만-김대중-전두환-노무현… 순
   
   現 한국사 교과서로 수업을 듣게 되는 고등학생들은 1994~1996년 사이에 출생해 2010~2011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청소년들이다. 200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격동의 한국 현대사는 흑백 자료화면으로 접하게 되는 아득한 옛 이야기쯤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나마 현대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학교의 역사 수업인 만큼,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수밖에 된다. 특히 사진 등 視覺(시각) 자료는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
 高校 한국사에 실린 우리나라 대통령의 사진 이미지는 어떨까. 이 사진을 통해 학생들은 각 정권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게 될까. 대한민국 1~17대 대통령 10명의 사진 등장 횟수를 조사했다.
 6種 高校 한국사 교과서 미래엔컬처그룹, 지학사, 천재교육, 비상교육, 법문사, 삼화출판사刊 각 책에서 현대사 부분에 해당하는 8~9과에 등장하는 사진과 삽화 자료(그래프, 표 등)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이 된 사진과 삽화 자료의 수는 총 1195건이었다. (숫자는 사진에 나온 횟수로, 같은 사진이 여러 번 등장할 경우 중복하여 수치를 잡았다. 한 사진 속에 두 인물이 나올 경우 각각의 수치에 넣었다)
 
 最多 박정희(17회), 最少 최규하(0회)
 
 대통령 10명 중 最多(최다)를 기록한 이는 17회의 朴正熙(박정희)이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를 제외한 5種 교과서에 등장했다(미래엔컬처그룹刊에는 ‘통일 주체 국민회의와 의장 박정희’라는 제목의 사진이 있으나 사진 속 얼굴의 확인 불가로 제외했다).
 이 중 7회가 5.16 당시의 군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5種 교과서에 등장했으며, 두 번씩 반복 등장한 경우(천재, 삼화)도 있어 ‘박정희’에 대한 이미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유신 관련 신문기사 내의 증명사진 5회, 서거 기사 속 증명사진 3회, 남한에 온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는 박정희(1972년 12월1일) 1회, 퇴역 당시 사진 1회이다.
 

 
3등은 13회 등장한 金大中 대통령이다. 유일하게 6種 모든 교과서에 등장했다. 이 중 8회가 제1차 평양회담(비상 2회, 법문 2회)이었고,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이 3회, 대통령 취임식 장면이 2회였다.
 
 
4등은 7회를 기록한 全斗煥 대통령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장면 2회, 육군대장 전역식 연설 1회, 야구장에서 始球(시구)하는 모습 1회, 囚衣(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 1회, 5공 청문회 장면 1회, 12.12사태 주체 장교들 단체 사진 1회 등으로 나타났다.
 5등은 6회를 기록한 盧武鉉 대통령이었다. 제2차 평양회담(2007) 장면 2회, 과거사관련위원회 오찬장으로 이동 중인 장면 1회,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 1회, 아세안+3 정상회담(2007)의 기념촬영 1회, 李明博 대통령 취임식 당일 악수하는 장면 1회로 집계됐다.
 다음은 5회 등장한 盧泰愚 대통령이다. 해외 인사와 회담 및 서명 중인 장면(고르바초프 2회, 옐친 1회) 3회, 12.12사태 주역들 단체 사진 1회, 囚衣(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 1회로 나타났다.
 7등은 4회를 기록한 李明博 대통령이다. 尹潽善 대통령은 3회, 金泳三 대통령은 2회 등장했다. 崔圭夏 대통령의 사진은 없었다.
 
 박정희 vs 김대중 이미지 비교
 
 등장한 사진의 이미지에서 큰 대조를 보이는 것은 朴正熙와 金大中이었다. 朴正熙의 경우 군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굳은 표정을 지은 사진이 7회나 등장하는 등 대표적인 이미지로 사용됐다. 신문 기사 속에 사용된 증명사진類도 8회인데, 내용 역시 비상계엄령 선포, 유신헌법 관련, 逝去(서거) 등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를 주었다.
 이에 반해 金大中의 경우, 13회 중 8회가 제1차 평양회담의 장면이었다. 모든 사진이 북한의 김정일과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3회를 차지한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과 2회의 대통령 취임식 사진도 긍정적으로 찍혔다.
 

 
 
사진을 설명하는 글의 내용 역시 대조적이다.  
 
<朴正熙의 경우>
 -군사 정변의 주역들: 박정희 소장 일행이 육사 생도들의 군사 정변 지지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맨 왼쪽 인물이 박정희 소장이다. (비상교육 351페이지)
 - 5.16 군사 정변: 1961년 5월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천재교육 342페이지)
 -5.16 군사 정변 직후의 박정희 모습 (지학사 304페이지)
 
 <金大中의 경우>
 - 남북정상회담(2000): 이 회담에서 남북한은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비상교육 384페이지)
 - 오늘 이 취임식의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 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김대중 대통령 취임사). (지학사 309페이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 정책으로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시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받았다. (천재교육 371페이지)
 
위와 같은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은 각 정권과 역대 대통령에 대해 사진이 주는 이미지대로 기억하게 될 확률이 높다. 특히 ‘박정희’하면 군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굳은 얼굴의 흑백사진을, ‘김대중’하면 환한 얼굴로 김정일과 악수를 하고 노벨평화상을 받는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박스] 4·19 35회, 5·18 17회… 서울올림픽은 단 3회 등장
 
 6種 교과서 사진 이미지 분석(주요 사건) : 등장횟수, 6ㆍ25-4ㆍ19-5ㆍ18-평양회담 순
 
 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가장 많이 등장한 사건 이미지는 6·25 전쟁이었다. 총 86회로, 많게는 삼화출판사刊에서 22회, 적게는 미래엔컬처그룹刊에서 7회 등장했다. 전쟁 경과를 설명하는 삽화와 전쟁 피해를 담은 慘狀(참상) 사진이 주를 이뤘다.
 2등은 35회 등장한 4ㆍ19 혁명이었다. 시위대에 발포하는 경찰, 탱크에 올라탄 시위대, 대학교수단 시위 사진,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초등학생들 등의 사진이 있었다.
 3등은 5ㆍ18 광주사태로 17회 등장했다. 武裝(무장)한 시민,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 장면, 속옷 차림으로 군에 연행되는 시민, 금남로 집회 등의 장면이 교과서에 실렸다. ‘1980년 5월, 도대체 이 땅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군대를 향해 총을 들었을까?’(미래엔),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에 저항하여 무장하였다’(삼화), ‘5ㆍ18 민주화 운동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의 모델이 되고 영감을 주었다’(천재) 등의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4등은 평양회담(10회)으로, 2000년 제1차 회담이 8회, 2007년 2차 회담이 2회 등장했다. 사진 밑에는 “이 회담에서 남북한은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비상), “남북의 정상들이 남북 공동 선언을 교환하고 있다”(법문사), “남북한 정상은 분단 이후 최초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논의를 하였다”(삼화) 등의 긍정적 설명이 있었다. 對北불법 송금 사건은 언급되지 않았다.
 
 서울올림픽 3회, 새마을 운동-경부고속국도 6회
 
 이에 반해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상징하는 업적인 서울올림픽, 86아시안게임, 새마을운동, 경부고속국도, 포항제철, 수출 관련 사진은 적었다. 특히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에는 위에 거론된 사건 중 100억불 수출 기념 아치 사진 만이 1회 등장하는 데 그쳤다.  
서울올림픽은 3회 등장에 그쳤다. 천재교육刊에 2회, 지학사刊에 1회 등장했으며 나머지 4種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천재교육刊에만 “1980년과 1984년의 올림픽과는 달리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동서 양 진영의 국가 거의 대부분이 참여하여 그 의미가 남달랐다(159개국 참가)”라는 설명이 있었다. 86아시안게임도 천재교육刊에만 1회 등장했다.
새마을운동 관련 이미지는 5種 교과서에 총 6회 등장했다. 새마을운동 깃발 사진 1회를 비롯해, 마을길 넓히기 공사 중인 향토예비군 등의 이미지가 등장했으며, “농촌 환경 개선 사업으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농촌, 도시를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삼화), “농촌 환경 개선을 목표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이후 전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천재)는 사진 설명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 기간 농가의 소득은 10.5배나 늘었다. 그러나 농가의 부채도 21배나 늘어났다”(비상교육)는 부정적인 내용도 등장했다.
 경부고속국도 개통 당시 이미지는 4種 교과서에 총 6회 등장했다. “1968년에 착공하여 연인원 900만 명이 참여하여 1970년에 완공되었다”(비상), 서울-부산 간을 잇는 고속도로로 196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에 개통하였다“(법문사) 등의 설명이 있었다. 그 외 포항제철소 전경 사진은 4種 교과서에 4회, 100억불 수출기념 아치 사진은 4種 교과서에 5회, KTX 개통식은 1회 등장했다.
 
 
 
 2. 북한정권 선전 문구 같은 교과서 제목
 
 목차로 보는 高校 한국사 교과서: 주관적이고 과격한 표현이 목차에 등장, 北에는 중립적이고 柔(유)한 표현 사용
 
6 개의 출판사에서 각각 발행된 高校 한국사 교과서들은 1~9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현대사 부분은 8과와 9과로, 세부 구성은 다르지만 큰 줄기는 6種 모두 비슷하다.
 8과 ‘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냉전 체제에 들어선 세계정세와 함께,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 6·25 전쟁과 분단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9과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 정세의 변화’는 4·19 혁명부터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다.
 특히 미래엔컬처그룹刊과 천재교육刊 교과서에는 주관적인 표현이 다수 등장했다. 비교적 중립적 표현을 사용한 교과서는 지학사刊과 법문사刊였다. 한 과의 제목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학사 2. 민주주의 시련과 발전
1) 4·19 혁명과 장면 내각의 수립 2) 박정희 정부와 유신 체제 3) 전두환 정부 출범과 6월 민주 항쟁 4)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의 정착
▲법문사 2. 민주주의의 발전
1) 4·19 혁명과 장면 내각 2) 박정희 정부와 민주화 운동 3) 민주화 운동의 전개와 민주주의의 진전
▲비상교육 2. 민주주의의 발전
1) 4·19 혁명 2) 장면 정부의 성립과 활동 3) 5·16 군사 정변 4) 박정희 정부의 활동 5) 유신 체제의 성립과 전개 6) 유신 체제의 붕괴와 신군부의 등장 7) 5·18 민주화 운동 8) 전두환 정부 9) 6월 민주항쟁 10) 직선제 개헌 이후의 정부
▲삼화출판사
2. 4·19 혁명이 일어나다 3. 5·16 군사 정변과 유신 체제 4. 민주주의가 발달하다 
▲미래엔컬처그룹 2. 민주주의 시련과 발전
1) 4·19 혁명,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다 2) 4·19 혁명의 기대 속에 출범한 장면 내각 3) 5·16 군사 정변과 민주주의의 시련 4) 유신 체제, 민주화 운동 앞에 스스로 무너지다 5) 신군부에 맞선 5·18 민주화 운동 6) 6월 민주 항쟁, 민주주의가 승리하다 7)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정착
▲천재교육 2. 민주주의 굴곡과 진전
1) 4·19 혁명이 일어나다 2) 군사 독재가 시작되다 3) 유신 체제에 맞서다 4)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 5)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다 
 
 6·25 전쟁 직후를 다룬 부분에서는 ‘반공 체제와 독재의 강화’(비상),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반공 독재의 강화)’(천재) 등의 표현이 등장했다. 이 제목 下의 本文(본문)을 보면 이승만 정부, 특히 反共(반공)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등장한다.
 대한민국 건국과 북한 정권의 탄생을 지칭하는 부분에서는 교과서 대부분이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에는 세부 목차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유일하게 ‘북한 정권’이라고 표기한 교과서는 지학사였다. 지학사刊은 김정일과 관련해 유일하게 ‘세습’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래엔컬처그룹 3.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부가 수립되다
1)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다 2) 정부 수립을 전후한 남한 사회의 갈등 3)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위한 노력과 좌절 4) 농지 개혁을 실시하다 5) 북한 정부가 수립되다
▲삼화출판사 4.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다
▲법문사 3.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부 수립
1)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2) 북한의 정부 수립
▲비상교육 3. 대한민국과 북한 정부의 수립
1) 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 2)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3) 북한 정부의 수립 4) 농지 개혁 단행 5) 좌절된 친일파 청산
▲천재교육 2. 8·15 광복과 새로운 국가 건설 운동
1) 새 나라 건설에 모두 나서다 2)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다 3)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4)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다
▲지학사 2. 대한민국의 수립과 국가 체제의 정비
1) 5·10 선거와 대한민국의 수립 2) 국가 체제의 정비와 국민 생활의 변화 3) 북한 정권의 수립과 사회주의의 추진
 
남북의 ‘분단’ 자체를 강조하고 있는 이러한 표현은, 앞 단원에 등장하는 목차와도 연관이 있다. ‘통일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다’(미래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법문사),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천재교육) 등, 좌우합작 운동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것처럼 소개되다가 左右의 갈등에 의해 좌절되어 남북이 분단, 각각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는 구도를 이룬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당시 상황 설명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분단’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부분에 대한 과거 國定 ‘국사’ 교과서의 명쾌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미 소련은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실상의 정부를 세워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이를 남한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광복 이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활동은 점점 무력 투쟁의 양상을 보여 주게 되었다. …남한만의 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 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소련의 팽창 정책과 북한에서 사실상의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남한에서 자유로운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때 통일 정부의 수립을 추구하였던 남북 협상파는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의 공산화를 위해 이들까지도 이용하려 하였다. <고등학교 국사(하), 2001년 3월1일 발행, 195~196페이지>
 
  주관적이고 과격한 표현이 사용된 남한 관련 목차에 비해, 북한 관련 목차에는 중립적이고 柔(유)한 표현이 사용됐다. 목차 내용으로는 현재진행 중인 북한의 폐쇄적인 개인독재 체제, 인권 유린, 對南(대남) 도발 등을 예상하기 힘들다. 목차에 ‘독재’라는 표현이 등장한 곳은 지학사刊(김일성, 김정일 독재 체제의 확립)과 비상교육刊(김일성 독재 체제와 주체사상의 확립) 교과서였다.
 
▲미래엔컬처그룹 4. 북한의 변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
1) 북한, 지배 체제에 변화가 일어나고 경제 위기를 맞다 2) 평화 통일을 위해 나아가다
▲천재교육 4. 북한의 변화와 평화 통일의 과제
1)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를 세우다 2) 위기의 남북 관계, 평화의 길을 찾다 3) 남북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으로 계속하다 4)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
 
 이 같은 목차의 분위기가 반영하듯, 실제로 교과서에는 개인독재 체제의 폐해, 북한 주민의 대량 餓死(아사) 사태, 인권 유린 문제 등이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 등의 남북교류 만이 크게 다뤄질 뿐, 북한의 군사적 도발 및 테러 사례도 찾아볼 수 없다. 미래엔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刊 교과서에는 ‘1ㆍ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 ‘美 EC-121機 被擊(피격)사건(1969)’, ‘8ㆍ15 대통령 암살미수사건(陸英修 여사 저격사건)(1974)’,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1983)’, ‘KAL기 폭탄 테러사건(1987)’, ‘천안함 爆沈(폭침)(2010)’ 등의 주요 대남 도발 사건 북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주요 도발사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지학사, 천재교육刊 교과서에 1ㆍ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아웅산 테러사건이, 비상교육刊 교과서에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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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김정일 정권도 민망해 할 교과서 문구
 
 특히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제목들은 李承晩·朴正熙 정부에 대한 비판과 김일성ㆍ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호와 美化가 대조적이다. 이 교과서는 李承晩ㆍ朴正熙 정부를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 ‘군사독재가 시작되다’, ‘유신체제에 맞서다’라고 비판하면서, 김일성ㆍ김정일 정권에 대해선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를 세우다’,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라고 비호하고 美化한다.
 
 위대한 建國 대통령과 建設 대통령을 ‘독재’라고 비판하려면 700만 학살에 책임이 있는 김일성·김정일 정권은 ‘전체주의 체제’나 ‘학살정권’이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독재’란 낱말을 회피하고 ‘유일사상 체제’라고 美化했다. 마치 김일성이 대단한 사상가나 되는 것처럼 糊塗(호도)한 것이다. 북한은 ‘유일사상 체제’가 아니라 ‘유일독재 체제’이다. 이 책은 本文에선 북한 정권을 ‘독재’라고 표기하였지만 제목은 읽는 이들의 판단을 크게 좌우한다. 제목에서 ‘독재’를 뺀 것은 편향적 편집이다.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라는 제목은 김정일 정권도 민망해 할 문구이다. ‘개방’의 참뜻은 사람과 물건과 정보의 자유로운 교류이다. 북한은 한 번도 그런 교류를 허용해본 적이 없다.
 
 책의 제목은 著者(저자)가 가진 가치판단 기준과 우선순위, 그리고 이념성향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위의 제목에서 우리는 저자가 대한민국을 만든 세력에 대하여는 反感(반감)을, 대한민국의 敵(적)인 북한정권에 대하여는 好感이나 동정심을 가진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反역사적, 反국가적, 反사실적 생각을 고등학생들에게 주입시킨다는 점이다. 이런 反국가적 교육을 李明博 정부가 허용하고 국가예산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역사적 범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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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생들에게 反軍, 反美, 反韓的인 소설과 영화를 추천한 교과서
 
영화와 소설을 선동에 이용하는 전형적인 左翼(좌익) 수법이 아닌가?
 
한정된 지면에 모두 다룰 수 없는 한국 현대사를 다양한 자료로 접근하는 것은 내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때문에 史料(사료)에 접근할 때는 엄격성이 요구되며, 자료를 인용할 때에도 1차 原자료가 그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2차 자료에는 연구자의 시각이나 입장이 포함되어 있어 사실성이 반감되는 탓이다.
 
더군다나 영화와 문학 등의 예술 분야로 역사를 다루는 것은 더 큰 위험이 따른다. 사실에 기반을 둔 작품이라고 해도 작가의 주관과 虛構(허구)가 가미되는 문학 장르의 특성상 ‘사실’과 ‘허구’의 구분은 쉽지 않은 탓이다. 특히 문학과 영화는 구체적인 묘사와 감정 전달이 가능한 만큼 그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이 전달될 경우 피해는 더욱 커진다. 白紙(백지) 상태의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反美(반미), 反軍(반군), 反韓(반한)적인 영화, 소설을 참고자료로 소개하는 것은 예술을 선전ㆍ선동에 이용하는 공산당 수법을 연상시킨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 대부분에서 原자료를 사용하기보다는 2차 연구 자료 사용이나 자료를 변형한 예가 많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래엔컬처그룹刊과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특정 영화와 소설을 참고자료로 추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문제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미래엔컬처그룹刊
소설 - 태백산맥(1989, 조정래)/ 무기의 그늘(1988, 황석영)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2004)/ 웰컴 투 동막골(2005)/ 효자동 이발사(2004)/ 박하사탕(1999)/ 화려한 휴가(2007)
▲삼화출판사刊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2004)/ 웰컴 투 동막골(2005)
 
 
두 교과서가 공통으로 추천하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웰컴 투 동막골’은 6ㆍ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심각한 편향성으로 인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들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ㆍ25 전쟁 당시 한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피난 도중 강제 징집된 동생을 따라 함께 입대한 형은, 동생을 제대시키기 위해 공을 세우며 전쟁 영웅이 된다. 그러다 동생이 국군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오해하여 국군을 떠나 인민군 부대장이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생은 제대 하루 전날 형을 구하기 위해 戰線(전선)으로 나가 우여곡절 끝에 형을 만나지만, 형은 끝내 죽음을 맞는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전쟁의 광기를 두 형제의 비극적인 운명과 형제애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 선전됐다. 그러나 6ㆍ25 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이 드러나지 않고, 국군ㆍ美 공군의 폭격 및 그에 따른 참상을 지나치게 묘사ㆍ강조하며, 국가를 천시하고 안보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등 反軍ㆍ反기득권ㆍ反정부 정서가 강조되어 있다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영화가 교과서에서는 ‘국군과 인민군 형제가 겪는 분단의 비극을 그린 영화(미래엔컬처그룹刊)’, ‘비참한 전쟁 속에서 따듯한 가족애와 함께 인간의 내면을 읽게 하는 영화(삼화출판사刊)’로 소개되어 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6ㆍ25 전쟁 당시 한 마을에 국군과 인민군, 연합군이 우연히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이 세 주체가 힘을 합쳐 미군의 폭격(동막골을 적군기지로 오해하여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사실 관계를 생략하고 감성적으로 접근한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막연한 反戰(반전)의식과 反美(반미)의식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를 본 한 초등학생은 “역시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서로 힘을 합쳐 싸우는 모습이 감동적이다”라는 감상평을 남겼다. 교과서에는 ‘6ㆍ25 전쟁에 휘말린 강원도 오지 마을 이야기’(미래엔컬처그룹刊), ‘평화의 가치와 그를 지키기 위한 인간 본연의 자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삼화출판사刊)로 美化되어 있다.
 
광주사태를 다룬 ‘화려한 휴가’ 역시 많은 물의를 일으킨 영화다. 영화 속 공수부대는 아무 감정 없이 시민들을 공격하는 ‘살인기계’로 그려진 반면, 궐기한 광주시민 측의 인물들은 至高至善(지고지선)의 영웅 혹은 천사로 그려졌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造作(조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造作 수준의 反軍 영화가 교과서를 통해 버젓이 소개되고 있는데도 당사자인 국방부는 아무런 지적이 없다. 교과서에는 ‘1980년 광주의 비극을 그린 영화’(미래엔컬처그룹刊)로 소개되어 있다.
 
‘박하사탕’은 광주사태 당시 진압군 출신인 ‘386 세대’의 형사가 주인공인 영화로, 진압 중 여고생을 실수로 죽인 후 타락해가는 주인공을 그렸다. 교과서에는 ‘설경구 주연의 5ㆍ18 진압군 출신 형사의 고뇌’(미래엔컬처그룹刊)로 소개되어 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는 주인공인 이발사의 관점에서 사사오입 개헌을 시작으로 4ㆍ19와 5ㆍ16, 10ㆍ26과 5ㆍ18에 이르는 사건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나라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고 믿는 순박한 이발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억지스럽게 戱畵(희화)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송강호 주연의 박정희 시대 풍자 영화’(미래엔컬처그룹刊)로 소개되어 있다.
 
이 영화는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이발사의 실제 모델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實話(실화)로 받아들인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朴正熙 대통령을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이 등장했지만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실제 인물인 이발사 박수웅 씨는 박지만 군의 머리를 깎아주다가 육영수 여사의 추천에 의해 朴 대통령의 이발사가 되었는데, 그가 기억하는 朴 대통령의 모습은 소탈함 그 자체다.
 
조정래·황석영 소설을 추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역시 대표적인 문제작이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이후를 배경으로 한 마을 사람들의 사상적 대립과 희생을 다루고 있는데, 남로당의 대한민국 타도투쟁을 미화하는 등 짙은 利敵性(이적성)을 지적받아왔다. 교과서에는 ‘분단을 배경으로 한 조정래의 장편 소설’(미래엔컬처그룹刊)로 소개되어 있다.
저자 조정래는 교과서에 소개하기 적절하지 않는 발언도 많이 했다.
 
“우리가 체제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꽃송이에 담긴 인민의 순결한 마음 그 자체야 왜곡할 건덕지가 없지요.” (2007년 10월4일, 2차 남북정상회담 시 김일성 동상 밑에 놓인 꽃다발을 보며 김용옥에게 한 말)
“김정일 위원장도 빨리 잘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싶어 한다.”(2007년 12월호 레이디경향 인터뷰)
“한반도는 엄연한 1민족 2국가 체제이므로 국가 간에 합의한 것은 지켜야 한다. 정부는 6·15 선언 등 지난 정권에서 북한과 합의한 것을 성실히 지켜라.”(2009년 3월2일,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태백산맥 200쇄 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욕심이 많은 게 아니라요. 우리나라의 역사가 너무 비참하고 처참하게 살았기 때문에 써야 할 이야기가 그만큼 많아서 역사가 저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한 거죠.” (2010년 10월12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자녀들이랑) 시위장 가서 소리 한 번 질러보세요…그게 산교육입니다”, “자식 교육 시키는 데 수학, 영어만 하라는 것은 자식 죽이는 겁니다. 손잡고 시민단체 찾아가서 ‘돈 만원이라도 시민단체에 후원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바르게 하는 거야’라고 자식에게 알려주는 것이 진짜 공부입니다. 자녀들이 방학하면, 손잡고 시위장에도 가서 소리 한 번 질러보세요. 얼마나 시원합니까. 그것이 산교육입니다.” (2010년 10월29일, G20정상회의 폐막기념 강연)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戰(전) 참전을 바탕으로 쓴 反戰(반전) 소설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베트남 전쟁의 숨겨진 본질’을 조명하고, ‘전쟁을 조종하는 미국의 실체를 파헤쳤다’는 평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과서에는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묻는 황석영의 소설’(미래엔컬처그룹刊)로 소개되어 있다.
 
2006년 발간된 《무기의 그늘》 개정판에 실린 작품해설은 베트남 전쟁을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이 가장 야만적인 폭력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소설이 ‘미국이 과거의 제국주의를 더욱 폭력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계승하는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소개한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작품 해설의 일부다.
 
<이 소설에는 침략주체인 미국과, 미국의 역할에 종속된 한국, 그들의 조력자로 동족을 수탈, 억압하는 남베트남의 권력층, 그리고 이 모든 세력에 맞서 싸우는 민족해방전선의 움직임이 적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그에 대항해 싸우는 해방 전사들의 움직임이나 미군에 의해 양민에게 가해지는 야만적 잔혹행위 또한 한국인의 눈으로는 최대치의 극적 단면들로 포착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은 일단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로 끝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막강한 제국에 맞선 싸움에서 베트남 민중은 너무나 가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고 베트남의 대지는 회복불능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임홍배, 문학평론가ㆍ서울대 독문과 교수)>
 
황석영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5번의 密入北(밀입북)을 하고 김일성을 7번 만났으며, 북한으로부터 25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黃 씨는 訪北(방북) 이후 4년간 해외 망명생활을 하며 북한기행문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출간했으며, 1993년 4월 귀국 후 구속되어 1998년 3월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특히 김일성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일성은 을지문덕, 이순신, 세종대왕과 같은 위인. (…) 그(김일성)는 어쨌든 사상의 차이는 도외시하더라도 두 번이나 세계 최강의 外勢(외세)와 맞서 싸웠습니다. 나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大國(대국)인 중국혁명의 지도자 모택동보다도 훌륭한 점이 있으며 베트남의 호지명에 절대로 뒤지는 인물이 아닌 제3세계적 革命家(혁명가)라고 생각합니다.” (1992년 ‘노둣돌’ 창간호 인터뷰 中. 이 글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에도 실려 있다.)
 
교과서가 추천한 위의 작품들을 본 학생들은 한국 현대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수많은 작품 중에서 굳이 과장되고 왜곡된, 反軍, 反美, 反韓的인 것들만 골라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픽션을 사실로 믿도록 유도하여 조국을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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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공한 독일 통일은 단점만 記述, 베트남 共産통일은 발전像 부각
 
독일의 자본주의 흡수통일에 대한 부정적 이해 유도, 그릇된 통일관 심어줄 우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8단원 탐구활동 ‘각국 통일과 그에 따른 문제점’(349페이지)을 통해 성공한 독일통일은 단점만을 記述(기술)하고 베트남 共産(공산)통일은 발전상을 부각시켰다.
 
베트남의 통일은 공산국가였던 北베트남에 의한 무력통일이었고, 독일의 경우 자본주의 국가였던 西獨 주도의 평화적 흡수통일이었다. 교과서는, 베트남은 1985년 이후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등 개혁에 성공해 발전을 이룩했다는 내용을 실은 반면, 독일에 대해서는 “서독의 자본과 엘리트에 의해 흡수통일 방식이 내적통일에 많은 문제점을 안겨주었다”고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자료 밑에는 “자료를 보고 베트남과 독일에서 통일 후 발생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자”는 질문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통일 방안은 무엇이며 그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토론해 보자”라는 두 번째 질문에서도 베트남이 통일 이후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긍정적인 측면만 서술되어 있다.
 
이 자료를 참고한 학생들은 부정적으로 서술된 독일통일의 문제가 더 크다고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교과서는 독일통일의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과거의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본문 중 “東獨(동독) 경제가 빨리 부흥되지 않고 20%에 가까운 높은 실업률이 지속…”이라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廉燉載(염돈재, 現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박사의 著書 《올바른 통일 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에 따르면, 독일통일 이후 신연방주(舊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2006년(19.2%)을 정점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2009년 실업률은 13.0%다.
 
廉 박사는 “동서독 주민 모두 통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東獨 주민들은 자유와 풍요를 만끽하고 있으며 서독 주민에 비해 ‘2등 국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며 메르켈 총리, 플라첵 사민당 당수, 티어제 前 연방하원 의장 등 동독출신 인사들이 통일독일을 이끌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교과서는 이런 사실은 간과하고 “동독인 사이에 통일 현실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며 대다수의 舊 동독 주민들이 통일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것처럼 설명했다.
 
廉 박사에 따르면, 동서독 간의 생산력 격차는 완만하지만 계속 좁혀지고 있다. 1992년 이후 2004년까지 신연방주의 국내 총생산량(GDP)은 두 배 가까이 증가해 1991년 국내총생산에서 7%에 불과하던 비중이 2008년에는 11.7%로 상승했다. 1인당 GDP는 서독 지역의 35%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72%, 2008년에는 79%에 달했다”며 舊 동독 지역의 경제규모가 확대되고 있음을 전했다. 그는 “아직도 동서독 지역 간의 격차해소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독일경제는 통일 후유증에서 거의 벗어나 과거 서독 수준의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2010년 <이코노미스트>紙는 2009년 貿易수지 黑字가 가장 많은 나라가 독일이라고 밝혔다. 독일의 2009년 4월~2010년 3월 사이 무역흑자는 2072억 달러로, 2위인 러시아의 1388억 달러, 3위 중국의 1387억 달러를 앞섰다. 2010년 3월의 독일의 산업생산액은 1년 전에 비해 8.6% 증가하였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드는 것이다. 실업률도 프랑스의 10%보다 낮은 7.8%이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한 1990년 이후부터 2009년까지 독일은 세계 수출 1위 국가였다.
 
반면 베트남은 월맹에 의한 共産통일 이후 독재체제가 더욱 심화되었고 정치는 월남처럼 부패해졌다. 베트남 공산당은 국민의 私有재산을 말살했으며 언론·출판·결사·종교의 자유를 壓殺(압살)했다. 월남 정부의 부패에 대항해 시위를 벌였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을 탄압해 공산당 주도의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시켰다.
일본 교도(共同)통신사가 발행한 《1992년 世界年鑑(세계연감)》에 따르면 1990년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230달러로, 이는 1975년 통일 이전보다도 적은 액수다. 共産통일 후 계획경제정책으로 인해 베트남人들의 삶은 궁핍해졌고, 결국 통일 이래 90여만 명이 조국을 버리고 미국 등으로 도망쳤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모방한 ‘도이모이’를 차용, 체제개혁에 착수했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고 베트남인들의 사유재산 소유와 자유기업체제를 부분적으로 허락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가 아직 미비하고 공산당 一黨 독재체제도 유지되고 있어 개혁의 성과를 기대하기엔 이르다. 2011년 1월9일字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베트남은 개방경제 체제의 초기 단계를 이제 막 벗어난 상태로 아직 경제 규모와 체제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날 만큼 크지도 않고 자유화돼 있지도 않은 상황이다. 신문은 “베트남 경제의 불안이 확대될 경우 정부의 강력한 통제정책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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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대중 교과서보다 더 왼쪽으로 간 이명박 교과서
 
現 6종 檢定 한국사 교과서와 2001년 國定 국사 교과서 내용 비교
 
2011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6種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각 출판사가 제작해 정부의 檢定(검정)을 거쳐 출간됐다. 現 檢定 교과서 ‘한국사’(이하 한국사)와 과거 사용됐던 國定(국정) 교과서 ‘국사’(이하 국사)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비교해보았다. 사용된 國定 교과서는 6차 교육과정 때 사용된 2001년刊 ‘고등학교 국사(하)’(1996년 초판 발행)이다.
 
과거 國定 교과서 ‘국사’에서 다루어진 현대사 내용은 45페이지 정도 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각 내용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다. ‘국사’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내용을 서술한 반면, ‘한국사’는 대부분 3인칭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사실을 나열하는 특징을 보였다. ‘국사’는 ‘우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비해 ‘한국사’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우익’으로 표현하면서 거리를 둔다.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였다”(국사)의 표현이 “대다수 국민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우익은 반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간 반면, 좌익 세력은 축소되어 갔다”(한국사)가 되는 식이다.
 
건국 초기의 정세에 대해서도 “(김구, 김규식의 남북 협상에 대해)그들의 노력은 미·소 냉전 체제하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남한만의 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 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국사)의 내용이 “남북 협상은 광복 이후 처음 있었던 남과 북의 지도자 회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 연합 전선 운동과 그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한국사)로 바뀌었다. 외세의 방해를 받아 남북협상이 좌절되었다는 듯한 설명이다.
 
1. 신탁과 반탁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신탁 통치는 강대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일정 기간 동안 통치하는 것인데, 실제로 우리 민족에게는 식민지 지배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은 우리 민족에게는 모욕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는 제2의 광복 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지만, 그들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였다. (192~193페이지)
<지학사> 오랫동안 독립을 열망해 온 대다수 한국인들은 신탁 통치를 식민지 지배의 연장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김구를 비롯한 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여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다. 좌익 세력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으나 임시 정부의 수립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하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 지지로 돌아섰다. 이에 우익 세력과 좌익 세력은 신탁 통치의 반대와 찬성을 둘러싸고 극심하게 대결했다. 대다수 국민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우익은 반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간 반면, 좌익 세력은 축소되어 갔다. (263페이지)
<천재교육> 이 결정은 공식 발표도 되기 전에 일부 언론을 통해 신탁 통치를 실시하는 것으로 국내에 알려졌고, 전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와중에 좌파 세력은 반탁 입장을 철회하고,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38도선 이북에 있는 대부분의 정치 세력들도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임시 정부 수립 결정을 중시하고,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지지하였다.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중도파와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미‧소 공동 위원회를 통한 임시 정부 수립이 최우선의 과제이고, 신탁 통치 문제는 차후 문제라고 판단하였다. 이들도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에 찬성의 입장을 취하였다. 반탁 운동 세력은 이들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지지 세력을 소련의 조정을 받는 공산주의 세력이며 매국노라고 공격하였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과 그에 따른 반탁 운동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우익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좌우 정치 세력은 광복 이후 최초의 3·1 운동 기념식도 따로 할 정도로 격렬히 대립하였다. (310~311페이지)
<비상교육> 즉각 독립을 바라던 우리 민족은 신탁 통치안에 크게 실망하였다. 김구, 이승만, 한국 민주당 등 우익 세력은 즉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익 세력 역시 초기에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후 좌익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의 본질이 신탁 통치보다 임시 정부 수립에 무게가 있다고 보고,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 (314페이지)
 
2. 좌우 합작‧남북 협상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남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려는 유엔의 결의는,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 만의 선거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 남북의 분단이 계속될 것을 우려하여 남북한이 협상을 통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 등은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미‧소 냉전 체제하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5페이지)
남한만의 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 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소련의 팽창 정책과 북한에서 사실상의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남한에서 자유로운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때 통일 정부의 수립을 추구하였던 남북 협상파는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의 공산화를 위해 이들까지도 이용하려 하였다. (196페이지)
<지학사> 미‧소 공동 위원회가 무기한 중단되자 좌우 세력의 대립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고 지지 세력을 모아갔다. 김규식과 여운형 등은 분열된 정국을 통합하기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이고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263페이지)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유엔이 남한 단독 선거를 치르겠다는 방침을 세우자,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 세력은 정부 수립 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지원 아래 1946년 2월에 이미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라는 정부 형태의 권력 기구가 출범한 상황이었다. 한국 독립당의 김구와 민족 자주 연맹의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에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가 함께 모여 통일 정부 수립 방안을 협의할 것을 북한 당국에 제의하였다. …이와 함께 김구‧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과 별도 회담을 가졌지만, 북한 측의 의도대로 진행된 4자 회담에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1948. 4. 19~4. 30). 남한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각각 한국 독립당과 민족 자주 연맹을 이끌며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총선거 감시 활동을 계속하고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도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단독 정부의 수립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267페이지)
<천재교육> 중도파의 여운형과 김규식 등은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과 임시 민주 정부 수립 좌절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하여 좌우 합작을 모색하였다. 미군정도 이런 움직임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런데 좌우파는 각각 서로가 받아들이기 힘든 합작의 원칙을 발표하였고, 토지 개혁 문제나 친일파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이후 좌우 합작 운동은 우여곡절 끝에 남북과 좌우 합작으로 임시 정부를 구성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좌우 합작 7원칙에 합의하면서 활기를 띠었으나 이후 좌우파의 실질적인 합의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313페이지)
<삼화출판사> 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는 식민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반면 좌익은 임시 정부 수립이 중요하다면서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였다. 여운형 등 중도 세력은 미‧소 공동 위원회에는 적극 협조하되, 신탁 통치는 반대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별다른 성과 없이 결렬되자 남한에서는 이를 소련 탓으로 돌려 반소‧반공의 분위기가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1946년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가자, 김규식‧여운형 등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지지를 높여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소련과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고 이 위원회를 지원하였다. 중도 정부의 수립을 지향하던 좌우 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기를 띠었으나, 좌우의 대립이 격심해지고 중심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되자 실패하고 말았다. (306~7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 좌우 합작 7원칙에 대해 좌우 합작과 민족 통일을 중시하는 중도파 세력들은 이를 지지했고, 한국 독립당의 김구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고 하면서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내세워 단독정부 노선을 취했던 우익 측과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리의 급진적 해결을 추구했던 좌익 측은 좌우 합작 운동에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파괴적 행동을 일삼고 좌우 합작을 반대하는 공산 분자와 합작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한국 민주당은 유상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면 국가 재정이 파탄날 것이라고 하였다. 공산당의 박헌영은 토지의 유상 몰수는 지주를 위한 것이며, 입법 기구는 미군정의 거부권을 넘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게다가 1947년 7월에 이르러 좌우 합작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재개되었던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었고, 좌우 합작 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암살당하였다. 결국 좌우 합작 위원회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1947년 12월 해산되고 말았다. (331페이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은 서울로 돌아온 후 총선거에 반대하면서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남북 양쪽에서 추진하는 정부 수립 작업을 모두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민족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남북 협상 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된 후 단절되고 말았다. (332페이지)
<법문사>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5명의 좌익 인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5명의 우익 인사는 7월에 좌우 대립을 막고 민족의 단결에 의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구성 이후에도 좌우 합작 위원회의 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좌우 합작 운동은 미군정, 우익‧좌익 세력의 이해관계가 대립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310페이지)
남북 협상은 광복 이후 처음 있었던 남과 북의 지도자 회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 연합 전선 운동과 그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311페이지)
3.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먼저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하여 제헌 국회에서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국회의원 10명으로 구성된 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친일 혐의를 받았던 주요 인사들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반공 정책을 우선하였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친일파 처단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지학사> …이러한 열망에 따라 제헌 헌법은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 아래 친일파 처단을 늦추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의원들을 공산당과 연결되었다는 구실로 구속하였으며,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류를 압수하고 직원을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민특위는 1949년 8월말 시효가 만료됨으로써 해체되었다. (270~271페이지)
<비상교육> 광복 직후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를 처벌하여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 관료 유지 정책으로 인해 즉각적인 친일파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 국회는 본격적인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그러나 반민 특위의 활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반민족 행위자 처벌보다 반공을 더 중요하게 여긴 이승만 정부는 경찰 고위급이 연행되자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때 국회 프락치 사건에 일부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연루되었다. 그러자 국회 앞에서는 ‘공산당의 앞잡이인 반민 특위에 체포된 사람들은 공사당과 싸운 애국지사’라며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 경찰 출신이었던 일부 경찰들이 반민 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322페이지)
<천재교육> 친일 경찰 출신의 현직 경찰 간부였던 노덕술이 체포되자 경찰이 반민 특위를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공 우선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도 반민 특위의 활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반민 특위의 활동은 유명무실화되고, 친일 잔재 청산의 과제 해결은 좌절되고 말았다. (319페이지)
<미래엔> 반민 특위에 대한 방해 공작 : 반민족 행위에 대한 처벌은 법을 제정할 때부터 반대에 부딪혔는데, 반민 특위에서 독립 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노덕술을 검거하자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 특위 활동은 3권 분립에 위배’되며, 좌익 반란분자들이 살인, 방화 등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경험 있는 경찰관을 마구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특별 담화를 발표한 데 이어, 반민법 개정을 요구하였다. (338페이지) (우측 자료: 반민 특위 피습 상황-반민 특위 조사관 정철용의 증언)
 
4. 李承晩(이승만)
 
<6차 교육과정 국정 교과서> 이승만 정부는 공산군의 남침을 경험했기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반공을 강조하였으며, 미국 등 우방 국가와의 외교에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후방에서도 공산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계엄을 실시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조처들은 정치적으로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였으며, 국회의 정상적인 정치 활동까지도 제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을 창당하고 재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고치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국민의 직선으로 재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위해서 다시 헌법을 개정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이 헌법의 개정을 반대하였던 정치인들은 민주당을 조직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 견제하였다. 그 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추구하면서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부정과 부패가 심화되었다. (203페이지)
<지학사>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로 남북 협상을 통한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중도 세력(무소속)이 국회에 많이 진출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 간접 선거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거하는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279페이지)
민심 이반으로 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진보당을 탄압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 통일론을 내세우며 선전한 조봉암 후보에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하였다(1958. 7). 또한 언론 통제와 반공 강화를 골자로 한 신국가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280페이지)
<법문사> 개정 헌법에 따라 실시한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장면이 대통령을 승계할 수 있는 부통령에 당선되고,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이 예상 외로 크게 득표를 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혁신 정당인 진보당을 탄압하고, 반공 체제의 강화를 내세우며 국가 보안법을 강압적으로 통과시켰다. 또,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327페이지)
 
5. 朴正熙(박정희)
 
<6차 교육과정 국정 교과서>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의 권력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헌법에 의거하여 국정을 운용하였다. 조국 근대화의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우선적인 정책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성장 정책은 공업화의 급속한 추진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외국으로부터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도입하였다. (206페이지)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국제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고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켰으며, 그 뒤 베트남은 공산화되고 말았다. 또, 미국은 주한 미군 병력의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최우선적인 과제로 내세우면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도 안정된 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장기 집권의 길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선포된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1972).
유신 체제는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였다. 그것은 곧 국가 행정의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집약해서 사회를 조직화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 활동을 제약한 독재 체제였다. (206페이지)
 
6. 북한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김일성 독재 체제를 강화해 갔다. 그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지 않는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즉, 김일성은 전쟁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남로당을 비롯한 그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지 않는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즉, 김일성은 전쟁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남로당을 비롯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게 전가하여 이들을 제거하였으며, 이어서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숙청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유일 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1972년에 김일성은 새 헌법을 채택해서 국가 주석이라는 지위를 만들어 그 자신이 이를 차지하였으며, 강력한 국가 권력 기관인 중앙 인민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주요 권력 기관을 김일성 일가와 그 일파가 지배하는 북한 특유의 전제적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특히, 북한의 김일성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부자 세습의 권력 승계를 꾀하여, 아들 김정일이 김일성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210~211페이지)
<지학사> 김일성은 6.25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그 책임을 물어 박헌영 등의 남로당 세력을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종파 분자를 없앤다는 명목 아래 최창익 등의 친중국 세력과 허가이 등의 친소련 세력을 숙청하였다(반종파 투쟁, 1956~58). 그리하여 1950년대 말까지는 북한에서는 권력이 김일성에게 완전히 집중되었다. 때마침 6.25 전쟁에 참가했던 중국 인민 지원군도 모두 철수하여 대항 세력이 없었다(1958). 이후 북한은 이른바 자주 노선을 표방하면서 김일성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284페이지)
 
7. 새마을 운동
 
<6차 교육과정 국정 교과서> 산업화와 도시화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먼저 농촌 새마을 운동을 도시에도 정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즉, 도시의 이웃끼리도 공통된 문제를 함께 의논하고 협동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또, 공장 새마을 운동으로 작업장 내에서의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이룩해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움직임도 전개하였다. (217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어촌 사이의 소득과 문화 격차가 갈수록 커지자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1970). …이로 인해 새마을 운동은 농어촌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나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381페이지)
<천재교육> 정부는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방법으로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작용도 발생하였다. 과도한 영농 설비 투자, 그리고 공급과 수요를 예측하는 시스템의 부재, 불투명한 판로 등으로 인한 농산물 가격의 불안정한 등락은 농가 부채 증가의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도시 문화의 급속한 유입은 농촌의 소비도 급증시켰다. 국가의 기획에 의한 새마을 운동은 획일적인 농촌의 모습과 생활양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379페이지)
 
8. 反共(반공)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우리나라는 통일을 민족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서,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왔다. 1960년대까지는 반공을 강조했는데, 이는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기 위하여 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주 국방에도 힘을 쏟게 되었으며,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 외교를 추진하게 되었다. (208~209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 6·25 전쟁은 무력 통일의 무모함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남북간에 서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고조시켰다. 특히, 남북의 두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를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1960년대 남한에서는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가 반공을 내세워 4·19 혁명 이후 분출된 민간 차원의 다양한 평화 통일 운동을 탄압하고, ‘승공 통일’을 강조하며 강경한 대북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도 남조선 혁명론을 바탕으로 무장 공비 남파 등 군사적 도발을 통해 위기 상황을 고조시켰다. (3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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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앞부분은 ‘필수’, 뒷부분은 ‘선택’이 된 반쪽짜리 高校 국사 교육
 
高校 국사 교과서의 역사 및 현황 정리
 
제6차 교육과정인 2001년 以前까지 고등학교 국사는 필수 과목이었다. 학교에서도 필수 과목으로 가르쳤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사회탐구영역의 공통과목에 포함되어 있어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사용된 교과서는 國定(국정)으로, 선사문화부터 근세(16세기 후반)까지를 다루는 국사(上), 근대태동기(조선 후기)부터 근·현대사를 다루는 국사(下)로 나뉘어져 있었다.
 
2002년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적용된 제7차 교육과정부터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 교육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國定교과서인 ‘국사’를 배우는데, (上)ㆍ(下)가 사라지고 한 권짜리가 되었다. 목차에는 근·현대의 부분도 등장하나 내용의 중심은 근세 시기까지다. 그 이후의 근·현대사 부분은 高 2~3학년 중 ‘한국 근ㆍ현대사’ 시간에 6개의 출판사가 발간한 檢定교과서 중에서 학교가 택한 책으로 배우게 되었다. 근ㆍ현대사는 선택과목이기 때문에 학교에 따라 택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되어, 이때부터 한국의 근·현대사를 자세히 배우지 않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근세 시기까지의 부분은 필수, 근ㆍ현대사 부분은 선택이 된 것이다.
 
반쪽짜리 國史 교육에 기름을 부은 ‘선택형 수능’
 
2005년 수능시험이 ‘선택형 수능’으로 바뀌면서 문제는 더 커졌다. 수능 사회탐구영역의 공통과목이었던 국사가 11개의 선택과목 중 하나로 변하게 된 것이다.
 
국사, 한국 근·현대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지리, 사회문화, 정치, 법과문화, 경제, 윤리 중에서 학생이 최대 4개까지 골라 시험을 보도록 했다. 여기서 ‘최대 4개’까지라는 것은, 1개부터 4개까지 개수를 선택하는 것은 학생의 자율이라는 뜻이다. 학생은 수험 과정에서 진학하고 싶은 대학이 요구하는 특정 과목이나 과목 개수를 충족시키는 내에서 선택과목을 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사를 포함한 3개 과목’의 점수를 요구하고 있는 ㅇㅇ대에 지원하려면 국사와 나머지 2개의 과목을 선택해 시험을 치러야 한다. 과목을 적게 선택해 집중해서 공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생긴다. 선택과목을 2개만 정해서 수능을 치렀을 경우, 선택과목 3개의 점수를 요구하는 대학에는 지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선택과목을 적게 선정하는 것이 불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2012년부터는 선택 개수가 최대 3개까지로 줄어들게 된다)
 
교육 현장에서 존재감 잃은 國史
 
수능에서 선택과목이 된 ‘국사’는 수업 현장에서 존재감을 잃게 됐다. ‘교육과정’ 상의 필수일 뿐, 高校 교육 현장의 실질적인 목표인 ‘대학 진학’에는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의무적으로 수업시간을 채우는 데 그치게 되면서 ‘국사’와 ‘한국 근ㆍ현대사’는 학생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된다.
 
실제로 대부분 高 3학년들은 ‘국사’를 기피하고 있다. 국사를 입시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있는 대학이 서울대뿐인 탓에 상위권 학생들만 수능 선택과목으로 국사를 택하기 때문이다. 상위권 학생들이 국사를 택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불리해지는 중·하위권 학생들은 국사를 선택하지 않는다. 필수로 국사를 배워야 하는 1학년 때도 한 학기 정도 수박겉핥기식으로 배울 뿐, 수능 범위가 아닌 이상 손을 놓게 된다.
 
2011년 또다시 잡음 속에 새로운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9 개정교육과정(제7차 교육과정의 기본철학 및 체제를 유지했다고 하여 제8차로는 부르지 않음)을 거친 교과서이다. (주)미래엔컬처그룹, (주)삼화출판사, (주)지학사, (주)천재교육, (주)비상교육, 법문사 등 6개의 출판사가 발간한 檢定 교과서로, 선사 문화부터 한국 근·현대사의 기간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체제부터 반쪽짜리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기존의 國定 교과서 국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한국사’ 교과서 체제는 2011년에 입학한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적용되어 수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한국사 수업은 필수과목이 아니라 선택으로 분류되어 잇다. 수능에서도 역시 선택과목으로 밀려난 만큼, 이제 학교 및 학생에 따라 한국의 역사를 배우지 않고 졸업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2012년부터 경기도 내 高校에서 역사 관련 교과목이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되고, 교육과학기술부에서도 한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사 교육이 정상화 되려면, 반드시 학교 수업 내의 필수 과목 선정과 수능 내 필수 과목 선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지난 한국근ㆍ현대사 교과서 때부터 지적되어 온 교과서의 편향성에 대해서도 국가 차원의 엄격한 지적 및 수정이 필요하다. ‘잘못된 내용’을 ‘필수’로 배우는 것은, 배우지 않는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편향성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기존의 한국 근ㆍ현대사(檢定) 교과서와 국사(國定) 교과서는 2010년 高校 입학생(현재 高 2)까지 적용되므로, 수업 현장에서는 내년(2012년)까지 사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