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眞實과 왜곡>
 
北정권 출범과정의 反민족·反민주적 사건 기술배제
2차례에 걸친 북한의 核실험 기술하지 않아
실패한 북한의 토지개혁 성공한 것처럼 소개
북한의 실패한 사회주의 건설운동에 대한 긍정적 서술
6種 교과서 모두 북한의 실패한 화폐개혁 다루지 않아
北주체사상 선전영화 및 교육제도에 대한 긍정적 서술
 
 
1. 교과서가 묵살한 김일성과 북한 정권의 8대 恥部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서 李承晩의 역할 格下
스탈린에 대한 김일성의 충성 등 惡行은 모두 배제
 
새로 발간된 高校 한국사 교과서들은 거의가 북한 정권의 출범과정에서 일어났던 反민족적, 反민주적 사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김일성을 소련군대가 조종한 사실, 김일성이 스탈린 앞에서 시험을 친 뒤 북한 정권의 지도자로 결정된 사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는 사실, 북한 정권의 國號(국호) 및 憲法(헌법)도 스탈린이 만들어준 사실 등을 교과서에 싣지 않는 것은 북한 정권의 反민족성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대한민국 建國(건국) 과정에서 李承晩(이승만)이 한 역할을 格下(격하)시키려고 애쓰면서 김일성이 한 못되고 못난 짓들은 덮어주었다. 예컨대 아래 사실들이 한국사 교과서에서 거의 묵살되고 있다.
 
▲ 소련군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산하 抗日 빨치산 출신 장교 金日成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발탁하여 1945년 9월 북한에 데리고 들어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적은 없다. 《朝鮮戰爭(조선전쟁)》이란 책을 쓴 일본공산당 기관지 기자 출신 하기와라 료(萩原 遼) 씨는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의 의식을 갖지 않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고 지적했다.
 
▲ 바로 이 시기 李承晩은 34년째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미국 정부는, 미래의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李承晩은 1945년 초 흑해 연안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스탈린에게 약속했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다. 그 전부터 李承晩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카츠라 밀약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묵인했듯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인정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親蘇的이고 좌경적인 인물들이 박혀 있었던 美 국무부를 화나게 했었다.
 
▲ 냉전이 끝난 뒤 공개된 舊소련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 지역에 ‘민주정권’, 즉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한 것은 1945년 9월20일이었다. 스탈린은 그해 8월 초순 런던에서 열린 외상회담에서 미국이 反蘇的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미국과의 대결을 결심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북한에서 공산 정권을 공고화한다는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당국은 김일성을 시켜 북한에서 행정조직과 군대를 만드는 등 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 단독 정권 수립 방침에 따라 소련군은 군사관할 분계선에 불과한 38선을 사실상 국경선으로 만들어 한민족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지시킨다. 남북분단의 全的인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이 져야 한다. 李承晩이 남한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스탈린의 分斷 결정 그 1년 뒤였다.
 
▲ 1945년 11월23일 신의주에선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소련군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공산당 타도’ 시위를 벌이다가 보안군과 소련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23명이 죽고 700여 명이 다쳤으며 2000명이 체포되었다.
 
▲ 1945년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외상)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소련의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朴憲永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 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산당 세력은, 民心을 거역하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 金學俊(김학준) 前 동아일보 회장(前 서울대 교수)이 쓴 《북한의 역사》(1, 2권)는 東西 냉전이 끝난 후 공개된 문서를 바탕으로 연구한 책이다.
 
1946년 7월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일종의 면접시험을 치게 한 뒤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지도자로 선택하는 장면은 李承晩이 왜 김일성을 무시하고 스탈린과 상대하려 했고 북한을 항상 北傀라고 불렀는지를 깨닫게 한다. 金學俊 박사에 따르면 “스탈린은 우선 金과 朴에 대해 조선반도의 정세, 남조선의 정세, 북조선의 정세를 자세히 물었다”. 김일성은 시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레베제프는 이 경우에 대비해 이미 金을 ‘꼼꼼하게 준비시켰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를 예측한 뒤 예상되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미리 마련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金에게 특히 군사문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특히 “군사 및 전략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가장 완벽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라고 레베제프는 회상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소련군에 대해 호의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스탈린의 배려, 그리고 소련군의 주둔 및 협조가 북한에서 여러 개혁들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스탈린의 환심을 사려 했다. 朴憲永의 통역을 맡았던 샤브신의 부인 샤브시나의 회상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朴이“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을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김학준 박사는 《북한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스탈린은 자신의 별장으로 김일성과 朴憲永의 일행을 초청해 연회를 베푼 뒤 朴을 모스크바에 며칠 머무르게 해 기업소들과 공장들을 견학시키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통역들의 회상에 따르면, 金은 ‘무서운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中級의 黨(당)간부처럼 보였으며 ‘아첨하는 어조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내내 스탈린에게 동의하곤 했다. 金은 긴장해 있었고 언제라도 스탈린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며 스탈린은 金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자신의 학생처럼 대하면서 강의하고 지시했다. 통역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군사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金을 감동시키면서 戰爭史(전쟁사)로부터 예들을 자주 인용했다. (…) 金은 진심에서 우러난 감격과 환희를 나타내며 입을 벌린 채 그것을 들었다>
레베제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金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金은 열광적인 단어를 그치지 않고 반복했다. (…)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에 의해서 그가 차지한 ‘영웅’의 권위가 ‘커다란 지도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스탈린에 대하여 아부했고, 朴憲永은 깐깐한 자세였던 듯하다. 김일성은 생전에 黃長燁(황장엽)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李承晩 대통령은 1954년 미국을 방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미국 측이 韓日수교를 압박하자 "내가 살아 있는 한 수교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자 李 대통령은 그의 등을 향하여 "저런 고얀 X이 있나, 저런"이라고 호통을 쳤다. 미국 대통령에게 호통 친 한국 대통령과 소련 독재자에게 아부한 북한 지도자의 차이가 오늘의 남북한 차이이다.
 
▲ 일본의 法政大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가 쓴 《아시아 冷戰史》에 따르면 1948년 4월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와 주다노프 등 소련공산당 간부들과 만나 북한 헌법 제정 등의 절차를 결정했다.
“헌법은 1947년부터 소련헌법을 기초로 하여 준비되었으나, 일부는 스탈린 자신이 집필했고, 또 당초 있었던 임시헌법에서 임시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이 회의에는 북한 지도자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 4월 회의의 결정에 따라 8월에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이뤄지고 9월2일에 제1회 회의를 소집했으며, 8일엔 헌법을 채택, 9일엔 인민공화국 창설이 선언되었다. 國名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러시아語로부터 直譯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5월 총선으로 구성된 制憲국회가 열띤 토론을 거친 끝에 만든 것이다. 이 헌법에 따라 국회가 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북한 정권은 스탈린에 의하여 제조되었고, 대한민국은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출범하였다. 한국의 정통성은 民意에 의하여 탄생한 국가라는 점에 있고, 북한 정권의 이단성은 외국인 독재자에 의한 被造物이란 데 있다.
 
▲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세우면서 위대한 독립투사이자 민족지도자인 曺晩植 선생을 숙청한 사실을 생략한 교과서도 있다.
 
 
2. 高校교과서, 두 차례의 北核실험 언급 없어
 
6種 교과서 모두 北核문제 해설 한 단락 넘지 않아
美國의 對北경제제재를 北경제실패 원인으로 지목
 
6種의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2차례에 걸친 북한의 核(핵)실험을 기술하지 않았다. 비상교육刊 교과서의 경우 북한의 核개발을 ‘핵 개발 의혹’으로 표현하는 등 왜곡의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라는 왜곡된 제목과 함께 “선군정치의 방침에 따라 북한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강성대국을 목표로 내걸고 核무기 개발에 나섰다”(400페이지)면서 선군정치와 核개발을 옹호하는 듯이 서술했다.
 
미래엔컬쳐그룹刊 교과서는, 1980년대 이후 북한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합영법을 제정, 나진-선봉 자유무역을 설치했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핵 개발 등 무력 도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가 가해져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389페이지)”고 서술했다. 북한이 경제개혁을 시도했으나 미국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지학사刊 교과서의 경우 ‘북한의 통일정책’을 小제목으로 “북한은 1995년을 통일 원년으로 설정하고 해외 세력을 포섭해 대대적인 통일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 정책은 核무기 개발 문제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326페이지)면서 북핵 문제를 다뤘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비핵화 공동 선언’(1992년)을 설명한 뒤, “그러나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핵 확산 금지 조약(NPT)에서 탈퇴하자 한반도에도 다시 긴장이 감돌았다”(383페이지)면서 北核실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핵 개발 의혹을 받아 오던 북한이 핵 확산 금지조약(NPT)을 전격적으로 탈퇴하자 남북관계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6년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국제 사회가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核 위기에서 벗어나려 하였다”(382페이지)는 내용만 기술했다.
 
북한 核개발의 실체
 
姜錫柱(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2002년 10월 방북한 제임스 켈리 美 특사에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 이어 2006년과 2009년 북한은 플루토늄을 사용해 두 차례에 걸쳐 核실험을 실시했다. 2010년 11월에는 미국의 核과학자인 헤커(Hecker) 박사를 초청해 중국의 도움을 받아 구축한 대규모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했다.
 
북한의 核개발은 역사가 길고, 舊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1955년 核物理(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한 북한은 1956년 소련과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북한은 핵물리학자 30명을 소련의 ‘드브나(Devuna) 핵 연구소’에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10㎞ 떨어진 드브나 시(市)에 위치한 이 과학기지에는 소련 최대 核실험실이 있었다. 1964년 중국 최초의 核실험을 성공시켜 ‘중국 核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핵물리학자 王淦昌(왕감창) 등 중국의 주요 核과학자들도 이곳에서 길러졌다. 1956년 설립 이후 1990년 북한과 러시아의 과학연구 협력이 중단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모두 250여명의 북한 과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1960년대부터 북한은 핵물리학 연구진을 자체적으로 길러냈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에 核物理學院(핵물리학원)을 설립해 核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1965년에는 소련의 도움으로 영변에 IRT-2000 연구용 核反應爐(핵반응로)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核연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1979년에는 자체 기술로 실험용 核反應爐 건설에 착수해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영변 核시설에 사용한 核연료봉을 써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 건설에 착수했다. 북한은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영변 核시설 내부의 모래밭에서 核武器 개발에 필요한 高爆(고폭) 실험을 130여 차례 실시했다. 북한의 초기 핵 연구는 都相錄(도상록), 韓仁錫(한인석), 李升基(이승기) 등 越北 과학자들이 주도했다.
 
일본 京都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都相錄(1903~1990)은 해방 후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1946년 5월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 주임을 맡았다. 韓仁錫은 해방 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越北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고급 교사를 맡았으며, 모스크바에서 첨단 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핵물리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李升基는 1939년 京都대학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6.25 때 월북했다. 1940년대 초반 석탄으로 합성섬유 1호를 개발한 그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영변원자력연구소장(1967)과 과학원 함흥분원장(1987)을 지내는 등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북한은 현재 核개발 핵심고급인력 200명을 포함, 전문인력 3000명, 기술인력 6000명 등 총 9000여 명의 核과학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핵물리학 분야의 핵심 교육기관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성이과대학이다. 평성이과대학은 핵물리학, 화학, 수학 등 총 다섯 개 학과로만 구성된 특수대학이다. 이외에 평양고등물리학교, 김일성고등물리학교 등도 물리학 연구 인력을 배출하는 주요 교육기관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정말 核武器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核武器 제조 기술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1950년대 이미 모든 원리가 밝혀진 기술이다. 원자로 기술과 核무기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분열 핵물질을 사용해 원자로는 3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쳐 핵분열이 일어나도록 작동시키는 반면, 核무기는 짧은 시간에 핵분열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분열시간의 조절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核武器 개발 시 설계된 모형에 대한 核計算(핵계산)을 현대와 같은 대용량의 슈퍼컴퓨터로 계산하지 않고 手記(수기)식으로 계산해 설계했으나 큰 문제점은 없었다. 북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자체 기술로 영변의 5MWe 原子爐를 설계해온 만큼 어떠한 모형의 핵물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 계산 가능한 核計算 코드를 보유하고 있으며 核武器 개발에 필요한 기술상의 문제점은 없다고 보인다. 여러 異說(이설)이 있을 수 있으나,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핵실험의 필요성은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낮아졌으며,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도 핵무기를 유지,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 대다수 核科學者들이 동의한다. 북한의 核 開發은 김정일 정권이 그동안 각종 합의를 위반하면서 집요하게 核開發을 추진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것을 요구하는 위협이다.
 
이처럼 사실을 조작-왜곡, 미래의 조국을 짊어지고 나갈 학생들의 正義感과 愛國心을 파괴하게 될 反국가적 교과서를 檢定해준 敎科部 책임자들에 대한 법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가꾸어 온 세력을 저주하고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敵을 감싸는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잔인한 자를 동정하고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한 인간형으로 커갈 것이다.
 北核문제는 아무리 북한 정권을 비호하려고 해도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사안인데, 이 교과서 필자는 문제의 본질을 흐림으로써 북한 정권의 책임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 술책을 바로잡지 못한 (또는 알고도 하지 않은) 李明博 정부이다. 이게 '중도실용'의 폐해이다. 국가가 이념을 버리면 不義 및 허위와 타협하게 된다.
 
 
 
3. 高校교과서, 실패한 北토지개혁 성공한 것처럼 서술
 
北토지개혁, 개인의 소유권 인적한 적 없어
李承晩의 성공한 ‘농지(農地)개혁’에 대해 부정적 서술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남북한의 토지개혁 문제와 관련, 실패한 북한의 토지개혁을 성공적인 것으로 서술하고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논조로 일관하고 있다.
6種 교과서 모두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실시해 농민에게 유리한 개혁이었던 것처럼 서술했다. 교과서에 실린 남북한의 토지개혁 문제와 관련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군정은 쌀 공출제를 폐지하여 곡물의 자유시장제를 실시하고, 소작료를 3분의 1로 낮춘 3.1제를 채택하여 농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정책은 토지개혁, 소작료 추가 인하와 금납제 등을 바라는 농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중략) 38도선 이북에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전신이었던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광복 당시 남북에서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였던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토지개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천재교육刊, 314페이지)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이 단행되자 미군정도 농지 개혁 관련법을 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 민주당과 지주층이 반발하여 전면적인 농지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 농지에 한하여 원래의 소작 농민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중략) (남한의) 농지개혁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었다. 그러나 법이 시행되기 전에 지주가 미리 땅을 팔아치운 경우도 있어 농지 개혁 대상 토지가 줄기도 하였다.” (비상교육刊, 318~319페이지)
 
▲“북한에서 1946년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남한의) 농민들은 북한과 같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였다. 미군정은 토지 개혁 요구를 외면할 수 없게 되자 입법을 서둘렀으나, 지주층의 반발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미군정청은 결국 1948년 총선거를 앞두고 신한공사를 해체하고 귀속 농지 분배를 실시하였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1946년 3월 토지개혁법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38선 북측 지역에 자신들의 안정된 정권과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 정부 및 일본인, 친일파,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작농에게 분배한 결과, 이후 농가는 평균 약 16,137㎡ 정도의 농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농지를 보유한 농민들은 수확량의 30%를 현물세로 내었다.” (삼화출판사刊, 315페이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조선총독부 및 일본인의 소유지, 친일 민족 반역자와 지주의 소유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중략) 몰수한 토지는 경작자에게 준다는 원칙에 따라 농업 노동자, 소작농, 소지주에게 가족 수와 노동력에 따라 점수를 매겨 나누어 주었다.” (미래엔컬쳐그룹刊, 341페이지)
 
▲“1946년에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 실시됨에 따라 남한에서도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중략) 농지개혁의 결과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가 폐지되었으며, 농민들은 소작농에서 벗어나 자기 농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분배받은 토지의 가격은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갚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농민들이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팔고 소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이른바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친일파를 숙청하였으며,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한 노동법과 남녀평등법 등을 제정하였다. 또, 5정보를 상한으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대지주의 땅을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법문사刊, 317~318페이지)
 
▲“북한의 토지개혁은 국가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영세농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많은 지주들이 토지는 물론 가축과 주택 등도 빼앗기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토지는 농민에게 가족의 노동력에 비례하여 분배되었다. 분배된 토지는 매매․대차․저당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농민은 경작권만 갖는 셈이었다…….(중략) 북한의 토지개혁은 지주 제도를 철폐함으로써 농촌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농민이 국가의 땅을 경작하는 셈이었기 때문에 근로 의욕의 감퇴를 가져왔다.” (지학사刊, 272페이지 ‘도움자료’)
 
김일성의 실패한 토지개혁
 
1946년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건설하겠다는 스탈린의 계획이 발표되면서 북한은 급속도로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에 편입됐다. 1946년 2월, 북한 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소련군 점령사령부는 가장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같은 해 3월5일 토지개혁법이 공포되어 사원을 비롯한 개인소유의 농지를 모두 몰수해 과도적 조치에 따라 무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분배했다. 이러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이 소련 점령군의 무장군인을 앞세워 불과 20일 만에 이뤄졌다.
당시 김일성의 명의로 발표된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의 기본내용은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와 5정보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소작제를 철폐한 뒤, 몰수된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分與(분여)하는 것이었다. 분배된 토지에 대해서는 道(도)인민위원회가 토지 소유권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하고 토지대장에 登載(등재)하게 했다.
 
북한은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 제5조를 통해 “몰수한 토지전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영원한 소유로 잉여한다”고 규정하여 명목상으로나마 소유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同(동)법령 제10조를 통해 “농민에게 분양된 토지는 매매하지 못하며, 소작을 주지, 못하며 저당하지 못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토지의 유동화를 금지했다. 애초부터 사회주의 방식으로 이뤄져, 분배농가(소작농)에게 분배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확실히 인정한 남한의 토지개혁과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와 함께 북한은 1946년 10월1일 ‘토지개간법령’을 공포해 토지개간의 허가제 시행과 개간 토지의 소유권 인정 개간 토지의 매매 금지조치를 취했다. 토지재산의 처분권에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농민에게 耕作權(경작권)만을 부여하는 조치였다.
1947년 3월22일 북한은 산림에 대한 결정서와 대지 및 잡종지에 관한 결정서를 공포해 묘지 등을 제외한 모든 산림을 국유화하고 주택의 사적임대제를 폐지했다. 1948년 3월12일에는 ‘대지 및 공지 이관에 관하여’를 공포해 도시토지의 국유화를 준비했다. 토지개혁으로 북한의 농업은 소규모 개인 농업이 중심이 된 소상품 생산구조로 전환됐다. 북한은 이후 개인농을 협동농장으로 흡수하는 농업 집단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은 6.25전쟁 이후 4~5년간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급속하게 진행됐다.
 
첫 번째 단계(1953년)에서는 토지의 사유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토지, 가구, 농기구 등을 공동 이용하고, 이를 통해 얻은 수확물을 투입된 노동의 양에 따라 분배하는 ‘노동 상호부조’ 형태를 취했다. 두 번째 단계(1954~1957년)에서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인정한 상태에서 토지를 협동조합에 출자, 집단 경영케 하고 노동의 기여도와 토지 출자량에 의거해 생산물을 분배하는 反사회주의적 형태를 취했다. 세 번째 단계(1958년)에서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 수단의 집단화로 사회주의의 전형적인 집단 소유와 집단 경영체제를 이루었다. 북한에는 현재 약 3000여 개의 협동농장과 국영농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총 경지 면적 중 협동농장이 90%, 국영농장이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협동농장은 형식상 농업관리위원회의 자율적 경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선전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무원의 농업위원회, 道(도)농촌경리위원회, 郡(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의 지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이처럼 1946년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 의해 실시된 북한에서의 토지의 개인소유화는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8년에 끝마친 농업협동화와 함께 종결됐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의 독재체제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토지개혁 법령 5조에서 밝힌 ‘무상 분배한 땅을 영원히 농민의 소유로 한다’는 김일성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승만의 성공한 농지개혁
 
이승만의 사회개혁을 위한 계획 중 농지개혁은 매우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사안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한국 사회의 탈농-상공업화를 주장했다. ‘일제에 의해 몰수된 모든 토지를 소농에게 분배할 것’과 ‘대지주제를 혁파해 소농체제로 개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R.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365~367페이지 인용)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한평생에 걸친 자신의 사상을 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존의 지주제 해체가 사회경제적 평등화에 기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지주제 몰락이나 평등화의 실현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농지개혁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을 신장하는 동시에 그것을 자본주의 산업화를 위한 조건이나 계기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농지뿐만 아니라 토지 이용 전반에 걸쳐 효율성과 합리성을 강조했다. 그는 토지절약을 위해 “국민이 싫어하더라도 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지소유자가 국가적 차원의 개발을 어렵게 할 경우 “국가가 할 수 있는 법이 개발을 보장하고 또 토지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승만의 입장은 좌익계 정치집단과도 달랐고, 지주제를 배경으로 한민당과도 같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은 5.10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 당국이 1948년 봄에 일방적으로 강행했던 歸屬農地(귀속농지) 拂下(불하)결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평등주의와 산업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쫓던 이승만의 생각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귀속농지 불하결정이 내려진 직후 이승만은 올리버(R. Oliver)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한국의 신생정부가 파시스트적, 반동적, 극우적일 것이라고 지껄이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조국을 ‘자유화’하는지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착수하게 될 것은 바로 토지개혁”이라고 했다. (R. Oliver, Syngma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152-153페이지 인용) 이어 “미군정 당국이 한국 국회의 동의 없이 귀속농지를 처분할 권리가 없는데다가, 총선거를 불과 6주 앞둔 시점에서 이를 급하게 서두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편지에서 언급된 ‘자유화’의 구체적인 의미와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평등주의와 산업주의의 병행 추진이라는 이승만의 평소 지론을 감안할 경우 그는 토지개혁에 관해 자신만의 心算(심산)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이승만은 歸屬農地(귀속농지)를 국가주도 산업화를 위한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또 일반농지에 대한 개혁 역시 지주들에 대한 확실한 전업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산업자본가 형성에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시키려 했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구상이 현실화됐다면 농지개혁의 全 과정이 일제가 남긴 산업생산 및 기술수준과 결합되어 한국의 국가주도 자본주의 산업화가 정부수립과 함께 바로 시행됐을 것이다.
 
농지개혁에 관한 이승만의 초기구상은 차질을 빚었다. 미국이 군정 말기에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속농지 분배를 일방적으로 단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는 본격적인 토지개혁의 예고편이 되었고, 이승만도 정부 수립 직후 농지개혁에 착수했다. 그가 당시 지주 계급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與黨(여당)인 한민당의 입장을 극복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 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1951년 4월 ‘농지개혁법 시행규정’을 통해 재개되어 남한 전역에 실시됐다. 그 결과 총 경지의 약 40%에 달하는 89만2000정보의 땅이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재분배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실현한 농지개혁은 삼림과 임야 등 非耕地(비경지)를 제외한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문자 그대로의 ‘농지개혁’이었다. 柳永益(유영익) 연세대 명예교수는 李 대통령의 농지개혁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첫째, 농지개혁은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사상 중요한 의의가 있다. ▲둘째, 이 개혁은 한국의 전통사회를 지배했던 양반지배층의 몰락을 초래하며 지주배경의 한국 민주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정치적 효과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셋째, 6.25 발발직전에 개시되어 전쟁 중에 완료된 이 개혁은 전쟁기간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내부동요를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 통치하에서 완결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기에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토지개혁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밝히고 있다.
 
 
 
4. “北과중한 국방비 부담, 韓美日 공조체제 때문”
 
실패한 北천리마 운동, 붉은기 쟁취 운동에 대해 긍정적 서술
지학사, 북한이 경제분야에서 사회주의적 개조 완성했다 서술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慢性(만성)적인 북한 경제의 고립과 파탄문제를 언급하면서 실패로 돌아간 사회주의 건설 운동 ‘천리마 운동’과 ‘붉은기 쟁취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다음은 구체적인 사례다.
 
▲ “한미일 공조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과중한 국방비의 부담과 에너지의 부족, 사회 간접 시설의 미비, 기계 설비의 노후화 등의 문제가 북한 경제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았다. 1980년대 말부터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에 힘입어 금강산 관광사업, 개성공단건설 등 남한과의 경제교류가 확대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관리개선·개조조치(2002)’를 발표하여 기업소 경영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생필품 교류를 위한 시장을 허용하는 등 시장 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미래엔컬쳐그룹刊, 389페이지)
 
▲ “북한은 1957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천리마 운동이 시작되었다. 천리마 운동은 사회주의 경쟁 운동이 되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후 북한 전역의 생산 현장에는 속도전과 경쟁이 지배하였다……. (중략) 1970년대에는 천리마 운동의 뒤를 이은 3대 혁명 운동과 3대 혁명 붉은기 쟁취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북한은 경제 부분에서 국제적 시야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여러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 자신들의 경제 성장을 과시하기 위한 건축물들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천재교육刊, 391~392페이지)
 
▲ “1956년 말부터 시작된 천리마 운동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이라는 구호 아래 인민들을 일치단결시켰다. 이때의 경이적인 속도를 ‘천리마 속도’라고 불렀다 한다. 평양시 건설 때는 14~16분에 한 채씩 주택을 조립하였기 때문이었다. 1974년부터는 ‘속도전’이라는 용어가 사회주의 노력 경쟁의 공식 구호로 채택되었다.” (삼화출판사刊, 330페이지)
 
▲ “북한은 6.25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쏟았다. 먼저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복구 및 경제 건설 3개년 계획(1954~1956)을 추진하였다. 목표를 초과 달성한 북한은 이어서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1957~1961)도 1년 앞당겨 완료하였다……. (중략) 북한은 전후 복구와 경제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영화·집단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수도 평양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선전하는 상징도시로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의 모든 경제 분야에서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되었다.” (지학사刊, 284페이지)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북한의 경제개혁
 
북한은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한다는 미명 하에 경제재건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주민들은 절대빈곤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경제건설의 중점을 군사력 건설에 두었다. 이에 崔昌益(최창익) 부수상은 “기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정책에 반대했으나 김일성에게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했다.
 
김일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57~1961년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웠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스탈린식 강제 대중동원으로 ‘천리마운동’이라는 생산독려 운동을 추진했는데 이는 1958년 중국의 毛澤東(모택동)이 추진했던 ‘대약진운동’과 유사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을 통해 철강생산량 2억 톤, 곡물생산량 5억 톤을 생산해 급진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인민공사’를 만들어 야심에 찬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일례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당시 도시와 농촌의 ‘4害’(해), 즉 파리·모기·쥐·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중국의 모든 주민들이 동원됐다. 당시 참새를 쫓기 위한 모택동의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 소름이 끼친다. 全 국민이 총동원되어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소리를 쳐서 쫓아냈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4害(해) 퇴치운동’이었다. 문제는 경제 門外漢(문외한)인 김일성이 모택동의 생산운동을 모방하면 경제건설의 목표가 쉽게 달성될 것으로 믿고 ‘천리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기계와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노동력만으로 경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오판이었다. 결국 ‘천리마운동’은 집단이익을 위해 주민들의 희생만 강요한 운동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이후 북한의 경제 실패는 1961~1967년 사이 진행된 제1차 7개년 계획에서 또 다시 나타났다. 이 시기 1956년 2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대립을 거듭하던 중국과 소련은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 소련은 對(대)중국원조협정을 파기시켰으며 1969년에는 국경에서 무력충돌까지 빚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어느 편에 서야 되나 고민하다 중국과 소련간의 等距離(등거리)외교를 지향했다. 겉으로는 等距離외교였지만 김일성은 내심 중국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김일성을 비판하게 되면서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게 됐고, 북한은 결국 중.소 양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됐다.
 
기대했던 경제원조가 없어지자 제1차 7개년 계획의 목표달성은 실패로 이어졌고, 북한은 窮餘之策(궁여지책)으로 소위 자력갱생을 경제 건설 노선으로 채택하게 된다. 이 계획은 아무런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全軍(전군)의 현대화를 위한 첨단무기 개발은 물론 부족한 기계설비와 원재료를 보충하는 데도 실패했다. 국내자원개발에 있어서도 노후화된 채광 설비를 개선할 수 없어 철광과 석탄 생산도 목표달성에 실패했다. 에너지도 부족하여 생산 공장의 가동에 차질을 가져와 기간을 3년씩이나 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했던 경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제1차 7개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일성은 ▲중노동과 경노동의 차이해소 ▲농업노동과 공업노동의 차이해소 ▲여성의 가사노동 해방 등을 목표로 한 제1차 6개년 계획(1971~1976)을 내세우게 된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대중동원을 위한 슬로건 ‘100일 전투’로, 이는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북한이 내놓은 窮餘之策(궁여지책)이었다. 이 기간에 7·4 남북공동선언(1972년)이 합의되면서 남북고위관리가 남과 북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朴正熙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을 보고 초조해진 나머지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플랜트(생산시설 및 공장) 수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북한 수출품의 주종인 아연 등의 국제가격이 폭락해 자금 조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中東의 오일쇼크로 극도의 에너지 부족과 원자재가격의 상승 등 불리한 여건이 조성되면서 북한은 외화부족으로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외채상환과 수입대금의 지불이 곤란하게 되어 국제사회의 신용을 잃게 됐다. 1975년 북한은 5억 5000만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1977년에 대외부채는 30억 달러에 달했다. 결국 김일성은 1977년 신년사를 통해 철강, 시멘트 등의 생산목표가 달성되지 못했으며 수송부문의 부진 등으로 6개년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3번의 경제 계획을 연달아 실패한 것이다.
 
북한은 1978년부터 1984년 동안 제2차 7개년계획을 진행한다. 이 계획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수립된 계획으로 목표는 경제의 자립 및 과학화, 운송부문의 현대화와 더불어 대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인민들의 소득을 1.9배로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서 농산물 생산목표는 1000만 톤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임야개간과 간척사업이 실시됐다. 계획의 슬로건은 ‘속도전’이었는데 이는 목표의 초과달성을 위한 것으로써 김정일의 아이디어였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김일성의 70세를 기념하기 위해 거액을 투입해 170미터 높이의 주체사상탑을 건립하는 등 비효율적인 부문에 자금을 집중함으로써 경제적 곤란이 더욱 가중됐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외자도입을 위한 合營法(합영법)의 제정이다. 합영법은 1984년 공포됐으나 자본의 도입은커녕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결국 북한은 1985년 2월 성과 발표도 없이 제2차 7개년 계획의 종료를 선언했다.
 
북한은 재차 제3차 7개년 계획(1987~1993)을 세웠다. 이 계획은 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계속 추진한다는 것을 과제로 정했다.
이 시기는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하고, 중국의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본격화한 때였다. 국제정세는 북한에 매우 불리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면서 자유화의 시대가 전개됐고, 1991년에는 소련도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북한의 경제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수립한 7개년 경제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원인은 對(대)소련 무역 격감과 무역결제방식의 변화에 있었다. 과거에는 우호적 가격에 의한 무역방식으로 거래를 해왔지만 소련이 개방경제가 되자 경화를 통한 결제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외화부족으로 허덕이는 북한으로서는 소련과의 무역거래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제3차 7개년 계획은 1993년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종료하게 된다. 1994년 김일성의 신년사에서 북한 경제상황의 악화를 보고했던 姜成山(강성산)이 전력·철강·화학섬유 그리고 농산물 생산의 부진을 시인하고 3차 7개년 계획의 3년 연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연장계획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1961년 이래 한 번도 북한의 계획경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이후 북한의 경제악화는 더욱 심화되어 극도의 곤란에 직면하게 됐고, 주민들의 생활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1983년 6월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일은 6월 15일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한 견학결과 보고를 통해 “중국공산당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전히 없게 됐다. 오직 있는 것은 수정주의 뿐”이라고 혹평했다. 이 내용을 전해들은 중국의 鄧小平은 분노했다.
등소평은 수차례에 걸쳐 경직된 북한의 경제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했었다. 일례로 1993년 5월 30일 鄧小平은 산동성 청도에서 북한의 姜成山 총리와 가진 회담에서 “북한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면 7, 8년 후에는 남한에 흡수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등소평은 또 “경제가 파탄나면 공산당은 집권할 자격이 없다”며 북한에 대해 개혁·개방을 권유했다. 鄧小平의 충고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1994년 7월 김일성의 장례의식 조문사절로 장관근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을 보내 喪主(상주)인 김정일에게 경제개혁을 권고했다. 이와 함께 鄧小平은 자신의 비서인 王瑞林(왕서림)을 북한에 보내 ▲경제발전과 국가건설 ▲조선반도의 비핵화 ▲휴전선에서의 군사 활동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對北(대북)정책 6개항을 김정일에게 전달했다. (1994년 7월22일자 홍콩신보 인용)
 
이 같은 중국 지도자의 간곡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이 사회주의 왕조체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한 김정일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북한의 개방을 반대했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1994년 11월1일자 보도에서 김정일의 논문을 소개하며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를 비난했다. “과학으로서 사회주의의 실패는 아니고, 사회주의를 변질시킨 수정주의자들의 파산을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수정주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가슴 아픈 곡절을 겪고 있지만, 과학성·진리성에 의해 반드시 재생하여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
 
북한 주민을 살리기 위한 개혁·개방을 말도 안 되는 수정주의로 치부해버린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권좌에 앉아 자신의 私利私慾(사리사욕)만 채우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런 김정일이 권좌에 오르자마자 시작한 것이 일명 ‘고난의 행군’ 운동이다. 이 운동은 餓死之境(아사지경)에 빠진 북한 주민들의 동요를 막고 김정일 독재체제 존속을 위한 대중동원 운동이었다.
그러나 정치운동으로 피폐한 북한 경제를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위기와 빈곤이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鄧小平은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경제를 살찌우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뜻이다. 鄧小平주의자들은 毛澤東의 절대적 평등주의를 반대한다. 현대사회의 운영에는 조직의 관리자와 고도의 기술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고 그에 따라 수입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했는지 북한은 2002년 7월 배급제 폐지, 물가·임금·환율의 현실화 및 기업의 자율권 확대 등을 골자로 한 경제 관리 개선조치를 추진했다. 김정일은 그러나 核을 부둥켜안고 경제 회생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空念佛(공염불)에 불과하다. 북한 경제는 지금보다 더 심한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5. 실패한 北의 화폐개혁, 교과서 모두 다루지 않아
 
한국의 경제失政은 과장, 北의 失政은 은폐
北정권이 ‘개혁 개방’ 추진한 것처럼 서술
 
6種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북한 경제를 다루면서 ‘합영법’(합작회사경영법)과 ‘개성공단’ 등은 집중적으로 다룬 반면 실패한 북한의 화폐개혁(2009년 11월 시행)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은 지금까지 총 5차례의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1947년 단행된 1차 화폐개혁의 목적은 日帝시대 때부터 사용하던 화폐를 1:1로 교환하는 것이었으며, 2차(1959년)는 6.25 전쟁에서 비롯된 인플레 방지, 3차(1979년)는 遊休(유휴)화폐의 유통, 4차(1992년)는 화폐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각각 실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화폐개혁은 주민 경제생활 향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철저히 黨의 이익만을 추구한 정책이었다.
 
이 가운데 4차와 5차 화폐개혁은 북한 주민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2009년 11월30일자 <데일리NK>는 1992년 11월 단행된 4차 화폐개혁이 新券(신권)과 舊券(구권)을 교환한다는 명목 하에 이뤄졌다고 했지만 사실은 주민들의 쌈짓돈을 당이 착취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데일리NK>는 “최고 액면가는 100원, 최저가는 1전이었다. 북한 은행들은 만 17세 이상 성인에 한해 1인당 300원씩 교환해 줬고, 개인의 돈은 2만원까지 적금으로 받아주었으나 그 이상은 전면 무효화했다”면서 “그 이상의 나머지 돈은 은행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출금해 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당시 북한의 화폐개혁은 북한 주민들뿐 아니라 조선족들까지 상당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졌으며, 외국인이 가지고 있던 북한 화폐 또한 교환해 주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최근에 단행된 5차 화폐개혁 역시 실패로 끝났다. 화폐개혁 두 달 만인 2010년 2월1일, 북한 당국이 전국적으로 실시했던 시장 통제를 풀고 모든 물품에 대한 거래를 허용해 反(반)시장 정책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폐개혁을 담당했던 박남기 노동당 계획경제부장까지 총살되어 화폐개혁 실패는 북한 내부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5차 화폐개혁의 부작용은 ▲쌀을 포함한 물가 폭등 ▲위안화 거래에 따른 중국 경제로의 예속화 ▲지급되는 급여와 배급 감소에 따른 餓死者(아사자) 증가 ▲노동당의 경제지배 구조 강화를 들 수 있다. 실제로 화폐개혁 직전(2009년 11월22일) 2200원(舊券 기준)이었던 평양의 쌀값(kg당)이 화폐개혁 이후(2010년 3월8일) 1300원(舊券 13만원 해당)이 되었다. 2200원에서 13만원이 되었으므로 약 59배나 뛴 셈이다. 그만큼 주민들의 생활은 더 궁핍해졌다.
 
6種 교과서 중 북한의 실패한 화폐개혁과 그 부작용을 다룬 교과서는 없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개성공업지구’, ‘금강산 관광특구’를 언급하며 이렇게 평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도 시장 경제적 기능을 일부 도입, 활용한다는 실리 사회주의 경제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북한식 개혁ㆍ개방은 국제 사회의 신뢰 부족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401페이지)
북한의 화폐개혁 실패로 미루어 볼때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북한 경제 기술은 사실을 왜곡하는 서술이다. 북한은 그간 자신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을 때마다 개성공단 계약 무효와 금강산 관광 철폐를 주장하며 억지를 부렸다. 이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黨 주도에 의한 화폐개혁 역시 시장과 정부 간의 정상적 역할로 보기 어렵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이런 사실을 외면한 채 포괄적으로만 서술해 북한이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를 적절히 혼합해 운용하는 것처럼 기술했다. ‘북한식 개혁 개방’이란 표현도 터무니없는 美化다. 북한이 그런 용어를 사용한 적도 없다. 親北세력이 북한 정권보다 더 북한을 선전해주기 위하여 만든 용어 같다. 북한은 개혁·개방을 수령체제 붕괴로 여긴다.
 
‘외화 부족’으로 식량난 악화?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는 390페이지 <북한의 식량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북한의 경제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난이다. 매년 600만 톤이 필요하지만, 생산력 저하와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생산량이 400만 톤을 밑돌기 때문이다. 여기에 외화 부족과 국제 식량 가격 폭등은 북한의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교과서는 북한 식량난에 대해 ‘생산력 저하’와 ‘자연재해’ 탓이라고만 설명할 뿐 黨이 지배하는 一黨(일당) 독재체제로 인해 벌어진 것임은 지적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실이 아닌 ‘외화 부족’과 ‘국제 식량 가격 폭등’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 화폐개혁에 대한 설명은 물론, 이로 인한 쌀값의 폭등과 식량난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도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 협력 정책에 힘입어 금강산 관광 사업 등 남한과의 경제 교류가 확대되었고 생필품 시장을 일부 허용하는 등 시장 경제 체제도 일부 도입하였다”고만 적었다. 시장경제를 부인한 화폐개혁에 대한 내용은 없다.
 
법문사刊 교과서는 ‘북한 경제의 문제점’(363페이지)이라는 小제목 하에 북한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비교적 자세히 다뤘다. “군사와 경제의 병진 정책 또한 한정된 자원으로 군사력 강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주민의 소비 부분이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오늘날 북한 주민들이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강요당하는 원인이 되었다”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화폐개혁의 실패에 대해선 다루지 않았다.
 
지학사刊 교과서에도 화폐 개혁은 찾아볼 수 없다. 2002년의 7.1조치와 1991년의 나진ㆍ선봉 경제특구, 2002년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소개하며,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개방 정책은 체제 유지를 우선시하고 있어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대략적으로만 설명했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도 북한 경제가 발전을 거듭하다 침체에 빠진 것처럼 간단히 기술했다.
“1970년대에는 인민 경제 발전 6개년 계획(1971~1976년)을 수립하고 생산력을 강화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지속적인 사상적 독려와 노력경쟁을 동반하여 이 기간에 농업 총 생산액은 전 기간에 비해 각각 2배 이상 증대되었고, 노동자ㆍ농민의 실질 소득도 각각 2배 가까이 늘어났다.”(379페이지)
“제2차 7개년 계획(1978~1984년)을 추진하면서 북한 경제는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자체의 자원과 기술만으로는 빠르게 발전하는 세계의 기술 수준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중략) 1980년대 초부터 경제 성장률이 점차 떨어지면서 북한 경제는 장기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380페이지)
 
역사는 민족과 국가의 興亡과 그 因果관계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좌편향 교과서는 계급적 시각과 친북적 성향에 집착, 사물을 편향적으로 보니 역사의 흐름과 진실을 놓친다. 그런 左傾(좌경) 이념적 집필방침이 적용되니 사실 왜곡이 일관성 있게 全面的으로 일어났다. 이건 역사가 아니라 선전물이다.
 
 
 
6. 高校한국사 교과서, 北주체사상 선전영화 게재
 
北체제 선전영화를 “북한의 독특한 예술”로 美化
 
6種 高校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9장 ‘북한의 사회와 문화’에서 공산 혁명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영화 ‘꽃 파는 처녀’를 소개했다.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꽃 파는 처녀’에 대해 “현재까지도 북한이 자랑하는 가장 대표적인 영화”라며 “김정일은 이외에도 수많은 영화와 연극 작품들의 제작에 관여하면서 주체사상에 기반한 북한만의 독특한 예술 체계를 만들어냈다”며 사진과 함께 문제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꽃 파는 처녀’는 교과서의 설명과 달리 농민과 地主(지주) 사이의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공산사회 건설의 정당성을 선동하는 북한의 ‘5대 혁명 가극’ 가운데 하나다.
 
1989년 개최된 제2차 고향방문단 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에서 북한의 적십자 대표들은 ‘꽃 파는 처녀’와 ‘피바다’ 등의 혁명 가극을 서울에서 3시간 10분씩 4회에 걸쳐 공연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고향 방문단 사업 자체가 무산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헌책방을 운영하던 김 모 씨가 ‘꽃 파는 처녀’, ‘민중의 바다’ 등을 인터넷상에서 거래해 국보법 7조5항(이적표현물 소지-제작-배포)위반 혐의가 적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선동하는 문제작이 이제는 버젓이 高校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꽃 파는 처녀’는 서장, 본장(7장),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 ‘꽃분이’ 일가와 지주와의 계급적 갈등을 통해 이들이 겪는 生活苦(생활고)를 反日(반일)-反封建(반봉건)의 계급투쟁으로 연결시킨 뒤, 마지막에서 김일성의 抗日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 했다.
1972년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던 ‘꽃 파는 처녀’는 1920년대 말~1930년대 초를 배경으로 주인공 ‘꽃분이’라는 어린 처녀가 공산주의 혁명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북한의 과학백과사전 출판사刊 《백과전서》는 ‘꽃 파는 처녀’를 “위대한 수령님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과 주체적 문예사상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명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북한의 잡지 《조선화보》는 이 영화에 대해 “나라를 빼앗긴 인민의 민족적 수난과 지주-자본가 계급의 횡포와 억압, 착취 밑에서 학대받고 있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예술적으로 그리면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혁명의 위대성을 실천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교과서는 “현재 북한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 대부분 1970년대에 창작되었다”면서 1970년대가 북한에서 집단주의 생활이 정착된 시기라고 설명했다. ‘꽃 파는 처녀’가 제작된 1972년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 역사상 매우 중요한 해였다. 환갑을 맞이한 김일성이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올랐고, 헌법에는 ‘주체사상’이 공식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본격적으로 김일성 우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김정일은 후계자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김정일은 1972년 10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5차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이 같은 후계자 경쟁과정에서 예술-문화의 선동부문을 활용했다.
김정일의 주도하에 제작된 ‘꽃 파는 처녀’는 ‘피바다’와 함께 김일성 우상화 작업과 김정일 후계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김정일은 2009년 5월1일 인민무력부장 김영춘을 비롯,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인 최태복, 김중린, 김기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양형섭,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 등과 함께 ‘꽃 파는 처녀’를 관람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이외에도 수많은 영화와 연극 작품들의 제작에 관여하면서 주체사상에 기반한 북한만의 독특한 예술 체계를 만들어냈다”는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설명은 북한 정권의 선전문을 연상시킨다. 예술은 표현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모든 예술적 활동이 철저하게 黨의 독재를 위하여 복무하는 우상숭배 체제에서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독특한 예술이 아니라 ‘선전 선동 연극’이라고 설명해야 맞다.
 
 
 
7. “北에서도 공부 잘하면 좋은 학교 입학(?)”
 
北 교육목표는 ‘공산주의적 새 인간 양성’
北 어린이, 출신성분 나쁘면 ‘꽃제비’로 전락
 
삼화출판사刊 한국사 교과서는 ‘문답으로 알아보는 북한의 교육제도’(381페이지)에서 북한의 학제 및 학생들의 일상생활 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여러분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공부, 시험, 성적, 등수 등은 여러분의 걱정거리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일 것 같습니다.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을 것 같은데요, 북한 학생들도 여러분들처럼 공부나 시험 성적으로 고민할까요? 물론 북한에서도 공부 잘하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노동신문에서도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공부를 잘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시고, 선생님들에게 칭찬 받고, 반 친구들한테 인기도 많습니다. 공부를 아주 잘하면 좋은 학교에 입학 할 수도 있고, 대학에 가는 것도 쉬워지지요. 그런 점에서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학교 공부를 많이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의 교육목표는 사회주의 헌법에 명시(제43조)된 것처럼 “사회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구현하여 후대들을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혁명가로, 智德體(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있다.
 
김일성은 1977년 9월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14차 전원회의에서 이러한 교육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정책지침으로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를 내놓았다. 여기서 테제란 ‘어떤 중대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입장과 태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기본원칙과 방도 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서술적 강령’으로 풀이되고 있다. (1992년 판 《조선말 대사전》)
이 테제에 의하면 북한의 교원은 “후대들을 혁명의 계승자, 공산주의자로 키우는 직업혁명가”로 규정하고 있으며 “모든 학생들이 개인주의-이기주의를 없애고 집단주의 원칙에 따라 사회와 인민의 이익, 당과 혁명의 과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도록 교양하여야 한다”고 명시해 놓고 있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교육이 본질적으로 계급성, 혁명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黨性(당성)과 노동 계급적 성격이 교육에서 나타나야만 黨과 革命에 충실한 혁명인재를 키울 수 있다고 규정한다. 교육을 통해 북한 당국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학생들을 ‘혁명화, 노동 계급화, 공산주의화’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및 김정일-김정은 부자에게 무한 충성을 바치는 혁명인재를 양성하는데 있다.
 
북한의 모든 교과과정은 정치사상 교육과 기술 교육의 양대 과목을 위주로 편성되는데, 인민학교는 4년 동안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 시절’,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 어린 시절’을 비롯해 ‘공산주의 도덕’, ‘국어’, ‘수학’ 등 총 12개 과목을 교육하고 있다. 고등중학교에서는 6년 동안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혁명 활동’, ‘경애하는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 혁명 활동’, ‘黨(당) 정책’, ‘수학’ 등 총 23개 과목을 교육한다. 북한의 주민들과 학생들에게는 당과 수령이 일방적으로 내리는 독재사상 교육을 충실히 받을 권리만 주어지고 있다.
 
북한의 교육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바람직한 세계관과 창조적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수령의 총과 폭탄이 되어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개인독재에 순응하는 가치관을 심어주는 교육으로 자율적-창조적 능력을 말살하는 교육이다. 더불어 출신 성분과 충성심을 기준으로 주민들을 3계층 51부류로 나누어 抗日혁명 유가족 및 黨·軍 간부의 자녀들은 별도의 교육체계를 갖추고 있는 등 差別待遇(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경제난으로 인해 교과서가 크게 부족하고, 교사나 학생들이 생존을 위해 식량을 구하는데 몰두하고 있어 정상적인 학교운영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학교를 포기한 아이들은 꽃제비가 되어 流浪(유랑)하고 있다. 북한은 교육 시스템 자체가 붕괴된 사회다.
 
 
 
8. “비날론 생산으로 北의복생활 획기적으로 바뀌어(?)”
 
삼화출판사刊, 실패한 北비날론 생산 성공한 것처럼 서술
비날론 개발자 이승기 박사, 北핵개발 주역
 
삼화출판사刊 한국사 교과서는 380페이지 ‘역사의 창’에서 북한의 核(핵)과학자인 李升基(이승기)와 그가 개발한 비날론(주체섬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리승기(1905~1996)는 세계에서 세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합성 섬유인 비날론을 발명하였다. 이 섬유는 카바이드를 원료로 하기 때문에 석회석과 무연탄이 풍부한 북한에서는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다. 1960년에 김일성은 “모든 것을 비날론 공장 건설에로”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하였다. 비날론의 생산으로 무명·삼베·아마 등과 같은 천연 섬유에 의존하던 북한의 의복 생활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代를 이어 北정권에 충성한 월북 核과학자 이승기
 
李升基(이승기)는 6.25전쟁 발발 직후 이종옥(李鍾玉, 前 북한 부주석)의 포섭에 넘어가 제자들과 함께 越北한 과학자로 북한 정권으로부터 ‘노력영웅’,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았다. 1905년 전남 담양군 출생인 이승기는 중앙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의 마츠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교토(京都) 제국대학에 진학해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교토 제국대학 화학연구소에서 조교수로 근무하던 이승기는 1939년 사쿠라다 이치로(櫻田一郎) 등과 함께 비날론 합성에 성공, 아시아 최초로 합성 섬유를 만들었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공대 학장을 지냈으며, 월북 후 1962~1990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맡기도 했다. 이승기는 비날론 개발로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1959년 제1회 과학부문인민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 불리던 레닌 상까지 수상했다. 김일성은 이승기가 잠시 병으로 누웠을 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북한은 비날론의 상용화를 위해 1961년 5월 흥남에 ‘2.8비날론공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비날론은 북한 정권의 선전과 달리 생산과정에서 막대한 전력과 석탄을 소비하기 때문에 나일론 등 다른 합성섬유와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졌다. ‘2.8비날론공장’은 삼화출판사刊 교과서가 서술한 것처럼 북한의 의복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꾸기는커녕, 70억 달러를 투자한 ‘남포갑문’, 40억 달러를 투자한 1989년의 ‘세계청년학생축전’과 함께 북한 경제를 파탄시킨 대표적 상징물로 전락했다.
 
이승기는 1967년 영변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초대 연구소장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북한은 이승기의 연구소장 재직 시절 소련의 도움을 받아 연구용 원자로를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1979년 5메가와트급 원자로를 착공해 1986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영변 원자력연구소장은 핵개발과 관련된 중요한 직책으로 이승기는 내폭형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루토늄 추출 기술은 핵공학 기술이라기보다는 화공학 기술이기 때문에 이승기의 역할은 상당했을 것이다. 이승기를 통해 북한에서는 자체 양성된 핵개발 인력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 가운데 특출한 인재들은 연간 수십 명씩 소련의 드브나(Devuna) 핵 연구소에 파견되어 현장 실습을 통한 기술을 습득했다.
 
북한 원자력공업부 공무원 출신 탈북자 김대호 씨는 자신의 저서인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은 피지 않는다》에서 이승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93년 여름, 본인은 평양 101 핵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간부로부터 북한이 低爆雷管(저폭뇌관) 개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핵탄두 폭발 시 통상 3만도 이상의 고온에서 핵분열이 일어나지만 그보다 훨씬 낮은 저온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저폭뇌관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황장엽 씨도 북한 고위관료로부터 들은바 있다고 본인에게 최근 이야기한 적 있다. 당시 연구사들 사이에선 ‘만약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승기 박사는 그 전범자의 한사람으로 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승기는 생전 함흥과학원 근처 2층 고급빌라에서 살았으며 사망 후 남한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代를 이어 북한 정권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 북한의 대외 홍보잡지 <금수강산>(2008년 1월호)은 이승기의 맏아들인 이종과(교수)가 ‘공훈과학자’로 화력발전소에 촉매법에 의한 발전기냉각용 수소정제체계를 도입했으며, 抗日투쟁 구호가 새겨진 ‘구호나무’ 보존에 기여하는 등 중견 과학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종과의 맏아들 이승일은 김책공업종합대학 연구사, 둘째 아들 이명일은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교수이며, 딸 이옥이는 김책공대 교수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