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俊河 추락사의 목격자 金龍煥의 手記

장준하가 타살되었다면 이 사람이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잠적이라고 몰아 붙인다. 나는 할 말을 다 했는데 의심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없었던 일을 지어서 말하라는 것인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없는 것도 마음대로 만들어 한 방향으로만 몰고가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란 것인가』
1975년 8월 등반중 추락사한 張俊河가 타살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또 나타났다. 전문 선동세력의 억지 주장을 멍청한 기자들이 써준다. 재미 있는 점은 선동꾼들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 장준하 추락사를 곁에서 목격하였던 결정적 證人을 몰아세우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증인 김용환씨는 "이 사건은 내 설명만 들으면 몇 초 안에 해결될 문제이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김용환씨를 살인범으로 모는 주장을 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김씨를 고발도, 공격도 하지 못한다. 폭로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도 갖추지 못한 不實 주장을 기자들이 써주는 데 문제가 있다. 19년 전 월간조선은 이런 사태를 예견한 듯 김용환씨의 手記를 실었다. 그 글을 再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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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俊河 추락사의 유일한 목격자, SBS 방송과 민주당이 의혹의 눈길을 보냈던 金龍煥씨, 18년 만의 최초 手記(月刊朝鮮 1993년 6월호)

죽음으로의 下山, 그뒤


金 龍 煥 고교 교사

두통에 시달리며…
나는 지금 18년 전 張俊河 선생님의 가족과 친지를 앞에서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던 모습을 얘기한 뒤 18년 만에 처음으로 의지에 의해 그때 일을 적고 있다.
18년이 지난 오늘, 지난 날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동안 겪었던 숱한 일들이 떠오른다. 존경했던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나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張俊河 선생님이 타살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유일한 목격자인 내가 했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분명히 18년 전 가족들에게 선생님의 실족 당시의 모습을 본대로 말씀드렸는데….
18년 간 겪어온 고통의 매듭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은 어디 갔는지 도무지 명하기만 할 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張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내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 어려웠던 세월들…

1967년 張俊河 선생님이 7代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하셨을 때 나는 동대문구 청량리 2동 산 1번지에 살고 있었다. 평소 張선생님을 존경하였기에 선생님을 돕고 싶은 생각에서 신민당 서울 제4지구당 사무실을 찾았다.
그때 나는 지구당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해온 金容德씨(호림산악회 회장)를 만났다. 金씨를 주축으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유세반을 편성해 선거 운동을 도왔다. 張俊河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옥중에서 당선된 선생님은 출감해 議政활동을 하셨다. 金容德씨는 지구당 상임위원회 의장직을 맡게 되었고 나는 상임위원으로 지구당 활동에 참여했다. 지구당 간사는 최인규씨가 맡고 총무는 사상계에 있었던 김동준씨가 맡았는데, 최인규씨가 간사직을 그만두게 되어 내가 68년에 간사직을 맡았다. 또 한 해 뒤인 69년에는 김동준씨가 도서출판 법문사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총무직도 겸해서 맡게 되었다.
생각하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연설회 장소의 사용 승락서를 받기 위해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부속 고교에 갔을 때 교장선생님이 내가 인천 동산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어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일, 1969년 5월 張선생님께서 이스라엘에 국회 국방위원 자격으로 방문하시고 귀국하실 때 지구당 당원들과 공항에 나갔던 일이 생각난다.
지구당 창당 대회를 위해 친구들과 동생, 동생 친구들을 동원해 선생님을 경호하게 했던 일, 1972년 10월 유신 단행 후 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 서명운동 전개과정에서 통일당 최고위원으로 계실 때 張선생님께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삼각동에 있던 중앙당사로 오실 때 주변의 통행을 통제하고 중앙당사 입구에서 선생님을 호위하고 회견장으로 모시던 일 등 당시 겪었던 일들이 모두 기억이 새롭다.

그 살벌한 시절, 선생님의 승용차 뒤에는 항상 어떤 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어려웠던 세월들….
선생님께서 당원 교육하시던 일들, 지구당 창당대회를 하면서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빴던 일들, 제기동 선생님 댁에 갔을 때 이력서를 가져오라고 하시던 일,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있었던 일,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이 모두가 지금도 내 마음을 뜨겁고 무겁게 한다.
1969년 대통령 3선 개헌반대 투쟁 때는 지구당 사무실의 옥상에 마이크를 가설해 張선생님의 비서 김상석씨와 함께 대통령 3서 개헌반대 방송을 했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날 신민당보 「민주전선」을 들고 지구당 사무실에서 일하던 최군과 함께 중화동, 상봉동을 다니면서 주택가에 돌리던 일도 떠오른다. 최군은 그 때 야간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추위에 몹시 고통스러워하던 모습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동행길

나는 1974년 1월14일 선생님께서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 의해 구속되신 뉴스를 호림산악회 山行을 마치고 돌아온 회원들과 함께 다방에서 들었었다. 그해 12월3일 구속된 지 10개월 20일 만에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출감하시어 종로구 견지동 조광현 내과에 입원하신 선생님을 지구당 당원들과 함게 병문안 갔을 때 선생님은 浮氣가 있었고 병원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나는 張선생님을 돕는 일에서 마음의 위안과 보람을 느꼈다. 선생님이 계시기에 내가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초 나는 張선생님을 떠나 낙향했다. 아버님게서 병환주이었고 큰아들된 입장에서 병간호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돌아왔다. 그해 3월 당진중학교 강사로 교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년 있으면서 내일을 기약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1975년 8월16일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 張선생님께 인사도 드릴겸 해서 서울에 올라갔다. 농사 일도 있고 가축도 기르고 해서 시간을 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나 기억된다.
상경 후 저녁 무렵, 金容德씨와 함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종로 4가에 있던 호림산악회를 찾아갔다. 金씨에게 張선생님댁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金씨는 『선생님께서 내일 산에 가시니 그 때 인사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하였다.

원래 내 생각은 그날 저녁에 인사 드리고 다음날 내려오는 것이었다. 서울에 볼 일이 있더라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아침에 일찍 서울에 왔다가 밤늦게라도 내려가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요즈음도 서울에 올라가면 당일 내려온다. 그러나 그날은 金容德씨의 권유대로 8월16일 저녁에 인사드리지 않고 산에 가면서 인사드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선생님께서 버스를 타신 곳은 상봉동 댁 근처인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곳에서 타시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타신 후 좌석에 가서 인사드린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약사봉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식사 준비를 하는 지점에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金容德씨인지, 김희로씨인지 누구인지는 잘 기억되지 않지만 『선생님께서 어디 가셨느냐』고 물으니까 『저 위로 가셨다』고 하여 그 위를 향해 선생님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어찌하여 혼자 찾아 나섰느냐고 하지만 선생님께서 안 계신데 모시고 있던 사람으로서 찾아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몇 분 올라가다 왼쪽으로 길이 있어서 그 쪽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5분 내지 10분 정도 그 길을 따라가 산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산 입구에 올라가니 그곳에서 선생님이 군인 두 사람(시골 출신 같은 이등병)과 커피를 드시고 계셨다.
나는 『선생님 여기 계시는군요』라고 말씀드렸고 그곳에 앉아 선생님께서 주시는 커피를 마시고 다시 산을 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배낭은 내가 메고 선생님은 앞서 가셨다. 선생님은 『여름 등산은 긴 팔, 긴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오르셨다(나는 그때 반팔 점퍼를 입었다).

아찔한 계곡

그런데 사람들은 산 입구에서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곳에 없던 텐트도 설치해 놓고 그곳에서 함게 커피를 마셨던 이등병 두 군인이 어떤 뜻이 있었던 사람들인 것처럼 서울방송에서는 암시했다. 산에 가다 보면 놀러나온 민간인도, 군인도 있을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보면 한없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을 조금 올라가니 야산 같은 등성이가 나왔다. 나무도 별로 많지 않았다. 북쪽(뒤쪽)의 경관을 보니 뒤쪽 산 밑에 군 부대가 보였고 부대 뒤에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선생님께 그곳을 가리키면서 저쪽으로 가면 어떠냐고 말씀드렸더니 『그곳은 軍 통제지역이라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그쪽 지역 사정을 알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등성이를 따라 올라갔다. 큰 소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잡목은 그리 많지 않아 쉽게 산에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있는 곳에 식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샌드위치 2인분을 해왔다』고 말씀하셨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파키스탄 政情(정정)이야기를 하였다. 식사를 끝내고 조금 있다가 일행이 기다린다고 하시면서 배낭을 들고 일어나셨다. 『배낭은 제가 메고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빈 배낭이다』고 하시면서 선생님이 메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은 일행이 기다릴 테니 식사 준비하던 곳으로 직선으로 하산하자고 하셨다. 나는 올라왔던 길로 등성이를 따라 내려가서 일행과 같이 오던 계곡을 따라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일행이 기다리니 빨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뜻이 그러한데 더 반대할 수도 없어서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후에 생각하니 「왜 선생님의 뜻을 더 막지 못했나」하고 후회가 된다.

선생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나 생각된다(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우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울려면 마음 속으로 울든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든지 하라고 몹시 꾸짖기도 한다).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평평한 능선 두 개를 넘은 것으로 기억된다. 능선을 돌아가니, 급경사를 이루는 계곡이 시작되는 제일 윗부분에 서게 됐다.
『선생님, 더 못가겠습니다. 되돌아 가시지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게서는 그곳에 좀 서 계시더니 건너편으로 뛰어 넘으시면서 나더러 건너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뛰어 넘으셔서 나도 그곳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을 뛰어 넘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계곡, 아찔함을 느꼈다.

추락, 인공호흡, 절명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위기에 처해 있을수록 냉철해야 한다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던지 몹시 긴장해 위기감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뛰어넘은 부분(급경사 계곡의 왼편)부터는 경사가 급했고 암석으로 된 地形이어서 몸의 자세를 낮추고 비스듬한 자세로 그곳을 내려오고 있었다.

암석 사이로 나무도 나 있고 해서 나는 그 잡목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를 내려오니 병풍같이 펼쳐진 단애가 있었다. 단애 밑에는 소나무가 나 있어서 나는 그 나무를 잡고 단애를 뛰어 내렸다. 그 단애의 높이는 1.5m 정도 된다고 생각된다. 단애의 밑은 평평한 지형이었다. 게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선생님께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허겁지겁 선생님이 떨어진 쪽을 향해 내려갔다. 선생님은 그곳에 누워 게셨다. 의식은 없었으나 호흡을 몰아쉬고 계셨다. 선생님을 반듯이 눕히고 손을 대고 인공호흡을 하면서 『선생님, 선생님 정신차리세요. 선생님 정신차리세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선생님의 호흡은 점점 약해져갔다. 호흡이 멎는 순간이 왔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계속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호흡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아! 이것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이제는 일행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일행이 있는 식사준비 지점을 향해 달렸다. 어떻게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돌에 미끄러지고 물에 빠지면서 달려갔다. 산악회 회장 金容德씨에게 『선생님께서 떨어지셨어요. 빨리 갑시다』라고 말했다. 金씨와 김희로, 김용봉씨(金容德씨의 동생)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시 인공호흡을 하였으나 회생하시지 못했다. 그곳에 계신 분들과 상의하여 길 옆으로 선생님을 모시기로 하였다. 옷을 벗어 들것을 만들어서 선생님을 길 옆으로 모시고 점퍼를 벗어서 선생님의 얼굴을 가려드렸다. 金容德, 김희로씨와 상의하여 군부대에 협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김희로씨가 군부대에 가서 군의관과 위생병을 데리고 왔으나 회생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파출소로 가고 그곳에서 포천 경찰서로 가 그곳 구치소에서 하루저녁을 자고 다음날 오후 의정부 검찰지청으로 가게 되었다. 張선생님 사모님께서 신원보증을 해주셔서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오게 되었다.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와 이문동 집에 들렀다가 선생님 댁으로 갔다.

그날 저녁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사고 상황을 말씀드렸다(함석헌 선생님, 계훈제 선생님, 張선생님의 숙부님 그리고 한두 분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통일당 주도의 영결식이 명동 성당에서 있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전세 버스를 타고 葬地로 가서 하관식에 참석했다. 제일 뒤에서 몸둘 바를 몰랐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고향 당진으로 돌아왔다.

1975년 봄의 귀향은 내일을 기약하며 희망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그날의 귀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과 체념과 슬프고 공허한 귀향이었다.
선생님! 홀로 길거리에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길거리의 돌처럼 이 사람한테 차이고 저 사람한테 차이는 가련하고 방황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SBS팀에게 한 말

지난 2월13일 오후 2시쯤 서울방송에서 전화가 왔다. 몸이 불편하여 자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분의 목소리였는데 선생님의 山行 사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중이라고 했다. 오후 9시30분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도 좋지 않고 하여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에 있는 점퍼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갔다. 문밖에는 ENG 카메라를 멘 기자 등 서울방송에서 온 사람 세 명이 張선생님 관계에 대한 취재차 왔다고 했다. 방으로 안내했다.
『張선생님이 너무 쉽게 잊혀져 가고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한다』고 했다. 선생님의 업적도 많은데 왜 하필 그 부분을 다루려 하느냐고 항의했다.

『18년 전에 결론이 내려진 것인데 무얼 더 말하라는 것인가. 그리고 당시 사모님께서도 신원보증하여 주셔서 종결된 것인데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는가. 나는 그 당시 선생님 댁에서 함선생님, 계선생님 등에게 사고 상황을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그 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선생님댁에서 당시 가족, 친지들에게 설명드렸던 사고 상황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니 그것을 참고해보라. 불행했던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더러 그걸 또 반복해서 말하란 말인가. 이건 혹독한 고문행위이다. 나는 싫다. 누가 무어라 말해도 나는 싫다』

자정이 가까와 오고 있었다. 가시는 손님에게 자고 가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 본의는 아니엇을 것이라고 하며 나를 위로해 본다.

지난 3월14일 방영된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 제1부를 나는 보지 않았다. 예고 선전 때에 보니, 선생님을 인형으로 만들어 마구 절벽에서 굴렸고 타살이라고 선전하는 것을 보고 그 이후 서울방송 프로는 보지 않았고 제1부 방영시간에 잠을 자버렸다. 다만 서울에 있는 아이들에게 녹화해두라고만 일렀다.

5월4일 저녁, 이 글을 쓰기 위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녹화해둔 것을 보았으나 이 글에 쓸 것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아프고 잠도 오지 않고 마음에 괴로움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집 주위를 몇십번 돌다가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다음날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머리는 무거웠고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을 또 하란 말인가

3월28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2부는 타살로 이끌어가기 위해 상봉동에서 「산에 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전하러 오신 선생님을 내가 「억지로 끌어올렸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모시던 선생님이었고 존경하는 분이었는데 그 분께 인사도 올리고 『타십시오』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가지 않겠다는 선생님을 억지로 끌어올렸을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가.

방송과 신문에서는 또 「金씨는 張俊河씨의 장례 직후 잠적했고 최초의 진술 외엔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고 적고 있었다. 선생님을 잃어버린 이 초라한 사람이 갈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나 슬플 때나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도 잠적이라고 하는가.

고향으로 가지 않고 親知들을 찾아 다니며 서로 어색한 대면을 해야 하는 환경에 머물러 있으란 말인지….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이해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과의 山行에서 있었던 불행했던 일들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할 말을 다했는데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없었던 일을 지어서 말하라는 것인가. 시작도 끝도 없고, 새로운 사실도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나 혼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고 부정적으로만 보는 불신 풍토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없는 말도, 없는 것도 마음대로 만들어 한 방향으로만 몰아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나는 힘을 잃은 사람이다. 나의 입장에서서 나를 이해하려고 하고 심정적으로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괴롭기만 하다. 「힘이 정의인지, 정의가 힘인지」 어떤 것이 옳은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런 진실을 밝힐 힘이 없다. 나는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에 서서 갈 곳을 잃은 거리의 고아가 되어 버렸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 정치권에서 나를 향해 공격해오고 있다. 유일한 등산 동반자이며 목격자의 증언도 부정한다면 그곳에서 어떤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부모님이 자식을 데리고 외출하거나 집안에서 한 방에 같이 있었는데 불의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자식이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할 것인가. 자식이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하면 부모가 그렇게 했다고 할 것인가.

운명이었다

8년여 동안 존경하고 따르며 모시던 분을 무엇 때문에 일부러 위험한 경지로 몰아가려고 했겠는가. 명예, 돈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적 목적 또는 원한 관계에서였겠는가. 나는 정치적으로는 선생님이 계셨기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고 선생님을 떠나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명예, 돈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은 결코 아니다. 선생님께서 他界하신 후 나는 정치적 욕망도 꿈도 다 버렸다. 선생님과 가까웠던 분들도 만나지 않았다.

단절된 18년!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도의적 책임감에 억눌려 한스러운 18년을 보냈다. 선생님을 존경했기 때문에, 선생님을 모셨기 대문에, 선생님과 산행을 함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공격을 받으면서 짓눌려 살아왔다.

18년!
선생님과 함께 산행을 하게 됐던 것은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운명 찬양론자는 아니다. 나는 교단에서 「자기의 운명은 누구에 의해 개척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개척된다」고 강조하는 때가 자주 있다.
그런 내가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것을 개척하지 못했다 하는 自責을 해본다.

75년 8월16일 저녁 선생님댁에 가려고 했을 때 선생님께서 산행을 하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냥 인사만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산행 때 식사 준비 지점에서 하필 내가 선생님을 찾아나섰던 일, 선생님을 찾아나섰을 때 길도 여러 갈래가 있었을 텐데 하필 선생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 등산로 입구에서 군인 두 명과 커피를 드시고 있던 선생님을 만난 일, 일행이 기다린다고 하시면서 바로 질러 가자고 했을 때 말리지 못하고 따라갔던 일, 벼랑이 나타났을 때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주저 앉아 버렸다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느껴지던 곳에서 선생님이 떨어지던 그 운명의 순간들….

인간의 힘으로 그 순간을 거역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위대한 순간이 되었겠나.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위대한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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