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출마하여 겨룬 18 대 대선은 포플리즘의 극치였다. 그들은 당선을 위해서 국가 안보에 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병역 의무를 필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표심을 얻기 위하여 현역 의무 복무기간을 18 개월로 단축하겠다는 극약 처방을 들고 나왔다.
현 이명박 정부(국방부)와 뜻있는 국민, 보수 우익 시민사회 단체 및 보수 언론들은 병역 기간 단축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대통령으로 당선 된 박근혜 당선자는 국민과의 약속과는 지켜야 한다면서 공약한 현역 복무기간을 18 개월로 단축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 장정들의 의무 병역 기간은 육/해/공군 공히 36개월을 복무토록 한 6.25 전쟁 직후의 혼란기 이후에 조금씩 줄어들다가 결정적 계기를 만나서 다시 늘어나게 되는데 오늘은 그 결정적 계기가 무엇이었으며, 얼마나 복무기간이 늘어났는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배경에 대하여 소개드리고자 한다.
그 결정적 계기란 1968년 1ㆍ21 무장공비 침투 사태가 도화선이 되었다.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기 위하여 세검정을 넘어 서울로 진입하기 전까지 우리 해/공군은 36개월 그대로인 상태인데 반하여 육군은 30개월로 단축되어 있었다.
사회가 안정이 안 된 시기였기 때문에 육군의 징집자원들 중에. 배경이 있는 자들은 뒷구멍으로 전부 병역을 면제받고, 징집된 장병들 중에서는 탈영병은 속출하고 징집 자원은 넘쳐나니 육군은 36개월에서 33개월로 단축했다가 다시 30개월까지 줄어든 반면, 그래도 해/공군은 대우가 좋다고(좋다는 기준이 육군에 비하여, 그리고 실업자가 넘쳐나던 과도기 사회상을 반영하여) 36개월이라는 긴 복무기간에도 지원자가 쇄도하니 육군이 두 번에 걸쳐 6 개월이나 단축되었건만 해/공군은 전혀 단축 혜택이 없었다.
당시 병영 생활은 어떠했는지 잠시 여담 한가지를 소개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갈까 한다.
필자는 공군에서 복무를 했기 때문 당시 군대의 군기가 얼마나 엄했는지 이런 것은 너무나 잘 알지만 하여간 이 얘기는 필자의 목격담은 아니고 병영 내에서 회자되던 일화이다.
현재 김포공항 위치에는 6.25 전쟁을 치른 공군 기지로 공군의 14 전대라는 비행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주말이 되어서 전부 외출을 나갔는데 경북 안동이 고향인 고참 내무반장은 외출을 나가도 마땅하게 갈 곳도 없고 해서 내무반에 잔류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마침 그 내무반으로 배속되어온 일등병 한 명이 내무실 침상 말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내무반장의 당번병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번병은 통상 취침 시간이 되면 내무반장의 침구를 펴드리고 원하면 마사지 서비스를 제공하며 구두도 닦아드리고 아침에 기상하면 내무반장의 치솔에 치약을 묻히고 수건을 양손에 펴들고 그 위에 치솔을 얹어서 내무반장의 좌로 일보 뒤에서 세면장으로 따라가서 세수가 끝나면 수건을 드리고 취사당번으로 라면도 끌이고 내무반장의 군복 세탁 및 아이롱도 하는 잡무를 담당했다.
내무반장이 무료했는지 당번병에게, ‘ 어디 가서 무협지를 구해오라.’ 고 지시했다.
도서실 운영병이 외출을 나간 관계로 기지(병영)내에 이 곳 저곳을 찾아봐도 무협지를 빌릴만한 곳이 없었다.
아침 나절에 무협지를 빌리러 나간 졸병이 저녁이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으니 내무반장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너무 혹사시켜서 탈영을 해버린 것이 아닌지 생각하니 문책이 자신에게 떨어질 것 같았다.
내무반장은 병영내 잔류자들을 시켜서 당번병을 찾아보도록 수배했지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가 않았다.
마지막 비상수단으로 내무반장은 고참병을 시켜서 당직사령실에 보고를 하여 찾아보기로 했다.
전 기지 요소요소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당번병을 찾는 안내 방송이 나갔다.
한편 기지 보급소 창고에서 박혀서 뭔가를 열심히 쓰던 이 졸병은 자기를 찾는 방송 소리를 듣고서야 시간이 이렇게 흐른 것을 알아차리고 불이 나게 글을 쓰던 종이 뭉치를 챙겨서 내무실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불벼락이 떨어질 것을 예감한 졸병은, 내무반장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경례를 하면서,
“ 필승, OOO 일병, 내무반장님께 용무, 부르심 받고 왔습니다. 무협지를 구하지 못해서 할 수 없이 반장님이 읽으시라고 저가 소설을 써 가지고 왔습니다. 아직 완결은 안 되었는데 읽으시는 동안 마저 써서 마무리 짓고 다시 가져 오겠습니다. “
마분지에 당시에는 아직 볼펜이 없을 때이니 철필을 잉크에 찍어서 써 내려간 그 유명한 소설, “ 별들의 고향 “ 은 이렇게 탄생되었다고 했다.
다소 과장이 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상관이 죽으라고 하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육군도 마찬가지여서 휴전선 일대에서는 밤마다 인민군이 넘어와서 대검으로 경계를 서는 아군을 죽이고 전리품으로 귀를 베어가고, 국군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대장이나 분대장의 명령 하나로 군사 분계선을 넘어서 인민군의 귀를 가져오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 날 전교조의 붉은 이념에 경도되고 지난 10년 친북 용공 정권하에서 북한의 좋은 점과 남북우호관계는 집중적으로, 반면에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도당이 한국인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교육받지 못하거나 우리 측의 잘못이나 자작극이라고 잘못 교육받은 젊은 세대들 상당수는 늙은 꼰대들이 과장이 심하다고 설마 하고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한반도의 긴장 상황과 일촉즉발의 휴전선 상황을 알게 된다면 충분히 수긍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현대사의 한 부분이다.
6.25 종전 이후 다시 남북 간 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던 경우가 2 차례 더 있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남북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첫번째요, 두번째는 1976년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이었다.
1967년부터 1971년도 까지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이 기간은 제2의 6.25로 불릴 만한 남북간의 피 비린내 나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남북간의 충돌로 최소한 1,500 명 이상의 군인과 경찰, 혹은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 혹은 납북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그 기간에 남북한 간에, 한반도 및 주변 해역, 상공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피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해군 경비함인 56함(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월 19일, 동해 쪽 북방한계선 근처에서 명태 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들을 북괴 경비정 두척이 출몰하여 납북을 시도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 해군 56함(당포함)이 현장으로 긴급 출동한다. 이 때 금강산 쪽 북괴 포병 동굴 진지에 은익했던 해안포대가 일제 사격을 가하여 제대로 반격조차 해보지 못하고 포탄을 맞고 침몰하였다.
해군 승조원 79명 가운데 40명은 살아남았고, 39명이 날벼락 같은 공격에 순국하였다.
이수근(李穗根) 위장 귀순
3월 22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취재하던 북한의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이 귀순하였다.
8.18 도끼만행 사건 이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JSA 내에서는 남북한 기자들이 중앙분계선을 상호 넘어서까지 서로 섞여서 취재를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이수근은 현장에 나와 있던 미군 연락장교에게 슬며시 다가가서 귓속말로 귀순의사를 밝혔다.
이수근은 미군 측에서 준비한 차량에 순식간에 올라타서 인민군 경비병의 저지 총격을 뚫고 전속력으로 판문점을 빠져 나와서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1969년 1월 27일 서울를 탈출, 캄보디아로 도피하던 중에 중간 기착한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되어 위장간첩임이 드러났고 같은 해 7월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후에 그는 이중 간첩이 아니라는 등 여러 말이 있었으나 그가 결백한지는 하늘과 본인과 북한 당국만이 진실을 알 것이다.
동 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던 임석진(당시 34세, 철학박사)이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수사에 착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 베를린 소재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천상병 시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독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윤이상은 서독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항의로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갔다.
종북 좌익 정권 시절 설립된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는 2006년 1월 26일 이들의 범죄행각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고 정부가 사과를 하도록 권고했다.
물론 사전에 누설될 경우 북한으로 도주 우려 때문에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처리해야 됐던 당시 수사 속성상 억울한 피해자가 설혹 섞여있었을지 모르지만 압송되어 대한민국 법정에서 법의 심판을 받은 상당수 인사들은 용공행각을 했음이 분명한데 노무현 정권의 종북 인사들이 참여한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이들 전부가 억울한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1. 이 사건은 중정이 주도적으로 밝혀낸 사건이 아니라 실제 친북 활동을 한 현지 유학생 임석진의 자발적인 자수에 의하여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점
2. .당시 서독이나 서 베를린에서는 동 베르린 출입이 자유로웠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동독 북한 대사관을 방문하거나 대사관에서 상주하는 북한 공작원(외교관으로 위장)을 만났고 일부(11명)는 평양에 왕래한 정황이 밝혀졌다는 점
3. 윤이상을 비롯한 일부 인사는 아직까지도 친북 활동을 현지에서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유명한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북 미수 사건이나 통영의 딸 신숙자 관련 사건에도 개입한 것이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남파 간첩 경원선 철도 폭파 사건
67.9.5 북괴 남파 간첩이 경원선철도(포천) 부근에 매설한 폭약 폭발로 철로가 절단되어 당시 운행중이던 화물열차 5량중 3량이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간첩은 체포하지 못했다.
1968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무장 공비 31명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
1.21 북괴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 124 군 부대 남파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지령을 받고 청와대로 접근 중 주민의 신고로 세검정에서 검문하는 당시 종로경찰서장을 사살하면서 총격전이 비화된다.
1월31까지 진행된 대간첩 작전을 통하여 28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하고 1명은 생포, 나머지 2명은 북상 도주했으며 우리 측은 경관 2명, 민간인 5명이 피살되고 수 명의 국군 피해는 대북 보안관계로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에 향토예비군이 신설되고 병역복무 기간이 육군은 6개월, 해공군은 각각 3개월씩 연장되어 육군은 다시 36개월로, 해공군은 39 개월이란 긴 세월을 병영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때 소위 계급장을 달고 김신조와 함께 넘어왔다가 천신만고 끝에 휴전선을 넘어서 도주했던 길재경은 군에서 승승장구하여 대장으로 진급하여 김대중 정권 시에 김정일이 선물하는 백두산 송이버섯을 실은 북괴 공군 수송기를 타고 서울에 나타났지만 김대중 정부는 그의 정체를 진작에 파악했음에도 그를 체포하기는 커녕 청와대에서 오찬을 베푸는 등 환대를 했다. 북한은 1.21 사태 전범을 종북 정권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시험 삼아서 그를 내려 보내는 간계를 썼는데 김대중 정부는 대한민국과 그 때 희생된 군경 및 민간인 유족들을 여지 없이 배신하였다.
미 해군 정보함「푸에블로(USS. PUEBLO)」호를 무력으로 납북
김신조 일당이 발각되어 우리 군에 쫓기며 교전을 벌이고 있던 1월 23일에 북한은 미군에 대해서도 또 다른 도발을 감행하였다.
이름하여 미 해군 정보함「푸에블로(USS. PUEBLO)」호를 무력으로 납북한 것이었다.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의 충격이 한반도를 강타한 1월23일 낮 12시쯤. 동해상의 원산 앞바다에 떠 있던 미군의 최신예 첩보 수집함 푸에블로호를 향하여 북한 구잠함(驅潛艦) 한 척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러나 당시 동 첩보함의 부커 함장은 `보잘것없는 북한 해군이 미 해군에 감히 도전하겠나' 선입견으로 그냥 자신들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 접근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수 분 후에 또 다른 북한 초계정(哨戒艇) 한 척이 가세하더니 국제신호로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을 해왔을 때에야 자신들의 오산을 알아차렸다.
곧 이어 미그기 두 대가 나타나 위협비행을 하고 적의 함정 숫자도 구잠함 두 척, 초계정 네 척으로 늘어났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부커 함장은 곧 무전사에게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기지로 구조 지원 요청(SOS)를 타전토록 하고 북한 함정들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순간 북한군 구잠함의 포문이 불을 뿜었고 푸에블로호의 레이더와 통신·항해 마스트가 떨어져 나갔다. 당황한 부커 함장은 순간 교전을 생각했지만 첩보함인 푸에블로호에는 50㎜ 경기관포 2문·경기관총 10정, 그리고 약간의 수류탄밖에 없었다. 함정에는 극비문서들과 전자수신 장치가 설비돼 있었다.
북한 전투함의 기관포 발사로 프에블로호 승조원 1명이 사살되고 13 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커 함장은 배를 침몰시킬까 생각하다가 승조원 전원이 몰사할 위험 때문에 정선토록 명령했다.
푸에블로호를 포위한 북괴 함정은 자신들을 따르도록 신호를 보냈다. 급한 대로 최신 전자장치를 파괴하고 기밀문서를 소각하라고 지시했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부커 함장은 부축을 받으며 무전실로 들어가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 사령부를 불러 교신했다.
“원산으로 끌려가고 있다. 세 명 부상, 한 명은 다리가 날아갔다. 비밀문서와 되도록 많은 전자장치를 파괴하고 있다. 저항할 생각은 없다.”(부커 함장)
“공군기가 구조하러 간다. 주한 미군과 협의해 F-105기를 보낼 것이다. 적기는 몇대인가?” (주일 미 해군기지)
푸에블로호는 끌려가면서 계속 급보(急報)를 타전했다. 그러나 아군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해진 부커 함장은 백악관과 이어지는 초긴급 메시지까지 타전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날 오후 2시32분쯤 푸에블로호는 `무전을 끊는다'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5대양을 지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최신예 해군 정보함이 북한 해군에 피랍(被拉)되는 수모를 겪는 순간이었다.
미국 함정이 적에 나포(拿捕)되기는 남북전쟁 이후 106년 만에 처음이었다.
미국 정부는 승무원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와 제7함대의 구축함 2척을 출동시켰다.
1968년 12월 23일 미군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가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북조선 영해 침입 및 첩보 행위를 인정하고 재발방지와 사과하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사건 발생 후 열한 달이 지난 후 북괴는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 명과 유해 한 구를 송환했으나 선체는 반환하지 않고 저들이 미군과의 전쟁 승리로 노획한 전리품이라면서 전쟁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적에게 포로가 된 후에도 ‘ 나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겠다. 나는 군사 기밀을 준수하고 전우를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The Code of Conducts(군진수칙)을 준수한 부커 함장은 미국에 귀향하여 신병 치료를 받고 요양소에서 2004년 1월 28일 향년 76세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울진·삼척지역 무장공비 침투
청와대를 습격했던 북괴 민족보위성 소속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을 15명씩을 1개조로 편성하여 8개조 120명에 달하는 무장공비들이 10월30일~11월 2일 사이에 이번에는 동해안 경상북도 울진군 고포면 해안을 통하여 몰래 상륙한 후에 울진/삼척 지역으로 숨어들어 남반부 혁명을 획책할 목적으로 공포분위기 속에서 주민들을 선전·선동하는가 하면, 양민학살 등 만행을 저질렀다.
북한은 1·21 박정희 암살 공작 실패 원인이, 침투 과정에서 만난 남조선 민간인을 살려둠으로써 그들의 신고 때문에 청와대 침투 직전에 발각되었던 점을 교훈으로 삼아 자신들이 주도하는 남한에서의 민중봉기를 유도하려는 거점 마련에 장애가 되는 양민들은 닥치는 대로 가차없이 살해 제거를 하였다.
무장공비들은 군복·신사복·노동복 등의 여러 형태의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채 주민들을 집합시켜서 북한책자를 배포,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사상교육을 시키면서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고 사진을 찍고서는 ‘인민유격대’ 가입을 강요하여 지원서에 서명을 거부자하는 자는 가차없이 현장에서 살해했다.
울진뿐만 아니라 삼척 등 여러 곳에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공산당의 야만성을 모르지만 당시 반공교육에 충실했던 평창군 산간마을에 사는 당시 10살이던 이승복 어린이에게 공산당에 대한 견해를 묻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얘기하자 대검으로 입을 찢어 죽이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했다. .
한편, 공비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신고를 받은 당국은 11월 3일 오후 2시 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이게 된다.
11월 3일부터 11개 육군 부대, 전투 경찰, 예비군 등 총 병력 47,000 명을 투입하여 같은 해 12월 28일까지 1개월 25일간 벌인 작전을 통하여 공비 107명을 사살하고 4명은 생포, 3 명은 투항했으나 나머지 6명은 포위망을 뚫고 끝내 휴전선을 넘어서 북상하였다.
이 작전에서 우리 군도 전사가 34명, 부상 50명, 민간인 31명이 피살되는 피해를 입었다.
미 정찰기「EC - 121」기 격추
6.25 남침을 미군 때문에 성공시키지 못한 북한은 미국을 미제라고, 미군은 양키라고 조롱하며 미제의 각을 뜨자고 지독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
푸에블로 호를 납치하고도 오히려 미국의 사과를 받아낸 김일성은 기고만장해져서 다시 한번 미군을 상대로 큰 일을 벌이는 데 69년 4월 14일에 일으킨 EC-121 기 격추 사건이다.
미 해군 함정의 납치에 이어서 이번에는 미군 정찰기를 격추시킨 것이다.
일본의 아쓰기 해군 비행장을 출발한 미 해군 소속 EC-121 워닝스타(Warning Star) 조기경보기가 상기 일 14시경 (한국시각) 동해상에서 북한 미그 21 전투기의 공격으로 해상에 격추된 사건이 발생한다. 탑승한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국은 정찰기가 동남쪽의 북한 영공 밖에 있었다고 주장한 반면 북한은 자기들 영공을 침범했기 때문에 격추했다고 엇갈린 주장을 폈다.
닉슨 행정부는 푸에블로 호가 납북된 데 이어 미군 정찰기까지 격추되자 이 참에 북한에 대하여 핵 무기로 공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었음이 최근 비밀 해제된 문서에서 밝혀졌다.
미국은 북한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0.2-10 킬로톤의 파괴력을 지닌 전술 핵무기로 북한내 12개 이상의 표적을 공격하거나 좀더 위력이 강한 70 킬로톤의 핵무기로 16개 비행장을 타격해서 북한 공군을 궤멸시키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북한의 반격에 따른 긴장고조 또는 전면전 발발 가능성, 군사행동이 베트남전에 미칠 영향, 중국과 러시아의 개입 가능성 등 여러가지 요인을 감안해 군사보복을 결국에는 포기했다.
흑산도 침투 간첩선 섬멸
1969년 6월 11일 흑산도 앞바다에서 79톤급의 간첩선이 발견되는데 이 선박은 현지에 나와있던 고정간첩 김용규를 북한으로 대동 월북하기 위하여 파견한 것이었다.
이 정보를 사전에 알아챈 우리 정보 당국은 공군의 전투기(F-5A)를 동원하여 간첩선을 미사일로 공격하여 격파한 후에 배위를 수색한 결과 북한 공작조와 인솔책 등 사망자 7명이 나왔다. 그 후에 잔당이 있을 것으로 보고 해군과 합동하여 동굴에 숨어있던 간첩 6명을 추가로 사살하였다.
이 사건에서 해안 초소와 간첩선간에 교전 과정에서 간첩선에서 발사한 미상의 포탄이 민가에 정통으로 맞아서 일가족 5명이 숨졌다.
대한항공 YS-11기 납북
69.12.11 남파 간첩 조창희가 강릉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KAL기에 승객으로 가장 탑승한 후에 조종사를 권총으로 위협하여 동 쌍발기를 납북했다.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오후 12시 25분경 강릉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의 YS-11 국내선 쌍발 여객기가, 이륙한 지 약 14분여 만에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상공에서 납북되어 원산시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양방송은 사건 발생 후 약 30시간 뒤인 12월 13일 새벽, KAL YS-11기가 조종사 2명의 자진입북에 의해 북한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지루한 협상 끝에 이듬 해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서 승무원 4명을 포함하여 12명을 제외한 39명을 송환받고 기체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아군의 방공망 레이다에 한동안 북한 영공에 자유진영 항공기가 비행하는 것이 포착되었는데 이는 우리들에게서 뺏어간 동 여객기를 저들이 운송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몇 년 후에 더 이상 이 항공기가 북한 상공을 비행하는 것이 포착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부품 조달이 어려워서 운행을 정지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승무원들에게 무기휴대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2001년 2월에는 미송환 승무원 중 한 명이었던 성경희가 제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70년대도 예사롭지 않게 시작이 되었다.
치욕의 해군함정 「I - 2 정」납북
68년도에는 미해군 함정이 납북되더니 70년 6월 5일에는 연평도 인근 공해상에서 우리 해군 함정 I-2 정이 북한 고속경비정에 의해 납북되었다.
흔히 도서 지역 및 해상 홍보활동을 하는 방송선으로 알려진 I-2 정은 120톤 규모의 경비정이다.
일제 시대 일본이 건조하여 소해정으로 사용하던 선박으로 1956년도에 폐선 처리되어 해군선박 명부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던 노후 함정으로 40 mm 와 20 mm 기관포 각 1 문씩을 장착하고 순항 속도는 시속 12 knot 로 피납 당시 20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었다.
납북 당일 상기 함정은 연평도 근해에서 어로보호작업 중이었는데 오전 11시 40분 경에 북괴의 고속 포함이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함정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북괴의 고속포함은 속도(시속 25knot) 무장도 75mm 포 및 기관포를 각각 1문씩 장착하고 있어서 배의 규모나 속도, 무장에서 아 방송선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처절한 15분간의 저항 교전 끝에 상당수의 승조원들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을 상태에서 방송선은 북괴 포함의 위협하에 12시 30분경에는 북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우리 해군 모선의 지원 사격권 범위 밖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해군 자력으로는 구조가 무망해지자 13: 05 분 공군에 전투기 출격을 요청하게 되고 12시 25분에 아군 전투기가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넓은 바다에서 일엽편주와 같은 소형 함정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단념하고 귀환하려는 차에 이미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끌려가는 아 함정과 북괴 함정을 발견하고 조종사는 공격 명령을 허가해 주도록 상부에 요청했다.
당시 공군에 대한 작전 명령권은 우리 군이 아니라 미 5공군 사령관에게 있었는데 조종사에게 교전 명령은 누구도 하달하지 않았다.
상부(공군본부)에서는 적함을 격침시켜도 좋다는 공격 명령 대신에 납북을 저지하라는 지시외에 달리 교전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현장에 출격했던 전투기들은 북괴 함정의 진로상에 위협사격을 가했지만 북괴 포함은 어디 격침시켜보라는 듯이 아무런 주저없이 계속 방송선을 몰아서 해주 쪽으로 들어갔다.
이 사고로 해군 참모총장이 문책 불명예 전역을 해야 했다.
북괴는 이 도발로 우리의 고물 소형 함정을 한척 얻었을 뿐만 아니라 승조원 20명의 송환은 고사하고 오늘날까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북괴는 이 도발로 우리 해군의 4성 제독 한 사람을 제거하는 승전고를 울렸다.
80년대 까지 일부 승조원들이 북괴 방송에도 가끔 출연한 점에 비추어 일부 장병은 북한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70년 동작동 국립묘지(국립 현충원)에서 열리는 「6.25」추모식에 참가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 2명이 동년 6월 22일 심야에 국립묘지 현충문에 폭탄을 장치하던 중 마침 현충원 경내로 진입하는 차량 전조등에 자신들이 노출되자 당황하여 조작실수로 폭발이 일어나고 건물 일부가 파손되며 간첩1명은 현장에서 폭사하고 나머지 1명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성국 소좌 미그 15 귀순
1970년 12월 3일 오후 2시 27분.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송죽리 해변가 모래 사장에 미그기 한대가 바퀴도 펴지 않은 채로 동체착륙을 하였다. 자주색 가죽점퍼에 하늘색바지 차림의 조종사는 한 민가에 찾아들어가서, ' 여기가 어디냐?' 고 물었다. 대한민국 땅이라는 주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몰고온 비행기는 미그15기였다. 조사 결과 그는 북한군 공군 소좌로 평남 남시 항공기수리창을 이륙, 원산으로 귀환하지 않고 남쪽 행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항공 F-27 여객기 납북 미수
1971년 1월23일 낮1시, 대한항공 속초 발 김포행 F27기(터보 프롭 쌍발기)가 승객과 승무원 65명을 태우고 속초 대포리 비행장을 이륙했다. 비행기는 강릉 상공으로 고도를 잡아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대관령을 넘었다. 이륙 20분 후 비행기가 날고 있는 곳은 홍천 상공. 갑자기 한 청년이 비행기 복도로 뛰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폭발물이 들려 있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조종사석과 통하는 방탄문이 박살이 났다. 범인은 또 하나의 폭발물을 들고 기수를 북으로 돌리라고 소리쳤다. ‘하이재킹’이었다.
기장은 바다 쪽으로 비행기를 돌렸다가 다시 기수를 육지 쪽으로 바꿨다. 거진 상공. “북한 땅이니 착륙해야겠다”기장의 기지가 발휘됐다. 범인(북한 간첩)이 창문으로 지형을 살피는 순간, 안전 요원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범인은 즉사했으나 그가 떨어뜨린 폭발물을 조종사가 덮침으로써 비행기에 대형 구멍이 나고 조종사 1명 사망, 승객 중 16명이 부상하는 피해가 발생했으나 비행기의 공중 폭발만은 막을 수 있었다. 기장은 기체를 강하시켜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앞 화진포 해변가에 동체 비상착륙을 감행했다. 휴전선 남방 20km까지 접근했으니 3분만 더 북상했어도 비행기는 납북되는 순간이었다.
위에서 소개드린 바와 같이 파란만장한 시절을 군에서 복무한 지금의 60대 이상은 적게는 36개월에서 많게는 39 개월까지 복무를 했다.
복무 기간이 길다고 불평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나라에 충성하는 것으로 알았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내려오고 울진 삼척 무장공비가 발생할 당시에는 전역을 불과 며칠을 남겨놓지 않은 장병들이 전역이 일거에 보류되고 무장 공비 소탕작전에 투입이 되었다.
진작에 집에 갔다면 무사했을 육신이 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됐다가 상이 군경으로 귀향해야 했던 장정도 없지 않았다.
팔다리 하나쯤 나라에 떼어줘도 이 나라 안보만 굳건하면 다 괜찮다고 씨익 웃으면서 죽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젊은이들은 또 하나의 전쟁 낯선 월남땅에서 청룡, 맹호, 백마 부대 용사로 청춘을 불사르고 죽음도 불사했다.
목숨과 바꿔서 벌어들이는 외화가 조국 근대화에 초석이 되고 아들 딸, 형제들에게 밥을 굶기지않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게 길었던 복무기간이 2012년 현재 육군 21개월ㆍ해군 23개월ㆍ공군이나 공익 근무 요원은 24개월까지 단축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길다고 18 개월도 또 줄이겠다고 안달이다. 군대에 갈 장정들은 정작 가만 있는데 정치인들이 선심을 쓰는 척하여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출산율 저하로 병역 자원이 점점 부족해지는 시점에 와 있다고 한다.
현재도 만만치 않은데 18 개월로 단축한다면 병원(兵員)의 부족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신체조건이 더 열악한 자원들도 군대에 가야 하고 오랜 기간 교육 훈련 없이는 전투에 투입할 수 없는 정밀 무기나 장비를 조작해야 하는 기술병들의 기술 수준이 빈약한 상태에서 복무에 임하게 되니 전력 약화가 불가피 해지게 된다.
신장이 145 CM 이하이거나 2M 이상자나 체중이 42 KG 이하자나 120 KG을 초과자가 현역 복무를 해야 한다면 이런 약졸들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고도 근시자에게 징집영장이 나오면 그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나 있을까?
그래도 안 되면 여성들도 의무 복무를 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대통령 당선자부터 복무 단축을 공약으로 걸었으니 이런 무모한 전횡을 막을 길이 없다.
이에 대한 대안은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선심성으로 고무줄 자르듯 복무기간을 함부로 줄이지 못하도록 헌법 조문에다가 의무 복무기간을 24 개월 이하로 못 줄이도록 못 박는 방법 밖에 달리 해결책이 없다.
박근혜 당선자보고 필자가 나라 말아먹으려고 한다고 그간 욕도 많이 했다. 내 입만 더러워지지 더 이상 욕할 힘도 없다. 나라가 망하면 나만 죽고 대통령은 무사할까?
국민 무서운 줄 모로고 인기 영합주의에 사로잡혀서 대권을 함부로 휘두르다가는 언젠가 대한민국 역사와 국민 앞에 책임지고 심판 받을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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