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6월15일 휴전선에서 침투한 북한군이 한국군의 대위와 상사를 납치해갔다. 閔耭植 1군 사령관이 직접 확성기를 잡고 몇 차례 북한군 전선사령관 吳振宇에게 납치해간 두 사람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북한군은 둘이 의거월북하였다고 억지를 쓰면서 욕설을 해댔다. 閔 사령관은 韓泰源 2사단장에게 "특공대를 편성, 특수훈련을 시켜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휴전선엔 철조망이 없었고 양쪽 GP가 있었다. 휴전선 안에선 무장을 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양쪽 근무자들은 다 무장하였다. 그럼에도 양쪽 근무자들이 만나면 담배를 나눠 피곤 하였다.
閔 사령관은 韓 사단장에게 북한군 두 명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했다. 먼저 북한쪽 GP 표시 말뚝을 몰래 북쪽으로 300m쯤 옮겨 박았다. 며칠 뒤 북한군 두 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GP쪽으로 내려오는 걸 기다렸다가 납치하여 데리고 왔다. 둘 다 대위였다. 며칠 뒤 유엔군 사령관 멜로이 대장과 유엔군의 휴전회담 대표 윈 해병소장이 찾아와 "북한측에서 한국군이 장교 두 명을 납치해갔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閔 사령관은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뗐다. 속으론 "김일성이가 이제 정신을 차렸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閔 장군은 한국군 두 명이 납북된 사실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사건을 비공식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는 두 북한군인을 미군 방첩대로 넘겼다. 두 군인중 한 명은 전향하고 다른 한 명은 버티었다. 1964년 미군 헬리콥터 한 대가 북한지역에 불시착하였다. 美軍은 전향하지 않은 북한 장교를 돌려주고 美軍 조종사를 송환받았다.
이 사건 이후 북한군의 한국군 납치행위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
派越(파월)맹호사단장과 합참의장을 역임한 柳炳賢(유병현) 예비역 대장의 회고록(조갑제닷컴 출판)에 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1981년 2월의 全斗煥-레이건 한미정상회담은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확정판결을 기다리던 金大中 씨(뒤에 대통령 역임)에 대한 減刑(감형)을 조건으로 이뤄졌음이 밝혀졌다. 柳 장군은, 全 당시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訪美, 레이건 당선자의 측근 리처드 앨런(뒤에 대통령 안보 보좌관)과 만나 全-레이건 회담에 합의하는 과정(암호명 ‘新春(신춘)계획’)의 대화록을 회고록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12·12 사건과 5·17 계엄확대 조치를 통하여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1980년 9월17일 김대중 씨가 육군본부계엄군법회의에서 死刑(사형)을 선고받자 미국의 政界(정계)와 언론은 전두환 정권 비판에 나섰다. 11월3일 2심인 고등군법회의도 김 씨의 항소를 기각,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두게 되자 사형집행을 막기
위한 압박과 救命(구명)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11월 초 공화당 후보 레이건이 카터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직후, 미국 합참의장의 초청에 따라 訪美(방미)하게 된 유병현 합참의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신고를 하러 갔더니 그는 무거운 語調(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주미대사와 안기부에도 지시하였으나 별다른 보고가 없어 의장께 부탁하고자 합니다. 나는 가급적 조속한 시일 내에 새로 당선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기는 취임식 때가 좋겠지요. 만일 성사되면 김대중의 減刑(감형)도 고려해보겠습니다. 의장께서는 미국 각계에 知人(지인)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출장 때 나의 뜻이 成事(성사)되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유병현 회고록에 의하여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김대중 감형을 韓美(한미)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제시하였음이 밝혀졌다. 11월14일 서울을 출발한 유병현 합참의장은 워싱턴에 도착, 미국 국방장관과 국무부 부장관으로부터 김대중 減刑(감형)과 救命(구명) 요구를 받았다. 17일 브라운 국방장관은 15분간의 예정으로 인사 차 방문한 유 의장을 40분간 붙들어놓고, “전두환 정부의 앞날은 인권의 존중 여하에 따라 평가될 것이며, 한미 관계의 걸림돌은 김대중 문제다”고 했다. 그는 “재판과정에 불합리한 점이 있기 때문에 김대중은 사면되어야 한다”고 했다. 유병현 의장은 “국내문제이며 군인인 내가 관여할 성격이 아니지만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브라운 장관은 보류상태인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를 열자는 유 의장의 제안에 대하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카터 정권이 한국의 인권침해를 묵인하는 인상을 줄 수 있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다음 날 오전 브라운 장관은 이례적으로 유 의장을 다시 招致(초치), 김대중 건에 대한 본국 정부의 응답 有無(유무)를 물었다. 회답이 없다고 했더니 실망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그날 오후엔 워렌 M. 크리스토퍼 국무부 부장관이 출장 중인 사이러스 R. 밴스 국무장관을 대신하여 유병현 의장을 집무실에서 만나, 강경한 어조로 전두환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 김대중 씨가 사형 집행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미국의 기대에 어긋 날 때는 한미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정권이 공화당으로 바뀌어도 인권문제에 관한 한 여론에 충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강한 요망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유 장군’이라고 판단해 면담한 것이다.”
유병현 장군은 회고록에서 김대중 감형과 연결, 전두환-레이건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은 상원의 공화당 총무 “하워드 베이커 의원이었다고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공화당의 선출직으론 대통령과 부통령에 이어 그가 세 번째였다. 11월20일 베이커 총무를 면담한 자리에서 柳(유) 의장은, “미국이 인권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타국의 內政(내정)에 간섭하는 인상을 준다. 나에게 생각나는 해결방책이 있으니 단독으로 협의하자”고 했다. 베이커 총무는 보좌관들을 물리치고 別室(별실)로 옮겼다. 이 자리에서 유 의장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잘 정비되고, 잘 훈련되었을 뿐 아니라 엄격한 규율이 잡혀 있는 한국군 60만 명의 존재를 輕視(경시)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구상은 큰 잘못이다. 전두환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대해 정상회담을 열어 양국 관계의 개선과 안보협력을 협의하면 한미 간의 현안이 획기적으로 해결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베이커 총무는 즉각적으로 찬동하면서 ‘내가 직접 레이건 당선자에게 전하는 것보다는 일단 측근 참모를 통하여 다루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니 레이건의 안보담당 참모 리처드 앨런 씨를 소개하였다고 한다. 이날 밤 베이커 총무로부터 연락을 받은 앨런과 통화가 이뤄졌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유 의장이 묵고 있던 육군참모 차장 베시 대장(전 유엔군 사령관) 관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낙선한 카터 대통령은 레이건 당선자를 백악관으로 초청, 정부의 인계 인수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도 김대중 문제가 거론되었다. 카터 회고록 ‘信義(신의) 지키기’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살리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하였다. 나는 그(레이건)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김대중의 救命(구명)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낸 데 감사하였다.>
한눈에 보는
베스트 기사
- 1 권양숙이 딸을 위해 건넨 13억 돈상자는 환치기 방식으로 미국으로 송금되었다!
- 2 北김여정 입에서 '삶은 소대가리' 욕설 안 나와서 '로우 키(low key)'인가
- 3 ‘답변이 제한됩니다’는 하나마나 한 말장난
- 4 '암살자(들)'의 가장 궁금증…유해진 박해일 이민호, 왜 출연했나?
- 5 북한군 두 포로 공개- 왜 잔인하고 무책임?
- 6 '부캉이'가 인기더니 결국 신격화?
- 7 우리의 아들인 국군 장병 3명이 다친 사고입니다
- 8 "나 자살하지 않았어. 살해됐어”
- 9 지금 한동훈에게 필요한 것
- 10 왕소금, 꽃소금, 보통 소금, 바위 소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