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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鑛夫)들, 놀러가다! - 광부와 어부들의 감격적인 손짓
1980년 4월23일부터 사흘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광부들의 폭동. 한 명(경찰관)이 죽고 91명이 다친 그 현장에 나는 부산 국제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로 가 있었다. 사태가 수습되고 탄광촌도 평온을 되찾았을 때 우리 기자들 일행도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동원탄좌 광업소 입구에서 취재차를 돌리는데 한 광부가 뛰어왔다. 마흔을 넘었을까. 수염이 듬성듬성 난 노리끼한 얼굴이었다. 그는 바지 뒤 호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흐물흐물해질 만큼 낡아버린 누런 색의 월급 봉투였다. 그 광부는 그 전날 내가 광부들의 임금실태에 대해 취재한 사람이었다. 복잡한 광부 임금 체계를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월급 봉투를 가져오겠다』고 그는 말했었다. 광부는 봉투 뭉치를 건네 주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를 잘 써 주십시오. 봉투는 꼭 돌려주셔야 됩니다』 그 뒤 3년이 흘러 1983년 여름 인구가 4천만을 돌파한다는 날, 나는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 사북으로 가는 강릉행 특급열차(태백선 경유) 안에서 문득 그 광부를 머리에 떠올렸다. 3년 전 그때 품었던 의문도 새삼 생각이 났다. 왜 광부들은 월급 봉투들을 그토록 귀중하게 보관할까? 오후 2시30분쯤 낯설지 않은 사북역에서 내려 변하지 않은 사북읍에 들어섰다. 외부 사람들에게 강원도 탄광촌은 두 가지의 인상을 준다. 좁은 길, 질주하는 석탄 운반 트럭, 흩날리는 탄가루―마른 날의 풍경이다. 질척질척하는 길바닥, 진흙처럼 신발에 달라 붙는 탄죽, 추적추적 걸어가는 광부들의 장화―비 내린 날의 인상이었다.
이날 사북은 전날 온 비로 푹 절어 있었다. 그러나 들떠 있었다. 동원탄좌의 뒷산인 지장산 사택 마을로 올라가는 택시 안에서부터 그랬다. 합승한 두 광부는 읍내에서 산 텐트 같은 야영 장비들을 한 아름씩 안고 있었다. 사택 마을 앞 출퇴근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텐트를 쳐 놓고 버너를 월부로 팔고 있는 장사꾼들이 보였다. 후산부 허영규씨(30)를 앞세워 둘러본 사택촌 전체가 축제 분위기 속에서 설레고 있었다. 텐트나 버너 손질, 젖은 배낭 말리기, 반찬 마련, 맞춘 새옷 찾아오기, 성급한 짐꾸리기…. 동원탄좌 복지회관의 구판장에서는 1주일 사이에 등산·야영장비를 5백만원어치나 팔았다고 한다.
연휴 3일! 열흘 전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렇게 결정했다. 한국 석탄 생산량의 약 9%(연간 약 1백80만t)를 캐내는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 사북 사태의 현장이었던 이 광업소가 아예 사흘간 문을 닫고 4천5백명의 광부들을 한꺼번에 휴가 보내기로 한 것이다. 노조측에선 4백20만원의 조합비를 내어 13량의 객차가 달린 임시 휴가 열차를 빌어 사북―강릉 사이를 한 차례 왕복시키기로 했다. 연휴 2일은 보편화되어 있으나 연휴 3일은 한국 탄광업계에선 처음일 것이다. 지난해까지의 이틀 연휴 때는 가고 오고 하는 것이 귀찮아서 나들이를 포기했던 광부들도 이번에는 아이들과 아내의 등쌀에 우선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연휴가 다가옴에 따라 사북읍 전체가 술렁이고 2만여 광부 가족들은 마치 소풍 前夜의 어린이들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사북 사태 이후 3년
어느 마을이나 도시가 큰 기업체의 소유물처럼 느껴지는 곳이 몇 있다. 포항 종합제철과 포항시,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와 철암, 그리고 동원탄좌와 사북읍이 그런 곳들이다. 1959년 사북읍에서 석탄 캐기가 시작되기 전 이곳은 화전민들이 띄엄띄엄 살던 깊고 깊은 골이었다. 1962년 동원탄좌가 엄청난 매장량(약 6천만t)을 가진 탄맥을 믿고 여기 광업소를 차렸을 때 인구는 1천8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광부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고, 그래서 「팔도 공화국」이라 불리더니 철도(태백선)가 들어오고 73년에는 읍이 되었다. 1983년 현재 사북읍 인구는 5만 명을 약간 웃돈다. 인구의 70~80%는 광부 가족들이다. 사북 사태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걸어본 사북읍은 적어도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음식점.술집.여관.양복점.구멍 가게들이 그러했고 잿빛 구름에 가린 산들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길쭉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북읍의 땅과 하늘이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일단 사북읍의 속으로 들어가 보니 딴판이었다. 광부 사택을 다섯 집 방문했다. 그 다섯 집의 공통된 가구는 장롱. 냉장고. 텔레비전. 전축이었다. 지금 사북 광부들의 당면 관심사는 컬러 텔레비전의 구입이다. 지난해부터 읍내 대리점들이 집요한 판매 작전으로 매기(買氣)에 불을 붙여 놓았다. 광부 가정의 컬러 텔레비전 보급률은 현재 30%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디오도 더러 팔리고 있다. 컬러 TV 붐의 여파로 읍내에 단 하나 남아 있던 극장도 문을 닫았다. 오토바이를 가진 광부들도 많이 불었다. 정확한 집계는 되지 않지만 수백 대일 것이란다. 사택촌과 탄광이 십 리가 넘게 떨어져 있어 오토바이가 요긴하게 쓰인다. 백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오토바이도 더러 눈에 뜨인다. 오토바이 사고도 종종 일어나고,  광부들은 사택촌에서 집단 거주하고, 집단 작업하는 관계로 상품 구입에서도 집단성을 보여 주고 있다. 누가 컬러 텔레비전을 샀다고 하면 너도나도, 누가 텐트를 샀다고 하면 「나도!」하고 몰리는 풍조가 있다. 그래서 월부 장수들이 밥으로 삼고 있는 곳이 탄광촌이란다. 지난해엔 전집 도서나 등산 장비를 팔러 온 월부 장수들이 『거, 줄 좀 서세요!』라고 떵떵 거리며 물건을 팔았다고 한다.
드디어 지난해에는 칠봉 관광이라는 관광 알선 회사가 이 마을에 들어섰다. 광부가족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가까운 정선, 강릉, 영월 쪽으로 놀러 나가는 광경은 이 마을의 새로운, 그러나 흔한 풍속도가 되었다. 배낭이나 텐트, 또는 낚시 도구를 갖지 않은 광부들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회사 테니스 코트에서 테니스를 정기적으로 치는 광부도 40명쯤 된다. 휴일에 광부들이 즐겨 찾는 곳은 정선이나 영월의 남한강 상류 물가이다. 새까만 물만 흐르는 광산촌의 개울을 떠나 청류에 몸 씻고, 탄가루 돌가루 박힌 허파를 상쾌한 공기로 세척하고, 두 겹 하늘 아래서 창백해진 얼굴을 양명한 태양 광선으로 그을리는 그들의 모습들은 광부 하면 「산업 전사」하는 낱말을 퍼뜩 연상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만 생소한 풍경일 뿐이다.
鑛夫도 쉬어야 한다. 산업 戰士도 놀아야 한다. 술도 마셔야 하고 노름도 적당히는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광부들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런 사람들의 시각을 대표하여 그들의 휴가를 뉴스거리로 취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북 사태 이후 종업원에 대한 회사와 노조의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는 物證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광부들이 가장 애태우는 자녀 교육의 경우, 적어도 돈이 없어 학교에 못 보낸다는 말은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채탄(採炭) 종사자에게 주는 석탄협회 장학금, 관리직 사원에게 주는 회사 내의 복지장학금, 형이 동생을 공부시켜야 할 경우에 주는 노조 장학금 등 3重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모두 1천5백명의 학생들이 한 해에 2억5천만원의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있는데 2백 명은 전문대학 및 일반 대학생이다. 사북 사태 직후 동원탄좌에선 10억 원의 기금을 내어 재단 법인체의 근로자 복지회를 만들었다. 이 복지회에선 공동 구판장, 광부 자녀들을 위한 유아원.도서실, 그리고 목욕탕.이발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구판장은 공장도 가격에 2~3%의 이문만 붙여 싸게 물건을 팔고 있다. 이 구판장의 개업으로 사북읍내 그 높던 물가가 내렸다고 한다. 2홉들이 소주가, 4백원에서 2백40원으로 떨어졌다.
3일 연휴를 성사시키는 데 1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노조 지부장 홍금웅씨(44)는 듬직하면서도 매우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지서(支署)에 갔다가 막 사무실로 돌아왔다는 홍 지부장은 『광부들이 사북읍을 비운 사이 밤손님들을 잘 막아달라』고 경찰관들에게 부탁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북 사태의 중요한 원인이 노조에 대한 광부들의 불신이었음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노조에선 매달 「동원소식」이란 4쪽 짜리 타블로이드판 회보를 내고 있었다. 지난 5월10일자엔 노조 지부장과 광업소 대표가 임금 인상 합의문에 같이 도장을 찍는 사진을 싣고 있었다. 그 기사는 83년 임금 인상률이 평균 임금의 6% 인상에 머문 까닭을 「기업이 있어야 근로자가 있고 근로자가 있어야 기업이 있다는 공존공생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고 설명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노조활동이 1백%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만 노조가 종업원과 회사 사이의 대화 통로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고 그쪽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홍씨는 요즘 광부들은 생활을 즐기는 것이나 자기 건강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옛날엔 광부라는 직업을 자포자기 상태에서 선택한 사람이 많았으나 요즈음은 떳떳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란 것이었다. 이 회사 전체 광부의 30% 쯤이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으며 月퇴직자가 1% 남짓한 40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를 제시하며 그는 광부들의 달라진 직업 의식을 강조했다.
갱(坑) 속에서 기다리는 휴가 다음날, 연휴를 하루 앞둔 7월 30일 토요일은 동원탄좌의 봉급날이었다. 여느 때의 봉급날이 아니라 1백%의 상여금과 하기 휴가비(1만5천원)가 한꺼번에 나가는 날이었다. 이날 지출될 돈은 약 16억원. 상오 8시 께부터 봉급을 받으려고 부인네들이 줄지어 광업소 사무실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탄광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대신하여 월급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남편은 坑道에 들어가 일하고 있거나 야근 뒤 집에서 자고 있기 때문이다. 광산촌에서는 외상 구매 때 요긴하게 쓰이는 <인감증>이란 재직증명서(부인 사진도 붙어 있다)를 보여 주고 남편의 두둑한 봉투를 받아 든 여자들이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보통 때는 봉급을 다 주는 데 종일 걸립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봉급수령자들이 빨리 오니 오전에 거의 끝나네요. 아마도 휴가 준비 때문이겠죠』봉급 창구의 경리직원이 하는 말이었다.
갱 속의 설레임을 알아 보려고 홍보부 김여섭 계장(42세)의 안내를 받아 650갱으로 들어갔다. 650갱이란 해발 650m에 뚫린 굴이란 뜻인데 동원탄좌의 주력 갱도로 하루에 2천7백t의 무연탄을 생산한다. 전동차를 타고 들어간 갱 속은 서늘하였다. 갱 속은 전동차 레일이 복선으로 깔린 곳도 있을 만큼 터널처럼 넓게 보였다. 동원탄좌는 우리나라 탄광 가운데서도 가장 사고 위험이 적은 곳으로 꼽힌다. 지난 해 우리나라의 5만 광부들은 2천16만1천t의 석탄을 캐기 위해 1백99 명의 목숨을 바쳤다. 석탄 10만t은 한 인간의 목숨과 맞바꾼 물건이기도 하다. 이 사고율은 미국의 열 배, 일본의 다섯 배다. 동원탄좌에선 지난 해 7명이 죽었는데 이것은 25만t 채탄에 1명 사망꼴로 한국 기준으로는 낮은 사고율이다. 그것은 동원탄좌 갱도에는 공기 중 메탄가스 함량이 미미하여 그로 인한 폭발 위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석탄은 못 캐어도 좋으니 사고는 내지 말라>는 이 회사의 운영 방침 덕분이기도 하다.
모자에 붙은 충전식 램프 빛줄기는 안개처럼 자욱한 탄가루를 비쳐 보인다. 금세 흰 장갑은 검게 오염되기 시작했다. 채굴된 석탄을 모아 炭車에 담는 곳에서는 과부들이 방독면 같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쏟아지는 검은 눈가루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 전날 밤
『도시락 흰밥에 탄가루가 검게 내려앉은 때도 있지만 그래도 먹어야지 어쩝니까』
라고 하던 어느 선산부의 말이 생각났다. 坑 속 권양기실은 조용했다. 공무부 소속 최호석씨(40)는 휴가 준비는 끝났다면서 坑 속을 나갈 오후 4시를 고대하고 있는 듯했다. 『빨리 나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려다가 간밤에 만났던 그 고참 선산부의 말을 떠올리고 입을 닫았다.
『아무리 탄밥을 오래 먹은 사람이라도 바깥 세상으로 나올 때는 역시 기분이 좋습니다. 10분이라도 먼저 굴 속에서 나올 수 있다면 1시간을 걸어서라도 나올 사람이 대부분일 겁니다』
 
밀폐, 어두움, 굉음, 불안, 초조, 그리고 땀과 눈물들. 태고의 태양광선이 통조림된 채 숨어 있는 이 광물, 불덩어리를 포장한 채 검게 빛나는 이 광물, 이 세상으로 캐내어진 이들 석탄에는 광부들의 피. 땀. 눈물이 돈으로 환산되어 30% 쯤 들어 있다(채탄 원가 중 노무비 점유율이 약 30%).
레일 점검을 하고 있던 보안부 소속 박정은씨(44)는 동해안 연곡해수욕장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친목모임에 들어있는 아홉 가족이 돈을 모아 관광 버스를 한 대 세내기로 했다는 거였다. 650갱도의 굴진을 책임지고 있는 젊은 한유섭 과장(32)은 토치카 같은 갱내(坑內)의 작은 사무실에서 우리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는 3일 동안 갱도 유지를 어떻게 할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지층은 늘 살아 꿈틀거린다. 사람 몸의 살과 같은 이 지층 속으로 뚫린 갱도는 핏줄이다. 끊임 없이 갱목을 보수하고 지하수를 빼내고 천장과 갱벽을 보수하고 지하수를 빼내고 천장과 갱벽을 점검해야 핏줄이 막히지 않는다. 3일간 연휴는 첫 경험이기 때문에 종업원들의 자원을 받아 전기공, 양수공(揚水工)과 같은 특수 기능직 종사원들은 연휴중에도 계속 근무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한 과장은 몸집이 작고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속이 꽉 들어찬 단단한 인상이었다.
『이번 3일 연휴가 무사히 끝난다면 다른 탄광에서도 3일 연휴를 하지 않고는 못 뱃길 겁니다. 갱도 유지가 어렵다 해도 광부들의 사기는 무척 올라갈 터이니…』
전남대학 자원공학과 출신인 그는 2백60명의 관리직 사원 가운데 18명이 학부출신이라고 했다.
『대학 졸업생이 탄광에 들어오면 70~80%는 1년 이내에 그만둡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다른 데 입사 시험을 치려고 공부나 하는 사람이 있으니 결국 필요 없는 사람이지요. 제가 들어온 게 7년 전인데 앞으로는 代가 끊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얼마 전에 광산과 재학 대학생들이 이곳에 실습을 왔어요. 15일간 실습한 뒤 가면서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너무 늦게 탄광에 와 본 것이 후회가 된다. 탄광이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진작 전공을 바꾸었을 것인데… 이런 식이에요』
坑口에서 2천7백m나 떨어진 갱 내 사무실에서 한 과장은 잠시 성난 표정을 지었다.
오후 4시, 650갱의 아가리는 수백명의 광부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검게 탄가루를 묻힌 얼굴 가운데서 두 눈망울이 유난히 번들거리는 광부들, 그러나 대체로 밝은 표정이었다. 모자와 캡 램프를 반환한 뒤 그들은 사택촌으로 가는 통근버스에 올랐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지장산 사택行 버스 안은 왁자지껄했다. 동승한 허영규씨는 『보통 때엔 지쳐 빠져 버스 안이 조용한데 오늘은 별나게 시끄럽다』고 했다. 꼬불꼬불 산길을 흔들흔들 올라간 버스가 사택촌 광장에 멈추었다. 우산을 든 꼬마들이 아빠를 부르며 승강구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떠나는 사람들
지장산 사택, 오후 6시쯤. 비탈길에 선 4.5t 트럭에 이삿짐이 쌓여지고 있었다. 연탄을 차에 싣고 있는 게 이상해서 옆사람에게 물었더니『사북에서 제일 싼 것이 25원짜리 연탄(회사에서 제공)인데 광부들은 이사갈 때 저걸 꼭 가지고 갑니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사 가는 김달원씨(37)는 9년 동안의 광부 생활을 청산, 대전으로 새 삶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야무지게 생긴 그는 경북 봉화 사람인데 지난 7월1일 동원탄좌에서 퇴직했다. 정확하게 만 9년4일간의 광부생활이었다. 그 가운데 7년간은 막장에서 채탄 선산부(先山夫)로 일했다. 그는 홑몸으로 사북에 왔으나 75년에 중매 결혼, 큰딸 호정양(8세) 등 세 남매를 보태며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보탠 것은 자녀뿐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있는 대전에 1천7백만원짜리 집 한 채를 사놓았다.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면 그 집에서 구멍가게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에겐 있다.
저축의 비결을 물었더니 「계와 적금」이라고 한다. 그의 마지막 월급은 40만원 정도였을 것이다.
『시원섭섭합니다. 그래도 저는 운이 좋은 편이죠. 무엇보다도 성한 몸으로 이곳을 나가니까요.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았는데 이웃과 동료들과 정이 붙으면서 살 맛이 났습니다』
이때 김씨의 이웃집에 살다가 사북읍내로 이사갔다는 홍옥순 아주머니(40)가 김씨의 딸에게 주라면서 과자 선물세트를 내밀었다. 김씨와 같은 막장에 있다가 같이 퇴직, 원주로 이사갔었다는 천준기씨(32)는 막장 동기생의 이사를 돕는다면서 이날 일부러 원주에서 와 주었다. 역시 김씨와 같은 날에 퇴직, 윗마을 고한에 이사갔다는 이상록씨(50)도 김씨를 전송하러 올라와 있었다. 광부생활을 청산한 김, 천씨에 비해 이씨의 사정은 좀 딱했다. 이씨는 25년간 주로 선산부 생활을 했다. 지난해 검진을 받아 보니 「진폐의증 1형」으로 판정받았다. 1형으로는 산재 보상을 받지 못한다. 비탈길을 조금만 올라도 숨이 가빠진다는 이씨는 퇴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 사정으로 보면 무리를 해서라도 계속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아무래도 결근 일수가 많아지고 일당으로 계산되는 월급은 작아질 것이다.
탄광의 퇴직금 산정 기준은 퇴직 직전의 3개월분 월급의 평균 일당이므로 퇴직금까지도 줄어들 위험이 높다. 그래서 서둘러 퇴직했다는 이씨는 『이젠 큰 탄광에는 재취업이 안 될 것이니 하청탄광에서 자리를 찾아볼 생각이다』고 했다. 하청탄광은 작업 조건이 더 열악한 곳이지만 병든 老광부를 받아줄 데라곤 그런 영세 탄광뿐인 듯했다.
진폐증으로 퇴직해도 이씨보다는 좀 나은 편인 것이 임만기씨(43)였다. 그도 퇴직 동기생인 이, 천씨와 함께 김씨의 이삿짐을 날라 주고 있었다. 임씨는 2년 전부터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아 진단을 받아보니 진폐증 1형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탄광에선 가벼운 진폐증 환자는 계속 취업을 허용하고 있지만 임씨는 이걸 계기로 해서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8년 동안 뼈빠지게 모은 돈으로 서울 쌍문동에 2천만원짜리 집을 사 놓았다. 그는 이사 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곳 생활 중 가장 괴로웠을 때가 친척들이 놀러왔을 경우라고 말했다. 차마 그들에게까지 새까만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입갱(入坑)을 하지 않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1975년 4월6일에 입사했다. 입사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기에 문득 3년 전의 그 광부 생각이 났다.
『월급봉투도 보관하고 있습니까?』
『물론이죠.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 우리 광부들은 모두 그 봉투만을 다 모으죠. 저 이사 가는 김씨도 월급 봉투는 전부 가져간답니다』
『보관해서 뭘 하죠?』
『글쎄요, 우선 퇴직 뒤 진폐증이 발병하면 그 봉투가 어떤 부서에서 어떻게 근무했느냐 하는 증거가 되지요. 그래서 직업병임을 입증하여 산재 보상을 받는 데 쓸모가 있지요. 그리고 그, 뭐 광부 생활에서 남는 건 그것뿐 아닙니까?』
아, 그렇다! 광부들은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그 불행에 대비하는 호신용으로 그걸 보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견딘 하루하루의 갱 속 생활이 날수와 돈으로 환산되어 적혀 있는 그 이력서들을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벌어들인 그 깨끗한 돈의 역사를….
임만기씨가 보여주는 월급봉투를 보니 입적(입사 대신 그렇게 부른다) 첫달(1975년 7월) 월급은 3만9천2백88원이었다. 76년 4월 봉급은 4만2천7백65원이었는데 그 다음달엔 7만4천8백75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것은 後山夫이던 그가 막장 선산부로 승격한 덕분.
『부자가 된 것 같았어요』
그때의 감격을 그는 지금도 못 잊는 듯 했다. 77년 5월엔 11만2천9백5원, 78년 5월엔 14만4천7백16원, 79년 5월엔 25만9천8백24원, 사북 사태가 있었던 80년 5월엔 28만1천7백76원, 81년 6월엔 30만6천4백79원, 82년 6월엔 29만6천1백45원, 83년 5월엔 31만3천77원. 이 31만3천77원 가운데 노조비, 의료보험비, 연탄비, 수도비, 국민 저축, 마을 금고 저축 등을 제하면 26만4천9백22원이 그의 실수령액이었다. 다섯 식구를 거느린 그의 한 달 평균 잡비는 술값 2만원, 담배값이 한 달에 1만원(청자를 피움), 세 어린들의 간식비 월 3천 원 등으로 나타났다. 한 달에 15~20만원으로 다섯 식구가 살아왔다고 했다. 오후 7시쯤 김달원씨는 이웃 사람들과 석별의 술 한 잔씩을 나누더니 집의 문짝을 모두 뜯어내 차에 실었다. 문짝 반납, 이것은 사택을 떠나는 사람들이 관리사무실에 가서 하는 마지막 퇴거 절차이다. 그는 문짝 위에 서서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갔다. 그 뒤로 누군가가 말했다. 『사북 사람 또 하나 줄었구나』
열차, 어부, 광부
連休 전야의 사북읍내는 조용했다. 월급날이었는데도 음식점과 술집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집집마다 가족들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짐꾸리기로 시간 가는 줄 몰라 했다. 이 시간에 아마도 가장 쓸쓸한 사람은 이정근씨(44)였을 것이다. 그는 지난 5월2일 밤 매몰 사고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48시간 만에 구출되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이번 연휴에는 집에 남아 있어야 하게 된 것이다. 이씨가 사고를 당한 곳은 760갱 입구에서 3천7백m 들어간 채탄 막장이었다. 발파 작업을 한 뒤 담배 두 대쯤 피우고 동발(갱목)작업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막장 뒤 물통(땅 속의 공간에 괴어 있는 지하수)이 터졌다. 물이 좁은 갱도로 쏟아지면서 동발은 무너지고 석탄은 탄죽으로 변했다.
이씨는 본능적으로 무엇을 붙들었는데 다행히 그것은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동발이었다. 다른 곳은 다 무너졌는데 그곳에는 쪼그리고 앉을 만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그는 이틀을 버틴 끝에 발굴반에 의해 구조되었다. 구조반은 이씨의 개인 장비가 떠내려왔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으로 판단, 시체 발굴 삼아 구조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그가 구조됐을 때 지장산 사택은 광부들과 가족들이 부르짖는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었다고 한다.
이씨의 두 아들도 광부인데 그는 『석 달 째 요양하고 있으니 월급이 60% 밖에 나오지 않아 곤란하다』며 며칠 더 쉬었다가 다시 막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음날은 7월31일. 전날밤 12시에 入坑했던 광부들이 이날 새벽 2~4시에 일찌감치 퇴근(정상 퇴근은 오전 8시),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오전 7시부터 사북역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오전 9시30분에 출발할 임시열차가 거기 있었다. 이미 많은 광부들은 전날 밤과 이날 새벽 임시열차의 신세를 지지 않고 끼리끼리 관광버스나 봉고차를 빌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이날 임시열차를 탄 광부나 그 가족들은 약 1천8백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한 자리에 세 명씩 앉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서 있어야 했다. 광부들은 한결같이 구두를 반들반들하게 닦아 가지고 신고 나왔다. 광산촌에서 넥타이 맨 것만큼이나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 닦은 구두인데 이날만은 정반대였다. 가족 단위로 자리를 잡느라고 우왕좌왕했으나 누구 하나 자리 다툼을 벌이는 사람은 없었다.
피서 열차는 출발했다. 해발 700m의 고한역에 정차, 북부 사택 사람들을 태웠다. 열차는 한국에서 가장 긴 정암 터널(4,505m)을 지나 추전역으로 향했다. 추전역은 해발 8백55m에 있는 역으로 「하늘 아래 첫째 역」이다. 곧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데 자리잡은 역이다. 열차가 달리자 객석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광부들은 아내와 아이들은 앉혀 놓고 객차 안을 오가며 인사하기에 바빴다.
『야, 이거 2년 만이구나!』
『너, 그렇게 입으니 못 알아보겠구나』
같은 회사에 근무하면서도 근무 시간과 근무처가 다르면 몇 년을 두고도 못 만나는 곳이 광산이다. 어느 광부는 과거의 상사를 만나 「계장님, 계장님」하다가 그 계장이 벌써 2년 전에 과장으로 승진한 것을 뒤늦게 알고는 낭패해하기도 했다. 추전역을 지나자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入籍(입적) 때의 감독을 모시고 벌이는 술판, 항장(坑長)끼리 모인 술판, 같은 막장 동료들끼리 어울린 소주 파티 등.
추전역을 지나자 백원 짜리 동전이 오가는 노름판도 선을 보였고 간간이 유행가 합창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서 왔다갔다하니 빈 자리가 많아졌고 통로는 붐빈다. 노조 간부들은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차표를 나누어주고 객차 안에 임시 매점을 차린 영리한 광부들의 음료수 판매가격을 점검하면서 구슬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노조 사무실 직원인 박대성씨(38)는 사북 사태 때는 광부로서 경찰서에 붙들려가 20일이나 유치장 생활을 경험했다.
그는『왜 앉아 있지 않느냐?』란 질문에『자리 못 잡은 사람도 있는데 노조 직원들이 어떻게 앉을 수 있겠는냐?』고 되물었다. 북평역이 가까워 오자 비로소 개울물은 흑색을 벗어버리고 맑게 흐르고 흰돌들도 나타나 반들거렸다. 아이들은 창밖을 보며 재잘대고 엄마들은 아기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어도 광부들은 한껏 기분을 내고 있었다. 피서 열차는 거대한 사교장이 되어 있었다. 모든 광부들이 계급과 나이를 초월하여 한 덩어리로 뒤범벅되어 웃고 노래하고 마시고 있었다. 남편을 찾아다니는 엄마, 엄마 찾아다니는 아이들이 車內의 어수선함을 더해 주고 있을 때 열차는 북평역에 닿았다. 오전 11시를 조금 넘어서였다. 수백명이 우르르 내렸다.
벌써 술 취한 鑛夫도 있었으나 꼬마들이 아빠의 손을 끌어가고 있었다. 북평역을 다시 출발한 열차 안은 썰렁해져 있었다. 열차 안은 이젠 파장 분위기였다. 열차가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달리기 시작하니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은 바깥으로 쏠린다. 시원한 바닷 바람도 후끈후끈하던 객차 안으로 들어와 분위기를 더욱 냉각시키고 있었다.
꼬마들은 바닷가의 낚시꾼들과 해수욕객들만 나타나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묵호를 지나 열차가 모서리를 막 돌았을 때였다. 자그마한 어선이 해안에서 가깝게 보였다. 어부들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열차 안의 아이들도 손을 마주 흔들었다. 상대가 어부들임을 알고 그러는지 창밖으로 목을 내밀면서 손을 흔들었다. 어느 광부가 소리쳤다.
『수고 많다!』
어부를 향해 손 흔드는 광부들, 당신네들의 고생은 우리가 가장 잘 안다는 듯 그들은 어부들이 열차의 뒤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경의를 표했다. 그 어선의 어부들도 자신들에게 손을 흔드는 승객들이 광부인 줄 알았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광부 열차는 망상. 옥계. 정동진역에서 차례 차례로 광부들을 내려놓은 뒤 종착역 강릉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광부와 어부.
한쪽은 파도와 폭풍과 싸워가며 바다를 캐고 다른 쪽은 돌과 암흑을 뚫고 석탄을 캔다. 한쪽은 툭 터진 바다를 무대로, 다른 쪽은 밀폐된 땅 속 막장을 일터로 힘을 쏟는다. 신문 사회면에서 「몰죽음」이란 제목을 가장 많이 제공하는 직업인들이 이들이며, 가장 많은 동정과 賤視를 받으면서도 몸뚱이 하나에 내일을 걸고 굳세게 그 편견들을 깨치고 나가는 사나이들이 바로 어부요, 광부다. 그들의 만남과 동병상련의 손짓은, 제3자의 입장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는 나의 가슴에 찡한 울림으로 와 닿았다.
암흑의 땅 속을 두더지처럼 파고만 들던 광부들은 이제 밝은 햇볕, 드넓은 해변, 맑디맑은 계곡으로 나간다. 창 밖 수평선, 얼룩덜룩한 텐트촌으로 흐르는 그들의 시선은 비로소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지난 열흘 동안 마음 설레며 손꼽아 기다리던 그것의 실체를 그들은 드디어 만질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