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종처럼 言動하는 경우

약소국의 대통령이었지만 李承晩은 강대국 대통령처럼 행동하였고, 노무현은 강대국의 대통령이었지만 김정일 앞에서 부하처럼 말하였다.


인간에겐 지능이나 도덕성과는 별도로 靈性(영성)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영혼의 본성적 모습을 이른 말이다. 기독교에선 지능이나 도덕성이 망가지면 고칠 수 있지만 靈性이 망가진 사람은 구제 불능이란 이야기를 한다.

종의 신분이라도 靈性이 좋으면 주인처럼 행동하고, 대통령이라도 靈性이 망가지면 종처럼 언동한다는 것이다. 약소국의 대통령이었지만 李承晩은 강대국 대통령처럼 행동하였고, 노무현은 강대국의 대통령이었지만 김정일 앞에서 부하처럼 말하였다.

2007년 10월3일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난 盧武鉉 당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였다(국정원 공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50회 넘는 정상회담을 했습니다만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중략).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의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장관이 그 한 달 뒤 盧 대통령을 만났다. 퇴임 후에 쓴 회고록에 의하면, 게이츠는 '아시아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가 반미주의자라고 결론 내렸고 약간 돌았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성경 舊約 세계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모세라고 생각된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의식에서 깨어나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40년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를 방황하였다. 그들은 모세를 따르다가도 모세를 반대하고 미워하기도 하였다. "왜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모세를 원망한 그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가 모세로부터 혼이 나기도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律法을 주어 法治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모세처럼 한민족을 노예근성과 사대주의에서 깨어나도록 한 분이 李承晩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존과 자기확신의 化身이었다. 조선조의 압제와 日帝의 질곡에 찌든 韓民族에게 자유정신과 主人의식을 심어준 이가 李 박사이다. 그는 "주께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갈라디아서 5장1절을 자주 인용하였다. 6.25 전쟁중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않고,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사상최대 규모의 선거를 하도록 하였던 것도 한국인에게 자유와 民主의 가치를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보여준 당당한 태도는 韓民族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한민족은 무의식중에 李承晩을 따라배웠고, 그 과정에서 사대주의와 노예근성을 상당히 씻어내게 되었다. 李承晩 덕분에 한국은 國格이 높아졌고, 한국인은 의타성을 버리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李承晩 대통령도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시기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역사는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하였다. 역사가 선택한 새 부대는 朴正熙였다. 李承晩이 선물한 自由라는 토양 위에 박정희는 國力을 조직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自助-自立-自主의 나무들을 심어갔다.

한민족은 李承晩 대통령을 제대로 평가하게 될 때 노예근성을 진정으로 청산하게 될 것이다. 李 박사의 위대성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의 노예근성이 뿌리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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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의 장례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弔辭(조사)를 丁一權(정일권) 총리가 대신 읽었는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衷心(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보다는 조국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羊(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과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寤寐不忘(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異域(이역)의 쓸쓸한 海濱(해빈)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중략).

생전에 손수 創軍(창군)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그 국군장병들의 英靈(영령)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護國神(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多難(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족의 모세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던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국에서 죽지 못하고 異域에서 별세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말했던 대로 이승만 박사는 민족수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어린 양이셨습니다. 요사이 젊은 세대에서는 김일성이 이승만 박사보다도 더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만,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가 이 나라가 제대로 서는 날일 것이고 하나님의 정의가 이뤄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어린 양 이승만 박사가 되살아나는 그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김정일 정권으로부터 북한동포와 대한민국을 지켜주시고, 거짓선지자들로부터 진실을 지켜주시고, 그리하여 그 진실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날이 반드시 그것도 빨리 오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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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4.19를 부정한 적이 없다!


부정선거의 진실을 알자 부상자들을 위문하고 물러났다.
柳根一

이제는 한 50년 흘렀으니 우리 정치사에 대한 객관적 조명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격하하지만) 과정에 있었던 이승만 박사의 공로에 대한 허심탄회한 평가다.
역사적인 인물에는 항상 몀암(明暗)과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대다수가 명(明)이나 공(功)보다는 암(暗)과 과(過)에 치우쳐 왔다. 이게 학문적으로 옳은 일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그것은 소련 중공, 김일성 박헌영, 남노당, 한독당, 중간파, 그리고 초기 미국의 모호한 정책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헌법과, 체제와, 국가의 건설을 줄기차게 밀어부쳤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남침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미국, 유엔, 참전 16개국을 우군(友軍)으로 동원한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근대적 조선왕조, 식민주의자 일본제국주의, 전근대적 중국의 낙후성과 단절하고 미국 유럽이 주도하는 선진적 근대문명, 자유민주주의 문명, 시장 경제 문명과 접목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레일을 깐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단행해 농업자본을 근대적인 상업, 산업 자본으로 전환 하는 데 획기적인 공적을 남겼다.

반면에 그는 이른바 사사오입 3선 개헌과 야당 탄압, 부정선거의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비록 최인규, 장경근, 한희석 곽영주, 등이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은 악행을 자행한 것은 이승만과는 직접적인 상명하복의 관계가 없었다 할지라도, 대통령으로서의 감독 책임은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승만은 4.19가 나자 4.19 부상자들의 병실을 찾아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위로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4.19 혁명을 ‘불순’이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대세를 파악하자마자 즉각 사임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언제 처음 시작됐나? 4.19인가? 아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1948년 7월 17일의 대한민국 헌법이 반포된 날 시작됐다.

그 민주주의가 자유당 강경파에 의해 난폭하게 훼손되고 배신당했다. 그래서 4.19 학생 시민 지식인 언론이 “왜 헌법을 무시하고 선거법을 무시했느냐?” 하면서 일종의 민간 경찰행위를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자유당 경찰이 실탄을 발사했다. 이 실탄이야말로 학생 시민 지식인 언론의 ‘항의’를 ‘혁명’으로 바꿔 놓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따라서 1960년의 4.19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처럼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아니라, 이미 1948년 이래 있었던 대한민국 민주헌법 체제의 복원을 위한 봉기였다.

4.19 혁명 50 주년을 맞아 유관단체들이 각종 행사를 할 모양이다. 잘 하기 바란다. 그러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과(過)만 부각 시키고 그의 건국의 공(功)을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1960년의 4.19 이전에는 마치 이 땅에는 <앙시앙 레짐(구체제=절대왕정)>만 있었다는 양 설정하고서 4.19가 한국의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의 최초의 출발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공정(公正)하지 않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유의했으면 한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은 대한민국 헌법제정과 대한민국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선두에서 리드 했다. 4. 19는 훼손당한 그것을 되살린 혁명이었다.
이 점에서 4.19는 반(反)대한민국 체제 아닌 친(親)대한민국 체제였다.
한 마디로 자유주의 봉기였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대한민국 헌법 체제에서만 가능하다.




[ 2010-03-20, 2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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