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과 봉건영주들의 갈등으로부터 탄생
1215년 6월15일 런던 외곽에 있는 스테인즈(Staines) 평원에서 국왕 존(John)과 그와 敵對(적대)관계에 있던 귀족들 사이에 內亂(내란)을 방지하기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장기간 지속되던 국왕과 봉건영주들의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존은 프랑스에 있는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전쟁에서 패배, 재정을 파탄내고 귀족들의 지지를 상실했다. 그는 지략이 뛰어나고 야망이 있던 敎皇(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Ⅲ)가 임명한 캔터배리 대주교를 배척함으로써 교황과의 사이도 소원해져 있었다. 존王은 캔터배리 성당의 사제들을 추방하였고 이에 분노한 교황은 그를 破門(파문)하였다.
존은 봉건영주들의 재산을 詐取(사취)함으로써 영주들과도 사이가 나빠졌고 이에 저항하는 영주들을 처단함으로써 사악한 군주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윌리엄 더 바라오스(William de Baraose)라는 영주가 재산헌납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도망쳤을 때 존은 영주의 아내와 아들을 코르페城(Corfe castle)에 감금하여 굶겨 죽였다.
잉글랜드는 惡漢(악한) 국가(rogue nation)가 되었다. 성직자들이 미사를 集禮(집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반대자들은 처형당하거나 도피하였다. 프랑스, 웨일즈, 스코틀랜드, 로마(교황청)같은 遠近(원근)의 강국들은 존의 강압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모의를 하였다. 침략의 위기를 맞이한 존은 영리하게 대처하면서 교황에게 굴복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그는 교황이 임명한 대주교를 받아들이고 聖바울 대성당에서 교황이 파견한 大使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문서가 영주와 성직자들에게 낭독되는 것을 청취했다. 이것은 교황의 승리이고 존의 굴욕이었다.
잊혀져 간 마그나 카르타
이것만으로는 귀족들의 분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었다. 존에 반대하는 영주들은 勢를 규합하여 런던을 점령하였다. 존은 반역귀족들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타협의 결과가 ‘마그나 카르타’(大憲章)였다. 당시로서는 마그나 카르타가 역사를 크게 바꿀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국왕이 특정 규칙에 의해서 國事(국사)를 결정하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는 헌장을 선포하는 것이 혁명적인 발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존王 이전에도 정복자 윌리엄公의 아들 헨리 1세는 1100년 王座(왕좌)에 오른 後에 영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보다 더 합리적으로 통치하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자유헌장’(Charter of Liberties)을 공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그나 카르타는 자존심이 있는 국왕이라면 결코 승복할 수 없는 강제조항(注: 국왕이 헌장의 조항 중 어느 하나라도 위반하면 국왕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귀족회의를 설립하도록 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존은 이 조항을 수용할 뜻이 전혀 없었다. 마그나 카르타 調印(조인) 한 달 후에 王은 새롭게 친구가 된 교황에게 헌장의 무효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교황은 聖바울 대성당에서 자신에게 모욕적 굴복을 한 존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그의 청원을 수락하였다.
마그나 카르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주된 내용이 영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전쟁세금', '부동산 점유침탈', '성직추천권' 등과 같은 이념적 조항들은 눈에 띄지 않고 파묻혀 있었다. 결국 마그나 카르타는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을 제외하곤 영국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미국에서 회생하다!
영국인들의 외면을 받은 마그나 카르타는 미국에서 再起(재기)했다. 이는 17세기 경의 변호사였던 에드워드 코크卿(Sir Edward Coke) 덕분이었다. 미국의 초기 13개 식민지는 코크가 주장하는 마그나 카르타 정신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코크는 식민지 정착민들을 영국의 자유 신민으로 보장하는 '버지니아 헌장'을 기초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本鄕(본향)인 영국보다 미국에서 더 각광받고, 더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 英 템즈강변의 마그나 카르타 기념비조차 미국 변호사 협회에서 건립했을 정도이다. 미국의 법조인들은 법률사건을 다룰 때에 아직도 마그나 카르타를 언급한다. 한 연방판사는 “ 영국인들이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에서 국왕도 神과 法에 복종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의 통치형식도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다”며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빌 클린턴을 상대로 폴라 존즈(Paula Jones)라는 여인이 제기한 성희롱 소송 판결의 연기에 반대하는 판결을 하였다.
마그나 카르타를 대하는 美英의 차이
미국의 對談(대담)쇼의 사회자인 데이비드 레터만(David Letterman)이 現 영국 수상 데이비드 카메론(David Cameron)에게 마그나 카르타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을 때 수상은 'Magna Carta'라는 단어의 뜻을 사회자에게 말하지 못하였다. 2014년 8월에 존 로버츠(John Roberts)대법원장은 '미국의 실험은 마그나 카르타 800년 역사의 1/3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우리는 마그나 카르타의 핵심적인 개념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우리의 헌법 골격 안에'라고 말하였다.
이 말 속에는 800년 동안 민주주의적 理想(이상)이 되어온 마그나 카르타를 생산하였지만 아직도 현대적 헌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영국과,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미국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양피지에 참나무 가지로 새겨서 밀랍과 송진으로 봉인해서 만든 마그나 카르타는 中世 영주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설계되었지만 앵글로 색슨은 물론 인류역사의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마그나 카르타를 앞세우는 게 효과적인 전략이 되었다.
〈출처: 이코노미스트紙 2014년 12월20일~2015년 1월2일字 'Magna Carta at 800: the Uses of history'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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